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헤르만 바빙크(H.Bavinck)는 그의 [改革敎義學](Gereformeerde Dogmatiek)1) 제 2권 31절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를 ‘거룩한 삼위일체’(De Heilige Drieeenheid)라는 제목 아래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삼위일체 논의에 대한 접근방식은 이른 바 ‘綜合的 源泉的 方法’(synthetische, genetische methode)2)을 취한다. 그래서 그가 논의하고 있는 내용의 구조를 살펴보면, 먼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다루고, 그 후에 역사의 지평 속에 나타난 여러 흐름들을 관찰한 후, 그들을 비교 평가하면서 자신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의 관심은 삼위일체론과 관련하여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 나타난 다양한 흐름들을 고찰하고자 하는 데 놓여 있지 않다. 다만 개혁신학의 巨星, 헤르만 바빙크의 주장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고자 함에 촛점이 놓인다. 물론 그의 사상이 역사 가운데 나타났던 여러 주장들과의 함수관계 속에서 형성된 것이 사실이요, 그래서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적인 배경을 폭 넓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이지만, 이는 본 논문의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관점들은 가능한 한 축소하면서 바빙크 자신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에 더 큰 관심을 두려고 한다. 이와 같은 목적 때문에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그의 글을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다만 본 논문의 목적에 부합하는 주제들만을 선택적으로 다룰 것이다.
II. 우선 논의되어야 할 문제
삼위일체 교리의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바빙크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 세 가지를 상정한다: ① 첫째는 본질(wezen)이란 용어의 의미 문제이고, ② 둘째는 位(persoon) 혹은 位格이란 표현이 지니는 의미의 문제이며, ③ 마지막으로는 본질과 위격, 그리고 위격 상호간의 관계와 관련된 문제들이다. 그런데 바빙크가 상정한 이 세 가지 문제들은 엄격히 구분하여 논의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떼어 내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바빙크 자신도 서로 다른 주제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 내용에 있어서는 중복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제 [개혁 교의학]에 진술되어 있는 논의의 순서를 따라 바빙크 자신의 견해를 잠시 살펴 보려고 한다.
첫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바빙크가 이해하는 ‘본질’이라는 용어3)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가 이해했던 철학적 ‘우시아’(ousia)개념4)과는 달리 삼위 모두에 의해 동등하게 소유되고 있는 신적인 성질을 의미하며, 그것은 또한 본질상 지음받은 존재와 구별된다.(G.D.II.305) 삼위의 모두 혹은 각자 안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신성이며, 따라서 하나님 안에 하나의 영원하고 전능하며 전지한 성질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정신, 하나의 의지, 하나의 능력을 지니신다. 이처럼 본질이란 용어는 신적 통일성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G.D.II.306) 그리고 이 통일성에 관하여 바빙크는 인간사에서 처럼 계약적이거나 윤리적 성격의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며, 또한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G.D.II.306f.)
삼위일체론의 영광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일성이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요구하는 데 있다고 강조(G.D.II.307)하는 바빙크는 두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位’(persoon)라는 표현5)을 신적인 본질 안에서 삼중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서로 병립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아니하고, 그 전체로서의 충만한 신적 본질이 각자에 의해, 그리고 모두에 의해 소유되는 방식으로, 각자 안에서, 각자를 통해 그리고 각자를 향해 있는 셋의 서로 구별되는 존재방식의 존재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빙크는 이해한다. 신성이란 단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며, 또한 각 位 위에, 옆에, 그로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각 위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각 위 안에서 전적으로 또한 수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각 위는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구분되어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각 위는 동일본질인 것이다.(G.D.II.306)
세번째 문제로서 본질과 위격, 그리고 삼위 사이의 관계와 관련하여 삼위를 단지 본질의 현현양식들로 볼 것이 아니라,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존재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바빙크는 주장한다.(G.D.II.309) 즉 ‘위’라는 용어로써 함의되는 것은 한 신적 존재가 삼중의 존재사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G.D.II.309) 삼위는 그들의 영원한 내재적 관계에서 서로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의 존재라는 사실에서, 그리고 아버지되심(agennesia), 아들되심(gennesis) 그리고 나오심(ekporeusis)이라는 그들의 위적 속성 들에 의해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다.(G.D.II.310f.)
