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칭호 "하나님의 독생자"
이승구 교수 (국제 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본문: 요 10:22-39, 마 11:25-27.
1.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의 일반적 용례들
우리는 지난번에 우리 주님의 "예수"라는 이름과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왜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불리시는지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보편적으로 언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기 때문에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가 하는 것을 밝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돌리되, 참된 의미에서는 그에게 이 중요한 칭호의 의미를 돌리지 않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성경 가운데서 어떻게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 용례들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순전히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아들 됨" 또는 "언약적인 아들 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 관계에 들어간 이들이기에 이들의 아들 됨을 언약적인 아들 됨, 또는 하나님 백성 됨의 아들 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셨고(출 4:22, 호 11:1), 그에 속하는 개개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이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신 14:1, 호 1:10. cf. 롬 9:4). 이런 용법을 본받아 신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 ???? ??? ????) 또는 "하나님의 자녀들(children of God, ????? [???] ????)이라는 표현을 돌리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왕으로 불림을 받아 임직한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다윗의 후손으로 왕이 될 이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삼하 7:14). 이런 뜻에서 시편 2편에서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을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시 2:7). 이는 "직임적인 아들 됨"(official sonship)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이런 직임적인 아들 됨의 의미에서 그렇게 부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지상적인 존재가 아닌 천상적인 존재들 일반을 지칭할 때도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표현을 사용한 일이 있습니다 (욥 1:6, 2:1, 38:7. cf. 단 3:25). 또 우리말로는 "권능 있는 자들"이라고 옮겨진 말도 권능의 아들이란 말로 이런 천상적 존재들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된 일이 있습니다(시 29:1, 89:6 참조).
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뜻
그렇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과연 위의 세 가지 용례의 어느 한 예에 속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인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하실 때, 그는 자신의 아들 됨이 그저 언약적 아들 됨이나, 직임적 아들 됨, 또는 천상적 존재로서의 아들 됨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하셨습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주의해서 읽어보십시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 ......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 10:25-30, 38).
이 말씀 중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 ??? ? ????? ?? ?????)"는 말씀은 그저 그 둘이 같은 것을 의도하거나 생각하는 바가 같다는 것을, 즉 예수님께서는 성부와 같은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환언해서 이는 그 둘의 기능적 일치성(a functional unity)을 표현하는 말이[1] 아닙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 그 둘이 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되면 결국 양태론적 결론이 날 것이므로), 단지 그 둘의 본질이 같다는 것을 단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 여기서 하나라는 말을 요한이 왜 "헤이스"(???)가 아니라 "헨"(??)이라고 옮기고 있는지의 의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를 "본질적 통일성"(essential unity)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제시하는 것입니다.[2] 그러므로 "이는 요한복음서의 서언의 말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나, 그와 함께 서는 것"이라고 말하는 모리스는 옳은 것입니다.[3] 이는 38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30절의 하나 됨을 본질적 하나됨으로 보지 않으려는) 비슬리-머레이조차도 이 상호 내주의 표현으로부터 "다른 곳에는 없는 관계인 가장 온전한 연합과 통일성"(completest unity, a relation sui generis)을 생각을 발견하여 말하고 있다는 데서 확언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4]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런 온전한 하나됨에 대한 주장, 그 둘의 배타적인 관계에 대한 주장은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맑게 개인 하늘에 나타난 요한적인 뇌성벽력"이라고 불리는 다음 말씀 가운데서도 이는 아주 분명히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여기에 오직 그 분만이 "내 아버지"라고 하실 수 있는 독특한 아들이 있다는 자의식이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5] 그 아버지와 그 아들은 서로에게 대해서 아주 독특한 배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런 식의 아들은 이 세상에 이 분 한 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말씀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이는 예수님 밖에는 다른 이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런 점을 잘 의식하면서 반응하였습니다: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도다"(요 10:33). 유대인의 이런 반응은 예수님의 주장이 단순한 그와 아버지의 뜻의 하나됨 정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 주는 것입니다.[6] 예수님께서 주장하시는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은 그저 그가 언약 백성의 한 부분이라든지, 큰 직임 심지어 메시아로서의 일을 감당할 분이라든지의 뜻으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의식하면서 성부(God the Father)에 대해 성자(God the Son)의 관계에 계신 분이심을 드러내시며 사용하신 아주 귀하고 독특한 계시적인 말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삼위일체적 아들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이런 독특하신 아들이심을 가장 잘 표현하는 칭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런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심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독생자"(????????? ???? ??????, 요 1:14) 또는 "독생하신 하나님"(????????? ????, 요 1:18), 또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 ???? ??? ????)이라는 칭호입니다(요 3:16, 18). 어떤 이들은 주로 그의 성육신과 관련해서 이 '독생자'(?????????)라는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는 그리 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출생하여 이 땅에 오셔서 비로소 '모노게네스'가 되시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이 단어는 출생적인 아들 됨을 지칭하는 용어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그가 아버지의 독생자이심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특히 요한복음 1:18의 "아버지 품속에 있는"(요 1:18) 독생자라는 말에서 잘 시사되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독생자나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 품속에 있는"(? ?? ??? ??? ?????? ??? ??????, 요 1:18), 즉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와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7] 또는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한"[8] 독생자이십니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과 요한복음 1:1을 연결시키는 이유가 분명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9] 그러므로 이는 영원과 선재 상태로부터도 그가 하나님의 독특하신 아들이었음을 이는 함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독생자'(?????????)