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론 차영배 교수

하나님아들 2021. 5. 19. 16:22

삼위일체론 차영배 교수

 

1序論

 

서론에서는 교리의 중요성과 불가이해성, 교리해석의 원리와 방법 및 내용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A. 교리의 중요성.(p11)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의 왕관으로서 교의학의 모든 부문을 총괄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라고 있다. 이 교리는 기독교의 심장으로서 모든 교인들의 신앙고백 속에 살아 움직이며, 교회의 예배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되는 축도가 시행되어지지 않는 교회가 거의 없을 정도로 신앙생활과 밀착되어 있다. 삼위일체론은 오직 기독교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신관으로서 다른 이교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삼위일체 교리의 신앙고백과 그 중시 여부는 기독교 전체의 존립과 사활이 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교리의 근본이며 새 언약의 실체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장로교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나타난 삼위일체론이 쉽게 이해되기 힘든 내용이 있긴 하나, 삼위신이 동질이면서 서로 다른 구별된다는 것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에서 삼위일체 이론의 존립여부에 교회존재문제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교리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B. 불가이해성.(p13)

삼위와 그 본체의 단일성, 혹은 유일신이 어떻게 서로 조화되는가 라는 것은 신비에 속하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으나 서로 모순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우리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싸여 심오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으로 계시된 만큼은 성경 자체의 가신성(可信性)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도 가신성(credibility) 있게 진술되어져야 한다.

유일신 혹은 삼위일체의 신이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은 중세 신비주의의 이른바 신의 침묵”(σιγη) 때문이거나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주장처럼 인식불가능성 혹은 절대자의 계시불가능 때문이거나 삼위일체 자체의 존재가 모순을 띠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 자체의 존재가 무한한 풍요와 그 존재가 그렇게 밖에는 달리 존재할 수 없는 영원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이해력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C. 교리진술의 원리와 방법.(p18)

오직 성경계시에만 의존하는 신앙에 입각하여 진술을 해야 한다. 지성적인 사색이나, 실천적인 이성 혹은 윤리 도덕이나, 감정 혹은 경험위주의 신학은 결코 객관적인 신학을 세울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은 삼위일체론을 설명할 때 사색을 피하고, 단순한 성경에로 돌아 오도록 경고하였다. 요컨대 성경계시만이 교리진술의 표준이요 원천이다. 전통적 신조와 교리를 참조하면서 사색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성경계시에 의존하는 신앙으로 진술하되, 삼위일체는 성부가 그 원천임을 간과치 않으면서 삼위의 본질이 단일함을 그 원리로 삼고자 한다.

 

D. 내용.(p22)

삼위일체의 교리는 신론을 총망라 한다. 먼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설(異說)을 주장한 아리안주의와 사벨리안주의를 취급코자 한다. 둘째로 교리의 정초와 그 성장과정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되며, 본질과 격위가 다루어지게 된다. 셋째로 삼위의 각론을 다루게 되며, 유일신은 누구이며 삼위의 일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루게 되고, 마지막으로 성경적 증거를 다룬다.

 

2 兩大 異端

 

A. 서언.(p25)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는 이단설은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보다 먼저 에비온파, 노스틱주의자들, 알로기파, 몬타누스, 아르데마, 데오도투스, 멜기세데기안, 사모사다의 바울루스 및 노에투스, 프락세아스, 에피고누스, 클레오메네스, 칼리스투스, 로마의 네 감독 등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1. 에비온(Ebion)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피난간 믿는 유대인들로 구성된 듯 함. 예수는 하나의 인간이었으나 수세시 성령 곧 신의 능력으로 큰 사명이 부여 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양자로 높여졌다는 것이다. 교부들은 이 에비온파를 양자론자들과 같은 이단으로 취급하였다.

 

2. 노스틱주의와 몬타누스

Menander는 예수를 보이지 않는 에온(aeon)세계에서 온 구세주라고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부인하였고 Kerdo는 구약의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여 성부와 독생자 예수를 서로 분리시켰으며, Basilides 최고의 신이 자기의 로고스 혹은 누스(νοΰς) 곧 그리스도를 육체의 모양으로 보냈으나, 고난을 당할 때 육체를 버리고 형체 없는 영으로 돌아갔으며, 고난 당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하는 적그리스도적인 말을 하였다.

