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八.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사

하나님아들 2021. 10. 2. 09:47

.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사

                       

1. 8·15해방과 교회의 재건운동(19451949)

 

A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교단 환원/조선기독교연합회(KNCC 전신)

이덕주: <남부대회의 조직과 소멸>(한국기독교사연구 제30, 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90.7.5)

 

. 「조선기독교단」남부대회: ←「일본기독교 조선교단」(1945.7.19-20, 초대통리: 김관식)→종교통합정책에 의해 조직됨/ 8 8일부터 전국에 교구 조직(경기 경북 강원 견남 함북 충남 전북  7 교구가 8.15까지 조직)/ 김관식 통리  김영주 김춘배 박용의 함태영 최거덕 김종대(장로교) 강태희 김영섭 방훈 신공숙 심명섭(감리교) 등은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의 간판을 내리고 「조선기독교단」이라는  간판을 달로 남부대회(1945.9.8, 새문안교회) 소집 - “개회벽두에 변홍규 이규갑 목사 등을 중심한  십명의 감리교 대표자들은 감리교의 재건을 선언한고 퇴장” 그러나 이들[뒷날 감리교 재건파의 중추세력이 ] 제외한 교단 관계자들은 남부대회를 명실상부한 교회 통치조직으로 개편하려고 노력함→성과없이 해산

 

. 1 조선기독교 남부대회(1945. 11. 2730) - 순교자 32명에 대한 ‘순교자 추도회’를 가짐/ 조선독립촉성을 위해 3일간 금식기도, 임시정부 절대지지, 38선문제와 조선완전자주독립키 위해 미국 교인에게 여론을 환기할 것과 트르만 대통려에게 진정, 폐쇄된 교회의 복구, 기관지발행[1946.1.17, ‘하나된 교회’를 목표로 基督敎公報 간행←韓國基督公報(예장통합기관지) 전신] 찬송가합편 발행 형무소에 목사 파견  결의→기관지 발행이 먼저 구체화/

남부대회에 대한 거부반응: a. 9.8 퇴장한 감리교의 혁신세력들은 12.17 감리교유지위원회 결성, 감리교 ‘재건’을 선언←남부대회 진로에 큰도전 b. 장로교 내부에서도 통폐합 이전의 장로교 체제로 환원 움직임,  교구체제를 노회 재건: 1945.11.3, 경남노회가 주남선 중심으로 재건/ 1945.12.5, 배은희 중심으로 전북노회 재건 c. 38선으로 인한 남북교회분단이 남부대회 정통성 확립에 한계로 등장, 북쪽에서는 통폐합 이전의 ‘헌법’을 따르는 이북오도연합노회 구성/ 해방 직후 월남한 이북 출신 목회자들-남쪽 교회만의 총회구성 반대  

 

. 2 조선기독교 남부대회(1946.4.305.2) - 대회장이 김관식 목사에서 배은희 목사로 바뀜(일제하 통리로 지냈던 전력에 대한 교계의 비판 때문)/ 부서 축소-감리교측 강태회 엄재희 박용래 등이 참석했으나 중요간부진은 장로교가 맡음→장  연합의 초교파적 통합기구로 재출발을 선언했던 8개월 전과는 상당한 변화/ 해체를 위한 모임의 성격이 강함-“본 대회 성격을 再討定,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을 결정→남부대회의 해체선언

 

. 남부대회 해산-  지도자들은 교파교회 환원을 위한 교단창설 작업에 착수 a. 감리교: 혁신세력, 1945.12.17, 감리교유지위원회 결성→감리교 ‘재건’ 선언/ (복흥): 재건파 감리교회에 대항, 1946.4.7, 기독교조선감리회 수습대책위원회→46.5.2 복음준비위원회로 개편, 중부 동부 연회 재건, 46.9.6, 특별총회 개최 감독(강태희 목사)1949 재건파와 합동하기까지 유지 b. 장로교: 1946.5.2 남부대회 참여 장로교 목사 장로 60여명, 교단 재건 논의/ 조선예수교장로회남부연합회 발족하되 1946.6.11 새문안교회에서 창립총회 갖기로 함→장소만 승동교회로 바꾸어 46.611-14. ‘조선예수교장로회남부총회’ 개최(‘대회’나 ‘연합노회’를 쓰지 않은 것은 이남 교회만으로 총회조직 의지 대변)1947.4 2차남부총회 1942 왜정의 강압으로 해체되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31 총회를 계승하여  33회총회로 개회할 것을 결정”→이로써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은 물론 1943년에 만들어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의 역사까지 부정, 해방전후 장로교회의 치욕의 역사를 ‘형식적으로나마’ 정리하고 교파교회로 환원을 마무리함⇒‘하나된 교회’와 정부수립을 지원하려던 정치적 의지를 가졌던 남부대회는 8개월만에 해체됨,  대신 교파 연합운동의 모체로 남음

