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잃어 버린 은전의 비유 (눅 15:8-10)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사역을 비판하며, 원망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눅15:2)예수님을 향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주님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비유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잃어버린 은전의 가치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자의 비유에서 양을 잃은 목자는 양을 단순히 백 마리 중의 한 마리의 양으로 즉, 숫자적인 개념이나 물량적인 것으로 백분의 일의 재산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양을 구하기 위하여 생명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본문에도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은 분명 열 드라크마 중의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이 여인의 돈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의 은전입니다. 헬라 시대에는 1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은전을 찾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 재산의 일부를 찾는 기쁨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이며, 이웃들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기쁨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이 열 드라크마는 팔레스틴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결혼 기념물이었을 것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증표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꿰어서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그것을 머리에다가 띠로 띠어서 남편과 남들에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다면 이 여인은 남편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드라크마는 이 여인과 남편과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나 재산의 가치 이상으로 반드시 찾지 않으면 않되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빚을 져도 다른 재산은 다 빼앗아 가도 이 결혼 기념물은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여인들이 결혼 기념물은 언제나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여인에게는 이것이 재산의 전부 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에게 마지막 남은 이 결혼 기념물은 누구에게도 줄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습니다. 영원토록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렸다면 반드시 다시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을 뒤지고 쓸어서 반드시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가치로 보면 참으로 벌레만도 못한 존재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생물학적인 가치 때문이 아닙니다. 고대의 은전에는 황제의 화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의 화상이 들어 있는 은전을 보시면서 (마22:2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셨습니다. (막12:17)에도 (눅20:25)에도 같은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처음 난 초태생의 아들은 모두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십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동물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아메바에서 진화되어 원숭이가 되었고, 더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이나, 인간의 삶에서 모든 것이 보이는 물질 뿐이라는 유물주의자들이나 공산당들이 주창했던 유물론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모든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으로 창조하시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처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은전이 여인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찾아야 되는 존재가 된 것은 은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랑과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지식입니까? 돈이나 명예입니까? 직업이나 외모에서 찾습니까? 이런 것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 사람은 이런 것들이 자신에게서 떠나버리면 비참하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나
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가장 큰 인간의 가치와 행복을 자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15:4-7)"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이렇게 기도합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가 같은 영광 가운데 있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영광 가운데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세속이 말하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진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 나를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2. 어둠 속에 있는 은전
우리는 예수께서 먼저 말씀하신 비유에서 양은 생명이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의지로서 길을 잃었지만 그러나 동전은 생명도 없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잃어버려진바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의지와는 관계 없이 죄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며, 죄가운데 태어난 우리는 동전처럼 생명이 없으므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본문의 동전을 잃어버린 곳이 방입니다. 팔레스틴의 방은 문이 작기 때문에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항상 어둡습니다. 그러기에 은전을 찾기 위해서는 등불을 켜서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 바닥에는 대개가 돌이나 진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닥에다 짚을 약간 깔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방바닥에 떨어진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는 짚을 걷어내고 바닥을 쓸어 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 떨어진 동전, 무능하고 생명이 없는 실체가 바로 죄 아래 있는 우리들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이렇게 비참합니다. 절대적으로 무능합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살아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골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이 비참한 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생명이 죽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 있는 우리를 향하여 생명을 주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앞에 찾아 나올 수 없는 인간을 찾으시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죄와 어두움 가운데서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동전 같은 우리들을 성령이 찾아 내십니다.
아마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 비유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에게서 쉽게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 본문에서는 어둠속에 있는 자들을 찾으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볼 수 있고, 세 번째의 비유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이 세 비유는 삼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인간을 찾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3. 은전을 찾은 여인의 기쁨
우리는 양을 찾는 목자의 기쁨을 알듯이 여인이 은전을 찾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눅15:9-10)"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본문에는 "찾았다"는 단어가 두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주전 3세기경 헬라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찾자마자 맨발로 목욕탕을 뛰쳐나와 거리를 달리며 외칩니다. "유레카!" "유레카!" , "찾았다" "찾았다" . 자신이 연구하고 찾는 것을 찾게 될 때 사람들도 이렇게 기뻐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찾으시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란 천사들을 말합니다. 죄인이 구원받으면 천사들 뿐만 아니라 온 우주적인 잔치가 벌어집니다. 본문에 이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와 잃은 은전을 찾는 여인의 비유를 알고 난 다음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작은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락지와 좋은 옷을 입히시면서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고 하십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아들을 안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아십니까?
죄 아래 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존재라는 사실도 모르는 죄에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 우리는 찾으시고 살리셔서 주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있게 하십니다.
여인이 잃어 버린 은전이 방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을 만난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도 듣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거리가 너무 멀게 있습니다. 당신과 하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십니까? 주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 나를 찾아 오셔서 부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만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짖고 죄 아래 빠진 순간부터 사람을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과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눅 15: 11-32)
아버지에 대하여 이 보다 더 잘 이야기한 본문이 있을까?
본문은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워진다.
그러나 실상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이시다. 죄인들을 영접하신 이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가장 온유하고 마음을 끄는 위대한 신의 현현을, 전인류에게 나타내 주셨다.
