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六. 기독교와 민족운동

하나님아들 2021. 10. 2. 09:46

. 기독교와 민족운동

 

1.기독교와 민족(주의)과의 관계

A.일반적인 견해---1)기독교는 민족주의를 초월한 보편적 종교,거기에 비해 민족주의는 그러한 보편성보다 개성에 근거해 있다고 생각. 2),일 등의 민족주의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이라 할 인권, 자유, 정의, 평화에 역행, 민족의 이름으로 타민족을 살해, 침략, 전쟁의 폭력성을 정당화. 3)그러므로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양립할 수 없음.--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인은 반민족주의 노선에 설 수 밖에 없음.

*2차 대전 후에 민족주의가 퇴색해진 이유--, 소에 의함(민족부정, 냉전체제의 영향)

B.기독교의 민족관---1)기독교가 민족을 초월한 보편적 성격을 가졌고 독, 일 등의 민족주의를 반기독교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일반은총으로 주신 민족의 범주 속에서 생활. 2).17;26-27에 근거하여 신학자들 중에는 바울이 민족을 창조와 섭리의 질서에서 이해했다고 봄--민족을 창조와 섭리의 산물로 볼 수 있다면 민족에게 부여된 개성적 자질은 하나님의 은총,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할 책임. 3)여기서 민족의 생존문제와 민족문화에 대한 기독교적인 시각이 가능

C.기독교 민족운동의 근거---1)위의 B)에 의해 창조와 섭리의 질서에 순응하기 위한 노력이 민족 내적 측면과 민족 외적 측면에서 가능. 2)민족 내적---반봉건, 사회개혁 운동. 3)민족 외적---반외세, 반침략 투쟁과 제 민족간의 공존(의식)이 가능/즉 하나님이 주신 민족적 개성을 살리자면 그것을 말살하려는 침략세력에 대해서는 대항해야 하지만, 다른 민족을 향해서는 자기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귀중하듯이 다른 민족도 꼭 같이 귀중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함---투쟁과 평화공존의 자세

D.기독교와 민족주의와의 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함--1), 일에서 보았듯이 인권 자유 평화에 역행하는 침략적 배타적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와는 공존 불가/이는 민족의 이름을 내건 위장된 폭력주의에 불과함. 2)거기에 비해 하나님 앞에서 민족을 정당하게 회복하기 위해 수립하려는 민족주의 이념이 가능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큰 숙제. 3)기독교적 가치에 역행하는 민족주의가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논리는 반대로 기독교적 가치에 합치되는 민족주의와의 공존을 가능케 할 것인가.---재정립의 필요성

 

2.한말 기독교의 민족운동 

어떠한 종교나 사상이 사회와 조우→운동적 성격을 갖게 됨/그것이 순() 역사적 성격을 갖게 되면, 창조적 변혁적 성격을 가짐 /한국의 불교(교종,선종)와 성리학의 역할

A.기독교와 민족운동과의 연대의 가능성;

F.A.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p.7>의 일절;“선교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이내믹하고 선동적인 책인 성경을 보급하고 또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든 한 민족이 학정에 접하게 될 때에는 그 민족이 멸절되던가 아니면 학정이 그쳐지든가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B. 반봉건적(사회개혁) 차원의 민족운동. 1)의식의 변화, 유일신관 노동관의 변화 2)인권의식의 통태화 및 부정부패 개혁운동<--기독교적 정의 / 재판받는 문제 등으로 관에 시위/ 부패한 관헌에 대한 항거/ 1902년의 황해도 감사 윤덕영의 예, 1899년의 북도군수의 사례:"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1899,3,1)→기독교인들의 항거는  기독교의 반 봉건운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남.⇒이러한 성격은, 한말에는 기독교인의 경제적인 항일운동으로, 일제하 기독교인들의 민족산업운동 및 절제운동으로 계승됨.

 

C.반침략적 (자주독립적) 민족운동 → 항일운동.

