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한 국 교 회 사

하나님아들 2020. 8. 27. 09:52

한 국 교 회 사

 

 

 

1: 서론, 한국의 전통종교와 종교적 심정

 

역사 : historical fact. 사람이 살아온 발자취,

(수많은 사람이 대상이 아닌 특별한 인물의 사건, 사실)

사관 : 역사를 보는 눈

ex. 일본 천왕 항복 : 2차대전 종결

1) 일본인 : 일본역사상 가장 수치

2) 한국인 : 역사상 가장 좋은 날

사관 : 1. 순환 사관 : 역사는 반복된다.

- 그리스와 로마사람의 Hellenism 역사관 - ex. 힌두이즘, 불교(윤회)

윤회 : 전생, 내생, 현생 - 전생의 원인으로 현재 우리가 이렇게 산다.

잉과 응보, 권선징악 - 착한사람은 복을 받는다.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왜 복을 받는가? - 히틀러....

그 사람이 전생에 선해서 지금 잘산다. 지금 못살면 내생 못산다.

문제점 : 책임의식이 없다. 위기의식이 없다.

2. 진행사관 : 역사의 시작이 있고 종말이 있다.

- ex. Hebraism(유대교, 기독교-역사시작은 천지창조,

끝은 예수님이 오셔서 종말 맞이 할 때)

역사는 시간의 단위, 영혼, 잠깐 있는 한 토막.

칼빈 제자 질문 하나님 창조전 무엇하셨나? 그사람 위해 몽둥이를

준비 - 역사 질문할 필요가 없다.

고려 은단 회사의 'Jesus loves you' 광고

- 어려운 행동이었다. 타종교는 안살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

지하고 과감하게 행한 것.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 : 내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향해 나간다.

위기의식 : 종말의 때가 있다. 오늘 저녁이라도 내가 불려 갈 수

있다. 내가 죽는데 남을 모함하고 죽일 수 있는가?

예수님의 초림은 왜 거대한 사건인가? 예수님이 영원히 역사속으로 들어오셨기

때문. 예수님 오시기 전을 주전(BC)로 분류.

ex) 이슬람 : A.D 622년을 기준으로 분류,

--> 그러나 세계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양분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통해 당시 역사 보여줌.

사도들의 순교: 베드로는 네로 박해시 거꾸로 십자가로 죽음

바울은 참수형, 목베임을 받고 순교. 교회의 시작

교회의 역사 : A.D. 예루살렘의 작은 마가의 다락방.

디아스포라의 퍼짐.

교회란 : 신약엔 교회, 구약땐 회당 - 회당엔 유대인만 들어감, 교회는 이방인포

함 회당은 동질적, 교회는 이질적 사람모임

ex) 교수님 유학때 교회 모습 : 의사. 지역, 유학생만 모이는 교회

- 이것은 교회 아닌 향우회다.

- 여전히 회당에 머물러 있는 교회모습.

- 지역 다른 부목사를 세워야한다.

예수님의 교회 설명 말씀 : 수가성 마을 여인 마남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사마리아와 앗수르 사람과의 혼혈)

유대인 남자 + 이방인 어머니 -> 유대인

이방인 남자 + 유대인 어머니 -> 이방인 어머니를 통해 교육영향

* 마태복음 족보중 4명 이방여인 : 다말, 라합, 밧세바, ,

우리나라 몽고족이 우리 여인 강탈 : 고국 돌아오면 오히려 받아

주지 않음 - 환향녀

* 예수님이 사마리아지방 감 : 지역, 종족, 남녀차별, 전통.

직업장벽(예수님은 목수, 율법선생, 여인은 천한여인, 여인이

변해 최초 여전도사 됨)넘음

==> 이것이 교회다. 어떻게 교회가 장벽을 벗어 버렸는가를

배우는 것이 교회역사이다.

ex) 이화학당서 교수님 뒤로 들어와서 뒤로감 여인 못봄

* 선생님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배할 때가 오나니, 그때

는 진리와 성령으로 드려야 한다.

 

--둘째수업 2005.9.15

* 사마리아 여인 대화(4) : 예배의 장소(Where)-정적

예배의 시간(Time)-동적

==> 신령(spirit) 과 진정(truth)

ex) 예배를 11시 드린다 : 하나님과 나와 성도간의 약속 ==> 시간이 중요

* A.D 70Titus왕이 예루살렘 포위하여 함락. 제일 먼저 성전 불지름

JS 지붕은 금은동을 만들어졌었다. 해가 뜨면 온 예루살렘이 반사된 빛을 보

고 모든 사람이 예배

불사르니 금은이 녹아 기둥뿌리까지 전달, 이것 캐기위해 예루살렘 뿌리가지

파해침

* 신학으로 오면서 성전이라는 장소의 계념은 없어진 것이다.

* 교회당, 성당, 병원, 수도원, 앰블런스의 공통점 : 십자가 - 군인에게 포격하지

말라는 이유

 

* 6.25때 미군이 북한의 십자가 있는 곳만 폭격 : 인민군들이 예배당과 성당에 숨어들어 그곳을 폭격

* 일류역사상 큰 혁명 : 볼세이 혁명-그 이후 예배당을 폐쇄한 결과가 있었다.

고의 성직자들을 처형시킴. 주일 없애기 위해 혁명력(

주일을 10일 단위로 나눔) => 혁명때 많은 사람들이 죽

고 있었는데 예배당에서는 귀족들이 잘먹고 하여 방탕한

모습 보여줌

* 미국에는 역사적 유명한 예배당이 있다.

ex) 무디 예배당 - 그땐 수 많은 사람들이 넘쳤었다. 그러나 지금은 소수의 사

람만이 모여 예배드린다. 예배당을 파는 현상도 일어난다.

예배당은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하는 곳, 장소가 아니다.

* 교회 근처에 사람들이 자살하여 죽고 있다. 예배당에서 잘 살아서 감사합니다라

고 기도한다면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것일까? 예배당 지을 돈으로 어

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옳을 수 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닌 선교와 구제에 힘써

야 한다.

* 선교 50%, 구제 50%가 적당하다.

ex) 동부명성교회 : 65% 선교와 구제 - 사찰과 성가대예산 없게 함

 

* 로마제국이 기독교 박해 이유 : 황제숭배 반대. 로마제국의 통제를 위해 황제상

을 세우고 절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십계명을 지키기 위해 절하지 않음,

자가형과 맹수의 밥이 되게 했다.

- 군대를 가지 않았다 :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초대

교인들은 그것을 지킴. 군국주의 로마제국은 그것을 당연히 허용하지 않음

- 몰래 숲에서 예배, 성찬식때 살과 피등으로 야만인으로 오인

* 콘스탄틴이 꿈을 통해 (크리스토스 문장)으로 전쟁에 승리를 하여 그리스도 호

의 정책 : 십자가형 폐지, 주일을 공휴일로 선포(모든 공공기관, 학교), 모든 교

회 예산에 대해서 면세, 성직자 병력 면제, 각지에 거대성당

Lord's Day (주일)

국가 교회 등장, 니케아 공의회때 아리우스에 의해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은적

있다고 주장(예수님은 피조물), 신성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 인성은 사람과 동

일 본질, 교회의 분열이 제국의 분열이 있을 수 있으니 둘중 한개를 통일 할것

을 왕이 요청 - 제독권 교회가 되면서 영적으로 교회가 죽어감, 여기에 반동으

로 일어난 운동이 수도원 운동,

 

 

 

0 32 70 100 313 500, 590 1000 1500

 

 

 

 

* 콘스탄틴이 왕이 되면서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로 옮기게 됨

* 콘스탄티이 죽은 수 제국이 반으로 나뉘고 로마중심의 서로마 제국과 비잔티움

중심의 동로마 제국이 생김 -> 1054년 공식적으로 5대교구(로마, 안디옥, JS,

잔티움, 알렉산드리아)중 동쪽 지역은 회교도에 의해 죽어가고 서방은 로마에 의

해 견고하게 되어 서방이 기독교 왕국을 이끌어가게 함

* 서방 분열 원인 : 인종, 언어, 종교가 다름

filioque 논쟁에 의해(니케아 신조에 성령이 아들에게서) -

삼위일체 강조하기 위해 서방교회가 논쟁을 벌임

성만찬 때 유교병을 쓰는가? 무교병을 쓰는가?

-예수님은 무교병을 사용했으나 동방교회는 꼭 그것을 사

용할 필요가 없다고 함

사순절(Lent)기간에 육식을 하는 문제

ex) Ash Wednesday - Lent 시작일 -> 부활절 전 40

==> a.교회는 육식을 하지 않고 채식을 함

b.검은계통의 회색옷, 사치품 안함

c.혼배성사를 하지 않음(미국에서는 목사와 신부

에 의해서만 주례, 불신자는 법적 허가)

- 결혼하지 않는다.

d. 서방은 고기 버터, 우유, 치즈 먹어도 된다고함

e. 성직자(교황추기경대주교주교신부수녀)결혼불가

- 동방은 결혼은 가능하나 일생을 교회에서살것

f. 성직자 수염 기르는 문제 - 동방은 길러야한다

* 1500Protestant 종교개혁으로 세 개의 교회로 나뉨

* 개신교를 통해 denominations라는 교파가 생김

구약 39권이 A.D 90년에 Jamnia에서 정경결정

신약 27권을 A.D 395년에 carthafe에서 정경결정

마태마가누가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다. 100년에서 395년 사이에 초대교회는 베드로 복 음서와 도마복음서등은 교회에서 채택하지 않고 27권 채택

ex) 농부 밭을 갈다가 다이아몬드 찾았다. 다이아몬드는 그전에도 다이아몬드

기계로 검사후에도 다이아몬드. 성직자만이 천국의 열쇠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 교회가 성경으로 채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어거스틴)

==> 루터는 오직 성경으로만 (기독교에 대한 판단 기준은 성경)

- 마리아는 죄가 없어 예수님 수태했다고 여김, 예수님 낳은 후 요셉과 함

께 살지 않았다고 로마카톨릭은 말함. 마리아도 죄가 없기에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했음, 이것을 받아드리지 않으면 교회에서 파문되고 교회 못

오고 영혼 말라서 지옥에 가게 된다 함

- 루터는 누구든지 성경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함

- 성경해석 기준이 모두 달라 문제

ex) 밥티죠(세례) 를 세례로 여길 것인가 침례로 여길 것인가? 장로교는

칼빈의 예정론으로 이미 그 사람을 구원했다고 했고 누구나

하나님 믿기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했고 침례교는 꼭 침례를

해야한다고 하여 교파가 나뉨, 예정보단 개인적 신앙의 구원을 강조

하여 감리교와도 교파 나뉨

==>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닌 진리가 중요한 것이다.

* 구라파의 기독교가 미국에 건너하면서 1789년 헌법에 의해 국가와 종교가 분리

에큐메니컬 운동

* 어원 : 이이쿠메내(천하) - 교회 일치 운동,

melting pot(유럽아닌 하나의 미국문화)는 실패

salad Bar(미국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면서 그리스도를 세계에 증언하

고 세계를 위해서 봉사하자)

* WCC, NCC 등으로 연합운동 전계, 2000년 연합운동

 

--셋째수업 2005.9.22

 

한국사를 어떤 사관으로 볼것인가?

1. 선교사관

* 백낙준 박사(전 연세대총장) -한국개신교사1832~1910

-> 미국에서 쓰다 보니 거의 모든 것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함(선교사의 입장), 한계

- 한국사람의 자료는 거의 쓰여지지 않음

* 밈경배교수. 민족교회사- 한국교회사의 훌륭한 책

-> 책이 너무 어렵다. 인용문에 한자가 너무 많다. 선교를 받은 한국교회의 입장

- 한계 : 한국사람들은 글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글로 남아 있는 것은 선교사의 글뿐.

선교사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입장이 표현되었다.

민족교회란 말에서 교회 앞에 민족이란 말을 쓰는것은 국수주의의 우려가 있다.

ex) 독일 민족교회, 일본 조국교회는 한국 침략을 교회가 정당화

* 주재용의 민중교회사: 가장 한국 기독교회의 민중교회사

-> 가난한자를 대상으로 미준을 정의 (어느 정도가 민중인지 불분명)

- 한계 :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닌 민중들을 위해 쓰자(결국 영웅으로 돌아감)

ex) 동학란을 생각하면 최재우에 대해서 쓰여야 한다. 전북 군수가 민중 늑탈해서 혁명일어 남, 전봉준이 이끔 -- 결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다.

* 실증사관. 이만열, 한국기독교사』ⅠⅡ : 어떤 역사를 쓸 때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쓰자

-> 저자가 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일반역사를 전공했다고 해서 교회사 쓸수 없다.

ex) 1907 대부흥운동을 선교사들이 한국교회를 몰 기독사회로 몰고 가기 위해서 행한 것이함

- 역사를 쓰기 위해선 사관과 언관이 필요하다. 언관은 왕이 어떤 표정으로 썼는지를 기록. 사관은

내용을 기록, 보관할때는 5개로 분리하여 장소를 달리하여 보관.

- 토마스목사님이 한국에서 대동강에서 순교 - 평양감사 박기수가 장기를 올렸는데 처음서부터 마지막까지 조선 잘못이 아닌 토마스만 잘못이어서 모든 선원과 목사를 죽였다고 했음(관변자료)

* 섭리사관(구속사관), :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일하셨는가

함석헌목사.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교회, 김교신 선생의 다른 책

1886년 갑신정변(일본을 배경으로한 개화파들이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수구파를 죽임,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끝내고 갈려다가 실패) -> 교회사에선 언더우드가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한 섭리이다.(그때 민영익이 칼 맞고 죽어갈 때 한의사를 고칠 수 없었다. 9월달에 알랜 한국에 들어왔었는데 관원이 치료를 요청했다. 환자보니 손쓸 단계가 아니었다. 위기 순간 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불가능을 믿음으로 기도하여 치료함. 서양약을 먹음. 기적적 치료. ‘당신은 하늘이 날 살리기 위해서 나에게 보내주셨다.’ 고종이 주치의로 임명. 서양의학효력이 널리 퍼짐. 광혜원에서 재중원에서 세브란스로 바뀌게 됨. 역사사관에서 갑신정변은 사건일 뿐이나 섭리사관에선 참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중요한 사건

-> 한계 : 하나님의 섭리를 역사가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쓰여질 여지가 있다.

무리하게 억지로 역사를 쓰여질 수 있다.

ex) 그 사람을 내가 미워하면 내가 역사에 쓰지 않으려함

1860년 남북전쟁시 북의 링컨의 노예재도를 폐지하려는 입장과 남의 반대입장간 전쟁, 북쪽이 북 북장로교회, 남쪽이 남 장로교회로 나뉘게 됨. 노예제도를 북 이냐 남이냐에 따라 역사 사관이 다르다. 성경을 근거로 노예제도를 찬성하기도했다.

* 그렇기에 역사가가 누구냐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황사형의 백서 : 물리적인 힘에 의존하여 선교를 하려고 함(군사력, 청나라의 압력)

- 그당시 배경은 죽음이 순간 순간 다가오고 있는 위급한 시간. 이시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시행될 수있는 방법을 찾던중 물리적힘에 의지할 것을 채택

- ‘이나라는 멸망해도 십자가의 피는 영원히 남아있어야 한다’(조정의입장에선 매국노요 반 국가적 존재) -> 천주교를 박해하는 정권이 없어지고 그렇지 않는 정권이 와야함을 말함

- 역사평가에 있어서는 아무리 문제가 시급하다고 해도 성경에서는 악으로 행해선 안된다고 한 다. 목적이 선하다해도 불법적 방법으로 행해서는 안된다.

ex) 샤를먀뉴가 기독교를 전파할 때 세례를 받던지 죽던지 하였다. 야만인들은 말로 안되었기 때 문에 극단적인 방법을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했으나 그것은 잘못되었다. 십자군 운동 때문에 이슬람과

지금까지 원수. 동방정교회 사람까지 죽였다.

* 정하상의 상제상서 : 조정을 설득으로 복음을 전할려고 함

- 효과가 바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한국의 전통종교

* 기독교전 무교, 불교, 유교가 있었다.

1) 무교(샤머니즘, 자연숭배) : 자연 속에 선을 배푸는 선신과 악을 주는 악신이 있다고 믿음

ex) 대학 졸업자 70~80% 가 궁합을 본다. 내 사주를 본다.

의타적이다.(운명이 이미 결정 되있다. 자기 운명을 책임 안짐)

보수성(옛날 것을 새것보다 좋아한다. 새것에 대한 개척의지가 결여된다)

현실 중심적(미래가 없다. 언제나 오늘을 중요시. 미래 계획 안 세움.)

향락성과 오락성이 많다.(노래와 춤이 발전)

  * 그러나 우주관이 같다.(삼층천 사상이 우리와 같다.)

* 기독교는 예수 잘 믿으면 복받는 것이다. 무교는 제액초복(나쁜것을 없애면 복이옴)의 종교다

ex) 기도할 때 주십시오가 많다. 한국교회는 심방을 중요시한다. 담임목사가 와서 아프면 안수기도해 주기를 원함. 수능 앞두고 기도 ==> 무교적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딸만 7

는 것은 무교에선 저주나 기독교에선 축복이다.

2) 불교 : A.D. 372년 중국의 순도가 불교를 한국에 들어옮, 우리의 민족종교가 됨

좋은 영향 : 참선, 사색하는 깊은 생각을 통한 행동, 명상, 자비의 정신, 착한 마음,

적선(積善), 살생금지(생명존중사상, 윤회설), 분명한 내세관(극락과 지 옥), 애국애족의 정신(임진왜란 때 불교의힘), 청빈사상(물질 탐욕), 고해(苦海),

좋지 않은 영향 : 염세주의(인과응보, 운명주의), 미신종교로 전락(제액초복의 종교, ex 심청전 공양미 300), 진취성을 약하게 만듦,

3) 유교 : 공자와 맹자의 도를 따르는 윤리사상,

공자가 죽으면서 살아있을 때 모르는데 죽어서 어떻게 아냐?’- 내세가 없다. 종교아님 신을 폴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으로 본다면 유교는 우리 나라에 엄청난 이데올로기로 정 착 했기에 종교라 할 수 있다.

좋은 점 : 군자학(인간의 도리, 신중행동), 일륜도덕숭상(인간과 인간간에 친분이 있어 야 한다.), 청념절의의 존중(인간이기 위해선 청념하고 절개와 의리가 있어야함),

좋지 않은 점 : 사대사상(독립사상결여, 중국섬김), 노동천시(군자는 노동 안함), 당쟁

(계급차별, 남인과 서인분쟁), 가족중심폐위(모든 것 위에 가족중심, 3년 산소지킴), 계급사상(양반-중인-상인-천민[백정,노비,남사당,기녀, ]) (선비-농사-공업-상업), 상명주의(벼슬), 남존여비의 정신(여자이름없다), 관존민비(공무원숭상), 적서(홍길동전), 문약(文弱)의 백성(병력약화), 산업능력의 저하(노동천시), 복고주의(옛날로 돌아감), 유교도 무속신앙으로 전락(궁합, )

기독교영향 : 천애사상 = 하나님의 사상, 유교의 윤리사상이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에 대한 정립

* 우리나라는 무교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기독교도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

* H. Richard Niebuhr 'Christ & Culture'

'christ against culture'

'christ of culture'

'christ above culture'

'christ and culture in paradox' - 혼합 X, 분리 X, 역설적으로, 세속일교회가

 

셀밴투스 : Jesus is the son of the everlasting father

칼 빈 : Jesus is the everlasting son of the father

결국 셀밴투스를 아리우스 주의라하여 죽

'christ the transformerof culture' - 문화의 변혁

ex) 섭섭이를 딸이름에서 은혜로 지음

* William E. Hocking : Radical Displacement(급진계혁주의) - Exclusivism(배타주의)

syncretism(혼합주의) - 기존의 문화와 혼합 -Relativism(상대주의)

마태오리치는 중국문화에 대해 경악하고 제사허용

중국의 천해가 하나님이라 하여 함께 가려함.

보유론(유교를 보충하는 기독교)

도미니칸이 예수회의 제사를 금지시킴

Reconception - Transformationsm(gredual) 바람직

새로운 개념을 넣어줘야 한다.

ex)여자도 남자와 동일, 애만 낳는것 아님, 은혜로

 

Paul Tillich The form of religion is culture

In the culture act, therefore, The religion is substantial;

In the religious act, the cultural is formal.