 

 

. 조선기독교 남부대회 주도 인사: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재건의 형태로 1946.9.3 「조선기독교연합회」 (KNCC 전신) 창설(회장:김관식, 총무:임영빈, 간사:엄요섭)→남부대회에 참석한   교회와 구세군 성결교회까지 참여한 에큐메니칼 운동체가 

 

B 出獄聖徒’와 교회 재건운동

 반민특위: 장로교-정인과 전필순 김길창 김동만 ()인선, 감리교-양주삼 정춘수

 

. 출옥성도(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채정민 최덕지  20여명) 은둔, 도피했던 교계 인사: 교역자들의 통회와 자숙, 정화운동을 교회재건의 기치로 내세움/ 교회재건 기본원칙(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토의):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제안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교역에 나아갈 .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  목사와 장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  재건의 기본원칙을  노회,  교회에서 일제히 실행케  .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

 

. 일제에 순응했던 교계 지도자들, 재건 원칙 거부: 교계의 지위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음→자신들도 피해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음/ 1945.11 평북 선천에서 개최된 평북 6개노회 교역자퇴수회 석상에서 박형룡이 교회재건 기본원칙 발표, 홍택기  강력반발[“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으로 감옥생활  사람들만큼 고생했고, 도피했거나 은둔했던 사람보다는 “일제의 강제에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많았다고 주장: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 46]→신사참배와 관련된 회개와 책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해결된 문제라고 주장. 어떤 목사들은 양심에 따라 스스로 해결했다며 신사참배를 문제삼는  대해 반발⇒교회의 지도권을 장악하여 自肅案 폐기시키려 

 

. 한상동, 최덕지 전도사: 북한에서 교회재건운동, 월남후 남한교회 재건운동/ 한상동: 기성교회 조직 안에 들어가 회개운동 주장/ 최덕지 중심의 30 교회들은 1948 예수교장로회 재건교회 중앙위원회 조직, 새로운 교단 출발→동조자를 포섭하기 위해 ‘장로교’ 명침을 버리고 예수교 재건교회라는 명칭으로 재건운동 전개→기성교회당을 마귀당이라고 하고→철저한 회개와 우상파괴운동 전개, 기성교회 교인들과의 교제도 죄악시하여 절교

 

. 기타 교단: 성결교회, 1945.11 경성신학교에서 조선성결교회 재흥총회 개최하고 재흥선언서 7개항 채택(성경과 성결, 재림의 교리로 복귀), 일본정부 상대 손해배상 요구 결의, 일제하 성결교 수난으로 순교한 이들을 위한 추도식 거행/ 구세군 침례교 안식교 등도 잇달아 재건. 이들 중소 교단들도 철저한 일제 잔재 청산과 회개 갱신운동을 전개하지 못함

 

 

C 북한5도연합노회와 남부총회: 

 

. 북한5도연합노회(1945. 12. 평양 장대현교회, 회장 김진수 목사): 이북5도연합회를 “남북통링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모든 교회가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할 것”과  총회 대행하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개정 이전의 헌법 사용  전교회의 신사참배 통회  교직자의 2개월 근신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  대대적인 전도 교화운동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 표함  결의함

 

. 38 이남 장로회 합동으로 남부총회(1946. 6. 1114, 총회장: 배은희):  조선신학교 총회 직영  1938년의 신사참배 결의 참회와 취소   지방 신사 접수 美 軍政 교섭  산동성 선교사업 계속, 부흥전도회  결의←1947.4, 2차남부총회에 의해 32 장로회 총회로 인정

 

