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목회와 교회론
최건호 목사
(충무성결교회)
오늘 이렇게 귀한 교역자들을 위한 집회에 시간을 허락해 주시고 또 부족한 제가 강의할 수 잇도록 초청받은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1년 간 저희 교단 총회장을 역임하면서 ‘영적 각성대회’를 치른 적이 잇습니다. 여러 가지로 걱정거리가 많은 가운데 진행했는데 영적각성을 위해 기도하고 총력을 쏟아 호소했더니 저희가 큰 교단은 아니었지만 교단 내 목사, 장로님만 2,200여 명이 참석해서 뜨거운 기도의 영적각성대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이 깨우침을 받고 기도하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교역자만 새로워져도 90%의 문제는 해결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이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나 경험의 전달보다는 성령께서 우리 목회자에게 목회에 대한 새로운 깨우침과 비전과 귀중한 영적 은사를 훈련시키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시고, 성령께서 한국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주의 종들을 새롭게 연단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참여하신다면 큰 은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서론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네 가지의 당면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경제적 풍요 속에서 신앙의 안일주의가 편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목회하고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즐길 수 있을까?’ 하는 평안을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유혹에 모뜬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외국의 교회나 서구 교회가 이미 밟아 온 전철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쉽게 믿음(Easy Believism)'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는 ’쉽게 목회하자, 힘들여 가며 고생하면서 어리석게 십자가를 질 필요가 뭐 있나?‘하는 약삭빠르고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서 성령의 강권하심을 무익하게 만드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오늘날은 물질적 풍요와 문명의 발달 속에서 모든 것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우리에게 큰 유혹이 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는데, 가난할 때도 유혹이 있지만 풍요할 때도 유혹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요한 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영적 파수꾼으로서, 말씀의 선포자로서 그리고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와 목자로서 우리 스스로 다시 한 번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든 쉽게 되는 것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멍에 없이는 주의 사역이 불가능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주님의 멍에를 맨 주의 일꾼이라는 확신을 갖고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도덕적인 무감각입니다.
기적을 추구하면서도 신령하고 거룩한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열매들은 거의 다 윤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크리스찬 가정과 교회 안의 윤리는 자꾸만 세상적인 상식 이하로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거듭나고 성결한 크리스찬의 생활 속에서 윤리 이상의 것을, 도덕 이상의 것을 드러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주님의 향기가 드러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생활의 성숙, 인격의 성숙, 그리고 영적인 생활에도 성숙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문화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입니다.
한국 교회는 영적인 성장과 전도에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면서도 사회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데는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우리 웨슬리안 교파들이 모여서 세미나를 했을 때 하워드 슈나이더 박사가 와서,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도 성결해야 되지만 지역 사회와 세상에서도 사회적 성결을 책임지고 그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또 모든 문화가 빛을 받아서 복음화되고 변혁되는 것이 성결케 되는 것이다.”라며 사회적 성결과 지역과 문화의 성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넷째, 자기 도취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가 대형화되고 헌금 액수가 많은 것을 주님을 위하여 나누기 위한 것임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자랑, 나의 목회 성공, 나의 목회 실적 전시로 빠지기 쉽습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 교파의 자랑일 수도 있고, 개 교회의 자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없다고 사도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보다 다른 것을 자랑하면 그것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이고 육적인 자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우리 민족이 다 복음화되고 복음으로 통일될 때까지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자랑해야지 교파 자랑, 개 교회 자랑, 교회 시설을 자랑하는 자만심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요한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이 점점 축복을 받아서 돈이 많이 생기면 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돈을 잘 써야 하며, 축복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복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경고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한 재물이 아니라면 그는 지금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은 자가 써야 할 것을 간접적으로 빼앗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부자의 철학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곳간을 채우면 영혼까지 만족할 줄로 아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마지막 때에 세계 선교의 큰 사명에 빚진 마음으로 힘을 모으고 뜻을 모아 민족 복음화 뿐만 아니라 세계 복음화에 기여하며, 더 큰 비전을 향해 전진할 때 하나님께서 크게 부어 주시고 사용해 주셔서 크게 일할 기회와 사명을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본론
1. 목회자의 교육적 사역
흔히 교육을 백년대계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 안에서는 교육개혁이 혁명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교육의 변화 없이 민족이나 국가가 선진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의 교육 개혁처럼 우리 한국 교회도 교회 내 교육의 개혁이 있어야 합니다.
