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와 그리스도인의 삶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코로나 19가 우리 삶의 기반 자체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코로나 19는 전염성이 강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고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고 각종 모임을 제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약은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나눌 주제는 코로나 19가 우리 사회와 교회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앞으로 교회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작년에 제가 섬기는 교회의 한 권사님이 데이비드 플랫이 지은 『복음이 울다』(두란노, 2019)라는 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제가 당시 우리 총회에서 위촉한 『Refo 500 성경 해설』을 쓰느라 다른 경건서적을 읽지 못했는데 아마도 영혼을 먼저 촉촉하게 적시면서 글을 쓰고 성도들에게 그렇게 실천하며 가르쳐달라는 메시지로 이해하고 이틀 만에 다 읽었습니다. 이 책은 플렛 목사님이 자기를 포함해서 동료 다섯 명과 함께 히말리야 산 기슭에 있는 마을을 트레킹(tracking)하며 느낀 점을 기록한 책입니다. 거기에 가난과 기아와 질병과 각종 폭력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픈 현실을 보며 갈등하여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답을 알아야 할 목사이자 설교자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안에는 답 없이 질문만 가득했다.”(75) 그는 태어난 날부터 물과 음식, 백신 접종까지 아무런 부족함 없이 살아온 반면에 오늘도 이런 것이 없어 2만 명의 아이들이 죽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만물과 만사를 다스린다고 믿지만 자기가 누리는 이 복을 구경조차 하지 못한 이들이 왜 그토록 많은가?”
오늘날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19라는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앞에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단순히 전염병만이 아니라 그와 연관하여 전 세계의 경제가 위축되고 삶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까지 익숙하게 해왔던 교회생활이 제약을 받고 공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환경이 발생한 것에 대해 이러한 일이 왜 발생하는지, 이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질문해야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제는 코로나 19에 대한 성경적 이해와 더불어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해야 코로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 전염병과 코로나 19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두 번째로는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교회에 나타난 현상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세 번째로는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사회에 나타난 현상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전염병과 코로나 19에 대한 성경적 관점
첫 번째로 성경에 전염병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고 현재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코로나 19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 ‘전염병’이나 ‘염병’, ‘돌림병’ 등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데베르’(rb,D,)와 ‘염병’ 또는 ‘재앙’ 등으로 번역된 ‘막게이파’(hp'GEm;, 출 9:14; 민 16:48; 26:1), ‘염병’, ‘재앙’ 등으로 번역한 ‘네게프’(@g<n<, 민 16:46, 47) 등이 있습니다. 이 단어들 가운데 ‘데베르’(rb,D,)라는 단어만 보면 개역개정판 성경에 단어를 ‘돌림병’으로 2번(출 9:3, 15), ‘전염병’으로 43번(출 5:3; 민 14:12; 삼하 24:13, 15 등), 염병으로 4번(레 26:25; 민 16:49; 31:16; 신 28:21) ‘역병’으로 1번(합 3:5)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같은 단어를 다양하게 번역한 것은 영어 성경도 같기 때문에 단어 자체로 의미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통분모는 있습니다. 그것은 전염병, 염병, 돌림병 등이 사람들의 생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몇 개의 본문을 예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에스겔 5:12] 너희 가운데에서 삼분의 일은 ‘전염병’(rb,D,)으로 죽으며 기근으로 멸망할 것이요 삼분의 일은 너의 사방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삼분의 일은 내가 사방에 흩어 버리고 또 그 뒤를 따라가며 칼을 빼리라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의해 포위될 때 일어날 일을 예언하신 것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전염병’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대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심판하심으로 삼분의 일은 성 안에서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고, 삼분의 일은 전쟁으로 죽고, 삼분의 일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시편 78:50]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rb,D,)에 붙이셨으며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시로 쓴 내용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실 때 행하신 일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전염병’에 붙이셨습니다. 이 경우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대적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loimo,j)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말세에 일어날 징조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 있습니다. 여기서 ‘전염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신 이후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하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전염병의 의미로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언약 백성의 죄에 대해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민 16:47-49; 삼하 24:15; 겔 5:12). (2)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대적들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시 78:50). (3) 전염병을 보내신 목적이 분명하지 않고 말세에 일어날 현상으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보여줍니다(눅 21:11).
