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신교의 시작(2)
초기 선교사들의 입국은 이상하게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들의 사역 또한 매우 협력적이고 연합적이었다. 그들은 '연합공의회'와 '한국복음주의 선교연합 공의회'를 결성하여 많은 부분에 있어서 함께 활동했다. 이렇게 연합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들 대부분이 스코틀랜드 '언약도들'(the Covenanters)의 후손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굳게 신앙하는 등 공통의 신앙 체계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들 선교사들의 헌신과 연합은 오늘날 교파간 그리고 각 교파 내의 분열된 모습에 경종을 울려 준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와 연합하는 일을 실천해야 한다. 어떤 기구적이고 제도적인 젓보다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의 작은 실천이 요청된다.
1. 선교사 입국 전의 상황
1) 귀츨라프의 내한
1832년 7월 17일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서해안에 도착하여 전도문서를 나누어 주었다.
2) 윌리암슨의 한국선교 지원
토마스 목사를 알선하여 한국선교에 나서도록 하였으며 만주를 통해 한국 선교를 시도하였다. 또한 1883년 중국내지 선교화 소속의 의료 선교사 다우드회 소속의 의료 선교사 다우드 웨이트(Arthur W.Douthwaite)를 요청하여 한국을 방문하게 한다.
3)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그 배에 탔던 선교사 토마스와 그 일행은 죽임을 당하였다.
2. 이수정과 그의 신앙 활동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출한 공으로 인해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게 된 이수정은 그곳에서 츠다센을 만나게 되었고 1883년 4월 29일 노월정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맛보는 기쁨과 복음의 비밀을 당시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가 있던 30여 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함으로 손봉구, 이경필을 비롯한 여러 명의 학생이 세계를 받았다.
또한 성경이 한민족에게 철도나 전신, 기선보다 더 필요한 것임을 확신하였기에 루미스의 성경 번역 제안을 받아들여 「신약성서마태전」을 필두로 「신약성서나가전」, 「신약성서약한전」, 「신약성서사도행전」 등이 출간되었다.
3. 맥클레이의 한국 방문
처음에 중국 선교사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옮겨간 맥클레이는 김옥균을 만나 1884년 7월 3일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국왕으로부터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를 통한 선교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맥클레이는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물며 선교사업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지를 물색하였다. 맥클레이의 성공적인 한국방문은 미감리회의 해외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게 했다. 그 이듬해 아펜젤러가 교육사업을 통한 선교활동을 위하여, 스크랜톤이 의료 선교사업을 목표로 각각 한국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맥클레이의 선구적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4. 초기의 의료선교
① 1884년 10월에 미국 공사관 소속 의사 자격으로 들어온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함으로 고종과 민비 및 정부측 인사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갑신정변 때 처형당한 홍영식의 집을 하사받아 1885년 4월에 광혜원(후에 제중원이라 개칭됨)이란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보는 서양의 근대식 병원을 세웠다. ② 1885년 9월 10일에 정동에서 감리교의 스크렌톤의 민간의료 기관으로 진료소를 시작하였다. 1886년에 정식으로 병원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시병원이다. 스크랜톤은 버림받은 환자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1894년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겼다. ③ 1887년 하워드에 의해 여성전용병원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시병원에서 시작했다가 1888년 건물을 마련하고 '보구녀관'이란 이름을 붙였다.
5. 초기의 교육선교
① 1885년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학교 설립허가를 받은 아펜젤러는 1886년 6월 2명의 학생으로 정식학교를 시작한다. 이것이 배재학당의 시작이다. 이 학교는 문을 열자마가 5개월만에 32명에 이른다. ②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극빈자나 고아를 위해 정동에서 학생 1명으로 1886년 5월 11일에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고아원 학교인 이학당은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하였다. ③ 1886년 5월 31일에 스크랜톤 부인에 의해 이화여학당과 1887년 6월 엘러즈에 의해 정동여학당이 설립되었다. ④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도 선교부 혹은 지역 교민들과 합동으로 설립한 기독교 학교들이 늘어났다.