목회 사역에 있어서도 선교적 사명,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 예배 인도자의 사명, 성도의 영적인 삶을 위한 상담의 사역 등 여러 사역이 있습니다만, 교회를 통한 교육 책임자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면 급성장한 교세나 대교회로서의 영적인 기능을 성숙시키고 발전시켜나가는 데는 미흡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라고 하셨으며 부활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 가운데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라고 하시며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가르쳐서 지키게 하셨습니다. 가르치지 않는 교회, 배우지 않고 믿는 신앙은 미신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길도 모른 채 무작정 앞으로만 달린다고 잘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승용차에 훌륭한 운전 기술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길을 모르면 빨리 갈 수가 없습니다. 출발 전에 지도를 놓고 목적지까지 가야 할 길에 대해 연구하고 잘 살펴본 다음에 떠나야 그 길을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교의 올바른 방향과 목회의 올바른 방향을 잘 설정하여 추호라도 양 떼를 인도하는 데 있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목회자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루 아침에 ‘번쩍’하는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위대한 목회자가 될 수는 없으며, 몇 주간 금식기도를 드렸다고 해서 천사 같은 교역자로 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주시는 은혜와 은총을 통해서 연단과 훈련을 받으면 우리 자신을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의 훈련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훌륭한 지도자로 쓰임받았습니다. 바울은 디메섹에서 회심의 체험을 했지만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의 고된 생활을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와 제자로서의 사역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육 없는 목회에서 기적과 요행을 바라는 막연한 꿈을 꿀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를 뻥튀기처럼 튀겨 주옵소서, 하루 아침에 60배 100배로 교인이 늘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기도 한답니다.
글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얼마만큼 응답해 주실지 모르지만, 땀도 눈물도 없고 아무 희생도 없이 교회가 갑자기 성장한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육목회를 올바로 하려면 ‘건달목회’를 청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런 짓을 해봤기 때문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고백합니다.
교회가 작으면 목사도 실망될 때가 많습니다. 동창생들은 큰 교회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교단 내에서도 힘이 있어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나는 심방이라야 닷새 하면 다 끝나고 설교도 매번 같은 사람 앉혀 놓고 수준 높게 해봐야 발전이 있는 것도 아니니 실망이 됩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 목사끼리 모여 산에 가고 들에 다니며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회는 더욱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목회의 맛을 알게 됩니다. 변화가 있습니다. 농사꾼이 땀 흘리며 죽을 고생도 하지만 가을에 추수할 때는 기뻐하지 않습니까?
내 목양의 양 떼는 늘지 않고 아무리 목양지에 거름을 주고 땀을 흘려도 자라는 것이 없으면 목회자는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교육을 시작하십시오. 백명이 안 오면 10명으로 10배의 열심을 가진 성도를 만들면 됩니다. 결코 실망하지 마십시오. 실망감과 상대적 빈곤감, 상대적 패배의식 때문에 목사님들은 목회에 대한 활력을 점차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육목회를 하는 목회자는 첫째 장기목회를 각오해야 합니다. 둘째 정착목회를 해야 합니다. ‘이 자리가 나의 무덤이 되어도 좋다.’하는 각오로 목사가 먼저 깨어지고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쳐질 때, 교육이 시작되고 성장이 되고 변화와 기적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그랬습니다. 열두 제자를 가르치면서 한 번도 낙심하거나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없습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게 되면 큰 일을 하리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크고 비밀되고 놀라운 일을 그들에게 끝까지 가르치고 깨우치셨습니다.
