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교회 지도력
전병금 목사
(강남교회)
서론
인류의 역사와 문명은 흥망성쇠를 거듭하여 왔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 그 변화는 거의 종족과 종교 그리고 천재지변에 의해서 결정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그 과정은 자연히 완만하게 진행되었고 그 역사는 긴 기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1950년대 이후 인류는 급진적인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변화의 원동력은 기술이었고 이 기술에 의한 변화가 세계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갈라 놓았고,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다른 종족집단을 거의 추종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기술에 의한 거대한 변화를 재촉했던 현대 문명을 앨빈 토플러는 ‘제 3의 물결’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제 그보다 훨씬 앞선 문명인 제4의 물결‘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뉴미디어의 시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뉴미디어의 시대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모든 형태를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뉴미디어로 도전해 오는 새로운 시대에 응전을 요청받고 있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는 모두 숨가쁘게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본론
제가 10여 년 전에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버ald엄에 가 있었는데 도시 중앙에 있는 큰 교회가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교회가 폐허가 된 것도 놀라운데 누구 한 사람 교회를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제가 주변에 있는 복덕방에 가서 저렇게 엄청난 교회를 왜 예배도 드리지 않고 저렇게 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 교회를 지금 팔려고 내놓았는데도 팔리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모이지 않고 그렇다고 예배당을 헐고 공장이나 아파트를 지을 수도 없고 그럭저럭 하다 보니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는 버밍엄 뿐만 아니라 런던, 파리 등 유럽 대도시에도 텅텅 빈 채 문 닫는 교회가 점점 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뉴미디어 시대에 교회가 직면하게 될 사상적인 위기는 무엇이겠습니까?
(1) 상대주의 물결
절대적인 진리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게 될 것입니다. 뉴미디어 시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가치관의 등장으로 과거의 모든 가치체계가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진리성에 대한 도전도 심각해질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이나 미국 교회는 엄청난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여러 종류의 종교 세력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막을 길이 없어서 생긴 신학이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서유럽에서 등장한 종교다원주의는 어떻게 해서라도 기독교가 살아 남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과정에서 나온 현상이지만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는 인기있는 신학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은 지금 기독교가 하늘 높이 올라가고 있는데 다원주의가 한국 신학계에 거론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이른 감이 잇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만히 두어도 40~50년, 혹은 20년 만 지나가면 종교다원론을 어쩔 수 없이 한국 신학에 등장시키지 않으면 안 될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되면 복음을 전하기란 더욱 힘들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고 예수 외에는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고 사람들에게 외치면서 자신 있게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앞으로 21세기에 등장하는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2) 세속주의 물결
영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관심이 고조될 것입니다. 성속이 뒤범벅되고 거룩함이나 신성함은 사라지고 향락문화에 빠져 소돔과 고모라를 방불케 할 것입니다. 즉, 무신론적 세속 도시화가 될 것입니다. 이미 이런 형상은 도래한 지 오래지만 더욱 심각해져서 전혀 종교가 설 자리를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역으로 환각에 빠지게 되는 심령과학 같은 영적 세속주의와 사이비 종교의 출현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오늘날 세속주의의 물결이 얼마나 무섭게 들어오는지 한국의 기독교인들마저도 영적, 도덕적 윤리를 완전히 상실한 채 세속주의 물결에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목사님들 가운데서도 한 빌딩에 교회가 있는데도 한 층 위에 다른 교단이라고 해서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풍조입니다. 이것은 바로 세속주의의 물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지역은 그 교회에다 맡겨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하지 않고 단지 신학교를 졸업 하고 목사가 되었으니 교회를 세워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교회를 세웁니다. 이처럼 목회자들의 목회윤리가 완전히 타락해 버리니까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도덕의식이 상실되어 가는 것입니다. 윤리의식이나 도덕의식이 상실된 시대에 어떻게 복음을 증거하겠습니까?