1)충군애국적 운동; 국기게양, 애국가제창 / 1896년부터의 국왕탄신일 경축 시민대회 / 독립협회. 협성회의 인적 구성면에서 기독교인의 참여 -- 지도부의 윤치호, 서재필, 중간 지도층의 이상재, 남궁억, 주시경, 이승만, 이원긍, 박승봉, 신흥우 및 이들을 지원한 아펜젤러, 벙커 등의 선교사, 민중층의 동원체제에 기독교인들 다수 참여--서울, 제물포, 소래 및 평양의 기독교인들 /독립협회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①평양교회의 독립협회 지원집회;평양 예수교인들이 모여 이번에 서울서 외국 사람과 고문관을 해고한 일로 백성들이 종로에 모여 연설함과 ,독립관에서 의리에 죽기로 동맹한 일과, 시폐를 들어 상소한 일이며, 정부에 몇번 편지한 일을 듣고 일제히 말하되 우리도 백성이 되어 이러한 충의있는 일에 어찌 수수방관하리요. 서울 사람들이 옳은 일과 충절만 가지고 죽을 것 같으면 우리도 그 뒤를 좇아 함께 죽음이 마땅하다고들 하였다니 과연 신민이 나라를 사랑하여 의리에 죽기를 영광으로 아는 일이라”(협성회회보, 1-14,1898 4 2일자)/ 독립협회 평양지회 중심인물이 안창호, 한석진, 방기창 등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임 ②독립협회 반대파 (길영수, 박유진, 홍종우)의 기독교회 비난, ③황해도에 내려진 독립협회원 체포지시문에 야소교인과 동일시, ④일본공사관의 비밀보고(. 감의 두 교파가 독립협회에 깊이 간여).

※장로교공의회--정치적 소용돌이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4개의 외국 선교부 선교사들이 모여 최초로 정교분리를 결의, 선언함(1901,9)←중국 義和團 사건과도 유관함

<교회와 정부 사이에 교제할 몇 조건> ①우리 목사들은 대한나라 일과 정부 일과 관원 일에 대하여 도무지 그 일에 간섭하지 아니하기를 작정한 것이요. ②대한국과 우리나라들과 서로 약조가 있는데 그 약조대로 정사를 받되 교회 일과 나라 일은 같은 일 아니라 또 우리가 교우를 가르치기를 교회가 나라 일 보는 회가 아니요,또한 나라일은 간섭할 것도 아니요.  ③대한 백성들이 예수교회에 들어와서 교인이 될지라도 그 전과 같이 백성인데 우리 가르치기를 하나님 말씀 거스림 없이 황제를 충성으로 섬기며 관원을 복종하며 나라 법을 다 순종할 것이요.  ④교회가 교인이 사사로이 나라 일 편당에 참여하는 것을 시킬 것 아니요, 또 만일 교인이 나라 일에 실수하거나 범죄하가나 그 가운데 당한 일은 교회가 담당할 것 아니요,가리울 것도 아니요. ⑤교회는 성신에 붙인 교회요 나라 일 보는 교회 아닌데 예배당이나 교회학당이나 교회 일을 위하여 쓸 집이요, 나라 일 의논하는 집은 아니요.그 집에서 나라 일 공론하러 모일 것도 아니요 또한 누구든지 교인이 되어서 다른 데 공론하지 못할 나라 일을 목사의 사랑에서 더욱 못할 것이요.(그리스도신문 5-40, 1901 10 3일자)

