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스크랩]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약사

하나님아들 2015. 12. 18. 15:03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약사

 


A Short History and Chronological Table of the Christian Church or the Church of Christ

조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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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이 글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를 쓰는데 필요한 기초자료연구에 불과합니다. 부정확한 연대나 자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검토와 토론을 거쳐서 바로 잡을 수 있다면 그보다 다행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 동역자들께서 심도 있게 검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토론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가 논의의 초점이므로, ‘1930년대까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사’ 부분은 서술형식으로 기술하였고, 발표도 이 부분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나머지 부분은 연대별 약사로 대신하겠습니다.

1. 1930년대까지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사

1930년대까지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사는 가장 초기에 속하는 운동사다. 이 시기의 운동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첫째, 자생적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들; 둘째, 일본 주재 커닝함 선교사의 한국 선교를 위한 노력들; 셋째, 미국 유학파들의 활동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국 선교사들의 활동들을 차례대로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A. 자생적인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들

1)말콤 펜윅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란 이름으로 최초로 교회를 세운 사람은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이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1889년 7월이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철물상을 경영하던 사람으로서 신학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예배인도자 윌더(Wilder)로부터 사막에서 물을 구하다가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어 선교사가 되었다. 윌더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훌륭한 유리병에 물을 담아와 유리잔에 부어서 그에게 준다면 그는 감사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낡고 녹순 찌그러진 깡통 밖에 없어서 그 속에 물을 담아다준다 하더라도 그는 그 물을 마시고 살아 날 것이다.”고 하였다.

펜윅은 침례교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자신은 교파의식을 떠나서 사역하였으며 그가 관계한 교회들은 ‘대한기독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미국을 방문한 펜윅이 1893-95년 사이에 매사추세츠의 보스턴 크라렌든가(街) 침례교회에서 얼마간 지냈는데, 씽(S. B. Thing)이란 집사가 외동딸을 추모하기 위한 뜻으로 선교회를 만들어 1895년에 6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습니다. 이들 선교사들은 공주를 중심으로 한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선교자금 부족으로 1900년까지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들이 하던 사역을 원산에 있던 펜윅이 넘겨받게 되었다. 펜윅의 노력으로 250여 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만주와 시베리아에까지 교회들이 세워졌으나 1936년 펜윅이 죽은 이후로 1950년까지도 침례교와는 어떤 연관도 없었다. 다음은 펜윅이 쓴 자서전(The Church of Christi in Corea)의 일부내용이다.

하나님은 나를 어떠한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르셔서 사역을 맡기셨고,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주님께로 돌아오는 영혼들이 많아지자 감독자들을 임명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고, 할 수 있는 대로 가장 간결한 교회 이름을 지었는데, 한국어로는 ‘대한기독교회’(Dai Han Kitock Kyouhay)였으며, 그것은 ‘한국의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Christi in Corea)란 의미였습니다(허긴, 󰡔대한기독교회사: 펜윅 선교사의 자서전적 이야기󰡕).

2)한석진

한석진 목사는 1868년 평북 의주출생으로써 동향인(同鄕人) 백홍준과 서상륜의 전도를 받고 처음 기독교를 알게 됐고, 1891년 마펫에게 세례 받았다.

한석진은 자주의식이 강해 마펫의 조사(助事)로 일하면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감격하여 그 진리를 내 동족에게 전하는데 외국인에게 돈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논리로 선교사가 주는 봉급을 거절했고, 평양 장대현교회, 서울 안동교회, 마산 문창교회, 신의주 제일교회 예배당을 건축할 때도 “한국인의 교회는 한국인의 힘으로 건축한다.”는 원칙을 고집했다고 한다. 또 1910년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신문인 󰡔예수교회보󰡕 사장이 되어서는 신문사를 주식회사 형태로 전환하여 한국인들의 헌금만으로 신문을 발행하여 선교부 자금의 유입을 차단시켰다.

한석진은 200년 전 미국에서 토마스 캠벨과 발톤 스톤이 펼쳤던 운동과 마찬가지로 ‘교파주의’를 극복하려고 한 자생적 환원운동가였다.

한석진은 1909년 일본 도쿄에 유학생들의 한인교회를 설립할 때에 초교파적인 연합교회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고,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로 세우기를 원하는 학생들과 본국교회를 설득하여 “일본에서만큼은 장로교나 감리교가 아닌 연합교회로 운영한다.”는 원칙을 만들어냈다.

한석진은 기회만 있으면 교파구별이 없는 ‘하나의 교회’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구체적인 예로 1915년 자신이 속한 경기충청노회에 ‘조선예수교장로회’란 교단명칭을 “조선기독교회로 바꿀 것”을 헌의하였다. 교단명칭에서 ’장로‘자를 빼고 보편적인 ’기독교‘ 명칭을 사용하자는 그의 헌의는 물론 부결되었다.

