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복/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태복음 5:7
긍홀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 팔복중 다섯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자신을 위한 그리스도인이 특성이라면 팔복의 나머지 부분은 타인을 위한 특성입니다.
여기 다섯 번째 복의 전제 긍휼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여 잔치를 베푸는 용서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분노를 일삼는 이방신과는 다른 분입니다. 긍휼은 자기의 재산을 창녀와 함께 먹어 버린 후에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광포와 강퍅이 아닙니다. 긍휼은 자비와 용서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용서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맥없는 것은 아닙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이웃에 대하여 교만하거나 비굴하게 구는 것이 아닙니다. 긍휼은 온유입니다.
긍휼은 너 그렇게 해 봐라. 그러다가 큰 코 다칠 것이다라는 저주의 마음이 아닙니다. 언제 한번 걸리기만 해봐라. 그냥 두지 않는다는 벼르는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복수의 마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가 없는 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습니다. 이런 사람은 타인을 긍휼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 위해 남을 긍휼히 여기라는 해석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길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지 우리가 남을 긍휼이 여기고 선한 행동을 하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특하게 여기시고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남에게 긍휼을 입기 위하여 너희도 남을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으며 긍휼을 받은 그들도 너희를 긍휼히 여길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 하였을 때 용서함을 받습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으나 주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이 이웃의 작은 잘못과 허물에 대하여 긍휼을 베푸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고도 타인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그것의 육십만 분의 일 밖에 되지 않는 일백 데나리온의 돈을 자기에게 빚진 사람을 옥에 가둔 것과 같이 파렴치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또 종래에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준 그 주인의 분노 앞에서 난처한 입장이 된 사람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난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마 18:23이하)
우리가 주께 받은 은혜가 얼마입니까? 죄 용서를 받은 것이 얼마입니까? 긍휼을 입은 것이 얼마입니까?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대로 베푸는 것은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이미 세상의 빛이고 소금입니다. 산 위의 동네가 우리를 숨기우지 못할 것입니다.
8복은 첫번째 것을 잠시 제쳐두고 거기에서부터 연달아 발전되는 열매들만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연속적 8복의 나머지 항목들이 쌍쌍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각각의 쌍은 하나가 개인 신앙의 깊은 요소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하나는 타인과 관련된 행동 분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애통하는 자와 온유한 자가 한 쌍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와 한 쌍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와 화평케 하는 자가 한 쌍을 이룹니다.
이러한 순서를 우연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주님은 구약성경의 형태에 따라, 첫째 되는 큰 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고 그 다음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두번째가 첫째의 연속이라고 지적하셨는데, 8복의 연속성은 바로 이 위대한 원리(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상세한 적용인 것입니다.
베품없는 신앙. 신앙 없는 베품은 둘 다 불구자입니다. 전자는 열매 없는 뿌리, 후자는 뿌리 없는 열매입니다. 최상의 감정, 가장 겸손한 신앙, 가장 고귀한 열망, 자신의 무가치성에 대한 극히 심오한 자각 등 무한히 값진 이 개인적 신앙의 요소들이, 만일 온유, 긍훌, 화평케 함 등과 불가분리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별반 가치가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 일련의 8복에서 핵심부에 자리 잡은 인격적 특성으로서 전적으로 서로에 대한 우리의 자세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매우 평범하고 흔하고 실천적인 종류의 설교가 될 것입니다.
2.주님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인격 자체-긍휼
8복의 여타 모든 항목들이 그렇듯이 이 특질도 행위보다는 내적 성향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행동도 수반되지만 행동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입니다.
현명하고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그렇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언제나 행동을 둘째 위치에 놓으십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합니다.
「복음은 그것의 일체 강조점을 행위에 두지 않고 상태에 두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행동보다 우리의 자세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이 복음의 주요 강조점은 여러분과 제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들인 가에 두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살펴보면, 우리 주님은 성격과 기질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주님은 행동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이에 앞서 성격과 기질을 말씀 하고 계십니다.
기독교인은 그가 무엇인가를 행하기에 앞서 어떤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인으로 행동할 수 있기에 앞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존재(being)는 행위(doing)보다 더 중요하며, 자세가 행위보다 더 의의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성품입니다.
