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七. 시련과 분열

하나님아들 2021. 10. 2. 09:47

. 시련과 분열

 

1. 192030년대의 한국 기독교의 상황

 A.부흥운동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타계주의적(내세. 신비주의)

 B.사회주의 계열의 비판과 도전 ↔ 민족. 사회. 농촌운동에 대한 관심 제고됨.

 C.신학적으로 진보사상의 소개, 신학적인 갈등이 점차 노출.

 D.희년을 맞아(1934) 기독교 문화의 점검, 발전

 E.1930년대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의 발발 → 전시체제의 강화

 

2. 민족 말살 정책과 신사참배의 강요 및 신사참배 반대투쟁

A. 민족 말살 정책: 전시체제의 강화 → 皇國臣民化 정책./ 그 골자는 천황제(천황 신앙)를 기반으로, 한 민족의 正體性을 말살시키려는 것 / 이를 위해 조선어, 한글, 한국역사 등의 수업금지, 創氏改名, 皇國臣民誓詞의 암송, 종교적으로는 神社參拜와 동방요배의 강요 / 뒷받침된 이론: 日鮮同祖論 內鮮一體論 → 그들의 침략전쟁을 「大東亞共榮圈 건설」, 興亞的 민족해방전쟁」, 聖戰, 「구미 제국주의로부터 아시아 해방」으로 미화시킴.

B.신사참배 강요

神道: 일본에서 발생한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 → 나아가 이러한 관습들을 뒷받침해        주는 삶의 태도 및 이데올로기/ 가미(); 자연현상, 경이적인 자연물, 신화적. 역사적 인   , 조상들의 영,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자들을 총칭, 8백만 신/ 다신교적 개념, 天照大神을 중심으로 신화적 인물이나 영웅들을 신사에 모셔 이를 숭배하는 형태→ 신사참배/ 천황제 강화 및 사상통제의 수단1)

 

신사참배 강요2) : 극도에 달한 것은 1938년부터이지만, 1920년대에 이미 일어남→강경보통학교 사건3) / 1936년에 천주교와 감리교 참배 공식결정/ 1938 9월 제27회 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결의←이에 앞서 1938.2~3월 전국 23개 노회중 17개 노회 신사참배 결의

  * 총독부의 장로교 총회 대책; ①총회에 참석할 대표들에게 a.총회에 출석하면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것을 동의하든지, b.신사참배가 의안으로 상정되면 침묵을 지키든지, c.앞의 두가지를 실행할 의사가 없으면 총대를 사퇴하든지 3자 중 택일 강요. ②총회 전날, 친일적 총대 포섭, 동의. 재청자 선정 ③총대 선교사들을 경찰서에 초치, 이에 관여치 말도록 요구 ④총회 당일 100여명의 정사복 경관을 배석시킴/ *가결 후, 가결공작에 공을 세운 경찰들은 무더기로 표창됨.

C.신사참배 반대 투쟁

. 1915 9월 장로회 4회 총회, 3인의 위원 선정 총독부와 교섭, 학생들의 祭日 참석 강요 문제를 교섭토록 함./ ˚1932 9월 제21회 장로회 총회, “교회학교의 학생이 신사 및 여러 제식에 참배하는 것과 일요일에 송영 등에 관하여 할 수 없다”고 결의→3인 위원 (차재명, 유억겸, Moffett)으로 교섭토록 함/ 1934, 1935 총회에서도 제기. 이 무렵 평남 안주 노회(임시) “학교의 문을 닫을지라도 교리에 위반되는 참배를 할 수 없다”고 만장일치로 결의/ 그러나 신사문제에 대한 교회의 태도가 일치된 것은 아님/ 선교사들 사이의 불일치; 우상숭배(McCune ), 애국적 국가의식(H.H.Underwood )/ 장로교가 강경, 천주교.감리교 등은 수용적 입장/ 장로교 선교부 중에서도 남장로교가 가장 강경-C.Darby Fulton 성명: 1937.2. 내한, 남장 선교사 총회(전주)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신사참배를 시키기 보다는 차라리 폐쇄”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Fulton 성명(전문 한기역 II 297f)/ 성명의 한계: 일본의 통치구조 인정, 조용히 물러가려고 함/ 1937. 중일전쟁 발발로 신사참배 강요, .장 산하의 숭일․수피아(광주), 영흥․정명(목포), 매산(순천), 신흥․기전(전주), 영명(군산) 등 폐교/ 이 조치가 북. 장에 결정적 영향을 줌./ .(경남); 1936.2월 “신사참배를 하거나 신사참배를 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 1939 1월부터 산하 학교 폐쇄시작

