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를 위하여
김병훈 교수 / 합신대
들어가는 말
325년에 열렸던 니케아공의회가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본질(homoousios)임을 확정한 이후에, 교회는 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동일본질의 세 위격이실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에 관련한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성육하신 아들 하나님이 신적 본질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한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바른 교리로 확정이 되어지면서, 어떻게 세 위격이 서로 구별이 되면서도 동일본질일 수가 있으며,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 아니라 세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아닌가의 의문이 제기됨으로써, 이러한 의문에 대한 적정한 답을 제시하여야 할 신학적 과제가 교회에 드리워진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니케아공의회가 한 편으로는 아들 하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동일본질을 강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르게 고백하였으나,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다면 하나님의 단일성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하여서는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지 아니하였음으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그러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은 니케아신경에 이르기까지 아직 "본질(ousia)"과 "위격(hypostasis)"의 개념이 구별되지 않은 채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하나님이라는 고백에서의 "하나"를 나타내 보이는 개념과, 세 위격의 고백에서의 "셋"을 가리키는 개념이 분명하게 구별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동일본질의 세 위격이신 한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관련한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의 단일성과 복수성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의 노력은 "본질"과 "위격"의 개념을 구별하는 길을 모색하는 데에 주어졌으며, 결국 니케아공의회 이후 반세기가 지난 381년의 콘스탄틴노플공의회에 이르러서야, 교회는 니케아공의회가 남긴 과제의 해결을 보게 되었다.
본 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hypostasis, prosopon, persona, subsistentia)"은, 이와 같은 교리사적 발전 과정에 따라, 하나님의 "본질(ousia, substantia, essentia)"과 구별되는 과정을 통해서, 정립이 되어졌다. 따라서 본 고는 먼저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의 구별에 대해서 살펴 본 후, 객관적 측면에서 살펴보는 하나님의 "위격"의 존재론적 의미를 밝히고, 주관적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위격의 심리적 이해를 논하고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해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의 구별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의 구별에 관한 최초의 논의는 갑바도시안 교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레고리 닛사는 "38번 서신(Letter 38)"에서 많은 사람들이 본질과 위격의 의미를 구별하지 않은 채, 본질(ousia) 혹은 위격(hypostasis)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제들에 관한 글들을 별다른 탐구없이 받아들이는 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본질"("essence" or "substance")이 하나임을 말하는 것처럼, "위 격"hypostasis")이 하나임을 말하기를 기뻐한다. 다른 한 편, 세 위격(three hypostases)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또한 숫적인 비유를 적용하여 세 본질 (essences or substances)을 주장함으로, 이러한 혼동 속에 묶여 있다.
갑바도시안 교부들이 이러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제안한 방법은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의 구별을 일반적인(general) 것과 개별적인(particular) 것의 구별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레고리 닛사는 "사람"의 경우에 빗대어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가 "사람"이라는 말을 쓸 때, 이 말은 보편적이며 일반적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본질을 가리킨다. 반면에 베드로, 바울, 혹은 디모데와 같은 단어는 의미의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보편적이며 공통적인 "본질"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를 의식하면서, 그레고리 닛사는 "구체적이며 특정한 것을 일컫는 것은 위격(hypostasis)의 이름으로 표지가 된다. 만일 그냥 '한 사람'이라고 말하게 되면, 그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게 된다. 본질을 가리키는 말이 제시되고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특정한 무엇을 지시하여 가리키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그레고리 닛사는, 이와 같은 "일반"과 "개별"의 관계 원리를 반영하고 있는, 이른 바 "세 사람 비유(three-person analogy)"를 이용하여, 삼위 하나님을 구별함과 동시에 사벨리안 양태론의 오류를 피하고자 하였다. 사실 "세 사람 비유"는 종속론자인 유노미우스(Eunomius)에 의해서 먼저 사용이 되었다. 유노미우스는 사람 셋이 각각 다른 것처럼, 삼위 하나님은 각각 신성의 차등적 구별을 지닌 세 하나님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레고리 닛사는 비판하기를, 세 사람이 서로 인격적으로 구별이 되는 개별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기초로 하여, 삼위 하나님은 서로 다른 세 본질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유노미우스는 "세 사람 비유"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레고리 닛사는, "세 사람 비유"는, 삼위의 구별을 마치 한 위격에 돌려지고 있는 세 개의 다른 이름인 것처럼 주장하는 양태론의 오류를 분명히 짚어주기 위해 사용이 될 경우에 한하여, 정당성을 인정받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레고리 닛사에게 있어서는, "세 사람 비유"에 포괄되어 있는 세 사람의 인격적 개별 특성은 삼위 하나님의 구별이 단순한 이름의 구별이 아니며, 분명한 위격의 구별을 말하여 주는 비유였다.
이러한 "세 사람 비유"에 대하여, 신 아리안주의자(Neo-Arian)인 아블라비우스(Ablabius)는 "세 사람 비유"의 삼신론 해석의 가능성을 주장하였다. 예컨데, 그레고리 닛사에 의해서 요약이 되어진 아블라비우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당신(아블라비우스)의 주장은 결국 이와 같다.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모두 가 하나의 인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 사람들이라고 일컬어진다 ... 그렇다면, 관 습에 따라 이러한 경우가 인정이 된다면 ... 신비로운 믿음의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 세 위격을 고백함과 동시에 이들 사이에 아무런 본질의 차이가 없음을 인정 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신성이 하나이지만 '세 하나님들'이 계시 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고백에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이건 관 습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인데 이는 어찌 된 일인가?
