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스크랩] 신론(神論:THEOLOGY) 하나님

하나님아들 2018. 9. 16. 22:45

 신론(神論:THEOLOGY) 하나님

 


 

 

"신학"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는 "하나님에 대한 연구"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보다 넓은 의미 즉, 기독교 교리의 전 영역을 망라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책을 쓰는 사람들은 삼위 중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공부에는 "신론"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우리가 비록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이성에 의해 어떤 것들을 배울 수는 있지만,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인 주장은 대표적으로 네 가지가 있는데, 그중 세 가지는 성경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먼저 우주론적인 주장(the cosmological argument)이 있습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주는 적절한 원인이 반드시 있어야만 존재하게 되는 일종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지금 뭔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분명 무(無)에서 나왔든지 아니면 영원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합니다. 여태껏 어떤 것도 원인이 없이 생겨났다거나 무에서 나왔음이 증명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물질이 영원하다고 믿는 것보다는, 어떤 최고의 지성적인 존재가 세세토록 무로부터 사물을 만들고 피조물을 창조했다고 믿는 것이 더 논리적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장으로부터, 하나님은 우주와 같이 복잡하고 놀라운 결과를 낳을 수 있을 만큼 영원하시고 권세 있는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창1:1, 히11:3).
다음으로 목적론적인 주장(the teleological argument)이 있습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주에는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목적이나 설계, 질서가 있으며 이것은 반드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언급한 주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14:17에서 이 주장을 사용하였는데, 이때 그는 계절이 질서정연하게 바뀌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증거라고 말했습니다. 설교할 때 흔히 쓰는 예화도 있습니다. 곧 어떤 사람이 시계를 발견하고는 그 작동 순서와 복잡함을 관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그가 돌이켜 지적인 창조자의 존재를 미루어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대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페일리(Paley)의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인데, 이 책은 다윈주의자들이 반박하고자 무진 애를 쓰기도 했던, 오래되었으나 위대한 책입니다. 실제 이 세상에 고난과 악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목적론적인 주장을 반박하고자 자주 제기되며 때로 참 난감한 문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악이나 고난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둘은 부정적인 것들로서, 사단과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인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행하심에 있어 의로우셨음이 드러나게 될 것임을 또한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인류학적인 주장(the anthropological argument)이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두 주장을 좀더 다듬은 것으로서, 인간본성의 지적, 감정적(종교성을 포함해서), 의지적인 면들은 이와 어느 정도 비슷한 속성을 지닌 지적인 원인을 요구한다는 주장입니다. 적어도 말은 진실하게 했던 어떤 이교도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바울은 사도행전17:28,29에서 아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소생으로서, 하나님을, 생각 못하는 돌이나 금속으로 된 우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한 것입니다. 인류학적인 주장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인간에게는 타락한 본성도 있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타락했다고 생각하는 법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이 제기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 우리는 사람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망가진 것은 아담 시대에 인류가 범죄한 결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존재론적인 주장(ontological)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비록 어떤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데 도움을 주기는 했으나, 많은 사상가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전제로 하여 한 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는 추론적인 주장입니다.『 ①나는 절대자에 대한 사상을 갖고 있다. ②만일 그 절대자가 실재한다면, 그 절대자는 실재하지 않는 어떤 가장 완벽한 존재보다 더 위대하다, 즉 가장 위대하다는 개념 속에 그 존재가 실재하고 있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③그러므로 절대자에 대한 사상 속에 그 존재의 실재에 대한 사상이 포함되어 있기에 절대자는 틀림없이 있다.』많은 사람들이 맨 마지막 진술의 논리를 따라가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중세 때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최소한 알아둘 가치는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만큼의 빛을 담고 있진 않지만, 올바른 방향, 곧 하나님을 믿는 데에 이르게 하는 한 가지 단계가 될 수 있는데, 이는 수차 입증된 바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최고 존재를 드러내주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견해도 살펴보는 것이 공정할 줄 압니다.