 

. 감리교. 천주교 및 카나다 선교사들,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받아들임, 별다른 마찰 없음. ˚카톨릭; 초기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 항거(1925년 조선신궁 진좌제 때) 1930년대초 교리서 수정으로 국가의식 수용[1936.5. 뭇솔리니 통치하의 로마 영내에 있던 교황청, 신사참배 가능하다는 훈령 → 굴복]/ “감리교; 1936.6월 총리사 양주삼, 총독부 초청좌담회 참석후 일제의 입장을 따르기로 함→ 감리교 내부, 문제 제기→1938.9 성명 “신사참배는 국민이 반드시 봉행할 국가의식이요, 종교가 아니라” “그런고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던지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 참배 거부 운동; a.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 b.신사참배 거부운동

a.청원운동: 1934년 장로회 총회, 청원서 제출하려 했으나 당국에 의해 저지/ ˚朴寬俊 장로5) /  善斗 목사 일행의 청원 운동6) / 이런 청원운동, “당시 정세로서는 받아들여질  없는 것이었고 청원자 측이 일제의 권력 구조를 인정한 체제 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는 것이긴 하지만, 순교할 각오를 가지고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항하여 문제를 확산, 폭로하고 불의를 담대히 경고하였다는 점에 의의를 지닌 운동이었다.

b.거부운동: 신사참배 거부권유→거부자들 간의 결속강화→투옥→순교에 이르기도 함,

주기철, 이기선(평북), 한상동, 이주원, 주남선(경남), 손양원(전남), 헌트(만주)

투쟁 사례, 반대 운동자 명단(149)***--『한국기독교의 역사』 pp.333~337 참고.

˚통계: 149~164 명으로 확인, 154명 중(37% 목사, 8% 장로, 25% 전도사, 10% 집사,    14% 평신도), 순교자로 확인된 자 19(일반적으로는 50여 명이 순교되었다고 알려져 있  )←투옥자 수 약 2천명, 200교회 폐쇄 / 연구의 부진.

 

. 거부운동의 성격-a.우상숭배 거부의 신앙적 동기 b.신사참배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그 거부는 민족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적인 성격을 지님(민족사적 의미)→이러한 성격 때문에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자를 모두 민족주의자로 규정, 치안유지법, 보안법, 불경죄 등을 적용. 탄압함. c.거부운동의 선봉자들; 1920~30년대의 진보적 계열에서의 사회운동가 적음. 대신 신앙성격으로는 근본주의 신앙에 가까운 이들, 거기에다 민족운동의 경험자들이거나 전통적 교육(충군애국)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3. 일제 말 기독교의 훼절

A 장로교: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전후하여 한국 기독교의 변질현상이 나타남/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장로교 일각에서도 “시국설교 및 기도회”로 일본의 침략전쟁의 승리를 기도할 것을 결의(승동교회에서 개최, 1937.8.1.)/ ˚1937.10.12. <기독교보>: “기독교의 국가봉사” 강조/ ˚1938.2. 평북노회-신사참배 결의, 평양-친일적 목사들이 친목회를 조직, 일본 기독교계와 연계→부일적 활동 전개/ 1938.5. ‘경성 기독교 연합회’ 조직 -종교보국(종교보국) 서약→7월에 이를 확대,  ‘조선 기독교 연합회’ 결성/ 1938.9. 장로회 총회 결의: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銃後 황국신민으로서 赤誠을 다하기로 함”이라 함/ 1939.9. 장로회 총회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 일제의 ‘국책 수행에 협력’할 것을 다짐→이를 효율적으로 수행키 위해 ‘총회 중앙 상치 위원회’ 조직→총간사로 鄭仁果 목사 취임→11월 ‘장로회 지도요강’ 발표(한기역: 304)→실천방법으로 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규정, 교회헌법. 교리. 교법. 의식 등을 일본적 기독교로 정비→찬미가. 기독교서적 등의 개정 요구→부일적 교회 기관으로 전락.

B. 감리교; 1940 10월 총리원 이사회 ‘혁신안’ 발표/ “국체의 정신과 내선일체의 원   리를 실현,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   무이다”라 하고, ; 민주주의 자유주의의 배격, ; 일본정신의 함양, ; 일본 메소디스트 교회와의 합동, ; 일본적 복음 천명, ; 개 교회의 애국반 활동 강화, ; ‘교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케 할 것’도 결의.