한석진은 목회말년에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 건립을 위해 헌신하였는데, 1926년부터 모금을 시작하여 1930년에 2층짜리 웅장한 돌집 수양관을 건립하였다. 기금은 한석진이 장로교회들을 순방하여 모은 것이었다. 수양관 간판을 달 때, 사람들은 당연히 ‘장로교 수양관’이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모금은 장로교인들이 했지만 공간은 다른 교파 사람들에게도 공개하자.”며 ‘기독교 수양관’을 고집했고 결국 그대로 되었다(이덕주, “한국교회의 자존심, 한석진 목사”).

3)최태용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고전 1:24)는 묵시를 얻었다면, 최태용(1897-1950) 목사는 “그리스도는 생명이다!”는 묵시를 얻었다.

10대 후반 수원농림학교 재학시절 기숙사에서 처음 기독교신앙을 접한 최태용은 어느 날 침상에 누우려 할 때에 홀연히 광명한 빛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복음을 위하야 네 몸을 바치라”는 가슴에 울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20대에 “그리스도는 생명이다!”는 묵시를 얻게 된다. 27살에 박동완, 전영택, 송창근, 강명석, 최상현, 채필근 등이 동인지처럼 펴내던 󰡔신생명󰡕(新生命)에 글을 발표하다가 28살에는 스스로 󰡔천래지성󰡕(天來之聲)을 펴냈다.<주: 강명석(관서학원과 밴더빌트대학 졸업)과 최상현(연희전문과 협성신학 졸업, ?신학세계? 편집)은 본래 감리교 목회자들이었으나 1930년 중반부터는 그리스도의 교회 발전에 공헌함.> 그는 이 신앙지에서 “사람은 다만 그리스챤이란 일흠 외에 무삼 딴 일흠으로써 신자를 부르기 십허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리스챤 이외의 일흠으로써 여배(余輩)를 부르랴거든 여배(余輩) 또한 한 일흠을 제공하리라.... 여배(余輩)는 교회주의라는 것이 비진리오 악마의 오묘(奧妙)임을 주창한다.”(“비교회주의자”, 󰡔天來之聲󰡕) 17호, 1926. 10)고 하여 ‘오직 그리스도인!'(Christian Only!)을 주창하는 ’그리스도의 교회‘ 운동의 한국인 선구자라 할 수 있다. 36살이던 1933년 9월 어느 날에는 작은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물살이 센 큰 강을 건너는 꿈을 꾸고서 “소(小)하고 순(純)한 교회”를 세우라는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여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 조선 복음교회’를 창설하였다. 이 때 그가 제창한 표어가 “1)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여라. 2)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여라. 3)교회는 조선인 자신의 교회어여라.”(“우리의 표어”, 󰡔영과 진리󰡕 81호, 1935. 12)였다.

4)성낙소

성낙소(成樂紹) 목사는 1890년 5월 16일에 태어나 1964년 11월 30일 74세로 소천 하였다. 그는 일찍이 구국의 일념으로 홍주성 의병군에 가담하여 왜적을 물리치려 하였으나 기회를 놓치자, 구세군에 가입하여 이를 실현하려 하였으며, 기미년 독립만세운동 때에는 영동지방의 유지와 청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왜경에게 쫓겨 다녔던 애국지사였다. 이 시기에 처가가 있던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2구 290번지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곳 사랑채에서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를 시작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 성낙소 목사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27년 정월 초에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에서 성낙소 자신이 기독교계를 시찰한바 기독교 각파가 기독 정신의 골자인 박애(博愛)로 속죄구령의 목적을 충각(忠覺)하고 각기 자파(自派)의 교세만 확장하려는 동시에 자파가 아닌 교회는 이단시할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심이 농후함으로 상대하는 입장에 소원(疏遠)함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성서 중 에베소서 4장 3~6절 말씀과 같이 칠종(七種)을 통일하자는 신앙으로, 첫째 몸도 하나요 하였으니, 몸은 즉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킴이라(엡 1:23; 골 1:24). 교회의 명칭을 기독의 교회라고 통일하기 위하여 기독의 복음으로 동민에게 전하였다(성낙소, 󰡔자서전󰡕제2장).

그러나 안타깝게도 화수리에 세워진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는 그 소중한 역사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담임자 성낙소 목사가 서울로 옮겨가고, 처가도 세도면 해촌으로 이사를 가면서 그만 문을 닫고 말았다. 성낙소의 처가가 이사 간 다음, 화수장로교회(기장)의 조용희 장로가 그 집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헐리고 공터로 남아 있다.