제가 영국 버밍엄에 있을 때 엄청나게 부흥되는 교회가 하나 있다고 해서 어떤 목사님의 인도를 받아 가 보았더니 그곳은 사탄을 숭배하는 사탄 교회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추다가 약간 변화되어서 록음악을 넣더니 예수가 빠지고 그 자리에 사탄이 대신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는 음악으로 목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이 기도할 때 보니까 아주 깨끗하게 생긴 사람들인데도 뱀처럼 혀를 날름날름거리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음악 목회를 하겠다고 배우러 가는 사람들 중에 그런 곳에 빠져 잘못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환각상태, 심령과학, 사탄음악 등 이러한 세속주의 물결이 21세기에도 계속 등장하여 교회에 도전해 올 것입니다.
(3) 공동체 의식의 붕괴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 같은 위치로 전락되고 개인은 부분적 작업만 수행하면 되는 일의 전문화가 촉진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일을 간섭할 수동 없습니다. 컴퓨터와 통신 기기들을 통해서 일하기 때문에 인간 관계가 단절되고 인간의 소외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되고 사회 공동체의 일체감은 붕괴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복을 받겠다고 교회에 나와서 헌금도 드리고 봉사도 했는데 소득이 1만 달러 시대가 되니 못 먹고 못 입는 사람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자동차 없는 집이 없고 조그만 아파트라도 없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복받아야 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됩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교회에 나오던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게 되면 그때는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컴퓨터나 통신기기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윤리의식과 도덕의식의 부재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새로운 신자를 교회로 인도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선교적 위기는 온 세계의 위기이고, 한국 교회의 심각한 위기는 우리가 아직 피부로 못 느끼지만 점차 우리의 눈앞에도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4) 무종교성의 시대
과학 문명의 발달로 과학 기술로써 거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 기술을 숭상하고 또 기술만으로 행복을 추구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는 영원한 세계를 부인하고 신의 계시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아예 무관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세계는 영원한 세계를 거부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세계로 만족하는 현세적 가치관이나 편의주의적 가치관으로 빠져들게 됨으로써 무종교적 사회로 전환될 것이 뻔합니다.
제가 영구의 셀리옥 대학 학장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은 새벽 기도와 철야 기도에 많이 모이고, 금식 기도를 많이 해서 그렇게 부흥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그분 말씀이 영국에도 50년 전에는 그런 엄청난 교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엄청난 교회들이 헌금을 해서 지금처럼 교회들이 우뚝 서있는 것인데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가 오면서 교회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직장이나 학교나 금요일 오전이면 모두 끝나니까 자동차로, 기차로 여행을 떠납니다. 특히 영구에서는 배에다 차를 싣고 프랑스나 스페인으로 가서 2~3주일 즐기다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우리 나라도 1996년도가 1만 달러 진입시대요, 1997년도가 되면 완전히 1만 달러 시대로 들어선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 교회도 지금처럼 많이 모이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요새는 직장도 주 5일 근무하는 곳이 점차 확산되고 있고, 대학도 토요일은 거의 공부를 안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외국 대학이 쏟아져 들어오면 대학 들어가는 것도 예전처럼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들이 고3 자녀 때문에 밖에 못 나가는 일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거의 다 산으로 바다로 가버리면 유럽처럼 교회가 비는 현상이 멀지않아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공휴일이 끼여 있으면 교인들의 20%정도는 교회에 안 나옵니다. 그 집에 전화해 보면 전화를 안 받습니다.
6천 달러 시대인 요즘도 이틀만 쉬면 서울의 교인들이 밖으로 많이 나가는데, 앞으로 1만 달러 시대에는 목회를 어떻게 해나가야 되지 심각한 문제입니다.
