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원 신학

그리스도교회와 환원운동

하나님아들 2018. 10. 16. 18:27

그리스도교회와 환원운동

조 동호목사

들어가는 말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상의 모든 교회가 신약성서에 나타난 대로 초대교회로 환원할 것을 주장하며 그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것을 환원운동이라고 부른다. 이 환원운동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추구하는 바 목적이다.

이 운동이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한국 땅에 소개된지도 반세기를 넘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원운동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운동인지에 대해서 선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이 운동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원운동을 성서로 돌아가는 운동, 특히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운동으로만 알고 있다. 환원(還元)이란 말이 그런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환원운동이 성서로 돌아가는 것뿐이라면, 마르틴 루터(Martin Luter)나 요한 칼뱅(John Calvin), 또는 마르틴 부쳐(Martin Bucer)의 종교개혁운동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환원운동과 중세기 종교개혁운동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이 글은 이 점을 밝히는데 있다. 환원운동이 무엇을 하는 운동인지에 대해서 선명하게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 환원운동의 발상지인 미국의 환원운동을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환원운동에 대한 정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회중을 위한, 회중에 의한, 회중의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 일치와 성서의 권위 회복과 회중주의를 표방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를 실천한다. 이 표어를 주제로 일치운동을 전개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서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것을 침묵한다"를 실천한다. 이 표어를 주제로 성서의 권위회복과 초대(신약)교회로의 환원운동을 펼친다.

이러한 운동은 원상회복과 하나님의 나라 운동의 관점에서 정의 내려 질 수 있다.

먼저 환원운동은 개혁이나 혁명, 또는 혁신과는 성격이 다른 원상회복운동이다. 이 운동은 첫째가 하나 되자는 운동이요, 둘째가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요, 셋째가 회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적인 교회정치 운동이다.

환원운동은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으로 미래에 나타날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이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이미 이 지상에 세워졌고, 불완전하긴 하지만 점차 그 완성을 향해서 한 거름씩 전진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선취(anticipation), 즉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된 삶을 미리 맛보고 체험하고 누리는 신앙 공동체라고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서 개개인이 누리는 행복한 삶과 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가정의 화목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회의 연합된 일치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앞당겨져 우리 앞에 전개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일치운동과 성서의 권위회복운동 그리고 교회정치의 회중주의 운동은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일치된 명칭아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앞당겨 끌어들이는 운동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전 세계의 교회가 하나임을 믿는다. 그리고 이 교회의 믿음과 실천을 위한 헌법은 오직 성서뿐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떤 조직체이기를 거부하고 교회일치와 성서의 권위회복에 힘쓰는 일종의 운동이기를 원한다.

환원운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고, 사도들이 지향했던 교회와 인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아래서 하나 되는 운동이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운동이다. 하나는 모든 것의 시작이요, 출발점이기에 개혁(reform- ation)이나 혁명(revolution)이나 혁신(renovation)이 형편에 따라서는 필요하겠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환원(restoration)이다.

중세 카톨릭교회가 인위적인 교리와 행실로 성서에서 몹시 이탈하여 타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 마르틴 루터나 요한 칼뱅과 같은 개혁가들이 나타나 '성서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전개했던 그 운동의 연장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환원운동이다. 성서로 돌아가는 운동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완성될 수 없는 지속적인 운동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자체가 교회를 찢는 운동 이였기에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회의 모습은 아집과 교파주의에 치우친 분열과 분쟁의 연속이었다. 종교개혁의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시정하고 고쳐 나가는 운동이 환원운동이다. 따라서 환원운동은 지속적으로 성서에 돌아가는 운동이요, 성서에서 만나는 운동이다. 성서가 말하는 바를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바를 침묵함으로서 모든 것에 사랑으로 하나 되는 운동이다. 성서에서 만나 하나 되는 운동, 이 운동은 비단 교회의 일치에만 국한되는 운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성이 회복되는 운동, 가족 구성원이 하나 되는 운동, 인간 공동체가 하나 되는 운동,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운동, 민족과 민족이 하나 되는 운동까지 포괄하는 운동이다.

환원운동의 출범

이 운동이 시작된 곳은 미국 동부지역이다. 환원운동은 두 다른 지역의 목회자들이 비슷한 시대에 발표한 두 개의 중요한 문서에 의해서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먼저, 1804년 6월 28일, 발톤 스톤(Barton W. Stone) 목사가 중심이 된 미국 오하이오와 켄터키주 접경지역에 퍼져 있던 15개의 교회들로 구성된 스프링필드 장로회가 해체를 선포하는 유언서를 낭독했다. 이들 15개의 교회들은 모두 부흥운동을 전개하던 교회들 이였다. 1800년 당시 남한보다도 조금 더 넓은 켄터키 주의 인구는 221,000명이었다. 이 중에 단지 10,000명만이 교인 이였다. 불과 4% 밖에 되지 않은 작은 숫자였다. 이러한 때에 이들 교회들은 체험 중심의 부흥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 교회들은 냉랭하고 인위적이며 율법주의적인 당시의 장로교회 조직으로부터 탈퇴하여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을 믿고 성서에 충실하며 민주주의적인 교회로 연합하기 위해서 스프링필드 장로회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교회들은 장로회 조직 9개월만에 해체를 선언하였다. 그 해체 성명서의 타이틀이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유언서}(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the Springfield Presbytery)[Barton W. Stone, The Last Will and Testament of the Springfield Presbytery (1804), reprinted by Lincoln Christian College Press, Lincoln, Illinois in 1983.]라는 것이다. 이 유언서 첫 조항에서 이들은 말하기를, "본 장로회는 죽고, 해체되어, 넓은 범위의 그리스도의 몸에로 연합하기 위하여 침몰되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오직 한 몸, 한 성령만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고, 이어지는 조항들에서는 "한 주님만이 계시므로 목사에 대한 높임 칭호인 Reverend를 쓰지 않겠다"고 하였고, "사람들은 성서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채택할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치리 할 법령이나 위임된 권위로 그들을 처벌할 권한을 영원히 멈춘다"고 하였다. 다른 조항에서는 말하기를, "복음사역을 위한 후보자들은 지금으로부터 열심 있는 기도로 성서를 연구하며,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인간의 전통과 세상의 초보적인 지식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로부터 부으시는 성령으로서  단순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자격을 얻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이 유언서는 목회자의 선택이나 책임은 물론 교회행정과 치리에 있어서 회중적이고 개교회 중심적일 것을 선언하였다. 또한 성서 한 권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인도자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피차 관용의 정신을 키우고, 기도에 힘쓰며, 분쟁을 줄이고, 시대의 징조를 살펴 구속의 날을 고대할 것을 강조하였다.