삼위일체로서의 존재양식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속한다. 그 점에서 인격성이란 하나님의 존재 자체와 동일하다. 만일 본질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속하고 인격성은 단지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속한다고 하면 삼위는 결코 하나의 존재를 이룰 수 없게 된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과 인격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각 위는 전체 존재와 동일하고, 다른 두 위를 합한 것이나, 세 위 전체와도 동일한 것이라고 바빙크는 말한다.(G.D.II.311) 그는 피조물에게는 이런 일이 없음을 말함(G.D.II.311)으로써 삼위일체론의 불가해성을 논리전개의 전제로 삼고 있다.6) 인간사에 있어서는 한 인격이 세 사람과 동일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성부나 성자 각각보다 더 큰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삼위는 모두 합하여도 각자와 동일하다. 둘 모두가 각각의 안에, 셋 모두가 각각의 안에, 그리고 각각이 전체 안에, 전체가 전체 안에 있고, 모두가 하나이다.(G.D.II.311) 따라서 본질과 위격 사이의 구별과 위격들 사이의 구별은 실체의 구별이 아니라, 상호관계의 구별이라고 바빙크는 말한다.(G.D.II.311)7)
하나님께는 신성과 인격성이 온전히 일치한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같은 뜻이고, 위대하시다거나 선하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그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위격과 같은 것이다. 삼위 각 위의 경우, 신적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됨의 상태에 온전히 속한다.(G.D.II.313) 아버지됨, 나심, 나오심은 신적 존재의 우연한 속성들로 간주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방식들이요,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영원한 내재적 관계들로 여겨져야 한다고 바빙크는 주장한다.(G.D.II.313)8) 삼위는 각기 구별되나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요, 삼위성은 단일성 안에서, 그것을 통해, 단일성에로 존재한다. 존재의 전개는 존재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존재의 동일성과 단일성은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삼위가 본질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지 않지만, 그들은 세 분의 독자적인 주체들, 휘포스타시스 혹은 실체들이다.(G.D.II.313) 삼위의 위적인 구별은 그들의 내적 관계와 일치한다. 성부는 영원히 성부이시며, 성자도 영원히 성자이시고, 성령 또한 영원히 성령이시다. 각 위는 영원하고 단순하며 절대적인 방식으로 자신이므로,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며,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이들이 모두 하나님인 한, 그들은 모두 하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영원히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성부, 성자, 성령 곧 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라고 바빙크는 이해한다.(G.D.II.314)
지금까지 우리는 삼위일체론 일반론과 관련하여 바빙크가 주장하는 몇가지 입장들을 살펴보았다. 그의 주장은 역사의 지평을 성경이란 프리즘을 통과시킨 후, 잘못 굴절된 부분들을 교정하여, 분산된 광폭을 재 집광시킨 것 처럼 여겨진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빙크의 입장을 다시 한번 요약한다면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첫째, 본질이란 말은 삼위 모두에 의해 동등하게 소유되는 신적 성질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질이란 표현에 의해 삼위는 본질상 피조적 존재사실과는 구별된다는 점과 하나님의 하나 되신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2) 둘째, 位라는 말은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삼중적 구별의 존재사실을 가리킨다. 삼위는 서로 병립하거나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그 전체로서의 충분한 신적 본질이 각자에 의해 그리고 모두에 의해서 소유되는 방식으로, 각자 안에서, 각자를 통해, 각자를 향해 있는, 세 가지 구별되는 존재방식의 존재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3) 셋째, 삼위는 단지 현현양식들이 아니라,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존재양식들로서, 그들의 영원한 내재적 관계에서 서로 구별된다. 즉 아버지 되심, 아들 되심, 그리고 나오심이라는 그들의 위격적 속성들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삼위의 동일본질과 본질적인 통일성을 말하면서도, 삼위 사이의 구별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면 중 한편으로 치우쳤던 종속론과 양태론의 오류9)를 극복코자 했던 바빙크의 노력의 결과로 평가된다.
III. 삼위 각론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의 일반적인 면들을 살핀 후, 삼위의 각론으로 들어간다. 그는 존재론적 삼위일체 안에서의 존재 순서는 경륜적 삼위일체를 통해 신비하게 반영된다는 관점을 가지고(G.D.II.328)10) 성부로부터 설명을 시작한다.
