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되기까지 니케아에서 칼케돈까지
1. 니케아 회의(The Council of Nicaea, 325)'
(1) 니케아 회의 소집의 배경
초대 교회는 오랜 갈등과 시련 그리고 고난과 박해 후 주후 313년 동방의 리키니우스(Licinius, ?-325)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the Great, 272-337) 사이에 맺어진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313)에 의해 교회에 새 로운 활력과 자유가 찾아왔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기독교를 자유화 한 뒤 몰수된 기독교의 재산을 반환하고 성직자에게는 국비를 보조하고 일요일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정하여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후 로마제국은 광대한 영토의 확장과 많은 이민족의 문화 와 혼합한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기독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이렇게 큰 결단을 내렸지만 정작 자유를 얻게된 교회는 갈등과 내분이 일기 시작했다. 잠재되어 있던 이단 사상이 신앙의 자유 와 함께 교회에서 머리를 들고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황제로서는 이런 현상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정치적으 로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모든 교회들 또한 평안하기를 바랐는데 뜻 하지 않은 이단의 출현으로 교회 내분이 일기 시작했고 황제가 나서서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되었다. 그 원인은 초대교회가 약 300여 년 동안 지나오면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은 그의 아버지로 믿는 분명한 삼위일체 교리가 정리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시련과 핍박 때문에 교리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려면 교회의 지지를 받아야만 평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후 325년 5월 20일 최 초의 세계 기독교공회가 니케아에서 모이도록 교회의 대표인 교회 감 독들을 소집했다. 회의는 2개월이 지난 7월 25일까지 계속되었다. 니케아는 소아시아의 작은 동네의 보스포러스(Bosporus) 해안에 있으며 콘 스탄티노플로부터는 약 45마일거리에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교회 감독들이 회의에 참석하기 원했다. 그래서 아프리카, 시리아, 폐르시아, 소아시야, 이탈 리아를 비롯하여 멀리는 스페인까지 총 318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는데 대부분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의 주교들이었다. 그러나 감독들은 장로 2명과 수행원 3명 정도를 데리고 함께 왔기 때문에 그 수가 약 1500여명이 넘었지만 이들을 위해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로마 제국의 국고에서 부담했다.
(2) 니케아 회의 논쟁의 원인
이렇게 니케아 회의가 소집 되게 된 발단은 교회가 진리를 파수하기 위한 이단과의 싸움 때문이었다. 4세기 초엽 교회 안에는 교리적인 체계가 바로 세워지지 않아 갈등과 내분이 일어났다. 그것은 318년 알 렉산드리아의 교부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가 성자 와 성부는 완전히 ‘동질’(同質)이라고 주장했고 아리우스(Arius, 256-336)는 성자는 성부보다 낮은 ‘이질’(異質)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이 니케아 회의에서 유세비우스(Eusebius, 263-339)의 제안대로 ‘동질’(同質)이라는 주장이 교리적으로 성경에 맞는 다고 확인되어 이 말을 넣은 ‘니케아 신조’가 작성됐다.(아래 니케아 신조 참조)
그러나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자 아리우스파(Arianism)는 또 다시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 다르다는 주장을 계속했다. 그래서 성자와 성부는 본질이 같다고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와 교회 내에서 갈등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기독교 정통파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47-395)는 ‘공동신앙령’(Cunctos populos)을 380년 반포하고 성자는 성부 와 본질이 같다는 니케아주의 기독교 지지를 선포하고 381년 콘스탄티 노플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영구 추방했다.
그리고 니케아 총회 직후 제국과 교회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 었는데 392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칙령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뒤 모든 이교의 제전을 금하고 올림픽 경기도 신의 제전이라는 이유로393년 금지했다. 그래서 제1회 올림픽이 1896년 아테네에서 다시 개 최되기까지 1500년 동안 경기가 중단되었다. 이런 테오도시우스 황제 는 397년 세례를 받고 기독교 황제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당시 교회의 또 한 가지 문제는 부활주일을 지키는 문제였다. 동방교회는 유대인이 지키는 유월절과 같은 날 즉 닛산월 14일을 부활주일로 지켰고 서방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요일 날 부활하신 사실을 중시하여 춘분 후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활주일의 날자 문제는 오랫동안 일치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니케아 회의에서 서방교회의 날자 대로 부활주일은 춘분 후 만월후의 첫 일요일에 지키기로 정하였다. 이것도 교회의 통일을 이루는데 큰 힘이 되었다.