그런데 구약성경의 용례를 보면 매우 흥미로운 요소를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전염병’, ‘돌림병’, ‘염병’, ‘재앙’이 ‘데베르’(rb,D,)와 ‘막게이파’(hp'GEm;, 출 9:14; 민 16:48; 26:1), ‘네게프’(@g<n<, 민 16:46, 47)가 있다고 했지요? 이 가운데 ‘데베르’(rb,D,)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 ‘말씀’이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습니다. 히브리어로 ‘말씀’은 ‘다바르’(rb'D')입니다. 이것은 같은 글자를 다르게 발음하여 의미를 다르게 표현하는 언어유희(word play)로 썼습니다.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전염병이 하나님 말씀을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의 전염병은 언약 백성에 대한 심판이거나 대적들을 심판하기 위한 것이거나 말세의 일어날 일들이거나 다 같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것으로 말씀의 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언약 백성의 죄를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라면 회개하고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대적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참조. 출 9:15-16). 전염병의 성격이 불분명한 것이라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와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코로나 19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지난 2019년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19는 구약성경에 언약 백성의 죄를 심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리신 것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 전염병은 구속역사에서 옛 언약 시대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 19는 넓은 의미로 전염병도 이 세상에 임하는 고난이나 고통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19를 인류가 죄를 범한 이후에 세상의 창조 질서가 왜곡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성도들은 인간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배우고 이 이 세상이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심판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롬 8:21-22; 엡 2:2). 그리고 이러한 환난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바이러스도 사람의 생명과 건강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고 인간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코로나 19를 보아야 할 성경적 관점입니다.
2. 코로나 19과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두 번째로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교회에 나타난 현상이 무엇이며 그것을 극복할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교회생활에 일어난 변화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성도들이 한 장소에 모여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교제하는 공적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코로나 19가 전염성이 강하여 다른 사람들을 감염시키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드리는 공적 예배는 하나님께서 모든 시대에 걸쳐 신자들에게 명하신 절대적이고, 도덕적이며, 영구적인 계명이며, 세상의 끝 날까지 계속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출 20:8; 사 56: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7절). 또한 이 명령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 피로 맺은 언약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출 24:6-7). ‘피로 맺은 언약’이라는 뜻은 이 법을 지키지 못할 때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주일의 원형인 구약의 안식일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에 관계를 규정하는 표징일 뿐만 아니라 이 날을 지킬 때 하나님이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체험하는 일이기에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출 31:13). 따라서 우리 교회는 주일에 정한 장소에 모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사 56:6; 행 2:42; 히 10:2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 6절). 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는 시간이고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는 외적인 채널로 하나님이 주신 제도적 장치입니다.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제도적 교회를 은혜의 방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생활 가운데 예배가 가장 중요하지만 코로나로 말미암아 동일하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경공부나 성가대 연습과 성도들 상호간의 교제와 소그룹 모임도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이러한 모임 역시 신앙을 전수하고 믿음을 성장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시대부터 우리가 매 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교회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믿습니다”라는 부분입니다. 특히 ‘성도의 교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머리와 몸 그리고 몸의 여러 지체의 상호관계를 통해 설명했습니다(엡 4:16).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이 서로 교제함으로 서로의 필요를 공급하고 도와줌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됩니다. 성도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성장하며 성화를 이루어갑니다(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195).
