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조직신학 기독론

하나님아들 2014. 7. 19. 16:04

 

 

 

 

 

                       조직신학 기독론

 

제 1편  총  론


  제 1장 모든 학문과 기독론과의 관계

기독교 신학은 전적으로 세상 학문과 그 방법을 달리한다. 세상 학문은 인간의 이성을 발동시켜 그 구체적인 대상을 관찰하고 실험과 탐구하여 만물이 갖는 그 본성과 배후 법칙을 탐구하지만 기독교 신학은 무한하고 영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인 신을 대상으로 하지만 직접적인 연구 대상으로는 불가하다. 따라서 세상 학문처럼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학문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자기 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학은 신비의 학문인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인 학문 가운데 가장 큰 신비가 삼위일체이며 그 다음은 성육신이다. 성육신은 간단하고 쉬우며 단순한 것 같으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성육신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사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육을 받아드릴 수가 있으며 신과 하나님이 되신가? 그리고 어떻게 신과 육이 공존할 수 있는가? 등의 사실은 모두 신비이고 풀 수 없는 일이고 우리가 눈으로 본다고 해도 의문일 것이다.  


제 2장 기독론의 정의

기독론은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의 사역을 다루는 학문(교의신학의 한 분과)이다. 즉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의 사역이 기독론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은 가장 큰 신비중의 하나로서 창조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1. 성육신의 필요성

성육신이 왜 발생했느냐? 하나님 사역의 목표가 하나님의 자기 영광인데 이 목표에 성육신이 봉사한다. 문제는 하나님의 자기 영광의 길목에 죄가 가로막혀 있어서 이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육신이 생겼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때문에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사람들의 첫 번째   목적이다).



  2. 성육신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견해

죄 때문에 성육신이 발생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강한 반론을 제기한다. 19세기에 Hegel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신학을 매개신학이라 하며 이 신학은 철학과 신학의 조화를 시도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성육신과 같은 큰 일이 인간의 우발적인 실수에 의해 유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울의 글에 특히 에베소서에서 만유를 통일케 하신다는 우주적인 드라마가 전개되는 말을 들어 만유를 통일하려면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해야 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만유를 통일하는 일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즉 신, 인이 합일하는데 성육신이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20세기 의 자유주의 신학자 k, Barth에 의해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일원론의 오류에 빠진다. 금세기에 이르러 바르트만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모든 신학적 논의를 한 신학자도 없다. 바르트의 논의도 19세기 매개신학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의 의하면 처음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특히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하나님과의 교제의 대상으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셔서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후에 인간을 끌어 올려서 신의 성품에 동참하게 하시는데, 즉 교제를 통해 증진시켜 나가다가 한 시점에서 신의 성품에 동참하도록 하신다. 따라서 이러한 신의 연합 혹은 신 인 합일을 위해 성육신이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죄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하여 신과 인의 합일에로 가는 길에 죄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그림을 꽂아 넣듯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성육신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죄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k, Barth에 있어서 죄는 성육신은 죄라는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신과 인의 연합을 위해 생긴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를 통해서 신과 인의 연합을 이루시도록 했는데 그 일을 성육신으로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성육신으로 함께 처리한다. 이것이 k, Barth의 성육신론이다. 이러한 이론으로 전개하니 창조 문제도 k, Barth에 의하면     인간의 주거의 환경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창조가 하나님의 영광의 무대  


인데 k, Barth 영광의 무대라는 의식보다는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한 보조기관 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창조가 신과 인의 교제를 위한 인간의 주거 환경으로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주 유명한 말 중에 "창조는 언약의 외적 증거이고 언약은 창조의 내적 증거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언약이 창조를 필연적이게 했다는 것이다.

  3. 신학 하는 자세

우리가 신학을 하려고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렇게 신비한 학문이면 어떻게 배울 것인가? 현재는 신학을 하는 데 있어서 잘못된 경향이 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울 때에는 일반 학문을 대하듯 가볍게 하고 예배하러 갈 때에는 경건하게 예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신비의 학문이므로 학문하는 자세가 경건한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기도하며 경건과 겸허한 자세로 학문에 임해야 한다. 기독교 학문은 논리적인 체계 정립만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신앙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표현하는 과정인 신학적인 학문을 인간이 하기 때문에 표현의 과정에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고 잘못된 것도 있을 수 있다. 오류의 가능성이 항상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기 현시 앞에 겸허하게 무릎을 꿇는 자세와 주의하여 신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리공론이 되기 쉽고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목사가 못된다.


제 2편 그리스도의 인격


   제 1 장 그리스도의 명칭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이름이 많이 있는데 이것들은 그의 본질적 존재와 그의 성질과 그의 상태와 그의 직책이 나타난다.

1. 예수

이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희랍어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시대 이후에 역사서에서 나타난 올바른 형식으로는 '예수와'로서 '구원   

하다'라는 히브리어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하늘 천사가 그 명칭에 대해서 해석한 것과 일치한 것이다. 전형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다음과 같은 인물이 있다.

1) 눈의 아들 여호수아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70인경에 '예수'라고 번역되었고, 히브리어 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예수서'로 되어 있다. 이는 400년 이상 된 약속을 받아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약속된 땅 가나안 복지를 정복하여 안정된 삶을 보장한 충성된 지도자, 영원한 축복을 선사해준 그리스도를 예표 해 줄뿐만 아니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할 자, 혹은 영원한 축복을 가져올 자, 영원한 우리의 기업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2)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슥 3:1)

포로 귀환 후 여호와의 종교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진 대제사장으로서 성전 제사를 회복하여 예루살렘 종교를 복귀시켰다. 바벨론에 남은 자들을 거느리고 두 번째 귀환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첫 번째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성전제사를 회복함으로 죄를 대속하시고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참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 위의 두 인물들은 전자는 이스라엘이라는 선민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자이고 후자는 예루살렘의 성전예배를 부활한 자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죄를 속죄해 주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축복에로 완전히 인도한 지도자 또는 구원자임을 나타낸다. 죄가 속해져야 영원한 안식에로 들어갈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지도자를 뜻하여서 여호수아라 하였다.


    그리스도와 성전과의 관계

성전 제사와 성전은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다른 의미가 없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이기 때문에 제사를 받으신다. 지성소는 밖과 차단되어 있고,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가야만 하는 임재의 장소이다.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마력적 혹은 기계적으로 부착되어 있는 것   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전 임재는 하나님의 주권적 임재이어서 언제든지 떠날 수가 있었    


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소를 하나님의 보좌로 정하신다고 하였기에 블레셋과 싸울 때에 법궤만 가져가면 하나님께서 같이 동행해 줄줄 알아 그들이 승리할 것으로 굳게 믿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아서 패배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주권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우리들의 안에 모든 면에서 충만하신 신성으로 완전하게 거하신다(골 1:19, 2:9).  하나님 자신이 완전하게 그리고 충만하게 거하신다. 신약에 하나님의 임재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몸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 충만하게 거하시니 더 이상 물리적인 성전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이 예루살렘 성전을 대신한 것이며 종말론의 천국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면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말씀하심으로 성전과 제사 중심의 모든 제도가 자신을 지칭했다고 밝히셨다.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희생을 드렸으므로 구약의 제사가 완성되었다. 이렇게 유월절 제사가 완성되었음에도 반복을 말하는 세대 론과 천년전기 설에 의하면 종말에 천년왕국이 건설된 후에 피의 제사가 복귀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는 간주곡이며, 하나님은 유대나라 복귀를 목표하였다고 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 관점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가 유대나라가 목표가 아니라 온 세상에 흩어진 자기 백성이 목표이며, 이스라엘을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출생으로 그 일이 성취됨으로 이스라엘의 임무는 끝이 나고 그들도 구원의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

그리스도란 이름은 중보자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말하고 구약의 메시아란 이름과 똑 같다. 구약시대의 왕과 제사장은 정규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러나 선지자는 가끔씩 기름부음을 받았고, 또한 직접  적인 소명으로 일했어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엘리사뿐이다. 따라서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예표와 그리스도가 받을 성령님을 보  여준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만이 완전히 성령님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   


고, 성령님의 담지자인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영원 전부터 그의 직위에 임명되었으나 역사적으로 되신 것은 잉태와 수세 때 이루어 졌다.

그리스도가 왜 성령님을 받으셨는가? 그리스도는 성화 적 출생으로 중생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님을 받으신 것은 메시야 사역에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 즉 예수님께 성령님의 세례는 메시아 왕으로의 인치심이며 왕으로 임직하심으로 새 시대의 도래 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신성인데 왜 성령님을 받으셨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성령님을 받으신 것이다.


  3. 인자

1) 인자는 시편 8:4절의 내용으로 70인경이 이 부분을 메시아적인 해석으로 번역한 것을 히브리서가 인용하여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히 2:6-9). 즉 히브리서가 70인경에서 인용할 때 시편 8:5절에서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게 하고'를 인성 상태하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였고 또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를 승귀로 적용하였다.

2) 다니엘 7장 13절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명칭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이것은 하강하는 구속주의 상을 구약에서 말하고 있다. 처음으로 신약에서 그리스도가 하강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고 구약에서 특히 다니엘 7:13절과 에스겔 1:26절에서도 언급된다.

3) 인자라고 할 때에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있다. 인자라고 함으로 사람의 아들임을 칭함으로 반어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신다. 사실은 자기는 사람의 신분으로 나타났어도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제 2의 아담으로서의 그의 신분을 지칭한다. 마지막 사람으로 혹은 새 인류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새 인류의 조상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부분은 없다. 그렇지만 첫 아담과 둘째 아담을  대조하면 첫 아담이 첫 인류의 조상이면 제 2의 아담은 새 인류의 아버지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것과 관련하여 히브리서 2장 13절에 주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라고 구약을 인용함은 그리스도가 새 인류의 조상임을 알 수 있다.



4) 인자를 심판 주로 말할 때는 초인간적인 존재로 이해하여 장차 하늘나라의 영광 가운데서 재림하실 것을 명확하게 암시해 준다. 이는 구약에 특히 묵시문학 시대에 많이 유행하였다. 메시야가 심판 주로 오셔서 심판하시고 세상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유대인의 왕국의 회복으로 유대인들은 기대했는데 그리스도는 거기에 적용하지 않고 자신의 재림에 적용하셨다.


  4.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구약 성경에서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왕들, 천사들, 경건한 성도들에게 적용하였다. 특히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독특한 위치를 지시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1)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 삼위일체의 아들의 의미로서 지시함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출생 때문에 그 인간성의 기원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활동 즉 성령님의 활동 때문에 아들이 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사용하셨다.

2) 하나님과 자기가 갖는 독특한 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 명칭이 사용되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갖는 친분 관계를 가지지 못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갖는 유일한 친분 관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표시하셨다. 그 누구도 그 친분 관계 사이를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친분 관계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바라고 불렀다. 우리 개역 성경에는 아바 아버지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어른들이 부르는 식으로 되어 있지만 분명히 아빠라고 할 때는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린아이가 부르는 칭호이다. 아무도 이 칭호를 예수님 이전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부른 사람이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래서 아빠 아버지인 것이다. 유대교의 모든 전통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었지만 더구나 아빠라고 부르는 경우는 그리스도에게서 처음이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갖는 독특한 친분관계  를 아빠로 표시했다.