환원운동은 또한 1809년 9월 7일 발표된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에서 비롯되었다. {선언과 제언}은 미국 펜실베니아주 워싱톤군에 조직된 '그리스도인 협의회'의 총무였던 토마스 캠벨(1763-1854)이 초안하여 재정부장이였던 토마스 아체슨과 공동명으로 발표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대헌장이다. 이는 '선언,' '제언,' '부록' 그리고 '후기'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 56쪽의 소책자이다.

이 책자에서 강조된 내용은 성서의 권위, 그리스도인들의 일치, 그리고 신앙양심의 자유이다. '선언'에서는 '그리스도인 협의회'의 아홉 가지 결의 내용을 적었고, '제언'에서는 분열의 무서운 결과들을 지적하면서 분열을 멈추고 일치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면서 일치를 향한 13개조의 명제를 발표하였다. '부록'에서는 '제언'에서 주장한 특정 부분을 확대 설명하였으며,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도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후기'에서는 전도단 발기를 위해서 취해야 할 단계를 제안하고 있다. '제언'에 나타난 13개조의 명제(Thirteen Propositions)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핵심헌장이다.

{선언과 제언}이 빛을 보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토마스 캠벨의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1809년 8월 17일 버팔로에서 모였을 때에, 참석자들이 각기 다른 교파에 소속되어 있었고, 대부분 확정된 복음 사역에 있어서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위에서 지명한 신앙 협의체를 조직하는 것에 선포 이후의 목적들을 위해서 심사숙고후 전원합의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협의회를 구성하였고, 복음사역자인 토마스 캠벨의 도움으로, 그들 협의회의 중대한 목표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 21명을 지명하여 함께 모여 협의토록 하였다. 협의의 결과로 {선언과 제언}이 빛을 보게 되었고, 협의회의 비용으로 협의회를 위해서 1809년 9월 7일 이 문서를 출판하기로 하였다.[Thomas Campbell and Thomas Acheson, Declaration and Address of the Christian Association (Washington, Pa: Brown &Sample, 1809), reprinted by Lincoln Christian College Press, Lincoln, Illinois in 1983, p. 90.]

이와 같이 발톤 스톤 목사가 작성한 {스프링필드 장로회의 유언서}나 토마스 캠벨 목사가 작성한 {선언과 제언}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출범한 동기와 목적을 설명해 주는 가장 초기의 문서들로서 이들 문서에 나타난 사상은 한 마디로 교회의 일치와 성서의 권위 회복 그리고 교회의 회중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으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모든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 (또는 교회 공동체)의 지체로한 개교회 중심의 회중정치를 표방하고 있으며, 성서를 교회의 헌법으로 삼고 있다. 교리적으로는 성서가 말하는 것을 말하고, 성서가 침묵하는 것을 침묵할 것을 다짐한다.

환원운동의 실천

이런 중요한 환원운동을 전개하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엇을 믿고 행하는가?

첫째,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서가 말하는 이름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명칭으로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명칭은 성서적인 명칭일 뿐만 아니라(롬 16:16),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교회라 부름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마 16:16), 그 분을 생명의 구세주로 자신의 중심에 모신 사람을 말한다(롬 8:9).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 곧 그리스도의 소유됨을 말하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롬 8:1). 성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한다(롬 8:9). 이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며,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고전 12:27). 그러므로 이 공동체를 '0 0 0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지극히 성서적이다(롬 16:16). 그리고 오직 이 명칭 아래서 만이 전 세계의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통일된 국가나 단체나 조직의 명칭이 여러 개 일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의 명칭은 하나이어야 하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교회를 장로교회나 감리교회 혹은 성결교회나 침례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둘째,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떠한 인위적인 신조나 견해를 배제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성서의 신조를 구원하는 믿음의 조건으로 삼는다. 이 신조는 마태복음 16장 16절과 로마서 10장 9절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두 구절의 말씀에는 예수의 신성과 부활하심을 믿는 신앙고백이 나타나 있다. 성서 말씀대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하였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침례를 받기 전에 이 신앙을 고백한다.

구원하는 믿음은 성서 해석적인 결론에 의한 장문의 신앙고백서나 특정교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교리로서의 믿음이기 때문이다(딤전 4:1,6; 유 3; 갈 1:23). 교리는 사람에 따라 혹은 지식이나 지혜의 정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한편 구원받은 성도의 행실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로서 순종과 확신 속에 거한다는 사실을 성서가 증명한다. 이를 순종의 믿음이라고 성서는 말한다(롬 1:5; 16:26; 약 2:14-26). 믿음에는 구원하는 믿음과 순종의 믿음 그리고 교리로서의 믿음 이외에도 성령의 은사로서의 믿음도 있음을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고전 12:9; 13:2).

셋째,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성서의 회심을 실천한다. 사도행전 2장 38절의 말씀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침례를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례전으로 믿고 행하고 있다. 그리고 침례와 성만찬의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침례의 성서적인 원형은 그 방법에 있어서는 침수이며, 그 대상은 복음을 듣고, 믿고, 죄를 회개하고, 증인들 앞에서 신앙을 고백한 신자이다. 그리고 침례의 목적이나 의미는 죄사함을 얻고 성령을 선물로 받기 위함이다. 침례를 받고 거듭난 신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세례이해는 유아세례의 성례전적 가치를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참으로 좋은 현상이다. 한신대의 박근원 교수는 {기독교사상} 1991년 8월호에 실린 그의 "세례와 견신례의 의식적 가치"라는 글에서 20세기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유아세례야말로 서방교회 전통이 만들어 낸 최대의 과오라고 지적한 바 있고, 에밀 부르너와 위르겐 몰트만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또 그는 유아세례 제도야 말로 서방 기독교가 몰락하는 주요원인이며, 누수의 진원일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였고, 이런 서구교회의 모순이 그대로 우리 한국교회에도 전수되어 있기 때문에 서구교회의 누수현상의 전철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박근원, "세례와 견신례의 의식적 가치," {기독교 사상} (1991년 8월호, 통권 392호), 176-177쪽.]

