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三. 改新敎의 수용 이만열

하나님아들 2021. 10. 2. 09:43

                        . 改新敎의 수용

 

1. 종래의 견해: 선교사를 통해 한국 선교 이뤄진 것으로 이해

 

A. 1816년 성경전래: 1816 9 4(純祖 16년 음 7 18) 영국의 두척의 함선이 충청도 비인현(庇仁縣) 마량진(馬梁鎭) 앞 갈곶()에 도착, 10여시간 정박하면서 성경을 전함: Alceste (함장 Murry Maxwell), Lyra (함장 Basil Hall), 중국 파송의 특명전권대사인 J.Wm.Amherst 호송/ 리라호의 함장 바실 홀: An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o the Great Loo-Choo Island: With Two Charts (John Murray, London, 1818)/ 알세스트호 승선 군의관 John M'Leod: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 to the Island of Lewchew: With an Account of the Her Subsequent Shipwreck (John Murray, London, 1818)→성경을 주었다는 사실을 밝힘/ 한국측 자료: 純祖實錄 순조 16(丙子年, 1816) 7 19 丙寅, 충청 水使  載弘이 중앙에 올린 狀- 後註 1 참조

 

B. 귀츨라프(Karl F. A. Guetzlaff, 郭實獵, 甲利)-1832년 홍주만 고대도 도착, 성경반포

※ 개신교의 동양선교 : Wm. Carey (, 1793, 인도)/ R. Morrison (馬禮遜, , 1807, 중국)/ Adoniram Judson (, 1812, 미얀마)/ Wm. Milne (米燐, 스코틀랜드, 1813, 마카오)/  Walter H. Medhurst (麥都思, , 1817, 말래카)

(1) 귀츨라프: 유태계 폴란드(독일)/ 할레 대학 출신/ 네델란드 선교회 소속 (1826)으로 동양선교(자바)시작→/ 메드허스트, 모리슨과 접촉/ 런던선교회로 이적, 중국선교사(, 上海, 天津 거쳐 마카오, 모리슨과 접촉)/ 동인도 회사의 요청으로 Lord Amherst호에 승선, 통상요구와 선교활동 목적으로 중국, 한국, 오끼나와 순방, 계획→통역 겸 船醫로 교섭, 그는 여행에 필요한 전도문서와 성경 및 선물 마련, 모리슨으로부터 한문성경을 받음/ 선장 Hugh H. Lindsay 廣東 출발(1832.2.27)→타이완 福州 영파 상해 산동반도의 威海衛7.17, 장산곶, 한문으로 필담 나눔, 지방관이나 정부당국 접촉 실패→7.23, 충청도 홍주만 古代島 앞 정박/ 홍주목의 관리인 듯한 사람 만나, 서한, 선물과 성경 한질, 전도문서 등을 국왕에게 선물하라고 요청→중앙의 회신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며 주민과 접촉, 이 때 성경과 전도문서를 전하고 지방관의 초대에 응함, 감자 심는 법을 가르쳐 줌, 불교사찰 탐방시도, 관리들은 일반 백성의 접근을 통제, 약을 나눠져 호의적인 반응/ 8 9, 통역관을 대동한 특사, 귀츨라프가 보낸 서한과 선물을 돌려줌, 중국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 불가 통고→조선이 중국의 속국 아님을 주장→관리들로부터 약속받은 식량을 공급받고 조선 해안 떠남. 귀츨라프 항해기에 의하면 그들은 약 1개월간 머뭄

(2)자료:K.Guetzlaff;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이진호 : 「동양을 섬긴 귀츨라프」)/임진왜란과 예수회,양이 이야기,전도문서와 성경  배포

 後註 2, 3 純祖實錄 순조 32 7 21일조 참조

 

C. 토마스 (Robert J. Thomas, , 托馬涘) 목사와 제너럴 셔만호 사건

 高宗實錄 참조: 고종 3 3 7 15 (신미) 3번째기사: 황해 감사 박승휘가 이양선이 송산리 앞바다에 정박하였다고 보고하다./  後註 4 참조, 고종 3 3 7 18 (갑술) 3번째기사: 평안 병사 이용상이 신장 포구에 정박한 이양선이 통상을 요구한다고 보고하다./  後註 5 참조. 고종 3 3 7 27 (계미) 1번째 기사: 평안 감사가 평양 백성들이 서양배를 불사르고 영국 사람 최난헌을 죽였다고 보고하다./ 고종 3 3 11 5 (경신) 4번째 기사: 중국 예부에 회답한 자문

 

(1) 토마스 : 웨일즈의 회중교회 목사 아들/ 런던 대학교의 뉴 칼리지 출신/ 학창시절 “휴학과 복학의 지루한 과정”을 보냄/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중국(1863)선교사→부인의 죽음과 상해주재 책임선교사 Wm. Muirhead와의 불화/ 1864년 말 선교회에 사표, 의 해관(: Robert Hart)에 취직(1-8), 본인: 정신적으로 선교사직, 선교회: 경멸과 적의 불신 뿐

(2) 윌리암슨 (A. Williamson, NBSS 芝罘 주재원)의 지원, 1865. 9. 한국 서해안 도착(13), 2개월 반 체재, 언어습득, 선교활동/ 서울 선교를 목표했지만 태풍으로 만주를 거쳐 1866.1 새 임지인 북경 도착/ 1866 4월까지 북경체재, 동지사 일행과 교제→자신이 전했던 성경이 평양에 들어간 것 확인/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에 통역 제의 받음→로즈 제목의 프랑스 함대 인도지나 출동, 허사/ 8월 중무장한 상선 General Sherman호의 통역으로 승선, 평양으로 출발(89), General Sherman”호 사건에 희생됨 (27)

(3) 한국의 상황 : 대원군의 쇄국 및 천주교 박해 정책 (1866)

(4) 기념사업과 희생의 의미: ① 순교자?  ②서구 국가교회 선교의 실패→교파 교회 선교?

