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 유해무

하나님아들 2020. 8. 11. 16:54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교수)

 

 

 

삼위일체론은 신학 교과서에만 있는 지식인가? 비록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사실상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다. 우리는 매주일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송영을 돌려드리며,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면서 예배를 마치지 않는가. 그렇지만 삼위일체론이 거짓으로 판명되어진다 하여도 기독교 경건 서적의 대부분 바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이 창조론, 기독론, 은혜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경건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다. 성령 안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를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드리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차례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도, 성도들의 머리에는 ‘단일신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신앙 현실을 주목하면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형성과 내용을 살피려고 한다.

 

1. 몇 가지 오해들

먼저, 삼위일체론은 인간이 고안한 사변이라는 오해이다. 주지하다시피 1차 니케아공의회(325)와 2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가 삼위일체론을 확립하였다. 인간들이 주재하고 토론했던 회의가 성자와 성령님의 신성을 결정한 것은 신뢰할만한 권위가 없으며, 삼위일체론은 사변일 따름이라는 오해이다. 둘째로, 이단에 대한 논쟁의 결과로 발생했다는 오해이다. 아리우스와 같이 그 당시 헬라 교양에 익숙했던 자들이 성자와 성령님의 신성을 부인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오해는 이단의 도전이 없었다면, 삼위일체론도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셋째로, 삼위일체론은 그 내용과 표현 용어에 있어서 복음의 헬라화라는 오해이다. 하르낙(1851-1930)은 삼위일체론으로 대표되는 교의는 헬라 정신이 복음의 토양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폄하한다. 즉 기독교가 지적이고 철학적인 욕구를 따라서 당대의 교양을 이용하여 복음의 내용조차 변질시켰다는 주장이다.

 

2. 올바른 출발점

삼위일체론의 형성에 있어서 이러한 오해들의 소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들은 오해일 따름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삼위 하나님을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부의 사랑을 성령님의 교제 중에서 고백하였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고안하지 않았고, 비로소 이단과의 투쟁을 통하여서 이 고백의 내용에 이른 것도 아니다. 사실 처음부터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태복음 28:19-20에서 부탁하신 일, 곧 부활의 주님을 전파하고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는 일을 잘 준행했다. 사도신경으로 대표되는 신앙고백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구원역사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지금 형태의 사도신경은 주후 5-6세기경에 완성되었지만,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본 구조는 이미 150년경에 형성되었다. 신약 정경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서 이 신경은 이미 성경의 삼위 하나님 가르침을 가장 잘 요약하였고, 세례를 통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예배와 기도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위치가 삼위일체론 형성에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사수하기 위한 울타리였다. 교회가 삼위일체론을 형성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방어적이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한 결과였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아래의 논의에서 개별 신학자들의 입장을 정리하겠지만, 이들은 교회의 경건을 정리했을 뿐이다.

 

3. 삼위일체론의 형성

구약에서는 특히 한 하나님이심이 계시되었다(신 6:4).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로 볼 경우, 삼위되심은 본질과 무관한 부가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사실 성경은 이미 창세기 1:26,27, 3:22에서 하나님의 내적인 자기 협의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동시에 삼위이심이 구약에서는 암시적으로 가르쳐졌으나, 신약에서는 명시적으로 계시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교의인 삼위일체론을 정리하고자 한다. 삼위일체론은 교의(dogma)이므로 성경에 그대로 나오지는 않으나, 성경은 이 교의의 기본이 되는 교리(doctrine)를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마 28:19; 고후 13:13; 갈 4:4-6; 엡 4:4-6 등).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의 흔적을 힌두교나 플라톤, 또는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성경과 사도신경은 구원역사적 순서를 따라서 삼위 하나님을 잘 가르치고 있으나, 하나님을 삼위로 고백하고 이 고백을 고수하는 것은 투쟁을 거쳐서 정착되었다.

