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의 예수이야기
들어가는 말 (OPENING SENTENCE)
그리스도교는 그 용어(用語)가 지시해 주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생애를 삶의 원리(原理)로 하여 삶을 재해석하고 그것을 향하여 살아가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자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로는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전통(傳統)이 있다. 성서는 비교적 예수 시대와 근접해 있는 것이고, 전통은 시대를 살아가면서 시대의 핵심되는 문제들에 직면하여 성서를 시대에 맞게 이해하고자 했던 모습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자료이다. 전통도 역시 성서에 그 뿌리가 닿아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 시대적 정황보다는 예수의 삶에 시간적으로 훨씬 더 근접해 있는 성서가 더 근본되는 자료가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어느 면으로는 우리가 성서를 기록했던 저자들보다 예수의 삶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성서저자의 삶의 정황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저자의 의도를 어느정도 알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다시말해 우리가 저자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 더 넓은 시야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저자의 의도를 저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수의 직접적인 삶을 전해주는 자료들 중에서 마가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구에 의하면 마가의 이야기를 자료로 하여 마태와 누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예수가 죽은지 시간적으로 40년이 지나서 마가는 당시 자신의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했을까? 본 과제물의 순서를 따라가면서 살펴보도록 하자.
서 론(序論)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이야기는 문학적인 전망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개별적인 이야기들에 촞점을 맞추어서는 마가가 전하고자 하는 뜻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또한 마태나 누가, 요한의 이야기에 나오는 요소들을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 나름대로 읽혀질 필요가 있다. 이때 우리는 각 이야기들의 '역사적 신빙성'이라는 문제에 부딪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각 이야기들은 역사편찬물들이 아니며 또한 저자들도 역사가들이 아니라 종교적 저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각 저자들이 각 이야기들을 쓰게 된 동기는 예수를 자신들의 시대에 관련되도록 해보자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은 당연히 재해석, 다시말해 재기록과 재개념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우리는 이글을 통해서 그것을 밝혀보고자 한다.
오늘 우리가 주제로 삼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책의 저자 마가는 한 익명의 유대인 그리스도교 신자로 보인다. 역사적 환경은 외적 증거로나 내적 논리로 보나 갈릴리 또는 남부 시리아 쯤 임에 틀림없다. 언제 쓰였는지에 대해 대략 로마-유대 전쟁(기원후66-74)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저자가 예루살렘 성전과 그것의 파괴에 유난히 몰두해 있기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시기를 기원 30년으로 볼 때, 이 글이 쓰여지게된 때까지 약 40년이라는 시간의 진행이 있은 후 이글을 썼던 저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이것이 우리의 주제이다. 다시말하면 국가적 중심지의 상실과 마가가 예수의 이야기를 쓰는 것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제 마가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서 그 연결점을 찾아보도록하자.
1. 하느님 나라의 신비
길을 준비함
우선 이글을 이해하는데 1장 1절을 눈여겨 보아야한다. 이것은 15절과도 연관이 있다. '복음'이라는 말과 '시작'이라는 말이 특별히 의미있다. 복음이라는 말은 마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성격규정한 것이며, 시작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게 될 것이지만, 복음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과 관계있는 말이다. (다시한번 주의 하자면 이글을 읽으면서 비마가적인 선입관들을 주입하는 것을 피하라.) 마가는 예수의 생애를 하나의 여행으로 서술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마가가 예수의 생애의 첫째 국면을 서술하면서 '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서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관련에서 볼 때, 예수의 초기 여행들이 유대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지역인 갈릴리와 더 나아가 이방인들의 거주 지역도 포함하도록 계획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른 예수 이야기들과 비교해 볼 때 마가의 이야기는 예수 탄생 장소와 환경에 대해서는 덜 관심하고 있으며 그러나 예수가 갈릴리에 있는 나사렛에서 온 사람인 것이 강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예수가 길을 따라 여행하게 될 때 그 처음은 어디인가? 그것은 세례자 요한에게로의 여행이다. 그 후 예수는 사탄과의 광야의 대결을 거쳐 복음 고지의 자격이 갖추어 진다. 예수가 외치는 첫 일성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글을 읽으면서 여기에 촛점을 맞추어 읽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마지막 쯤에 가서 그 나라의 윤곽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
이제 곧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보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예리한 눈을 가짐으로써 가능하다. 즉 예수가 네 어부를 부르는 것에서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차원을 읽어 내야 하며, 가버나움에서의 귀신 축출 사건에서 사탄의 세력들과의 투쟁을 파악해야 한다. 또한 시몬의 장모의 치료, 병들린 사람들의 치료에서 하느님 나라의 본질적인 부분을 읽어 내야 한다. 이것이 마가가 보여주는 하느님 나라의 성격, 즉 악마의 세력들로부터 해방된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운명적 삶을 다 살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그의 정체가 알려져서는 않된다.
