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아다나시우스는 그의 동시대 인물 중 어느 누구보다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 여하에 따라 서기도 하고, 폐해지기도 한다고 했다. 바빙크 또한 삼위일체의 신앙조항이 우리 고백의 핵심이요 기독교의 구별하는 표요 모든 참된 기독교인들의 영광이요 위로라고2) 고백하고 있는데, 그것은 만물이 그로부터,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창조와 재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은 시작이요 완성자인 것이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이러한 고백으로부터의 이탈이 다른 교리 내용에 있어서 잘못 인도하며, 하나님의 큰일을 참되게 전파할 수 있는 것은 신자가 그것들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큰 역사로 인식하고 고백할 때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은 충분히 드러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그에 걸맞지 않는 현실에 놓여 있다. 어느 세미나에 참석했던 이가 '한국 교회 대부분이 양태론적 이단에 빠져 있다'라고 진단한 것과 잘못 말을 하여 이단이 되기 싫다는 교인들의 말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각각의 인격성을 희생시키는가 하면 삼위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통일성을 희생시킨다. 또 오히려 그것은 인간적인 추론과 학술활동의 열매라 생각하고서 종교적 생활에는 무가치한 것으로 고백하는 자들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요 유일하며 단순하다는 것, 그럼에도 그의 인격, 그의 계시, 그의 활동에 있어서 삼위 동시적인 것을 우리는 지켜야 한다 3) 그러기 위해 거대한 개혁신학자인 헤르만 바빙크의 도움을 얻고자 한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역사적 흐름을 꿰뚫고 있으며, 성경에 의존하여 삼위일체론을 정립하고 있다.(큰일. p.145)
먼저 삼위일체론 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의 정의와 그것이 의미하는 것들을 살펴본 후 성경을 통해 바빙크가 주장하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아리안 주의와 사벨리안 주의를 개괄하려 한다. 삼위일체를 예증하기 위한 시도들에 대해서는 바빙크의 평가만을 간략히 다루겠다.
본론
1. 삼위일체론 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과 그 의미
1) 용어 사용의 정당성
많은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보이는 논리와 어려운 용어 사용으로 인해 삼위일체론은 철학적 사변에 의한 것으로 단정해 버리고는 교회와 신앙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바빙크는 성경진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독자적 성찰권과 신학의 존재권을 근거로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4) 그것은 성경을 소화해서 우리자신의 말로 그 사상을 표현해 내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며, 그래서 이러한 용어의 사용은 이에 대한 잘못된 표현과 오류들로부터 이 진리를 변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신론 p. 430).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의 근원은 인간에게서 왔고 따라서 제한적이 고 결점이 있으며 유오하지만 다른 더 좋은 것을 발견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용함을 밝히고 있다.5)
(1) 본질 또는 존재
동방에서는 우시아(ο?σ?α)를 서방에서는 에센티아(essentia), 수브스탄티아(substanti)를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에 사용하였다
(2) 위격에 대해서
동방에서는 휘포스타시스(?ποστ?σι?)를 서방에서는 터툴리안이 페르소나(persona), 수브시스텐티아(subsistantia)를 각 위(the persons)에 사용하였다.
동방에서는 위를 한 본질의 계시적 양상으로만 여기는 사벨리안주의를 생각하면서 삼위의 자존적 성격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각 위에 대한 휘포스타시스를 사용하였고, 서방에서는 아리안 주의에 반대해서 삼위에 대해서는 세 수브스탄티아에(tres substantiaee) 보다는 세 페르소나에(tres personae)라고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2) 그 용어들이 의미하는 것들
(1) 본질, 존재 - 본질, 존재 란 말은 삼위 모두에 의해서 비슷하게 그리고 동등하게 소유되고 있는 신적 성질을 가리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피조물적 존재사실과 구별되는 삼위 안에 공통적인 신적 성질을 지칭한다(신론 p. 436). 존재나 본질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시사한다(신론 p. 437).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순전하며 복잡성이나 구분이 없다. 그리고 그 통일성은 사람들 사이에서처럼 계약적 이거나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고,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적 요소이다6)
(2) 위(位) - '위'라는 말은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삼중적 구별의 존재 사실을 지칭한다. 즉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서로 병립하거나 구분되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로서의 충분한 신적 본질이 각 자에 의해서 그리고 모두에 의해서 소유되는 방식으로 각자 안에서 각자를 통하여 그리고 각자를 향하여 있는 세 가지 구별되는 존재방식의 존재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다.7)
(3) 본질(존재)과 위, 그리고 삼위 간의 관계 - 이 구별은 본질의 구별이 아니라 관계의 구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별은 신적 계시에 근거하여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존재와 위격은 실체적으로(materially)가 아니라 실제로(really)다르다. 그 차이는 존재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차이다. 삼위는 존재 안에 있는 존재양식들이다. 따라서 삼위는 서로가 다르다. 마치 한 존재양식이 다른 존재양식과 다르듯이 말이다.
즉, 쪽 벌린 손바닥이 움켜진 주먹과 다르듯이. 성경이 아주 유일신론적 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자와 성신께서 신적 성질과 속성들을 돌리며, 그들을 성부와 동일시하고 있다. 따라서 성부, 성자, 성신은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구별되는 주체들이다. 그런 이로써 그들은 다른 이름을 가지며, 각기 다른 위격적 특성들을 가지고, 항상 일정한 순서로 나타난다(이것은 내적 관계에서나 외적 관계 모두 해당된다.).
그러므로 위격의 구별은 소위 위격적 속성들, 위격적 특성들에 의해서 온전히 표현된다. (즉 아버지 되심, 불출생성, 낳아지지 않으심, 능동적 낳으심, 능동적 내어 쉼. 2. 아들 되심, 수동적 낳아지심, 능동적 내어 쉼. 3. 나오심, 또는 수동적 내어쉬어짐.) 물론 이 위격적 속성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아무 것도 보태는 것은 없다. 한 위가 아버지이실 때 그의 존재가 변하는 것은 아니고, 그는 단지 다른 관계를 취하실 뿐이다. 또한 하나님의 존재가 제1위, 제2위, 제3위에 따라 본질적으로 또는 실체적으로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관계에서만 다를 뿐이다. 이렇게 서로와의 관계에서 한 위는 성부, 또 한 위는 성자, 그리고 또 한 위는 성신이신 것이다. 아버지됨과 아들됨은 단지 관계일 뿐이다.
하나님에게서는 존재한다는 것이 위격(인격, person)이시다. 삼위 각자의 경우에 있어서 신적 본질은 성부, 성자 ,성신됨의 상태 안에 온전히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영원한 존재방식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영원한 내재적 관계들이다.
본질내의 과정은 동시에 하나님의 절대적 인격성, 그의 삼위일체적 존재사실, 그리고 그의 내재적 관계들을 이루는 것이다. 삼위는 각기 구분되나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과정은 그를 통하여 인간성이 인간과 가족과 인류에게서 온전히 전개되는 모든 과정의 원형이다. (바빙크는 삼위일체가 사람세계에 반영되었다고 보고 있다. 신론. p. 445).
삼위성은 단일성 안에서, 단일성을 통해, 단일성에로 존재한다. 존재의 전개는 존재 안에서 이루어진다. 비록 삼위가 본질에 있어서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세분의 독자적 주체들, 휘포스타시스, 또는 실체들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그 존재의 온전한 전개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삼위는 출생과 내어쉼에 의해 절대적인 방식으로 서로 연관된다. 그들의 위격적 구별은 그들의 내재적 관계와 온전히 일치한다.
