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신약개론!!

[스크랩] 신약신학 제 3강

하나님아들 2013. 8. 3. 11:36

신약신학 제 3강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서론으로써 이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가 예수의 주신 메시지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특별히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이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에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του ουρανον, 하나님 나라라기보다는 하늘 나라라고 하였죠. 이것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유대의 전통 즉 랍비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한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의미가 다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통일해서 보통 부르는데 이 때의이 βασιλεια의 이 개념이 히브리어의 에 해당되는 개념으로서 전에는 히브리어의 이 개념에서 의미를 도출하기 보다는 헬라어로 βασιλεια는 장소의 개념으로 많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옛날 유대의 세계관에 의하여 삼층 세계관 즉 하늘, 땅, 지하의 3층 세계관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즉 하늘 나라를 저 하늘에 있는 장소로 우리가 종말에 가거나 보통 죽으면 간다는 그런 장소적인 개념으로 많이 생각을 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 구약의 히브리어의 이 쓰여진 곳을 보면 대개가 dynamic sense 역동적 의미로
①다스림. 통치 혹은 통치권 소위 영어로는 reign, rele의 의미 소위 dynamic sense가 강하다. 그래가지고 최근에는 1950년대 60년대에는 하나님 나라가 신학의 중심이 되었을 때 주로 이렇게 dynamic sense로만 이해할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런데 사실 구약에 있어서의 은 동적인 개념이 아주 주개념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여러 가르침에 보면 항상 이런 동적인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②장소적인 개념이 쓰였다. 조금 있다가 보겠지만 이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동시에 쓰이는 동사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문이 있다. 그래서 무슨 문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하나님 나라의 문에도 열쇠가 있다.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에 장소적인 개념,sphere이 개념을 우리가 다 떨굴 수가 없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 개념에는 이렇게 동적인 개념이 많이 있고 심지어 그것이 주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대는 장소개념이 강력하게 나오고 주 개념이 들어올 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③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이 강할 때가 있다. 대개의 경우 신학자들이 어느 하나만 가지고 이것 뿐이라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전체가 다 의 변형인데 그 하나님 나라가 나오는 구절구절마다 어느 개념이 더 앞장서 나오느냐의 문제이지 어느 하나만 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하여간 위의 세 가지의 뉘앙스를 가진 개념이다.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가 이렇게 정해져서 나오는 예가 아주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 나라와 대칭되는 사상들은 상당히 흔하다.
그령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의 왕되심,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시고 그래서 우주 온 세상의 왕이시다 하는 개념이 강하고 또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라는 사상이 아주 구억에 강하다. 그래서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왕되심, 이 즉 신약의 ‘하나님 나라’에 대칭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묵시문학에 있어서 오는 세상, , 묵시문학의 큰 특징의 하나가 역사를 둘로 나누는 것이다. 이 세상 즉 satan이 통치하는 악과 고난의 세상과 오는 세상, 하나님이 통치하는 오는 세상 즉 메시야가 와서 이 세상을 종결짓고 새시대, 새세대를 가져온다(연다)는 것이 묵시문학의 큰 특징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렇게 묵시문학의 오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대응되는 그런 것들이다. 개념이다.
하나님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왕권을 종결시키고 스스로 통치하심으로 구원의 시대가 열린다는 사상, 그래서 고후 4:4에도 사탄을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느냐면 ‘이 세대의 왕이라’ ‘이 세대의 신이라’ 고 한다.
이렇게 이 세대, 이세상을 사탄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나 오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릴 텐데 오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신이고 하난미이 왕이라는 것이다.
이 사상이 벌써 묵시문학의 원조중의 하나인 다니엘서에 나타난다. 그래서 단2:44/7:14ff에 보면 종말에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사상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이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내용이 아주 비슷하다.
7장에 보면 나타나는 것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환상과 더불어 나타난다. ‘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는데 단 7:18이하에 보면 거기에 무슨 의미를 갖느냐면 종말에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 거기서도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고 개념화 되어서 나오지 않고 그냥 나라를 받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는다고 나온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라는 고정된 개념은 구약성경가ㅗ 유대교에 아주 드물게 거의 안 나타나는 개념이나 그와 대칭되는 개념들, 가령 오는 세상 또는 하나님의 왕되심 이런 것들로는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들이 있어야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에도 물론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온 세상의 정당한 주가 정당한 왕이 하나님이라는 것.
