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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 (景敎, Nestorius파 기독교) 이만열

하나님아들 2021. 10. 2. 09:42

                        한국 기독교사      이만열     

                                                               

참고문헌: 백낙준, 《한국개신교사》(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전택부,《한국교회발전사》(대한기독교출판사,1987)/ 민경배,《한국기독교회사》(연세대학교 출판부,1993)/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한국기독교의 역사 I. II(기독교문사,1990)/ 이만열, 《한국 기독교 수용사 연구》(두레시대, 1998)/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1 (1784 - 1910)   2005, 한국기독교회사1 (1784 - 1910)   2005

 

               

                                . 경교 (景敎, Nestorius파 기독교)

 

1. 경교: 4C의 삼위일체론을 거쳐 5C의 기독론의 교리논쟁으로부터 파생됨

 

* 사도 도마의 인도전도설: 인도인들의 전설중, 사도 바울의 소아시아 전도시에 도마와 바돌로매는 동방으로 가서 도마는 인도에서, 바돌로매는 중국에까지 가서 전도했다는 설./ 남인도 Malabar에는 기독교 전통: 사도 도마가 인도 동쪽 마드라스에 도착, 점차 서쪽, Malabar에 도착, 전도활동→그의 전도활동이 중국에까지 확산→초기 역사가들 중 도마가 인도와 중국에 가서 기독교를 전한 복음의 창시자로 보는 예가 발견.(한기역I 24-25)

 

A. Nestorius : 안디옥 근처의 수도원에서 수도생활/ 안디옥 학파의 대표자인 Theodore of Mopsuestia 밑에서 수학/ 428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 II에 의해 Constantinople 감독→ 안디옥파 신학전통에 충실, 이단박멸에 적극적 자세→ 알렉산드리아 학파와는 갈등/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논쟁과 추방[한기역 I 26]: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인정, 인성측면 강조→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인성을 강조, 인간인 예수에게 신이 임재함으로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되었다고 설명→ 이런 점에서 마리아에게 神母란 칭호 theotokos란 칭호를 붙일 수 없다고 주장/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마리아에게 theotokos란 칭호를 사용, 그리스도의 인성-신성의 완전한 결합을 주장.→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비적이고 은유적인 어휘를 사용했고 성경해석에서도 은유적인/ 그러나 안디옥 학파는 이성적이고 합리적 경향을 띠었으며 성경해석에서도 분석적이고 비평적인 입장 취함"//  “두 학파 사이에 긴장고조, 네스토리우스가 데리고 온 장로 아나타시우스가 설교 도중 마리아에게 theotokos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그 칭호사용금지를 강조. 이것이 교리논쟁으로 발전/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감독 키릴루스(Cyril)가 대표적인 인물로 나섬, 로마교황 코일레스티우스(Coelestine)도 키릴루스에 동조, 430년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 같은 해 키릴루스도 알렉산드리아 교회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 이단으로 정죄→ 네스토리우스 반박”// 이같은 논쟁 해결 위해 동로마황제 데오도시우스는 431년 성령강림주일에 에베소 공의회 소집, 네스토리우스 지지의 안디옥 관구의 주교들이 늦게 도착, 키릴루스 지지의 주교들 중심으로 공의회를 개최, 여기에서 이단으로 정죄, 주교직에서 파문→ 이런 결정 후 안디옥 주교들 도착, 별도의 공의회 열고 키릴루스와 에베소 주교 멤논을 파면→ 황제는 사태해결을 위해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루스, 멤논 체포, 실패→ 키릴루스와 멤논을 석방, 네스토리우스를 추방, 안디옥파에게 치명적인 결정타→ 이 논쟁(그리스도론)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승리로 끝남//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근처 수도원에 유배→ 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의 오아시스로 추방→451 , 이집트에서 사망// 동방교회 안의 추종자들은 에베소 공의회의 결정을 인정치 않음→ 동로마 황제 435년 네스토리우스 지지자 17명을 추방하고 그 신자들을 박해→ 신도들은 동쪽으로 이주, 페르시아 에뎃사에 정착. 당시 페르시아 Persia의 사산 왕조(226-637) 하→페르시아 국왕은 네스토리우스 학설을 좋아했고 자기 영토 안에서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도록 편의제공→네스토리우스의 친구 Ibas가  세운 에뎃사 신학교는 네스토리우스 신학의 본산이 됨→451 Calcedon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확정, 제스토리우스파는 서방교회와 단절/ 네스토리우스파는 자기네 교회를 “앗시리아 교회”, “갈대아 교회”라 하며 독자적인 전통→ 489년 에뎃사에서 다시 추방당함 → Nisibis에 옮겨 신학교 재건, 서방교회와는 다른 전례와 신학 전통 수립→ 674년 페르시아가 회교국인 아라비아에 의해 멸망 후에도 칼리프의 신임을 얻어 계속, 교세 확장, 672년 본거지를 Bagdad로 옮겨 발전하게 됨→ 7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외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 인도와 아라비아에 선교사 파견, 인도에서는 Malabar에서 중점적으로 활약, 이런 상황에서 중앙아시아를 통해 뚫린 비단길을 타고 중국에 선교단 파송→경교발전