D. 감리교 재건파와 복흥파: 

재건파 - 감리교재건중앙위원회(위원장 이규갑 목사) 조직, 3부연회 조직하여 연합연회 개최(1946.1.14), 감리교의 완전 개건과 신학교 재건 결의/ 복흥파 - 기독교조선감리회 부흥신도대회(1946. 4. 7)에서 재건파의 재건방향 비난성명, 기독교조선감리회 복흥준비회(회장 강태희 목사), 복흥파 총회/ 재건파와 복흥파의 상호 비방과 교회쟁탈전으로 사회적 비난/ 1948 양파 합동운동으로 무조건 통합에 합의, 합동총회(1949.4.2930, 감독 김유순 목사)→감리교의 분열과 재통합은 교단 내의 일제잔재청산 문제와 밀접한 관련

 

E 북한교회의 재건과 북조선기독교도연맹:

북한 김린희, 박신근 중심의 재건교회 조직(1946. 4), 교회 활동에 대한 제한으로 김린희, 고흥봉  월남하여 서울 부산 전남 경남 등지에서 활동/ 정권과 우호적인 남한의 기독교에 반해,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정권과 대립/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조직(1946. 11. 28, 강양욱 목사)하여 북한정권에 협력, 많은 기독교인 탄압 피한 월남으로 북한지역 교세 위축

 

2. 6·25전란과 교회의 분열(19501959)

 

A 전란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반성: 전란을 미연에 막지 못한 교회의 책임 - 해방  사상적 갈등과 냉전체제 속에서 대립과 갈등 증폭, 교권다툼 등에 몰입하여 신뢰와 지도력 상실/ 전란 중에 저지른 교회와 지도자들의 과오-자신만의 안전을 위한 도피, 교권싸움, 상호 모략, 이권 다툼 등에 혈안/ 전란  반공이데올로기에 얽매여 독재정권과 군사정권 지지

 

B 장로교의 분열: 경남법통노회  고신파 분열(1951.9) - 한상동, 주남선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들의 회개운동에 대한 기성교회의 반대, 불신과 소외가 원인, 고려신학교 운영 문제/ 기장 분열(1953) - 조선신학교 김재준 교수의 교육 방향 문제(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의 불일치)/ 합동측과 통합측 분열(1959) - 세계교회협의회(W.C.C.) 노선과 국제복음주의 연맹(N.A.E.)노선 지지자들의 갈등,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로 분립

 

 

C 감리교의 분열과 통합: 김유순 감독의 납북, 유형기 목사 감독 선임(1951. 11)/ 선교달러운영 문제와 개헌 문제로 호헌파가 별도의 총회 구성하여 분립/ 유형기 감독 물러나자, 1959. 3. 17. 합동연합연회로 통합

 

D 기독교계 신흥종파의 출현: 6·25전란으로 사회 경제적 불안 증대, 기성교회의 분열/ 통일교(교주: 문선명)-「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1954. 5. 1) 조직하여 기독교 자처, 창조론, 타락론, 복귀섭리론 등의 독특한 교리와 반공 교리로서 기성 교계에 말썽/ 전도관(박태선) - 「한국예수교부흥협회)(1955.7.1) 조직하여 기성 교회 비판,  독특한 말세론, 신앙촌에서 공동생활

 

3. 교파 교회의 연합운동과 교세의 성장(19601969)

 

A 4·19혁명과 기독교: 감리교 - 사과성명서 발표, 3·15부정선거와 집권당에 가담한  처리 결의/ 장로교 - 교계의 과제 제안 (정당한 비판 감수와 자가 숙정과 정돈, 말씀의 선포자로서 정의에 용감, 불의를 방관하거나 타협 제거,  교파의 연합사업 )

 

B 장로교의 통합노력: 합동측과 고신측의 합동 시도, 합동총회(1960. 12. 13)/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의 합동과 이전, 교회정치, 신앙노선 문제 등으로 다시 대립, 고신측 환원총회 소집하여 재분리(1963) - 고신측 교세에 타격

 

C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투쟁: 한국기독학생회 - 일본 기독자의 각성 촉구(1964.2.12)/ 「대일저자세 외교 반대 국민투쟁위원회」 조직, 국민적 반대/ 1965. 6. 22. 게엄 선포  한일협정 조인/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대성명서 발표, 구국기도회 개최 - 이후 기독교의 사회·정치 참여론 급성장하는 중요한 계기/ 초교파적 복음화운동: 가톨릭,성공회를 비롯한 17 교파 대표들이 참석하여 전국복음화운동위원회 구성 - 전도훈련, 부흥집회, 전도집회, 노방전도 등을 통한 교파연합으로 다각적인 전도에 노력(한국교회의 대규모 연합전도운동의 가능성)