(3) 니케아 신조
우리는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일체의 사물들의 창조주이신 전 능하신 성부 한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 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부의 본질로서 비롯된 하나님의 독생자 이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 중의 빛이시오 진정한 하나님 중에 하 나님이시니 그는 창조되지 않고 성부와 동일 본질로서 잉태되셨으니 그를 통하여 천상과 지상의 만물이 창조되었다. 그는 우리 인간들과 우리 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성육신 하시고 인간이 되심으로 고난을 받으시고 제 삼일에 부활하시어 승천하셨으니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는다. 그러나 그가 존재하 지 않을 때가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잉태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 다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무에서 그가 비롯되었다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서로 다른 본질 혹은 정수라고 주장하는 자들, 혹은 그가 창 조 되었다거나 변화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보면 교회는 저주하 는 바이다. 아멘
(4) 사도신경
사도신경은 신약 성경 정경(正經) 확정(카르타고 제3차 교회회의, 397)과 때 를 같이하여 정해졌다. 사도신경이란 사도들이 지은 신경(信經)이란 뜻이 아니고 사도들이 교회에 물려준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상 사도 신경은 사도들이 떠난 뒤 오랜 후에 정해 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은 사도들에 의해 지어졌다는 전설이 오래 동안 믿어져 왔다.교회의 조직법과 행정규례는 시대가 변함에 다라 변천해 왔지만 사도 신경만은 그 때의 신앙 고백을 지금까지 지속하여 오고 앞으로도 계속 지속할 것이기에 신앙의 선조들이 고백한 사도신경은 당대에 쌓은 영 원한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신경(信經)이란 크리드(Creed)란 말로 라틴어 크레도(Credo)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그 뜻은 “나는 믿는다.”라는 뜻이다. 또한 신경이란 신앙적 조건의 설명이다. 당시 영지주의(Gnosticism) 이단과 교회와의 투쟁 때문 에 사도신경을 성문화 하여 확정하게 되었다. 이 신경은 사도들의 신앙 에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은 주후 200년경부터 세례식을 거행 할 때 사용하면서 부터 시작이 되었다.
세례를 받는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앙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세례를 위한 신앙고백이 점차 발전하여 360년에 아리안 고백에서 처음으로‘음부로 내려 가사’가 첨부되었고 750년경에 정식으로 삽입이 되었다. 또한 ‘성도의 교제’란 말은 650년 이후에 삽입되었으며‘영원히 사는 것’이란 말은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 사용한 신경(信經)에서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 경은 니케아시대에서부터 일반적으로 믿어오던 것을 좀 더 보충하여 세례문답 뿐만 아니라 영지주의(Gnosticism)이단을 위시한 여러 잘못된 교 리를 구별하기 위한 정통적 신앙고백으로 점차 사용하게 되었다.
2. 콘스탄티노플 회의(The Council of Constantinople, 381)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교리는 확정지었으나 성령(聖靈)의 신성(神性)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81년에 제2차 세계 기독교 총회의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니케아 신경’(Symbolum Nicaenum)을 재확인하고 또한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가 정리되고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 고백이 되었다. 성부,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다. 다만 위(位)로 구분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계획 하신분이시고 예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신분이시며 성령님은 예수님께 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일을 하신다. 이렇게 하여 삼위일체 교리가 콘스탄티노플회의에서 온전히 정립되었다.
3. 칼케톤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edon, 451)
325년 니케아 공의회의 핵심은 삼위일체의 본질에 관한 것으로 성 자와 성부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이 논쟁을 통 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바로 규명한 서방의 아타나시우스의 신조를 인정하여 정통 교리로 채택하였 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삼위일체의 제2격인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어떻게 그의 인성과 관계될 수 있는가? 진실로 하나님이신 그 가 어떻게 동시에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또한 그가 어떻게 인간적 조 건하에 살 수 있으며 사람의 형체로 나타났는가?”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의 문제였다.
이 문제로 인하여 451년 제3차로 세계 종교회의가 니케아 근처의 칼케톤(Chalcedon)에서 약 600여 명의 교회 감독들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다. 칼케톤 회의에서 논의된 사항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신성(神性)의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성(人性)을 가진 참 사람으로 교회가 신앙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두 성품은 그리스도 자신의 관계에 관하여 혼돈이 없고 변함이 없고 분리가 없고 불화가 없는 두 성품을 가지 셨지만 한 인격이시다.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면 근본 주의로 흐르기 쉽고 사람으로만 생각한다면 신(新) 신학으로 흐르기 쉽 다. 그러나 그리스도 자신의 증언과 그 인격의 생활에서 보여 주듯이 그리스도는 분명이 하나님이요 사람이시다. 그리스도를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주의적 전통 신앙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 논쟁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부터 시작되 었고 451년 칼케톤 공의회에서 126년 만에 끝났다. 칼케톤 공의회가 확정한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고백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래서 이후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단으로 정 죄되었고 그것이 기독교 2천년 교회 역사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만큼 여호와의 증인 등 이단들로부터 끊임없 이 공격을 받아 온 교리도 없다.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의 모든 출판물 을 통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이단교리’, ‘비성경적 거짓 교리’로 단정한 다.(Make Sure of All Things, p.386)
구약은 하나님을 나타낼 때 복수로 언급하고 있다.(창 1:26; 3:22; 11:7) 마태복음 3:16,17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말씀하셨고, 아들 하나님은 지상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 하나님은 비둘기의 형태로 내려오셨다. 이것은 한 하나님의 신격 안에 세 분이 존재하시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만일 삼위일체 교리가 인간의 이성(理性)으로 이해되고 설명 될 수 있다면 그 분은 우리와 같은 인간 이상이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 자체는 신비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이 해되지 않는 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 하신다. 믿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열린 위치
|
'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빙크(H.Bavinck)의 삼위일체론 (0) | 2021.03.05 |
---|---|
니케아 -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바른 삼위일체론 (0) | 2021.02.10 |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를 위하여김병훈 교수 / 합신대 (0) | 2020.08.31 |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 유해무 (0) | 2020.08.11 |
헤르만 바빙크의 삼위일체론 (0) | 2020.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