C 군소 교단의 변질; 1940.11. 조선 구세군→조선구세단 변경 “ 일본적 지도이념” 및   그 기구 확립 선언/ 1940.12. 조선 성공회-일본정신에 의한 새 출발.

D. 혁신교단(1942.7)1월에 ’교파합동 추진 위원회(19, 9, 4, 일본4, 4)→제2  합동준비위 혁신교단안 12개조 혁신안 “신약성서 기초의 교의, 구약사상의 유대사상 제거  위해 구약성서의 새로운 해석 교본 제정”→구약성서의 사실상의 폐기 의미/ 이 교단은 경  기노회의 전필순 중심, 내분, 감리교 내부의 반발→혁신교단 해체/ 교파 합동안의 실패로   각 교단이 개별적으로 일본 기독교에 예속. (43.5), (8) →일본 기독교 조선 장.감 교단으로 각각 개칭/ 43.12.28. 안식교 해산/ 이튿날 성결교 해산/1945.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E. 신학교의 변화→장:1938. 평양신학교 폐교, 39년 채필근 중심 개교/ 1939.3. 조선신학교 설립기성회→1940. 승동교회, 조선신학원 “복음적 신앙에 기하여 기독교신학을 연구하고 충량 유위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함. 김대현 장로와 함태영, 김재준 중심/ 1941.10. 감신. 종교보국 강화를 위한 강연회, 궁성요배, 호국신사 건립지 근로봉사를 위해 100여명의 교역자 합숙훈련→1942. 일본적 신학교로 개조→이해에 폐교/ 신학교      :「경성 기독교 교사연성소」 황도정신을 가르치는 기관화

 

 

*** 신사참배 반대자 명단 

       신사참배 반대운동자
 장로교  평북 고흥봉 목사, 김지성 전도사, 김승룡 집사, 김영락 전도사, 김의흥 전도사, 김인희 전도사, 김창인 전도사, 김화준 전도사, 박신근 집사, 서정환 전도사, 심을철 전도사, 안이숙 선생, 양대록 집사, 오영은 집사, 이광록 집사, 이기선 목사, 이병희 집사, 장두희 집사, 이병규(1945.8.3 사망)
 평남 김선두 목사(만주로 이거),김의창 목사, 박관준 장로(출옥후 1945.3.13 사망), 방계성 전도사, 송상석 목사, 오윤성 목사, 오정모 집사(주기철 목사 부인), 이약신 목사, 이주원(이인재) 전도사, 주기철 목사(1944.4.21 옥사), 채정민 목사,  최봉석(출옥후 1944 사망)
 황해 박경구 목사, 이종근 목사
 함남 신의균, 신필균, 안승주, 위병언, 이계실 목사, 이창수, 한복현, 한상몽, 한윤몽, 한치상, 홍종선, 홍종현
 경남 강문서 장로, 강창주 집사, 김두석 선생, 김묘년 집사, 김야모, 김여원 집사, 김영숙, 김점룡 전도사, 박경애 전도사, 박성근 목사, 손명복 전도사, 염애나 전도사, 이봉은 권사, 이술연, 이찬수 전도사, 이현속 전도사, 조경우 강도사, 조수옥 전도사, 조용학 영수(취조후 1940.8.14 사망), 주남선(주남고) 목사, 최덕지(김덕지) 전도사, 최상림 목사(1945.5.6 옥사), 한상동 목사, 한영원 전도사
 충북 송희용 목사, 허성도(허원훈) 목사(1944 옥사)
 충남 정태희(1943 옥사)
 전북 김가전 목사, 배은희 목사, 최양서
 전남 강순명 목사, 구피덕 목사, 김남수 장로, 김상두 목사, 김순배 목사, 김영갑 전도사, 김용하 목사, 김원식 장로, 김정복 목사, 김창옥 장로(출옥 사망), 김형모 목사, 김형재 목사, 나덕환 목사, 나옥매 전도사, 박동환 전도사, 박병근 전도사, 박연세 목사(1944.2 옥사), 박용희 목사, 박창규 장로, 박팽동 장로, 배은덕 장로, 백영흠 목사, 선재연 목사, 선춘근 장로, 손양원 목사, 양용근 목사(1943.12.5 옥사), 오동옥 목사, 오동환 장로, 오석주 목사, 오정환 장로, 유재학 집사, 이남규 목사, 이용선 전도사, 장현경 전도사, 정인세, 조상학 목사, 조용택 전도사, 황두연 장로,이기풍 목사(1942.6.20 병보석 사망), 이우식(1943 사망)  
 만주 계성수, 김성심, 김순복 전도사, 김양순 전도사, 김윤섭 전도사(1943.5.3 옥사), 김응필 전도사, 김택영 집사, 김형락 전도사, 박명순 집사, 박희흠 전도사(옥사), 박인지 집사, 신옥녀 전도사, 전봉성 전도사, 전준덕 전도사, 전최선 전도사, 정치호 전도사, 최용삼, 한수환 전도사,김이준(1945.8 사망)
 감리교   강종근 목사(1943.6.3 옥사), 권원호 전도사(1944.4.13 옥사,서대문), 신석구 목사, 이영한 목사(옥사), 최인규 전도사(1942.12.1 옥사,대전), 이진우 목사, 최한호
 성결교   김연 목사(취조중 사망), 김지봉 집사(순교), 김하석 목사(1939.10.6 순교),박봉진 목사(출옥후 1944.8.15 사망)
 동아기  
 독교
  김영관 목사, 김용해 목사, 김재형 목사, 노재천 목사, 박기양 목사, 박성도 목사, 백남조 목사, 신성균 목사, 이종근 목사, 이종덕 목사, 장석천 목사, 전치규 목사(1944.2.13일옥사,원산)
 안식교   최태현 목사(출옥후 사망)