먼저 무신론(無神論: atheism)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걸까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독단적인 무신론자는 자기가 사실상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 이 사람은 우주 구석구석을 샅샅이 다녀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자들이 최초로 사람을 지구 궤도 위에 쏘아 올렸을 때, 그 사람은 그곳 우주에는 하나님이 없었다고 보고했다고 합니다. 이에 누군가 "만일 그 우주인 친구가 자기 우주선 바깥으로 나와 보았더라면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확신하자면 무신론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한 번에 모든 곳을 다 가서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는 것과 한 번에 모든 곳에 갈 수 있는 이 두 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해 제멋대로 생각함으로써 초자연적인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무신론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으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14:1).
두 번째로, 불가지론(不可知論:agnosticism)이 있습니다. 불가지론자는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무신론보다는 더 합리적이지만 무지에 근거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불가지론자는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그 자체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진화가 증명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만일 진화가 사실이라면 그 시작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복잡한 세상으로 "진화"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기본원소들은 누가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누가 이 세상을 시작했고 또 계속 돌아가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우주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으로는 다신론(多神論:polytheism)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신론의 반대입니다. 다신론은 신이 많다고 가르칩니다. 고대 그리이스나 로마의 종교, 오늘날의 힌두교나 신도교(神道敎) 같은 이방 종교에는 여러 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들을 추적해보면, 나머지 신들을 존재하게 만든 원래의 탁월한 한 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신론에서는 피조물들이 신의 지위까지 격상되어서 신처럼 숭배됩니다.
다음엔 범신론(汎神論:pantheism)이 있습니다. 이 엄청난 착각은 하나님이 우주만큼이나 넓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사실상 우주가 스스로 지어졌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일부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하나님이다"라고 범신론자는 말하며,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과 구별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정 이단들이 이 교리를 다양한 형태로 가르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피조물과 구별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창1:1)은 이 그릇된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연신론(自然神論)이 있습니다. 자연신론자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것을 믿으려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그 뒤에 어딘가 외딴 구석으로 물러 가셔서 삼라만상이 마음대로 제 길을 가도록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과 더불어 말씀하실 뜻이 안 계셨다면 왜 우주와 인류를 지으셨는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첫 문장, 곧 성경의 맨 첫 구절이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오류들을 반박하고 있음을 주목해보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것은 분명 흥미 있는 공부입니다. 그러나 바로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 안다는 것은 얼마나 더 만족스러운 것입니까! 우리는 자연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의 계심과 그 능력에 대해 일부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를 계시하신 책, 곧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자연이나 이성 그 어느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씀해줍니다(속성이라 함은 어떤 대상에게 원래부터 있거나 그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어떻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냐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을 많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너무나 광범위한 주제여서 이 주제를 완벽하게 분류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가령 영원함이나 무한함)과 일부 사람들에게도 있는 속성(사랑이나 지식 같은 것)으로 분류하고 전자를 가리켜 "전달 불가능한 것"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절대적", "상대적"과 같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본 서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구분함에 있어 인격적인 것(인간이 어느 정도 나누어 갖고 있는 것)과 하나님께만 있는 고유한 것(그래서 인간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으로 나누었습니다.