B. 일본 주재 커닝함 선교사의 한국 선교를 위한 노력들

1)윌리엄 커닝함

윌리엄 커닝함(William D. Cunningham/1864-1936)은 1901년 10월 1일 일본에 도착하였으며, 1902년에는 도쿄에 요추야 미션(Yotsuya Mission)을 설립하였고, 1903년 7월 5일, 1905년 4월 8일, 1906년 6월 9일에 각각 한 개씩의 교회를 개척하였으며, 다섯 곳에 성경공부 반을 운영하면서 300여명을 가르쳤고, 미국에서 들여온 인쇄기로 󰡔도쿄 크리스천󰡕(Tokyo Christian)이란 선교지를 발행하였다. 1930년까지 도쿄에는 10개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하나가 재일본 한인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커닝함이 한국선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 4월에 중국 상해에서 열린 선교사대회에 참석차 가고오던 길에 한국에 들리게 되고, 오던 길에는 몇 개 교회에서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1911년에 일본성도가 요추야 선교부(Yotsuya Mission)에 한국교회 설립을 위해서 15엔 70전을 맡기자, 커닝함은 이 돈을 일본 거주 한국인을 한국에 보내 이 돈을 쓰게 하였다.

1916년 커닝함 선교부는 한국 선교의 거점 확보를 위해서 노력하게 되며, 1923년(같은 해 9월 1일에 관동지역 대지진 피해로 사상자 2만, 가옥피해 6만, 일주간 조선인 6661명이 피살됨)에는 일본 요코하마시 미야다죠 조선인 교회(橫濱市 宮田町 朝鮮人 敎會)를 설립하게 된다.

1924년 10월에는 한국인 이완건을 한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힐 요한 선교사의 회고에 따르면, 1924년 일본에서 한국에 건너온 사람에 의해서 일곱 교회가 세워졌고(󰡔타오르는 횃불󰡕이나 󰡔도쿄 크리스천󰡕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됨), 힐 요한 선교사가 1939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들 일곱 교회 가운데서 인천에 있는 두 개 교회와 서울에 있는 한 개 교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들 교회들은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란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1930년 5월에는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를 시무하던 성낙소가 요코하마시 미야다죠 조선인 교회(橫濱市 宮田町 朝鮮人 敎會)에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에는 한국에 2개의 교회가 임대건물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를 중심으로 - 1864-1936󰡕, 한성신학교.).

󰡔크리스천 온리-환원운동사󰡕를 쓴 제임스 드포레스트 멀치는 커닝함 선교사의 한국선교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짤막한 내용을 그의 책 204쪽과 340쪽에 싣고 있다.

한국: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일본 주재 커닝함의 직접-지원 선교로 한국인들에 의해서 한국에 설립되었다. 12개의 교회들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동란 중에 사라져버렸다. 한국에서의 현재의 사역은 800명가량의 교인과 7개의 교회들을 세운 죤 채이스에서 비롯된 것이다(James DeForest Murch, Christians Only: A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Cincinnati: Standard Publishing, pp. 304, 340).

2)이완건과 이인범

이완건(Li, Wan Kyun)과 이인범(I. P. Lee)은 본래 교파 교인들이었으며, 커닝함이 1907년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때 친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커닝함을 통해서 일본에 건너가 커닝함으로부터 성경을 배우고 침례를 받았으며, 한국에 파송되었다. 이완건은 1924년 10월에 한국으로 파송되었고, 이인범은 1932년에 파송되었다. 이인범은 한국 YMCA에서 일을 했는데, 한국에 머무는 동안 100여명에게 침례를 주었고, 몇 군데에 교회도 개척하였다. 커닝함은 이 일에 관해서 󰡔도쿄 크리스천󰡕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하나님은 "가라"고 명령하셨고, 한국 사람들은 와서 도와 달라고 간청해 오고 있으며, 우리들도 가고 싶다. 가고 싶은 정도가 아니고 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가기를 절대적으로 원한다. 보내고 안 보내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달렸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신약교회의 설립의 때가 왔다. 한국에는 2개의 큰 교파의 교회가 있는데, 이들은 성공하고 있지만, 이인범에 의하면, 인간적인 신조를 벗어나서 성경만 믿으려고 하는 무리가 증가하고 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이인범을 두 번이나 한국에 보냈다. 한국교회는 두 가지가 유명하다. 성경공부와 기도이다. 내가 한국에 가서 한번은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모인 숫자가 1,200명이었다. 참석한 자들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를 중심으로 - 1864-1936󰡕, 한성신학교.).

3)죤 채이스

7년간 커닝함 선교부에서 일하던 선교사 죤 채이스(John T. Chase)는 1930년 일본에 체류하는 성낙소 목사를 도왔으며, 1936년에는 성낙소의 목사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건너와 선교하였다.

4)성낙소

기독지교회가 창설된 지 3년이 지난 1930년에 기독지교회 출신의 한 청년이 일본 동경신학교에 유학하였는데, 커닝함이 동경에서 30년째 기독지교회란 동일한 명칭으로 선교하는 것을 보고는 성낙소 목사를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에 커닝함은 성낙소 목사에게 도항증(渡航證)과 뱃삯을 보냈고, 성낙소 목사는 1930년 5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커닝함이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요코하마시 미야다죠 조선인 교회(橫浜市 宮田町 朝鮮人 敎會)를 섬겼으며, 이 기간에 죤 채이스와 커닝함으로부터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서 배울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1931년 9월 하순에 커닝함 선교부로부터 조선 전 지역 포교책임자로 임명받고 귀국하였다.

