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신학! 신약개론!!

[스크랩] 신약신학 제 4강

하나님아들 2013. 8. 3. 11:35

5.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느냐? 이 문제 있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이 theocentric,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사상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서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행해서 하시는 행위리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행위이지 무슨 인간이 거기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오는데 무슨 협조하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에 우리가 배경으로 유대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또는 오는 세상이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지요?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대의 종교적인 모든 분파들이 전부 하나님 나라의 오는 것에 대해서 이 synergism아니면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면 이 synergism이란 이러한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의 συνεργεν에서 왔다. 같이 일한다의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일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synergism이란 말은 구원론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에 인간도 조금 스스로 공헌한다고 하는 교도들이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하면 나오는데 그럴 때 그런 이단들이 synergism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여러파들의 신학이 대개 이 synergism 아니면 열혈당원의 신학과 같이 완전히 이 땅 위에서 그들이 투쟁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야 할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에 대항해서 예수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인간을 위해서 한 행위이지 인간이 무슨 거기에다가 공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제일 많이 쓰이는 동사가 ‘온다’는 것이다. ‘온다’는 동사이다. 또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는 동사이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와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져요.
그러면 인간 편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행위는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편에서는 받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동사이다. 이러한 것이 가장 많이 쓰이는 동사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들어간다’고 하는 동사가 재미있다고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동사가 아주 많이 나오는데 이때에 지난번에 잠간 말을 했지만 하나님 나라는 장소로 상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장소로 하나의 공간으로 상상이 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집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동사가 같이 가는 그림들이 많다.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가는길이 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라고요? 좁은 길이다. 좁은 길로 가야한다.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에는 문이 있다. 그래서 두드리라 그러면 어쩐다고? 열린다고 하였다. 또 하나님 나라의 문에는 열쇠가 있다. 그래서 열쇠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베드로에게 주어졌다. 또 하나님 나라에는 방이 있다. 그 방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그 방에서는 하나님이 잔치를 베푸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집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집이 정확히 무슨 집이냐?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전을 생각하는 것이다. 성전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 무엇이냐? 유대신학에서 성전은 뭐냐면 유대말에 ‘우주’라는 말이 있는가? 없는가? ‘우주’라는 말은 없다. 그와 같은 추상명사는 없다. cosmos라는 명사는 없고 우주를 이랴기할 때는 ‘하늘과 땅’이라고 한다. 이렇게 히브리어 숙어로서 하나님께서 전체의 양극을 말함으로써 창조 전체를 말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창조의 두 부분이 하늘과 땅이다.
그런데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거처이고 땅은 인간들의 거주하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에 거처하기로 정하면 어디에 거처하느냐? 어디인가? 성전이다. 그래서 성전은 하늘과 땅, 즉 온 우주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다시 말하면 땅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는데 이 보좌는 하늘에 있는 보좌의 copy이다.

하늘

 성전 


그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거처, 모조품이 지상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다. 그 성전이 땅에서 하늘로 통하는 관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표현을 제일 많이 사용하는데 ‘들어간다’는 말과 더불어 아까 말한대로 좁은 길, 좁은 문 그리고 열쇠 또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에 누가 계시느냐? 하나님이 계시고 잔치를 베푸시는 것이가. 그래서 그 잔치는 성전에서 하나님과 백성이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화해를 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의 완성인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일부 성전에 비추어서 해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속죄제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 성전이다. 속죄의 제사는 왜 드리는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언약의 관계가 지탱하기 위해서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는 것이다. 언약을 어긴 것이 죄인데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다시한번 언약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화해가 되는 것이다.
그 화해가 어떻게 그림으로 나타나느냐면 극으로 나타나느냐면 잔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여러 절기때에 커다란 잔치가 베풀어지는 것이다. 성전에서의 이러한 것들이 전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Model이 되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면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로 하나님의 하늘의 서언의 모조품으로써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중요한 부분이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또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무엇을 성전을 선포함에 있어서 누구누가가 성전에 들어갈 수있나? 어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 수 있어요? 어린아이와 같아야 되고 또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와야 되고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고 좌우간 예수의 제자도를 지킴으로 예수의 말을 듣고 행하고 따르는 제자도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세웠다.
그런데 이것도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조건과 거의 같이 만들어져 있다. 시편에 여러편을 보면 우리 말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목사와 회중이 교대로 읽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죠? 교독문! 그 교독문이 여러가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유대의 중요한 절기 때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문 밖에서 회친다. ‘누가 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수있는가?’ 그러면 거기의 제사장이 대답을 한다. ‘우상숭배하지 않는다’ 그러면 또 ‘누가 들어갈 수있는가?’ 고 하면 답하기를 ‘도둑질하지 않는자’‘간음하지 않는자’ 이렇게 여러가지 조건이 있다. 성전에 들어갈 수있는...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의식으로 깨끗한 자만이 성전에 들어갈 수가 있다. 거룩한 자만, 청결한 자만,..이렇게 성전에 들어가는 조건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별난자이다. 손을 씻고 발을 씻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이것은 예수에 대한 태도와 도덕적인 기준으로 정해져 있다. 이것은 다르지만 형태는 비슷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여러가지의 형태로 볼때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동사를 사용할 때는 주로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왜 예수가 성전에 대하여 그렇게 독특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우리가 알 수가 있다.