 

D. 18841885년의 선교사 입국이 한국기독교 시작으로 이해:(1)R. Maclay-1884.7.247.8일까지 한국에서 교육 의료사업 허가받음. (2)H.Allen-1884. 9.20 주한미공사관 공의자격으로 한국입국,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을 도와 그 이듬해 광혜원(제중원)을 개설케 됨→세브란스 병원. (3) H.G.Appenzeller H.G.Underwood의 입국으로 한국의 기독교 수용되었다고 함 

 

 

2. 만주를 통한 한국 선교의 시작: 종래 한국교회 시작에 대한 異論

(1) 만주에서의 선교와 성경의 번역, 출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P.C.)1862년 중국 선교/1872 John Macintyre(馬勤泰) John Ross(約翰)의 중국도착→로스는 윌리엄슨의 충고에 따라 10월 만주선교 시작(營口 牛莊), 첫해 겨울 중국어 만주어 四書三經 공부→이듬해 5월 중국어로 설교 가능/ 1874, 10 9일 로스, 봉황성의 고려문(의 국경이자 교역장소) 탐방→한국 상인 만나 성경을 전하고 전도하려 했으나 그들은 洋木에만 관심→여관에서 50대의 한국상인 만나 신약성경과 訓兒眞言(Peep of Day)을 건네줌←한국 최초의 수세자 백홍준의 아버지/ 선교사들은 한국 상인(1881년 현재 영구를 다녀간 한국 상인 9백명)과 접촉으로 한국의 복음수용가능성 타진→이 무렵부터 한국인 만나 어학 공부, 성경 번역 준비/ 1876 4월 말 로스의 두 번째 고려문 방문→이응찬의 도움으로 1877 Corean Primer, 1878년 봄까지 요한복음 마가복음 번역

 1879: 로스의 “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간행/ 신약 번역이 일단 완성/ 이 해에 매킨타이어에 의해 4명의 한국인 수세자→① 번역일을 맡았던 한 사람-“예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 있는 용기”의 시험 후 年에 돌아와 “행복한 신자”가 됨, 1879 1월의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의‘수세 사건’, 중국인 교회에 출석, 성경 번역일 계속, 성명은 전해지지 않음. ② 백홍준(白鴻俊) - 뒷날 의주교회의 초석, 투옥에도 굴하지 않음. ③ 이응찬(應贊), Ross의 어학 선생으로 가장 먼저 신자가 됨, 한 때 아편쟁이로 의심 받고 식사 때 火酒→중국인들의 입교반대→고향에 다녀온 후 수세 추천→7월경 수세 ④ 한의사 출신의 이응찬의 친척, 성경번역에 종사, 12월 경에 수세→고향으로 돌아감(1880년 초에는 한국 안에 2명의 수세자, 만주에 2명의 한국인 수세자)

 

※ 당시 수세인의 각오: 우리는 3(서경조 최명오 정공빈)을 문답했는데(1887.1.23일 주일), 그들은 훌륭하게 문답에 통과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들과 구원교리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대답은 명쾌하고 정확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이 위험할 것이라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임금님이 우리를 처형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으며, 다른 한 명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임금님이 내 목을 자른다 해도 상관치 않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H.G. Underwood to Ellinwood, 1887.1.22일자 및 1 27일자) 

˚1882 3월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 5월 「예수셩교요안내복음젼셔」 각 3천부 (그 전에 「  예수 셩교문답」 「예수셩교요령」이 1881 10월에 간행,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문서’)/ 요한복음에는 講名篇 ‘밥팀네’‘사밧일’→1887년 「예수셩교젼셔」로 신약이 완역, 출간됨

(2) 3천부 중 일본에 1천부와 기독교 문서, 일본 NBSS로 보냄→ 부산, 동래, 대구

(3) 서간도 지역의 한인촌-1860년대 이후 20여년간 서간도 압록강 대안지역이 행정적으로 공백지대(封禁地帶)/ 쇄국금교조치기에도 기독교 전파에 유리함/ 한인촌 이주민은 가난과 가렴주구를 피해 간 농민과 임오군란 후에 피신, 유배된 군인들/ 1870년대 로스의 고려문 탐방(1874), 로스 맥킨타이어 지도하에 이루어진 한국인의 성경번역이 1880년대 한인촌 전도의 기초/ 한인촌의 첫 전도는 1882년 金靑松 6 개월간 전도→1883년의 6개월 간 개종자 나타남/ 임오군란에 연루, 망명(유배)된 군인들의 개종, 그 최연장자의 受洗/ 1884 11, 로스, 친구 J.Webster와 함께 영하 40도의 추위 속에서 600마일의 여행, 4개의 한인촌에서 75(보수파 군인 6명 포함), 85년 초 여름에 25명이 각각 수세→1885년에는 28개의 한인촌에서 100명의 수세자, 600여명의 수세 요청→“매일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수 천 가정들”(J.Orr, The Gospel in Corea, UPMR, June 2, 1890, p.188)이 존재/ 1885년부터의 중국인 지주들의 박해→압록강 남하, 흩어짐, Diaspora 발생→뒷날 선교사들의 입국후에 서북지방 교회 설립의 기초

(4) 서상륜과 한국인의 성경배포활동←백홍준, 김청송, 이응찬, 이성하, 최성균, 서상륜 등

※ 성경반포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매서(), 권서(), Colporteur/ “서상륜은 1870년대 말 홍삼장사 차 만주→병에 걸려 로스의 도움/ 성경 번역에 종사→1882, 최초의 성경 간행 후(5-6월 경)수세(앞서 김청송이 제5수세자)→의주를 거쳐 1883 1월경 서울 도착, 6개월의 반포 후에 13명의 세례, 로스에게 교회 조직 요청→1884년 봄 신약전서(한문인 듯)덕혜입문(德慧入門) Moellendorff의 도움으로 수령(그의 동생 徐景祚(相佑)의 입신→소래교회의 설립,1885년 경)/ 1885년 초 봉천 방문, 70여 명의 세례 청원자 보고, 로스의 한국방문 요청 (1885.3.8. RossBFBS 편지, "그가 2년 동안 노력한 결과 현재 70명이 넘는 세례 청원자가 있으며, 그 가운데 몇 명은 주목할 만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세례받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서울의 서쪽에 있는 한 도시에 설교당 preaching hall을 개설하였고 그곳에 18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서울 남쪽의 한 도시에 있는 다른 한 개종자는 20명이상의 세례청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한국교회의 출발의 전형이자 요람으로 불리는 소래 신앙공동체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들 구도자 중 3명은 서상륜의 인도로 1887년 서울의 선교사들을 찾아가서 세례문답을 하고 1 23일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며, 나머지 사람들은 이후 언더우드를 소래로 불러서 세례를 받게 된다. 선교사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고, 그들을 불러와서 세례를 베풀게 했던 한인촌과 의주, 그리고 소래의 신자들, 이들에 의해서 자생적인 한국교회는 세워져 나갔던 것이다.(한국기독교의역사I,p.156)  1885.4.5. Appenzeller, Underwood 입국과 비교