구원과 침례와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4대 요소를 살펴봄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10절과 골로새서 2장 12절의 말씀을 요약해 보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례로," "선한 일을 위하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의 바탕으로, 우리의 믿음을 구원의 수단으로, 침례를 구원의 시간으로, 선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원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침례식은 마치 임산부가 아이를 출산하는 시간이나 사랑하는 남녀가 혼례식을 거행하는 시간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될 수 있다. 출산의 개념은 중생의 시간으로 혼례식의 개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간으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새 생명이 산모의 몸에서 10여 개월 성장해 온 점이나 혼례 전에 남녀가 상당한 준비기간을 갖고 서로의 사랑과 신뢰를 확인했다는 점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생명이 세상의 빛을 보는 때는 출산의 때요, 사랑하는 남녀가 공식적으로 부부가 되는 시간도 혼례 때인 것처럼 성화의 차원에서 중생의 거듭남과 죄씻음은 물론 칭의의 차원에서 의롭다 하심을 입는 공식적인 시간은 침례 때인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놀라운 역사는 물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오, 성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짐은 말할 것도 없다. 디도서 3장 5-7절과 고린도전서 6장 11절의 말씀과 에베소서 2장 8-10절의 말씀들, 그리고 로마서 3장 21절에서 5장 21절의 구원에 관한 모든 말씀들을 종합해 볼 때, 단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침례 안에서 재판장되신 성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포하시고, 대속의 보혈을 친히 흘리시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선물로서 이 때에 주시고, 의사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씻고 부패한 상처를 싸매시는 대 수술을 감행하심으로서 옛 사람을 물 속에 장사시키시고 새 생명으로 재생시키신다. 물론 이 수술작업의 근원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은총이요, 조건은 신자의 믿음이다. 따라서 침례는 단지 시간상의 문제를 해결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침례는 인간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이 되는 것이다.

{리마문서}[Faith and Order(WCC),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Faith and Order No. 111(Geneva: World Council of Churches, 1982), s.v. "Eucharist."]에서도 침례의 중요성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예수의 요단강에서의 침례는 죄인과의 연대(in solidarity with sinners)속에서 회개와 사죄의 표시로 시작되었고,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하심 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사죄와 구원의 채널로서의 침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새 생명의 표지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로의 편입과 하나님과 그의 백성사이에 맺어진 새 계약에로의 유입을 뜻한다. 따라서 죄의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에 동참한 자는 사죄함을 받고 새로 거듭나며, 성령으로 새로와 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으며,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탈출과 성별, 인종, 사회적 신분의 분단의 벽을 초월하는 새로운 인간성에로 회복됨을 뜻한다.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동시에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 치시고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적으로 미리 맛보게 하시며 그 나라를 완전하게 소유할 자로 보증하신다. 이런 뜻에서 침례는 하나님의 나라의 표지이며 침례를 받아 구원을 얻는 자는 항상 종말의 완성을 향해 변혁과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새로운 윤리적 의지(a new ethical orientation)를 부여받는다. 이 새로운 윤리적 의지는 순간적인 경험으로서 끊이지 않고 평생토록 지속되어야 할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이며 책임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한 자는 여기와 현재에 공동책임을 가지며, 인류의 해방자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증거한다. 이 공동증거의 현장은 교회요 세상이다. 마지막으로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리스도의 몸 즉 그분의 공동체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성도 상호간의 결속과 일치를 도모한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침례를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환원운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이미 2천년 전에 출범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완성될 그 날을 바라보며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침례를 통해서 비로소 시작된다.

넷째,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성서의 예배의식을 준행한다. 사도행전 2장 42절의 말씀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 속에 예배의 기본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다. 말씀과 교제와 성만찬과 기도(찬양)가 이들이다. 한 때 카톨릭교회는 말씀이 빠진 성만찬 중심의 미사를 드려왔고,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개신교회는 성만찬이 없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림으로서 절름발이 예배를 드려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카톨릭교회가 강론을 시작하면서 말씀과 성만찬이 있는 예배로 회복해 가고 있고, 개신교회도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매주 성만찬 운동이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난 200여년 동안 주장해 왔고 실천해 왔던 말씀과 성만찬 중심의 균형 있는 예배가 참 예배의 모습 이였다는 점을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 한 좋은 예이다.
성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성례이다(고전 11:23-25; 마 26:26-29; 막 14:22-25; 눅 22:14-15). 성만찬의 뿌리는 최후의 만찬에서뿐만 아니라, 예수의 공생애와 부활 후에 민중들과 함께 나누신 나눔의 식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리마문서}에 설명된 바와 같이 성만찬은 인류의 구속을 이루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이며(Eucharistia), 그리스도의 화목제물 되심과 십자가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이며(Anamnesis), 성령의 임재를 비는 제사이며(Epiklesis), 예배를 통해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연대하고 수평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연대하는 교제의 시간이다(Koinonia). 성만찬은 대신, 대인, 대물관계에서 교제와 친교를 통해서 서로 연대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신뢰를 쌓기 위해 마련된 화해와 나눔의 시간이다.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과 은총을 미리 맛보고 누리는 종말론적 식사이다(Anticipation).

"리마문서의 신학적 의미"를 설명하는 {기독교사상} 1991년 11월호에 실린 글에서 한신대의 박종화 교수도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고백적 행위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몸에 동참하는 기념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념행위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의 사건을 현재화하는 경험임과 동시에 종말에 이루어질 궁극적 구원의 축복을 미리 맛보는 선취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취와 현재화는 정치, 경제, 사회적 삶을 포괄하는 구원의 체험인 동시에 온갖 불의, 인종차별, 분열, 부자유 등으로부터 참 해방을 선포함으로서 맛볼 수 있는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의 식탁을 오늘의 우리의 삶 속에 현재화시키는 일이며,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 하시면서 이들과 연대하는 밥상공동체를 세우심으로서 종말론적 식탁공동체를 선취하신 것처럼, 지극히 작은 자와 연대하고 동일화시키는 일이다.[박종화, "리마문서의 신학적 의미," {기독교 사상} (1991년 11월호, 통권 395호), 62-65쪽.]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만찬을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환원운동은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이기 때문에 침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구성원이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식탁에 동참하여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을 미리 맛보고 누린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교회는 신약성서의 명령을 준행한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의하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아들 하나님에 의해서 창설되고, 성령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권능이 부여된 신성한 조직이다. 그러므로 이 공동체는 모여 예배하고, 교육하며, 교제하며, 흩어져 전도하며, 봉사하며, 구제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공동체의 목적은 첫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막 16:15; 행 8:4). 이 복음은 전도자와 개개인의 성도들에 의해서 전파되며, 어느 장소에서나 이루어진다(행 20:20; 5:42; 11:12-15). 둘째, 제자를 삼는 것이다(마 28:19). 제자 양육은 남녀노소 불신자들에게 접촉하여 교육을 통해서 이들을 신앙인으로 또는 전도자로 육성하는 일이다. 셋째, 침례를 베푸는 일이다. 침례는 복음을 듣고, 믿고, 회개하고,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자신의 구세주로서 입으로 고백한 자들에게 베푸는 성례이다(마 28:19). 넷째, 주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이다(행 5:20; 마 28:20). 이는 그리스도인의 계속적인 성장과 성결의 생활을 위한 것이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환원운동의 쟁점