라는 말의 용례를 잘 살펴보면, 그것이 "유일하게 낳아진" 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예도 있지만,[10] 이것이 이 말의 유일한 용례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11] 많은 이들은 "유일하게 낳아진"이라는 어원 전체에 주의를 집중하기보다는[12] 그저 "유일한"(one of a kind, only, unique, 또 the only one of its kind)라는 뜻으로 이 단어를 이해하려고 합니다.[13] 그리고 이 "유일한"이라는 말과 "사랑 받는"(????????)이라는 말이 같이 사용된 용례가 많다는 것에 근거해서 이 둘을 동의어로 보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문자적으로 유일한 아들이 아닌 경우에도 이 '모노게네스'라는 용어를 사용한 예들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22:2을 희랍어로 번역하면서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번역한 것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 때 이삭은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가진 아들은 아니나, 사랑하는 아들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우의 '모노게네스'는 '유일한'이란 뜻이기보다는 '독특한'(unique)이란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4] 그러나 일반적인 용례는 그렇게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예수님의 경우에는 그가 유일한 아들(?????????)이기에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보스의 말을 깊이 생각하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15] 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실상은 이런 경우에 '아가페토스'(????????)가 '모노게네스'(?????????)와 같은 수준으로 높여져서 사용되어 독특함이나 특이함이라는 숫자적 의미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경우에 '아가페토스'(????????)라는 말은 '아들이면 부모에게서 당연히 사랑을 받듯이 그런 아들로서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에서 특별한 정도의 사랑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야히드'(????)와 같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thy son, thine only son, whom thou lovest)(창 22:2, 12, 16).
...... 사실 '아가페토스'가 신약 성서에서 사용될 때도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수자적으로 하나뿐인 것이기 때문에 특이한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 옳다.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나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의 말씀의 뜻도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우리 주님께서는 여기서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묘사되었다고 말이다.[16]
이와 같이 성자는 성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입니다. 여기서는 강조점이 그가 성부의 유일한 아들이셔서 그와 동등한 이가 없고 따라서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실 수 있으시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17]
그러나 우리는 성자의 유일하심을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역사적 교회와 함께 보스처럼 "모노게네스라는 형용적 서술어는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영원적 출생(the eternal generation of the Son by the Father)이라는 숭엄한 교의를 지지해 주는 것 중의 하나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1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이들과는 아주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독특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가 "독생자"(?????????)라는 말의 뜻입니다.
4. 독특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 1:12). 그러므로 우리의 아들 됨, 자녀 됨은 양자 됨의 의미에서의 아들 됨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이심은 본래적인 아들이심, 존재론적 아들이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33 문에서는 이를 이렇게 묻고 대답하여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문)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God's only-begotten Son) 라고 불립니까?
(답)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본래적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비하여, 우리는 그 덕분에 은혜로 양자 됨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의 "맏아들"이라고 표현했을 때도(롬 8:29) 우리는 이런 존재론적 차이를 의식하면서 말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많은 오해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들 됨과 우리의 아들 됨의 의미를 존재나 질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단지 정도의 차이 정도로만 생각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의식한 후에는 예수께서 "맏아들"이시라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본 받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를 따라가며 그의 모습을 이 땅 위에 드러내어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성을 취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의 존재적 특성인 것입니다.
****<주석>*******************************************************
1 이런 주장의 대표적인 예로 J. H. Bernard, Gospel According to St. John, vol. II, ICC (Edinburgh: T. & T. Clark, 1928), 366; Ernst Haenchen, John 2, Hermenia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4), 50을 들 수 있다. 심지어 George R. Beasley-Murray, John, Word Biblical Commentary 36 (Waco, Texas: Word Books, 1987), 174도 그런 견해를 말한다. 그는 양을 다루고 돌보며 사랑하고 빼앗기지 않는 면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기능적 통일성이 있는 것임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해석한다. 그의 논의 근거는, 헨첸의 논의와 같이, 여기 하나라는 말이 "헤이스"(???)가 아니라 "헨"(??)이라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는 존재에서의 하나됨(one in person)보다는 행동에서의 하나됨(one in action)을 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초대 교회 교부들이 이 구절에서 이끌어낸 결론들이 복음서 기자의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31절에서 왜 유대인이 돌을 들어 치려 했는지를 잘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많은 주석가들과 함께 이 점에 있어서 버나드나 비슬리-머레이의 주장은 옳지 못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Leon Morris,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71), 522. Donald Guthrie, "John," in New Bible Commentary, Third Edition (Leicester: IVP, 1970), 952. F. F. Bruce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 말이 이런 고등한 의미를 지닐 수 있고, 그것이 요한 복음서의 일반적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진술 태도를 보인다(The Gospel of John [Hants, U.K.: Pickering & Inglis, 1983], 232).
