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四. 한국 교회의 설립과 교단의 조직 이만열

하나님아들 2021. 10. 2. 09:44

. 한국 교회의 설립과 교단의 조직   이만열

 

1. 민중, 지식인의 입교

※ 입교의 사회적 동기: ① 생명과 재산 보전(민중)→생존적, 謀食信者(Rice Christian,  : 175, “미끼는 떼어 먹으면서도 낚시 바늘에 걸리지 아니한 사람” “정부의 관직을 얻을 목적으로 영어와 서양과학을 배우려고 선교사 선생들을 찾아온 학생”) ② 개화, 부국강병 (지식인)→정치적(초기에 순 정치적 동기로 찾아온 사람 적었다고 지적, , 175)

A. 민중계층의 입교←봉건 지배자의 가렴주구, 2차례의 전쟁 때, ˚가렴주구→민중들의 기독교 입교 재촉 (독립, 황성신문):양대인 문제와 결부/ ˚청일전쟁(1894)→생명과 재산 보호받기 위해 입교(왜냐하면 교회-치외법권적 존재)→십자기, 성조기, 성 조지 십자기 등 효력→ 청일전쟁 계기로 교인 수의 증가 (2000명 이상으로), 교회의 설립 가속화 (피난지 등)/ ˚노일전쟁(1904)-일본군의 피해를 막기 위해 기독교 입교 (선천의 경우)→특히 두 전쟁의 격전지인 서북 지방민들의 입교 재촉.

B. 지식인(지식인, 縉紳)들의 입교←개화, 부국강병→“힘의 종교”로서의 인식/ ‘교폐문제’에 나타난 기독교에 대한 인식 (洋大人 문제)/ C. E. Sharp, 어느 출교당한 관리-정치적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일진회나 다른 기관보다 기독교로 들어가라고 권유/ 한편 기독교 국가가 부강국가라는 인식→부국강병의 수단은 기독교라는 인식→개화 유도/ 독립협회계 인사들의 입교-지도층(서재필, 윤치호), 중간 지도층 (남궁억, 이상재, 주상호), 인천 용동교회, 소래, 평양 (안창호, 한석진, 방기창, 김종섭 등)

※ 독립협회 사건과 옥중 개종: 이광린, 「구한말 옥중에서의 기독교 신앙」 (한국 개화사의 제문제, 일조각, 1986), 서정민, 「구한말 이승만의 활동과 기독교」 (한국 기독교사 연구,  18, 1988)/ 이상재, 이원긍, 유성준, 홍재기, 안국선, 김정식, 이준, 신흥우, 양의종, 박용만, 정순만, 이승인, 이동녕, 이승만←아펜젤러, 벙커 (D. A. Bunker) H. B. Hulbert, J. S. Gale ⇒그들을 가둬 넣은 이근택 씨에 감사(이 해[1903] 12월 말에 피수된 여러 동지들이 모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 오늘날 이와갓치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엇음은 모다 리근택 씨의 덕이라 출옥한 후에는 그를 심방하고 치사함이 올타하고 원수갑흘 생각이 이갓치 변한 것을 일동이 감사하는 뜻으로 하나님게 기도하엿다.-유성준 한기역, p. 265).

C. 영향: 민중의 입교→급진적 개혁 요구, 백정[박성춘 등]의 입교→四民平等反封建운동 확대/ 양반 유식 계층의 입교→개화, 구국, 반외세 운동⇒ 기독교 민족 운동의 가능성

 

2. 외래종교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

A. 선교과정에서 나타난 갈등: ①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갈등: 황해도 충청도[윤치호일기5, 1998.1] 지역과 서울에서 심하게 나타남. 海西敎案, 海西査覈使報告書[이응익], Mutel 문서, 진교패[眞敎四牌, 閔德孝 ], 예수텬쥬양교변론[耶蘇天主敎辯論, 최병헌], 敎明證問答[천주교], 누터개교긔략[이창직 교열] ) ② 개신교 선교사간의 갈등(알렌 헤론 스크랜튼 등) ③ 외국교의 교폐문제, 윤치호(한기역, p. 237), M.N.Trollope(조마가)의 지적 (한기역, p. 239, 천주교와 개신교의 입장 차)⇒기독교 측에서 洋大人 의식에 입각하여 일으킨 사건들/→이와 반대로 한국의 보수세력의 기독교 박해 사건이 있었음 ④러시아(희랍)정교, <한말 러시아 정교와 그 敎弊문제>(<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 지식산업사, 1991)