성부는 영원히 성부일 뿐이며, 성자도 영원히 오직 성자일 뿐이고, 성신은 영원히 오직 성신일 뿐이다. 그리고 각자가 영원하고, 단순하며, 절대적인 방식으로 자신이므로,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신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성부는 성부의 특정으로 하나님이고, 성자는 아들로서의 하나님이며, 성신은 성신으로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하나님인한, 그들은 모두 하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원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성부, 성자, 성신 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다.
3) 삼위 각론(各論)
(1) 성부 - 소극적으로는 낳아지지 않으심(agennasia)8), 적극적으로는 아버지되심.
아버지됨은 제2위에 대한 적극적 관계를 함위한다. 또한 아버지란 이름은 하나님이란 이름보다도 신성에 대해 더 적절한 지칭이다. 신약에서의 아버지란 이름과 구약에서의 여호와란 이름은 하나님의 위격적 특성에 대한 지칭이고, 고유명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만이, 그리고 그가 온전히 아버지이시다. 그는 오직 아버지일 분이다. 그는 성질상 아버지이다. 그는 영원부터 시작도 끝도 없이 아버지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를 낳음도 영원하고, 성자도 성부와 같이 영원하다. 왜냐하면 만일 성자가 영원하지 않다면 성부도 영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적 아버지됨은 신적 아들됨의 영원한 성격을 함의한다. 성부와 성자에 대한 이 관계 때문에, 또한 성신에 대한 성부의 관계 때문에 제 1위는 때때로 스스로 난, 스스로 생성된 창조되지 않은, 시작이 없는 자기 기원적인, 자기 존재의 근거인, 자원인적인 분이라고 불리우며, 성자와 성신, 그리고 신성 전체의 시작, 원인, 뿌리, 원천, 기원, 머리등으로도 불리운다.
(2) 아들됨
성자의 위격적 속성은 낳아짐, 혹은 아들됨이다. 하나님은 전개될 수 있으시고, 자기를 전달할 수 있으신 것이다.(영지주의자들 이신론자들을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도 교통할 수 없으며 그래서 피조 세계와 교통하기 위해서는 중간적 매개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해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만일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비공유적 이시라면, 그는 어두워진 빛이요, 마른 샘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자신을 피조물에게 주실 수 있을 것인가?' 신론. p. 451.)
하나님에게서 출생이란 영적이고 단순한 것이다. 즉 이는 분할이나 분리를 함의하거나 생성치 않는다. 그것은 유출이나 분리 없이 일어나고, 그것은 구별과 배분을 야기시킨다. 그러나 신적 본질 안의 분리나 분할(다양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9) 사람의 영혼이 말을 수단으로 해서 그 자체를 객관화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로고스 안에서 온전히 표현되시는 것이다(신론. p. 452.). 영원에서 성부의 본질로부터 낳아진 것이다. 그러므로 출생을 성부의 참된 사역이나 활동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낳으시는 성질'이 성부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낳으심이 마치 창조사역처럼 하나님의 결정하시는 뜻의 작정에서 결과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본성과 본질에 타당한 계시이다. 따라서 또한 그의 지식, 의지, 능력, 그리고 그의 모든 속성들의 계시이기도 하다.
출생은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만일 성자가 영원하지 않다면, 하나님도 영원히 아버지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은 시간과정 중에서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10) 성부께서 과거 어느 순간에 단번에 성자를 낳으셨다던지,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원에서 자신을 분리시키셨다 하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않 된다. 오히려 성부께서 영원히 성자를 낳으시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낳으심은 말씀하심이고, 그 말씀하심은 영원한 것이다.
(3) 성신
성신의 위격적 특성은 나오심또는 내어쉬어짐이다. 성자와 관련해서 논쟁점이 그의 신성이었음에 반해서 성신에 대해서는 그의 인격성이 논의의 초점이 되었다. 성신의 인격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신성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되어졌다11) 성령훼손당(pneumatomachians)은 성경에 성신이 하나님이라는 언급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에 대해 바빙크는 성신의 인격성과 신성은 성부와 성자의 인격성과 신성과 같이 그렇게 외적이고 객관적인 명확성을 가지고서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지 않았고, 영(spirit)이란 용어는 아버지나 아들이란 용어만큼 명확히 그 인격성을 표현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지만, 그러나 바빙크는 성신의 인격성과 신성에 대한 믿음이 철학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종교 자체의 핵심에서, 교회의 신앙에서 나온 것임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기에는 주로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일깨우시고, 그리스도께 기름부어 그 사역에 준비시키신 것과 같은 과거의 사역에 모든 주의가 집중되었다.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객관적 계시만이 충분하다고 여겨졌고, 주관적 조명의 필요성은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가 그 자체의 생명의 근원을 반성하고 명상하며, 구원의 객관적 원리들뿐만 아니라 주관적 원리들도 성명하기를 시작하자 마자, 교회는 기쁨으로 성신의 인격성과 신성을 고백하였다(신론. p. 455.)."
성신의 인격적 존재사실과 신성에 대한 부인은 항상 합리주의, 펠라기안주의, 그리고 이신론에로 추적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아리안주의, 소시니안주의, 그리고 알미니안주의와 밀접히 연관된 것임을 바빙크는 지적하고 있다(신론. p. 455.). 성신의 위격은 구원론적 의미를 갖는다. 성경은 성신이 모든 구원, 즉 중생, 신앙, 변개, 그리고 성화 등의 주관적 원리라는 것을 아주 명확히 하고 있다. 즉 성신 안에서의 성신을 통한 것이 아니고서는 성부, 성자와의 교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신은 피조물이 아니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신론적 의미로는 성신의 삼위일체적 위격이 인정돼야만 본질의 통일성 내에서의 위격의 삼위성과 위격의 삼위성 내에서의 본질의 통일성이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A.D. 381)에는 "주님이요, 생명을 주시는 이인 성신을 믿는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며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던 성신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권이 동일 본질의 삼위일체를 믿는다고 고백한다(신론. p. 457.).
제 3위가 성부, 성자와 유지하는 관계는 대개 내어쉬어짐으로 여겨진다. 이는 성경에서 성신이 루아흐(??????)(457)라고 불리웠으며, 가끔 숨이나 바람에 비교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시33:6, 욥33:4, 요3:8, 행2:2). 이 내어쉬어짐도 신적 본질내에서 일어나는 영원한 자기 전달의 행위이다. 낳음은 성자에게 성부에게서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도록 주는 것임에 비해서 내어쉬어짐은 성신에 관한 것인데, 그 이상 자세한 것에로 나아가는 것은 대개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거스틴이후에 성신의 나오심에 대한 교리는 톨레도 공의회의 신조(AD400), 툴리브우스에게 보낸 레오 1세의 서한, 아타나시우스 신조 제23항, 그리고 제 3차 톨레도 공의회의 고백(AD589)에 나타나 있는데, 콘스탄티노플 신조 본문에 그리고 '아들로부터(filioque)도' 라는 말을 삽입하였다12).