그레고리 닛사는 아블라비우스의 문제제기의 타당성을 인정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삼신론적 해석은 "사람들"이라는 복수성을 인정하는 관습을 근거로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레고리 닛사는 그 관습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반박을 하였다. 왜냐하면 "세 사람들"이라는 표현 속에서는 "사람"이라는 인성이 복수형으로 나타나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인성은 실재로는 하나이며 결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경우는 유한한 존재이므로 이러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부작용이 없이 관습화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경우에는 한 하나님을 복수화하는 오류를 피할 수가 없으므로, 그러한 관습을 허용하여서는 안된다고 그레고리 닛사는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위의 하나님,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이 모든 피조계를 향한 능력의 행사와 운영에 있어서 모든 일에 연합적이며 비분리적(cojoint and inseparable)이므로, "세 사람들"과는 달리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을 허용할 수 없음을 덧붙여 강조하였다.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각각 고유한 위격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러한 위격의 특성들로 인하여 세 본질들이 있게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교회는 세 위격들의 특성을 하나님의 본질로 이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옳은 견해로 인정하지를 않았다. 그레고리 닛사는 아블라비우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Ablabius)에서 이 의문에 대해 답을 하였다. 우선, 그는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원인관계의 측면에서 서로 구별이 됨을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아버지 하나님은 "원인(the Cause)"이시며, 아들 하나님은 "그 원인에 기인하신 자(of the Cause)"이시다. 그러나 그레고리 닛사는 이러한 위격의 원인관계성이 하나님의 본질(nature)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이러한 원인관계성(causal relationship)은 "존재방식의 차이(difference in manner of existence, )"를 가리킬 뿐, 결코 본질(nature,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갑바도시안 교부 중에 한 사람인 그레고리 나지안주스(Gregory of Nazianzus) 또한 쓰기를,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라 일컬음은 "어떤 본질이나 행동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단지 "아들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 하나님이 갖는 관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왜 세 위격의 하나님이 세 하나님이 아니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대답은 위격을 구별하는 세 특성들이 하나님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는 원인관계성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위격들의 위격적 개별 특성들이 하나님의 본질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의 본질의 복수성을 유발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갑바도시안 교부들이 삼위일체론의 형성에 있어서 공헌한 중점은 바로 이와 같은 "본질"과 "위격"의 구별을 통하여 하나님이 "한 본질의 한 위격"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본질의 세 위격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결론적인 정리는 이른바 "한 본질, 세 위격(mia ousia, treis hypostases)"의 표현으로 압축되었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콘스탄틴노플 공의회(381년)는 니케아 공의회(325년)가 남겼던 과제, 곧 "동일본질(homoousios)"의 해석과 관련된 하나님의 단일성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세 위격의 구별을 분명하게 확정할 수 있었다.
이처럼 세 위격들의 개별 특징들을 관계성으로 이해하는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시도는 어거스틴(Augustine)의 신학에서도 확인이 된다. 예를 들어, 아리안주의자들이 하나님께 속한 어떤 것도 우유적(偶有的, accidental)일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에 관계된 모든 것은 필유적(必有的, necessary)이며 본질적(substantial)인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아리안주의자들은 세 위격들의 개별 특성들이 하나님의 본질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세 위격들의 하나님은 결국 서로 구별이 되는 세 본질의 하나님이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아리안주의자들의 이해에 대하여, 어거스틴은 필유적인 본질과 우유적인 것이라는 두 범주 이외에 관계의 범주를 제시하므로, 아리안주의의 오류를 비판하였다.
그들은(아리안주의자들)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여지는 것이나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 으로 이해되어지는 어떤 것이든지 우유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질에 속한 것이어야 한다는 이해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출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따라서, 아버지 하나님께 속한 출생치 않으심은 그의 본질에 따른 것이며, 아들 하나님께 속한 출 생하심은 아들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런데 출생치 않 으심과 출생하심은 서로 다른 것이므로 아버지 하나님의 본질과 아들 하나님의 본 질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 그러나 하나님은 불변하시므로 하나님께 속한 어 떤 것도 우유적일 수는 없다하더라도, 하나님과 관계하여 말하여지는 모든 것이 다 본질과 관련하여 말하여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 과 관련하여 말하여지고 있으며 아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관련하여 말하여지 고 있는 것처럼, 우유적이지 않은 어떤 것들이 관계에 따라 말하여 지고 있기 때문 이다 ... 그러므로 비록 아버지되심과 아들되심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의 본 질이 다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그렇게 일컬음을 받는 것은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관계 는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유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아리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삼위 하나님의 세 본질론을 비판함에 있어서, 갑바도시안 교부들이 그러하였듯이, 어거스틴 또한 원인관계성에 근거하여 삼위 하나님의 복수성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갑바도시안 교부들과 어거스틴에 관한 이러한 관찰은 벨레키(Velecky)가 말한대로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사상이 어거스틴을 통해 라틴신학에로 전승되어졌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하나님의 복수성을 관계로서 풀이하였다. 아퀴나스는 주장하기를 하나님 안에는 관계의 실재가 있으며, 이러한 관계는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하여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자들 간의 관계적 대립 안에서 구별된다고 하였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버지되심으로부터 "아들 하나님"은 아들됨으로부터 일컬어진 이름이다. 그런데 아버지되심과 아들됨이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의 실재가 아니라 면, 하나님이 실재에 있어서는 아버지도 아니시며 아들 또한 아니시며, 단지 정신 적으로만 하나님을 그렇게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사벨 리안 이단의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는 구별이 실재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완전히 단일 하며 순일한(純一한, simple) 하나님의 본질의 절대적인 실재를 고려할 때에 그렇 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 의하여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는 관계들이 존재하며, 이 관계들은 실재적이다. 이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바로 사벨리안 양태론의 오류였다. 아퀴나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각의 위격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무한성, 창조의 권능, 섭리 등과 같은 절대 개념에 속한 것에 관련하여서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이해하였다. 오직 관계의 개념만이 "하나님 안에서의 구별을 설명하여 주는 유일한 원리"라고 말하였다.