3)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삼위일체에서 그 위격을 표시하기 위해서 사용      


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주로 하나님과의 기도에서 사용하였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가지셨던 영광으로 아들을 영화롭게 하옵소서'에서 요한복음이 가장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러한 내용들이 전혀 없는데 그 이유는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단의 핵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5. 주

이것은 정중한 언사에서 높이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보통 소유권과 높은 권위를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칭호를 적용하여 교회의 최초의 공식적인 칭호가 되었다. 여기서 주 예수라고 할 때에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을 한다. 첫째가 예수는 주(Jesus is the lord)이시며 둘째는 주 예수(the lord is Jesus)이시다. 주라는 칭호 속에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주라는 뜻으로 적용하였고 이것이 그들의 신앙고백이 되었으며 그리스도가 구약의 야웨와 동등한 분으로 혹은 동일한 분임을 지시한다. 특히 부활 후에 이 칭호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면서 교회와 전우주의 신적 통치권을 받으신 분임을 지시하였다(요 8:58).


   제2장 그리스도의 본성

  1. 그리스도의 양성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처럼 독특한 인격을 가지신 분이 없다. 많은 학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 데 인간이시다. 한 인격 속에 두 인성을 가지셨다. 이는 그리스도만이 양성을 가지신 독특한 분으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심은 성육신 때문이다. 이 성육신은 인간이 풀 수 없는 신비로서 삼위일체 다음의 해결 받을 수 없는 신비이다. 어떻게 하나의 한 분 인격 내에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의 장소에 두 존재가 있 을 수 있는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금세기에 루터 교에서 시도한 것이 케노시스 이     


론이다. 케노시스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성육신할 때에 대부분의 신성을 비워내셨다는 것이다(빌 2:5-11). 그러나 케노시스 이론은 본래 출발한 취지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육신이 아니며 성육신의 부정에 도달한다. 신성의 특성들을 거의 다 비워내고 난후 거의 인간 수준까지 떨어지는 그것은 성육신의 부정이 된다. 즉 하나님의 속성들을 다 비워내어 버렸으면, 하나님으로 계신가? 하나님이라고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성육신의 부정이 되는 것이며 양성을 구별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또 어떤 이는 인격의 통일성을 주장하는데 실패하였다.

1) 그리스도의 신성

어떤 이는 한 인격 내에 두 본성이 있을 수 없다는 전제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 루터교의 케노시스 이론도 신성이 비웠다고 말한다. 그것은 성육신의 부정에 도달한다. 로마서 9장 5절을 보면 육체를 따라서 오신 이가 만물 위에 영원히 찬송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바울이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강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지시한 부분이 여기이다. 바른 번역으로 육을 따라 오신 그리스도,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번역해야 한다. 미가서 5장 2절은 다스릴 자가 나온다고 했고, 말라기 3장1절은 내가 내 사자를, 예레미야 23장 6절은 그 날에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 요한복음 8장 58절은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표현으로 구약의 야웨와 동일시한다.

  2) 그리스도의 인성

영지주의 자들은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다. 희랍사고에 의하면 물질이 존재의 크기에 있어서 최하위에 서 있다. 그러니 물질은 악한 것이다. 따라서 악한 물질과 거룩한 신성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그러므로 가현설을 주장한다. 이는 실제로 나타난 것이 아니고 단지 거짓으로 그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편 현대의 자유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을 신성으로 치부함으로 신성을 부인한다.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을 신  성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a. 그리스도는 인성의 본질적인 요소 곧 물질적인 육체와 이상적 영혼을      


소유하심으로 완전한 인성을 소유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혼과 육체를 둘 다 소유한 것이다. 하나라도 다 모자라면 완전한 인성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성이 못되는 것이다.

b. 영혼의 자리에 로고스가 자리한 것으로 주장한 것도 잘못으로 정죄되었다. 왜냐하면 완전한 인성 소유가 아니면 우리의 구속주가 되지 못한다. 선한 뜻으로 일을 했지만 영혼이 들어가지 않은 인성은 불완전한 것이다.

c. 그리스도는 양성의 속성 전달이 없으므로 정상적인 성장을 하여 인간의 일반적 법칙을 따라 발육하였으며 동시에 인간의 결핍과 고난에 종속되었다. 그리스도가 한 쪽은 신성이고 한 쪽은 인성이면 그 힘에 의해서 천재 중의 천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사는 성경에 없다. 12살 때에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학자들과 토론해서 기이한 것은 있어도 천재중의 천재인 그러한 곳은 없다. 그러한 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성장과 발육이 아니다.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정상적인 성장의 발육으로 모든 연령별 계층들을 모두 구원하였다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이레네우스는 그러한 자기 말 때문에 나이가 많을 때까지 살았다고 하며 그리스도는 33세가 아니고 더 오래 살았을 것으로 이야기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정상적인 성장 발육을 한 것은 신성이 인성에로 전달됨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교의 속성의 전달은 성경에 맞지 않다. 우리는 루터교의 속성 전달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다. 만일 그렇게 교통한다면 신성과 인성의 한계선이 흐려지며, 우리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치 않다. 그리고 신성이 완전히 인성에 들어 왔다면 신성이 본래대로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도 성경적이 아니다. 따라서 칼케돈 신경에서 정죄했는데 '혼합 없이'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당하는 배고픔, 목마름, 더위, 슬픔의 감정, 기쁨의 감정 등을 다 겪으신 것이다.

d. 그러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이었어도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시험과 유혹은 있었으나 양성의 본질적인 연합으로 인성이 신성의 지배를 이탈해서 범죄 하기 불가하다.

하나의 인간이 되었으면 결핍과 고난에 종속되는데 그러면 죄까지 종속      


되는가? 죄는 없으신 데 성령님의 잉태로 원죄를 방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죄가 없으니 유혹과 시험도 없느냐? 그리스도의 인성에 시험과 유혹이 있었어도 범죄 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시험으로부터 시작해서 참으로 많은 시험과 고난을 당하셨다. 범죄가 불가능한 것은 무죄하신 성육신의 강점과 신성이 인성을 붙들어서 범죄 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도덕적인 고결성을 가짐으로도 넘어가지 안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의 지배인 것이다. 우리들에게도 성령님의 감동과 감화가 늘 함께 하지만 결국 범죄하고 회개에 이른다.

e.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성화된 인성이다. 신성이 계속해서 그를 붙드셨는데 성령님의 충만으로 붙드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성화된 인성이니 우리와는 달리 죄와 유혹에 대한 반응이 전혀 다르다.

f. 인성 자체만 보았을 때 범죄 가능성이 없느냐? 이 질문은 스콜라 철학의 사변이다. 그리스도의 인성만 본다면 아담의 경우를 비춰볼 때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가 구속을 위해 오셨고 신성이 인성을 붙드시기 때문에 그러한 사변적 질문을 불가하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말할 때 다소 문제가 있으나 그리스도가 아담의 형상으로 창조 출생된 것이 아니라 천상에 속한 분이시며, 행위언약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죄책에 가담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담의 죄책이 전가되지 않은 유일한 인성이어야 구속이 이루어진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속하신다.

g. 그리스도의 인성은 인성의 취택이지 우리와 같은 인격의 취택이 아니므로 신적 인격이며 무 인격적 인성이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이 무 인격적 인성이라는 점이다. 어려운 문제로 제일 중요한 것이 무 인격적인 인성이다. 어떻게 모든 인성을 다 구비했는데 인격은 없느냐? 지성도 감정도 의지도 모두 가지셨는데 인격은 없느냐? 무엇이리라고 답할 수가 없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로 전통적인 기독교회가 처음부터 무 인격적 인성을 취택하셨다고 했다. 만일 인격을 취택하셨다고 하면 그 취택한 인격 속에 죄책의 문제가 발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무 인격적 인성을 취택했다는 점이 우리와 완전히 구별되는 점이다.

우리는 인격적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기의식과 자기 추체를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자기의식은 신성의 의식이다. 자기 결정도 신성의 일이다. 그렇다면 인성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인성은 신성에 종속적이다. 따라서 그의 인성은 신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이 우리의 존재방식과 예수님은 다르다. 이렇게 다른 예수님을 무 인격이라고 할 때에 인성에서의 인격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인간을 취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인성을 취택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 여기에 따른 우리와 다른 양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주체는 신적인 인격이다. 그리스도의 자기 결정과 자기의식은 하나님의 의식이고 인성으로서의 의식이 아니다. 즉 그리스도는 신적인 자기의 의식이 자기 결정의 주체이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성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안했는가? 칼케돈 신경에서 양성이 다 자기 법칙을 따라 활동한다고 규정하였다. 인성은 인성의 법칙을 따라 활동하셨고 신성은 신성의 법칙을 따라서 활동하신 것이다. 여기서 무 인격적이라는 말을 오해하여 무 인격이니까 인성이 아는 것도 없고 느끼는 것이나 반응하는 것도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와 똑 같으신 인격이시지만 철학적으로 언제나 동일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표현하느냐? '나'라는 것으로 자기의식의 동일성을 표현하신다. 예수님의 의식은 항상 하나님으로서의 자기의식이었으며 자기 결정도 하나님으로서의 결정이었다. 이렇게 볼 때 인성은 모든 것을 구비했어도 인격은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존재가 독립적이 아니고 신적 인격에 결합되므로 그 존재가 종속적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때부터 이 진리로 그리스도의 무죄 성을 변호하였다.

3) 그리스도의 양성의 필요성

왜 그리스도의 인성이 무죄하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어야 하는가? 왜 신성의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야 하는가? 우리는 성육신을 다르게 표현한 위의 질문에 대하여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구속의 방법이 그 방법으로만 하셔야 되는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는 못하신가? 첫째는 타락한 본성에서 속  상이 이루어지므로 인성을 취하심이요 둘째는 타락한 본성이 회복 또는      


구속해야 하기 때문에 인성을 취택하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창조가 아니고 재창조이다. 따라서 구속이요, 회복이며 재창조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타락한 본성이 원상 복귀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그 본성으로 성취하여 그 공의를 만족하게 해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죄와 우리의 고난까지 구속하셔야 하시므로 우리를 사랑하사 속량하시려고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 인성은 무죄하다. 즉 성육신이 그냥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과 수치와 사망에로 들어오신 것이다. 이는 아담에게 요구한 행위언약을 하나님이 다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을 하나님이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이를 은혜언약이라고 하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은혜언약의 중보자이요 머리이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은혜언약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옳은 것이다.

신성의 필요성은 죄가 절대적 성격을 가지며 그 죄의 값이 무한하여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무한한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택하심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신성이 인성을 취택한 것이 아니라 신격이 인성을 취택한 것이다. 또한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속사업의 결과를 적용할 수 있기 위하여 참된 하나님이셔야 했다. 그리스도가 구속 사역에 있어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반드시 인류의 한 사람으로 오실 때 무죄한 인성이어야 다른 사람을 속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파산자는 빚보증을 설 수 없는 것과 같다. 

4) 그리스도 양성의 통일성에 대한 부정

네스토리우스파는 양성을 너무 날카롭게 구별해 놓아서 사실 양성의 연합을 분리시켜 놓았다. 그래서 양성을 두 인격으로 만들었으며 도덕적으로 목적과 행동에 있어서만 연합시켜 놓았다. 이렇게 신성과 인성이 분리 상태로 공존하나 은혜로 연합한다고 말한다. 칼케돈 신경의 '분리 분열 없이'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의 반박이다.