2)한말 항일의식의 통태화 (1905~1910) -->①시대적 상황--1904~05,노일전쟁/1905,가쯔라(桂太郞)-태프트(Taft) 밀약, 영일동맹 개정, 포쓰머드 조약, 11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피탈/1907,고종 퇴위, 군대해산, 정미7조약(행정권 피탈)/ 1909,기유각서(사법권 피탈)/ 1910,경찰권(5)피탈, 한국 황제 퇴위 /이런 상황에서 당시 기독교의 대세적인 흐름--‘대부흥운동’(1907)과 ‘백만명구령운동’(1909)/죄의 회개와 전도운동 등이 역사의식을 마비시켰다는 비판 있음/한편 이때의 한국교회의 신생과 조직화가 뒷날 3.1운동 등을 가능케 했다는 지적도 있음 ※ 1907년 ‘대부흥운동’에 대한 견해: 이승만, “최근 한국이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놀라운 부흥의 영이,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 나라 전체를 휩쓸고 있다. 양반과 귀족 가문 출신으로부터 정부 고위관료 출신과 보수적인 유교선비, 불교사찰의 독실한 승려, 평민은 물론 양반가문의 부인들과 시골의 가난한 농부들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백성들이 사는 곳에서 가까운 하나님의 집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들은 교회와 예배당을 채우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나가 전도하고 가르치고 있다. 현재 10만 명이 넘는 토착 교인들이 오는 20년 내에 이 작고 아름다운 나라가 완전한 기독교 국가가 되도록 해 달라고 열심히, 그리고 혼신을 다해 기도하고 있다. 나도 그렇게 개종한 토착교인의 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이런 형편에 처한 나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도울 수 있을지 심사숙고해 주시기 바란다.(Appeals of Native Christian, The KMF., Jun.1908, p.96)/ 안창호, “그는 부흥 운동 때에 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여 죄를 자복한다 하여 울부짖고 땅에 구르는 것을 보고 ‘저 어리석은 백성을 어떻게 깨우칠꼬’ 하고 한탄했다는 것이다.(주요한, 『안도산전서』 27)

 

이런 때에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은 교회의 주류 흐름과는 달리 다음과 같이 동태화됨

①종교의식적인 측면; 1905년 길선주의 발의로 장로교단의 전국교회가 11월 감사주일 후에 나라위한 기도회/ 1906년경부터 시작된 새벽기도회/ 을사조약 후 서울의 상동교회에서 정순만, 전덕기의 구국기도회 인도  * 全德基/ 1909년 순종(純宗)의 서순시에 보인 평양교회의 기도회/ 內田의 보고: 한국교회의 구국기도회, 조직적→일제하에서도 이 전통이 유지됨. 새벽기도회. 3일기도회. 철야기도회. ②경제적인 항일운동; 선교사 및 한국인 조사의 조세저항적인 설교→ 반대운동/ 시장세 반대 투쟁/ 국채보상운동→일제하의 경제적 항일운동 및 무실역행 운동 등 ③정치적; 기독교인의 단체 (Y ) 반 일진회, 반 합방운동과 신민회 * 기독교인이 다수 참여한 신민회 조직--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김구 등 기독교계 및 개화파 인물 중심 ④행동적. 무력적 항일운동; 을사조약 반대시위 (최재학, 이시영 / 김하원, 이기범, 김홍식, 차병수 등 구국시위 및 연설→일제헌병들과 충돌 / 洪太順의 고종양위 반대 자살 / 鄭在洪의 이등박문 제거 미수 자살/ 의병운동 지도자 중에서도 기독교인 (具然英, 具禎書 부자 등)

※한말 매국원흉 살해 사건--기독교인과 관련됨; 張仁煥 의사(Stevens 제거 1908,3,231924년 완전 석방)/ 안중근(카톨릭),(禹德淳, 개신교)의 이등박문 제거- 우덕순의 시”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중략) 앉을 때나 섰을 때나, 仰天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예수여 살피소서,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원대로 구하소서. 오호 奸惡 이 도적아, 지금 네 명 끊어지니, 너도 원통하리로다, 닦으면 덕이 오고, 죄범하면 죄가 온다./ 在明의 이완용 제거 미수 (이동수, 김병록, 이학필, 김정익, 조창호, 전태선 등의 기독교인)/ 全德基의 을사오적 제거 계획 및 유년군사학교 설립→李東輝, 姜宇奎, 相玉, 의사의 무력항일 운동 및 만주에서의 무장항일투쟁에 기독교 명의(대한기독교 의병→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움)로 참가      

*기독교와 폭력의 문제

 