갈릴리 여행
이 갈릴리 여행은 첫번째 가버나움 여행과 두번째 가버나움 여행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것은 처음에 우리가 주의 했던 바, 개별 사건에 보다는 여행의 패턴에 주의를 기울일 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여행의 패턴은 세 가지 국면을 지니는 데, 갈릴리 전역의 여행에서는 압도적인 반응이 보인다. 그러나 다시 가버나움이라는 두번째 국면에서는 반대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세 번째 국면인 호숫가 주위의 여행에서는 새로운 방향을 보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국면에서 반대자들은 예수의 메시지와 생활 스타일을 반대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성격이다. 세 번째 국면의 호숫가는 아주 유용한 장소로 사용된다. 거기서 예수는 방해받지 않고 가르치고 또 추종자들을 조직하기도 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호숫가에 모여든 사람들이 유대민족에 국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 모인 군중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함께 이루어진 혼합 집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에큐메니칼한 유대 및 이방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의 지리학적 윤곽을 구상하는 예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바로 직후 예수는 공동체 지도자를 임명하는 일을 한다.
하느님 나라 연설
마지막 호숫가 여행에서 예수는 여러가지 비유를 얘기 하는데 마가는 씨뿌리는 비유를 선택하여 전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어느정도 보여진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으나 재난과 박해의 시기를 통과할 것이며 그것의 완전한 실현은 아직 아니라는 것이다.
2. 눈 먼 제자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에게로의 항해
첫번째 항해에서 우리는 예수의 전권적인 주도권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제자들은 이 여행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 첫 횡단은 종교적으로 새로운 영역의 개척에 해당한다. 예수 일행은 거라사에 도착하여 이방땅에서 대랑적인 귀신 축출을 행한다. 예수가 그의 공적인 활동을 유대적 배경에서 귀신 축출로 시작한 것에서 볼 때, 이방인들도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와 야이로의 딸을 고치며, 그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혈루병을 앓는 한 여인을 치유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서술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가 호수의 양편을 포용하는, 다시 말해 유대와 이방 땅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의 일부인 것처럼 그렇게 포용하는 자세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승인
하느님 나라의 포괄적인 성격을 보인 후 예수는 그의 고향으로 들어 간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배척을 받는다. 이어서 마가는 예수의 죽음의 선취로 이해될 수 있는 요한의 죽음을 보도한다. 그후 유대지역에서의 5천명 급식 사건을 우리는 보게된다. 그것은 예수가 유대인들을 '목자없는 양'으로 보아 받아들이면서 제자들에게 급식하는 방법을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것을 알기나 하는지.
이방인들의 승인
이어서 예수는 제자들을 호수 건너 이방인 땅으로 먼저 보낸 후 뒤따라 가는데 물위를 걸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마가는 제자들의 무디어진 마음을 보여주는데, 무디어진 마음이란 구원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터 마가는 예수의 제자들을 반대자들과 동일시 한다. 예수는 일단 이방 땅에 도착하자 병자들을 고치는데 호수 저편에서 하던 방식을 취함으로써 예수가 유대와 이방 사람들 양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는 장로들의 전통을 파기하면서 더 철저화한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인과의 대화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을 인정하면서도 이방인을 승인하고 있다. 이 밖에도 벙어리를 고치는 사건, 사천명 급식 사건을 행하므로써 장차 제자들이 감당해야할 역할과 그 공동체의 성격을 보여준 것이다.
떡 한 덩이의 문제
이방인을 승인한 후 다시 건너 오면서 제자들의 무지가 철저히 폭로된다. 그들은 사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임을 상징하는 떡 한덩이를 가졌을 뿐인데, 그것을 위해서 지금까지 항해를 계속해 온 것인데, 제자들은 먹다 남은 떡 덩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화가나서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고 힐문을 한다. 이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마가는 예수의 제자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유대와 이방인, 남성과 여성의 일치와 평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잘 밝혀주고 있다.