* 물질문화(material culture) - , , -> 쉽게 변한다.

사회문화(social culture) - 관습, 전통 --> 쉽게 변하지 않는다.

정신문화(mental culture) - 종교, ---> 변하지 않음

ex) Thailand 선교

몽고선교 47년에 한사람도 세례 X중국 morrison 한자성경만들었으나 한명도 세례 X일본도 저조한국은 28년만에 총회, 20만명, 해외선교 --> why?

1831-미국 회중교회

1849년선교

1840 - 미국 장로교회

1858 - 18년만에 첫

27년만에 첫 세례자 Nai chune 여성

 

한국교회 성장의 10가지 이유 --> 시험문제

1. 국교가 없다.

 

* 알렌이 한국에 들어와서 하지 말라는 기준은 무엇이었는가?

물질문화는 보존해도 괜찮다.

사회문화도 어떤 것은 보존해야 한다.

ex) 한국은 고개 숙여서인사. 외국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첩 두는 일부다처제의 문화는 폐

지해야 한다.

정신문화(종교문화)는 꼭 버려야 한다. - 종교를 인정하게 된다면 종교 다원주의가 되는 것이다.

- the truth, the way, the life(예수님)

인간()을 훼손하는 문화는 버려야 한다.

ex) 일부다처제, 노비문화, 장례문화(손가락잘라 친분표시),

 

 

 

 

 

 

 

1 편 로마 가톨릭 교회의 한국선교

1 장 가톨릭 선교이전 기독교와의 접촉 가능성

 

경교의 전례

1. 언제 - 372

2. 어디서 - 중국

3. 누가 -

네스토리우스 알로펜이 중국 선교시 태종 환영

* 삼위일체(trinity)

Θ = X = 성령 X는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시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 -> 네스트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라함. -> 시릴이 이의제기하여 네스 토리우스가 정치적 싸움에 져서 애굽망명 -> 제자들이 이란등에서 수도원 교육, 해외선교

-> 중국에 전례되어 경교로 이름 바뀜, 200년간 부흥

(1625년 농부 땅 파다 큰 비석인 경교비를 발견)

-> 850년에 나라의 박해로 자취 감추게 됨

* 우리나라에 영향 주었을까? - 신라, 나당연합군

불국사에서 돌로된 십자가가 발견, 불국사의 관음보살상 얼굴이 성모마리아와 비슷하다.

- 그러나 너무 부족한 자료이다. 경교 한국 전래는 희박

* 이집트의 돌무덤에 십자가 있는 교회 : 단성론

- 성육신시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예수님은 지상에서 신성만 있었다. 모든 이적 가능

(에디오피아 교회, 시리아 교회)

고려시대 때 기독교와의 접촉 가능성

* 몽고가 이슬람 침략 : 로마바티칸은 십자군이 하지 못한 이슬람을 몽고가 초토화하니 기쁘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했다. 그래서 몽고에 사절단을 미리 보냈다. 이 사람(프란시스칸 수도사 루브룩)이 중국을 통해 압록강까지 갔다. 그래서 강 건너에 Caulei(고려) 라는 나라가 있다고 서구 세계에 보고했다. (caulei->coree->corea->korea)

천진암 :한국 초기 가톨릭교 신자였던 이벽(李檗권철신 등이 최초로 가톨릭 교리를 강론하던 가톨릭교 성지

2 장 선교이전의 가톨릭 교회와의 접촉

임진왜란

* 카톨릭 extreme unction(종부성사) : 일본에 스페인 출신 그래고리 세스페데스가 신부로 가게됨,

그가 한국에도 옴. 그때 선교의 가능성은 희박, 웅천에 머무름, 웅천은 주기철 목사님 고향,

서양학문에 관심있어 이승훈과 함께 서학서적을 얻기 위해 중국에 가게 되었는데 천주교를 접하고 믿게 되어 한국와서 선교를 하게 됨. 스스로 신부가 되었다가 잘못을 알고 중국에 정식 신부를 요청. 천주교 교리요목을 정리한 [성교요지]를 지필했다.

조선에 첫발을 디닌 가톨릭 성직자 - 세스페데스

임진왜란때 소서행장의 종군신부 세스페데스

병자호란

* 10만명 청국

* 청나라의 침입때 볼모로 갔던 소현세자는 북경에서 독일인 예수회 신부 Adam Schall과 친교를 맺음

유학자들의 서학 접촉

기호지방의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계열의 권철신,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이가환, 이벽, 이승훈등 강학회를 열고, 교리를 연구하고 주일준수, 노동금지, 아침, 저녁으로 기도, 육식금지일

 

천주교 오해 : 무군무부의 종교 - 부모와 나라를 무시한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종교

당시로선 왕보다 더 높은 존재가 없는데 천주교는 왕보다 교황이 높고 교황보다 천

주가 높다고 함 - 한 시민으로서 왕보다 교황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 반역행위

기독교는 기존의 절대 왕정에 대한 상대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순교 : 진리를 따라 죽는다 -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다니엘, 주기철)

아버지 돌아가시면 3년동안 산소지킴 : 임금 어명보다 더 귀하게 여김

ex)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 죽은후 아버지의 묘를

남쪽에 모시고 잘 모셨다. 한강을 건너가야 하는데 모든 배를 역어 가마를

타고 화성까지 가게 했다. 행차시 수백명이 함께 했다. 일년에 몇 차례를 가

서 아버지의 넋을 기림, 하루는 송충이가 아버지 묘의 나무 잎을 먹음. 괴씸

하다하여 송충이를 잎으로 씹음 -> 조선사람 효의 극치, 륭릉, 건릉

임금진 수라상을 백성들 힘듬을 이유로 없애고 밥, 간장, 시래기국을 먹음. 내가

죄가 많아서 나라에 재앙이 임했다.

제사 거부로 조선기독교가 이 효를 거부함. - 네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3 장 한국천주교회의 창시

1. 이승훈의 영세

한국기독교 시작의 분기점, 17842(당시 27) 북경에 있는 북성당에서 예수회 소속 그라몽으로부터 영세를 받음

2. 초기 천주교의 태동과 가성직시대

1785년 서울 명동의 역관 김범우 집(오늘의 명동성당)에서 예배드림

3. 을사추조적발사건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이 발견되어 압송됨

한국 천주교의 특징한국 스스로 구도를 한 종교다. 학구적 호기심에 의해 시작된 종교다.물리적 힘에 의해 교화하려 했다. 성사(Sacramental)적 교회이다.- 예전을 중요시한다. 무군무부의 종교로 오인받아 은둔적 교회로 자리잡았다. 우리 민족 최초로 참 하나님, 참신을 알려주었다.Suffering 교회로 시작되었다.민족 주체의식과 민족전통을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4. 초기 천주교회의 배교자들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

1. 한국인 자신의 구도에 의해서 시작한 교회(자생적인 교회, 선교사 X)

2. 학구적 학구심에 의해 시작된 교회는 상부 지식층과 관리들과 결부하여 접촉하게 됨

* 정조는 아버지가 누명쓰고 죽은 것을 보고 마음 속에 한을 품음, 절에서 세상과 벽을 쌓고 무술 을 연마했다. 때가 되어 원수의 목을 베어 아버지 묘에 갔다. 효도가 끝남. - 보복의 악순환

* 한국민족이 가지고 있던 악한 보복의 체계를 무너뜨림

* 헌종 때 변화기환, 철종 때 사화교난, 고종 때 병인교난으로 많은 천주교인 죽음

3. 물리적 힘으로 선교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 남현군묘소사건 : 목적을 위해서 수단이 정당화됨 - 패롬이라는 신부가 보길 억울하게 9명의 신부

가 죽음을 보고 어떻게 하면 조선에서 선교의 자유를 얻을까 했다. 한국사람의 효가 절대적임을 알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현군의 묘소를 파해쳐서 그 뼈를 확 보하면 나라와 협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묘를 도굴하다 큰 돌이 발견되

도망가다 한명이 붙잡힘. 사건이 조정이 보고되고 대원군이 알게 되어 천주교를

더욱 박해, 천주교 박해의 정당성 확보.

4. 성자적(sacremental) 교회로 정착했다. : 성례적 교회 <-> 성사적 교회

* 예전적 교회는 성경이 중심이 아닌 신부가 중심인 교회이다. 신부 없으면 예배, 고해성사 못함

* 성서 해석을 안함

5. 역사적, 몰민족적, 몰문화적

* 진산사건, 황사영백서.. --> 은둔적, 도피적 지하신앙화

6. 수난당하는 교회(suffering church)로 규정됨

* 3대교회의 특징 : R.C=suffering E.O=resurrection Protestant=incarnation(낮아짐, 겸손)

* 공식적으로 1, 비공식적으로 3만명 순교.

* 1882년 한미조약 이후에 들어온 개신교와 대비

7. 한국민족이 처음으로 제3의 문화와 만남.

* 전통적으로 중국(1) - 한국 - 일본(2) 의 교류.

* 서구(3)문화 접촉으로 비로소 세계문화와 접촉 --> 이승훈세례는 이 접목의 시발

조문모 신부의 순교서인과 남인의 청치적 싸움이 천주고 탄압까지 이르자 신해교난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도 한국에서의 신부에 대한 절신한 요구로 최초 한국인 신부 중국인 조뭄모가 왔다. 그런데 시파이 서학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져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죽게 되었는데 여기에 주문모신부도 포함되었다.

* 금속활자로 각종 서적 출판, 신문발간.

* 동양의 형이상학적 문화가

8. 4천년 조선족 사회에 처음으로 참 신(하나님), 인격적 하나님 소개

* 무교적 신앙에서 참된 신앙으로

 

4 장 수난속에 생존하는 천주교회

1. 신해교난 - 무군무부의 종료로 오인된 천주교회

신부들의 왕보다는 교황에게 복종하라는 가르침과 조상제사 거부문제가 관건

진산사건이 발달이 됨 - 윤지충이 신주를 즉시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폐지함, 모친의 사망시 시신에 절하지 않고 위패를 모시지 않음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선 천주교회사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됨

2. 신유교난 - 최초의 성직자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순교

천주교에 우호적이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나이에 등극하면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되면서 정치적 이유로 시파 박멸

새남터에서 조선에 잠입한지 6년만인 1801년 참수되고 양쪽귀에 화살이 꽂힌 채 머리가 효수되었음

3. 황사영의 백서 사건 - 선교방법론의 문제

조선조정에서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핍박이 북경에서 있자 주교에게 보고하여 이 박해를 면케하고자 폭 62, 길이 38cm의 흰 비단에 가는 붓으로 장장 13천자에 이르는 놀라운 편지, 1801년 신유교난 때 반역모반의 죄를 쓰고 능지처참에 처해졌고 가산은 몰수되었으며 그 모친은 거제도에 처는 제주도에 자녀들은 추자도에 유배되는 등 그의 혈족이 무거운 형을 받았다.

 

5 장 조선 교구의 창설과 계속되는 박해

1. 조선교구의 설정

척사윤음 : 이에 그치지 않고 조정에서는 척사윤음을 발해 천주교도 박멸의 정당성을 변명하고 백성들이 사교의 유혹에 빠지지 말 것과 이 도에 빠지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못박음.

조선 천주교회의 2세대인 정하상의 노력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원에 따라 18319월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독자적인 교구로 확정되었다. 초대 조선교구의 주교는 프랑스인 신부 브루기에르이다. 그러나 그는 청국신부 유방제의 방해로 만주땅을 헤매다 결국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었다. 뒤이어 18361월 서양인 신부로서의 최초로 모방 신부가 삿갓을 쓰고 서울에 잠입, 이어 앙베르와 샤스탕이 잠입에 성공하였다.

2. 계속되는 박해 - 기해교난(1839)

풍양조씨와 안동김씨간의 권력싸움으로 헌종을 섭정하던 순원왕후가 천주교도의 포고령인 사학토치령19394월에 반포하여 시작됨

정하상등과 앙베르, 샤스탕, 모방등이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함

3. 정하상의 상재상서 - 최초의 호교문

천주교가 사학으로 인식되어 수많은 무고한 인명이 살상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진리를 알지 못하고 곡해하여 탄압을 계속하는 조정에 대해, 천주교의 원리를 설명하며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최초의 호교문, 황사영의 백서가 국외의 물리적 힘에 호소하였다면 정하상의 상재상서는 자국안에서 진리를 일깨움으로써 조정 스스로 박bbv 해를 거두어주길 바람

4. 한국인 최조의 신부 김대건의 순교 - 병오교난(1846)

페롱 신부 천주교 박해로 베르뉘 신부가 순교하자 조선에 있는 페롱을 살리기 위해 로즈가 이끄는 프람스 군함이 왔는데 그것이 조선약탈로 이어져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천주교 박해는 더욱 컸다. 페롱은 오스트리아 상인과 함께 대원군 아버지의 묘를 도굴해 그것을 담보로 대원군과 협상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더욱큰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당함

5. 병인교난

고종을 섭정하던 대원군때 사색당쟁으로 국가의 힘이 쇠진되고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하자 민란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천주교 탄압실시, 7, 8년이나 계속되어 베르뉘 주교9명의 프랑스 신부들이 체포되어 처형됨, 탈출에 성공한 리델 주교는 로즈 사령관에게 알리고 중무장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사고에 보관되어 있는 사료들을 약탈,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선과의 전투를 벌여 병인양요가 일어남.

6. 남연군 묘소 도굴 사건 - 또 다른 박해의 원인

페롱 신부는 오페르트라는 상인과 함께 100여명을 동원하여 천주교를 박해하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함

그 이후 18716월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조선과 교전이 벌어져 불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함. 이 사건을 듣고 미국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나타나 조선군과 교전을 벌임 - 신미양요

이후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 강화

7. 천주교회의 문서사업 - 한글보급의 공헌

일반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된 교리서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번역서 - 이가환과 최창고가 담당하여 1802<성경직해>, <성경광익>, <성교절요>, <성교요리문답>등이 번역

조선인 교리서 - 이벽의 <성교요지>, 정약종의 <주교요지>, 김건순의 <주교요지>

앙베르 주교는 태평동에 2대의 인쇄기 도입하여 교리서 배포에 노력

문법책, 사전 - 뿌르띠에의 <조선문법>, <라틴-조선-중국어 사전>, 다블뤼의 <조선어-라틴어 사전>, 리델의 <조선문법책>, <조선어-프랑스어 사전>

천주실의 :중국 명()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한 예수회 소속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利瑪竇)가 한문으로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

한국서적 번역 - 홍종우와 로니교수는 <춘향전>을 번역하여 <프린템프 파르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신문발간 - 1906<경향신문>

한국천주교 전래의 의의

한국의 천주교회가 한국인들의 구도에 의해 시작되고, 고난의 세월속에서도 자력으로 국내에 교회를 세웠다는 점은 세계포교사상 하나의 기적이다.

 

 

결론 : 천주교는 한국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게 만듬

--> 왕권의 상대화, 사회질서에 대한 거부(조상제사거부 등), 종교의 다원성 인정, 인간평준화(차별문 화 거부), 봉건질서를 거부하고 근대사회로 넘어오는 길목 마련,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이의 길 틈.

* 천주교는 신학생중 25% 만이 신부가 된다. -> 신부 부족 사태가 심하다. 신부는 남자만. 1. 신부는 재산을 가지지 않는다. 2. 신부는 순결한다. 이성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 결혼 안했기에 어디든지 갈 수 있다. 3. 순명한다.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신부는 주교에게 주교는 대주교에게 대주교는 교황에게.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용어조정 : 이씨조선->조선왕조/ 민비->민왕후 혹 명성왕후(황후)/ 일제 36-> 35(1910. 8. 29 ~ 45. 8. 15)

1927년부터 성서조선에 기고한 것 정리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50)

비기독인 - 기독인 - 무교회주의자 - 퀘이커(society of friends) - 종교다원주의

 

* 1887년 예수셩교젼서 : 한지로 접어서, 순수한 우리나라말을 많이 씀, 성인 및 부녀자들 및 공부 잘 못한

사람이 썼다. 소망을 바람으로, 긍휼을 가련으로, 안식일을 넘*사밧일 이라 표기

 

2 편 개신교의 전래와 수용

 

1 장 선교사 이전의 개신교와 접촉

21. 조선에 처음 온 개신교인들

1) 벨테브레 - 1627(인조 5)에 전라도 해안에 표착하여 우리나라에 처음 왔으나 개신교 신자라는 명확 한 증거가 없다.

2) 하멜 -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인

벨테브레 다음으로 1653(효종 4) 동아시아의 교역을 위해 스파베 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은 <표류기><한국에 대한 기술>을 저술하여 한국을 유럽에 널리 소개함

3) 맥스웰과 홀

1816(순조 16) 영국군함 올체스터호의 선장 맥스웰과 라이라호의 선장 홀은 한국의 서해안 일대를 탐사하고 해도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한국에 왔다가 마량진 첨사 조대복에게 한문성경 한 권을 주고 감(성경을 손에 쥔 최초의 한국인)

 

2. 조선에 처음 온 개신교 성직자들 - 선교의 문을 두드린 사람들

1) 칼 귀출라프의 선교여행

영국 군함 로드 앰허스트호를 타고 서해안 백령도 근처 섬에 상륙하여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선교사가 됨, 주기도문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함, 감자씨를 보급

* 성경과 비누 보급 - 육신도 깨끗하게

2) 알렉산더 윌리엄슨의 정지작업

윌리엄슨은 한국선교에 관심이 많던 토마스를 성서공회 직원자격으로 일하게 해주고 1865년 한국을 방문하는 그에게 한문성경을 다량 제공해 줌. 한국인들의 교역지인 고려문에서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탐지하고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한문성경을 나누어 줌

존 로스와 존 매킨타이어가 만주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 줌

3)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순교 -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몸을 싣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박춘권의 칼에 순교함

한편 박춘권은 토마스 목사가 죽기직전에 건네준 성경을 읽고 신자가 됨

* 제너럴 셔먼호가 한강에 온 것은 잘못이다. 썰물로 배가 좌초, 배가 불에 탐, 배에서 나오는 사람을 모두 포졸들이 죽임, 토마스 목사님이 성경 여러권을 품고 강물에 뛰어듦, 박춘권이 성경을 강에 뿌리고 목사를 죽임. 박춘권이 성경 가져와 읽고 회개, 반주교회 영주. 박영식이 성경 벽지로 바름, 예수 믿고 남장로교회 윌리엄 라젤스의 조사가 되어 성서번역위원회가 됨. 영향으로 평양이 부흥

한국 개신교와 성경과의 관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한국에 온 토마스 목사는 썰물로 배가 좌초되자 박춘권에 의해 순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살인자 박춘권에게 준 성경이 그를 변화시켜 한국 개신교의 시작을 하게 하였다. 또 빠른 개신교 전래와 더불어 한국 성경 번역이 되어 전국적인 개신교 선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 평양은 최고 미인이 있던 유흥의 도시였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님의 순교의 피로 그 땅이 변했다.

 

 

3. 외지에서 입교한 한국인들

1) 만주에서 입교한 의주 청년들

평안북도 의주 청년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등이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한국어 선생이 되어 매킨타이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첫 한국 개신교 신자가 된 사건

한편 서상륜은 위독한 열병을 앓았다가 로스로부터 세례를 받음

2) 만주에서의 한글 성경번역

로스는 의주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1877<한국어 입문서>를 출판하였다.

1881년 최초의 개신교 문서인 <예수셩교문답><예수셩교요령>이 발간됨

우리글로 된 최초의 성경 - 1882<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

뒤이어 <예수셩교 요한니복음젼셔> 출판됨

신약전체번역은 1887<예수셩교젼셔> 5천부가 심양의 문광셔원 활판으로 간행됨

- 아직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외지에서 성경번역이 이뤄진 것은 세계 선교역사에 기록적인 사건임

* 1884년 알렌이 성경책 가져옮 -> 1876년 한국 개신교회 시작(세례교인 시작)

3) 권서, 매서인의 활동

권서란 성경책을 갖고 다니면서 사 보라고 권면하는 사람들을 일컬음

매서란 성경책을 팔고 다니면서 전도하던 사람들을 일컬음

만주에서 번역한 성경을 백홍준은 한 장씩 뜯어 긴 끈을 만들어 반입에 성공하여 요리문답반을 운영함.