3. 삼일운동과 기독교

A.3.1운동의 교회사적 배경-- 1)일제의 기독교 회유정책(Y.등에 자금지원,교계지도자들의 외유알선, 일본 조합교회의 진출과 회유, 외국 언론인과 학자 동원) 2)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105인 사건/ 포교규칙(1915)-교회설립 및 교역자 초빙을 간섭/ 개정사립학교규칙(1915)-미션계학교에서의 예배와 종교교육 금지/ 전도회,사경회,부흥회, 기도회와 예배, 설교 등에 대해 감시 간섭.3) 한국교회의 성장--1907(대부흥운동,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조직)/1912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조직과 해외선교사 파송/신학교 설립(1901 평양장로회신학교,1905 협성신학교)/신학전문지 간행(1916 神學世界,1918 神學指南>/ 4) 기독교인 중심의 독립운동→신민회, 송죽결사대, 한영서원의 학생비밀결사, 조선국민회/ 그 밖에 해외독립단체들 중에도 다수의 기독교인 관여.

 

B.점화단계에서의 기독교--1)해외기독교 지도자들의 활동→여운형,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1918년 노회출석을 빙자하고 선천에 들어와 이승훈 이상재를 만나고 상해로 돌아감. 1919년초 새문안교회 장로를 역임한 김규식이 한민족 대표로 평화회의에 파견됨 2)국내 기독교계의 움직임→1919.1월말 선우혁이 일시 귀국하여 양전백 이승훈 길선주와 독립운동 참여를 의논. 서북지역에서 김선두 강규찬 도인권 이덕환 윤원삼 김동원 등이 독립운동 논의. 서울의 YMCA와 세브란스병원 중심으로 각각 독립운동계획 태동 3) 이승훈이 주도하여 거족적인 운동에 참여 4) 33인 중 16인 참여, 48인 중 반 이상이 기독교인.

C.운동과정에서의 기독교--1) 3 1일 당일 서울을 비롯, 12곳에서 일어남-대부분 교회 내지는 기독교인 중심/3~4월의 통계에서, 주동세력이 뚜렷한 311개 지역중 기독교 78(25%) 천도교 66, ,천 공동 42개 지역/6 30일까지의 투옥자 9,458명 중 기독교인2,087(22%)/ 1919,12월 말까지의 복역자 19,525명 중 기독교인 3,373(17%)→이런 통계의 신빙성 문제/ 당시 기.천의 교인 비교--20만명 추산, -녹명자 3백만, 의무부담자 2백만→손병희의 진술/ 일제의 보복이 기독교에 가장 가혹함, ; 제암리 사건 등  

D.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민족의식과의 관계; 기독교신앙(정의 자유 평화)+민족적 양심(자주 평등 해방)=민족주의 신앙,즉 하나님나라 건설+독립국가 건설=3.1운동 참여

 

4.‘문화통치’와 민족말살정책 시기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A.6.10만세운동과 신간회, 근우회 운동: 신간회[이상재 조병옥, 이갑성 박동완, 조만식, 정춘수 이동욱 김영섭 목사, ], 근우회[유각경 김활란 金 김미리사 양매륜 방신영 손정규 차사백 최활란 홍에스더 이효덕 김영순 신알벳트, 이밖에 여성동우회계의 이현경 황신덕 정종명 등이 기독교계]는 좌우합작운동으로 우파계에는 기독교민족주의 세력이 참가하여 사회주의 세력과 제휴, 항일전선 구축 /이런 제휴가 1925년 사회주의계의 ‘반기독교운동‘이 절정에 달한 상황에서 주어졌다는 것⇒이는 민족적 과제를 두고 이념, 노선이 다른 세력과의 제휴 가능함을 의미함.

