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복음서!!!

[스크랩] 팔복강해 6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하나님아들 2014. 3. 31. 23:26

2012.10.17. 식도성결교회 수요성경공부 팔복강해 06

제 6 복/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마태복음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옳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옳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수신을 해도, 가죽이 벗겨져 피가 나오도록 닦아도 죄인입니다. 마음이 아무리 청결하여도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셔야만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렘17:9) 그 마음 속에는 불의, 탐욕, 시기, 악독, 음란, 포악이 꽉 차있습니다. 이것을 씻을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마5:8은 다음과 같이 다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마음이 깨끗하여 복이 있나니 저희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 주실 터이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권력이나 많은 돈이나 명성을 갖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깨끗한 마음을 더럽힌 대가로 얻어진 것이라면 천금을 주고 쓰레기를 산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잠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잠4:23)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노력으로 어느 정도는 깨끗하게 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온전히 깨끗해집니다.
청결한 마음은 두 가지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지 않은 마음을 말합니다. 도덕적인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순종하는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 원죄가 있습니다. 아담 이후로 계속하여 내려오는 원죄입니다. 이 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깨끗해집니다. 둘째 스스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불의, 비양심, 냉혹, 시기, 비방, 도적질, 투기, 살인, 증오등의 것들입니다. 이러한 죄는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합니다. 입술과 혀로 회개한다고, 눈물 몇 방울을 흘리고 흐느껴 운다고 그 죄값이 다 없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회개로 용서를 받지마는 죄값은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과 의가 우리를 오히려 더럽히기도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선과 의는 하나님 앞에서 누더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누더기 같은 의와 선으로 형제를 판단하고 비방합니다. 이런 마음은 가난한 마음도, 애통하는 마음도, 온유한 마음도, 긍휼이 여기는 마음도 아닙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이 아니라 의에 배 불러서 그 의를 토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누더기 같은 의와 선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힐 때가 의외로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얼마나 마음이 청결한 분인가? 그 크고
위대한 일을 하신 후에도 그 분은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셨다.
자기 죄에 가려서 타인의 죄를 볼 수 없는 자는 복이 있다. 남에게 없
는 의와 선과 경건이 내게 있을 때는 이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
음. 그러한 것들이 없는 이웃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
다. 부자를 볼 때 "말세에 재물을 모았구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기만큼 어렵겠다. 참 안됐기도 하지만 고
소하다." 라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
물을 맡겨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겠지. 그 재물이 복 받아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씌어질 날이 올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기도하
는 마음은 깨끗한 마음이다.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을 위해
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거야. 저 사람도 언젠가는 믿음과
성령님의 감동으로 좋은 사람이 될 거야." 라고 믿고 소망 가운데 기
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좋은 마음 깨끗한 마음이다.
"참 큰 일이야. 저런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니. 한심하다니까." 라
는 마음 가짐은 그 말이 비록 사실일지라도 자기 마음이 먼저 얼룩진
다.
사탄을 종종 우리에게 작은 의와 선을 주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그것을 무기로 삼아 이웃을 판단하고 비방케하고 또 전쟁하고 싸우게
하여 더 큰 죄를 짓게 하여 우리의 마음을 더럽혀서 우리가 하나님을
뵙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사탄의 계략과 싸워 이기라. 주님께서 힘을
주시리라.

1. 팔복중 다섯 번째 복
우리는 여기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말씀들 중의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되도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듣기에는 이 위대한 말씀에서 묘사된 인격이나 주어진 약속이 사람이 도달하기 더욱 어려운 경지인지 어떤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볼만한 어떤 인격이나 하나님의 그 눈부신 광채를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할만한 성품을 소유하였다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확실히 이 요구는 불가능하고 이 약속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족될 수 없는 요구로 우리를 조롱하고 실현될 수없는 소망을 우리 앞에 매달아 놓으셨단 말입니까? 많은 도덕가들과 자칭 스승이라는 자들 이 이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전장에서 두 다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누어있는 군인에게 '당신이 일어나서 달려가기만 한다면 무사하리라'고 말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 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와같은 어리석은 방법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거리가 먼 것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그리스도의 입술에서 나온 말씀 가운데 가장 희망적이고 밝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외견상 불가능한 인격을 보장하고 있고 외견상 불가능한 하나님을 보는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두려움을 진정시켜 주며, 하나님을 보는 일을 우리 자신 부적격하다고 생각하여 때때로 부득히 피하기도 하지만 그 보는일이 가장 순결한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말씀을 완전히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본문의 중요한 의미 의 일부를 파악해 보려는 것입니다.