예수는 성전에 가주 갔는가? 안갔는가? 예수는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예루살렘 성전을 그냥 무시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하고 거기의 잔치에 참여하곤 하였다. 심지어 팔레스타인 밖에서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일생의 한번 쯤은 그러한 것을 자신의 평생 소원으로 알았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돈 푼깨나 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까이 가서 살다가 성전에 드나들다가 살다가 죽어서 그 성전 가까이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을 10등급의 거룩도로 나누었다. 동심원으로....
그런데 성전의 지성소가 제일 거룩하고 그 다음에 성전의 마당이 거룩하고 그다음에 예루살렘이 거룩하고 그 다음에 유대가 거룩하고 그 다음에 어디까지가 거룩하고, 이런 식으로 거룩의 도를 열등급으로 정하였다.
그래서 되도록 성전과 가까이에서 죽는 것이 그들의 구원관과 결부되어 있어서 아주 중요하였다. 이와 같이 성전이 그 사람들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는데 예수는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도리어 예수가 무엇이라고 주장하였는가? 이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의 돌이 돌위에 얹히지 않도록 다 부셔져 버리리라고 예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성전을 다시 짓는다고 예언하였다. 그게 예수의 재판의 죄목이다. 예수의 재판의 죄목이 그것 밖에 더 있는가? 성전 부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 예수의 죄목이 아니었던가? 성경 열심히 읽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야? 눈만 말똥말똥 떠가지고...
엊그제가 예수의 수난절이었지만 예수의 죄목이 무엇이여? 증인들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자가 말하기를 내가 손으로 만든 성전을 때려부수고 삼일만에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전을 짓는다고 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재판의 증거가 아닌가? 이거 성경 100번 읽어도 아무 소용 없다구! 그냥 중 염불하듯이 무슨 뜻인줄도 모르고 막 읽는 모양이라..그러니까 기억에 남을리가 있나?
이와 같이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가 아주 독특하고 우리 보기에 이상하다. 왜 그러느냐? 일단의 설명이 이렇게 된다.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 필요는 있겠지만..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이 자기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 그림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전의 진정한 기능이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자기가 지금 완성된 것을 가져오는데 지금 예루살렘의 성전, 부패한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그것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것이다. 여러분들 중에 혹 요한복음 공부를 많이 하였으면 그럴 것이가. 요한복음에 보니까 아 예수가 성전에 여러번 가지 않았습니까? 초막절에도 가고 유월절에도 가고 여러번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을 자세히 보세요.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가 성전에 딱 한번 간다. 가서 뭐해요? 가서 난동을 부리신다구요. 채찍으로 막 쫓아내고 난리를 쳐요. 성전에 가서 예배참석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성전에 가서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는 하나도 안취하고 불경적인, 부정적인 태도만을 취한다. 공관복음 보면 한번 가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서가 성전에 4번 간다. 적어도 3번은 간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자세히 보면 예수가 성전에 가서 성전의 무슨 제사에 참여하거나 성전의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성전의 그 절기에 초막절이면 초막절,유월절이면 유월절, 그 절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서 자기가 그 성전의 진정한 완성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초막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초막절에 유대 사람들이 광야에서 헤맬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초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계시의 불빛이 나타났다. 그래서 초막절에는 시내산에서 일어난 계시를 기념해서 제등행렬을 하였다. 그 불행렬.. 세상에 비치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상징해서 불교의 초파일에 하듯이 제등행렬을 하였다.
또 물긷는 행렬을 하였다.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긷는 행렬을 하였다. 그것에 비유해서 예수가 초막절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요한 복음 7장에서..‘내가 세상의 빛이라’ 또 내가 무엇이라? ‘내가 영생을 주는 물이라’
너희들이 이 성전에서 행사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그 진정한 실체라. 요한복음에서도 예수가 이 예루사렘 성전의 진정한 의미로 자기가 성취하는 것으로 설명하지 성전에 가서 제사하고 하는 것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예수는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였다. 왜 그랬느냐 하면 예수가 지금 자기가 선포하고 있는 이 하나님 나라, 자기가 지금 이 세상에서 현실이 되게 하는 실제가 되게 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전의 진정한 의미와 그 기능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성전의 진정한 의미와 그 기능의 완성으로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지금 부패한 기껏해야 지금 그림에 불과한 또 그림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부패한 성전에 대해서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깡그리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요즘 수백억씩 돈 대가지고 성전짓는 사람들 좀 생각해 볼 일이 있다고...