1. 하나님의 인격적인 속성
인류학적인 주장에서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과 비슷해 보이는 지적, 감정적, 의지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데, 바로 성경이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창1:26). 이것은 하나님이 중세의 그림에 그려진 것처럼 수염이 흰 노인 따위의 인간의 모양을 하고 계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요4:24). "하나님의 팔"이니 "하나님의 눈"이니 하는 표현들은 수사법이며 또한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인간의 신체와 하나님의 속성을 비교함으로써 그분의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를 사람에게 분명하게 깨우쳐주려는 의도해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팔"은 그분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되신 삼위의 두 번째 위(位)되신 분은 실제 인간의 몸을 입으셨었고 영광의 몸으로 변하신 뒤에도 이러한 인간의 속성들을 항상 가지고 계십니다. 이 점은 기독론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a. 지성(知性)
하나님의 위대한 지적인 속성은 바로 전지(全知)하심입니다. 모든 인간은 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속성이 어떤 것인지 마음에 상상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란 바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든 아니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든, 과거 현재 미래 어느 때의 일이든, 사람이나 사건, 환경, 장소 아니면 물건이든 간에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그 전지하심을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시지 않고도, 또 어떤 분야에서든지 똑같이 잘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성자 하나님의 삶 속에서 보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두로와 시돈에서 이적을 행하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말씀해주셨습니다(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 아셨던 것입니다 - 마11:21 하반절). 이 "하나님의 전지"는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격려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에 이미 그분의 속성상, 우리가 구원받은 뒤에도 얼마나 자주 그분을 실망시켜드릴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b. 감성(感性)
하나님께 대해 말할 때는 "감성"이란 말이 "감정"보다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두번째 용어에는 다소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성, 또는 고차원적인 감정에 대해서 뚜렷한 네 가지 속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일서4:8). 그런데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사랑은 애정과 잘못을 고쳐주는 것을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대상에게 가장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분의 뜻은 최고의 선입니다. "선"이라 함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선함과 긍휼, 그리고 은혜는 사랑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하나님의 개별적인 속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의 사랑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2:4-7과 요한일서3:1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속성을 너무 지나치게 확대한 나머지 사랑과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정의, 혹은 공의(이 두 단어는 원어 상 동일한 단어)의 교리를 망각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구속에 있어 하나님은 당신 자신도 의로우시고 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십니다(롬3:26). 심판에 있어 하나님은 결코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무사공평(無私公平)하시고 도덕적으로도 공정하신 재판관이시라는 뜻입니다(행10:34). 하나님의 공의, 혹은 정의에 대한 주요 구절들로는 시편11:7, 요한복음17:25, 계시록16:5-7 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거룩은 악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거룩은 능동적인 공의의 특성입니다. 어두움이 조금도 없기 때문에"(요일1:5 하반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안에서 절대적인 표준을 가지게 되며 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는 직접적인 명령을 듣고 있습니다. 비록 표준은 절대적이지만 그 요구사항들은 우리 신앙의 성숙도가 어떠하냐에 따라 상대적입니다. 날마다 우리는 생활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나 있는 대로 하나님의 거룩을 본받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 없는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눈부신 거룩함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어 죄의 심히 죄악됨이 드러나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관계해서 이사야 6:3, 요한복음 17:11, 계시록 4:8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6). 진리는 신성(神性)의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입니다. 거룩과 마찬가지로 진리도 소극적, 적극적인 양면을 다 갖고 있습니다. 진리는 거짓이 없는 것이며 또한 나타난 것에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 즉 어떤 표준에 대해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그 표준이시므로 이것은 곧 그분이 스스로 모순 없이 일관되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3:4에서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의 속성 때문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목적이나, 약속이나, 또는 계시에 있어서 거짓된 것은 결코 하실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중 계시에 대한 부분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무오류성에 대한 주장인데, 이는 복음적인 운동의 수호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조차 공격을 받아온 교리입니다.