ⓑ그런데 어덯게 된 셈인지 사탄이 하나님의 왕권을 찬탈해서 지금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
ⓒ이 사탄이 하나님의 권한을 찬탈해서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이 세대가 종결되어지고 오는 세대 즉 이 세상이 이제 종결되어지고 새 세상이 도래한다는 묵시문학적인 종말론 또는 역사관 이것이 세번째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 나라라는 고정된 개념은 잘 안나타나지만 그에 대칭되는 개념들이 사상들이 또는 생각들이 구약과 유대교의 여러곳에서 나타난다고 그랬는데 예수님 당시나 또는 직전 직후에 유대교의 여러 분류에서 어떻게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나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그래야 예수의 가르침이 얼마나 그들과 가깝고 또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잠간 살펴보면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선지자들의 주의날 The day of the Lord 사상을 이어받아가지고 이 ‘주의날’을 오는 세상으로 보고 이 오는 세상은 묵시적인 사건으로서 그날의 종말론적인 심판이 일어나며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과 질서를 완전히 한꺼번에 종결지으시고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고 온 우주가 완전히 쇄신된다고 보았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하나님과 더불어 온 세상을 통차하게 되며 모든 이방민족들이 완전히 굴복하게 된다. 그때는 의가 승리해서 이 세상이 더 이상 악과 고난의 세상이 아니라 의로운 세상이 된다. 이런 것들이 묵시가들이 바랐던 오는 상이었다.
랍비들도 이 오는 세상이라는 개념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오는 세상의 상황을 묵시문학가들보다 더 형세적으로 생각하였다. 물질적으로 생각하였다. 다만 오는 세상이 이 세상과 다른 것은 양적으로 더 풍부하고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는 세상의 모든 상황이 이 세상의 연속이다. 그래서 랍비들의 부활에 대해서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는데 그 때에는 어떤 상태냐의 논쟁이 있다. 그때에 어떤 결론이 나느냐면 우리가 병고에 시달리는 그러한 약한 몸이 아니라 더욱 강한, 아름다운, 좋은 몸을 가지나 지금의 몸과는 같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한 상타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남편과 아내가 친구와 친구가 서로 알아보는 그런 상태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의 연소으로 이렇게 보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악과 고난이 없고 모든 것이 더욱 좋고 아름답다는 그것 뿐이지 다른 것은 없다. 단절보다는 연속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들의 오는 세상에서의 상황은 아주 earthly하게 이 땅적인,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이 사람들이 생각하였다.
이사람들에 있어서 한가지 중요한 강조점은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이 세상이 언제오느냐?
메시야가 언제 와서 어떤 세상을 가져오느냐?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오는 세상’이 오는 것을 이스라엘의 회개가 있을 때라는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그때는 그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열혈(심)당원들은 좀더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도 랍비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이세상적이게 하나님 나라를 상상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에 있어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오는 세상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무엇과 동일시 하였느냐면 이스라엘이 온 세계를 정복을 해서 통치하는 것과 동일시하였다.
하나님의 통치가 곧 이스라엘의 통치와 동일시되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무엇이었느냐하면 ‘자유’라는 개념이었다. 이방의 식민지주의적인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과 자유, 이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이방에게 더 이상 압제받고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이방을 통치하는 것을 상상하였다. 또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사회정의’가 중요하였다. 그래서 오는 세상에서는 ‘평등’이 이루어지고 ‘정의’가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다 종으로 만드는 것이 유대인의 이상이나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자기들 사이에는 주도 없도 종도 없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혈당원들의 AD 66,70년대의 소위 유대정쟁을 일으켰을 때에 로마 사람들과 전쟁을 했을 때에 이들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에 제일먼저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노예방부와 빚채권,채무장부를 다 불태워 버린 것이었다.
옛날 우리 한국에서도 노예난이 나면 대개 그렇게 하였지요? 이렇게 그들이 사회정의를 상당히 강조하였다.