이런 것을 보면 예수가 유대의 하나님 나라 옴에 대한 사상, 아까 이야기한 synergism에 대해서 아주 다른 가르침을 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우리가 알아 두어야할 것은 이 하나님 나라의 오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어떤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새로운 실재가 나타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고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이어받고 우리가 그 곳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에 성전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의 옛날의 속죄 제사로 화해함으로써 다시 옛날의 언약의 관계, 즉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이 언약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다시 한번 화해가 일어났듯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인간의 그 죄사함,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이러한 그림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만 말을 하지 하나님 나라에 와서 보면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의 어떤 사회적인, 경제적인 변화가 와야 되지 않느냐? 등의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거의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독특한 것중의 하나가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social program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경제적인,사회적인 program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지난 번에 열혈당은 무슨 program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는가? 하나님 나라와 관계시켜서 무슨 program을? 사회정의의 program을..그래서 어떻게 한다고 하였는가? 그래서 노예를 다 해방하고 빚을 다 청산하고...그래서 이들이 유대전쟁때에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에 자기들의 하나님 나라의 vision을 이루는 줄 알고 무엇부터 하였다고요? 노예장부하고 빚 장부를 다 불태웠다고 하였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이런 것이 없다. social action program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해방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아쉬운 점일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예수가 그렇게 했다고 거짓말로 막 억지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가르친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또 어떻게 오느냐면 처음에는 조그만하게 온다. 보일락 말락하게 온다. 이것이 유대 무슨 묵시문학 같은 데서나 열혈당원들이 상상하는 것같이 무슨 세상을 뒤집어 엎는 위대한 커다란 혁명이나 무슨 벼락이 치고 난리가 나는 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아니라 조그맣게 보일락 말락하게 온다. 지금 내가 무슨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겨자시 비유의 이야기다. 겨자씨 같이 온다. 또 어떻게? 누룩같이 온다. 처음에는 이렇게 보일락 말락하게 시작한다. 무슨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대할 때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하였나? 묵시문학가들은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 같이 열혈다원들은 무슨 커다른 정치적인 대혁명과 위대한 작전으로 오는 것 같이 가르치는데 그것에 반응해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온다고요? 겨자씨 같이 온다고 하였다. 누룩같이, 보일락 말락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쩐 다고요? 점차 커진다. 그것이 확실하게 커진다. 그래서 겨자씨가 커다랗게 커져서 큰 나무가 되어서 새들이 거기에 둥지를 만들어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새들을 이방인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랍비들의 책에 이방인들을 새들로 비유를 많이 한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같은데 마치 겨자씨같이 처음에는 시작하는데 점점 커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새들이 와서 깃든다하는 말은 유대민족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에 와서 보호받고 축볼을 받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조그맣게 보일락 말락하게 시작을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의 지금 자기의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갈리리 시골의 조그마한 목수의 아들로서 제자 12들과 여자 몇몇을 데리고 처음 하나님 나라를 지금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보일락 말락한 것이다. 로마의 위대한 힘이나 예루살렘 성전의 지배계증에 비하면 진짜 이것은 보일락 말락한 것이다. 아무 무의미하게 아주 조그맣게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확실히 확신한 것은 그것이 점차 커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어쩐다고요? 모든 민족들이 새들이 와서 둥지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이 맞았는가? 안맞았는가?
맞았다. 갈릴리의 조그마한 동네에서 몇몇 사람에 의해서 시작한 예수의 운동이 전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그래서 세계 모든 만민들이 하나님의 통치 밑에서 구원을 얻는 그 일이 우리 가운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12제자들을 에수의 제자들을 12을 삼은 것도 재미있다. 그것도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언약의 백성의 시작으로서 옛 언약의 백성의 이스라에릐 12지파의 상징적으로 상응하는 12제자를 모집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가 또 이 하나님 나라를 또 백성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언약의 이스라엘로..
예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상응하는 새 이스라엘 백성을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12제자를 임명한 것이다 .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이 세상 가운데에 무슨 천지개벽이나 커다란 혁명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보일락말락하게 시작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면 하나님 나라의 안에서도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녀, 세상의 자녀들이 이 세대에는 같이 산다. 이것이 양과 염소의 비유이고 밀알과 가라지 비유가 아닌가? 최후 심판때까지 그들을 분갈할 수 없을 정도로 같이 자라는 것이다. 같이 자라요.