B. 한국사회와의 갈등:  嬰兒騷動(1888.6.10-25): 선교사들이 한국 어린이 유괴, 외국에 팔거나 잡아먹는다는 유언비어 →서울에서 선교사 배척운동으로 연결/ 프랑스 공사관의 吳奉曄의 헛소문이 발단→…近以民間失兒事 里驚騷 莫此尤甚(고종실록 25 戊子 五月)→신구교 선교사 및 선교사 운영기관 및 외국인과 외국공관이 의심 받음→한국인 중에서는 외국인들과 기관 습격자가 나타남(학당 수위살해, "두 차례나 흥분한 군중들이 우리 학교를 습격, 학교 고용인들이 죽음을 당하였다."→스크랜튼, The Korean Repository, 1896, p.6)→미, , 러 공사관의 항의, 한국 정부의 순찰 강화, 외국 군대의 서울 진주로 사태 진정. 민비 반대파들의 조작된 사건?, 조선정부는 을 붙여 영아유괴혐의자 심문 극형 약속, 美 佛 露 군대 무력시위→선교사업 공개화의 계기, 강인규:<嬰兒騷動 事件>(韓國基督敎史硏究 14,1987,6)/ ② 평양 기독교인 박해사건(1894.5): 평양감사 민병석이 김창식(), 한석진()을 체포, 방면한 사건→미 감리회(1892) Hall과 미 북장로교(1893) Moffett, Lee, Swallen 등의 평양 선교 개척에 대한 수구파 관료의 반발/ 처음 민병석은 Hall의 의료선교는 수용했으나 Moffett 등의 복음선교 거부/ Hall, Moffett 등은 김창식, 한석진 등을 내세워 가옥 구입→평양인들의 거부 반응→민병석이 김, 한과 관련된 한국인들을 체포, 배교강요, 금품요구/ Hall이 서울에 전보, ,영 총영사→한국 外衙門에 항의→조선정부의 지령(박해 중지)→지방 관리의 복종/ 외세, 선교사의 치외법권적 영향력이 선교에 결정적으로 영향력/ 한국 민중들의 외세 의존의식 점증→박해사건은 보수 세력과 민중 결탁하여 일어남→보수세력, 선교사 세력에 패배, 민중들은 기독교의 실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라 됨, 김승태:<1894년 평양 기독교인 박해사건>(韓國基督敎史硏究15,16, 1987.8)

 

   

4. 각 교단 선교부의 입국

A. 미국 북장과 북감의 입국(1884년과 1885): 한국 기독교의 紀年↔만주 지역 선교 고려

B. 1889, 호주(Australian) 장로교와 M. C. Fenwick의 입국

C. 1890, 성공회 (Anglican Church): C. J. Corfe(고요한), M. N. Trollope

D. 1892, 미국 남장로교(P.C.U.S.)의 입국 : 언더우드 형제의 노력

E. 1896, F.미국 남감리교 (M. E. C. South) : 1895년에 귀국한 윤치호의 노력

F.1898, 카나다 장로교의 입국/ 개인자격으로 시작된 선교:J. S. Gale(奇一) 1888.  Toronto 대학 YMCA파견/M. C. Fenwick (片爲益) 1889, 실업인들의 지원/R. A. Hardie(河鯉泳) 1890. 9. Toronto 대학 의과대학 Y/O. R. Avison (魚丕信) 1893. 7. Underwood의 요청/W. Z. McKenzie (梅見施, 金世) 1893. 12. 18.  Maritimes지역 장로교 선교협의회 파송

※ 침례교:1895년 엘라딩 기념선교회가 부산, 공주에서 선교 시작. 1900년에 중단하면서 M. C. Fenwick이 이를 인수(대한기독교회→동아 기독교회로 개칭), 플리머드 형제단 (Plymouth Brethren):1896년 ⇒ 기독 同信會 

G. 1900, 러시아 정교회 : 크리산프 세헷토브스키, 요나스 레프헨코

H. 1904, 안식교 (Hawaii 이민 중이던 손홍조, 神戶에서 귀국, 진남포, 용강)

I. 1907, 성결교 (동양 선교회) : 카우만, 킬보른, 김상준, 정빈

J. 1908, 구세군 : 호가드(R. Hoggard, 許加斗)  

※ 한국 개신교 수용의 특징: ① 교파교회의 이식(미국 남북 감.장 경우)-교파적 특징이 강하게 됨/ 서로의 경쟁심 유발/ 교파, 교단들 간의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 해방 후 저질의 선교사 대거 입국, ② 한국인의 적극적, 주체적 기독교 수용 자세 - 외국 선교부의 한국 선교 결정에 한국인의 호소가 영향/  3세계 국가의 기독교 수용과의 차이→한국인들의 적극적인 수용→선교에 대한 제국주의 尖兵 인식이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3. 한국 교회의 설립: 교회론에 대한 시각

A. 최초로 설립된 교회에 대한 문제: (1)義州교회론:김양선,Ross Version과 한국 Prostentanism」 『백산학보』 제3,1967.11/ (2)松川교회론:1885 <徐景祚 信道 傳道 松川敎會 設立歷史>神學脂南,1925. 10.