서상륜은 188210월 영국성서공회에 의해 한국 교회사상 최초의 권서로 임명됨, 솔내에 예배당을 정하고 한국 개신교회의 첫 번째 교회가 됨, 언더우드가 창설한 새문안교회의 첫 교인, 세브란스 병원의 전도사

4) 일본에서 입교한 이수정과 성경번역

이수정은 일본에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갔을 때 진전선의 인도로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하고 미국인 선교사 녹스에게서 동경 노월정 교회에서 세례를 받음

그후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선교사가 들어와야 된다고 판단하고 미국 선교부에 선교사 파송을 호소 - 녹스 선교사는 이수정의 호소를 한국의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이라고 말함

이에 크게 자극받은 주일본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는 성서번역을 실시하여 현토성서(한문성경에 토를 달아서 읽기와 이해를 쉽게 한 것)라는 이름으로 <신약성서 마가전>188411월 출판,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신약마가젼복음셔언히>라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요코하마에서 1천부 발간됨

 

2 장 선교사들의 내한

1. 선교사 내한 이전의 정지작업

1)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의 체결

운양호사건이후 청나라 이홍장의 중재로 강화도조약 체결 - 중국이외 처음으로 외국과 맺은 조약

* 불평등 조약. 힘이 지배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힘없는 민족의 수난

* 당시 조선의 내정은 청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조선과 일본의 공식적 국가적 조약이기 때문에 청으로

부터의 벗어남을 의미

2) 한미조약의 체결

데이빗 맥 윌리엄스선교 잡지에 게재된 한국 선교의 호소문을 읽고 깊은 관심 갖게 됨. 북장로교회 해외 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에게서 한국 선교에 대한 가능성을 묻게 되었고, 선교사 두 명의 2년간 생활비 5천 달러를 내놓겠다는 편지를 통해 1884년 봄 헤론을 임명. 헤론은 일본에서 기다리다 18856월 입국.

셔먼호의 보상과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미국 동양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소속군함 5척을 이끌고 강화도 포격을 가함, 18825월 한미 두 나라 대표들은 제물포에서 김홍집과 슈펠트간의 역사적인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

* 미국과의 공식적 관계 시작

3) 감리교회 선교의 효시 - 가우처

매릴랜드 주 볼티모어 가우처대학의 설립자인 가우처의 편지와 2천달러의 도움으로 1884년 목사이며 의사인 스크랜톤과 그의 모친 메리 스크랜톤,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임명됨

4) 장로교회의 선교를 가능케 한 데이빗 맥윌리엄스

선교사 두명의 2년간 생활비 5천달러를 내어 놓아 헤론이라는 젊은 의사가 한국최초의 선교사로 임명됨

* 이 사람 때문에 한국 선교가 가능. 한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

2. 첫 선교사 알렌의 입국

1885광혜원’(후에 제중원으로 개명)이라는 진료소를 개설, 이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의 전신

--> 광혜원은 알렌이 세운 최초의 서양식 진료소로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이다.4 v

3. 언더우드의 입국

안수 받은 목사 선교사로 한국에 처음 발을 디딘 사람

알렌이 갓 시작한 제중원에서 일하는 것을 한국에서의 첫 사역을 시작하였다.

* 인도가려 했으나 막혀서 한국으로 오게됨.

* 처음 한국 와서 고아원(사회사업) 시작

1648westphalia Treaty(웨스트팔리아 조약) : 그 지역의 종교로 통일, 한 지역에 로마교회와 프로테

스탄스 함께 공존 가능. 아버지의 종교를 그대로 따를 수 있다.

-> 종교 복수 주의가 생김.Religious Pluralism

A

B

The Established Church(국교)

Europe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은 국가형 교회)

* 단일 문화권 - 문화적 안정, 갈등 없다.

주민 전체가 교인이 된다.

교회가 생명력 잃고 형식적

Denominational Church

America - 1789 헌 공포 st/ch

(교파형교회)

* 다양문화 - 300개의 교파, 종교 복수주의

문화적 혼란

경쟁적 체제, 교회 활성, 성장

* 한국 교회가 미국의 교파형 교회가 들어왔기 때문에 성장의 요인이 되었다.

 

3 장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1. 의료선교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하는 일 - 복음화, 문명화, 근대화

제중원은 실업가 세브란스가 15천달러를 희사함으로써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1907년 내한 후 다시 3만달러를 희사해 줌으로 외료진료소와 의학교 기숙사를 건립할 수 있었다.

헤론은 이질에 걸려 내한한지 5년만에 순직하고 외국인을 위한 묘지로 양화진이 책정됨

스크랜톤은 1885년 시월 시병원이란 간판으로 정식 병원개원

남녀 7세 부동석이라는 전통으로 인해 여자 치료소가 시급하여 1886년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독신 여자 간호사 엘러즈가 입국하여 부녀계 사업을 담당 뒤이어 릴리어서 홀톤양이 이어받아 왕후의 시의도 겸함

여자들만을 위한 병원 - 메타 하워드가 세운 보구여관 뒤이어 로제타 셔우드가 담당함

기홀병원 - 로제타 셔우드가 평양에 세운 병원

낙동병원 - 성공회가 1892년에 세운 병원

의학교 - 제중원에서 시작되어 알렌과 헤론이 해부학과 생리학을 가르치고 언더우드가 영어와 수학을 가르침, 1908년 최초로 의사와 간호사가 배출됨

지방의료선교 - 부산에선 휴 브라운부부, 뒤이어 어윈, 이외에도 평양, 선천, 재령, 대구등지로 확대

2 교육사업

1) 언더우드의 고아원

맨 먼저 학교형태의 교육을 시작

이것이 1905년 이창직, 김정식, 유성건에 의해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숭실대학교 - 감 연합으로 베어드가 설립

2) 이화학당

초기 장로교가 복음전도에 역점을 두었다면 감리교회는 교육사업에 역점을 둠

스크랜톤은 이화학당을 세움

* 여성에게 교육 : p305(화학, 한자2000, 역사, 지리)

3) 배재학당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영어교육이 시급하다고 판단, 고종이 배재학당이라 하사

* 남학생을 위해 세움, 배재 중고등학교 대학교로 됨

* 장로교회는 복음전도에 치중, 감리교회는 교육에 치중 200년 후에 보니 장로교회가 3배 성장

기독교 학교들이 한국에 끼친 영향과 공헌

병자와 환자의 과학적 치료

빈민과 고아의 조직적 보호책

미신숭배 감소

어린이 존중

조혼과 혼인습속의 개선

여성에 대한 처우개선

민주주의 사상과 민족의 재평가

학문과 문화교육의 개선과 한글보급

민주적 인간관계와 계급타파

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통해 지식을 얻은 후 알렌의 집에서 몰래 가져 온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읽는 중 기독교 진리에 접하게 됨.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언더우드를 찾아가 성경을 공부하고 세례문답을 마친 뒤 마침내 1886년 언더우드에게 생명을 걸고 세례를 받음

사회복지 관심

알콜과 마약 계몽

근대 과학교육과 필요성 대두

3. 전도사역

1) 한국에서 최초의 수세자 노춘경

1886년 언더우드의 집례로 헤론의 집에서 세례를 받음

최초의 유아세례는 서경조의 아들 서병호. 한편 감리교회의 아펜젤러는 한국에서 최초의 감리교인 세례식을 거행했으니 일본 영사관 직원이다. 한국 감리교인 최초로 배재학당의 학생이었던 박중상이 세례를 받았다. 한국 첫 여성 수세자는 아펜젤러가 주었으나 미상

2) 최초의 교회 설립 - 정동교회(새문안교회)

1887년 최초의 조직교회는 14명의 교인중 2명의 장로를 선출한 후에 세워진 정동교회이다.

* 장로될 준비 안된 자를 세움, 나중 한사람은 타락, 한사람은 중죄인.

* 장로될 기준은 오직 믿음이다.

장로교회 최초의 성찬식은 18851011일 선교사들끼리만 모여 집행되었다. 한국인들과 함께하는 성찬식은 1887년 크리스마스때 언더우드 집에서 이루어졌다.

한편 아펜젤러도 언더우드가 정동교회를 세운지 2주후인 1887109일 정동에 교회를 시작하여 벧엘예배당’(정동감리교회의 전신)이라고 명명하였다.

1901년 감리교회의 무어감독은 한국인 김창식과 김기범을 집사로 안수하여 세례와 결혼주례를 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였으니 한국에서 첫 평신도 목사로 안수 받은 사람들이다.

4. 성경번역과 사경회

1) 성경번역과 사업

이전에 번역된 한글성경이 번역상의 오류와 용어 문제가 있어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구성 위원으로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선임되었고 언더우드가 위원장을 맡았다. 번역위원회는 성경번역의 신중을 기하기 위해 심의과정을 세웠으니

첫째, 선교사들과 조사들이 함께 번역하고,

둘째, 다른 번역자들에게 보여 그들의 견해를 듣고 수정하고,

셋째, 다시 다른 번역자들이 읽고 의견을 개진케하여

마지막으로 한절씩 읽어 가면서 토의를 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표결을 하여 확정짓는 과정으로 진행됨

최초의 신약성경은 1900년에, 구약성경은 1910년에 완역되어 1911년에 신구약성경이 완성됨

이어 1937년 전면적으로 개정되어 개역성경이라 불리게 되었다.

* 언더우드는 학부 때 문학편집부장을 했음. 어학에 뛰어난 재질, 성경, 신문, 잡지, 의학, 교육 영향

* 아펜젤러가 배타고 가던 중 정신여고 학생 구하고 서해바다에 묻힘.

2) 사경회

1890년 언더우드의 집에서 7명이 모여 성경공부반을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1893년부터는 교회지도자들을 위한 상급반과 농한기를 위한 기초반으로 운영되었다.

3) 주일학교(Sunday School)

한국교회 아동주일학교의 시작 - 1907년 서울 연동, 평양의 장대현, 선천의 북, 전주의 서문교회에서 소아회를 조직한 것

한국교회 주일학교 전국대회 - 1913년 세계주일학교연맹의 하인즈 회장과 브라운 총무가 극동지역을 방문하는 길에 한국방문을 계기로

1 차 전한국주일학교대회 - 192111월 서울 승동교회와 YMCA 강당에서

한국주일학교연합회 결성 - 192211월 회장에 오천경, 총무에 홀드크로프트가 선출되어 세계주일학교연합회에 가입함

종교교육부 신설 - 1933년 총회내에 설치하여 정인과 목사가 총무가 됨

주일학교 연합회 출판사업 - <아이생활>

하기아동성경학교 - 주일학교 사업중 가장 괄목할만한 일로 1922년 정동감리교회에서 5명의 교사와 100명의 학생이 모여 시작한 것이 첫모임

5. 찬송가의 출판과 문서사업

찬미가 - 1892년 감리교 선교사 존스와 로드와일러가 편집출판

찬양가 - 1893년 언더우드가 서울에서 출판, 처음으로 4성부의 악보가 포함됨

찬성시 - 1895년 장로교 선교사 리와 기포드 부인이 편찬, 1902년 장로회공의회에서 공인찬송가로 결의

찬미가 - 윤치호는 단독으로 출판하여 오늘의 애국가가 들어있다.

찬숑가 - 1908년 장감 연합하여 발행

신정찬송가 - 1924년 결성된 장*감연합의 찬송가 개정위원회에서 출판

신편찬송가 - 장로교회에서는 신정찬송가에 불신자인 이광수와 이은상이 작사한 찬송가가 들어있다는 이유로 출판

통일찬송가 - 1983년에 초교파적으로 사용

신문발행

기독교 진리전파와 민중계몽에 초점을 맞추어 선진제도, 문물, 관습과 농사개량법, 공업기술 보급 등이 들어 있었다.

죠션 그리스도인 회보 - 18972월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발행

그리스도 신문 - 18974월 장로교의 언더우드 창간, 궁정에도 배달됨

감 연합공의회에서 19057월 그리스도 신문이 발행됨

경향신문 - 천주교회

구셰신문 - 구세군

잡지발행

코리안 리포지토리 - 1892년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가 발행

코리아 리뷰 - 1901년 감리교 선교사 헐버트가 발행

코리아 필드 - 1901년 장로교 선교사 빈턴이 발간

코리아 메도디스트 - 1904년 남북 감리교회 연합으로 발간

코리아 미션필드 - 1905년 장감 연합운동 결과로 코리아 필드와 코리아 메도디스트를 통합하여 발행, 한국교회 역사의 귀중한 자료

한글잡지

신학월보 - 1900년 감리교 선교사 존스가 인천에서 발행한 한글 잡지

예수교서회보 - 1904년 장로교 선교사 빈턴이 발행

성경강론월보 - 1906년 정동감리교회에서 발행

종교성교회월보 - 1908년 성공회에서 발행

한글로 된 최초의 단행본

예수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 - 1883년 만주에서 로스목사에 의해

해타론 : 해타란 말은 나태, 즉 게으름을 일컫는데, 길선주가 기도교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게으름아라는 마귀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저해한다면서 게으름을 경계한 소책자이다.

국내에서 발행된 단행본

속죄지도(언더우드), 셩교촬요(아펜젤러)

한국인에 의한 단행본들

1908년 간행된 기독교 변증서. 최병헌(崔炳憲) 역술.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본을 대본으로 최병헌 목사가 역술한 것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상세히 논술하였다. 이 책은 1907년 천주교 측에서 개신교 비판용으로 펴낸 예수진교에 대항하는 성격으로 출판된 것인데 선교 초기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논쟁을 반영하고 있다.

칠득(홍정우), 파혹진션론(노병선), 해타론(길선주), 예수텬쥬량교변론(최병헌)

 

 

한국어 공부를 위한 책

한국회화 입문 - 1890년 언더우드

한영영한사전 - 1894년 언더우드, ‘모든 한영사전의 아버지라고 평가됨

한글문법형식 - 게일

한국말 사용의 초보자를 위한 50가지 도움들 - 배위량 선교사의 부인

일상한국어 - 언더우드의 외아들 H. H. 언더우드

학문서적

의학서적 - 세브란스 병원의 에비슨

일반과목 - 웰즈, 샤록즈, 빈턴등이 협조

신학서적 - 클라크(설교학), 스왈른/베어드/게일(성경교재)

삼문출판사 - 1889년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가 운영하여 선교사들의 문서활동을 활발하게 지원, , , 3개 언어 사용, 코리안 리포지토리, 독립신문, 코리아 리뷰등이 출판됨

 

6. 여러 선교부들의 내한

1)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 - 경남지방

미국 북장로교회와 북감리교회에 이어

데이비스가 파송되었지만 천연두와 폐렴으로 사망하여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첫 희생자가 되었다.

2) 성공회

챨스 코르프가 첫 주교가 되어 트롤로프등 7명의 사제와 2명의 의사와 함께 1890929일 제물포를 통해 내한하여 강화도를 선교거점으로 하여 사역함

3) 미국 남장로교회 - 전라도지역

언더우드의 공헌으로 테이트, 메티, 데이비스, 레널즈 부부 그리고 전킨 부부가 착수하여 데이비스양이 맨 먼저 들어와 선교실시

* 남북 전쟁의 영향으로 남쪽은 남장로교회, 북쪽은 북 장로교회가 됨

*18927명 선교사가 한국와 호남지역 남장로교 선교

4) 미국 남감리교회 - 원산지역

그의 유산으로 캐나다 선교사가 오게 되어 결국 함경도가 캐나다 장로교 선교구역이 되었다.

1896년 윤치호의 요청으로 리이드 박사가 한국 선교사로 임명됨

광희문 교회에서 시작, 본부는 송도에 있었다.

* 남북전쟁으로 남북 감리교로 나뉨

5) 캐나다 장로교회 - 매켄지의 순교(토론토 YMCA 후원으로 오게됨), 함경도 지역

한국에 살면서 말도 배우고 생활양식도 배우고 전도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솔내로 내려가서 동고동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한여름 일사병으로 고열에 그만 권총으로 자살을 하였다.

6) 엘라딩 선교단 - 침례교회의 선교

폴링 목사 부부와 가드라인양을 한국에 파송하여 충청도 공주 지방에서 선교 시작

7) 러시아 정교회

18977월 서울에 정교회 선교부 설치를 결의하고 굿코 신부와 알렉세예프 보제 그리고 크라신 낭송자등이 임명되었으나 알렉세예프만 입국하였다. 러시아 영사 파불로프는 그의 자택에 예배처소를 제공하여 희랍교 교당이라 불리웠다. 지방선교에도 힘을 쓰던 정교회는 정길당 사건 같은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정길당 사건은 러시아 정교회에 입교한 정길당이란 여인이 교회의 힘을 입고 충청도 공주지방에서 민폐를 끼진 사건으로서 한러간의 외교문제로까지 번졌다. 지금은 한국정교회

* 러시아 정교회는 국교회. 625전쟁때 그리스 군인 와서 다시 선교

8) 개별적으로 온 선교사들

게일 - 카나나 토론토 대학 YMCA1889년 파송되었으나 부산에서 선교를 하다 북장로교회에 가입하여 성서번역활동을 하다 연동교회의 목사로 일함

하디 - 카나나 토론토 대학 YMCA가에서 파송된 의사로서 게일과 함께 선교를 하다 미국 남감리교회에 가입하여 제중원에서 일함

펜윅 - 한국에서 첫 침례교회 시작, 황해도 솔내에서 시작하여 한국순회전도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함경도 원산에서 선교함 외국인에 대한 복음전파는 선발된 본국인 신자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다고 술회함, 현지인과 함께 살면서 선교하고, 제국주의적 서양문화에 제동을 검

 

 

 

4 장 선교부의 선교정책과 한국교회의 성장

 

1.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채택

언더우드의 요청에 따라 한국에 머물면서 2주간 선교 전략과 방법론을 강론함

* 한국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 미국인 중국 산둥성의 죤 네비우스 선교사가 1890년에 한국에 와서 젊

은 선교사들에게 선교학 강의. 네비우스는 박사학위가 있고 중국 잡지에도 논문 올림.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핵심

선교사들은 순회선교를 통해 전도한다.

성경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다.

자립전도 - 신자는 타인의 복음선생이 된다.

자립정치 - 모든 그룹은 봉급을 받지 지도자들과 봉급받은 조사들이 교육받음

자립보급 - 모든 예배당을 신자들 자신의 힘으로 건축되고 조사들의 봉급책임

성경공부를 해야하며 지도자들과 조사들은 성경반에서 공부해야 한다.

성경에 규정한 대로 엄중한 훈련과 치리

다른 단체와 긴밀한 협조를 하고 지역분할하여 일한다.

교인들의 법정소송문제는 관여하지 않는다.

자립을 돕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3자 정책으로 자치(Self-government), 자립(Self-Support), 자전(Self-Propagation)이다.

북장로교회 -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경상북도남장로교회 - 전라도, 충청도카나다장로교회 - 함경도지역호주장로교회 - 경남지방과 부산

1893년 남북 장로교회는 연합공의회(후에 카나다 장로회와 호주장로회도 가입)를 발족하고 예양협정(Comity Arrangement)를 통해 같은 지역에서 중복사업을 하지 않기로 함

 

 

 

 

* 중국의 삼자교회의 정책

* 예양협정은 선교사가 지역을 나누어 선교함. 4개의 지역으로

* 한국교회 치명적 악 영향 : 지역갈등 조장.

* 그 선교구의 신학에 때라 교회의 신학 결정 : 카나다장로교회는 진보적으로 나중엔 장로교 배격

- 서북지역은 보수적인 신학(박형룡, 합동측 교단)

* 1860년 남북전쟁의 영향으로 노예제도를 찬성하는 남장로교회와 반대하는 북장로교회로 나뉨

- 이것이 한국에도 영향을 줌. 남장로교회 선교부는 한국인이 phd 하는 것을 반대함. 한국인 아래에서

배울 수 없다는 보수적 생각, 그러나 북 장로교회는 오히려 미국으로 한국인을 신학공부하러 보냄

선교사들이 한국상황에 맞게 고친 네비어스 정책(시행 시책)

상류 계급 보다 근로계급을 상대로 먼저 선교정책(농민, 노동자, 여자)

* 노비도 사람입니다. 교황이나 당신이나 같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위해 죽으심

부녀자와 소녀를 상대로

* 어머니를 전도하면 12명의 자녀 모두가 기독교인이 된다.