동방교회서는 성신은 성부로 부터 나옴은 인정하면서 성자로부터도 나오심을 분명히 가르치지는 않았다.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성신이 아들로부터도 나오심을 아주 명백히 부인하였다. 동방교회에 대한 바빙크의 의견은 이렇다. 동방교회는 그 통일성과 동등성이 항상 성부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성부는 신성의 원천이요, 기원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종속론의 오류를 아직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추론 방식에 따라 성신이 성자로부터도 나오신다면, 성자는 성부와 조정되어, 통일성의 원리가 사라지고 일종의 이신론이 도입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삼위는 한 본질 안에 있는 세 가지 관계들, 신성의 자기 전개로 여겨지지 않고, 성부가 성자와 성신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여하시는 이로 여겨진 것이다. 성자와 성신은 다소간 서로에게서 독립적이 된다. 즉 각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성부께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통주의와 신비주의, 정신과 의지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교리와 생활이 분리되어서, 교리는 정신만을 위한 것이고, 신학적 사변에만 적절한 대상이 된다.
그래서 또 다른 생명의 원천인 성신 신비주의(the mysticism of the Spirit)가 나온다.13)이것은 지식을 그 원천으로 지가지지 않고, 그 독특한 기원을 가지며, 심정(heart)을 양육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정신과 심정 사이의 거짓된 관계가 수립되고, 개념과 감정이 분리되며, 이 둘을 묶어 주는 윤리적 연합이 결여케 되는 것이다.
(4) 신적본질 내에 있는 이 구별들은 역시 외적으로 계시된다. 모든 외적 사역들은 한 주체, 즉 하나님의 사역이다. 창조와 구속에서 한 분의 같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비록 모든 외적 사역들이 하나님의 존재 전체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위에게는 신적 본질 내에서의 그의 존재 순서에 상응하는 특정한 사역이 돌려진다. 성경은 소위 구별되는 전치사들, 즉 '...으로부터', '...을 통하여', 또는 '...을 수단으로 하여', '...안에서'를 통해서 이 구별을 명확히 하고 있다〔고전8:6, 요1:3,14, 롬11:36은 삼위일체적인 것이 아니다(신론. p. 466.)〕. 이는 삼위의 협동을 수단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창조, 구속, 성화의 사역에서 각 위에게 분명한 위치와 질서가 주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성부에 의해서 기원하고, 성자를 통하여 수행되며, 성신을 통해 온전케 된다. 그래서 외적 사역들이 삼위 안에서 분배된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의미에서 나뉘어 진다는 것이다14) 경륜적 의미에서 창조의 사역은 특히 성부께 돌려지고, 구속의 사역은 특히 성자께 돌려지며, 성화의 사역은 특히 성신께 돌려지는 것이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그 존재 사실의 순서에서 첫째이고, 성자가 둘째이며, 성신이 셋째이듯이, 계시사 에서도 성부가 성자에 앞서며, 성자가 성신에 앞서는 것이다. 성부의 경륜은 특별한 의미에서 구약에 속하며(히1:1), 또 그런 의미에서 성자의 경륜은 성육신에서 시작되었고, 성신의 경륜은 오순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요7:39; 14:15). 성부는 보냄을 받지 않고 오신다. 그러나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시고(마10:40, 막9:7, 눅9:48, 요3:16,; 5:23,30,37; 6:8), 성신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신다(요14:26; 16:7). 바로 이 시간 내에서 나오심은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의 삼위간에 존재하는 내재적 관계의 반영이고, 출생과 내쉬어짐에 근거한다.15)
2. 성경적 삼위일체론
1) 구약에서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
계시의 하나님은 한 신적 본질 안에 고도의 구별을 가지고 계시며, 충분히 무한하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엘로힘16)은 말씀과 성신을 수단으로 해서 창조하신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1) 엘로힘 하나님께서 발하신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우주가 그것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는 큰 능력이다(창1:3, 시33:6,9; 147:8, 욜2:11).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와는 구별되고, 그래서 후에 지혜로 인격화되었다(욥28:23-27, 잠8:22이하, 참고 잠3:19,렘10:12,;51:15).
(2) 하나님의 성신이 구별된 인격으로 언급됨.
창조와 섭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했다.(창1:2, 시33:6; 104:3; 139:7, 욥26:13; 27:3; 32:8; 33:4, 사40:7,13; 59:19) 만물에게 생명과 빛을 주시는 성신을 통해서 모든 피조계에 내재하신다. 이렇듯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세상은 그의 말씀을 그 객관적 원리로 하고, 그의 신을 그 주관적 원리로 하는 것이다.373
(3) 여호와의 사자
이 삼중적 원인은 특별계시의 영역, 구속사역에서 더 분명하게 된다. 여기서는 더 이상 엘로힘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언약과 맹세의 하나님, 계시와 역사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여호와로도 나타내신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중보자 없이 하나님을 계시하시지 않으신다(출33:20). 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리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시107:20).
다음 구절에서는 여호와의사자가 피조된 천사를 훨씬 능가하는 자로 나타난다(창16:6-13; 21:17-20; 18장; 22:11-19; 24:7,40; 28:13-17, 31:11-13; 32:24-30).
그것은 성부는 참으로 불가시적이고, 접근할 수 없으며 형언할 수 없는데 비해서 성자는 하나님을 계시하실 수 있고, 따라서 그는 모든 계시의 원리라는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사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일체의 동일본질을 오해할 수 있고 잘못하면 종속론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4) 대제사장적 축복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단9:19,슥1:3, 사6:;33:22)등의 삼중적 반복에 이런 삼중적 계시를 억지로 넣어 읽어서는 안 된다. 민수기6:24-26 의 대 제사장적 축복문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고린도후서 13:13의 사도적 축복문은 이 축복문을 따라 작성된 것이다.
(5) 신적 존재 안에 구별이 있음
창세기19:24, 시45:7; 110:1, 호세아1:7과 같은 구절들이 있다. 분명한 구절들은 시편33:6, 사61:1; 63:9-12, 학개2:5,6이다. 17)
2) 외경과 필로, 그리고 유대교신학에 나타난 삼위일체와 구약의 삼위일체와의 차이.
(1) 원칙적으로 필로와 후기 유대교 신학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재적 실체에 대한 이교리는 하나님과 물질적 우주를 절대적으로 분리시키는 플라톤적 이원론에서 파생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말씀과 지혜가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중재자들로 나타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다. 말씀과 지혜가 하나님께 속하며 피조적 우주의 발생적 원인인 것이다.(신론. p.382.)
(2) 필로에게서는 이성은 주로 하나님의 이성, 사유, 정신을 뜻하는 속성일 뿐이다. 즉 하나님에게로서 나와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개하는 말씀이란 의미는 필로에게 2차적 의미만 갖는다. 구약은 말씀의 기본적인 의미가 하나님이 그것을 수단으로 해서 만물을 만드시고 보존하시는 말하여진 말씀이다(신론. p. 383,).
(3) 필로와 유대교 신학의 중재적 실체들은 구원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구약에서 로고스, 선지자, 제사장, 왕이신 한 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스스로 낮추셔서 그들 중에서 영원히 거하시는 그분을 공통적인 초점으로 하고 있다(신론. p. 383,).
(4) 중재적 실체에 대한 필로와 유대교의 교훈은 그것은 철저한 이원론이다. 하나님과 우주의 반립은 계속되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접촉을 허용치 않는다. 또한 이는 성신의 중요성을 무시한다. 기껏해야 어떤 이에게 주어지는 예언의 신 정도로 언급된다. 필로의 교리와 로고스 교리와 신약의 로고스 교리사이의 유사성은 단지 그 의미가 철저히 다른 단어 상의 유사성일 뿐이다.
