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모세오경의 세 가지 대 주제

하나님아들 2017. 7. 29. 23:38

 모세오경의 세 가지 대 주제

 


 

 


 

 

정태현
 

 

 1. 계약

 

’계약’은 히브리말로 ’베릿’이다. ’베릿’은 본디 ’족쇄,’ ’사슬’을 뜻하였지만, 성서에서 두 주체 사이의 구속력을 지닌 온갖 협정을 가리키는 데에 쓰인다. 예를 들면, 야곱과 라반 사이의 장엄한 협약(창세 31,44),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우정어린 약조(1사무 18,3), 아브라함이 아모리족 전체와 맺은 평화조약(창세 14,13)과 임금들 사이의 협약(1열왕 5장; 20,34), 혼인 서약(잠언 2,17; 말라 2,14) 등. 그러나 성서에서 ’계약’은 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특별한 약조를 가리키는 데 가장 많이 쓰인다.

성서학자들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을 고대 근동 국가들 사이의 조약과 비교·연구함으로써 계약에 관한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 금세기에 발견된 대부분의 고대 근동 조약문들은 기원전 1500-60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이 시기는 구약성서의 형성 시기와 겹치기에 성서 저자들이 이 조약문들을 참조했으리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 고대 근동의 조약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계약을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대목으로는 출애 19─24장과 신명기 전체를 들 수 있고, 짧은 언급으로는 여호 24장, 1사무 12장을 꼽을 수 있겠다. 이 대목들과 비교할 수 있는 고대 근동의 대표적인 조약은 기원전 1400-1200년경에 나온 헷족 조약들과 기원전 700-6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아시리아 조약들이다.

고대의 조약들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평등조약이고 다른 하나는 주종조약이다. 평등조약에서는 조약의 두 당사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며 약속의 이행을 두고 상대방을 억압하거나 강제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가 기원전 1290년경에 시리아에서의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헷 임금 하투실리스 사이에 맺은 평화조약이다. 주종조약에서는 종주국 임금이 일방적으로 종속국 임금에게 충실히 실행해야 할 의무조항들을 나열한다. 자신을 위해서는 자비심을 가지고 종속국을 보호하겠다는 약속 이외에는 어떤 의무조항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주종조약이야말로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시나이 계약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헷족의 초기 주종조약은 보통 여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첫째, 조약 주체의 자기 소개: 종주국 임금이 자기 이름과 호칭을 장엄하게 소개한다. 둘째, 이전의 관계들을 묘사하는 역사적 서문: 종주국 임금이 과거 종속국 임금에게 베푼 은혜들을 나열한다. 은혜의 언급은 종속국 임금이 종주국 임금을 섬겨야 하는 이유가 된다. 셋째, 종속자가 지켜야 할 의무와 규정들: 종주국 임금은 종속국 임금이 지켜야 할 의무조항들을 상세히 밝힌다. 넷째, 조약의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해할 것을 공적으로 선포함: 종주국 임금은 종속국 임금이 조약문을 신전에 두고 정해진 때마다 그것을 공적으로 낭독할 것을 요구한다. 다섯째, 조약의 증인들에 관한 언급: 나라와 나라 사이에 체결되는 장엄한 조약의 증인들은 두 나라의 신들이다. 여섯째, 저주와 축복: 증인으로 선정된 신들은 조약이 잘 지켜질 수 있도록 그것을 충실히 지키지 않는 종속국의 임금에게는 저주를 내리고, 충실히 지키는 임금에게는 복을 내릴 것이다.

 

2) 주종조약과 시나이 계약 및 신명기의 비교

위 주종조약의 정식(定式)은 구약성서의 시나이 계약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소개된 본문은 「새번역」에서 따온 것이다.

첫째, 계약 주체의 자기 소개: "나는 너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출애 20,2). 둘째, 역사적 서문: "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 이제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되리라. 온 세상이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에게 사제들의 왕국이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출애 19,4-6).

셋째, 의무 규정들: 시나이 계약에서 이 요소는 십계명(출애 20,3-17)과 이어지는 계약의 책(출애 20,22-23,19)에 나온다. 넷째, 계약의 공적인 선포: 시나이 계약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계약의 책을 읽어 들려주고(출애 24,7-8), 주님께서 돌판에 새겨 주신(출애 24,12; 34,29) 율법과 계명을 영구히 보존하게 하였다(출애 40,20). 다섯/여섯째, 고대 근동의 조약에서는 증인들로 신들이 등장하지만, 시나이 계약에서는 유다인들이 유일신교를 믿기 때문에 이런 다신교적 증인들이 나올 리 없다. 또 이런 신들이 내리는 저주와 축복도 없다. 그 대신 시나이 계약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번개와 천둥과 먹구름을 동원하시어 당신의 강력한 현존을 드러내시면서 계약에 순종하도록 명하신다(출애 19,16-19; 20,18-20).

주종조약의 정식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남긴 유언 형식의 설교인 신명기 전체의 내용과도 잘 맞아 들어간다. 첫째, 신명기 머릿글은 이 책의 내용을 누가 전해 주었는지 밝힌다. "이것은 모세가 요르단 건너편, 아라바에 있는 광야에서 온 이스라엘에게 한 말이다. 아라바는 숩을 마주보고, 바란, 도벨, 라반, 하세롯, 디자합 사이에 있다"(신명 1,1). 둘째, 신명기는 이어서 설교가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서술한다. "사십년째 되던 해 열한째 달 초하룻날, 모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두고 자기에게 명하신 그대로 그들에게 일렀다. 그가 헤스본에 사는 아모리족의 임금 시혼을 쳐부수고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 사는 바산 임금 옥을 쳐부순 다음이었다"(신명 1,3-4). 셋째, 의무 규정들은 "이스라엘아, 잘 들어라!"로 시작되는 4장 처음부터,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을 두고 서로 합의한 내용을 확인하는 26장 마지막까지에 나와 있다. 넷째, 모세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더불어 백성에게 율법의 모든 말씀을 돌 위에 기록하기를 명한다. "네가 요르단을 건너 주 너의 하느님께서 너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 너는 큰 돌들을 세우고 거기에 석회를 발라야 한다. 그리고 네가 건너가거든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써야 한다"(신명 27,2-3; 참조: 7절). 다섯째, 계약의 증인들은 신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다. "내가 오늘 너희를 거슬러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운다"(신명 4,26; 참조: 30,19; 31,28). "하늘아, 귀를 기울여라. 내가 말하리라. 땅아,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라"(신명 32,1).

