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When the Holy Spirit came upon korea in1907
캐나다 출신 선교사 Stephen Goforth가 펴낸 "When the Holy Spirit Came upon Korea in 1907"에서 평양 대부흥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이 내게 너무도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주님께 행한 것이 참으로 미미해 내 자신이 부끄러운 감정을 갖지 않고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룩한 성취와 희생을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이야기를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 들려주자
중국인 청중들이 자주 울음을 터트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값 주고 산”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국에서의 복음의 승리 소식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당신 역시 확실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역시 겸손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한국의 주요 선교 중심지 여덟 곳을 방문한 것은 한국에서 놀라운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1907년이었습니다. 중국에 돌아와 나는 묵단에 있는 중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부흥 소식을 전해주자 그들도 깊은 감동을 받은 듯 했습니다.
나는 페이 타이 호에 가서 그곳 선교사들에게 어떻게 주께서 한국에 축복하셨는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몇몇이 눈물을 흘리며 그 같은 축복이 중국에 임할 때까지 기도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다른 휴양지 키궁산에 초청을 받아 그곳에 가서 한국에 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느 한 주일 저녁에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설교가 끝나갈 즈음 너무 오래 설교 했다는 느낌이 들어 즉시 나는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정적이 그 현장을 압도하는 듯했습니다. 이렇게 약 6, 7분이 흐른 뒤 회중 가운데
회개의 역사가 터졌습니다. 죄가 고백되었고 나뿐 성질, 다툼, 그리고 그 유사한 죄에 대해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모임은 늦게 끝났으나 그곳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성령께서 불로 정련하시며 그들
가운데 임재 하셨음을 느꼈습니다. 그런 후 우리는 4일간의 사경회와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교사들 가운데 지금까지 목도한 가장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중국교회가 부흥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 정각에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해 가을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 현시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하기 시작했으며,
그 권능은 만주와 그 밖에 지역에서 1908년 시작된 후 더 강력한 상태로 점증했습니다.
한국에서 부흥운동이 처음 목도되기 시작된 것은 1903년이었습니다.
한국의 동해안 원산의 하디(Robert Hardie) 선교사가 선교사들이 연 한 작은 기도회에서
기도에 대해 몇 번의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주제를 준비하다 요한복음 14장과 그 밖의 성경으로부터 성령께서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심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기도에 대해 강의를 하자 모든 선교사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한국 그리스도인들 역시 기도회에 참석 대단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 후 하디 박사는 한국의 전역에 있는 열개의 선교 중심지를 방문하여 기도에 대해
말씀을 전했으며, 1904년 동안에 1만 명의 한국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후 이렇게 시작된 부흥운동은 1906년까지 권능과 영적 결실을 맺는 가운데
계속되었습니다.
1907년 6월에 평양의 스왈른 선교사는 어떻게 그들이 한국에서 더 큰 역사를 목도하게
되었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 “나는 개인적으로 1906년 중엽까지 우리가 목도했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한국에서
목도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의 결과를 중국에서의 결과들과
비교할 때 우리의 선교 결실들이 이들 나라들에서의 어떤 것도 훨씬 능가하였음을 보고
우리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목도했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1906년 9월 서울에서 뉴욕의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이 1905-6년에 일어나 2년 동안 8,200명의 회심자가 세례를 받게 된 인도 카시아 지방(Kassia Hills)의 부흥운동을 우리에게
들려주었을 때 새롭게 우리의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평양 집으로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 평양에는 감리교 장로교 선교회 소속 2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사람들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며, 그가 평양에서보다 인도 카시아
지방에서 더 큰 축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더 큰 은혜가
임할 때까지 정오에 기도회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약 한달 간 기도한 후 한 형제가 "우리가 약 1달을 기도해왔으나 아무것도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지 않았느냐"며 기도회를 중단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정당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여느 때처럼 우리 사역을 계속합시다. 그러고 각자가 편리한 시간에 집에서 기도합시다."
그 제의는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선교사들은 주님께서는 인도 카시아 지방에 허락하신 그 축복을 평양에도 내려주시기를 거부하시지 않을 것임을 믿고
기도회를 계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기도 시간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선교사들은 그런 견해를 갖고 만약 원하면 저녁시간까지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도록
12시 정오에서 오후 4시로 기도회 시간을 변경했습니다.
그곳에는 기도 외에 다른 프로그램은 거의 없었습니다. 만약 어느 누가 격려될만한 아이템을 갖고 있다면 기도를 계속진행하면서 그것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4개월을 기도했으며, 그 결과 모든 참석자들은 감리교도들과 장로교도들이라는
사실을 잊었고,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참된 교회 연합이었으며, 그 연합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중에 생겨나는
일이며, 오래 지속할 수 있으며,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즈음 스왈른 선교사는 블레어 선교사와 함께 시골 선교구 가운데 한 곳을 방문했습니다. 보통 방식으로 뭐甕?수행하는 동안 많은 이들이 울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스왈른 선교사는 그가 결코 전에는 그처럼 낮선 어떤 일을 만난 적이 없었으므로
청중들 가운데 휩쓸고 있는 감정의 파고가 가라앉기를 희망하면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몇 번 시도했으나 매번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두려움 속에 그는 그 어떤 다른 이가 그 모임을 통제하고 있음을 깨닫고 가능한 자신은 사람들에게서 멀리 사라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와 블레어 선교사는 기뻐하며 평양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나님께서
시골 선교구에 임하셨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평양에 은혜의 때가 가까웠음을 믿었습니다.
이제 1907년 1월 첫 주가 왔습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께서 기도 주간 동안에 자신들에게 눈에 띠게 축복하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덟 째 날 마지막 날에 이르렀으나 아직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이 현시되지 않았습니다. 그 주일 저녁 약 1500명의 사람들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들 위에 온 하늘이 놋으로 덮인 듯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부으심을 위한 그들의 간구를 거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이날 모든 사람들은 교회를 이끄는 길선주 장로가 서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자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수 없었습니다. 약 1년 전 임종을 앞둔 한 나의 친구가 나를 자신의 집에 불러 부탁했습니다.‘길 장로,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 같소. 내 아내는 그만한 능력이 없으니 자네가 내 재산을 정리해주면 좋겠소.’
나는 ‘걱정마오, 내 그렇게 해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그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던 중 나는 미망인의 돈 100달러를 사취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방해했으며, 100달러를 내일 아침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즉시 벽이 무너져 내렸고 그 거룩한 자, 하나님이 임하셨음이 느껴졌습니다.
죄에 대한 통회가 청중을 휩쓸었습니다. 예배는 주일저녁 7시에 시작했는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끝나지 않았으며, 그 시간 동안에 약 12명이 죄를 고백하기 위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울며 서 있었습니다. 날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성전에 계심이 현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지만, 이들 고백들은 인간의 힘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만든 것은 사탄 아니면 성령이었습니다.
거룩한 비췸을 얻는 지성이라면 곧 어느 누구도 악령이 길선주 장로 같은 교회의 주된
일꾼으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고백하도록 만들었다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고백되지 않고 숨겨져 있는 한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나,
회개를 통해 그 죄가 드러나는 순간 그분을 영화롭게 하였으며,
그해 한국에서 매우 예외적으로 온갖 죄악들이 고백되었습니다.
몇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한 의료 선교사가 조선(동양에서는 요리사가 시장을 봅니다)에서 가장 정직한 요리사 가운데 한명을 두고 있다고 자랑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요리사가 ‘나는 매번 의료 선교사를 속여 왔으며, 내 집과 재산이 의사를 속여
확보한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요리사는 자신의 집을 팔아 그 선교사에게 그것을 모두 갚았습니다.
한 선생은 선교회를 위해 얼마의 땅을 사도록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땅을 확보하고
가격이 500달러라고 말했습니다. 선교사는 비록 너무 큰 금액이었지만 요구하는 금액을
지급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 동안에 그 선생은 자신이 실제로는 그 땅을 80달러에
확보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갖고 있는 전 재산을 팔아 선교회로부터 사취한 420달러를 다 갚았습니다.
종군 기자 매켄지에게는 자신에게서 4달러가 못되는 돈을 사취한 한 급사가 있었습니다.
부흥운동 기간 동안 자신의 죄를 깨달은 그 소년은 80마일을 걸어가 한 선교사에게 그 돈을 매켄지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매켄지가 한국의 기독교를 강하게 믿는 자가 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평북 의주에 아내와 한 자녀를 둔 남자가 가족을 떠나 다른 도시에 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부흥을 경험하자
그는 이 여인과 딸들을 지원하기로 하고 의주로 돌아가 자신의 본 처와 화해했습니다.
만약 한국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부흥운동이 이혼이 성행하는 몇몇 기독교 국가에 임했다면 그곳에서도 모종의 놀라운 사회 변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거의 완벽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아온 한 집사가 있었는데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매우 불안해 보였습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는 자선기금 얼마를 사취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곧 평정을 얻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는
더 깊은 고통으로 빠져들었더니 드디어는 제 7계명을 범했음을 고백했습니다.