결국, 이상의 관찰을 통해 살펴본 신학자들의 견해들은,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하나님의 위격의 복수성을 본질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위격이 셋이라고 하여 본질 또한 셋이어야 한다는 아리안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오류임을 밝혀 주고 있다. 요컨데, 교회는, 삼위일체론을 정립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어떠한 이론도 부정하고, 이들의 명확한 구별을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위격의 존재론적 접근
교회는, 지금껏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을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세 위격들을 존재론적 실재가 없는 이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면서 오직 한 본질의 한 분 하나님만을 고백하였던 사벨리안 양태론을 정죄함과 동시에, 세 위격들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본질을 지닐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면서 세 위격들이 신성의 본질에 있어서 서로 동등한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부정하였던 아리안주의를 정죄하였다. 하나님의 위격은 본질과 혼동이 되어서는 안 되며, 따라서 세 위격들의 하나님이 세 본질들의 하나님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교회의 공식 가르침은 언제나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들의 구별성을 강조하면서도 이 구별성을 본질의 차이와 관련하여 해석하려는 시도를 정죄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격이 존재론적 실재를 결여하고 있는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본질인 것도 아니라면,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위격은 무엇일까? 이러한 객관적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위격을 이해하기 위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주요 신학자들의 노력을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우선, 살펴볼 것은 위격을 구별하기 위하여 갑바도시안 교부들인 바실과 그레고리 닛사가 사용하였던, 흔히 "존재 양식(modes or ways of being)"으로 번역이 되고 있는 "트로포이 휘파르크세우스, "라는 용어이다. 바실은 세 위격들이 영광과 신성에 있어서는 서로 친밀히 하나로 결합되어져 있음에도, "트로포이 휘파르크세우스, "에 있어서 서로 구별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말하자면 관계성으로 위격을 구별하였던 갑바도시안 교부들은 후에 이 관계성을 "트로포이 휘파르크세우스, "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바실의 친구인 암필로치우스(Amphilochius of Iconium)는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이름들은 그 자체로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위격의 존재혹은 관계의 양식(a mode of hyparxis or relation)'을 표현한다"라고 하여, 바실과 동일한 이해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요컨데, 바실과 그레고리 닛사, 그리고 그들의 친구였던 암필로치우스와 디디무스(Didymus, the blind theologian of Alexandria)는, 삼위 하나님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세 위격들이 본질에 있어서 다른 것이 아니고 서로의 관계성에 따른 존재의 양식에 있어서(in their mode of hyparxis, being or subsistence)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트로포이 휘파르크세우스, "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여 출생치 않으심(agennetos), 출생하심(gennetos), 그리고 발출하심(ekporeutos) 등의 표현들은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양식, - "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위격을 구별하여 주는 개념으로서의 "존재양식, - "은 하나님의 위격의 개별적 특성들(distinguishing particularities of hypostases)을 가리킬 뿐이지, 그 자체가 실재로 하나님의 위격은 아니라는 점이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위격 자체와 위격의 특성이나 속성을 동일하게 취급하거나 혼동하지를 않았다. 예를 들어 바실은 "각각의 위격의 속성을 '고유한 존재의 속성' 혹은 '고유한 존재의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트라마라(Stramara)는 "트로포이 휘파르크세우스, "의 뜻을 "존재양식, mode of existence or being"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존재화의 방식, manner of coming into existence"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함을 밝힘으로써, "트로포이 휘파르크세우스, "가 위격(hypostasis)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예를 들어, 진흙은 토기 그릇이라는 존재양식을 갖을 수 있다. 그 토기는 적어도 두가지의 존재화의 방식(two possible manners of coming into existence)을 갖 을 수 있을 것이다. 1) 도자기 만드는 회전 판위에서 손으로 빚어졌거나, 아니면 2) 형틀에 부어져 빚어졌거나 하였을 것이다. 그레고리 (닛사)가 이 구절에서 가리 키고 있는 것은 존재의 현재 양식(the present mode of existence)라기 보다는 존재화의 방식(the manner of coming into existence)을 가리키고 있다.