그래서 이 세상의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딱 여기있고 세상나라의 영역이 딱 여기 이렇게 따로따로 있는 거시 아니라 이 세상이면서 하나님 나라가 거기서 시작이 되엇 누룩이 퍼지듯이 겨자씨가 자라듯이 자라는데 그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세상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같이 자라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 심판 때 그들이 확실히 색깔을 드러내고 갈린다 그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비밀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최후 심판 때에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비밀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하면 예수를 통해서 온다. 예수가 지금 가져오는데 그것은 지금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예수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다. 마12;28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지난 시간에 이야기하였듯이 예수의 귀신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예수를 통해서 이 지상에서 실재가 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실재가 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의 이적들과 귀신 쫓아내는 것과 병고치는것들이 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사탄의 통치는 항상 그 증상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그 표증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악과 고난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항상 그 고난의 치유와 그리고 평화로 나타난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러니까 사탄의 사자들인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가운데에 거기에 치유가 나타난다. 사탄이 가져온 고난이 이제 종식되고 치유함이 일어나고 거기에 평화가 있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지금 예수를 통해서 지금 현재에 역사속으로 들어와서 지금 현재에 역사안에서 실재가 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데 예수가 어떻게 그것을 가져오느냐 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곳곳에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성령의 역사가 연결되어 있다. 지금 읽은 마12:28도 그러하다. 또 12:21도 그렇다. 막3:29/마12:32/요3:3,5/롬14:17/갈5:21ff/고전4:20 등에서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역사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역사는 동시에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고 성령이 사탄과 더불어 싸우는 역사라고 볼 수있다. 그래서 예수가 이 하나님 나라의역사를 언제 시작하는가? 언제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자기의 세례로부터 시작한다. 세례 때에 예수가 무엇을 받아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래서 세례를 받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시험을 받는다. 그 시험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탄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공생애에 나서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사역에 나서는데 그것이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과 싸워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의 사자들인 귀신들을 쫓아내고 사탄이 가져온 고난을 치유하고 병고를 치유하고 이렇게 한다.
그런데 결국 사탄이 예수를 어떻게 하는가? 십자가에 넘겨준다. 사탄이 누구에게 들어갔는가? 유다에게 들어가서 예수를 팔게해서 예수가 체포되고 심판받고 십자가에 넘겨주는그 darma의 주역이 satan의 도구이다. 그래서 사탄이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최후의 발악을 했는데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는데 결국 하나님이 이 예수를 살리심으로 사탄을 결정적으로 꺾었다. 사탄의 마지막 무기인 죽음을 이겼다는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 눅 22:3/요12:2,17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사역은 동시에 성령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고 성령이 사탄의 권세를 꺾어가는 사역이라고 볼 수있다.
그런데 이 성령은 구약에서 종말에 모든 사람들에게 퍼부어질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요엘서 2:28절에 보면 .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인 개념이고 성령도 종말론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당연히 이 하나님 나라와 성경이 같이 가는 것이 전혀 당연한 것이다. 자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온다. 자 하나님 나라가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오는데 인간의 무슨 보탬이 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시작하는가? 조그맣게 보일락말락하게 시작하짐나 점차 커서 온 민족을 모두 다 추복의 장에 끌어들일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의 회복으로서 성전의 원래의 기능이 완성되는 것으로써 사탄이 가져오는 고난이 해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의도
그 다음 여섯번째로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의도, 예수의 의도,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무엇을 할려고 하였나? 무엇을 이룰려고 하였나? 하는 그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밑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자이다. 청첩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이다.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통치권 밑에서 떠나서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권 밑으로 들어오라는 청첩이며 부름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그 통치가 의와 사랑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구신들을 쫓아내고 병고를 치유하는 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과 같이 하나님의 통치는 의와 사랑이며 고난의 종식이며 건강의 회복이며 축복이다. 한마디로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말로 선포하면서 또 이적으로 귀신 쫓아내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축복 밑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첩장을 발부하는 것이다. 초대장을 발부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었다. 즉 예수가 무엇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는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 사탄의 통치권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통치권 밑으로 오는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 그게 무엇인가? 하나님 백성이다.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래서 이것을 굉장히 강조해야 하는 것인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하면 종말에 하나님 나라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있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또 다른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과 행동이 전적으로 일치한다. 지난번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서 예수의 무슨 자기 이해가 나타났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출 4:22-23절에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제는 예수가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으며 자기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아빠라고 하는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부름에서 나타나는 자기 이해가 두가지라고 하였다.
하나는 자기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해와 둘째로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 사람?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는 자라는 이해이었다. 어떻게?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됨을 중재주므로써...
그러니까 예수의 이 아빠라는 독특한 기도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이것도 독특하다고 하였다.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 선포와 그의도에 있어서 똑같다.