 

E 새로운 신학조류의 유입: 다양한 신학사조 유입 - 토착화신학, 평신도신학, 세속화신학, 정치신학, 혁명의 신학, 하느님의 선교 등의 신학적 토론 전개/ 진보세력 - 기독교 현실참여의 이론적 기반을 찾고자 노력, 일반 사회에 교회의 존재 부각시킴

 

4. 교회의 사회참여와 교세의 부흥(19701979)

 

A 인권운동과 한국교회의 민주화운동: 7·4남북공동성명과 10 유신 - 교회의 민주화운동 전개의 계기/ 1973. 4. 22. 부활절연합예배 박형규 목사  - 유신정부 비판, 민주·언론자유  회복 전단 배포로 구속/ N.C.C.「인권선언문」 채택 - 교회의 사명을 인권 확립에 두고 인권운동 전개/ 1976. 3. 1. 명동성당 3·1민주구국선언」 - 긴급조치 철폐, 구속인사 석방,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사법부 독립 요구로 목사, 신부  11 구속

 

 

B 대규모 부흥운동: 교인수의 급격한 증가, 대규모 전도집회, 대형교회의 등장으로  성장/ 「한국기독교부흥협회」 조직되어 활발한 부흥운동 전개/ 빌리그래함 한국전도대회, 민족복음화대성회  - 민주화운동·인권운동 약화, 물량주의적 전도활동 치중 등의 역기능적 측면도 있으나, 교회의 양적 성장으로 교회의 힘을 축적시키는 계기가 .

 

C 교회의 사회 참여와 민중신학의 대두: 교회의 사회참여, 민중운동 참여 - 의식의 변화와 새로운 체험으로 신학적 사고에 반영(1979 민중신학으로 불림)/ 민중신학의 방법론 - 역사과정에서 민중의 존재와 역할 재인식, 이론보다 행동 실천 중시, 성서와 함께 한국 역사 문화 현실 속에서 신학적 소재를 찾음/ 산업선교 - 전태일 분신자살사건(1970.11)으로 노동자, 도시빈민 선교에 대한 관심 증대, 인권신장에 기여,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숙에 공헌

 

5. 교회의 통일운동과 성숙에 대한 모색(19801990년대)

 

A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교회: 광주민주화운동, 직선제 민주개헌운동 등에 가담하여 기도회, 성명 발표, 시위 동참과 보수 교단의 가세-교회에 대한 일반 국민의 신뢰 회복에 기여

 

B 통일운동과 교회: 인권·민주화운동의 한계→분단의식→통일의식의 고양과 통일운동. 1) 1982. 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 조직, 2) 1984 일본의 세계교회협의회국제문제위원회 - 한국교회 통일운동 지원 제안, 3) 1986, 1988, 1990 스위스 글리온 남북 교회 대표자 만남 -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글리온 선언」 채택, 4) 1988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기독교사상 1995.1월호 참조), 5) 한국교회의 대북지원 사업-남북나눔운동 

 

C 한국교회 선교 100주년과 역사에 대한 관심: 1984 기독교 복음 전래 100주년 - 범교단적 협의체 조직하여 100주년 기념사업 활동 활발히 전개/ 한국교회 역사에 대한 관심 증대 - 자료 발굴과 보급, 기독교 역사관계 저서 발간, 연구단체 조직되어 활동, 교단사나 개교회사 발간

 

D 교회 성장에 따른 한국교회 선교의 과제 의식  선교활동

 

E 한국교회 성장의 문제점과 성장둔화 현상에 대한 반성: 1) 1990년대에 들어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 원인 분석, 2) 성장과 성숙에 대한 반성-이원론적 태도와 잘못된 축복관의 문제 3) 한국 교회의 윤리성과 ‘대교회 목회자의 세습문제’

 

 

      군사정권과 한국교회

 

1. 머리말

 

2. 해방~‘5.16이전’까지의 한국교회

 