그런데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의 교회생활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만약 코로나 19에 감염된다면 성도들만이 아니라 사회에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고 그 사업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에 예배를 강행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예배를 중단하기도 어렵습니다. 구약시대에 나병환자나 전염성 있는 환자를 이스라엘의 진에서 분리시켰습니다(레 13:46). 이와 같이 오늘날 교회가 감염의 위험이 있는 모임을 자제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이웃 사랑의 책임이기도 합니다(레 19:18; 마 22:39; 롬 13:10). 정부는 지난 2020년 8월 15일 서울의 사랑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위 후 일어난 집단 감염을 계기로 한국교회에 대면 예배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바가 있습니다. 정부는 이전에도 이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때 교계는 종교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반발했습니다. 교회가 방역을 제대로 하고 있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모여 왔는데도 정부가 교회의 모임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 일에 대해 교회가 분노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루에 지하철에 수많은 사람이 출퇴근하는 시간에는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활동하지 않고, 교회의 예배 모임 때만 활동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부는 이 부분도 분명 경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한편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과 공공의 선을 위해 봉사하도록 국가 공직자들을 세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롬 13:1-4; 벧전 2:13-1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3장 1절).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고 공공의 선과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는 코로나 확산을 막고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일부 교회가 주장하는 대로 종교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때로 우리의 자유가 제한된다 할지라도 덕을 세우는 일을 위해 교회가 협력하는 일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국가가 신앙을 박해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되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국가의 정책에 협력하고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이 고린도전서 10:23-24; 32-33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성도들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이상에 따라 광화문 집회도 갈 수 있고 이 정부에 대해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 일은 성경이 금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개인이 가진 양심의 자유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을 위반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해도 다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내 자유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제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자유를 사용하는 보편적인 규칙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고, 또한 그 일을 통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결정할 때 우리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그 일을 통하여 그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적 기준에서 볼 때 교회는 코로나 19시대에 감염을 막고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며 덕을 세우기 위해 교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배와 교제의 자유를 일시적으로 제한하고 이웃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일에 우선적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대에 교회의 공적 예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때도 공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되고 예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때 교회가 공적 예배를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상장비가 갖추어진 교회라면 영상을 녹화하여 내보내든지 실시간으로 보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영상장비를 갖추지 못한 교회는 설교를 포함한 예배문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영상장비를 영상으로 예배 영상을 내보내는 교회라 할지라도 예배문을 성도들에게 스마트폰의 카톡을 활용해서 보낸다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각 가정의 예배 인도자는 담임목사님을 대신하여 카톡을 통해 받은 예배문을 낭독합니다. 예배문에는 대표기도, 목회기도와 설교 전문을 포함하여 가능한 한 자세한 내용을 담으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성경공부와 교제를 위해서는 구역이나 목장 단위로 화상회의 프로그램인 줌(Zoom)과 구글 미트(Google Meet)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학교에서나 회사에서 줌을 사용합니다. 줌은 어려운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이들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는 유튜브에 많이 있습니다. 그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이는 실제로 해 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교회가 그 사용법을 알리는 강좌를 개설하여 가르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감사한 것은 IT 산업이 발달하여 누구나 손에 컴퓨터를 들고 다닐 수 있는 시대가 되어 어느 곳에서든지 듣고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지난 학기에 신대원에서 대면 강의를 할 수 없어 비대면 강의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줌과 곰캠과 파워포인트의 슬라이드쇼와 PPT 만들기부터 사용법까지 유튜브를 통해 배웠고 저의 제자를 통해 배웠습니다. 홍콩의 엘림교회 조윤태 목사님은 그 교회에서 당회도 줌으로 하고 여러 동역하는 목사님들이 함께 줌을 통해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도 하고, 읽은 내용을 점검하고, 기도 제목을 나누는 일을 하는데 좋은 결실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 줌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코로나 시대가 지나도 효과적으로 성도들만이 아니라 청년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도구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감염의 위험과 이웃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면 지금 학교에서 줌을 사용해 교육하듯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일과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지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습니다.
3. 코로나 19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
세 번째로 코로나 19가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고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사회에 일어난 변화는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상적인 활동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을 축하객 없이 치르기도 하고 장례식도 조문객 없이 치르기도 합니다. 국가 간 이동도 제한되어 있어 국제 교류와 교역도 제한적입니다. 사람을 대면하지 않는 비대면 방식의 상거래와 상품 주문, 온라인 회의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비한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코로나 19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나 우리 국민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겁고 힘겹습니다. 국내나 국외 여행을 할 수 없기에 관광, 숙박, 운수업이나 음식업을 경영하는 분들, 학원이나 유치원, 어린이집 등의 교육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분들과 여러 종류의 자영업자들 그리고 비정규직이나 계약직, 일용직 근로자들과 같은 사회적 취약계층이 정말 어렵습니다. 특히 사회적 취약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집이 없이 전세나 월세로 살기 때문에 더욱 힘이 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인가? 어떻게 이 어려운 시기에 선한 행실로 교회를 비방하는 자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점을 질문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이 일을 해야하는지 예수님이 한 율법교사와의 대화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느 날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눅 10:25)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생이 무엇인지 정의해 주시기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17:3). 여기에 ‘알다’라는 말은 이론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앎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율법교사의 대답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살리라’라는 말씀은 생명을 얻는다는 말로 ‘생명’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대답이지요? 그러자 율법교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네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눅 10:29).