 

 

 

F. 한국기독교의 전쟁 말기 부일 협력 진상: 장로교(한국기독교의 역사 II, 311); 신사참배 여행, 전시물자 동원 협력-비행기, 종 헌납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실천요목」(p.313)

G. 기독교인들의 부일 행각; 배교자 속출 / 교회해산/ 총후활동의 실시율(1938.5)/ a.교회당에 국기게양탑 건설(88%), b.국기경례 실시(96%), c.국가봉창(82%), d.동방요배 실시(96%), e.황국신민서사 제창(93%), f.서력연호 폐지(87%), g.신사참배 실시(55%)

   * 이러한 기독교의 변질과 기독교인의 변절이 철저하였기 때문에 해방 후의 회개운동과 일제 잔재 청산 운동, 한국교회를 성결되게 재건하려는 운동은 그만큼 의미 있음.

 

4. 분열 - 해방 후

 A.원인 --일제신사참배와 일제잔재 미청산의 문제, 신학상의 갈등←선교지역 분할,  

 B.고신파의 분열 (1951. 신사참배 문제, 출옥성도 중심)− 

 C.기장파의 분열 (1952. 신학상의 문제, 조선신학교−  -- 선교지역 분할이 겹침.

 D.통합. 합동의 분열 (1959):선교지역, W.C.C. NAE, ICCC 문제 등이 겹침, 선교자금.

 E.감리교 및 타교파의 분열 : 선교지역, 신학상, 해외의 선교자금

 F.오늘날은 교단별 분열에다 진보. 보수의 갈등/ 열린 진보. 보수에 대한 기대.

 

         


