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의 의미는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아들 2020. 8. 9. 21:13

삼위일체 교리에서 '하나'의 의미는 숫자가 아니라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存在)를 서술(敍述)하는 신비(神秘)이며 인간의 언어와 사고(思考)의 한계를 가진다.

그래서 인간의 상식적인 사고로는 잘못된 이해에 빠지기 쉽고 오히려 바른 이해가 어렵다.

삼위일체론에서 ‘삼'위(三位) 하나님이 곧 ‘한'(一) 하나님이시라는 부분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1. 삼위일체론 진술의 두 가지 방법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진술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내재적 삼위일체론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내적인 관계에 접근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기술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이해한 삼위일체에 대한 이 론을 ‘내재적(內在的) 삼위일체론’이라고 한다.

삼위 하나님을 반드시 ‘존재론’적으로 규명해야 한다는 점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내적인 관계이며,

삼위가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인식하기 어려운 한계를 가진다.

또 삼위 일체를 존재론적으로만 논하면 사변적이 되어

우리와는 직접적으로 관 계 없는 하나님으로 느껴지기 쉬워 공허해진다.

(2) 경세적(또는 섭리적) 삼위일체론
다른 하나는 삼위가 역사 속에서 행하신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인 식하는 방법이다.

성경에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풍부한 기록이 있다.

이렇게 삼위의 역사 섭리(攝理)를 통해 이해하는 방법을 ‘경세적(經世的, 세상을 다스리심) 삼위일체론’이라고 한다.

성경은 모호하 게 삼위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 않고 구체적 행위에 근거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활동과 역사는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인식된다.
이 점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우리와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는 분이심을 실감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경세적 삼위일체론’ 이 하나님의 ‘존재’에 근거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은 인간에게 경험되는 어떤 ‘기능’이나 ‘현상’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접근할 때는

‘경세적 삼위일체’로 시작하고 그에 근거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함께 이해하는 방법이 좋다.

하나님의 활동은 반드시 그의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 시며 영원불변(永遠不變)하신 신적(神的)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經綸)과 내재(內在)는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는 “경 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며,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 적 삼위일체론이다.”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2. 일체(一體)는 숫자가 아니라 공동체(共同體, Unity)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적절한 개념과 표현을 보자. 삼위일체(三位一 體)를 숫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옳지 않은 접근방 법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三位)이 숫자적으로 ‘하나’의 본질이나 신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삼위일체론에서

이단적 삼위일체론들(False Doctrinal Views of the Trinity)
Unitarianism, Sabellianism, Tritheism(삼신론)

한 분 하나님과 세 인격(person)이라고 표현 할 때 한 하나님의 ‘하나’와 세 인격의 ‘셋’을 같은 일차원에서 다루면 안 된다. 즉 3과 1을 동일 평면에서 이해하면 셋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셋이 되는 모순에 빠진다.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3=1’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삼위와 일체를 숫 자로 이해하면 삼위일체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교리가 된다.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신성이라고 인정한다면 결국 삼위일체론의 핵심은 ‘하나’를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건이다. ‘하나'는 숫자가 아니고 세 위격이 함께 연합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일체’는 세 위격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상호 내재해 있는 ‘연합이며, 삼위의 의지 와 구속 사업이 서로 상반되지 않고 통일을 이루는 ‘공동체’를 뜻한다.

최근 삼위의 공동체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가 있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 내재적, 순환적, 침투적이라는 의미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相互通在)를 통해서

일체되시는 ‘공동체적 하나님’을 형성하고 있다.

이 통일성 때문에:
 성부는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 성자는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 성령은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페리코레시스’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는 것 이 아니고

상호 침투하여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거하시는

삼위(Three)가 공동체(Unity)라는 의미다.

3. 함께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성부, 성자, 성령이 가지는 고유한 속성 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부를 전능(全能), 성자를 전지(全知), 성령을 전선(全善)으로 표현했다.

또 성부를 태초의 근원, 성자를 지혜, 성령을 덕성으로 부르는 것도 유사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삼위 의 속성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

삼위가 자신만의 고유한 속 성을 가지면 결국은 삼위의 완전한 일치가 깨지고 삼위가 분리(分離)된 다.

그렇게 되면 삼신론(三神論)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삼위의 역할과 경세(經世)도 마찬가지다.

만약 성부가 천지창조의 행위를 하시고,

성자는 십자가에서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구원을 하시고,

성령은 성화(聖化)의 영(靈)으로 피조세계에 임한다고 생각하면

삼위는 각 자 고유한 영역(領域)을 가지게 되고 결국 삼위의 공동체성이 훼손될 가 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또한 삼신론(三神論)이 된다.


최근 신학계에서는 “삼위가 함께 활동하신다.”는 표현이 더 좋다고 본다.

예를 들면 천지창조는 성부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함께 하신 사건으로 본다.

또 십자가의 구원도 예수님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행위이고,

성령님의 성화도 성령 홀로가 아니라 삼위의 역사(役事)로 본다.

성경이 어떤 사건을 때로는 성부, 때로는 성자, 때로는 성령의 행위 로 표현하지만

그 의미는 삼위(三位) 하나님 가운데 한 위(位)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三位)께서 함께 역사(役事)하신 것으로 보는 것이 다.

즉 십자가 사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 해’ 행하신 구속(救贖) 사역인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삼위일체론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삼위일체론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삼위의 온전한 사귐 안에서 인간사회의 자유 와 평등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기도 하고,

삼위일체를 실천적이고 해 방적 교리로 해석하기도 하며,

삼위의 섭리 형태를 생태계와 우주를 포 함하는 사상으로 발전시키는 모티브로 삼기도 한다.

삼위 하나님에게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온 피조 세계가 하나님 안에 안길 수 있는 새 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글쓴 이 / 김동건 교수(영남신대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