수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통과한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이 어느 저녁에 공공집회에서
간음죄를 고백했습니다. 그 집회를 책임 맡은 선교사는 대단히 놀랐는데,
그것은 그녀의 남편이 그곳에 참석하고 있었고 만약 그 남편이 한국의 법에 따라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간음죄를 범한 아내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그 한국 여인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듯 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는지요.
그러한 특별한 일들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기 위해 왔으나 두려움 가운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빈둥거리는 호기심으로 교회에 찾아온 한 갱단의 두목이
죄를 깨닫고 회심했으며, 그리고 곧 경찰관에게 가서 자수했습니다.
깜짝 놀란 경찰관은 “당신을 고발하는 자가 없고 당신이 자수했으니 우리 한국 법으로는
당신 사건을 다룰 수 없다”며 그를 석방했습니다.
한 일본 관리가 부흥운동 기간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서구의 불가지론 사상에 깊숙이 물들어 영적인 일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런데 상당수의 한국인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몇몇 일본인들 가운데서 조차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몰래 이를 조사하기 위해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드디어 그의 모든 불신앙이 휩쓸려 지나가고 그는 주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스왈른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지난 수개월 동안 기도해 왔던 것이 놀랍게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 선교사 모두가 6개월 동안 성취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단지 반나절 만에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2개월 남짓한 동안에 2000명 이상이 회심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순간 항상 그러한 결과가 오는 법입니다만, 대체로 그리스도의 것임을
고백하는 교회가 교회 활동에 분주한 것을 그치지 않고,
기도 가운데 그분의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그 기회를 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1903년에 시작된 부흥운동은 계속 점증하더니 놀랍게 차고 넘쳐 평양에서 한국 전역으로
저변확대 되었습니다. 1907년 중엽까지 평양 지역과 관련하여서 3만 명이 회심했습니다.
평양에 네 다섯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촘촘히 앉는다면 장대현교회는
약 2천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당시 한국교회들은 의자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마루에 펴놓은 돗자리에 앉았습니다. 장대현교회에 만약 2천명이 빼곡히 앉는다면 너무 밀착해 만일 어떤 사람이 욺쿠린 다리를 편하게 하기 위해 잠시 일어선다면 공간이
너무도 꽉 차 한 치의 틈도 없어 결코 다시는 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3천명이어서 장대현교회는 그토록 빽빽하게 앉는다고 해도 장대현교회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여인들이 먼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배가 끝난 후 남자들이 와서 예배를 드리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1910년까지 부흥운동이 사라지지 않았음이 분명한데 그것은 그해 10월에 4천명이 한 주에 세례를 받았으며, 이들 외에 수천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결심 카드를
제출했습니다.
우리는 평양 남쪽에 있는 한국의 고도(古都) 송도를 지나갔습니다.
1907년에 부흥운동으로 그 교회에 500명이 증가했으며,
1910년 한 달간의 특별전도집회 동안에 2,500명이 모였습니다.
1907년 우리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모든 교회가 사람들도 가득 찼습니다.
한 선교사는 6주간의 전도여행에서 500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700명에게 학습세례를
베풀었고 다섯 개의 시찰구역이 1년 사이에 25개로 증가했다고 말했습니다.
1910년 동안에 서울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다고 말하며 결신 카드에 이름을 적어낸 사람이 13,000명이었으며, 그해 9월에 서울시내 감리교회들이 3000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수도 서울의 서쪽 제물포 항구에 있는 감리교 선교회에는 1907년에 800명의 교세를 가진
한 교회가 있었습니다. 항구 반대편에는 인구 17,000명의 한 섬이 있습니다.
그 섬의 교회들은 세례교인이 4,247명이었고 그들 중 반 이상이 그해에 세례 입교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곧 섬 전체가 주의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남부 지방 도시 가운데 하나인 대구의 아담스(James E. Adams) 선교사는 그들이 10일 동안의 기도회를 가지고 부흥을 간구하자 성령이 일곱째 날에 놀랍게 찾아오셔서 어떻게 그들을
부흥케 하셨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부흥운동의 한 가지 결과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드는 바람에 대구 시내 교회 예배 공간이
너무 작아졌고, 시골 전역에 교회들이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에 그들은 1,976명의 회심자를 얻었고 1906년에는 3,867명의 회심자를 얻었으며 1907년에는 6,144명의 회심자를 얻었습니다.
그는 “내가 결코 가 보지 못했던 지방에 지금 교회들이 생겨났으며, 몇몇 교회는 전도인 조차 결코 한번도 방문하지 못한 곳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어떤 한 교회가 어떻게 선교사나 전도인 없이 형성되었는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지역 출신 한 사람이 대구 시내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신약성경 한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성경을 이웃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읽어주어 50명 이상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교회를 설립해야겠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어떻게 교회를
설립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들은 신앙의 출입이 물세례를
사용하는 것을 통해 시작된다는 사실을 추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상의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한 후 모여 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들의 행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1907년 방문한 또 다른 선교 중심지는 평양 북부에 철길을 따라 위치한 선천이었습니다.
확실히 그런 새로 시작된 선교지에서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는데,
그것은 선교사들이 단지 8년 전에 선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도시와 시골지역에 15,348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그 숫자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헌금을 내지 않는 자는
단 한명도 포함하지 않는 숫자입니다.
그들은 막 1,500명을 앉을 수 있는 한 교회를 완공했습니다. 그곳에 1년 전에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있었는데 교인이 870명으로 증가해 불가불 교회를 다시 증축해야
했습니다. 그해 동안에 그곳 시내 선천교회가 다섯 개의 시골교회를 분립시켰는데도,
교회가 완공되자 교인이 1,445명으로 증가했습니다.
교회로부터 복음의 빛이 닿지 않은 곳이 한 곳도 없을 만큼 구석구석까지 복음이 전해져
거리에는 불신 가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서구 우리 기독교 국가에서는
“교회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은혜에서 더 멀어진다”고 말하기 때문에 교회 가까이에는
불신 가정이 하나도 없는 한국교회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나는 다만 그들이 성령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서 매우 강력한 형태의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살므로 교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확신한다는 그 사실로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1916년에 나는 한국의 동해안에서 사역하는 한 선교사, 푸트(Mr. Foote)가 최근 한 지역에서 한 주일을 지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주일 저녁에 그는 증축한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곳 교회는 2,500명의 청중들로 입추의 여지없이 꽉 찼으며,
그 저녁 다른 교회에서는 500명의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도시는 단지 3,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습니다.
주민 모두가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기독교가 존중되고 있는 우리 기독교 국가에서는 함께 모인다는 특권에 대해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주께서 언젠가 서구 기독교 국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분명하게 말씀하실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곳의 중심지의 선교사역이 어떻게 시골 전역으로 확산되었는지 아이디어를 얻고 싶어
나는 블레어(Mr. Blair) 선교사에게 그가 맡고 있는 지역 가운데 하나를 지도로 그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용천군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곳은 압록강 동쪽, 바다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그 지도의 중심에 그는 350명의 교세를 가진 한 교회를 그렸고,
그곳에서 1마일 남짓한 곳에 250명의 교세를 가진 또 다른 교회를,
다시 북동쪽 5마일 떨어진 곳에 400명의 교세를 가진 또 다른 교회를,
다시 2마일 남짓한 동쪽에 750명의 교세를 가진 또 다른 교회를,
그리고 계속 그려 나갔는데 그곳 용천군에는 14개의 자립교회가 있었습니다.
내 옆에서 서 있던 휘트모어(Mr. Whittenmore) 선교사는
“그 용천군은 바로 그 북쪽에 내가 사역하는 군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곳 군에는 35개의 자립 시찰을 가진, 5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필자는 400명의 교세를 가진 한 시찰이 있는데 1년 만인 그 다음해에 3000명으로
급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교사역이 1884년에 시작된 이후 낮과 밤 매 45분마다
한 사람씩 교회에 영입되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한반도 전 마을이 기독교가 되었습니다.
어떤 누군가가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 주님을 따랐던 군중들이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점은 잘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 첫 장을 살펴보십시다. 우리는 비록 그 기준을 전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일은 선호하지 않겠지만 한국교회에 적용하는데 기꺼이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 하나님을 대단히 경외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성령의 강림을
준비하면서 10일 동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선교사들이 수개월 동안 매일
한 시간에서 수 시간을 성령의 부으심을 준비하면서 전심으로 기도해왔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들 선교사들은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으로부터 어떻게 성령께서 인도 카시아(Kassia) 지방에 놀랍게 임하셨는가를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장소에 압록강을 따라 펼쳐진 소나무 숲에서 좀 떨어진 강계에서 온 권서인
한 사람이 존스톤 박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가서 250명의 강계 교인들에게 성령께서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사역을 실제로 유효하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어떤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자유롭게 그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임하실 것임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1906년과 1907년 사이 가을과 겨울 내내
매일 저녁 다섯 시가 아닌 새벽 다섯 시에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로 모여 성령의 은사를
사모했습니다. 그들은 6개월을 기도하면서 성령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며,
그런 후 그가 홍수 같이 임하셨습니다. 그 후 교회 교세가 몇 배로 증가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까? 우리가 정직하십시다.