Valentinus 많은 에온으로써 구성된 플레로마 가운데 오직 누스만 성부를 알며 그를 계시하며 이 플레로마가 예수를 구세주로 낳았고 그리스도 또는 말씀이라고 일컬어졌다고 하였다. 이러한 이원론적 노스틱주의는 결국 예수와 로고스를 분리시킨 아리안주의에 이르는 발판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Marcion는 예수 그리스도는 비실존적 환영이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일 수는 없었다고 하였으며 Montanus는 스스로 보혜사 성령을 지닌 자로 자처하였을 뿐 아니라, “나는 성부요, 성자요, 보혜사라고 하였다. 로마의 몬타누스주의자들의 일부는 양태론적 단일신론 때문에 大會의 논란이 되기도 했다.

 

B. 이단의 발단(p27)

1. 아리우스 이전의 단일신론(養子論)

a. 알로기와 데오도시안파 :

알로고이(άλογοι, 로고스를 부인하는 사람들)파는 몬타누스 운동을 신랄하게 거부함, 성령을 멸시함, 보혜사 성령에 관한 말씀이 담긴 요한복음의 정경성을 의심함, 성령에 의한 이적적 탄생은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선재(先在)나 영원한 발생(generatio)을 전제로 하는 로고스이심을 부인함, 예수의 인간적 지상생활에만 관심을 가졌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된 것으로 본 것은 아리안주의의 공통된 주장 그대로임을 보인다.

데오도투스(Theodotus, 190)알로기”(Alogi) 남은 찌꺼기”(άπόσπασμα)로 불리움, 예수는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나긴 했으나 하늘에서 오신 분은 아니며, 수세시 성령이 그에게 임함으로써 그리스도가 되었고, 남다른 권능을 받아 탁월한 일을 했으나 단순히 성령이 임했다고해서 그가 하나님이 될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는 못했다. 18:15, 8:40, 딤전2:5에 근거하여 이같은 역동적 단일신론을 주장, Victor감독에 의해 파문을 당했는데 그는 예수를 단순한 인간”(ψιλόν άνθρωπον)으로 본 양자론의 원흉이다.

b. 사모사다의 바울루스 :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인간으로 보았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후 神子로 승격되었다고 보았으나 그의 인격적 선재와 신성을 확실히 부인한 역동적 단일신론자였다. 바울루스는 무인격적으로 생각한 로고스와 예수와의 사이에 도덕적 내재적 관계만 인정했기 때문에 비록 초자연적 탄생을 인정했다 할지라도, 인격적 로고스(말씀)化肉을 부인하였고 수세시 점진적으로 신격화되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가 본성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신이 두 분 됨으로써 유일신이 무너진다고 생각한 그는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완전히 부인한 단일신론자로서 역사상 이단자로 낙인이 찍힌 인물이었다.

c. 루시아누스 : 사모사다의 바울루스에게서 배웠고, 알렉산드리아학파의 비유적 해석과는 대조적으로 如字的 解釋에 치중하는 학풍을 세웠다. 神觀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와 동등한 분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그 밖의 모든 존재는 피조물이다. 그는 로고스를 지으셨고, 세상에 보내사 사람의 몸을 가지게 했고, 계속 성장하여 완전한 영광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것은 사모사다의 바울루스의 사상과 비슷하나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 인간 예수가 주님으로 높여지 것이 아니라 지음 받은 로고스가 그렇게 된 것이다. 성자의 피조성, 성부와의 동질 부인, 예수의 성장 및 발전후의 불변성 등이 루시아누스의 신관이요, 그 학파의 주장이었다. 不動因子로서의 하나님을 내세움(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루시아누스는 성자가 성부의 본질과 완전한 동질이라는 사상을 품을 수가 없었다.

2. 사벨리우스 이전의 단일신론(樣態論)

사벨리안주의는 2,3세기에 노에투스, 에피고누스, 클레오메네스, 프라세아스 등에 의하여 싹트기 시작하였다.

노에투스(Noetus)는 그리스도는 성부 자신이시다. 아버지께서 친히 나시고, 고난을 당했으며 죽으셨고, 만약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면 그는 확실히 아버지이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다. 이신론도 피하고 그리스도의 신성도 주장하려고 하는 단일신론적 동기는 성경 출3:6 ; 20:2- ; 44:6 ; 45:5,14- ; 10:30, 14:8- ; 9:5에서 나왔다.

클레오메네스(Cleomenes)와 그의 추종자들 :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분은 바로 자신에게 자기의 영을 부탁하였고, 죽었으나 죽지 아니했으며 창에 찔렸으나 사흘만에 부활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은 단지 이름 뿐이고, 한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 아들의 모양으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 이것은 곧 노에투스가 주장한 성부고난설과 완전히 일치한다.