3. 인자의 고난
죽음으로의 여행
마가가 제시했던 길이라는 모티브는 여기서도 등장한다. 즉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갔다", "길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등등. 선박여행이 여섯 번으로 얼거리가 짜여진 것처럼 여기서도 길에 대한 여섯번의 언급이 있다. 그런데 마가의 특별한 틀을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전체 이야기의 중간 부분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틀이 그것이다. 첫 부분에서는 벳새다의 맹인 치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디메오의 치유를 보도한다. 그런데 이것은 제자들의 눈을 띠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것은 사실 가이사랴 빌립보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행의 우선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이 틀을 채우고 있는 내용에는 수난과 부활이라는 제자들을 위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제자들의 이해부족이라는 심각한 문제점만을 발견할 뿐이다.
베드로와 예수의 대결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아이러니를 발견하게 되는데 베드로의 고백 내용이 그것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하는 베드로의 말은 정확한 것이였음에도 실상 그 자신은 잘못된 내용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예수로부터 귀신축출 때 사용되는 용어인 <꾸짓다>라는 말로 논박당한다. 이것이 '대결'이라고 보는 것을 타당하게 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의 이해부족
이제 그러나 마가는 예수의 추종자들의 실패를 점차 강조한다. 하느님 나라에는 위계구조가 없고 단지 섬김으로써 권위가 인정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좌 우 편에 앉을 궁리에 몰두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로부터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고 핀잔을 듣는다. 사실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철학은 죽음이 없이는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고난의 강조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부활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았었다. 마가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길을 가고 있는 예수를 따르는 것,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 것, 그리고 적어도 자기 자신의 삶과 복지에 덜 관심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느님의 아들의 영광
또 한번 마가는 제자들의 무지를 드러내는 대목을 추가한다. 그것은 높은 산에서의 예수의 변형에 관한 기사이다. 이 이야기는 마가 이야기 전체의 중심점에 위치한 것이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초막을 짓겠다고 함으로써 그들의 무지만을 드러냈을 뿐이다. 마가 이야기의 중심점에 위치한 인자의 고난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종교적 진리는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이 진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닐까.
4. 성전의 끝장
성전으로의 첫번째 여행
우리는 이야기에서 또하나의 아이러니를 보게되는데, 그것은 마가가 전개하고 있는 줄거리와는 맞지않게 예수를 환호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이제까지 마가가 보여준 예수는 수난받는 사람, 죽음을 향한 여행자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환호라니. 또하나 눈여겨 볼 것은 성전과 성전 산과의 긴장관계이다. 성전에서의 활동이 있은 후 예수는 산으로 나간다. 다시 말해 성전은 예수의 장소가 아닌 것이다.
두번째 여행과 성전 무효화
여기서도 또하나의 틀을 발견한다. 성전 정화라고 알려진 이야기의 앞뒤로 무화과 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은 성전 비판을 극화시킨다. 무화과 나무의 적절한 때의 결여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적절한 때의 결여를 시사해준다. 또한 종교적 내용을 무화과 나무 이야기 사이에 도입함으로써 그것에 종교적 차원을 부여한다. 즉 성전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것이다.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위는 성전의 상업적 종교적 기능들의 폐쇄를 뜻한다. 성전에서 돌아가는 길에 죽은 무화과 나무를 보면서 예수는 믿음과 기도와 용서를 제자들에게 각인 시킨다. 그것은 마가에 의하면 새로운 공동체를 보증하는 것들이다.