오, 그 혹독하게 추운 날씨 성령 하나님의 부으심을 간구하며 6개월 동안 내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날 수 있겠는가!
구주의 공로를 널리 알리기 위한 불타는 열정은 초대교회 오순절 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신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인들의 박해를 참을 수 없다고
불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항상 자신이 구주에 대해 분명하게 증거 했습니다. 몇몇 불신자들은 기독교인들이 하도 전도를 열심히 해 편히 지내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정리하고 기독교인들이 없는 어떤 지역으로 이사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평양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중등학교에서 성령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들은 318명의 학생을 가진 한 학교(숭실중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1907년 2월 개학하는 월요일 아침에 학교를 책임 맡은 두 명의 선교사가 교장실에서
아침 일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시작부터 그 학교를 지배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만약 그가 지배하시지 않는다면 학교는 단지 한국에 거친 장애물(menace)이
될 수 밖에 없는 교육받은 천박한 악당들(educated rascals)을 양산할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기독교 국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께서 우리의 고등학교와 대학교들을 온전히
통제하시도록 사모하지 않습니다. 서구의 몇몇 학교에서는 대단한 불신앙이 어떤 제재도
없이 자유롭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받은 천박한 악당들을 양산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우려하지 않습니다. 고위직의 사람들이 국고를 사취하고 어떤 일인지 이중 몇몇은
항상 무죄혐의를 받습니다. 이들은 교육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대학을 졸업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도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겸비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그분이 통제하시도록 우리의 교육을 위임함으로 그 분을 경외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이 범죄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토로합니다.
1907년 2월 학교가 개학하는 그 월요일 아침, 9시가 울리기 전 평양의 숭실중학교에서
주의 영이 통회의 역사와 함께 이들 소년들을 강타하였습니다. 통회의 절규가 위층과
아래층에 가득 찼습니다. 곧 교장실은 죄를 회개하는 소년들로 가득 찼습니다.
학교는 그날 개학하지 못했고 그 다음날도 개학하지 못했으며, 금요일에도 아직 개학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장로교 소년들 모두가 승리를 경험했으나
무엇인가가 감리교 학생들을 묶고 있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날 저녁 모든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약 12명의 감리교 소년들이 가서 그들의 담임목사에게 그에게 한 자신들의 약속에서 풀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이 한국인 목사는 부흥운동이 감리교회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기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 숭실중학교 남학생들이 부흥운동을 반대하고,
모든 공공의 죄 고백이 마귀에게서 비롯된 것이므로 반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금요일 밤에 이르러 마음의 탄식을 더 이상을 참을 수 없어
그 목사님에게 찾아가 자신들이 한 약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그 목사는 가서 선교사의 발 앞에 조아리며 부흥운동이 장로교 가운데 시작된지라 사탄이 그에게 시기심을 가득 채웠음을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내게 그 주간 이들 학생들 가운데 심령을 옥죄이는 듯한 죄의 고백을 듣는 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했으며, 마치 죄옥의 뚜껑을 열어 제친 것처럼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죄악들이 적나라하게 들어났음을 들려주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까지 학생들이 하나님과, 선생들과,
그리고 서로 간에 바른 관계를 정립했으며, 학교는 성령의 통제하심 속에 시작되었습니다. 그일 후 바로 약 100명의 감리교 선교회 전도자들과 권서인들이 한 달간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연합 기도회 때 선교사들은 성령께서 통제하시도록 그 중요한
사경회를 맡겼습니다. 그들은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고 오직 주의 성령으로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자, 그분께서는 바로 첫 집회 때 그의 임재와 권능을 현시하심으로 보답해주셨습니다.
다음 며칠 안에 굽은 일들이 바로 잡혔습니다. 거룩한 분이 그 모임을 통제하셨습니다.
그들은 사경회 기간동안 효과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한달이 끝날 때에 이제 그들은
세상으로 나가 주의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시골 장로교회에서 올라온 선별된 550명의 자매들이 12일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위해 평양에 모였습니다. 만약 우리나라, 북미에서 12일 동안 성경을 배우기 위해 500명이 넘는 자매들이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면 우리는 큰 부흥이 도래할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전쟁 전 많은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기보다 노는 일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여인들은 모든 악령의 사역인 우상과 미신행위를
끊어 버릴 때 화투도 함께 던져 버렸습니다.
이들 550명의 여인들은 자비로 모든 비용을 지불하며 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들 중 2명은 5일을 걸어 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업고 5일을
걸어 그곳에 참석했습니다. 부흥을 경험한 평양의 선교사들과 지도자들은 만약 어떤 권능이 결핍되었다면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기다리고 계시며,
그를 통해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첫날 밤 그분께서 통제해주실 것을 간구했고 약속에 신실하신 그분께서
현시하셔서 죄와 의와 심판을 확신시켜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첫날 밤 장애물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어 선교사 아내가 표현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발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혹은 고름을 짜지 않은 종기를 갖고 있는 듯 며칠을 고통 가운데 지내다 그런 후 성령께 전적으로 순복하여 승리를 얻었습니다.
가장 최고의 선생이신 성령께서 사경회 동안 그들을 가르쳐주셨으며,
그런 후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변화는 숨길 수 없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남편들이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며느리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 동양의 시어머니들은 공포의 존재들이었습니다.
희생자들은 단지 자살함으로만 그 공포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런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어머니들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사경회에 참석했던 몇몇
며느리들 또한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더 근면해졌고 덜 신경질 적이었습니다.
불신 이웃사람들이 그 변화를 또한 감지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여인들이 거의 집에 도착하기 전 75명의 평양 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이 3개월 동안
신학훈련을 받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매년 3개월 씩 5년의 과정을 밟도록
되었습니다. 평양장로회신학교는 200명 이상의 신학생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교입니다. 교과과정이 정해짐에 따라 선생들은 3개월을 끝날 때까지 성령께서
이들 젊은이들을 충만케 해주시기를 희망하면서 매일 저녁 기도회 및 사경회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께서 최근에 그들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셨음으로,
자신들이 이전에 성령께 “우리가 그 학기에 최선을 다함으로 학기 말에 당신이 오셔서
젊은이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 달라”고 간구했던 것이 대단한 불순종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 첫날 밤 하나님께 그 젊은이들을 맡겼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앙을 영예롭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오직 모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실 수 있는 그분께서 그가 전에는 결코 허락하시지 않으셨던 놀라운 역사로 그 학기를 친히 가르치셨으며, 그해 50,000명이 교회에 영입됨으로
한반도 전역에서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 사실들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참으로 그랬던 것처럼 한국교회가 약속하신
성령을 간절히 구하고 그 성령께 순종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했음을 증명합니다.
한국교회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도 유형을 적용해 보십시다. 사도행전에 기도는 매우 눈에 띠는 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한국교회는 기도에 대단히 의존했습니다.
부흥 주간에 감리교 출신 숭실중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성령의 역사에 저항했습니다만
장로교 학생들은 강권적인 부담을 가지고 변화를 받고 승리가 도래할 때까지
간절히 금식과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 때에 초등학교에 기도의 영이 너무 강력하게 임해 학교들이 잠시 수업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책을 보면서 어린이들이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있어서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느라 밤의 절반을 보내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그들이 일어나 새벽 전까지 오래 동안 기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습관이었습니다.
스왈른은 한 때 시골 지역을 방문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내일 아침 다섯 시에 기도회로
모임을 갖기로 했다고 광고했습니다. 다음날 다섯 시에 스왈른이 와서 보니 세 명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동안 기도한 후 이들 참석자 가운데 한명이 스왈른에게 그가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기도회는 그가 도착하기 전에 끝났고 그들 가운데
몇은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산맥을 가로질러 왔습니다.
길 장로가 평양 장대현교회 담임목사에 부임한지 몇 년 후 그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장대현교회에서 가장 영적으로 충만한 장로 가운데 한 사람에게 제의하여 그들 둘이 4시 30분에 매일 아침 기도회로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그 달 매일 새벽 교회에 모여 기도하자 다른 사람들도 알아채고
참석하여 한달이 지나갈 때에는 약 20명이 매일 아침 4시 30분에 모였습니다.
이제 공개적인 기도회를 갖겠다고 광고할 때가 무르익은 듯 했습니다.
주일 예배 때 길 목사는 매일 아침 4시 30분에 기도회를 갖겠다고 광고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그 시간에 종을 울리겠다고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다음날 두 시에 400명이 교회 밖에서 기도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4시 30분에 600명이 그곳에 가득 찼습니다.
한 주간이 끝날 무렵에 700명이 매일 아침 모였으며 그런 후 성령께서 거룩한 사랑으로
그들의 심령에 부으셨습니다. 그렇게 선명한 통찰력을 가진 목회자를 갖는 교인들은 축복된 사람들임에 분명합니다.
오, 얼마나 우리가 낮아져야 하는가! 그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이 그곳에 함께 계십니다. 영광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아침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는 것을 상상해보십시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도회가 한국 서울에서 열렸습니다.
