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뻘콥 조직신학(기독론)

하나님아들 2014. 7. 19. 16:03

 

 

 

 

 

뻘콥 조직신학(기독론)

 

루이스 뻘콥 저 고영민 역

 

기독교문사

 

 

 

 

제 1 편

 

 

그리스도의 인격

 

 

I, 기독론의 역사

 

 

A, 인간론과 기독론의 관계

 

 

인간론(anthropology)과 기독론(christology)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간론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고 참 된 지식과 의, 거룩을 부여받았으나 하나님의 율법을 고의적으로 범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참된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죄인으로 변형해버린 사람에 대해 취급하고 있다. 인간론은 사람을 여전히 하나님의 본래적 영광의 어떤 흔적들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최고 특권적인 피조물로 지시하지만 오히려 그 생득(生得權)과 참된 자유 그리고 본래적 의와 거룩을 상실해 버린 피조물로 지시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론이 원래적으로 피조물성(被造物性, creatureliness) 뿐만 아니라 사람의 죄악성(罪惡性, sinfulness)에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윤리적” 거리, 즉 사람의 타락에서 비롯되어 사람이나 천사가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거리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질적으로 신적인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과 같은 것이다.

기독론은 부분적으로 그 부르짖음에 대한 응답이다. 기독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간격을 다리 놓고 그 거리를 제거하려는 하나님의 객관적 사역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조건들을 만족시킴으로써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들을 제거하고 사람을 하나님의 복된 교제에로 회복시키려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로 오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론은 이미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의 생활을 준비하는 사람과의 교제의 언약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준비에 유의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그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만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교리가 필연적으로 뒤따라와야만 한다. 구약에서 사람의 구속자로 예표되고 예언되었던 그리스도는 기약이 차매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거주하시고 영원한 은혜를 이룩하신다.

 

 

B.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론

 

1, 칼세톤 회의까지

 

초대교회의 문헌에서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분, 즉 사람의 아들과 하나니므이 아들로 나타나있다. 그의 무죄성(無罪性)이 주장되고 있으며 또한 그는 예배의 정당한 대상으로 간주되고 잇다.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에 의해 제시된 문제와 이러한 개념에 포함된 난관들은 초대교인들의 마음에 충분히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논쟁에 비추어 인식되었다. 유일신주의(monotheism)를 매우 강조하는 유대교가 초대 유대인 기독자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었다.

에비온파(Ebionites, 또는 그들중의 일부분)는 유일신주의를 위해 그리스도의 신서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한 사람, 즉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메시야의 자격을 얻으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의 교리를 동일한 노선으로 해석하였던 자들이 초대교회에 있었다. 아로기파(Alogi)는 요한의 로고스론이 신약의 나머지 부분과 충돌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의 저서들을 배척하였으며, 또한 예수를 비록 이적적으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을지라도 단순한 사람으로 보고 그가 세례받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에게 강림하여 초자연적 능력을 부여하셨다고 가르쳤다.

동력적 일신론자들(Dynamic Monarchians)들도 대개 이 입장을 취하였다. 그 주요 대표자인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은 예수와 로고스를 구별하였는데, 전자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요. 후자는 비인격적인 신적 이성으로서 그리스도가 세례 받으실 때부터 그 안에 특별한 의미로 거주하시어 그의 큰 과업을 수행할 자격을 그에게 부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신성의 교리를 변호하는 것은 초기 변증가들의 한 과업이었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위해 신성을 희생한 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그 순서를 바꾼 자들도 있었다. 그노시스파(Gnostics)는 본래적으로 사악한 물질의 영(靈)에 전적으ㅗ 반대된다고 생각한 헬라인들의 이원론적 개념과 또한 지상의 사물들을 큰 우주적 과정의 우화적인표현들(allegorical representations of great cosmic redeeming processes)로 간주하려는 신비적인 경향으로 말미암아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성육신, 즉 하나님이 유형적인 형태로 현현하셨다는 개념을 거부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영과 물질의 직접적인 접촉을 함의하였기 때문이다. 하르낙(Harnack)은 그들 중 대부분이 그리스도를 성부와 동질(同質)인 성령으로 간주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인간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그에게 강림하셨다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이전에 그에게서 떠낫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단순히 환영적(幻影的)인 실체를 취하셨다고 생각하였다.

형상적 일신론자들(Modalistic Mornarchians)도 역시 한 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위해 한편으로는 신적 실유(實有)의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인성(人性)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이 인격들의 구별을 인식할 수 없는 다만 한 분 하나님의 어떤 형체 또는 현현으로 보았다.

반(反) 그노시스적(Anti-Gnostic)적인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변호하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그들의 변호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성부에서 종속된 것으로 표현하는 오류에서부터 전혀 탈피하지 못하였다. 터툴리안(Tertullian)도 일종의 종속(從屬)을 가르쳤지만, 특별히 “본체”에 관해 종속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오리겐(Origen)도 그러하였다. 이것는 아리안주의(Ariansm)의 디딤돌이 되었는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신적 이성(divine reason)인 로고스와 구별하였으며 또한 이전 시간적(pre-temporal)이고 초인간적인 피조물, 피조물들 중의 첫째, 하나님은 아니지만 사람보다는 높으신 분으로 표현하였다. 아다나시우스(Athanasius)는 이라우스(Arius)와 논쟁하였으며 또한 성자가 성부와 동등한 본질이며 본체라는 입장, 즉 321년에 니케아 회의에서 공적으로 채용된 입장을 강력히 변호하였다. 반(反) 아리안주의(Semi-Arianism)는 성자가 성부와 “유사한”본체라고 선언함으로써 “중간 노선”(via media)을 제안하였다.

성자의 신성이 교리가 공적으로 확립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두 가지 성질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관계에 대한 의문이 자연적으로 제거되었다.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는 문맥의 해결점을 제공하였다. 그는 사람이 신(身), 혼(魂), 영(靈)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헬라의 삼분적(三分的)인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로고스가 사람 안에 있는 영(πνευμα)을 대신하셨다(그는 영을 죄의 좌소로 보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성을 희생함이 그 안에 있는 인격의 단일성을 확보하며 그의 무죄성을 수호하였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입장은 381년에 콘스탄티노풀 회의에서 명백하게 정죄되었다. 아폴리나리스가 논쟁한 요점들 주의 하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인격의 단일성이었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위험에 처하였다는 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두 가지 성질들의 구별을 과장하였던 안디옥 학파가 취한 입장에서 매우 현저하게 되었다.

몹쉐스티아의 데오도래(Theodore of Mopsuestia)와 네스토리우스(Nestorius)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manhood)를 강조하였으며 또한 그 안에 로고스의 내주(內住)를 비록 동일한 정도는 아니지만 신자들도 누리는 바와 같은 단순한 도덕적 내주(moral indwelling)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목적에 참여하는, 하나님과 연합된, 하나님과 결부된 사람으로 보았지만, 단일한 인격적 생활의 유일성(oneness)에 있어서 그와 하나인 자, 즉 두 인격으로 구성된 중보자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들에 반대하여 알렉산드리아의 키릴(Cyril of Alexandria)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격의 단일성을 가조하였으며 또한 그의 반대자들이 생각으로는 두 가지 성질들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추측컨대 그에 대하여 오해한 것 같지만, 유티쿠스(Eutychus)와 그의 추종자들은 분명히 그에게 항소하였는데,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다거나 두 성(性)이 단일한 성으로 혼합되었다는 입장, 즉 그리스도안에 있는 두 가지 성질에 대한 부인을 포함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칼세톤 회의(451년)는 이러한 견해들을 정죄하였으며 또 한 성질들의 이중성(duality of the natures)과 마찬가지로 인격의 단일성(unity of the person)을 주장하였다.

 

2, 칼세톤 회의 이후

 

얼마동안 유티키안적(Eutychian)인 오류는 일성론자(一性論者, the Moonophsites)에 의해 계속되었지만, 결국에는 교회에 의해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의 ㅇ니성이 온전히 비인칭적인 것으로 간주될 보다 큰 위험은 비잔티움의 레온티우스(Leontius of Byzantium)에 의해 미연에 방지되었다는데,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비인격적(impersonal)이 아니라 인격 안에(in-personal)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 안에 그 인격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동방교회의 기독론은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에게서 최고의 발ㅈ너을 보았는데, 그는 그리스도안에 신성과 인성의 결합(circumincession), 즉 인적 성질에로의 신적 속성들의 전달(communication)이 있으며 다라서 후자는 신성화(神聖化)되어 우리가 하나님은 육신적으로 고난을 받으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는 개념을 첨가하였다. 그는 인성을 로고스의 단순한 기관이나 도구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지만, 오히려 두 성(性) 사이에는 협력이 있다는 것과 또한 인적인 의지는 언제나 신적 의지에 예속되지만 한 인격이 각 성(性)으로 행동하고 의지한다 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서방교회에서는 우르겔라(Urgella)의 감독(監督) 휄릭스(Felix)가 양자설(養子說, adoptionism)을 변호하였다. 그는 신성으로는 그리스도, 즉 로고스를 장녀적 읜미에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 간주하였지만, 그의 인간편으로는 그리스도를 단순히 양자에 의한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잉태되실 때로부터 사람의 아들(인자)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의 당일성(통일성)에로 취해졌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인격의 단일성을 보전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적인 자격(子格, sonship)과 양자적인 자격 사이가 구별지워졌으며 그리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장녀적 탄생에서 시작하지 않았지만 그가 세례받으실 때에 시작되엇고 부활 시에 완성되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만든 것은 영적인 탄생이었다. 교회는 이 견해로 말미암아 다시 한번 그리스도 안에 인격의 단일성의 위험에 직면하였으며, 따라서 이 견해는 794년에 프랑크폴트의 교칙(the Synod of Frankfort)에 의해 정죄되었다.