* 한국 남자 선교 힘듦 : , , 담배, 놀음 금지

기독교 교육은 시골에서 초등 정도의 학교를 경영함으로

한국인 교역자도 배출되어야

하나님 말씀으로

모든 종교서적은 순 한국말로

진취적인 교회는 자급하는 교회가 되어야

동족 전도를

의료선교사들은 환자와 친숙해짐으로써

병원치료자는 고향마을에 자주 왕래하여 전도의 문을 열도록

언더우드가 압축한 네비어스 정책 <한국의 부름>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활과 자신의 언행을 통해

교회방법과 기구는 한국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내에서

최선을 자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정식 사역자로 일하게 해야

예배당은 토착적인 모습과 한국인 자신의 재원으로, 한국인들에 의해 건축되어야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공헌

- 노동계급과 부녀자 전도 등 한국상황에 적합하고, 한글보급에 기틀마련

- 한국사회를 근대시민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전기마련

- 자급은 의존심과 사대사상이 강했던 한국민에게 자립정신을 갖게 해 줌

네비어스 선교정책의 비판

지나친 개교회주의 폐단 - 자급을 강조한 나머지 협력을 망각하여 교파분열조장

2. 교역자들의 교육문제

미국 네쉬빌에서의 언더우드의 연설에 감동받아 한국에 오게 됨

구체적인 교역자 양성안을 제출한 사람은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널즈

소극적인 면

오랫동안 사실을 알리지 말 것

외국의 재정으로 키우지 말 것

미국에 보내지 말 것

적극적인 면

높은 경지의 영적 사람이 되게 할 것

하나님 말씀과 기독교 기본 진리에 철저히 통달하게 할 것

청년 목사 지원자들이 곤란을 참을 수 있도록 훈련시킬 것

한국인 목회자들의 교육수준을 높일 것-한국인 평균 교육수준보다도 약간 높으리 만큼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사경회와 재정자립이다.

 

3. 초기 한국 교회 급성장의 원인 ==> 중간고사

한국에는 강력한 국교가 없었다.

* 불교억책정책 있었고 유교는 종교 아니었다.

국내외적으로 무척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국왕이 공개적으로 기독교에 호의를 보였다.

* 카톨릭은 엄청난 박해했으나 고종황제를 개신교나 도와주어고 주치의 통역관이 되어서 호의. 선교사와

국왕이 밀착

서구식민 경험이 없어서 서구와 서구 종교에 대한 반감이 없었다. - 상당히 중요

* 조선은 미국이 한국을 도와주는 입장. 미국과 친미하고 일본과 반일하는 입장.

* 미국을 대표하는 서구 선교사들에 대해서 호의적 영향

* 인도네시아, 중국들은 기독교나 서구세계에 대한 나쁜 마음이 있다.

한국인들의 전도열이다.

자국어로 된 성경이 일찍이 확보되었다.

신앙과 생활을 양분하지 않고 즉시 생활변혁을 가져 옴

* , 담배 금지, 성수 주일, 십일조 생활 철저, 음담패설, , 거짓말 못하게 함

교인들의 기도운동이었다. - 새벽, 철야, 통성, , 가정기도 등

한국교회는 사회개혁과 애국애족의 교회로 정착

한국교회는 권징과 치리가 철저한 교회였다. - ) 새문안교회 두 장로 권징

요단강 세례 - 언더우드가 1887년 평북의주에 갔을 때 100명이 세례를 받고자 했다. 세례문답을 통해 33명을 합격시켜 목선을 타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땅에서 세례를 베푼 일

4. 초기 선교사 순교자들

* 데이비스 - 호주 장로교 파송, 부산선교중 천연두에 걸려 순교, 경남지방 선교에 공헌

* 헤론 - 한국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임명, 알렌의 제중원에서 일함, 이질에 걸려 순교, 최초로 양화진 안치됨

* 윌리엄 매켄지 - 솔내에서 열병으로 순교, 격리, 역경, 물질적 궁핍, 위험을 영혼의 양식으로 삼았다.

* 기포드 - 이질에 걸려 남편이 순교하고 한달 만에 아내도 순교하여 최초의 부부 순교

* 조지 렉 - 평양 신천에서 천연두에 걸려 미국인이 경영하는 광산에서 성탄절에 순교

* 헨리 아펜젤러 - 최초의 한국 선교사, 배재학당, 정동감리교회 창립, 성서번역일로 군산앞바다에서 배 가 충돌하여 익사

* 월터 존슨 부부 -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아내가 중이염을 앓고 고베에 도착하여 사망, 남편은 천연두에 걸려 2달만에 순교

* 안나 밀러 부인 - 패혈증으로 선교 중 순교

* 빈턴부인 - 한국에서 활동하다 순교

* 윌리엄 헌크 부인 - 남편과 평양에서 사역하다가 패혈증으로 사망

* 피터스 부인 - 내한 즉시 폐병으로 타계

* 사무엘 무어 - 장티푸스와 결핵으로 사망

* 전킨 -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는 말을 남기고 장티푸스와 폐렴으로 사망

* 게일 목사 부인 - 헤론의 부인이었으나 남편 순교 후 게일과 재혼하여 결핵으로 사망

 

 

 

 

이기적 동기 - 일반시민, 대중애국애족의동기 - 지도층, 유식

* 아들 못낳는 여인에게 믿으면 낳는다 하면 당연히 믿는다. 별 못다는 대령에게 믿으면 된다고 하면 당연히 믿는다.

- 이것은 개인적인 이기적인 동기에 의해서 믿는 것이다.

- 한국의 기독교 전파의 확산의 동기는 이 이기적인 동기가 있다. :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 하면 가정이 복을 받고 잘된다.

- 유교도 되지 않고 불교도 안되었는데 가능하다고 하면 당연히 복음을 받아들인다.

- 지성인은 종교가 어떤 비전을 주며 어떤 이끔을 줄까를 생각 : 이승만, 윤치호, 남궁혁,

-> 애국애족의 동기, 교회를 통해 우리나라가 개화, 문명국, 독립 등을 원함

==> 그러나 이 두가지는 모두 잘못되었다. 기독교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ex) 안셀름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

-> 온 일류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없는 사람이 대신 죽어야 하기 때문. 어떤 인간도 자

범죄와 원죄로 인해 대속할 수 없다.

아벨라아드(Aberrard) :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부인하는 결과, 왜 전능을 부인하는가? 안셀

름의 말중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의미가 문제이다. 그것은 아가페인 무

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 이동기는 선교사들이 교회와 정치는 함께 할 수 없다는 말에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공산당 으로 감

 

 

5 장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 수난

 

1.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형태

 

1) 서민들의 입교

'아래에서 위로'의 전도 형태. 일반 대중들은 없이 살면서 고통당하고 사는 처지인지라 새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된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쉽게 받아 들였다. 학교와 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훨씬 필요한 기관이었고 교회는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돌보아 주고 가르쳤기에 대중들의 인기를 끌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가 현실적 이익에 급급하여 그랬던 것으로 이해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특히 백정들의 입교는 중요하다. 양반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였다. 초기 서민들의 기독교 입문은 다분히 이기적’, ‘감정적인 부분이 많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2) 지식층의 입교

첫째, 초기 유학자들의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연구심에 의해 기독교 서적을 접함으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둘째, 기독교를 통하여 국가의 자주독립을 쟁취해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셋째, 기독교 사상을 통하여 민도를 높이고, 부국강병을 모색하여 민주적 입헌국가로서 당시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원인이 있었다.

? 초기 신자들의 입신 동기가 순수한 기독교 신앙에의 입문이라기보다는 일반 대중들의 이기적 동기로, 양반 지식층은 애국적,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루어졌다.

 

3) 세례의 조건 ==> 선교사들의 철저한 신앙훈련

학습 규정, 즉 첫째 조상숭배금지, 둘째 안식일지키기, 셋째 부모 공경, 넷째 일부일처제, 다섯째 가족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기, 여섯째 근면하고 계명을 지키기, 일곱째 악한 범죄를 피하라(, 노름..) 1894년 부터 학습제도가 시작하였다. 학습을 받은 후 6개월이 지난 다음에 세례문답에 임하도록 하였다. 한편 감리교에서도 1903년 이후로 철저하게 신앙의 훈련을 시켰다.

한국 초대교회 새례조건

1. 1회이상 신구약 성경 통독 - 문맹자는 불가

2. 1인 이상 전도

3. 첩 정리

4. 금주

5. 금연, 금도박
6. 직업이 있어야함 - 양반들은 노동 천시, 왕자도 일해야 한다.

 

2. 초기 기독교가 당한 수난들

 

1) 전통과 수구의 반격 : 문화와의 충돌

1888어린이 소동’ : 선교사들이 어린이들을 잡아 눈알을 빼어 약을 만들기도 하고, 식탁에 올리기도 하며 노예로 팔기도 한다는 뜬소문에 퍼저 선교사들 전체가 위험에 빠졌고, 선교 사역을 크게 위축시켰다.

1894년 평양감사 민병석 : 유교의 수호와 서양인들의 혹세무민 방지 명분으로 장로교 한석진과 감리교 김창식과 신자 수인을 체포하여 신앙을 버리라고 죽도록 구타하였다. 평양 주재 선교사 마펫과 홀이 외교 경로로 국왕에게 보고하여 왕명으로 풀어주게 하였다.

1899년 황해도 황주 : 장로교 선교사 그레이엄 리가 황주에 도착했을 때 사교를 박멸한다는 이유로 교회를 부수고, 교인을 난타하며 책을 불태웠고, 현금을 강탈하였다. 이때 알렌이 정부에 항의 각서를 보내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190012. 1. : 1899년 시작된 전차공사를 반대하는 사람들(김영준, 이용익)의 전차 안타기 운동을 벌였다. 이에 외국인들이 국왕에게 불평하자, 이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국왕에게 밀서를 보낸다. 개신교가 끼치는 피해를 보고하며 1900,12,1에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을 박멸하라는 밀서였다. 언더우드가 이를 알게 되자 라틴어로 에비슨에게 전보를 쳐서 알렌에게 알게하였고, 알렌이 즉시 국왕을 알현하여 고종의 즉각적인 전보를 발송하여 이를 중지하게 하였다.

 

2) 천주교의 박해

초기 개신교회는 천주교회로 부터 적지 않은 박해를 받았다. 대개 개인이나 개교회 단위에서 이루어진 불행한 사건이었다. 처음 1891년 황해도 재령읍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로마 천주교인들이 몰려와 협박과 공갈을 하였다. 또한, 재령 원내동교회 건축시에 100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예배당의 공동사용을 요구하면서 교인들을 구타하였다. 1902년 황해도 신환포에서 성당을 짓겠다고 개신교인들에게 건축비를 기부토록 하였다. 이에 응하지 않자 감금하고 구타하였다. 천주교인들이 이렇게 방자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안악 근처에서 전교활동을 하던 괴팍한 빌헬롬 신부의 영향이었고, 분별력 없는 사람들에 의한 일이었다. 1906년에는 전북 김제 대송리 교회에서 예배 중에 신부가 교도 10명을 데리고 와서 위협하고 발포함으로 부상을 당하고 폭력으로 해산하게 하였다.

 

3) 동학교도들의 위협

경상도 경주 몰락한 양반의 아들 최제우37세 되는 1860년 신의 계시를 받아 인내천 사상(사람이 곧 하늘이다.)을 주장하였다.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닌 현세에 있음을 주장하면서 당시 고통당하는 일반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고, 현 체제에 반항하는 무리들과 더불어 불길처럼 거세어 졌다. 1864년 결국 요언이라는 죄목으로 최제우는 참수형을 당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고종 31년 동학란이 발생한다. 삽시간에 호남 일대를 점령하지만 청나라의 원병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주모자들이 체포, 처형된다. 전후 약 30만 명의 목숨을 잃은 미증유의 불행을 남겼다.

동학은 조선 말기의 혼란한 사회에서 서학이라는 기독교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집에 선교사들은 물러가라는 방문을 붙였다. 그러나 직접 공격하거나 교회당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항일정신 아래 오히려 동지의식을 느끼게 된다.

* 동학은 서학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 동양의 학문을 나타냄. 최제우의 인내천 사상을 보임

= 인 하나님 다음의 두 번째 중요한 것이다.

* 노비도 똑같은 사람이다. 인간 평등사상. 기독교 신앙은 비슷한 면을 보았다. 그래서 서양은 빼고 일

본만 배척하자는 생각으로 흐름

* 윌리암 맥켄지의 솔레지방은 동학사람들이 많이 지나갔어도 어떤 박해도 하지 않았다. 멕켄지는 고종

황제를 치료했던 약을 똑같이 백정에게 치료했다. - 기독교 배척 이유 없었다.

 

 

 

6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회연합운동

 

* 1907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비로서 이기적 동기를 가진 한국교인들이 참다운 기독교인이 될 수 있었다.

* 회개운동 - 기존까지 죄가 아니라 생각했던 한국 사회문화가 죄라고 생각하게 됨

ex) 미국 선교사들이 피지가서 식인종에게 잡혀 먹힘. 그들은 죄의식이 아닌 축제분위기

치매 걸린 어머니를 고려시대때는 고려장을 하고서도 죄의식 없었다.

- 기존까지 첩과 노비문화는 죄가 아니었으나 기독교를 통해 죄 인식하게 됨

- 노비문서를 폐기하고 딸로 삼게 됨. 4000년간의 전통문화가 완전히 바뀜

- 서리문화가 죄임을 인식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정미조약-국권상실, 1910년 한일병탄. 이렇게 어려운 때에는 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1907년 독()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에는 장로교 총회가 창립되었고 감리교도 연회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결과였다.

 

1. 대부흥운동

 

1) 기원과 진행

1903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들과 스웨던 목사 프란슨이 이 지역에 왔을 때 원산의 바닷가에서 기도회 겸 성경공부를 갖게 되었다. 이 기도회는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선교사들과 일부 한국교인들이 참여하는 연합 기도회로 확대되었다. 그런데 이 기도회에 수년간 선교활동을 하여도 별성과를 얻지 못하던 강원도 선교사 하디가 자기의 무력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기도를 드린 것이 불씨가 되었다. 하디의 회개와 성령충만, 은사를 체험하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04년 정월. 원산에서 다시 사경회가 시작되었고 성령의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원산지방의 부흥소식을 들은 평양의 선교사들이 1906년 하디를 강사로 장 감 선교사들 연합으로 일 주일 동안 기도회로 모여 성령체험을 갖고자 하였다. 존슨 목사는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사경회를 열었다.

1907년 정월 평양 장대현교회 평안남도 남자 도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짐으로서 비롯되었다. 10일간 성경공부와 전도집회가 계속되었고, 그 전해(1906) 가을 길선주 장로에 의해 시작된 새벽기도회로 이 사경회를 준비하였던 것이 부흥의 불길을 돋우었다. 따라서 1907년 대부흥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교사들의 자성하는 성경공부와 길선주 장로의 새벽기도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길선주 목사 :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

1869, 3월 평북 안주 출생. 일찍이 종교편력이 대단하여 관성교, 선도 수련에 심취하였다. 마펫과 친분이 있었던 친구 김종섭의 권유에 따라 처음에는 학문적 탐구심에서 기독교 진리를 접하였고, ‘천로역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깊은 명상과 기도에서 하나님을 결정적인 체험을 하였고,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교하여 19071회 졸업생이 되었다. 독노회에서 안수를 받았고, 20년간 장대현 교회를 시무하였다. 193511월 평서노회 사경회 마지막날 설교를 마친 후 강대상에서 소천하였다.

 

3) 운동이 발전

대부흥의 역사는 길선주에 의해 더욱 타올랐다. 정월에 시작한 부흥의 불길은 학교가 2월에 개학을 하면서 학교로 퍼져나갔고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동참하였다. 선교사 하디, 져다인, 길선주 등이 전국을 누비면서 교회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부흥사경회를 열었고,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다. 모트에 의하면 이 부흥의 열기에 기하급수적으로 교인들이 늘어났고, 하나같이 열정적으로 전도하였다고 한다. 이 부흥의 열기는 중국에까지 퍼져나간다. 만주에서 일하던 중국교회 목사들이 평양의 부흥회를 참석하고 은혜을 받아 본국으로 돌아가서 부흥을 주도하였다.

 

4) 운동의 결과

(1) 한국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게 하였고 기독교 진리가 한국 기독교인들 마음에 뿌리내리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회개운동

(2) 한국 교회의 급격한 성장을 가져왔다.; 교인의 증가, 기독교 학교의 증가

(3) 토착적이고 독특한 한국 교회의 특징이 확립되었다. ;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4) 에큐메니컬 정신의 구현이었다.; 한국인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의 갈등 해소, 장 감 연합으로 모이는 사경회. - 성령 운동은 교파의 장벽을 넘는다.

(5) 부정적인 면 ; 내적 신앙에만 치중하다 보니 한국 교회로 하여금 비정치화, 몰역사화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부흥운동의 본원을 잘못 이해한 데서 나온 곡해였다.

* 사회학적으로 잘못 이해하면서 잘못된 생각

? 이 운동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비로소 민족교회로서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2. 백만 명 구령운동

대부흥의 물결이 2,3년이 지나자 그 열기가 식고, 1910년 한일병탄에 따른 사회적 불안과 좌절이 심해져 갔다. 이때 교회가 나담한 대중에게 복음 전해야겠다는 사명을 일깨우면서 교회의 부흥운동이 재개하였는데 이것이 백만 명 구령운동이었다.

1909. 개성 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갬블, 리드 3인이 다시 부흥의 불길을 당기기 위해 사경회와 기도회를 1주일 갖기로 하고 한국 교인 몇사람과 산상기도회를 개최한 데서 비롯한다. 마침 세계를 순회하며 전도강연을 하던 부흥사 데이비스가 한국에 남아 전국을 순회하면서 집회를 가졌고, 1910년 독노회에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10/24부터 1주가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기로 결의하고 이 일을 추진하였다.

이 운동기간에 나타났던 특이한 현상은, 이 운동을 위해 가난한 교인들이 물질적으로 헌금할 수 없어서 시간을 바치는 소위 날연보를 한 사실이다. 전국적으로 10만일이 넘는 날연보가 있었다. 사실 이 운동은 그 결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물론 백만명이 다 J를 믿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3.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

1) 선교사들의 단일교회 형성을 위한 협력

한국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한국에 하나의 교회를 설립한다는 꿈을 꾸었다. 선교회의 연합인 개신교복음주의선교협의회는 교육, 의료, 문서, 출판의 업무를 다 포함하였는데 이 사업의 궁극적 목표는 한국에 하나의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 감 연합은 이미 한국 민족교회의 이름은 한국 X의 교회라 하기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2) 단일교회의 실패

(1) 선교사들 모국 교회의 비우호적 태도: 미감리교 자체내서의 불일치;근본적 원인

(2)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열의 부족; 각자의 독노회 설립

 

3) 연합운동의 결실

(1) 미 북장로교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부의 협력

그러나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죽은 후인 이듬해 1년 만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미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다시 장로교 협의회가 태동하였다. 이 공의회의 목적은 한국에서 개혁교회의 신앙과 장로교회의 정치형태를 갖는 하나의 교회르 만드는데 있었다. 후에 캐나다, 호주가 다시 연합하였다.; 선교지 분할 문제 협의

(2) 개신교 복음주의선교협의회

19054개의 장로교와 2개의 감리가 연합하여 이 협의회를 구성한다. 선교지 분할문제를 다루었고, 선교지 교회와의 문제, 연합 찬송가, 연합잡지 코리아 미션 필드를 발간하였다. 주일공과, 기도달력도 발행하였다. 기도달력에는 모든 교파 이름을 제거하고 예수교회라 쓰기도 하였다. 또한 각 기독교학교들을 통합하였고, 연합 신문을 발간하였다.

(3) 지역분할과 교인의 교환 ; 한국 초기교회사의 가장 빛나는 에큐메니컬 정신의 발현

예양협정에 따라 1905년 지역을 분할받았다. 이후에 지역내의 교인을 바꾸었다.-적을 옮겼다. 12천의 교인들이 아무 문제 없이 교환되었다.

 

한국 에큐메니컬 운동사(조별발표내용)

* 다양한 교파가 연합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있었다. 함께 같은 성경을 편찬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찬송가도 통일하였다.