세번째 여행과 성전 연설들
예수의 권위를 묻는 자들에게 예수는 사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말한다. 또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예수는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라는 답변을 한다. 가장 큰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과 과부의 헌금을 칭찬함으로써 여성을 하느님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그럼으로써 남성만으로 구성된 오랜 권력 구조를 무시한다.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
우리가 여기서 읽어야 하는 것은 마가의 역사적 상황이다. 이 시기는 유대전쟁, 성전의 파괴, 그리고 큰 환난의 시기이다. 마가의 예수는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예언자들을 논박하고 또한 모든 하느님 나라 기대들을 전쟁 기간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리고 요약적으로 말하자면, 마가는 예수가 전쟁, 성전 파괴, 그리고 예루살렘에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음을 예언한 것처럼 기록함으로써 그 당시 살고 있는 독자들이 예수 이야기의 문맥에서 당시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성전은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는 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마가는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5. 굴욕 속에서의 즉위
죽음을 위한 준비들
이제 마가는 예수의 죽음의 준비를 시작한다. 적대자들의 음모를 보여주고 예수에게 기름부음을 하는 이야기를 서술한다. 유다의 배반을 이야기하고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식사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예수의 목적이 전통적인 다윗 가문의 기대들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뒤집어 엎고 거꾸로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요약적으로 말하면 마가는 성전의 몰락을 고지하고 예수가 처형받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마가의 예수는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갈릴리를 자신의 목표점으로 노출 시킨다. 그런데 갈릴리는 유대인 이방인 공동체의 설립지가 아니였던가. 한편, 마가는 제자들의 대표로 베드로를 내세워 예수와 대결케 하고, 그러나 죽음을 각오케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제자들의 궁극적인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겟세마네에서 길을 갈라 섬
여기에서 마가는 제자들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예수를 보여준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어있지 못함을 세번씩이나 말하므로써 결국 제자들과의 갈라섬을 이야기 한다. 겟세마네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고난의 필연성 이었다. 예수는 고난을 하나님의 손에 맡김으로써 그 필연성을 감수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약할 뿐이다. 이제 제자들은 마지막 기회를 상실하고 예수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음 속에서의 죽음
이야기 중에 알몸으로 도망한 청년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예수의 이야기에 비교된다. 예수는 붙잡힌 바 되었으나 부활로 도망하고 만다는 암시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에서도 마가의 구성 기술을 파악해야 한다. 54절과 66--72절의 베드로 이야기 사이에 예수의 심문 이야기를 삽입함으로써 마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베드로와 예수를 비교하도록 하고 있따. 특이한 것이 또 있다. 마가의 에수 이야기 초반에는 예수가 자신을 알리기를 감추는데 이제 딱한번 예수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를 고백한다. 빌라도의 우유부단에 의해 예수는 사형판결을 받는다. 그리하여 예수는 죽임을 당하고 세상은 악마의 어둠 속에 빠진다. 그런데 예수는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마가가 전하는 내용이다. 그는 동료들과 추종자들에게서 뿐만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있는 예수에게 하느님도 아무런 간섭을 보여주지 않는다.
십자가에 못박힌 왕
이러한 예수의 죽음에서 마가는 예수의 왕적 사명을 완수 하는 것으로 보도한다. 그것은 틀림없는 역설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용어가 '왕'이라는 단어이다. 예수의 십자의 팻말에 쓰인 이 용어는 반대자들의 오해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러나 바로 그 오해에 의해서 그에 관한 진실을 확증한 것이다. 이러한 마가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은 예수의 예루살렘 여행을 고난과 십자가를 향한 "올라감"으로 전하고 있는 데서도 볼 수 있다. 그 고난의 올라감의 최종적인 것이 십자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죽음의 결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그것은 성전의 파괴를 의미한다. 이 왕의 주검은 내부인들에 의해 거둬지지 않고 국외자에 의해 거둬진다. 내부인들은 끝까지 실패한다. 일단의 여인들이 등장하여 향유를 바르려고 했으나 그들은 실패한다. 예수는 이미 기름부음 받은 적이 있을 뿐더러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그 빈 무덤안에서 한 젊은이가 무덤의 최후성을 부정하면서 여인들에게 새롭게 여행의 참된 목적지를 방향지운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그 목적지를 전해야 할 여인들 마저 무서워 놀라므로써 자신들도 실패하고 제자들도 실패를 회복할 길을 잃고 만다. 제자들은 유대와 이방인의 공동체의 본고장인 갈릴리로 가는 길이 막혀버리고 만다. 여기까지가 마가의 결말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9절부터 19절은 앞서 본 실패의 결론을 회피해 보려는 한 시도일 뿐이다. 이것은 실질적 사본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마가 이야기의 내적 논리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상의 이야기에서 명백한 것은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었고 십자가에 못박힌 왕의 개념과 인격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왕으로서의 즉위식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러므로써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지도자들이 될 수 있는 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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