프락세아스(Praxeas)는 프락세아스의 단일신론은 성부와 성자가 완전히 동일함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성부 자신이 말하기를 동정녀에게 강림하사 그녀에게서 자신이 났고, 스스로 고난을 받았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만약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양에 불과하다면 아들의 모양이긴 하여도 아버지 자신이 고난을 당하였다.” - “파트리파시아니(Patripassiani, 성부 고난설자들)

 

C. 대표적 인물.(p36)

단일신론의 발단은 양자론부터 먼저 일어났지만 양태론의 대표적 인물인 사벨리우스가 아리우스보다 연대적으로 앞선다.

 

1. 사벨리우스(Sabellius)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한 한 하나님이며, 따라서 이 세 이름은 하나의 동일한 본체의 세 형태라는 것. 시벨리우스가 의지한 성경적 근거는 신6:4 ; 20:3 ; 45:6 ; 10:30 등이었는데 하나님은 오직 하나이며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라는 것이 중요한 내용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양태요, 한 국면이라고 생각한 그에게는 格位사이의 구별은 있을 수 없다. 삼위는 말하자면 각각 자기의 직무를 맡은 것과 같다. 한 사람이 대통령일 수도 있고 시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2. 아리우스(Arius)

오리게네스의 좌경적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루시아누스에게서 배운 후 알렉산드리아 학교의 스승이 되었다. 사모사다의 바울루스와 루시아누스 보다는 철저한 단일신론자였다. 그의 신은 비인격적 단일자 혹은 신플라톤주의적 일자이며 중간자로 보았다.

D. 양대이단의 특징.(p43)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는 이단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양자론이고, 다른 하나는 양태론이다. 양자론은 삼위를 위하여 일체를 희생시켰고, 양태론은 일체를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켰다. 이렇게 양자는 각기 고유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양자가 다 공통된 특징도 있는데 그것이 단일신론이다.

 

1. 단일신론(Monarchianism)

양태론자들이나 양자론자들이나 이들이 아무리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적으로 바로 말하지 않으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게 된다. 좌로는 아리안주의로, 우로는 사벨리안주의로 치우쳐 서로 상극인 것처럼 보이나 그 근본동기는 다 신을 한 분 되게 하려는 마음에서 나왔다. 양태론이나 양자론이 다 단일신론임은 명백한 사실일 뿐 아니라, 이것을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정도로 신을 단 한 분 되게 하려는 집념이 너무 강하다. 양자는 성자와 성령을 성부와 나란히 놓지 않고 혹은 피조물로 혹은 본체의 한 모양으로 보아 두 분의 완전한 신격을 무시함으로써 신은 언제나 한 분 되게 하되 오직 단일이 되도록 힘쓴 것이 그 특징이다. 삼위의 구별을 무시하거나 삼위 사이에 차이를 둠으로써 신을 단일되게 하려는 경향은 교회사에 항상 계속 되풀이해서 나타난 현상이다.

2. 역동성(力動性)

양자론을 역동적 단일신론이라고 하는 이유는 단순한 인간이 신적 능력에 의하여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입양)되거나, 혹은 로고스(말씀)나 영이 인간 예수에게 임하여 그를 양자로 채용하였다라는 생각 속에 삼위의 다이나믹한 움직임이 엿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 보인다. 양자론자들은 다 한결같이 예수는 피조물이었으나 수세시 성령을 받은 후 그리스도 혹은 아들로 승격되었고, 그 후 점진적인 성장을 하여 영광의 세계에 들어감과 동시에 혹은 부활 후에 불변의 위치를 차지했다는 역동성을 띠고 있는데 이것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영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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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초피조 : 루시아누스 - 로고스가 지음 받음, 아리우스

?? 탄생 : 1. 초자연적 : 사모사다의 부울루스, 데오도투스

? 2. 자연적 : 알로기파, 환전자 데오도투스

?? 수세 : 1. 그리스도로 승격 : 데오도투스, 바울루스

? 2. 하나님의 아들로 승격 : 알로기파, 바울루스(?)

?? 점진적 성장, 신격화 : 데오도투스, 바울루스, 루시아누스, 아리우스

?? 부활후 아들로 인정됨 : 1. 데오도투스의 제자(Asclepiodotus?)