민족분단에서의 한국 교회의 책임론/ 분열과 정교유착의 시기-일제 말기 조선교회의 강제통합( 1945. 7. 19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으로)/  2회 남부대회 이후 각 교단 환원/ 장로교회-신사참배 회개 문제와 신학노선 상의 문제로 교단적인 분열/ 미 군정 이후 이승만의 등장, 정교유착-기독교적 정권 탄생/ 예언자적인 역할 상실/ 4.19 혁명-기독교적 정권의 전복→기독교의 각성이 시작됨/기독교의 책임-결국 민주․민족주의 압살하였다는 비판

 

3. 공화당 정권하의 기독교

A 자유당과 민주당의 실패 지적하고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을 시작-군사정권하에서 비로소 정교분리의 각성을 갖게 됨

B 한일회담 및 한일기본조약 비준반대운동-KSCM(1964)이 처음 나섬/1965.2.10일 한일기본조약 가조인되자 반대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남, 이 때 한국기독교연합회는 4 17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 발표, 국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함/6 22일 정식으로 조인되자 7 1일부터 한경직 김재준 강원룡 함석헌 213명이 성명서 발표, 영락교회에서 회집(7 5-6 3000, 7 11 6500)하여 반대운동이 불붙게 됨  

C 6.8부정선거 및 3선개헌반대운동-1967 6.8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의 부정에 항거/1969 3 2일부터는 기독교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3.1운동 50주년 기념식을 하고 3선개헌 반대투쟁에 들어가 8.15에는 <3선개헌반대 범국민주쟁위원회>를 조직, 김재준 목사 위원장으로 취임→‘전국의 신앙동지 여러분’이라는 성명서 발표/ “신앙인 개인은 물론 교회 전체도 의를 위한 목숨을 건 결단에서만 참다운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복음 위에 서서 불의를 바르게 찾아내어 규탄하고 의를 찾아 세우는 역군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다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교회는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예언자적인 직능을 다하여야 할 시기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멍에를 지고 방방 곡곡에 우리의 결단을 전파하고 민중의 운동을 조직하고 실천하여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 9 4일 김윤찬 박형룡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등 보수계 목회자 242명은 개헌문제와 양심자유 선언을 위한 기독교 성직자 일동 명의로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발표하고, 김재준 목사의 호소문을 “순진하고 선량한 뭇 성도들의 양심에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인 행위라고 비난하고 나섬

 이 때 한국교회는 사회참여 문제를 두고 진보와 보수의 경계가 확연히 드러남/ 9 5일에는 대한기독교연합회(DCC)라는 명칭으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 발표됨→NCC는 하등 관련없는 단체라고 함/ ※ 이런 맥락에서 NCC에 반대하는 기구로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태어남-유호준 등/ 7.4공동성명과 민족통일 문제-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

 

4. 유신정권과 기독교

A 유신정권의 성립: 7.4공동성명의 파장→남북이 민족문제를 정권강화에 이용→유신선포

B 진보측: 인권과 민주화 운동 등 사회참여에 적극/ 1972 12 13일 기장 전주남문 교회 은명기 목사 구속/ 1973 4 22, 남산부활절 예배 사건-이 예배를 이용하여 기장과 NCC에서 유신비판, 민주회복, 언론자유회복을 주장함/ 1973 87, 기장 <신앙사회선언> 발표/ 1974 1 17일 소장 목사들이 도전, 긴급조치 1, 2호 위반으로 수감/  1974 12 14, 오글(George E. Ogle) 목사와 시노트 신부의 추방령-세계에  한국의 인권 및 민주화 상황이 알려지게 되는 계기/ 1977 11 5일 강희남 목사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1979 3 9일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한명숙 신인령 등 이 때 구속됨)/ 기독교교회 협의회 김관석 목사 구속 및 기독자교수 해직 사건(1975 5-6)

 