그가 죄인들을 영접 하시는 방법은 사랑의 팔을 펴서 전인류를 감싸주시는 방법이다.
그가 죄인들을 비난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영접 하시고, 말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나누어 주실 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특별한 보호와 인도로 죄인들을 당신의 은혜의 왕국으로 불러 주신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친구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얽매어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본문의 비유는 서로 상관성 있는 비유이다.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서로 대조되는 그룹이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마땅히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바른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을 배척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교회와 세상이 나뉘어져 이원화되는 현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의 이원 구도처럼 위험을 내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영접하신다. 죄로 번민하는 가련한 인생들을 그리스도는 언제나 영접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사랑으로 다루신다.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은 이같이 사랑을 나누어 줄 대상이며, 관계의 회복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식탁을 함께 할 대상이지 정죄의 대상은 아니다.
11절에서 32절까지의 두 아들의 비유는 1,2절의 등장인물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시에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데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 주며, 회개하는 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본문은 여러가지 진리를 가르쳐 준다.
세상이 인간을 버릴 때 인간도 세상을 버린다.
탕자는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또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후에 회개하는 자의 위치는 자유인의 상태가 아니라, 노예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가 노예의 심정의 심정이 되어 돌아온 것에 주목하자. 그러나 그러한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받는 환영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아들이 돌아온 데 대한 아버지의 기쁨은, 돌아온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다. 아들에게 베풀어지는 향연과 춤은 아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이다.
본문을 통하여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훈계가 있다.
본문에 나오는 큰 아들은 불공평한 것 처럼 생각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조치에 당황하고, 불만을 갖는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겼으나,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시지 않는구나>라고 불평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 하신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것이로되>
탕자의 기쁨은 한시간의 커다란 것이지만, 맏아들은 일생을 통하여 평강을 누렸다. 꾸준한 신앙생활은 황홀경을 체험하지 못하더라도 값진 것이다. 하나님의 잔잔하고 영원한 임재 하심으로부터 오는 평강은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것이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있는 죄의 모습을 보자.
탕자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배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그 마음이 선천적인 성향을 따르고 있는 한 인물을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본문은 충실하게 묘사해 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하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교만하고, 자기 멋대로이다. 자신을 살펴 보면 어떠한가? 이것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한다.
이 아들의 요구에 따라 아버지는 각각 그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12절]
그러면 큰아들의 재산은 어디에 갔는가?
그는 그 분깃을 즉시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그는 지혜롭고 현명한 자이다.
아버지의 재산은 원하였으나, 그의 사랑은 구하지 않은 둘째아들은 그 자비로운 아버지를 말로만 아버지라 불렀고, 그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를 중시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 속의 나와 같은 자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다 하나님의 선물에만 더 관심을 가지는가?
죄은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 없이,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은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방종한 삶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다.
죄의 추진력은 굉장하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 간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함께 하시지 않는다.
<먼나라>는 어리석은 자들이 염원하는 실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낙원일 뿐이다.
거기에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하였다. 죄는 끊임없이 죄의 결과를 가중시킨다. 그는 행복을 얻는 대신에 빈곤에 휩싸이게 되었다. 풍요하고,명예로운 삶 대신에 그는 예속과 수치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었고,단지 붙여 사는 돼지치기일 뿐이었다.
그의 식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금수의 먹이는 결코 사람의 배를 만족 시킬 수 없다. 그에게 먹는 기쁨은 사라졌다.
이와같은 말씀은 전체가 신자에게 주는 진리의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자기 만족의 삶을 추구하여도 결코 만족에 이를 수가 없다. 세상적인 것만으로는 참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 하는가?
인간의 헛된 추구와 그로인한 실패는 물론 인간의 자율성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아들의 분깃요구를 거절할 수도 있는 아버지, 그러나 그는 아들의 요구가 결코 갑작스러운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재산분배는 아버지의 응징의 방법인 것이다.
본문에는 죄의 성질이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인간영혼에 엄청난 파멸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렸을 때, 우리의 영혼이 택한 여정은 길고도 지루하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일하며 밤 늦게야 휴식을 취하며 빵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헛수고 일 뿐이다.
죄를 짓는 영혼의 고통은 어떤 것들인가?
그 하나는 결핍[결핍]이다.
죄는 영혼을 굶주리게 한다.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다.
친구가 없게 되는 고통이 또 있다. 이 세상의 진정한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또 하나의 고통은 노예생활이다.
죄 아래 있는 모두가 사탄의 노예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고난을 통해서 회개의 마음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회개에 이르는 마음을 본문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본문의 아들은 죄악에 빠졌던 과거의 삶을 돌이켜 봄으로써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또 자신의 위치를 살펴 봄으로써 회개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여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 아버지에 대하여 잘못되었고,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멀고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통하여 아버지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 보다도 자비와 긍휼에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친다.
본문의 중심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그 아들을 맞으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라. 그는 완전한 복음의 사면장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 아버지는 오늘도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신다.