예수님은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이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때마침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도와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레 19:9-18, 34). 그런데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역시 하나님의 법을 잘 아는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들은 이들이 알고 있고 가르쳤던 율법 지식과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이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을 모른 척합니다. 그때 누가 도와주었을까요?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이 경멸했고 율법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며 상처를 싸매고 여관에 데려다 주고 모든 숙박비와 치료비를 대신 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던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율법교사가 사랑해야 할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사랑해야 할 주체에 맞추어 “누가 어려움을 만난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냐가 아니라 내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비유의 본질에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에 율법교사의 질문이 있었지요?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요약해 주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그 율법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 바로 그가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십니까? 사실 인간 본성으로는 이 율법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3:20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행함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자신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을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법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게도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담당해야 할 율법의 정죄를 대신 담당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생명을 얻은 자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계명을 능히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로마서 8:3-4과 베드로후서 1:3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베드로후서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영생을 얻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면 이 율법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러한 사람을 창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까?
코로나 19로 우리 사회에 여러 불안 증세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비탄하고 생명을 끊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지금 각 교단의 성명서에 보면 어려운 시기에 사랑을 실천하자는 슬로건을 있지만 구체성이 없습니다. 어떻게 코로나 19로 고통받은 우리 민족과 이웃을 도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지난 2019년 5월 19일에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있는 모어하우스 대학졸업식에서 사모 펀드를 경영하는 로버트 스미스가 약 400명의 졸업생 대출금 4천만 달러(477억)를 갚아주어 화제가 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룻기서에 기록된 보아스와 같이 무너진 한 가정을 회복시켜주는 분도 보았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자였고 부자였습니다. 당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백성들이 어려울 때 함께 살면서 그들과 고통을 나누기보다 재산을 정리하고 모압으로 이민갔던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가 남편과 자식을 잃고 그의 자부 룻이 빈손으로 돌아와 남의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보아스가 이 가정의 기업을 회복시켜 줌으로 구속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이름으로 남았습니다. 그 분은 이 보아스처럼 자기 친구가 실직하여 오갈 데 없을 때 당시 3천만 원을 주고 전셋집을 구해주고 일어설 수 있도록 자기 사업의 일부를 떼어주었습니다. 이들에게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특별한 사례 외에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의 자녀들이 중, 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어주거나 대학등록금을 내어주신 분들이나 심지어 전세자금까지 그냥 주거나 많은 수술비로 인해 수술을 할 수 없는데 수술비 전액을 이름없이 드리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코로나 19시대에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많은 요인이 있으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삶의 정도가 다 다르고 수준이 달라 기준을 정하기는 어렵습니다만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성도라면 만약 전세나 월세를 놓았는데 세들어 사는 사람이 코로나 19로 말미암아 경제적으로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다면 단지 몇 달만이라도 세를 받지 않거나 줄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들 가운데 빚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가 어려움 사람들의 빚을 대신 탕감해 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 시대에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나 계약직이나 일용적 근로자들은 그 빚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 생을 포기하거나 범죄를 계획하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선한 이웃이 되어 이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일들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교회 가족들이 이 민족이 어려움 가운데 처했을 때 도울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를 통해 복음이 전파될 것이고 신천지와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와 여러 교회들이 행한 과오로 국민의 건강과 생명과 경제적인 큰 손실을 안겨준 일로 실추된 기독교의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 복음의 참된 의미를 전하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마스크를 착용하고 띄엄띄엄 앞뒤, 좌우 1-2미터 간격으로 앉아 예배하되 그것도 모든 성도들이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참석하고 나머지는 영상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매우 낯선 풍경입니다. 그러나 코로나가 종식된 후 이 일은 과거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때 이 시대를 추억하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노력했고,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 복된 회상을 할 수 있는 복된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실천함으로 은혜를 입은 자들이 새 힘을 얻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복되게 만드는 일을 전염시키는 세상을 보기를 바랍니다. 이 일이 불가능할까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해 주심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법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새 사람이 되게 해 주셨고 이 일이 가능하도록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셨기에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코로나 19 시대에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주일의 공적 예배를 강화하고 성도들의 믿음을 돌보고 세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영생 얻은 자에 합당한 삶인지 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코로나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 박우택 목사(부산북교회 신학강좌, 2020. 09. 27.)
[출처] 20/09/27 코로나 19와 그리스도인의 삶|작성자 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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