B. 최초로 설립된 <정규조직교회(a regularly organized church)>:1887 9 27일 조직된 새문안 교회/ ※ 정동제일교회와 남대문교회의 문제

   

5. 선교지역의 분할 - 敎界”의 문제

여러 교파 선교-마찰의 가능성/선교 활동지역의 중첩을 피하고 돈, 시간, 힘의 낭비 절약

A. 1892. 6. 11. 미 감리회와 미 북장 사이의 협의(공식적으로는 채택되지 못함): 5천 명 이상의 도시, 공동사역,  5천 명 미만의 경우 기득권 인정, 6개월 간 사업 중단할 경우는 타 선교회의 진출 가능, ③ 교파의 소속을 옮길 수 있는 권리 인정 등

B 1893, 남북 장로교 사이의 협정: 남장이 충남, 전라도 지역 확보

C. 1898, 북장, 카나다: 함남의 원산 지역 양도 받고, 함경도 지역 확보

D. 1909, 북장, 호장: 호장이 경남 (부산 포함) 지역 확보

E. 감리교의 경우: 1901년 남감 원산지역 확보. 송도, 서울 공동지역

F. 1905년 북장과 북감: 영변 등 평안도 지역 조정

G. 1907년 미감리회와 미 남장: 충남의 대부분 지역을 미감리회에 이양

H. 1909년 미감리회와 미 북장: 청주 및 충북 남부 (북장), 원주와 충북 북부 (미감)

※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게 될 그 즈음(1910) , 미계가 한국 대부분 지역 선교 지역화함

※ 선교지 분할의 부정적 영향:1930년대 지방색 ② 해방 후 한국교회 분열

 

6. Nevius 선교 방법

 Charles Allen Clark, The Korean Church and the Nevius Methods(Fleming and Revell Company, 1930), 곽안련 지음, 박용규 김춘섭 옮김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정책>(대한기독교서회, 1994)The Nevius Plan for Mission Work(CLSK,1937)을 번역한 듯

A. John L. Nevius(1829~1893):중국에서 30년간 활동, 芝罘에서 1890 6월 내한 두 주간

B. “독립, 자립의 진취적인 토착교회”의 설립을 위한 실천 방법→종래 봉급을 받는 본토 전도인들에게 맡김, 외국선교기금 사용, 네비우스는 본토인 전도인들에게 드는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처음부터 자립의 원칙을 세워서 빠른 시일안에 독립과 자립을 이룬 진취적 교회를 세우게 한다는 것→본토인 전도인을 내세우는 데는 일치, 활동비용을 누가 부담하는가는 방법이 나눠짐/ 본토 전도인들에게 전도를 맡겨 자립적인 토착교회 목표로 하되 기존의 방법은 선교기금을 외국의 선교부에서 전적으로 부담→네비우스는 본토인들이 스스로 부담토록 하는 방법/ 自進傳道(Self-Propagation), 自力運營(自給,Self-Support), 自主治理(自治,Self-Government)으로 알려져 있음/ 이 명분 뒤에서 선교부측의 인력, 경제력의 투입을 최대한 억제하고 선교의 효과는 극대화하자는 것/ 이 정책은 당시 정치 상황으로 보아 대규모의 선교사업이 불가능하다는 선교본부의 판단에 의해 1890년까지 인원과 사업비를 증액시키지 못했던 상황에서 채택됨 (백낙준, pp. 168-169).

C. 미 북장에서 이 원리 적용 강조: 선교사 도착 후에 치루는 시험에 어학시험과 이 ‘원리’의 이해를 요구/ 1891 2장으로 제정된 Presbyterian Northern Mission Rules and   By-Law에 의해 거의 각 장마다 이 ‘원리’의 적용, 혹은 직접 인용 구절이 보임/ 1896, 1901년 수정, 보완된 조례에서도 보임←1893년의 10 가지 선교정책 (미 남북장로교 선교부 공의회) 1895 10월의 북장 선교정책의 신조에도 적용 (<한국기독교의역사I> pp. 221-223)/ 1895년 경 북장 선교정책화→다른 장로교 선교회들도 이의 없이 이 정책을 수용.

 