이처럼 "어떤 존재의 모양이나 양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그와 같은 존재의 모양이나 양식으로 드러나게 되는 방식"을 가리키는 의미에서 그레고리 닛사는 "트로포이 휘파르크세우스, "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위격(prosopon, hypostasis)은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객관적 실체(a concrete individual objective entity)이다. 따라서 "트로포이 휘파르크세우스, "는 하나님의 위격의 존재론적 지위를 설명하여 주지를 못한다.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하여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개념은 "자존체(自存 , subsistent being)"라는 신학적 표현이다. 토랜스(T.R. Torrance)에 따르면, 그레고리 나지안주스(Gregory of Nazianzus)는 다른 두 갑바도시안 교부들, 곧 바실과 그레고리 닛사와는 달리, 어떤 의미에서이든지 존재양식 혹은 존재화의 방식을 의미하는 를 하나님의 위격, hypostasis를 설명하는 데 연결짓기를 원치 않았다. 즉, 그레고리 나지안주스는 "존재양식"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는 하나님의 위격을 설명하는데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대신하는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제안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위격적으로 자존하는 관계자들(relations eternally and hypostatically subsisting in God)"로서의 삼위 하나님의 이해였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한낱 존재양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내재적으로 자존하는 실체로서의 관계들(substantial relations subsisting intrinsically in the eternal Being of God)"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토랜스는 삼위 하나님 사이에서 존재하는 관계들에 대한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생각의 특징은 그 관계적 자존체(relational subsistent being)가, 스스로 존재하며 불변하는 어떤 것들처럼, 실체적(substantial)임을 밝혀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서방신학의 전통 안에서 하나님의 세 위격은,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견해와 같은 맥락에서, "자존체들(subsistent beings)" 혹은 "자존적 관계체들(subsistent relations)"로 이해되어 왔다. 한손(R.P.C. Hanson)에 따르면, 예를 들어, 어거스틴(Augustine)은, 한 하나님이 세 위격으로 존재한다고 할 때, 셋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상 범위 안에서의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길이 없음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이후, 하나님의 위격은 "실재적이며, 자존적인 관계체(real, subsistent relations)" 혹은 "하나님 안에 자존하는 실재적인 관계체(real relations which are subsistent in the divine Being)"이라는 답을 주었다. 켈리 또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각각의 위격 하나님이 다른 위격의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 존재하신 다는 점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하나님은 각각 하나의 "관계"로 이해되며, 그 관계는 실재적이며 영원한 것으로 이해됨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의 위격은) 어떤 것과의 관계성 안에 있다. 마치 아버지가 그렇고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성 안에 있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관계성은 우유적(偶有的, accidental)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항상 아버지이시며, 후자는 항상 아들 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들이 항상 아들이라할 때, 그 항상은 아들이 태어나신 때로부터 (마치 태어나신 어느 때가 있는 것처럼) 그렇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다. 이것은 아들이 아들이시기를 그치신 적이 없듯이, 아버지가 아버지이시기를 그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아들은 항상 태어나신 자이시며 아들이시기를 시 작하신 때가 따로 있으신 것이 아니다.
유라이(M.W. Ury)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이해가 갑바도시안 교부들과 실질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세 위격의 상호 관계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여야 할 정도로 관계적 개념으로서의 세 위격의 이해를 어거스틴이 강조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유라이는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세 위격의 관계는 "위격에 대해 부수적(ancillary)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substantial)"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어거스틴의 이해를 이어 받아,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위격을 "자존하는 관계체(subsistent relations)"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에 있어서 초대교부들과 구별이 되는 특징을 보인다.
하나님에게 있어서의 구별이란 오직 (삼위의) 기원의 관계를 통하여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관계는 어떤 한 주체에게 있는 하나의 우유적인 (accidental) 것이 아니며, 신적 본질(the divine nature) 자체이다. 그러므로 관 계란 마치 신적 본질이 그러하듯이 자존적(subsisting)이다. 결과적으로, 마치 신 격(Godhead)이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버지되심(fatherhood)이 하나의 위 격이신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격'이란 자존 하는(subsisting) 것으로서의 관계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위격'이란 본질 (substance)로서의 관계이며, 신적 본질 안에서 자존하는 것이란 다름 아닌 신적 본질 자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본질은 곧 신적 본질 안에 자존하고 있는 (subsisting) 위격(hypostasis)인 것이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위격을 관계적 자존체로 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위격, 관계, 본질(nature or essence) 등이 모두 하나님의 단순단일성(divine simplicity)으로 인하여 동일한 실재임을 주장하였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과 오직 개념적으로만(conceptually) 다를 뿐, 실재적(really)으로는 동일하니, 하나님의 위격은 존재론적 실재(the ontological reality)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과 동일한 하나이다. 아울러, 세 위격을 구별하는 개별 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앞서 살펴보았던 존재양식 혹은 존재화의 방식( ) 또한 아퀴나스에게 있어서는 위격(hypostasis)과 개념적으로만 다를 뿐이다. 결국,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으로부터 "관계적 자존체(relational subsistent being)"으로서의 하나님의 위격을 이어 받으면서, 또 다른 한편 어거스틴에게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던 하나님의 단일단순성(divine simplicity)을 삼위의 개념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위격이 실재로는(really) 본질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위격의 존재론적 의미를 본질로 설명하였다.
한편, 동방신학 안에서도 자존체(subsistent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위격의 개념은 전통적인 이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존재론적 실재에 있어서(in the ontological reality) 하나님의 위격이 본질과 같은 실재(reality)인가라는 데에 있어서는 서방신학과 이해를 달리한다. 그것은 동방신학은 하나님의 단일단순성을 서방신학과 다르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동방신학은 하나님 안에 세 가지의 서로 구별되는 실재들이 - 본질(essence), 활동이나 작용(operation 또는 energies), 그리고 위격(hypostasis) - 있는 것으로 가르친다. 로스키(Vladimir Lossky)는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어 알 길이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격적이며 살아계신 자로서 우리에게 계시하신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본질과 영향의 구별을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본질"을 나타내시지만, 피조계에 대해서는 "작용"으로 나타내시니, 이는 자신의 실재를 피조계에 나타내 보이심에 있어 자신의 본질을 전달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이러한 "본질"과 "작용"의 구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지오르구우시스(Maximos Aghiorgoussis)에 따르면, 동방신학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감추시는 한편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구별이 불가피한 것으로 이해한다. 동시에 동방신학은 "작용"이 "본질"의 밖에 있으며, 본질과 구별되는 별도의 실재인 것( )으로 규정한다.