2. 데오도투스 자신도 암시

 

3. 양태성(혹은 변태성)

역동성양태성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노스틱주의의 이원론을 극복하는 듯 하더니 결국 노스틱주의의 환영설로 전락하는 느낌을 준다. 영은 뼈와 살이 없지만 부활한 그리스도는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뼈와 살이 순간적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성령으로 오셨다고 하니, 변화무상한 주님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3세기 교부시대 양태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한 본체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는 형식 혹은 양태라기 보다는 성부 하나님이 아들로, 아들은 성령으로 그 모양을 바꾸는 변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 합리성

한 하나님이 삼위로 계신다든가 삼위가 일체라는 사상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자연과 이성을 초월한 삼위일체의 교리는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안에 나타났다고 한 사모사다의 바울루스의 역동적 단일신론을 합리주의적양태론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성령의 인격성은 부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역동적 단일신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영향하에 있었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스토아나 헤라클리투스의 사상적 사고방식을 닮았다고들 한다. 한 신이 세 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합리적인 것 같으나 그 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양태론자들은 신의 전능성에 호소한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얼마든지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E. 양대이단의 각양 유형(p43)

1. 아리안주의(Arianism)

아리안주의의 본질은 성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본체가 아니며 그보다 낮은 중간존재라는 것이다.

a. 유사성(Homoiousisnism)

니케아회의를 전후해서 드러난 것, 세가지 유형의 사상이 노출되었다. 아리우스와 루시안주의자들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 아다나시우스, 호시우스 등의 정통 중간노선 곧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였는데 가장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중간노선은 오리게네스의 우경적 사상을 이어받았는데 보통 종속설(從屬說)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종속설 중에도 성자와 성부의 동질을 인정하는 편이 있고, 이것을 부인하고 유사성을 주장하는 편이 있었다.

b. 태초피조설

유일한 단일신 곧 성부에게서 창세전에 아들이 지음받았고, 이 아들에 의해서 성령이 지음받았다는 것으로서 그 사상적 도식은 성부 성자 성령의 순서로 피조되었다. 아들은 신의 본질에서 분리된 피조물이기 때문에 가변적이며 이질적이고, 성부를 완전히 알 수 없고 완전히 볼 수도 없다.

c. 선재부인설(先在否認說)

종교개혁 당시부터 싹트기 시작, 아들은 화육(化肉)할 때까지는 존재치 아니했다는 것, 이로써 그의 선재를 부인한 것이다.

d. 유니테어리안이즘(Unitarianiasm) :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에 영국과 미국에서 거동시작, 죤 비틀, 요셉 프리스툴리, 데오필루스 린드세이 등이며 이들의 주장은 소씨니안주의보다 더 완강하게 삼위일체론을 부인한다.

 

2.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나 그것은 삼위일체론의 견지에서 본 학명이고 간단하게 양태론이라고 하며 이 양태론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신의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리안주의와 같이 성자와 성령을 신의 본질 밖에 두지 않고 그 안에 두되 삼위의 구별을 전적으로 무시한다. 이 양태론도 성부고난설, 성부속성설, 범신론적 계승설, 이원론적 가족설, 신지학적 양태설, 범신론적 과정설, 계시 양태설등 다양하나 모두 격위 사이의 영원한 구별을 무시한다.

a. 성부고난설(Patripassianism)

가장 처음으로 나타난 양태론. 노에투스가 먼저 주장. 한 본체가 삼위의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있다는 것이 특색이다. 이 성부 고난설 혹은 동질동격설은 Noetus, Praxeas, Hermogenes, Beryllus, Sabellius에 의하여 주장되었으나 교회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강력한 비평을 가했다.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 고난설은 드디어 자취를 감춘 것으로 추측된다.

b. 성부속성설(聖父屬性說)

마르셀루스, 포티누스.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 안에 있는 속성들로 본다. 하나님은 시간세계에서 아들과 영으로 변했다가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보았으며, 이것이 바로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며, 삼위를 단지 한 본질의 계시양태로 보았다. 성부속성설은 11세기에 니시비스의 엘리야를 통해서 약간의 수정이 가해져 나타났다. 삼위는 세 가지 본질적 속성, 곧 본질, 지혜(말씀) 및 생명이라는 것이다. 본질은 아버지이고, 지혜는 아들이며, 생명은 성령이다. 칼빈의 적대자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론을 극력히 반대한 이단자로 3권의 책을 써서 교회의 삼위일체교리에 대하여 예리한 비평을 가했고 적극적으로 자기의 이론도 전개했다. 전통적인 삼위신 교리가 그의 눈에는 삼신론으로 보였고, 삼위를 가리켜 머리를 셋 가진 한 흉물”, 음부의 三頭犬, 혹은 三分神등 입에 담지 못할 참람한 말을 거침없이 했다. 그 밖에 그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 칭의를 부인함으로써 다른 복음을 전하였다.

c. 범신론적 계성설

Floris의 요아킴, Bena의 아말릭, Dinant의 다윗, 종교개혁 당시의 재세주의.

