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신학자가 되기 위한 실천 여섯 단계 – 제럴드 히스텐드
목회자로서 내가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이렇다. 목회자-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신학의 늪, 즉 현대 복음주의의 조류를 거슬러 헤엄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이 과제를 다 해결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목회자-신학자라는 이상에 다가가기 위해 목회자가 사용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유익한 여섯 단계는 다음과 같다. 대략 중요한 순서대로 배치했다.
1. 같은 뜻을 지닌 직원을 고용하라
당신의 교회에 왕성한 신학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긴 과정은 신학을 소중히 여기는 직원을 갖추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오로지 목회자-신학자라는 이상만을 고려하여 직원을 교체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교회에서 직원채용을 관장하고 새로운 목회자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신학적 리더십에 대한 당신의 소명 의식을 공유하는 목회 동역자를 찾을 것을 강력히 권한다. 신학적 리더십을 중요하게 여기며 같은 생각을 지닌 목회 동역자를 찾을 수 있다면 목회자-신학자의 가장 중요한 장애물, 즉 고립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립은 목회자-신학자에게 중대한 장애다. 내가 이전에 섬겼던 교회에서는 갑자기 옆방 문을 열고 들어가 (예를 들면) 아퀴나스가 어떻게 회심해서 지성을 우선시하는 태도로 인해 구언의 서정을 칼뱅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것이 전적 타락 교리에 어떤 함의를 갖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만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았다. 이제는 그럴 만한 환경이며, 이는 중대한 차이를 만들었다.
2. 네트워크를 이루라
우리 모두가 목회자-신학자를 동역자로 고용할 만한 입장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당신의 교회는 너무 작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당신이 할 수 있는 그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같은 생각을 가진 목회자들이 네크워크에 참여하는 것이다. 교단 모임이든, 외부 동료들과 갖는 비공식적 모임이든 시학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동료 목회자들과 네트워크를 이루는 것은 당신의 신학적 소명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스카이프(Skype)를 활용하거나 복음주의신학회에 참여하거나 블로그를 시작하라. 나는 매달 두 명의 목회자들과 스카이프를 통해 우리가 읽고 쓴 것에 대해 토론한다. 정기적으로 대화를 나눔으로써 동지 의식을 얻을 수 있고 신학적 예민함을 유지할 동기부여를 받을 수 있다. 어떤 방법이든 신학활동에 열심인 목회자들의 모임을 찾으라.
3. 당신의 주간 일정에 공부하는 시간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라
당신의 회중의 기대와 요구 때문에 아마도 당신은 신학공부와 글쓰기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학 공부를 하고자 한다면 당신의 일정에서 거기서 우선순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내 경우는 아침 시간을 떼어놓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나는 첫 한 시간 정도를 기도하고 성서를 읽는데 사용한다. 다음 시간은 라틴어 독본에 할애하고(나는 고전어 박사과정을 하고 있다) 다음 세 시간은 신학공부를 한다.
올해 나는 월요일마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수요일마다 바르트를, 목요일마나 현대신학/학문에 관한 책을 읽는다. 화요일 아침에는 교회의 전망에 관한 주제를 공부한다. 오후는 직원회의와 상담 약속, 행정 업무를 위한 시간으로 잡아두었다. 물론 장례식이나 응급상황처럼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공부를 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저 다음 설교나 강의만을 위해서 공부하지는 말라. 너무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이라는 기차보다 딱 한 걸음만 앞서 있다. 목회자의 생명줄은-당신의 회중이 깨닫든 그렇지 않든-풍성한 신학과 기도, 성서 읽기를 통해 꾸준히 영양을 공급받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칼뱅의 ‘기독교강요’나 아타나시우스의 ‘성육신에 관하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읽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 신학 공부는 목회자가 다른 목회적 의무를 다 이행한 다음 시간이 남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학 공부 자체가 목회자의 의무다. 당신 회중의 유익을 위해-당신의 설교와 교육, 상담, 목회적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당신이 스스로 양분을 공급받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4. 당신의 교회 지도자들의 동의를 얻으라
당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한다면 당신 교회의 지도자들은 결국 당신이 공부에 쏟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당신이 행한 신학적 노고의 혜택을 누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 교회의 전통이 어떠하느냐에 따라 왕성한 신학 공부가 목회적 의무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서두르지 말라. 신학이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와 분리되어 있었던 탓에 많은 회중들에게는 자신들의 목회자가 꾸준히 신학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이를 단순히 주장해서는 안 되고 입증해 보여야 한다. 어떤 경우든 당신의 교회 지도자들이 당신의 신학 공부가 목회자로서 당신의 소명에 부가적인 일이 아니라 그 소명의 핵심 요소임을 깨닫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는 다음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5. 신학이 교회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의 교회를 위해서 존재함을 잊지 말라
당신이 교인들을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다고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이 아무리 똑똑해지더라도 당신은 보잘 것 없는 목회자-신학자가 될 뿐이다. 교인들은 당신이 공부하는 시간이 그저 당신의 다음 저술 계획이나 설교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시간이라고 느껴야 한다. 당신이 공부하는 시간을 그들이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예를 들어, “목사님이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어”), 당신 자신과 당신의 우선순의를 냉철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당신이 공부하는 시간이 당신 생각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한 시간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학이 교회를 섬겨야 하며 그 반대가 아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위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만약 하나님과 회중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공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니라면 우리는 정말로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것일까?
6. 이제 당신이 일하는 곳을 ‘사무실’이라고 부르지 말고 ‘서재’라고 부르라
목회자-신학자 모임에서 쫓겨나기 싫다면 서재를 ‘사무실’이라고 부르지 말라. 만약 이 규칙을 지금 처음 듣는다면 세 번까지는 이를 어겨도 괜찮다. 그다음부터는 목회자-신학자 면허가 정지될 것이다. 단어의 의미는 중요하다. 당신이 ‘서재’를 ‘사무실’로 부른다면 교인들은 당신이 일과 공안 하는 일에 특정한 기대를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이 그곳을 ‘서재’라고 부른다면 그들은 다른 종류의 기대를 갖게 될 것이다. 당신의 책이 있는 방, 당신이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방, 그 방은 당신의 서재다. 그것을 그렇게 부리기 시작하라. 그러면 교인들은 공부가 당신의 소명의 일부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목회자란 무엇인가, 케빈 벤후저, 오언 스트래헌, 박세혁 옮김, 포이에마, 2016.08.10. P.5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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