B.사회의식의 심화와 농촌, 사회운동; 192030년대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양분화됨--민중계층 교인의 초월(신비)주의적 타계지향 신앙→부흥운동, 지식인. 엘리트층의 계몽주의적 사회참여 신앙→사회운동을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서게 됨. 1930년 기독교조선감리회의 <감리교 교리적 선언>의 제 7: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사람이 형제됨을 믿는다.→천국은 인격의 원칙이 되는 도덕적 자유를 무시하고 성립되지 아니한다. 사람의 인격은 거룩한 가치가 있는 것과 각자의 가능한 바를 실현할 만한 기회를 부인하여서는 아니될 것이오, 인류는 사회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최고의 社會善을 위하야 협동하며 봉사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鄭景玉, 기독교의 원리, 1935, p.127] ①사회의식의 심화; 배경-‘문화. 민족말살정치’하에서의 민족의 암담한 현실과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개조의 기운, ‘사회주의계’의 기독교 비난, 공격과 신비주의적 신앙형태에 대한 반성,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 한국대표; 신흥우 양주삼 정인과 김활란 노블 마펫)와 당시 미국에서 풍미하던 ‘사회복음’(Social Gospel)주의의 영향⇒여기서 ‘신앙생활의 실제화’와 ‘실제생활의 신앙화’를 동시에 수행하면서 민족의 독립역량을 비축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의식을 심화시키게 됨/ ②기독신우회’사건; 趙炳玉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조직,“우리는 속죄구령을 고조하는 동시에 기독의 사회복음주의를 중흥시키려 한다. 우리는 이 고통과 죄악으로 포위된 생을 타 세계에 전거시키려 함보다도 자유 평화 진리의 천국을 인간사회에 임하게 하야 거기에서 우리의 인격의 진선미를 완성코자 한다.“→”기독주의의 민중화와 실제화“를 기함./가 신간회사건으로 체포되자 와해 ③적극신앙단; 1932년 “기독교의 민중화, 생활의 간소화, 산업기관의 시설, 조선적 교회 설립”을 목표로 함/ 5개 선언(우주관→자연과 역사와 예수와 경험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믿음, 인생관→하나님과 하나이 되어 악을 싸와 선으로 정복케 함이 인생의 첫째 원측임을 믿음, 개인해방→사람의 권리와 의무와 행동에는 남녀가 없이 완전의 동등이오 타인에게 침해가 없는데는 원만의 자유임을 믿음. 개인대사회→개인 소득욕보다 인류 공헌욕으로써 새사회 건설함을 믿음, 사회대개인→사회는 우리의 경제 문화 정신생활에 升登的 衡平과 안전을 보장하기로 믿음)과 “생활개조 21개조”(동등대우, 보수동등, 공동활동, 단체발전 등 사회주의적 이념들이 제시되고 있음)에 그들의 주장이 잘 나타남→이승만의 동지회 계열을 중심으로 이뤄짐/1935년경부터 활동저조 ④한국 교회의 사회신조(신경)의 제정; 1932,‘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12조의 사회신경 채택-“일체의 唯物교육 유물사상 계급적 투쟁 혁명수단에 의한 사회개조와 반동적 탄압에 반대”한다는 반사회주의 노선을 분명히 밝힘, 12개조에는 남녀동등 여성교육 노동시간 노동조합 최저임금법 등의 사회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입장을 밝힘/ 1928년 일본기독교도 연맹에서 채택한 사회신조와 대동소이하다는 지적/ 주체성에 문제 있지만 그러나 이 신조는 기독교의 농촌, 절제 및 구제 운동에 신학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사에서 의의가 있음. ⑤농촌운동; YMCA,1920년부터 한국농촌 조사, YWCA,1926년에 농촌사업 시작/ 1931년 협성신학교 출신의 崔容信, 경기도 샘골(泉谷)에 파송, 활동, 1935 1월 병사←沈의 《상록수》의 주인공 ⑥절제운동과 구제사업(1936년 현재, 고아원 양로원 병원 등 사회구제기관 38개 중 천주교 6, 구세군 1, 성공회 1, 안식교 2, 일본기독교 1, 개신교 27) ※ 체제 안의 ‘타협주의 노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

 

 

B.해외---임시정부, 무장․의열 투쟁, 미주 동포의 독립운동 지원

1. 임시정부와 그리스도인:① 안창호의 상해 임정 조직 ② 구성원→초대 대통령(이승만)과 마지막 주석(김구), 임시의정원→이동녕(상동계, 뒷날 대종교) 손정도, 김인전 등  