 

3-1. 니케아회의 이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님을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심지어 정통적인 교부라 할지라도 이런 종속설의 흔적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다. 다만 니케아회의 이전에 이 종속설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만약 문제로 지적되었다면, 그들은 겸허하게 올바른 입장을 수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정통과 이단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善神이라는 주장을 펼쳤다(말시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神聖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헬라교회가 정착되자 헬라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헬라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서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일성을 강조하는 君主論의 반격을 촉발하였다. 군주론은 성부의 단일성을 고수하려고 성자의 신성을 파생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성부의 外現 방식으로 보았다. 전자는 2세기에 강했는데, 인간 예수 안에 비위격적인 신적 능력이 역사하여 그를 세례나 부활 시에 성자로 입양시켰다는 입장인데 이는 예수를 ‘半神半人’으로 만들었다(동력적 군주론). 후자는 200년경 유행했는데, 성부만이 독자적인 위격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외현 방식으로 보면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주장의 대표자는 사벨리우스인데, 그는 ‘성자-성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양태론적 군주론). 군주론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이 단일성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개진했다. 이레네우스(140-202)도 단일성을 고수하되 양태론적 경향을 지녔다. 영원 전에 성부는 말씀과 지혜를 가졌고, 그들은 동등한 위격이라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에서 출발하여 성부의 위격이 동시에 말씀과 지혜(곧 성자와 성령)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이는 1-2세기 삼위일체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좋은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교부가 새로운 기여를 한다. 서방의 터툴리안(160-220년 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단일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속사를 위하여 단일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나, 동일하지는 않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군주론과 노스틱 이단들을 잘 대처했다. 그럼에도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시키는 흔적은 그에게도 남아 있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했지만, 이보다는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위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휘포스타시스’(uJpovstasi")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는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다르다는 구별성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는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다는 ‘호모우시오스’(oJmoouvsio")라는 말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정립을 위한 용어를 창제한 인물이지만, 그의 설명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즉 그는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약과는 달리 성자께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성자가 성부 밑에 있듯이, 성령도 성자 아래 있다는 위계적인 신론은 그가 신플라톤 사상을 원용하여 신론을 전개한 代價이다. 이 때문에 ‘호모우시오스’는 니케아회의 이전까지 사용이 금지당했었다. 그렇지만 오리게네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니케아 회의 전과 당시와 후에도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의 해석이 논의를 지배하고 향방을 정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에 의하여 로고스 기독론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3-2.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256-336)와 그의 스승 루시안( -312)도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잘못된 한 측면만 강조하는 우를 범했다.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단일성과 종속설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無에서 피조되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인데 이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 다만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일 뿐이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되었을 뿐이다. 다른 편으로 아리우스도 위격이라는 말을 쓰고, 성자와 성령의 독특성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군주론은 그리스도를 ‘半神’으로 만들었고, 성령도 참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아닌 그리스도는 결국 성부를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부를 완전하게 계시할 수 없다는 망언을 하였다. 만약 하나님을 알려면, 성부 하나님 외에 그를 아는 다른 신을 상정하는 다신론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다. 이와 같이 그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잘못 주장한 결과는 엄청나게 클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런 주장을 방관할 수 없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에는 필요 없는 사변이 지배한다고 판단하고 상호 사랑과 포용을 촉구했다. 여기에는 이런 논쟁으로 자신의 제국의 통일이 손상받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공의회를 자기의 궁정 니케아에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고백의 본문에 ‘호모우시오스’를 삽입토록 했다. 이는 터툴리안이 쓴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라는 라틴어의 헬라 역어이기도 하다. 니케아 고백은 시리아-팔레스틴 고백, 아마 예루살렘 고백을 기초로 삼았다. 아리우스와 두 친구만이 고백 서명을 거부했다. 이 고백은 논쟁의 핵심에 해당되는 기독론에서 예수는 피조되지 않았고, 출생되었고, 성부와 동등하다고 했다. 이로써 성부는 성부가 아닌 적이 있었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거부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신개념을 거부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신약의 교훈을 무시하고 종속설적으로 그를 半神半人으로 만든 아리우스의 이단을 막는데는 성공했다. 사실 아리우스의 체계는 신플라톤적으로 채색된 위계적인 철학적 신론이었다. 니케아는 이에 맞서는 철학적 신개념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의 고백은 ‘위격’과 같은 용어로 신앙을 개념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고백에는 필시 역리(逆理)가 있기 때문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역리 말이다.

