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스크랩] 로이드존스 교리강해1 제5장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

하나님아들 2016. 4. 5. 00:15
5장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롬 11:33).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11장의 마지막에 기록한 말로서 이 감동적인 구절을 마음에 새겨놓는 것보다 더 우리의 성경 교리 연구에 도움을 주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전체 주제에 대한 서론을 마무리 했으니 이제는 각각의 교리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첫째로 살펴볼 교리는 성경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교리로서 하나님에 대한 교리입니다.

Ⅰ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중요성

지난 백 여년 간의 신학과 성경 자료들에 대한 전형적인 접근 방법이 거의 대부분 그 출발점을 인간을 설정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된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학은 언제나 주관적이며 항상 인간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모더니즘은 자기 자신과 소위 기원에 대한 심리학적 개념들에 대해 관심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 또는 세상으로부터 출발하며, 그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연구로 진행해 나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 시작합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주 위대한 첫 진술을 기억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가 이것을 강조하고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궁극적으로 다른 모든 교리의 총합입니다. 이 위대한 중심이며 모든 포괄하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교리가 없이는 다른 모든 교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교리나 죄의 교리를 살펴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성경의 시작인 이 엄청난 진술로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이 교리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분명한 주제와 맞닥뜨린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하나님의 본성과 존재의 필연적인 결과로, 이 주제는 한없이 영원한 세대에서 하나님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의 지식을 체계화하려 노력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특히나 예배에 있어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저 성경을 일반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중요한 큰 원리들을 강조해야 합니다. 이것을 알게 된 후에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존재

분명 우리가 처음 다루어야 하는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을 알기 원하기에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은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주제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명확히 하는 것이 필수적이기에 이 문제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선언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언가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당연한 일로 간주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구절을 살펴봅시다. ‘자, 다음 증거들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그가 존재하셨으므로 그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확증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단지 그분의 존재를 진술할 뿐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14장과 17장, 로마서 1장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우리의 불신에 대해서는 변명할 수 없다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소극적인 논증일 뿐이지 자연 등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의미의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누군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자연에 남겨 놓으신 흔적들이 그의 불신을 논박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주장하듯이, 믿지 않는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들

여기서 증명의 문제를 오래 다룰 수는 없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기에 그런 증명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잠시 언급합니다. 수많은 논증이 있으며, 성경 교리와 신학에 대한 대부분의 교과서는 그것을 상당히 자세히 다룹니다. 소위 우주론적 논증은 자연을 근거로 한 논증으로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질서와 설계로부터 끌어 낸 논증인 목적론적 논증은 만물은 분명히 무엇엔가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논증에서는 우리의 선과 악에 다한 의식, 옳고 그름에 대한 자각이 도덕적 존재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킨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다음으로, 모든 사람은, 짐지어 가장 미개한 인종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느낀다는 사실에 근거한 논증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느끼게 된 어떤 근거가 반드시 있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런 논증들에 대해 가르쳐 주는 바는 이러한 논증을 통해서는 결코 믿음이 생겨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들은 소극적인 의미에서 유용하기는 하지만 결코 믿음으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믿음이 없이는, 믿음으로 이끄는 성령님의 내적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주시는 선물인 믿음의 선물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인해 믿게 되었을 때, 위에서 말한 증거들은 그 믿음을 뒷받침해 준다는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증거들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들을 당신의 믿음을 강화하고, 당신과 토론하게 된 사람들을 핑계치 못하게 만드는 데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Ⅲ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은 계시며 성경은 분명 거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과, 또한 우리를 세상 안에 두셨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 성경이 존재를 단언하는 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모든 주제 중 대단히 중요한 측면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대한 이 질문은 모든 종교의 목적, 가장 큰 목적입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할 커다란 문제입니다.