이들은 오는 세상, 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고 보았느냐면 자기들의 가만히 기다렸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이스라엘이 회개만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투재을 하샤 얻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소위 聖戰 이스라엘 초기 이데올로기인 성전 holy war를 치룸으로 당시의 로마의 압제자들과 성공적으로 투쟁해서 이겨서 이스라엘의 통치권이 확립이 될 때에 이러한 ‘오는 세상’이 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오는 세상, 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느냐? 인간들이 투쟁으로 온다고 이렇게 보았다. 그 투쟁이 무엇이냐 하면 이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초기 이스라엘의 특히 출애굽이후의 聖戰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이들이 자기들의 모델로 삼은 것은 마카비형제들로 보고 聖戰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려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유대교에서는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를 공통적으로 어떻게 보아쓴냐 하면 ①묵시적인 사건으로써 이 세사이 끝나고 하나님이 직점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 세상, 새 세대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있고 ②이것이 더이에서 이루어지느냐면 땅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의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황 자체에 대한 생각들이 아주 이 세상적이었고 물질적이었다. 유대교에 있어서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있어서 또 하나의 특징은 ③민족주의가 아주 강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의 통치와 직결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원만 직결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와 직결되었다. 아주 강한 민족주의...
또 하나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느냐면 ④Synergism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으로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랍비들의 인간들이 회개로, 의를 실천함으로, 열혈당원들은 자기들의 직접적 투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하나님의 협동으로 보았다.
자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두번재로
2. 예수께서는 그러면 어떻게 가르쳤나?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했나를 볼 때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장래에, 미래에 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점을 우리가 어디에서 쉽게 볼 수 있느냐 하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볼 수 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중요한 요청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것이다.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기도로 기도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기도제목으로 삼으라는 그말이다.
이 악과 고난의 세상을 종결시키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그 세상 세대를 빨리 가져오소서 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것으로써 미래에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써 dejure 법적으로 원칙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defacto누가 이세상을 통치하느냐면 사탄이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이미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데 이 통치가 실제로도 defacto로도 세사에서 확립이 되어서 그러니까 하늘에서 하나님이 법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로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바와 같이 땅에서도 실제로도 defacto로도 하나님의 토치가 확립이 되어서 사탄을 완전히 결멸하고 타락한 세상과 인간들을 구원하시옵소서 하는 기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이가 있느냐면 예수께서 유대 묵시사상 곧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는 새로운 세대를 말한다. 그런데 그 때는 미래에 오는 것이다라는 묵시문학의 사상을 예수가 이어받은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묵시사상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며 모든 죄악이 일어나며 이 온 우주가 갱신된다는 새롭게 된다는 사상(마19:28)과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는 사상들을 가르치는데 이러한 것들은 다 예수가 묵시문학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마19:28을 읽어보라 거기에 세상을 새롭게 하며 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을 헬라어의 παλιγγενεσια의 번역이다. 그것은 세상이 새롭게 창조되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타락한 이 세상이 새롭게 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묵시문학과 비슷한 사상들을 가르쳤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집에가서 찾아보기 바란다. 막13:32/마24:42,50/눅12:46/마25:13/10:23/24:44/눅18:8/21:36
이러한 곳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는 실재로서 미래에 오는 실재에 대해서 유대의 묵시문학과 비슷하게 가르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제 이것도 묵시문학과 비슷한데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그러면 언제 온다고 보아쓴냐? 아주 가까운 장래에 온다고 보았다.
금방 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소위 imminent expectation 금방 온다는 사상이 예수에게 강하다. 마10:7/눅10:9/눅19:11/막9:1/눅21:31/막1:15. 이러한 데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실제인데 그것이 금방 도래한다고 그렇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황(conditions)
이것을 우리말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느냐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유대교와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별로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또는 오는 세상을 아주 이 세상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이런 것이 별로 안나타난다. 또 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와 우리 신약의 전통을 상당히 많이 이어 받은 이스랆교에서는 종말에가는 파라다이스, 이 천국을 아주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 유대교보다 더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성전을, 이스람교를 위해서 전쟁을 하다가 순교를 하면 파라다이스의 제일 높은데로 가는데 그 가는 길목마다 아주 아름다운 천사들이 있는데 이 천사들과 가기 마음대로 결혼할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아주 육신적이고 물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렸다. 먹는 것이 풍부하고 육신적인 향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 기독교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타지를 많이 그려놓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금으로 깔려 있고 다이아몬드가 어떻고 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구체적으로 하나도 없다. 좀 목마를 정도로 하나도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라칠 때에 다만 한가지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 일반적인 구원론적인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지 그 상태가 어떠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하나도 그린 것이 없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는 어떠 어떠하다고 비유를 많이 하였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는 어떠어떠 하다고... 그러면 그럴 때에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려주었으면 우리가 상상할 때에 쉬울텐데 그렇지 않다.