* 세브란스 병원세울 때 많은 돈이 필요했다. 장로교 선교사중 많은 분과의 의사 있을 수 없었다. 여러 교파의 의사들이 함께 의과대 하면서 복음 전하면서 협동함

* 에큐메니컬 : 오이쿠메네(οικουμενη) - 예수님이 하나님이요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는 교

회는 서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 마펫은 에큐메니컬에 회의적, 언더우드는 호의적, 이것이 한국 장로 교단의 두가지 맥으로 흐름

언더우드는 회중교회 출신으로 교파가 없는 교회를 세우려 함

* 대한 예수교 장로회, 대한 기독교 감리회, 대한 기독교 성결교회에서 장로회와 감리회와 성결교회를

뺀 예수회만 정하자고 언더우드는 주장. 교리를 주장하지 말고 진리만 주장하자고 함

회중 - 회중, 장로, 침례

감독 - 성결, 감리

장로제도 - 장로교회

==> 서로 다른 제도 때문에 교회연합이 안됨

* 장감이 합의하여 2000명 이상이면 장감이 같은 지역에 들어가고

2000명 이하이면 먼저 들어간 교회만 들어간다.

- 나중 들어간 교회는 철수하고 교회의 모든 것을 전의 교회에 준다. 실제로 행해졌다.

 

 

? 그러나 이 복음주의 선교협의회는 7년 후 장로교회가 총회를 창설하면서 이름을 'General Council'에서 'Federal Council'로 바뀌었고, 단일교회 형성의 목적도 빠지게 되었다. 이 협의회는 1940년까지 지속되었다.

 

4) 성교서회의 설립

1890년 초기 선교사들은 문서 선교를 위해 성교서회를 설립한다. 이 일에 7일 안식일 교회만 제외하고 모든 선교회가 동참하였다. 서회에서는 한국에서 선교하는 모든 선교회가 쓰는 문서를 관장했고, 일어, 중국어, 영어로 된 책들을 수입하고 다루었다. 연합찬송가를 출판하였고, 연합교회신문, 주일학교공과, ‘코리아미션필드를 출판했다. 서회는 1919년 기독교서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5) 성서 번역의 협력

초기 선교사들이 가장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여러 선교회의 대표들로 구성된 한국 성서 상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 위원에 에서 번역자선출, 검토, 편집, 성경의 가격을 결정하였다. 처음부터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톤이 참가하였고, 언더우드는 처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위원장직을 맡았다. 1910년 신약이, 1911년 구약이 완성되었다.

6) 연합 교육기관들

(1) 숭실전문 : 북장로교 사무엘 마펫에 의해 시작. 1905년 감리교와 연합. 결국 4개의 장로교와 2개의 감리교가 연합으로 경영하는 모범적인 연합기구가 되었다.

(2) 연희전문 : 언더우드기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혼신을 다해 이룩한 에큐메니컬 기구였다. 미 남북 장로교회와, 캐나다 장로교, 남북 감리교의 연합 경영하였고, 한국의 대표적인 연합기관으로 오늘에 이른다. 현 연세대학교. CCC

(3) 피어선 기념 성경학교 : 남북 감리회, 북장로교, 캐나다 연합사업. 평택대학교

(4) 세브란스의과대학 및 병원 : 4 장로교, 2 감리교, 성공회, 7일 안식일교회의 연합사업.

 

* 연합운동은 부분적으로 성공했으나 교회연합은 실패했다.

* 일제는 작은 마을에 장감성구등이 있으니 다 없애고 하나만 남게 함. 나머지 목사는 실업자가 됨. 하나남은 교회에 누가 목사가 될 것인가를 두고 싸우게 됨. 남은 교회를 팔아 전쟁물자비용으로 사용

* 해방후 하나였던 것이 다시 나누어지게 됨.

 

7 장 교회의 애국과 사회개혁활동

 

1. 을미사변과 선교사들

(1) 삼인: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아시아를 제패하기 위한 대외 정책 수행을 위해서 실시한 음모. 러시아 황제를 암살하는 것. 중국 전권 대신을 처치하는 것. 한국의 국모를 시해하는 것.

(2) 을미사변: 일제가 민 왕후를 침전에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사건. 1895108

(3) 다이(Dye)와 사바틴(Sabbatin): 미국인 군사 고문 장군, 러시아인 전기 기술자. 명성왕후 시해사건의 외국인 목격자들. 이들에 의해 사건이 외부에 잘 알려지게 됨.

(4) 을미사변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역할

의화군이 언더우드 집으로 피신하고, 고종에게 언더우드 부인이 음식을 제공하게 됨. 이런 일들로 인해 일반일들 사이에서는 선교사들이 왕의 생명을 구했다라는 소문이 돔. 선교사들은 일제의 만행을 비난하였고, 선교 본부에 보고서를 냈을 뿐만 아니라, 외부에 이 일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음.

이러한 선교사들의 국왕을 위한 헌신적인 노력은 국왕과 내각의 대신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까지 선교사들이 곤경에 처한 국왕을 최선을 다해 보호하고 도와 주는 사람들로 인식되어 기독교를 애국충군의 종교로 이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로마 천주교회는 무군무부의 종교로 인식되어 무수한 고난을 당한 데 비해 개신교는 애국충군의 종교로 인식되어 을미사변을 지나고 교인들의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현상을 보임.

 

2. 춘생문 사건

(1) 춘생문 사건: 친일파에 의해 연금되었던 고종을 보다 안전한 장소로 옮기기 위해 왕의 측근들과 일부 서양인들 사이에서 진행되었는데, 이 거사를 위해서 궁궐의 동북문인 춘생문을 통해 고종을 출궐하려던 사건. 변절자들의 밀고로 실패로 끝나고 맘.

(2) 윤웅렬: 고종을 구출하는 계획을 세운 장군.

(3) 헤링톤(Harrington): 이 사건이 언더우드의 정치 개입이라고 단정한 사람.

(4) 매켄지: 절대 관련없다고 부인.

(5) 결과: 일본은 선교사들이 정치개입을 한다고 확대선전하는데 이 사건을 악용함. 선교사들의 정치 개입을 염려한 미국 국무성은 선교사들이 선교의 목적으로 어떤 나라에 입국하였으면 선교 업무에만 열중해야지 주재국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와 교회의 분리 입장을 천명함. 미국은 앞으로 한국보다는 아시아에서 일본과 더 친숙하게 지내면서 외교정책을 펴나가려고 함. 그러나 한국민의 눈에는 국왕을 위해 헌신한 그들의 모습이 애국충군의 사람들로 비쳐지게 되었음.

 

3. 고종의 탄신 기념행사

(1) 고종의 탄신기념 행사: 언더우드가 1896년 국왕탄신일인 92일에 이를 기념하는 예배를 드릴 계획을 세움. 이일을 통하여 기독교가 애국충군의 종요임을 일반에게 알림과 더불어 전도의 기회를 업으려고 생각. 내각의 각료들과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초청. 주한 선교사들도 모두 참석.

(2) 의의: 국왕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림으로서 왕과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기독교가 애국충군의 종교라는 일반 국민들에게 좋은 인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기회를 통하여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 것. 언더우드의 혜안.

(3) 황해도 은률교회: 한 양반이 우연히 이 예배에 참석. 예수 믿기로 작정하고 고향에 돌아가 교회를 세움.

(4) 결과: 이러한 선교사들의 애국활동은 왕실의 특별한 관심과 호혜를 입게 되었고 특히 고종황제의 신임을 얻게 됨. 기독교나 서구의 문명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에서 고종은 언더우드에게 전 조선을 기독교국으로 선포해 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었으나 언더우드는 정중히 이러한 제안을 거절하였음. 기독교 선교는 왕명에 의한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고 한 영혼, 한 영혼에 호소하여 개종시키는 원리를 따라야 하기 때문.

이런 사건들은 선교사들의 정치 개입이라기 보다. 친구로서, 어려움을 당한 이들을 돕는 인간 본연의 모습.

 

개인변화 -> 가정변화 -> 사회변화 -> 국가변화

 

4. 교회의 사회개혁활동

(1) 조만식: 회개는 가치있는 사회변화의 유일한 기초. 그에게 있어서 복음 선포는 개인구원 뿐만 아니라 민족의 사회적 구원의 틀이 됨. 개인구원이 사회구원의 밑받침이 된다는 점.

(2) YMCA : 이 단체는 1844년 영국의 기독교 사업가 조지 윌리엄스가 기독교 신앙의 바탕위에서 지, , 체 세가지 덕목을 청소년들에게 함양시키기 위해서 시작한 초교파적 운동. 한국에서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선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미국과 캐나다 YMCA에 한국에서 이 단체의 시작을 위한 자금요청을 한 것에서 비롯.

- 과정 : 여병현이 1900년경 영국에서 귀국하면서 y의 필요성을 역설. 질레트(Gillette)룰 한국에 YMCA 설립 준비를 위해서 파송. 190310월 정동의 유니온 클럽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공식적으로 조직. 게일이 회장, 윤치호가 부회장.

- 성격 : 국가의 개혁과 개화에 압장 섰던 독립협회가 수구당의 압박으로 해체된 후에 사실상 이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만들어진 단체. Y에서는 고관들의 자제들이 와서 사교와 친목,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빈한한 가정의 소년들이 와서 주, 야간으로 실시되는 기술학교에서 기술교육을 받음. 직업훈련, 체육교육, 운동경기소개, (야구, 농구, 배구, 정구, 탁구, 정말체조, 인도봉) 대회 실시, 국민보건과 운동 경기력 향상에 크게 공헌. 청소년들의 좋은 사교와 훈련장이 됨. 사회계몽에 큰 공헌. 와나메이커와 현흥양의 희사로 건물을 건립. 1927년부터 신흥우, 홍병선, 이대위 등이 중심이 되어 농촌운동도 전개.

- 기관지 : 청년

- 단행본: 신흥우 양심의 해방김창제20세기의 대발견이기대정말의 농촌

(3) YWCA: 3.1 독립이후 여자 전문학교와 중학교 안에서 비롯. 19226월 전국여자하령회가 개최되었을 때 조선 여자 기독청년연합회 기성회가 발족. 한국의 YWCAYMCA와는 달리 순수히 한국의 여성들에 의해 창립되고 주도되었다는 특성이 있음. 3.1독립운동이후 한국에 일고 있는 강한 민족주의적 경향으로 외국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체의 힘으로 민중계몽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열의가 내포되어 있음.

- 목적: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주임을 믿게하며, 온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됨을 인정케하고 구세주인 예수의 교훈을 자기 생활에 실천하게 함으로써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함에 두고 있으며, 여성운동, 청년운동, 기독교 운동, 회원운동의 특징을 가진다.

- 주 사업: 종교적, 교육적인 출판물 간행. 음주의 해독에 관한 교육, 금주운동. 공창반대운동. 그외에는 수양회, 하령회, 금주, 금연운동, 생활개선운동, 물산장려운동, 여성지위행상운동, 기숙사, 목욕탕 설립운동, 농촌지역의 여성교육등 한국 여성의 인권과 사회적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

(3) 엡윗청년회와 면려청년회

- 엡윗청년회: 감리교회의 청년단체. 1889년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시 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시작. 복음 선교와 사회 봉사의 목적. 18975월 미 북감리회 13회 한국선교연회를 주재하기 위해 내한한 조이스(Joyce)감독의 승인 때문. 동년 5월 정동감리교회에서 15세이상 40세 미만의 남자 25명과 여자 11명으로 창립.

- 기관지: 종교교육회보1929년 발간. 유형기 목사가 발간하던 신생을 인수하여 발간.

- 성격: 전도가 그 목적이었으나 전도외에 사회봉사, 특히 국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에 국가를 위해 여러 가지 애국활동을 전개하여 불신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침.

- 면려청년회: 1881년 미국 오레곤 주 포틀랜드 시의 회중교회 목사였던 클락(Clark)이 창설한 초교파적 청년운동단체. 다른 교파들이 단체를 만들어서 분립. 장로교회만 남게 되어, 결국 장로교회 청년단체가 됨. 1926년 새문안교회, 승동교회, 평북 선천의 북교회 등이 면려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 3. 1운동이후에 앤더슨 선교사가 경북 안동 지방에서 선교 동을 하면서 청년들의 신앙지도, 사상선도를 목적하고 정식으로 창설. 처음에는 전도사업, 성경연구, 교회봉사 등 교회 안에서 활동에 그쳤으나 차차 운동이 활발해 지면서 교회가 펼치고 있던 금주, 금연운동, 문맹퇴치운동, 농촌사업 등의 사회계몽운동으로 그 활동 범위를 확대. 이대위-청년운동의 권위자, 1933년 총무로 선정.

- 기관지 : 진생

(4) 여성 인권의 신장

- 장로교 공의회가 여성인권에 대한 결의사항 - 남녀가 장성하기 전에 혼인하는 일, 과부가 두 번 시집가는 것을 금하는 것, 교증 신도가 믿지 아니하는 이와 혼인하는 것, 혼인을 맺을 때에 먼저 돈을 받는 것, 부녀를 압제하는 일을 업시하자고 하는 일.

- 감리교회에서도 1895년 선교사연회에서 일부다처주의를 정죄. 첩을 가진 자는 교인 자격이 없으므로 교회에서 추방하기로 결의.

- 소실을 추방하지 않으면 결코 세례를 받을 수 없음.

- 여성 교육 : 여권신장을 위한 첫째 조건. 여성교육기관 설치에 치중.

- 황해도 평산 감바위 교회 : 부부가 서로 존댓말을 쓸 것. 한 자리에서 식사할 것을 결정.

- 여아들의 교육에 상당한 성과.

- 여성 인권 회복과 성 차별의 철폐야말로 초기 한국교회가 이루어 낸 값진 선교의 결과.

(5) 사회신분제도타파

-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와 이루어낸 사회개혁 중에 인간 평등을 위해 애쓴 것. 큰 공헌. 버려진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은 고아, 병자, 신체장애자, 노약자 등에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펴고, 그들을 위한 사업에 최대의 노력.

- 1894년 군국기무처 갑오경장때 23개 조항 - 노비, 백정들에 대한 법적인 철폐. 그러나 실질적인 면에서는 크게 미흡. 교회가 앞장서서 이들에 대한 전도를 강화하여 큰 반응을 일으킴. 이로 인해 천대받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나오는 일이 잦음. 선교사들의 공헌.

* 창극, 피혁에 종사하는 천하게 여기는 직업 : 불교의 윤회사상 때문에 동물잡는것을 천시 -> 이런 직업의 사람을 천민의 신분에서 면하게함

- 에비슨의 백정치료: 무어 선교사가 목회하던 곤당골 교회에 출석하던 백정이 장질부사에 걸려 고생하였을 때 고종황제의 시의인 에비슨이 치료.

- 고찬익, 임공진: 서울 연동교회의 장로. 갖바치와 광대 출신.

- 전덕기: 상동교회의 목사. 애국지사. 숯장수 출신.

(6) 노동의 신성 강조

- 군자불기 : 군자는 손으로 기구를 가지고 하는 일을 천하게 여긴다는 유교의 가르침

- 교회는 노동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성경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라는 말씀을 종종 인용하며 노동의 신성과 근면을 강조.

- 윤치호: 민족의 살길은 산업의 장려와 노동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전환.

1906년 부친의 재정적인 후원으로 개성에 한영서원을 개원. 실업분야에는 과일, 채소재배, 목공, 목축업, 섬유산업까지 확대.

- 삼문출판사 : 북감리교회가 세운 배재학당에 3개 국어를 인쇄하는 인쇄소와 제본소를 갖춤.

- 소년학교 : 남장로교회 구역. 실업교육에 치중. 기계농업. 가마니짜기. 벽지 바르기. 잔디깍기. 샘 파기. 도로와 다리 수축하기. 철조망 울타리 짜기. 목재 제재. 주물등의 기술을 가르침.

- 소녀학교: 뜨개질 하기. 단추달기. 자수. 레이스 뜨기 등의 기술 교육을 시킴.

- 벤스 부인: 매산학교 학생들이 만든 종이 인형 56천개를 미국에 팔아 수익을 올림.

- 기독교 선교가 남긴 업적 중의 하나가 한국인들로 하여금 노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근면의 정신을 진작케 한 것.

(7) 조상제사 문제

- 우상숭배해서는 안된다는 교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의 측면에서도 강력하게 계도해 나감.

- 교회의 철폐 운동은 효도하는 일에 대한 제재가 아니라 우상숭배적인요인을 제거하고 폐해를 없애기 위한 노력의 일환.

- 그리스도 신문에 기재 된 폐해 : 시간허비, 힘 낭비, 재력소모, 우상숭배

 

* 제사 못하게 하는 이유 1) 시간을 낭비 2) 힘을 낭비 3) 제력을 보존 4) 일부 다처제를 조장 5)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 조상을 하나님과 같이 섬김, 우상숭배

 

(8) 한글전용

- 스나이더(Snyder) : 민족주의에 대한 명저를 기술. 언어와 민족의 동일성 언급.

- 한글전용: 이와 같이 한국민족문화의 동일성과 일치성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그 공헌이 다대하다. 선교사들의 1893년의 결정 두가지. 첫째,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한다. 둘째, 모든 문서는 순수한 한글을 사용한다. 선교사들의 한글 전용 추진 결과 시골의 아낙네들도 쉽게 한글을 깨우쳐 성경을 읽고 기독교 서적을 읽게 됨으로써 전도와 민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초기 한국 교회에서는 원칙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한글을 읽을 수 있도록 계몽. 서른 살 미만의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세례를 받을 수 없었음. 남편들은 자기 아내가 한글을 깨우칠 수 있을 때까지 역시 세례를 받을 수 없었음. 소수의 노인들을 제외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를 수 있게 됨. 초기 교회는 전도만 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지 아니하고 민족교회의 차원에서 한글교육에 열성을 다하였음.

- 최현배: 한글학자. 기독교가 한글에 끼친 영향. 한글을 민중 사이에 전했다/ 신도들은 사상 표현의 말씨를 배우며, 글을 읽고 쓰는 방법까지 깨치게 되었다/ 한글에 대한 존중심을 일으키고 한글을 지키는 마음을 길렀다/ 한글의 과학스런 가치를 인정/ 배달의 말글을 널리 세계에 전파/ 한글만 쓰기 기운을 조성.

* 중국은 현재 외국어를 사용하려 하지 않는다. 외래어를 그대로 표기하지 않고 자국어로 변형하여 표기

현대그룹 -> 현대집단. Card -> ()

우리나라는 너무 그대로 쓰는 경향이 있다.

- 한어자전: 1890년 요코하마에서 발행된 한국어 사전. 언더우드 편찬.

- 일본이 한글 말살정책을 폈으나 기독교의 한글 성경과 찬송을 통해 한글을 유지했다는 성과도 있음. 한글 전용 정책이 한국교회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질의 것. 게일의 언급 복음을 위해 준비해 두신귀한 선물.

 

(9) 결핵, 나병퇴치

- 결핵퇴치 : 선교사들은 치명적이고 고질적인 결핵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병원을 세움. 1920년 세브란스병원의 내과의사 스타이츠(Stites)에 의해 세워진 것. 배동섭- 독립 투사. 최초의 환자로 치료받음. 평양에 1925년 결핵진료소. 1928년 감리교에 의해 해주에 구세 결핵 요양원. 남 장오교회에서 세운 전남 광주에 제중병원(결핵환자 전문 병원).

- 크리스마스 실 : 로제타 홀. 남편의 순직을 기념하기 위해 기홀병원을 세우고 헌신적인 노력을 하던 홀 부인에 의해서 비롯. 193212월 첫 실을 판매.

- 항결핵회: 1928년 세브란스 병원의 교직원, 학생, 동문들이 망라되어 조직. 결핵퇴치사업의 계속 추진을 위해.

- 나병퇴치: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1904년 어빈, 빈턴, 스미스로 나병치료를 위한 위원회 구성. 1909년 부산에 나병환자 수용소. 예양협정에 따라 호주선교부로 메켄지 목사에게 관리.

- 윌슨(Wilson, 우일선): 광주 기독병원장. 에딘버러의 나병협회에서 2천달러를 보내주어 이것이 기초가 되어 나병원을 건축하고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

- 근멸회: 14회 장로교 총회에서 나병 완전 박멸을 위해 결성된 조직.