일년에 평균 한 주일 참석자가 1,100명이었습니다. 한 수요일 저녁에 나는 성장하고 있는
토론토 장로교회 가운데 한 곳에서 열린 기도회에 참석했었습니다.
한 한국의 선교사가 설교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나는 잠시 내 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한 멋진 외모의 노신사가 다가와 내 곁에
앉았습니다. 기도회가 곧 시작되는데도 그 순간까지 그 넓은 교회당에 빈 의자들이 아직
많이 눈에 띠었습니다. 그 교회당 안을 둘러보면서 그 노신사는 “나는 왜 사람들이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언급하였습니다.
내가 “사람들이 기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나를 알지 못하는 노신사는 나를 알지 못하겠다는 듯이 나를 위 아래로 흩어보더니
“당신은 정말 그들이 실제로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그곳에 있겠다’고
하신 주 예수의 말씀을 믿었더라면 그들이 주님을 멀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덧 붙였습니다. 주님은 오직 우리의 기도의 조건을 주목하십니다.
한국교회는 진지하게 가정 기도회를 드립니다.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는 남자는 한국에서
교회생활을 하지 않을 우려가 있는 자들입니다.
캐나다의 몇몇 기독교 가정들은 세상일에 너무 바빠 식사기도 조차 갖지 못합니다.
푸트 선교사는 한국을 순회 전도 여행 중 한 때 길에서 몇몇 사람들로부터 그 마을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심방할 수는 없는지 부탁을 받았었던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푸트는 “그곳에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하는데 왜 그러시죠?”라고
답했습니다. 푸트는 그 마을에 가서 세례를 받거나 학습을 받을 준비가 된 많은 사람들을
발견하였습니다. 푸트가 그들에게 “당신들은 가정 예배를 드립니까?”라고 질문을 하자
그들은 “예, 하루에 두 번 드립니다”고 대답했습니다.
푸트가 “이 마을에 얼마나 많은 가정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마을에 모두 스물 네 가정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매 가정 마다 가정 제단을 쌓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만주의 한 선교사가 1907년의 놀라운 부흥운동에 관해 모든 것을 알아보도록
두 명의 전도인을 파송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 혹 선교사들이 가두 전도처(傳道處)를 개설했는지를 물었습니다.
전도인들은 돌아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전혀 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가두 전도처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개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노무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한명도 없는 시골에 가서
전도하며 여름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행상인들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여행하면서 늘 놀라운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있을 때 동해안에서 열린 한 부흥 집회에서 회심한 한 모자 장수는
그 후 1년 안에 약 12 곳에 작은 기독교 공동체를 탄생시켰습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에는 17명의 회심자가 있었습니다.
한 학생이 한 달간의 휴가를 내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며 시간을
보내 100명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매일 적어도 여섯 명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9개월 말까지 그는 3,000명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숫자는 우리 고국 북미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생동안 전해야 할 만큼 많은 수입니다.
어느 해 남감리교 선교회는 너무 예산이 모자라 송도에 학교 건물들을 세울 수 없었는데,
그곳에는 여전히 교육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150명의 학생이 있었습니다.
전직 교육부 장관 윤치호는 그들에게 교사를 자원하였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소년들은 거친 나무들로 교사(校舍) 골격을 세우고 볏짚으로 지붕을 덮고
그곳에서 수업을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길선주 목사가 새벽기도회를 통해 자신의 교인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켰는지 언급했습니다. 그 때 길 목사가 쓴 한통의 편지에는 심지어 8살과 9살 먹은 아직 어린 학교 소년들이 학교가 끝나자마자 곧 거리로 나가 사람들의 소매를 잡고 울면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지난 3일 혹은 4일 동안에 400명의 남자들이 와서 모두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했다”고 말했습니다. 소년들의 간절한 애원이 그들의 심령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한국의 외진 도서에까지 복음을 전한 후에 그들은 멀리 외국에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놀라운 부흥이 있은 후 서울에서 열린 장로교 독노회에서 중국 산둥성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선교를 자원할 자를 찾는다는 보고가 있자 전 총회 총대들이
일어나 자원했으며 그중 네 명이 선정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선택된 이들을 부러워하는 듯했습니다.
고국 총회에서는 이 같은 놀라운 일을 결코 목도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값없이 받은 은혜에 대해 대단히 감사했으며,
이 때문에 그들 역시 값없이 그 은혜를 나누어주려는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1917년까지 늦게 길선주 목사는 동해안에서 사경회를 인도했는데 사람들이 녹아 내려 죄를 고백할 만큼 하나님의 권능이 강하게 임했습니다.
모든 슬픈 일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전능하신 성령께서 한국에서 처럼 캐나다와 미국에서 기꺼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의 영의 역사를 목도하시는 것인데,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런 복종의 채널을 얻지 못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또 하나의 두드러진 특징은 자유롭게 풍성히 바치는 일입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 또한 풍성하게 헌금합니다.
어느 한 선교사는 한국인들이 너무 바치는 바람에 자신의 교인들에게 감히 헌금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기독교 국가인 서구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진실로 말할 수 있는 목회자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필자는 남녀, 교사와 전도인들, 139명의 사역자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선교 중심지에
있었는데 부흥운동으로 사역이 놀랍게 증가되어 사역자들 57명을 더 늘렸습니다.
그 선교사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너무 작다는 것을 발견하고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건축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전 재산을 헌금했습니다. 남자들은 시계를, 여인들은 자신들을 장식하는 은금 패물 보석 같은 장식물들을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다른 이들은 땅 문서를 바쳤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그들이 더 바칠 수 없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빚 하나 없이 교회를
건축하려고 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한 때 매우 가난한 선교지역에 있었을 때 일입니다. 그곳 교회 지도자들은
선교사에게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너무도 불편하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다 30달러에 주겠다는 멋진 대지를 발견하고 선교사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선교사가 “잘 되었군요, 가서 그 대지를 사시지요”라고 말하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님,” “여기 우리는 극도로 가난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형편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약 당신이 대지를 구입할 그 돈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것은 안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 대지를 구입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계속 말하며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자매들이 “만약 남자 성도들이 구입할 계획이 없으면 우리가 그것을 구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들 모두가 자신들의 패물을 모두 가져와 그것을 팔았으나 겨우 10달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여인이 놋 주전자 한 개를 팔았고, 다른 사람은 두개의 놋 사발을 팔았으며,
또 다른 여인은 몇 뭉치의 놋쇠 젓가락을 팔았는데, 한국의 요리 및 음식 식기들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모두 다 팔자 20달러가 되었습니다. 이제 30달러에 해당하는 그 교회 대지를 여인들이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받는 자보다 주는 가 더 복되기 때문에 여인들은 더 큰
비전을 받은 셈입니다. 자매들은 하나님 없고, 그리고 희망 없는 전국의 헤아릴 수 없는
마을에 복음을 전하려는 구령의 열정으로 불타 그들은 한 달에 6달러를 모아 한명의
전도인을 파송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그 선교사가 새로 건립한 교회 헌당식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는 아직 50달러의 교회 빚이 있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한 교인이 일어나 “목사님, 내가 다음 주일까지 5달러를 가지고 와 그 빚을 갚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사람이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당신 혼자 그것을 다 갚을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함께 힘을 모으면 그것을 곧 갚을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고국에는 5만 불의 빚을 지닌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 이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50달러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선교사는 깜짝 놀라 “당신이 어디서 그 돈을 구할 수 있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목사님, 걱정 마십시오. 그 모든 돈은 깨끗한 돈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 후 그 지방을 순회 전도하던 그 선교사는 이 사람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사람 아내에게 남편이 있는 곳을 묻자 “들에 나가 밭을 갈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 선교사는 들에 나가다 노부(old father)가 쟁기를 잡고 그의 아들이 멍에를 메고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선교사는 놀라 “왜 당신 소는 어디 두고 당신이 밭을 갈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50달러를
빚지고 있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어 그 빚을 갚기 위해 소를 팔았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를 인도했던 똑 같은 성령께서 한국교회를 인도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한국 교인들의 불타는 열정입니다.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인쇄된 성경을 그토록 신속히 구입할 수 없었습니다.
평양에서만 한 해에 3000권의 성경이 팔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배웠고 심지어
우둔한 여인들까지 성경을 배웠습니다.
사업차 여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성경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길을 갈 때나 여인숙에 묵을 때나 그들은 성경을 펴서 읽었고 많은 이들이 말씀에
매혹되었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북미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습니다.