1 우리의 최고의 필요이자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 최고의 필요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것이어야 하며, 그래서 ‘하나님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신론(deis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 가르침을 믿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은 시계 제작자가 시계를 만들 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나서 더 이상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기대하는 다른 어떤 축복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추구, 모든 예배, 모든 노력의 목표가 특별한 체험이나 특정한 복을 구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즉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 복이 아니라 복 자체의 근원이자 샘이 되시는 분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과 자신의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되고 전적으로 비성경적인 일입니다. 우리 주님 자신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우리의 최고선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목표이자 목적지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며, 우리의 노력의 이유도 이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영생에 대한 우리 주님의 정의를 생각해 봅시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영생을 우리가 받은 어떤 것이 경험한 것 등 주관적 방식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영생에 포함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8).

이제 이 문제를 올바르게 정리해 봅시다. 우리가 용서받았음을 알고 싶어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 죄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것도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소망들이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전체적인 마음가짐은 대단히 그릇되고 부적절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는 대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 소망을 다른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요?

2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능한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용어 하나를 소개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가르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은 하나님을 최종적으로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읽어 나가며 마음으로 이해하려 애쓰지만, 하나님은 불가해한 분이시기에 궁극적이고 최종적이며 완벽한 의미까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 로마서 11장 33절, 이사야 55장 8-9절에서 이 점을 어떻게 기술했는지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에 거하십니다. 영원하시고 절대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은 불가해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불가해한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분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감사하게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은 부분적인 지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것이 부분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은 진정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이끌기에 충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이라는 용어를 소개해야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들 중 하나님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씀하고 계신 구절들을 말합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감정을 느끼시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이 또한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대해 알게 하고자 계획된 구절들입니다.

제시할 또 하나의 논거는 성경에 하나님의 선지지들과 종들에게 보여졌다고 기록된 환상들입니다. 모세가 반석 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던 사건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출 33:18-23). 이 환상들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들은 분명히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존재의 일부를 보여 주신 표본이자 예증일 뿐이었습니다. 이 환상들이 하나님이 구원 등과 관련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사건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에게 자신의 탁월한 영광을 잠시나마 볼 수 있게 하락하셨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영원히 영광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은 불가해한 분이시지만, 그분의 무한하신 은혜와 인자하심과 겸손하심에 의해 알려지실 수 있는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알려지십니다.

Ⅳ 하나님의 본성

이 주제에 접근하는 합당한 자세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지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연구를 하는 이유가 지적인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둡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는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을 때 모세가 했던 일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 그는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출 3:8)고 말하고는 이 놀라운 현상, 불타지만 타버리지는 않는 이 떨기나무를 조사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이로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5절). 이런 일들을 고찰해 볼수록, 성경을 더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왜 고대의 유대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절대로 입에 담지 않았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은 너무 큰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하나님의 엄위하심의 개념을 알고 있었기에 심지어 그 이름을 말하는 것조차 감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라는 표현은 있지만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말은 결코 성경에 없습니다. 우리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기 때문입니다(히 12:28-29).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기고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이 주제에 접근하도록 합시다.

1 무한하심

성경은 하나님의 무한성(infinity), 즉 하나님의 본성이 무한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유한하지 않음’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존재이시며 다른 무언가로부터 유해하지도, 다른 무언가에 의해 영향을 받지도 않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존재! 이 얼마나 경이적인 사상입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무한성은 그분이 다른 모든 것의 원인이며, 모든 실존, 모든 존재가 그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무한성은 하나님이 모든 구속과 한계로부터 자유로우시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한 그 어떤 제한도 전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이시며, 모든 곳에 계시고, 제한이 없으십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고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만물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높으심, 장엄하심, 말할 수 없는 위엄, 탁월하심 등을 생각해 보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성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곳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반드시 이 사실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신인동형론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것으로 인해 잘못을 범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가운데 다가가고 있는 분이 바로 이 무한하시고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노력합시다.