긍휼이란 무엇입니까? 긍휼히 여기는(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에몬은 불쌍히 여기다, 동정을 베풀다를 말에서 파생되었으며,자비로운(자), 동정심 있는(자)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긍휼은 우선 첫째로 남, 특히 고난과 궁핍 중에 있는 사람. 아니 더 나아가 서는 비난을 살만한 악한 사람을 향해 느끼는, 어떤 습관적인 감정과 그를 보는 태도입니다. 남을 곧이 곧대로 대하면 결국 보다 엄격한 행동 방식과 사고 방식이 나올 수 밖에 없지만 긍휼은 이를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많이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란서 말에 '노블레스 오불레지'(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귀한 사람은 의무를 더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배운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돈이 많은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 없이 시달리는 사람을 돌보아 주는 것이 '노불레서 오불레지'라는 말이 가지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움과 증오가 없는 바른 질서의 사회는 우리들이 먼저 사랑을 베풀 때에 이루어집니다.
3. 이 긍휼, 곧 자비에 대해 몇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자비로운 사람의 첫째 특징은 남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의 자비로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을 악평하거나 동료를 평가함에 있어 험담을 일삼지 않고, 끝없이 그리고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남에 대한 책망에 있어 온화하며 남의 행위와 동기를 관대하게 해석합니다.
여러분, 다른 사이에 대하여 이와같이 자비롭습니까? 자신을 검토해 봅시다. 이것은 매우 오래된 사상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평범한 것에 깜짝놀랄만한 권능을 부여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오래 묵은 평범한 것을 자신의 삶 및 행위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 평범하고 오래 묵은 길을 일주일 동안 시험 삼아 걸어 보십시요. 그러면 그러한 생활 방식이 당신과 맞물러 당신을 단단히 사로잡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오래묵은 진리는, 그 진리에 순종할 때 비로소 효력을 발휘하며, 우리가 거기에 복종하려고 노력할 때 평범한 진리이기를 그칩니다.
(2) 자비로운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기꺼이 돕고자 하는 마음, 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 긍휼의 실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 중에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고 숙식을 준비시켜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긍휼입니다. 참으로 그 사태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빅토리아(Victoria)여왕이 나이팅게일(F. Nightingale)에게 준 기념 훈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말로 할 수 없거든 눈물로 할 수도 있다."
(3) 자비로운 사람은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 심지어 원수에 대해서도 적대하거나 반감을 가지기 보다는 오히려 동정하여 도움의 손길을 뻗는 것입니다.
이런 긍휼 곧 자비에 대한 최고의 실례는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 반역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겨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 간의 상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긍휼의 영을 가진다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죄지은 사람이나 대적자 에 대해서 느끼는, 그리고 그들이 여러분의 권세 아래 있음을 발견할 때 나타나는 그러한 영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긍휼한가 아닌가를 아는 길은 여러분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 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자, 나는 이점에서 내 권리를 행사해야겠다, 법대로 처리해야겠다, 이 놈 잘 걸려들었다 라고 말합니까?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대적자에 대해, 복수의 영을 품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 중 에 있는 적대자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영, 친절한 영을 품고 있습니까? 긍휼에는 사회와 도덕에 대한 범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범죄까지도 쾌히 용서하려 는 태도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의 복을 상속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에서 반감이나 적대 감정, 조롱 섞인 회의감, 그러한 어떤 앙금도 깨끗이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적인 심약한 태도로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을 수는 없어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행할 바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말한다는 것은 용서 가 아닙니다. 그것은 긍훌이 아닙니다.
가장 비열한 인간들과 흉악무도한 원수들도 우리에게서 긍훌을 받을 권리가 있습 니다. 저항 없이 고요히 서 있는 것으로는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행하신 일을 행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서로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한다면, 우리의 팔은 도움의 손길을 한껏 내밀어야할 것이고 우리의 마음에서는 긍훌과 자비가 용솟음쳐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많은 혜택을 받았습니다.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긍휼과 자비를 베풀 차례입니다.