여섯째, 저주와 축복에 관한 말은 신명기 곳곳에 나오지만, 특히 28장에 집중된다. "네가 주 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내가 오늘 너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면, 주 너의 하느님께서 땅의 모든 민족 위에 너를 높이 세우실 것이다. 네가 주 네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네 위에 머무를 것이다"(28,1-2). "그러나 네가 주 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명심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이 모든 저주가 내려 네 위에 머무를 것이다"(28,15).

 

3) 맹세 의식과 공동식사

계약을 맺는 예식에는 일반적으로 짐승을 둘로 가르는 의식과 공동식사가 따른다. 고대 근동에서는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의 조약이 깨졌을 때, 이를 중재해 줄 국제사법재판소 같은 기구가 없었다. 그들은 계약의 증인들로 동원된 신들이 조약을 깨뜨린 당사자들을 징벌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 신들 앞에서 장엄한 맹세를 하였고, 이 맹세의 효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맹세 의식이 무척 중요하였다. 맹세 의식은 보통 짐승을 두 쪽으로 가르는 행위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18세기 마리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당나귀를 두 쪽으로 가르는 맹세 의식이 확인된다. 시리아의 세피르에서 발견된 점토판에 따르면, 조약 당사자들은 매번 짐승을 둘로 가를 때마다, ’계약을 깨뜨리는 자는 황소가 둘로 갈라진 것처럼 갈라지리라’는 저주문을 외웠다.

이 맹세 의식은 구약성서에서도 확인된다. 히브리말로 ’계약을 맺다’는 ’카랏 베릿’인데 본디 ’계약을 가르다’라는 뜻이다. 창세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에 삼년 된 암송아지와 암염소와 숫양을 반으로 갈라놓자, 주 하느님께서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 속에서 갈라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셨다. 예레미야는 이 의식을 보다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나는 내 계약을 어긴 사람들을, 곧 내 앞에서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가르고 그 사이로 지나가면서 맺은 계약의 규정들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을, 그 송아지처럼 만들어버리겠다. 유다의 대신들과 예루살렘의 대신들, 내시들과 사제들을 비롯하여 갈라놓은 송아지 사이로 지나간 온 나라 백성을 원수들 손에, 그들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 손에 넘기겠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시체는 하늘의 새들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리라"(예레 34,18-20).

또 고대 근동의 임금들은 조약을 맺을 때에 보통 만찬을 함께 나누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과 시나이 계약을 맺은 다음 음식을 함께 나누었다(출애 24,11). 계약에 동반된 공동 식사는 시나이 계약 이외의 다른 계약에서도 발견된다. 이사악과 아비멜렉 사이의 계약(창세 26,26-31), 야곱과 라반 사이의 계약(창세 31,54) 등. 유다교인들은 해마다 해방절 축제를 지낼 때, 과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이 시나이 계약을 기억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성찬례를 거행하며 예수께서 최후만찬 가운데 제자들과 맺으신 새로운 계약을 기념한다.

 

4) 시나이 계약의 중요성

시나이 계약은 모세오경의 중심 사건이다. 출애 1─18장은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거룩한 시나이산까지 가는 여정을 다루고, 출애굽기의 나머지 22장(19─40장)과 레위기 전체, 그리고 민수기 처음 열 장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시나이산에서의 체류를 다룬다. 모세오경 안에서 시나이 계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 만큼 큰 셈이다. 이 계약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준비된다. 야훼 전승과 엘로힘 전승에 따르면, 시나이 계약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까지 소급된다(창세 15장).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은 다시 이사악과의 계약(창세 26장)과 야곱과의 계약으로 갱신되며(창세 28장), 마침내 시나이산 위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으로 (출애 24장) 봉인된다.

사제계 전승은 시나이 계약의 원천을, 아브라함 시대보다 훨씬 더 이전인 천지창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 하느님께서 창조물을 대표하는 첫 남녀에게 내리신 번성의 복에 둔다(창세 1,28).

하느님께서는 이 번성의 복을, 홍수로 세상을 벌하신 뒤에 노아에게 내리신 복으로 갱신하시고(창세 9,1-7),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통하여 이 복의 실제 내용을 자손의 번성과 가나안 땅의 소유로 밝히시고(창세 17장), 마침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새 계약을 맺을 준비를 하라고 명하신다(출애 6장).

자손의 번성과 땅의 소유에 관한 주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곳의 큰 민족이 됨으로써 성취되었다. 신명기에서 열왕기에 이르는 신명기계 역사는 시나이 계약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계약을 부각시키는데, 이 두 계약은 서로 다른 계약이 아니라 연결된 계약이다. 다윗과의 계약은 왕정제도라는 새로운 상황에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다.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임금이 중개자로 들어섰기 때문에,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중개자로 내세워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으셨던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는 다윗을 중개자로 내세워 새로운 왕국의 백성들과 계약을 맺으셔야 했다.

다윗과의 계약 역시 아브라함과의 계약처럼 축복이 약속된다. 다윗의 자손들이 왕좌에 앉아 영원히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고, 그의 나라는 영원히 굳건해질 것이다(2사무 7장).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아들을 당신의 아들로 채택하시겠다는 약속도 덧붙이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2사무 7,14). 이같은 약속을 담은 다윗과의 계약은 시편 2장과 110장 등의 메시아 본문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과 메시아로 선포하는 신약성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편 신명기계 문헌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에서 주님께 충성할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 약속된 땅에서 주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주제는 여호 23─24장의 세겜 계약과 2열왕 22─23장에 나오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도 반복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이 하느님께 충성하지 않고 자주 계약을 깨뜨렸음을 증언한다. 심지어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순간에도 백성과 아론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출애 32장). 이스라엘 쪽의 불충으로 하느님과 그들 사이의 계약은 처음부터 깨뜨려질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시나이 계약의 경우, 계약을 파기한 뒤에 그 저주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삼천 명이 레위인들의 칼에 맞아 쓰러져 죽었다(출애 32,26-28). 그리고 계약은 다시 갱신되어야 했다(출애 34장).