제일 구체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 가르침이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믿음의 백성과 먹고 마시는 그 그림만 그렸다.
그리고 이제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가르치기는 가르쳤는데 그것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구원을 의미한다(눅19:9ff)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그 자녀들로 귀환되는 것을 의미한다(눅15:11ff). 거기에 아버지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기쁨이 있다는 등의 이런 것만 알지 아버지의 집이 금으로 지어지고 방이 얼마나 큰지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모른다.
또 하나님 나라는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을 독일말로 하면 Umwertung aller werte의미가 있다. 모든 가치가 뒤집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막강하고 부자고 이 세상에서 즐긴 사람들은 어떻게 돼요?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윙나을 받아 버렸으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위안을 못받는다.
그러면 누가 위안을 받는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슬퍼하는 자들, 그래서 이른바 산상수훈에서 누가 복이 있는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또 우는 자들이 복이 있다. 또 누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어요? 그 대신 누가 지옥에 떨어져서 죽을거라고 해요? 부자가. 이렇게 완전한 가치의 전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가치가 완전히 도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 또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막2:7). 하나님 나라에는 종말에 기쁨이 있는 곳이다(막2:19).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즐긴다. 오는 세상의 생명을 즐긴다(눅20:34ff). 그러므로 거기에는 더이상 죽음이 없고 거기에는 더 이상 자녀들을 낳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 더 이상 결혼도 없다. 이렇게 무엇무엇이 없다는 것. 거기에는 더이상 배고픔이 없고 목마름이 없고 더 이상 고난이 없고 울음도 없다. 평화와 의가 가득차며 그러기 때문에 독일말로 Heilwerdem 우리 모두가 온통 아주 만족한 상태에 이르는 그것을 shalom이라고 한다. 우리의 온 실존이 부족함이 없고 아픔이 없고 무엇무엇에 대한 간절한 바램이 없고 만족한 상태들을 예수가 여러비유들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축복들이 다 어떻게 오느냐?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절단된 교제의 회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절단된 관게의 회복이다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리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게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을 가져오기 위한 실제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초월적인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실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실제 그것은 내재적인 실제는 항상 제한성,한계성과 임시성 등을 특징지워져 가지고 그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만족을 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세상의 한계성과 임시성, 사라져 가는 이런 상태속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원인데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무조건 정의상 초월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초월적인 실제는 곧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것으로 그릴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제한되어, 한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초월적인 실제는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느냐? 기껏해야 비유로 밖에 가르치지 못한다. 이 세상적인 것으로 초월적인 실제를 잠간 견주어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도 비유의 도가 중요하다. 비유가 어떤 진리를 나타낼 수는 있지만 또 그것이 비유이기 때문에 초월의 진리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왜곡한시키는 비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비유를 들지 않았다. 아까 이야깋나대로 좀 더 추상적인 기쁨이라든지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다시 회복된다든지 등의 비유지지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거기서 밥을 많이 먹게 되는지, 밥안먹어도 배부르게 살게 되는지 등의 인간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비유에는 없다. 가장 물질적인 비유가 있다면 그것은 잔치비유이다. 잔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잔치는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베푸는 하나님이 얼마나 풍요로우신가? 풍요로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로 우리에게 큰 상을 베푼다는 것이다.
우선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우리 제한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무한한 자원에 참여함을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는 뭐가 없는가? 베고품이 없다. 이것도 비유이다. 목마름이 없다. 풍요로움이 있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잔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기쁨을 가져다 준다. 풍요와 기쁨,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타락한 피조물의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을 예수는 가장 즐겨 어떤 비유로 말했느냐면 잔치라는 비유로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유대교나 이스람교 같이 아주 세상적인 가치들로 그리지 않은 것이 아주 의미심장하며 아주 천만다행이다.