C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과 10월유신은 교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줌. 자주적 평화적 통일과 민족적 대동단결의 3대 통일 원칙을 합의한 74남북공동성명은 집권자들의 의도야 어디에 있었든 교회의 통일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켰고, 대체적으로 교회가 편협한 반공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그 해 10월에 시행된 유신체제가 등장하면서부터  교회의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이 체제를 비판하는 기독교 지도자들까지도 탄압 구속하여 교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1973 4 22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대한기독교연합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박형규 목사와 전도사 학생 등이 유신정부를 비판하고 민주회복과 언론자유회복을 주창하는 전단을 배포하여 국가내란 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에 의해 인권탄압 사례가 격증하자 N.C.C.에서는 7 23일 「인권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은 “한국사회 속에서 교회의 사명이 인권확립에 있음”을 천명하고 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는 복음적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회의 내적 갱신을 기한다. ② 교회는 개인의 영혼구원에 힘쓸 뿐만 아니라 구조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출하기 위하여 사회구원에 힘쓴다. ③ 교회는 인권확립을 위하여 교회의 자원을 집중시킨다 등 3개항의 결의로 한국교회 인권운동의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1) 그리고 이를 전담할 인권위원회를 N.C.C. 내에 설치하고 지속적인 인권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좌경 용공세력으로 몰아 긴급조치법 등으로 탄압하였지만, 희생자를 내면서도 이 운동은 사회의 공감을 얻어 점차 공고한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특히 1976 3 1일 명동 성당에서 열린 31절 기념미사에서 야당 정치인과 함세웅․문정현 신부, 문익환․안병무 교수 등 신구교 인사들은 「31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긴급조치 철폐, 구속인사 석방,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국회 기능 회복,사법부의 독립 등과 함께 박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으로 함세웅 신부, 문익환 목사 등 11명이 구속되어 교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그후의 각종 시국사건에도 기독교인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처럼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1970년대에 유신체제의 타도 및 붕괴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D 보수측: 정교유착 현상/ 1966 2 3, 크리스챤 국회의원 조찬기도회-CCC의 김준곤 목사가 중심이 되어 시작, 주로 공화당 국회의원이 중심이 됨/ 1966 38, 대통령기도조찬회/ 1968 5 1,  1회 대통령 조찬기도회→1974년까지 계속됨/ 1976년부터 국가조찬기도회(8)라고 이름을 변경함- 김준곤 등 보수계 목사와 CBMC의 장로들, 500-600명 참석/ ※정교분리와 국가조찬기도회

E 대형집회와 한국교회 성장: 1970년대의 한국교회는 교인․교회수의 급격한 증가와 대규모 전도집회의 성행, 그리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대형교회의 등장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의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에는 대체로 모든 교단들이 양적인 성장을 하여 교인수가 수만 명이 넘는 대형교회들이 나타나고 대규모의 전도집회가 몇 차례나 거듭되었다. 「한국기독교부흥협회」라는 전국 부흥사들의 초교파적인 조직이 1970 2월에 조직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고, 1973 5 16일부터 6 3일 사이에 교파를 초월한 대중전도집회로서 빌리그래함 한국전도대회를 개최하여 일시에 1백여만명이 모였고 3 7천여명의 결신자를 내기도 하였다. 이어서 1974년에는 한국대학생선교회가 주최가 되어 8 13일부터 18일까지 엑스플로 ’74 전도대회를 개최하여 연인원 650만이 동원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대규모 전도집회는 수많은 교인들이 참석하여 전도 훈련을 받는 등 교세의 성장에 기여를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교회의 관심을 이 곳으로 모아 기독교인에 의한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을 약화시키려는 정부의 의도와 협조가 일정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역기능적인 측면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1977 8월의 민족복음화대성회는 앞에서 언급한 부흥협회 임원들이 주축이 되어 1974 10월에 집회를 갖고 준비되었다. 이들은 1977 8월에 민족복음화대성회를 열기로 하고, 이를 위한 부흥성회를 1974 11월부터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 12개  지역에서 잇달아 열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부흥전도집회의 빈번한 개최는 그 성격이야 어떠튼 유신체제 하에서 사회불안요소의 외적 작용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교회의 양적 성장에 기여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F 교회성장 정책: 그밖에도 이 시기에 각 교파들은 경쟁적으로 교세 확장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여 실행하였다. 즉 감리교는 1972년 부흥전도대회와 1975년부터의 「5천교회 100만 신도운동」, 예장 합동측의 「1만교회 확장운동」, 기장의 「2천교회 100만 신도운동」, 성결교의 「2천교회 확장운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운동이 전개됨으로써 각 교단은 상당한 교세의 신장을 가져왔다. 교회와 교인수가 급격히 증가하자 교회 지도자들은 이 시기를 “복음화 시대” “확장의 시대”로 부르면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교회의 양적 성장은 한편으로는 거액의 헌금과 대규모의 교회당 건축으로 연결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바로 교회의 발전이며 목회의 성공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교인과 교회의 수적 증가를 교회의 성장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1960년대부터 미국의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교회성장학파들의 영향도 컸다. 이 시기의 교회 성장운동은 사회선교보다는 물량주의적 전도활동에 치중했던 점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교회의 힘을 축적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5. 군사정권과 기독교계의 유착현상