메시아의 3대 사역 가운데 하나는 ‘디다케’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디다케가 없는 목회사역은 성숙과 진보를 이루지 못합니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흉내내기, 모방하기의 목회보다는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내 속에서 잉태되고 태어나서 해산된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목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전깃줄에 앉은 참새와 같이 어느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가 비었다는 소문에만 귀기울이고 있다가 그런 뉴스만 들으면 인맥, 지맥, 학맥을 다 동원하여 보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주가가 계속 하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안 팔리는 물건처럼 왜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낮춥니까? 심지어 어떤 목사는 큰 교회 장로님을 찾아가 세배를 드리기도 한다는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목사의 권위와 위신과 체면을 스스로 값싸게 팔아 가면서까지 교회 출세주의에 빠진 천박한 교역자들은 하나님께도 쓰임받지 못합니다.
일본에 가니까 교회들이 너무 작습니다. 그래서 자기네들도 정말 부끄럽다고 말합니다만 그런 교회를 위해 일생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100명이 넘으면 크게 성공했다고 합니다.
일본에 비하면 여기 계신 분들은 모두 다 성공하신 목사님들입니다.
줄에 낮은 새가 콩밭에만 마음이 있는 것처럼 앉아만 있으면 교회가 부흥됩니까? 그런 교회는 주인 없는 교회요, 목사는 있지만 참 목자는 없는 교회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여러분 정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흉내내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자기 소리로 설교합시다. 이름만 중앙교회라고 해서 중앙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교회라고 이름붙이면 다 소망교회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새 교인들은 그런 데에 안 속습니다. 주님께서 하라는 대로 하셔야 됩니다. 강단에 엎드려서 내 강단에 필요한 말씀이 임하도록 기도하시고, 양 떼와 교회를 위해 성령께서 내게 주시는 은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파고 또 파면 생수가 반석에서 나오듯이 생수를 마시고, 생수를 공급하여 배에서 넘쳐 흐르도록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는 성령의 사람으로 변호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정착의 목회자가 될 때 교육목회가 가능하고 또 발전하며 기대할 만한 성과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교육적 기능
하나님의 교회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양 무리요 또 살아 잇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뜻으로 교회를 할 수 있지만 중요한 또 하나는 신앙의 공동체인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된 구원의 약속을 붙들고 그 말씀으로 모여 있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말씀의 공동체를 성숙시키고 유지하고 성취하기 위해 성경의 말씀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성서 교육자이며 평신도의 말씀의 교사입니다. 그래서 잘 가르치는 장로를 배로 존경하라고 했습니다. 잘 가르치는 장로는 목회자를 말하는데 그들은 평신도의 신앙을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신앙으로 확고하게 발전시킬 수 잇으며, 그 신앙은 순교적 신앙으로까지 연결될 수 잇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첫째로 평신도에 대한 성서교육의 지도자이고, 둘째로 신앙공동체를 말씀공동체로 이끄는 영적인 훈련자이고, 셋째로 교회 회중에 대한 영성 훈련자입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교육적 사역입니다. 그러나 실천신학자들은 목회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 목회 기능은 지탱하는 것입니다. 영적 구원의 상태, 성결한 상태가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설교와 기도를 통하여 넘어지지 않고 좌우로 흔들리지 않으며 굳건한 믿음 안에 서있도록 하는 영적인 지탱자입니다.