미국의 환원운동은 지난 2세기동안 신약교회의 표준과 규범에 대한 증인으로서 존재해 왔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환원운동은 신앙양심을 얽어매는 신학체계나 신앙고백서, 교파적 교권, 또는 인위적인 전통을 배격해 왔으며, 알렉산더 캠벨이나 발톤 스톤과 같은 환원운동가들의 전통과 특성을 유지하며, 받들어 왔다. 이 전통의 맥을 이어 가고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들(Christian Churches/ Churches of Christ)이다. 미국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무악기, 제자 교회, 유악기,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고, 교세는 다음과 같다.

1987년 통계에 따르면, 전 미국과 캐나다에 유악기 교회가 5,756개에 110만 성도, 무악기 교회가 13,485개에 128만 성도, 제자 교회가 4,330개에 115만 성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 모두를 합하면 대략 23,571개 이상의 교회에 353만 이상의 성도가 되지만, 환원운동은 원래 또 하나의 교단을 시작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Philip L. Young, "The Restoration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1987," The Christian Standard(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April 24, 1988), p. 4; "The Strength of Religious Bodies in the United States," The Christian Standard(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June 6, 1982), p. 6.]

본질적으로 환원운동은 개신교적 성격도 카톨릭교회적 성격도 띄지 않았다. 개신교적이라 함은 분파적인 성격을 의미하고, 카톨릭교회적이라 함은 비 성서적인 성격을 들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의미에서는 다분히 개신교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구조와 제도적 사고는 당시의 개신교주의와 전혀 같지 않았다.

한편 환원운동은 카톨릭교회가 우주적인(catholic)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카톨릭적이었다. 동서교회의 분단과 종교개혁이전까지는 원래 그리스도의 교회가 단일 교회였고 우주교회였다. 이런 의미에서 분단이후의 카톨릭교회를 우주교회와 구분키 위해서 카톨릭교회 앞에 로마(서방)를 붙여 Roman Catholic Church라 부른다. 카톨릭교회는 환원운동가들에게 우주적인 교회로 믿어지기보다는 교권적 오만과 자칭 종교적 전통을 주장하는 사이비 교단으로 보아졌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알렉산더 캠벨은 1836년 카톨릭교회의 감독 퍼셀(John Purcell)과 1820년 장로교 목사인 워커(John Walker)씨와 그리고 1823년 역시 장로교 목사인 맥칼라(W. L. McCalla)씨와 공개토론을 가졌으며, 그들을 공박함으로서 성서적인 교회와 우주적인 교회를 추구하였다.

환원운동의 핵심논쟁을 이해하려면, 교회일치와 성서적 권위회복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환원운동은 종교개혁가들이 파괴한 우주적 단일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일치 운동이며, 성서의 권위를 회복하자는 복합적인 성격을 띤 운동이다. 이 두 가지 쟁점이 환원운동을 지난 200년 동안 지속시켜 온 추진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두 원칙의 맥락을 어떻게 조화와 균형 있게 이어 가느냐에 있다. 교회일치 쪽이 밀리면, 율법주의적이고, 분파적인 성향을 띄게 되고, 성서의 권위 쪽이 밀리면, 교리적 상대성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서의 권위에만 치중하고 연합을 소홀히 하는 탓으로 미국의 무악기 교회 형제들이 다분히 분파적이며 율법주의적이다.[1966년 자료에 의하면, 미국의 무악기 교회는 30여개 이상의 분파로 갈라져 있으며, 텍사스의 아빌레네(Abilene)에서만도 6개파가 서로 공박을 일삼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30개 이상 되는 그룹들은 서로 교제를 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1960년에 16,500개의 교회에 2백만 이상의 성도를 보유하였던 교회가 필립 영의 1987년 통계 자료에서는 13,485개 교회에 130만 성도로 감소되었다. R. J. Kidwell, "Psalms and Hymns and Spiritual Songs," The Seminary Review(Cincinnati Christian Seminary, Summer 1966); James D. Murch, Christians only: A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n.d.), p. 309.] 또한 제자 교회 형제들은 연합에 치중하고 성서의 권위를 소홀히 하기 때문에 진보신학 노선을 취하고 있다.[제자파 교회도 필립 영의 1982년 자료에 의하면, 1971년부터 1982년까지 10년간 916명의 교인수의 감소를 보이고 있고, 역시 필립 영의 1987년 통계자료와 대조해 볼 때도 꾸준히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환원운동의 핵심논쟁은 바로 이 두 가지 교회일치와 성서의 권위 사이에서 어떻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나가느냐로 집약될 수 있다.[James B. North, "The Current Challenge to the Restoration Movement," The Seminary Review(Cincinnati Christian Seminary, September 1986), pp. 105-122.] 유악기 교회도 성서만이 믿음과 실천의 유일한 길잡이이며 교회일치의 시금석으로 입장을 정하고 있으며, 성서의 권위에만 치중하고 있어서 교회 일치에 다소 소홀히 하는 편이다.

이 두 원칙에 추진력을 주기 위해서 환원운동가들은 세 가지 표준을 세웠는데, 그것들은 통일, 자유, 사랑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본질적인 것은 통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비본질적인 것은 자유로 하되, 본질적인 것이든지, 비본질적인 것이든 지간에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무악기 교회 형제들은 비본질적인 요소인 신약성서가 침묵하는 부분을 하나님께서 금지하는 것으로 믿어 본질적인 문제로 쟁점화 시켰고, 회중예배 때의 교회에서의 악기사용, 급료목회자, 성가대, 교회 공동체 사이의 협동, 교회 밖의 기구 구성문제(예: 선교부, 성서공회 등)등을 문제 삼음으로서 환원운동 100여년만인 1906년에 갈라서게 되었다.

제자 교회 형제들은 1900년대 초 자유신학의 물결에 합류하면서 진리의 상대성을 인정하였고, 성서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더 큰 비중을 두면서 진리의 통일보다는 상호이해와 협력을 기치로 연합운동을 전개하면서 결국 중도 그룹인 유악기 교회에서 갈라서게 되었다.