- 최흥종: 호 오방. 나병환자들을 위해 애쓴 목사. 전남 광주에서 활약. 윤치호, 김성수, 김병로, 안재홍, 이 인, 백관수 씨를 찾아가 나병근절협회를 만들고, 동아, 조선, 조선중앙일보등의 협조를 얻어 나병환자를 위한 모금운동 전개. 모금 액 4만원에 이르자 조선총독부에서 자극을 받아 나환자근절협회로 이 기금을 인수하게 하고 소록도에 나병원을 설치. 애양원

(10) 맹학교

- 효시: 로제타 홀 여사1894년 앞 못보는 소녀 하나를 데려다가 가르쳤는데 그것이 맹학교의 효시. 1906년 소경 동생을 둔 뉴욕의 클락(Clocke)여사의 자금으로 교실 마련. 점자와 기술-뜨개질을 가르침. 1909년 이 학교에 농학교를 개설하여 귀먹고 말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함. ‘한국 맹인의 천사인 로제타 홀.

- 훈맹학당: 감리교 본부가 있던 정동에 세운 맹아학교.

- 남자 맹학교: 마펫 목사의 부인 엘리즈(Alice)의 시작으로, 1915년 남,여 맹학교의 합병. 1935년 이창호 목사에 의해 활발하게 활동.

복음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했지만, 인간의 육적인 삶과 현세적 삶까지도 구원하는 영혼구원과 사회구원의 복음으로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은총.

 

어떤 사람도 무시될 수 없다. 개인의 변화 -> 사회의 변화

니버의 moral man in immoral society' : 어떤 도덕적인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사회가 먼저 도덕적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ex) 한국에서는 정직하게 해서 기업이 성공하기 힘들다. 한국의 사회가 잘못하게 되어있기 때문에 장부

를 여러 가지로 만들수 밖에 없다.

==> 기독교는 개인을 회개시키고 올바르게 만드는것도 중요하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한 것이

. 개인구원과 사회 변혁은 동전의 양면같이 함께 가야하는 것이다.

 

8 장 교회의 항일 운동

 

1. 교회와 항일의 문제

비기독교인들은 나라를 빼앗긴 의분과 원통함 때문에, 즉 한 국민으로서의 자연적 애국심에서 투쟁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음. 또한 그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불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투쟁함.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생각은 이들과 달랐고 그 투쟁 방법도 다름. 즉 단순한 애국심의 발로가 아닌, 보다 깊은 기독교 신앙에서 연원하는 의분.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탈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근거한 공분. 즉 약자를 도와주고 고난당한 자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일제가 한국에 저지르고 있는 악에 대한 저항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그 투쟁의 방법도 복음적인 방법. 즉 예수께서 보여주신 비폭력, 무저항의 방법으로 항일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음. 길선주 장로의 의병들의 무장폭동을 자제하라는 충고. 무력항쟁보다 국가가 힘없어 나라를 잃은 것을 자성하면서 교육과 산업의 증진을 통해 힘을 비축하여 때를 기다리는 길을 택하도록 권유. 김구도 을사늑약때에 도끼를 매고 대한문에까지 상소. 그러나 헌병 부대의 출동으로 해산되는 것을 목도. 동지들과 방침을 바꿔 전국 각지로 흩어져서 교육 사업에 힘을 씀. 서명의숙의 교원. 양산학교의 교원. 해서교육총회사건으로 투옥.

- 블레어(Blair): 1910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만일 한국 교회가 공식적으로 항일을 선언했다면, 한국 교회는 또 다른 로마 가톨릭이 되었을 것”.

 

2. 교회의 항일 운동 방법

(1) 신앙 운동을 통한 항일 - 나라를 위한 기도회

위군위민의 종교로 인식된 개신교는 일찍부터 애국심을 길러옴. 애국심 발로의 표현은 초기 예배때부터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 교인들은 집에, 교회에 다는 것으로 애국의 마음을 표현.

- 스피어(Speer): 미국북장로교회 해외선교부 총무. 한국인들의 애국심의 발로로 태극기가 달려 있는 것을 증언.

-> 주일되면 예수믿는 사람집에는 국기를 답니다. 기독교 신앙이 곧 애국신앙을 가짐을 의미

* 1882년 임호군란후 태극기를 처음 게양. 1876년 강화도조약시 일과 한국 협상시 두 나라의 국기가 걸 려야한다. 우리나라는 국기가 없었다. 운양호사건시 왜 국적기 없이 함포사격했냐? 일측 질문. 박영효 가 일에 가는 배위에서 국기 게양하게 됨.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그해 9월 장로교 공의회에서 길선주 장로는 나라를 위한 기도회를 갖자는 발의. 일주일을 국가를 위한 기도주간으로 선포. 11월 을사늑약이 선포되자, 상동감리교회에서는 전덕기, 정순만의 인도로 매일 수백, 수천의 교인들이 모여 국가를 위한 기도회를 개최. 1907년 정미조약이 발표되고 고종이 퇴위당하자 교회는 한국을 위한 기도를 세계 교회에 부탁하여 세계 교회가 기도하는 범 세계적인 유대를 강화.

한국 교회는 기도로써 국가를 위한 힘을 비축. 기도회를 가짐으로써 항일의 모습을 구체화. 일제는 교회에 나가는 기독교인들을 항일의식을 선도하는 불순분자로 분류. 교회를 적대시. 기도하는 자는 항일분자로 낙인찍혀 요 주의 인물로 취급.

(2) 시위와 무장투쟁을 통한 항일

한국의 그리스도인 중에는 항일을 단순한 기도회 개최 정도로 끝내지 않고 집단적인 시위형식. 또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표출하기 시작한 이들이 있음.

- 도끼를 메고 상소: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강제로 이루어진 조약 - 힘을 기르지 않으면 나라가 빼앗길 수 있다.)이 발표되자, 엡윗청년회의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김구등이 대표로 모여 결의. 대한문에서 일경들의 강제해산. 민영환의 자결. 이상설의 자살미수.

- 을사5적을 처단하기 위한 암살계획: 전덕기등이 평안도 장사들을 모집하여 계획한 일. 홍태순이 고종의 강제퇴위로 인해 자결. 정재홍은 이등박문 암살하려다가 자결.

- 스트븐슨 격살 사건: 장인환, 전명운. 1908321일 일제 통감부의 외교 고문. 일제의 한국 강점을 도운 친일파 미국인 스트븐슨(Stevenson)이 기자화견에서 망발. 장인환이 그를 쏘아서 격살.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내의 애국단체들이 통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조직.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영향력있는 단체가 됨.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

- 안중근의 이토 암살 사건: 190910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격살한 사건. 우연준(우덕정)과 함께 계획. 국가를 위해 신구교가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줌.

-> 지방병원에서 사형, 항소하면 무기징역, 어머니 편지 받고 여순감옥에서 34살에 죽게됨

- 우연준 : 을사늑약이 선포되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계동학교를 설립.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의병운동을 지도. 1908년 안중금을 만나 의기토합하여 이토 암살에 가담.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서, 우연준이 채가구에서 감행하기로 모의.

- 이재명 : 이완용 습격 사건. 19091223일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벨기에 황제 추도식을 참석하고 돌아온 이완용을 군밤장사로 가장하고 습격함. 1906년 평양 태극서점에서 안창호, 이동휘, 안태국 등의 기독교 신자들이 모여 이재명이 거사 담당자로 택정. 19208월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

*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지 않을 수 있으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배울만 하다.

(3) 경제적 항일

조세저항운동 : 가장 쉽게 구체적으로 일반 서민들이 할 수 있었던 경제적 저항은 일본 상품 불매운동과 조세저항 운동. 평북 용천과 평남 순천의 기독교상인들 중심의 조세저항. 19094월 통감부의 시장세 징세에 저항. 일제는 기독교인들의 저항을 선교사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평가.

- 최봉환: 순천읍 교회 장로. 19101상민회조직. 시장세 납부 거부 운동을 전개.

국채보상운동 : 일제가 한국에 통감부 설립이후 여러 가지 시설을 확충하는 가운데 열악한 조선의 제정 때문에 차관을 제공. 이렇게 진 빚을 갚아야 독립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선각자들 사이에서 국가의 빚을 갚자는 운동이 일어남. 대구 경북에서 처음 시작. 출판사 광문회의 사장이었던 김광제와 서상돈이 주축이 되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 이 운동은 금주, 금연운동이 주축.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어 외채를 지고 있는 것은 민족의 수치, 경제적 몰락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자각에서 비롯. 이 운동은 고종황제까지 호응하여 친히 담배를 끊고 보상금을 하사. 고급관료, 지식인, 사인, 인력거꾼, 기생, 백정등의 하층민까지 확대.

이 운동이 초기부터 금주, 금연운동을 교인들의 엄격한 신앙생활 훈련으로 실천해 오던 교회의 지침과 맞물려 교회는 애국운동의 한 방편으로 이 운동에 적극 나섬. 국채보상운동본부를 서울의 YMCA에 설치하고, 사경회, 강연회, 토론회, 음악회 등을 통해 교인들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전개. 다양한 기독교 단체들이 구성됨 : 서울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대한부인회, 선천 의성회, 안악 국채보상탈환회, 제주도의 삼도리 부인회.

* 경부선과 경인선 철도를 세우고 그 비용을 나라보고 갚으라 함. - 전국교회의 노력

탈환회운동 :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운동. 탈환이란 반지를 뺀다는 의미. 국채보상을 위해 반지를 빼어 바치자는 운동. 우리 교회 여성들이 패물을 모아 나라의 부채를 갚고 은행도 설립하고 국가의 내일을 기약하고 있는 것은 가상한 일. 일제는 대한 매일 신보의 총무 양기탁등 여러 지도자를 공금 획령의 죄목을 씌워 재판에 회부하는 등의 방해.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나 합법적이고 복음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항일 운동을 전개했던 투철한 정신을 보여줌. 패물폐지 ==> 패물을 국가에 바침

감선회운동 : 식사때에 반찬을 줄여 먹는 운동. 감선: 국난을 당했을 때에 임금이 삼가고 절제하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이기 위해 반찬 수를 줄이는 것. 교회는 이 운동을 일으켜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에서 교인들이 사치스럽게 찬을 먹는 것을 경계하고 절약의 정신을 보여줌. 부산 사천리에서 조직.

물산장려운동 : 교회의 경제적 항일 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난 운동. 19207월 평양에서 조만식에 의해 주도된 물산장려운동. 이 운동의 목적은 민족단결, 협동정신, 상부상조, 생활개선 등 다양. 그 중에 국산품 애용운동이 주축을 이룸. 조만식: 전통한벅을 개량하여 입고, 말초모자, 짧은 두루마기, 편리화를 착용 보편화시킴. 짚신. 짧은 머리. “한국의 간디로 알려짐. 일반 대중들에게 국산품 보급과 생활개혁을 통해 항일정신을 불어 넣음. ‘물산 장려가

교회의 항일은 일제가 이 강토를 강점하기 시작한 때부터, 1930년대 말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우상 앞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 꿋꿋한 지속적으로 내려옴. 비록 변절자나 친일분자도 적지 않았지만, 생명을 내놓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조국과 신앙을 지킨 지사와 순교자들이 우리 교회 안에 그 맥을 이어옴을 볼 수 있음. 방법론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었고 비복음적, 비성경적인 요인도 없지 않았지만 애국이라는 그 공통분모만은 결코 잊지 않음.

* 개성은 일본품을 사용하기 않아 일본 상권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 한국은 작년에 250억 달라의 적자를 보았다.

 

9장 교회의 조직과 일제로부터의 수난

 

1. 한국 교회의 조직

1) 장로회신학교의 시작과 독립노회의 창립

* 장로회신학교의 태동 및 발전과정

태동: 1901년 평양에 있던 마펫이 평양 장대현 교회 장로였던 김종섭, 방기창,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 사 리(G. Lee)와 함께 자기집 사랑방에서 신학교육 실시한 것이 효시

발전과정: 6인의 신학 교육 위원으로 신학반 지도

1902. 5년간의 신학 교육 결의

1903. 조사(helper) 양성을 위한 특별과정 채택

1904. 교수 지원 요청- 북장로 교회의 언더우드, 남장로 교회의 전킨, 캐나다 장로 교회의 푸트,

평양거주의 선교사들(베어드, 스왈른, 하이셀, 블레어) 출강

*1907. 6. 20. 첫 졸업생 배출- 길선주, 방기창, 송인서, 한석진, 이기풍, 양전백, 서경조 장로회신학교라는 공식 명칭 갖게 됨

1915. 등록학생 수 250명 넘음-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라는 말을 들음

1920년대 후반. 최초의 한국인 교수 남궁혁, 박형룡 교수 시작

Presbyterian : 희랍어의 장로가 πρυτερος에서 유래(presbyter church)

* 독립 노회 창립

원인: 신학교 졸업생들 목사안수를 위한 노회 창립의 필요성 대두

창립 노회: 1907. 9. 17. 장대현 교회에서 개최

초대 노회장: 마펫 선교사

신앙고백 채택: 인도 자유교회의 12신조 채택(독립된 신앙고백을 갖지 못하는 아쉬움) 철저한 칼빈주의적 입장지나치게 폐쇄적인 교리

전도부 설치: 노회 창립 기념으로 이기풍 목사 제주도에 파송

1909. 김영제 목사 북간도에,

김진근 목사 서간도에 파송(백만명 구령운동의 일환)

최관흘 목사블라디보스톡에 파송(50여 교회 창설 및 노회 설립)

한석진 목사(1회졸업생)동경에 파송

이선광 목사제주도에 파송(평양여전도회에서)

방화중 목사미주지역(캘리포니아, 멕시코)

7대리회: 노회의 위임 사항을 처리하기 위해 7대리회 구분

함경, 평북, 평남, 황해, 경충, 전라, 경상

 

2) 장로교회 총회 창립과 해외 선교의 시작

총회 창립: 1912. 9. 2.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개최

초대 총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 총회 (General Assembly), 당회(Session), 노회(Synod), 전국장로총회(World Allience Reformed Ch)

이로써 한국의 장로교회는 세계장로교회와 세계교회의 일원

첫 사업: 해외 선교부 조직

한국의 정체성을 갖는 최선의 방법

1970. 마틴 마티(미국, 교회사가, 시카고대학교수)-국가의 정체성과 선교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중국 산동성(내양현) 선교: 첫 선교사 파송 - 김영훈, 사병순, 박태로 -> 처음 중국인을 한국인이 가 르침, 항상 중국으로부터 한국은 배워오기만 했다. 영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한국

서양선교사들보다 유익한 점: 한자사용의 용이

* 선교가 국가의 정체성 유지 - 여권을 일본것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말과 음식을 먹음으로 중국사람들

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인식

첫 수세자: 장수명(70세의 학자)-김영훈 목사가 지방관에게 보낸 한시를 읽고 감동하여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임

선교 구역 확대- 평도, 즉묵, 해양, 누하 등지로

 

3) 교인들의 훈련

한국인들의 감정적인 성격으로 엄격한 신앙 훈련 실시

수세시의 신앙고백문 -1. 조상신숭배금지(오직 하나님께만)

2. 주일 엄수 3. 부모 공경

4. 일부일처 5. 찬송과 기도로 자기집을 돌아볼 것

6. 나태, 거짓말, 도적질, 방탕 등 금지 7. , 노름 금지

 

4) 감리교회의 조직 - , , 카나다, 호주가 합쳐 감리교 조직

* 미북감리회

1897. 서울 구역회 설치

1901. 3개 지방회로 분류- 서지방회(인천중심), 북지방회(평양중심), 남지방회(서울중심)

1905. 6. 한국선교연회(The Korea Mission Conference)로 조직 확대

1908. 3. 한국연회(The Korean Annual Conference) 창설 - 감리 교회의 완전한 조직(정동 교회) 해리스(M.C.Harris) 주재.

* 미 남감리회

1897. 9. 지방회 조직(중국연회 소속)

12. 한국선교회로 독립

1914. 한국연회 조직

1918. 10. 한국연회 정식 출범- 맥머리(W.F. McMurry)주재

* 북 감리교회의 통합

1930.“조선 감리교의 합동과 조직에 대한 성명서" 발표

12. 2-12일 조선감리교회 창립총회 개최(합성신학교에서)

기독교 조선 감리회 탄생

1대 통리사: 양주삼 목사 추대

 

5) 성결교회의 시작

* 모체: 동양선교회-1901. 동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표로 일본 동경에 왔던 카우만킬보른 두 선교사 에 의해 시작된 선교 단체

카우만-미국 오하이오 출신. 전기기술사로 일하다가 1894. 9 시카고의 무디 교회에서 있었던 선 교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선교사로의 결심. 무디 성경 학교에서 수학 후 감리교회에서 목사안수.

1901. 아내와 함께 무일푼으로 동경에 도착.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이라는 간판 걸고 전도 시작

킬보른-1902. 직장 동료 카우만의 전도로 신학 공부. 같은 해 감리교회에서 목사안수. 카우만의 요 청으로 동경에서 시카고의 무디 성서 학원의 본을 받아 성서학원 개설. 전도자양성에 힘씀

190411월 전도관과 성서학원을 결합하여 동경에서 동양 선교회창설

* 성결교회의 시작

태동: 1907. 5. 동경의 성서학원에서 공부를 마친 김상준, 정 빈이 서울 무교동(, 성결교회의 본부 위치)에 집 한 채를 사고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달고 전도를 본격화하기 시작. 이 후 일본 동양 선교회에 지원 요청하여 경성 성서 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이란 이름의 새 교사 건축.

* 진행과정: 1910. 12 영국인 존 토마스 초대감독으로 내한(부인병들자 귀국)

1914. 7. 독자적 목사 안수: 김상준, 이장하, 강태온, 이명직, 이명헌 등 5명의 첫목사 장립 1920. 킬보른 제2대감독으로 내한, 교세 확장

1921. 전도관, 교회 체제로 전환.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명칭 시작

1922. 교단지 활천창간

1929. 2. 성결 교회 제1회 연회 개최

1932. 선교구역 확대: 봉천과 하얼삔에 선교사 파송

1936. “대한기독교 하나님의 교회분립

 

6) 구세군

* 구세군의 탄생: 영국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드와 그의 부인 캐더린이 창시한 종교단체

19세기 영국 산업 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빈민들을 위해, 전도, 자선 및 사회 사업을 목적으로 출발. 본래 "동 런던 부흥전도단" 또는 "기독교전도단"이라는 이름에서, 부드가 "기독교인의 사명은 구세군 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1878년부터 구세군이라는 명칭이 붙여짐.

* 한국에서의 구세군

1908. 10. 호가드 정령 일행이 새문안에 영()을 설치하고 전도 시작

1909. 구세군 사관학교 설립, 사관양성

호남 지역 선교-전주에 교두보 확보하고 로드와 그 부인 파송

 

7) 침례교회의 조직

1900. 펜윅 단독 선교

- 원산을 중심으로 1901년 엘라 딩 선교회의 사역을 한국순회선교단과 병합하여 한국에서의 침례회 선 교의 교두보 확보

1906. 10. 충청도 강경의 강경교회에서 전 사역자 소집

교회의 성격을 인류의 선결은 화목이요, 그리스도인의 선결도 화목이라 하고 조직의 명칭을 대화 회라고 정함. 교단명칭은 대한기독교회로 정함

초대감목(총회장) 펜윅 선출, 교회 본부는 원산에 둠

명칭의 수정: 대한기독교회 동아기독교회(1921) 동아기독대(1933)

 

8) 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 안식일 교회의 연원: 19세기 중엽 미국의 경건한 침례교도였던 농부 출신의 윌리엄 밀러에 의해 연원.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계시록을 열심히 읽고 공부하던 윌리엄 밀러가 1843년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외쳤을 때, 그를 따르던 무리들 중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 만든 교회 예수재림 제7일 안식일교회이들은 안식일에 예배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을 금지함

* 한국에서의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시작: 1904년 하와이로 이민 떠난 손홍조와 하와이 개발공사 직원이었던 임기반에 의해 도입.

손홍조, 일본에서 잠시 머물 때 제7일 안식일 재림교회의 구니아 히데 목사에게서 침례를 받음으 로써 한국인으로는 첫 안식교도가 됨.

- 교리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자, 일본의 구니아 목사와 미국인 선교사 필드가 1904 년 내한하여 전도시작.

- 경의 교리보다는 안식일을 더욱 강조. 여타교회와의 충돌 불가피. 안식일 성수 주장으로 이단 정죄.

 

2. 교회의 수난

1) 일제의 기독교 정책 ==> 말살정책

초대통감 이등박문-우호적 입장

초대총독 사내정의- 반기독교적 입장

민족의식을 고취한다고 판단된 기독교 학교에 일본 천황의 사진 걸고 사진에 절하도록 강요.- 우상 숭배를 금하는 기독교의 가장 중심 교리에 도전

1909년 백만명 구령운동, 일제에게는 교회가 조직적으로 항일운동을 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인식.