기독교 학교에서는 초기 교과목에 한문, 역사, 지리, 수학, 과학 등 일반 과목에 많은 비중을 두었고 예외없이 성경 과목을 포함시켜 기독교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고자 했다. 복음전도의 도구로는 의료선교보다 교육선교가 보다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학교는 '한국을 복음화시키는' 도구였다. 이점에서 선교사들의 의도는 분명했다. 그러나 학교를 찾는 학생들은 이 점이 갈등의 용인이 되기도 했다. 이런 종교적 갈등은 민족의 종교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민중계층은 병원이나 학교를 통한 선교활동을 은혜의 행위로 받아 들였고 그만큼 기독교에 대해 개방적인 분위기였으나 식자층과 지배계층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펼치는 의료·교육사업으로 인해 종래 기독교에 대한 그릇된 선입관이 많이 해소되었고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도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천주교는 선교 초기부터 동학(천도교), 북학(유교, 도교 이후의 실사구시의 실학), 남학(인도의 불교)가 나란히 서학으로 일컬어진 양반의 관심 대상이었다. 반면에 개신교는 하부계층으로 스며들어 전파 속도가 빠른 새로운 종교로 인식되었다. 개신교가 직접적인 복음전파에 앞서 왕실의 공식허가를 얻어 교육기관과 의료기관을 창설하여 조선사회에 봉사하기 시작한 것은 논쟁적 학문으로서의 천주교 선교방침에 비해 우월했다고 평가된다. 기관선교 이외에 인쇄시설과 잡지 도서 신문을 통한 문서선교가 뒤따랐으며 '전도부인'으로 하여금 문서를 지참하고 노방전도, 사랑방전도를 하였으므로 귀로 듣고 눈으로 읽으며 마음에 새기는 여유를 피전도자에게 줄 수 있었다. 나아가 교사와 교역자 양성, 성경번역과 교재개발, 선교사들 간의 교계예양(사역지역 조정) 등으로 현실적 선교정책을 펴나감으로 개신교 선교는 성공할 수 있었다.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천주교에 비하여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러한 차이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어떤 방법으로 한국인들에게 전해졌으며, 또 그것을 한국인들이 어떠한 것으로 받아들였는가 하는 것에서 생겨난다. 당시 천주교와 개신교를 욕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각각 요학(妖學), 사학(邪學), 패륜지학(悖倫之學)으로 그리고 '예수쟁이, 예수꾼' 등으로 불렀다. 이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천주교가 어떤 종교로서라기보다는 하나의 '학'(學)으로 한국인들의 인상에 새겨졌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개신교는 전염성이 강하고 하층민들이 주로 믿는 종교로 인식되어졌다. 결과적으로 개신교는 천주교에 비해 수월하게 복음 전파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복음의 핵심은 그대로 간직한 채 한국의 상황에 잘 적응한 선교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1. 네비우스 이전의 정책
초기 개신교의 선교 방법은 주로 노방전도, 사랑방전도, 순회전도, 교육선교, 의료선교 그리고 문서선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노방전도와 순회전도는 웨슬리(J.Wesley 1703-1791) 시대와 그 이후의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 전도 방법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사랑방전도는 주로 전도부인을 통하여 시행되었는데 그 효과는 매우 컸다. 교육선교를 제일 강조한 교파는 감리교이다.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하여 처음 행한 것은 고종의 윤허를 받아 배재학당을 세운 일이다. 감리교 이에도 선교사들은 이화학당, 구세학당, 정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 많은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의료선교의 효시는 알렌이다. 알렌과 스크랜톤, 하워드 등은 의료 활동을 통하여 한국인들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할 수 있게 하였다. 문서선교에 있어서는 특히 배재학당 내에 일부의 인쇄시설을 하여 '삼문(三文) 출판소'(The Trillingual Press)를 설립해서 잡지, 신문, 교재 등을 출판했다. 여기서는 「천로역정」, 「한국유기」(韓國留記), 〈독립신문〉 등을 출간했다.
2) 감리교의 선교 정책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 개신교의 일반적인 선교 정책이기도 하면서, 특별히 장로교의 선교 정책이다. 그러므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살펴보기 전에 장로교와 더불어 대표적 교단이었던 감리교의 선교 정책을 살펴본다.