 

3. 일본에서의 한국인 선교활동 - 이수정(樹廷, Rijutei)

※ 임오군란(1882)과 한국 교회사와의 관계: 芝罘의 미국선교사 A.W.Douthwaite(NBSS의 윌리암슨을 대리함)1883 10월에 다량의 로스역 복음서를 가지고 조선 방문→중국인 신자 1명이 성경반포하다가 투옥되었고 효수되었다는 보고/ 중국인 신자란, 임오군란 진압을 위해 1883 9월에 파견된  병사(원세개의 호위병), 그는 청의 황제와 ‘자신의 구세주를 위해서 싸우기’로 하고 다우드웨이트에게서 받은 성경 배포, 가두전도, 체포, 사형 구형→馬建忠이 기독교 신자였으므로 그 병사의 석방을 요구, 생명을 구함(효수는 와전된 것임)

(1) 이수정의 개종: 임오군란에서 민비를 구출/ 9 朴泳孝의 수행원으로 渡日 유학 ← 안종수의 農政新編에 자극/ 농학자이며 그리스도인인 쯔다 센(津田仙)과의 만남/ 성경연구, 그 해 12월에 성탄축하예배 참석/ 야스가와(安川亨)목사의 도움/1883. 4. 29 미 북장로교 선교사 녹스 (G.W. Knox)로부터 수세/ 5 8일부터의 전국 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 사진  

(2) 성경번역과 활동: 訓讀신약성서-「신약성서 마태전」,「신약성서 마가전」,「신약성서 로가전」, 「신약성서 약한전」, 「신약성서 사도행전」/ ② 「마가의 전한 복음셔 언해 」 (1885년 초, A. U. 등 선교사 입국시 가져옴) ※ 귀신 본:  子 耶蘇基督 ...”의 神字/ 전도활동-재일 한국인 전도, 정기집회를 가짐/ 서구 기독교계에 한국선교 호소: Rijutei to the Christian of America, Greeting (M.R.March, 1884. pp. 145-146)

     ※ “First Corean Convert”로 미국 선교잡지에 소개 (a Macedonian from Corea)

 

4. 미국 선교부의 한국선교 개시 

 Wm E.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1) 한미수호통상조약(1882. 5)1885 5월 비준서 교환(L.Foote 전권공사로 내한)/ 당시 주재외국인의 의료 요청으로 1884. 9. 20 Horace N. Allen(PCUSA. 중국의료선교사) 입국.

(2) 미 감리교회의 선교 (Methodist Episcopal Church): 미국 공사관 설치 후 상응하는 조치 요구/ 1883.7. 견미사절단, 민영익, 홍영식, 유길준 등 8(외국인 3)9 2 San Fransisco 상륙, 대륙횡단 철도→John F. Goucher의 만남, 그의 기도와 선교헌금, 뉴욕의 선교본부와 일본 선교사 Robert Maclay를 움직임→1884.6.24 ~ 7.8.한국 방문,MEC.가 한국에서 의료, 교육사업 허락→이듬해 Appenzeller (교육), Scranton (의료) 가능.

(3) 미 북장로교: 1837 외국선교부 창설. 그러나 1870년 경에 이 기구를 통해 선교 시작/ 이수정의 선교 호소(1884.3)-Ellinwood (선교부 임원) 적극적, Brooklyn 교회의 평신도     David W. McWilliams 5천불 한국 선교 기금/ 1884년 봄 Heron(惠論), 7월에 Underwood를 선교사로 지명→그러나 Allen, 언더우드(1885.4.5), 헤론의 순으로 입국함.

(4) 미국 선교운동의 배경: ① 대 각성운동 (the Great Awakening) - 해외, 인디언 선교와 산업 현장 ② 미국의 해외팽창 운동 - 1864년 남북전쟁 종식 이후, 북군의 승리로 남부 중심의 중농주의보다는 북부 중심의 본격적인 산업화 추진→알라스카 매입하고 몬로주의 폐기하며 팽창운동에 나섬 ③ 백인 우월주의의 문화적 적용

 

 

   

 

 

 1 순조실록 19, 16(1816) 7 19(병인) 2번째 기사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 의 장계에,

 

“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의 첨사 조대복(趙大福) 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 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鑪臼)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날으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眞書牋)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書牋) 내용에, ‘ 영길리국(英吉利國) 3696)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 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 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 천진(天津) 북연하(北蓮河) 입구에 도착하여, 지금 왕의 사신 등이 모두 북경 에 나아가 황제[萬歲爺]를 뵈었으나 천진 외양(外洋)의 수심이 얕은데다가 큰 바람까지 만나 배의 파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선척이 그곳에 감히 정박하지 못하고 지금 월동(粤東) 3697) 에 돌아가서 왕의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귀국하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해헌(該憲)은 음식물을 사도록 해 주고 맑은 물을 가져다 마시고 쓰도록 해 주십시오. 왼쪽에 우리 왕께서 보낸 사신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으니 증거가 될 것입니다. 가경(嘉慶) 3698) 213699) 월 일에 씁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2 순조실록 32 32(1832, 壬辰) 7 21(乙丑) 4번째 기사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 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 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 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 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 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 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 과 흔도사단(忻都斯担) 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 · 애란국(愛蘭國) · 사객란국(斯客蘭國) 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 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 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 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 의 지방은 75()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 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 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 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 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 · 아사라(我斯羅) · 여송(呂宋) 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선재(船材)는 이목(桋木)5751) 을 썼고 배의 형체는 외[]를 쪼개 놓은 것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上層)과 중층(中層)은 큰 것이 10[]이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는 각각 건영귀(乾靈龜)를 설치했고, 배 안에는 흑백의 염소[]를 키우며 오리와 닭의 홰[]를 설치하고 돼지 우리도 갖추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는 각색의 기()를 꽂고 작위(爵位)가 있는 자의 문전에 있는 한 사람은 갑옷 모양의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종일토록 꼿꼿이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제지하였으며, 급수선(汲水船) 4척을 항상 좌우에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때에는 물에 띄워 놓았습니다. ()·중()·후()의 범죽(帆竹)은 각각 3층을 이루고 있고 흰 삼승범(三升帆)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사용하는 그릇은 화기(畵器)이고 동이[]와 병()은 유리였으며 숟가락은 은()으로 만들었고, 배 안에 실은 병기(兵器)는 환도(環刀) 30자루,  35자루,  24자루, 대화포(大火砲) 8()이었습니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총 67인이었는데, 선주(船主) 4()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 이고, 6품 거인(擧人)은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 이며, 1과장(第一夥長)은 파록(波菉)이고, 2과장은 심손(心遜) 이고, 3과장은 약한(若翰) 이고, 화사(畵士)는 제문(弟文) 이며, 사자(寫字)는 노도고(老濤高) 이고, 시종자(侍從者)는 미사필도로(米士必都盧) 이며, 과계(夥計)는 벽다라마(辟多羅馬) · 행림이(行林爾) · 임홍파(林紅把) · 가파지(加巴地) 이고, 수수(水手)는 가타(嘉他) · 랍니(拉尼) · 야만(耶熳) · 주한(周翰) · 명하(明夏) 및 마흥(馬興) 6인이며, 진주(陳舟) 10, 손해(遜海) 20인이고, 주자(廚子)는 모의(慕義) 와 무리(無理) 이며. 지범(止帆)은 오장만(吳長萬) 이요, 근반(跟班) 시오(施五) · 시만(施慢) · 시난(施難) · 시환(施環) · 시섬(施譫) · 시니(施尼) · 시팔(施八) 이었습니다.