A 정권에 편드는 한국교회의 행태는 이승만의 ‘기독교적 정권’의 종말과 더불어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청산과 단절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체질은 그 뒤에도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였다. 심지어 불의한 군사정권에 편드는 작태까지 보였다. 5.16군사정권뿐만 아니라 5.17군부반란 세력에까지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B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10일만에 교계는 그것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었다. 내용은 군사쿠테타가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다. 어떤 기독교계 신문은 ‘우리는 자유를 희생당하더라도 방종한 무리들이 숙청되는 것을 보고 싶다.2) 고 주장하였고, 군사정부의 내각수반인 장도영이 영락교회의 교인인 것과 해병대의 김윤근이 5.15쿠테타에 앞서 기도하고 거사에 나갔다는 것을 소개하였다. 그 해 6월 하순 한경직 김활란 등은 ’혁명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위해 미국에 파견, 쿠테타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도 했다.  

C 박정권에 대한 기독교계의 태도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조찬기도회등을 통해 왜곡된 정교유착으로 진전되었다. 1968 5 1일 제1회 연례 대통령 조찬기도회는 이환산감독과 백리언 목사 등이 참석하였고, 그 위 정례회된 조찬 기도회에는 한경직, 박대선, 김준곤, 이천환, 이상근, 조용기 목사 등 교계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군사정부를 지지하고 정권에 영합하는 인산을 주었다./ 1969 3선개헌 때도 기독교계지도자들중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느니, 박대통령의 승공에 대한 신념이나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경제 계획을 들어 찬성(기장 증경총회장 길진경 목사)하였다. 또 박형룡, 김윤찬, 김준곤, 조용기 등 242명의 목사들도 ‘기독교인은 성서의 가르침을 따라 날마다 그 나라의 수반인 대통령과 영도자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며 기도함이 없는 비판은 비생산적이며 비기독교적3) 이라고 주장하였다.  1972 11월에는 이종성  , 김희보, 김정준, 조종남, 홍현설 등 신학대학 학장들에 이어 유호준, 김윤찬, 지원상, 김창인, 조용기 , 한경직 등 40여명의 목사들이 유신을 찬양하였다.4)

 

D 기독교 지도자들의 과오: 이들이 지지했던 정권이 그 뒤 민족사에 어떠한 과오를 범하였는지는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다. 교회지도자들이 공개적으로 편들어 준 결과, 그 불의한 정권은 때때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인권민주화 운동과 산업선교마저 용공적인 것으로 매도할 수 있었으며 그런 토대 위에서 민주적인 체제를 부인하고 유신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이같은 체제와 논리가 통용될 수 있었던 것은 해방 직후부터 반공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지속적으로 사회보수층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후의 철저한 일제잔재 청산의 경험을 갖지 못한 데에 있다고 그 아쉬움을 거듭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F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할 때에 교계는 과오를 되풀이한다. 이 해 8 6일 오전 서울 롯데 호텔에메랄드 룸에서는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국보 위의 상임위원장 전두환과 전분과윈원장 등 당시의 실세들이 모여 있었고, 교계에서는 보안사 군목 문만필의 연락을 받은 한경직, 김윤식, 조향록, 김지길, 정진경, 김창인, 이봉성, 지원상 목사등 23명의 목사들이 나와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한 목사는 미가 6장을 들어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이란 제목으로 설교한 후, 조향록목사가 ‘나라를 위해’, 김지길 감독이 ‘한국교회를 위해’, 정진경목사가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위해’5) 김인득 장로가 ‘국군장병을 위해’각각 기도했다. 이 광경은 KBS와  MBC를 통해 수차례 방영되었고, 몇몇 일간지의 머릿기사로 실렸다. 이 기도회는 ‘전두환의 장도를 축복하는 자리’였고, 그의 ‘군권찬탈’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했으며,6) 이 때문에 참석자들은 독재정권의 출현에 협조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교인들의 신군부협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80 5월 ‘국보위’가 초헌법적인 기관으로 만들어 졌을 때 , 기독교의 목사와 교수 중에는 국보위 입법의원으로 혹은 국보위 종교부담당자들로 협조한 이들이 있다.7) 국가조찬기도회가 82년부터 본격화되자, 5 4일 신라호텔 다이나스티룸에는 교계지도자와 삼부요인, 주한외교관등 1천여명이 모였다. 주한외교사절까지 동원된 이 기도호에는 전두환정권이 안정되었음을 국내외에 과시하는 자리였다. 그 이듬해 5 3일에 모인 조찬기도회에는 군장성과 우방국의 의원까지 참석했으며 84년에는 기도회가 열리는 날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도일’로 정하고 전 교인들에게 국가발전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며 거세지고 있는 국민적 저항을 무마해 보려고 시도했다.