예수가 무엇을 하는 분인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이다. 가져와서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을 수있는 즉 하나님 나라가 가져온 동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받는다’는 동사이었다고 하였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상속받는다’는 말이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어떤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없다고 하였는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받는다’는 것과 ‘상속받는다’는 것이 항상 같이 간다. 여기에서 상속받는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의 부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그게 누구의 것이니까? 내 아버지의 것이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무엇인가? 상속자가 아닌가? 이러한 모든 것이 다 그림언어이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우리 제한성의 한게성의 고난 받는 피조물들이 무한하신 하나니의 자원을 상속받는 것이다. 내것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한다Fu 말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 피조물성이다. 한계성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무한함, 창조주의 무한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받음으로... 사탄의 통치권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으로 넘어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므로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서 우리 아빠 것을 내것으로 할 수가 있어서 내 지난번에 그 소리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왜 우리가 기도할 때 아빠라고 하다고 그래요? 벌써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쓰기 위한 행위가 기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빠라고 기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 그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도 똑같다. 이것은 나중에 좀 살펴보도록 하겠다. 눅19:28절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사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
이것이 누가 복음에 보면 눅22:29에 대응절이 있는에 이 대응절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대개 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는 누가가 옳다. 눅22:29절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가 12제자들에게 지금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을 대에 그 때에 12제자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핵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의 핵을 이르고 이 패역한 이스라엘, 옛언약의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자리에 설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막13:27
“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종말에 어쩐다구요? 하나님의 백성을 모은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에 있었다. 마8:11-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어쩐다구요? 세상의 사방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이 모여져서 하나님 나라에서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데 그때에 이 에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그를 통한 이 청첩장을 제일 먼저 받은 자가 누구인가? 유대인들이다. 이스라엘, 옛 언약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이 청첩장을 무시하고 거절한 그들은 어덯게 된다고 하였는가? 내어 쫓긴다고 하였다. 그 잔치상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여러곳에서 예수는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사방에서 모아져서 하나님의 잔치상에 참여해서 역대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등 모든 선지자들과 같이 커다란 잔치를 베풀것이라는 그말이다.
지난번에 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즐겨 잔치로 비유하였다고 하였나? 왜 잔치로 비유하였는가? 그게 무엇을 상징하기 위해서인가?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부요함, 하나님의 자원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잔치는 거기에는 항상 무엇이 있는가? 기쁨이 있다. 거기에는 사귐이 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회복이 있다. 사귐이 잇다. fellowship이 일어난다. 그래서거기에는 잔치에의 기쁨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상징하기 위해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할 때 가장 즐겨쓰는 그림이 잔치이었다.
그래서 지금 읽안 마8:11 등에서본바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세상에서 사방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 종말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서 역대의 하나님의백성의 조상들과 역대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 선지자와 더불어 커다란 잔치를 베푼다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해서 그 청첩장에 응해서 회개하고 제자에게 따르는 자들과 백성에게 무엇을 베풀죠?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행적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예수의 회개한 죄인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 하도 그것을 많이 해서 예수의 별명이 뭐라고요? 탐식자요 술주정뱅이라고 한다고 그랬다.
예수의 이것이, 예수가 지금 하나님 나라 선포의 그 청첩장에 응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것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에 대한 sign이다. 그림이다. 약속이다. 그것을 미리 연극으로 표시해서 깨닫게 해준 것이다.
눅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월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버하시느니라”
이 적은 무리여. 여기에서 ‘무리’라는 말은 양무리라는 소리이다. 따라서 ‘적은 양무리여’이렇게 번역해야 한다. 여기에서 ‘양무리’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을 ‘양무리’라고 한다. 하나님이 ‘양무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칭호인 ‘양무리’를 이제는 누구에게 적용하고 있는가? 자기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한 자기 제자들에게 적용하는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이 주어진다고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곧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삼으신다는 말이다.
옛 이스라엘 백성, 옛 언약의 백성이 이 하나님의 청첩에 응하지 않으므로 이 적은 무리들 이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아들이라. 이와 같이 여러곳에서 예수는 자기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즉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 그래서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의 궁극적인 의도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예수가 그 당시의 활활 불타오르던 유대의 민족주의를 완전히 배격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아까 마 8:11절에 어떻다구요? 누가 하나님 나라에 와서 잔치에 참여하는가? 동서에서... 누까 좇겨나는가? 그 잔치에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지금 방금 읽은 눅12:32에서도 누구에게 ‘양무리’란 하나님의 백성이란 칭호가 주어지는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니라 누구에게?그중에서 몇 사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사람들..
여기에서 하나니 나라를 선포하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라고 초대장을 발부하니까 유대인들이 다 어떻게 하였는가?이 핑계, 저핑계로 다 피하였다. 결혼해서 못간다느니, 무슨 소를 사서 못간다는니....그래서 하나님이 화가 나서 어쨌다구요? 종들을 보내서 골목골목 가서 앉은뱅이, 무슨 병든자 다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예수의 이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유대의 민족주의를 완전히 배격하고 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종말의 새로운 백성을 유대민족에서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중에서 모은다는 것이다는 사상이 강력히 나타나며 도리어 이 예수의 청첩장에 응하지 않은 유대인들에게는 심판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중에 아주 강력히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때가 메시야 시대의 때가 임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높임을 받고 이방인들을 심판해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을 섬기는 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예수는 그것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다. 유대인들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그 몇 사람과 또 어느 민족에게서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자들이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대체로 예수의 청첩장에 응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도리어 심판을 받고 던져버림을 받을 것을 예수가 경고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이 유대민족주의와 아주 반대되는 가르침을 하였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 선포를 올바로 하면 민족주의를 내세울 수가 없다. 어느 민족이나..그런데 지금까지의 교회사를 보면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각 민족 민족주의와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마치 한국사람이 새로운 이스라엘인양 주장하고 지금도 많이 그렇게 선포하고 다닌다. 여러분의 겨단이 원래 합동과 본류 아닙니까? 거기에서 늘 하던 게 무슨 아시아의 장자교단, 그런말 어디 있어요? 그런 엉터리가 어디가 있겠어요? 옛날 일정때에 하던 버릇이 지금까지 계속이 된다. 옛날 일정때에 일본 사람에게 억눌리던 우리 백성들이 성경을 어떻게 읽었느냐면 구약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 거기의 ‘이스라엘’을 빼고 ‘한국’을 넣어서 읽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국백성을 출애굽시킨 것으로..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후예로 이렇게 늘 성경을 읽어왔다. 지금도 그렇게 한다.