3) 신약의 삼위일체론
(1) 구약과 신약의 일치
신약은 구약의 참된 발전이며, 삼위일체 개념은 어디서나 전제되고 함의되어 있다.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에서 발견되는 삼위일체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여호와는 주(Lord)보다 그 의미가 더 풍성한 아버지(pater)라고 불렸다. 그리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모든 구약의 예언들, 선지자와 왕, 제사직과 희생제, 여호와의 종, 다윗의 자손, 여호와의 사자, 지혜들의 완성에 이르렀다. 그리고 성신의 내려부어주심은 구약 약속의 실현이었다(행2:16이하)
(2) 신약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는 삼위일체를 계시한다(마1:18이하, 눅1:35, 마3:16,17, 막1:10,11 눅3:21,22). 아버지는 아들을 세상에 주시고(요3:16), 아들 자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요6:38)반면에 그 자신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에서 수태되었다(마1:20, 눅1:35). 세례 때에도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아버 지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자임이 선포되었다(마3:16-17).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철저히 삼위일체적이다. 그는 그가 그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신(Spirit)으로 묘사하며(요4:24;5:26),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그의 아버지이신(마11:27, 요2:16; 5:17)성부를 우리에게 선포하신다. 또한 그리스도와 성부는 구별되지만 그리스도는 성부의 유일하신 독생자요, 사랑하는 아들이신 것이다(마11:27; 21:37-39, 요3:16). 그래서 그 영광, 생명, 그리고 능력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하신 것이다(요1:14; 5:26; 10:30). 그리고 그리스도를 인도하시며 그로 하여금 주어진 과업에 적합하도록 준비시키시는 성신(막1:12, 눅4:1,14, 요3:34, 요15:26; 16:7; 14:16)을 언급한다. 특히 마28:19절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을 아름다운 마로 요약한 것이다(신론. p. 387.)
그의 죽음에 있어서도 그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하나님께 흠없이 드렸고 (히 9:14), 부활은 아버지로 말미암은 일으키심이며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그가 성결케 하시는 영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능력 있게 증거한 예수님 자신의 행위이다(롬1:3)
부활 후에도 그는 40일 되던 날에 그를 살리신 영으로 하늘 높은 곳으로 승천하셔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을 복종케 하셨다(벧전3:19,22).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구원의 삼위적 신적 원인을 인정하고 높이고 있다. 기뻐하심, 예지, 선택, 권능, 사랑, 그리고 나라가 아버지께 속한 것이다(마
6:13;11:26, 요3:16,롬8:29, 엡1:9, 벧전1:2). 화해, 중보자됨, 구속, 은혜, 지혜, 그리고 의는 아들에게 속한다(마1:21,고전1:30, 엡1:10, 딤전2:5, 벧전1:2, 요일2:2등)그런가 하면 중생, 재생, 성호, 그리고 교제는 성신께 속하는 것이다(요3:51; 4:16, 롬5:5, 8:15; 고전14:17) 이들은 고전8:6,12:4-6, 고후13:13, 살후 2:1314, 엡4:4-6, 벧전1:2 요일5:4-6, 계1:4-6)에서 이것을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요일 5:7의 사본에서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다. 신론. p.388.)
(4) 삼위간의 관계
①성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이름은 하나님을 만유, 특히 인간의 창조자로 지칭하는 칭호이다(민16:22, 마7:11, 눅3:38, 요4:21, 행17:28, 고전8:6, 엡3:15, 히12:9). 또 신정정치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불리운다(신32:6, 사63;16; 64:8, 말1:6 2:10, 렘3:19;31:9, 시103:13, 롬9:4). 또 신자들의 아버지로 불리운다(마6:4롬8:15).특별한 의미에서 성자의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는 항상 그가 성부에 대해 갖는 관계와 다른 이들이 성부와 맺는 관계를 본질적으로 구별하셨다(마11:25-27, 눅22:29, 요2:16 20:17) 그는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 하셨다(요 5:18). 성경은 주로 그 원래 의미에서 성자에 대한 성부의 관계를 지칭한다는 견해를 지적한다(요14:6-13, 17:26),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주로 그가 사랑하시는 성자의 성부이시다(요5:19이하; 10:17;17:24,26)그리고 이 사랑은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해서 다른 이들에게 나아간다(요16:27;17:26) 성자에 대한 성부의 이 관계는 시간 내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고 영원부터 있는 것이다.
(요1:148:38) 그러므로 거듭해서 하나님은 특별한 의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롬15:6, 고전15:24, 고후1:3, 갈1:1 엡1:3).
신구약 모두에서 성부가 첫 자리를 차지한다. 목적(행4:28), 기뻐하심(마11:26, 엡1:9), 창조와 구속사역에서의 주도권(시33:16, 요3:16), 권위와 능력(마6:13, 롬1:20 엡1:19), 의로움(창18:25, 신32:4, 요17:25, 롬3:26, 딤후4:8), 선하심, 지혜, 불사성, 능히 접근하지 못할 빛(마19:17, 롬16:27, 딤전6:16)이 그에게 속한다. 따라서 그는 자주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운다. 그에게는 엘로힘, 여호와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 엘샤다이,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요17:3). 한 분 하나님(고전8:6, 딤전2:5)이시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성신과 함께 하나님과 아버지로 불리우신다 심지어 그리스도 자신도 그를 아버지라고만이 아니라, 그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다(마27:46, 요20:17, 히 1:9, 2:17, 5:1, 10:7,9),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불리운다(눅9:20, 고전3:23, 계12:10) 이것을 아리안 주의는 오해하여 성부만이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신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신적이지 않고, 단지 그들은 하나님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뿐이라고 결론을 도출하였다. 하나님이란 이름이 특별한 의미에서 성부께 적용될 때, 그것은 신적경륜에서 그가 가장 먼저라는 것을 뜻한다.
② 성자께 돌려진 이름들
로고스(Logos), 이것은 이성(reason), 말(Speech), 말씀(Word) 또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번역되었다. 요한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부르는 것도 창조와 구속에서, 그 안에서, 또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이다(요1:3,14)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요1:2),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다
(1:18).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기교통의 대상이시라는 말이다(5:26,17:24). 그러므로 로고스는 영원부터 신적 본능, 생명, 사랑 등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실 수 있으셨다.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구약에서 천사에 대해서(욥38:7),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신31:8; 8:5; 14:1, 호11:1), 신약에서는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차지한다. 양자가 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영적 출생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특히 신정국가의 왕에 대해서(삼하7:11-14, 시2:7,8 2:27 ,28)상용되었다.