성경적 참된 신은 내재자만도 아니고, 초월자만도 아니다. 그러나 이 범신론적 계승설 혹은 양태설은 우리 안에 있는 신을 참된 신으로 보았기 때문에 초월자가 배재된다. 이것은 인간을 신격화하고 내재자만을 높이는 신비주의 그대로이다. 신비주의는 주객의 구별이 없는 주관주의 치우치는 것이 그 특색이다.

d. 양태론적 가족설

진젠도르프는에 의하면 신 자신은 감추어져 은닉되었고 아무도 그에게 접근하거나 미칠 수 없고 침투하거나 통달할 수 없으나 자신을 그리스도안에서 계시하신다. 1위는 아버지이고 성령은 어머니이시며, 그리스도는 아들이신데, 이 가족 속에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아들의 신부로서 받아들여져, 온 가족을 이룬다. 이는 마치 하와가 아담의 갈빗대로써 지음받은 것처럼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옆구리와 피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받아 신부가 된다. 진젠도르프는 자신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노스틱적 이원론에 입각한 신관 영원한 내재적 삼위의 관게를 간과한 점 성령을 어머니로 본 것등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e. 신지학적 양태론

신비주의자 스웨덴보르크(Swedenborg)는 전통적인 삼위신론을 삼신론으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한 하 나님이 아버지로서 혹은 아들 혹은 성령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은 분명히 일위 삼양설이다. 삼위의 상호관계를 영혼, 육체 및 영육의 상호작용으로 본 것은 신지학적 요소가 농후하다. 성부는 영혼이고 그리스도를 그 몸으로 본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영혼을 무시한 셈이다. 성령을 영육의 상호작용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도 성령의 인격성을 무시한 주장이다. 성령을 단순히 어떤 역사로만 보는 것은 성경이 그토록 많이 증거하는 그의 인격성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다.

f. 범신론적 과정설

뵈머, 슐라이에르마커, 쉘링, 헤겔 등은 범신론적 과정설 혹은 생성설을 주장하였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의 불변성(1:17) 신자신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성(딤후2:13)에 어긋남 피조물인 세계가 신의 아들일 수 없다 영원히 항상 충만한 신의 자기 상실이란 당치도 않은 말이다. 신은 어떤 과정에 의존치 아니하고 영원히 자존하신다. 만약 이러한 신의 영원한 자존성, 삼위의 생명의 충만함과 완전한 사랑, 무한한 지혜와 능력뿐만 아니라 그 영원성과 불변성이 부정된다거나 혹은 창세 이전의 삼위신의 영원한 존재 자체가 부인되면 신은 역사 속에 흡수되어 역사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변할 수 밖에 없다.

g. 계시양태설

신의 본질은 하나인데 삼위는 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모양이며, 성부, 성자, 성령은 이러한 계시의 모양(modi)에 대한 명칭에 불과하다는 것.

 

3. 이신론과 이위일체론

이신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의 경우 중 어느 하나가 이신론일 수 있다. 종류가 다른 신이 둘 있을 때. 두 격위 예컨대 성부와 성령이동일시되고 한격위(아들)가 성부와 비슷한 경우. 한 격위(예컨대 성자나 성령)가 피조물인 경우. ④ ②.의 경우 두 격위가 분리되어 일체를 이루지 못할 때. 두 격위가 경륜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속관계에 있을 때이다.

 

4. 삼신론과 사신론

Tertullianus, Hippolytus, Novatianus, Calvin 등이 다 삼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특히 사벨리우스와 세르베의 공격은 심각하다. 다음과 같은 정의에 저촉되면 삼신론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삼위가 모두 이질이라고 할 때 삼위가 서로 비슷하다고 할 때 단순한 인간 예수와 신의 능력으로만 보여진 성령이 각각 신격화 될 경우 삼위로부터 시작하여 그 일체를 꾀할 때 본체가 나뉘어 삼위로 분리되고, 본체가 사라지는 경우이다. 본질 혹은 본체로부터 출발하여 비성경적으로 삼위에 이르면 일위 삼양설이 아니면 사신론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격위를 본체나 본질(본성)쪽으로 끌어당겨 동일하게 하면 유니테어리안(단일신론자)이 된다. 이때 본체가 삼위에 완전히 흡수되면 삼신론이 되는데 일종 삼분신론을 말한다. 그러나 흡수되지 않고 나뉘어진 후에도 그대로 있으면 사신론 혹 사위일체론이 된다.