3 Morris, 522.
4 Beasley-Murray, 177.
5 이것이 너무 강하기에 많은 이들은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하거나(Ferdinad Hahn) 또는 이 말씀은 좀 변형된 말씀이라고 한다(W. G. Kümmel, Promise and Fulfilment, 2nd edition [London, 1961], 40-42; Joachim Jeremias, The Prayers of Jesus [London, 1958], 36-37). 그러나 이 말씀이 에수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라는 증거는 너무 강력하다.
6 유대인들의 반응으로부터 예수님의 주장의 의미를 잘 추론하는 해석으로 Hoskyns, Morris, 523 등을 보라. R. H. Lightfoot도 아주 명확히 진술하지는 않지만 이런 것을 암시하는 논의를 하고 있다(St. John's Gospel, A Commenta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57], 208).
그런가하면 Barnabas Lindars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므로 예수님을 오해하였다는 묘한 해석을 한다(The Gospel of John, The New Century Bible Commentary [1972; Grand Rapids: Eerdmans, 1987), 371. 린다스의 논지가 과연 주장될 수 있을 것인가?
7 Morris, 114. 심지어 Bernard도 이를 말한다(32: "the intimate relationship of love between the Son and the Father").
8 Beasley-Murray, John, 15.
9 심지어 Lindars 같은 이도 그리한다(99).
10 그 대표적인 예가 입다의 딸을 유일한 딸(무남독녀)라는 의미로 쓴 "야히드"(????)를 70인경에서 ?????????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삿 11:34 참조). 그러나 같은 것을 보면서도 어떤 이들은 여기서는 ?????보다는 ????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Cf. J. H. Bernard, Gospel According to St. John, vol. II, ICC (Edinburgh: T. & T. Clark, 1928), 23.
11 이 용어의 성경적 용례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으로 Geerhardus Vos, The Self-disclosure of Jesus (Philipsburg: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 Co., 1978), 이승구 역, {예수의 자기 계시} (서울: 엠마오, 1986), 245-63을 보라.
12 심지어 이 말에 "낳아진"이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고 단언하든지(Morris, 105), 그런 의미에 괌심을 기울이지 않는 분들이 많다. 모리스는 이 말이 '겐나오'(??????)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다른 단어인 '기노마이'(???????)에서 온 것이므로 어원적으로 낳음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105, n. 93). 그는 이 단어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출생과 연관될 것을 우려해서 이점을 강조한 것 같아 보인다. 그렇다면 이는 좀 문제 있는 주해일 수 있다. Bruce는 모리스와는 정반대로 요한이 '모노게네스'를 말할 때 동사 '겐나오'(??????)와의 연관성을 생각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하였기에 이는 "유일하게 낳아진"(only-begotten) 또는 "오직 하나의 낳아진"(begotten of the only One)을 읨한다고 단언한다(Bruce, 65, n. 26). 이 말의 본래적 의미에 "유일하게 낳아진"(only begotten)이라는 뜻이 있다는 어원 연구에 근거한 강한 주장으로 Vos, 235 등을 보라.
Lindars는 두 견해를 다 소개한 후 결정적인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96). 단지 "그 아버지의 독생자"로 표현된 경우가 "유일하게 낳아진"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논의를 끝내고 있는 것으로(96) 보아서 이런 입장에 굴복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13 그 대표적인 예로 J. H. Bernard, Gospel According to St. John, vol. I, ICC (Edinburgh: T. & T. Clark, 1928), 23 Merrill C. Tenney, "John," i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vol 9 (Grand Rapids: Zondervan, 1981), 33; B. F. Westcott,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2 vols (London: John Murray, 1908), 12; Beasley-Murray, 14을 보라. Lightfoot, 90도 보라. 그러나 그는 이를 "only begotten"과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다른 이들보다 우리가 앞서 말한 견해에 좀더 근접하는 표현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4 심지어 Bruce 같은 이도 이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41).
15 Vos, 247.
16 Vos, 247. 아마 이는 같은 창세기 22:2의 사례를 보면서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확연히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7 이는 Moulton and Milligan, The Vocabulary of the Greek Testament, 416-17에 근거하여 Tenney가 하는 주장이다(33).
18 Vos,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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