 

그러면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의 뜻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군주론에 대항하여 성부/성자의 數的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을 뜻한다. 작성 당시에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니케아회의 이전과 이후 상당 기간동안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본질의 (수적) 동일성으로 이해(오해)되었다. 나아가 본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의 관계 또한 고려되지 않았고,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다.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295-373)는 ‘호모우시오스’가 성자의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동시에 신성의 단일성까지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초기에는 성부와 성자의 단일성은 고려하지 않고 로고스의 신성만 강조했지만, 후기에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派가 비난하듯이 그가 양태론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양 위격 간의 구별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위격’이라는 용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이 삼위일체론 자체가 아니라 구원론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안에 피조된 半神半人적인 본질만 있다면, 그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우리를 ‘신품화’(divinisation)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3-3. 니케아회의 이후

아타나시우스가 남겨놓은 문제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었고, 이는 성령의 신성 문제 해명으로 연결되었다. 니케아 수용자들 중에도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불확실했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마케도니우스(342-360)와 같은 성령否認派들까지 있었다. 그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가운데서 일하려고 창조한 도구요 능력일 뿐,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했다. 다만 위격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단일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을 각각 사용하였다. 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父性, 성자의 子性, 성령의 聖力 또는 聖化를 말하였다.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329-390)는 성부께는 태어나지 않음, 성자께는 태어남, 성령께는 발출이라는 고유성을 부여했다. 그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성과 君主權을 성부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군주론이 지닌 최대 약점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닛사의 그레고리(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독생하심,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고,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이들은 계시에서 전개되는 행위의 단일성에서 본질의 단일성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나아가 그들은 ‘호모우시오스’를 ‘호모우시오스’로 해석하는 것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호모우시오스’를 단일성으로만 이해하다 보니 사벨리우스派적(양태론적)인 오해의 소지가 많았는데, 이런 식의 선언으로 그런 오해도 제거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회의(381)는 성령의 ‘호모우시오스’를 문자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식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다. 1년 뒤의 또 다른 회의는 ‘호모우시오스’를 성령께도 돌려드렸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 교회는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가 성경의 모든 말들을 자기 식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호모우시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선(防禦線)을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벗겨버리거나 본질을 정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진짜로 오셨고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성경적 교훈을 고수하려고 했다.

 

어거스틴(354-430)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증거했다. 그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種槪念으로 보고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했다. 이 비교는 단일성보다는 구별을 너무 부각시켰다. 이에 근거하여 아리안파들은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어거스틴은 삼위란 三神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단일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이 본질은 곧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부께만, 또는 오직 성자나 오직 성령께만 돌려지는 사역이란 없다.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삼위는 한 원리를 제시한다. 가령 성육신에도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공히 능동적 기여를 하셨다고 설명한다.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불가분리인고로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신다. 어거스틴은 ‘위격’도 새롭게 해석한다. 이 말은 라틴어로 번역할 때, ‘본질’로 번역되어야만 했다. 동방신학에서는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persona’로 번역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사용하지만, 의도하는 바를 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 용어를 관계(relatio)로 번역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입장을 따르며, 이는 서방 전통도 되었다. 삼‘위’란 그 자체로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들이다. 모든 속성들은 ‘일체’에 귀속되지만, 관계로서의 위격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계와 연관되어 의미를 지닌다. 삼위는 거룩하다, 선하다,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삼위는 성부이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삼위를 성자이라 할 수는 없는데, 子性을 다른 위격에다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성자,성령 간에 본체론적이나 또는 질적, 양적인 여하한 구분을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원한 관계성을 도입했다. 나아가 이 관계성은 본질에 부가적인 우연이 아니다. 부가적 우연은 신성의 가변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한 하나님이 오직 성부이거나 오직 성자이거나 오직 성령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셨고, 또 그러하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三神論의 위험을 극복했다. 용어의 제한성이 있으나 그는 삼위 고백에서 침묵만이 능사가 아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um)는 삼위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며, 위격들을 혼돈하지 않고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 고백을 언명한다.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각각 다르나 성부,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다. 영광과 위엄도 동일하며, 영원하다. 삼위는 공히 피조되지 않았고, 공히 불가해하며, 공히 영원한데, 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나, 삼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각각 주님이시나, 세 주님들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주님만이 계신다. 성부는 출생되지 않았고, 성자는 피조되지 않고 출생되었고, 성령은 피조되지도 출생되지도 않았으나 발출하신다. 세 성부들이 아니라 한 성부만 계시고, 세 성자들이 아니라 한 성자가 계시고,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만이 계신다. 삼위 간에는 전과 후가 없으며, 크고 작음도 없다. 함께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론에 共在(또는 共座) 개념을 도입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간에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칼빈(1509-1564)은 먼저 삼위께서 참되신 한 하나님이시요, 이 삼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분을 바로 삼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성자,성령께 공히 적용되며, 위격이란 비공유적 속성이며, 상호 연관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을 말한다. 위격은 상관적인 이름이고, 본질은 절대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자의 이름은 명목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서 시작하여 삼위일체론을 언급한다. 하나님 내에서의 위격 구분은 성자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계시됨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 위격에서 全 신성을 이해한다. 그는 요한복음 14:10을 인용하면서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고 다메섹 요한式의 공재를 말한다. 각 위는 본질의 상이성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을 통한 상호 관계성으로 구별되며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하여 단일성을 이룬다.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 단일성을 근거로 하여, 삼위께서 함께 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이 측면에서는 자기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이다. 이 측면에서는 성부가 성자의 원인자이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순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시작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全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쓴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인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인이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로 이해한다.” 이렇게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