감리교의 선교 정책에 대해서는 도식화된 문서상의 규정은 없다. 물론 그 내용이 간접적으로 네비우스 방법에 접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감리교 선교 정책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순회전도, ② 교육에 대한 강조, ③ 부녀사업에 대한 강조, 순회전도는 원래 감리교식의 전도 방법으로 아펜젤러, 존tm, 리이드 등은 그들의 기동성을 발휘하여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전도했다. 또한 감리교는 교육 일반에 주력하여 복음전도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 감리교는 부녀사업에 있어서 특별히 공을 세웠는데, 전도부인들(Bible Women)을 통한 무당종교의 진압, 여성을 위한 병원인 '보구녀관'(保救女館), 쉐어우드(Rosetta Sherwood)의 여성을 위한 '의료강습반'(Medical Training Class), 에드먼즈(M.J.Edmunds)의 간호원 양성소 등이 그것이다.
2. 네비우스 선교 방법
1) 발단
대부분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20대의 젊은이들로 선교 경험이 없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다. 이들이 한국에 파송될 때의 나이를 살펴보면 1885년에 입국한 스크랜톤과 헤론은 29세, 아펜젤러가 27세, 언더우드가 26세였고, 1888년에 입국한 게일은 25세였다. 1890년에 입국한 마펫은 26세였다. 또한 선교사 중 최고참으로 행세하던 알렌도 1884년 입국시 26세였다. 그러므로 이들은 산동성에서 사역하고 있던 네비우스를 초청하여 경험담을 듣고, 선교 정책에 대하여 배우고자 했다.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는 뉴욕 출신으로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산동성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마침내 네비우스는 1890년 6월에 한국을 방문했다.
2) 방법
네비우스가 제시한 선교 방법은 9가지 정도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먼저 ① 자립 ② 자치 ③ 자선의 3가지를 그 기본으로 한다. 자립(自立, self-support)이란 교회당 건축, 교회를 조직하여 전도인의 봉급을 지급하는 일들을 교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원리이다. 자치(自治, self-government)란 교인들이 선택한 무보수의 지도자 아래서 교회를 경영하려는 자립정치의 원리이다. 그리고 자전(自傳, self-propagation)이란 신자 각인이 다른 사람의 성경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원리이다. 이러한 3가지 원리에 입각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제시된 선교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④ 노동자 및 하층민들과 여자, 어린이를 주된 대상으로 하는 순회전도, ⑤ 의료 사업을 통한 전도, ⑥ 학교교육을 통한 교사와 교역자의 양성, ⑦ 성경번역과 체계적인 성경연구를 통한 전도와 교육, ⑧ 성경에 입각한 철저한 훈련과 치리의 시행, ⑨ 선교사들간의 협력과 일치의 노력. 특히 이중에서 각 교파 선교사들간의 협력사업은 소위 '교계예양'(敎界禮讓, Comity Arrangements)을 통한 지역의 분할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미국 북장로교는 평안도·황해도·경상북도를, 미국 남장로교는 전라도, 미국 북감리교는 충정도, 미국 남감리교는 강원도, 캐나다 장로교는 함경도, 그리고 호주 장로교는 경상남도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3. 네비우스 방법의 실행 결과
네비우스 선교 방법은 한국 교회의 특성에 매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긍정적인 부분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것의 공(功)과 과(過)를 살펴보자, 네비우스 방법이 한국 교회에 끼친 긍정적인 결과를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교회는 네비우스 방법의 원리대로 자립·자치·자전하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둘째, 성경 중심적인 선교로 인해 성경 중심적인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셋째, 한글성경의 번역으로 한글 보급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러나 네비우스 방법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도 했다. 선교의 주 대상을 하층민과 여자, 어린이들에 둠으로 교인들의 질(質)적 수준이 저하되었으며, 장로교는 타교파에 비하여 교역자 양성책이 미비하여 수준 높은 교역자들이 부족한 결과를 가져왔다.