이와 같이 교회분단을 자초하고 일치를 훼방하는 주된 독소는 신학자료 권위문제와 성서해석학상의 차이에 있음을 보게 된다. 신학자료 권위문제는 유악기 교회나 무악기 교회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절대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절대진리로 믿는데서 출발한다. 그러나 유악기 교회 형제들은 초대 환원운동가들의 표어인 성서의 절대권에 통일을, 문화권에 자유를, 그리고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 임한다는 교회일치 사상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으나, 무악기 교회 형제들은 신약성서가 침묵하는 부분 즉 신약성서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금지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서 강한 보수성향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보수 성향에 치우치면 칠수록 교회일치는 멀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신약성서가 침묵하는 부분을 금지로 볼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허락으로 볼 것인지는 개개인의 신앙양심에 맡겨 본질적인 문제로 쟁점화하지 않는 것이 교회 일치에 매우 중요하다.  

진보노선을 취한 제자 교회 형제들은 성서보다는 인간의 이성에 더 많은 권위의 비중을 두게 되었고, 절대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상호이해와 협력을 도모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진리의 상대성의 인정은 곧 모든 사람이 교리에 관계없이 친교를 맺을 수 있다는 조건이 충족된다. 그러나 친교의 문을 넓혔음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약해져 가고 있다.

한편 신학자료 문제에 통일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해석학상의 원칙이 통일되지 않는 한 교리나 성서해석에 통일을 가져올 수 없다. 또한 신학자료의 권위문제와 성서해석학상의 문제가 통일된다 하더라도 신학방법론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유악기와 무악기는 성서 하나만을 믿음과 실천, 즉 신학과 윤리의 유일한 책으로 고집하는 반면, 제자파는 성서뿐만 아니라, 신학체계, 인간의 이성, 문화, 경험, 감정 등을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학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신학의 제반 문제점을 잠시 언급하고 계속 진행하고자 한다.

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훈련을 통해서 객관적인 지식을 추구하며 신앙인의 믿음과 실천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사명이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앙을 위한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이론적인 학문이며 실천적 그리스도인의 삶을 촉구하는 행동지침이다.

신학이란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들을 네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서 신학교의 전 과정을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대학과 대학원의 커리큘럼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대학간에 다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체로 성서원어, 성서주석, 교회역사, 고고학, 성서교리, 변증학, 윤리학, 기독교 교육학, 설교학, 선교학 등 다양한 학문의 분야에 걸쳐서 교과과정을 짜고 있다.  그리고 신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신학과목들은 크게 네 분야로 나누어 구별하게 된다. 이들 분야를 성서(주석)신학, 역사신학, 조직(이론)신학, 그리고 실천신학이라고 부른다. 대학원의 교과과정은 더욱 분명하게 이들 네 분야로 구분되며, 전공도 이들 네 분야 중에 하나를 택하여 하게 된다.

성서신학이란 주석신학으로서 신구약 성서를 기록 당시의 원어를 바탕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며, 성서 해석학, 성서 정경사, 고고학, 역사적 배경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역사신학에서는 교회사를 다루게 되는데, 사건 사고의 발생과 내용을 신학적인 측면에서 다루게 되므로 역사에 자신이 없더라도 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다. 조직신학은 뒤에서 더 자세하게 언급될 것이므로 일단 뒤로 미루기로 한다. 실천신학은 여러 가지 분야의 전공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교회성장학 분야, 선교학 분야, 기독교교육 분야, 교회음악 분야, 상담학 분야, 목회학 분야 등 다양하다. 아무튼 넓은 의미에서의 신학이란 앞서 열거한 모든 신학적 학문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둘째, 조금 좁은 의미로서 신학이란 말은 전공분야로서의 신학 즉 조직신학을 두고 말하기도 한다. 조직신학은 성서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에 대등한 말로서 교리학, 조직신학, 교리역사, 변증학, 종교철학, 윤리학 등을 다루게 된다.

셋째,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서 신학이란 말은 조직신학 또는 교의학을 두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보통 변증학 및 윤리학 분야와 함께 조직신학부의 삼개 전공분야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신학이란 말은 신학이란 말이 담고 있는 하나님(theos)과 학문(logos)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의 원뜻인 신론을 두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신론을 흔히 영어로 theology proper(신학 원뜻)라고 부른다. 이는 다른 많은 신학의 뜻과 신론을 구분코자 함이다. 신학의 내용은 다음의 표와 같이 분류될 수 있다.

이제 조직신학의 의미에 대해서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조직신학은 성서를 절이나 권별로 연구하기보다는 주제별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면, 성서가 죄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다루는 죄론 같은 특별한 주제를 체계 있게 연구하는 신학방법이다. 이와 같은 포괄적인 조직신학을 다룸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조직신학의 위치(loci)를 차지해 온 주제들을 다루게 되는데, 이들 주제들은 성서론, 신론, 인간론, 죄론, 기독론, 구원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조직신학을 성서신학 혹은 교의학이라고 명하기도 한다.

이들 성서신학과 교의학은 때에 따라서는 그 뜻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도 있는데 이때 성서신학은 성서의 특정부분 즉 구약신학 또는 바울서신 신학 등과 같은 연구를 말하며, 교의학은 성서이외에도 교회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천명된 신앙고백서들을 연구에 포함시킨다.

조직신학의 성공적인 시도는 반드시 성서의 통일성과 성서의 명백성이란 원칙 속에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모든 성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 저술된 책이란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그리고 성서의 저자들이 각기 다른 스타일, 어휘, 배경, 강조점들이 그들의 저술에 철저히 개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전체가 통일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성서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전개된 사건들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해석한 믿음의 글 또는 신앙을 통한 삶의 고백으로 보는 경우에는 성서를 쓴 저자들이 역사나 과학적 사실을 기록하여 전하기보다는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전한다고 보게 되며, 성서를 해석된 역사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원의 행위를 믿음으로 전달한 역사로 보게 된다. 따라서 성서는 저자들의 자료수집, 선별, 해석, 편집의 결과이며, 수집된 자료들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을 신앙으로 교육하고 선교하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조직신학의 타당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저자별 신학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또 저자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삶의 자리, 저자가 속한 신앙공동체의 제 문제들, 그리고 저자의 신학적 관점과 기록 목적의 차이 등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기 때문에 용광로에 성서 66권을 모두 넣고 녹여서 죄론 따로 뽑아 내고, 인간론 따로 뽑아 내는 식의 조직신학을 거부하고 저자의 신학적 관점과 기록 목적에 관심을 두고 마태신학, 마가신학, 누가신학, 요한신학, 바울신학 등으로 세분하여 저자별로 연구하는 성서신학을 선호한다.