중세기에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에 거의 아무 것도 첨가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모방에 대한 강조, 속죄의 이론들 그리고 미사(mass)의 교리의 발전과 같은 다양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간성을 굳게 보존하였다. 맥킨토쉬(Mackintosh)는 “그리스도의 신성(deity)은 오히려 인간의 행동과 열정을 유한한 가치에로 무한히 협동적으로 들어 올리는 것으로 고려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스콜라주의자들은 그들의 기독론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도케데적(docetic)인 견해를 나타내었다. 롬바르드 피터(Peter the Lombard)는 그리스도가 그의 인성에 관한한 전혀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러나 이 허무주의(Nihilism)는 교회의 정죄를 받았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몇가지 요점들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로고스의 인격은 성육신에서 합성적(composite)이 되었으며 그것의 인성과 연합은 후자를 독립적인 인격성(personality)에로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로고스와의 연합의 효능으로 이중적인 은혜를 받았는데, (a)“일회적 은혜”(gratia unionis)는 인성에게 특별한 위엄을 부여하여 그것까지도 예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한 (b)“지속적 은혜”(gratia habitualis)는 이것을 그것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속시켰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지식은 이중적이었는데, 즉 주입된 지식(infused knowledge)과 획득된 지식(aquired knowledge)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가지 의지들(wills)이 있지만, 궁극적 인과관계(ultimate causality)는 신적 의지에 속하며 인적 의지는 언제나 예속되는 신적 의지에 속한다.

 

 

C,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론

 

 

1, 19세기까지

 

 

종교개혁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교리에 어떤 큰 변화도 가져오지 않았다.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는 둘 다 칼세톤 회의에 의해 공식화(公式化)된 기독론에 찬동하였다. 그것들의 충요하고 뿌리 깊은 차이들은 다른 곳에 있었다. 특별히 유의해야할 루터파의 기독론의 한 특색이 있다. 그리스도가 성만찬에 육체적으로 임재 하신다는 터의 교리는 특별히 “특성들의 전달”(communicatio idiomatun)에 대한 루터파 견해에로 인도하였는데, 그 요지는 “그리스도의 각 인성(人性)이 다른것(perichoresis)에 침투하며 또한 그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속성들에 참여한다”(Neve, Lutheran Symbolics, p. 132). 전능이나 전지, 편재의 속성들은 성육신 때에 그리스도의 인성에로 전달되었다고 주장된다. 자연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은,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루터파 신학자들 사이에 의견상의 차이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성육신에서 받으셨던 신적 속성들을 포기하셨거나 또는 그것들을 단지 경우에 따라 종종 사용하셨다고 주장하였지만, 어떤 사람은 그가 그의 모든 지상생활 가운데 계속적으로 소유하셨으나 그것들을 감추시거나 다만 은밀하게 사용하셨다고 말하였다. 어떤 루터파는 지금 이 교리를 포기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혁파 신학자들은 이 루터파 교리를 일종의 유티키안주의(Eutychianism)나 그리스도의 이성(二性) 혼합으로 보았다. 개혁파 신학도 역시 속성들이 전달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 신학은 성육신 이후에 두 성질의 특성들이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로 귀속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의 인격은 전지하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제한된 지식을 가지신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편재(偏在)하신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특수한 시간에 어떤 단일한 처소에 제한되어 계신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특수한 시간에 어떤 단일한 처소에 제한되어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2헬베틱 고백서(The Second Helvetic Cofession)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분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안에 두 가지 성질,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서로 연결되고 연합되었기 때문에 삼키워지거나 혼동되거나 서로 섞이지 않고 다만 한 인격 안에 함께 연합되거나 결합되었다(각 성질의 특성들은 안전히 있으며 종용히 남아 있으면서)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둘이 아니고 한분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를 예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신성이 수난을 받았거나 또는 그리스도가 그의 인성을 따라 여전히 세상에 계시며 따라서 매 곳에 계신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가르치지도 않는다.”(XI장).

 

2, 19세기에

 

19세기 초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연구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 때까지는 그 출발점이 주로 신론적(theological)이었으며 또한 결과적인 기독론은 하나님 중심(theocentric)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엽에 보다 더 밀접한 발상지, 즉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로써 보다 나은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제2의 기독론 시대”가 찾아왔던 것이다. 새로운 관점은 인론적(anthropological)이었으며 또한 그 결과는 사람 중심(anthropocentic)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신아을 파괴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복음서 자자들의 묘사한 역사적 예수와 또한 신학적 사상가들의 풍부한 상상의 열매로서 그 형상이 지금 교회의 신조들에 반영되어 있는 신학적 그리스도 사이에는 광범위하고 유해한 구별이 지어졌다. 초자연적인 그리스도는 인간 예수에게 길을 터주었으며(양보하였으며), 또한 두 성질들의 교리는 신적 인간의 교리를 위해 길을 마련해 주었다.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는 새로운 발전의 선두에 섰다. 그는 그리스도를 인성이 이상적 완성의 수준에로 올리워진 하나의 새 창조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그의 그리스도는 인적 수준 이상에 오르셨다고 말할 수 없다. 그의 인격의 독특성은 가가 완전하고 끊임없는 신성과의 연합의식(sense of union)을 소유하시고 또한 그의 무죄하신 완전성의 성격에서사람의 운명을 충분히 실현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있다. 그의 최고 위엄은 그 안에 하나님의 특별 임재, 즉 그의 독특한 하나님 의식(God-consciousness)에 의하여 설명된다.

헤겔의 기독관은 그의 범신론적 사고방식의 일부분이었다. 육신이되신 말씀(성육신)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인성으로 성육신하신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성육신은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단일성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마도 단순한 인류 과정의 결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인류는 대개 예수를 단지 하나의 인간적 선생으로서만 간주하지만, 신앙은 신적인 선생으로 인정하며 또한 그가 세상에 오심으로서 하나님의 초월성이 내재성으로 변화된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리에서의 인성과 신성의 범신론적 동일성을 대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 중의 어떤 것이 케노시스적(Kenotic) 이론들 가운데서 보여지는데, 이 이론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교리의 체계를 진보시키려는 괄목할만한 시도를 나타내고 있다. <케노시스>(κενωσις) 또는 용어는 빌2:7에서 유래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εκενωσεν)”고 가르치고 있다. 케노시스주의자들은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곧, 로고스가 문자적으로 그 자신을 사람의 차원에로 축소하심으로써(약화시킴으로써)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사람이 되셨다. 즉 사람으로 변화되셨으며 그 다음에 결국 그가 하나님이 또 다시 될 때까지 지혜와 능력이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으며, 그 중에서 가장 절대적인 것은 게스(Gess)의 것이며 또한 잠시 동안 널리 호평을 받았다. 그것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제성과 위엄을 유지시키는데 있었으며 또한 그가 부요하시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그의 수치의 위대성을 선명하게 나타내는데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경계성을 범시론적으로 삭제하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중재학파(仲裁學派, Mediating sch00l)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였던 도르너(Dorner)는 이 견해를 강력히 반대하였으며, 그 대신에 점진적 성육신(progressive incarnation)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에 대한 특별한 수용성(受容性)을 가진 인성으로 보았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 수여(self-bestowal)의 원리인 로고스는 자신을 이 인성에 연합하셨으며, 그가 이것을 행하신 정도는 신성을 위한 인성의 점진적 수용성(ever-increasing receptivity)에 의해 매 계단에서 결정되었으나 부활 때까지 그 마지막 계단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옛 네스토리안적인 이단의 새롭고 간교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두 인격으로 구성된 그리스도를 포기하고 있다.

현대신학에서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와 더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알브레히트 리출(Albreeht Ritschl)이었다. 그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격보다는 그의 사역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의 인격의 위엄을 결정하고 있다. 그는 한낮 사람에 불과하였지만, 그가 성취하신 사역과 수행하신 공적을 볼 때 우리는 그에게 신격(Godhead)의 속성(predicate)을 정당하게 돌릴 수 있다. 그는 선재(先在)와 성육신,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기각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기독교인의 단체의 신앙적 의식에서 접촉점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창설자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그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으며 또한 지금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기독교인의 단체에 가입토록 하며 사랑에 의해 전적으로 야기된 생애를 보내게 하신다. 그는 자신의 교훈이나 모본, 독특한 영향력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며 따라서 하나님으로 불리우시기에 합당하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의 교리를 갱신한 것이다.

하나님의 내재성에 관한 범신론적 개념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의 교리는 오늘날 종종 철저하게 자연론적인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 표현들은 매우 다양할 수 있지만, 그 근본적인 개념은 동일하니 즉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적인 동일성의 개념이다. 그리스도의 두 성질의 교리는 현대신학에서 사라지고 그 대신에 하나님과 사람의 범신론적인 동일시(identification)가 나타났다. 본질적으로 모든 사람들은 신적이다. 그 이유는 그들 모두가 그들 속에 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지 정도에 있어서만 그리스도와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현대의 교훈은 모두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속(continuity)의 교리에 기초되어 있다. 그리고 바르트(Barth)와 또한 그와 동일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정확하게 이 교리를 대항하여 소리를 높혔다. 오늘날 이성(二性)의 교리에로 돌아오는 조짐 이 일단의 신학계에 일어나고 있다. 믹클렘(Miclem)은 그의 저서(What Is the Faith?)에서 자기는 여러해 동안 그리스도의 한 인격안에 두 성질이 있다는 교리는 포기되어야만 한다고 자신있게 단언하였으나 지금은 이것이 오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p.155).