옛날에 내가 외국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의 기도원이 어떻게 생겼나 해서 가보라고 해서 저기 동두천에 갔더니 거기에 완전히 출애굽의 상황을 해 놨었다. 무슨 ‘구국기도’라 해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한 것 같이 오늘날 새로운 모세가 한국을 출애굽시켜야 되고 구원시켜야 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고 해서 작뜩 써 붙였더라고.
그런데 그것은 한국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국 사람들도 한 동안 자기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후예로 보았다. 독일 사람들도 그렇다. 미국에 이주간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 그랬다. 자기들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민족주의를 늘 이렇게 연결시켜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이렇게 배태적으로 사용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아긋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하면 벌써 보편주의, 사해동포주의, 세계만민을 포함하는 인종과 피부색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온 우주를 창조하고 온 인류를 창조해서 이룩한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것이 어덯게 해서 여기 한 민족, 여기 영국 사람, 여기 독일사람, 여기 미국인으로 생각을 하겠는가? 그래서 민족주의라는 것은 도대체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개념과는...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신앙고백한 베드로에게 약속을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줄 것이며 그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겠다. 그래서 이 εκκλεσια 교회가 히브리어의 을 번역한 것으로써 이 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인 사태를 두고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가르침에서도 마16:18에서도 옛 이스라엘은 이제 제쳐놓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모임, εκκλεσια를 세울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그들이 사탄의 주권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모인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데 그들이 아무리 완성을 기다리는 이 세생에서 죄악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고 그들이 또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그 통치와 더불어 오는 하나님의 받고 있다는 의미에 있어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의 지상에서의 표현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그러면 교회,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ethos는 무엇이냐? 삶의 원칙은 무엇이냐 하면 제자도와 섬김이다.
막10:32-45절을 보세요.
거기는 우리가잘 아는 장이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이제 자기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인가를 설명하니까 이 유대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 찌들은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요한과 야고보가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가 오면 국무총리가 되고 내무부 장관이 되겠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거기에 질세라 다른 제자들이 분해서 화가 나가지고 네가 공로를 더 세웠느냐? 내가 더 세웠지. 그러니까 내가 국무총리감이지 하고 다투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42절부터 보면 제자들을 불러가지고 이르기를 이방인들, 세상의 통치자들, 세상의 큰 자들, 세상의 힘있는 자들은 남들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억누른다. 그런데 너희들 중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지금 누구인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의 핵인 제자들,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인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그 공동체에서는 그런 ethos가 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새로은 상황의 공동체의 ethos는 무엇이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되어야 하고? 작어져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도, 세상의 ethos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여 모으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ethos가 180도 다르다.
세상의 ethos는 자기 주장하는 것이 그 원칙이다. 자기를 남위에 주장을 해서 남을 자기의 종으로 삼는 것이 세상에서의 삶이요 방법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주장 성공적으로 했다는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총칼 가진 놈을 많이 지휘하는 놈이 대통령이 된다. 이 세상에서 누가 부자가 되는가? 남을 잘 속이고 착취를 많이 하는 자가 부자가 된다. 이렇게 자기 주장을 한다.
따라서 세상의 ethos는 무엇이냐 하면 남위에 군림하는 남에게 자기를 주장해서 나위에 군림하는 것이 세상의 ethos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높다고 하고 귀하다고 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귀하신 몸이 이 세상에서는 어떤 몸이신가? 남을 막 짓밟는 몸이 귀하신 몸이라고.. 남에게 막 짓밟힌 몸은 귀하신 몸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놈이 누누구인가? 부라는 것이 옛날 한국사람들이 추구하던 부귀,장수 이러한 것이 다 무엇인가? 이것이 다 세상의 ethos이다. 그것은 자기 주장하는 의지를 성공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성공했다고 하고 귀함을 얻고 존경을 얻고 부를 얻고 그렇다. 즉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이방인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세상의 백성의 삶의 도이며 삶의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고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에서의 ethos는 무엇인가?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섬김이 무엇이냐? 여기에 대해서 45절에 자기를 예로 들어서 섬김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self-giving. 세상의 eths는 무엇이었는가? 영어로 self-assertion이었다. 자기 주장이었다. 남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의 공동체에서는 그 ethos가 무엇이냐 하면 섬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섬김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인자가 무엇하기 위해서 왔는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이제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의 백성의 공동체의 삶의 방법이고 ethos이다.