로스키(Lossky)에 따르면, 이러한 "본질"과 "작용"의 구별은 이미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신학에서도 암시되고 있었으며, 여러 교부들에 의해서 확정이 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바실은 "작용(energies)들이 우리에게 미쳐질 수는 있다하더라도, 본질에는 접근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 그레고리 닛사는 이를 요약하여 이르기를 "우리의 영혼이 우리를 초월하는 분의 지식에까지 이르고자 할 때, 그것은 그의 작용을 이해할 뿐이며, 현재로서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는 데에까지 나아갈 수가 없다. 단지 그가 행하시고 있는 것을 통해서만 그를 알며, 놀라움 가운데에서 경배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존 다마스커스(John Damascene) 또한 본질은 우리가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것이며 알 수가 없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작용은 "하나님에 대해 알려질 수 있는 것"이라고 분명한 정의를 내렸던 것이다.
그런데, 동방신학 안에서 전통적으로 "본질"과 구별이 되는 실재인 "작용"은 "위격"을 떠나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동방신학의 "위격"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하나님의 "작용들"은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위격 안에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위격에 의해 소유되며, 사용이 된다. 이처럼 불가지한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여 주는 가능성으로서의 "작용"이 오직 하나님의 위격에 의해서만 드러나고 계시된다는 것은 동방신학이 본질에 치중성을 두는 서방신학에 비해 위격의 치중성이 강하다는 이해를 가능케 한다. 메이엔도르프(Meyendorff)는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이 위격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가 (알려지지도 않으며 전달도 되지 않는) 본질이라는 것으로만 축소, 환원되지를 않고 그의 작용과 활동을 통해 피조계에 실제로 존재하실 수가 있다"라고 쓰고 있다. 이와 같은 동방신학의 "본질-작용-위격"이라는 구조는 서방신학에 비해 동방신학이 위격을 근원적으로 강조하며 중시하는 신학의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동방신학의 위격적 경향성(personalism)을 토대로, 지지울라스(Zizioulas)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월성을 본질이 아닌 위격에서 찾는다. 그는 위격을 "가장 궁극적 의미에서의 존재론적 개념(an ontological concept in the ultimate concept)"인 것으로 인식하며, 이러한 위격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이 삼위일체 논의에 있어서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가장 큰 공헌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에, 갑바도시안 교부들에 의해서, 위격이 존재에 있어서 이차적인 개념이 아니라 우선적이며 절대적인 개념인 것이 확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를 발전시켜, 지지울라스는 동방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단일성, 하나님의 존재론적 원리는 그의 본질의 단일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격, 곧 하나님 아버지의 위격에 있다고 주장을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를 존재되게 구성하는 근본 요소는 본질이 아니라 위격임을 말하여 준다고 지지울라스는 해석한다.
이러한 지지울라스의 해석이 모든 동방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아니지만, 동방신학의 "본질-작용-위격"의 구조는 본질에 비해 위격을 강조하는 신학적 성향을 지니며, 그 결과로 동방신학에서의 위격은 존재론적으로 본질과는 구별되는 별개의 실재(reality)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해는 서방신학에서는 불가능하다. 서방신학의 "신적 순일성(純一性, divine simplicity)"은 위격이 본질과 동일한 실재(reality)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신학에서는 "신적 순일성"이 서방신학과는 다소 다르게 이해되기 때문에 본질과 구별되는 위격으로서의 존재론적 실재라는 개념이 가능하다. 크리보쉐인(Krivocheine)에 따르면, 예를 들어, 그레고리 닛사에게 있어서, 신적 순일성(divine simplicity)은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존재론적 구별이 없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세 서방신학이 이해하고 있는 바처럼,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존재론적 구별이 없다라는 식의 이해는 그레고리 닛사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그레고리 닛사에게 있어서의 "신적 순일성(divine simplicity)"은 "하나님의 본질의 순일성(the simplicity of divine nature)"으로 이해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안에서 위격과 본질을 존재론적으로 구별하는 그레고리 닛사는 "신적 순일성(divine simplicity)"을 "하나님의 순일성(the simplicity of God)"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의 순일성(the simplicity of divine nature)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기초하여, 결론을 내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격의 존재론적 의미와 관련하여 두 가지 서로 다른 답을 얻게 된다. 하나는 서방신학에서의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를 통해 얻은 것으로, 하나님의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론적 실재가 동일하며, 단지 우리의 생각에 있어서만 개념적으로 하나님의 본질과 구별이 된다. 다른 하나는 갑바도시안 교부들, 그레고리 팔라마스 등을 포함하는 동방신학자들의 견해로, 하나님의 위격은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실재라는 것이다.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은 모두가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자존적 관계체들(subsistent relations)"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이 자존체들(subsistent beings)의 존재론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서방신학은 본질이라는 답을, 동방신학은 본질과 구별되는 그 자체로서의 별개의 실재라는 답을 주고 있다.