※ 이 정책 수용과 교단의 성장(, 장 비교): 1937년판 서문“본서를 인쇄에 부치면서, 우리는 1909년 이후 지금까지 선교지역의 자랑거리가 되어 왔던, 감리교와의 선교지 분할이 철폐되고 장로교 총회가 주도권을 잡았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막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이 다 쏟아졌으나 교인수의 증가 비율에서 한 쪽 교단이 다른 교단보다 몇 배나 높은 상황 때문에 결국 제방들은 무너지고 말았다. 한국의 모든 친구들은 이 일로 일부 현장에서 나타난 온갖 경쟁의 폐단이 유발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D. Nevius 선교정책의 성과와 한계: ①성과: “하나님의 말씀을 터로 하여 자급자치의 원리 밑에 희생과 봉사를 내용으로 하는 고도의 기독교윤리를 실천하는 데서 오는 오늘의 큰 성과”를 얻음(김양선), “교인들에게 자립정신과 규칙적 헌금의 습관을 가르쳐 주었으며, 한국 기독교회의 서양화를 방지”(백낙준), “한국 교회의 발전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형태라든가 교역자의 지적 수준, 교회의 조직에 대해서 무 못할 커다란 영향”을 줌(민경배) ②한계: 구체적인 실천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 발견→한국 장로교 교역자 양성책의 문제점, 선교사들이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강력한 통제(한국 장로교 교역자 양성책의 문제점.W.D.Reynolds, "The Native Ministry" Korean Repository, May,1896 참조, 교역자 후보 교육을 상당한 기간 동안 비밀로 할 것, 전도인이나 설교자로 고용할 때 선교자금으로 급료를 주지 않을 것, 선교초기에는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하지 않을 것 등) 한국 장로교의 질 저하의 문제(교역자의 수준을 일반인들의 수준 정도로 할 것→한국 교역자들을 근대교육을 받지 못한 구세대인으로 구성, 존경과 권위를 받지 못함), W.Scott(徐高道)의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대한 비판:자주치리 강조→교회안에 계급조직 형성, 이 조직은 종종 교만한 임원진에 의해 좌우됨. “교회 조직과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별개의 공동체가 되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으로 흘렀다. 자급운영을 지나치게 강조한 것이 교회재정은 교회조직을 운영하는 데만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사회복지 같은 것을 위해 재정을 쓰는 것은 거의 생각지도 못했다,(Canadians in Korea, p.53)

       

7. 교회 직제와 교단 조직

A. 한국 내에서의 최초의 의식들: ①외국인만의 최초의 예배(1885.6.28, 알렌 부부, 헤론 부부, 스크랜튼 대부인) ② 최초의 세례(1886.4.25)-스크랜튼의 딸과 아펜젤러의 딸, 일본 공사관의 통역관 ③ 한국인 최초의 세례(노 도사 춘경, 1886.7.11/7.18)  

B. 교회 직제의 시작: ① 조사와 영수-선교거점(Mission Station) 중심으로 조사(Helper) 확보(주로 어학선생), 선교지점(Mission Sub-Station) 중심으로 영수(Leader)/ 조사는 1888년 언더우드의 지도하의 서상륜, 백홍준, 최명오/ 1905(50), 1906(105), 1907(160)/ 조사→목사, 영수→장로로 진출, 최초 영수는 1894 이영언 ② 집사는 1887년 경 부터인 듯, 1907년에 장립 집사(서울 1, 평양 8명 설) ③ 장로-1887 9 27일 새문안교회 2명의 장로/※ 서상륜, 백홍준이 최초의 장로였다는 설은 잘못/1898 2명 피택, 1900년 서경조, 김종섭 ④ 목사- 1901 김창식 김기범, 집사목사, 1902 최병헌 설교목사/  1907 7명 목사

C. 교단 조직: ① 장로교-1889:연합공의회(北長, 호장), 1893:선교부 공의회(Council of Missions holding the Presbyterian Form of Gov't, 南北長, , 加長 가입), 1901:장로회 공의회로 개칭, 영․한어 회의로 분리, 1907:노회 조직, 1912:총회 조직/ 朱明塤: 寒國長老敎組織 確立過程(1889-1912)- 傳來에서부터 起論[<韓國史硏究>2, 1968,12] ※ 노회, 총회 조직의 경위와 그 역사적 의의,

 

 ② 감리교: 미국의 남 북 선교부→1930.12.2:기독교 조선감리회 조직, 총리사 양주삼, 기독교 조선감리회 「장정」 「기독교조선감리회 교리적 선언」 제정, ,,,만주 선교연회      

 

. 신학, 신앙 운동

1. 초기 기독교 사상 수용의 한 형태-정대위:「한국의 그리스도교와 신크리티즘의 문제」←Chung David: Religious Syncretism in Korean Society(Yale University, 1959)

A. 格義佛敎: 중국에 불교가 수용될 때 특히 남방에서 無爲自然 長生不老를 주장하는 도교를 방편으로 하여 그 틀에 입각한 수용

B. 중국에 기독교 수용: 중국적인 용어와 古典 인용/ 神觀: , 上帝, 太一, 太極, / 예수 그리스도: 神人, 聖人, 仙人, 大人, 美人, 信人/ 동정녀 탄생: 古之聖人, 皆無父, 感天以生/ 代贖的 죽음:  小人則殉利 士則以身殉名 大夫則以身殉家 聖人則以身殉天下  羊群而黨  執之不鳴 殺之不號 生禮死義(이사야 53)/ 성경의 인물과 중국 신화에 나타난 인물 비교: 아담=黃帝, 가인=小昊, 아벨=太昊, =神農, 노아의 홍수= 임금 때의 홍수