침례교의 펜위크(Malcom Fenwick) 선교사는 그의 사역 결과 "한국 기독교는 한국인이 전담하여 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네비우스 방법은 펜위크의 사상과 거의 일치하는 성향을 띠지만, 한국 교회를 이끌어 나갈 한국인 지도자의 양성에 소홀했다. 그리하여 어느 학자는 한국 장로교의 지나친 분열상의 원인을 장로교 지도자들의 낮은 질적 수준에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한국 교회는 지도자를 키우고 양성하는 일에 인색하다. 한국 교회의 미래가 더 나은 지도자, 실력과 영력을 갖춘 지도자에게 달려 있음을 분명하게 깨닫고 역량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1. 선교지역 분활
하나의 나라에 여러 교파 신교회 진출하여 선교함으로 야기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선교회간에 지역분할이 추진되었다. 그래서 교계예양(敎界禮讓)으로 불리는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의 근본목적은 '마찰의 요인이 되고 있는 선교사업의 중첩을 피하고 돈과 시간과 힘의 낭비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이 협정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일반 원칙으로 작은 도시나 그 주변 지방을 공동 점유하는 것이 능력을 효율성 있게 활용함에 있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것임을 확인한다.
② 5천 명 미만되는 도시에서 지방을 관장하는 한 선교사에 의해 준선교기지가 설정되어 있을 경우엔 점유된 것으로 인정하고 다른 선교회가 그곳에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③ 사업을 시작하거나 확장하려는 선교회들에겐 아직 점유되려는 선교회들에겐 아직 점유되지 않은 지역에서 착수하도록 강력히 권고하여 모든 지역에서 선교 사업이 진행되도록 추구한다.
④ 각 교회 교인들은 교파 소속을 옮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⑤ 서로 다른 교회의 규칙을 상호 존중한다.
⑥ 일반 원칙으로 문서들은 판매해야지 거저 주어서는 안되며 가격에 있어서도 통일성을 기해야 한다.
⑦ 조사(助事), 학생, 교사 및 보조인은 어느 분야에서 일하든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인물의 문서화된 요청이 없이는 다른 선교회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지원을 받을 수 없다.
2. 선교정책의 신조
네비우스의 선교 결과 1891년에 북장로회 선교회는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Presbyterian Nothem Mission Rules and By-Laws)을 제정하여 선교의 규칙으로 삼았다. 또한 1895년 10월 5일 열린 북장로회 선교회는 8개 조항을 선정하여 선교정책의 신조로 삼았다. 그 신조는 다음과 같다.
① 선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은 복음주의 정책을 믿는 바이다.
② 선교회는 학교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거나 적어도 학교만을 위한 학교가 도리 수 없음을 믿는다.
③ 그러나 선교회는 초등학교의 설립을 믿는다.
④ 선교회는 본토인을 고용하여 종교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외국 선교자금 지출을 최소화시켜야 함을 믿는다.
⑤ 선교회는 본토인들이 처음부터 자급자족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바 본토인 교인들로 하여금 자기네 책을 사고 자기네 교회를 짓고 자기네 전도인 봉급을 지급하게 한다.
⑥ 선교회는 보다 정규적인 조직이 갖추어질 정도로 사업이 발전되기까지는 '네비우스 사업 방식'을 적용하여 교인 지도자들을 다른 지역에 임명하고 원입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교리 학습반을 운영하며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겨울 신학반을 운영함을 믿는다.
⑦ 선교회는 선교회들 사이에 또는 개개인 선교사들간에 협정함에 있어 각각 남의 권리를 보호하고 모두에게 활동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를 제공해야 함을 믿는다.
⑧ 선교회는 사업의 모든 분야는 한 가지 목적, 즉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을 얻고 세우는 것을 위해 이루어져야 하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교인된 자들은 성령의 손길 안에서 겸손하게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믿는다.
3.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비판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하나님의 말씀을 터로 하여 자급자치의 원리 밑에 희생과 봉사를 내용으로 하는 기독교 윤리를 실천하는 데서 오늘의 큰 성과'를 얻었다.
교인들에게 자립 정신과 규칙적인 헌금 습관을 가르쳐 주었으며 한국 기독교의 서양화를 방지하였다. 한국 교회의 발전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의 형태라든가 교역자의 지적 수준, 교회의 조직에 대해 무시 못할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장기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들도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 교역자 양성에 관한 선교회 정책이다. 본토인 교역자를 양성하여 본토 교회를 관장케 한다는 원칙하에 선교사들은 초기부터 한국인 교역자들이 선교회에 의해 강력하게 통제받을 수 있는 상황을 견지하려 했다.