하나님의 위격의 심리적 접근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를 위하여, 이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논제는 주관적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심리적 고려이다. 다시 말해 각각의 위격이 의식과 행위의 주체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격적 하나님으로서 계시하셨으므로, "한 본질, 세 위격들"이라는 삼위일체 신관에 있어서, 의식과 행위의 주체라는 인격적 속성이 세 위격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살피는 것은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에 있어서 필수적인 논의를 구성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은 각각이 "의식과 행위의 주체라는 심리적 인격(a psychological person as center of consciousness and action)"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의 차이에 따라서 달라진다. 우선, 서방신학의 한 단면의 이해를 위하여 아퀴나스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아퀴나스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의 위격은 "본질의 존재론적 주체 또는 기체(主體 또는 基體, an ontological subject or supposit of divine essence)"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위격이 본질과 존재론적으로 구별이 되는 "본질의 존재론적 주체"라면,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이 동일한 하나의 실재(reality)라는 "하나님의 순일성(the simplicity of God)"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위격이 피조물의 존재양식에 따라서는 본질의 주체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비록 하나님 안에 본질과 위격이라는 존재론적 구별은 없지만, 하나님에 대한 논의를 하는 사람의 인식 안에서는 존재론적인 구별과는 다른 의미에서의 구별, 곧 피조물의 존재양식에 따른 구별이 있으며, 이러한 구별의 범위 안에서 위격은 본질의 주체인 것으로 말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존재양식에 따른 이러한 구별은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인간의 언어가 "유비적(analogical)"이라는 아퀴나스의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언어 표현은 그 사실들의 "본래적 존재양식에 따라(in accord with their proper mode of being)" 붙여진 것이 아니며, "피조물들 가운데 발견되는 방식에 따라(in accord with the way of being found among creatures)" 붙여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되는 어떤 것도 피조물에 대해 언급되는 것과 동의적(univocal)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위격(person)"의 개념과 관련된 논의의 경우, "위격"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일한 의미로 사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형상(form)과 질료(matter)로 구성되어 있는 사람의 경우, 본질(nature)이 주체(subject)에 해당하는 질료(matter)에 의해서 개체화되지만, 하나님은 사람과는 달리 형상과 질료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퀴나스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언급이 서로 이의적(異意的, equivocal)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퀴나스 생각에, 만일 그렇다면 피조물에 관한 언급을 이용하여 하나님에 관한 언급을 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컨데, 만일 하나님의 "위격"이 사람에 대하여 말할 때의 "위격"과는 이의적으로 쓰였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위격"은 어떠한 의미도 지니지를 못하게 된다.
이러한 유비적(analogical) 이해의 맥락에서, 인격(person)을 "이성적 본질의 개별 실체(individual substance of rational nature)"로 정의한 보에티우스(Boethius)를 원용하면서, 아퀴나스는 이를 수정하여 위격 혹은 인격을 "이성의 본질 안에 있는 자존체(what subsists in rational nature)"로 정의한다.
'인격(person)'이란 전 자연에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 곧 이성의 본질 안 에 있는 자존체(what subsists in rational nature)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본질이 완전하시므로, 어떤 것이라도 완전한 것은 하나님께로 귀속이 되는 바, '인 격'이란 말이 하나님께 사용이 되는 것은 적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피 조물에게 쓰이는 바와 똑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쓰여서는 안 되며, 더욱 높은 의 미에서 쓰여야 한다. 마치 하나님을 일컫는 다른 경우들에서 논의할 때 설명하였듯 이, 우리가 피조물을 일컫는 다른 것들도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아퀴나스는 이러한 유비적 용례에 따라 하나님, 사람, 그리고 천사들에게 "인격 혹은 위격"이란 말이 공통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이 때의 "인격 혹은 위격"은 "이성의 본질 안에 있는 자존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위격에 심리적이며 도덕적인 이해를 부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아퀴나스는 유비적 이해라는 범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격 각각을 이성, 사랑, 정의, 자유,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어떠한 것이든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주체(supposit, subject)로 이해하고 있다. 벨레키(Velecky)는 이러한 아퀴나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준다.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 적용되는 정의가 주어질 때에, 그것의 의미는 유비적이다 ... '인격'은 행동과 책임의 궁극적 주체를 가리킨다. 그것은 (행동과 책임이) 최종적 으로 귀속되는 주체이다. 그런 까닭에 삼위일체 신학은 '인격'의 개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격은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재창조하시는 행위자들(agents) 이시기 때문이다. 각가의 위격은, 비록 다른 두 위격들과 함께 행하시지만, 정확히 '인격'으로서 행동하신다. 그리고 피조된 전 우주는 그들의 흔적을 담고 있다.
이상의 관찰은 비록 아퀴나스가 존재론적으로는 하나님 안에 오직 한 실재만 있을 뿐이므로, 하나님의 위격이 하나님의 본질의 주체(subject)로 구별되어질 수 없으나, 유비적으로는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하나님의 본질의 주체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비적 의미에서하나님의 위격들은 본질의 속성에 속한 모든 것들, 이성, 사랑, 공의와 자유를 지닌, 의식과 행위의 주체인 것이다. 요컨데, 아퀴나스를 통해 본 서방신학은 유비적인 용례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위격을 심리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다른 한편, 동방신학의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본질의 존재론적 기체(基體, supposit)이며 또한 행위와 의식의 심리적 인격체(psychological person of action and consciousness)인 것으로 관찰이 된다. 예를 들어, 메이엔도르프(John Meyendorff)는 이와 관련한 팔라마스(Gregory Palamas)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팔라마스는 하나님의 위격들을 단지 본질과 동일한 위격의 특성들이나 내적 관 계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존재(divine Being)에 대한 '기체들 (基體들, supports)'로 본다는 점에서 위대한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전통 안에 있다 ... 만일 위격들이 한낱 본질의 현현에 불과하다면, 아들과 성령은 위격들일 수가 없다. 왜 냐하면, 본질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아버지 하나님 만이 유일한 위격이 되 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컨대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지혜의 능력이라 고 말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가 (=아들 하나님)가 '스스로 위격화 된 지혜 '라는 것 이다. 왜냐하면, 다른 의미에서 그는 지혜가 아니며 아버지와 성 령과 동일한 지혜와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 존재 의 활동이며 작용인 것이다.