 

 

 

II, 그리스도의 명칭과 성질

 

 

A, 그리스도의 명칭

 

이 점에 있어서 간단한 논의를 요하는 특히 다섯가지의 명칭들이 있다. 그것들은 그의 성질과 직무적 위치, 그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사역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1, 예 수

 

<예수>라는 명칭은 히브리어<예호수아>(יהושׁוע 수1:1, 슥3:1) 나 <예수아>(ישׁוע 예수아, 포로 이전 역사서의 일반형)의 헬라어형이다. 구세주를 나타내는 이 일반적 명칭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분명치 않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의견은 이 단어가 어근 <야사>(הושׁיע, hiph.ישׁע “구원하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지만, 어떻게 <예호수아>가 <예수아>로 되었는가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부정사에서 비롯된 <호세아>(הושׁע) 가 원형인 것같이 보이며(cf.민13:8, 16, 신32:44). 단순히 구속의 개념을 나타낸다. 미완료의 표식인 <요드>( י )는 구속의 확실성을 나타내기 위해 첨가 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마1:21에 주어진 이름의 해석과 가장 잘 일치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예호>(יהו ,여호와) <수아> (שׁוע, 도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cf. Kuyper, Dict. Dogm. De Christo, I, pp. 56 f). 그 명칭은 구약에서 두 개의 잘 알려진 예수의 전형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2, 그리스도

 

만일 예수가 메시야의 개인적 명칭이라면, 그리스도는 공적인 명칭이다. 이 명칭은 구약<마쉬아흐>(םשׁח ,משׁיח ,“기름부음을 받다”에서 유래)와 도일하며, 따라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한다. 왕과 제사장들은 일정하게 구약 세대동안에 기름부음을 받았다(출29:7, 레4:3, 삿9:8, 삼상9:16, 10:1, 삼하19:10). 왕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불리웠다(삼상19:16). 예언자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단하나의 실 예가 왕상19:16에 기록되어 있으며 아마도 그것에 대한 언급이 아마도 그것에 대한 언급이 시105:15과 사61:1에 있다. 이러한 임직자들에게 기름 부을 때 사용된 기름은 하나님의 성령을 상징하였으며(사61:1, 슥4:1-6) 또한 기름을 붓는 것은 성령이 성별된 인물에게 임하는 것을 나타내었다.

기름을 붓는 것은 (a) 직분에 임명되는 것이나 (b) 기름받은 자의 거룩한 관계가 성립되거나 그 결과적인 신성 불가침(삼상24:6, 26:9, 삼하1:14) 또는 (c) 성령이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 임하는 것(삼상16:13, cf. 역시 고후1:21,22)의 유형적인 표식이었다. 구약은 시2:2, 45:7에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신약은 행4:27과 10:38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것에 대한 이전의 언급들은 역시 2:6과 잠8:23에서 발견되었지만, 오늘날 히브리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에 사용된 <나사크>(נסך)는 “기름을 붓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세운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기름 붓는 것에 상징화된 첫 번째 것의 실제성을 가리키고 있다(cf. 역시 사11:2, 42:1).

그리스도는 여원 전부터 그의 직위에 세움을 받으셨거나 임명을 받으셨지만, 역사적으로 그가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을 때(눅1:35)와 특히 세례시 성령을 받으셨을 때(마3:16, 막1:10, 눅3:22, 요1:32, 3:34)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그의 큰 과업을 수행하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셨다. “그리스도”라는 명칭은 처음에 관사를 가진 보통명사로 주님께 적용되었지만, 점차적으로 고유명사로 발전하였고 관사 없이 사용되었다.

 

3, 사람의 아들(인자)

 

구약에서 이 명칭은 시8:4, 단7:13에서와 종종 에스겔의 예언에서 보여 진다. 이 용어의 신약적 용법이 다니엘서에 있는 구절에 의거되어있다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이 구절에서 그것은 단순히 묘사적인 구절이요 하나의 칭호는 아니었다.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진 것은 후대에 있었으며, 에녹서가 기록되었을 때는 이미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다. “인자”라는 명칭은 40회 이상이나 사용하셨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아니하였다. 복음서에서 단 하나의 유일한 예외는 요12:34에 있는데, 이 구절에는 인자라는 명칭이 예수님의 말씀의 간접 인용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는 스테반과 요한이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행7:56, 계1:13,14:14).

보스(Vos) 박사는 그의 저서(The Self-Disclosure of Jesus)에서 이 명칭이 나타나는 구절들을 4부분으로 나누고 있다. (a) 인자의 종말론적인 도래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잇는 구절들이(마16:27,28, 막8:38, 13:26등) (b) 특히 예수의 수난과 죽음, 부활(때때로)에 대해 언급하고 잇는 구절ㄷ글(마17:22, 20:18,19. 28, 12:40 등) (c) 하늘의 초인간적인 면과 예수의 선재성이 강조된 제4복음서(요한복음)에 있는 구절들(1:51, 3:13, 14, 6:27, 53, 62, 8:28 등) (d) 예수께서 그의 인간서을 반영하시는 몇 구절들(마2:27,28, 요5:27, 6:27, 51,62).

예수님이 왜 이명칭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는가를 단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전에 이 명칭은 일반적으로 신비적인 칭호로 간주되었으며, 예수께서는 이 칭호를 사용하심으로써 그의 메시야직을 계시하시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가리우려고 하셨다. 이 설명은 보다 큰 유의가 복음서에 있는 종말론적 요소와 유대인들의 계시문학에 있는 명칭의 사용에 집중되었을 때 폐기되었다. 달만(Dalman)은 그 개념을 부활하였으며 또한 그 칭호가 한 번 더 “메시야적 성격을 지닌 자의 인성을 확인하는 칭호하에 그 성격의 고의적인 가리움(veiling)” 으로 간주되었다(Words of Jesus, p. 253). 이렇게 추상 하게 된 증거는 마16:13, 요12:34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 증거는 의심스럽다. 요12:34도 백성이 그 명칭을 메시야적으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보스 박사는 예수께서 그 명칭을 사용하려고 하신 것은 아마도 그것이 메시야적에 대한 모든 가능한 유대적인 타락에서 멀리 옮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인자로 부름으로써 메시야직에 그 자신의 하늘 중심적 영(heaven-centered spirit)을 분여(分與)하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와같이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들어올리신 높이는 그의 초기 추종자들이 그를 모든 칭호들 중에서 가장 천계적(天啓的, celestial)인 것으로 부르기를 주저했던 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4,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구약에서 여러 가지로 적용되었는데, 즉 (a) 이스라엘 백성(출4:22, 렘31:9, 호11:1)과 (b)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관리들에게, 특별히 다윗집의 약속된 왕(삼하7:14, 시89:27) (c) 천사들(욥1:6, 2:1, 38:7, 시29:1, 89:6) 그리고 (d) 일반적으로 경건한 백성(창6:2, 시73:15, 잠14:26)에게 적용되었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 명칭은 신정적(神政的)인 의미를 획득하였다. 신약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이 명칭을 전용(專用)하셨고 다른 사람들도 그 이름으로 예수님을 불렀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명칭은 4가지 다른 의미로 예수님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언제나 성경에서 구별되지는 않지만 때로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그에게 적용되고 있다.

 

a, 직임적 또는 메시야적 의미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질보다도 오히려 그의 직임(office)의 묘사로서 사용되고 있다. 메시야는 하나님의 후사 또는 대표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워 질수 있다. 마귀는 분명히 그 명칭을 예수님에게 적용할 때 그것을 메시야적으로 이해하였다. 이 명칭은 역시 마24:36, 막13:32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갖고 있는 듯 하다. 예수의 세례와 그의 변화시에 음성으로 들려왔던 이 명칭(마3:17, 17:5, 막1:11, 9:7, 눅3:22, 9:35)을 그렇게 번역될 수 있지만, 아마도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메시야적인 의미가 삼위일체적 의미와 결부된 몇 구절들이 있다(아래의 (b)항을 참조하라).

 

b,삼위일체적 의미로

 

그 명칭은 종종 그리스도의 본질적 신성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다. 그 자체는 선재적(先在的)인 자격(子格, sonship)을 지시하고 있는데, 이 자격은 절대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간생활과 메시야로서의 그의 직임적 소명을 능가하고 있다. 이 용법의 실 예들은 마11:27, 14:28-33, 16:16 과 그 병행구절들에서 발견된다. 이러한 경우들 중의 어떤 것에서 메시야적 자격의 개념은 역시 보다 더 혹은 덜 들어있다.

제4복음의 몇 구절에서도 존재론적 자격과 메시야적인 자격이 연합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은 비록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실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명백히 암시하고 있다(요6:69, 8:16,18,23, 10:15,30, 14:20 등). 서신들에서 그리스도는 종종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표현되고 있다(롬1:3, 8:3, 갈4:4, 히1:1, 그 외 많은 구절들). 현대 자유신학에서는 관례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이상학적 자격(metaphysical sonship)을 부인하고 있다.