한때 기차에서 내가 성경을 읽고 있자 한 남자가 아주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흩어보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지 내게로 다가와
“실례합니다만 나는 플리머스 형제단이나 천주교 신부가 아니면 기차에서
사람이 성경이나 혹은 기도집을 읽는 것을 결코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시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플리머스 형제단도 천주교 신부도 아닙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시죠?” “아 예, 저는 중국 선교사입니다” 지금 왜 내가 책 중의 책인
성경을 기차 안에서 읽고 있는 것을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목사나 장로 그리고 집사가 여객선이나 기차를 타는 시간에 카드놀이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나이든 노인들이 젊은이들을 꾸짖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속담 혹은
격언이 있습니다. 그들이 말을 마친 후에 만약 연소자들이 할말이 있으면 이제 노인들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말보다 실천이 매우 잘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시대에 젊은이들은 주로 비평의 권리를 독점합니다. 지금 한국인들은 가장 오래된 사람의 비평이 성경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므로 그들은 항상 성경이 그들을
먼저 비판하도록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책, 성경을 감히 비판할
여지를 결코 남기지 않습니다. 나는 그러한 종류의 성경 비평학을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토록 많이 비평할 수 없습니다. 만약 사람이 한국인들 심령처럼 성경을
겸손히 접근한다면 몇몇 신학교 주변에는 바울이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자 에베소 거리에서 불태웠던 것보다 더 많은 책들을 불태우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 세계적인 부흥운동을 발흥케 하였습니다.
한국 목회자들과 전도인들과 장로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투옥되면
게으른 불평으로 자신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대신 성경공부를 착수합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옥중에 있는 동안 성경을 일곱 번 읽고
“나는 결코 나의 주가 그토록 놀라우신 분인 줄 결코 전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고
외쳤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일본인들이 성경을 빼앗아 그것을 찢어 버릴까봐 염려되어
로마서 전체를 암송하고 풀려나자 요한복음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만약 참된 박해가 이제까지 기독교 국가에서 일어난다면 성경은 현재보다
더 존중을 받을 것입니다.
푸트 선교사가 예기치 않게 모든 가정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발견한 마을에서 그는 그날 25명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는 첫 세례 문답자에게 문답을 하면서 어떤 성경 귀정을 암송하고 있는지 암송해 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는 “예”라고 대답하며 성경 암송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암기한 것 약 100개의 성경 구절을 암송한 후 푸트 선교사는 그만 하라고 하고,
만약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암기하는 모든 성경 구절을 다 암송하라고 한다면
결코 세례문답을 다 끝낼 수 없을 것을 걱정하며 다음 세례 문답자의 문답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25명의 세례문답자 각자가 100개 이상의 성경구절을 암송할 수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왜 한국교회가 그토록 강하고 영향력 있는지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경 공부 때문입니다. 한해 1,400개 사경회가 전국에서 열렸고 약 9만 명이 여기에 등록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경비를 자신들이 부담합니다. 어떤 때는 1,800명이나 많은 이들이 성경공부하기 위해 한 사경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장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는 바람에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숙소를 찾을 수 없어 불신자들 가정에 숙박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사경회 참석자들을 숙박시킨 모든 불신가정이 회심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주일학교에 참석하여 성경을 공부하는 데는 연령의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평양에 있던 어느 주일날 비가 내렸는데 그곳 그리스도인들이 날씨에 구애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인지 아닌지를 시험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 주일학교 시간에 열리는 성경공부반 몇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성경 반은 사람들이 발들일 틈도 없이 꽉 찼습니다.
초대교회는 축복된 이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 받는 것을 값진 것으로 여기고
즐거워했습니다. 똑같은 정신이 한국교회를 특징 지웠습니다.
시기심에 가득 찬 사탄이 한국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부추겼음이 분명했습니다. 선천의 그리스도인들이 테라우찌 총독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는 참으로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부당한 일은 결코 없는 일인데, 기독교 지도자들을 투옥시키기 위해 일제는
그러한 음모를 조작한 것입니다. 감옥에서 일본인들은 한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자백받기 위해 한국인들에게 무시무시할 정도로 너무도 잔인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손을 뒤로 묶고 공중에 매달았으며,
어떤 사람은 불에 달군 쇠 젓가락으로 지졌습니다. 한 사람은 일곱 번이나 기절했으나
모든 고문 속에서도 그들은 신실한 신앙을 지켰고 결국 재판에서 그들 모두가
무죄 방면되었습니다.
한 남자가 자신의 문중 마을에서 구주를 고백하자 문중 사람들이 그를 가문과 집에서
�아 냈습니다. 그는 법에 호소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 부드러움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모욕과 부당한 잘못을 온유하게 참고 살아가면서 전 문중 사람들이 회심할 때까지
복음을 전해 마침내 그의 전 소유가 회복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 도시를 방문하는 동안 회심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 후 그는 그의 놀라운 이야기를 전하러 갔습니다.
그의 문중(門中)이 분노에 차 복음을 거부하였고, 곧 분노한 친척들이 그를 쓰러트리고
거의 초죽음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병원에 실려 갔을 때는 경우 목숨만 붙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여러 주를 치료 받은 후 의사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에게 어느 날 출혈을 하면서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른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그리스도인은 대단히 많은 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수년 동안 그는 자신의 고향 지역을 다니면서 책을 나눠주고 자신이 소유한 주님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런 후 어느 한날 그는 피를 토하며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시도했던 그 불신 지방에 그는 자신이 개척한 11개의
교회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확실히 성령 하나님께서는 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그가 행하신 것처럼
한국에서 우리의 승천하신 주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쉽게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로 하여금 깨어 동양의 이들 자녀들이 행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하나의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현시되는 것이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 풍부한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겸손으로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히 그들을 통해
넘쳐흘렀습니다.
하나님은 똑 같은 구원의 충만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살았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너무도 위대하신 구원을 베푸실 구원자를 경멸하는 이들에게 정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준비와 이 운동이 미친 영향
- 하디 선교사와 길선주 목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
김인수 교수(장신대 역사신학)
내년이면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된다. 이 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구형(構形)되는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기독교 역사는 선교의 역사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선교는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데서 맺어진 결실이다. 성령의 역사는 주로 부흥운동에서 비롯된다. 예수 승천 후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무리들이 불같은 성령을 받고 전도하면서 예루살렘에 첫 교회가 세워졌고 이 교회로부터 온 세계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면 불같은 성령은 어떻게 임하는 것일까? 교회 역사를 더듬어 보면 부흥운동에서 성령이 역사 하셨고, 그 역사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다.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이 운동을 되짚어 봄으로써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되살려야겠다.
한국교회는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이다. 수 천 년 내려오던 이교 문화의 배경에 기독교 신앙이 소개 되었고, 재래 종교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교회 문화가 형성되어갔다.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그 틀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를 통해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고, 조직이 확대되었다.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때 장로교회 노회가 조직되었고, 1912년에는 총회가 창립 되었으며, 감리교회도 연회를 조직하여 선교와 교육에 전념하면서 교회 확장에 매진한다. 이러한 교회의 성장과 정착은 일제의 폭압 속에서 도 고난을 감내하고 극복할 힘을 비축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 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사역하던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하디(R. A. Hardie)로부터 발단되었다. 그의 통절한 참회의 사건이 차차 번지면서 급기야 4년 후인 1907년 평양에서 모인 남자사경회에 성령의 불길이 떨어져 한국 교회사에 빼어 놓은 수 없는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따라서 부흥운동은 선교사들이 불을 붙였고, 한국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특히 길선주 목사에 의해 승계,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은 다양한 결과를 교회와 사회에 가져왔는데, 이 운동으로 해서 교회도, 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으므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 짧은 글에서는 하디와 길선주에 의한 부흥운동의 준비 과정과 이 운동이 미친 영향에 대해 간단히 검토해 보고자 한다.
II. 대부흥운동 발단과 준비과정
1. 정치, 사회적 배경
평양에서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즈음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은 순탄치 않았다. 약소국 조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힘이 다스리는 냉엄한 국제 질서 속에서 비극적 역사를 맞게 된다. 1905년 7월 27일 미육군성 장관 태프트(W. H. Taft)는 당시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의 밀지를 받고 일본수상 카츠라 다로(桂太郞)와 소위 “카츠라-태프트 메모”라는 비밀협정을 맺었다.1) 이 협정에 따라 그 해 11월, 일제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라는 치욕적인 늑약(勒約)을 강압적으로 체결시켰다. 조약에 따라 서울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1906년 2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으로 와서 본격적으로 한국의 식민화를 구체화하였다. 일제는 한국을 군사 기지화 하여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러?일전쟁 직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노동자들을 강제 징발하여 군용철도를 건설하였다. 또한 그들은 군사적 필요라는 명분으로 민간인들의 토지를 강제 수용하고 군법회의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대행하였다.2) 원한경(H. H. Underwood)은 그래서 “일제의 한국 통치는 사실상 러?일 전쟁을 위해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던 1905년부터 시작되었다.”3)고 술회한 바 있다.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 정미년(丁未年)에 일제는 ‘정미7조약’을 역시 강압적으로 체결시켜 한국의 경찰과 군대를 해산하면서 사실상 국권을 장악하였다. 그 해 네덜란드 헤이그(Hague)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가 밀사를 파견한 것을 트집 잡아 일제는 같은 해 7월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 시키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등극함으로써 조선왕조는 서서히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급기야 1910년 한일병탄이 되고 말아, 500년을 이어 오던 조선왕조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군대의 해산으로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동학농민혁명, 계속되는 흉년과 기근, 역병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황폐해 갔다. 이런 육체적 탈진은 영적 고갈을 심화시켰고, 종교적 본능은 새로운 종교 운동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었다. 남감리교회의 무즈(J. R. Moose)선교사는 “일반적인 불안 의식과 정신적 지주(支柱)의 결여는 백성들로 하여금 선교사와 그가 전하는 복음으로 지향하게 하였고, 그들이 의지할만한 무엇인가를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지 찾으려고 애썼다.”4)고 말했다. 1907년 부흥운동은 이러한 정치, 사회, 경제, 사상적 혼란과 난경(難境)에서 비롯되었다.