c. 의지(意志)
하나님은 자유를 누리십니다. 속박이나 제한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자유"라고 부릅니다. 사람에게 있어 자유는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피조물도 정확하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있어서 자유는 그분이 보시기에 옳게 여기시는 대로 하실 수 있는 제한 받지 않는 독립을 의미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성품에 반대되는 행동은 안 하시는데, 그분의 본성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이점을 제한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이나 언약의 형태로 스스로에게 "구속"을 가하실 수 있고 또 이러한 계획 내에서 행하십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하겠다고 친히 결정하셨기에 그렇게 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들에게 어떤 것을 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으시지만, 자기가 약속하신 것, 즉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나 자기 아들을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구원을 베푸시겠다고 하신 약속 등은 반드시 그 하신 말씀대로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아름다운 말씀은 이사야 40:6-31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능(全能)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마음에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의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완전한 뜻을 실행하실 모든 능력, 즉 전능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여러 번 "전능자"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42:2)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은 우주의 창조와 보존, 출애굽, 그리스도의 부활, 그리고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이 구원받는 것에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는 창조가 "손가락 놀림"(시편8편)에 불과하지만, 잃어버린 바 된 인류를 구하시는 데는 하나님의 "팔"이 필요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곧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지만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아드님의 죽으심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32:17과 마태복음19:26, 요한계시록19:6을 보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들은 훨씬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 점들은 본래 그 성격상 인간이 소유할 수 있도록 전달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단일성입니다. 하나님은 혼합되지 않았습니다. 즉 그분은 순수한 영적인 존재이십니다(요4:24). 이 속성은 그분의 본질과 관련된 것이며 나중에 설명하게 될 삼위일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유일성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이 말씀을 가지고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심을 선포해왔습니다. 이 작은 교리로 불리우고 있는 "쉐마(들으라)"에서의 "하나"라는 단어는 문자대로 숫자상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복수로 하나님의 이름을 엘로힘이라고 하는 것처럼 어떤 위격(Persons:位格)들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가끔 세 분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약의 그리스도인들도 구약의 신실했던 성도들처럼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고 있음을 명백히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의 무한성입니다. 하나님은 경계가 없으시며 무한하시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갇히시는 분도 아닙니다(왕상8:27). 하나님은 공간을 완전히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이 우주 공간을 지으신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성입니다. 영원은 무한함을 시간과 관계지어 일컫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시간도 완전히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시간에 있어서 우리는 줄지어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속에 갇혀 있을 따름입니다. 영원에 있어서는 혹 진보는 있을지 몰라도 이런 사건의 연속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시간의 관계를 아주 희미하게나마 그림으로 그려보자면, 어떤 사람이 높은 건물 꼭대기에 올라가서 행렬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바라본 광경과 길가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단지 자기 눈앞을 지나가고 있는 행렬의 부분만을 바라본 광경의 차이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90:2).
그 다음엔 하나님의 불변성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또 변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분의 성품엔 발전이나 모순이라는 것이 없습니다(약1:17). 창세기6:6과 같은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후회하신다"(즉 마음을 바꾸신다)고 하고 있지만 이것은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맞춰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 또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인동감론(神人同感論)"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이루심에 있어 그 계획을 차례로 보이셨는데, 인간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바꾸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속성을 바꾸시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면 그분께서 이렇게 행하시고, 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저렇게 행하시는 것은 그분의 신성에 따른 것이며, 하나님 자신은 불변하십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입니다. 이 속성은 하나님의 창조와 그 지으신 피조물과의 관계 측면에서 그분의 무한하심으로 불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그러나 범신론이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인간 속에 거하시기는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서 결국 영적, 도덕적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서 사는 것을 영적인 현실로서 실천해나가야 합니다. 시편 139편은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는 것에 대한 대표적인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8:20도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제 일의, 곧 최고의 통치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행사하시는 주권의 종류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영제국의 주권은 소련의 최고통치권자의 통치와는 그 형태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통치를 행사하심에 있어서 사람과 사물은 직, 간접적으로 통제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통치자시며 이에 대해 "방심해서 허를 찔리었던" 적은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신실한 성도들에게 확신을 주는 교리입니다. 특히 사태가 정의와 진리를 거스리는 쪽으로 가는 것 같을 때에는 더 그렇습니다. 결국엔 본질적으로 악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되는 것들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결말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로마서9:14-24와 에베소서1:3-14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 외에 또한 인간이 책임을 가진, 자기 자유대로 도덕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진리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이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주권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이 두 가지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모두 다 진리라고 나타내주신 것입니다. 이 둘 중 어느 한 쪽을 희생함으로써 다른 한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신성한 삼위일체(Trinity)