5) 그리스도의 양성의 의지에 대한 문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양쪽에 모두 의지가 있다. 이렇게 두 의지가 존재 하고 인성의 의지가 신성의 의지에 종속한다. 초대 교황 중의 한 사람인     


호노리우스는 그리스도에게 한 의지만 있다고 주장하다가 정죄되었다. 그들이 교황의 무오 설을 주장할 때 개신교에서는 호노리우스의 경우를 들어서 반박했다.

6) 그리스도의 양성에 대한 부정

우티커스파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인적인 것이나 신적인 것도 아닌 어떤 제 3의 성질의 것으로 말하였다. 인성이 신성 족에 흡수된 것처럼 표현되었다. 유티커스는 혼합이 아닌 융합으로 보았다. 이러한 파의 주장에 반대하여 칼케돈 신경이 '혼합 없이, 변화 없이'라고 정하여 정죄하였다. 양성이 변화된 것이 아니다. 인성이 신성으로, 신성이 인성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인성은 인성으로 그리고 신성은 신성으로 종말에도 존재한다. 끝까지 양성은 그 본성의 실질 혹은 견실성을 유지한다. 그리고 성육신에서 인성의 취택은 인간이 형성된 후가 아니라 수태 시부터이다.

루터파의 기독론도 속성 전달에 있어서는 유티커스파와 비슷하다. 즉 신성이 속성의 비하의 몸인 인성에 전달되어 인성도 편재한다고 하니 완전한 인성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육신 했으니까 신성의 특질이 인성에 전달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인성의 편재뿐만 아니라 인성의 전지와 전능에 도달한다.

7) 기능적 기독론의 인성에 대한 견해와 비판

기능적 기독론은 구속을 위한 수단으로 성육신 하셔서 인성을 입었으니 구속 성취 후 그리스도의 몸과 인성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마루셀루스에 의하면 성육신이 구속을 위해 가지셨으므로 구속이 완료되면 그리스도가 지금처럼 인성과 신성을 가진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께로 복귀한다고 주장했다. 칼빈도 고전 15장 24-28절의 설명에서 그 왕권을 내려놓은 것을 인성 무화의 형태로 보았다. 칼빈을 본받아 판 눌러가 종말에 가서는 인성이 무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명한 주경 신학자 크레이다누스 1903년에 '성육신과 비하'에서 칼케돈 신경을 변호했는데 종말에 인성이 무화된다든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칼케돈 신경에 의존해서 반박했다.

위에서 밝힌 고전 15장 24-28절은 부활을 말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은 만      


유안에 만유가 되신다는 것이다. 왕권을 내놓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리스도의 사역이 없어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성의 은혜의 통치 방식에서 신성의 직접적 통치 방식으로 옮겨감을 뜻하며 인성이 없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빙크는 종말에 구속 중보 사역이 끝나도 인성이 무화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인 연합 중보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구속만 이루고 끝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신인 연합 중보 직을 담당한다. 구속 계시가 치료하는 계시이기 때문에 구속이 완성된 다음에는 구속의 은혜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의사가 원상 복귀했다면 더 이상 의사가 필요치 않듯이 구속의 중보 직은 마감되고 새로운 신인 연합의 영원한 중보 직이 행사된다.


    제 3장 그리스도의 신분

그리스도의 신분은 중보자의 인격의 신분으로 율법에 대하여 가지는 법적 지위를 말한다. 그에 따른 결과로 중보자의 인격으로서 낮아지는 것을 비하로 또 중보자의 인격으로서 승귀 하신 것을 승귀라고 하여 두 단계로 나눈다.

  1. 비하의 신분

(1) 비하의 정의

비하는 신적인 권세와 영광을 감추어 사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주로 가난에 해당하는 말인데 다 비어 있는 가난의 상태를 말한다.

a. 인성의 취착

비하란 신적 위격이 성육신함인데 창조주요 입법자(율법 수요자)요, 주권자인 하나님이 신적 위엄을 버리시고 피조물인 인성을 취택하시되 종의 형태로 오셔서 그 율법을 복종하셨다. 여기서 취택이라는 것은 하나는 취하고 다른 것은 버린다는 뜻이므로 취해서 붙이는 뜻을 가진 취착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즉 율법의 저주와 굴욕에 복종하신 상태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인성을 취착하심은 하나님이 종이    


되신 것이다.

b. 입법자가 율법아래 복종하심

군주는 자기가 법을 세웠으므로 법에 초월해 있다. 이 원칙을 떠나서 입법자가 자기 법을 지키게 된 것이 비하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내신 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지만 종의 형상을 입으시고 율법아래 종속하여 자기가 세운 율법을 다 지키셨다. 이것이 곧 비하이다.

(2) 비하의 주체

A. 루터교의 비하와 비하의 주체

루터파는 성육신은 비하가 아니다. 왜냐하면 성육신으로 신성의 속성이 인성에 전당되었는데 그 전달된 신적 속성을 은폐하고 인성이 사용하지 않는 것이 비하이고 그 비하의 주체는 인성이다. 그리고 부활 때 신적 속성의 사용의 제한을 철폐한 것이 승귀라는 것이다.

B. 개혁파의 견해

비하의 주체는 인성도 아니고 신성도 아니라 신적 위격이다. 신성은 삼위의 공통된 본성이다. 그러므로 신적 위격이 성육신 하셨다고 해야 한다.

C. 비하의 4단계

a.성육신 자체 출생이 비하이다.

b.고난의 생은 율법에만 복종하신 것이 아니라 시험과 유혹 그리고     모든 고난을 다 당하신 것이다.

c.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장사지냄이 비하이다.

d.지옥에 내려 가셔서 승리를 선포하심이 비하이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탄생

  1) 성육신에 있어서 취착한 인성의 성직과 의의

성육신은 그의 신적 위격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완전한 인성을 위하여 실지로 인류의 일원이 되셨던 것이다. 신적 위격이 마리아의 몸에서 모든 인성의 실질을 취착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서 유사 인성이 아닌 우리의 인성을 취착하셨다.

재세례파는 그의 무죄를 변호하기 위하여 천적 인성을 주장하였으나 그     


리스도의 인성은 하늘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성이요, 일부는 택하고 일부는 버리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성을 다 취착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서 유사 인성이 아닌 우리의 인성을 취착하셨다. 이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서 속죄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중보자 예수님은 우리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다.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의 창조로 되었다. 마리아의 몸에서 우리의 인성 혹은 육체를 다 취하셨다. 그러나 영혼까지 다 취한 것은 아니다. 루터교는 유전설이므로 그것이 가능하나 우리개혁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혼은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2) 루터교의 성육신에 있어서 양성의문제와 비하와 승천

루터교는 인성에 강조를 둔다. 성육신으로 인성과 신성이 합쳐지면 신성의 고유한 속성이 인성에 전달되어 인성이 신성의 많은 혜택을 입으므로 신성의 속성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전달된 속성이 육에 은폐되는 것이 비하라 한다. 이처럼 신성의 속성이 비하상태에서 때때로 나타나다가 부활 전 감춰진 속성이 부활 승천 때 완전하게 드러낸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계실 때 신성을 사용치 않았는데 이것을 비하라고 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승천이 없다할 것이다. 루터교의 승천은 존재 방식의 변화로서 제한적 존재에서 편재에로 이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성의 편재설이 나왔고, 인성의 특성들과 실질이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 함께 있다는 공재설이 나왔다.

19세기에 인성 자체를 취함이 비하가아니란 주장에 개혁 교회도 양보하여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사람도 인성을 취한 성육신 자체는 비하가 아니라고까지 했으나 인성 곧 피조물을 입음이 비하이다. 무죄한 인성을 취해도 개혁교회는 성육신 그 자체가 비하라고 한다. 그것은 피조물은 하나님의 종인데 그리스도는 그 종의 형상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또 편재란 내 몸의 요소가 온 공간을 가득 채우는 식으로 없는 곳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성과 달리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활동하며 계시는 신성의 존재방식이다. 신성은 이렇게 편재하신 존재 방식으로 계신다. 그리고 피조물은 편  재가 불가능하고 편재는 하나님만의 일이다. 편재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특색이다.

사단이 어두움의 권세의 왕이라도 지금 여기 있으면 동시에 저기는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활동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렇지 않고 하나의 왕국을 이루어 명령 체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사단이 명령을 내리면 여러 장소에서 그 왕국의 세력들이 동시에 활동한다. 사단이 무소부재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3) 성육신과 무죄한 인성의 문제

(1)그리스도께서 무죄하신 이유

a. 아담의 형상을 받지 않았으니 행위 언약에 속하지 않는다.

b. 무 인격적 인성을 취착했다.

c. 출생부터 성화 되었다. 그러니 중생이 필요 없는 단 하나의인간이    다. 우리는 다 중생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시작부터 성화되었으니 중생할 필요가 없다.

d. 수태부터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로 죄와 타락의 가능성을 혹은 범죄 가능성을 막았다. 성령님이 충만하니까 시험과 유혹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렇게 성경을 우리의 선입주견으로 읽으면 안 된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많은 시험과 유혹을 받았는데 그리스도는 눈물로 아버지께 호소함으로 이겼다고 했다. 그러나 위의 사실 때문에 우리가 죄의 시험과 유혹을 받았을 때의 반응과 그리스도의 인성이 했던 반응의 방식하고 전혀 다르다. 이제 교회에 출석한 사람에게 물질로 유혹하면 넘어갈 수 있지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통해 성화된 사람은 유혹할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화된 인성이며 신성이 그 인성을 꽉 잡고 있다.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가 늘 그를 지킨다.

(2) 재세례파의 천적인 인성에 대한 비판

그리스도의 무죄를 해결하는데 참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의 무죄 본성이 그가 천적인 인성을 입으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그의 인성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천적인 인성과 결합하도록 마리아가 파이프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   로 하늘에서 가지고 오신 인성을 말하지 우리의 본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와는 많이 유사해도 우리의 것이 아닌 천적인 인성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지 못하여 이 견해를 배척한다.

개혁교회에서는 우리의 본성이 아니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우리의 본성이 아니므로 우리의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한다. 마리아의 실질에서 모든 인성을 취착했는데 성령님이 여기에 동력인(動力因)으로 일하셨다. 성령님이 남자 역할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인성이 마리아에게 수태될 때 성화하고 죄의 오염을 방지하셨고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이루었다. 성령님께서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이루셨는데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말이 이 말이다.