특히 한국 교회는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교파가 분열되어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내 신앙, 우리 교단의 신앙이 최고의 신앙이다.’라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아직 많기 때문에 교단의 연합과 일치보다는 갈라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장로교회를 하나로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 선교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피부로 못 느낄지 몰라도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욕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장 간판을 걸고 행세하는 사이비 종교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붕괴된 사회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사명은 더욱 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계에 대비하여 교회 지도력을 새롭게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 위기에 처해 있는 한국 교회 지도력
세계 교회가 직면한 선교적 위기는 한국 교회에서도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더욱 한국 교회를 긴장시키는 것은 선교 100주년을 자축한 이후 교회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는 것, 즉 교회 성장의 중단을 그 무엇보다도 큰 위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 성장의 중단에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우선 교회 분열과 기독교 간판을 건 사이비 종교의 병폐, 그리고 기독교인들의 윤리와 도덕의 부재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대부분 한국 교회 목회자의 지도력 결핍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지도력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야 합니다.
첫째,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목회 지도력을 갖추기 위해 우리 목회자에게 우선 필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지식에는 신학적 지식 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학문과 배경, 상황 등 사회 전반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하며 생각하면서 자기 스스로 지도력을 키워 나가야 합니다.
둘째, 인격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지식이 아무리 풍부해도 인격이 잘못되어 있으면 허공에다 소리치는 것과 같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랑과 인내로 자신의 인격을 다스려 나갈 때 지도력에도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 기능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식과 인격을 갖추었는데도 기능이 부족하면 사람을 이끌어 나가기 어렵습니다. 설교를 잘 하는 것도 기능이요, 교인들을 잘 대하는 것도 기능이요, 장로님과 좋은 협력관계를 맺는 것도 모두 기능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한마디로 말해서 기능입니다.
그런데 인격이나 지식 없이 기능만 능통한 것은 재주꾼이지만 인격과 지식을 겸비했으면서도 기능까지 갖추었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21세기가 아무리 최첨단 정보화의 시대가 된다 할지라도 이 세 가지를 목회자가 갖춘다면 한국 교회의 미래는 밝습니다.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 교인들이 큰 교회로만 몰린다 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큰 교회로 가기야 하겠지만 세계 교회의 추세는 작은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작은 교회라 해서 허탈 상태에 빠지거나 열등감에 사로 잡힐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앞으로 21세기는 작은 교회 중심이 됩니다. 지금은 작은 교회일지라도 그 곳에서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목회를 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2. 바람직한 교회의 지도력
교회 지도력의 원형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하고 또한 구약시대의 지도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전승되어진 교회 지도력의 모범을 통해서 찾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롭게 도전해 오는 21세기의 교회의 지도력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직한 지도력을 가진 교회 지도자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합니까?
첫째, 섬기는 지도력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예수의 지도력은 섬기는 지도력이었습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내려오는 종의 개념입니다. 모세나 다윗도 종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요사이 정치가들이 말하는, 듣기 좋은 소리로서의 ‘공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따라서 일하는 사람, 백성의 행복과 번영과 축복을 바라시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백성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삼기는 것은 니체가 말하는 노예 근성이 아니라 백성들의 괴로움과 아픔이 당신의 괴로움과 아픔이 되시는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혀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는 엄청난 지도력을 가진 사람인데 그의 지도력은 하나님을 만나면서 생깁니다. 모세는 황태자로 애굽 궁궐에 살면서 많은 지식과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문학에서는 천문학의 시조로 모세로 보고, 물리학에서도 물리학의 시조를 모세로 봅니다. 또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했으니 인격도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훌륭한데도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종 된 자기 민족이 애굽의 감독에게 매맞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이고는 애굽 왕의 추적을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그는 실의의 40년 동안 양을 키우면서 과거에는 부유한 사람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지만 이제는 양을 키우는 목자로서 양을 키우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실제 경험에 의해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민족을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절대로 쓰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9~10).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부르시어, 그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종으로 나서라고 사명을 주십니다. 모세는 그 말씀에 사로잡혀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한 후 하나님의 심정과 접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들려 오는 백성의 아우성 소리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종이면서 백성을 섬기는 자로 서게됩니다.