1)  國家神道:국가신도란 19세기 후반에 일본 '근대천황제국가'가 고유의 神社神道 皇室神道를 결합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일본의 국가종교. 메이지 유신 초기에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불교와 기독교 등 일반 종교를 억압, 통제하는 한편,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사신도와 민간신도를 국가신도로 개편, 여기에 초종교적, 공적, 절대적 지위를 부여함.‘천황’의 조상과 당시 ‘메이지천황’을 신격화하여 절대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군국주의적 소위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기초를 놓음/ 神道는 일본인의 고유 종교 사상으로 천황숭배 내지 조상숭배를 핵심으로 하는 일본의 국수적인 토착종교. 신사는 이러한 신도의 祭神 奉齋하고 종교의식을 거행하는 중심적인 시설. 신사에 봉재되는 제신→① 皇祖皇宗 神靈  氏族 祖神 ③ 국가(또는 그 지방)에 공로가 현저한 이들, 또는 國難 殉國한 이들의 英靈 ④ 일본 문화의 진보에 대한 공헌이 현저하고 또 그에 관계가 깊은 이들의 神靈  皇室의 번영, 國運의 발전, 국민생활의 安泰에 수호적인 烈을 발휘하는 神靈/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天照大神으로 대표되는 ① 皇祖皇宗 神靈. 일본 총리의 공식 참배로 문제되는 靖國神社 봉재 신령은 ③ 國難 殉國한 이들의 英靈. 야스쿠니신사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확산과 자국민을 대외침략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됨/ 야스쿠니(靖國) 신사: 1869(메이지 2) 6, 칙명으로 軍務官에 의해 지어진 招魂社. 그해 5월 도쿠가와 막부 세력을 완전히 패배시킨 천황측은 이 내전에서 죽은 자기측의 군인들의 합동초혼제를 지내고 이 초혼사에 합사함. 明治天皇은 이 초혼사에 특별배려→1874 1월 직접 방문. 征韓論을 둘러싸고 일어난 1877년 세이난(西南) 전쟁에서 明治 정부군 승리→그해 11월 이 초혼사에서 전사자들을 위한 임시 제사 거행. 1879 6 의 의견에 따라 이 초혼사를 야스쿠니신사로 개칭, 別格官幣社의 특별 지위 부여. 야스쿠니 신사→처음에 내무성과 육, 해군성에서 함께 관할, 군부의 성장으로 1882년에는 ‘군인칙유'를 내려 천황이 군의 통수권자이며, 군인은 천황의 군대로서 절대 충성의 의무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야스쿠니신사도 1887년 육, 해군성의 독점적 관할하에 두어 神職도 육, 해군성에서 임명→별격관폐사로서 황조신을 봉안한 神宮에 버금가는 지위 획득. 그 후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에서 침략 전쟁 동원에 이용.1898년 가을부터 전투중에 사망한 자나 적의 포로가 된 자 및 “전쟁터에서 질병 또는 재해로 인해 사망한 자도 '특별한 배려'로 전사자와 같이 인정해 야스쿠니 신사에 신으로 모셔지도록”됨. 1939 3월부터는 지방에 있던 관설․사설의 초혼사들을 護國神社로 개칭하여 신직 및 神饌幣帛料를 관에서 제공하게 하고 그 하부의 지역 야스쿠니신사의 기능을 하게 함. 이로써 그들의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국가신도, 참배 강요가 군국주의적 대외침략과 깊은 관련을 이해가능함.

 

2)  신사 수: 1916/17, 1920/82, 1925/150, 1930/231, 1945 6월 현재, 군 단위 이상 70개소, 면단위에 세운 神祠 1,062개소, 도합 1,141개소에 이름. 부여신궁 등 짓는 도중에 해방을 맞은 신사들은 이 숫자에 들어있지 않음/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에 일반 종교계에 대해서는 억압․통제 정책을 실시, 반면 신사신도는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법령정비를 통해 관공립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주입과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지원․장려하는 정책을 취함. 일제는 식민지 등에 시정권을 얻으면 그 지역에 예외없이 官幣大社를 설치함. 조선총독부도 1912년부터 내무국 지방과에서 관립신사 건립 계획을 세우고 막대한 예산 배정. 남산 중턱에 20만평의 부지를 조성하여 건립키로 함, 제신은 일본 내무대신에게 조회, 아마데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와 한국 병탄원흉 메이지천황(明治天皇)으로 함, 1919 7 18일자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 공포. 1920 5월 착공, 1925년 완공. 이들의 이 신사의 건립의도,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조선총독이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조선신사 창립에 관한 청의'에 잘 드러남./ 조선신사 건립이유-일제가 메이지유신 초기에 강력히 실시하였던 '신도국교화정책'을 그들의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하여 일반 민중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와 신사신앙을 강요하고, 일본 풍속을 이식하여 '동화'시키는 것이 조선통치상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 조선총독부는 1915 8 16일 조선총독부령 제82호로 '신사사원규칙'을 제정 발포, 모든 신사의 창립과 존폐는 총독의 허가를 받도록 하여 신사에 관공립적 성격 부여. 1917 3 22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21호로 '神祠에 관한 건'발포 →神社는 물론 小祠라도 보호육성 정책./ 1920 9월 동아일보가 일본 신도의 3종신기 숭배를 미신적 우상숭배라 비판 →무기정간처분. 이는 1925 10 15일 조선신궁 준공에 앞서 기회를 이용, 신사 참배와 신앙의 확산을 꾀하고자 함./ 기독교계 학교의 반발.