둘째, 이끄는 것입니다.(Guiding Function). 진리 가운데로, 구원의 푯대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교회로부터 하나님의 일꾼을 파송해서 양육하는 일에 안내자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재자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가까이하여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이 구원받은 성도들 사이에 화해의 역할을 계속 지속하도록 하는 것이 목회의 기능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이끌고 지속시키는 데는 말씀의 훈련과 영적인 훈련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2. 평신도 성서교육을 위한 목회자의 교육기능
한국 교회는 장년부로부터 유치부에 이르기까지 교회학교가 오랜 전통을 갖고 지속되고 있는데, 요즈음에 보면 주일학교란 말이 교회학교란 말로 바뀌고 장년부는 거의 약화되어 있습니다. 물론 어린이부터 청년부까지는 교회학교의 활동은 활발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주간에는 평신도 성서교육이 여러 가지 교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고, 구역에서는 성경 교재를 가지고 예배와 성경 교육을 잘 실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문제는 목회자의 세미나나 교단의 모임이나 집회에 성경공부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의 모임이나 세미나에 성경공부가 없는 것은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진리의 기반을 강력하게 뒷받침하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세계적인 기독교 활동이나 또는 복음주의 계통의 진보적인 쪽이나 W.C.C 까지도 특별한 신학 세미나나 신학강좌를 하기 전에는 아침 일찍 반드시 성경공부를 한 후 모든 활동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에는 강해설교나 강해 세미나가 많이 열리는데 성경 연구만 다로 하지 말고, 모든 세미나에 강해적인 성서 연구 시간을 넣어서 강의의 주제나 회의 주제와 연결되는 성서교육, 성서지침을 제공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흔히들 한국 교회는 모이면 뜨겁고 힘이 있다고 합니다. 힘이 있는 것도 좋지만 성경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고하게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한국 교회는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했고, 선교사도 많이 파송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의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성서에 대하여 세계적으로 공헌을 할 때가 오리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의 신학자와 목회자들 손에 의해 세계에 내놓을 만한 훌륭한 주석이 집필될 날이 멀지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몇몇 분들이 성서 주석을 쓰고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급되고 적용되려면 교역자나 평신도 세미나에서 실천해 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의 부흥회나 사경회는 성경을 가르치는 모임이었으며, 또한 평신도에게도 성경 가르치는 모임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기록을 보니까 목포에 있는 한 평신도가 나흘을 걸어서 평양의 사경회에 이틀동안 참석하고, 나흘 걸려 목포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성서의 말씀에 도취하고 말씀에 붙들려 공부하러 다니던 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도 말씀에 입각해서 전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환상을 봅니다.”이렇게만 전하다 보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서적인 기초가 약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회에 성서적 사경회 시간을 회복하는 운동을 일으켜야 될 것입니다. 교육목회는 비록 속도는 느릴지 모르지만 뿌리가 깊고 기초가 단단해지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모든 집회에 성서적 사경회 시간을 회복하는 운동을 일으켜야 될 것입니다. 교육목회는 비록 속도는 느릴지 모르지만 뿌리가 깊고 기초가 단단해지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 줄로 믿습니다.
저와 함께 신학을 공부한 목사님 한분은 해박한 신학 지식이 있거나 학위를 소지한 것은 아니지만 목회에 열심히 있는 분으로, 부임하는 교회마다 젊은이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너희들이 자라면 10년 안에 우리 사회의 기둥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너희들이 헌신해라. 너희들이 하나님 앞에, 이 교회를 위해 충성하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비전을 가지고 자라라”라고 말씀하시며 늘, “교회도 작고 교인도 적지만 10년 안에 ‘사’자가 달린 교인 10명만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사’자 달린 사람 10명만 나오면 우리 교회는 알찬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의 판사, 검사 열 사람만 알곡이 되면 부인과 자녀들까지 알곡이 될테니 우리 교회는 알찬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옮겨 주시기 전에는 맡겨주신 그 목회지에서 헌신할 것이라며 충성하였는데 어떤 결과가 왔는지 아십니까? 그분이 은퇴하기도 전에 그분 아들들 가운데 ‘사’자가 셋이 나왔습니다. 이보다 더 믿을 만한 일꾼이 어디 있습니까? 첫째 아들은 외과 의사, 둘째 아들은 내과 의사, 며느리는 약사, 셋째 아들은 목사, 며느리는 전도사입니다. 자기가 교회를 그렇게 이끌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자기 가정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녀가 그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없는 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3. 교회공동체의 신앙훈련을 위한 목회자의 기능
신자들의 양육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학습, 세례, 교리문답, 집사․권사․장로의 직분, 교회의 여러 가지 적임을 맡기기 위해서는 그들을 훈련하고 교육하는 것을 철저히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하는 가운데 부흥회 시간에 성도들이 회개하고 성령체험을 하는 것을 보았고, 여러 가지 병 고치는 은사도 경험했으며, 영적인 힘을 얻고 변화되는 것도 많이 보았습니다. 또 세례문답할 때마다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세례문답이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곤 합니다. 새신자였을 때 성경으로 확고하게 훈련시키지 않으면 성장해 가면서 기초를 잃어버립니다.