17세기 초반에 탐심에 눈이 어두워진 많은 백인들이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금 덩어리를 찾고 다이아몬드를 캤습니다. 나중에는 그곳에 사는 흑인들을 빼내어 노예로 팔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이 노예 무역에 의해 짐승처럼 팔려 갔습니다. 그 노예 무역을 했던 사람 중 하나가 회개하고 큰 은혜를 받은 후 지은 찬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 와"(찬송가 253장 "Amazing Grace"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흑인을 결코 짐승 같은 노예로 생각지 아니했습니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리빙스톤은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슈바이처(A. Schweitzer)는 그들의 더러운 고름 주머니를 어루만졌습니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그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긍훌은 소극적 온유의 적극적 측면입니다. 수동적 온유의 미덕만을 발휘하는 것으 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긍휼이라는 적극적인 미덕이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미덕은 상기와 같은 악덕들을 전제로 하는 미덕이라는 것입니다 ! 세상은 이처럼 악이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오늘날 우리가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다는 것은 진정 사실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유일한 힘은 모든 악을 선으로 갚는 끈질긴 온유와 긍휼입니다. 이것이 악을 변화시키고 극복할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3.팔복에서 긍휼이 차지하는 자리
기독교적 신앙을 전적으로 떠나서도, 인간 본성의 구조 속에는 주님이 여기에서 복 을 선언하신 긍흘의 감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래적으로 마음도 후 하고, 말도 후하고, 행위도 후해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자비롭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이 자연적 본능적 감정이 아닙니다. 자연적, 본능적 긍훌지심은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윤리나 도덕, 법를은 거의 상 관하지 않고 안이하고 적당주의식, 눈가림 주의식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삶에서 일관성있게 실천되기 위해서는 보다 고상한 사상의 뒷받 침이 있어야 합니다.
어쨌든 주님이 말씀하신 긍휼은 본능 이상의 것, 단순한 감상 이상의 것, 가련하고 슬픈 일을 볼 때 나타나는 인간 마음의 자연적 반응 이상의 것입니다. 사실상 이 긍휼은 8복의 사슬 가운데 선행하고 있는 모든 인격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의 것들을 다시 상기해 보아야 합니다. 심령의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 이것들이 이 긍휼의 강에 물을 흘려보내는 샘입니다.
이 샘에서 홀러나오는 물을 가지지 않고 인간적 감상과 본능의 지표수만을 받아들 인다면, 긍홀의 강은 오래지 않아 곧 말라서 불모지에 생기를 주지못하고 목마른 입술을 축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와 복에 선행하는 약속들을 살펴봅시다.천국이 저회 것임이요,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들은 긍휼의 강으로 흘러오는 또 하나의 원류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하고 지속적이고 믿을만하고 정복의 힘이 있는 긍휼지심은, 두 개의 근 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 자신의 연약성에 대한 자각,
- 자신의 죄를 발견할 때 마음 속에서 요동치는 슬픔,
-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유한 순종과 남으로부터 오는 반감에 대한 부드 러운 수용,
- 자기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시커먼지를 안다면,
- 죄의 유흑에 얼마나 쉽게 넘어가는지를 안다면,
- 내가 행한 미덕 가운데 내 탓으로 돌릴만한 것이 얼마나 적은지를 안다면
- 내가 남에게는 엄격한 판단을 적용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얼마나 관대한 가를 안다면,
- 나의 혀에서 비난의 말이 나오려 하다가도 머뭇거릴 수 밖에 없을 것이며 형제의 헹위와 인격에 대한 가혹한 판단은 침묵에 싸이고 말 것입니다.
지극히 훌륭한 성도는공공연한 외적 폭발을 제외하고는, 가인과 유다가 가진 것 가운데 내게 없는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를 자각하고 있다면 스스로 자문하게 될 것입니다.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인가 ? 그리고 남에 대한 정죄의 말은 입 밖으로 내려는 순간 목구멍을 가시처럼 찌르게 될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 이러한 자아 인식, 자아에 대한 겸손한 평가,
- 죄에 대한 통회 자복과 하나님에게 대한 자기 의지의 순복을 안다면
- 무가치한 자들에게 거저 베푸는 것, 내가 이미 받은 것을 거저 나누어 주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가늘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 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엡 5 : 1-2)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긍휼을 받은 자만이 깊게, 철저하게, 보편적으로, 항상 긍훌을 베풀 수 있습니다. 빛은 물체에 닿는 각도와 똑 같은 각도로 반사됩니다.
많은 어두운 심령들을 밝게 비추고 그늘진 여러 곳에 밝음을 줄 수 있는 광채가 우리의 얼굴과 삶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마음을 먼저 천상적 광선의 원천으로 완전히 돌려 거기에서 나오는 빛을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러한 사상 가운데는 실제적인 명백한 권면이 두 가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의 열매가 무엇인가를 알 자는 것과, 또 하나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긍휼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수한 자선 사업과 박애주의적 행위가 실천에 옮겨지고 있지만, 그 중, 자선을 행하는 개개인들에 관한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인식 및 신앙과 동 떨어진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오늘날 세계 곳곳을 흐르는 비그리스도교인들의 자선 행위의 물줄기가 그리스도의 샘에서 흘러 나왔다고 믿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보편적 죄성의 교리를 없앤다면,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덮어버린다면, 만일 여러분이 그 십자가에서 지극히 무가치한 자들에게 끝없는 긍흘을 베푸시는 어떤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명력 있는 진정한 자선의 토대를 무너뜨리는 짓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보다 겸손하고 보다 진정한 이해에 이르도록 노력합시다.