시나이 계약의 정신은 예언서에도 이어진다. 아모스와 호세아 예언서는 모세나 시나이산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시나이 계약의 정신을 자주 반영한다. 후기 예언서인 예레미야서와 에제키엘서의 약속과 심판 신탁에는 이 계약이 언제나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이처럼 시나이 계약은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관통하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규범으로 자리잡는다. 계약의 이행 여부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시작한 여호수아와 판관 시대에 민족의 흥망성쇠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에서 이스라엘 임금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에즈라와 느헤미야 시대에는 시나이 계약을 바탕으로 유다교의 개혁과 쇄신이 이루어진다.

시나이 계약의 확립은 더 이상 계약이 깨뜨려질 위험이 없을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런 시나이 계약의 확립을 새계약으로 묘사한다. "그날이 온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야곱 집안과 새계약을 맺으리라. 이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에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올 때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그 시절이 지난 다음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게 될 계약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 가슴속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써 넣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그때에는 더 이상 제 이웃이나 동기간에 서로 ’주님을 알아 모셔라,’ 하고 가르치지 않으리라. 그들 모두가 다 낮은 자부터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나를 알아 모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예레 31,31-33).

예레미야의 예언은 6백여년이 지난 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제자들을 통하여 온 인류와 맺으신 새계약에서 성취된다. 신약성서에서 계약의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만찬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수께서는 최후만찬 때에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내어주신다. 이는 당신 자신을 과월절에 살해되는 빠스카 양과 동일시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다음 날(유다인 날짜 계산법으로는 같은 날)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심으로써 당신의 목숨을 빠스카 양으로 내주셨다. 복음서 저자들은 특히 십자가의 피흘림에 주목한다.

시나이 계약에서도 피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모세는 짐승의 피 절반을 제단에 뿌려 제단을 정화한 다음, 계약의 내용을 백성에게 들려주고 나머지 피는 백성에게 뿌리며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 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출애 24,8). 레위기에 따르면 짐승의 피는 속죄예식에 쓰였다(레위 17,11). 곧 어떤 사람이 계약의 규정을 어겼을 때에 그는 짐승의 피로 자기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계약의 위반에 따르는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짐승의 피와 관련된 출애굽기와 레위기 두 대목은 성체성서를 제정하실 때 하시던 예수의 말씀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나의 피다.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가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태 26,28; 병행: 마르 14,24; 루가 22,20).

바오로 사도의 이해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율법의 저주를 스스로 맡아 지셨다(갈라 3,13). 그리스도께서 맺으신 새계약이 옛 시나이 계약의 저주를 영원히 철회시킨 것이다.

 

 

 2. 율법

 

계약과 더불어 율법은 구약성서의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모든 율법은 계약의 틀 안에 위치한다. 십계명과 계약의 책은 시나이 계약의 핵심을 이루고, 레위기의 사제계 법전과 성 법전은 금송아지 사건 이후 시나이 계약을 갱신하면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 법전은 40여년이 지난 뒤에 모압 광야에서 이 계약을 갱신한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하느님의 총애를 얻는 한 방법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해 내신 그분의 은총에 대한 합당한 응답이다. 그런데 구약성서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배반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율법에 충실하지 못한 당신 백성을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유배하셨다. 따라서 유다의 지도자들은 율법의 준수가 민족의 구원과 하느님 약속의 실현에 필요 불가결한 것으로 여겼다.

 

1) 율법의 명칭

구약성서에서 율법은 ’지침, 규정, 말씀, 법령, 명령, 계명’ 등 여러 가지 개념들 안에 포함된다. 그 가운데 우리가 통상 ’율법’이라 부르는 히브리말 ’토라’는 본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토라는 유다인들과 신약성서 저자들이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 책, 곧 창세기, 탈출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전승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법령을 제정하고 이 다섯 권의 책을 쓴 사람은 모세라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칠십인역에서는 그의 이름을 빌려 토라를 모세오경(Pentateuch)이라 불렀고, 이후 이 명칭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그대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모세오경은 세상의 창조부터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다루면서도 곳곳에 율법의 규정들을 끼워넣고 율법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 년 이상 이스라엘의 사회·종교적 발전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실제로 모세가 죽은 지 한참 뒤인 기원전 6세기에 와서야 다양한 형태의 민법, 형법, 경신례 규정, 금령, 윤리적 명령, 소송 규칙 등을 총괄하여 율법으로 간주하기 시작하였다(신명 17,19; 27,3; 28,61).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는 율법을 태동시킨 틀이고, 율법은 역사의 방향과 흐름을 주도한 원리라 하겠다.

문학비평은 율법을 다섯 가지 법전으로 구분하였다. 십계명, 계약의 책 또는 계약 법전, 사제계 법전, 성결법전, 신명기 법전이 그것이다.

 

2) 조건법과 단정법

율법을 법전별로 나누어 고찰하기 전에 서로 구별되는 법의 양식에 관하여 살펴보자. 법에는 조건법과 단정법이 있다. 조건법은 일종의 판례법으로서 앞의 조건절에는 "만일"로 시작되는 사례가 나오고, 뒤의 주절에는 "그때엔(또는 ’그는’) …될 것이다"로 이어지는 처벌 규정이 나온다. 이 조건법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 법령 양식이다.

단정법은 주로 이스라엘 종교법에서 주로 발견되는 무조건적인 법(신법)으로 앞에 조건절 형태의 사례가 나오지 않는다.