 

3장 교리의 정초와 발전(p94)

 

본장에서는 먼저 충성된 교부들이 어떻게 각종 이단의 자극를 받음으로써 성경을 깊이 상고케 됐는가 라는 것을 먼저 살피고, 정초작업 이전과 그후에 있었던 교량역할을 한 신학을 검토한 후 이레네우스의 성경 및 주경신학적 정초작업의 시작과 테르툴리아누스의 본격적인 정초작업을 거쳐 교회 전체의 관심아래 니케아신조가 작성 공고됨으로써 어떻게 그 정초된 교리가 발전했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A. 이단으로부터의 자극.(p94)

삼위일체론의 골격은 기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칠 때 즉각적인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 교리가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먼저 노스틱 이단과 마시온의 이원론적인 우주관과 성경관에 자극을 받았고 또 교회 자체로부터 나오는 성장에의 욕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B. 교리정초에의 교량.(p100)

1. 유스티누스(Justinus)

그리스도는 만물의 시작이요, 만물보다 먼저 나셨고 성령의 모든 능력이 그에게 넘치며, 로고스의 씨가 그 안에 있고, 인류를 신격화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으므로 자신이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는 단지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격위로서 선재하신 로고스이시며,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지만 성부에게 종속되며 성부 다음으로 가장 큰 제일능력이다. 유스티누스에게는 첫째 성령론이 약한 것이 흠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의 본체론적 관계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의 사역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둘째 신관이 헬라의 철학적 영향이 있는 것을 간과 할 수 없다. 성자를 제이신으로 본 것이라든지, 성부를 은닉된 신으로 본 것 등은 확실히 철학적 영향이 있음을 보인다.

2. 오리게네스(Origenes)

처음으로 아들의 영원한 나심을 말함으로써 삼위일체론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 생산의 결과로 나신 아들의 신성이 성부의 그것과는 정도가 낮은 신이다. 이것은 변증가들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보이며 그의 신관 중 큰 결함의 하나로 꼽힌다.

 

C. 이단의 定礎.(p109)

1. 속사도 교부들

속사도 교부들은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여기지 않고 그 피조물을 초월한 독특한 위치에 있는 분으로 보았다. 또한 성부와 그리스도와 성령이 단숨에 불리워졌다. 성령에 관하여는 적게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부, 성자와는 구별되며 나란히 놓여졌다.

2. 이레네우스(Irenaeus)

노스틱이단의 신관을 비판하고 성경 계시대로의 신을 찾고자 했다. 그는 성부를 성자와는 대조적으로 불가견적 은닉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도, 노스틱이단과는 달리, 아들 안에서 보고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항상 성부를 유일한 하나님으로 본 것. 우리를 구속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을 나란히 열거한다.

3.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처음으로 적절한 신학적인 용어를 구사하면서 삼위일체론의 골격을 세움으로써 본격적인 정초적업이 시작되었다. 프락세아스의 성부고난설을 논박하는 가운데 삼위일체론을 구축했기 때문에 처으부터 끝까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의식하면서 자기의 신앙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는 각각 구별되면서도 하나”(unum)라고 하였다.

 

D. 이단의 발전.(p125)

1. 니케아 이전

속사도교부들, 이레네누스, 테르툴리아누스, 노바티우스 등을 통해서 그 정초가 놓여진 삼위일체교리는 노바티아누스 이후 약 70년만에 처음으로 열려진 니케아 대회의 신조에 의하여 한 걸음 더 발전하게 되었고 그 후 아다나시우스의 필사적 투쟁과 콘스탄티노플대회의 신조 및 힐라리우스의 삼위일체론에 의하여 니케아 신조가 더욱 구체화 혹은 더 견고하게 성장해 나갔다.

2. 니케아 신조

325년 니케아에서 콘스탄틴 황제의 소집으로 약 318명의 감독들이 모여 결의한 삼위일체에 관한 중요한 신조. 니케아 신조는 종속론을 극복하였다. 성자는 성부와 동질이라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가 서로 구별되나 동질이라는 용어로서 신성의 단일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니케아 후로는 삼위일체 교리가 하나의 독립된 가치와 신학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오직 하나의 본질개념이 용납되었다.

3.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노스틱주의의 영향으로 종래에 있었던 우주론적 본체론과 기독교적 신관의 혼합을 완전히 추방하고 아리안주의 속에 스며든 신과 세계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인한 중간존재들을 물리쳤다. 삼위는 참으로 구별되나, 한 본질이 삼분된 것이 아니며 한 본체에 대한 세 가지 명칭이 아니다. 성부는 오직 성부이며, 성자는 오직 성자이며, 성령은 오직 성령이시다. 이 삼위는 다 한 본질이고 하나의 실체이며, 동일한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삼위는 서로 상관하며 각각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은 일체를 이룬다.