(3) 로마교회의 마리아 무흠설의 비판

로마교회는 그리스도의 무흠의 수태 때문에 마리아에게 원죄 유전이 없다고 주장한다. 마리아 자체에게 원죄 전달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무죄하다는 것이다. 결국 마리아가 무흠하면 아담까지 무죄를 말하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는 마리아 자체가 원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성령님의 공작에 의해서 죄의 오염과 부패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4) 성육신의 유래

하나님이 이루신 세 가지 가장 큰 사역을 창조, 성육신, 성령을 부어주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 때에 성육신은 인간의 죄악 때문이지만 이는 영원한 경륜과 작정이 있었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장 높이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 때문이지 죄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터툴리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꼭 죄와 연관되지 않는다고 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성경 전체 중에 한 곳이 문제인데 창세전이라는 여기에(엡1:) 근거해서 타락 전 선택설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속의 경륜을 크게 찬동하며 기록되었다 할 것이다. 성경 해석학적으로 보면 부분은 전체에 비추어야 하기 때문에 타락 전 선택설은 아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책임 한계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는 것이 개혁신학이 가진 가장 큰 문제로서 아킬레스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작정되어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초의 실현이 창조이고, 그    일의 진행을 작정하신 분이 그 작정을 떠나 우발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창조주요, 절대 주권자이시며 경륜 밖에서 그의 통치 영역을 벗어난 우발적 사건을 제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다. 그러면 타락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책임은 하나님께 지워지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타락도 그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타락은 허락 적 작정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3. 그리스도의 고난

1) 율법의 준수

그리스도는 출생, 죽음, 전 생애가 율법 순종의 수난의 생이다. 언약의 중보자로서 모든 율법의 요구와 순종의 법을 수행한 것이 수난이다.

a. 자원 적 순종

율법준수는 입법자로서 우리를 위해 자원하여 준수하셨으며 의를 이루신 것이다. 이 때 자연법을 포함하여 모세의 행위 언약 법을 의무감 없이 모두 준수하셨다. 우리의 의가 어디서 왔느냐? 그리스도의 율법의 순종에서 왔다. 이러한 율법의 순종이 십자가에까지 간다. 죽음이 포함된 순종에서 의가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과로부터 신인 화해를 가능케 한다.

b. 피동적 순종

입법자로서는 율법의 준수요구가 있을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작정에 의하여 특별히 법정 적 선고를 받아 죄인으로 저주 아래 죽으셨으니 이 죽음이 대리적 죽음이요 곧 우리의 구원이다.

2) 시험을 받으심

아담 (은혜언약의 대표) 

그리스도(둘째 아담)  

  1. 첫 사람

마지막 사람

  2. 첫 인류의 조상 광야에서 동물과 함께(막 1:13)

둘째 인류의 조상

  3. 행위 언약의 대표(창세기 2장)

  은혜언약의 대표

4. 낙원에서 동물과 함께

  광야에서 동물과 함께 함

  5. 먹는 시험을 실패(풍요 속에서)

먹는 시험에서 승리(빈곤에서 승리)

6. 나무도 불순종

나무에서 순종

                                  (이레네이우스는 로마서 5장으로 그리스도와 아담을 위와 같이 말했다)

                                            

공생애 시작부터 사단의 공격으로 시험을 받으셨다. 처음 당한 시험이 먹는 시험이다. 첫 조상은 실패했으나 둘째 조상 예수님은 시험에 승리다.

  4.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망의 확인으로 완전한 죽음이었다. 문명사회에서는 사망 진단서가 있어야 시체를 매장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망진단서가 무엇인가? 창으로 찔러서 물과 피를 흘림이다. 이것은 그의 완전한 죽음의 확인이다. 여기에서 물과 피가 분리됨은 죽음의 징조이다. 나무에 달린 자가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는데 그가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우리의 저주가 된다는 신명기 21장 23절의 성경에 응

하셨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 법률이 가장 발달하고 합리적인 로마법에 의해서 재판을 받아 죽으실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섭리라고 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정당한 법정 적 선고로 죽으시고 로마법에 의해 사망확인이 되어 확실한 진단서를 제시한 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역사이다.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 값을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이 성경대로 하나님의 저주를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러한 죽음이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죄의 값을 지불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속상하여 만족을 드림과 동시에 완전한 순종으로 의를 이룬다.

  능동적 순종

법은 입법자에게 지킬 의무를 부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입법자는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능동적으로 율법을 지키셨다.30년의 생애도 율법에 응하신 삶이었다.

  피동적 순종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작정하신 대로 순종하여 우리의 저주를 담당할 목적으로 죽게 하셨으니 그 죽음은 피동적이다. 왜냐하면 그 죽음을 자원하시므로 죽게 하셨으니 그 죽음은 피동적이셨다.

독특한 것은 제사장이면서 제물로 죽은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 이 모든 구약의 제사제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고 예언한 것이다. 그러면 구약의 속죄 기능은 어떤가? 그 기능을 무시하면 우화가 되고 예표는 못    


된다. 당시대 유대인들은 그 제사로 자기의 죄가 속하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은 실제로 죄를 속하셨다. 그러니 그 제사 때문에 속하신 것이 아니고 그 제사가 지시하는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속하신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야 성경이 정확무오 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된 문자대로 믿어야 한다고 하여 글자대로 구약에서는 피 제사로 속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예수님을 믿어 속죄 받다가 종말에서는 피 제사가 복귀한다고 한다. 천년 전기설이나 세대 론이나 근본주의는 대부분 성경을 하나님의 전 경륜과 통일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경구절을 근거하지만 잘못된 해석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약이 예언하고 예표 한 완전한 희생제사로서 구약의 모든 제사를 성취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사가 마지막 제사요, 다른 제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구약의 모든 목표는 그리스도이시며, 구약은 그리스도를 위한 준비이었다.

구약 백성을 위해서 선민을 택하시고 섭리하신 것이 아니며, 전 인류의 백성을 위해서도 아니고, 택함을 받은 전 인류를 위한 도구로 택하셨기 때문에 모든 궁극적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원을 위해서 구약의 모든 역사로 하나님이 섭리해 오셨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인가? 그 큰 구원의 사건을 기록하고 친히 해석한 책이므로 해석도 궁극적인 계시에 속한다(구원이 궁극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다.

세대 론이나 천년전기의 종말론에 대한 도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십자가로 구속이 완성되었고 더 이상 다른 것이 불필요하다. 현세에서 구원이 끝나면 또 한번 중간기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과 하늘이 즉시 도입된다. 이 것이 바른 진리이니 잘 배워야 하겠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이 왜 이루어졌는가? 혹자는 하나님이 몰인정하고 비도덕적이고 초 도덕적이라는데 그렇게 거룩하신 분이 아들을 잡아 제사 지내라는 것을 용납할 길이 없다고 한다(100세에 얻은 독자요 나무를 지고 가는 청소년이다). 아브라함을 시험해서 큰 복을 준다   


지만 정답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그 독생자로 구원할 구원의 섭리를 미리 보이신 것이다. 즉 이삭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구약을 보면 볼수록 그 죄악이 드러나고 짐승의 피를 가지고는 그 죄가 속죄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며 대안으로 메시야를 기다리게 한다. 흠이 없는 제물을 드릴 때마다 대속의 교리를 가르친다. 흠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죄를 씻는 재료이며 근거이기 때문에 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의 길이다. 회개를 반복한 것은 십자가의 피를 의지하고 피에 호소하지 않았으므로 성령님께서 용서받은 확증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피를 의지할 때 확실한 용서가 온다.

  죄의 장본인인 옛사람을 죽이는 십자가

옛사람은 죄에 오염되어 죄의 종이다. 우리가 늘 범죄 하는 것도 이 옛사람의 욕망 때문이다. 바울은 십자가로 죄와 그 옛사람이 처형되고 바로 그 옛사람이 장사에 동참했다고 말한다. 옛사람을 죽이라고 하니까 내가 죽이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까. 죽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을 한다.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명령법은 알고 직설법은 알지 못하여 옛사람을 죽이라고 명령만 하는데 죽이라, 죽이라 하니까 내가 죽이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죽일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큰 오해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직설법에 근거해서 명령법이 나온다. 이미 죽었으니까 죽이라는 명령이 나온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우리가 거룩해 졌으니까 거룩하다는 명령법이 나온다. 직설법은 빼고 명령법만 말하니까 전 세계적으로 그렇게 문제가 많은데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다.

성령님의 충만을 받으라, 그렇게 강조하지만 성령님의 충만을 받은 사람은 없다. 성령님의 충만한 인도를 받으라는 것도 이미 성령님을 받았으니 성령님의 지배아래 살라는 명령으로 가능하고 또한 그 말이 성립된다.

지금 소위 알미니안 신학을 따르는 복음주의 교회는 이 직설법은 모르고 명령법만 본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 성령 세례, 방언 받기 위해서 온갖 사력을 다하며 또 금식, 철야하고 성령 충만하다는 교회 찾아가서  안수 받고 그래도 안 되면 10년 기다리고 20년을 기다리고 한다. 이는 사람을 괴  


롭히는 율법주의요 고행주의이다. 이 말은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고 오순절파의 책에 쓰여 있는 말이다. 얼마나 사람을 고문하는 교리인가? 이미 성령 받아 있으니까 그 지배아래 살라는 명령이다. 이미 거룩해 졌으니까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다. 바울의 교훈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 있으니까 옛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이 나온다. 직설법은 안보고 명령법만 보니까 문제가 많은데 직설법은 은혜이다. 그러니 이 은혜에서 구습을 죽이는 동력이 나온다.

성령 충만은 무슨 뜻인가? 새 사람을 풍성히 있는 일이다. 그러니 성령 지배받은 표가 죄와 투쟁하는 것이다. 죄와 싸우는 일없이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음에 이르지 못한다. 새 생명의 권세로 그 죄와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결혼예식

여러 생활에 있어서도 우리는 결혼할 때 축의금을 내지만 외국은 아니다. 그들이 돈을 낸다는 법이 없다. 혹은 가정 필수품을 선물하되 살림 장만해도 될 정도로 한다. 이것을 우리는 대신 돈을 주고 명부를 쓰는데 이것은 갚으려고 하기 때문에 선물, 즉 축의금이 아니라 빚이 된다. 장례식 때도 우리는 조의금을 주지만 서양에는 그렇지 않다. 조의만 표하면 된다는 것이다.

5. 지옥강하

1) 용어 설명

(1) 천국과 지옥 :성경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층이 없다.

(2) 낙원 :유대교에서는 낙원을 메시야의 처소로 이야기한다. 지금은 십자가 밑에는 그 유대의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이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보면서 자기들의 메시아 관대로 그 요구를 채워 줄 것을 말하면서 조소하고 있다. 누가복음 23장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한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선포하고 증거 한 것이다. 그들은 후에 베드로의 선포를 듣고 그가 자기 증거대로 메시야임을 깨닫고 회개한 자들이 3천명 5천명이 되었다.



(3) 음부: 음부에 대한 이해는 3가지가 있다.

죽음, 무덤, 망자들이 가는 곳. 구약에서는 3가지 구분이 희미하다. 족장시대 이후로 계시가 점점 더 명료하고 확실하게 나타나므로 구속사 안에서의 계시의 점진 성을 성경 전체에서 살펴야 한다.