저는 새신자가 대학교수건 판검사건 간에 세례문답을 할 때는 그를 어린아이로 여기고 철저하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가 아니면 인간은 구원을 못 받습니까?” 그리고 맨 마지막에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장가는 두 번 갈 수 있지만 세례는 한 번밖에 못 받습니다. 인간은 죽으면 누구나 다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그 때 주께서 나의 증인이 되어 주실 터이니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으면 반드시 회개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그리고 당시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한 십일조와 주일 성수를 꼭 지키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맡기고 헌신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구원받은 표요, 하늘나라 생명책에 당신 이름이 등록된 표요, 당신이 사망과 저주에서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 된 표요, 하나님 나라의 십자가 군병으로 입대하는 날이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받는 날이니 정말 축하합니다.”
외국의 경우는 세례를 받을 때 청첩장을 돌리는 신자도 많다고 합니다. “나는 오늘 크리스찬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저를 축하해 주십시오. 생일 초대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이렇게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어떤 상사가 군대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받고 보니 기분이 좋아서 주위 동료들에게, “오늘 나 하나님의 아들 되었어. 우리 술 한 잔 하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특권만 알았지, 의무와 헌신, 회개, 믿음의 고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부산대학교 교수이지만 부인 집사님이 10년 간 기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된 분이 있었습니다. 세례문답 잘 못하면 교회 안 나간다고 할까봐 부인이 저한테 와서 부탁을 합니다. “목사님, 제가 송아지같이 끌고 나왔으니까 오늘은 그저 적당히 해주세요. 목사님한테 가면 심하다는데 괜히 덧나면 안 나와요. 고집이 세니까 적당히 달래서 세례받도록 해주세요.” 저는 속으로 ‘떨어지고 안 떨어지고는 하나님께서 책임질 것이고, 나는 원칙대로만 해야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말로는, “예,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해 놓고는 우는 아기 달래서 침 놓듯이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도하라고 했더니 “이제까지 제가 하나님께 대하여 너무나도 상식 이하의 태도로 하나님을 대했던 걸 용서해 주옵소서. 제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합니다. 이제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제 이름을 기록하게 되었으니 일생을 하늘나라 사람으로 살도록 붙들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는데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자기 부인에게 그러더랍니다.
“내가 유치원 때부터 박사될 때까지 공부했지만 그렇게 무서운 선생님을 처음 만났어. 그렇지만 일생 동안 잊어버리지 못하겠다. 내가 그 목사님 앞에서 얼마나 떨었는지 꼭 유치원 생도 같았다. 그렇데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더욱 잊혀지지 않는단 말이야.”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왕에 거듭나고 교회의 문턱에 들어섰는데 그들의 영혼을 해산하는 영혼의 해산자로서, 구원의 진리에 대해서 확고하게 가르치고 확고하게 연단을 해주어야 그들이 자라서 영적인 지도자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훈련은 자칫 잘못하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구원에서 끝 날 때가 많습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신자는 지체요,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인 것같이 공동체 의식에 대한 훈련을 목사님들이 계속하지 않는 한 한국 교회는 개교회주의나 교파주의나 교역자 중심의 교회로, 이기적인 자기 본위의 개인주의적 신앙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세례받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주민등록증은 대한민국에서 백 년도 못 있다가 어느 날 빨간 줄이 그어질 것입니다. 즉,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권리도 없고 의무도 모든 게 청산됩니다.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당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이 말을 했더니 참석자들이 세례가 이렇게 엄청난 것이냐며 쇼크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세례문답이나 교회 직원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교회 직원들은 교회 관료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의 명예, 교회의 직분을 얻는 것도 교회의 계급을 얻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편만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갔더니 교포사회는 더 심합디다. 한인 사회에서는 장로가 되는 것이 그럴 듯한 신분 과시의 명예직으로 인식됩니다. 장로가 되어야 믿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를 안 시켜 주면 교회에 안 나갑니다. 장로를 시켜 주어야 교회에 나가고 헌금도 합니다. 장로직이 헌금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것은 성직을 매매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로가 된 분이 정말로 목회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교회를 받들고 봉사할 수 있는 희생적인 일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명예와 축복과 상관이 없을 때도 교회를 위해 십자가를 같이 질 수 있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직임과 직분을 받는 평신도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늘 나라를 이룩하는, 하나님의 부름받고 택함받은 일꾼으로 세울 때, 평신도를 훈련하는 책임이 목회자에게 잇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 성서적이고 하나님 말씀에 입각한 권면과 훈계를 해야 되겠습니다.