4. 콘스탄티노플 신조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와 그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다.

 

 

4 장 교리의 정립

 

A. 힐라리우스(Hilarius). (p141)

1. 그의 신학의 위치와 원리

서방교회의 아다나시우스로 불리워지고 있다. 그는 삼위일체교리를 증병하기 위하여 예증이나 비유를 드는 일이 거의 없었고 도리어 이것이 불충분하다고 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관념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2. 유일신과 성부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은 고립되거나 고독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특히 강조했다. 힐라리우스는 신의 본질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성부 곧 유일신으로부터 출발하되, 성자의 신성이 이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강조함으로써 유일신을 옹호했다.

3. 성자의 나심

성자의 나심”(發生)을 강조하며 성부와의 동질을 증거했고, 이로써 아리우스의 성자피조설과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물론 아리안들(Semiarians)의 유사론을 비평하는 무기로 삼았다.

4. 성령

성령은 인격적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함께 우리에게 역사하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에 관한 신앙고백을 할 때 고백의 대상에서 성렬이 제외될수 없다.

고전 12:4-11을 인용하고 성령의 기원과 역사 및 그 능력에 관하여 설명한 뒤 이러한 귀중한 은사를 신자는 모두 받아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성령의 인격적 사역이 다른 격위와 구별된 것과 그 특수성을 지적하면서도, 성부와 성자와 나란히 성령을 동등하게 고백치 않으면 교리전체가 무너진다는 것을 강조했다.

5. 삼위의 일체

삼위가 일체임을 강조함으로써 모든 이단을 물리친다. 삼위는 본성으로 하나이다. 만물이 성부에게서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 성령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삼위 하나님은 그 본질이 하나이다.

 

B.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p176)

1. 그의 삼위일체론

그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적 새체가 농후하다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성자의 나심이나 성령의 나오심을 본질 혹은 삼위일체 자체에서의 유출이라는 부분을 읽을 때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이 뚜렷한 것처럼 보인다.

2. 유일신과 성부

본질적 삼위일체론자. 성부만 불가견이 아니고 삼위가 다 불멸이며 불가견이라고 함으로 은닉된, 감추워진, 불가견적인 성부로만 주장되어 온 종래의 사상이 부정된 것이다.

3. 성자의 나심과 성령의 나오심

성자는 성부와 함께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며, 성령은 성부와 동등하다. 성부만이 아니라 성령도 불멸이다.

4. 삼위의 동질과 구별

그는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격위로 계시는 것은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면서도 전자는 자신과만 관련된 것 곧 독자적으로 쓰여진 것이고, 후자는 상대적으로 쓰여졌다고 보았다.

5. 삼위의 본질과 그 자체

삼위는 나누어질 수 없는 동등한 한 본질을 소유하고 이 본질 자체는 한 하나님으로서 불멸, 불생, 불가견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삼위일체론 제1권 벽두부터 삼위일체라는 말에 최고라는 말로써 수식했고, 3권에 와서는 트리니타스”(삼위일체 혹은 삼위자체를 가리킴)하나의 最高至高善이신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6.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아웃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흔적을 먼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찾고 있다. 삼위와 그 일체의 흔적이 사랑속에 보인다. 사랑하는 분이 계시고 사랑을 받는 분이 계시고 사랑 자체가 있다.

 

C. 아다나시우스 신조(p202)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비교해 볼 때 특히 다음과 같은 사실이 주목된다. “trinitas”(삼위 혹은 삼위일체), “unitas”(일체), “substantia”(본질), “divinitas”(신성), “persona”(격위) 등의 용어가 그대로 사용됨으로써 기독교의 의식구조 속에 교인들에게 이르기까지 着根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즐겨 쓰던 “relatio”(관계)라는 용어가 전혀 쓰여지지 아니하고 persona가 계속 사용되었다. 사벨리안주의가 강력하게 배격되었다. 삼위 자체 혹은 삼위일체 자체라는 철학적이고, 애매한 용어는 쓰여지지 아니했다. 삼위의 그 속성이 곧 그 본질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이 그대로 반복됨으로써 삼위의 일체를 강조했다. 삼위 밖에 또는 그 위에 어떤 본체가 있음을 示唆한 일이 전혀 없다. 성자나 성령의 성부에 대한 종속적 관계가 완전히 극복되었다.

 

D. 칼빈(p211)

칼빈(1509-1564)은 교부들 못지 않게 이단들의 도전을 받으면서 삼위일체론을 정립했다.

1.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며 성부와 동질이다. 성령의 신성에 관해서는 약술되었다. 이것을 문제시 한 자들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2. 성부 하나님만이 유일신이신 것은 아니다.