 

B. 중국 전래와 발전 : 635-845

(1) (, 618-907) 태종 때 전래(635)--長安←알로펜(Alopen,阿羅本)이 선교          단장/당 태종은 房玄齡을 보내 이들을 환영, 장안에 머물며 경전번역토록 함/ 波斯敎, 大秦敎(大秦寺, 大秦僧), 景敎(光明正大한 종교), 大秦景敎/ 638년 조정이 인정하는 종교로 선포, 大秦寺 건축-승려 21명을 두고 포교토록 함/ 알로펜은 641년 예수메시아경(序聽迷詩所經),一神論, 一天論, 世尊布世論) 등 번역→당이 수용한 이유: 페르시아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아라비아 회교국 견제, 태종의 춣신 성분이 전통 한족이 아니고 胡族 사이의 혼혈→배외관념 희박, 외래종교에 관대한 정책/ 高宗 대에는 경교를 眞宗이라 하고 전국에 景寺 건립토록 함, 알로펜-鎭國大法主란 칭호 후대, “법도가 전국에 퍼지고 국가는 부유하며 백성은 선미해졌고 교당이 각 성읍에 충만하여 가가호호 경복이 은성하다”고 경교 융성→ 長安 외에 洛, 霙武, 沙州, 成都, 廣州/ 房玄齡 高力士 郭子儀 , 100년간 三夷寺로 국가보호

(2) 景淨-고급의 경전(大秦景敎宣元本經 志玄安經 經敎三威蒙度讚 尊經 ) 번역/ 781. 大秦景敎行中國碑를 건립[碑林]/ 내용; [한기역I 30]경교 약사, 경교의 진리, 경교인들의 모습, 신앙생활 내용(7일중 하루 예배, 목탁사용)/ (3) 회창멸법(會昌滅法, 845)에 의해 쇠퇴--재산 국가 귀속, 경교승 환속 조치됨

C. 신라 ( 57 B.C.~935 A.D.통일 668)에 전래 가능성

    (1) 근거:① 통일신라 때 당과의 긴밀한 관계 (사절,유학생,상인,新羅坊, 신라, 신라)

            ② 통일신라 때 Arabia, Persia 등과의 교역의 가능성 - 處容 전설

    (2) 제기 : E.A. Gorden - The Symbols of the Way, Tokyo 1916.

                             Asian Christology and the Mahayana, Tokyo, 1921.

       * 석굴암의 신장, 관음상, 나한상 / 12지상(支像) / 무인상 ⇒ 경교적 영향

       *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형을 금강산 장안사에 세움

    (3) 발전 : 김양선(金良) - 1956년의 돌 십자상과 마리아상/ 오윤태(吳允台) - 「한국기독교사」 I. 경교편(景敎篇) 참조. 저자는 이 책에서 비교종교학적인 견해로도 설명 : ① 자율적인 성격의 불교가 타율화 (대승불교) - 보살사상/ ② 미륵불(彌勒佛) 사상과 메시아니즘의 비교/‘메다로돈’/ ③ 서학(西學)/조선후기처럼 서양종교(경교)로 오해.

 

 

2. (,1234~1367)의 야리가온(也里可溫)과 카톨릭 ; 고려(918~1392)        

  A. 몽고족이 세계 제국 건설 : 종교와 사상의 포용성

    * 돌궐 계통의 위구르 등이 Syria 문화의 영향을 받음 → Nestorius파 기독교 흡수

      → 몽고를 통해 중국에 전파

    * 이들 기독교도들을 야리가온, 아이개온(阿爾開溫) ← 몽고어 아리카운(Arkaun,              Arcoun, 기독교 복음을 섬기는 자) 에서 유래.

    * 징기스칸 - Kerart족 공주(독실한 기독교 신자) 맞음 → 몽고 수도에 Kerart 출신의        야리가온. 궁중 안의 3만명의 경호원들을 Alains족의 기독교도들로 조직했다는 설.

  B. Nestorius파는 에베소 공의회 이후 이단으로 규정 → 서방의 기독교 (Catholic 및          Greek Orthodox)와 다른 전통을 가지고 발전함.

    ˚대 분열 (The Great Schism, 1054)

    ˚십자군 운동 (1059- ) 이후, 동양 진출을 꾀함.

    ˚선교 단체 조직 : 프란체스코회 (Fransiscans, 1209)

                       도미니쿠스회 (Dominicans, 1216)

   

    ˚카르피니 (Giovanni da Pian di Carpin : 1182~1152)의 몽고 방문 (1246~47) <The                  History of Mongols> Franciscans 소속.