다음 해인 1932년 초에 조선 총독부 종교과 포교계에 교파를 ‘동경 사곡 선교회 기독의 교회’로 등록을 필한 후, 서울에 상주하면서, 각 지방에 교회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2구 290번지에 세운 기독지교회를 매월 순회하였는데, 이로써 화수리 기독지교회는 소속이 불분명한 자생교회란 옷을 벗고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옷으로 바꿔 입게 되었던 것이다.

성낙소 목사는 1932년에 서울 종로구 내수정(혹시 106-1번지의 내수정 기독지교회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음), 계동, 공덕동, 청엽동, 인천 송현동 외 2곳과 평북 구성(平北 龜城)에 기독지교회를 1년 반 동안 7개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37년에는 서울 종로구 필운동 289번지에 대지 42평 초가를 매입하여 필운동 기독지교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인 1932년, 일본 커닝햄 선교부는 일방적으로 성낙소 목사를 해임하고 이인범(李寅範)을 조선포교책임자로 임명하였다(1960년대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주보 및 성낙소 목사 자서전 제2~5장).

C. 미국 유학파들의 활동(무악기)

1)동석기

동석기(1881-1972) 전도자는 1881년 4월 6일 함경도 북청에서 유교집안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일찍이 서당교육을 받았으며 17세에 결혼하였다. 1904년 23세 때에 우연한 기회로 미국 하와이로 이민하였고,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노스웨스턴 대학교(Northwestern University)과 게레트 신학교(Garrett Biblical Institute)에서 공부하였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1913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4년간 감리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죄로 복역한 바 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3.1운동민족대표로 서명하였으나, 이후 33인의 일원이 되지는 못하였다.

1927년에 다시 도미하여 순회하던 중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알게 되었고, 신시내티 성서 신학대학원(현 Cincinnati Christian University)에 입학하여 1929년에 "미국 환원운동의 초기 역사"(The Early History of the Restoration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란 제목의 졸업논문을 쓰고 졸업하였다. 그는 거기서 대오각성하고 1930년 11월에 귀국하여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그리스도의 교회들을 개척하였다.

1930년 11월 29일 함경남도 북청에 「함전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다.

1931년 5월 14일 함경남도 북청에 「시흥리 교회」 설립가 되다.


1931년 5월 22일 일본에 있던 메칼렘 선교사가 내한하여 동석기 전도자를 도와 일하다. 31명에게 침수세례를 베풀다.


1932년 5월 22일 함경남도 북청에 「수동리 교회」가 설립되다.


1936년 10월 11일 함경남도 북청에 「임자동 교회」가 설립되다.

1936년 9월 서울에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다. 동석기 전도자는 1935년 도미하여 선교모금을 한 후 귀국하여 1936년 9월 서울 내수동 106-1번지에 작은 가정집을 교회로 마련한다. 이것이 내수동 그리스도의 교회의 시작이다. 그런데 당시 교회를 관장하고 확장해 나갈 만한 사람이 없어 성낙소 목사에게 빌려 준다. 다음 해인 1937년 성낙소 목사는 동석기 전도자와 갈라서 필운동 289번지의 대지 42평 초가를 매입하여 옮기고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시대를 열다.

동석기 전도자는 은퇴 후 미국에서 거주하다가 1972년 90세의 고령으로 소천하였다.

2)강문석

강문석(본명은 강명석/1897-1944) 전도자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후일 도일하여 관서학원(關西學院) 신학부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귀국 후 향리인 밀양에서 감리교 목사로 목회하던 중 감리교의 감독을 지낸 양주삼 박사의 주선으로 도미하여 테네시 주 내시빌에 있는 밴더빌트 대학교 신학부(Vanderbilt University, Department of Religion)에서 공부하였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접촉하게 되었고, 우리의 신앙은 다양한 교파의 교회나 신조에 따르기보다는 성서로 돌아가서 초대 교회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일 년을 더 머무르면서 프리드 하드만 대학(Freed-Hardman College)에서 '환원운동'에 관해서 연구하였다.

강문석 전도자는 1936년 11월 귀국 이후 1944년 5월 28일 47세의 나이로 소천하기까지 아래와 같은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1936년 12월 강명석 전도자의 장모되시는 전난 성도의 집에서 「울산 그리스도의 교회」가 창립되다.(지금의 예배당부지는 1951년 12월 전난 성도가 자신의 사유 여관 10칸을 울산교회에 헌납하여 형성되다).


1937년 5월 서울에 「동교 교회」, 10월에 「경주 교회」와 서울 「대현교회」가 설립되다.