저희 교회는 당회와 사무총회에서, 권사 이상의 평생직을 맡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2년 이상의 성경공부 과정을 끝내야 한다고 결의했습니다. 요즈음에는 한국에도 성경공부 과정이 많이 있습니다. 베델성서연구, 크로스웨이 등 어느 것을 하든지 본인이 좋은 것을 택해서 2년 이상 공부하고 또 장로나 권사가 된 지 5년이 되면 1주일씩 수련회에 참석해서 영적 수양을 쌓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두 번째 것은 잘 안 됩니다.
여러분, 대장장이가 대장간에서 칼이나 호미를 만들 때 보면 쇠가 달았을 때 두드리는 것을 볼 수 잇습니다. 쇠가 벌겋게 달아 있을 때 두드리면 호미도 되고 칼도 됩니다. 식으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순진하고 진실된 영적 체험을 했을 때 하나님의 훌륭한 직분자가 되도록 연단을 해야 합니다.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직분을 주다가는 교회나 목사님에게 문제가 많이 생길 소지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 앞에 와서 장로를 시켜 달라고 막 조르면서 뭐라고 햇는지 아십니까? “모사님, 세상 친구들 보기 부끄러워서도 장로가 돼야겠어요. 친구들이 저보고 그래요. ‘너는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 그래 여지껏 장로도 못 되었냐’라고 말합니다.” 창피해서 장로가 꼭 돼야겠다는 것인데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걱정스러웠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정치적 압력이나 인간적인 체면 때문에 이런 분들에게 장로직을 허락해 놓고 그 밑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성서적 기준을 세우십시오. 물론 교회의 법과 질서가 있겠지만 그들을 교육하는 데도 교육적 표준을 높여서 연단하면 하나님도 훌륭하게 쓰실 줄 믿습니다.
4. 교회 회중을 위한 영성 훈련자로서의 목회자의 기능
헨리 누웬(henry Nouwen)이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평신도가 받고 있는 모든 공동체의 신앙 훈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도록 교육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데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몇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우선 예배에 대한 훈련이 있고, 두 번째는 교리나 성서적 지식을 교육시키는 훈련이 있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평신도를 언약의 그룹인 교회안에서 선교의 공동체로서 선교적 파송을 할 수 있는 인물로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통 교파에 속한 교단은 아니지만 이단 교파들 가운데는 평신도를 철저히 훈련시키는 집단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을 본보기로 하라는 말은 아니지만 좋은 예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몰몬교도들을 보면 청량리나 광화문 혹은 서울역 근처에서 가슴에다 명찰을 붙이고 전도를 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전도사나 선교사 후보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단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으면 몇 가지 서약을 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자기 돈으로 해외에 나가서 3년 동안 복음 전도를 하고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서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번 후 자기 스스로 선교의 모든 장비를 갖춘 후, 선교지에 가서 3년 동안 선교를 한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갑니다. 그런 후에야 교회의 직분을 받고 교회를 정상적으로 섬길 수 잇는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이보다는 못하지만 단기 선교라도 할 수 잇는 기회를 평신도에게 제공해 주면 어떻겠습니까?