 

G 87 5 1일에 열린 기도회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과 그 은폐조작기도까지 폭로되는 상황에서, 전 정권이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고’있는 가운데 열렸다. 이날 한경직목사는 8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설교하면서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에 근거한 인권유린과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는 사회를 이룩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전 정권의 철권통치의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8)

 

6.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민중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의 변화

 

한편 이 시기에 교계에서 주목할만 한 일은 한국의 독자적인 민중신학이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에 들어 한국교회의 활발한 사회참여 내지는 민중운동의 참여는 많은 의식의 변화와 새로운 체험을 가져다 주었고 점차 이러한 의식과 체험이 신학적 사고에 반영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경향은 1979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교회협의회 신학자회의 이후 민중신학으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민중신학은 “경제적으로 고도성장과 이에 따른 산업화와 도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라고 하는 한국적 독재정치의 인권탄압 아래서 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하여 발언하고 유신체제를 전면 부정하고 비상조치 아래의 강권정치와 맞서 싸운 경험 속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소외된 민중과 만났고, 그들의 현실을 인식하였으며, 그 인식을 세계사적 교회사적 인식과의 연결속에서 그리스도 신앙 속으로 수용한 것”(서광선)이었다.9)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등 민중신학자들의 신학적 관심과 방법론은 다양하지만 대체로 공통된 점은, 역사과정에서 민중의 존재와 역할을 재인식하고, 이론보다 행동과 실천을 중시하며, 성서와 함께 한국 역사와 문화와 현실 속에서 신학적 소재를 찾으려 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민중신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과 역사 현실 전체를 ‘아래로부터’, 즉 가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했으나 일부 비판자들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자리에 민중을, 구원의 자리에 인간 해방을, 재림의 자리에 계급투쟁을 대치시킨 일종의 사회정치운동에 불과하다고 혹평하였다./ 1970 11, 20대 청년 전태일군이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절규하고 분신자살한 사건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폭증하고 교회의 일각에서도 소외된 노동자들과 도시빈민의 선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기 시작하였다. 산업선교는 각 교단별로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1950년대 말경부터 서서히 조직되기 시작하였고, 그 실무자들의 연합조직인 한국산업전도문제위원회가 1964년에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때의 활동은 어디까지나 교회 전도의 연장으로서 예배․교육․평신도활동․봉사 등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에 들어 산업화․도시화의 후유증이 사회에 심각하게 노정되면서 사회정의와 공정한 분배, 인간다운 삶의 보장을 위한 노동운동에까지 선교의 관심이 넓혀지게 되고, 인천노동자교회․영등포노동자교회․청계천 활빈교회․성남 주민교회 등 노동자나 도시빈민을 위한 특수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들 교회들은 정기적인 예배는 물론 성서연구와 각종 그룹활동 등과 함께 노동자와 도시빈민의 인권옹호와 복지향상을 위한 의식화와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73년 경부터는 도시산업선교 실무자들이 구속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직접 간접으로 유신정부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교회의 노동자와 도시빈민을 위한 활동은 소외되기 쉬운 계층을 교회로 이끄는 주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그들의 인권신장에도 기여하여 결과적으로 한국교회의 성장과 성숙에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