 

용모(容貌)는 더러는 분()을 발라 놓는 것처럼 희기도 하고 더러는 먹물을 들인 것처럼 검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머리를 박박 깎기도 하였고 혹자는 백회(百會)5752) 이전까지는 깎고 정상(頂上)에서 조그만 머리카락 한 가닥을 따서 드리운 자도 있었으며, 입고 있는 의복은 혹은 양포(洋布)를 혹은 성성전(猩猩氈)을 혹은 3()의 각색 비단을 입고 있었는데 웃도리는 혹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기도 하였으며 혹 소매가 좁은 모양을 입기도 하고 혹 붉은 비단으로 띠를 두르기도 하고, 적삼은 단령(團領)을 우임(右袵)5753) 하고 옷섶이 맞닿은 여러 곳에 금단추(金團錘)를 달았으며 소매는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였는데 작위(爵位)가 있는 사람이 입는 문단(紋緞)은 빛깔이 선명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것은 호하미(胡夏米) 는 푸른 비단으로 족두리처럼 만들었는데 앞쪽은 흑각(黑角)으로 장식하였고, 그 외의 사람은 붉은 전()이나 흑삼승(黑三升)으로 더러는 감투 모양으로 더러는 두엄달이(頭掩達伊) 모양으로 만들었고 혹 풀[]로 전골냄비 모양으로 엮기도 하였습니다. 버선[襪子]은 흰 비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백삼승(白三升)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등에 꿰맨 흔적이 없었고, []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은 발막(發莫)5754) 과 같았습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玻璃器) 5백 개, () 1천 담(), 화석(火石) 20, 화포(花布) 50, 도자(刀子) 1백 개, 전자(剪子) 1백 개, 납촉(蠟燭) 20, 등대(燈臺) 30, 등롱(燈籠) 40, () 1만여 개, 요도(腰刀) 60개인데, 아울러서 값으로 따지면 은화(銀貨) 8만 냥()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 과의 교역은 유래(由來)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淸國) 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朝貢)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 에 가도 계하(階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대청 황제(大淸皇帝)는 먼 나라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 하였으나 요사이는 관리들이 황제의 뜻을 잘 받들지 않으므로 황은(皇恩)이 외국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외국 상인은 관리의 횡포로 인하여 많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 · 법란서국(法蘭西國) · 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 · 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 · 대여송국(大呂宋國) · 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 · 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 · 식력국(寔力國) · 영정도국(伶仃都國) · 대청국(大淸國) 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 · 법란치국(法蘭治國) · 하란국(荷蘭國) · 파려사국(波呂斯國) 이라 하고, 영국(英國) 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 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 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忻慶) 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 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은 수위(垂圍) 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 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 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 · 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 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 에서 영국 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榏能埠) 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 · 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 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년 2 20일 서남풍을 만나 이곳에 와서 국왕의 명으로 문서와 예물을 귀국의 천세 계하(千歲階下)에 올리고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으며 공무역(公貿易)을 체결하여 양포(洋布)·대니(大呢)·우모초(羽毛綃)·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 등의 물건으로 귀국의 금·은·동과 대황(大黃) 등의 약재(藥材)를 사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바칠 예물은 대니(大呢) 홍색 1, 청색 1, 흑색 1, 포도색 1필과 우모(羽毛) 홍색 1, 청색 1, 포도색 1, 종려색(棕櫚色) 1, 황색 1, 양포(洋布) 14, 천리경(千里鏡) 2, 유리기 6(), 화금뉴(花金紐) 6() 본국의 도리서(道理書) 26이라 하였습니다.

 