창세기 1장 2절을 보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는 세상의 모든 것이 혼돈스러운 카오스적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모세 역시 혼돈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쓰시지 않습니다.
목회자도 하나님의 신이 오기 전이라면 그는 혼돈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며 교단만 분열시킬 뿐입니다. 가치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통해서 백성들의 고통을 일체화시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열리고 하나님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의 고통소리를 듣고,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을 같이 아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아픔이 바로 자신의 아픔입니다. 교인들의 슬픔을 자기 슬픔으로 느껴 통곡해야 합니다.
모세는 성령 충만함을 받고 주저앉아 본 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갔습니다. 성령은 한때 팍 일어났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입니다. 모세는 성령을 받아서는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지 않고 백성들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모세는 그들의 고통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한 것은 노예의 근성으로 인해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기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모세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이요 행복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였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위해서 완전히 죽음으로 섬기는 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와 허물로 버려진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종으로서의 섬김의 원형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섬기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말만의 봉사자가 아닌 참된 봉사자였습니다.
저는 목회자야말로 교회와 민족과 그 지역사회를 섬기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어느 부목사님 한 분이 저를 찾아와서, “우리 교회 장로님들은 목사를 섬길 줄 몰라요. 그래서 교회가 날마다 시끄러워요.”라고 하시기에 제가 그랬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장로들을 섬기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우리는 교인들을 섬기러 온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섬기셨는데, 모세가 섬겼는데, 선지자들이 다 섬기는 자들이었는데 선지자와 사도들의 후예인 우리가 왜 섬기지를 않습니까?
“나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 노릇 한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21세기가 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지도자가 되는 방법입니다. 교인들을 제대로 섬기지 않고는 교회 안에서 목사의 위치가 서지 않습니다. 지금은 과거하고 다릅니다. 교인들보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해서 순종합니까? 겉으로야 물론 따르겠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기는 영성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날 교역의 지도력은 백성의 고통을 하나님을 통하여 듣고 그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데서 얻어집니다.
둘째, 남을 지도하는 것보다 협력하는 지도력이 필요합니다.
구약성서의 삼손과 같은 사자들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각 개인의 지혜와 용맹으로 그때그때의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점은 그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독선적 지도력은 그 기초가 견고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여호와 중심의 신앙 부흥운동을 선도할 때 그가 기름 부어 세운 두 왕, 사울과 다윗은 지도자로서의 성품이 서로 상반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 왕위에 오른 사울은 힘과 용맹에 있어서 사사들에게 견줄 만하고 뛰어난 통솔력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나라가 하나님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권세 안보에 치중함으로써 그의 왕정은 실패하고 맙니다. 그의 실패는 선지자 사무엘의 신앙적 충고를 무시한 독선과 유능한 지도자 다윗을 끌어안지 못함 때문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결국 왕정의 기초를 놓은 지도자로서 실격되고 맙니다.
유능한 지도자는 남의 말에 귀기울일 줄 알고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크게 쓰십니다.
사울은 새로운 지도자인 다윗의 등장에 간담이 서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떠나면 별것 아닌 것에도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교인들의 부목사 양복 한 벌 맞춰 주면 간담이 서늘해져서 ‘내가 쫓겨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지 말고 비록 자기는 자기 돈으로 양복 맞춰 입더라도 부목사에게 양복 맞춰 주게 하면 그 교회는 목사의 지도력이 올라가게 됩니다. 부목사를 인정해 주고 자신감을 가지십시오.