 

4. 삼위일체론의 의미

고대 교회에서 신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근대학문의 한 분과로서 신학과는 전혀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학은 그 어원에서 ‘神’과 ‘말’의 관계를 뜻한다. ‘..를 하나님이라 말함’이 신학함이었다. 이방적이고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하는 것이 신학‘함’이었다. 고대 헬라교부들은 성경의 저자들, 특히 성자의 신성을 잘 가르친 사도요한을 신학자라 불렀다. 신학은 성자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함으로써 삼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 부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었다. 신학‘함’은 교회의 삶 자체, 특히 설교와 세례와 예배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도의 삶도 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닮아가는 ‘신품화’였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인 반성인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었다. 즉, 하나님의 단일성 아래서 계시의 삼위 하나님은 진정으로 또 다시 한번 더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해석이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 교의의 전형이다. 침묵이 아니라 말함이며 말함이 아니라 방어막을 치는 것이 이 해석의 의도이었다. 계시의 하나님이 원래 삼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에도 삼위 하나님으로 알려진다. 삼위 하나님은 비공유적 속성들을 통하여 완전한 방식으로 한 본질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신학의 원래적 의미와 활동이 회복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근 신학의 삼위일체론 부흥과 고대 헬라신학에 대한 높은 관심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기독교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에 내포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분이시다. 구원역사에 삼위로 계시되셨기에 우리가 삼위로 고백하지만, 원래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비록 삼위일체론이 바로 이 신앙의 핵심을 인간의 논리와 언어를 사용하여서 정리하였지만, 삼위일체론은 딱딱한 사변이 아니라, 송영이며 신앙의 본질이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삼위 하나님을 사도신경으로 매주 고백하고, 삼위 하나님이 주인이신 설교를 들으며, 예배의 말미에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도, 삼위일체론이 어렵다고 인식되며,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실천적인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계시하는 신약의 본문 뿐만 아니라, 암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구약의 본문도 이제는 삼위론적으로 설교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 세례 교육을 삼위론적으로 시행하며,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구조와 의미를 다시 음미하며, 예배 말미의 축복 선언은 삼위 하나님의 동행 약속임을 매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삼위를 향한 송영을 찬송가에 많이 싣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이며,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의 역사가 포섭된다.

 

삼위일체론은 부정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설교, 선교, 교육, 예배와 기도 등 교회의 본래적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다. 이것은 공교회적 유산이다. 성장하고 부흥한 한국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송영에서 공교회적인 유산을 잘 전수받아서, 삼위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하고 사귀는 성숙한 교회와 교인들이 되어서, 다음 세대에게도 이 신앙의 핵심을 잘 전수할 때, 공교회적인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