다시 말해, 팔라마스에게 있어서는, 앞서 살펴 본 아퀴나스의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의 위격들은 하나님의 본질과 다만 개념적으로만 구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기체들로서 존재론적으로 구별이 되며, 심리적 혹은 도덕적 의미에서 "인격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격들은 지혜와 능력은 물론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속성들 모두를 소유하고 있는 "기체들(supports, 또는 supposits)"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지울라스(Zizioulas)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개별적인 위격들을 "총체적인 본질의 담지체들(擔持體들, bearers of the totality of nature)"로 이해함으로써, 아퀴나스의 견해와는 달리, 위격을 본질의 존재론적 기체로 보는 동방신학의 특성을 증거한다. 지지울라스는 이러한 이해의 정당성을 한 기독론 논쟁으로부터 풀이한다.
칼케돈(공의회)는 ... 그리스도의 위격적 정체성이 아들 (하나님)의 위격임을 천명함 으로써 중요한 존재론적 서술을 하였다 ...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의 답은 아들 하나 님이시라는 것이다. 그 분에게 있어서는 두 품성들이 각각의 특성을 위격에 부여하 지만 그렇다고 하여 위격이 존재론적 의미에서 이 특성들에 (자신의 존재를) 의존 하는 것은 아니며 ... 그러므로 두 품성들이 개별자인 '나'를 존재론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의 특성들이 위격과 상관없는 것은 아니나 ... (오히려) 이러한 특 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위격에 의존한다. 위격이 자신의 존재를 본질의 특성들에 의 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원인은 일반자(곧, 본질)가 아니라 개별자(곧 위격들)에 있는 것이다.
지지울라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씨릴(Cyril of Alexandria)의 "두 품성의 위격 연합(the hypostatic union of the two natures)이라는 개념은 위격이란 본질의 기체(supposit) 혹은 담지체(bearer)로서 본질과 구별되는 존재론적 실재임을 주장하는 신학적 기반을 제공하여 준다고 생각한다. 위격이 본질과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실재라는 이해는 하나님의 위격들이 본질의 존재론적 필연성에 속박을 받지 않으며, 절대적 자유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여 준다고 지지울라스는 힘주어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아버지 하나님은 자유의 존재자로서 본질의 필연에 의해 강요받지 않으시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신 가운데, 아들을 "낳으시고" 성령을 "발출하신"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의 행사는 결과적으로 "교통(communion)"의 사랑을 생성케 된다.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인 방식에 따라, 하나님의 자유의 행사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지지울라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위격은 존재론적으로 자유와 사랑 가운데 존재하며,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존재"는 "의식과 행위의 심리적, 도덕적 주체"로 이해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그레고리 팔라마스와 존 지지울라스의 견해들은 고대 동방교회의 신학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위격성(personhood)에 대한 씨릴(Cyril of Alexandria)의 개념은 "의식의 주체(center of consciousness)"로서의 위격에 대한 심리적 이해를 열어주고 있다. 맥거킨(J.A. McGuckin)에 따르면, 씨릴의 위격성은 "행위들, 말들, 그리고 의도들의 - 이러한 것들은 위격을 구성하는 요소라기보다는, 위격을 표현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는데 - 직접적인 (어떤 다른 매개에 의지하지 않는) 행위자에게 있는 역동적인 영적 주체성과 의식(dynamic spiritual subjectivity and consciousness)"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레고리 닛사의 위격 이해도 심리적 측면을 담고 있다. 스트라마라(Daniel F. Stramara)에 따르면, 그레고리 닛사가 하나님의 위격을 가리키는 용어로 휘포스타시스(hypostasis)가 아닌 프로소폰(prosopon)을 사용할 때, 그 프로소폰은 "단순한 형이상학적 실체(just a metaphysical reality)"가 아닌, "심리적이며 인격적 차원에서의 관계성의 개별적 표현(the individual expression of relationality in its psychological and personal dimension)"을 나타낸다. 요컨데, "하나님의 위격들은 그들의 원인관계(causal relationsh)에 의해서는 존재론적으로 구별이 되며, 그들의 관계성에 의해서는 인격적 혹은 심리적으로 구별이 되는 것이다." 그레고리 닛사의 이러한 위격에 대한 이해의 두 가지 측면, 다시 말해서, 존재론적으로 본질과 구별이 되는 형이상학적 객체(metaphysical object)이면서 또한 관계적이며 심리적인 경험의 영역에 속한 심리적 주체(psychological subject)라는 이해는 "의식의 주체(center of consciousness)"로서의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지지하여 준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위격들이 "상호-인격적이며 공동적인 관계성(an inter-personal, communal, relationship)" 안에 존재하므로, "각각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다른 둘을 의식하고 있기(each is necessarily aware of his respective self and the other two)"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를 근거로 스트라마라는 그레고리 닛사의 하나님 위격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하나님의 위격은, 자유의지와 의도성 그리고 의식적인 목적을 행사하며, 의식의 중 심을 소유하고 있으며, 자기 스스로 고유하며 (위격의 속성을 다른 위격들과) 공유 하지 않는 개별자이며, 자아의식에 의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주관적이면서 또한 객 관적이며,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다른 두 위격들과 관계성을 이루며, 완전하게 그리고 즉자적으로 자기를 실현화하는 분이다.