 

3) 십계명(탈출 20,1-17; 신명 5,6-21)

십계명 또는 열 말씀(Decalogue)은 구약성서 율법의 정수(精髓)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이미 구약성서 저자들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와 바오로의 견해이기도 하다. 모세오경의 저자들은 십계명을 두고 하느님의 직접적인 영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직접 당신의 손가락으로 그것을 쓰셨다고 말한다. 십계명이라는 말 자체는 탈출 34,28; 신명 4,13; 10,4에 나오고, 그 내용은 탈출 20,1-17; 신명 5,6-21에 나온다. 또 열셋으로 확장된 경신례적 십계명은 탈출 34,11 이하에 나오고, 다른 종류의 십계명 단편이 23,14-19에 나온다.

십계명은 조건법 또는 판례법과는 달리 단정법이다. 십계명에는 그것을 어겼을 때에 받게 될 인위적 징벌이 명시되지 않고, 하느님께서 내리실 징벌에 대한 무서운 경고나 그분께서 내리실 복의 약속이 덧붙여진다. 십계명은 종교적 또는 윤리적 원칙들의 바탕을 제시하는 선언이어서 일반 민사법이나 형사법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십계명의 모든 항목이 다 하느님의 뜻을 반영하고 그것을 어겼을 경우 징벌을 불러들이게 되지만, 거기에는 우선 순위가 있다. 처음 다섯 계명을 어긴 자에게는 죽음의 벌이 주어진다. 여섯 번째, "간음해서는 안된다"는 계명을 어긴 경우에는 죽음의 벌이 선택적으로 주어진다. 거짓 증언과 도둑질은 정규 법정에서 처리하지 않고, 남의 소유를 탐내는 것은 법리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십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충성과 그분 이름의 존중과 안식일의 준수 등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의무로 앞세우고, 부모에 대한 사랑과 생명 수호와 혼인 계약의 준수를 첫 번째 의무 못지 않게 중요시한다. 그 다음에 진실과 소유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으로 탐욕에 대하여 경고한다.

한편 십계명의 분류는 유다교 랍비들, 가톨릭과 루터교, 정교회와 개혁교회 사이에서 서로 다르다. 십계명의 본문을 소개한 뒤에 그 차이를 살펴보자.

’새번역’ 탈출 20, 2 나는 너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밖에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대 사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된다. 주님은 당신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버려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준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된다. 14 간음해서는 안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된다."

    유다교 랍비들: 2절, 3-6절, 7절, 8-11절, 12절, 13절, 14절, 15절, 16절, 17절.

    가톨릭과 루터교(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분류): 3-6절, 7절, 8-11절, 12절, 13절, 14절, 15     절, 16절, 17ㄱ절, 17ㄴ절.

    정교회와 개혁교회: 3절, 4-6절, 7절, 8-11절, 12절, 13절, 14절, 15절, 16절, 17절.

 

4) 계약의 책 또는 계약 법전(탈출 20,22─23,33)

’계약의 책’(또는 ’계약 법전’)이라는 명칭은 탈출 24,7에서 소개되고, 그 내용은 탈출 20,22─23,33에 나온다. 이 계약의 책은 십계명과 동시에 주어진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십계명을 일상의 삶에 접목시킨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이 법전의 삶의 자리는 목축 생활에서 농경 생활로 자리잡아 가는 과도기적 사회이다.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직후의 사회상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계약의 책에는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고대 근동의 법전에서 발견되는 내용이 들어와 있다. 이 경우 법조문의 양식은 위에서 언급한 조건법 또는 판례법의 양식을 취한다. 대표적인 예가 동태복수법으로도 알려진 ’탈리온 법’(Lex talionis)이다. "(그러나) 다른 해가 뒤따르게 되면, 목숨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3-25). 이 동태복수법은 그 목적이 무서운 복수를 조장하려는 데에 있지 않고, 복수에 한계를 정함으로써 받아야 할 벌에 비하여 지나친 되갚음을 막는 데에 있었다. 그리고 이 법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집행되었다. 한편, 계약의 책에는 탈출 22,17이하에서 볼 수 있듯이 십계명에서처럼 단정법의 양식도 나온다.

계약의 책이 내용과 양식면에서 고대 근동의 법전과 유사하더라도, 후자를 기계적으로 옮겨놓은 것은 아니다. 탈출기 저자는 성서적 우선 순위에 따라 근동의 법전 내용을 재편집하거나 거기에 새로운 요소를 덧붙였다. 예를 들어 근동의 법전에는 경신례를 비롯한 종교적 법조문이 매우 드물게 발견되지만, 계약의 법전에는 이 법조문이 처음(20,22-26)과 마지막(23,10-19)에 나온다. 또 메소포타미아 법전에는 노예들에 관한 법이 보통 맨마지막에 나오지만, 계약의 법전에는 경신례 법 바로 다음(탈출 21,1-11)에 나온다. 이는 노예들이 단순한 소유물이 아니라 인간임을 인정하는 구약성서의 생각을 드러내는 동시에 십계명 도입 부분에 나오는 주 하느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너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 하신 것처럼 노예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약의 책은 또 인간 셍명을 언제나 재산보다 우위에 두고 존중하였는데, 이것도 고대 근동의 법전과 다른 점이다.

 

5) 사제계 법전(레위 1─16장)과 성결법전(聖潔法典 레위 17─26장)

출전비평에서는 레위기를 둘로 나눈다. 앞 부분 1─16장은 사제계 전승에 속한 본문으로 보고, 뒷 부분 17─27장은 사제계 전승보다 더 오래된 문헌이지만 나중에 사제계 전승에 병합된 법전으로 본다. 성서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전자를 사제계 법전, 후자를 성결법전이라고 부른다. 1─16장은 사제들의 주요 관심사이기도 한 제사와 축제일에 관한 규정들을 포함하는데, 문학비평에서는 이 규정들을 사제계 법전으로 분류한다.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면, 이 규정들은 왕정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바쳐지던 제례(祭禮)를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17─27장의 성결법전은 그 권유 형식과 설교조로 후대의 사제계 전승과는 분명히 구별되며 사상적으로는 에제키엘서(기원전 593-572년)에 가깝다. 성결법전에서는 1인칭으로 소개된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윤리적인 행동과 경신례적 정화의 규정들을 전달하신다. 이 법전은 19장과 21장에서 볼 수 있듯이 경신례 안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되다가, 마침내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으로 추정된다.