구체적인 예로 남장로회의 레이놀즈(W.D.Reynolds)가 제시한 교역자 양성 원칙을 들면 ① 누군가를 교역자로 훈련시킬 생각이 있더라도 상당 기간 비밀로 할 것, ② 가능하면 그를 전도인이나 설교자로 고용할 때 선교자금으로 급료를 주지 말 것, ③ 적어도 선교사업 초기 단계에 미국에 보내 교육을 받게 할 것 등이다. 이러한 대목들로 인해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비판을 받는다.
즉 한국인 교역자의 교육수준을 일반인들의 수준 정도로 규정함으로 교역자의 자질 향상을 제도적으로 규제한 결과를 빚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교회의 교역자들은 근대 교육을 받지 못한 구세대인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국의 교역자들은 존경과 권위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정반대의 현상을 초래하였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한국에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스스로 교회를 설립한 독특한 경우에 속한다.
본 연구는 장로교와 감리교를 중심으로 한국 교회의 창립 초기 시대를 약술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교회는 1884년 서상륜 등이 세운 소래교회(장로교)이다.
그 후 장로교는 1887년 정동교회를 세움으로 본격적으로 교회 활동을 시작했다. 감리교회는 1887년 선교사 아펜젤러 등이 세운 벧엘 예배당이 최초의 교회이다.
교회의 조직에 있어서는 1888년 선교사를 돕는 조사로 해서 1907년 서리집사, 1908년 장립집사로, 장로는 1887년 새문안교회에서 최초로 선출하였다. 목사는 감리교회에서 1901년 2명, 1902년 1명을 세운 것이 최초이고, 장로교에서는 1907년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한 7명의 목사를 세운 것이 최초이다.
1. 최초의 교회들
1) 교회의 설립
한국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내(송천, 松川)에 세워진 소래교회이다. 이 교회는 만주에서 로스(J.Ross) 선교사와 성경번역 사역을 함께 하던 서상륜과 그의 동생인 서경조가 중심이 되어 1884년에 설립된 순수한 한국인들만의 힘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한편 언더우드는 1886년에 서상륜을 만나 1887년 9월 27일에는 서울 정도의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택에서 14명의 세례교인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정동교회(새문안교회의 전신)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언더우드의 공은 적었고, 자발적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 조직에 참여한 한국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외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85년에는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인천에 내리 감리교회가 세워졌고, 1895년에는 전위령 선교사가 군산에 구암교회를, 1896년에는 배위량 선교사가 대구의 제일교회, 최의덕 선교사가 전주의 서문교회를 세웠다. 1893년에는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장대현교회, 배위량 선교사가 부산에 초량교회, 그리고 소안론 선교사가 원산에 명석동교회를 세웠다.
2) 교회의 조직
한국인으로서 교회 사역에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조사(助事, Helper)로서 이는 선교사를 돕는 어학 선생 출신의 남자 협력자를 가리킨다. 이들은 대부분 후에 목사가 되었는데 안수받지 않은 목사라고 볼 수 있다. 조사는 1888년에 언더우드가 백홍준, 서상륜, 최명오 등을 임명한 것이 최초였다. 또한 각 선교지에서 교회를 치리하고 선교사와 조사의 위임 사항을 처리하는 영수(領袖, Leader)가 있는데, 이들은 안수 받지 않은 장로로 1894년 평양교회의 이영인이 최초의 영수이다. 다음으로 집사가 있는데, 1907년 이전에는 정동교회, 소래교회, 평양 널다리골교회에서 서리집사 제도를 실시했고, 1907년에 장립집사 제도가 시작되어 1908년 서울에 1명, 평양에 8명의 장립집사가 있었다.