2.마음의 청결 - 먼저 마음은 어떻게 하여 청결해 질수 있는가를 생 각해 봅시다.
이 대답은 팔복에서 이 말씀의 위치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앞의 강해들에서 팔복에 있는 의미의 보고들을 열어 주었던 열쇠가 여기서도 특별히 필요합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이 말씀은 하나의 고립된 말씀으로 간주하면, 조롱거리와 고통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경건한 영혼의 인격적 특성을 묘사하고 있는 이 화환 사슬의 모든 선행(선행) 하는 고리들과 이 말씀을 연결해서 본다면 이 말씀은 다른 모양을 띠게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자"는 선행하는 은사들과 자질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볼 수있는 마음의 청결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상태를 인식하는 영의 빈곤,
-그 상태의 심각성과 절망적 모습으로 인해 일어나는 통회 등,
-그리고 의에 대한 갈망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선행할 때, 그리고 그것들로 부터 시간의 간격없이 흘러나오는 결과를 수반할 때
- 즉 천국을 소유하고, 통회 후에 위로를 받고, 진정한 소유로만족하고, 의를 갈망하여 얻을 때, 오직 그 때 마음이 죄악과 교만에서 깨끗해지고 눈이 열려 영원한 하나님의 빛을 바라보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은, 홀로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면 절망만을 자아낼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위치시킨 그 자리에 놓고, 전후에 묘사된 일련의 인격적 특징들 가운데 하나 로 간주한다면, 이 말씀은 지극히 밝고 순수한 소망을 안겨 줍니다.

"구스인이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뇨?"(렘 13:23).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빛갈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본문을 팔복의 다른 복들과 연결해 생각해 볼 때, 마음의 순결은 인간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일련의 팔복 가운데서 본문이 차지하는 위치를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그 진리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보다 간결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동일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께끗게 하사"(행 5: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 옛 진리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개혁과 자기 개량은 죄에 대한 자각, 죄에 대한 통해, 신적 의에 대한 갈망,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개방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 때만 우리가 마음의 순결이라는 이 고요한 고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 방법에 의해, 오직 이 방법에 의해서만 "께끗한 것이 더러운 것에서"(욥 14:4) 나올 수 있으며, 죄악으로 더러워진 인간, 모든 악의 원천인 사탄의 결박에 매인 인간이 깨끗해지고 청결해지고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리될 때 하나님은 모든 인간 행위의 목적,목표,동기,힘,보상이 되십니다. 의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회심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조건으로 하여 하사되는 선물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순결을 향한 갈망은, 일상생활에서 무수히 억압받고 좌절당하고 벽에 부딛칩니다. 그 갈망은 확실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갈망이 완전히 충족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더러워진 빈 손을 하나님 앞에 높이 들고 나아가, "주께서 명하시는 것, 그 께끗한 마음을 내게 주소서, 그러면 내가 깨끗해지리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시 51:10).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이 선물은 단번에 영구적으로 주어지 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인 갈망이 있을 경우에 한해 계속적으로 주어진다는 것과, 이 선물을 우리가 지신의 신앙을 통해서는 물론, 노력을 통하여 삶속에서 활용하고 인격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들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려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라고 권면했습니다(고후7:1). "이 선물을 가진 자마다 그가 깨끗하신 것처럼 자신을 깨끗게 합니다".
우리에게 중생의 선물을 가져다 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정결한 물이 담긴 샘 으로 부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여 너희 악업 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라"(사1:16)라고 외침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순결케 하는 권능을 받고, 부지런한 행위를 통해 이 능력을 사용합니다. 믿음과 행위는 나눌 수 없 습니다.