레위기의 저자는 이 책에 실린 모든 법과 규정이 계약의 책처럼 시나이에서 선포된 것으로 말한다. "이것이 주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당신과 이스라엘의 자소들 사이에 세우신 규정과 법규와 법이다"(레위 26,46; 27,34).

레위기의 법 규정도 십계명이나 계약의 책에서처럼 성서적 우선 순위를 따른다. 곧 하느님에 관한 의무 규정을 먼저 소개하고, 그 다음에 이웃에 대한 규정을 소개한다.

’거룩함’은 레위기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20,26).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은 일차적으로 구성원의 윤리 도덕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개인으로든 공동체로든 하느님께 속해 있고 그분의 길을 따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거룩함’의 반대 개념은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제외시켜야 할 모든 ’속됨’이다(레위 21-22장). 성소(聖所)가 거룩한 이유는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그곳에 사시기 때문이며, 사제들이 거룩한 이유도 거룩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를 주관하기 때문이다.

거룩함(聖)의 반대가 속됨(俗)이라면, 깨끗함(淨)의 반대는 더러움(不淨)이다. 그리고 깨끗함은 거룩함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거룩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은 깨끗한 상태의 유지와 부정한 것과의 철저한 분리를 의미한다. ’거룩한’을 뜻하는 라틴어 쌍뚜스(sanctus)는 ’분리하다, 가르다’라는 뜻의 동사 쌍치레(sancire)에서 나왔다.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하고 더러운 것과 접촉해서는 안된다. 더러운 것은 거룩하신 하느님과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될 주변의 우상이나 잡신들과 관계된 것, 생명이신 하느님과 반대되는 죽음과 관련된 것들이다. 특정한 짐승들의 고기를 먹지 못하게 한 것은(레위 11장; 신명 14,3-20) 단순히 미관상이나 위생상의 이유만이 아니라, 그것들이 우상숭배나 인간을 위협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들과 관련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돼지는 고대 가나안인들이 제물로 바치던 짐승이고 이집트에서는 지하 세계의 신들과 접촉할 수 있는 존재였다.

낙타는 고대 아랍인들에게 주요 제물이자 신성한 짐승이고 이집트인들에게는 신적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개는 이집트, 이란, 북부 시리아에서 신성시되었고, 헷족들의 신들은 개들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사 66,17에 따르면 쥐도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이고, 실제로 하란에서는 생쥐들이 제물로 바쳐졌다. 토끼의 대가리와 발톱은 오늘날까지도 아랍인들 사이에서 부적으로 통하고, 올빼미는 아라비아에서 죽은자가 육화한 짐승으로 공경을 받는다. 이 밖에도 많은 짐승들이 고대 근동에서 제물로 바쳐지거나 신성시되었다. 이런 짐승들은 제물로 사용해서도 안되고(창세 8,20), 맏물 봉헌이나(레위 27,27; 민수 18,15) 십일조로 바쳐져서도 안된다(레위 27,32).

정확한 생리 지식이 없었던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 몸에서 나오는 각종 분비물(고름, 정액, 생리혈 등)도 초월적 힘을 지닌 존재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사람이 이것들에 접촉했을 때 더러워진다고 믿었다(레위 12; 15장 참조).

죽음과 연관된 것들과의 접촉도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 그것들이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의 시신(레위 21,1-3.11; 민수 6,6-7; 19,11-16), 짐승의 시체(레위 11장), 무덤(민수 19,16), 그리고 각종 전염성 피부병과 곰팡이(레위 13-14장)와의 접촉은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레위 11장). 이런 것들과의 접촉으로 더러운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하느님과 분리되어 있으므로, 정결 예식을 거쳐 깨끗해져야만 거룩하게 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생명은 존중해야 한다.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피 안에 있고(레위 17,14), 생명을 뜻하는 피는 하느님께 바쳐져야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생피를 마시거나(레위 17,10-13), 피가 아직 담겨있는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어서도 안된다(사도 15,21 참조).

 그런데 백성이나 개인이 거룩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과 직접 만나거나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세 같은 몇몇 비범한 인물들을 빼고 범속한 인간으로서는 하느님을 뵙거나 그분과 직접 통교할 수 없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통교 수단으로 두 가지가 제시된다. 하나는 각종 제사를 중심으로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소, 만남의 장막, 계약궤, 성전 등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현존하시는 자리이다. 그리고 이 둘의 관리는 모두 사제들에게 맡겨졌다.

 창세기에 따르면 성조시대에는 사제라는 어떤 특정 계층만 제사를 거행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성조들도 가문의 우두머리로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창세 8,20; 15,9-10; 22,1-14). 그러나 후대에 내려와 특정 계층의 사제직은 일정한 장소, 곧 성소에서 경신례를 정기적으로 집전하면서 확립된다. 이처럼 경신례와 성소와 사제직은 처음부터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제들은 흔히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 인식되었다. 아무도, 비록 한 나라의 최고 권력을 지닌 임금이라 하더라도 이 사제들의 중재 임무를 대신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이 하느님께 버림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가 사제가 아니면서 사제의 고유 권한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불레셋인들과 성전(聖戰)을 치르기 전에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라 주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당시 사제요 판관이던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사울이 직접 나서서 주님께 번제물을 바쳤다(1사무 13,7-13). 그러나 제사 집전은 전투의 우두머리인 임금의 소관이 아니라 사제의 일이었으므로, 사울은 신성모독죄를 짓게 된 것이다. 다윗 시대에 계약궤를 옮기던 도중 우짜라는 사람이 계약궤가 흔들리는 것을 붙잡았다 죽임을 당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2사무 6,6-7). 그가 사제(또는 레위인)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지만, 하느님의 거룩한 현존이 머무르시는 계약궤를 합당한 신분이나 합당한 예로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다.