7)하나님 나라와 예수
자 일곱번째 하나님 나라에 예수에 대해서 살표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에 의해서 분명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agent로서 그의 선포와 그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역사 속으로 들여오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실재로 나타나게 하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실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은다.
이렇게 보았을때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짊어짐(bearer)이다. 하나님 나라를 짊어짐이다. 하나님 나라를 bearer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나타내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bearer를 가져오시는 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누가 들어갈 수 없는가의 조건을 내세울 수가 있었다.
지난번에 간접기독론을 할 때 예수의 권위주장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고 하였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없느냐의 조건을 예수가 제시하였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같아야 하고(막10:15) 이 세상을 버리고 자기의 제자가 되어야 하고(막10:17-31) 또는 산상수훈에서 제시된 여러가지 가르침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조건으로 예수가 제시하는데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권위는 어디에서 오느냐면 예수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의 vearer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번에 간접 기독론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가 이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그 구원위를 주장했다는 것도 엄청난 놀나운 일이지만 그 조건이 자기에 대한 제자도로 나타난다는 것은 더더둑 놀라운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이 전권대사라는 자기 이해 즉 하나님의 plenipotentiary를 하나님의 전권대사라는 자기 이해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구약과 유대교의 언어수단을 통해서 표현한다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8)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죽음.
예수는 하나님 나라와 그 구원을 가져오신 분인데 궁극적으로 자기의 새속의 새 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가져왔다. 즉 자기의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가져온다. 그래서 여기서 분석해보려고 하는 것은 최후의 만찬의 말씀 마가복음 14:17-25까지 읽어보세요.
한마디 한마디 주의해서 읽어보세요. 최후의 만찬의 말씀은 두가지의 판이 있다. 최후의 만찬은 우리가 4가지로 전수되어 있다. 세공관복음에도 나타나고 고전 11장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 4가지 전승이 크게 2가지로 나타난다.
막-마  눅,바울
그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가거니와
 

woe to that man throug who the son of man is delivered
하나는 마가,마태판이고 하나는 누가,바울판이다. 그래서 이 마가,마태판은 아주 비슷하다. 거의 똑같다. 누가와 바울판은 또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면서 또 누가와 바울판은 마가와 마태판과 다르다.
이처럼 최후의 만찬의 전승이 4가지로 전승이 되는데 크게는 이렇게 두개의 전승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나이를 먹었느냐 이것이 나이를 많이 먹었느냐를 가지고 이제까지 학자들의 연구가 많짐나 해결이 나지 않는다. 어떤 교수는 이것이(막-마)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고 하고 어떤 교수는 눅-바울이 더 나이를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결하기가 아주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데 하여간 우리는 이 마가판을 지금 보자 이말이다.
자 여기의 21절이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의 말씀을 여는 말이다. 거기에 인자는 ‘그 사람의 아들은 그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다. 자 기록된 대로, 성경에 예언된 대로 가거니와....그런데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아주 어렵다. 어순이 번역하기가 정확히 어렵다. 영어는 헬라어와 어순이 비슷해서 번역하면 좋은데 우리만은 그렇다. 우리 말로 거기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영어로 써 보자. woe to that man through who the son of man is delivered 여기에 소위 word play라는 것이 있다. word play가 무엇이냐? 영어로 pun이라고 한다. 비슷한 말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웃기는 것이다. 그런 것을 word play라고 한다. 또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잘 사용한다.
지금 여기 that man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가? 유다를 지칭한다. ‘그를 통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 이제 넘겨줌을 받는데 그 사람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인데 the son of man이란 말도 숙어적으로 하면 ‘그 사람’이라는 that man의 뜻이다. 이 문장에서 그 사람....그 사람..이것이 word play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의 만찬을 여는 이 말씀이 뭐라고 시작되느냐면 ‘그 사람이 간다’고 시작되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특징중의 하나가 알쏭달쏭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을 *라고 한다. 수수께끼라는 말이다. 그래서 비유도 그 중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앞의 말투도 *에 해당한다. ‘간다’느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예수가 간다고 하는 이 말이.... 그것은 자기의 죽음을 두고 한 소리이다. 자기가 그 사람의 아들로써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언된 대로 죽는다는 말이다. 그것을 좀 더 알쏭달쏭하게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제자들은 그 말을 알아 들었다. 왜? 하도 같이 오래 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가느냐? 한 사람이 그를 배신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봐야할 때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여러 곳에서 예고하는데 예고할 때마다 꼭 그 사람의 아들이 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마다 예수는 자기의 칭호인 ‘그 사람의 아들’을 사용하여 ‘내가 죽는다거나 간다’고 하지 아니하고 인자가.. 그렇게 한다. 아까 막10:33에도 마찬가지이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줌을 받아서..’ 45절도 마찬가지이다. ‘인자가 온 것은 뭐하러?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는 죽음을 이야기할 때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러느지는 다음시간에 볼 것이다.