사내정의 - 교회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집단이라고 판단.

 

2) 해서교육 총회 사건 - 안악 사건

-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여, 깊은 신앙심과 후세 교육에 열성을 보이면서 기독교 세력이 가장 강한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교계 지도자들을 사전에 억압할 필요를 느낀 일제는, 1908년 황해도에서 김 구, 최광옥, 도인권 등 기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해서교육총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한 면에 한 학교를 세워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국민을 계몽할 것을 다짐하자, 이를 항일을 위한 작업으로 받아들임. 이 때,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의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울 자금을 모금하려고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경에게 체포. 일제는 안명근을 내란미수죄로 기소하면서, 해서교육총회의 회원 모두를 체포하여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이에 따라 안명근은 종신징역, 김 구등 7명은 15, 기타 여러 회원들은 10년에서 5년까지의 중형 선고.

40여명 유배 해서 교육 총회 사건, 안악 사건.

 

3) 105인 사건 ==> 평안도지역 교역지도자 박멸

- 총독부 경무총감 겸 조선 헌병 사령관 명석원이랑이 서북 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일망타진하려 고 한 음모 사건. - 데라우치 암살 음모

- 평양 지방: 당시 한국 기독교의 중심으로서 막강한 지도력과 교세, 항일적 요소가 짙게 배어 있음. 1907년 안창호가 신민회 조직

신민회의 취지에 따라 한국인들에 의한 학교들이 강력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설립.

안창호, 대성학교 설립 남강 이승훈, 오산학교 설립(평양 정주)

선교사들, 숭실학교(평양), 신성학교(평북 신천) 설립 - 민족사상, 배일사상

- 사건의 전말: 일제는 105인 사건을 사내(데라우치) 총독 모살 미수 사건으로 규정.

사내총독이 19101227, 압록강 철교의 낙성식에 참석하기 위해 선천역에 잠시 하차하여 선교사 매큔과 악수를 하는 순간, 안태국, 이승훈의 주도로 평안도내의 유력자 60명과 선우 혁이 인솔한 20여명, 그리고 황해도에서 온 20여명이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경비가 삼엄하여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각본을 만들어, 평안도 일대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일제히 체포함. 이 때,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105이었으므로 105인 사건이라고 함. 그러나 105인 모두가 판결에 불복하여 99명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주모자급 6인에게만 6년을 선고함.

- 선교사들의 역할: 선교사들과 미국 본국의 역할이 큼. 평양에 거주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해외 선교부 총무 브라운에게 이 사건의 전말을 보냈으나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황성 기독청년회(YMCA) 총무로 일하던 질렛(P.L. Gillet)이 중국에 있는 친구에게 알림. 그 후 세계 각 잡지에 게재되면서 세계여론의 초점이 됨.

 

4) 기독교 학교의 탄압과 개정 사립학교 규칙 ==> 선교사들은 학교 세우지 말고 예배 하지 말라

- 일제는 기독교세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억압하고 고사하는 방법으로 기독교계 사립학교를 탄압하는 방 법을 사용함

- 1915. 3. “개정시립학교규칙공포. 조선교육령보다 더욱 엄격한 내용으로, 성경 교육 제외와 예배 철폐 등의 학교 존립과 관계되는 규정을 만듦.

- 기독교 학교의 시련: 취직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학생들의 불만.

감리교회와 장로교회 선교부의 이견. (학교의 폐교보다는 총독부의 규칙을 지키면서 교육을 계속하겠 다는 감리교의 입장과 폐교가 불가피하다는 장로교회 선교부의 의견 차이).

- 수적인 감소: 2080(1910) 1154(1915) 649(1923)

-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라는 표방 아래 성경교육과 예배허용이 이루어짐

 

5) 일본 교회의 조선 교회에 대한 정책

-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조선 교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일본 교회에 흡수시켜 버릴 계획을 세워 의도적으로 일본 조합교회를 조선에 이식시킬 것을 획책함. 도뢰상길이라는 인물이 앞장섬.

 

6) 교회 내 분쟁

- 최중진의 자유교회 및 기타 자유 교회 운동

교회 최초의 분열- 호남지역 제1호 목사였던 최중진 목사가 장로교회를 탈퇴하여 자유교회를 설립해나가면서 발생. 19101월 전주에서 모이는 전라 대리회에서 자신의 요구가 거부되자, 전라대리장 선교사 불(W.F. Bull)에게 서한을 보내 대한 예수교 자유회 목사라 칭하면서 자유 교회선언. 지역 선교사들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이 운동은 선교사들로부터의 자립을 내세움.

- 김장호의 조선기독교회

김장호: 한국 장로교회 안에서 최초로 자유주의 신학을 부르짖은 사람. 190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쿤즈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 1909년 평양장로회신학교 제7회 졸업생. 자유주의 신학의 주장에 따라, 모세의 홍해도하를 갈대밭사이를 건넌 것으로, 예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군중들이 도시락을 싸온 것으로 해석.

-> 1916. 6. 황해 노회에서 총대자격 박탈.

조선기독교회: 노회의 결의에 불복한 김장호는 노회 탈퇴를 선언하면서, 곽기호 외 13명과 함께 정 (正信)의 교회, 동양인의 교회, 국민의 교회를 표방하면서 조선기독교회 창립

문제점: 신학적 문제 - 보수신학에 대한 비판

일본적 기독교화의 경향(반선교사, 반교권) - 내선민족 곧 일본과 조선의 민족적 불가 분리성 주창. 3.1운동 맹비난.

- 이만집의 자치선언

이만집: 경북노회 소속. 1900년경 아담스의 전도로 기독교 신자. 평양 장로회 신학교 10회 졸업생 (1917)

자치선언: 발단-남성정교회(이만집 목사 담임)의 한 청년이 당회에 교회내의 문제를 건의하는 서한을 제출한데서 비롯. 이 청년에 대해 출교처분하자는 강경측과, 책벌만 하자는 온건측(이만집)으로 대립으로 문제 확대. 노회가 강경측을 지지하자, 불만을 품은 이만집 목사 자치선언. 10년간의 지리한 법정 싸움 끝에 노회의 승리로 끝남.

영향: 대구의 10개 교회와 영양의 3교회, 경주의 1교회 가담. 그러나 개교회 사건으로 끝남

선교사 배척정책을 쓰던 일제에 협력하는 꼴이 되어버림.

* 조직이 교회에 해가 되었으나 조직을 없앨 수는 없다. 조직이 있어야 교회가 유지한다. 노회가 없

으면 목사 안수할 수 없다. 그러면 사도적 전승이 무너질 수 있다.

* 사도적 전승(예수님의 12제도속사도감독후속1907독노회,길선주 미카호연합인정1970)

* 목사는 평신도지만 장로가 없는 성례집행권과 설교권이 있다.

ex) 도나티스트 논쟁 : ex opere operato (그 성례 자체에서 효력이 나온다)

- 도나티스트 감독이 로마에 의해 배교한 사람들이 죽음 면하고 살다가 다시 교회 왔을 때 절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배교한 죄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함(노바티안 novatian 장로), 평신도는 가능할지 모르나 감독은 절대 안된다고 함. 감독은 성례를 집행하는 사람인데 성례의 손은 피가 묻은 손이다. 더러운 손으로는 효력이 있을 수 없다.

-> 어거스틴은 성례의 효력은 성례자의 도덕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해 효력이 나오는 것이다.

 

7) 춘원 이광수의 교회비판

- 1917.3. 청춘11호에 금일 조선야소교의 결점이라는 글에서 교회 비판

비판내용 : 계급적, 교회지상주의, 교역자들의 무식함, 미신적(기도만능설).

1918. 9. 매일신보에서 신앙고백이나 교리 해석 한 권도 편찬하지 못한 교회 비판.

- 기독교적 휴머니즘의 영향 :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남강 이승훈과 조만식 장로로부터의 영향 및 톨스토이의 기독교 휴머니즘에 영향. 그의 저서 무정, 재생, , 유정등에서 엿보임.

 

 

 

 

 

 

 

 

10장 한국교회와 31독립운동

 

1. 운동의 기원: 한일합방 후 일제의 대한정책에서 기인

동화정책 및 우민화 정책

경제적 수탈 자행 - 토지 조사령, 조선 자원 빼앗음

퇴폐문화 유입 정책 - 공창제도 도입, 아편 재배, 술과 담배 전매, 화투 보급

* 화투는 놀음으로 가정파괴되고 살인과 싸움을 일으킴

* 공창이란 일본창녀를 조선에 유입시켜 조선 젊은이를 유린하게함

* 조선에 양귀비를 공짜로 보급함

교회에 대한 조직적 억압 - 교회의 허가제 실시

직접적 동기: 1917.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원칙 발표

19191. 22 고종 황제의 갑작스런 붕어

 

2. 진행과정

- 3.1 운동 이전의 독립의 움직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라 전개)

1918. 4.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담에 대표단 파송

여름. 신한 청년단 조직(여운형, 장덕수, 선우 혁 중심)

여운형, 1차 세계 대전의 마무리를 위해 중국을 방문함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에게 만국 평화회담에 대표단 파송 협조 부탁. 이듬해 김규식 한국대표로 파리회담 파견...

1918. 12.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파리회담에 대표단 파송.

1919. 2. 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식 거행 - 3.1 독립운동의 도화선

- 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논의

천도교 - 1919. 1. 권동진, 오세창, 최 린, 교주 손병희 등이 독립운동 3원칙 합의

독립운동의 3원칙-독립운동의 대중화, 독립운동의 일원화, 독립운동의 비폭력화

기독교 - 선우 혁, 이승훈, 양전백, 길선주 등이 상해에서 그리고 박희도, 이갑성, 김원벽 중심으로 서울에서 독립운동 계획

불교 - 한용운, 백용성 동참

- 민족대표 결정

기독교인 16, 천도교측 15, 불교 2인 등 33명 결정

- 3.1 운동 시행

장소: 서울 종로 인사동 명월관 및 파고다 공원

참석자: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 참석. 33인중 13명이 기독교인

인사동 명월관에 모여있는 민족 대표들이 체포되자 파고다공원에서 기다리던 수많은 군중들은 경신학교 졸업생이며, 교회학교 교사였던 정재용이 독립선언문 낭독하자, 일제히 대한독립만세 외치기 시작. 서울 뿐 아니라 평양, 진남포, 안주, 신천, 의주, 원산 등 전국 각지에서 행해짐, 그후 전국적으로 약 6개월 동안 진행...

 

3. 교회의 피해

일제의 잔혹한 탄압-평남 강서 학살사건, 정주 학살 방화 사건, 서울 십자가 학살 사건, 의주 예배당방화사건, 천안병천 학살 사건 수원 제암리 사건

 

4. 선교사들의 관여 문제

- 이 당시 선교사들은 선교 현지에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언제나 중립을 지킨다는 원칙을 지킴. 그러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일제가 폭력적으로 진압하자, 선교사들은 중립적 태도만 취할 수 없다고 판단, 일제의 만행을 해외에 알리기 시작. 세브란스병원에서 일하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가 가장 큰 역할을 함.

스코필드: 제암리에서의 일본 군인의 만행이 담긴 사진과 꺼버릴 수 없는 불(Unquenchable Fire)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전 세계에 일제의 만행을 고발.

- 이 때, 미국 교회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함: 신흥우(배재학당 교장이며 평신도 지도자)19195월미국에서 열리는 미 북감리 교회 100주년 기념 대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출국하여 대회의 의장이었던 노드에게 한국의 시위 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알림.

- 선교사들의 피해

모우리(E. M. Mowry):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한 학생들을 자기 집에 은신시키고, 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선교부에 보낸 혐의로 6개월 징역형

매큔(G.S.McCune): 교회 지도자들과 운동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추방

마펫: 세계선교사대회에서 한국 독립을 지원하는 강의를 했다는 이유로 구금

토마스(동양선교회 소속): 운동에 협조했다가 헌병에게 구타.

그 밖의 선교사들 운동에 협조했다가 많은 박해(노불(W.A.Noble), 빌링스(B.W.Billings)(감리교 선교사) 등등)

 

5. 결과

민족을 하나로 묶어놓는 결과를 가져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창설하는 결과를 가져옴 - 상해임시정부는 4000년 만의 민주주의 정부

일제의 한국에 대한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의 전환을 가져오게 함

- 동아일보, 조선일보, 제한적 성경 가르치게함

기독교가 가장 애국적이며 민족 사랑의 종교임을 주지시킴

3.1 운동 이후 교회로 사람들이 몰리는 결과.

* 독일 신학자 Ernest Troeltsch 'The Social Teaching of Xn Christ'

- Church Type : 조직악-세상과 타협 ==> 길선주(교회중심, 사경회 말씀, 건전부흥)

- Sect Type : 세상과 결별-은둔적소집단적동질적집단 ==> 김익두(불량배출신, 신유치병은사, 짧음)

- Mysticism Type : 개인으로 혼자서 주님과 만남 ==> 이용도(병기도은사, 자유인,폐병사망이단)

 

 

111920-30년대 교회상황

 

단답식 대비

1. 길선주 :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하나로 1907년 대부흥운동의 기수로서 1920년대 교회 신앙사경회를 이끄신 목사님.

2. 김익두 : 1920년대 신유의 기적을 통해서 교회 부흥을 일으킨 목사님.

3. 이적 명증회 : 김익두 목사의 이적이 의심을 받자 임택권 목사가 중심이 되어서 만든 모임.

4. 조선기독교도 연맹 : 해방후 김익두가 강양욱의 회유에 못이겨 함께 만든 공산당의 어용 기독교 단체로서 김익두 목사는 초대 총회장이 되었다.

5. 이용도 : 감리교의 목사로 1920년대 신비주의 부흥운동의 기수. 그의 독특한 신비주의는 1932년 이용도를 이단으로 정죄하기도 하였다.

6. 유명화 : 원산 감리교회의 여자 평신도로서 1927년 그녀는 입신하여 강신극을 벌였으며 이용도는 그에게 엎드려 주님이라고 하였다. 백남주, 이용도 등과 함께 예수 교회를 만들었던 대표적인 사이비 접신파.

7. 황국주 : 황해도인으로 100일기도후에 목가름, 피가름을 주장하며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한 사람. 1933년 이단으로 정죄됨. - 통일교의 문선명 교리에 영향

8. 김교신 : 1927성서조선을 만들어 그의 스승인 내촌감삼의 뜻을 따르는 무교회주의자. 그는 2C(Christ, Chosun)를 사랑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 교회는 2000년 동안 교리조직예전역사정치가 있는데 무교회주의자는 모두 무시하고 오직 성경만 강조

* 무교회 주의의 문제 : 모이기 위해 장소, 겨울엔 난로, 석탄 사와야 함. 예배위해 경비필요, 헌금관리

- 신학교 목사 없으니 세례와 성례 할수 없게 됨. 예수님 명령 거부 결과

* 손기정 선수를 훈련, 학생들이 김교신교수 때문에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함.

9. 최태용 : 함남 영흥 사람으로 내촌감삼의 영향을 받은 무교회 주의자로서 1935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한 사람. 이것이 후에 복음교회가 되었다.

10. 적극 신앙단 : 1932YMCA 총무인 신흥우가 중심이 되어 만든 단체로 민족주의, 자유주의신학의 경향을 가진 단체이다. - 반 선교사, 반 서북지방, 반 보수주의 신학

어거스틴 : Whatever is is good.(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선하다)

 

서술형

1920년대와 30년대의 교회의 상황을 논하시오.

- 3.1 운동이후 교회는 겉으로는 약간의 자유가 보장된 듯 하지만 일제의 억압은 꾸준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의 구원과 교인들의 신앙적 각성과 부흥을 위하여 사경회와 부흥회를 이끌고 갈 지도자를 마련해 두셨는데 바로 1907년 대 부흥운동의 기수인 말씀의 사자 길선주 목사와 전무후무한 신유의 기사를 행한 김익두 목사와 감리교회 목사로서 한국교회의 신비주의의 전형을 보여준 이용도 목사가 그들이다.

길선주 목사는 민족대표 33인중의 하나로 독립운동으로 있은 2년동안 요한 계시록을 거의 외워서 말세학이라는 계시록 강해집을 만들어서 말세학 사경을 주도하였다. 당시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에 밀려 암울한 현실에서 갈길을 찾던 교인들과 민족에게 종말과 재림 사상을 가르침으로 새하늘과 새땅의 비젼을 보게 하였다. 그는 우리의 것을 사랑하고 우리의 문화를 수호할 것을 외치던 민족의 선각자로서 마지막까지 복음을 외치다가 결국 강대상위에 쓰려져 순교하였다. 김익두 목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 3회 졸업생으로 신유의 은사로 초기 부흥운동에 기사 이적이 나타난서 사도행전의 기사를 20세기에 재현한 사람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는 191912월 경북 달성 현풍교회에서 불구자를 고치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낳게 하였다. 이에대해서 비판적 견해를 갖는 사람이 나타나자 황해도 재령의 임택권 목사가 이적 명증회를 발기하여 책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는 776회의 부흥회를 이끌었고, 28천회의 설교와 150개의 교회를 신축했고 그의 감화로 목사가 된 사람이 200, 치유받은 자가 1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의 생은 한마디로 복음을 위한 삶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해방된후 이북에서 강양욱의 회유와 협박에 못이겨 조선기독교도 연맹에 가입하여 초대 총회장이 되었지만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용도 목사는 길선주, 김익두와는 달리 독특하게 부흥회를 이끌었는데 바로 개인의 영적 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한다. 그러나 그의 이단성은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합일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성애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는데 있다. 마침내 장로교 총회는 1932년 이용도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장로교회에 그의 출입을 봉쇄하였다. 결론적으로 이용도의 부흥운동은 장로교회 목사인 길선주, 김익두의 부흥회와는 달리 독특한 방향에서 출발하여 결국 이단정죄로 끝나는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길선주 목사의 부흥이 철저한 성경공부에 기초하고 있었고, 김익두 목사의 부흥이 신유의 이적 역사에 기초하고 있었다면 이용도 목사의 부흥은 이 목사 개인의 영적 체험에 근거한 신비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12 장 사회적 변화에 대한 교회의 대응

 

1.공산주의 사상의대두

3.1 운동 후 일제의 문화정책으로 각종 사상과 지식이 밀려들어왔고 이때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 사상도 소개되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3.1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이 좌절되고 기독교가 주축이 된 독립운동에 미국이 소극적 입장을 보였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교회에 실망하며 새로운 세력인 공산주의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은 과격한 모습이 아닌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 공산주의는 반대하는 것은 적으로 간주하여 모두 없애() 혁명을 일으키고자 함

- 기독교와는 공존할 수 없다.

1) 한인사회당 - 조선인이 만든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연해주의 이동휘, 김립, 박진순 등이

중심이 되어 1918년 결성.

2) 한경희 목사 - 만주로 총회 파송받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공산당에 의해 순교.

김영희 목사 탈피해서 죽임

 

 

3. 교회의 농촌문제 대처

1920년대 농민은 전체 80%, 한국교회는 75%가 농촌교회. 농촌문제 전문 선교사 러츠가 내한하여 농작물 개량법, 토지 개량, 윤작제, 등을 가르쳤고, 농민지도자 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YMCA가 특히 많은 노력을 하였고, 언더우드 선교사도 농민들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소개, 계몽하였다.

 

1) 그리스도 신문(The Christian Times) - 언더우드가 발행, ‘농리편설의 제목으로

농민들을 위한 농사개량법과 여러 가지 농사법을 소개, 계몽.

2) 러츠 - 농촌문제 전문 선교사. 농작물 개량법, 토지 개량, 윤작제, 등을 가르쳤 농민지도자 훈련에 심혈을 기울여 숭실전문학교에 농과 신설에 큰 역할.

 

4. 사회계몽운동

처음의 선교사들은 교육, 의료,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20-30년대에는 선교사 주도에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사회계몽운동이 전개됨. 일제는 문화정치로 젊은이들을 퇴폐문화에 젖게 하여 한민족 말살정책을 진행함. 이에 교회는 절제회, 금주운동, 금연금아편운동, 공창폐지운동, 성경구락부, 수양동우회 등을 통해 민족정신을 잃지 않도록 계몽하였다.