1937년 4월 14일자 [긔독신보]에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다.


1938년 3월 경남 진양에 「반성 교회」가 설립되다.


1940년 3월 인천에 「송림 교회」, 6월에 경북에 「동방 교회」가 설립되다.

D. 입국 선교사들의 활동과 협력자

1)미첼 쉘리

제이 미챌 쉘리(J. Michael Shelley)는 1935년 3월 중하순경에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이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같은 해 11월에 귀국하고 만다. 쉘리는 선교본부를 서울에 두고, 북한지역에서 2개월가량 사역하였고,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일제하에서 정부에 최초로 법적으로 등록하였으며, 성경공부 반을 만들어 가르쳤다.

아래의 글은 제이 미챌 쉘리가 1963년 1월 23일에 해롤드 테일러(Harold Taylor) 선교사에게 답장형식으로 보낸 것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롤드 테일러 선교사님께,

선교사님께서 내 아들 진에게 보낸 편지는 크리스마스 경에 내게 전달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매우 바빴기 때문에 며칠 이내에 답장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한쪽으로 치워두었는데, 그만 그것을 잘못 두게 되어 오늘에야 비로소 그 편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한국에 건너간 최초의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드러난바 대로 도쿄 주재 커닝함 선교부의 감독아래 허락된 부정직과 비기독교인다운 행위들로 인해서 한국에서의 선교 사역은 매우 유감스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 때의 일을 되돌아본다 해서 좋을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그것이 우리가 본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두 가지 중대한 사유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 한 가지 사유는 우리 가족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꼬인 것들을 풀어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1935년 2월에 샌프란시스코를 배로 출발했고, 그해 11월에 미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북한지역에서 2개월가량을 보냈지만, 선교본부는 서울에 두었습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몇몇 설교자 자료를 찾게 되기를 바라면서 매우 훌륭한 성경공부 반을 개설하여 가르쳤습니다. 이 성경공부 반에 참석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세 명이 서울 변두리 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서울과 도쿄에서 증거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 여러 날을 힘들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수집된 자료들을 문서형태로 미국에 가져와 사람들에게 보였습니다. 이런 노력 때문에 커닝함이 죤 채이스의 이력에 깔아놓은 먹구름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줄을 쥔 자들에게(후원자들에게) 우리에게 주던 후원을 채이스에게 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그리고 채이스는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 사역을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선교단체에 소속되지 아니한 채로 독립적으로 후원금을 모았습니다. 그 일로 여기서 일 년 이상을 보냈습니다......

바이다 오레곤에서 1963년 1월 23일

제이 미첼 쉘리 드림(김찬영,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역사 - William D. Cunningham의 생애를 중심으로 - 1864-1936󰡕 한성신학교.).

2)죤 채이스

채이스(John Trawrick Chase)는 1905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Louisville)에서 출생하여 다섯 살에 고아가 되어 숙모 집에서 양육되었다. 15세에 침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으며, 17세 때 존슨 성서 대학(Johnson Bible College)에 입학하여 신학을 시작하였지만, 1924년 신시나티 성서 대학으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졸업하였다. 그곳에서 와네타 스미스(Wahneta Smith)양을 만나 결혼하였고,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

1927년 3월에 일본에 도착한 채이스 가족은 일본 주재 커닝함 선교사와 7년간 함께 일했으며, 한국에 파송된 초대 선교사인 J. 미챌 쉘리(J. Michael Shelly)의 지원과 성낙소 목사의 초청으로 한국 선교사로 옮기게 되었다.

1936년 한국으로 건너와 서울시 송월동 32-6번지에 위치한 큰 고가와 대지를 영국 해외성서공회로부터 사들여 그곳에서 기독교회 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를 설립하였고, 지하실 방을 이용하여 성경공부 반을 열어 지도자들을 육성하였다.

채이스는 세계 제2차 대전과 6.25동란과 같은 매우 어려운 시기에 한국에 건너와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특히 그는 성낙소(일본에서), 성수경, 최상현과 같은 분들을 환원시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초기 지도자들로써 평생을 헌신할 수 있도록 하였고, 1939년에는 힐 요한을 발탁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하였으며, 심요한, 박판조, 김문화와도 함께 사역하였다.

1936년 10월 11일 한국에 도착해서 1940년 5월 떠나기까지 채이스 선교사가 한국에서 4년 동안(1936~1940)에 이룩한 선교 업적은 다음과 같다.

,선교부 설립 - 1936년 서울 게이조 쇼게추조 32-6번지에 위치한 큰 고가와 대지를 영국해외성서공회로부터 사들여 그곳에 '기독교 선교부'(the Korean Christian Mission)를 설립하였다. 선교부를 설립함으로써 대내외적인 활동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성경공부 반 개설 - 채이스는 선교부 지하실에 성경공부 반을 개설하였는데, 1939년에 약 10여명의 남학생이 등록하였다.