사울은 협력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끊어버리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유다 남방 아둘람 굴에 거했을 때도 권세에 쫓겨 도망해 온 자들을 모아 그들을 사랑하고 힘을 기르면서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아둘람 굴의 400명의 사람들은 다 원통한 자, 마음이 상한 자, 빚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중에 다윗 왕국의 대신들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원대한 계획 아래 주어지는 기회가 오면 과감하게 붙잡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왕의 추적을 피하여 숨어 있으면서도 국경지대의 마을들을 적으로부터 보호해 줌으로써 그 시기를 백성들의 신임을 받는 기회로 삼았고, 적국 브레셋의 시글락에게 붙어 살면서 철 조작법을 익혀 두어 후일을 도모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지방의 조그마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다면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하고 인재도 양성해야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 여러분이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 혼란스러운 카오스의 세상에 코스모스를 만드는 지도자가 되려면 지금 있는 위치에서 실력을 닦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영성이 나타나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작은 교회는 준비하기에 말할 수 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심방할 곳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나 만나러 왔다갔다 해서는 안 됩니다.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원수 사울이 3천 명의 병력을 데리고 자기를 죽이러 왔을 때 굴속에서 만났지만 그의 옷자락만 베고 밖으로 보냅니다. 십 황무지에서 만났을 때도 사울의 물병과 창만 들고 나왔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죽이면 왕권이 그에게 오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사울을 지지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대정치가입니다. 정치가가 정치를 하려면 멀리 내다보고 정치를 해야 합니다. 그는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조가를 읊어 슬퍼하고 또 자기 부하에 의해 죽은 사울의 심복 아브넬의 죽음도 슬퍼하였습니다. 이런 행동으로 사울편 사람들의 마음을 사게 됩니다.
다윗은 대정치를 하는 사람입니다. 대정치는 하나님의 정치를 말합니다. 여러분, 노회 정치나 총회 정치를 작게 하면 안 됩니다. 돈이나 쓰고 받는 그런 정치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대정치를 배워야 합니다.
만약 자기 밑에 원수같이 행동하는 장로님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사람이란 곧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되 집중적으로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같은 결과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저도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지금 목회하는 교회에 갔을 때 파벌이 많아 저를 쫓아내려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장로님께서 저를 미워하니까 저도 그 장로님이 미워졌습니다. ‘저 장로는 암에도 안 걸리나’ ‘남들처럼 미국에 이민도 안 가나’ 등등 별별 생각을 다 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할 때 제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내가 그 장로님을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지.’ 그래서 저는 그 장로님께 찾아가서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그랬더니 저한테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내가 목사님보다 열 살이나 더 먹었으니 내가 져야지, 내가 이 교회에서 나가기로 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을 붙잡고 “제발 나가지 마시오. 같이 일합시다.” 그랬더니 벌써 자기네 그룹끼리 나가기로 합의를 했다는 것입니다. 제 마음속에 변화가 올 때 하나님은 장로님의 마음도 감동시켜서 나가도록 이미 역사하셨더라구요. 그분들이 나간 지 14년 되었는데 이번에 땅을 사서 교회를 짓는다고 합니다. 이것도 다 하나님의 섭리인 걸 느꼈습니다.
다윗은 또 북방 사람들을 포섭하기 위해 국토의 중앙부인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을 빼앗아 수도로 삼음으로써 남북을 함께 포섭하는 대지도자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것은 정치적인 해소책일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신앙적인 선택이었으며 또한 도량이 큰 지도자의 면모를 보인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대항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그의 인간적 의리와 신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실상 다윗은 자기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사울의 발탁이 결정적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골리앗을 친 것부터가 사울 왕의 발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발탁한 사울에 대해 끝까지 의리와 신의를 지킵니다.
그런데 다윗도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범죄할 때가 있었습니다. 부하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녀가 임신한 것 때문에 우리아를 죽을 곳으로 보내 버리고 그녀를 아내로 삼았던 것입니다. 정말 의리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 나단의 책망을 듣고 용상에서 내려와 회개하며 그 일이 괴로워서 베개가 젖도록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렇게 자기 죄를 솔직히 고백하는 진실성을 보이면서 그는 자기의 주변 사람들을 들어 쓰고 그들과 협력하며 대정치를 보인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협력하는 지도력은 신앙에서 나온 지도력이어야 합니다.