1. 성부
바빙크는 성부의 위격적 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의미가 항상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 구별되기에 이른 헬라어 단어 ‘아겐네토스’와 ‘아게네토스’11)를 비교한다.(G.D.II.314) 성부의 위격적 속성은 소극적으로는 낳아지지 않으심(agennesia)이며, 적극적으로는 아버지 되심이다. 아겐네시아(agennesia)는 문자적으로 낳아지지 않음, 그래서 낳아지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 이를 시작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아게네시아(agenesia)와 혼동해서는 않된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아겐네시아’는 위격적 속성으로서 성부에게만 속하는 것임에 반해, ‘아게네시아’는 삼위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속하는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란 것이다.(G.D.II.315) 즉 ‘아게네시스’는 삼위 모두에게 적용되어, 삼위는 피조물적인 방식으로 존재케 된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하여 삼위는 모두 시간 안에 시작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고, ‘아겐네시아’는 존재 내의 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바빙크는 설명한다.(G.D.II.315) 여기서 그는 이에 대한 유비를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써 덧붙인다: “마치 아담, 이브 그리고 아벨이 같은 인간성에 참여하고 있지만, 각자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 인간성을 얻듯이, 하나님 안에 한 본질이 있지만, 그것이 삼위 속에 서로 다른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다.”(G.D.II.315)12) 바빙크에 의하면 이러한 ‘아겐네시아’는 소극적으로 단지 성부가 출생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 하나님의 본성과 관련하여서는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G.D.II.315) 이러한 이유로 제 이위에 대한 적극적인 관계를 함축하는 ‘성부’란 표현이 ‘아겐네시아’와 관련된 ‘아겐네토스’란 용어보다 제 일위의 위격적 속성을 훨씬 더 잘 드러내며, 또한 훨씬 더 애호된다고 바빙크는 말한다.(G.D.II.315)
성부의 아버지 되심의 의미를 바빙크는 몇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먼저, 성부의 아버지 되심은 그것이 인간들 가운데 존재하는 아버지 됨의 원형일 뿐, 그 반대가 아님을 바빙크는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때, 단순히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 됨의 일차적인 의미가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고, 단지 이차적인 의미 혹은 파생적인 의미에서만 하나님께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즉 하나님이 참되고 온전한 의미에서 아버지시란 것이다.(G.D.II.315) 이러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에서 인간들 가운데에서의 아버지 됨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바빙크는 말한다. 첫째,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버지 자신으로부터, 스스로에 의해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성부로부터 그리고 그에 의해서만 성자가 낳아진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유독한 것이다. 둘째, 사람에게 있어서의 아버지란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들은 또 아버지가 되기도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성부는 또한 성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절대적인 것이다. 셋째, 사람에게 있어서의 아버지됨은 현세적이지만,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영원하다. 성부는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이러한 아버지 되심은 시간 안에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관계이다. 넷째,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는 아버지 됨은 어떤 의미에서 우연적 관계로서 사람됨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다. 그러나 성부의 아버지 되심은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속하는 것이다.(G.D.II.316)
2. 성자
성자의 위격적 속성은 낳아짐(filiatio)으로 묘사될 수 있음을 바빙크는 말한다. 그는 이에 대한 이유를 성부께 대한 제 이위의 관계를 성경 자체가 말씀, 지혜, 로고스, 아들, 독생자, 하나님의 형상 등으로 표현하고 묘사하기 때문으로 보면서, 성자의 아들 됨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성자의 아들 됨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의 어떤 분리나 분할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의 출생이란 신체적이거나 물리적이거나 피조물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신적 출생에 대한 최상의 유비를 ‘思想과 言語의 관계’(in het denken en spreken)에서 찾는다.(G.D.II.317) 그 점에 대한 정당성은 성경이 성자를 로고스로 부르는데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영혼이 말을 수단으로 해서 그 자체를 객관화 하는 것 처럼, 하나님께서도 로고스 안에서 그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신다는 것이다.(G.D.II.317) 이런 유비를 통해 성자의 신적 출생을 설명하던 그는 그러한 유비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 일과 관련하여 성자의 아들 됨의 두번째 의미를 설명한다. 바빙크에 의해 지적된 한계란 과연 이런 유비가 모든 면에서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속속들이 합치될 수 있는지의 여부와 관련된다. 이는 소위 일반적 유비가 지니고 있는 성격으로부터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실체를 설명함에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그 유비가 적합성을 지니고 있으나, 또 다른 면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다. 즉 사람들이 하는 말, 즉 들리는 말은 물리적인 성격의 것이며, 그 자체의 존재 사실을 가지지 않는데 비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말씀이 그 자체의 존재 사실을 가지며, 성부는 이 신적인 말씀(로고스) 안에서 온전히 자신을 표현하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자의 아들 됨은 성부의 존재 곧 신적 본질로부터의 나심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성자가 성부의 뜻에 의해 無로부터 출생되었다는 아리안주의자들의 입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바빙크는 신적 출생에 대한 니케아 신조의 표현을 전거로 제시한다: 신적 출생이란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하나님,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 낳아졌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으신, 성부와 동일 본질의 아들을 낳으심”을 의미한다.(G.D.II.318) 이 문맥에서 바빙크는 성자의 피조성을 주장하는 아리안주의적 경향에 대하여 신적 출생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창조란 만들어진 것이 만든 자의 본질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본질과는 전혀 상관 없이 생성된 것임에 반해, 출생이란 낳아진 것이 낳은 이의 본질로부터 그래서 동일 본질을 가지고 나오는 것임을 바빙크는 강조한다.(G.D.II.318) 따라서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히 복되신 하나님이시다(롬9:5).