그러나 특별한 의미에서 히5:5은 이것이 영원에서 그리스도가 아들로서 아버지에 의해서 낳아지는 것이라고, 즉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요, 그의 본체의 형상으로 낳아지는 것이라고 즉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반사요, 그의 본체의 형상으로 낳아지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더구나 행13:33과 로마서1:3에 의하면 삼위일체의 제2위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 그러나 이것은 베들레헴으로부터 나올 이스라엘의 통치자는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에게 적용될 때 이는 구약에 있는 신정적 의미에 근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18) 그리고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신다(마11:27). 그는 아버지가 기뻐하시며, 사랑하는 아들이시다(마태3:17, 17:5, 막1:11, 눅3:22; 9:35). 유일하신 독생자이고(요1:18), 하나님의 아들이시고(롬8:32), 그리고 영원한 아들이시다(요17:5, 히1:5,5:5). 그에게 아버지는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하셨고(요5:26), 그 지식과 영예와 창조적 구속적 능력에서와(요1:3,5:21,27), 사역과(요10:30), 통치(눅10:22; 22:29, 요16:15; 17:10)에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아들 됨을 인하여 그는 죽음의 정죄를 당하셨다(요10:33, 마26:63이하).하나님의 형상은 의미에서는 이것도 그리스도께만 속한다. 성육신 이전에도 로고스와 아들로서(롬1:3,4,8:3,갈4:4)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하셨고 (빌2;6), 풍부하셨으며(고후8:9), 위엄으로 옷 입으셨고(요17:5), 부활과 승천으로써 영광의 자리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셨고, 지금도 그러신 것이다(골1:15, 고후4:4)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광채란 말은 아파우가스모스, 즉 광채 자체가 아니라, 아파우가스마, 즉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나 반영에서 기인하는 형상, 그리고 아버지의 본체나 존재의 반영이다(신론. p.397). 먼저 나신 자이자 먼저 형성되었거나 먼저 창조된 자가 아니다. 이것을 그리스도를 피조물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를 그 영역에서 제외시키는 것이다. 비록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의존하고 종속하는 것으로, 그래서 죽음에 복종하여 나라를 세우시고 그것을 아버지께로 돌려 드리는 아버지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보냄 받은 종으로 묘사되지만, 그 본질과 존재에서 그는 아버지와 동등하신 것이다(요14:28)에서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말할 때, 그는 아버지가 권능에 있어서 크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낮아지심 중에 있는 자신을 지시하신 것이다(신론. p.397.). 그러나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면, 이 열등성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들의 주가 아버지께로 갈 때에 기뻐해야만 한다. 즉 비로 이 땅에 있는 동안에 그리스도가 그 위치와 작무에서는 성부보다 낮으시자만, 그 본질과 성질에서는 동일하신 것이다. 그는 피조물이 아니고, 만유 위에 계시고 영원히 복스러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1:1; 20:28, 롬9:, 히1:8,9, 벧후3:18, 요일5:20, 계1:8, 살후1:2, 딛2:13, 베후1:1) 소시니안들, 리츌, 슐츠, 가프탄 등은 그리스도께 적용된 하나님이란 말을 그의 존재에 대한 지칭이 아니라, 그의 직무에 대한 지칭으로 해석하고 있다.)만물이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처럼 또한 만물이 아들로 말미암아 나온다(고전8:6)
③ 성령19)
성신론은 신구약의 여러 책들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 있다. 신약은 이전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심(마22:43,막12:36, 행1:16, 28:25, 히3:7, 10:15, 뱃전1:11, 벧후1:21), 노아의 날에 증언하신(뱃전3:19, 이스라엘이 그에 대해 저항했던(행7:51), 그리고 믿게 하시는 (고후4:13) 성신은 메시야에게 내려오시고, 예언된 대로 교회에 거주하시는 바로 그 신이신 것이다(마12:18, 눅4:18-19, 행2:16). 성신이란 말의 기원은 삼위일체의 제 3위의 독특한 존재방식에서 유래한다.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은 자체로 하나가 되시고 성령 안에서 동등함을 종결하시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 가운데 거하신다. 참으로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 영이시고(요4:24), 거룩하시지만(사6:3) 성령은 영으로서 하나님과 명백히 구별된다. 성신은 모든 피조물 내에 내재하는 생명의 원리이신 하나님이시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이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또한 그가 하나님과 모든 실존하는 대상들의 관계를 규정하시므로 거룩한 신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우리 입에서 숨이 나오는 것처럼 성신도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며,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신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신, 주의 신, 아버지의 신(9창1:2, 사 11:2, 마10:20)으로, 또한 그리스도의 신, 아들의 신으로도 불리우며(롬8:2,9 고전2:6, 고후3:17, 빌1:19, 갈3:2 4:6 뱃전 1:11), 그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앞에 서 있다고 한다(계1:4; 3:1; 4:5; 5:6). 성신의 나오심은 성부와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것으로(민11:29, 느9:20, 사42:1, 겔36:27 요3:34, 요일3:24; 4:13), 보내어진 것으로(시104:30, 요14:26, 15:26;,16:7, 갈4:6, 계5:6) 쏟아 부어진 것으로(사32:15; 44:3, 욜2:28, 슥12:10, 행2:17,18),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으로(마3:16), 이스라엘 중에 있는 것으로(사사63:11, 학2:6), 어떤 이에게 내리는 것으로(마12:18), 어떤 이에게 내쉬어지는 것으로(요20:22) 표현된다. 또 성신이 성부에게서 나오신다(요15:26)는 말도 듣는데 이것은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오순절 날 일어났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성신의 구별이 있으나, 그 구별의 성질이 아직 모호하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신이 아직 저희에게 주어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요7:39)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의 인격으로 언급된다. 그에 대해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요:1526; 16:13,14) 그는 보혜사라고 불리우고, 또 다른 보혜사라고도 불리운다(요14:6). 그는 하나님에 대해 1인칭으로 말씀하시고(행13:2). 인격적 행위가 돌려진다찾아아심, 판단함, 들음 말씀하심, 원하심, 가르치심, 중보기도 해주심, 증언 하심 등이다. 또 그는 성부와 성자를 연관시키고 조정하는 관계에 있다(마28:19, 고전12:4-6, 고후13:13, 계1:4).성신의 신성도 신약에서 분명해 졌다. 성부가 말씀하시는 것이나 성신이 말씀하시는 것이나, 거주하시는 것, 거역 받으시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에서 자명해진다
(사6:9, 참고 행28:25, 렘31:31, 참고 히10:15, 시 95:7,8, 참고 히3:7-9, 행5:3,4, 롬8:9,10, 고전3:16, 참고6:19, 엡3:22) 이것은 위격적 구별과 본질적 동일성이 함께 할 때에만 참될 수 있다. 또 신적 속성은 하나님께 대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에게도 적용된다. 영원성(히9:14), 편재성(시139:7) 전지성(고전2:10,11) 전능성(고전12:4-6)등이다. 이것은 또한 성신과 하나님이 본질상 하나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성신의 신성은 특히 창조사역(창1:2, 시33:6, 욥33:4, 시104:30)과 구속사역에서 메시아를 기름 부어 직무에 합당하게 하는 일(사11:2, 61:1, 눅4:18, 사42:1, 마12:18, 눅1:35, 마3:16, 4:1,용3:34, 마12:28, 히9:14, 롬1:4), 사도들을 그들의 독특한 사역에 준비시키는 일(마10:20, 눅12:1; 21:15; 24:49, 용14:16, 15:26, 16:13), 신자들에게 은사와 달란트를 나누어 주는 일(고전12:4-11)등. 바빙크는 (큰일155에서) 성령이 방언이나 에언의 선물과 관련하여 사려될 수 있는데, 그러나 부당하게도 이것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성령은 하나님의 한 선물, 혹은 응력에 불과하다고 추론하고 있다며 이것은 성령의 인격적 이름을 취하고 인격적 속성을 가지며 인격적인 사역을 행하는 한 인격체로서 나타나는 것을 증거로 들고 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영적으로 내재하게 하는데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신은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맺고 있는 관계와 같은 관계를 그리스도와 맺으신다. 성자께서 자기 스스로는 아무 말씀도 아니하시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로서 받아 말하였듯이 성신도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서 받으신다(요16:13,14). 성자가 성부를 영화롭게 하시듯이 성신도 아들을 계시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요15:26;16:14). 아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버지께로 갈자가 없었 듯이, 그 누구도 성령 안에 있지 않고서는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는 것이다(고전12:3). 그러므로 성신을 떠나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하다.