2. 무장 의열 투쟁:  大韓新民團(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에도 참가, 승리의 중요한 역할담당)←金圭冕 일파의 대한기독교(聖理敎) 신도의 단결한 것←구한말 신민회를 직접 계승한 단체[신용하:<대한신민단 독립군의 연구> 『의병과 독립군의 무장독립운동』지식산업사 2003] ② 강우규 김상옥 편강열 朴次貞(근우회→김원봉) 

3. 미주 동포의 독립운동 지원

 

C.신사참배거부 투쟁의 민족운동적 성격--일제의 천황제 자체에 대한 전면적 거부

 

5. 해방 이후의 민족운동

A. 해방-1960년까지의 기독교: 신사참배회개 등 일제 잔채청산에 소극적, 국가수립운동에 참여한 바는 있으나 오히려 정교유착했으며 긍정적인 평가는 곤란함

B. 5.16이후 군사정권: 인권 민주화 운동에 크게 공헌함

C. 유신정권 및 신군부 하에서는 통일운동의 물꼬를 트고 적극적으로 활동함

D. 북한돕기 운동에 선도적인 역할, 그러나 한반도 평화와 관련, 다수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진보적인 기독교회와 대립적인 역할을 보이며 남북 화해에 소극적임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의 개념화를 위한 시론

   1. 머리말

기독교는 1880년대, 외국 선교사 주도로 전파된 다른 나라의 경우와는 달리, 선진적인 한국인들에 의해서 한국에 수용되었다. 한반도 주변에까지 전파된 기독교는, 만주와 일본에서 성경의 일부가 번역되고, 그 곳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용기있는 한국인들이 그 번역된 성경을 한국에 전함으로 비로소 개종의 역사가 일어났다.1)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는 외국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여 수용하게 되었지만, 한국의 경우는 한국인 스스로가 먼저 수용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의 기독교의 역사에는 수용 초기부터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돋보였다.  

기독교 수용의 이같은 특징은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성격을 해명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기독교 수용에서 한국인들의 자기 필요성에 의한 측면이 강조될 수 있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그들이 처한 상황과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 연역될 수 있다. 그 필요는 영적 세계에 그치지 않고 민족공동체가 처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되었을 것이고 그 점에서도 활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가 초기부터 한국 사회의 시대적 과제와 맞물려 교호작용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교호작용은 한 세기에 걸친 한국의 민족운동 그것과 관련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수용된 이후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로 변화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유습을 개혁해야 한다는 수용당시의 당면한 과제에서부터 시작하여, 한말에는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국권을 수호해야 했으며, 일제 강점하에서는 국권회복․민족독립이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는 식민지적 유제 청산을 비롯하여 민족적 전통의 창조적 회복과 통일된 민주국가의 건설해야 하는 등 중층적인 과제를 안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해방 초기의 식민지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적인 과제는 독재․군사 정권 아래서는 인권 신장․민주화의 과제로 발전되었으며, 분단이 민족공동체의 제반 사회적 조건들을 제약한다는 것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때에는 무엇보다 통일국가의 실현이 가장 뚜렷한 민족사의 과제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는 민족구성원으로서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기독교인에게도 당연히 주어진 과제였다.  

수용당시에 이미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을 보였던 한국 기독교는 민족사의 고비마다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는 데에 등한하지 않았다. 한국의 기독교인 또한 이같은 과제를 의식하고 수행함에 적극적이었다. 필자는 기독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수행한 그같은 과제들이 민족운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고 그것을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한국의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이 자신들 앞에서 주어진 민족사적 과제 앞에서 퇴영적 자세를 갖지 않고 적극적으로 과제 해결에 나섰다는 뜻이다.