2 영이심

성경이 강조하는 또다른 하나님의 본성은 그분이 영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 주님 자신이 영단번에 진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요 4:24).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그의 유명한 설교에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행 17:24).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말은 하나님이 물질적인 존재여서 어떤 형체 혹은 몸 안에 한정되어 있다는 일체의 개념을 배격합니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물질에 속한 특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인 감각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적인 관점에서는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자신이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요한의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 1:18). 바울도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호로 하나이신 하나님께....”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종종 형상들과 초상들을 만드는 것을 금한 이유도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첫 두 계명과 그 외 다른 곳들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에 대한 가장 놀라운 증거는 후에 살펴볼 그분에 대한 또 하나의 진리, 즉 그분의 편재하심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곳에, 그것도 같은 시간에 모든 곳에 계시다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언급하는 구절들에 대한 이해

하나님이 모세를 반석 틈에 두고 그에게 자신의 등 부분만 보라고 하신 사건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출 33:23)? 그리고 우리 주님이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요 5:37)라고 하신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대답은, 비록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존재이시지만, 원하실 때는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 주님이 성육신 이전에 언약의 사자로 나타나셨다는 말씀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무언가 가르치려 하실 때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본성이 아닙니다.

두 번째 대답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기 위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무한하시고 영이시라는 개념을 파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치 그분이 사람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도록 하나님은 자신이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인동형론의 개념입니다.

3 인격이심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의 마지막 특성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성(personality)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이 그대로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게도 성경 전체에 걸쳐 암시되어 있습니다. 인격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격은 마음, 지성, 의지, 이성, 개별성, 자의식, 자기 결정 등이 있는 곳에 존재합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때 인격이 있는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이시라고 단언합니다.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것이 얼만 중대한 사실인지요. 우리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이 문제가 중요했던 것은 범신론때문이었습니다. 범신론은 지금도 여러 형태로 유행하고 있습니다. 범신론을 믿는 사람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범신론자는 그런 이유로 해서 자연을 숭배합니다. 그는 자연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범신론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대한 정신 혹은 위대한 힘 혹은 위대한 에너지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문자 ‘M’으로 표기하는 정신(Mind)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정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인격이십니다. 그분은 또한 대분자 ‘F’의 힘)(Force)도, 대문자 ‘E’의 에너지도 아닙니다. 이 말들은 모두 의식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단지 에너지, 의식이 없는 에너지, 의식이 없는 권능, 힘, 활력 등으로 묘사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격이시라고 말하며 이것은 참된 예배의 마음을 갖는 일에 있어서, 그리고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확신을 갖는 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성경적 증거

성경은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가르칩니다. 간접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 하나님 자신의 표지와 하나님의 지성과 감성의 표지를 남겨 놓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와 질서의 증거를 보게 됩니다. 이것들은 그저 우리가 이 세상에 ‘자연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 냈기에 만들어질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발명품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논증하듯이 우리는 자연법칙으로부터, 그 설계와 질서로부터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표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증거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임재가 언제나 인격적인 방식으로 묘사되었다는 사실을 눈치챘습니까? “나는....이다(I am).”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격적 존재이며, 하나님은 그분이 자신을 이런 말씀하심을 알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단순한 무의식적인 힘이 아니라 인격이심을 선포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하나님과 우상이 대조하는 방식을 생각해 봅시다. 시편 115편을 읽어 보십시오. 시편 기자는 이 우상들이 눈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보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데셀로니가인들에 대해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살전 1:9). 그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며, 하나님은 사람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실 수 있고, 특정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복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이 모든 것 역시 인격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최종적인 증거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성육신에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인격 안에서 자신이 자신이 인격적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이 말을 하고 계신 분이 인격이셨으므로 하나님도 분명 인격이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런 인격적 특성이라는 견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아무 신에게나’가 아니라 인격이신 ‘거룩하신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면에서, 그리고 어디서나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임을 단언합니다.

4 통일체이심

마지막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통일체(one unity)라는 사실도 가르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신 6:4). 삼위일체 교리를 다룰 때 이 사실을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살펴본 진리는 바로 이것입니다. 무한하시고, 절대적이시고, 장엄하시고, 탁월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엄위하시고, 강력하시고, 영원하신 분, 영이시며 진리이시며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시는 이 하나님이 여러분과 내가 그분을 알고, 그분께 이야기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을 은혜 가운데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우리를 만나 주시며, 우리의 무가치하고 볼품없는 예배와 찬양과 경배를 받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라!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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