 

c, 탄생적(nativistic) 의미로

 

그리스도는 역시 그의 초자연적 탄생의 효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우고 있다. 그 명칭은 누가복음에 잇는 잘 알려진 구절에서 그렇게 그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그 구절에서 그의 인성의 기원은 하나님의 직접적, 초자연적 부성(父性, paternity)에 돌려지고 있다(눅1:35). 보스(Vos)박사도 역시 이 명칭의 의미에 대한 암시를 마1:18-24, 요1:13에서 찾고 있다. 자연적으로 이 명칭의 의미는 역시 현대 자유신학에 의해 부인되고 있는데, 자유신학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새이나 초자연적인 잉태를 믿지 않는다.

 

d, 윤리적-종교적 의미로

 

“하나님이 아들들”이나 “자녀”라는 명칭은 신약에서 윤리적, 종교적 의미로 신자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이 마17:24-27에서 윤리적, 종교적 의미로 예수님에게 적용된 실예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베드로가 여기에서 성전세를 면세받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지 여부에 의거되고 있다. 현대 자유신학은 특별히 이러한 의미로 그 명칭을 예수님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 신학은 예수의 자격이 단지 윤리적, 종교적 자격에 불과하며 이 자격은 실로 다소 높혀지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제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5, 주(κυριος)

 

“주”라는 명칭은 70인역에서 하나님에게 다음과 같은 것으로 적용되고 있는데, 즉 (a) 여호와와 도일한 명칭. (b) <아도나이>(אדנ)에 대한 표현. (c) 하나님에게 적용된 인간의 경의적 칭호에 대한 번역(주로 אדו )으로 적용되고 있다(수3:11, 시97:5). 신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다소 유사하게 삼중적으로 적용될 명칭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a) 정중하고 경의적인 인사의 형식(마8:2, 20:33)으로 (b) 소유권과 권위의 표현으로 적용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신적인 성격이나 권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마21:3, 24:42). (c) 승귀된 성격을 표현하는 최고의 권위적 의미로 적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명칭과 동일하다(막12:36,37, 눅2:11, 3:4, 행2:36, 고전 12:3, 빌2:11).

어떤 경우에 그 성호의 정확한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께서 승귀(承貴)되신 후 그 명칭을 일반적으로 가장 높혀 진 의미에서 그에게 적용되었다. 그러나 이 명칭이 부활 이전에도 그러한 특수한 신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실 예 들이 있다(마7:22, 눅5:8, 요20:28). 예수님에게 적용된 이 칭호의 기원과 발전에 관하여 학자들 사이에 견해상 많은 차이가 있다. 모든 것이 모순된 것으로 진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게 적용된 이 명칭의 사용은 구약에 근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개념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불변적인 요소가 있으며 또한 그것은 “권위적인 소유권”의 요소이다. 바울 서신들은 그것이 “이전에 획득된 권리들에 의거된” 권위와 소유권이라는 첨가된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 요소가 이미 복음서에 있는지의 여부는 의심스럽다.

 

 

 

B, 그리스도의 성질

 

 

교회는 초기 시대부터, 보다 특별히 칼케톤 회의 이후로 그리스도의 두 성질(본성)의 교리를 공언 하였다. 이 회의는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적인 사람에 의해 제출된 문제를 풀지 못하였으며, 다만 잘못된 것으로 분명히 인정된 어던 그릇된 해결책을 막기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일위이성(一位二性, 한 인격안에 두 성질을 가짐)의 교리를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그것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슴에 의해 계시된 신비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교리는 그 후 인적이해를 초월하는 하나의 신앙의 신조로 교회에 남아 있었다. 이 교리에 대한 합리주의자들의 공격은 전적으로 없지는 않았지 만, 교회는 그것이 종종 이성에 모순되는 것으로 공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리의 고백에 있어서 확고 불변 하였다. 이 신졸르 공언함에는 로마 카톨릭교와 개신교가 어깨를 나란히 한다.그러나 18세기의 후반부로부터 이 교리에 대해 계속적인 공격이 가해졌다. 이성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또한 그 교리는 인간 이성에 분명히 모순되었던 성경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에게 무가치한 것으로 선포되었다. 그 자체가 이 새로운 중재자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던 것은 단순히 그릇된 것으로 선포되었다.

개체주의적(Individual)인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성(二性)의 교리에 대신할 만한 것을 교회에 제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제출된 문제를 해결하는데 부심하였다. 그들은 인간 예수에게서 출발하였으며 또한 고심하여 연구한 결과 예수는 단지 그 안에 신적 요소를 가진 한낮 사람에 지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그를 그들의 주나 하나님으로 인식하지는 못하였다. 슐라이어막허(Schleiermacher)는 최고의 신의식(神意識)을 가진 사람으로, 리츌(Ritschl)은 하나님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웬트(Wendt)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계속적인 내적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베이살락(Beyschlag)은 하나님이 채워진 사람으로, 산데이(Sanday)는 잠재의식 속에 신성의 유입(流入)을 지닌 사람으로 말하고 있다.-그러나 그리스도는 단순히 하나의 사람이시며 또한 사람으로 머물러 계신다.

오늘날 하르낙(Harnack)에 의해 제창된 자유학파, 바이스(Weiss)와 슈바이쳐(Schweitzer)의 종말론적인 학파, 부셑(Bousset)과 키르솝 레이크(Kirsopp Lake)에 의해 주도된 보다 근래의 비교종교학파는 한가지로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참된 신성을 박탈하고 그를 인간의 차원에로 끌어내리는데 일치하고 있다. 첫 번째 부류에게 있어서 우리 주님은 단순히 하나의 위대한 윤리적 선생에 지나지 않으며 또 한 두 번째에게는 계시적인 예언자, 세 번째에게는 승귀된 신의(神意)에 따른 비할데 없는 지도자에 불과하다. 그들은 교회의 그리스도를 헬레니즘(Hellenism)이나 유대주의(Judaism) 또는 두 개가 결합된 사상의 창조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전 세기의 인식론(認識論, epistemology)은 의심이 되고 있으며 또한 궁극적 진리의 해석에 대한 인간 이성의 충죽성(sufficiency)은 진지하게 의문시되고 있다.

계시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있다. 바릍(Barth)나 부룬너(Bruner), 에드윈 류이스(Edwin Lewis), 나다니엘 믹클렘(Nathaniel Micklem)과 같은 영향력 있는 신학자들은 이성(二性)의 교리에서 한번 더 신앙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있다. 칼케톤 회의에서 형식화되고 현재 우리의 고백 표준서(Conf. Belg. , Art, XIX; Heidelberg Cat. , Qs. 15-18; Canons of Dott II, Art. IV)에 포함되어 있는 바 대로의 이 교리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성격적 증거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폭넓은 부정이란 견지에서 볼 때 그것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철저히 깨달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 증거는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그 누구도 이 요점에 대한 어떠한 의심도 마음에 품을 수 없다. 신적 명칭들과 신적 속성들, 신저 사역들 그리고 그에게 돌려진 신적 명예에서 비롯된 성경적 증거들의 통상적인 분류를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한 장(章)에 대하여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다소 상이한 배열이 여기에서 역사적 비평주의의 추세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행해지고 있다.

 

a, 구약에서

 

어떤 사람은 구약이 신적 메시야의 예언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경향을 나타내었으나 이 부정은 다음의 구절들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지지될 수 있다. 즉 시2:6-12(히1:5), 45:6,7(히1:8,9), 110:1(히1:13), 사9:6, 렘23:6, 단7:13, 미5:2, 슥13:7, 말3:1). 최근의 몇몇 역사학자들은 초인간적 메시야의 교리는 기독교 이전의 유대주의에 본래부터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유대교에서 신약 부분들의 초자연적 기독론을 발견하기까지 한다.

 

b, 요한과 바울의 기록에서

 

요한과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가르쳤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임이 알려졌다. 요한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가장 높은 견해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 나타나고 있다. 요1:1-3, 14, 18, 2:24, 25, 3:16-18, 35, 36, 4:14, 14, 5:18, 20, 21, 22, 25-27, 11:41-41, 20:28, 요일1:3, 2:23, 4:14, 15, 5:5, 10-13, 20, 비슷한 견해가 바울서신과 히브리서에 보여진다. 롬1:7, 9:5, 고전1:1-3, 2:8, 고후5:10, 갈2:20, 4:4, 빌2:6, 골2:9, 딤전 3:16, 히1:1-3, 5, 8, 4:14, 5:8 등.

비평학자들은 이러한 기록들에 다양한 방법으로 분명히 교훈된 교리를 회피하려고 하였는데, 예를 들면 요한복음의 역사성과 많은 바울서신의 신빙성을 부인함으로써, 요한과 바울 그리고 히브리서의 표현들을 보증 받지 못한 해석들로 간주함으로써(특히 필로적인 로고스 교리의 영향하의 요한이나 히브리서의 경우나 동일한 영향 또는 기독교 이전 유대교의 견해의 영향하의 바울의 경우에), 요한에게서 발견된 보다 더 낮은 개념, 즉 그리스도를 선재적(先在的)이고 천적(天的)인 사람이라는 개념을 바울에게 돌림으로써 회피하려고 하였다.