성신은 그리스도의 공적, 긍휼로 인한 모든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중생(요3:3), 죄를 깨닫게 함(요16:8-11), 아들삼음(롬8:15), 새롭게 함(딛3:5), 하나님의 사랑(롬5:5), 온갖 영적 열매(갈5:22), 인치심(롬8:23, 고후1:22; 5:5 엡1:13, 4:30), 부활(롬8:10)등이 모두 성신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다.
성신을 통해서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와 교제하게 되고, 이 교제는 직접적이다. 성신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요14:23이하, 고전 3:16,6:19, 고후6:16, 갈2:20, 골3:11, 엡3:17, 빌1:8,21)성령은 인격체일분 아니라 참된 하나님이다. 그것은 인격체들인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마28:19, 고전12:4-6, 고후13:13, 계1:4).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축복을 받는다. 따라서 교회는 성신을 근심하도록 하지말고, 성신의 훈계를 받아야 한다(사63:10, 엡4:30). 이 성신에 대한 신성모독은 용서받을 수없는 죄이다(마12:31,32)
3. 삼위일체에 대한 어거스틴 이후의 교리사
바빙크는 종교개혁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단순한 역사적 신앙만으로는 그것이 아무리 순수한 것이라 해도 구원에 충분치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참다운 마음에서 나온 신뢰만이 구원에 합당한 것임을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신론 p.417)삼위일체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한편으로는 본질의 통일성을 희생시켜 가면서 위격의 삼위성을 강조하는 오류가 있었고(아리안주의), 또 한편으로는 위격의 삼위성을 희생시켜 가면서 본질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오류가 있었다(사벨리안주의). 두 종류의 오류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그 정도와 변이를 달리하여 나타나 왔다.
1) 아리안주의
(1) 선구자들
이들은 A.D. 2세기와 3세기에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단지 초자연적 방식으로 낳은 사람으로만 여기고 그가 세례 때에 성신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서 그의 사역에 적합하게 되고 주로 높여졌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선재와 신적 본성을 부인하는 에비온주의자들(the Ebionites), 알로기파(theAlogi), 테오도투스(Theodotus), 아르테몬(Artemon),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등이다. 이들은 양자론적 기독론(an adoptionistic Christology)를 받아들였다.
(2)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불출생적이고, 시작을 가지지 아니하시는 한, 그는 절대적으로 독특하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고, 다 알 수 없으며, 무한하시므로 직접적인 교제관계에 들어갈 수 없고, 그의 존재를 수여할 수 없으며 불출생적인 것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직접 인간과는 교제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존재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의 뜻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고 피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되셨다. 즉 그는 본질적으로 아버지인 것이 아니고 피조물들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창조사역은 시작하시기 전에 창조될 매개자로 행동할 일종의 중간적 존재, 즉 지혜, 아들, 로고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리운 구별된 휘포스타시스, 또는 구별된 본질을 존재케 하셨고 세 번째 휘포스타시스인 성신도 존재케 하셨다. 로고스는 무로부터 낳아졌고 피조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케 된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다. 비록 그가 시간들과 세대들 이전에 즉 우주이전에 피조된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가 있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는 온전한 피조물로써 신을 선택하였고, 그럼으로써 불변성을 얻었고 그리하여 신성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영예를 받으시기에 합당하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아니다(신론. p.420.).
(3) 근거구절
이들은 하나님의 통일성(신6:4, 32:39, 요17:3, 고전 8:6), 성자의 출생(잠8:22, 골1:15), 그의 성부께 대한 종속(요14:28, 고전15:28,히3:2), 그의 지식의 제한성(막13:32, 요11:34, 그의 능력의 제한성(마28:18), 그의 선의 제한성(눅18:19), 그의 지혜의 성장(눅2:52), 그의 수난(요12:27; 13:21, 마26:39; 27:46) 그가 주와 그리스도로 높여지심(행2:36, 빌2:9, 히1:4)등이다. 이들은 명목론적으로 파악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으로부터 다양한 논의를 도출해 내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통일성과 불출생을 증명하였다. 또한 니케아 기독론을 비판하였다. 만일 성자가 낳아졌다면, 바로 그 사실이 그가 낳아지지 않는 분이신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임을 확언하며, 그가 시간 내에서 존재하게 된 것을 지시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4) 발전
아리안주의의 본질은 성자와 성부와의 동일본질을 부인한다. 즉 성부만이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성자에게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간 위치를 부여해 상당한 사변의 폭이 허용되고 결국 성자의 신성이 전혀 주장되지 않기까지 이르렀고, 이것 때문에 아리안 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423)
종속론- 아들은 참으로 영원하며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진 분이다. 그는 SAN로부터 존재케 된 피조물이 아니다. 그러나 성부보다 열등하고 그에게 종속된다. 저스틴마터, 터툴리안, 클레멘트, 오리겐등의 가르침이며 유사-아리안 주의자들, 가이사량의 유세비우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견해이며 후기에는 항론파들과 많은 근대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졌다.
(5) 본래아리안 주의 - 이것은 종교개혁 후기 많은 신학자들 특히 영국에서 애호되었다. 때문에 하나님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화란의 많은 항론파들, 그리고 후기의 그로닝겐신학자들(423참조)
소니니안 주의 는 성부만이 참 하나님이며 성자는 하나님께서 직접적 초자연적 개념을 수단으로 해서 창조하신 거룩한 사람이다. 그 창조 이전에는 그가 있지 않았다. 이 사역후 그는 하늘로 올라가 신적 은혜에 참여자가 되었다. 성신은 단지 신적에너지나 능력뿐이다.(존비들(John Biddle), 라르드너(Nathnael Lardner), 린세이(Theoph Lindsey), 유니테리안 협회의 창시자인 프리스틀리(Joseph Pristly)
유니체리안 예수는 그저 보통 사람이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인물인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었다.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신학이 이러한 작업을 하였으며 결국 삼위성은 없어지고 오직 하나님은 하나가 되었다.
리츌(Ritschl)은 예수는 이 땅에 하늘나라를 수립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준비된 사람으로 후에 교회의 하나님과 주의 위치로 높여졌다고 한다. 성신의 신성과 인격성 모두 부정되었다.
2) 사벨리안 주의
AD2-3세기의 사벨리안의 주의의 선구자는 노에투스(Noetus), 프락세우스(Praxeus), 에피고누스(Epigonus)그리고 클레오메네스(Cleomenes)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성부 자신이 태어났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는 같은 분이다. 또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성부이고 인성은 성자라고 하였다.
이들은 성부, 성자, 성신은 같은 하나님이며, 하나이고 같은 존재에 대한 세 가지 이름이라 한다. 즉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입법자로서 성부의 양태로, 성육신 때부터 승천까지는 구속주로서 성자의 위격과 얼굴로, 마지막으로는 생명을 주시는 이로써 성신의 위격과 얼굴로 나타났다. 사벨리우스는 성신은 신적 본질에 포함시켰고 성부와 동등한 위치에 두었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 안에 생성의 과정이 있으며 그의 존재의 계시에는 역사적 과정이 있다고 믿었다.