성자는 성부의 뜻에 의해 無로부터 시간 중에 나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영원에서 성부의 본질로부터 낳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성자의 나심이 성부의 의지나 능력과 상관없는 무의식적 유출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G.D.II.318) 이러한 성자의 나심은 아버지의 뜻과 온전히 조화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부의 뜻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왜냐하면 낳으심은 성부께 속한 사역이 아니라, 그에게 속한 본성이기 때문이란 것이다.(G.D.II.318) 그러므로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시다. 셋째, 성자의 아들 됨은 무시간적이고 시작과 끝이 없다는 점에서 영원한 성질의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서도 바빙크는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고 주장했던 아리안주의자들의 입장13)을 반박한다. 만일 성자가 영원하지 않다면 하나님도 영원히 아버지일 수 없게 된다.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은 시간의 과정 속에서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나심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성자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부의 신성과 그의 불변성 그리고 영원히 아버지 되심, 이 모든 일들을 부인하는 격이 된다고 바빙크는 말한다.(G.D.II.318f.) 그리고 또한 성자의 나심은 과거 영 단번에 이루어 진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영원히 이루어졌으며 또한 영원히 계속되는 행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바빙크의 지론이다.(G.D.II.319)
3. 성령
바빙크는 성령의 위격적 속성이 나오심(ekporeusis; processio) 혹은 내어 쉬어짐(pnoe; spiratio)으로 묘사될 수 있음을 말한다.(G.D.II.319) 그는 세번째 위격인 성령과 관련하여 그의 인격성(persoonlijkheid)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성령의 인격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성령의 신성을 믿는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G.D.II.319) 그런 까닭으로 바빙크는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했던 여러 종파들14)을 열거하면서 강한 비판의 의지를 나타낸다.
그는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부인하는 경향들을 유발시킬 수 있게 했던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로서의 해석학적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은 성부와 성자의 인격성이나 신성과 같이 우리 밖에서 우리를 향해 그렇게 객관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G.D.II.320)15)라고 함으로써 이러한 객관적인 명확성의 결여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를 제공한 것으로 본 것이다. 실로 바빙크가 분석한 바와 같은 이런 요소가 오해 발생의 외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가 좀더 분석한 바와 같이 오해 유발의 더 큰 원인은 이런 외적인 요인에서 보다 교회 자체의 이해 부족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교회가 그때까지만 해도 객관적인 구원사건에 비해 내적인 은혜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점차 교회 자체가 스스로를 반성하며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만이 아니라, 주관적인 조명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 구원의 객관적인 원리들 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원리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은 점차 고백되어진 것이다.(G.D.II.320)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에 대한 믿음은 철학의 산물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로부터, 곧 교회의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강조하는 바빙크는 제 삼위의 인격성 및 신성과 관련하여 그 구원론적 의미와 신론적 의미를 살핀다. 바빙크는 먼저 구원론적 관점에서 성령이 모든 “구원의 주관적 원리”(het subjectieve principe van alle heil)라고 말한다: “성령 안에서의 성령을 통한 것이 아니고서는 성부, 성자와의 교통이란 있을 수 없다.”(G.D.II.321)16) 구원을 예정하신 성부와 피뿌림으로 구속을 이루신 성자와의 교통이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다면 성령은 분명히 구원의 주관적인 원리가 되신다. 이 성령은 성자가 성부께 대해 갖는 것과 동일한 관계를 성부와 유지한다. 그는 또한 성자가 성부께 대해 그러하듯이 성자와 밀접히 연관된다. 그는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그의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본질에 있어서 성령은 성자와 동일하다는 것이 바빙크의 지론이다.(G.D.II.321)