한 저명한 심리학자가 언젠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본성에 대한 책을 한 권 쓴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인간성에 대해 이미 기술된 적이 있는 49가지의 정의들로 시작해서, 거기에 자기가 내린 50번째 정의를 덧붙였습니다. 만일 과학자들이 인간성을 정의하는 데 이토록 애를 먹는다면 신학자들과 성경의 교리를 연구하는 학도들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별로 놀랄 일이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 중 하나가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이 진리는 성경에 근거한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정의를 몇 가지 살펴보고 어떻게 해서 이 정의들이 성경을 근거로 나오게끔 되었는지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널리 알려진 정의의 하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발견됩니다(1643년). 이 고백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한 분이신 하나님 속에 본질과 능력, 영원하심이 같은 삼위(three Persons)가 계신다.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시지 않으며 누구에게서 나셨다거나 출생하신 분이 아니다.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오신 분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시는 분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매우 성경적인 진술입니다. 그러나 영어에서는 "삼위"의 "위(Persons)"라는 단어가 다소 오해될 수도 있는데, 이것은 여러 명의 "사람들(persons)"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 분 계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따로 한 분씩 계시다는 뜻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은 세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엔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이 점은 워필드(B.B.Warfield)가 내린 정의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한 분이신 하나님 속에 본질적으로는 같으나 존재가 전혀 다른, 똑같이 영원하시고 똑같이 동등하신 삼위가 계신다. 삼위는 본질적으로 같으시지만 그 존재하심은 분명히 구별되신다.』 여기서 "한 분"이란 단어가, 평범하지만 다소 어려운 용어인 "삼위"를 지켜주고 있고, "똑같이 동등하시다"와 "똑같이 영원하시다"는 말들은 성자나 성령께서 성부보다 열등하다거나 아니면 성부에 의해 지으심을 받았다는 암시를 피할 수 있게 해줍니다. 어떤 사람이 더 명백히 하나님을 정의한 것처럼, 이 "삼위일체(Tri-unity)"의 삼위는 본질적으로나 근본적으로 하나이십니다. 과학에서 분광기로 각각의 원소를 보면 각 원소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고유한 무늬를 지니고 있으며 한 원소는 항상 똑같은 무늬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속에 계신 성부 성자 성령은 같은 "경향"을 지니고 계신데, 이는 삼위께서 본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와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야말로 성경에서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논리적 해답입니다.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신6:4). 이와 동시에 성경은 아버지가 하나님이요, 아들이 하나님이며, 또 성령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것은 반박하지 않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들과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성자(聖子) 하나님
그리스도는 성부와 분명히 구별되시지만 그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1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문자적으로 볼 때) 하나님과 "대면하고 계신 것"을 보는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분명히 구별이 되시지만 또한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서1:8과 요한복음20:28에서도 하나님으로 불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고 계시기에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의 예로는 그분의 불변성(히13:8), 무소부재하심(마18:20), 또 전지하심(요2:24,25)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세 번째 증거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그분이 하셨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2:5-7에서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시는데 이것은 분명 하나님만이 지니신 특권입니다. 골로새서1:16,17에서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우주를 붙드시는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2. 성령(聖靈) 하나님
성령님도 성자와 똑같이 세 가지 증거에 의해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사도행전 5장에서 하나님으로 불리고 계시며 이것은 3절과 4절을 비교해보면 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3:16 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께 있는 다음과 같은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계십니다. 즉 영원하심(히9:14), 전지하심(고전2:10.11), 무소부재하심 즉, 동시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안에 거하심(고전6:19)입니다.
하나님으로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요3:5, 딛3:5), 죄를 깨닫게 하시며(요16:7-11), 또한 사람을 감동하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케 하시는 일들이 포함됩니다(벧후1:21).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신 삼위께서 지니신 신성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세 분이라면 당연히 세 분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고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삼위께서 하나라는 것이 또한 증명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28:19은 삼위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한 이름"으로 연결하고 있습니다(이 구절에서 삼위를 가리켜 단수로 "이름"이라 한 점을 주목하십시오). 고린도후서13:14에서 사도는 마지막 인사말에서 삼위를 동일한 지위에 놓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 주님이 침례 받으신 것에 대한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마3:16,17).