       네스토리우스파 (야리가온) 소개 → 카톨릭 선교의 가능성

    ˚코르비노 (John of Monte Carvino, 1247-1328)의 선교 : 1294년 북경 도착, 10 여       년 후 북경에 2개의 교회, 6천여 명 세례.

    ※ 로마 Clement V, 1307년 중국교구 창설, 코르비노 대주교(Archbishop of                 Cambaluc)이 임명.

  C. 고려에 선교 가능성 - 김양선 등의 주장

    (1) 몽고 왕실과 고려와의 깊은 관계

    (2) 고려인들의 몽고 및 원나라 수도 이주

    (3) 몽고군과 고려군의 연합군-- 몽고군 중에 야리가온이 많았음.

 

 

        .  천주교(天主敎, Catholic)의 전래와 박해

 

1. 일본을 통해 전래의 가능성: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 Cespedes 신부.

˚1517년 종교개혁→Catholic의 반동종교개혁,예수회(Jesuits)창설(1534)-외방전교회 인정,

    ˚자비엘 (Francisco de Xavier, 15061552)의 동양전도→1541년 포르트갈 국왕의 지      원으로 인도 고아(Goa)진출, 8년동안에 약 10만명 세례 → 일본 전도 (1549. 8. 15)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 일본 기독교의 시작 → 1년 후 교오토(京都)로 옮김

    ˚다이묘(大名) 중에서 개종자 많이 생김 → 소속 주민들의 개종.

    1570 3만명,10(1579),1587 20만 명 → 기리시단(切支丹, 吉利支丹)이라 부름.

    ※ 교오토의 명문 다이묘 개종자 : 다까야마(高山右近), 고니시(小西隆佐), 이께다(池田丹後), 1570~82년 일본 기리시단의 절정기-규우슈의 3대명문 다이묘(大友義鎭,大村純忠,有馬晴信)들이 12,3세 되는 소년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로마 교황청에 파견함.

 

    ˚임진왜란 때의 침략군 선봉

    * 가또오(加藤淸正) --- 불교 부대

    * 고니시(小西行長,아우구스티누스) --- 천주교 부대 (18,000)    

      웅천에 웅거, 장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제 파견 요청.  

      Gregorio de Cespedes (Spain 출신)과 일본인 수사 동행.  

      1593 12 27일 도착설-1년 남짓. 가또오의 시기와 모함으로 자유로운 활동

      불가(1587년 선교사 추방령)Cespedes가 한국인에게 선교했다고는 볼 수 없음.

    ˚한국인 신자의 출현과 순교

       포로 약 5만 명 (7천 명 귀환) - 대부분 노예 (인도 Goa 등지)

                                   → 그들 중에서 천주교 개종자 7천 명

    ˚1614년 도꾸가와(德川) 막부, 선교사 추방령 및 기독교 금령 → 순교자가 많이 나옴

    조선인 포로 중 福者 9, 순교자 칭호 11명 설. 일본인 성인 26명 중 한국인 3인설.

        ※ 권() 빈센트, 오타 줄리아 (Ota Julia)

 

  2. 중국을 통한 천주교의 전래

    ˚1514년 포르투갈 상인 - 중국 도래

    ˚1552년 자비엘(F.Xavier)이 일본 인도를 거쳐 광동 앞 상천도(上川島) 상륙, 열병으        로 사망. 그 후 Carneiro (1568, 주교), 루기에리 (Michael Ruggieri 羅明堅)

     Jesuits의  Matteo Ricci(瑪竇)  Macao에 도착(1582)

     →소주(韶州,1589),남창(南昌 6년간)

      1601 북경 도착,판토자(D.de Pantoja,龐迪我)와 함께 신종(神宗) 알현

     → 자명종 등을 선물 천학실의(天學實義), 교우론(交友論), 서학기법(西學記法), 천주          실의(天主實義, 1603), 양의현람도(儀玄覽圖) 

     →천주실의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 1614)에 소개됨.

    ˚1631년 정두원(鄭斗源)이 천주실의 등의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와 서양문물을 유입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천주교 (신부) 접촉.

    1636년 병자호란 때 청()에 볼모→1644년 명()멸망, 북경 문연각(文淵閣)으로 옮김

    예수회 신부 아담 샬(J.Adam Schall von Bell,湯若望)→청()의 흠천감(欽天監) 감정       (監正)-1644,11.소현세자 귀국때 「성교정도(聖敎正道)」 구세주상(救世主像)을  보냄.

      -소현세자, 조선에 동행할 선교사 1명 요청→중국인 궁녀 감독관 5명의 환관 선발.