신론적 의미에서도 바빙크의 논의는 계속된다.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에 대한 확신을 떠나서는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이라는 결론이 결코 나올 수 없다고 바빙크는 확신한다. 이는 곧 삼위일체 교리의 존립 여부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에 대한 고백에 전적으로 의존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 콘스탄티노플 신조(Het Symbolum Constant.)의 전통 속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을 바빙크는 밝힌다.(G.D.II.322)
성령과 관련되어 사용된 여러 동사들인, ‘주어진다’, ‘보내어진다’, ‘쏟아부어진다’, ‘숨쉬어진다’, ‘나온다’, ‘내려온다’ 등은 제 삼위가 성부, 성자와 유지하는 관계를 어느 정도 암시한다고 바빙크는 지적한다.(G.D.II.322) 사실 이러한 점들과 관련하여 삼위의 위격적 속성은 드러나는 것이다. 성령의 위격적 속성인 ‘나오심’ 혹은 ‘내어쉬어짐’도 성자의 위격적 속성인 ‘낳아짐’에서와 같이 신적 본질 내에서 일어나는 영원한 자기 전달의 행위이다.(G.D.II.322) 그럼에도 양자가 서로 구별되는 것은 대상에 대한 차이에서 나오는 것일 뿐이라고 바빙크는 지적한다: “이것(내어쉬어짐)이 출생과 구별되는 것은 ‘출생’은 성자에게 성부께서 자기 자신 안에서 생명을 가지도록 주는 것임에 비해, ‘내어쉬어짐’은 성령에 관한 것인데, 그 이상 자세한 것을 아는 일은 대개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7) 출생과 내어쉬어짐을 구별하고 있는 바빙크에게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인간의 한계를 겸손히 고백한다는 사실이다. 바빙크는 이 문맥에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을 인용하고 있다: “... 이 정도로 나도 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는 낳음과 나옴의 차이를 나는 모르고, 충분히 그 차이를 제시할 수도 없다.”(G.D.II.322)18) 얼마나 겸허한 태도인가! 신학도로서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를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바빙크는 성령의 나오심, 또는 내어 쉬어짐의 의미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대답 - ‘성자는 성부로부터만 나오시는데 비하여,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것’,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데, 그들에 의해 낳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다는 것’ - 을 신중하게 논의하면서 자신의 입장으로 받아들인다.(G.D.II.322)
지금까지 바빙크가 논의한 각론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결국은 삼위의 관계성 문제가 그 중심주제였다. 그는 삼위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은 용어들로써 묘사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했었다. 제 일위는 낳아지지 않으신 아버지시요, 제 이위는 나신 아들이시며, 제 삼위는 나오신 성령이시다. 즉 각 위의 위격적 속성은 제 일위의 경우, 낳아지지 않으심 혹은 아버지 되심이요, 제 이위의 경우, 낳아짐, 혹은 아들 되심이며, 제 삼위의 경우, 나오심 혹은 내어 쉬어짐이다. 그런데 바빙크가 구별한 삼위의 위격적 속성은 어디까지나 각위의 본질적 동일성을 전제하고 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와 같은 결론이 함축하는 교리사적인 의미는 아리안주의적인 종속론과 사벨리안주의적 양태론이 갖는 극단성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그들을 극복하며 성경적 진리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 했던 바빙크의 통찰력이 그의 신학작업에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IV. 소위 Filioque 논쟁
바빙크는 ‘성령의 나오심’과 관련하여 동-서방교회 사이에 발생한 신학적 차이점들이 어떠한 경위를 통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진술한다. 기독교역사 초기 2세기 동안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시는 성자와 더불어 성령의 나오심도 그와 유사한 과정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성령의 관계를 논의하려는 새로운 시도와 변화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바빙크는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와 갑바도기안 신학자들(Cappadociers)이 성자와 성령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나오신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에 대한 바빙크의 진술을 들어보자. 아다나시우스는 성령을 가리켜 성부의 신, 성자의 신, 혹은 그리스도의 신이라 불렀으며,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 로고스에 의해 보내어지고 주어지기 때문에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은 성자의 형제나 아들이 아니다. 그는 로고스가 성부의 아들이신 것과 같이 성부의 신이신 것이다. 그럼에도 성령은 아들을 떠나 존재할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성령이 지혜와 양자됨의 신이라고 불려지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성령을 소유한 자는 아들을 가진 것이며, 아들을 소유한 자는 성령을 가진 것이다. 아다나시우스는 특별히 성자께서 성부에 대해 그러하신 것 처럼 성령은 성자께 대해 특정한 관계와 순서, 그리고 특정한 성질을 지닌다고 하여 성령이 성자께 의존하여 있음을 분명히 가르쳤다. 그럼에도 그가 성령이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을 명백히 말하지는 않았다고 바빙크는 이해한다.(G.D.II.324)