,가족의 증가 - 채이스는 한국에 와서 아이 한 명을 더 낳았다.

,구호품 전달 - 당시의 한국은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운 때었다. 미국의 성도들이 정성껏 모아 보낸 구호품은 춥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데도 훌륭한 도구가 되었다.

,교회개척 - 1939년 힐 요한 선교사 내외가 한국에 왔을 때, 기독교회 선교부 산하 교회들이 서울에 다섯 개가 있었다. 또 채이스는 "한국에 교회당을!"(Chapels for Korea) 이라는 모금운동을 󰡔크리스천 스탠더드󰡕(Christian Standard) 주간지와 공동으로 벌렸는데, 성과가 좋아 1949년에 약 5만 불이 모금되었다. 이 돈은 교회 개척과 교회당 수리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채이스는 이 돈을 다 사용하지 않고, 테일러 선교사에게 인계하였는데, 1957년 6월 미국에 보고 된 것에 의하면, 39교회에 도움을 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채이스는 1987년 12월 23일 캘리포니아주 로디(Lodi)에서 82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였다.

3)힐 요한(John Hill)

1939년 6월 힐 요한(John & Easther Hill) 선교사 부부가 입국하기 전인 1936년에 호주 멜버른 출신의 토마스 G. 힛치(Thomas G. Hitch)가 입국하여 동년에 귀국하였고, 1937년에는 오웬 스틸(Owen & Shirley Still) 부부가 입국하여 1941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들은 크게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고 알려진 바도 많지 않다.

그러나 힐 요한 선교사는 1939년에 입국하여 1972년 6월에 은퇴할 때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귀국 직전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사 약사’(A Short History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Korea)를 기록의 남겼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커닝함 선교사 부부의 일생기(一生記)를 적은 책, 󰡔타오르는 횃불󰡕을 읽고, 어떻게 선교사가 되었는지, 또 그 책 속에 언급된 한국선교에 관한 부분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여기서 힐 선교사는 한국 선교의 시점을 1907년으로 보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1924년에는 커닝함이 보낸 한국인에 의해서 일곱 교회가 세워졌고, 힐 선교사 자신은 1939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들 일곱 교회 가운데서 인천에 있는 두 개 교회와 서울에 있는 한 개 교회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 교회들을 세운 사람은 이완건이지만, 힐 선교사는 잘 알지 못했던 것 같으며, 이인범은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커닝함 선교부로부터 크게 신뢰를 받고 있었던 이인범은 정직하지 못했고, 그로 인한 실망으로 1935년 미첼 쉘리 가족과 1939년 호주 멜버른 출신의 토마스 G. 힛치 가족이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힐 선교사의 회고에 의하면, 이인범은 세계 제2차 대전 중이거나 그 후에 장로교단으로 넘어가 버렸다.

4)최상현

최상현(1891~1950?) 수난자이다. 호는 청송(靑松). 평남 용강군 신녕면 신덕리에서 생원(生員)시에 합격한 최치우(崔致祐)의 아들로 출생.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진남포의 삼숭(三崇)학교를 거쳐 1912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1919년 3월 제1회로 졸업하였다(3월 25일이 졸업예정일이었으나 3.1운동으로 졸업식은 거행치 못했다). 졸업 후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여 1년간 시무하였는데, 이 무렵 그는 연희전문학교 조교수 및 동창회장을 겸임하면서 독립선언서를 영역하는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얼마간 구속되었다가 풀려 난 후 중국으로 망명, 북경의 연경대학에서 수학하다가 미국에 건너가기 위해 상해까지 갔으나 일경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그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다가 서울 협성신학교 하층 방을 얻어 종교서적을 탐독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1921년 3월 <동아일보>에 <인물평정(人物評定)의 표준론(標準論)>이란 논문을 연재하면서 문필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세계 위인들의 생애와 사상 연구에 심취하여 3권으로 된 󰡔세계위인전󰡕을 펴냈다.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펴내는 <신학세계>의 편집을 맡으면서 이를 통해 신앙 및 역사 교양에 관한 논문들을 발표하였으며 1923년부터는 시 <고독으로 비애에>, <새로운 희망>,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소설 <타락자>, <목사의 혹색 너울>, <어떤 수요일 밤> 등을 발표해 최남선, 방인근, 전영택, 이은상, 임영빈 등과 함께 1920년대 기독교 문학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그 사이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29년 본처사역자로 미감리회 조선연회에서 집사목사안수를 받았으며 궁정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1931년 체부동교회로 옮겼으며 1935년 목회를 사임하고 성서공회 관계 일을 보던 중 1936년 일본에서 나온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선교사 채이스(John T. Chase)를 만나게 되었고 이 만남이 계기가 되어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옮겨 채이스 선교사와 함께 한국에서 환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서울 송월정(松月町)에 교리강습소를 개설하고 교설자(敎說者)양성에 착수하였으며, 1937년 10월 15일 「돈암동 그리스도의 교회」와 왕십리 그리스도의 교회(당시는 기독교회)를 개척하여 시무했다. 일제 말기 요시찰 인물로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았고 지하교회로 변한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끌어 나갔다. 이 시기인 1937년에 조선총독부 관보에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가 「조선기독교회」로 소개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 아놀드 장관의 고문직을 맡았었고 공보과장으로 2년간 복무하였으며 1947년 돈암동교회를 다시 재건하여 시무하였다. 1950년 6.25사변이 터지고 그해 8월 공산군에 의해 납치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2. 1940년대 이후의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약사