거기에 예수의 가르침의 진리됨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됨같이 그려놨다면 생각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무슨 구원의 능력이 있겠는가? 이 세상을 조금 잘 만들면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해방신학자라는 그러한 사람들이 그렇다. 해방신학자들 뿐 아니라 우리 복음주의 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말에 그 쓰는 용어가 그런 식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확장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가 있는 content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특별한 context에서 쓰이지 아니하면 무슨 인상을 주는가 하며 우리가 노력을 해서 아까 랍비들이나 열혈당원들 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해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 같이 그래서 이 땅에 무슨 하나님 나라의 reality가 될 수 있는 것 같이 오해하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가 오는 세계에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가르치고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라고 가르쳐주기는 주어야 하지만 초월성을 보호하여야 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자세하게 세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리기를 거부하고 다만 그것이 종말에 구원을 의미한다는 구원론적인 천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4.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하나님 나라의 옴. 바로 이점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통치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에서 제일 독특한 부분이다.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ηγγιλεν η βασιλεια του Θεου.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벌써 여기 임했다. 당도했다고 스스로 선포했으며 자기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선포하도록 가르쳤다. 막1:15과 그병행절 마4:17.눅10:9-1.
곧 하나님께서 사탄을 꺽고 그의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올 그 사건이 임박했다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임박했을 뿐 아니라 벌써 여기 도착했다고 그렇게 가르쳤다. 눅11:20/마12:28. 예수 자기의 선포와 자기의 사역에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곧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자기의 선포와 자기의 사역에 있어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실제가 되어서 나타나고 있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느냐?
우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하나님이 정당한 통치자이시고 하나님이 사탄을 몰아내고 자기의 구원의 통치권을 확립하신다고 선포하였다. 즉 하나님이 왕이라고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왕권이 벌써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유대묵시문학에서 이 세상이 종결되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새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 시간이 벌써 와서 지금 그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임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권이 벌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통치권이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심판과 구원이 일어난다.
그러면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는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예수의 귀신쫓는 일과 병고치는 일이 그 증거이다. 예수의 귀신 쫓는 일과 병고치는 일이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주권이 막강한 구원의 힘을 드러내고 있는 증거이다.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서 사람들을 귀신의 통치에서 해방을 시켰다. 이 귀신들은 사탄의 종들인데 이 사탄의 종들인 귀신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래서 이 예수의 귀신쫓아냄은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남이요 하나님의 나라. 통치가 곧 완성되리나는 표징이다.
눅11:20,29을 보세요.
여기가 무슨 이야기인가?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교여행 보냈다. 가서 뭐하라고 하였는가? 거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귀신들을 쫓고 병자들을 고치라고 하였다. 자기의 하는 일을 그대로 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제자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의 성공담으로 기쁨에 가득차니 예수가 뭐라고 했는가?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 눅 10:20절을 읽었는데 아주 옳은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서 그것으로 아주 좋아하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무엇이냐? 귀신의 통치권이 종결된다는 말이다. 귀신의 통치권이 종결되고 그 대신 누구의 통치권이 그 사람들 위에 확립이 되는가?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립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그들 위에 실재(reality)가 되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 그게 11:20절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낸다ㅁ녀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을 예수가 왜 하고 있어요? 예수의 원수들이 예수의 귀신 쫓아내는 일을 뭐라고 단정하였어요? 귀신들의 두목인 사탄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예수의 귀신 쫓아내는 일을 비꼬았다. 그런데 예수께서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가당치 않다고. 내분이 일어나면 그 집이 망할텐데 어떻게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귀신을 쫓애날 수 있다고? 더 강한자, 더 강한자가 이 귀신을 꽁꽁 묶었을 때만 종들을 쫓아내고 그 집을 노략질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은근히 자기가 무엇을 나타내느냐면 예수가 바알세불보다 더 강한자로써 바알세불을 꽁꽁 묶어가지고 바알세불의 종들을 다 패서 그 집을 노략질하고 쫓나낼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곧 하나님의 힘으로, 힘을 입어서 마태복음 판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누가복음 판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이든지 하나님의 손가락이든지 하여간 하나님의 힘으로 귀신들을 지금 쫓아내고 있다면 지금 자기가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부인한 것이 무엇인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자기가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을 자기가 부인하였다.