 

e, 공관복음에서

 

어떤 사람들은 공관복음이 단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사복음서의 이상적 모습과 대조된 인간, 즉 참된 역사적 예수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요한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참으로 신적이라는 사실은 전혀 명백하다. 그는 일관적으로 초자연적인 사람, 즉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로 뛰어나신다. 그의 성격과 사역은 그의 주장을 정당화시킨다. 특히 다음의 구절들에 유의하라. 마5:17, 9:6, 11:1-6, 27, 14:33, 16:16, 17, 28:18, 25:31이하 그리고 많은 유사 병행구절들, 위필드(Warfield)박사의 저서(The Lord of Glory)는 이 점에 대해 매우 훌륭한 참고서이다.

 

d, 예수님의 자의식(自意識)에서

 

최근에 “예수님의 자의식(self-concionsness)에로 돌아가서 그가 메시야나 하나님이 아들임을 의식하셨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자연히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 이 예수님의 의식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가질 수 없다. 또한 그것들이 정확하게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였다는 것을 언제나 부정할 수는 있다. 복음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의식하신 사실에 대하여 의심할 수 없다. 다음의 구절들은 이 사실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마11:27(눅10:22), 21:37,38(막13:32), 28:19. 이러한 구절들 중의 어떤 것은 그가 가장 승귀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식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그가 삼위일체 중의 첫 위격을 ”내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는 몇 구절들이 있다. 즉, 마7:21, 10:32, 33, 11:27, 12:50, 15:13, 16:17, 18:10, 19, 35, 20:23, 25:34, 26:29, 53, 눅2:49, 22:29, 24:49. 요한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의식이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 더욱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즉 요3:13, 5:17,19-27, 6:37-40, 57, 8:34-36, 10:17, 18, 30, 35, 36 등.

 

 

2,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 대한 성경적 증거

 

 

그리스도의 인성의 실제성(그노시스주의)과 “자연적” 위엄성 (도케티주의, 아포리나리안주의)가 부정되었던 때가 있었지만, 현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 대해 참으로 의문시 하는 사람이 없다. 사실상 오늘날에는 그의 진정한 인성에 대한 극단적인 강조, 다시 말하면 항시 증거하는 인성론(humanitarianism)이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귀속시키는 유일한 신성은 단순히 그의 완전한 인성의 그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현대적 경향은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일방적 강조를 부분적으로 항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신성에 대한 그들의 존경에 있어서 인간적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스도의인간적 발전과 제한들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인성의 실제성과 위엄성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의 신성의 광채는 그의 참된 인성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한도에까지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람으로 지칭하셨으며 또한 다른 사람에 의해 그렇게 불리우셨다(요8:40, 행2:22, 롬5:15, 고전15:21). 그의 가장 일반적인 지칭인 “인자”는 그 의미가 어떠한 것이었든지 간에 분명히 예수님의 진정한 인성을 지시하고 있다. 더욱이 주님은 육신으로 오셨거나 나타나셨다(요1:14, 딤전3:16, 요일4:2). 이러한 구절들에서 “육신”이란 용어는 인성을 나타낸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이 인성의 본질적 요소들, 즉 물질적 유신과 이성적 영혼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마26:26,28,38, 눅23:46, 24:39, 요11:33, 히2:14). 예수님은 인적 발전의 통상적 법칙들 그리고 인적 궁핍과 고난들에 예속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들도 있다(눅2:40,52, 히2:10,18, 5:8). 인생의 정상적 경험들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이 세밀하게 명시되고 있다(마4:12, 8:24, 9:36, 막3:5, 눅22:44, 요4:6, 11:35, 12:27, 19:28, 30, 히5:7).

 

 

3, 그리스도의 무죄하신 인성에 대한 성경적 증거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자연적이고 도덕적인 위엄 또는 도덕적 완전, 즉 무죄성을 돌리고 있다. 이것은 다만 그리스도가 능히 범죄를 피할 수 있으셨으며(potuit non peccare) 또한 실제로 피하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또한 인성과 신성 사이의 본질적 유대 때문에 범죄할 수 없으셨다(non potuit peccare)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무죄성은 여러학자들(Martineau, Irving, Menken, Holsten, P. fleiderer)에 의해 부정되었지만, 성경은 분명히 다음의 구절들에서 그것에 대해 입증하고 있다. 즉 즉 눅1:35, 요8:46, 14:30, 고후5:21, 히4:15, 9:14, 벧전2:22, 요일3:5).

그리스도는 사법상으로는 범죄한 자가 되었지만 윤리적으로는 유전적인 타락과 본래적인 죄로부터 자유하셨다. 그는 결코 도덕적인 오류를 고백하시거나 또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데 있어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그는 자기의 대적들에게 자기를 정죄할 수 있느냐고 도전할 수 있으시다(요8:46). 성경은 역시 그를 이상적인 사람이 실현되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히2:8, 9 고전 15:45, 고후 3:18, 빌3:21). 더욱이 그가 애용하신 “인자”라는 명칭은 그가 완전한 인성의 이상(ideal)에 응수하신다는 사실을 표시하고 있는 듯 하다.

 

4, 그리스도의 이성(二性)의 필요성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성(二性)을 추측한 필요성(necessity)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바에 의해 분명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있어서 단지 일개의 사람에 불과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에게 하나님의 가치를 귀속시키거나 그 안에 하나님의 내재(immanence) 또는 성령의 내주(indwelling)로 말미암아 그의 신성을 주장하기를 주저하였다. 그리스도의 이성(二性)의 필요성은 성경적 속죄론에 필수적인 것에서 비롯된다.

 

a, 그의 인성(manhood)의 필요성

사람은 범죄하였으므로 사람에게는 반드시 형벌이 가해져야만 한다. 더욱이 형벌의 보상은 사람만이 능히 담당할 수 잇는 신체와 영혼의 수난을 포함하였다(요12:27, 행3:18, 히2:14, 9:22). 그리스도는 그것의 모든 본질적인 특성들 뿐만 아니라 타락 후에 빠지기 쉬운 모든 연약성을 함께 취하시어 사람이 타락한 하강(degradation)의 심연(深淵)에 까지 내려가셔야만 하였다(히2:17,18). 동시에 그는 무죄한 사람이 되셔야만 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셨고 그 자신의 생명을 상실하신 자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속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히7:26). 인류의 재난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을 가지시고 모든 시험들을 초월하신 참으로 인간적인 중보자만이 사람의 모든 경험들과 시련들 그리고 시험들에 동정적으로 임하실 수 있었으며(히2:17,18, 4:15-5:2),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완전한 인간적 모범이 되실 수 있었다(마11:29, 막10:39, 요13:13-15, 빌2:5-8, 히12:2-4, 벧전2:21).

 

b, 그의 신성(Godhead)의 필요성

구원적 신적 계획에 있어서 중보자는 역시 필연적으로 하나님이 되셔야만 하였다. 그 이유는, (1) 그가 무한한 가치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2) 그가 하나님의 진노를 구속적으로 받기위하여, 즉 다른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또한 (3) 그가 성취하신 사역의 열매들을 신앙으로 그를 받아들인 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그의 파산된 생활로써 죄의 형벌을 지불하거나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할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가 없이는 그것을 영원히 받아야만 하지만 그것을 피할 방도로써 받을 수는 없다.

 

 

 

III, 그리스도의 일위성(一位性)

 

 

451년에 칼케톤 회의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교회의 신앙을 공식화(公式化)하여, 그가 “혼잡없이, 변화없이, 분할 없이, 분리없이 이성(二性)을 가지신 것으로 인정되며, 그 성(性)의 특징이 보존되고 한 위(인격)와 한 실제로 결합(일치)하여 이위(二位)로 나누어지거나 구분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이 공식화는 주로 소극적이며 단순히 여러 이단적인 견해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하려고 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초대교회의 신앙을 분명히 진술하고 있지만, 내포된 신비 즉 자연적인 설명을 할 수 없는 신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역사의 가장 중심적인 이적은 바르트주의적인 용어로 한 위(인격) 안에 있는 하나님과 사람, 즉 최고의 역설(paradox)을 그 모든 장엄(莊嚴)중에서 전면에 내세우도록 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가 되셨는가를 보여주려고 시도함이 없이 단순히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발표된 위대한 진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스스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며, 부룬너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인간 예수가 신성을 획득하셨다는 것은 아니다. 칼케톤 회의의 발표는 오히려 그 반대인 하나님이 사람으로 옮기신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후 여러 세기가 지나갔지만 교회는 약간의 설명을 붙였을 뿐이요, 실제적으로는 칼케톤 신조를 초월하지 못하였다. 교회는 언제나 성육신을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로 인정해 왔다. 그리고 또한 그 사실은 계속될 것이니, 이는 성육신이 이적들 중의 이적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위(인격)에 대해 심리적인 설명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다 실패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이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심리적 설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구절들은 교회론에 대한 간단한 진술로 의도되고 있다.