셋째, 남에게서 배우는 지도력이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지혜를 무시하고 젊은 친구들의 야심과 욕망에 끌려 나라를 둘로 갈라지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백성을 얕보지 않고 그들에게서 인생의 슬기를 배우기 위해 항상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지도자의 자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특히 목회자는 입보다 귀가 발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남의 말을 정확히 오래 듣고, 중간에 자르지 말고,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흔히 듣는 데는 세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귀로 듣고, 둘째, 눈으로 듣고, 셋째,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의 괴로움을 느끼면서 듣는 단계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모든 것을 듣고 그의 몸을 바쳐 우리를 위해 죽으셨던 바로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바로 들을 때 온전한 지도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들으면서 배우는 지도자가 참된 지도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넷째, 창조적인 꿈이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열일곱 살 때 두 번이나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꾼후에는 결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꿈에 대해 흔들리지도 않았습니다. 형들이 죽이려고 우물 속에 빠뜨렸을 때에도, 노예로 팔렸을 때에도, 감옥에서도, 요셉은 결코 그 꿈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 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꿈을 이룰 때까지는 누구에게나 요셉처럼 많은 역경과 고초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기고 끝까지 나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편하고 쉽게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꿈을 이루어 나가는 데는 많은 인고의 수고가 따릅니다.
암탉이 16개월 동안 계란을 낳으면 폐계가 된다고 합니다. 그 암탉에게 다시 알을 낳게 하려면 삼일 동안은 굶기고 그 후 사일 도안 물만 먹이고, 이십 일 동안은 먹이를 평상시의 절반씩만 먹인다고합니다. 그러면 그 암탉은 털을 다 벗어 버리고 새로운 털로 옷을 입게 되고 8개월 동안 다시 계란을 낳는 닭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시 알을 낳는 닭이 되기 위해서 죽음의 고통을 이겨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지도력은 꿈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그 일을 위해 창조적인 고통을 참고 이겨 나가는 데서 생겨납니다.
다섯째, 맡은 일에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큰 꿈을 가지고 전력투구해 나가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가 전도하여 세운 교회에서 짧은 시간 동안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들에게 흔들림 없는 지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의 전심전력하는 태도와 복음에 대한 열정에 기인한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맡은 교회의 목표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전력투구할 때만 목표가 이루어집니다.
여섯째, 철저히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흔히 목회자들은 목사 안수로 권위를 세우려고 하지만 그것으로 권위를 내세우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목회자의 권위는 경건한 삶에서 나옵니다.
바울 선생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처럼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라고 자신있게 말했던 것은 그가 경건한 생활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베일에 숨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교 여행중에 회당이 있는 곳에서 회당에서 전했지만 회당이 없는 곳에서는 그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전했으며, 또한 전도 일행과 언제나 함께 기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도력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철저한 경건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목회자는 너무 바쁩니다. 설교 준비, 상담, 심방, 노회, 총회 그리고 연합기관과의 관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너무 바쁘기 때문에 오히려 경건의 시간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시간이 없을 때 목회자의 영적인 지도력은 저하되고 교인의 의견을 결집시킬 수 있는 능력도 상실됩니다.
루터는 바쁘면 바쁠수록 잠을 줄이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짐으로 영적인 능력을 소유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대 교회 목회자들도 루터의 기도 시간을 본받아 깊은 영적 골짜기에서 영적인 능력을 퍼올려야 할 것입니다.
결론
언제나 꿈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야 됩니다. 말씀은 곧 성령, 하나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주님이 피로 세우신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력이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바로 이 때를 새로운 시작과 출발의 시기로 삼고 영적인 지도력을 갖추어 21세기에 대처함으로써 침체기에 접어든 한국 교회를 다시 일으키고 세계 선교의 핵심 교회로서 면모를 갖추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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