그러니까 자기가 말을 할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하나님의 힘으로 쫓아낸다는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화되겠는가? 하나님 나라가 실재화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귀신의 통치를 종결지으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함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시는 그 구원을 주시는 그 통치권이 지금 자기를 통해서 지금 귀신 쫓음을 받은 그 사람에게 너희들에게 reality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reality가 되고 있다. 이미 임해서 그것이 실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귀신 쫓는 일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이미 세상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사탄의 사슬에서 인간들을 해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사탄을 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21절 보세요.
거기에서 예수가 사탄보다 더 강한자로써 사탄과 투쟁해서 이겨서 사탄을 묶고 사탄의 집을 노략질하는 것으로 자기의 귀신 쫓는 것을 비유하였다. 귀신들이 사탄의 종들인데 자기가 사탄을 이겼기 때문에 종들을 쫓아낼 수 있다는 그말이다.
아까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상반되는 것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는가? 이 세상의 사탄의 통치이다. 그래서 이제 예수를 통해서 사탄의 통치가 점점 물러가고 사탄이 패배를 해서 그 통치가 좀 약화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사탄의 통치권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요? 점점 해방되는 것이다. 사탄의 통치권에서 해방이 된다. 해방이 되고 예수를 통해서 나타나는 구원의 통치권을 맛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귀신쫓겨남을 체험하는 사람들이고 그것이 병고침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를 통해서 벌서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reatity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눅10:9,17절을 보면 거기에 아까 20절을 읽었는데 그 직전을 보면 예수게서 성공적인 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낼 때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내가 봤다’ 무슨 소리인가? 사탄이 하나님이 통치해야할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제 예수와 자기 제자들의 하나님나라 선포,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이 선포와 그리고 그 선포를 듣고 사탄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로 사람들이 결단을 하고 또 실제로 사탄의 종들인 귀신들을 쫓아내고 사탄이 가져다준 질병을 치유함ㅇ로써 사탄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사탄의 영역에서 빼옴으로 사탄의 통치권이 잃어가고 사탄의 통치가 무너져가고 있다. 이것을 보고 예수가 기뻐했다는 그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관점을 보고 넘어가야 하는데 이 예수의 병고침과 귀신 쫓아냄이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reality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예수가 즐겨 어느날 병을 고쳤는가? 안식일날 병을 고쳤다. 예수가 즐겨 안식일날 병을 고쳤다.
안식일날 병을 고친다고 유대신학자들에게 욕을 많이 먹고 혼을 많이 나고 한다. 그런데도 왜 자꾸 안식일날 하는가? 예수가 좀 짖꿏은 면이 있었는 모양이지? 왜 그랬는가? 여기에 아주 깊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 예수가 안식일날 병을 고쳤는가를 알려면 안식일의 원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인가?
원래 안식일은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하게 지으셨다. 완전하게 지으시고 짓는 일을 다 마쳤다. 그리고 보니까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니 할일이 더 있겠는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쉬신 것이다. 그래서 이 안식일의 원래의 의미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기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히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하는 이 일을 완전히 마쳤기 때문에 더 할일이 없으신 것이다. 그래서 안식했다 이말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타락으로 그들이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의 전체 피조세계가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더 이상 이 피조물이 완전하지 못한다.
  
완전한 창조를 기념 ←  안식일  불완전시 
  →

그래서 땅은 엉겅퀴를 내고 아담과 이브는 이제 어떻게 먹고 살아요? 피땀을 흘려 먹고 살게 된 것이다.