큰 교회 장로님이나 권사님에게 개척한 지 얼마 안 되는 미자립 교회에 가서 그 교회가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라고 하는 것도 좋은 선교 훈련이 될 것입니다.
감리교의 어떤 감독은 교회가 어느 정도 크면 반드시 구역을 잘라서 그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서 장로님과 함께 개척교회로 보낸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체계적인 선교 파송 훈련이 필요한 때라고 봅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 성서교재의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피선교 교회로 경제적 지원 뿐만 아니라 신학적 지식, 성경교재 등 여러 가지 많은 지원을 외국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한국 교회는 주는 교회의 입장에 서있습니다. 물론 개 교회별로는 작은 교회, 미자립 교회, 개척 교회도 많이 있지만 한국 교회의 전체적인 교세는 교단적인 규모나 능력면에서 볼 때 세계선교를 위해 나서야 할 위치에 서있습니다.
지난 몇 주간 동안 한국에서 열렸던 ‘지구촌 21세기 세계선교대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4천 명이 넘는 해외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는데 거기에서 발표된 것을 보면 선진 각국의 기독교 국가와 서구 교회들이 파송한 선교사 가운데 세례교인의 비례를 볼 때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네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는 나라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더 배우고 받아야 하겠습니까?
또 세계적으로 대형 교회 50개를 꼽으라면 그 중의 1/3이 한국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수도 서울에 있습니다. 또한 각 교파에서 제일 큰 교회도 한국에 있습니다. 예장 통합측이나 합동측, 순복음이나 성결교회, 감리교회나 기장교회 등 모두 세계 최대 교회가 한국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큰 자원과 힘과 능력을 하나님께서우리에게 맡기셨는데 1,200만 교인에게 가르칠 성경교재가 한국 교회 목사나 신학자 손에서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루터교회에서 만든 베델공부를 하려고 구름 떼같이 모여들어 배워야만 합니까? 대학생들도 미국에서 만든 C.C.C. 교재를 갖다 번역을 해서 공부해야 합니까? 물론 내용도 좋고 교재도 훌륭한 줄은 알지만 우리도 우리 신학자들이 만든 교재로 성경공부를 해야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로고스 성경이나 TBC성서교재 등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고무적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 우리 한국 문화와 목회 상황에서 토착화된 성경 교재라야 할 것이며, 또 목사님들에게서 창조적으로 다시 한 번 연구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그렇게 만들어진 성서 교재가 해외로도 나갈 수 있는 단계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해서입니다.
구속사적인 연관을 맞추기 위해 히브리적 사고방식으로 해석하고 연구해 나가다 보니 때때로 인류 전체의 연관성과는 단절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출될 때 서양 역사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전공한 사학도가 크리스찬이 되면 성경에 나타난 역사와 서양사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를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그것을 서양사로 보면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인데 새번역에만 다마스커스로 나와 있으니 성경을 보고는 어딘지 모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아덴의 거리로 갔는데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보면 아레오바고 공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스도이고 사람과 에비구레오 사라미 와있다는 말이 잇는데(행 17:18) 그것은 서양 철학사에 나오는 스토익파와 에피큐리안파를 말합니다. 이처럼 서양사에 대한 일반배경과 구속사를 따로 떼어 놓고 있으니 성경이 예배당 안에서만 읽히는 책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성경은 세계의 모든 역사를 구원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교리사적인 면으로만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런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루터 교회에서 만든 베델성서 교재를 가지고 교인들을 10년 간 가르쳤습니다. 거기에는 상징공부라 해서 제목에 대한 상징적인 그림이 있어 같이 공부합니다. 그때도 제가 그림이 있어 외우느라고 애먹었는데 지금도 몇가지 밖에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갈대아 우르의 계약과 축복의 선언” 그 장면만 생각나고 나머지 그림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복음성가는 한두 번만 들으면 외워지는데 도대체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니 베델에 나오는 그림은 서구문화의 상징으로 서양 사람들의 눈에만 익숙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저울 추나 판사의 판결 방망이로 표현하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고 생소할 뿐입니다. 그런 것들을 한국 문화와 한국적인 상징 그림으로 연결시켜 교재를 만들면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제가 10년을 가르쳤는데도 완전히 외워지지 않는데 장로님이나 권사님이 2년을 배워서 얼마나 이해 되겠습니까?