갑바도기안 신학자들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취하였는데, 그들 역시 성령이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도 부인하지도 않았다고 바빙크는 말한다.(G.D.II.324) 이와는 달리 동방에서, 다메섹의 요한은 성령이 아들로부터도 나옴을 아주 명백히 부인하였다. 그의 견해는 동방교회의 교리로 남아 있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그를 주시고 성자를 계시하시는 성자의 신이며, 아버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door)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성자로부터 나오시며(uit), 성자로부터 그의 존재를 가진다는 개념은 그에게 분명히 거부되었다.(G.D.II.325)
서방교회는 성령의 나오심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임을 가르쳤다. 터툴리아누스(Tertullianus)과 힐라리우스(Hilarius)는 이 교리에 접근하였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이를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를 한 분의 불가분적 신성 안에 있는 관계들로 보았으며, 그리하여 성령을 성부에게만이 아니라 성자에게도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부, 성자라는 이름은 삼위일체에 있어서 두 위 사이의 상호관계를 나타낼 뿐, 그 두 위와 성령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관계가 인간의 말로는 적절히 표현될 수 없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도 성령의 원리이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시고, 그는 성령으로 하여금 성부로부터만이 아니라 그로부터도 나오게 하신다. 왜냐하면 성자는 그가 성자라는 한 면 외에는 그 어떤 것에서도 성부와 다를 수 없기 때문이다.(G.D.II.326)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서방교회의 신학은 그의 입장을 따랐으며, 제 삼차 톨레도 공의회 신조(589년)는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본문에 ‘그리고 성자로부터도’(filioque)라는 문구를 덧붙였고, 개혁자들도 그와 같은 전통을 따랐던 것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의 입장 차이가 별것 아닌 것 처럼 보인다고 말한다.(G.D.II.372) 그리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동방교회와 관련하여 그들이 명백하게 종속론을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점, 삼위의 동등성을 인정한다는 점, 또한 성령과 그 성령을 주시며 보내시는 성자 사이의 일정한 관계도 받아들인다는 점, 그래서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성부로부터 나오신다는 진술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었고, 서방교회와 관련하여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이 나오시는 것은 두 원리나 두 기원적 원인들로부터의 나오심이 아니라, 한 원리로부터 나오시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서방교회가 선언하였다는 점, 또한 서방교회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란 표현에 대하여도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들어 바빙크는 동-서방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입장 차이가 별 것 아님을 말한다.(G.D.II.372) 이와 같은 미소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아들로부터도’(filioque)라는 표현에 동방교회가 반대한 이유는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도 나오신다는 것을 수납한다는 것은 두 가지 원리, 또는 두 가지 기원적 원인을 인정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동방교회가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바빙크는 말한다. 그리고 이런 반론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께 종속되며 성부의 위격으로부터 삼위성이 도출된다고 이해하는 종속론(het subordinatianisme)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바빙크는 평가한다.(G.D.II.372) 바빙크의 평가를 직접 들어보자: “성부와 성자가 아무리 하나이고 동등하다고 생각된다하더라도, 동방교회는 성자와 성령에 대한 통일성과 동등성이 항상 성부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성부는 신성의 원천이요, 기원인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이런 추론방식에 따라) 만일 성령이 성자로부터도 나와서 성부 곁에 선다면, 통일성의 원리는 깨어지고, 일종의 二神論이 도입된다(는 것이다). 헬라 교인들은 하나님의 본질의 통일성과 위격, 인격의 삼위성을 신성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성부의 위격으로부터 이끌어 내었다.”(G.D.II.327)19)