이제 일이 생긴 것이다. 할일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안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만 더 이상 안식을 못하고 할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일이 생긴 것이다. 자기의 타락한 이 세상, 고장난 이 세상과 인류를 고쳐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원래 의미의 안식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5장에서 뭐라고 하시는가? 안식일에 병자고친다고 시비하는 유대신학자에게 뭐라고 하는가?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시는 것 같이 나도 일한다고 하신다. 아버지가 지금 안식하지 않는다. 그날이 무슨 날인가? 안식일날 예수가 병고치니까 38년된 중풍병자를 예수가 고치니까 바리새인이 시비하니까 말하기를 아버지가 일하시므로 아들도 일한다고 한다. 그날 안식일날인데 아버지가 쉬지 아니하는 것이다. 왜? 원래 의미의 안식일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할일이 생긴 것이다. 이 세상을 고치고 이 세상 속에 들어 있는 타락한 병고에 시달리는 인간을 구출해야할 구원해야할 세상을 새롭게 해야할 재생해야할 재창조해야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왜 모세를 통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계명을 주셨는가?
그 안식일은 태초의 창조의 완전함을 기념하며 종말의 하나님의 새창조의 완전한 새창조를 바라는 소망의 의미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이 이중의 의미가 있다. 태초의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기념하며 원래가 그런 의미가 있으며 그런데 이제는 그 뿐만 아니고 종말에 오는 새창조의 바램,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꼭 새창조를 이루어서 우리를 영원한 안식에로 인도하시리라는 신뢰를 나타내며 그 바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바램을 나타내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법적으로 해석을 해가지고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발검음도 몇 발자국 이상 떼면 안되고 그 이내면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고 무엇을 하면 되고,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율법주의적인 안식일에는 원래 의미의 안식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지금 뭐하는 사람인가? 예수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이 지금 뭐하는 것인가? 타락한 불완전한 세상을 구출하는 새창조의 역사인 것이다.
사탄의 통치 밑에서 어그러지고 고생하는 불완전한 인류, 또 세상을 치유해가는 구원해가는 과정이 예수의 사역이다.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고 귀신 쫓아내는 일이고 병고치는 일이다. 그것을 안식일과 결부시켜 말하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안식일이 있도록 해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안식일 있도록...
진정한 의미의 안식일이 있도록...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자기가 안식일이 있도록 해가는 분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원래의 안식일이 되도록 하는 것을 아주 극적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안식일날 병고치는 것이다.
이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다 모였는데 거기에 손 마른 자가 있다는 현실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안식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일이 있는 것이다. 손 마른 자를 고쳐주고 거기에 더 이상 병고와 질병이 없어야 안식이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안식일에 예배하러 모인 이 회중에 손마른 자가 하나 나타났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안식이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를 고치는 것이 안식일을 안식일 되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귀신 쫓아냄, 병을 고침, 특히 안식일에 병을 고침은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석이며 그것의 실재화, 하나님 나라의 실재화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안식일의 병고침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설명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구원의 힘으로 나타나게 하는 reality 하는 그래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고 이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과 고난을 다 물리치고서 새로운 창조를 다 완성해서 거기에서 원래의 의미의 안식일 즉 하나님도 쉬고 우리 인간들도 쉬는 병고와 더 이상 투쟁할 필요가 없는 그러한 새로운 질서, 새 세대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귀신 쫓아냄과 병고침이 특히 안식일에 일어난 것은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석이며 실재화라고 그렇게 말할 수 가 있다.
질문:안식일에 대한 개념이 출애굽기에서와 신명기에서는 완전함과 출애굽의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유대신학에서는 출애굽을 새창조로 보았다. 유대신학에서 중요한 사상 하나가 출애굽이 새창조이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만 새창조로 본 것이 아니고 묵시문학에서는 종말에 오는 새창조를 또 하나의 출애굽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본다. 이렇게 출애굽과 새창조를 항상 이렇게 결부시켜 본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것이 원래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대한 celebration인데 이 엄청난 구원의 사건, 출애굽의 이 사건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같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원래의 창조와 같이 기념되어야할 새로운 창조의 사건으로 같이 기념되어야할 그래서 안식일의 의미가 원래의 창조를 기념할 뿐만 아니라 출애굽의 사건, 구원의 사건, 새창조와도 같은 이 구원의 사건도 기념하는 의미를 더 갖는 것이다.