2. 하디 선교사에 의한 준비
1907년 한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성경공부와 기도운동에 기인한다. 여기에는 두 줄기의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다. 원인은 1903년 함경남도 원산 지방에 남감리회 중국 선교회 소속 화이트(Mary C. White)와 캐나다 장로회 소속 다른 여선교사 둘이 한국을 방문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선교하고 있던 캐나다 선교회 소속 선교사인 매컬리(Louise H. McCully)와 더불어 한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의 영성을 강화 시켜달라며 간절한 합심 기도를 드렸다. 이 소식에 접한 이 지역의 선교사들은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한 주간을 특별기도 주간으로 정하고 이 기간에 집중적인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갖기로 결의 하였다.5) 이 지방에서 선교하고 있던 남감리회의 소속으로 1898년부터 선교하고 있던 하디(R. A. Hardie)는 이 기간 동안 3편의 글을 발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준비하였다.6)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불길에 점화 한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는 본래 캐나다 토론토 대학 YMCA 소속 의료선교사로 8년간의 선교 지원을 약속받고 부인 마가렛(Margaret Kelly)과 함께 1890년 내한하여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8년 후인 1898년에 남감리교회에 가담하여 강원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7) 하디는 개척선교를 하였으나 사역에 별 진척을 보지 못했다. 그의 1904년 보고에 의하면,
나는 3년 동안 강원도에 [남감리]교회가 처음 터 닦은 지경터(地境垈) 지역에서 애써 일 하였으나, 거기서 사역에 실패하였다. 이 실패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고, 나는 일을 더 할 수 없으리 만큼 기진맥진하였다8) 라고 기록하여, 선교사역이 순탄치 않았음을 고백하였다.
하디는 성경공부 교안 작성을 요청받고 자기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출석하는 한국 교인들이 진정한 참회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는 주제로 교안을 준비하다가, 오히려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선교사로써의 자격을 갖고 있는가라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는 고백하기를 “성령이 내게 오셨을 때 그의 첫 요구는 나의 선교사 생활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던 선교사들 앞에서 나의 실패와 그 실패의 원인을 시인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다.”9)
하디는 통절히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고, 사죄의 확신을 얻은 후에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스스로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의 실패를 모두 털어 놓았다. 다음 주일 그는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나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으로 내 자신의 교만함과 신앙 없음, 그리고 이렇게 되어버린 나의 잘못을 고백한다.”10)라고 자백했다. 그 때의 경험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나는 성신이 내 안에 충만하신 실증을 가지고서, 나는 부끄러움과 혼미에 찬 얼굴로 나의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함과 또 그 상태가 빚어낸 모든 결과를 자복하였다. 이에 회중은 강한 죄의식과 회개로써 신앙생활의 깊은 체험상의 작용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단순한 신앙으로 내가 성신의 은사를 받았음을 알려 주었다.11)
그 때 그 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하디의 적나라한 죄의 고백과 성령의 충만한 은사를 체험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들도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어 부흥의 불길이 서서히 붙기 시작하였다. 하디의 이런 참회 경험은 1907년 대부흥운동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되었다.
성령 체험을 한 하디는 넘치는 영적 능력과 확신에 찬 모습으로 선교 사역에 나서게 되었다. 그의 변화된 모습을 동료 선교사였던 게일(J. Gale)은 후에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 나님은 그에게 전혀 아무런 가식이 없는 진지함(earnestness)과 부드러운 촉진(觸 該 tender touch)의 은사를 주셨으며, 그에게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주님 나라 에 대한 사모함을 주셨다. 그의 삶의 변화는 갈릴리에서 베드로의 마지막 고기 잡는 여정과 그가 너무도 놀라운 부드러움으로 베드로 서신을 기록하던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12)
성령의 뜨거운 체험 없이 그리고 통절한 참회의 과정 없이 선교에 임했던 하디가 이런 성령체험과 참회의 과정을 겪은 후부터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영적 능력으로 집회와 선교 사역을 감담 하였다.
이 때 타오른 성령의 불길이 한국 교인들 사이에도 떨어졌다. 한 집회에서 젊은이가 일어나 자신은 자기 부인을 죽게 방치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했다.13) 이에 자극 받은 교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크게 깨닫고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기도회를 연일 가졌다. 이에 더 큰 은혜가 임재하면서 서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수순으로 이어졌다. 심지어 설교 시간에 어쩔 수 없는 힘에 압도되어 갑자기 일어나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바람에 설교가 종종 중단되기도 하였다. 큰 은혜를 받은 교인들은 그들의 은혜 받은 대로 고백하였는데 “모든 사람들이 간증하는 내용은 지금까지 기독교를 이렇게 개인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살아 있는 경험으로써 느끼지 못했다.”14)는 내용이었다.
원산 지역의 이런 성령의 역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확산되는 양상을 보였다. 1903년에도 지속적으로 특별집회와 사경이 계속되다가 이듬해인 1904년으로 이어졌다. 이즈음 중국 스캔디나비아선교협회(Scandinavian Missionary Alliance of China)소속 선교사 프란슨(F. Franson)이 이 곳에 도착하여 이어지는 주간에 일주일간 머물며 원산 지방 선교사들의 기도와 성경공부를 인도함으로써 더욱 힘을 보태 주었다.15) 이 기도회는 감리교 선교사들과 더불어 장로교, 침례교 선교사들, 그리고 일부 한국교인들도 참여하는 연합 모임으로 확대되어 매일 밤 집회가 계속 되었다.16)
하디와 더불어 캐다나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원산에서 동역하던 로브(A. F. Robb)가 큰 은혜를 받아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1904년 정월 모인 원산 사경회에서 그는 “특은(特恩)을 받아 다일간(多日間) 금식통회(禁食痛悔)하며 가로상(街路上)에서도 간구불절(懇求不絶)”17)하는 성령의 체험을 하였다.
이런 일이 있는 다음달에 하디에게 송도, 서울, 제물포, 평양 등 각지로부터 집회 요청이 쇄도 하였는데, 그는 집회를 할 때마다 먼저 죄를 참회하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성령의 역사는 철저한 죄의 회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에서 추출해낸 것이다.
부흥운동이 원산을 중심으로 점점 확산되어 가던 중, 이 소식에 접한 평양의 선교사들이 하디를 초청하여 1906년 8월에 장, 감 연합으로 집회를 갖게 되었다. 이 집회를 가질 즈음의 한국 상황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의 종주권을 세계 제국들로부터 인정받게 되었고, 한 해 전인 1905년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탄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채결하고 선포한 때였다. 특히 한국과 우호조약을 체결한 미국은 소위 ‘가츠라-태프트 메모’에 의해 한국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밀약을 맺었고, 제일 먼저 서울에 있던 공사관을 철수 시켰다. 이로써 한국인들의 반미 감정이 고조되어 가는 때였으므로 주한 선교사들은 이를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블레어(W. Blair)는 “미국까지도 영국이 했던 것을 본 따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고 나서는 것을 용인함을 볼 때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서 격렬한 척외 정신이, 특히 반미 정신의 물결이 전 국토를 휩쓸었다.”18)고 당시의 상황을 기록했다.
이런한 상황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 사이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고, 선교사들은 이런 현실을 타개 할 수 있는 길은 따로 없다고 판단했다. 블레어는 “그 여름 8월의 집회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 세례만이 우리(선교사)에게 합당한 것이며 장차 고난을 겪게 될 한국의 동료 교인들에게 적합하다는 것을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이 기회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19)고 기록했다. 이런 배경에서 8월 선교사 모임이 실현되었다. 그들은 이 집회를 통해 선교사들과 한국교회가 진정한 ‘성령세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다음 해 초 평양에서 모이는 겨울 사경회에서 이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단하였다. 그 때 그 곳에 모인 선교사들은 “통회와 자복으로 크게 은혜를 입었다.”20)
1906년 평양의 모임에 이어 그 해 9월 서울에서 모인 연례선교사총회에 미국에서 온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원이었던 존스톤(Howard A. Johnston) 목사가 출석하여 선교사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는 또 한국 교인들과 지도자들에게 인도와 영국의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에 대해서도 자세히 소개하며 설교하였다. 선교사들과 한국 교인들은 그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선교 보고서는 그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가 선교사들에게 한 설교는 듣는 이들의 영혼과 삶을 크게 자극하였고, 더 큰 사랑을 실천하게 하였고, 더욱 열정적인 기도를 하도록 북돋아 주었다....그가 한국 교인들에게 행한 설교는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의 방문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일로 남게 되었다.20)
매년 연말이 되면 선교사들은 성탄절 준비와 새해맞이 그리고 휴가 기간에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1906년 말은 선교사회와 한국교회에 일고 있던 성령 운동의 기운으로 새해 초에 있을 사경회 준비를 위한 기도를 계속하였다. 매년 초에 장로교회는 도사경회(都査經會)를 갖고, 감리교회는 일반부 성경공부반을 운영하였는데, 두 선교부는 이들 성경반을 위해 함께 기도하였다. 장로교 사경회는 정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낮에는 대체로 시골에서 올라온 남자들 약 900여명이 모여 성경공부를 하였고, 저녁에는 평양 시내 여러 교회에서 온 남자들 약 1,500명이 모여 전도 집회를 하였다.20)
본격적인 성령의 역사가 시작된 1907년 정월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는 이런 예비 단계를 거치면서 전개되었다. 성령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참회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다시 보여준 일련의 사건들이었다.