 

6) 신명기 법전(신명 12─25장)

 신명기는 그리스말로 ’두 번째 법’(신명 17,18)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비록 12─25장에 일련의 법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책의 형식이나 내용에 썩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가나안 땅의 진입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의 준수를 촉구하는 일종의 설교 형식으로 쓰여졌다. 설교의 요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행복과 번영을 누리고자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자신들에게 전해 주신 율법을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와 레위기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주시거나, 모세를 통하여 백성에게 전하신 법을 선포하는 데에 반해, 신명기는 율법에 대한 모세의 반성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지키도록 설득하는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신명기 법전으로 분류되는 12─25장의 법 규정들 역시 십계명의 우선 순위를 따른다. 그리고 십계명의 몇몇 조항과 뚜렷하게 연결된다. 12─13장은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마라’는 제1계명을, 15─16장은 ’안식일과 축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는 제3계명을, 17─18장은 ’부모와 웃어른을 공경하라’는 제4계명을, 19─21장은 ’살인하지 마라’는 제5계명을, 22─23장은 ’간음하지 마라’는 제6계명을, 23─24장은 ’도둑질하지 마라’는 제7계명을, 25장은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는 제8계명을 각각 다룬다. 여기서도 하느님께 대한 의무에 이웃에 대한 의무가 뒤따른다.

 

7) 율법의 완성

 율법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성과 태도는 가장 긴(176절) 시편인 시편 119장에 잘 나와 있다. 그래서 이 시편을 율법시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율법시편은 각 대목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 알파벳 22자로 시작되고, 8절로 이루어진 한 대목은 매 절 시작마다 같은 알파벳 글자가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알파벳 노래’이다. 이 시편에 나오는 중요한 통찰들을 몇 가지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율법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요 그분의 가르침이다. "행복하여라, 그 길이 온전한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걷는 이들!"(1절; 참조: 26-27, 33-35절 등). 둘째, 율법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짐과 괴로움이 아니라 큰 재산이요 기쁨이다. "온갖 재산을 얻은 듯/ 당신 법의 길로 제가 기뻐하나이다"(14절; 참조: 24, 72, 92, 143절 등). 셋째, 이스라엘은 율법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사랑한다. "저는 당신 계명으로 기꺼워하고/ 그것을 사랑하나이다"(41절; 참조: 113, 119, 159, 163절 등). 넷째, 율법의 실천은 구원을 얻게 해준다. "주님, 저는 당신의 구원을 바라며/ 당신의 계명을 실천하나이다"(166절; 참조: 50, 81, 88, 93-94, 134, 146절 등).

 율법을 두고 유다인들이 이렇게 긍정적인 생각을 갖는 데 반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가? 아마도 율법에 대한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의 비판적인 말씀 때문에 그같은 생각을 갖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가 율법 그 자체를 문제시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니다. 율법에는 분명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 예수님은 언제나 율법에 담긴 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실천하라고 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21)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은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가 비판한 것은 율법의 시행세칙에 매달려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못보거나 일부러 지나치는 ’율법주의’(Legalism)였다. 예수님은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사랑의 두 가지 중대한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밝혀주셨다(루가 10,25-28).

 율법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또 다른 원인은 율법을 의무 규정이라만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은 그것을 지키지 않을 때 징벌을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율법을 동양 사상에서의 도(道)와 연관시켜 생각하면 이런 의무감에서 한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율법은 하느님께 가는 길이요 가르침이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도리요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도를 닦고 안 닦고는 형법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도를 훌륭하게 닦는 사람은 올바른 인간이 되고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율법을 단순히 윤리 도덕의 지침과 규정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인간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도요 지켜야 할 도리로 이해하면, 형식적이고 경직된 율법주의에서 좀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3. 제사 또는 제물

 

 먼저 제사를 가리키는 히브리말이 완전히 하나로 고정되지 않았고 개념상 우리말에서처럼 제사와 제물이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성서 번역이나 전례문에서 두 낱말의 사용에 혼란이 없지 않음을 지적한다. 우리말에서는 제사가 제물을 바치는 행위이고 제물은 제사때 바쳐지는 음식을 뜻하는 것으로 두 낱말이 구별되지만, 히브리말에서는 제물의 종류와 바치는 방법 및 목적까지 모두 하나로 표현된다. 많은 경우 제사보다는 제물로 표현해야 문맥에 맞을 때가 많다.

 인간이 신에게 찬미와 감사와 속죄와 청원의 뜻을 담아 바치는 제사 또는 제물은 고대 근동의 종교에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이스라엘의 제사 예식은 그 개념과 세부 사항들을 두고 이웃 나라 종교들과 공통점을 많이 지니면서도, 나름대로의 고유한 규정들을 확립해 놓았는데, 이 규정들은 전체적으로 시나이 계약의 틀 안에 들어와 있다. 제물의 종류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짐승과 땅의 소출이다. 짐승의 경우 소, 양, 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제물로 삼고, 땅에서 나는 곡식예물의 경우 밀, 보리, 올리브 기름, 포도주, 향을 제물로 삼는다. 모든 곡식예물에는 정화와 양념의 기능을 갖는 소금을 넣어야 한다. 소와 양과 염소 등 짐승을 잡아 제물로 바칠 때, 생명을 뜻하는 그것들의 피는 제단에 뿌리거나 제단의 뿔들에 바르고 제단을 정화하기 위하여 제단 밑바닥에 쏟는다. 그리고 내장에 붙은 굳기름과 콩팥은 하느님께 속한 것이므로 제단 위에서 태운다(레위 3,16). 제물로 삼은 짐승은 흠이 있는 것, 곧 병들었거나 상했거나 거세된 것이어서는 안된다(레위 22,17-25).