C. 한국의 기독교, 타 종교의 개념 수용: 천당, 지옥←불교의 극락, 지옥/ 永生道敎 長生不/ 효←유교의 효  

 1890년대 전도문서:①종교적으로, 타종교를 방편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는 경향 ②점차 기독교가 타종교와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설명하고 있음. 유일신 사상을 기반으로 기독론, 성령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성경론, 창조론, 죄론, 천사론, 종말론 등이 나타남

 

2. 신학운동 ※ 유동식: 「한국 신학의 광맥」, 송길섭: 「한국 신학사상사」

A. 신학운동의 시작(1900 년대 초기):  「신학 월보」의 간행: 1900~1910, G. H. Jones(趙元時), 최병헌 ② 신학 교육의 시작: 신학반 (Theological Class): 전도인 양성목적1888.12~1889.1 언더우드 처음 시작, 이 무렵 감리교의 Scranton 대부인도 신학반 시작

B. 신학교 교육: ① 평양신학교: 1901. S. A. Moffett (馬布三悅)첫 입학생: 김종섭, 방기창(장대현교회 장로), 1902 4명 추가, 1905년 장로회 공의회-연합적인 성격, 1년에 3개월 수업, 9개월 교회봉사, 1907 7(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졸업 ② 감리교의 협성신학교: 미 감리회와 남 감리회의 연합사업으로 1905년 개설 ③ 동양선교회의 서울성서학원(1911)-성결교(1905년 선교시작) ④ 구세군의 성경대학(1910) 1908년 선교시작 ⑤ 피어선기념성경학원:1912:조선예수교 연합공의회 지원

C. 이 시기 신학 운동의 주역들: ①윤치호(밴더빌트, 에모리 대학 신학) ②최병헌: 「신학월보」주필,“한국 최초의 신학자인 동시에 종교학자의 명예”(유동식),「죄도리」(1901), 「성산 유람기」(1907, 뒷날 「성산명경」)→유, ,  3교와 기독교를 비교 고찰/ 四敎考略」(1909)/ 「종교변증론」(뒷날 萬宗一, 1922): 이는‘모든 종교가 하나로 성취된다’는 입장⇒선교사들의 동양 종교에 대한 이해와는 차이가 있음, 「예수천주양교변론」(1908) ③길선주: 「해타론」(懈楕論, 1904, 1916년 만셩취 萬事成就로 재간)

 

※ 한국인에 의한 첫 전도문서: 노병선의 <破惑進善論>(1897)

 1930 년대에 귀국, 활동하던 신학자들:-변홍규, 한치진, 정경옥, 유형기, 김인영, 김창준, 김영희, 이환신, 정일형, 갈홍기/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성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윤인구, 박윤선

D. 신학 전문잡지들의 간행(1910년대 ~ 1920년대): ① 「신학세계」(1916, 협성신학교)「신학과 세계」 ② 「신학지남」(1918, 평양 장로회신학교) 현재도 속간 ③ 「활천」(1923, 성결 교단) ④ 「신생명」(1923): 전영택, 송창근, 채필근/ 신학적인 실천과제를 교회 밖에서 찾으려 함위의 세 잡지가 교단적 배경을 가진 것과 대조가 됨

E. 신학적 흐름의 형성(1930년대):, 의 신학 교육← 선교사들의 학문적 신앙적 배경

① 시간표

                 성경신학 /  이론 (조직신학) / 역사신학 / 실천신학 /  교양 과목

   1916. 감      36.2%          15.9%          15.9%      15.9%    15.9%(국어등)

   1920. 장      38.4%          23.0%          14.5%      18.7%     5.2%

   1921. 감      25.5%           7.6%          11.8%       8.5%    46.6%

② 한국인 교수: (1915) 양주삼 목사/ (1928) 남궁혁 목사한국인 교수의 비율:  42%/  15% ③ 여성 참여율(신학교육에): (A.B.Chaffin, M.Tinsley, J.M.Chery, 홍에스더, 장정심)/ (없음) ④ 성경 원어 교수 시작(시간표에 의해)/ (1922)/ (1930년대)

 , 의 신학교육의 차이에서도 두 교단의 신학 성격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음.