1) 절제회 - 1923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에서 틴링을 파송하여 절제운동을 펼쳐, 여자절제회가 창설되 고 교회를 중심으로 금주, 단연운동, 물산장려운동을 전개.

2) 금주운동 - 절제회가 가장 역점을 둔 사업. 구세군이 가장 적극적. 교회는 1938청소년 보호법을 통해 미성년자들에게 술, 담배를 금하는 법령을 만들게 하는 일을 성사.

3) 공창폐지운동 - 일제가 공창제도를 강화하자, YMCA 단체들이 기생조합 폐지, 무당, 판수조합 폐지 등 을 강력히 요구, 미 감리회 연회의 위촉으로 공창폐지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

4) 성경구락부(Bible Club) - 킨슬러가 시작한 운동으로 빈민 자녀들 교육을 위한 야학으로 시작한 활 동. 좋은 호응이 있자 일제의 탄압이 있어 성경만 가르치는 기관으로 성경구락부로 이름을 바꾸 고 계속 사업을 진행. 신사참배문제로 폐쇄되었다가 해방 후 많은 수가 정규학교로 승격되었고, 40개 는 기독교 학교로 승격.

5) 수양동우회 사건 - 안창호 선생이 미국에서 조직한 흥사단이 국내에서 수양을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 일제는 탄압할 핑계를 찾던 중 청년단체들이 절제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든 홍보 전단을 트집잡아 지도 층 인사들도 체포, 고문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변호인을 통해 전원 무죄 석방됨. 길선주 목사님 투옥

 

5. 신학적 갈등

1) 진보의 대립 - 한국의 교회는 기존의 보수세력과 해외유학파 간의 신학적 갈등이 대두. 평양 산정현 교회 송창근 목사의 신학이 진취적이라는 이유로 처음으로 신학적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장로회신학교의 박형룡과 자유주의 신학의 숭인상업학교 김재준의 갈등이 대표적. 김재준은 신학지남에 축자영감설을 거부하는 글과 선교사들이 고루한 정통신학을 한국교회에 주입했다는 글의 실음으로써 성서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박형룡과 신학적 대립.

2) 창세기 저자문제 -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가 1934년경 창세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함으로 논란 야 기. 후에 주장을 철회.

3) 김춘배 목사가 기독신보에 교회 안의 여권문제를 다루어 문제.

4) 아빙돈 단권주석사건- 신생사 출판의 아빙돈 단권주석의 정통성에 관한 문제. 감리교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유형기 목사 책임하에 번역, 출판. 번역자들 중 장로교 목사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목사 등이 포함되었는데 박형룡 박사는 내용이 장로교 전통 신앙에 위배되고, 집필자 대부분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임을 지적하며 문제시. 이에 한국 장로교회 총회는 1932년 신조개정을 결의하고 이듬해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채택, 성경의 절대권위를 확립하였다.

 

13장 일본 군국주의 통치하의 교회의 시련

 

* 난세에 목회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

타협 : 집이나 교회에서 목회

도피 : 해외, 대부분은 국내 남음

저항 : 감옥, 곧 순교

* 일본 천왕도 신이다. 예수그리스도와 일본 천왕 중 어떤 신이 더 큰가?

-> 99.9%의 목사들이 동의하고 일본천왕은 신판 받지 않는 다고 함

* 주기철 목사님은 순교를 각오하고 반대 및 저항, 예수님 오시면 천왕도 심판받는다.

 

신사참배옛날의 천황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민족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일본화하여 한국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이다.

 

내선일체란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 민족의 일부이며, 소위 흥아(興亞)적 민족 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 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라는 주장이다.

 

매큔(G.S.McCune) 과 스눅크(V.L.Snook): 매큔(G.S.McCune) 과 스눅크(V.L.Snook)는 각각 숭실중학교 교장과 숭의여중 교장으로 1935년 도내 공사립 교장회의에서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절하고 파면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하였다. 이들 대신 다른 교장이 자리를 대신하였으나 거절하기 마찬가지여서 학교는 폐교되었다.

 

홀드크라프트(J.C,Holdcroft) : 홀드크라프트(J.C,Holdcroft)는 북장로교 선교사로 신사참배가 문제가 되자 신사문제를 연구하여 보고하라는 부탁을 받고 1937310일 장문(長文)의 보고서를 통해 신사에는 종교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므로 참배는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노구교사건이란 193777일 일본군이 북경 교외의 노구교 부근에서 야간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중국군이 기습을 가해 왔다고 하여 일본 관동군 정예부대가 중국군 진영을 습격했다고 허위 날조한 것을 말한다.

 

일만일체 (日滿一體) : 일본과 만주가 한 몸이다.

선만일여 (鮮滿一如) : 조선과 만주가 하나이다.

내선일체 (內鮮一體) :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다.

 

창씨개명 : 일제는 1940년 일본 기원 2600년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한국사람들은 그들의 성을 개명하는 소위 창씨개명을 실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양주삼 목사 : 감리교회 목사로 당시 총리사였다. 19366월에 개최된 제3차 연회에서 총독부 초청 좌담회에 다녀온 후 신사참배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정책

아시아 제패를 위해 한국을 그 전초기지로 삼으려 한 일제는 한국민을 철저하게 황국신민화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착안한 것이 신사참배이다. 신사참배는 옛날의 천황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민족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일본화하여 한국을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이다. 1919년 일제는 조선 신궁을 건립할 것을 결의하고 1925년에 남산 중턱에 조선 신궁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여 신사 참배를 강요하시 시작하였다. 내선일체란 한국 민족은 일본 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 민족의 일부이며, 소위 흥아(興亞)적 민족 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 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 민족을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라는 주장이다. 일제는 먼저 통제가 학교부터 신사참배의 공략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기독교계에도 압박을 가하였다.

 

2. 기독교 학교에 대한 억압

일제는 신사참배로 기독교와 정면 충돌하는 것을 피하고 이것이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리고 먼저 각급 학교에 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것은 기독교 학교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음모였다.

1923년 일제는 춘계 황령제를 열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선교사들이나 교사들이 참석할 수 없다고 하자 제사행위에는 참석하지 말고 국민의례에만 참석하라고 하여 숭실전문, 숭실중학, 숭의여중학교가 이 예식에 참석하였다.

매큔(G.S.McCune) 과 스눅크(V.L.Snook)는 각각 숭실중학교 교장과 숭의여중 교장으로 1935년 도내 공사립 교장회의에서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절하고 파면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하였다. 이들 대신 다른 교장이 자리를 대신하였으나 거절하기 마찬가지여서 학교는 폐교되었다. 북장로교계 학교의 폐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서울의 연희전문도 1941년 총독부에 넘어가고 말았다.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신사문제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홀드크라프트(J.C,Holdcroft)는 에게 신사문제를 연구하여 보고하게 하고 홀드크라프트는 1937310일 장문(長文)의 보고서를 통해 신사에는 종교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므로 참배는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남 장로교회는 북장로교회보다 이 문제에 더욱 강경하였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결의에 따라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각급 학교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감리교회계 학교들과 캐나다 선교회 계열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받아들여 어려움 없이 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3. 교회 지도자들의 굴복

일제는 19377월 노구교사건을 일으켰다. 노구교사건이란 193777일 일본군이 북경 교외의 노구교 부근에서 야간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중국군이 기습을 가해 왔다고 하여 일본 관동군 정예부대가 중국군 진영을 습격했다고 허위 날조한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을 핑계삼아 일제는 중일 전쟁을 시작하면서 기왕에 시작된 신사참배를 교회에까지 확장할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남차랑 총독은 도지사 회의를 소집하여 일만일체 (日滿一體 : 일본과 만주가 한 몸이다.) 선만일여 (鮮滿一如 : 조선과 만주가 하나이다.) 내선일체 (內鮮一體 :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다.)를 주장하여 11신사를 세웠다.

일제는 1940년 일본 기원 2600년을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한국사람들은 그들의 성을 개명하는 소위 창씨개명을 실시하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국민징용령에 의하여 강제 연행이 시작되었다.

먼저 신사참배를 수용한 교회는 로마카톨릭이었다. 1918년 신사는 종교임을 명시한 일이 있으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3국 동맹을 맺은 후 태도를 바꾸어 19365월 교황 비오 12세는 포교성을 통하여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이를 허용한다고 하였다. 이어 안식교가 1936년 신사참배를 가결하였고 성결교회,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회까지 참배를 결정하였다.

 

4. 굴절된 교회의 모습 - 장로교회의 굴복

일제는 우선 각지에서 모이는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공작하였다. 19382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평북노회는 전 일본 헌병 보조원 출신의 친일파 목사 김일선이 노회장으로 선출되고 나서 그의 주동으로 선천 남교회에서 모인 노회에서 신사참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9월까지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굴복하고 말았다.

일제는 총회가 개회되기 전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주기철 목사 등은 미리 투옥하고 193899일 오전 8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차 총회에서 총회장에 홍택기가 선출되어 불법적으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다. 평양 경찰서 경관들이 예배당을 에워싸고 사복 경찰들이 총대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신사참배 결의에 대해 찬성을 묻자 몇 사람이 예라고 대답할 뿐 대부분이 침묵하자 경찰은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고 이에 놀란 총회장이 부()는 묻지도 않고 불법으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선교사들은 오후 1시에 따로 모여 총회에 항의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고 912일에 항의서를 제출하였으나 경찰의 강요로 각하되었다.

 

5. 신사참배 거부운동

본격적이 반대운동은 1938년 전국 노회에 일제가 참배를 강요한 때부터였다. 평북 노회장 김일선의 주도로 2월에 평북노회가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과 교수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를 성토하였다. 이 때 평북노회 소속 학생 장홍련은 평북노회장 김일선이 신학교 입학기념으로 신학교 교정에 심어 놓은 나무 한 그루를 도끼로 찍어 버렸다. 또한 노회 단위로 학생들이 신사불참배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평양 경찰서에서는 이런 기미를 알아차리고 학생들은 체포하고 교수 박형룡과 김인준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이 일은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결국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389월 무기휴교를 선언하고 그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의 선교사들도 강력한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대표적 인물은 주기철 목사님이다. 그는 한국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순교자이다. 그는 경남 창원군 웅천에서 태어나 개통소학교를 마치고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장로가 세운 학교로 당시 교장 고당 조만식 장로 아래에서 주기철은 민족정신과 항일사상에 대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1917연희전문 상과를 진학하였으나 안질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고향에 내려와 있던 그는 김해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 참석해 회개하고 중생의 체험을 하고 안질까지 치료를 받았다. 전엔 산업으로 선교하려 함

그 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2630세로 졸업하여 부산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에서 6년씩 목회였다.(문창교회 옮김 이유 : 문창교회는 작은 교회다, 월급을 적게 준다. 마산은 부산보다 작은 도시) 마산에서 그는 안갑수 사모를 잃는 아픔을 당하였다.(마산 오정모 선생이 아들 4이나 있는 홀아비 가정에 시집옴) 그리고 1936년에 산정현 교회로 목사로 가게 된다. 경남노회 장으로 있을 때 23노회중 최초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 채택. 19382월 일제는 주 목사를 검거하였고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일시 석방하였다. 그러나 1939년 다시 검속하여 조사하다가 일단 석방하였다. 평양에 돌아온 그는 최후 유언과 같은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 후 일제는 주 목사에게 3개월 내에 목사직을 사면하라고 협박하였다. 1940년에는 주 목사에게 더 이상 설교를 하지 말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받은 목사직과 설교권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였다.

평양노회장 최지화 등이 감옥에 찾아와 주 목사에게 사표를 강요하였으나 거절하였다. 평양노회는 할 수 없이 주 목사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의 경고문을 무시하였다.”는 이유로 노회 명부에서 제명처분하였다. 평양경찰서는 산정현 예배당을 대각선의 횡십자로 못박아 폐쇄하였다. (오정모 사모는 어려운 중에도 순교할 것을 계속 권유, 유계준 장로가 가족을 경제적으로 도움)가족은 사택에서 쫓겨나고 19444월 오정모 사모와 최후 면회를 하고 421일 밤 9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일제가 굶겨서 주목사를 죽게함, 오정모 사모는 매일 5년 동안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잠도 취함,)

유언말씀 : 어머니와 아이들을 부탁, 따끈한 숭륭이 마시고 싶소, 내가 죽어 천국에 가더라도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하리라, 내 시체를 평양 돌박산에 묻어주시오.

* 손양원 목사 : 애양원 섬김. 공산당에 의해 두 아들 죽음. 공산당원을 양아들로 삼음, 죽을 때 까지 전

. 공산당에 의해 순교

 

최권능 목사(최봉석 목사)는 주 목사와 같이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으면서도 교회와 민족을 위해 40일 금식 기도를 하다가 그 힘이 다 소진된 채로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하여 있던 중 주 목사의 순교 일주일 전인 1944415일 순교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평북 영변 사람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하여 안이숙 선생을 대동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신학을 수업하고 있던 아들 영창과 제국의회에서 종교법안을 심의하고 있을 때 방청석에 앉아 여호와는 유일한 진신(眞神)이시다.’라는 요지의 유인물을 살포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고초를 겪다가 순교하였고 안이숙 선생은 해방 후 출옥성도로 출감하여 옥중 수기 죽으면 죽으리라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14장 교회의 마지막 변절

1. 교회의 친일행각

신사참배를 결의한 장로교회는 19394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을 조직하여 국가 시책에 적극 협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연맹이 할 일을 더욱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중앙상치위원회를 설립하여 총간사에 정인과 목사가 취임하였다.

194210월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모였던 장로교회 제31회 회록을 보면 한국교회가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것을 볼 수 있다. 총회로 모이기 한 달 전인 9월에는 전국 장로교회가 국방헌금을 해서 모은 돈으로 비행기 1대와 병기 2정을 사서 헌남식을 남산에서 거행하였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알리는 귀중한 예배당의 종을 미영 박멸의 탄환으로 헌납해야 한다는 망언을 서슴치 않은 기독교 인사들도 있었다.

또한 감리교회는 19449월 상동예배당에 황도문화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갈홍기 목사를 관장으로 임명하고 교단 내 목사들을 강제로 모아 일본정신과 문화를 강의하였다.

일제는 찬송가에도 제재를 강하여 어떤 찬송가는 일체 못부르게 하였고 어떤 찬송가는 몇 절을 못 부르게 먹으로 지우게 하는 짓들을 자행했다. 또 사도신경 중에서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내가 믿사오며라는 부분은 신도의 창조 설화와 위배되고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을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부분은 천황의 영원한 계속 사상을 파괴한다고 하여 금지시켰다. 예배 5분 전에는 천황의 사진에나 동방으로 요배를 하였고, 전몰용사들을 위로하는 묵념, 출정장병의 무운장구를 위한 기원, 황국신민서사를 제창한 후 예배를 시작하였다.

 

2. 혁신교단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에 있는 여러 교파를 하나로 묶어 통제하는 것이 이롭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장감이 통합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혁신교단이었다. 이 일은 감리교회측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 혁신안에는 구약을 정경에서 제외하여 없애자고 하였고 사업으로는 일본 군사훈련 등 황민화운동을 장려하고 교회 내에서는 신학교를 개혁하고, 선교사들로 하여금 지도자급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감리교회가 탈퇴하여 이 합동안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혁신교단은 조선감리교단으로 환원하였다.

 

3. 교회의 병합 및 통합

한국에서 일제는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한 지역에 여럿 있는 교회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그 속에는 예배당의 재산을 갈취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교회 병합에 의해 없어진 예배당과 기타 건물들로 인하여 생긴 돈은 모두 국방헌금으로 전환되었다.

 

4.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

일제는 1943년 장로교회를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만들더니,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 중 성결교회는 폐쇄시키고 나서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를 통합할 작업을 시도하였다. 조선총독 아베는 원등을 정무총감으로 임명하였다. 원등은 전인선 목사를 내한하게 하였다. 전인선 목사는 교계 중진들을 만나 협조를 구하고 해방 40여일 전 정동제일감리교회에 모여 창립총회를 열었다. 그리고 19458월에 개신교 각 교파를 합하여 소위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시켰다. 조선교회는 일제교회에 예속되고 만 것이다.

 

5. 기독교 지도자들의 친일행각

일제의 억압이 심해지면서 교회, 노회, 총회가 조직을 통하여 친일을 했던 일들은 다반사로 많았다. 19379월에 총독부는 각 도에서 시국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저명한 기독교계 인사들을 동원하고 있었다.

31독립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박희도가 친일파가 전향, 동양지광이라는 친일적 잡지를 간행하였다. 1942년 복음교회 최태용은 동양지광에서 징병제가 신의 명령이라는 망언을 하였다.

 

6. ()평양 장로회산학교와 조선신학교 설립

1938년 장로회 제27차 총회가 신사참배 안을 불법 통과시키기 몇 달 전인 5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신사참배문제로 무기 휴교에 들어갔다. 총회는 교역자 양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시 신학교를 시작할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보수적인 목사들 대부분이 투옥된 상태에서의 신학교 재건은 당연히 자유주의 신학적 배경과 친일적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발기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채필근 목사가 이 일을 제안하고 19393월에 조선신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발족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평양에서 평양장로회신학교 재건운동이 일어났다. 이 일은 급속히 추진되어 채필근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장로회신학교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19402월에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조선 신학교 설립에 앞장 섰던 채필근 목사가 평양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평양 장로회신학교는 선교사들의 소유로 있었기 때문에 그 곳에 마음대로 신학교를 운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덕여대 교사를 사용하다가 마포기념관과 서문밖교회 하층에서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한편 조선신학교 설립을 추진하던 이들은 신학교 인가를 받지 못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19403월 경기도 지사의 강습소 인가를 받아 그 해 4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개원하였다. 그리고 김재준 목사가 교수로 취임하였다. 그리하여 이 신학교는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신학으로 출발하였다.

 

* 장로교 분열사

1901년 개교한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382월에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함을 시작으로 여러 노회들이 참배를 결의하자 19389월 무기휴교를 선언함으로 그 문을 닫았다. 그 후 신학교 문을 다시 열고자 노력하여 1940년에 평양에 후평양신학교가 채필근을 교장으로 문을 열었다(보수 정통주의). 서울에서는 조선신학교가 문을 열어 김재준과 송창근이 교수가 되었다.

1945년에 해방이 된 후 . 해방 후 30 명의 출옥성도들은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로 시작하였고 나머지는 조선신학교로 계속되었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평양장신과 성화신(감리교)이 합하여 기독신학교를 세웠으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폐교되었고 한편, 박형룡을 중심으로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시작되었다.

1951년에는 출옥성도들 중심으로 고려파가 정식으로 분립하였는데 이것이 제1차 분열이다. 그러던 중 1953년에 조선신학교 측이 김재준을 중심으로 기독교장로회로 분립되었는데 이것이 2차 분열이다. 박형룡의 3,000만 환 사기사건으로 박형룡 측과 에큐메니칼 측이 나눠지기 시작하면서 1959년의 총회에서 합동(총회신학교)측과 통합(장로회신학교-광나루)측으로 나뉘어졌다. 여기서 합동이라는 말은 1960년 박형룡의 NAE측과 고신 측이 합동총회를 통해 연합하였다가 다시 환원총회로 환원된 일이 있었는데 이 때부터 합동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 때이 환원총회 시 고신은 부산측과 서울측(NAE측이 교단의 좋은 부분을 차지하여 고신측 나오다 충현교회등 안나와 법적 조치했다. 법적 조치 찬성과 반대로 나위어 부산과 서울로 나뉘게 됨)으로 나뉘어 지기도 하였다. 부산측은 합동으로 환원하지 않고 교회와 부지등도 환원하지 않는 교회를 고소해야 한다는 측이었고 서울측은 고소하지 말자는 측이었다. 통합이라는 말은 1960년 통합총회를 한 때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그 이후 합동 측은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고 현재 대략 180 개의 교단으로 나뉘어져 있고 통합측은 하나의 교단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 세계교회는 19세기 한국 교회를 A miracle 이라 하였으나

20세기 한국교회 몇백개의 분열을 보고 또 다른 miracle이라 함

 

 

 

 

산정현 교회 : 재건파 -

고려측 -

합동파 -

통합측 -

* 통일이 되면 4개의 파가 똑 같이 산정현교회를 세운다고 할 것이다. 북에 남한의 여러 파 교회를 세

울 것이다. 통일이 늦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 교회는 전혀 준비하지 않고 있다. 한교회로 되도 문

제가 되는 것은 그 산정현 교회가 어떤 노회 소속이 될 것인가?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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