칼빈은 아리안 이단의 주장 곧 성부만이 유일신이다라는 사상을 철저히 배격한다. 그러나 그는 성부가 곧 유일신이다라는 것을 부인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것을 적극적으로 정립한다.

3. 본질의 단일성과 격위의 구별

교부들이 항상 주장한 바와 같이 칼빈도 신의 유일한 본질이 성부의 이름 아래 내포된 것으로 보았고 동시에 이 유일한 본질을 삼위가 다 공유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본질의 단일성에 의하여신은 유일하다. 그러나 이 유일독특한 신은 경륜의 비밀에 따라서삼위로 나누어진다.

 

E. 웨스트민스터 신조(p237)

121명의 신학자들을 포함한 151명의 회원들은 16483월에 공표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속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는 세 가지 주제가 고백되고 있음을 본다. 첫째, 삼위가 계신다. 둘째, 그 신성은 동일하다. 셋째, 삼위는 각각 구별된다.

1. 삼위가 계신다.

본체는 하나이나 삼위로 계신다는 말이 아니고 삼위가 계시는데 그 본질이 하나이다.” 본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가 영원히 실재하시니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2. 삼위의 신성은 동일하다.

삼위는 영원히 변치 않고 실재하신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초월하여 항상 존재하신다. 그러나 이 삼위의 신비 곧 그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은 셋이 아니라, 하나이다.삼위가 각각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일체이신 하나님은 유일독특하여 어떠한 단일신도 이에 비교될 수 없다.

3. 삼위는 서로 구별된다.

삼위의 명칭의 특유성에 있어서 삼위의 공통적이고 동질적이며 본질적 호칭은 하나님이지만, 그 이름들은 각각 다르다. 나아가 성부의 특유성은 성부는 그 누구에게도 속하거나 그 무엇으로도 구성되지 아니하신다(The Father is of none). 성부의 배후에는 아무도 없다. 성부는 그 누구에게서 나시지 아니하셨다(neither begotten). 이것은 곧 성자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성부는 나오시지 아니하신다(nor proceeding). 이것은 성령과는 구별된 특성임을 보임과 동시에 성부가 어떤 한 본체에서의 유출임을 배격하고 있다. 적극적인 특성으로 성부는 성자를 낳으셨고 성령을 보내신다. 이것은 성부에게만 있는 특유성인데 그 누구도 성부를 낳거나 보내실 수는 없다. 성자도 성령을 낳을 수는 없고 다만 보내신다. 또한 성자의 특유성은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셨다(The Son is eternally begotten of the Father). 성자의 나심은 영원부터”(from eternty)이기 때문에 時空制約을 받지 않는다. 성자는 성령을 성부에게서 보내시는 것이 또한 특유하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특유성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The Holy Ghost is eternally proceeding from the Father and the Son). 이 성령의 나오심은 성자의 나심과는 다르다.

 

결론(p245)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려고 하면 이해할수 없는 교리지만 믿고 이해할려면 이해할수 있는 교리이다. 이 삼위일체 교리로 인해 많은 이단이 등장하였으며 이로인해 교회는 많은 어려움 또한 겪어 왔다. 그러나 이 교리(삼위일체)교리는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엿볼수 있다고 본다.

아다나시우스, 칼빈의 삼위일체론 및 웨스트민스터등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을 지닌다.

아다나나시우스의 신풀라톤주의적 본질 개념은 온전히 자취를 감취었고 본질자체 혹은 삼위일체라는개념도 찾아 볼 수 없다.

서방교회의 양태론적 경향을 바로 잡았다.

성령의 나오심의 교리는 중세신학이 이를정립한 것을 칼빈이 그대로 받아들여 더욱 확립하였다.그러나 칼빈은 성자의 신성에 관한 성경적 증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부의 동질동절을 명백히 표현하였다.

칼빈은 교부들이 한결같이 주장한 유일신 곧 성부의 신학사상을 이용하여 아리안주의적 이단을 강력히 배격하였다.

칼빈은 성자의 신성과 성부의 동질, 동등을 강조하면서 아우그스티누스를 포함한 여러 교부들이 주장한 성부가 곧 유일신이라는 사상을 그대로 주장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간결하지만 삼위일체의 교리을 다 수용하고 있다.

 

거기에는 교리의 定礎發展 定立이 여실히 보일 때마다 갖은 이단을 물리치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옳은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하심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도처에 偏在하시면서도 항상 나오시는 보혜사이신 성령님께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세세에 영원무궁토록 돌리게 되기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