E. 장로교 내의 진보, 보수의 갈등: ① A.J.Brown의 말: 초기의 선교사들, 전형적인 청교도 신앙, 1세기 전 뉴잉글랜드의 경건성을 유지/ 그러나 미 南北長 豪長과는 달리 加長은 다소 진보적인 색채가 있었음.  1910 년대 말 「조선기독교」의 김장호의 배후에 W. C. Kerr(공위량)라는 자유주의적 선교사(紅海 건넘을 干潮 현상, 五餠二魚 이적도 달리해석)

② 평양 신학교:神戶(고오베)신학․靑山(아오야마)學院 출신의 학문적 배경 ③ 1920년대 말부터 외국에서 공부한 신학자들 귀국/ 박형룡(「기독교 근대신학 난제 선평」←근본주의 신학 대변):김재준(Princeton, 피츠버그 노쓰웨스턴에서 수학→성경의 고등비판 수용) ④ 갈등의 표면화→1930년대 후반 미국에서는 舊學派 新學派의 대결, Princeton신학교와 Westminster(1929)신학교 출신의 대결. 한국에서는 a. 春培 목사의 女權問題(1934)→딤전 2:11-12, 고전14:34-35. b. 英珠 목사의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 사건(1934) * 두사람 모두 關西學院  신학부  출신 c. 아빙돈 성경주석(The Abingdon Bible Commentary,1930) 사건(1934)←번역/ 책임:신생사의 유형기/ :양주삼, 정경옥, 김창준, 전영택, 변홍규, :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김관식, 김재준, 조희렴, 윤인구 등 53 명 참석/ 문서비평학, 역사비평학 등 도입←근본주의 신학 토대 위에 서 있던 장로교의 반대에 봉착-1935년 총회문제로 제기 d. 1938년 평양신학교의 폐교와 1940 조선신학교의 설립(신사참배 문제와 조선인에 의한 신학교육 표방)    1930 년대의 신학적 유파 (유동식)

        근본주의 신학 (박형룡 −−−−−−→ 보수주의, 복음주의 계열

                                                                     −−−−−−→ W.C.C. 진보주의 수용

        진보주의 신학 (김재준−− −−−−−→ 민중신학

                                                                         −−− 진보적 계열 형성

        자유주의 신학 (정경옥−− −−−−−→ 토착화 신학 (:, :, :)

 

3. 부흥운동의 전개

 

A. 사경회(1890 년대)-성경의 번역,보급: 3 <한국기독교의‘성경기독교적 성격’참조>

B. 대부흥 운동과 백만인 구령 운동(1907~1909)1903 원산 부흥운동←사경회, 1907 대각성운동과 1909  백만인구령운동: 긍정적 측면-신앙의 순수성, 회개를 통한 거듭남 경험, 민족사적 의미-당시 상황과의 관련 등으로 비판 받음.

C. 1920~30 년대의 부흥운동: 1920 년대-3.1 운동 후의 교회는 사회주의계열의 도전/ 1903~1909 년의 부흥운동과는 달리 개인에 의해 주도됨/ 길선주(내세 지향적), 김익두(신유의 기적 수반), 이용도(신비주의적 성격)→이들 지도자들은 민족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가졌던 이들: 따라서 1920~1930의 민족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신앙적 표현으로 평가되기도 함, 부정적 평가: 한국교회의 신앙성격을 현실과 유리된 他界的인 것으로 형성해 감→1930 ~40년대와 6.25 때 더욱 강화→현재에 이르렀다는 평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 2: 37-39)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최근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해서 부쩍 관심을 갖고 있다.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먼저 한국을 둘러싸고 20세기 말부터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치적 상황이 20세기 초 한말의 위기를 연상시키면서 그 때 한국교회가 가졌던 입장을 되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고조되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한 시기에 100년전 겪었던 대부흥운동이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해 줄 것이라는 희망에서다.

 

또 행 2: 37절의 말씀과 관련된 이해도 할 수 있다. 당시 평양 장대현 교회 성도들은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인해 “오 하나님, 내가 어찌 하오리까, O God, what shall I do?”라고 하면서 죄를 고백했다./ 또 오순절 운동 때의 방언을 말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보는 일부 견해도 있음-박명수의 <한국 교회 부흥운동 연구> p.61,  80에서 게일이 말한 것을 인용함-게일은 1907년 대부훙운동 중에 중국신자들이 평양으로 길선주를 방문하여 함께 기도회를 가졌는데, “중국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단음절로, 한국인들은 세계가 잊어버린 그들의 고대어”로 기도했다고 함(korea in Transition, p. 216) 여기에 비해 브루스 헌트는 평양 부흥운동이 오순절 운동과 거의 관계가 없다고 밝힘. 일반적으로 1907년 대부흥운동은 다른 나라의 것과 비교해서 방언의 은사가 없었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개괄: 한국 교회가 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먼저 한국을 둘러싸고 20세기 말부터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치적 상황이 20세기 초 한말의 위기를 연상시키면서 그 때 한국교회가 가졌던 입장을 되돌아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한국 교회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고조되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한 시기에 100년전 겪었던 대부흥운동이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해 줄 것이라는 희망에서다. 평양대부흥운동을 되돌아보기 위해서 역사적인 조명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자료의 정리와 연고루 나타나고 있다.