이들 주제별 조직신학과 책별 또는 저자별 성서신학은 서로 적대 관계이기보다는 서로 보완적이고 필연적인 관계이다. 특히 성서신학은 조직신학을 위한 기초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비록 성서가 수많은 저자들과 수세기에 걸쳐서 기록되었고, 신학적 관점에서도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모든 저자들이 공통적으로 창조주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소유자들 이였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증거하는 통일성을 갖고 있다. 또한 인간의 언어로 된 체험적 신앙고백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무대에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해서 그 드라마를 쓴 작가 자신의 말을 듣는 것과 같으며, 또 관현악 연주에서 여러 연주자들의 각기 다른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을 듣게 되지만, 결국 작곡자 자신이 의도한 한가지 주제 음악을 듣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결국 성서를 기록한 여러 저자들의 설교와 증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특히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을 보게 되며, 그 구원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등에 관해서 알게 된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이 전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학체계와 조직신학은 다르다. 조직신학은 성서연구의 한 방법이며, 신학체계는 조직신학의 산물 즉 교리(dogma)라고 할 수 있다. 조직신학의 모든 노력이 신학체계를 위한 것도 아니며, 그럴 의도도 대개는 갖지 않는다. 예를 들면, 한 설교가가 주제설교를 쓴다든지, 어떤 특정한 교리에 대한 성서 강의록을 쓸 때에 그는 조직신학을 하고 있으면서도 신학체계를 세우는 것은 아니다.

성서의 모든 가르침을 포괄적이고 체계적으로 세우려는 행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는 교회의 분열을 초래하고 급기야는 성서보다는 인간들이 세운 불완전한 체계에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수용할 수 없게 만든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신앙고백서들을 만들어 정통의 시비를 가리는 울타리 역할을 삼아 왔는데,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정죄 되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울타리가 크면 큰 만큼 교리는 상대적이 되지만 교회연합이 쉽고, 울타리가 좁으면 좁은 만큼 교리는 절대적이 되어 교회분열을 조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본질에 일치하고, 비본질에 자유하며, 모든 일에 사랑으로 관용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신학체계의 위험은 잘못된 출발점, 잘못된 성서 해석학적 원칙을 적용하여 내린 거짓된 해석에 인간을 묶기도 하고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는데 있다. 또 다른 신학체계의 위험은 이 잘못된 해석의 내용을 성서주석이나 신학작업의 울타리로 삼아 칼뱅주의, 아르미니안주의, 카톨릭교회주의, 웨슬리안주의 등으로 이즘화 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러한 주장이나 주의가 해석하는 사람의 지혜, 지식, 경험, 관심, 관점(가치관)의 차이에서 많이 생긴다는 점이다. 또한 자료에 권위를 부여하는 문제, 자료를 해석하는 원칙의 차이, 신학 하는 방법의 차이는 필경 각기 다른 해석을 낳게 할 것이다.[Cottrell, Jack. "Theology and the Church." Christian Standard (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February 7, 1982).]

자료의 권위 부여 문제는 교단 분열과 교리의 비통일성의 주된 주범이 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서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성서가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에 의해서 저술된 책이란 사실을 인정하여 성서의 통일성과 분명성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서를 신앙인들의 믿음의 글 또는 삶의 고백, 또는 해석된 역사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원의 행위를 믿음으로 전달한 역사로 보는 사람도 있다. 전자는 성서의 절대성을 인정하여 오직 성서만을 믿음과 실천 혹은 신학과 윤리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는 한편, 종교개혁이후의 교리와 전통을 보수하고자 한다. 그러나 후자는 성서의 상대성을 인정하며, 성서이외에도 인간의 이성과 시대적 상황을 중시하여 교리와 전통을 보수하기보다는 시대성에 맞는 상황신학에 관심을 갖는다.

카톨릭교회는 성서이외에도 교회전통과 교황의 권위를 동등하게 취급한다. 그밖에 사이비 교단에서는 성서이외에 몰몬경이나 원리강론 또는 대쟁투와 같은 책들에 성서 이상의 권위를 부여한다. 이와 같이 자료에 부여하는 권위에 따라 신학과 윤리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는 성서이외에 다른 것을 믿음과 실천의 규범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이다.

자료의 권위문제에만 신학의 분열이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성서 해석학의 문제 또한 심각한 주범이다. 해석학적으로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삶의 정황을 철저히 살피고 저자의 기록의도나 목적을 고려한 다음 우리의 삶의 정황에 맞는 해석과 주석을 내려야 한다는 공통된 의견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救贖史)로 풀이하는 방법이 있고, 역사적-비평적 방법을 적용하여 성서를 풀이하는 방법도 있다. 구속사적 해석방법은 전통적인 방법으로서 기독론적 맥락에서 신 구약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며, 역사적-비평적 방법은 역사비평 방법을 성서에 적용하여 본문, 자료, 언어, 구전양식, 문학양식, 편집내용, 주변 종교의 영향 등을 비평한다. 이밖에도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정황을 살피는 사회학적 성서비평 방법이 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또는 여성신학이 사회학적 성서비평 방법에 의한 신학이다.

성서의 기록된 내용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느냐, 아니면 단순히 신앙인들의 삶의 고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성서신학의 방향이나 목적이 달라 질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신학을 연역적으로 풀어 가면서 주로 개인의 영혼구원에 주력하는 경우가 많고, 후자의 경우는 신학을 귀납적으로 풀어 가면서 주로 사회구원에 주력하는 경우가 많다. 전자(복음주의)의 경우에는 신과 인간을 수직선상에 놓고 신본위 신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많고, 후자(자유 진보)의 경우에는 인간 대 인간을 수평선상에 놓고 인본위 신학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서 전자의 경우는 교회의 사명인 봉사와 구제 및 사회참여를 통한 인간화 또는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수평신학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예배, 선교, 교육을 통한 인간의 영혼구원을 추구하는 수직신학이 결여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종교의 근본 목적이 전인구원에 있고, 인간의 구성이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도 영혼구원은 물론 육체구원(부활), 더 나아가서는 우주회복까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신학방법론은 사실상 상호 보완적이며, 협조적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절대성을 기점으로 출발하여 연역적 신학방법을 사용할 때는 결국 상대성을 살펴야 하는 것이며, 상대성을 기점으로 출발하여 귀납적 신학방법을 사용할 때는 결국 절대성에 귀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영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 사이의 갈등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점이다.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개념 하나만 보더라도 어떤 이는 무천년설, 후천년설, 다른 이는 전천년설 또는 시대구분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문자적인 해석만을 고집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이 있는 데, 대개 시대구분설을 주장하는 사람 가운데 많다. 성서는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고, 영적으로만 해석할 수도 없다. 문맥에 따라서 문자적이면 문자적으로, 영적이면 영적으로, 비유적이면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획일적인 방법의 적용은 언제나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구원의 본질이 아닌 천년설과 같은 문제는 인위적인 견해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도의 교제를 위한 시금석이 될 수 없다. 다만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신학적인 해석 또는 견해를 가지고 울타리를 치고 분열을 획책할 때이다. 그러므로 학자간에 통일된 신학자료의 권위부여, 통일된 성서해석 원칙들에 합의를 이루는 일이 남겨진 과제이다.