2) 각 교파의 견해

a.로마교회

로마교회는 조선림보를 주장한다. 조선림보에는 구약의 모든 백성들, 즉 아담부터 그리스도 십자가 이전까지 모든 망자들이 갇혀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아직 흘리지 않음으로 그의 피가 구약 백성들에게 적용되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속죄가 이루어지지 못했으므로 천국에 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한 백성들은 그리스도께서 옥문을 열고 조선림보에서 해방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신다고 한다(벧전 3:18-19). 그러나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의 중보자의 의가 이미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그의 백성에게 전가되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십자가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경륜에서 다 이루어졌다면 실제로 십자가의 필요성이 있겠는가? 하는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나 그의 경륜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을 역사 속에 실현할 것까지 작정되었고 그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b. 영국교회

지옥에 내려가셔서 언약 백성에게 진리를 더욱 분명히 가르치셨고 예수의 육체가 무덤에 머물러 있을 때 지옥에 있는 자를 구원키 위해 갔다고 한다. 이는 로마 교회와 유사한 입장으로 바른 기술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지옥에 가 있는 자들은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 것으로 더 이상 변동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중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c. 루터파

루터파는 승귀의 첫 단계로서 승리를 선포하시고 그들 위에 승리의 행진을 하셨다. 그리고  악행들이 있는 세계까지 선포할 필요 때문에 지옥에 가셨다고 한다.


  d. 개혁교회

개혁교회는 위의 파들의 견해와 같이 글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지옥에 내려가셨다고 하나 개혁교회는 지옥 강하를 상징적인 표현으로 본다. 따라서 그가 사망의 고난의 경지에 깊이 들어간 것으로 보며 십자가상에서 당한 고난의 극치를 지옥강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완성되어서 누구도 더할 수 없다. 그러면 왜 지옥강하가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없는가? 이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버림받은 자들의 처소에 갈 수 없다. 이미 지옥에 간 자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상실되었으므로 지옥까지 갈 필요가 없어진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영으로 옥에 있는 자들에게 전파하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우주적인 사건이므로 영의 권세로 십자가 사건이 지옥까지 알려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6. 승 귀

승귀는 그리스도의 신인 인격에 관련하여 비하의 신분과 상태를 벗어나 신인의 위격이 영광에 복귀한다. 즉 승귀는 신인 위격이 하나님의 모든 영광에로 복귀하심이고 인성도 함께 영광에 동참한다. 이에 대하여 마르셀루스(334년에 정죄 됨)는 성육신이 죄로 인하여 이루어졌고 하나님으로 창조와 구속의 목적을 이루어 소임을 다했으므로 종말에는 인성의 옷을 벗고 하나님으로 복귀한다고 하는 기능적 기독론을 주장하였으나 이는 결국 로고스가 시작은 없으나 끝이 있다는 것으로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 판룰러에게 그 사상이 연계된다. 그의 의하면 하나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비상조치로 성육신이 등장하게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죄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더 이상 성육신으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고 종말에 가면 무화(無化)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번 하신 일을 그렇게 내 버리시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성육신 때의 육을 계속 입고 계신다. 따라서 칼빈은 고전 15:28절을 언급하면서 육도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 권세에 동참한다고 하였다. 육신은 그 인성이 위격에 부착하므로 승귀 상태에서도 인성을 분리해서 말할 수 없으며 그의 신인 위격이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 권세에 동참한다. 즉    


승귀는 신인 위격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승귀에 대한 여러 견해

루터파: 지옥 강하부터 승귀로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승리를 선포하기 때문이다.

로마교회: 로마교회도 지옥 강하를 승귀로 본다. 그 이유는 연옥에 갇힌 조상들을 그의 구속의 권세로 해방이기 때문이다.

개혁파: 개혁파는 부활부터 승귀로 본다. 따라서 문자적 지옥 강하는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덤에 갇힌 것을 영화로 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중보자로서 죄인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로 승귀에 이름이 필연적인 단계이다. 따라서 승귀는 부활로 시작하여 신인의 위격에 관련하여 인성의 존재 방식도 완전히 변화한다. 보통으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성이 신의 영광을 반사하고 표현하는 기관이 된다. 그러므로 부활후에는 자연적인 제약을 많이 벗는다. 그리하여 루터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 편재를 이야기 하지만 부활 후의 인성이 피조물의 제약을 완전히 벗는 것은 아니다. 많이 벗어나기는 하지만 인성의 편재까지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성이 피조물이니까 아무리 영화 된다 하더라도 피조물의 존재 방식까지 벗는 것은 아니다.

2) 부활

그리스도의 부활은 재창조의 시작으로 승귀의 첫 단계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승귀로 보며 그 이유는 영광 보심을 십자가에 달림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승귀의 첫 단계로 봄이 바르다.

(1) 부활의 성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첫 추수이다. 즉 한 개인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의 새 인류의 부활의 첫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새 인류 전체의 부활이 확증되고 약속되어졌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재래 조직 신학의 전개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리스도 자신만의 일로 이야기하나 사실은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로써 부활한 것이     


다. 따라서 머리가 부활하였으므로 몸의 부활은 필연적인 것이며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부활했으므로 인류 부활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대표한 사람이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이다. 그들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하늘로 올라갔지만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지 못하였다. 단지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법이 있음을 예표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완전히 죽음뿐인 세상에 그 죽음의 법이 깨뜨려지고 새 생명의 법이 도입한 것이다. 이제까지는 세상이 죄와 죽음의 세력아래 있었으나 사망의 법에 대하여 승리하여 의와 생명의 법을 인류에게 도입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의 옛 생명은 죽어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우리 속에 있어 죽지 않도록 되어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그 부활에 대한 경탄과 찬송이 그의 서신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지며 고전 15장에서 담대하게 외친 것이다.

a. 부활의 보증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전체의 부활로 머리의 부활이라고 할 때 보증금은 무엇인가? 성령님의 내주가 그 보증금이다.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 영이 너희를 살리리라는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신다. 바울의 전개에 의하면 새롭게 부활할 새 인류가 된 사람들 마음에 그리스도를 살리신 이의 영을 보내셨다. 중생케 한 영으로 계시지 않고 성도들을 부활시킬 부활자의 영으로 오셨고 계심으로 천국에까지 인도하실 보증의 성령님이시다. 따라서 한번 오신 성령님이 떠나 가셨다가 회개하고 기도 많이 하면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도에게서 떠나가시지 아니하시고 영구히 계시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 영이며 그 동일한 영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영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는 그 사실은 우리가 부활할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보증금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은 새 세계, 새 창조의 시작일 뿐 아니라 도입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한 영육의 결합은 아니지만 의와 생명을 인류에게 도입하셨다. 죽음이 인류 사회의 법인 이 세상에 생명의 법이 역     


사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새 생명이 지금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생명의 법의 역사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다.  

b. 그리스도와의 영의 관계

그리스도는 몸의 머리로 부활하였을 뿐 아니라 몸과 영혼이 재결합하여 천계에 적응할 수 있는 영적 몸으로 영화되어 생명을 주어 살게 하는 영이 되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영을 부활한 그리스도와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영을 부활한 그리스와 일치시킨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살려주시는 영이 되었으면서 어떻게 성령과 구분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확실한 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2) 부활의 의의

A. 모든 구속 사역을 다 이루심에 대한 보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모든 구속 사역을 다 이르셨음에 대한 보상이며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을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승인하셨다는 표이다.

B. 미래 부활의 보장이다(룸 6:4,5,9)

성도의 미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후속 조치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죽으심에 동참하고 또 의와 생명으로 살게 되는 것이 우리의 미래 부활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보증되어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래 부활은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보장되어진다. 이 때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머리와지체인 우리들의 사이를 매는 끈으로서 역사하심으로 그 무엇으로도 이 연합이 끊어지지 아니하며(롬 8:34-35)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부활 즉 머리의 부활은 몸의 부활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

C.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의 의와 생명이다.

a. 그의 속죄에 근거하여 우리 칭의의 근본이 된다.

로마서 4장 25절에 의하면 그가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하기 위해서 살아나셨다고 말한다.

b. 부활은 중생의 원인이 된다. 부활이 왜 중생의 원인이 되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성령님이 우리에게 적용함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살고 그 중생의 생명이 영생에로 이른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와 있는 생명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므로 그 생명으로 살면서 죄와 악과 싸워야 한다.  환언하면 우리가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사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의 권세를 이기듯 우리도 그 생명으로 죄악과 싸워 이겨야 한다.

c. 부활이 최후 부활의 원인이며 인격과 몸의 동일성의 회복을 이룬다.

몸은 동일하고 인격도 동일하다. 그러나 재료가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즉 재료의 절대적 동일성이 아니다. 몸의 모든 조직은 7년 주기로 모든 세포가 한번씩 다 바뀐다고 하나 인격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러나 최후 부활 때는 인격과 몸의 동질성이 회복되는 것이다. 화장법(火葬法)은 성경에 없다. 왜냐하면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특히 헐몬산에서 변화되신 예수님의 변화는 부활한 것이 아니고 단지 신성의 영광의 광체를 보이심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도 부활이 아니라 예수님의 승천을 예표 했을 뿐이다.

(3) 부활의 부정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한다.

a. 기절 설

이는 그리스도가 죽지 않고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고 하는 설이다. 그러나 깨어난 이후의 현상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사람이 죽으면 곧 매장하지 못하고 사망진단서가 발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도 사망 진단서가 발급되었다. 그것은 첫째로 옆구리에 창을 찌름으로 물과 피가 나와 즉음이 확인되었으며 둘째로 총독이 이 장사를 허락한 점이다.

b. 허위 설

이 설은 그리스도가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닌데 허위로 부활했다고 제자들이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은 사도들과 초대 증인들이 부활을 선포할 때 제사장들이 시체를 갖다 보임으로 사도들과 초대 증인들의 부활 주장에 대한 반증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설은 맞지 않다.

  c. 환상설



이설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으로 환상을 보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 부활이 아니면 부활 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대화하시고 명령하신 사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D. 부활설화

그리스도의 부활이 제자들이나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조직된 부활설화라 하면 제자들이 그렇게 부활의 증인으로 신화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 의미의 인류 역사의 대 전환점으로 최종적이고 궁극적이어서 반복되지 않는다. 또 죽음의 세계의 법을 끊어 새 생명의 세계를 열어 우리의 부활을 열고 또한 보장한다.

3) 승천

승천은 부활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부활이 복음서와 바울 서신에 가득히 묘사되어 있다. 이제까지는 사망 권세뿐이었는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것을 깨뜨리고 새 생명을 도입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종말론 적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류 역사와 또 하나님의 인류와의 관계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므로 크게 많이 묘사되어있다. 승천은 부활의 후속과정이며 후속 조치이니까 승천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며 그 묘사가 많지 못할 뿐만 아니라 큰 의의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승천은 큰 구속사적 의의를 가진다.

(1) 승천의 성격: 부활의 절정

승천은 인성을 가지신 중보자의 지상에서 하나님 앞으로 장소를 옮김이다. 또한 승천으로 부활에서 시작된 변화가 더 상승하여 신적 영광을 완전히 나타나 보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사람 등을 접촉해야 하기 때문에 부활로는 신적 영광을 모두 현시하지 못했고, 부활의 몸이 상승하여 영광의 현시의 기관이 된 것이다. 그래서 승천은 장소 이동과 상태 변화를 말한다.

(2) 승천의 장소

승천의 장소는 현 창조의 밖에 있다. 아무리 먼 곳의 은하계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 곳도 시간계이기 때문이다. 추측할 수 없는 무한대의 은하계와     


그의 은하계도 시간 세계이니 천국은 거기 있지 않다. 시간의 영역이 아닌 영원의 영역을 소개할 때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예비한 것 같은 장소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표현하셨다. 즉 창조 계에 천국이 있다면 영원 세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역사 밖에 있다.