(1) 성부수난설은 프락세우스가 주장하였다. 성부, 성자, 성신이 같은 인격존재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2) 안키라의 마르셀루스와 셀미움의 포티누스는 성자와 성신이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자존적이 되고 인격적이 된 신적속성들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아들과 신으로 존재하셨는데 후에 하나님이 자신에게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이러한 구조는 삼위가 단지 한 하나님이 연속적으로 담당하는 세 가지 역사, 세 가지 계시의 양식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생성을 가져왔다. 이것은 중세기의 범신론적 파와 재세례파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또한 세르베투스는 교회의삼위일체론을 삼신론적이고 무신론적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은 나뉘어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성신의 신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위격을 말해서는 안되고 성향, 나타남, 신적양식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로고스를 통해 창조와 구약에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리스 도안에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로고스 안에 내재하시는 성신을 하나님의 자기 부여의 한 양식이다. 왜냐하면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안에 거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 과정이 마쳐지면 삼위일체는 사라지고 만다.
이 영지주의적이고 신지학적 인요소는 뵈메(Bohme)는 삼위일체는 신성 안에서의 한 과정의 산물이다. 진젠도르프(Zizendorf)는 영지주의적으로 자신 안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접근할 수 없으며, 감취어져있고, 불가사이하나 그가 그리스 도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하였다. 이 삼위일체를 가족으로 설명하였다. 스웨덴보르그(Swedenborg)는 교회의 삼위일체를 삼신론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성자, 성신으로 계시되었다.
하나의 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뿐이라는 스피노자에게서는 삼위일체는 있을 수 없다. 칸트에게서는 거룩한 입법자, 선한 통치자,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침투하시고 한 성신을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연합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쉘링과 헤겔에서 하나님은 신(spirit), 사상(thought), 이성(reason)이라고 해석되는 중요한 철학적 진리가 삼위일체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에 대한 개념 형성, 자신을 보고 생각,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본성적인 것으로 보고 객관적 자아는 실제적인 존재 사실을 가져야 하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생각하면서 자연 세계 안에 자신을 낮으시고(객관화) 자기 객관화의 상태로부터 그는 인류의 의식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자연 안에서(창조), 역사에서(그리스도),그리고 의식에서(교회)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4. 삼위일체론을 예증하기 위한 시도들
삼위일체론을 합리적 근거에 두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들의 입장에 대하여 우리는 이 논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에서 얻고 있음을 강조해야만 한다. 성경이 삼위일체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의 유일하고도 종국적인 근거이다. 그것이 신앙에 의해 받아들여진 후에, 모든 추론은 이를 우리의 의식에 좀더 확실케하는 일만을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신론. p.479).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제시할 수 있는 연약한 근거 위에서 이를 받아들인다는 우리 반대자들의 조롱에 이 진리를 던져 버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경이 이러한 논증을 사용할 권리는 부여해 주고, 여러 반론들에 대한 대답들로서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예증들과 논증들로 인하여 자연과 은총, 창조와 구속의 관계가 밝혀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삼위일체적이라면, 이 사실은 최고의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참된 종교적 필요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신론. p.480.).
5.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신론. pp.480-486)
1)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은 참으로 살아 계신 분으로 계시해 준다. 이신론은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큰 간격을 내고, 그 둘 사이의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추상적인 구별 없는 실체, 순수하고 다양성 없고, 단조로운 존재로 환원시켜 버린다. 결국 모든 참된 예배를 억누르는 것이다. 범신론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져오기는 하나, 그를 피조계와 동일시하고, 그의 독자적 존재 사실을 부인하며, 역시 종교를 약화시키고 무시하는 것이다.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제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독자적 존재 사실을 또 한편으로는 그의 영광스러운 본질의 충만을 주장한다. 하나님은 절대적 본질이요, 지금도 계시고 과거에도 계셨으며 장차 오실 영원하신 분이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순한 추상적 존재가 아니고 무교통적이지 않다.
삼위일체성을 하나님의 사유나 그의 의지, 그의 사랑, 선하심, 온전하심 등에서 이끌어 내려는 시도들은 부적절하다. 사유로부터의 파생은 삼위성을 낳지 못하고, 신적 의지에 돌려지는 성신의 나오심을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사랑에서의 시도도 마찬가지이다(신론. p.482). 우리가 삼위일체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우주를 떠나서라도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하며, 전적으로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에 의해서 하나님은 독립적이며, 영원하고, 전지하며, 자비로우시며, 사랑하시며,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분이시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본질의 충만, 참된 생명, 영원하신 영광으로 계시해 준다. 하나님은 동시에 세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온전한 통일성을 낳는다. 셋이 같은 본질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다양성을 낳는데, 성부, 성자, 성신이 구별되는 위격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동일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면 각위에 대해 가장 적절한 개념은 그들이 동일 본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구별이 있다면 이 구별들, 또는 독자적 위격들은 그 본질이 동등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는 하나님 이하의 것이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아리안 주의는 충분히 반박된다. 또 사벨리안주의의 양태론적 삼위일체론도 정죄한다. 왜냐하면 삼위의 동일 본질은 이 삼위가 참으로 서로 구별될 때에만 의미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이 삼위가 동일 본질의 담지자들일때만 그들이 동일 본질이란 말이 있다는 것이다. 창조와 구속에 있는 하나님이 계시 안에서 분명히 구별되어 나타나는 다양한 주체들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위격의 다양성에서 결과된 것이다. 내적으로 다양성이 없으면 외적으로도 다양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 삼위일체론은 창조론에 대해서 굉장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 교회는 이신론(계시 없는 유일신앙)과 범신론, 유대주의와 세속주의의 잘못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다.(큰일. p.161) 이신론은 우리의 본성, 직업, 우리의 사업, 우리의 과학, 우리의 기술 혹은 구원의 영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없이하여 스스로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또 범신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세계와 해, 달, 별들과 기술, 과학, 국가를 신성시하며 피조물, 종종 우리 자신의 조작물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위대성을 숭배하게 한다. 그러나 교회는 두 가지를 고백한다. 즉 하나님의 자연을 초월하여 본지에 있어서 세계와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의 존재와 더불어 세계 안에 현조하며 공간의 어느 점에서든지 시간의 어느 순간에 대해서든지 세계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초월하여, 우리를 위한, 우리 안에 계시는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우주와는 상관이 없으시고 하나님은 생명이요 복되심이고, 영광스러우시다. 창조는 반드시 하나님한테 근거하지만 창조는 하나님의 생성의 내적과정중의 한 요소 일수는 없다. 또도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낳아지심과 나오심은 창조와 계시의 외적 사역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의 내재적 행위들이다.
3), 실천적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전 구속계시의 핵심이다. 이것은 그리스 도안에서만 온전하고, 분명하게 계시된 것이다. 그리스 도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에게 오셨고 성신 안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는 것이다. 구속사역은 그 성격상 철저히 삼위일체론 적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말미암고 하나님을 통하고 하나님 안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삼중적 구별을 나타내 보인다. 즉 그것은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신의 교통하심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은 성경의 증언, 삼위의 사역, 그리고 주로 우리 안에서 느끼는 삼위의 사역으로부터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들을 성자에 의해서 구속된 그리하여 성부, 성자와 성신을 통해 교제하는 성부의 자녀로 안다. 삼위일체j 하나님은 우리가 받는 축복의 원천이다.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 이름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요약이다. 그 이름이 우리에게 내리는 모든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 영원히 우리의 찬양과 찬미의 대상으로 있고, 그 이름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안식하고 양심이 평안을 얻는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의 우리의 구원이 삼위일체론과 관련되어 있다(신론. p.486.)