아버지는 집나가 고통받는 아들의 처지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아버지는 아들의 실패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날마다 문열어 놓고,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회개를 미루지 말라.
용서를 위한 아버지의 준비를 보라.
그는 제일좋은 옷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는 지환을 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상속자임을 인정하는 지환을 준비하고 계신다.
아버지를 떠난 자는 지금 즉시 돌아가라.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하는자의 계속적인 순종의 큰 가치를 알라.
오늘도 이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이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사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눅 16: 1-9)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 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본문은 난해한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매우 교활하고 불의한 사람이며 그의 하는 짓도 악한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파면을 통보받고 사후 대책에 부심하다가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우선 장부를 허위 조작하여 채무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에 여력을 쏟게 되는데 그 방법의 재치에 감탄한 주인은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게 됩니다.
실로 괴악한 이 비유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이 청지기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인인 것과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약점,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거기에 따르는 상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 고 말했을 때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변명하려는 기색없이 당연히 올것이 왔다는 담담한 태도로 앞날을 위한 설계에 몰입합니다.
어떻게 보면 얄밉고 화도 나게 하는 태도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하거나 고심하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들의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필연적임을 명심하고 책임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거나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역사안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이 청지기는 자기에게 남은 기회와 권한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장부를 허위조작하여 빚진 자들의 환심을 산 것이 도덕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활용하는 지혜를 칭찬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비유중에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경우 그는 받은 것을 묻어두었다가 그것을 주인에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려고 하는 노력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던 종의 태도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떠하던 받은 것이나 가지고 있는 것은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은사도 믿음도 능력도 지식도 활용해야 합니다. 활용하지 못할때 한 달란트의 가치는 보존할 수 없음은 물론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활용의 결과이며 미문의 앉은뱅이가 걷게된 것도 활용의 결과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에서 폭풍우로 조난을 당한 배가 한 척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난파선의 선원들을 구출하려고 어선들을 동원해 수많은 생존자를 구원해 냈습니다. 그러나 워낙 배가 작고 한사람도 더 태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난파선의 틈에 끼어있는 한 선원을 보고도 그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남아있던 생존자의 구조를 위하여 지원자를 찾는데 마침 한 청년이 그 모험에 지원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는 한사코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남편도 바다에서 죽은 바가 있을 뿐 아니라 큰아들도 원양어업에 나간지 수년이 되도록 소식을 모르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 아들마저 희생이 되면 혼자만 남게 될 것이라고 애원을 하며 지원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마지막 생존자 한 사람을 살리려고 구조작업에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애를 태우면서 아들의 성공을 빌었으며 마침내 아들은 마지막 생존자를 태우고 돌아왔는데 바로 그 생존자는 생사를 모르던 그 어머니의 큰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이 청지기는 목적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빛의 아들을 능가하는 열심과 결단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의로운 일을 도모하면서, 악행을 일삼는 자들보다 얼마나 소극적이고 기피적인가에 대하여 깊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풍성한 수확을 쌓아 놓고 내 영혼만을 위한 욕심으로 고마운 이웃 또는 불우한 이웃은 전혀 잊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내게 맡기신 주인의 것으로 주인의 기뻐하실 이웃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처럼 내가 가지고 있을 때, 내가 쓸수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눅 16: 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의 설명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사로의 이름이 나와 있으나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자의 이름은 '다이브스'라고 합니다. 본문은 다이브스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그 삶의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뒷골목 빈민굴에 가보면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고 합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나라에도 거지는 존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부자 다이브스는 돈이 많은 사람을 대표하기보다는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게 죄가 아닙니다.
다이브스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을 인하여 더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과거에는 옷으로 나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우리나라 부자들 가운데 한국은 겨울에 추우니까 미국 하와이에 가서 지내고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철새처럼 더위와 추위를 피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안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많이 가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평생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 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히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소유한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뱀,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이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70 이후에는 너무 그렇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늙어 눈치보며 오래 살면 또 무엇하겠습니까? 남에게 피해주며 오래 살 필요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므로 성실하게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둘째는 육신적 죽음입니다.
세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죽은 존재는 잊혀진 존재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불신자들은 지옥에 대하여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기 위안을 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입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열 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사실에 주의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옥은 참혹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말도록 이웃과 어린 자녀와 그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옥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지옥은 무서운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불꽃 가운데서 사정없이 고통받는 곳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의 불은 육체가 타는 곳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알지 못하는 불에 타는 곳이라서 그것이 육신이 타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제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셨습니다.
② 지옥은 기도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물 한 방울의 자비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불신자에게도 비를 주시고 땅의 열매를 주시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③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람에게 비교의 고통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눈 앞에 밝히 천국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남과 비교할 때 더욱 큰 괴로움입니다.