 일반적으로 제물은 보통 세 가지 지향으로 바쳐진다. 첫째 신에게 ’예물’을 드리려고, 둘째 신과 ’통교’를 이루려고, 셋째 신에게 ’속죄’하고 용서를 얻으려고 제사가 바쳐졌다. 이스라엘의 경우 본디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맏물 봉헌은 ’예물’을, 친교제물은 ’통교’를, 속죄제물과 보상제물은 ’속죄’를 위해 봉헌되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고 주변 상황이 바뀌면서 이스라엘은 갖가지 재앙과 저주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과 죄악과 직결된 것으로 인식하고 제사에서 속죄와 화해의 목적을 더 강조하게 된다. 여기서는 제사의 종류와 의의만을 간단하게 소개하겠다.

 

1) 번제물(레위 1장)

 번제는 가장 흔하고 일반적인 제사로서, 가죽을 빼고(가죽은 사제에게 돌아간다) 짐승 전체를 제단 위에서 완전히 살라 바치는 것이 특징이다. 번제물을 일컫는 히브리말은 본디 ’올라가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는데, 이 말에는 고기를 태울 때에 나오는 연기와 냄새가 하늘로 올라가 그곳에 계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풀어드리고 기쁘시게 해드린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번제물에는 흔히 ’하느님을 흐뭇하게 하는 향기’라는 표현이 붙어다닌다. 제물을 남김없이 태워바치는 번제는 제물을 바치는 자의 완전한 봉헌을 뜻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제사로 여겨졌다. 다른 제사에서는 제물의 몫이 그것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자신을 번제에 바쳐질 짐승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뜻으로 그 짐승 위에 손을 얹는다. 제물로 바쳐질 짐승은 자기가 기르는 양이나 소나 염소 가운데에서 고르되, 가장 좋은 것, 곧 ’흠이 없는 수컷’으로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에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같은 날짐승을 바칠 수도 있다.

 

2) 곡식제물(레위 2장)

 곡식제물도 번제물처럼 불에 완전히 살라바친다. 곡식제물은 가루로 만들어 생으로 바칠 수도 있고, 굽거나 삶거나 지지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바칠 수도 있다. 생으로 바칠 경우에는 향을 첨가시킨다. 요리해서 바칠 때는 발효하거나 달게 해서는 안된다. 생으로 바치든 요리해서 바치든 곡식제물에는 기름이 곁들여진다. 곡식제물로는 밀, 보리, 향이 바쳐졌다. 가난한 이가 속죄제물로 짐승을 바치는 대신 곡식을 바칠 경우에는 기름과 향을 곁들이지 않았다(레위 5,11; 민수 5,15 참조). 곡식제물은 보통 한 손 가득히 떠서 향과 더불어 제단에 태우고, 나머지는 사제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사제가 곡식제물을 바칠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예물에서 이득을 취할 수 없으므로 모두 태워 바쳐야한다(레위 6,23).

 민수 15장에 따르면 번제물과 친교제물은 보통 기름을 섞은 곡식예물과 포도주가 곁들여졌다. 이 때에 곡식의 양과 포도주의 양은 봉헌되는 짐승의 종류에 따라 달라졌다. 큰 짐승에게는 그 만큼 많은 분량의 곡식예물이 곁들여졌다.

 

3) 친교제물(레위 3장)

 친교제물은 사람들이 고기를 먹고자 할 때에 바쳤다. 제물로 쓰이는 짐승은 소, 양, 염소이다. 제물 가운데 내장의 굳기름과 콩팥은 제단에서 하느님께 태워바치고, 오른쪽 넓적다리는 제사를 주관한 사제에게, 가슴 부위는 모든 사제에게 돌아간다(레위 7,31-34). 나머지 부분은 제물을 가져온 사람 차지인데, 고기는 하루나 이틀 안에 친지들과 더불어 다 먹어치워야 한다(레위 7,15; 19,6-8). ’친교제물’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평화, 안녕’을 뜻하는데, 이 제물은 본디 하느님과 사람과 이웃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하는 데에 바쳐졌다.

 친교제물은 그 목적에 따라 감사(또는 찬미)제물과 서원제물과 자원제물로 세분화될 수 있다(레위 7,11-18). 시편 107장에는 감사제물을 바치기에 적합한 네 가지 기회를 언급한다. 사막을 무사히 통과했을 때,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중병에서 회복되었을 때, 바다에서 폭풍우에 시달리다 그 위험에서 벗어났을 때이다. 그 다음 서원제물은 서원한 사람이 서원을 채우고자 할 때 바쳤고(2사무 15,7-8), 자원제물은 특정한 기회와 상관없이 원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바칠 수 있었다. 이 밖에 임직제물도 친교제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제물을 바칠 때 주례 사제는 짐승의 피를 사제 직무를 받는 사람의 몸과 옷에 발랐다(출애 29,19-34; 레위 8,22-32).

 

4) 속죄제물(레위 4장─5,13)

 속죄제물과 보상제물은 서로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본디 둘로 나누어진 제물이 후대에 합쳐진 것인지, 한 제물인 것을 후대의 편집자가 인위적으로 나눈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속죄제물은 주로 하느님의 법이나 규정을 어긴 행위를 갚기 위한 반면, 보상제물은 주님께 속한 봉헌물을 잘못 바친 행위나 다른 사람에게 끼친 손해를 갚기 위한 제물이었을 것이다. 보상제물의 경우 잘못한 값어치에 오분의 일을 가산하여 바친다. 그러나 이 두 제물은 다 고의적인 범죄를 속죄하거나 보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거슬러 고의로 범한 죄악은 절대로 속죄받을 수 없으며, 이웃을 거슬러 저지른 죄악도 그에 합당한 징벌로 다스림을 받아야지 제사로 보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죄제물의 목적은 본의 아니게 또는 실수로 부정하게 된 사람을 다시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속죄제물은 보통 정화예식과 깊이 연관되고 공동체 전체가 거룩하게 참여해야 하는 축제 때에 통상적으로 바쳐졌다. 그리고 번제와 속죄제물을 함께 바칠 때에는 속죄제물을 먼저 바침으로써, 다른 제사가 바쳐지기 전에 공동체와 제단을 정화시켰다. 속죄제물에 사용되는 짐승의 종류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지위에 따라 달랐다. 대사제나 공동체 전체가 잘못하였을 때는 수소를 바치고, 통치자의 경우에는 수염소를, 일반 평민의 경우에는 암염소나 암양을 바쳤다. 예식 자체에도 차이가 났는데, 공동체나 공동체를 대표하는 대사제가 잘못한 경우에는 제물을 바치는 장소인 성소 자체가 부정하게 되었으므로, 성소 휘장의 정면에 수소의 피를 뿌리고 분향제단의 뿔들에 그 피를 발랐으며 수소의 고기는 먹지 않고 진영 밖에서 태웠다. 통지자나 평민 등 개인의 경우에는 바깥 제단만 더럽혀진 것이므로, 제단의 쁠들에 염소나 암양의 피를 바르고 짐승의 고기는 사제가 차지하였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에는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를 주님께 바칠 수 있었고, 이것도 장만할 수 없을 지경이면, 고운 곡식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대신 바칠 수 있었다.

