유럽에서는 1340년대 처음 창궐한 이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여 공포의 대상이었다. 1340년대 흑사병으로 약 2천5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이 때의 흑사병은 중앙아시아나 인도에서 발원하여 전파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당시 유럽의 인구의 약 30%에 달하는 숫자이다. 최초의 흑사병 확산이후 1700년대까지 100여 차례의 흑사병 발생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5] 14세기 중세 유럽에 퍼져나간 흑사병은 "대흑사병"이라 불린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은 사회 구조를 붕괴시킬 정도로 유럽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 등이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자들로 몰려서 집단폭력을 당하거나, 심지어는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믈론 사회학적으로 비평했을 때 흑사병 기간동안 일어난 학살들은 마녀사냥처럼 흑사병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전가한 희생양적인 폭력이었다. 한편, 흑사병의 창궐은 삶에 대한 태도도 바꾸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자"는 신조를 낳았고, 이는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등에 반영되었다. 흑사병은 유럽인들의 종교적인 사고에도 영향을 주어,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이 흑사병으로 심판하니 고행을 함으로써 죄를 씻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흑사병 유행기간동안 벌어진 유럽인들의 유대인 학살.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1883년에 붙여졌는데, 피부의 혈소 침전에 의해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증상이 더욱 진행되면 검게 변색된 부위에 괴저가 발생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흑사병은 임상병리학에서 서혜 임파선종 중 가장 위험한 종류로 다루어진다. 흑사병은 박테리아의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가 원인균으로 이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을 옮기게 된다. 19세기까지 흑사병은 쥐에 의해 전파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20세기에 들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흑사병이 쥐와 사람이 함께 걸리는 전염병이기는 하나,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은 쥐가 아닌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흑사병 창궐의 결과 유럽,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의 지역에서 창궐한 흑사병으로 발생한 희생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망율을 기록하였다. 흑사병에 의해 빚어진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인구 감소 유럽 유럽 지역의 인구는 흑사병으로 인해 지역에 따라 1/3 ~ 1/2 규모로 감소하였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천5백만 명에서 2억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22] 유럽 중세사를 연구하는 사학자 필립 데이리더는 2007년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23]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한 초기 4년간의 희생자는 통상 인구의 45% ~ 50% 로 추산되고 있으나 이는 총괄적인 수준의 기록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사망율을 보였는데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 등에서는 지역에 따라 인구의 80%가 희생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한편 북부 독일, 잉글랜드 등지에서 초기 4년 동안의 사망율은 20% 정도였다" 아시아 중국의 원나라 시기인 1334년 허베이에서 창궐하여 인구의 90%가 사망하였으며 1353–54년 동안 중국과 몽골지역에서 2천5백만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 외의 영향 죽음의 춤에 그려진 흑사병  <흑사병을 몰고다니는 >닥터 쉬나벨, 파울 페르스트 1656년 작 1350년대 유럽의 문화는 흑사병의 영향으로 매우 음울하였다. 문화의 곳곳에서 염세주의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당시 사람들은 역병을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민간에서는 닥터 쉬나벨 폰 롬(독일어 Doktor Schnabel von Rom , 로마 출신의 부리 가면 박사)이 흑사병 환자의 집을 방문하면 환자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속설이 퍼졌다. 닥터 쉬나벨은 새부리 가면을 쓰고 긴 검은 겉옷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 1)봉건제의 붕괴-흑사병의 발발로 유럽 전역은 인구가 감소하여 평균 3분의 1이 사망하였다고 하지만 어떤 지역은 80%의 인구가 죽기도 하여 사실상 자급자족적인 경제활동의 성립이 불가능해졌다. 거기다가 급감한 인구로 인해 노동력의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여 신분제도의 질서가 붕괴되어 갔다. 노동력의 가치가 상승한 만큼 지배층에서는 임금의 한정, 이동의 구속으로 생산계층의 이탈을 억제하려 했으나 생산계층은 타영지로의 도주, 근무 태만으로 맞서나갔다. 상대적으로 생산계층의 입장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지배층은 많은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신분제도와 자급자족적인 경제질서는 붕괴되고 최종적으로 봉건제가 본격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절대왕정체제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주로 서유럽에 해당하였고 동유럽은 흑사병으로 죽는 인구가 적은편으로 기존의 체제에 영향을 받지 못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서유럽과 동유럽의 역사는 서로 다르게 흘러가게 된다. 2)사치, 태만의 풍조-인구가 줄었다는 소리는 생산력의 감소를 뜻하기도 하나 그만큼 잉여노동력의 감소와 사람당 배분되는 생산물의 양이 커짐을 나타내기도 한다. 인구의 큰 감소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생산물이 많아짐에 따라 사람들은 노동에 신경을 쓰려하지 않으려 하였다. 거기다가 흑사병의 만연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을 가속시켜 어차피 죽을꺼 그날그날 즐겁게 놀며 살아가자는 분위기와 염세주의가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되었다. 3)소외 계층의 학살-거지, 유대인, 집시 등 소외 계층의 학살이 심했다. 사람은 크게 절망에 빠져 분노하게 되면 분을 풀 대상을 찾게 되는데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에는 주로 평소에 증오하거나 혹은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분을 풀게 된다. 이에 해당하는 대상이 바로 평소 자신들의 위주로 한 공동체속에서만 살아가는 유대인 그리고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집시, 거지 등이었다. 이들은 우물에 독을 풀었다거나 방화를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고 학살당했다. 이와 같은 경우의 다른 예는 1923년의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학살이 있다. [출처] 전염병 역사를 통한 폐러다임의 변화|작성자 청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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