그래서 typology라. 그래서 종말에 일어날 새창조가 출애굽과 같은 사건이다. 그래서 그때에 진정한 안식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절대적인 의미로 새창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여간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중요한 사상의 맥 하나가 구원을 또는 새창조를 출애굽의 사건으로 제2의 출애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묵시문학이나 랍비 문학을 보면 새로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메시야가 가져오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할 때에 그 때는 출애굽때 일어나는 모든 이적들이 일어나는 세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출애굽때 일어나는 모든 이적들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애굽의 파라오를 패퇴시켰듯이 모든 이방민족들을 패퇴시킬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밸성들이 만나를 먹고 살게 된다. 땅을 일굴 필요가 없고 천사들의 음식인 만나를 먹고 산다. 만나를 천사들의 음식으로 보았다. 이렇게 출애굽 때의 기적의 되풀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출애굽 때의 기적은 무엇이냐? 원래 완전한 창조때의 되풀이로 본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 원래 창조때의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래서 모세가 원래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회복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또 다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숭배함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상실하게 되어 우리 인간과 같이 왜소하게 되고 우리 얼굴, 이마에서 광채가 안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종말에 새창조때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가 다시 한번 아담의 이마에 났던 광채가 얼굴에 나게되고 아담과 같이 거인으로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출애굽의 사건이 원래 창조의 영광을 많이 회복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으로 많이 없어져 버렸는데 새창조때에 또 출애굽 때의 기적들이 일어나는데 그 출애굽 때의 기적은 무엇이냐? 원래의 창조 때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을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유대의 랍비 문학에 보면 랍비책에 보면 모세와 아담과 위대한 랍비인 벤자카이 인가 하였든 위대한 아담과 모세의 무덤에 갔더니 둘이 열심히 논쟁하고 있었다. 누가 더 위대하느냐의 논쟁이었다. 그런데 아담은 내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니 내가 더 위대하다고 모세는 반박하기를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는 죄를 지어서 상실했지 않느냐?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으니 내가 더 위대하다고 논쟁을 열심히 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우스운 이야기같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들에게 진리를 헤아릴려고 녀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이냐 아까 이야기한대로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사건이 태초의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모세가 되찾은 것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귀신 쫓는 일과 병고치는 일을 통해서 실제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임한 것이다.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reality 지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제일 독탁한 점이다. 유대교의 여러 분류에서 볼 수 없는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이요 주장이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의 선포와 예수의 사역 병고침이나 귀신 쫓아내는 것을 통해서 reality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인간들이 해야될 것은 무엇이냐?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으라’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라’고 신약성경은 부르고 있다. 예수와 제자들을 부르고 있다.
이 회개라는 것은 사탄에 대한 순종을 하지 말로 사탄에 대한 순종에서 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그의 왕권에 순종하는 것이 회개이다. 그래서 바로 이 회개가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와 같이 자기의 하나님의 왕권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그것의 실증으로서의 병고침, 귀신 쫓아냄 등에 응답하여서 사탄에 대한 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그에게 순종하겠다고 회개하는 죄인들을 모아서 예수가 무엇을 하였는가?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푼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의인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되는가? 죄인이 된다.
그런데 예수가 그들과 먹고 마셨다. 이렇게 죄인들을 모아서 그들과 먹고 마시는 교제를 한 것은 그들이 죄가 용서되었음과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는 sign이다.
또 다른 한편 그것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잔치에 대한 성취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성취가 그에게 응답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나타난다. 죄의 용서가 선언되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드라마로 표현한 것이 잔치이다.
그런데 예수가 나누는 이 잔치는 천국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예비적인 임시적인 지상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회개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믿는 죄인들 가운데 특별히 일단의 제자들을 모았다. 그래가지고 이들을 자기가 새롭게 구성하는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핵으로, 핵심으로 삼았다. 자기가 새롭게 구성하고 창조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서이 무엇이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나라의 백서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가 아까 무슨 뉘앙스가 강할때가 있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뉘앙스가 강할 때가 있다고 하였다.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핵심으로 삼은 거이다. 그래서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12제자를 특별히 선택한 것이다. 곧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12지파의 상징적으로 대응하는 12제자들을 틀별히 삼은 것이다. 곧 자기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누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예수의 메시지 곧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고 회개한 자들, 곧 사탄을 주로 더이상 사탄을 왕으로 섬기지 않기고 결단하고 그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그에게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자들, 이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라는 것이다. 그들의 핵이 12제자이다 라는 것이다.

출처 : 智本知神
글쓴이 : Heal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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