3.하나님을 볼 수 있는 청결한 마음

우리는 여기서 청결한 마음이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중략)
그러면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해 마음이 청결해질 때 '하나님을 본다'라고 말할만한 하나님과의 어떤 직접적인 관계를 능히 이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오감에 의해 하나님을 보는 것 못지 않게 확고하고 확실하고 뚜렸한 인식을 가져다 줍니다. 청결한 마음이 청결한 아버지 하나님을 봄에 있어서는 오감의 착각 이라는 것이 존재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와같은 성경말씀을 해석할 때는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즉 매우 심각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천명하셨던 그 위대한 원리에 따라 항상 안내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이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9).
영원 전부터 말씀(WORD)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세세무궁토록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로 그러한 존재로 살아 계십니다. 즉 영원한 하나님을 계시하 시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연을 통하여, 인류역사를 통하여, 또 인간의 도덕성과 양심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황홀하고 신비한 하나님 대면 보다도, 종말 때 일어나게 될,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특유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교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1) 첫째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현세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육체로 임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현재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한 그 역사적 현현의 밝은 불꽃 가운데 서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를 "욕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으로 인 식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부르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이라 부르든, 혹은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말을 사용하든 결국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즉 그것은,
-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
-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체험,
-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대한 복된 확신,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가까이 오신 하나님과의 마음, 가슴, 의지, 행 동을 통한 교제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각 내지 체험과 적극적, 실제적 교제를 위해 마음의 청결이 필수 불가결하 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는 어떤 독단적 요구가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상 필연적으로 내재, 수반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잠간이라도 생각해 본다면, 오직 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실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을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는가"(암3:3)라고 하였 습니다. 시편24;3이하에서 보면,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자만이 성전의 예배 도 종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까이 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우리 자신의 느낌과 자각에 대해 생각해 본다면, 불결 은 언제나 우리 영혼에 연막을 입히고 하늘 위에 안개막을 입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죄라도 그것은 우리로부터 하나님을 차단시킵니다. 아주 작은 분량의 염료가 수마일의 강물을 흐리게 하여 푸른 하늘과 반짝이는 별빛이 반사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극히 작은 악이라도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시야로부터 차단하거나 흐려지게 만듭니다. 죄인들이 강렬한 풀무불 속에 들어가면 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 음이 청결한 자"가, 그리고 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2) 둘째로 미래 천국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타의 팔복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을 보는 것도 역시 현세에서는 부분적으로 성취되고 미래의 삶에서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님과 교제방식 및 하나님에 대한 인식 방식과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것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는 필연적으로 크고 놀라 운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만 양자가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양자는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물론 변화된 상황, 새로운 수용능력, 시간과 오감의 변화, 보이지 않은 사물과 우리 사이에 장벽인 육체적 휘장의 소멸은 하나님을 보는 방법과 정도에 있어서 놀라운 혁 신과 진보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쩌면 어리석은 짓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늘의 그 영광스러운 지복의 상태가 지상의 상태와 어느 정도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어떤 비 교의 대상이 지상에 있다면, 우리는 양자 간의 차이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견줄 수 있는 어떤 사물이 지상에 없습니다. 지상의 것과는 도저히 견줄 수 없을 만큼 하늘은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 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고전2:9).
그리고 "우리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장차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보는 일이 이루어질 것인지 모른다고 하여 그 사실 자체 를 의심하거나 무시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심이 되면 우리가...그의 계신 그대로 그를 볼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일3:2).
사도 바울은 "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 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 이 내가 온전히 아리라"(고전13:12).

4.하나님을 보는 행복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어떻게 복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을 보는 것 외에 "봄으로써 눈을 만족시킬"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지상에서 가능한 이 원초적, 불완전한 형태에 있어서도,
- 우리의 혼란을 평정시키시고,
-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고,
- 우리의 삶을 다른 방법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고요한 권능과 행복의 수준으로 높혀 주는 유일한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태양이 하늘로 솟아 오를 때 별들이 그 모습을 숨기고 희미하게 사라가듯이, 지상의 온갖 현란한 환영들을 무색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주인, 세계의 주권자, 시간과 감각을 다스리는 왕으로 만들 것입니다.
"땅이 하늘로 가득차고 모든 평범한 수풀이 하나님으로 불타오를 때" 모든 것은 달 라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잡은 그리스도인,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 버지 및 성령과의 교제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가능합니다.

다음 저 하늘에서의 행복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지상의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미래의 행복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황금길과 진주문들은 그 비밀들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저 위에 하늘의 행복에 대한 우리의 온갖 생각은 번데기가 자기 무덤 속에서 어느 날 나오게 되, 빛나는 날개 달린 삶에 대해 꿈꾸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나는 의로 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 위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야 말로 하늘 중의 하늘이요 행복 중의 행복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굳게 믿읍시다.

이 영원한 하나님을 보는 것은, 그 영원한 계시자(REVEALER) 덕분에 우리에게 가능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화된 성도들이 아버지를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기 지상에서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을 보는 것은 육체적 시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며, 어떤 붙잡을 수 없는 광채를 멀리서 바라보는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그 대상의 실제적 소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게 될 때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저 위에서 그 소유는 충분한 소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제 6 복을 끝맺으면서 사도 요한의 말을 들어봅시다. -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 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심이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하느니라(요일3:2,3).


출처 : 서해노을보다 아름다운 식도교회
글쓴이 : 비니성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