 

 

A, 그리스도의 인격(위)에 관한 교회관의 진술

 

 

1, “성(性)”과 “위(位)”라는 용어들의 정의

 

이 교리를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하여는 이것과 관련되어 사용된 “성”(nature)과 “위”(person)라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성”(性,성질)이라는 용어는 어던 물건으로 하여금 그것이 되게하는 그 물건의 모든 본질적 품질들의 총체(sum-total)를 나타낸다. 성(性)은 실체(substance)의 모든 본질적 품질들을 가진 공통적으로 소유된 실체이다. “위”(位, 인격)라는 용어는 이성(理性)을 부여받은 완전한 실체이며 따라서 그 자체의 행동들이 책임있는 주체(subject)를 나타낸다. 위성(位性, 인격성 personality)은 성(性)의 본질적인 구성부분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것이 지향(指向)하는 목표이다. 위(位)는 어떤 것이 첨가된 성(性), 즉 독림된 실체, 개체(individuality)이다. 그런데 로고스는 인격(위)화 되지 않은, 즉 독자적으로 존재치 않은 인성(人性)을 취하셨다.

 

2, 교회의 견해가 설명될 수 있는 주장들

 

a, 중보자 안에는 단지 한 위(인격), 즉 불변적 로고스가 있을 뿐이다. 로고스는 그리스도의 위성(位性, 인격성)의 기초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중보자의 위(인격)가 신적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못할 것이다. 성육신은 그를 이성(二性)으로 구성된 복합위(인격)로 만들었다. 그는 신인(神人)이시다.

b,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의 인적 위(인격)를 구성하지 않는다. 로고스는 인적 위(인격)를 채택 하지 않으셨지만(따라서 우리는 중보자 안에 두 위(인격)드릉ㄹ 가지고 있다) 단순히 인성을 취하셨다. 부룬너(Brunner)는 선언하기를, 우리가 죄악된 인격을 가질 때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의 신적 인격을 가지시며 오히려 그 신적 인격이시라는 것은 그의 인격(위)의 신비라고 하였다.

c,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성을 비인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이 인성은 그 자체의 독립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았다는 의미에서만 참되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일순간이라도 비인격적이 아니었다. 로고스는 그 성질을 그 자신과의 인격적 실체로 취하셨다. 인성은 그것의 인격적 존재를 로고스의 인격(위)안에 가지고 있다. 그것은 비(非)인격적(impersonal)이라기 보다는 내(內) 인격적(in-personal)이다.

d,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미완료 또는 미완성적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의 인성은 그 성질에 속하는 본질적 품질들을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모자라게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 아들의 인격(위) 안에 개체, 즉 인격적(위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다.

e, 이 인격적(위적) 실체는 의식이나 주유의지와 혼동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 자체 안에 또는 독립적으로 인격적(위적)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것이 의식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f, 영원부터 신성을 가지셨던 하나의 신적 인격이 인성을 취하셨으며, 그리하여 지금은 양자를 함께 가지고 계시다. 이것은 신적 위(인격)가 신성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들이 제 3성(tertium quid), 즉 일종의 신적, 인적, 성질로 혼합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이성(二性)의 위엄성을 위태롭게 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주장되어야만 한다.

 

B, 그리스도의 일위성(一位性)에 대한 성경적 증거

 

 

일위(一位)이성(二性)의 교리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고 있다. 그것은 초감각적인 실제성과 불가해적(不可解的)인 신비여서 우리는 인간 생활에 그 유추를 알 수가 없으며 인간 이성에서 그 뒷받침을 얻지 못하며, 따라서 오직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근거하여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이유 때문에 이 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면밀히 유의하는 것이 이중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1, 성경에는 이위성(二位性)에 대한 증거가 없다.

 

첫째로 매우 주요한 것에 대한 소극적인 고찰이 있다 만일 예수 안에 이위성(二位性), 이중성 인격성)이 있었다면, 우리는 자연적으로 그것에 대한 어떤 흔적들을 성경에서 찾으려는 기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보자의 내적 생활에는 하나님의 삼위적 실유에 사용된 바와 같은 “나”와 “당신”(한 인격이 다른 인격에게 말함 시2:7, 40:7,8, 요17:1, 4,5, 21-24)의 구별이 없다. 더욱이 예수님은 한번도 자신에 관해 복수(창1:26, 3:22, 11:7에서 하나님이 하신 것 같이)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요3:11은 혹 문제가 될 수 잇을 것이다. 그 복수는 특별하지만, 추측컨대 니고데모와 그가 대표하였던 무리에 대립하여 예수님과 또한 자신과 함께 하였던 자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일 것이다.

 

2, 이성(二性)은 성경에 일위(一位)로 연합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경의 몇 구절들은 그리스도 안에 이성(二性)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만, 오히려 일위(一位)를 의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롬1:3,4, 갈4:4, 5, 빌2:6-11). 몇몇 구절들에서는 이성(二性)이 연합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성경은 어느곳에서도 추상적인 신성이나 어떤 신적 능력이 인성에 연합되었거나 나타났다고 가르치지 않고 다만 언제나 구체적인 신성, 즉 하나님 아들의 신적 인격(위)이 인성에 연합되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요1:14, 롬8:3, 갈4:4, 롬9:5, 딤전3:16, 히2:11-14, 요일4:2,3)

 

3,일위(一位)는 어느 한 성(性)에도 해당되는 관계로 언급되고 있다.

 

종종 일성(一性)의 속성들은 인격(위)으로 단정되지만, 그 인격(위)은 다른 성(性)으로부터 비롯된 칭호로 표현된다. 한편으로 인적 속성들과 행동들이 인격(위)으로 단정되지만, 그는 신적 칭호로 표현된다(행2:28, 고전2:8, 1:13,14). 한편으로 신적 속성들과 행동들은 인격(위)으로 단정되지만 그는 인적 칭호로 표현된다.(요3:13, 6:62, 롬9:5).

 

 

c, 일위(一位)에 이성(二性)이 연합된 결과들

 

1, 신성(神性)에 본질적 변화가 없음

 

창조와 성육신의 교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y)과 연관하여 문제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그 속성에 대한 논의에서 이미 지적되었다.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할지라도, 신성은 성육신에서 하등의 본질적인 변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주장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역시 신성이 고난과 죽음을 맛보실 수 없으며, 무식에서 해방되어 있고, 언약과 시험을 당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성육신이 “인격적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 성육신하셨다고 말하는 것이 “신성”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셨다고 말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낫다.

개혁파 신학자들이 종종 신성이 성육신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스콜라신학의 어법으로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그들은 이 성(性)을 절대적으로 또는 그 자체에서 고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위) 안에서 고찰한다. 성육신의 결과는 신적 구세주가 무지하시거나 연약하실 수 있으며, 시험을 받으실 수 있으며, 또한 그가 인성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그의 신성에서가 아니라 이차적(파생적, derivatively)으로 고통하시고 죽으실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2, 성육신에서 결과된 삼중 전달(Threefold communication)

 

a, 특성들의 전달(A communicatio idiomatum)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성과 신성의 특성이 인격(위)의 특성이며 따라서 인격(위)에 귀속된다는 것이다. 인격(위)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며 편재(遍在)하시다고 말해질 수 있지만, 또한 슬픔, 제한된 지식과 능력 그리고 인적 궁핍과 불행에 예속된 사람으로 불리워 질 수도 있다. 우리는 전달이란 용어가 신성에 독특한 어떤 것이 신성에 전달되었거나 또는 인성에 독특한 어떤 것이 신성에 전달되었다는 것과 또한 이성(二性)의 침투로 말미암아 신성(the human)은 인성화되고 인성(the human)은 신성화된다는(로마)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유의해야만 한다. 신성(deity)은 인적 연약함에 참여할 수 없으며 또한 사람은 신격(Godhead)의 본질적 완전성의 어느 것에도 참여할 수 없다.

 

b, 성과 또는 사역의 전달(A communicatio apotelesmatum or operationum)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과 특별히 그 사역의 최종적 결과(opotelesma)는 신인적(神人的, divine human)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전달의 의미하는 바를 분석하여 말한다면 (1)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동인(動因, efficient cause)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개의 분할될 수 없는 인격적 주체라는 것. (2) 그것은 이성(二性)의 협력에 의해 수행된다는 것. (3) 각 성(性)이 그 자체의 특별한 정력(energeia)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 (4)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분할될 수 없는 단일성(동일성)을 형성함은 그것이 단일 인격(위)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e, 은총 또는 은혜의 전달(A communicatio charismatum or gratiarrum)

 

이것이 의미하 바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그 존재의 첫 순간부터 각종 부요하고 영광스러운 은사들로 장식되었다는 것이며, 그 은사들이 예를들면 (1) 우월적(優越的) 은혜(gratia eminentia)라고도 불리운 신적 로고스와 연합된 은혜와 영광(gratia unoonis cum persona tou Logou)이 있는데 이것에 의해 인성은 모든 피조물 위에 높이 오르시고 심지어 찬양의 대상이 되신다. (2) 성령의 은사들, 특별히 지성과 의지, 능력의 은사들로 구성된 지속적 은혜(gratia habitualis)가 있는데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의 인성은 모든 지성적 피조물들 위에 높이 승귀되셨다. 그의 범죄 불가능성(impeccability, thr non posse peccare)는 특별히 여기에서 언급되어야만 한다.

3, 신인(神人)은 기도의 대상이다.

 

일위(一位)에 이성(二性)이 연합돤 결과는 지금 존재하시는 바와 같은 즉 이성(二性)을 가지신 중보자가 우리의 기도 대상이시라는 것이다. 마음에 유의해야만 할 것은 예배의 존귀(honor adorationis)는 이 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의 본성에서 예배할만한(adorabilis) 신적 로고스와 연합된 효능으로 인성에게도 속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예배의 대상과 근거 사이를 구별해야만 한다. 우리의 종교적 예배의 대상은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우리가 그를 예배하는 근거는 로고스의 인격(위)에 놓여있다.