장로는 1887년에 새문안교회에서 백홍준과 서상륜을 초대 장로로 선출한 것이 최초의 경우이다. 그 후 1878년에 장대현교회에서 이영인, 소래교회에서 서경조가 선출되었다. 한편 최초의 목사는 1901년 감리교에서 김창식, 김기범이 집사목사, 즉 설교권은 없고 집례권만 있는 목사로 장립되었고, 1902년에 최병헌이 설교권을 가진 목사로 장립되었다. 또한 장로교에서는 1907년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한 7명이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한석진, 이기동)
2. 장로교회의 설립
장로교회는 1884년에 최초로 소래교회가 세워졌으며,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입국하여 1887년 최초의 조직 교회인 정동교회(새문안교회)를 세움으로 본격적인 교회 형성이 시작되었다. 1889년에는 선교사 공의회(연합 공의회)가 조직되었고, 190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가 조직되었다. 이 당시의 회원은 장로 3인, 조사 6인, 그리고 선교사 25인이었으며, 평양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 설립, 한국 자유장로회 설립을 위한 신청, 미국 장로교 헌법 번역위원 채택, 〈그리스도신문〉을 공의회 발행물로 선정하는 등의 내용을 결의하였다.
1907년 9월 17일에는 최초의 독노회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8인, 장로 40인, 그리고 내빈 3인을 회원으로 하여 소집되었다. 독노회에서는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명의 목사 장립, 이기풍 목사의 제주도 선교사 파송, 평양신학교의 직영,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정치 채택 등을 결의하였다. 1912년 9월 1일에는 최초의 총회가 평양신학교에서 열렸다. 당시 회장은 언더우드였고 회원으로는 목사 52인, 장로 125인, 선교사 44인으로 총 7개 노회가 모였다. 총회에서는 총회조직 기념 선교사 파송을 결의했고 중국 산동성에 1913년에 김영훈·박태로·사병순을, 1917년에는 방로원, 홍승모를, 1923년에는 박상순, 1931년에는 김순조, 그리고 1937년에는 방지일 목사를 각각 파송했다.
3. 감리교회의 설립
감리교의 한국 선교는 1884년 미국 감리교의 가우쳐(J.F.Goucher) 목사가 일본 파송 선교사인 맥클레이(J.S.Maclay)에게 한국의 형편을 시찰하고 선교 기초를 정하라고 요청함으로 시작되었다. 맥클레이는 그해 6월 23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여 김옥균을 통해 선교사업을 시작했고, 7월 3일에 학교·병원의 설립을 허락받았다. 1885년에는 아펜젤러가 입국하여 6월에 배재학당을 시작했고, 9월에는 스크랜톤이 의료사업을, 1886년에는 스크랜톤의 모친이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1887년 1월에는 아펜젤러 외 4인이 정동에 벧엘 예배당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감리교 최초의 교회인 정동감리교회의 시작이다. 1895년에 귀국한 윤치호는 미국 감리교회에 선교사 파송 요청을 했고, 동양 선교 책임자인 헨드릭스(E.R.Hendrix) 감독과 리드(C.F.Reid) 목사가 내한하여 시찰했다. 1896년에는 리드 목사가 입국하여 활동을 시작하여 1897년에 고양읍에 남감리교회를 처음으로 설립했다. 1898년에 하디(R.A.Hardie) 부부가 입국했고, 1901년에는 미남감리회 조선연회에서 김창식, 김기범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04년에는 개성에서 호수돈여숙(好壽敦女塾)이 시작되었고, 1906년에는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영서원이 설립되었다. 1910년에는 협성(協成)신학교가 설립되었고 1911년에는 〈그리스도회보〉가 발간되었다. 1926년에는 남북김리회 조선연회가 모여 남북감리연합방침 연구위원을 선정하였고, 1927년에 보고받아 채용하여 미국총회에 청원하였다. 1930년에 한국 통합진권 위원이 선출되어 12월 2일에 조선감리교 1회 총회가 협성신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그날 10일에는 정동교회당에서 제1대 총리사로 양주삼 목사가 취임식을 가졌다.
한국 교회의 설립은 여러 방면에 걸친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선교사들 그리고 많은 한국인 신자들과 지도자들은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함을 역사 속에서 증명해 보였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선조들의 귀중한 유산을 물려받아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성숙한 교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 한국 교회를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이 또한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서 살아 역사하심을 믿고 전진하자.