(3) 승천의 의의

a. 구속의 완결

이제까지는 승천이 중보자의 장소적 이동으로 보았으나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 그의 상한 몸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구속의 완성을 보이신 것이다. 승천이 자기의 영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제사를 완결시키기 위해서이다. 제물인 몸을 가지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 아버지 앞에 그의 상한 몸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구속의 완성을 보이신 것이다. 승천이 자기의 영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제사를 완결시키기 위해서이다. 제물인 몸을 가지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 아버지 앞에 나타내 보이심으로 아버지께서 열납 하시고, 승인하심으로 제사가 완결되었다. 그 표가 성령님의 강림인데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공로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님을 획득하여 교회에 보내신 것이다. 즉 승천이 부활 후의 후속조치가 아니라 제사의 완결과 성령님을 보내심의 필연적인 과정이다.

b. 우리 육의 구원의 보장.

그리스도의 승천이 우리 육의 구원의 보장임은 우리의 인성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 있기 때문이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라는 예표는 되지만 보장은 못된다.

(4) 승천에 대한 다른 견해

루터 파: 비하는 전달된 신의 속성이 육체에 감추어진 것을 말하며 승천은 감추어진 속성을 발휘한 것으로 하여 부활 후에는 감출 것이 없어 신성처럼 인성이 편재하는 상태 변화를 승천으로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승천이 아니라 상태 변화뿐이다. 그러니 인성 편재를 말하는 루터 교는 승천이 없다 해야 한다.

비판: 편재는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신적 성격이다. 그러므로 인성은 장소에 국한하며 피조물은 편재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거대성으로서 충만



케 계시지만 피조물인 사단은 편재 자가 못되어 이 방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 방에 있을 수 없어서 두루 다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루터 파처럼 편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성이 완전한 신적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원래 그리스도의 양성은 속성의 전달이 아니라 위격적인 전달이다. 신성과 인성이 동일한 신적 위격으로 귀속되기 때문에 인성이 처음부터 신성의 모든 영광에 동참한 것인데 승천으로 인성이 단지 무죄한 인성에서 완전 영화의 상태로 변화되어서 완전한 신적 영광의 현시가 가능하게 된다.

4)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1) 의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은 중보자의 위격이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에 동참함을 말한다. 그런데 그 통치는 신적 통치를 말하지 않고 신인 위격인 메시야 왕권의 통치를 말한다. 근본주의자들처럼 문자대로 하나님 우편에 의자를 갖다 놓고 왕세자나 황태자가 옆에 앉은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보좌우편이라는 말은 성경에 있음이 아니고 스데반의 고백 속에 나온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보좌우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2) 사역

왕: 그리스도에게 왕으로서 우주와 교회의 통치권이 부여되었으며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이제 그리스도가 통치를 시작하심을 극적으로 보여 주심이다.

제사장: 그 몸을 성부님께 드림으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신다. 우리의 기도가 열납 되게 중보 하신다.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니까 예배, 헌금, 기도, 봉사, 섬김이 하나님께 열납된다.

선지자: 성령님의 역사로 그의 종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계속 교훈하심으로 선지자의 사역을 행하신다.

5) 재림

(1) 재림의 의의

심판 주로 오시는 재림이 승귀의 마지막 단계이다.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



으시고 불신자들에게 공의를 집행하시고, 또 세계 역사를 종결하고 신천 신지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2) 재림의 결과

그리스도가 구속자이셔서 인류 역사의 종결을 이루고 구속을 완성하신다. 구원은 영혼이 구원 얻는 일이고, 구속은 그 몸만이 아니라 우주까지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창조 내에 더 이상 죄와 타락의 요소가 없도록 불로 정화하신다. 처음 창조 시에는 죄를 안 지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타락의 가능성도 있는 가변성의 상태였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불변적 상태로 영원히 계속된다. 이 구속의 완성은 심판의 집행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로 세계를 정죄하시지만 불로 정화하시고 새 세계를 도입하신다.

영화 후에도 신앙과 지식의 진보가 있는가?

이성이 영화된 상태에서 그 능력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같아지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주님처럼 된다. 그러나 그 때에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의 연합 중보 적 사역의 그 계시에 의존한다.


제 3 편 그리스도의 사역

  제 1장 그리스도의 직무

그리스도의 심중 직은 칼빈이 확정하여 세웠다. 그러니까 이 진리의 개진은 종교 개혁이후부터의 일이다.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타락 전 첫 사람아담도 삼중 직을 가졌으며 낙원에서 이를 행사했다. 아담은 언약 체결에서 삼중 직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고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께 이 직분을 이월하여 그에게서 성취된다.

1. 아담의 삼중 직

1) 선지자

하나님은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아담이 지어준 사물들의 이름은 그 본성을 지시함이요, 그 특성이 삶을 방향 짓는다. 어떻게 창조를 재해석하여 미래를 예언했다.



  2) 제사장 :하나님께 제사를 담당했고 창조를 성별할 의무를 지녔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고 찬양했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3) 왕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고 찬양하는 일은 꼭 재사장만의 일이 아니라 왕의 일도 된다. 삼중 직이 개별적으로가 아니고 하나로 행사되었다.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본성을 아는 것이다. 본성을 아니까 왕으로서의 다스림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벼락이 두려운 사건이지만 피뢰침으로 두려움을 이긴다. 자연을 다스리는 능력과 짐승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는 통치자로서의 아담이다. 그리고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창조를 개발하는 문화적 사명을 함께 가졌다.

  2. 타락후의 인간의 직무

타락 후 인간이 재 기능을 못해도 어느 정도는 행사한다. 그러므로 타락했어도 순종하고, 창조를 개발하는 책임을 면치 못한다. 삼중 직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므로 우리 구원받은 자들에게 회복되었다. 회복된 삼중 직으로 천국을 건설하는 사명감으로 왕께 봉사해야 한다. 타락 후 인간이 그 기능을 다하지는 못해도 어느 정도는 행사한다. 그러므로 타락했어도 하나님을 순종하고, 창조를 계발하는 책임을 면치 못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도 구원받았으므로 그 기능을 행사할 수 있다. 삼중 직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됨으로 우리에게 회복되었다. 구속 전에는 자연의 종이었으나 이제 회복되었으니 삼중 직을 행사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사명으로 우리의 왕께 봉사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라고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직 삼중 직을 다 몰아서 쥐고 있다는 것은 잘못이다. 목사가 특별히 말씀의 봉사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니까 선지자 직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도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한다. 섬김으로 목회자가 왕 직 기능도 하는데 그건 그리스도인들도 한다. 목사만 특별하게 권면하고 일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설로 권면하고 해야 한다. 또 목사가 도고 해 주는 의미로 제사장적 역할을 한다. 그런 면에서 목사는 교인들 기도를 고르게 잘해야 한다. 그러나 교인들이 미숙해서 자기 기도만 하는 것뿐이지 누구를 막론하고 남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며, 기도는 실천해야 한다. 목사가 제     


사를 드려 주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인도한다. 그러므로 만인 삼중 직이 바르다. 목사의 삼중 직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요한 계시록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표현이 있고,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칭한다. 목사의 위치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치는 성도의 위치를 바르게 말한 것이다. 성경을 잘 가르치는 스승을 배나 존경하도록 교훈 한다. 좋은 목사가 되어야 하며 또 성도는 그 가르침으로 잘 인도를 받아야 한다.


  A.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

  1.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의 의의

낙원에서 아담이 삼중 직으로 역사했다. 그런데 그 삼중 직은 범죄 함으로 실패했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아담 그리스도에게로 이 삼중 직이 전이되어 그 삼중 직이 완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제 2의 아담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신현의 계시이니 그 자신이 선지자다. 그리스도 자신이 신 계시의 절정이고 계시 자체이다.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그리스도는 선지자다.

  2. 그리스도의 선지직의 유일성(우월성).

  1) 그리스도는 참 생명의 말씀을 가져 왔으니 선지자요

  2)또 자신이 성육신 하여 하나님의 계시 자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니 선지자이다.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아들이라는 로고스를 통하여 오며 하나님의 자기 현시는 아들인 로고스이다.

3) 성경을 가장 바르게 해석하여 깊고 바른 의미로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다.

4) 친히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가장 합당한 참 선지자이다.

  3. 그리스도의 선지직의 시기

선재하심부터: 그리스도의 선지 직은 신약의 성육신 때만이 아니다. 선재해 계실 때에도 직접 선지자이셨다. 구약에는 선지자들 통해서 혹은 여호와의 사자로 일하셨다.



승천 후: 승천하신 후에는 어떻게 선지 직을 계속하시는가? 그리스도가 하나님 계시의 절정이고 완성이기 때문에 성경을 완성되게 하시므로, 또 성령의 조명과 말씀의 봉사자를 통해서 선지 직을 계속하신다. 도식은 말씀이 선포되면 성령이 역사 한다. 성화가 40일 금식 기도하고 고행을 하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선포하고 그리스도인으로 바르게 살도록 가르치면 성화가 이루어진다.

  B.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1. 제사장직의 의의

그리스도의 여러 지상 사역중 제일 중요한 것은 그의 제사 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이 바로 속죄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분명히 그는 세상의 모든 죄를 담당하는 어린양으로 죽으셨다. 그래서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시고 새 창조의 지반을 구축하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중보자로서 구속 중보 직을 담당하신 것이다.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종말론적 구속 방법으로 하나님의 경륜에서만 이 일의 이해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역사가 이것의 준비이었고 그 모든 구약 제사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그리스도는 삼중 직을 행하셨는데 그중 제일 중요한 직무가 제사장의 직무이다. 특이한 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제사장이면서 제물인 점이다.

이 진리를 히브리서가 말하기를 구약의 전체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리스도의 제사직의 탁월성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제사장과 제물이 일치함으로 구약 전체 제사를 완전히 성취하였다고 증거 한다.

1)  구약 백성의 사죄의 근거

구약 백성의 사죄가 구약의 그 제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 했기 때문에 예표에 참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그의 피로만 구속을 받는다. 그래서 구약의 무흠한 어린양의 피 제사는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   


러니 구약 사건은 그 때 그 당시 사건으로는 의미가 없고 오늘날 적용하는 효과에서만 그 의미를 찾는 그런 우화적 해석이다 풍자적 해석을 강력히 배제해야 한다. 구약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도구로 역사하여 그리스도의 사전 표상을 말하기 때문이다.

구약 백성의 시간상의 문제도 구속사적 관점에서만 해결이 가능한데 그것은 사실용서의 시기는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된 일이기 때문에 신약과 연관해서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그 시대 그 때에 그 예물들이 예표 적으로 지시하는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해서 용서를 받았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는 천년전기설과 세대 론은 그리스도의 제사 직을 무시하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메시아 왕국을 건설할 때는 구약의 피 제사가 복귀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임시적이라는 귀결에 이르고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헐어 내는 이단 체계이다. 또 십자가 이전의 구약의 모든 성도는 조선림보에 있다고 하는 로마 교회의 가르침도 그리스도의 구속에 배치되므로 적극적으로 배척되고 교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구약의 제사가 필요 없다. 다만 구약의 제사가 역사 속에서 우연히 일시단지 구약의 제사가 역사 속에서 우연히 일시 중단되었다가 그리스도가 오시면 다시 재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구약 제사가 종결되었고 폐지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근본주의가 성경을 정확무오 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일에 공헌을 했으나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봄으로 구약이 지금도 문자 그대로 타당한 줄로 오해함으로 천년기론의 큰 오류를 범했다. 물론 구약이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라 구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메시아 왕국 즉 이스라엘의 다윗 왕국의 회복이 아니라 전 세계적의 구속이다. 그러므로 천년 왕국을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은 천년 기를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부정해버렸다.