B. 길선주(吉善宙) 목사에 의한 준비(새벽기도회)
1907년 대부흥운동은 위에서 살펴 본바와 같이 선교사들에 의해 준비 되어졌다. 비록 처음부터 부흥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된 바는 없었지만, 그들의 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이 효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운동의 중심에 길선주 목사가 있다.21) 그는 “조선 기독교의 아버지”22) 또는 “가장 위대한 한국 개신교 인물 중에 한 사람”23)이라는 칭송을 받는 인물로 부흥운동의 중요한 준비 단계에 그의 새벽기도 운동이 있었다.
3. 1907, 어떻게 성령이 평양에 임하셨는가?
How the Spirit Came to Pyeng Yang?
이길함(Graham Lee)
1906년 8월 [26일]에 우리 평양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은 우리 자신의 영적인 삶을 더 깊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1주일간[8월 26일-9월 2일] 사경회를 개최했다. 원산의 하디 박사가 와서 우리에게 대단한 도움을 주었다. 성령께서 그 집회를 통해 우리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시며 그분을 섬기는 일에 우리를 놀랍게 사용하시기를 사모하도록 우리의 심령에 간절한 열망을 불어넣어주셨다.
사경회 후 즉시 우리는 서울로 올라가 연례회의에 참석하였으며, 거기서 하워드 애그뉴 존스톤(Howard Agnew Johnston)을 만났는데 그를 통해 서울 선교사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존스톤 박사는 평양에 와서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 인도에서 나타난 놀라운 성령의 현시에 대해 들려주었으며 그 이야기를 들은 한국인들 몇 사람이 같은 축복을 받기를 대단히 열망했다. 그 때부터 축복이 임할 때까지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은 놀라운 부흥이 임하도록 기도해왔다.
우리가 연례회의에서 돌아와 성령의 부으심이 임하도록 간구하면서 얼마 동안 특별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그 때에는 응답을 받지 못했다. 한국인들은 그 집회를 즐겼으나 성령께서는 권능 가운데 우리와 함께 임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를 계속하였고, 크리스마스 때에 우리 선교사들 심령에 한 주간 특별 기도회를 갖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불어 넣어주셨다.
이 특별 기도회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유익이 있는 집회였다. 이 집회가 마치기 전에 평안남도 겨울남자 도사경회가 시작되어 약 700명의 남자들이 성경공부를 하며 2주[1월 2일-15일]를 보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이 사경회 동안에 특별한 축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 장로교 선교사들은 매일 정오에 모여 사경회를 위해 기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정오 기도회는 우리 모두에게 대단한 유익을 가져다주었다. 왜냐하면 이 정오 기도회가 우리에게 바로 벧엘이었기 때문이다.
1월 6일에 우리는 평양시내 네 개의 장로교가 연합하여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와 평양시내 사람들을 위해 저녁집회를 시작했다. 만약 남녀를 같이 참여하도록 한다면 장소가 너무 협소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우리는 여성들의 경우 네 개의 다른 장소에서, 학교 남학생들의 경우 중학교 예배실에서 별도로 모임을 갖도록 요청하였다. 장대현교회에서는 단지 남자들만 참석하였다. 장대현교회는 약 15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매일 밤 교회는 사람들로 꽉 찼다. 토요일[12일] 저녁까지 매일 밤 집회 가운데 주의 능력이 점점 강하게 나타나 토요일[12일] 저녁집회는 그 때까지 열린 저녁 집회 가운데 최고였다.
주일[13일]에 우리는 평양의 네 개의 각 교회에서 정규 주일예배를 드리고, 주일저녁에 장대현교회에서 계속해서 평양시내 네 개의 교회가 연합하여 다시 저녁집회로 모였다. 우리는 그 주일 저녁집회에 대단한 축복을 기대했었으나 놀라운 축복을 받는 대신 우리는 아주 독특한 경험을 하였다. 집회는 냉랭했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떠난 것처럼 보였다. 한번의 설교와 유익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몇 사람의 열의 없는 간증이 있은 후 우리는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며 무거운 심령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전 저녁 집회에서는 생명력을 가진 간증들과 실제적이고 진지한 죄의 고백이 있었으나 주일 저녁에 모든 것이 막힌 듯했다. 그 집회는 하나의 죽어 버린 형식적 집회처럼 보였다. 한국인 형제들도 우리 선교사들이 느끼는 것과 똑 같이 느꼈다. 주일저녁은 음울한 밤이었다. 1월 14일, 월요일 정오에 우리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울면서 간절히 간구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월요일 저녁집회에 바로 그 축복이 임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채 월요일[14일] 저녁집회에 참석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해달라고 내내 간절히 기도했다. 나는 우리가 장대현교회 건물 안에 도달했을 때 우리 모두가 무언가 임하고 있음을 느꼈음을 감지했다. 간단한 설교가 있은 후 우리는 함께 통성기도를 드렸으며 모든 청중들이 함께 여기에 합류했고 이 통성기도는 이들 집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기도 후 몇명의 간증이 있은 후 사회자가 청중들에게 일어나라고 하고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새벽까지 계속 기도회를 가질 계획을 가지고 혹 오래 남아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남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고 5백에서 6백명 가량이 남았다. 우리는 이들을 장대현교회 건물의 한 L자 형 예배실에 모으고 집회를 시작했는데 그 집회는 우리 중 아무도 지금까지 목도하지 못했던 그런 집회였다. 기도 후에 죄를 고백했으며 즉시 하나님의 영이 그곳의 회중들 가운데 임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흐느껴 울며 마루 바닥에 고꾸라졌고 혼신을 다해 통회하는 가운데 손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내 요리사가 죄를 고백하려고 시도하다 집회 중간 쯤 통회하며 그 방을 가로질러 내게 와서는 “목사님, 내게도 소망이 있습니까, 나도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소리치고는 바닥에 쓰러져 울고, 또 울고, 거의 고통 속에 절규했다. 때 때로 죄의 고백이 있은 후 전 회중이 통성으로 통회의 기도를 드렸고, 수백 명의 남자 성도들이 통성으로 함께 드리는 기도의 효과는 무언가 형언할 수 없었다. 다시 또 다른 사람이 죄를 고백한 후 회중들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통회의 기도가 시작되어 우리 모두 울었고,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그 집회는 죄를 고백하고 울며 기도하면서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중 몇몇은 교회의 높은 제직 가운데 몇 사람, 특별히 강씨와 김씨 사이에 마음에 증오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 우리는 이 저녁 집회가 열리는 동안에 모두 와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희망했다. 월요일 저녁에 강씨가 용기를 가지고 그가 얼마나 김씨를 미워했는지를 고백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하고 강한 사람이 울음을 터트리고 다시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그런 후 다시 자신이 얼마나 김씨를 미워했는가를 말하면서 통회하는 모습을 목도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새벽 2시가 되었으나 아직도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건물이 점차 추워가고 우리가 아직 또 다른 저녁집회를 남겨두고 있어 우리는 여기서 월요일 저녁집회를 마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날 화요일[15일] 정오기도회에 우리 선교사들은 전날의 놀라운 저녁집회에 대한 감사로 가득한 심령을 가지고 모여, 또 다시 화요일 저녁집회 때에 더 큰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했다. 화요일 저녁집회 때 우리의 가장 은사를 충만히 받은 설교자, 길선주가 간단히 설교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약 6백명이 남았다. 그 집회는 월요일 저녁집회와 상당히 유사했지만 성령의 현시는 더 강력했다.