지금까지 살펴본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들은 모두 신약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다신론의 위험이 너무 컸기에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해야 했습니다(신6:4).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통해 일단 우상숭배에서 고침을 받게 되자,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가르침이 더 분명하게 계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삼위일체가 구약성경에 나와 있긴 합니다만, 뚜렷하게 제시되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엘로힘( Elohim. 이 단어의 어미(語尾)인 "-임(-im)"은 "그룹들, 스랍들(cherubim, seraphim)"의 어미와 같다)은 복수형인데 동사는 단수를 쓰고 있습니다. 이 점은 신약의 계시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편 2편에서 메시야와 성부는 구별되어 있지만 두 분 다 하나님이시며, 이 점은 이사야 48:16에서 성령과 성부에 대해 하신 말씀에서도 동일합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지만 결국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못됩니다. 10여 년 전에 어떤 사람이 "풀리지 않은 과학의 수수께끼 10가지"라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이 수수께끼 중에는 전기, 빛, 원자,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과학은 많은 진보를 이루었지만 이 수수께끼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 수수께끼들을 푸는 데 있어 발전이 있었습니다만, 더 큰 문제들이 새로 발생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엄청나게 증가했고 그로 인해 "물질"에 대한 이해도 대단히 깊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이 연구를 맡은 과학자들은 "비물질"이란 새로운 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날에 와서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속성이나 성품을 우리가 분석할 수 없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신성이나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놀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를 단순히 믿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만큼 이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현재로선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그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 영원히 존재해오신 분이며 이 세 분을 동등한 하나님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신 구주로 믿는 사람은 아름다운 삼위일체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천지 창조 훨씬 전에 삼위이신 하나님 사이에서 나타내신 그 영원한 사랑을 설명할 길은 오직 이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과 천사들로 더불어 우리가 삼중적인 속성을 지니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3. 성부(聖父)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가장 의미심장한 개념의 하나는 삼위 중 첫 번째 위(位)께서 "성부"로 불리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느낌을 주는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하는 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어진 것입니다. 성경은 네 가지 중요하고도 분명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이십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소위 "우주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인간은 형제지간"이란 비성경적인 주장을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버지, 곧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는 성경적인 진리가 복음적인 신자들 사이에서조차도 막연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17:28,29은 하나님을 인류에게 생명과 물질적인 필요들을 공급해주시는 분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어졌던 아담(눅3:38)으로부터 공통된 혈통을 물려받은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구원받은 자들"과 "잃어버린 자들"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십니다.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 아버지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아들, 내 장자"(출4:22)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31:9에서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과 맺은 개인적인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개인이 아닌 민족으로서 아버지가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십니다. 주 예수님은 자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말씀하셨으며 또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마태복음에 20회, 마가복음에 2회, 누가복음에 11회, 요한복음에 62회, 그리고 계시록에 3회 나옵니다. 여섯 개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자신의 첫 번째 서신에서 이 표현을 쓰고 있으며, 요한은 자기 서신에서 이와 비슷한 표현을 네 번에 걸쳐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자관계를 단순히 인간적인 부자관계나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 혹은 믿는 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부자관계 등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자기 아들이라고 인정하시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번 하늘에서부터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저를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셔서 성자를 지으셨다거나 존재하게 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독론에서 우리는 성자께서 영원하시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구절들을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성경에는 두 단어로써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는 독생하신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다섯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로 이 단어는 "종류가 똑같은 것", "단 하나 밖에 없는", 또는 "유일무이한"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또한 맏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도에 대해 일곱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점에 대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분이 시간적으로 첫 아들로 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또한 지위상으로 첫째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골1:15).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1:18)나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8:29)이라는 말씀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피조물과의 어떠한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맏아들"이란 단어는 흔히 한 집안에서 제일 먼저 태어난 남자에게 주어지는 호칭입니다. 예를 들어서 "맏아들"의 은총은 셈, 이삭, 야곱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해 쓰일 때 "맏아들"이라는 이 단어는 그리스도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지 그 출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으로서 그분은 이 세상에 첫 번째로 태어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는 조상에게서 자손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존재하시게 되었다거나, "탄생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기를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말을 쓰니까 아무튼 이것이 하나님이나 사람이나 같은 면이 있다는 점에서 나온 것이라고 대충 여깁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것을 인간적인 것에 가장 가까운 표현을 들어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부자 관계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항상 있었으며, 이것을 가리켜 "영원한 세대" 또는 "영원한 아들의 명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시며,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갈3:20)라고 일컬어집니다. 흔히들 잘못 알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앞에서 지적한 대로 모든 사람들은 창조에 의한 하나님의 소생이라는 것은 맞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실제적이고 중요한 기독교 진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 한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또한 성부 하나님의 가족에 들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에 들게 되는 것일까요? 보통 사람의 경우 한 가족의 식구가 되는 데에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방법들은 각기 하나님께서 한 사람이나 전 교회를 위해, 또는 그 안에서 행하시는 조치와 일맥상통합니다. 우선, 아기가 한 가족의 식구가 되듯이 출생을 통해 한 가족의 식구가 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습니다(요1:12,13). 이것은 중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3:7).