 

 

평양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하디 선교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원산부흥회에서 기원을 찾고 있다. 그것이 1906년 평양연합사경회와 1906년 목포부흥회를 거쳐 평양 대부흥회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1907년 평남 도사경회를 계기로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평양 미북장로교 선교부의 노력이 크다.

 

1906 8월 하디를 초청, 장 감 선교사들이 모여 여기에서 “한국 교회에 종교적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1907 1 2일부터 시작되는 평남도사경회에서 이런 한 체험을 갖도록 기도할 것을 결의함/ 도사경회가 임박하자 길선주 장로로 하여금 특별준비집회를 지도하도록 하여 한국인 신도들에게 ‘성령강림’의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한편 도 사경회 기간에는 매일 정오에 선교사 기도회를 개최하여 성령강림의 분위기가 고조되게 되었다.

 

그 동안의 평양대부흥운동에 대한 연구를 보면 그 기본적인 사실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1.2()-1.15(): 낮 평양동계도사경반/ 선교사들의 정오기도회

1.6(주일)-1.15: 저녁 7시에 야간연합부흥집회 남성-장대현교회

1.17()-1.19(), 21()-22(): 여성야간부흥집회

 

* 사경반(겨울성경반, 평양도사경회, 1 2-15): 저녁집회 1,200명 이상의 남자들 출석(Lee1)/ 두 주간 겨울남자성경연구반 700, 선교사들-정오기도모임 벧엘과 같음(Lee2)/ 시골순회구역 각 교회에서 온 940명 등록(Swallen)/ 1,000명 등록, 평균출석 약 700, 선교사들-정오기도모임 벧엘과 같음(Lee3),

 

* 저녁집회(1 6-15): 남자들만 1,600-2,000명 참석, 여성들을 위한 분리된 모임이 3개처에 있음(Swallen)  

 

* 1 6: 훈련반(사경회)과 그 도시인들을 위한 저녁모임-4개의 장로교회 연합모임, 여성들은 별도로 4개의 다른 곳, 남학생들-아카데미에서 모이도록 함, 중앙교회-1,500명 수용가능, 매일 저녁 가득참(Lee3)

 

* 13(주일): 저녁까지 권능이 증가했으나, 저녁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떠난 것 같음. 선교사들이 무거운 마음을 가짐(Lee1)/ 기회가 주어지자 많은 사람들 죄 고백, 그러나 철저한 회개 없었음,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기다렸으나 갑자기 모임이 끝남, 방해하는 사람과 싸움이 있었음(Swallen)/ 모임은 죽은 듯하고 하나님의 영은 떠난 듯함, 한번의 설교와 의례적인 간증들, 무거운 마음으로 귀가(Lee3)  

   

* 14(): 정오에 선교사들 기도, 저녁 7시에 모여 짧은 설교와 간증 후 집에 가도록 함, 500-600명 정도 남음/ 통성기도, 한 사람씩 일어나 죄 고백: 믿기 전에 동료를 죽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다. 교회직분자였으나 도둑질함. 어느 장로는 선교사에 대한 증오를 회개. 어느 집사는 믿기 전에 딸을 독살함. 곡산 순회구역조사는 렉 목사의 4엔을 춤침-리 목사에게 돈을 가져와 미국의 렉 목사에게 보내달라고 부탁. 남편들-부인을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함(McCune)/ 간증하려고 1시간씩 기다림, 무서운 최의 고백들이 끊이지 않음, 죄 고백후 고통의 울부짖음, 바닥에 쓰러져 바닥을 침(Swallen)/ Lee의 요리사 죄 고백-땅 바닥에 엎어져 통곡, 통성기도 후 또 다른 사람 고백, 지도자급인 강씨와 김씨 사이의 증오가 고백되기를 기도, 강씨의 고백, 용서를 빌며 통곡(Lee3)

 

 

* 15(): 정오기도 모임에서 더 큰 축복을 달라고 기도함, 저녁-길씨의 설교 후 대중들을 향해 귀가할 것을 광고, 600여명 남음, 몇몇이 김씨와 주씨를 위해 기도, 강씨-고통스러워하고 자제력 잃고 통곡, 김씨에게 가서 팔을 두르고 함께 통곡, 청중은 계속 통곡, 자제력 잃을까 염려하여 한장 부르고 2시까지 고백이 계속됨, 한 대학생-간음 증오 그의 아내에 대한 무정, 그 외 여러 가지 고백, 통곡 자제력을 잃음(Lee3)/ 아침: Lee Blair는 집집마

다 다니며 월요일 저녁의 소식을 전함, 이날 저녁의 일-Blair와 관련된 일-지도자 강씨와 김씨 사이의 증오의 감정, 강씨는 월요일 밤에 김씨에게 고백했지만 김씨는 침묵, 강씨는 평북교회 담당의 Blair의 조사, 김씨는 평영남자청년회(회장 Blair)의 간부, 김씨가 강단을 붙들고 강유문과 방(Blair)목사를 미워했다고 고백, 용서를 구함, Blair는 아바지 아바지 하며 김씨 옆에서 울면서 기도, 수백명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서 있었음, 각자가 하나님을 대면함, 부르짖음이 시내까지 퍼져나가 불신자들이 놀람, 선교사들이 의논했으나 그대로 두기로 하고 위로함, Lee 선교사 찬송인도, 그 후에 전에 한번도 보지 못한 양상이 나타남,