1940년 3월 25일 김요한(金約輪/與範), 최상현(崔相鉉), 김문화(金文和), 성낙소(成樂紹), 박판조(朴判祚) 5명이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을 졸업하다.

1940년 3월 인천에 「송림 교회」, 6월에 경북에 「동방 교회」가 설립되다(강명석, 교역자회).

1940년 가을. 힐 요한이 신학교를 개교하였으나 일본 경찰이 무허가를 이유로 폐쇄조치하다.

1940년 교회 명칭을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기로 결정하다(성낙소, 강명석). <한학자(漢學者)였던 성낙소는 처음부터 「기독지교회」(基督之敎會)란 명칭을 쓰고 있었고, 미국에서 공부한 강명석 전도자는 1936년 12월에 세운 「울산 교회」, 1937년 5월 서울에 세운 「동교 교회」, 1937년 10월 「경주 교회」와 서울 「대현 교회」, 1938년 3월에 세운 경남 「진양 교회」 등에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동석기 전도자도 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Christ)라는 명칭을 썼다. 그러나 현 협의회와 총회가 소속된 미국의 독립 그리스도의 교회인 경우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교회」(Christian Church)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1941년 채이스가 일제에 추방되면서 선교부 소유지를 난로공장 사장 전항섭에게 임대하다.

일제 말엽 조선총독부기록에 따르면, 경기도에 2개, 경북에 1개, 경남에 3개, 함남에 7개 교회들이 있었고, 교역자 5명, 신도 수가 1937년에 236명이던 것이 1941년에는 140명으로 줄어든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가입을 반대하고 받은 박해 때문이었다. 1940년 가을에 일제가 모든 신교 교파들을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아래 통합시키려고 교파 수뇌들을 경성 서대문 2정목(현 신문로 2가) 「피어선 성경신학교」 내 장로교 총회장 사무실에 모이게 하였는데, 그리스도의 교회 대표로 김문화, 최상현, 성낙소가 참석하였다. 모든 교단이 여기에 가입하고 신궁참배까지 하였으나, 「그리스도의 교회」 대표들은 끝까지 가입을 반대함으로 포교계를 취소당하고 고등형사실에 두 차례나 불려가 심문을 받고 구타당하였다.)

김득종 저, [한국종교사]에는 1943년 12월말까지 교회 6개, 교역자 6명, 신도 909명으로 기록되다.

1945년 김은석 목사 「부강장로교회」에 부임하다. 곧 이어 김교인 장로를 비롯한 일부 교인들이 김은석 목사와 함께 부강교회에서 나와 김규상 목사의 모친 구집사의 집으로 옮겼고, 수개월 후 옛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 터로 옮기다. 1946-1955년 초까지 「부강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시작된 「성경연구원」에서 공부하였던 목회자들로는 정찬성, 장주열, 김명석, 김재순, 최요한, 김상호, 구광서, 심영진, 박점상, 김규상, 이원로, 김정만, 함창현, 김동렬 등이 있다. 이밖에 김교인 장로의 아들 김태수, 김철수, 김명석 전도사의 아들이자, 김은석 목사의 수양아들 김성철 등이 부강교회 출신 그리스도의 교회 목사들이며, 이신도 6.25때 광주에서 김은석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리교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로 환원한 신학자겸 목사이다.

1946년 8월 「그리스도의 교회 합동선언문」을 발표하다(성낙소).

1948년 2월 18일 힐 요한 선교사 재입국하여 서울 연지동에 거주하다.

1949년 3월 15일 힐 요한 선교사는 중단된 「그리스도의 교회 신학교」를 연지동 자신의 집에서 「한국 기독교 성서 신학교」(Korea Christian Bible Seminary)로 개교하다. (일제말 선교사들의 추방으로 송월동 선교부 재산이 채이스에 의해서 난로공장 사장 전항섭에게 임대되었고, 일본은 전항섭에게 강제 매각한 상태에서 재산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었다. 힐 요한, 최상현, 성낙소, 백낙중이 교수로 섬겼고, 동년에 학생들이 7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필운동 교회」로 옮겼다. 이종만, 강병천, 설하운, 성수경, 최순국, 김규상, 조충연, 김종기 등이 당시의 학생들이었다.)