3)  1925년 강경보통학교 신사참배 거부사건: 神社 不拜하고 免職 해’(<활천> 1924 12월호 pp. 727-728): "교회 신자인 강경공립보통학교 여훈도 김복희 양과 그 교회 주일학교 학생인 강경공립보통학교 남여학생 57인은 지난 10 11일 강경신사제일을 당하여 일반교사와 학생들은 다 경배를 하되 자기들은 헛된 신에게 절하는 것이 무리한 미신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죄됨을 깨닫고 신앙의 주의를 굳게 지키어 절하지 아니하였더니, 그 학교에서는 일대 분제가 되어 절하지 아니한 교사와 학생을 낱낱이 취조하며 만일 잘못되었다고 항복지 아니하면 교사는 면직하고 학생은 출학을 시키겠다고 위협을 하되 불복하였으므로 총독부에서는 학무국장이 내려가고 충청남도청 학무당국자와 교장이 모여 협의하였으나 필경은 면직이나 출학시킬 조건을 얻지 못하고 그 대로 흩어졌으며 후에는 학부형회를 열고 그 학생들을 그 부모에게 맡겨 조정시키려 하였으나 학부형측에서는 말하되‘ 나 역() 예수를 믿지 아니함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아들에게(지금 주일학교에 다니는 아이) 절하라 하되 듣지 아니할 때에 때리기도 하고 밥도 굶겨 보고 갖은 위협을 다 하되 듣지 아니한 즉 신앙의 자유는 결코 빼앗지 못할 것임으로 이제는 방임(放任)하였노라. 또한 그들이 주일학교에 다녀서 행위상에라도 불미한 것이 있다 하면 절대로 금할는지 알 수 없으나 사실상 주일학교에 다닌 후로는 행위도 아름다워진 이상에 구태여 금하고저 아니하노라. 또한 그 아이들이 신사에 절하지 아니한다고 학교 규칙이나 행위에 잘못된 것이 없고 오직 절하지 아니한 것뿐으로는 출학시킬 조건도 없고 문제 삼을 것이 없는 줄 생각하노라" 하였음으로 학부형회도 필경은 아무 효력 없이 되고 말았으며 특별히 여훈도 김복희 양에게 대하여는 권고사직을 시키고자 교장은 말하나 김양은 ’내가 면직은 당할지언정 권고사직은 아니하겠노라‘하고 면직을 당하였다더라./그 뒤 학교 당국이 끝까지 참배를 거부한 교사 1명과 7명의 학생을 희생시킴으로 일단락됨. 강경교회 전도사 백신영: 1919 9월 김마리아가 다시 조직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결사대장으로 참여,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1920년 강경교회 부임, 1927년까지 전도사로 시무함. 강경보통학교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배후에는 강경교회의 백신영 전도사가 있었음→이 사건은 첫째, 미션계 학교가 아닌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일으킨 최초의 신사참배반대투쟁, 둘째, 교사가 한 분 있기는 하지만 어린이들이 일으킨 최초의, 아마도 유일한 신사참배거부투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임

4)  박관준 장로는  대동,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장로의 아들 永昌 함께 구세군 사령관 야마무로(山室軍平) 중장, 일본기독교회 장로 히비키(日疋信亮) 중장, 정우회 대의사 마쓰야마(松山常次郞),  조선 총독 우가키(于垣一成) 등을 방문하여 진정하고, 문상(文相) 아라기(荒木貞夫), 사대당 대의사 아베(安部磯雄) 등과도 면담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순교할 각오를 하고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74 일본 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첫째, 종교법안 제정 반대, 둘째, 국교를 신도(神道)에서 기독교로  , 셋째, 신사참배 강요  악법 실시 강요와 양심적 교역자 투옥을 철폐할  등을 내용으로  경고서를 단상을 향하여 투척함.  사건으로 이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경시청에 구금되었다가 평양으로 회송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박장로는 6년간의 옥고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남

5)  총회장을 역임한 김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서 고등계에 체포, 병보석으로 풀려남. 마침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하기 사경회 강사로 잠시 귀국한 斗英 함께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일본 정계 요로에 진정하고자 1938 8월에 건너감. 이들은 일본에서 정우회 외정부장이요 중의원의원인 마쓰야마(松山常次郞)장로, 궁내 대신 차관 세키야(關屋貞三郞), 정계와 군부의 원로인 히비키(日疋信亮)장로 등을 만나 진정하며 이들과 함께 다시 한국에 건너와 미나미(南次郞) 총독의 지시에 의한 장로회 총회의 강제 신사참배 결의를 막고자 . 그러나  사실이 탄로나 김목사는 종로 경찰서에 구속되고, 총회도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함으로써 성과없이 끝나고 말았다.4)

6)  김두영,神社參拜決議前夜秘話, <基督世界>, 11, 1957, pp.134, 152-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