④ 지옥은 무섭게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무디라는 미국의 의학자는 어떤 사고를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한 내용을 '죽음 이후'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에서 죽음 이후의 경험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좁고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억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다 알게 되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챠드 3세'라는 책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달린 수 십, 수 백 개의 혓바닥들이 쉬지않고 지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⑤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자기 운명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세상 낙에 빠진 사람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눈이 먼 사람들, 여기 본문 속에 부자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낙에 빠져 있는 사람들아 정신 차려라.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 하십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왜 부모가 자녀 교육을 할 때 때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초리를 예비시켜 놓고 교육합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적당히 넘기실 수 없습니다. 죄를 공의롭게 처리하십니다.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하시는데 그것이 죽음 곧 영원한 죽음,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른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가 지옥에 가면 당할 고통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그가 십자가에서 친히 다 담당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살리신 다음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의 행복과 기쁨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불신자를 부르셨습니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 자식을 바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운명을 예수님께서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가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자격자이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외치십니다. "부자야! 가난한 자야! 왜 계속 그리로만 가는가. 나 예수를 믿으라!" 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 요구를 거절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세상의 지식, 돈, 건강과는 상관없이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지구상의 13억 인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성경책이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년 6억권 이상이 팔리는 책이 성경입니다.
죽는 것은 어길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 길 중에 한 길은 분명히 가서는 안될 길입니다. 지옥을 피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에 놓인 우리 운명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죽음이 따라올 때 그 때는 기회가 없습니다. 가서는 안될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왜 이웃을 하나님이 내게 보냈을까요? 왜 전화를 하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괴롭히는 것일까요? 가는 길이 너무나 가서는 안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일학교 어린이를 통해서, 이웃을 동원해서, 사건들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강원도에 황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탄공촌이 있는 곳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막바지 인생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택시운전이라고 합니다. 택시 운전 중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한데 직업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숨걸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인생들은 수천 미터 지하에 들어가 40℃가 넘는 곳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그 안에서 먹고 일하면 탄가루가 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폐가 굳어지는데 그 병이 구폐증입니다.
나중에는 폐인으로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게 됩니다. 구폐증은 아무리 현대 의술이 발달했어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막장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기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어느 광부의 아들이 쓴 시(詩)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 하니까 나도 커서 광부가 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광부는 절대로 되지 말라 하신다.
왜 아버지가 한사코 말린 것일까요? 광부의 생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한사코 지옥에 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지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 가지고 오라는 것 아닙니다. 지옥에는 제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잃고도 선택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사람의 풍요가 있습니다.
(눅 17:5-10)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우리들의 믿음이 없어지기도 하고, 신앙생활에 피곤을 느끼기도 하며, 혹은 가정생활, 사회생활에 무력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좋은 뜻으로 시작하였다가 낙심하여 돌아서는 나약한 사람들을 봅니다. 또한 그 이유를 찾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러한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며, 제자들에게 필요한 참된 믿음을 가르쳐 주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라고 하였는데 바로 제자들의 요청 때문에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진정 믿음이 있으려면 믿음이 자라려면, 믿음이 점점 온전해지려면,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이 믿음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것만 해도 저들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이야기를 잘 압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 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내게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 하실 때에 솔로몬은 치리자로서 필요한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3:10)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솔로몬은 지혜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부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혜를 구하는 지혜 자체가 상당한 것이요, 믿음을 구하는 믿음 자체도 상당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 한 가지만 구하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한마디로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가장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도 역시, 돈 명예, 출세 등이 모든 것을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3년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다 보니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역시 믿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님의 믿음이 대단하시더란 말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시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사건적인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귀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표현하면 기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더 하소서!" 실족치 않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데에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적을 행하는 것도 결정적인 요소가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이 절대적 필요성을 깨달은 저들 제자들이 바로 이 믿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좋겠다고 하십니다. 대단한 믿음, 바윗덩이처럼 큰 믿음이 아니라 이 작은 겨자씨요 살아 있는 조그만 믿음이 있어도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순종할 것이라는 믿음의 위대성을 설명하십니다.
본문은 비유로 믿음이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종이라고 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종이라고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요15장에 보면 우리를 당신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편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친구라고 건방지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가 친구처럼 대한 다고 해서 아빠는 내 친구야! 하고 덤벼들면 후레자식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대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언제나 대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오로지 종일뿐입니다."하는 그 마음을 가져야 믿음이 자란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종이라는 의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이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편지 가운데에는 언제나 "나도 사도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예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를 예수님의 종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나 제자들이 실수한 그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식,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일들을 머리 속에 새기며 이 본문에 나타난 종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1.종이란 첫째로 소유권이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지만 자기의 생명마저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마음대로 죽지도 못합니다. 자기의 재능은 물론 심지어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 되고 맙니다. 모두가 주인의 것일 뿐 나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이라 주장하고, 거기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더 많은 복을 받아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믿음이 자라지는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좀 했다고 생각이 됩니까? 내가 지적을 나타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나타내신 것일 따름입니다. 또한 내가 말씀을 전했다 해도 주님께서 내 입술을 통하여 역사하긴 것입니다.
그 아무 덧도 내가 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도 기능도, 내 자신마저도 나에게는 전혀 소유권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의 모습이요 종의 의식입니다.
2.종은 절대 순종합니다.