1950년 11월 동란으로 중단되었던 신학교를 장충동 임대 건물에서 개교하다. (선교부 건물에 고아들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교회 수는 42개였다.

1951년 2월 제주시 삼도리 해변가에 「제주 그리스도의 교회」를 개척하다(김광수).

1951년 2월 4일 부산 용두산 일대에 「부산 중앙 그리스도의 교회」의 전신인 「영주동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다(교역자회). (이 즈음에 울산읍 「태극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헌당예배를 드리다.)

1951년 봄. 광주에서 「한국 그리스도의 교회 교역자회」를 조직하여 초대회장에 김은석 목사를 선출하다. 이 때 김재순(金在順), 창현 함태영(唱泫 咸泰英), 장주열(張周悅), 최요한(崔要漢), 이신(李信) 등이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다.

1951년 함태영(창현) 목사가 사재를 들여 광주 사직동 공원입구(KBS방송국 앞, 2000년 1월 현재 치과병원이 들어 있음)에 일본의 적산가옥 2층집 을 매입하여 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하고 시무하다. 같은 교회건물에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를 개설하여 김은석 목사, 이신 목사, 김태수 목사 등이 협력하여 환원운동신학강좌를 실시하다. 함태영 목사의 3제 함태중의 재정적 후원으로 신학교 운영에 큰 도움이 되다.

1951년 가을 함태영(창현) 목사가 충남 논산군 부적면으로 이주하여 충곡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하다. 같은 시기에 논산군 부적면 신교리그리스도의교회를 개척 시무하다. 11월 15일, 신교리의 마을회관을 빌어 복음중학교(후일 후배 이춘식 목사가 인수하여 대명중학교로 개칭)를 설립, 피폐한 농촌 2세들을 교육하다. 3제 함태중과 계제 함태욱이 교회와 학교 일에 적극 협력하다. 복음중학교교사들의 식사문제 등으로 인해서 가족의 거소를 충곡리교회에서 신교리교회로 옮기다.

1951년 7월 전항섭으로부터 만 10년 만에 송월동 선교부의 재산을 되찾다.

1951년 8월 4일 「크리스천 미션 고아원」으로 불린 첫 고아원을 선교부에서 시작하다. (1953년 이후에 부평으로 옮겨갔다.)

1951년 6.25동란 중에 대전 판암동(백청현)과 대구에 고아원(1954년에 폐쇄)이 설립되다.

1952년 2월 20일 「수정동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되다(김광수).

1952년 4월 20일 부산 「염주동 그리스도의 교회」 헌당식을 갖다(교역자회).

1952년 7월 13일 강순명 전도자가 광주 그리스도의 교회에 「천혜 경로원」을 설립하다(교역자회).

1952년 8월 1일 이종만 목사가 인천시 남구 학익동에 인천보육원을 설립하다.

1952년 이신 목사는 부여 합송리로 이주하여 합송리그리스도의교회에 시무하며 광주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를 이곳에 옮겨와 김은석 목사, 함태영 목사 등과 함께 신학강좌를 하며 기독교환원운동을 전개하다. 김확실 전도사, 정찬성 목사 등 많은 환원신학도를 배출하다. 부여 합송리 그리스도의교회신학교에서는 <로고스(λογοζ)>라는 환원운동신학잡지를 간행 전국 환원교회에 배포하다. 신학교는 1954년 전남 목포로 잠시 옮겨갔다가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에서 개원되었다.

1953년 울산에 「신흥동 그리스도의 교회」(현, 강남 그리스도의 교회)가 개척되다(교역자회).

1953년 9월 16일 힐 요한 선교사가 돌아와 장충동에 「한국 기독교 성서 신학교」를 재개교하다. 학생으로는 김종기, 최홍철, 김규상, 최순국 등 24명이었다.

1953년 가을 「도마기독교회」(대전 그리스도의 교회)가 손중심씨 집 안방에서 개척되다.

1953년 9월 13일 김광수 등이 목사 안수를 받다.

1953년 영주동 그리스도의교회 부설 「승리모자원」이 부산에 설립되다(교역자회).

1953년 폴 잉그람(Paul Ingram) 선교사가 입국하여 1955년 귀국하다.

1953년 로버트 웨스트(Robert West) 선교사가 장충동 「한국 기독교 성서 신학교」 교수로 입국하다.

1953년 제인 키넷(Jane Kinnett) 선교사가 장충동 「한국 기독교 성서 신학교」 교수로 입국하여 1955년에 귀국하였다가 1959년 힐 요한 선교사와 결혼한 후 재입국하다.

1953년 하워드 대이비스(Howard Davis) 선교사가 신학교육을 위해 입국하다.

1953년 리라 힐러(Lila Hiller) 선교사가 입국하여 1956년에 귀국하다.

1954년 메리 루이즈 반힐(Marry Louise Barnhill) 선교사가 입국하여 1955년에 귀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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