 7 12일에 모양이 이상한 작은 배 한 척이 서산(瑞山) 의 간월도(看月島) 앞 바다로부터 태안(泰安) 의 주사창리(舟師倉里) 앞 포구(浦口)에 와서 이 마을 백성들을 향하여 지껄이듯 말을 하면서 물가에 책자(冊子)를 던지고는 바로 배를 돌려 가버렸는데, 던진 책자는 도합 4권 중에서 2권은 갑()까지 합하여 각각 7장이고 또 한 권은 갑까지 합하여 12장이었으며 또 한 권은 갑도 없이 겨우 4장뿐이었다 하기에, 고대도(古代島) 의 문정관(問情官)이 이 일로 저들 배에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금월 12일 묘시(卯時)에 종선(從船)을 타고 북쪽으로 갔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밤을 새우고 13일 미명(未明)에 돌아왔는데 같이 간 사람은 7인이고 책자 4권을 주었으나 받은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저들이 식량·반찬·채소·닭·돼지 등의 물목 단자(物目單子) 한 장을 써서 내면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2, 돼지 4(),  80(), 절인 물고기 4(), 갖가지 채소 20(), 생강(生薑) 20, 파부리 20, 마늘뿌리 20, 고추 10, 백지(白紙) 50, 곡물 4(), 맥면(麥麵) 1, 밀당(蜜糖) 50,  1백 근, 입담배 50근을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저들이 주문(奏文) 1()과 예물 3봉을 전상(轉上)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굳이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니, 저들이 마침내 물가에 던져버리고 또 작은 책자 3권과 예물의 물명 도록(物名都錄) 2()을 주었다고 하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별정 역관(別定譯官) 오계순(吳繼淳) 이 달려가서 문정(問情)하였는데, 그의 수본(手本)에 의하면 문서와 예물을 저들이 끝내 되돌려 받지 않으려 하여 여러 날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17일 유시(酉時)에 이르러 조수(潮水)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우리 배와 매 놓은 밧줄을 잘라 버린 뒤에 닻을 올리고 돛을 달고 서남쪽을 향하여 곧장 가버려 황급히 쫓아갔으나 저들 배는 빠르고 우리 배는 느리어 추급(追及)하지 못하고 문서와 예물은 결국 돌려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이 배는 필시 바다 가운데에 있는 나라들의 행상(行商)하는 배일텐데, 우연히 우리 나라 지경에 이르러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교역을 시도해보려 하다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저들도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다만 그 주문과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간 것은 자못 의아롭습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속셈을 비록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처리에 있어서는 의당 신중히 해야 하겠으므로, 문정관(問情官)과 역관 등으로 하여금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에 봉해 두게 하고 우리들에게 준 책자를 빠짐없이 모아 함께 봉()하여 본주(本州)의 관고(官庫)에 보관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충 수사(公忠水使) 이재형(李載亨) , 우후(虞候) 김형수(金瑩綬) , 지방관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 가 문정할 때에 거행이 지연되고 처리가 전착(顚錯)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이 논감(論勘)한 대로 파직의 율로 시행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영길리국 은 비록 대국(大國)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열에 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친 책자로 보면 민월(閩越) 과 광주(廣州) 등지로 왕래하는 상선(商船) 1년이면 6, 70척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우리 나라에 와서 정박한 사실이 혹 대국에 전해질 염려도 없지 않으니 우리 나라에서 먼저 발설(發說)하여 후환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槐院)5755) 으로 하여금 사실을 매거(枚擧)하여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형편에 따라 예부(禮部)에 들여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3. 순조 32, 32 7 21(乙丑) 5번째 기사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 도광(道光) 12 7월 초4일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 ,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 등의 첩정(牒呈)을 첨부한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 홍희근(洪羲瑾) , 수사(水使) 이재형(李載亨) 이 인차(鱗次)로 치계(馳啓)한 바에 의하면, 본년 6 26일 유시(酉時) 경에 이양선(異樣船) 1척이 본주(本州) 고대도(古代島) 의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서 역학(譯學) 오계순(吳繼淳) 을 차송하고 본 지방관 홍주 목사 이민회 와 수군 우후 김형수 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언어가 통하지 않아 문자를 대신 사용하여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상세히 힐문하였는 바, 그들 대답에 ‘우리들은 모두 영길리국 난돈(蘭墩) 과 흔도사단(忻都斯担) 땅에 사는 사람들로서 선주(船主)는 호하미(胡夏米) 인데, 서양포(西洋布)·기자포(碁子布)·대니(大呢)·우단초(羽緞綃)·뉴자(紐子)·도자(刀子)·전도(剪刀)·요도(腰刀)·납촉(蠟燭)·등대(燈臺)·등롱(燈籠)·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천리경(千里鏡) 등의 물품을 가지고 귀국의 소산물을 사려고 본년 2 20일 배에 올라 본월 26일에 이곳에 왔으니, 귀국의 대왕에게 전계(轉啓)하여 우호(友好)를 맺어 교역하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동선(同船)의 선원(船員)은 총 67인으로 4(四品) 자작(子爵) 이라고 칭하는 선주(船主) 호하미(胡夏米) 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과계(夥計)와 초공(梢工)5756) ·수수(水手)의 복장은 혹은 양포(洋布), 혹은 전자(氈子), 혹은 삼사포(三梭布), 혹은 단자(緞子)이고, 옷의 양식은 혹은 포자(袍子), 혹은 괘자(褂子), 혹은 단삼(單衫)으로 하였으며, 모자(帽子)는 양식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그 빛깔이 혹은 붉고 혹은 검고 혹은 푸르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풀로 엮은 것도 있었습니다. 배는 공선(公船)인데 표호(票號)는 안리(安利)이고, 넓이는 6(), 길이는 30파였으며, 의간(桅竿)에는 층범(層帆) 3개 달리고 또 물을 긷는 작은 배 4척이 있었습니다. 배 안의 집물(什物)을 일일이 점검하려고 하니 저들 말이 교역하기 전에 멀리서 온 사람의 물건을 보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며 여러 차례 설왕 설래(說往說來)하였으나 끝내 보여 주지 않았는데, 이 배는 왕래하면서 행상을 하는 배로서 풍랑을 만나 표착(漂着)한 것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사세가 강박할 수 없어 상세히 검열하지 못하였습니다.

 

개유하기를, 번방(藩邦)의 사체(事體)로는 다른 나라와 사사로이 교린(交隣)할 수 없고, 더구나 우리 나라는 자래로 전복(甸服)5757) 과 가까이 있어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뢰고 알려야 하므로 임의로 할 수 없는데, 너희들이 상국(上國)의 근거할 만한 문빙(文憑)도 없이 지금까지 없었던 교역을 강청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지방관이 어떻게 경사(京司)에 고할 것이며 경사에서는 또 어떻게 감히 위에 전달(轉達)할 것인가?’ 하니, 저들이 개유하는 말을 듣지 않고 줄곧 간청하여 전후로 10여 일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본년 7 17일 유시(酉時) 경에 조수(潮水)를 타고 서남쪽을 향하여 갔다는 등인(等因)으로 구계(具啓)하니, 이에 의거하여 조량(照諒)하기 바랍니다. 주거(舟車)가 통하는 곳에서 유무(有無)를 교역하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일이나, 번신(藩臣)은 외교(外交)가 없고 관시(關市)에서 이언(異言)을 살피는 것이 더욱 수방(守邦)의 이전(彛典)에 속하는데, 소방(小邦)은 대충 분의(分義)를 아는 만큼 각별히 후()의 법도를 지켜 비록 해마다 의례히 열리는 개시(開市)5758) 에 있어서도 오히려 반드시 칙자(勅咨)의 지휘를 기다려서 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영길리국은 지리상으로 동떨어지게 멀어 소방과는 수로(水路)의 거리가 몇 만여 리가 되는지 모르는 처지에 망령되이 교린을 핑계하고 교역을 억지로 요구하였으니, 사리에 타당한 바가 전혀 아니고 실로 생각 밖의 일이었습니다. 경법(經法)에 의거하여 시종 굳이 방색(防塞)하였더니, 저들도 더 어쩌지 못함을 알고 바로 돌아갔습니다. 교역에 관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겠으나, 변경(邊境)의 정세에 관한 일인만큼 의당 상세히 보고해야 하겠기에 이렇게 이자(移咨)하는 바이니, 귀부(貴部)에서 자문 내의 사리(事理)를 조량하여 전주(轉奏) 시행하기를 바라고 이에 자문을 보내는 바입니다.