무슨 일을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며 묻거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입니다. 폭우가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종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루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배도 고프고 피곤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말하기를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먹는 동안에 수종을 들며 심부름을 한 다음에 먹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은 이렇게 이치를 따지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양을 치라면 양을 치고, 밭을 갈라면 밭을 갈아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 일하라면 해야 합니다. 밤을 세워야 할 뿐 거절이한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불평이 있고 질문이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여기에 바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가리고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면 주님에 대한 절대 순종, 절대 위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인의 말씀이 종에게서 능력화되어 그것이 종으로 하여금 능력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지혜롭게 주신 말씀대로 하면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또한 종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할 때에 거기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3.이제 세번째로 생각하는 종의 특성은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을 시킨 일꾼에게는 그 대가로 삯을 줍니다. 그러나 종에게는 보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마디의 고맙다는 인사도 없는 것이 이 종입니다. 보상은 없더라도 알아주기라도 해야겠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모두들 보면 결국은 안알아 준다고 불평들 아닙니까? 그러나 정말 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다 무엇입니까? 다소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고자 하다가도 나중에는 받고자 하고, 처음에는 무조건 바친다고 했다 가도 뒤에는 조건으로 바치며 점점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조석변개라고 하지만 가는 마음과 오는 마음이 그렇게도 다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수고를 시작할 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제법 하다 보니까 무엇인가 좋은 반응, 최소한 칭찬이라도 받아야 될 것이 아니냐는 당위성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 가지고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세상은 당연히 너희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나를 먼저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며, 따라서 내 제자가 되었다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례도 없고, 보수도 없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노예입니다
어떤한 경우에 있어서도 칭찬이나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는 깨끗한 마음,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적합한 비유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를 하던 한 선교사가 홍수에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어떤 중국 사람 하나가 이 선교사를 건져내어 주었습니다. 이에 선교사가 너무 고마워서 일생 동안 이 은혜를 기억하며 살겠음이 이름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선한 사마리안 사람에게 이름이 있소? 있다면 내 이름을 말해 주겠오"하더니 그대로 가 버리더랍니다. 종은 이런 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종은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4.종은 불평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곤이나 불평, 원망이 전혀 통하지를 않습니다. 여기에는 절대 의무, 절대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때와 장소, 성격도 가리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힘들다는 말은 할 것이 아닙니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죽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힘들다는 말은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는 이미 앞선 수많은 순교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도 순교 아니면 순직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딴 소리하거나 불평할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종의 마음입니다.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결정적인 말씀이 이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수고하였으나 그 마지막 생각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지칠 만큼 많은 수고를 하고도 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우리네 동양인의 겸손한 마음과 생각의 표현 방법이기도 합니다. (손님을 위하여 상을 가득 차려 놓고도 차려 놓은 것이 없다고 하는 생활의 자세)
본문의 마지막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도록 수고하고도 일한 것이 없다는 마음! 이 마음만으로만 살아간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런 불행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리고 아내의 마음이, 남편의 마음이 이렇게 불편이나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나 내가 하는 일은 부족하다고 하는 마음, 수고하고도 부족하고 주고도 부족하며 오히려 죄송해지는 마음이 되는 거기에 진실이 있고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쉬임 없는 수고를 하고도 부족하기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정 믿음이 더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충성심도, 우리의 겸손도, 우리의 종됨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하는 자기 의식 속에서 보다 더 성장해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눅 18 : 1-8)
서론
예나 지금이나,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쉬이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재미있는 비유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싸움에 관한 것입니다. 힘 없는 여인, 하소연할 곳도 없고, 뇌물을 쓸만한 힘도 없는 연약한 여인과, 부와 권력과 아울러 교만까지 갖춘 불의한 재판관의 대결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전혀 승소판결이나 이로운 해결이 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일만 차일피일 미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얼마나 아침저녁으로 찾아다녔는지 귀찮아서 그 송사를 진행시켜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목적이 기도생활의 끈기를 촉구하는 것이어서 재미있습니다. 쉽게 구하고, 쉽게 얻으려는 편의주의자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이 가련한 과부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1. 과부가 처한 상황
어떤 어려운 일이었는지, 얼마나 억울한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혼자 사는 여인에게 있어서는 절망적인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결국을 합법적으로 보장해 줄 이는 재판관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은 어떤가? 혼자는 어느 하나도 마음놓고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과부처럼,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얼마나 눈물 흘릴 일이 많은가? 얼마나 하소연할 일이 많은가? 그가 처한 상황은 우리의 상황이요, 그는 지금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는 일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가 찾아가야 할 이가 누구입니까? 재판장이신 하나님밖에 또 있겠습니까? 이 여인은 비록 힘은 없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지혜롭게 선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일 뿐입니다.
1절에 이 비유의 동기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가르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므로 기도의 교훈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부사가 따릅니다.