      -그러나 귀국 70여일 만에 소현세자 사망.이어서 세자빈 사사,그 자녀들도 유배당함.

    ˚한역 서학서의 소개-서학, 천문학, 지리, 機器 등이 도입→함께 천주교 소개  

      ⇒ 학문적으로 선진문화의 도입 ※ 李:서학 이해와 소개의 선구자, 체계화

    ˚서학의 학문적 이해 - 星湖 좌파에 의해 신앙으로 변화.

      - 이벽, 정약용 형제, 권일신, 이승훈, 이가환 등 (양반)→ 홍유한 종교적 계율 실천

      - 김범우 등 역관(중인)도 천주교에 귀의  

      - 1777년경부터 교리연구 등 講學會 - 天眞庵, 走漁寺

      - 1784, 承薰→북경 북천주당 그라몽(J.J.de Grammont, 棟林)신부 세례,

     ˚가성직(假聖職) 시대 (  -1787) : 세례, 고해성사, 견진(堅振)성사

      주교:권일신(權日身),신부: 이승훈, 存昌, 유항검(柳恒儉), 최창현(崔昌顯)

 

      ※ 자생적 신앙공동체.  신부(神父), 대부(代父)

  3. 천주교에 대한 박해

    ˚Jesuits : 현지 적응 선교정책,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 (조상제사, 공자숭배)-도미니칸(1631),프란시스칸(1633),파리외방전교회(1684)의 도래-- Jesuits의 태도를 혼합주의라 비판-전례(典禮)문제 논쟁 결과, ...는 중국에서 추방, 1773 Jesuits 해산.

    ※전례 문제:주로 공자 및 조상 제사문제로 Jesuits는 신위(神位)앞에 절,(),제물봉헌을 우상숭배나 미신행위가 아니라고 함(중국학자 서광계, 이지조 등이 호응). 그러        나 도미니칸, 프란시스칸은 여기에 비판적임.

    1643 도미니칸 회원 Morales 17개 항으로 반론(反論) - Innocentio X 1645 17개항의 금령→제수잇은 Martini를 파견, 로마에 자기들의 입장 설명→1656,59, Rome는 제수잇의 방침 허용.

   1684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중국에 도착.  ..의 입장 지지

   1693 복건성 주교 (. 소속) Charles Maigrot, 제사금지 훈령 → 교황청에 요청

   1704 Clemens XI 제사와 신위(神位) 금함. 청 정부 반발, Jesuits 제외 선교사 핍박

   1715 Clemens XI 제사금지 칙서,1742 Benedicto XIV-Clemens XI의 칙서를 재천명

   1777년 교황,Jesuits 해산명령,1842까지 도미니칸, 프란시스칸, 파리외방전교회 등이       100여 년 간 핍박을 받음.

    ˚핍박과 발전

   1875 (乙巳) 명례방 (지금의 明洞) 김범우 집에서 집회 적발.

   ⇒을사추조(秋曹=刑曹)적발사건, 김범우만 체포,순교(이승훈,이벽,정약용 3형제,권일신)

   → 천주교 비판여론 고조;() 안정복 (권일신의 장인) 천학고,천학문답--사학이라 규정

   ② 정미(丁未, 1787) 반회(泮會) 사건: 반촌(泮村).  이승훈, 정약용, 강이원 등이 김석     태의 집에 모여 서학서 공부 - 폭로

   ③ 진산(珍山) 사건 (1791) : 신해(辛亥)교난 혹은 신해사옥.

    尹有一:1789,1790 두 차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다녀옴. “조상제사 금지”

         의 확답을 받아옴 → 신앙에서 떠나기도 함.

   ※ 윤지충(尹持忠) (정약용의 外從), 권상연(權尙然, 의 외종형) : 신주를 땅에 묻고

          1791년 모친 별세 때 제사 폐지, 신주 폐기.

       *  확대 안됨 - 時派, 僻派의 대립과 정조의 남인 시파(천주교인 많음) 배려

      ④ 신유(辛酉) 박해 → 황사영(黃嗣永) 백서(帛書) 사건.

         1백여 명 순교, 4백여 명 유배 (정약용 19년 간 유배)→ 양반층에서 배교자 나옴

        黃嗣永 帛書 :

           의 황제가 조선 왕에게 선교사 받도록,  

           의 황제가 친한 관리 파견, 평양과 안주 사이에 무안사(撫安司) 설치, 조선              의 정치 감독, 또 청의 공주를 조선의 왕비로 삼게 하여 천주교 확산

          ⓒ서양함대 동원 → 조선정부 위협,강제로 천주교 수용

      ⑤ 기해(己亥)박해(1839) : 참수 54, 옥사 60, 배교자 40-50 여 명. /  79명 성인

      ⑥ 병인(丙寅)박해(1866) : 대원군 8-2만 여 명 희생.  24명 성인

     ※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