1. 최초에 설립된 교회들
①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내 소래(松川)교회 (184 서륜) ② 서울-새문안교회(1887. 927 언더우드) ③ 평양-장대현교회(1893 마펫 선교사) ④ 대구-제일교회(1896 배위량 선교사) ⑤ 광주-양림교회(1904 벨 선교사) ⑥ 인천-내리 감리교회(1885 또는 1886 아펜젤러) ⑦ 전주-서문교회(1896 최의덕 선교사) ⑧ 군산-구암교회(1893 전위렴 선교사) ⑨ 부산-초량교회(1893 배위량 선교사) ⑩ 원산-명석동교회(1893 소안론 선교사)
2. 한국 교회 최초의 사건들
① 수세사-노춘경(1886) ② 유아세례-서병호(서상륜의 아들 1896) ③ 영수-이영언(1894) ④ 전도인-서상륜(1894) ⑤ 교회-소래교회(1894) ⑥ 신학교 입학-김종섭, 방기창(1901) ⑦ 입교-이수정(일본 1883) ⑧ 첫 한문성경 한글번역-서상륜(1882 로스성경) ⑨ 총회-장대현교회(1912) ⑩ 당회-새문안교회(1887) ⑪ 최초의 목사-김창식, 김기범(집사목사, 신학교 졸업 않음) ⑫ 장로회 최초목사-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3. 예장총회 성립 경로
① 알렌 의사 부부 입국, 최초의 한국 교회인 소래교회 설립(1884) ② 언더우드, 아펜젤러 입국(1885) ③ 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 설립(조직교회 1887) ④ 선교사 공의회(연합공의회 1889) ⑤ 조선 예수교 장로회 공의회 조직(1901) ⑥ 미국 장로교에서 한국자유 장로교의 독립을 반대(1904) ⑦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 조직, 7인 목사 장립, 제주도 선교사 파송, 12신조와 장로교 정치 채택(1907) ⑧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조직(1912)
4. 합동공의회
① 연대-1901년 ② 회원-장로 3명(서경조, 방기창, 김종섭), 조사 6명(양전택, 송순명, 최홍서, 천광실, 고찬익, 유재영), 선교사 25명 ③ 결의-평양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신학교 설립, 한국자유 장로회 설립을 위한 선출, 미국 장로교 헌법 번역위원 채택, 〈그리스도신문〉을 공의회 발행물로 선정.
5. 독노회
① 연대-1907년 9월 17일 장대현교회 ② 회장-마포삼열 선교사 ③ 회원-선교사 38명, 장로 40명, 내빈 3명 ④ 결의-목사장립(7명), 선교사 파송(제주도에 이기풍 목사)평양신학교 직영, 장로회 12신조와 장로회 정치 채택
6. 최초의 총회 조직
① 연대-1912년 ② 장소-개회예배(평양 여자성경학원 강당), 회의장(평양신학교) ③ 회장-언더우드 목사 ④ 회원-목사 52명, 장로 125명, 선교사 44명(총 7개 노회) ⑤ 결의-총회조직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 파송결의(선교사-김영훈, 박태로, 사병순, 방호원, 홍승한, 박상순, 김순효, 방지일) ⑥ 산동성 선교사 파송이유-공자의 고향에서 유교보다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함.
7. 평양신학교
① 설립결의-190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결정 ② 설립명칭-1901년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평양신학교) ③ 첫 학생-김종섭, 방기창 ④ 성격-미 남북 장로교, 호주 장로회, 캐나다 장로회가 함께 운영하는 연합 신학교 ⑤ 당시 교수-마포삼열(교장), 이길함(교수) ⑥ 과목-성경, 교회사, 조직신학, 실천신학 ⑦ 학교교사-마포삼열 목사의 사택에서 시작, 1908년 한국식 교사, 1922년 서양식 교사신축, 1913년 6동의 기숙사 건립 ⑧ 제1회 졸업생(1907)-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송린서, 양전백, 이기풍, 한석진 ⑨ 폐교-1938년 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로 인해 선교회에서 결의함
8. 네비우스 전도방법
① 발단-1890년 6월 산동성에서 존 네비우스를 초청하여 그의 선교정책을 배우고 선교 전략을 수립. ② 방법-자립(스스로 교회당 건축), 자치(스스로가 교회 다스림), 자전(스스로 정도). 상류층을 배제하고 노동자, 하층민 전도, 부녀자 어린이 전도 학교교육, 성경번역, 의료사업 등. ③ 결과-자립, 자급, 자치교회로 성장, 성경 중심 교회, 기도, 전도, 교육하는 교회, 한글보급 등.
(DTP 교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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