나아가 우리가 이런 이해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소망의 닻인 그 진리를 삶의 모형으로 삼음으로써, 우리에게 그런 이해와 신앙이 있음을 보여 주도록 합시다.
아브라함은 애굽 땅에서 돌아올 때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힘입었습니다.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잘 때에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하고 "여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내가 몰랐구나"라고 외쳤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 갔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체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가게 될 때에 그 사막 지대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가운데 물을 마시고 만나를 먹었습니다. 옷이 해어지지 아니했습니다. 한나가 아기가 없어서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로 아들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103편 17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라고 말씀했습니다.
4.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저희가 긍흘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에 해당 하는 헬라어 엘레에데소나이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혹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를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그 동기는 명백히 하나님의 자비이며, 긍휼히 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 께서 긍휼히 여길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지며, 수동태가 사용되어 그 주체가 하나님 이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냅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때 B도 A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라는 의미로 이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이 위대한 사상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주고 받기식 관계는 경우에 따라 사실일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아닙니다.
모든 8복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따라서 다섯번째 복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비로운 사람들이 얻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인 것입니다.
황해도 운율에 이 찬영 장로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큰 부자로 일년 농사를 지으면 특별히 마련한 십일조 창고에 가득 넣어 두고 교회 살림을 하며 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좋은 일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집안에 잔칫날이 오면 먼저 큰 잔치를 베푸는데 그 잔치는 황해도 거지를 다 초청하여 여는 잔치였다고 합니다. 황해도 뿐 아니라 평안도, 함경도 거지들까지 몰려와 잔치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가난한 장사의 물건값을 절대로 깍지 말라고 자녀들에게 항상 당부할 만큼 선한 분이었습니다.
그곳에 공산당이 들어오면서 토지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 장로님의 과수원도 토지개혁으로 공산당에게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내일이면 과수원이 공산당에게 넘어가는 그 전날에도 하루종일 과수원에 나가 김을 매고 거름을 주며 수고를 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내일이면 남의 과수원이 될텐데 무엇 하러 그렇게 수고하십니까?"하고 물으니까 이 찬영 장로님은 "누구인들 이 과실들을 먹을게 아니오, 나는 오늘 이 과수들을 가꾸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6.25동란이 터졌습니다. 다 빼앗기고 이 장로님이 오고 갈 데도 없어졌을 때 그에게 긍휼을 입은 거지들이 모여 와서 이 장로님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그분의 손녀 되시는 이해성 집사님이 광림 교회에 다니는데 이 집사님이 남편 되시는 분이 지난번 일본의 뉴 제팬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이 기적도 부모가 뿌린 선한 씨앗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이란, 어떤 사람에게 일단 주어지면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지속되는, 그러한 취소될수 없는 선물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후에도, 구원의 보존을 위해서는, 그리고 가일층 그 성장을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확실한 감정과 행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이 다섯번째 인격은 위로부터 내리는 복을 받을 일련의 집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복은, 생명에는 생명, 죽음에는 죽음으로 갚는다는 그 위대한 법칙에 따라, 문제의 그특별 은총 (Grace)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후에도 거칠고 가흑하고 자기 중심적이고 무자비하고 베풂 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자비를 어떤 생생한 의식 속에 보존한다거나 어떤 복된 결과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종이 동료의 멱살을 붙잡고 빚을 갚으라고 말했을 때, 그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붙였습니다.
구원은 거저 주시는 선물로 우리가 받는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선물에 상응하는 감정과 행위로써 이를 보존해야 합니다.
자아를 목표로 삼는 자비는 자비가 아니지만, 자비를 베푸는 동기가 이미 받은 자 비이고 자비를 베풀도록 자극하는 것이 앞으로 받을 자비라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 한 이치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했습 니다. 우리 자신의 무가치성과, 자비로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들을 생 각할 때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하나님을 본받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명상과 믿음을 통해서는 물론 실천적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 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풂으로써, 영 적 생활을 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긍휼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있는 처소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베푸십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긍휼을 베푸는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해 주셨으니 내 주변의 적은 일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베풀 때에 우리 사회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고 그리스도의 긍휼을 베푸는 가운데 긍휼이 여김을 받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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