 

 

하였다.

 

 4. 고종 3, 3(1866년 병인) 7 18(갑술) 3번째 기사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용상(李容象) ,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 이 보고한 내용 중 「이양선(異樣船) 1척이 평양 경내의 초리방 사포구(草里坊沙浦口)에 와서 정박하였으므로 11일 술시(戌時) 쯤에 그들의 배가 정박하고 있는 곳에 가보니, 이미 본 평양부의 신장 포구(新場浦口)로 옮겨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벌써 밤이 깊었기 때문에 12일 진시(辰時)에 그곳에 달려가서 문정(問情)을 하니, 서양 사람으로서 자기들은 단지 통상과 무역을 하려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역하는 한 가지 문제로 말하면 법적으로 엄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또한 지방관이 마음대로 허가해 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토마스〔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 가 말하기를, 『귀국은 무엇 때문에 천주교인들을 쫓아내는가? 지금 우리 예수교〔耶蘇聖敎〕는 천도(天道)를 체험하고 인심(人心)을 바르게 하여 나쁜 풍속을 교화시키기 때문에 인의충효(仁義忠孝)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종교는 모두 우리나라에서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감히 마음대로 익히지 못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 프랑스 의 큰 배는 이미 수도에 갔는데, 우리 배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큰 배가 수도에 갔다고 말하는 의도를 알 수 없습니다. 언제쯤 철수해 갈 겁니까?』라고 하니,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황주(黃州) 에서 얻은 식량과 찬거리로 겨우 며칠간 살았으니, 쌀과 고기, 계란(鷄卵)과 시목(柴木) 등을 도와주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는 도리로서는 냉담하게 대할 수가 없어서 쌀과 고기 등의 물건들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12일 유시(酉時)에 그 나라 사람 6명이 작은 푸른색 배를 타고 물깊이를 탐지하기 위해서 상류로 올라갔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3일 인시(寅時)에는 배를 출발시켜 본 평양부 만경대(萬景臺) 아래 두로도(豆老島) 앞에까지 다다랐는데 그대로 그곳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떠나고 머무는 것과 일의 경위에 대해서는 계속 탐지하여 치보(馳報)를 올리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5. 고종 3, 3(1866년 병인) 7 27(계미) 첫 번째 기사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 의 장계(狀啓),

 

“ 평양부 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에서 더욱 미쳐 날뛰면서 포를 쏘고 총을 쏘아대어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 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토마스〔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 와 조능봉(趙凌奉) 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므로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을 본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겸 중군(兼中軍)인 철산 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 과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 은 직접 총포탄이 쏟아지고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싸움으로써 결국 적들을 소멸시켰으니 모두 그들의 공로라고 할만 합니다. 포상(褒賞)의 특전을 베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이양선(異樣船)이 경내에 침입하였을 때 이미 방어를 잘하지 못하여 심지어 부장(副將)까지 잡혀가 억류당하는 수치를 당하게 한 데다 끝에 가서는 서로 싸우고 죽이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는 전하께서 멀리 있는 나라의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은 황공하기 그지없어 대죄(待罪)할 뿐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 평안도 로 말하면 기자(箕子) 의 옛 도읍지로써 《범금팔조(犯禁八條)》 를 대대로 계승해오고 충성과 의리를 서로 권면하는 곳이라 조정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른 도보다 특별하게 대해 왔다. 이번에 서양의 추악한 무리들이 대동강(大洞江)에 몰래 침입하여 부장(副將)을 잡아다가 억류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였다. 못된 놈들이 사납게 날뛰는 것에 본래 피 흘리며 싸움할 것까지는 못되지만 대체로 그들이 죄악을 쌓은 것이 이미 오래되어 스스로 천벌을 받을 죄를 지었다.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은 기율(紀律)을 철저히 세워서 제때에 적들을 제압하여 이미 온전하게 공을 세웠고 군사들과 장교들, 아전(衙前)들과 백성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용감하게 나아가 적들을 남김없이 섬멸하였으니, 이는 충성심과 의분에 격동된 것이므로 그 기개와 의리가 아주 가상히 여길 만하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 에게 특별히 가자(加資)하고, 겸 중군(兼中軍)인 철산 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 에게 가자하고 영장(營將)의 이력을 허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 은 맡은 벼슬에 한번 더 연임하도록 하라. 그리고 감사(監司)와 중군(中軍), 서윤(庶尹)에게는 새서(璽書)와 표리(表裏)를 주는 특전을 시행하도록 하라. 전 중군 이현익(李玄益) 에게는 이미 책임을 물을 일이 있다 하더라도 수고롭게 뛰어다니며 일한 공로가 없지 않으니 변지(邊地)에서의 이력을 허용하도록 하라. 그 외 교리(校吏)들에 대해서는 본 감영에서 후하게 시상하고, 공곡(公穀)도 회감(會減)하도록 하라. 감사는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한국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 성격

 

한국기독교사는 외국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성경이 먼저 번역되고 보급되었다는 데서 시작된다. 이 점은 한국기독교의 그 후의 성격을 규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성장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성경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를 인식한 선교사들은 한국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Bible lovers)이라고 불렀고, 또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이렇게 언급하였다.

 

이 땅에서 발전되고 있는 기독교는 출중하게도 성경기독교이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하기 위해 가져가는 것은 성경이다. 믿어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에 의해 사람들이 구원받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성경이다.……성경은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양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Matters of Moment" Bible in the World, Mar.1907.p.70)

 

한말 일제하에서 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한국 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인 성격은 지속되었고 또한 교회 성장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교회가 자랄 수 있는 영적인 토대는 바로 성경이 한국사회에 널리 보급되고 교인들 사이에서 공부되는 과정을 통해 마련되어 갔기 때문이다.