 

D, 하나의 신비인 그리스도의 일위성(一位性)

 

일위(一位)에 이성(二性)에 연합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으며 또한 그 때문에 종종 부인되는 하나의 신비이다. 그것은 종종 사람 안에 육신과 영혼이 연합된 것과 비교되어 왔다. 또한 어떤 유사점이 있다. 사람 안에는 가장 밀접하게 연합되면서도 혼합되지는 않은 두 개의 실체, 즉 물질과 연혼이 있으며 또한 중보자 안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사람 안에는 연합의 원리인 인격(위)이 그 좌소를 신체가 아닌 영혼에 두고 있으며 중보자 안에는 그것이 인성이 아닌 신성에 두고 있다. 영혼과 육신의 상호 영향은 하나의 신비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성(二性)의 연결과 그것들의 상호 영향도 그러하다.

육신과 영혼에 일어나는 매사가 인격에 돌려지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성(二性)에 이러나는 모든 것이 인격으로 단정된다. 종종 사람은 그의 영적 요소에 지명되며, 그때에 어떤 것은 보다 특별히 그를 육신에 적용하는 것으로 단정되며 또한 그 반대의 방식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인성에만 적용하는 유사한 일들은 그가 신성을 따라 명명될 때 그에게 돌려지며 또한 그 반대의 순서도 성립된다. 사람의 육신이 영혼과 연합되는 것이 그것에게 여예가 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인성이 로고스의 인격과 연합되는 것이 그것에게 영예가 된다.

물론 그 비교는 불완전하다. 이것은 신적인 것과 인적인 것, 무한과 유한의 연합을 예증하지 못한다. 심지어 이것은 단일한 인격(위)안에 두 개의 영적 성질들의 연합을 예증하지 못한다.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육신은 물질적이요 영혼은 영적이다. 그것은 놀라운 연합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이성(二性)의 연합과 같이 놀라운 것이 아니다.

E, 루터파의 속성 전달설

 

1, 루터파의 입장에 대한 진술

 

루터파는 “특성들의 전달”(communicatio idiomatum)의 교리에 있어서 개혁파와 다르다. 그들은 한 성(性)의 속성들이 현실적인 이전(移轉), transference)에 근거하여 다른 속성들에로 귀속된다고 가르치며 또한 오직 이러한 이전에 의해서만 인격(위)의 참된 단일성(통일성)이 확보된다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이성(二性)의 속성들은 그 인격9위)에게 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의 부정을 함의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보는 바대로 인격(위)의 단일성(통일성)을 위하여 그것에 어떤 것을 추가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교리를 언제나 동일한 형식으로 진술하지 않았다. 루터와 어떤 초기 루터파 사람들은 전달을 두 방향으로 말하였는데, 즉 신성에서 인성에로 또한 인성에서 신성에로의 전달을 말하였다. 그러나 이 교리의 후속적인 발전에 있어서 인성에서 신성에로의 전달은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으며, 다만 신성에서 인성에로의 전달만이 강조되었다. 오래지 않아 오히려 보다 더 큰 제한이 따라왔다 루터파 학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적(operative) 속성들(전능, 편제, 전지)과 그의 정적적(quiescent) 속성들(무한, 영원등) 사이를 구별하였으며 또한 오직 전자만이 인성에로 이전되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한 가지로 전달은 성육신 때에 있었다고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견해가 어떻게 복음서에 있는 그리스도의 초상(picture)과 맞출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일어났는데, 이 초상은 전지하시고 편재하신 사람의 초상은 아니었다. 이것은 의견상의 차이를 야기 시켰다. 어떤 사람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필연적으로 이 속성들을 그의 비하(卑下)기간에 수행하셨으나 그것을 은밀히 하셨다고 하였지만, 다른 사람에 의하면 그것들이 수행은 신적 인격(위)의 의지에 예속되었는데 그 신적 인격은 그의 비하의 기간에 이것들을 부동작(不動作, inoperative)상태에 자발적으로 남겨두었다고 하였다. 이 교리에 대한 반대가 종종 루터파 교회에 나타났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생애에 참된 인적 발전이 있었다는 개념과 모순된다는 것이 지적되었으며, 루터 자신이 그렇게 가르쳤다. 속성들의 전달에 대한 저 위대한 개혁자의 주장은 그의 신비주의적 경향과 성만찬에 그리스도가 신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그의 교훈에 의해 설명된다.

 

 

2, 루터파 교리에 대한 이의(異議)들

 

루터파의 속성 전달설에 대한 중대한 이의들이 있다.

 

a, 이 교리는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신성의 속성들이 인성에 이전되어 그것을 편재 하게 된 증거로 요3:13의 진술이 인용되지만, 이 이론이 정당하다면 모순이 없기 위하여 고전2:8 으로부터 수난의 재능이 신성에 전달되었다는 추론이 결과 되어야 만 한다. 그러나 루터파들은 그런 결론에서 퇴거하였다.

b, 이 교리는 그리스도안에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함의(含意)하고 있다. 루터파는 속성들이 그 성(性)으로부터 추상될 수 있으며 성(性)들이 구별된 체로 전달될 수 있지만 실체와 속성들은 그렇게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신적 속성들이 인성들에로 전달됨으로써 “인성”은 존재를 중지 한다. 편재와 전지는 인간성과 조화된다. 이러한 전달은 성경이 엄격히 구별하고 있는 신성과 인성의 혼합으로 귀착된다.

c, 이 교리는 지금 보편적으로 루터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형식에 있어서 모순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 만일 신적 속성들이 인성들에 전달된다면, 인성도 역시 신성에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어떤 속성들이 전달된다면, 반드시 모든 속성들이 다 전달 될 것이다. 그러나 루터파는 분명히 완전히 먼 거리에까지 감히 나가지 못하고, 따라서 도중에서 멈추고 만다.

d, 교리는 복음서에 발견되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비하(卑下)의 신분에 계셨을 때의 모습과 일치되지 않는다. 이것은 편재하시고 전지하신 사라의 모습은 아니다. 이 모순에 대한 루터파의 설명은 대체로 교회의 마음을 끌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어떤 루터파 추종자에게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였다.

e, 이 교리는 실질적으로 성육신을 파괴한다. 루터파는 성육신(incarnation)과 자기 비움(exinanitio)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로고스는 단지 전자(前者)의 주체이시다. 그는 인성을 신격(Godhead)의 충만하심의 내주(內住)를 잘 받아들이게 하시며 또한 그것에게 어떤 신적 속성들을 전달하신다. 그러나 이같이 하심으로써 그는 실질적으로 인성(人性)을 신성에 동화(同化)시켜 그것을 폐지하신다. 그리하여 오직 신성(神性)만이 남는다.

f, 이 교리는 역시 실제적으로 비하(卑下)의 신분과 승귀(昇貴)의 신분 사이의 구별을 철폐하고 있다. 브렌즈(Brenz)는 심지어 이런 것들이 계기적(繼起的, successive) 신분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상생할 중에 함께 있었던 공존적(共存的, co-existed) 신분들이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이 난관을 면하기 위하여 루터파들은 자기 비움(그것의 주체는 로고스가 아니라 신인(神人)이시다)의 교리를 도입하였는데, 그 요지는 그가 실제로 자신을 비우셨거나 신적 속성들을 포기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들의 간헐적(間歇的, intermittent)사용에 대해 말하였다.

 

 

F, 케노시스의 다양 이론들

 

19세기 중엽에 기독론의 새로운 형태가 케노시스적인 이론들에 나타났다. 이 이론들은 특별히 루터파와 몇몇 개혁파 신학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것들은 교회의 루터파의 부분들을 함께 접근시키려는 시도의 일부분을 나타내고 있다. 이 새로운 견해의 주장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manhood)의 실재성과 고결성을 공평하게 처리하고 그의 자아 극복과 자아 희생의 중대성을 강조하기를 원하였다.

 

1, 이 교리의 진술

 

“케노시스(κενωσις)라는 용어는 신학에서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본래 이 용어는 루터파 신학자들이 로고스가 아닌 신인(神人)의 자기 제한, 즉 이것으로써 자신의 비하를 위하여 그의 신적 속성들의 실제적 사용을 포기하신 것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케노시스론 자들이 교훈들에 있어서 이 용어는 로고스가 성육신 하실 때에 그의 이행적(移行的) 속성들 또는 그의 모든 속성들을 박탈당하셨으며, 단순한 가능성(potentiality)에로 축소되셨다가 그 다음에 인성과 연합되어 신인적(神人的) 인격에로 또 다시 발전하였다는 교리를 두드러지게 하였다. 이 교리가 교훈된 주요한 형식들은 다음과 같다.

 

a, 토마시우스(Thomasius)와 델리취(Delitzsch), 크로스비(Crosby)의 이론.

토마시우스는 하나님의 절대적 또는 본질적 속성들(절대 능력, 거룩, 진리, 사랑)과 그의 상대적 속성들(신격에 본질적이 아닌 속성들 예를들면 전능이나 편재, 전지)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또한 로고스는 자신이 진정한 인성을 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신적 자의식(自意識)을 존속하시면서 후자를 포기하셨다고 주장한다.

b, 게스(Gess)와 비쳐(H.W. Beecher)의 이론.