항상 기도하고(눅18-1),
무시로 기도하라(엡6:18).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다(삼상12:23)
2. 과부가 취한 행동
과부에게는 재판을 위해서 소용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돈이 있어 재판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지위가 있어 한마디 말이라도 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건강한 육체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활용했습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재판관의 집을 방문하고, 법정을 드나들었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좇아 다녔는지 모릅니다. 처음에 이 재판관은 여인을 가볍게 보았고, 그의 억울함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재판관은 시달리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여인을 그냥 두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습니다. 물론 그의 억울한 문제는 모두 해결이 되었습니다. 과부는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을 보지 아니하고, 오직 부지런히 재판관을 찾아다닌 것으로,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라 응답이 있을 때까지 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기도의 간절성을 과부의 원한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원한은 악한 의미에서의 원한이 아니고 마음에 맺힌 한과 같은 간절한 소원을 말합니다. 삼상 1:15-16에 한나의 기도에 대하여 원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통했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3. 주님이 찾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과부의 의나, 재판관의 불의가 아닙니다. 이 여인의 끈기있는 행동입니다. 처음 한 두번 재판관을 방문했던 여인은, 외면을 당하고 핀잔을 받았습니다. 물론 멸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쫓아다녔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예수님의 핵심입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도 이렇게 끈질긴 여인에게는 항복을 하고 마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녀들의 소원을 외면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 부분에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을까요? 이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그것은 인내하는 믿음이요, 용기있는 믿음이요, 끈기있는 믿음입니다. 말세의 사람들은 조급해 하고, 무언가 금방 이루려하고, 참고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끈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계속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필요한 때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말세의 신자들의 믿음이 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가장 기도가 요구되는 말세지말인 재림직전에 깨어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을 미리 아시고 탄식하신 말씀입니다.
도시 속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중산층 이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에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사납고 우리는 약합니다. 섰다고 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때문에 해결책은 기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 대화하듯이 하나님과 나와의 기도는 부모와 자녀의 대화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고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재판관과의 대화가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다시 자신의 문제를 빨리 해결해 달라고 독촉하는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통화선이 끊어지면 이런 독촉도 불가능합니다. 주님을 성가시도록 조르고 조릅시다.
손은 과부의 소원을 요청하는 기도의 손일 수도 있고, 재판관의 거절하는 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의 해결을 약속하는 손이라면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주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손을 부끄럽게 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구원을 허락하시고, 내가 죄를 고백하면 기쁘게 용서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우리들의 기도하는 손을 들어주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결론
쉽게 취하고 쉽게 깨며, 쉽게 사랑하고 쉽게 식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도 다를 바 없이 무엇이나 속성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조급한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주일 동안에 우주와 만물을 하나씩 만드신 분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이들이 됩시다. 기다림도 믿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내 기도가 주님을 귀찮게 할만큼 오랫동안 부르짖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속히 응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눅 18:9-14)
학교나 직장에 들어갈 때 더러 추천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추천서가 첨부되어도 그 추천서는 우리 현실에서 그렇게 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경우 대부분 추천서를 본인이 받아다 본인이 제출합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없고 많이 미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쓴 추천서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의 추천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부수적인 자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서류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추천서입니다. 추천서를 받아든 사람은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합니다.
우리나라 어떤 목사님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미국 주요 도시를 돌아 보면서 교회들을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외국인 가정은 방문 전에 반드시 연락을 해서 사전 허락을 받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각 도시를 돌면서 그 지역에 있는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에 각 교회로 연락을 하고 그곳에 가면 교회에서 신세를 질 수 있는지 여부를 알려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추천해 줄 것을 지도교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추천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그 사람을 추천합니다. 그러므로 미화해서 쓰지 않고 자기가 겪으면서 보고 느낀 그대로를 씁니다. 추천서는 본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추천하는 사람이 추천서를 원하는 사람에게 직접 우편으로 발송해 버립니다.
이 목사님은 몇 개월 동안 여러 도시를 돌면서 교회를 연구할 수 있었지만 추천서를 지도교수가 어떻게 썼는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추천서를 쓰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쓴 것이지만 그 내용이 좋지 않을 경우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추천자가 추천서를 쓸 경우 그 어려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추천서를 쓰신다면 뭐라고 쓰실까요?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쓰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쓰시는 이유는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지만 당사자는 하나님을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서 죄인라고 쓰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싫어서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무조건 비판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 죄인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을까요? 그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1.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에 이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는 의로워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오늘날 현대인들 중에는 바리새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사람의 인생을 육신의 생명으로 한정하고, 숨이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죽음 이후에 있는 천국과 지옥도 부정하고 죄에 대한 벌도 의에 대한 보상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죄에 보상도 인정하고 죄인에 대한 심판도 인정하여 나름대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정도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인은 은근히 자기를 의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도 '나를 의인으로 인정해 줄 것이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선을 부정하십니다. 더러 불신자들 가운데 감동적인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선을 부정하십니다.