 

1. 한국인들이 한글 성경의 번역을 재촉함

한국인들은 새 번역을 추진하는 선교사들에게 그것을 서둘러달라고 “울부짓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성경번역을 재촉하는 한국인들의 이같은 요구는 복음선교사를 파견한지 5년밖에 되지 않던 1891년의 미 북감리교 선교부의 연례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한문 성경 외에는 현재 일부의 성경만이 이용될 수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성경을 번역해 달라는 한국인들의 간절한 요구가 있다.(Annual Report of the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M.E.C.for 1891. p.274.이하 원문:There is crying need for hurrying on the translation as fast possible, as only a few portions of scripture are now available, except in the chinese language.)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1900년에 ≪신약전서≫가 번역, 간행되었고 1911년에 ≪구약전서≫가 출판되었다. 이어서 개역에 착수하여 1936에 ≪개역 구약전서≫를 ,1937년에 ≪개역 신약전서≫를 완성하고 이를 묶어 1938년에 지금까지도 사용되는 ≪개역 성경전서≫를 펴냈던 것이다. 성경의 번역은 우리말을 한글(문자)로 정착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한글을 대중의 글로 만드는 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하층민(노동자)과 부녀자를 그들의 주요 선교대상으로 했던 장로교(개신교)는 민중의 문자로 번역된 한글성경을 가짐으로 이제 복음전도에서 한국민중들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그 전에 한국에 들어왔던 불교 유교 등과는 달리 그들의 선교대상인 한국민중을 쉬운 언어와 문자를 매개체로 하여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성육신(成肉身)‘사건이었다. 1893년 미 남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모여 소위 Nevius방법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정책으로, 모든 문서에서 한글을 전용하자는 것과 ”조속한 시일내에 정확한 말로 성경을 번역“하자는 것을 채택한 것은(이것은 1893 1월에 조직된 한국장로교선교부공의회에서 채택한 10가지 선교정책 중의 제 5항과 6) 성경 말씀을 민중 속에 파고 들게 하려는 선교정책 차원의 노력이 얼마나 일찍부터 시작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찌기 민중의 언어로 성육신되어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생동하던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의 씨앗이 ’복음화‘의 열매를 맺어  교회의 성장을 가져오게 된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2. 성경의 보급과 권서: 번역된 성경의 보급은 전도와 한글의 민중문자화에 공헌함

한 연구에 의하면,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가 18961940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성경은 총 2,062만여권으로 이는 매년 458,255권이 반포된 셈이며, 미국성서공회(ABS) 한국지부가 19011919년까지 한국에서 반포한 것은 총 266만권으로 매년 140,455권을 반포한 셈이다.(이만열, <勸書에 관한 연구>《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지식산업사,1991) p.153154.참고)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 이미 성경의 보급만으로 개종의 기적이 일어났던 한국에, 이같이 많은 양의 성경의 반포가 곧 전도와 개종을 촉진시켰음을 의미한다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이 보급됨으로 그것은 읽혀지고 암송되었고, 또 “말씀은 이 생기없고 영감없는 백성들의 뼈와 살 속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으며, 그들을 반드시 새로운 남자와 여자로 만들 것이기”(Annual Report of BFBS for 1901, p.291) 때문이다. 불교와 유교가 전파된 이래 경전적 전통을 이미 갖고 있던 한국인에게 “문서(성경)없는 종교는 그들 속에서 거의 성공할 수 없었”는데 ,이는 “한국인들은 글을 읽는 민족이기 때문”이었다.(Annual Report of BFBS for 1916, p.294)  그래서 거의 4년간이나 BFBS 한국지부에서 성경반포사업에 종사했던 베시 목사는 성경이 한국의 복음화에 끼친 결과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

 

오늘날 한국에는 성경이 뚫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성경은 교도소와 병원, 나환자 수용소, 매춘굴, 도박판, 아편소굴 그리고 궁궐과 가게를 통과했다. 성경은 추악한 거지소굴과 산중의 절간, 가난한 초가집, 어부의 거룻배와 뱃사공의 나룻배 그리고 학교와 대학에까지 들어갔다. 그리하여 성경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모든 곳에서부터 거듭난 사람(twice-born men)이 나타나고 있다.(F.G.Vesey, "Korean Vignettes", Bible in the World,1912.8.,p.242)

 

그런데 한국의 성경 반포사업이 그렇게 활발하게 일어나게 된 이면에는 권서(colporteur)들의 숨은 봉사활동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권서는 성서공회 혹은 선교사의 감독을 받으며 성경을 판매, 보급하는 활동을 맡았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그것을 보급하고 그 내용을 전하기에 희생적으로 헌신했던 분들이다. 1940년까지 영국성서공회 한국지부는 성경보급의 약 85%를 권서들에 의존하였고, 19131918년의 미국성서공회 한국지부 성경보급의 약 98%는 권서에 의해 이뤄졌던 것이다. 따라서 한말과 일제하의 성경의 반포는 권서들의 ‘복음짐’과 부르튼 발에 의해 대부분 이뤄졌던 것이다. 성경의 활발한 보급이 한국복음화의 가장 중요한 요인의 하나였다면, 적어도 한말 일제하 한국의 복음화에 기여한 공로는 이들 권서들에게 돌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선교 10여년에 225개의 교회와 기도소에 3,545명의 신자들을 얻게 된 미국 남감리회가 이러한 공로를 전적으로 권서들에게 돌린 사실이나(1908 12월 남감리회 선교사 R.A.Hardie가 성서공회에 보낸 편지-양주삼 정태응 편,閔休先生實記 pp.2829), 한국 주재 개혁교회 선교회 소속의 10여만명 신자들의 7할이 권서들의 사역을 통해 이뤄졌다고 하는 지적은(Annual Report of NBSS for 1905,p.47) 이들 권서들이 성경의 보급과 말씀의 전파를 통하여 한국복음화에 얼마나 공헌하였는가를 증언하는 것이다.  

 

 

3. 성경의 보급은 사경회운동을 일으켰고 ‘말씀의 흥왕’( 6;7, 12;24, 19;20)을 통해 교회의 성장을 가져왔다.