이것은 보다 더욱 철저한 이론이다. 라 두게(La Touche)는 그것을 “신적 자살(自殺)에 의한 성육신”이라고 말하고 있다. 로고스는 그의 모든 속성들을 무능화(無能化)하셨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그의 지상생활 동안에 그의 우주적 기능들과 그의 영원적 의식(意識)을 중지하셨다. 그의 의식은 순전히 인적 영혼의 의식이 되고,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적 영혼에 대신할 수 있으셨고 또한 그렇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은 그의 범죄 가능성의 범위에까지 추구되었다.

e, 에브라르드(Ebrard)의 이론.

에브라르드는 성육신하신 로고스가 인적 영혼을 대신 케 함에 있어서 게스(Gess)의 의견과 일치하고 있다. 영원하신 성자가 영원의 형태를 포기하셨고 또한 충분한 자아 제한으로 인적인 생명 중심(life center)의 존재 형태를 취하셨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이 자기 축소(self-reduction)는 로고스의 완전한 무능화에 이르지 않는다. 신적 특성들은 유보 되었지만, 존재의 인적 형태에 고유한 시한 형식(time-from)으로 신인(神人)에 의해 소유되었다.

d, 말텐센(Martensen)과 고레(Gore)의 이론.

말렌센은 두 개의 비(非) 전달적 생명 중심(non-communicating life-centers)에서 오는 이중적 생활이 성육신하신 로고스 안에 존재하였다고 가정하였다. 하나님의 품안에 계셨으므로 그는 삼위일체적 생활과 세계에 대한 창조주와 유지주(維持主)로서의 우주적 관계에서 기능을 계속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인성에 연합되어 무능화된 로고스로서의 그는 자신의 삼위일체적이고 우주적인 기능들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셨으며, 다만 자신을 인성의 기능들에게 지식되기 가능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으로 아셨다.

 

2, 이 교리에 대한 추측된 성경적 기초

 

케노시스 주의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특히 빌2:6-8과 고후8:9, 요17:5에서 성경적 지원을 찾고 있다. “케노시스”라는 용어는 빌2:7에 있는 주 동사 <에케노센>(εκενωσεν)에서 유래되고 있다. 이 말이 미국 개정역(R.V.)에는 “emptied Himself”(개역 개정성경에는 “자기를 비워”로 번역됨)로 역술되어 있다. 위필드(Warfield)박사는 이것를 오역이라고 말하고 있다(Christology and Criticism, p. 375). 이 동사는 다른 신약 부분에서 오직 네 번 발견되는데, 즉 롬4:14, 고전4:14, 고전1:17, 9:15, 고후9:3 이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이 용어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헛것이 되고”, “헛되지”, “헛된”을 의미하고 있다(cf. Auth, Ver, in 빌2:7). 만일 우리가 이 말을 이런 뜻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헛되게 하여, 자신의 신적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적 의미로 취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케노시스 이론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만일 우리가 그의 포기하신 바가 <몰폐데우>(μορφηθεου,하나님의 형체)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 <몰폐>를 엄밀하게 신격(Godhead)의 본질적 또는 케노시스론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추측컨대 <몰폐>(μορφη)는 그렇게 해석되어야만 할 것이지만, <에케노센>(εκενωσεν)이란 동사는 <몰폐 데우>(μορφηθεου)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에이나이 이사 데오>(ειναι ισα θεω) 즉 그의 하남님과 동등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신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본체를 포기하셨을지라도 하나님과의 동등을 귀중한 보화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조의 형체를 취하셨다. 그러면 그가 종이 되신 것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그것은 즉 사람이 순종하려고 불리움을 받은 복종의 신분이다. 하나님과의 동등 되심은 실유(being)의 형태를 나타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른 신분으로 바꾸신 신분을 나타낸다(cf. kennedy, in Exp. Gk. Test.; Ewald, in Zahn's Comm; Vos, Notes on Christology of Paul; Cooke, The Incarnation and Recent Criticism, pp. 201 ff.)

 

 

3, 케노시스론에 대한 의의(意義)

 

a, 이 이론은 하나님과 사람이 절대적으로 판이하지 않고 그 하나가 다른 하나에로 변형될 수 있다는 범신론적 개념에 기초되어 있다. 헤겔주의의 “생성”(生成, Becoming)의 개념은 하나님에게 적용되고, 절대적인 표식 선(線)이 폐지된다.

b, 이 이론은 성경에서 분명히 교훈되고(말3:6, 약1:17) 또한 하나님의 개념이 함의된 그의 불변성의 교리에 전혀 위배된다. 절대성과 可變性은 서로 배타적이며 또한 가변적인 하나님은 분명히 성경의 하나님은 아니다.

c, 이 이론은 삼위일체의 실질적인 파괴를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의 참 하나님을 배제한다. 자신의 신적 속성들을 비우시고 인간화되신 聖子는 더 이상 삼위일체적 생활 안에 있는 신적 실체이실 수 없다.

d, 이 이론은 신적 존재의 형태 즉 신적인 속성들과 신적 본체 사이의 관계를 너무 이완(弛緩)되게 추상하여 전자를 후자로부터 잘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며 또한 오류 자체를 내포하는 것이다.

e, 이 이론은 해결하려고 의도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 이론은 주님의 인격(위)의 동일성(단일성)과 그의 인성의 실재성을 굳게 지키려고 갈망하였다. 그러나 분명히 인적 로고스가 인적 영혼과 공존(共存)하신다고 추상함으로써 인격(위)적 통일성이 굳게 되지는 않는다. 또한 무능화한 로고스를 인적 영혼에 대치시킴으로써 인성의 실재성이 유지되지도 않는다. 케노시스론의 그리스도는 하나님도 아니요 사람도 아니다. 워필드(Warfield) 박사의 말대로 그의 인성은 바로 수축된 신성“(just shrunken deity)이다.

 

케노시스론은 한 때 독일에서 인기를 얻었으나 지금은 실제로 거기에서 거의 사멸되었다. 이 이론이 독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영국에서는 여러 학자들(D.W. Rorrest, W.L.Walker, P.T. Forsyth, Ch. Gore, R.L. Ottley, H.R.Mackintosh)의 지지를 얻었다.

 

 

G, 점진적(漸進的, gradual) 성육신론

 

 

도르너(Dorner)는 케노시스론을 가장 맹렬하게 반대한 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케노시스론의 오류를 피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공평하게 다룰 수 있는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는 점진적 또는 진보적(progressive) 성육신의 이론으로써 그 난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에 의하면 성육신은 예수의 잉태시에 완성된 행동이 아니라 로고스가 완전한 연합인 부활시에 완성되었을 때까지 점차 증가하는 분량으로 독특하고 대표적인 사람(실질적으로 새로운 피조물), 즉 그리스도 예수에게 자신을 연합한 점잔적인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 연합은 단일한 의식과 의지를 가진 신인(神人)을 결과하였다. 여기에서 신인과 로고스는 인격성(위성)을 공급하시지 않고 다만 그것애게 그 신적 품질(quality)을 주신다.

이 이론은 성경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데, 성경은 언제나 성육신을 하나의 과정(a process)보다는 하나의 순간적인 사실(a momentary fact)로 표현하고 있다. 이 이론은 논리적으로 네스토리안주의(Nestorianism) 또는 중보자 안에 두 인격이 잇다는 실로 이끌어간다. 그리고 이 이론은 인격성의 참된 좌소를 인간 예수안에서 발견하기 때문에 우리 주님의 참된 선재(先在)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로데(Rothe)와 보본(Bovon)은 이 교리를 주장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고대 이론들과 현대 이론들의 결정적 차이는 후자가 도르너의 이론에서도 나타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인격(위)적 생활의 특별한 형체로 인식된 로고스의 인격(위)을 유일하게 신적 품질을 가진 구체적 인적 인격(위)로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성(위)과 구별하였다는 사실에 있다. 현대의 견해들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자아(ego)를 구성하는 것은 로고스가 아니라 인간 예수라고 한다. 예수의 인격성은 의식의 전형과 도덕적 성장에서 인적(human)이지만, 동시에 유일하게 신성을 받아들이시며 따라서 실제로 인성 자체가 일반적 우주적 표현인 성육신의 극치(climax)이다. 이것은 산데이(Sanday)가 그의 저서(Christologies Ancient and Modern)에서 제시한 이론, 즉 예수 안에 있는 인성과 신성을 함께 공정히 다루게 될 예수의 인격(위)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잠재의식(subliminal consciousness)이 모든 신적 내주(內住) 또는 인적 영혼에[ 대한 신적 행동의 고유 좌소(proper seat)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으며 또한 동일한 또는 상응한 잠재(潛在)자아(自我)는 역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의 고유 죄소 또는 소재지(locus)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의 통상적 의식은 인적 의식이었지만, 종종 정당하게 가혹한 비평을 받았다. 이 이론은 사람의 생활에 소유하고 있지 않은 잠재적인 것을 중요시하고 있으며, 신성은 그리스도의 인격(위) 안에 있는 어떤 특별한 장소에 위치될 수 있다고 그릇되게 추측하며, 또한 성경의 자료와는 조화되지 않은 그의 신성을 단지 간헐적(間歇的)으로 인식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이론은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인격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있다. 산데이 이외에 현대 기독론의 유력한 대표자로는 쿤제(Kunze), 솨에델(SDchaeder), 카엘러(Kaehler), 모벌리(Moberly),두 보세(Du Bose)가 있다.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청지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