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1서 4장 16절 설교제목 : 사랑의 영성
<영성 시> 오늘 / 구상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알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요한1서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 한국교회가 상투적으로 하는 전도용어 중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상투적인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더랬습니다. 왜냐하면 도대체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일단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어법상 맞지 않는 구절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하느님은 인격적 실체, 즉 젊잖은 할아버지 형상인데 그 인격적 실체를 ‘사랑’이라는 추상명사로 정의하니까, 어법상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말은 “할아버지는 사랑이시다”고 한 것이니까, 어법상 잘 맞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이 “할아버지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는 뜻으로 쓰인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걸 뭉뚱그려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하니까,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기독교가 하나님에 대해서 인격적(人格的) 실체로 정의하는데, 사실 현대인의 사유방식에 있어서 인격적 실체로서의 신(神)은 대개 부정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극소수 열렬한 기독교인을 제외한 다수의 현대인들은 지구상을 다스리시는 저 하늘의 ‘젊잖은 할아버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둥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격적 하나님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이야기하니까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초월적 인격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초월적 인격의 속성이 ‘사랑’이라고 말하니까, 이건 뭐 도대체 공감의 여지가 전혀 없는 ‘죽은 언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책 이야기> 최근 저는 『노마디즘-천의 고원을 넘나드는 유쾌한 철학적 유목』(이진경 지음, 휴매니스트출판사)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들뢰즈와 가타리, 두 철학자의 기념비적 저서 『천의 고원』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이 참 훌륭합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셸 푸코는 들뢰즈의 저서, 『반 오이디푸스』의 서문에서 “21세기는 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찬사를 표했다고 하는데, 저 역시 그런 찬사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아니 우리 한국사회가, 혹은 현대인류가 들뢰즈의 철학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인류문명의 오랜 패악(悖惡)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마저 듭니다. 너무 지나친 칭찬인가요! 이 책을 읽는 현재 제 소감이 그렇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 이 두 철학자가 제시한 매력적 사상개념은 ‘리좀’(rhizome)입니다. 리좀이란 한 마디로 “시작도, 끝도, 중심도 없는 사고(思考)”입니다. 뿌리에서 시작해서 줄기를 거쳐 꽃이나 열매로 종결짓는 ‘나무형 사고’와는 달리, 그냥 하염없이 계속되는 ‘뿌리형 사고’, 그것이 리좀철학입니다.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 『노마디즘-천의 고원을 넘나드는 유쾌한 철학적 유목』에서는 리좀철학에 입각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성경의 명제를 아주 흥미롭게 풀어주고 있습니다. 그 풀이를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정확한 의미의 절대자라면, 그는 누구 한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지도 않을 것이고,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지도 않을 겁니다.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 대로 보내 주는 것, 애증의 감정에 끄달리지 않으며 모두를 사랑하는 것, 이게 바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의 사랑(Amor Dei)이지요. 사랑한다는 생각도 없이 사랑하는 것, 대상의 차별을 떠나 사랑하는 것. 따라서 이는 이미 미움의 짝인 사랑 - 정념적 사랑은 불같은 사랑만큼이나 불같은 미움이 수반되게 마련이지요 - 이란 개념을 벗어난 사랑입니다. 저는 이런 사랑을 “주체도 대상도 없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누가 사랑한다고 할 것도 없고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것도 없이 그저 인연이 닿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아니 만남 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 말입니다. 이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 모든 타자들에 대해 평등하게 마음을 여는 것을 뜻할 겁니다. 아마도 ‘나’라는 생각이 사라진 경지에 이른다면 그때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그런 사랑이겠지요.(『노마디즘 1, 404쪽)』】 저는 이 글이 어느 신학자보다 탁월한 ‘사랑에 관한’ 신비로운 성서주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만, 신적(神的) 사랑의 세계는 그런 차원이 전혀 아닙니다. 영성적 사랑의 세계에서는 주체도 없고 대상도 없습니다. 하나님(주체)가 당신(대상)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온 누리에 사랑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 그게 하느님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냥 다 사랑입니다. 아니 사랑이라는 말조차 필요 없는 사랑의 상태, 그게 하느님 사랑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온누리에 가득 차 하느님 사랑의 세계 속에서 사랑에 흠뻑 취해서 기쁘고 행복하고 편안하고 가볍고 … 무심(無心)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영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언어는 무심(無心)입니다. 무심은 사랑의 극치며, 사랑의 완성입니다. 무심의 사랑이라야 완전한 사랑인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사랑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부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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