결론
바빙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출발을 하나님의 존재에서 파악한다. 그것은 성부의 위격에서 삼위일체성을 찾을 때 얻게 되는 오류들을 막을 수 있다. 그때에서야 하나님의 참다운 삼위일체성이 유지된다.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즉 창조와 재창조의 모든 사역 가운데 통일적으로, 일체성과 삼위성이 계시되고 있음을 잘 파악하고 있다.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들만이 아니라 신적 본질의 통일성내에 구별이 있음을 시사하는 그의 위격의 이름들을 알릴 때, 계시의 일정한 진전이 있음을 지적한다.20) 구약에서는 희미한 개념을 제공하지만, 신약에서는 삼위일체 교리가 아주 분명히 계시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바빙크는 계시의 점진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신론. p.372.) 또 바빙크에서는 철저하게 계시의존적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성경을 떠난 그 어떤 것으로도 삼위일체는 파악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 고 있다. 묵시문학과 필로에게 있는 이러한 교리는 이교적 사변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신론. p. 479.). 그는 어느 정도 유비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이 헛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차원으로 제한하고 있다(신론.pp. 469-480). 또한 그는 이 삼위일체교리의 실천적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총체라는 것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위로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인 것이다(신론. pp.480-486.).
미주
1) 주 교재. Herman Bavink, 신론, 이승구 역,(기독교 문서선교회, 1994.)
2) Herman Bavink, 하나님의 큰일, 김영규역(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p. 145. 이후로는 본문에 '큰일'로 표시함.
3) 같은 책, p. 159.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그것을 표현한다. "이론적인 사색에 있어서나 실천적인 생활에 있어서나 이 두 가지가 분리할 수없는 결합과 순수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모든 신자들의 소명이다."
4) Herman Bavink, 신론, 이승구 역,(기독교 문서선교회, 1994.) p. 431. 이후로는 본문에 '신론'으로 표시.
5) 헤르만 바빙크, 하나님의 큰일, 앞의책. p.160. 바빙크는 언어가 사상 뒤에 멀리 있고, 사상은 다시 사실 뒤에 멀리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6) 이것으로도 되어져가는 하나님을 주장하는 모든 이단들이 반박될 수 있다. 또한 모든 종속론을 비판할 수 있다. 이것은 C. Van Til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이단들은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이단으로 환원될 수 있다....".(개혁주의 신학 서론, 이승구 역,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5. p. 375.)
7) 헤르만 바빙크, 신론, 앞의 책, p.443. 사벨리우스는 주관적 이성에서, 이성적으로 명목론적으로 다른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8) 헤르만 바빙크, 앞의 책, p. 448.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낳아지지 않은 심연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용법을 사모사타의 바울, 아리안 주의자들, 아에티우스, 유노미우스가 채용하여 아겐네시아란 용어가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하며, 이것이 하나님을 피조물과 구별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더 나아가 성자는 낳아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낳아졌고 따라서 성자는 하나님을 일수 없고 반드시 피조물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겐네시아는 문자적으로 낳아지지 않음. 즉 낳아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시작 없는 상태를 지칭하는 아게네시아(agenesia)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아겐네시아는 위격적 속성으로서 성부에게만 속하는 것임에 반해서, 아게네시아는 삼위 모두에게 속하는 것이다. 아리안주의는 이것을 오해하였다.
9) 헤르만 바빙크, 앞의책, p. 452. 아리안 주의자들은 특히 출생이란 분리와 분할, 그리고 낳으려는 열정과 유출을 뜻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출생은 니케아 신조가 말하는 대로 성부께서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 낳아졌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으신, 성부와 동일 본질의 아들을 낳으심"을 의미한다. 다메섹의 요한은 "창조는 피조된 또는 만들어진 것이 창조자 또는 만드신 이의 본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본질과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와는 전혀 다르게 생성된 것을 지칭한다. 그러나 출생은 낳아진 것이 낳는 이의 본질로부터 그래서 같은 본질을 갖게끔 나오는 나오심을 지칭한다" 라고 했다,
10) 여기에서 하나님을 되어지는 개념으로 인식하는 모든 사고들이 비판된다. 경륜적 삼위일체, 십자가의 신학은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바라보는 대상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승구,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관계, 미간 논문.)
11) 이것으로 성령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하는 여러 단체들이 비판된다.
12) 헤르만 바빙크, 앞의책. p. 458. 토마스 아퀴나스는 낳음은 지성적 방식으로 내어쉼은 의지적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설명하였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낳음과 내어쉼 성자와 성신의 차이는 받아들이고있으나 전체적으로 토마스아퀴나스에의해 주어진 구별이 성경적 지지를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13) 종속론은 결국 신비주의가 된다.
14) 김영규 교수는 존재론적 삼위일체보다는 통일적 경륜이라는 말을쓰는 것이 합당하다고 제안한다.
15) 범신론은 자주 이 진리를 잘못 해석했다. 몬타누스(Montans)때로부터 헤겔의 때에 이르기까지 삼위가 교회사의 세시기를 대표한다는 견해를 범신론은 변증하였다. 즉 그들은 생성(becoming)의 속성이 하나님께 돌려지고, 우주발생론이 신발생론(theogony)으로 변하여 졌다고 바빙크는 지적한다. 이것으로도 오늘의 경륜적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모든 단체들은 범신론자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16) 헤르만 바빙크, 앞의 책. P. 373. 구약에서는 우리는 신약적 삼위일체론의 예시를 보게 된다고 한다. 엘로힘( ???????????? ) : 엘로힘이라는 이름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삼위일체성을 증명하는 것이 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신적 존재의 풍성함을 지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17) 헤르만 바빙크, 앞의책. p. 376. 어떤이들은 창18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의 이야기가 삼위일체의 계시라고 해석했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중 하나는 로고스였고, 나머지 둘은 보통 천사들이었다고 했다(칼빈과 화란 흠정역에 붙은 註의 저자들). 그러나 바빙크는이것을 어거스틴의 주해 즉 세 사람이 그들 가운데서 여호와께서 하나님을 특별한 방식으로 계시하신 피조된 세 천사들이었다는 해석을 옹호한다.
18) 헤르만 바빙크, 앞의책. p. 396. 그러나 수양론자들은 그리스도는 신성에 의하면 출생에 의한 아들이지만 그의 인성에 의하면 양자됨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견해를 주장한다. 이것은 후에 소시니안주의자들과 알미니안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고 바빙크는 지적한다.
19) 신(Spirit)이란 말은 바람, 숨을 의미한다. 성신을 전능자의 숨(욥33:4), 그의 입의 기운(시33:6)이다. 예수께서는 성신을 바람과 비교하셨고(요3:8),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이를 말하기도 했다(요20:22, 참고, 살후2:18)
20) 반틸도 구약에서 완전한 신학의 체계를 찾는 것과,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교리의 체계를 가르치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한다.(앞의 책. P. 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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