그러므로, 환원운동의 성공은 이러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환원운동이 제자 교회 형제들에게는 교회보다는 교제의 개념으로 비쳐지고 있고, 유악기나 무악기 교회 형제들에게는 교제보다는 교회라는 개념에 강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실 초기 환원운동가들은 교회를 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토마스 캠벨과 발톤 스톤도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울 의사는 전혀 없었다. 1804년 6월 28일 발톤 스톤은 스프링필드 장로회를 해산하면서까지 연합운동에 기치를 들었고, 단지 그리스도인으로만 남기를 원하였다.
알렉산더 캠벨도 만일 장로교회나 침례교회가 성서해석학상 그와 뜻을 같이했거나,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을 장로교인이나 침례교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토마스 캠벨과 알렉산더 캠벨이 장로교회를 떠나 교회를 세우지 아니하고, 1809년 8월 17일 펜실베니아주에 위치한 워싱톤군에 그리스도인 협회를 세운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1811년 5월 4일 브러시 런(Brush Run)교회를 세웠을 때는 토마스 캠벨에게 이날은 정말 가슴 아픈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연합운동의 꿈이 깨어지는 듯 싶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캠벨은 자신의 교회를 갖고 싶어했고, 그리스도의 교회 교리의 많은 부분이 그에 의해서 정립되었다. 알렉산더 캠벨은 "우리는 파당을 지어 머리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언제나 비난을 받아 왔다. 또 한편 우리는 진실로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기반을 잡아야 한다는 압력을 언제나 받아 왔다"[
Alexander Campbell, The Lunenberg Letter with Attendant Comments (Nashville: The Disciples of Christ Historical Society, 1955); Bruce R. Parmenter, "What Is the Restoration Movement-A Fellowship or a Church?" The Christian Standard(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August 18, 1985), pp. 740-741; Alexander Campbell, "Any Christian Among Protestant Parties" And "The Lunenberg Letter," Millennial Harbinger(1837), reprinted by Lincoln Christian College Press, Lincoln, Illinois in March 1970, p. 11.] 고 하였다. 이는 협회가 교회로서의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압력으로 인해서 연합에 대한 토마스 캠벨과 발톤 스톤의 강한 정열과 함께 알렉산더 캠벨의 분파적 성격도 함께 띄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현실이나 오늘날의 현실로 보더라도 교회없이 환원운동을 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알렉산더 캠벨이 어떤 의미에서는 토마스 캠벨보다는 현실적 이였는지 모른다. 문제는 복합적인 성격을 띤 환원운동이 제자 교회와 무악기 교회에 의해서 극우 극좌를 달림으로서 균형이 깨졌다는 것이다.

환원운동은 교회분열을 뼈아프게 체험한 초대운동가들이 교파교단속에서 일치운동을 전개하면서 성서의 권위회복을 부르짖다가 교리적 문제가 쟁점화 되면서 교파교단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자체교회를 세워 성장을 거듭하면서는 교리적 진실성 때문에 누가 과연 참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논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침례가 바로 이런 질문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이 질문의 발단은 1837년 6월호 {천년왕국 예고자}지에 알렉산더 캠벨이 [영국에 보내는 서신들](Letters to England-No.1)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모든 개신교 교파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발견된다"["Any Christian Among Protestant Parties" And "The Lunenberg Letter," s.v. "Preface."] 라고 표현한 내용에 대해서 루넨버그의 한 자매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침례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데서 발생한 다. 이 질문에 대해서 알렉산더 캠벨은 교파교단의 기독교인들을 "경건한 미침수자들"[Alexander Campbell, "Any Christian Among Protestant Parties," Millennial Harbinger(1837), pp. 411-578; "Editorial," The Christian Standard (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August 18, 1985), p. 3.]이라고 칭하는 한편, 개신교 교단에도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캠벨은 침수세례를 받은 자와 무지한 상태에서 약식세례를 받은 자와의 차이를 온전한 신체를 가진 자와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신체의 일부가 불구인 자로 비교하였다. 다음의 글은 캠벨의 입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면, 신앙 고백에 따라 받는 침수를, 그것이 비록 성화와 안위에 대단히 본질적일지라도, 그리스도인에게 절대적인 본질로 만들 이유(occasion)는 없다. 나의 오른쪽 손과 오른쪽 눈은 나의 소용과  행복에 대단히 본질적이다. 그러나 나의 생명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들 없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침수의 진실 되고 성서적인 의미와 목적대로 바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수용함이 없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침수세례자 이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없다고 추측하는 사람은 분명하고 온전한 시력을 가진 자 이외에는 산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는 사람만큼이나 큰 과오를 범하는 것이다.["Any Christian Among Protestant Parties" And "The Lunenberg Letter," p. 3.]

그러나 캠벨의 이러한 입장은 교회에 상당한 논쟁의 불씨를 제공하였고, 온 교회가 달아올랐다. 캠벨 자신도 이 문제에 상당히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교계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캠벨주의자(Campbellite) 또는 물중생론자(Water Regenerationist)로 매도되었기 때문이다. 캠벨의 다음과 같은 불평은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주 열렬한 이들 형제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대중의 모든 사적이고 사회적인 덕행들을 얕보면서, 우리가 침례를 구세주로 만든다 든지 혹은 천국 가는 여권으로 만들고 있다는 교계의 비난에 빌미를 제공하였다.["Any Christian Among Protestant Parties" And "The Lunenberg Letter," p. 10.]