성경이 광범하게 반포되자 한국의 초대 기독교공동체에서는 성경을 읽기 위해서 ‘국문공부’운동이 일어났고, 뒤이어 ‘사경회(査經會)’라는 이름의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경회 운동은 1903년과 1907년의 한국의 부흥운동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하에서도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져왔고, 해방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인 성경공부가 한국교회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888년 스크렌튼(Mary Scranton)의 성경공부반과 1890년 언더우드(H.G. Underwood)의 성경연구반에서 본격화된 한국의 성경학습은, 1891년에 각 선교부가 성경학습과정을 선교부세칙에 삽입함으로 각 지교회에까지 널리 시행하게 되었다. 사경회는 초기에 선교사와 그 부인들, 한국인 조사와 장로들 및 권서들이 인도하였으나, 뒷날에는 주로 한국인 지도자들이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사경회를 겸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서는 1908년 미 북장로교 선교구역에서만 800여회의 사경회에 5만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이 무렵에는 신자들의 60% 정도가 매년 사경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 사경회에 참석한 신자들의 열심들에 관한 감동적인 기사들은 이러한 열심의 증거들이다. 1901년 평양에서 개최된 사경회에는 입록강 가의 삭주 창성 지방의 자매들이 행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300리 길을 걸어왔고, 그 이듬해 평양에서 열린 ‘사나이’사경회에는 멀리 전라도의 목포 무안 지방에서 참석한 형제들이 있었다.(<그리스도신문> 6-5,1902.1.31일자) 1909 10일간의 성경공부를 위해 한 자매는 머리에 쌀자루를 이고 300마일을 걸어왔고, 다른 이들은 거기에다 아이들까지 업고 왔는데 그들은 손때묻고 닳은 성경책을 갖고 있었다.(H.Miller,"Matters of Moment" Bible in the World,1909.9.p.263)

 일제 치하 신앙의 자유가 제약당하던 상황 속에서도 줄기차게 계속된 사경회는, <사도행전> 기자가 언급한 바와 같이, ’말씀의 흥왕‘( 6;7, 12;24, 19;20)을 의미했고 그것을 통해 한국 교회의 성장을 주도하고 있었다. 당시 그것을 현실적으로 목격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사경회의 열심이 한국교회를 성장시켰다고 다음과 같이 자주 고백했던 것이다. 그 고백은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을 찾아내야 하는 오늘날의 교회사가의 식견과 평가를 대신해 주고 있다.     

 

물론 성경 그 자체가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이다. 그러나 한국의 성경은 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 온 것이 분명하다.…성경공부와 성경공부반은 한국 교회의 발전에서 가장 독특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들 속에서 신앙과 지식의 기초를 놓아 왔다.(S.A.Moffett,Bible Society Record of ABS, 1916.11.,p.216)

 

성경은 한국에서 제일 공부가 많이 되는 책이다. 교회생활의 매우 뚜렷한 특징은 성경공부에 있다. 성경공부반은 겨울에 열흘에서 2주일 동안 중심지에서 열린다. 겨울마다 족히 12 5천명의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참여하기 하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목적은 단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배운 것을 출신교회에 전달해 주기 위한 것이다.(Annual Report of NBSS for 1917, p.32)

 

한국 교회의 주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때문이라는 것이 충분히 관찰한 사람들의 확신이다.(Annual Report of NBSS for 1930,p.104) 

 

 

마량진 성경 전래  

 

 

1816 9월에 영국의 함선 두 척이 충청도 비인현(庇仁縣) 마량진(馬梁鎭) 앞 갈곶()에 도착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 함선은 영국의 알세스트(Alceste) (함장 Murry Maxwell)와 리라(Lyra) (함장 Basil Hall)로서 중국에 파송하는 특명전권대사인 암허스트(J. Wm. Amherst) 일행을 천진(天津)에까지 안내한 후, 맥스웰 대령의 지휘 아래 요동만과 직예만, 조선 서해안 및 유구열도의 탐사에 나섰다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8 29일 위해위(威海衛)를 출발하여 9 1일에는 대청군도(大靑群島)에 접근했고, 9 4(純祖 16년 음 7 18)에 이곳에 도착, 10여 시간 정박하게 되었다. 정박하는 동안 조선 관리들이 적어도 두 차례나 문정했다. 이들 두 척의 배가 마량진에 도착했을 때 마량진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비인현감 이승열(升烈)이 문정 차 두 배에 승선, 검사하고 모두 세 권의 책을 받았는데, 뒷날 영국인의 기록에 의해 그 받은 책 중 한 권이 다름 아닌 성경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마량진에 도착한 후 조선 관원이 이들과 교섭한 내용과 이들로부터 책을 건네받은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는 한국 측에도 기록이 있으나 그 받은 책 중에 성경이 있었다는 것은 영국 측 기록에 의해 확인되었다.  

음력으로 작성된 한국 측 기록은 순조실록(純祖實錄) 순조 16(丙子年, 1816) 7 19일 병인(丙寅)조의 충청 수사(水使)  이재홍(載弘)이 중앙에 올린 장계()에 이 사건의 전말을 보여주고 있다. 이재홍은 이양선 두 척이 마량진에 ‘임의대로 두류(逗留)하고 환거(還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마량진 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열의 죄상을 상신하면서 이양선의 도래와 퇴거 및 정박시의 문정한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정황을 설명하였다. 이재홍이 올린 장계 중 책(성경)을 받은 상황을 전후한 내용을 옮겨본다.

 

 "마량진 갈곶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의 첨사 조대복과 지방관 비인현감 이승렬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은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았으나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르모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 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서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1)      

 

양력으로 일지를 남긴 영국 측의 기록은 이 때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함장과 군의관에 의해 항해기의 형태로 남겨졌다. 리라호의 함장인 바실 홀(Basil Hall) An Account of a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Corea and to the Great Loo-Choo Island: With Two Charts (John Murray, London, 1818)를 남겼고, 알세스트에 승선했던 군의관 존 맥레오드(John M'Leod) Voyage of His Majesty's Ship Alceste, Along the Coast of Corea to the Island of Lewchew: With an Account of the Her Subsequent Shipwreck (John Murray, London, 1818)를 남겼다.2) 이 두 책에 보이는 관련 기록은 앞서 말한 순조실록의 이재홍의 장계와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서로를 잘 보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