우리 중 몇은 두 사람, 특별히 김씨와 주씨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드렸는데, 그것은 우리가 볼 때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하게 고백할 무엇인가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김씨가 용기를 내자 상황은 절정에 달했다. 강대 앞 쪽에 앉았던 그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앞으로 나와서는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할 기회를 가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다른 형제들, 특별히 블레어 선교사를 미워했음을 고백하고는 온 몸을 전율하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형언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고통이었다. 그는 마루 바닥에 고꾸라졌는데 모습이 꼭 발작하는 사람 같았다. 그가 통회하자 온 회중은 마치 하나의 강력한 통회의 폭풍처럼 통회하기 시작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우리 선교사들은 나머지 무리들과 함께 울었으며 회중들이 통회하는 것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그들이 흐느껴 우는 동안 강씨가 일어나 기도했다. 심령이 가난한 그 남자는 절규하며 기도하고는 완전히 녹아내려 자신의 죄를 완전히 통회 자백하였는데 마치 심장이 끊어지는 듯했다. 형제들이 그 사람 주변에 모여 그들의 팔로 그를 감싸자 그가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런 후 그가 김씨에게 가서 사랑스럽게 자신의 팔을 벌려 그를 포옹하고 그와 함께 우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런 후 김씨가 통회하며 블레어 선교사에게 돌아가 “블레어 목사님, 나를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를 용서해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블레어 선교사는 일어서는 “아바지, 아바지”를 두 번 말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잃고 더 기도를 하지 못했다. 청중들은 통회를 계속했고 그것은 어떻게 그들이 중단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드디어 우리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찬송 한 곡을 불러야 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몇몇 사람이 자신들을 통제할 수 없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찬송을 부르는 동안 그들이 냉정을 찾았으며 그런 후 다시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그 집회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그 저녁에 있었던 가장 놀라운 일 중의 하나는 한 대학생의 기도였다. 그는 하나님 앞에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싶다고 요청 기회를 얻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결코 전에는 그런 기도를 들은 적이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진 한 영혼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간음, 증오, 아내에 대한 애정 결핍,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몇 가지 다른 죄를 고백했다. 기도하면서 그는 통회하였으며, 실제로 거의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가 통회하자 청중들도 그와 함께 통회하였다. 우리 모두는 마치 우리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화요일[15일] 저녁집회로 평안남도 겨울 남자 도 사경회는 마쳤으나 우리는 마치 이 같은 성령의 현시가 이제 그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수요일 저녁 우리 평양 시내 네 장로교회 기도회 때 똑 같은 놀라운 권능이 현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른다. 나는 수요일 저녁 장대현 교회에서 두 장로를 선출하겠다고 광고했었으나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저녁에 선거를 하는 것이 최선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내가 그 건물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날 밤 선출할 장로는 아무도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혹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간단한 설교가 있는 후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돌려보냈다. 청중이 조용해지자마자 우리는 함께 통성 기도를 드렸다. 즉시 일단의 남자들이 껑충껑충 뛰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싶다며 의사를 표했다. 몇몇 사람이 죄를 고백한 후 주 장로가 자기 죄를 고백할 용기를 얻게 되자 그 집회는 절정에 달했다. 그 놀라운 화요일 저녁집회 내내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우리들은 그가 고백할 무언가 무서운 죄가 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그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강단 앞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갑자기 그가 내 곁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내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가 굴복하였고, 성령께서 이제 그를 깨끗게 하실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너무 떨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표현이 불분명했다. 그러나 계속하면서 그의 말은 더 분명해졌고, 그런 후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토로했다. 그는 간음과 공금 유용을 고백했다.
그가 자신의 죄를 토로하는 동안 유한한 인간이 표현한다면 이제까지 내가 목격했던 바로는 가장 무시무시한 고통 가운데 처해 있었다.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나는 그가 혹시 고꾸라지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팔을 벌려 그를 붙들었다. 무서운 심령의 비탄 속에 그는 “이제까지 세상 어디에 나와 같은 무시무시한 죄인이 있을까요”라며 울부짖고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주먹으로 강단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는 바닥에 주저 않고는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으며 극심한 고통 가운데 뒹굴었다.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마치 그는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장면을 목도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한국 형제들이 그에게 다가가 자신들의 팔로 그를 감싸고는 고통 가운데 있는 그를 위로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주씨가 통회하자 온 회중이 눈물로 통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울고 절규하고, 다시 절규하였으며, 마치 그들은 중단할 수 없는 듯했다. 나는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찬송 한곡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집회를 조금 연장한 후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현시하셨음을 인하여 감사하며 회중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 장로가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일이었다.
수요일[16일] 아침 평양 숭현여학교에 똑 같은 성령의 현시가 임했다. 스눅 여 선교사가 여느 때처럼 학교에 출근하여 첫 수업이 끝난 후 10시에 학생 예배가 시작되었으나, 그날 아침 예배 내규는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었다. 몇 마디의 멘트와 기도가 있은 후 여학생들이 통회하며 울부짖으며 회개하기 시작 12시까지 오직 기도와 통회와 죄를 고백하였으며, 집회는 12시가 넘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목요일 아침에 수요일의 역사가 반복되었으며 채플이 정오까지 지속되었다. 금요일에 학교 수업을 중단하고 오전 내내 지난 이틀간처럼 시간을 보냈다. 수요일 아침 장대현교회 남학교, 숭덕학교에서 똑같은 성령의 현시가 나타났다. 학교가 보통처럼 개학하였으나 수업을 중단하고 1시까지 계속 통회하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세 명의 소년들이 절제를 못하고 강력한 집회에 압도되어 의식을 잃었다. 확실히 그 책임을 맡은 한국인 교사는 필요할 경우 어떻게 그 영적 긴장에서 회중들을 벗어나게 할지 알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목요일 아침 여자 초등학교에 성령이 임하셨다. 우리 중 몇은 학교 교실까지 가면서 학생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으며 그 똑같은 권능이 그곳에 임한 것을 알았다. 베스트 여 선교사는 즉시 내려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이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듣고 번하이젤 선교사 부인이 평양의 여학교로 내려가 그곳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목도했다. 그녀는 그 여학생들에게 몇 마디를 하자 즉시 그들이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수요일 정오기도회 때에 똑같은 권능이 현시되었다. 30분의 기도회 대신 우리는 그날 오후 2시까지 울면서 우리의 죄를 고백했다. 나는 결코 전에는 그 같은 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의 영이 문자적으로 우리에게 임했으며 우리는 울며 우리의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서 방해하거나 죄짓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정결케 하시려는 것처럼 보였다.
평안남도 도 사경회 내내 교회 여자 성도들은 별도로 모임을 가졌으나 그곳에서는 그들 가운데 특별한 성령의 현시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저녁에 장대현 교회에서 그들을 위한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특별한 성령의 현시가 없었는데, 그것은 여인들이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소의 죄 고백과 몇몇 자기 의로 충만한 나이든 여인이 산만하게 몇 마디 했으나 성령께서 권능으로 그곳에 임하시지는 않았다. 토요일 저녁에 권능이 임하자 여인들은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교사들은 우리에게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되었던 한 젊은 여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을 보고 참으로 기뻤다. 우리는 그녀를 도우려고 했지만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토요일 저녁에 그녀가 통회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는데 그녀는 마치 심장이 찢어지는 듯 절규했다.
1월 20일 주일 아침 장대현교회에서 우리는 주일날 평소의 주일학교 성경공부를 가졌으며, 그날 오후예배 때 또 다른 놀라운 성령의 현시가 임했다. 길선주 장로가 설교했는데 그는 아주 생생한 예화로 자신의 설교를 마무리했다. 그는 밧줄에 연결된 끈을 가지고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조여 묶고는 매큔 선교사가 강단에 서서 그에게 오라고 손짓하는 동안 사회자 중 한 사람에게 그 밧줄을 잡아당겨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 후 길장로는 어떻게 죄로 결박당한 죄인이 죄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가를 설명했다.
길선주 장로가 사람들 중 몇이 통회할 때처럼 몸부림치자 드디어 그 결박이 끊어졌고 그런 후 그가 강단을 가로 질러 가서 매균과 서로 감싸 안았다. 나는 블레어 선교사와 시골 사경회를 개최하느라 시골에 있어서 그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매큔 선교사는 길선주가 결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회중들이 숨을 죽이고 있었고 결박이 끊어지고 그와 길 장로가 서로 팔로 포옹하자 그 효과는 형언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많은 남자들이 곧 일어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울부짖었고, 반면 다른 사람들은 간절히 울부짖으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길 장로는 그들에게 집으로 가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다시 저녁집회에 오라고 말했다.
월요일과 화요일 저녁에 단지 여성들만을 위한 집회가 열렸으며 그 집회 때 또 다시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이 현시되었다. 그 임재의 역사가 너무도 커서 한 여인이 의식을 잃었고 다른 이들도 거의 자신들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은혜 가운데 집회가 끝났다. 사람들이 대단히 기뻐 즐거워했다. 시골 지역에서 그 역사는 계속되었다. 블레어 선교사와 내가 막 시골 사경회에서 돌아왔는데, 그 사경회에서도 성령의 현시가 정확히 똑같이 나타나 죄로 인한 무시무시한 통회, 죄에 대한 고백이 있은 후 놀라운 기쁨과 평화가 찾아왔다.
평양에서 은혜로운 사역이 시작되었음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 최고의 감사를 돌리며, 우리가 목도한 것이 단지 하나님이 아직 우리를 위해, 아니 단지 우리만 아니라 이 나라 전체를 위해 예비해두신 더 위대한 축복을 위한 염원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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