그레고리 닛사는 하나님의 위격을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기체(基體, supposit)로 볼 뿐만 아니라, 행동과 의식의 중심이며, 심리적이며 도덕적인 주체로 이해하는 동방신학의 근원을 제공하고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 미루어, "의식의 중심체(center of consciousness)"로서의 하나님 위격에 대한 심리적 이해는 서방신학과 동방신학에서 모두 인정이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진다. 다만 서방신학에서는, 동방신학에서와는 달리,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실재는 오직 하나 뿐이므로 "의식의 중심체"로서의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이해는 실재적으로는 불가능하며 다만 개념적으로만 가능하다. 하지만 동방신학에서나 서방신학에서나 모두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심리적이며 도덕적 이해는, 일의적(univocal)이지 않으며, 유비적(analogical)이다. 이러한 유비적 의미에서 서방신학은 개념적으로(conceptually), 동방신학은 실재적으로(really), 세 하나님 위격들이 심리적이며 도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의식의 주체들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오는 말
하나님의 위격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어원론적인 접근을 따르지 않고, 교리사적 흐름을 추적하는 방식을 따라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방법론적 선택은 절대적이다. 그 이유는 "한 본질, 세 위격(mia ousia, treis hypostases)"이라는 말로 제시되는 삼위일체 신관이 역사적 결과로서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세 위격들이 서로 영원한 위격의 구별을 지니고 있으시면서도,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완전히 하나이시며, 동일하시다라는 신앙의 고백을 성경적인 바른 신관으로 확정케 되는 과정에는 오랜 시간에 걸친 토론이 요구되었다. 니케아공의회(325)의 이전으로부터 콘스탄틴노플공의회(381)에 이르는 초대교회의 교부들 사이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본질과 위격의 구별이 분명히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본질과 위격의 구별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하여, 사벨리안 양태론자들과 아리안주의자들을 양극으로 하는 잘못된 해석들이 역사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해석들과의 논쟁을 거쳐가면서, 먼저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심을 "호모우시우스"의 표현으로 확정하였고, 이어서 위격과 본질을 구별하였다. 그 결과, 본질이 하나이면 위격 또한 하나이어야 하거나, 위격들이 셋이면 본질들 또한 셋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옳지 않음을 확정하였다. 이러한 위격과 본질의 구별은, 보다 구체적으로, 서로 구별되는 위격상의 특성들이 본질이 아니라, 관계라는 자존체들(subsistents)인 것으로 이해하므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의 하나님의 본질은 오직 하나이며, 위격들은 셋이라는 표현으로 압축되는 삼위일체 신관이 정립되었다.
그런데, 삼위일체 신관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기본 교리의 기반이 확정이 된 이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각각의 서로 다른 신학 전통 안에서, 본질과 위격이 어떤 의미에서 구별이 되며, 각각의 위격은 어떠한 인격적 성질을 지니는가라는 등에 대하여, 서로 다른 신학적 결론들을 발전시켜왔다. 우리의 관찰에 따르면, 동방신학은 객관적 측면에서 위격은 본질과 존재론적으로 구별이 된다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 반면에, 서방신학은 위격이 본질과 존재론적으로 다른 실체일 수 없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신학이 서로 다른 신적 순일성(純一性, divine simplicity)의 이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데, 서방신학은 이것을 "하나님의 순일성(the simplicity of God)"으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에, 동방신학은 "하나님의 본질의 순일성(the simplicity of divine nature or essence)"로 이해하고 있다. 서방신학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의 본질 이외에 다른 어떤 실재(a reality)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반면에, 동방신학은 하나님의 본질 이외에 위격과 작용(energies)의 실재들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한편, 주관적 측면에서 위격이 심리적, 도덕적 중심 주체일 수 있는가에 관한 관찰과 관련하여서는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이 차이를 나타내지 않고 있다. 서방신학에서는 비록 위격이 본질과 개념적으로만 구별이 되지만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서로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에), 위격들은 서로 간에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실재적으로 구별이 되며 (만일 위격들의 구별이 개념적인 것에 그친다면 양태론의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각각의 위격은 유비적 의미에서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기체(supposit)이며, 아울러 심리적, 도덕적 주체로 나타난다. 위격과 본질이 존재론적으로 다른 실재들로 구별이 되는 동방신학에서는 위격들이 서로 실재적으로 구별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각각의 위격은 실재적으로(단지 유비적으로만이 아닌)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기체이며, 아울러 유비적 의미에서의 심리적, 도덕적 주체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 위격에 관한 이해의 노력을 통해 얻어진 이상의 관찰들은, 현대 신학에 있어서, 칼 바르트 이후 양분화 현상을 보이고 있는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주관적 측면의 고려, 다시 말해 각각의 위격을 심리적, 도덕적 중심 주체로 이해할 수 있는가의 논쟁에 있어서 살펴보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여 준다. 각각의 위격이 "의식의 중심체"라면 삼신론이 되는 것인지, 혹은 반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는 오직 하나의 "의식의 중심체"가 있을 뿐이라면 양태론이 되는 것인지 등의 논의 등은 본 논고의 주제를 벗어나고 있으므로, 본 논고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여기서 줄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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