여기서의 바빙크의 태도는 서방교회의 입장에서 동방교회의 약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동-서방교회 사이의 입장 차이가 별것 아닌 것 처럼 보인다고 평가하면서도 Filioque문제와 관련하여 야기될 수 있는 문제 - 만일에 종속론으로 기울어진다면 - 는 교리적인 혹은 윤리적인 영역에서 심각한 결과20)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V. 신적 본질 안에 있는 구별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삼위 간의 관계와 구별은 외적으로 드러나며,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말하는 바빙크는 외향적 사역들이 신적 존재 전체의 일이요, 창조와 구속에서 동일하신 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통일성 속에서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존재의 순서는 보존된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외적 사역 속에서 경륜적 구별 또한 그에 상응한다. 이 모든 외적 사역들이 비록 하나님의 존재 전체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의 각 위는 신적 본질 안에서의 그의 존재 순서에 상응하는 거기에 자리를 갖게 된다.”(G.D.II.329)21)
바빙크는 여기서도 다른 신학자들의 주장을 주의 깊게 살피는 일을 잊지 않는다.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 동등한 신성과 신적인 속성을 소유하면서도 삼위일체의 경륜과 관련하여서는 구별되는 속성이 삼위 각 위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했던 힐라리우스22)와 아우구스티누스23)와 아다나시우스와 바실리우스(Basilius)에게서 자기가 주장하는 바의 메아리를 듣는다.(G.D.II.329f.) 그러나 그는 이 진리를 오해했던 몬타누스(Montanus)로부터 헤겔(Hegel)에 이르까지의 여러 범신론적 경향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결정한다.(G.D.II.330)
모든 외향적 사역은 한 주체 곧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나 이는 삼위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 이유로 창조, 구속, 성화의 사역에서 각 위에게 특별한 지위와 질서가 부여되는 것이다. 성자는 자신으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일하신다. 이 모든 일들이 성부에 의해서 기원되고, 성자를 통해 수행되며, 성령을 통해 온전케 된다.(G.D.II.330) 그런 점에서 외향적 사역들은 삼위 안에서 분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역 중 어떤 것들은 특별히 한 위에게로 돌려지고, 또 어떤 것들은 다른 위에게로 돌려진다. 예를 들자면 창조는 성부에게로, 구속은 성자에게로, 성화는 성령에게로 돌려지는 것이다. 비슷하게 계시의 순서에도 성부가 먼저이고, 성자가 다음이며, 성령은 마지막이다. 이처럼 존재론적 삼위일체 안의 존재의 순서는 경륜적 삼위일체에서의 나타남의 순서에 아름답게 반영되는 것이다.(G.D.II.331)
성자의 나심은 성육신의 영원한 원형이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의 나오심은 성령 부어주심의 원형이라고 말하는 바빙크는 여기서 교부들이 삼위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내적 관계들에 관한 지식을, 시간 안에 반영된 경륜들로부터 이끌어 낸 일에 대해 그 정당성을 부여했다.(G.D.II.331) 사실 이 점은 바빙크가 사변적인 추론보다 구원역사의 추이 과정에 더 큰 관심을 둔 도르트 노회의 정신을 따른 것으로 평가된다.24) 영원과 시간 사이의 질적인 차이로 인해 야기되는 어려움이 놓여 있는 문제이지만, 바빙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
성자가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보내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육신이 되시기 위해 보내어졌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또한 성부께서는 역사의 과정 중에서 성자가 파송되어야 한다고 명하신 것이 아니다. 어떤 때 이런 일이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시간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자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것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므로 육신으로 나타난 분이 파송되었다고 하고, 나타나지 않은 분이 파송했다고 말하는 것은 마땅하다.(G.D.II.331f.) 성령의 나오심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성령은 그 누구에게 주어지기 전에도 이미 은사인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주어질 수 있게 나오시기 때문이다. 은사라는 말은 주어졌다는 말과는 다른 말이다. 은사란 주어지기 전에도 존재할 수 있으나 주어지기 전에는 주어진 것이라고 불려질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 안에 나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의 영원하신 나오심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G.D.II.332) 성부로부터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나오심이 있는 것은 그들을 통해, 또한 그들 안에서 성부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기 위한 것이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만유 안의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로 바빙크는 한 문단을 마친다.(G.D.II.332)
VI. 결론
지금까지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제 2권 31절 가운데 바빙크 자신의 견해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을 선택적으로 살펴 보았다. 이 논문에서는 다루지 못했으나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는 마지막 단원에서 그가 밝힌 것처럼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은 참된 종교의 핵심과 본질이며, 구원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한다면(G.D.II.346f.), 본 논문의 주제인 삼위일체론 보다 더 절박한 문제는 그리 흔치 않으리라 여겨진다.