 

5) 보상제물(레위 5,14─6,7)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님께 속한 봉헌물(맏물과 십일조)을 실수로 잘못 바치거나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을 경우에 바치는 보상제물은 손상된 것의 회복에 그 목적이 있다. 맏물과 십일조를 잘못 바치게 되는 사례는 이 봉헌물을 실수로 바치지 않거나 규정된 양을 다 채우지 않고 바치거나 봉헌 예식을 잘못 거행하는 경우 등이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는 사례는 위탁물이나 담보물이나 약탈물과 관련하여 동족을 속이거나 착취함으로써 그의 권리를 침해한 경우이다. 동족의 권리 침해는 이스라엘 백성의 권리를 당신의 권리로 여기시는 주 하느님의 주권을 훼손하는 것이다.

 주님께 속한 봉헌물의 경우이든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이든, 보상제물을 바칠 때에는 봉헌자가 먼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고백해야 하고 숫양 한 마리와 더불어 보상해야 할 값어치를 성전 세겔로 환산하여 바칠 뿐 아니라 벌금으로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덧붙여야 한다. 이 제물만이 유일하게 짐승 대신 돈으로 바칠 수 있었다(레위 5,18; 참조: 2열왕 12,16). 보상제물은 언제나 개인적인 제물이므로 속죄제물에서처럼 그것을 바치는 사제가 짐승의 고기를 차지한다.

 

6) 성전의 전례

 성전의 일상적 전례는 아래와 같이 이루어진다. 전날 저녁에 바쳐진 번제물은 아침까지 밤새도록 제단 위에서 타고 있어야 하고 제단의 불도 꺼지지 말아야 한다. 사제는 제단 위의 재를 청소하는 일로부터 아침 전례를 시작한다. 그 다음에 담당 사제는 장작을 새로 넣어 사그라드는 불을 다시 지피고 곡식제물과 제주를 곁들여 일년된 숫양을 번제물로 바친다. 그리고 나면 대사제가 정장을 하고 성소에 들어와 기름 등잔을 손질하고 안쪽 분향제단에서 향을 바친다. 향을 바치고 난 대사제는 밖으로 나와 번철에 구운 밀가루 과자와 더불어 고운 밀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기름에 반죽하여 곡식제물로 바친다. 저녁에는 두 번째 양이 아침과 같이 바쳐지고, 대사제가 다시 성소에 들어와 기름 등잔을 손질하고 분향제단에서 향을 태워 바친다. 그리고 나머지 곡식제물 반을 마저 바친다.

 안식일에는 양 두 마리를 더 바친다. 성소에는 빵 열두 개를 구워, 지성소 바로 앞에 놓인 순금으로 된 제사 상 위에 언제나 여섯 개씩 두 줄로 쌓아놓거나 차려놓는다. 이 빵은 매 안식일마다 새 것으로 바꾸고 오래 된 빵은 사제들이 먹는다. 빵 위에는 순금으로 된 작은 잔에 순수한 향을 담아 얹어놓았다가 나중에 이 향을 기념제물로 태워 주님께 바친다.

 속죄의 날은 모든 부정을 벗는 날이다. 이 날 사람들은 일을 그만두고 쉬면서 단식한다. 예식을 주관하는 대사제나 사제는 이 날에만 입는 특별한 예복을 갖추고 속죄의 날 예식을 거행한다. 속죄의 날에는 두 가지 속죄제물을 바치는데, 하나는 사제들을 위한 제물(수소)이고 다른 하나는 일반 백성을 위한 제물(염소)이다. 예식을 주관하는 사제는 향을 피워 자신과 계약궤 사이에 연기막을 만든 다음 살해된 짐승의 피를 지성소에까지 가지고 들어와 계약궤에 뿌린다. 이렇게 성소를 정화시키고 나서 주례 사제는 자기 손을 살려둔 숫염소 위에 얹고 백성의 죄들을 그 앞에서 고백함으로써 백성의 죄를 염소에게 전가시킨다. 그런 다음 백성의 죄를 짊어진 이 숫염소는 광야로 내몰린다.

 

7) 제사제도의 남용

 제사제도는 쉽게 형식주의에 흘러 남용될 소지가 있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당대의 세태에 비추어 이같은 제사의 남용을 자주 비판하였다(예: 아모 5,25; 이사 1,11-12; 예레 7,22). 사실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자신의 윤리적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도 자신들이 바치는 제물은 당연히 하느님께 가납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들의 죄를 단순히 외적인 요소로 여겨 그 부정적인 효력을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로 정지시킬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였다. 그러나 죄는 근본적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내적 자세에 근거한다. 그래서 많은 성서 대목이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그분의 뜻에 순명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밝힌다(1사무 15,22-23; 시편 40,6-8).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제사는 겸손하게 뉘우치는 마음과 더불어 바치는 의로운 제사이다(시편 50,19-21).

 구약의 불완전한 제사는 신약에 와서야 완전하게 완성된다. 짐승의 목숨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며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십자가 위에서의 수난과 죽음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에 꼭드는 완벽한 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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