2)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와 대언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의 중보자로서 백성의 죄악을 담당하신 자기 구속에 근거해서 백성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중재한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변호하여 안위와 위로로 보호하고 대언 하시는 일을 한다.

성경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다른 보혜사를 약속하므로 그리스도 자신을 대언 자 혹은 변호 자 또는 보혜사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가 보혜사이므로 부활 자 그리스도가 파송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보혜사 직에 근거해서 그의 보혜사 직을 계속한다.

이러한 기능에서 볼 때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다른 자아하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오심은 그리스도의 오심이다. 기능면에서 그리스도의 보혜사 직을 계속하므로 그리스도는 성령님에 의해서 그의 보혜사 직을 계속한다.

요한일서 2장도 그리스도께서 이 속죄의 사역 즉 자신의 속죄와 구속의 사실에 근거해서 자기변호의 정당성과 그 응답을 주장할 때 구속자와 택  자를 위한 대언은 반듯이 응답되고 그의 속죄 사역 때문에 우리가 변호를 받는데 이것이 참으로 큰 은혜이다.

  C. 왕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 직은 모든 만물 즉 교회와 세상까지 통치하는 통치자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왕권은 온 우주에 필연적으로 미친다. 이러한 면에서 중보자의 우주적 왕권이 신적 왕권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왕권은 교회 보호를 말한다.

왜 중보자의 왕권이 영적으로 교회를 보호하는 왕권인가?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속을 완전히 이룩하기 위해 우주를 다스리시는 우주의 통치권이 교회 보호를 위해 그리스도에게 유임되어 있다. 그것은 신적 통치가 아니고 구속에 근거한 은혜의 통치이기 때문이다. 은혜의 통치는 말씀과 영으로 그 다스림이 간접적으로 시행된다. 그래서 은혜의 통치라 한다. 지옥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 것은 바로 이 왕권에 교회가 기초하여 서 있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의 영적 왕권의 본질과 영역

하나님 나라는 현세적이어서 이 왕권은 그의 백성과 교회에 대한 통치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그리스도가 교회의 생명의 원천이므로 여기서 그의 통치권이 나온다. 은혜의 통치 면에서는 말씀과 영으로 하니 간접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다스림이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니 중생한 영혼과, 영으로 창조된 교회, 천국 원리가 미치는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면 첫째 죄가 제거된다. 이 말은 인간의 죄만 속하여 우리만 구원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혼돈과 무질서의 근원이 죄인데 이 죄를 제거함으로 혼돈과 무질서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법 즉 그의 공의가 시행된다. 이 것은 혼돈과 무질서가 제거됨으로 하나님의 법 혹은 질서, 즉 의를 좇아 사는 신자의 삶의 영역이다. 이는 십자가와 정치가 연관되는 문제로서 신앙 정치 중심에 십자가가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법이 시행된다는 말은 세상의 권력 횡포가 아니라 죄가 제거되어 정화됨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의를 좇아 사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성도들이 사는 교회를 말한다. 그러나 창조는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에 보존되고 유지됨으로 모든 창조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그려져 있다. 그러니 모든 사회 영역도 하나님의 법이 시행되며 그리스도의 법이 서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그 영역의 통치권도 그리스도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보수주의 교회의 약점들은 교회 안에서 혹은 우리 개인은 경건하게 살아도 저 사회는 복음 밖의 영역이고 불신자의 영역, 즉 이성으로 다스리는 영역이기 때문에 상관할 바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경건주의와 근본주의 영향을 깊이 받은 잘못된 처사이다.

계시록 11장 15절에 보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하니" 했고 16절에서는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24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17절은 '  가로되 감사 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  

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는 도다'라고 말 한다. 판눌러가 어떤 면에서 좀 과한 말을 했는지 몰라도 사회 모든 통치권도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통치권이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세워지도록 하는 일이 우리의 책임이다.

루터 교회는 두 왕국 이론으로 영의 나라 혹은 교회와 세상 영역 즉 사회와 세상으로 구분하고 세상 영역은 이성으로 다스리고 교회는 은혜로 다스리는 영역이라며 세상과 사회를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에서 제외 시켜 버리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 혹은 개혁 신학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바른 복음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나라의 통치 대권이 교회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도 세워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가 이러한 면에 크게 각성해야 한다.

  2. 종말의 통치방식

종말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성되므로 그의 통치가 중단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종말에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중단되는 것으로 알기 쉬우니 그 통치 방식이 오히려 지금의 간접적 은혜의 통치에서 직접적 신적 통치로 그 통치 방법이 바뀐다. 증보자의 왕권은 초림 시부터 시작하나 그의 왕권은 영원부터 영원까지이기 때문이다. 또 현재 임한 하나님 나라는 미래적이어서 종말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한 적용으로 모든 창조의 영역을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회복시키신다. 지금은 그 통치 방식이 말씀과 영의 간접적 방식으로 하는 은혜의 구속 통치인데 계시록에 있는 대로  철장으로 다스린다는 표현처럼 신 천신지가 도입되는 미래의 그 때는 직접적, 유형적, 신적, 통치가 나타남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가 온 천하에 드러나고 이 통치는 영원하여 영원에서 끝이 없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천년적기나 세대주의 영향으로 그리스도 통치를 천년에 국한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미래에만 국한하여 현제적인 통치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은 재림 때 진짜 통치가 시작된다고 하고 그것도 천년으로 국한함으로 칼빈이 이를 제일 많이 비판한다. 그리스도 통치가 영원한데 천년에 국한시키는 것은 안 되는 일이므로 우리는 적극   


적으로 이를 배척할 것이다.

  3. 우주적인 영원한 왕권

고전 15장 24-28절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였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서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를 주로서 만 유안에 계시려 하심이라는 이 부분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종말에는 종결되는 것으로 말하는데 콘스탄틴 공회의가 이 바울의 글을 다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통치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통치권이 영원하므로 다만 그 통치 방식이 변화되는 영원한 왕권으로 결정했다.

그리스도의 현재 통치 방식은 아버지께 복종하는 인성을 통한 구속 중보적인 은혜의 왕적 통치 방식으로 우주와 사단의 세력이 교회를 멸하지 못하게 하여 교회를 보호하시고 또 교회를 위해 우주를 다스리신다. 그러나 종말에 가면 교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교회와 인류가 구분되어 있지만 그 때는 교회가 교회 형태로 있지 않고 새 인류로 존재한다. 이제는 구속이 완성되어 더 이상 구속 중보 사역의 필요성이 없어진다. 예를 들면 다리를 다쳤을 때 의사와 보조기구가 필요하지만 완치되었을 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과 같다. 흔히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끝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본래적 왕권은 중보 자되심과 상관없이 그의 영적 왕권이 영원한 왕권으로 신의 직접적 신적 왕권으로 이월해 간다. 이 때는 신적 영광과 권세가 직접 현시 된다. 이제는 구속 중보 사역이 끝나지만 구속받은 백성과의 연합 중보 사역이 이 새로운 통치 방식과 함께 계속된다.



여기에 천년 전기 론을 반대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교회와 루터교회, 개혁교회 모두가 천년 전 기론을 배제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의미의 그 천년 기는 종교 개혁 때까지도 알지 못하였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중보 적 왕권만을 전부로 알고 천년 기에만 그리스도의 왕권을 국한하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천년 구속이 끝나면 구속이 다 끝났으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더 이상 필요 없고 끝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신적 왕권이라 할 때는 인성이 제거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신적 통치는 인성이 제거되는 상태가 아니라 인성이 부착된 신인의 위격으로 영원히 다스리신다.

누가복음에 보면 천사가 말하기를 그의 왕권은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원한 왕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천년 기를 강력히 배격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닌 육욕적이고 세상적인 이기심에서 나온 유대주의 발상으로 이 지구가 우리의 거소라는 개혁교회의 회복교리에 반대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제2장 그리스도의 속죄

  1. 속죄의 동인과 필요성

속죄를 말할 때 아버지를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면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린다면 바른 이해가 아니다. 우리는 속죄의 동인을 아버지에게서 구한다. 즉 아버지의 공의와 사랑에서 구한다.

속죄가 무엇인가? 속죄는 아버지의 공의와 엄위를 그 죄의 속상이며 그 속상으로 아버지의 공의를 만족시키면서 구해낸 일이 또한 사랑이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로 이루어진 것이다. 흔히 우리는 사랑을 잘못 이해하여 죄를 그냥 다 덮어버리는 것을 은혜요, 사랑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런 식의 사랑만 말하면 십자가가 성립할 자리가 없고 또 필요 없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를 잘못 생각하면 무법이 되는데 용서를 비는 일없이 무조건 용서는 하나님의 법이 아니다. 많은 우리 교회들이 죄는 범해도 벌은 받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것은 이 십자가와 은혜에 대한 몰이해 때문이다. 하나님은 엄하신 아버지시고 그리스도만 사랑으로 우리를 대속하는 것으  


로 이해하면 안 된다. 아버지는 공의로우셔서 엄책하시지만 또한 자비로우셔서 친히 아들 안에서 또는 아들로 오셔서 구속을 이루어 사랑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아들의 사랑이 곧 아버지의 사랑이다. 또 잘못 생각하여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하면 십자가의 공의가 무효화되고 공의뿐이면 십자가의 사랑이 무효화된다. 속죄의 동인을 공의로우신 아버지의 사랑 즉 아버지의 기쁘신 뜻에서 그리스도에게로 구한다. 그래서 구속은 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에게서 완성된다. 여기에 근거해서 누구든지 벌을 받지 않으려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너무 용기가 없는 것이므로 은혜를 올바로 깨달아 헛되게 받고 허되게 믿지 말아야 한다.

속죄의 필연성: 죄는 하나님의 공의와 엄위에 대한 훼방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이 죄를 용납하실 수 없고 오히려 진노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창조가 인간의 범죄로 영원한 저주 가운데 있게 되었으므로 그 창조의 회복에 속죄가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서 죄인의 죄에 대한 속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흔히 오해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나를 구원하였으니 내 구원이 전부이고 목표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창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듯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목표는 하나님의 자기 영화이다. 그런데 바로 이 길에 인간이 혹은 인간의 죄가 가로막혀 있으므로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속죄가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도 그 목표가 아니요 하나님의 영화의 수단이며 한 길이다. 다른 길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이 곧 우리의 생명이고 구원이다. 그러니 이것이 개혁신학이므로 우리는 올바로 알아야 한다.

2. 속죄의 성질

1) 만족, 보상, 보속, 속상.