민족운동은 체질․언어․문화를 같이하고 있는 민족공동체가 정치적․사회적․문화적 통합을 이룩하고 대내외적 주체성을 지키며 자체의 성장과 발전을 기약하려는 제반 운동을 말한다. 그것은 대내적으로는 인간 평등을 전제로 공동체의 균형과 정의, 인권과 자유를 신장시키려고 노력하는 운동이며, 대외적으로는 민족공동체가 주체성을 확보, 신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운동을 1차적으로 하여 민족과 민족간의 화해와 협동을 증진시키고 인류와 세계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하는 제반 운동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운동을 이렇게 규정할 때 ‘기독교 민족운동’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나 기독교인 같은 특정 집단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민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행한 운동을 특별히 ‘기독교 민족운동으로 범주화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런 문제의 제기에는, 기독교인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속하고 있지만 그는 종교인이기 이전에 민족공동체에 속한 존재라는 점과 그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그런 민족운동을 주도하거나 참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전제를 유념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점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즉 앞서 말한 범주의 민족운동에서 기독교 공동체 혹은 기독교인에 의한 것이 같은 시대의 다른 이념 집단과 구별되거나 비교될 수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에 의한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기독교 혹은 기독교인들의 운동을 새롭게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열거한 민족적 과제 수행에 대한 기독교()의 활동은 필자를 포함한 여러 연구자들의 개별적인 논문과 단행본들에 소개되어 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런 내용을 종합하고 개괄하여 그 요점을 간단하게 제시하고 그것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으면서 기독교인들의 그같은 운동이 ‘기독교 민족운동’이라는 개념설정을 가능케 할 것인가을 논의의 초점으로 삼고자 한다. 이 글이 넓은 의미의 ‘기독교 민족운동’ 개념화설정을 위한 논의를 활성화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거듭 기대한다.

 

 

2. 한말 반봉건․사회개혁 운동

 

기독교가 수용될 때에 한국은 중세 말기의 모순과 부패로 사회적인 취약점이 드러나고 있는 데다가, 서구 제국주의의 서세동점 현상으로 민족족적으로 극심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사회적인 취약점과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자기 사회의 체질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를 이룩하는 길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내적으로는 반봉건, 대외적으로 반외세(반침략)를 위한 사회개혁이 필수적이었다. 사회개혁을 통해 근대적인 사회와 국가를 이룩하는 것만이 당시의 위기를 해결하는 방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한말 기독교 수용 당시의 이같은 민족적인 과제는 기독교인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과제였다. 따라서 이 무렵의 기독교의 민족운동적 성격은 결국 기독교가 이같은 한국의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회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가 하는 점을 검토하는 데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한말 봉건사회의 모순은 이미 조선 후기부터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당쟁과 세도정치는 그런 모순을 더욱 촉진시켜 19세기에 들어서서는 각종 민란으로 통칭되는 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을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들은 봉건사회의 실정과 모순들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 매관매직으로 인해 인사상의 난맥과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철종조에 들어서는 임술년(1862) 한 해 동안에 37건의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원군이 등장하여 세도정치로 땅에 떨어진 조선왕조의 권위를 재건하고자 일종의 개혁정치를 과감하게 실천하고자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왕비족인 여흥 민씨에 의한 세도정치가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어느 사회에나 한 파당의 전횡이 있는 곳에 독재나 부패가 만연할 수 밖에 없다. 민씨 세도는 얼마 안가 국고를 탕진했고 인사의 난맥상으로 부정과 부패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의 관리들의 부패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독립신문의 기사다.

 

 

“혁파하라신 잡세를 여전히 무는 것은 관장들의 탐학하는 까닭이요, 돈 많은 부자들을 무단히 불효부제(不孝)한다고 잡아가두는 것은 그 부자가 다른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돈모은 것이 죄가 됨이요 한 동리 사람은 아무가 불효부제인줄 모르되 먼 데 있는 관찰사와 군수들이 먼저 아는 것은 그 관원들이 다른 탁이한 문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사야탁(晝思夜)이 다만 돈 먹을 생각뿐인고로 동녹슬 밝은 눈이 먼 데 있는 돈구멍을 능히 밝게 봄이라.2)

 