 

그 다음에 전에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며,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은 종류의 집회가 시작되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모든 죄악이 그날 밤 공개적으로 고백되었다. 창백하고, 마음과 몸의 고통 속에서 강렬하게 떨고 있는, 죄지은 영혼들이,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이 그들을 보는 것처럼 그들 자신을 보았다. 그들이 수치와 슬픔과 자기혐오에 완전히 사로잡힐 때까지, 그들의 모든 추악함 속에 있는 그들의 죄들이 떠올랐다. 교만이 제거되고, 체면도 잊었다. 하늘을 향해 그들이 배반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자신을 세차게 때리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주님, 주님,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모든 것이 잊혀지고, 아무것도 문제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용서하시기만 하면, 사람들의 비난, 법에 따른 형벌, 심지어 죽음 자체도 하찮은 것으로 보였다.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하여 각자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 나는 내 의견이 있다. 나는 이제, 하나님의 성령이 죄지은 영혼에 임하면, 고백이 있게 되며, 이 땅의 어떤 힘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평양 훈련반(사경반): 화요일로 끝남, 모두들 시골로 내려감, 평양에서는 한 달 이상 각 교회에서 특별집회가 계속됨, 학생들의 회개로 며칠 동안 수업을 쉼, 회개는 고백과 눈물에 그치지 않고 보상이 뒤따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해를 끼친 사람에게 고백, 훔친 것은 불신자에게도 갚음, 한 중국인 상인은 기독신자가 와서 보상하자 깜짝 놀람, 강씨의 상황-내 조사 중 하나인 강씨라는 사람은, 김씨라는 사람과 적대적인 관계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무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밤마다 그는 회개하였지만, 결코 평화를 얻지 못했다. 부흥집회가 끝났을 때, 그는 점차 흥미를 잃었고, 그의 직책을 버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오지 않고 나를 피하게 되었다.  1년이 지난 후에 한 여인의 고백을 통해, 이 강씨가 교회 직원이었을 때 부도덕한 죄를 저질렀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성령에 끝까지 저항하며 고백하기를 거부했으며, 하나님은 그를 그대로 두셨다. 강씨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으며,

결국 도시에 있는 매음굴의 관리자가 되었다. 몇 달 전에 그가 아편을 피워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는 소식이 내게 들려왔다.

 

평양대부흥 운동 1907 1월 집회 상황

날짜 요일 평양도
사경회
선교사 정오
기도회
저녁 연합 부흥회 저녁 여성 부흥회 참고
1     기간: 1 6-1 15
 저녁 7시 시작
도사경회 참석자 + 4 장로교회
-> 남자만 1,500-2,000명 참석
   
2 기간: 1.2-1.15
장대현교회
(참석자:
 700
 250)
 
- 스왈론:  1,000명 도시사람
참석불허
 
- 강사: , 스왈론, 번하이젤, 헌트, 블레어 및 몇몇 한국인
(McCune 1 15일자 편지)




 


 



   
3    
4    
5 강사 제목    
6 길선주 마음의 눈을 열고  성신을 영접하라   *
7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   *
8 지옥을 취하랴 천당을 취하랴   *
9 성령 앞에 숨을 자는 없다   *
10 이신칭의   *
11 무궁안식세계   *
12 W. N. Blair(방위량) 고전 12:27
discord & unity
  *
13 길선주 혹은 Lee
/ 베어드 사회()
    night of gloom
14 W. B. Hunt(한위렴) *강유문 회개   ※ 통성기도, 통회자복
15 길선주 *김 장로 회개   ※ 통성기도, 통회자복
16   수요기도회/ Lee *주 장로 회개   ※ 통성기도, 통회자복, 보통학교 남학생, 남녀 중학교
17         저녁 여성들만의 모임 /
장대현 교회
*  남녀 보통학교
18         * 한 여인의 회개
19         ※ 젊은 소녀 고백
20     오후 길선주 graphic sermon     한 여인의 회개
21         저녁 여성만의
모임/ 장대현 교회
22          

                                                                                                                                 성령 임재 강도  ※  *

 

블레어는 부흥회의 결과, 한국교회에 큰 도움, 1. 사기앙양 2. 교회 정화:사랑스러워짐 3. 독립된 한국교회조직과 목회자 지망생이 많이 나타나게 됨, 김형재-좋은 기회를 버리고 소명에 따름(제주도 선교사로 감), 소명이 승리함(Bl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