이 명자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경찰관의 아내로 네 자녀를 데리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어느 해 겨울 방안으로 연탄 가스가 들어와 남편과 세 아이가 죽고 9살 난 딸 아이와 단 둘이만 겨우 살았습니다. 이 사실이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무명으로 그 여인을 도왔습니다. 당시에 불신자들도 힘써 그녀를 도왔습니다. 남편 죽고 자식 잃고 난 뒤에 이 여인은 큰 돈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졸지에 큰 돈을 갖게 된 이 여인은 그 돈을 혼자 쓰지 않고 절반을 잘라 어려움을 당하는 가난한 택시 운전사 가정을 도와 주었습니다. 하나님도 이 여인이 행한 일을 잘한 일이라고는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이 일로 천국에 가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 정도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갈 것 같은데 하나님은 아니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불의를 아시고, 불신자의 선도 아십니다. 하나님이 이 여인이 행한 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이 하나님에게 만족을 줄만한 선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에게는 인간의 그 어떤 착한 행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는 미달합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수십 층 빌딩을 보면 높다 말합니다. 산에 올라가 이 산은 높다 말합니다. 그러나 구름 위에서 보면 모두가 납작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대단해 보여도 하나님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미국에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여자 배우가 있습니다. 그녀는 많은 남자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가 한 남자와 가장 길게 결혼 생활한 것이 고작 5-6년입니다. 보석을 사주고 달래고 달래서 겨우 5-6년을 삽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그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만이 간음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나쁜 상상만 해도 그것을 하나님은 간음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동기와 행동을 하나로 보시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표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주례를 하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16년간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한 부부였습니다. 여자 나이 40에, 남자 나이 50에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가 반대하여 결혼하지 못하다가 끝내 결혼한 것입니다. 남자는 중간에 방황하기도 했지만 여자는 일편단심으로 그 긴 세월을 견디었습니다. 기가막힌 사랑입니다. 그런 여자나 마음에라도 나쁜 생각을 안가질까 몰라도 우리같은 보통 평범한 사람은 사랑했다 미워하고 미워했다 다시 사랑하곤 합니다.
이런 인간이 스스로 '내 마음은 깨끗하다' 하니 하나님이 보실 때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준에 맞는 인간이 없습니다.
2.하나님 추방한 세계에서의 선은 선이 아닙니다.
한 때 프랑스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국왕을 무시하고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되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을 떠다니면서 여객선을 습격했습니다. 물건을 빼앗고 여자들을 강제로 욕보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이 이들을 섬멸할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해적들은 나쁜 일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동료를 위하여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물건을 빼앗으면 한 사람도 욕심부리지 않고 공정하게 분배하여 나누어 가졌습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가 있어도 혼자 차지하지 않고 공유했습니다. 동료가 부상을 당했을 때는 밤잠을 자지 않고 곁에서 치료했습니다. 그 후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 모두 체포되었을 때 이들은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이들이 "우리도 좋은 일을 한 것이 있습니다" 말했지만 국왕과 법을 무시한 선은 선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안 믿는 세계의 선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추방하고 자물쇠를 잠근 그들의 선을 하나님은 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자신들이 앉아서 행한 선은 하나님과는 관계없습니다.
가출한 아이가 친구를 도와주었다 해도 어머니는 그 선행을 선행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렸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하여 행했을지라도 내가 했기에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선은 하나님이 인정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세계에서도 내가 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치 않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한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나름대로 판단합니다. 현대인들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흑인이 목욕탕에 가서 다른 사람의 두 세배의 시간을 들여 목욕을 한다 하여도 검은 피부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흑인 특유의 냄새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표범은 반점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가 원하는 완전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선을 보시기 바랍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12)"
자기 행위와 선행으로 구원받을 육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8-9은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천국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보통 착하다는 유순한 사람을 보면 그 마음의 교만이 보통이 아닙니다. 스스로 괜찮다는 사람들로 천국이 가득찬다면 그곳은 교만한 사람 천지일 것입니다. 그곳은 결코 천국일 수 없습니다.
자기의 악한 행실보다 자기의 선행, 의로움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세리와 창기가 왜 구원을 받습니까? 자기를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까? 자기 선행과 의로움을 의지했습니다.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감옥에 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 사람 중에서 7-8 명은 자신은 죄없이 들어왔다고 말한답니다. 감옥은 자칭 의인이라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감옥보다 더한 곳이 지옥입니다. 그곳에는 100%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입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6-18)"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위로는 안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천주교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없이 한 과거 선행이 하나님께 전혀 인정받을 수 없듯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악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 지폐는 휴지 조각입니다. 그런데 누가 크레디트 카드를 주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예수라는 카드 밖에 없습니다. 이 축복을 우리만 누리는 것은 너무나 아깝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하나만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 앞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선물을 받으라고 하나님이 요청하십니다. 사람들이 지금도 거절합니다. 그러나 주저하지 말고 받으십시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눅19:11-27)
이 비유의 동기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림에 있어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며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셔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긴 기간 즉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없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실터인데 저희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오르시고 능력과 권세로 로마의 세력을 꺾으시고 당장에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가르치시고 승천과 재림의 기간이 길게 될 것을 말씀하시며 그 기간이 의미없는 기간이 아니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하여야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므나' 희랍화폐단위 -- 100데나리온이 1므나
*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사도들의 질문에 너희들은 때와 기한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요구하심.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가장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즉 성도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예배와 봉사와 거룩한 생활이다. 집회출석, 교회봉사, 생활의 거룩함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충성, 책임감 있는 직분자들 되라.