기독교는 한말 이같은 사회에 선교사에 앞서 먼저 성경이 번역, 보급되면서 수용되었다.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번역, 보급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한국이 기독교 복음에 먼저 접근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뒤에 한국 기독교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유용성을 갖는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Bible-loving Christian) 혹은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Bible lovers)이라고 불려졌고, 또 한국의 기독교를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언급한3)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도래한(1885) 후 얼마 안된 1888년경부터 주기도문․십계명․사도신경․웨스트민스터요리문답 등의 교리서가 번역 출판되었고, 1890년대에서 1900년에 이르는 기간에 성교촬리를 비롯하여 60여종의 전도문서들도 간행, 유포되었다. 성경과 전도문서의 유포는 선교사들이 전해준 서양문화와 함께 한국 사회에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문서들은 기독교의 중심교리 - 신론․기독론․성령론․인간론․창조론․계시론․죄론․천사론․구원론․종말론 - 와 우상숭배 금지․제사문제와 부모공경․안식일 준수 등의 종교적 주제, 및 인간평등과 남존여비의 문제․결혼의 문제․자녀교육의 문제 등의 사회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4) 이런 주제들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하나님 앞에서 변화된 인간이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십계명과 기독교 교리들은 한국 사회의 봉건적 관행과 사회적 모순에 대해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정면으로 개혁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개혁에 미친 중요한 것의 하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주는 영향이다. 이것은 곧 근대사회 성립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 할 인민평등의 문제와 상통할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서로 평등하다는 전제가 근대사회를 성립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독교가 수용되어 바로 이런 인간관을 가장 먼저 가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의 존엄성과 천부적인 인권을 담보해주는 것일 뿐만아니라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기독교는 백정과 종이 양반이나 주인과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평등권이 현실화되는 단서가 된다. 서울의 승동교회는 백정 출신의 박성춘(朴成春)이 장로로 되었던 사례를 갖고 있다.5) 그리고 그의 아들 박서양(朴瑞陽)은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이 되어 한 때는 모교에서 가르치기까지 했다. 이런 사례는 결혼의 풍속도 등 전통적인 풍속을 변화시키는 것과 함께 도시 시골 할 것 없이 기독교회가 성립되는 곳에서 시작되고 있던 현상이다.

 

기독교의 수용은 인간관의 변화와 함께 직업관과 가치관의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이미 반상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가졌던 직업관도 바뀌어지기 시작했다. 일의 귀천에 관계없이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일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봉사와 희생을 기독교적 실천덕목으로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과 함께 기독교인들의 삶의 영역에 파고 들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예수의 교훈은 배재학당의 당훈(堂訓)이 되었고 이를 교훈 받은 자들이 섬겼던 한국 사회의 가치관을 개혁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의료선교사들의 콜레라 퇴치를 위한 헌신 봉사는 한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은 물론 직업관과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6)

한말 성경과 십계명, 기독교 전도문서들에 의해 정직과 신용, 근면과 절제를 기독교윤리로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는 능력을 배양해 갔다. 이것은 물론 선교사들이 한국 사회에서 서양의 문화와 힘을 소개하면서 점차 ‘양대인화(洋大人化)’하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그 힘에 의존하게 되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독교인들의 부정 부패에 대한 항거는, 당시 오로지 복종만 강요당해 온 백성들의 자각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백성들은 관장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도 기독교에 입교하는 경우가 더러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관장의 말을 믿다가는 큰 낭패를 보겠으니 다시는 관장의 말을 믿지 말고 외국교에나 들어가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게 하자7) 고 하는 가련한 백성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황성신문』도 당시 백성들이 외국교에 떼지어 들어가는 것은 관리들의 탐학에 고통받아 그 화망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했다.8)

한말에 기독교가 수용되어 교회가 세워지는 곳에서 전통적인 종교나 사상에 의한 갈등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었다. 서울 평양 수원 등지에서 일어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그 뒤에 지방관의 조종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갈등은 곧 선교사와 지방 수령과의 갈등으로 압축되었고 급기야는 선교사가 승리하여 그들의 힘이 한국인들에게 과시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 세력을 뒤로 한 기독교인들은 지방 수령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 과거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지방 수령 중에는 부정에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을 ‘동학교도’라는 혐의를 뒤집어 씨워 투옥시키기도 했지만 부정부패한 지방관들 중에는 부정을 고발하는 기독교도들의 항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매관매직하여 지방수령으로 발령받은 일부 양반들은 야소교 있는 마을에는 부임하지 않겠다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 고을로 옮겨 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나뇨. 우리 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 듯”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