우리 환경에 맞는 교재를 만들고 가르쳐서 신실한 지도자를 많이 배출하여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5. 목회자의 구속적 교육방법과 자세
헨리 누웬은 교육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을 두 가지로 이야기했는데 권위주의적 자세와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자세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교육 방법은 섬기는 자의 자세였습니다. 그리고 온유와 사랑과 인내로 깨우치는 자세였습니다.
여러분도 익히 아시겠지만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여 은 30냥에 스승을 팔고 왔을 때 주님은 다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중에 나를 팔자가 있는데 그는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면 더 좋았을 것이다.”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가롯 유다는 주께서 모르시는 줄 알고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어었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네가 말하였도다”라고만 하셨습니다.
만약 제가 그런 일을 당했으면 당장 저주하고 책망했을 텐데 주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권위주의적 자세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악당들이 주님을 향하여 온갖 폭언을 하고 침을 뱉고 돌을 던지며 저주를 해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지금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 주셨습니다. 얼마나 구속적입니까? 같이 원망하고 저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그들을 깨우쳐서 구원받도록 해야겠다는 구속적인 자세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목회자의 태도는 권위적인 것보다는 구속적인 자세가 좋습니다.
다음으로 가르칠 때는 일방적인 자세보다는 대화하는 자세로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물을 수 있도록 언제든지 질문하면서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먼저 해놓고 생각하고 의문이 나게 한 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의문이 있는 곳에 진정한 의미의 해답이 있으며, 문제가 있는 곳에 문제를 해결하는 보람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원하지도 않는 것을 자꾸 갖다 준다면 기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교육은 동기를 유발시켜야 합니다. 교육의 필요를 자각하게 해서 본인 스스로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목회자의 진정한 교육 자세입니다.
여러분, 인류 역사에 등불이 된 훌륭한 선생, 위대한 사상가와 철학자, 지도자 중에서 가장 으뜸 가는 교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간디 등은 인류에 심오한 진리를 터득시킨 위대한 스승들입니다.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다는 공자보다 더 뛰어난 영생의 말씀을 깨닫고 믿고 또 영생을 얻도록 가르치는 선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인류의 구속자인 동시에 최고의 선생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교사로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목사님들은 영생의 진리를 가르치고 영생의 말씀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은혜와 진리의 양식을 공급하는 목자들입니다.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주님께 고백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다오니 우리가 어디로 가오리까?” 목회자가 영생의 말씀을 가르칠 때는 구속적인 진리와 화해적인 은총 안에서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를 함께 묻고 찾는 진리의 동반자로서 평신도들을 상대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께서 견지하신 자세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13:12~13)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에게 섬김에 대해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우리 목회자들은 교육적 사명을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교회의 교육적 사명이야말로 평생 해야 할 사명입니다. 교회는 아마도 평생 교육의 무대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갓 태어난 신생아로부터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의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인적인 평생 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마포삼열이라는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던 개화기 초기에는 교회에서 세운 학교만도 230여 개나 됩니다. 그런 미션 스쿨을 통해서 기독교 근대화의 큰 인물들이 배출되었고 그들이 우리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큰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 교육 역사를 보면 세칭 일류 학교라는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 등과 같은 대학은 원래 훌륭한 목사를 양성하고 교회 지도자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설립한 신학교였습니다.
서구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칼빈이 만든 제네바에 있는 대학이나 독일, 영국 등 서구의 전통 있는 대학들은 대부분 원래 신학생을 양성하기 위한 신학교였습니다.
여러 목사님들은 훌륭하고 위대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선교사이고 복음을 전하는 영적인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모든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진리의 교사입니다. 목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어 영속적이고 정착된 목회자로서 많은 열매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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