두 번째로 우리는 입양을 통해 한 가족의 식구가 됩니다. 이는 합법적으로 한 아이를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모세가 바로의 딸에게 취함을 받아 그 친자식으로 양육된 것이나, 에스더가 그 사촌 모르드개 손에 자란 고아였던 것과 같습니다. "양자됨"이란 단어가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나중에 보게 되는 것처럼 이 단어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그 뜻이 다소 다릅니다.
세번째로 더 나아가 우리는 결혼함으로써 한 가족의 식구가 되는데, 이는 결혼하면 사위나 며느리 같은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룻의 시어미는 룻을 "내 딸"이라고 불렀습니다(룻3:1). 다윗의 장인 사울은 다윗을 "내 아들 다윗"이라고 불렀습니다(삼상24:16). 이점과 일치하는 것을 신약성경에서도 보게 되는데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엡5:25). 새로운 출생은 특별히 성령님의 사역입니다(요3:5). 그러나 양자삼으심은 성부와 연관되어 있으며(갈4:5,6), 성자는 신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계19:7).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게 되면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복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로 고아가 갖고 있는 한 가지 서러움은 자기 아버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한한 우주 속의 점과 같이 미미한 피조물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게 되고(요20:17), 또 그분과 같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마5:48 ).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모두 집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완전한 권리가 있습니다. 이 땅 위에서 우리는 나그네지만 지금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서 가사 처소를 예비해두셨습니다(요14:2, 엡2:19). 그 다음으로 하나님은 또한 사랑이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면 우리는 그분이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요16:27). 또한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실 것도 분명합니다(마6:32,33). 아버지의 사랑과 그 능력을 알기에 우리는 장래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저희를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요10:29). 이 얼마나 복된 확신입니까! 아버지께서 모든 아들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영생의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요일5:11-13). 그분은 또 유업을 약속하십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유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아들들만이 유업을 받을 후사가 됩니다(롬8:17).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이외에도 더 많은 복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책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죄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보다는 "하나님의 자녀가 죄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라는 것이 더 좋은 질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무도 죄짓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새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도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요일1:8).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께 범죄 한다면 가족 중에서 내침을 받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녀로서 징계를 받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가 범죄 했다고 가족 중에서 내어쫓지도 않으실 뿐더러 그 죄에 머물러 있게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히브리서12:5-11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참 자녀들은 불순종한 것에 대해 징계를 받으며 그럼으로써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평안에 다시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만일 징계를 받고도 하나님의 자녀가 뉘우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본향인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그 사람을 이 땅에 두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합당치 않은 행위를 한 연고로 "잠든" 즉 죽은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 많았습니다(고전11:30). 사도 요한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를 범한 형제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요일5:16). 사망에 이르는 범죄의 구체적 예로,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의 죄는 돈을 일부 감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돈을 다 바칠 의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들의 죄는 모든 것을 바친 척함으로써 성령님에게 거짓말한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죄를 짓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도착할 때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도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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