이런 논쟁의 결과로 나온 표어가 "우리만이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인들 뿐이다(We are not the only Christians, but Christians only.)"였다.

20세기 초반부터는 제자 교회가 교파교단의 신자들을 조금도 의심없이 구원받은 사람들로 인정하여 교제를 함께 함으로서 이런 논쟁을 무색하게 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유악기 교회와 무악기 교회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적인 아집을 굳게 고수하고 있지만, 근래에는 침례를 시간의 개념으로 보는 재해석이 일고 있다. 이는 침례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과 성령세례를 받는 시간 또는 장소라는 점이다. 알렉산더 캠벨도 동등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알렉산더 캠벨의 침례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앞에서도 언급된 바와 같이, 약식세례자의 구원의 문제는 복잡한 신학적 성서학적 해석학적 문제점이 얽힌 것이므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Alexander Campbell, Christian Baptists(April 1828), p. 222; Christian Baptists(June 1828), pp. 254-255; Jack Cottrell, His Truth(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1980), pp. 73-75.] 약식세례자의 구원의 문제는 [루넨버그 서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성찬예식 참여문제도 초대 환원운동가들은 공개성찬도 폐쇄성찬도 주장하지 않은 것 같다. 무악기 교회는 단연 폐쇄 쪽일 수밖에 없고, 제자 교회는 단연 공개성찬일 수밖에 없다. 유악기 교회들은 교회 사정에 따라서 폐쇄 또는 공개성찬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무악기 교회가 폐쇄성찬을 행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제자 교회들이 공개 성찬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주장들은 개교회들보다는 대표성을 띤 학자들에게서 나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멤버십 문제도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가 멤버십을 갖는 것이 교파 형성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Bruce R. Parmenter, op. cit.그러나 교회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멤버십은 천국의 시민권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침례를 받아야 교회의 회원이 될 수 있고,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는 점은 구원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언제나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환원운동의 쟁점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일치와 성서의 권위회복을 함께 충족시켜 나갈 수 있느냐에 있다.

1828년 야레트 레인즈(Aylette Raines)는 젊은 목회자로서 만인구원설을 견지하고 있었는데 견해만 가지고 있고 가르치거나 설교는 하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견해를 동료들이 많이 반박하였으나, 토마스 캠벨과 알렉산더 캠벨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연합의 측면에서 그를 옹호하였고, 레인즈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숙해지면 자연히 만인구원설을 포기할 것이나, 그를 반박하면 오히려 더 고수하려 들 것이라고 설득하였는데, 5년 후에 그들의 주장대로 레인즈는 그의 만인 구원설을 버렸고, 교회는 평화와 연합이 지속되었다.

1840년 발톤 스톤과 알렉산더 캠벨 사이에 구속교리에 대한 견해 차이로 토론이 있었는데, 스톤이 그리스도의 구속교리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톤이 비록 자신의 견해를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지 않았고, 캠벨이 침묵함으로서 비본질적인 문제에는 자유라는 기치아래 평화와 연합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항상 평화와 연합만이 유지된 것은 아니다. 1830년대에 요한 토마스라는 의사가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었는데, 강한 전천년설과 함께 단일신 사상[역자주: 여호와증인이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을 주장하고 나서기 시작하였다. 이 문제로 캠벨은 그를 두 번에 걸쳐 만나 잠잠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가 자기의 견해 주장하기를 멈추지 않자, 공개적으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 그리스도형제단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테네시 네쉬빌에 젊고 유능한 설교가인 제시 퍼거선(Jesse B. Ferguson)이 있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 잡지}의 편집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 근거하여 사후 복음을 지지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알렉산더 캠벨은 반대의 입장을 밝혔고, 계속해서 신학적으로 몰아 부쳤다. 결국 퍼거선은 만인구원설쪽으로 밀리게 되었고, 결국은 영주의를 주장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캠벨이 젊고 유능한 설교가를 몰아냄으로서 평화와 연합은 깨지고 말았다.[James B. North, "Our Father Is Rooted in Our Great Heritage," The Christian Standard(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July 21, 1985), pp. 4-5.]

최근에 우리 나라에서도 여성의 교회에서의 위치문제로 교단마다 논란이 일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오랫동안 여집사 조차도 인정치 않고 있다가 최근에야 변화를 보이고 있다. 1988년 조사결과에 의하면, 미국 유악기 그리스도의 교회 가운데 약 10%가 여집사를 두고 있으며, 그 수는 약 8천여 명에 이르고 있고, 약 1%에 해당하는 교회가 100여명의 여장로를 두고 있다. 그리고 약 38%의 교회가 960여명의 여교역자를 고용하고 있다. 이들 여교역자들은 대부분 교육, 음악, 초중등부를 담당하고 있으며, 아직 부목이나 원목으로 사역하는 여교역자는 거의 없다. 그러나 여성의 교회에서의 위치는 지난 10여년간 배로 증가했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Glenn M. Zuber, "Results of a 1988 Survey: Women as Deacons, Elders, and Ministers," The Christian Standard(Cincinnati: The Standard Publishing Co., August 6, 1989), pp. 8-9.]

이러한 어려운 문제를 풀어 나가는데 있어서 우리는 불성실한 판단을 지양하고, 분명한 쟁점을 놓고 성서적으로 그 문제를 논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가 겸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알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한다면, 앞서 열거한 두 사례와 같이 연합과 평화는 유지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성서적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가능한 연합을 유지하느냐에 있다. 현재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한 문제들은 여성의 교회에서의 위치뿐만 아니라, 성서의 무오설, 은사론, 침례, 그리고 연합운동의 참여문제 등 많다. 이러한 문제들은 비단 미국의 문제만은 아니며, 그리스도의 교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오늘날 모든 교단과 교회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들이 풀리지 않은 한 범교단적 일치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생각들을 좁히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의 견해를 다른 사람에게 설득하기도 쉽지 않다. 얽혀 있는 인간관계나 생활연계 문제도 풀기 힘든 매듭이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남의 견해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성서적 가르침에 접근해 가야하며, 결국은 합일 점에 도달해야 한다.

맺는 말

이상으로 간략하게 환원운동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우리가 미국의 환원운동을 검토하고 연구하는 데는 우리의 문제를 풀어 가는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 우리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성서의 권위 회복과 교회의 일치는 교회의 지상과제이다.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는 몸을 던져 이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환원운동의 쟁점들에서 드러난 문제들이 미국 교회의 문제이지 한국 교회의 문제는 아니란 점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본 장에서 소개된 내용들은 이어지는 글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자료들이 제시될 것이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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