* 주님이 재림하실 때 충성여하에 따라 상급이 비례된다. 태만과 게으름은 있는 것도 빼앗긴다. 그리스도께서 왕됨을 원치 않는 자들은 무서운 진노로 죽인다.
착하고 신실한 청지기
눅19:11-28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25:14-30)절에 있는 달란트의 비유와 대조가 되는 말씀이며,
누가복음 17:7절에 있는 무익한 종의 비유와,
마태복음 20:1-16에 있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로 서로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이 몇 곳에 있는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 또는 종 또는 재물 맡은 자, 즉 청지기라는 명칭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첫째 누가복음 17:7-10을 보면 종이 수고하였을지라도 그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그 댓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의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주인이 그에게 앉아 쉬게하지 않고 도리어 주인의 먹을 것을 준비하고 그리고 그후에야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한 것 뿐입니다. 해야 옳다고 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보아 3가지를 겸비해야 합니다.
(1) 믿음직해야 합니다.
(2) 겸손해야 합니다
(3)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충성스러운 종이 수고하고 공을 세운 후에도 가져야 할 겸손이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요 바로 청지기의 자세인 것입니다. 종은 충성심이 있어야 하는데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고 적은 일에 충성해야 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둘째 마태복음 20장에 나타난 포도원 일꾼에 대한 그 주인의 대우에 불평을 품는 비유가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살리는 데 유익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천국을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위한 품꾼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만난 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낮에 만난 품꾼도 해질 무렵에 들여보낸 품꾼도 해질 무렵에 들여보낸 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였는데, 삯을 주려할 때 먼저 온자들 중에서 원망 불평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온종일 수고하고 시달렸는데 해질 무렵에 한 시간 일한 저 사람과 같은 대우를 한단 말입니까? 하고 항의 소동이 납니다. 이것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남이 받는 보수나 대우에 대해 시기나 질투로 자기에 대해 우대가 없음을 원망 불평하는 마치 장사치와 같은 정신을 가진자들은 천국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경계의 말씀인 것입니다. 삯을 위해 주를 섬기고 남의 직책과 대우에 시기와 질투로 불평하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소망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해주신 사랑의 은총을 힘입어 감사와 찬양과 영광으로 맡은자의 일꾼으로 사명을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주의 일에 어떤 댓가를 받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고 봉사자의 자세로 주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공의의 사랑에 빚진자의 심령으로 갚겠다는 은혜의 보답의 신실함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약속의 말씀의 상급을 확신하여 믿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달란트의 비유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기회와 능력의 분야는 다를지라도 충성스러운자는 같은 상급을 받을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하여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았던 자나 두 달란트 맡았던 자나 다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았습니다.
넷째 그러나 본문에는 열 므나의 은을 가지고 열 사람에게 똑같이 분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실 때 맡겼던 것을 도로 찾을 때 그 충성의 정도에 따라 상급과 칭찬의 정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인간을 쓰시는 원칙과 그에 대한 대우와 처리는 과학적이고도 불평할 수 없는 철저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수고는 자발적 봉사이며 또한 하나님의 종된 인간의 마땅한 본분으로 이 수고에 대한 치하와 공로에 댓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내게 맡기신 일에 충성하고 내게 약속한 것을 주님에 대한 감사한 것뿐이고 남에게 대한 우대와 상급에 대한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하겠다는 것입니다.
3. 같은 분량의 직책을 맡겼을 때에는 그 충성의 정도에 따라 상급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 세가지의 진리를 우리 모두가 깨닫고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므나를 나누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장사하는 말씀은 현대어 영어 성경대로 번역한다면 맡아서 관리하라는 말입니다.
Occupy Till I, come 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번역에는 Occupy 대신에 trade란 말을 썼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왕으로 오실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맡아서 관리하라는 청지기란 사실입니다.
그가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나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피를 미워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오시는 날 우리가 그를 위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그의 뜻대로 보관하고 관리하여 그에게 충성하게 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서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예비하여야 그에게 한므나를 맡은 자로 당연할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왕됨을 거절하고 내가 스스로 그의 맡기신 것에 대하여 왕노릇 한다면 그 결과가 주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든 자는 다섯 고을을 맡는데 한 므나를 받아 자기 마음대로 악한데 더러운데 헛된 사욕에 맡기신 것을 허비함을 보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더니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는 평강의 왕이요 사랑의 왕이요 의의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죽은 후에 그를 따라 죽는 자의 없고 죽은 후에 그를 따라 죽는 자도 없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살아서 세계를 정복하는 큰 권세와 충성하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나폴레옹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후에 그를 위해서 죽은 사람도 없고 그를 위해 재물을 바친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때에 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재림해오신 예수는 그가 죽은 후 지금까지 온 세계 수 억의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살고 또한 그를 위하여 바치고 그를 위하여 죽습니다.
주님 재림이 임박한 현실에서, 지난날에 주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들을 주님을 위해 많은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면 주신 므나를 빼앗듯이 주신 것도 회수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탁은 충성입니다. 작은 일에도 충성이요 남이 보든 말든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이요 댓가를 생각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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