속죄란 로마서 5장 10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세상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피해자는 하나님이고 가해자가 인간이다. 사람의 경우에는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피해에 상당한 보상으로 피해자를 만족시켜야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런데 오히려 자기 영광을 훼손당하시고 피해를 입은 하나님께서 속죄를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심으로 자기에게



죄를 범한 가해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 으시고 화해하심으로 가해자인 인간을 지금 만나신다. 바울이 이 진리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훼방한 그 공의를 친히 만족하게 속상하심으로 그 의 즉 그 뜻을 하나님 자신이 이루시고 화해를 이루신다. 그러므로 속죄는 하나님 아버지께 만족을 드릴 수 있었다. 사람의 경우에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인간에게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도권을 가지고 오셔서 주권적 은혜를 베푸사 화해를 이루셨는데 이것이 화해의 바른 순서이다. 그러므로 회개의 일도 은혜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러니 용서는 항상 십자가의 방법으로 용서를 빌어야 받을 수 있지 다른 법으로는 용서가 되지 못한다. 많은 경우 우리는 죄의식의 약화로 인하여 용서의 간구가 약하다. 항상 하나님에게 있어서 공의의 만족 없는 용서는 없다. 이런 속죄가 가능한 것은 인류는 동일한 한 조상의 한 핏줄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번 타락으로 그 개체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가족이란 개념 때문에 한 사람의 타락과 범죄로 전체가 다 저주를 받았다. 그리고 한 조상의 의로 전체적으로 구속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나 천사는 "류" 개념이 없고 종의 개념만 있어서 죄를 범한 천사는 한번 타락으로 그 운명이 결정되어 구속에서 완전히 제외된다.

2) 대리적 속죄

죄의 성질은 하나님의 공의와 엄위에 대한 훼방이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속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속죄가 인간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이 먼저이다. 이 하나님의 공의와 엄위의 속상에서 보면 결국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엄위와 공의의 속상에서 볼 때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역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자기 영화이다.

이 하나님의 영화로 가는 길에 인간이 가로막고 서 있다. 그러니 속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왜 반란을 용납하지 않느냐? 하늘 아래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한나라에 왕의 권세와 영광을 깎아 내린 역모의 반란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 반란이 있으므로 그 영광이 손상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치 않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단지 창조에서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된 것이다. 이 하나님의 엄위와 공의의 회복 때문에 속죄가 필연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 속죄만 강조하면 속죄는 사람만 높이는 오류에 빠진다. 속죄가 마지막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수단이다.

왜 속죄가 대리 속죄인가? 지금은 다 돈으로 환산해 버리지만 옛날에는 소를 도적맞거나 소를 죽이면 소를 갖다가 대신 갚았다. 양을 몰아갔거나 양을 죽이면 양을 갖다 갚아야 했다. 옛날에는 꼭 같은 것을 갖다가 그것을 그 자리에 세울 때  보상한 것이 된다. 이것이 공의의 법이다. 죄를 범한 인간은 그 본성에서 죄가 속상(贖償재물을 바치니 보상이 됨)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그 죄과는 무한하여 그 값을 갚을 길이 인간에게는 없다.

인간의 최고의 속상은 죽음이고 하나님의 철저한 요구는 사망이며 다른 길이 없었고 그 저주는 영원하여 형벌 또한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대리적 속죄는 필연적이었다. 그러므로 대리 속죄 자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택하여 성육신하심과 죽으심이 필요했다. 이에 대리 속죄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일을 이루심으로 그 속죄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나타났다. 그래서 구약의 백성들은 제사 드릴 때 죄 없는 양이 자기 위해 죽는 것을 보고 대속교리를 배웠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다. 이는 무죄하신 예수님을 예 표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구약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3) 속죄는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며 피동적인 순종을 포함한다.

왜 능동적(자원) 순종인가?

왕정 치에서 왕은 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짐은 곧 법이다). 그러므로 군주는 법에 매이지 않는다. 그 원리에 의해서 창조주 그리스도는 법을 지킬 의무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자원하여 자기 법에 자기가 종속되었다. 그리고 이 법을 지킴으로 법을 완성함이 의이다. 속죄는 그의 순종으로 파괴된 행위 언약의 요구를 이루셨다. 그리스도는 자원한 대리적 순종으로   


파괴된 행위언약의 요구를 이루셨다. 그리스도는 자원한 대리적 순종으로 의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그리고 그 순종은 죽음까지를 포함한 순종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는 그리스도의 순종이고 그 순종으로 모든 법을 이루심이요, 모든 하나님의 법을 이루심이며 그것이 곧 의이다.

피동적 순종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와 형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그가 죽으심은 피동적인 순종이다. 이는 하나님의 작정과 경륜에 의해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희생의 제물이 되도록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속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죽음이 꼭 피동적인 것만이 아닌 것은 그것을 그리스도 자신이 자원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의 값이 지불되고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죽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죄가 그 세력을 상실했다. 예컨대 갚아주기 전에는 빚쟁이가 빚을 재촉하며 독촉한다. 그러나 화해를 하고 빚을 갚으면 되는 것과 같이 죄과가 지불되었으니 죄가 더 이상 세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바울이 로마서 5장과 8장에서 밝힌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가 그 세력을 상실해서 우리가 죄의 지배아래 있지 않으니까 사망의 권세가 죄인데, 사망아래 있지 않다. 속죄는 반드시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순종으로 율법을 지킴과 그리고 죽음으로 대가를 다 지불함이다. 그러니까 죄의 세력이 상실되고 죄의 세력이 상실되면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않는다. 잘 이해를 하고 가서 이제 로마서를 읽고 은혜를 받아 설교를 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속죄는 율법을 순종함으로 의를 획득함과 죄과의 지불이다. 이 두 가지로 속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의를 이룸은 차원적 순종인데, 죽으심은 죄 때문에 죽게 된 작정이므로 피동적이라 한다. 그러나 피동적인 죽음도 완전히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제로 양이 끌려가듯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작정에 자원적인 순종이었다.

3. 속죄의 범위

1) 보편속죄

우리는 보편 구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구원의 방법에 있어  


서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 다는 말인데 객관적인 구원의 기능성을 내가 선택해서 내 것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흔히 예를 들어 은행에 구좌를 설치해 두고 필요한 사람은 갖자 쓰도록 했다. 그 말을 듣고서 믿고 받은 사람은 그 돈을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시원찮게 여겨 믿지 않고 가지 않은 사람은 은행에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가난하게 된다는 것이다. 혹은 수원지에 아무리 많은 물이 있어도 내가 수도꼭지를 돌리지 않으면 갈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에 있어서 자유의지가 있으니 구원을 자기가 임의로 선택하여 받으라고 한다.

하나님은 객관적인 구원을 이루셨지만 누구든지 내 것으로 하는 것은 내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 구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구원의 근거와 가능성을 만드셨으나 실제로 개인 구원은 누구든지 제한 없는 범위로 자신들의 선택에 좌우된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선택에 하나님이 종속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되심이 인간의 선택에 의해 달라진다. 그러니 보편 구원은 자유의지의 강조로 하나님의 주권 성을 박탈한다. 그러므로 캘빈이 이를 적극적으로 배척한 것이다.

2) 제한속죄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민 구원에 종족이 가능하다. 그것은 그 효능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효력은 피택자에게 임한다. 그래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초청장을 보낸 것은 아니지만 작정된 자를 위해 죽으시고 효과를 적용한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택자는 구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하심으로 친히 이일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보편 구원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구원 이루는 주권은 있지만 적용하는 주권은 없게 된다. 그들은 예를 들어 선물을 줄 때 당사자가 거절하면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복음을 전해도 그들이 거절하는 현상을 보면 그 말이 옳은 것 같고, 또한 우리가 믿으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들이 거절한 것은 믿을 수 있는데 거절한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거절한 것이다. 그러면 왜 믿으라고 하는가? 그래도 그 책임은 그들에게 있고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죽은 영혼을 살려내시자 은혜로 믿게 한다.



제한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 구원의 효능이 꼭 속죄 자를 위할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은 아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만민의 구원에 충족하다. 그것은 효능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초청장을 보내시고 다 오라 하신다. 그래도 실제로 잔치에 참여한 피택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 구원의 은혜를 작정한 자들에게 주권적으로 적용하여 은혜가 더욱 은혜 되게 하신다.

3) 불가항력적인 은혜와 견인의 구원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신 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그 구원의 은혜를 성령께서 적용시키신다. 우리가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구원을 알면 도무지 거절할 수 없다.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끝까지 구원한다. 그래서 복음의 도를 깊이 이해하면 다 칼뱅주의가 된다. 모든 성도는 칼뱅주의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가 역사 하는 것을 알게 되어 있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역사라고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가는 꼴이 된다. 은혜를 찾아가면 이방종교이다. 한번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누구도 거부하거나 상실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 상태에 들어가면 한번 은혜 입으면 그 은혜를 중간에 상실하거나 은혜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하신다. 로마 교회는 교회에서 떨어지면 구원에서 이탈한다고 하기 때문에 구원에 확신이 없다. 끝까지 교회 안에서 지내다 죽으면 구원이 있지만 중간에 잘못하다 신부하고 싸우면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죽을힘을 대해서 노력한다. 열심히 있어서 좋으나 그것은 자력 구원의 이단적 체계이다.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신 자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그 구원의 은혜를 성령님께서 적용하여 목표에 이르도록 불가항력적으로 이 일을 이루신다. 누구든지 이 은혜를 거부하거나 놓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견인 구원이다. 오래 참으심으로 그의 미쁘심이 피택자들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적 때문에 은혜 입은 자가 한 번 받은 은혜를 중간에 상실하지 않고 또 은혜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택자로 하   


여금 구원에서 탈락하지 못하도록 붙드신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일이요 죄악은 자유의지로 짓는다. 은혜 받은 일은임으로 할 수 없다. 이것이 개혁신학이고 그 진리만이 참 은혜의 복음이다.

4) 성경을 통해 구약의 예를 보자

초대 왕: 사울은 신정 정치와 왕정 정치를 분리하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왕권을 위태롭게 했다. 사울은 종교와 정치를 분리함으로 종교의 대표자인 제사장을 무시하니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미신적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무시함으로 진노를 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2대 왕: 다윗은 왕정 치와 신정정치를 일치하여 신정이 위태롭지 않게 밀착시켰고 첫 번째 하는 일이 법궤를 자기가 사는 곳으로 모셔 왔던 것이다. 이것이 신정과 자신의 왕정을 밀착시키고 한 번도 자기를 왕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왕 나의 주'라고 했던 것이다. 다윗 전에는 예루살렘이 알려지지 않았다. 왜 예루살렘이 만고불변의 도성으로 알려졌는가? 하늘에도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다윗이 정치를 잘해서가 예루살렘이 유명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소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다윗이 왕이 되어 제일 먼저 신정에 왕정을 밀착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예표론 적으로 시작하고 성경에 입각한 종교에 봉사하므로 특별은혜에로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5) 영아구원

스트롱의 학설이 영아구원을 지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영아구원을 지지한다. 우리는 왜 정죄해야 하는가? 그것은 죄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이론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성경은 한 사람의 죄도 예외 없이 죄인으로 정죄한다. 다윗은 어머니 모태에서부터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인으로 출생하여 죄를 필연적으로 짓는다고 고백했다. 바울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6) 새 인류만이 참 인류이다.

 

 우리는 선택받은 자라고 할 때 몇 사람을 뽑아서 구원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이해에 도달코자 하지만 카이퍼는 새 인류를 나무에 비유해서 인류란 나무가 있는데 마른나무를 재해 버린 인류 그 나머지의 인류가 참 인류라고 했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새 인류의 머리요 독 새 인류이시다.

 제한 속죄라고 해서 여기저기에서 몇 명을 빼내는 그러한 방법이 아니다. 전(全) 인류를 위한 구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 인류가 한 인류를 이룬다. 여기에서 마른 가지 혹은 썩은 가지 즉 불택자를 잘라낸다는 것이다. 기독론을 배운 우리는 이단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제한 속죄를 무서워 말고 하나님과 같이 죄를 무서워해야 할 것이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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