바빙크의 삼위일체론을 읽으면서 가지게 되는 필자의 소감은 그가 교리사의 흐름을 마치 성경이란 프리즘을 통해 분산시킨 후, 잘못 굴절된 부분들을 제거하면서 분산된 광폭을 다시 집광시켰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본 논문을 통해서 그 점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본 논문의 주안점이 단지 바빙크 자신의 입장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하는데 놓여 있었고, 따라서 사적 고찰을 포함한 그의 삼위일체론 전부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삼위일체론에 대한 바빙크의 견해를 살피면서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는 교리사 가운데 나타났었던 두 극단적인 오류들 - 종속론과 양태론 - 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그는 본질이란 개념을 삼위 모두에 의해 동등하게 소유되는 신적 성질로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의 본질이란 삼위가 본성상 피조적 존재사실과는 구별된다는 점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함의한다. 그는 또한 位라는 표현이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삼중적 구별을 함의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삼위는 서로 병립하거나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 그 전체로서의 충분한 신적 본질이 각자에 의해 그리고 모두에 의해서 소유되는 방식으로, 각자 안에서, 각자를 통해, 각자를 향해 있는, 세 가지 구별되는 존재방식의 존재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삼위는 단순한 현현의 양식들이 아니라,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존재양식들로서, 그들의 영원한 내재적 관계에서 서로 구별되는 것으로 이해 되었다. 이처럼 바빙크는 삼위의 동일본질과 본질적인 통일성을 말하면서도, 삼위 사이의 구별을 동시에 언급했다는 점에서 아리안주의적인 종속론 뿐만 아니라 사벨리안주의적인 양태론의 오류를 동시에 극복하코자 했던 것이다.
같은 노력은 삼위의 각론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바빙크가 논의했던 각론의 중심주제는 삼위의 관계성 문제였었다. 그는 삼위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은 용어들로 묘사했었다. 제 일위는 낳아지지 않으신 아버지시요, 제 이위는 나신 아들이시며, 제 삼위는 나오신 성령이시다. 즉 각 위의 위격적 속성은 제 일위의 경우, 낳아지지 않으심 혹은 아버지 되심이요, 제 이위의 경우, 낳아짐, 혹은 아들 되심이며, 제 삼위의 경우, 나오심 혹은 내어 쉬어짐이다. 그런데 바빙크가 구별한 삼위의 위격적 속성은 어디까지나 각위의 본질적 동일성을 전제하고 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이와 같은 결론이 지니는 교리사적인 의미는 종속론과 양태론이 갖는 극단성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그들을 극복하며 성경적 진리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동일한 관심은 filioque문제에서도 발견된다. 바빙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표면상 이 문제를 둘러싸고 동-서방교회 간의 입장 차이는 별 것 아닌것 처럼 보여지지만, 그러나 그 배후에 미묘한 전환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탁월한 신학자로서의 예리함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filioque문제를 포함하여 삼위일체론 전체를 다루면서, 교의학을 이론을 위한 이론으로 마감하지 아니하고, 실제 삶의 영역에 나타날 파장까지 염두에 두면서 신학작업을 했다는 점에서 ‘삶을 지향하는 신학’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근본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관심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이론과 논리에 의해 함몰되는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는 없다.
바빙크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들은 그가 사변적인 추론보다 구원역사의 추이 과정에 더 큰 관심을 둔 도르트 노회의 정신을 따른다는 점에서 발견된다. 그점은 바빙크가 삼위 안에 존재하는 영원한 내적 관계들에 관한 지식을, 시간 안에 반영된 경륜들로부터 이끌어 낸 교부들에 대해 그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G.D.II.331) 그리고 또한 바빙크 자신이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해 인간의 한계를 겸손히 고백한다는 사실에서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어느 문맥에선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고백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 “... 이 정도로 나도 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는 낳음과 나옴의 차이를 나는 모르고, 충분히 그 차이를 제시할 수도 없다.”(G.D.II.322) 얼마나 겸허한 태도인가! 인간으로서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를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또한 그에게서 약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그 자신이 위에서 했던 고백에 철저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즉 신비를 신비로 남겨두지 아니하고 때로 인간적인 유비를 들어 설명하려는 시도들을 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그가 인간적인 유비의 한계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만일 바빙크가 그 자신의 관점에 더 충실하고자 했었다면, 아예 유비를 사용하지 않고 특별계시 의존적인 신앙에 철저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크게 염려할 만큼 일관성을 상실한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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