그러면 우선 그것만 염두에 두고 그러면 ‘그 사람의 아들’이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
그러면 죽음이 이제 내일 다가온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보았을 때 내일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제 그 제자들에게 미리 설명해 준다. 설명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면 우선 연극을 한다.
연극을 한다. 이 떡을 떼는 그 제스쳐, 그 행위, 그리고 빨간 포도잔을 붓는 제스쳐를 한다. 그런데 이 연극이 두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떡을 떼는 일 그리고 부수는 일, 하나는 잔을 붓는 일, 포도주를 붓는 일, 이렇게 연극의 제스쳐에 무어가 붙었느냐면 설명어가 붙어 있다.
떡을 부수는 일+설명어
연극 잔을 붓는 일+설명어
이것은 무엇이라?(떡) 너희를 위해서 부서지는 나의 몸이라. 이것은 무엇이라(포도주) 이것의 붓는 설명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것에 대해 우리가 집주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24절, 이것은 무엇이라고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24절)’ 마가판은 이렇게 되어 있다.
누가,바울판은 이것이 좀 다르다. ‘너희들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새언약이라’이렇게 되어 있ㄷ. 누가, 바울판에는...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새 언약이라. 이것이 잔이므로 새언약의 상징이라. 거기에 비해서 마가, 마태 판은 ‘ 이잔이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이고 누가,바울판은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로 되어 있다.
어순이 다르므로 이렇게 조금씩 다른데 그러나 의미는 똑같다.
어떤 것이 더 나이를 많이 먹었고 어떤 것이 더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냐?를 따지는데 내가 보기에는 마가,마태 판이 더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다. 하여간 이것이 잔의 말씀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것을 소위 잔의 말씀이라고 한다. 왜? 잔을 붓는 일의 설명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에 이 연극의 제스쳐나 설명어나 모두 다 같이 무엇을 설명하느냐면 그 사람의 아들로써 가는 것을 설명한다.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연극으로 표현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잔의 말씀만 분석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어약의 피’이다. 그러며 이게 무슨 말이냐? ‘많은 사람을 위하여서 흘리는’이 말은 이사야 53:1-12절에서 왔다. 거기에 보면 고난받는 종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마태복음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영혼을 흘린다는 말을 사용하였다. 내어 쏟는다. 내어 쏟아 흘려서 그들을 하여금 의롭게 함을 입게 한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즉 주의 고난 받는 종이 곧 대속의 죽음, *,곧 속죄의 제사로 자기를 내어주어서 자기 영혼을 내어 쏟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속죄하고 의롭게 함을 입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사야 53:10-12까지를 인용을 해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바로 그 이사야서에 있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언약의 피라’는 어디에서 왔느냐? 이것은 아주 풍부한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첫째로 우리가 무엇을 상기하게 하느냐면 출24장에 보면 19장,14장,34장에 보면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는데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모아져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 에 뿌리면서 무어라고 부르짖는가? ‘언약의 피라’ 그렇게 부르짖는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가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모세가 세운 그 옛언약에 상응하는 그 옛 언약의 후형, typology에 상응하는 새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죽음이 모세가 sinai에서 제물을 바쳐서 세운 옛언약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본 것이다.
또 아까 누가,바울 판에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쓰여져 있다고요? ‘나의 피로 세운 또는 피로 인한 피가운데 세우는 새언약이라’ 여기에 ‘새’자가 들어간다. 이것은 벌써 이속(마가판)에 들어 있는 말이 조금 더 분명히 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나는 마가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 분명히 새언약이라고 하였다. 왜? 모세가 세운 언약에 대응해서 상응하는 언약이기 때문에 새언약이다. 그래서 이것이 렘31:33절에 나오는 위대한 새언약에 대해서 나오는데 예리미야서에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종말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새언약을 종말에 세운다고 하였다. 그 예레미야서의 새언약에 대한 예언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부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사야서 42:6/49:8에도 근거하고 있다.
이사야서 42:6절과 49:8절에 보면 주의 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는 예언이 있다.
이사야 42:6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사야 49:8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도대체 이 언약을 세우는데 짐승의 피로 세우지 않고 인간의 제물로 세운다는 사상은 여기의 최후의 만찬에 밖에는 안나온다. 예수의 이 가르침 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제일 가까운 구약적인 배경이 이사야서의 주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것이다. 주의 고난받는 종이 속죄의 제사만을 위해 시험만을 위해 보내어진 것이 아니고 새 언을 세우는 제사로 보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약의 피’라는 말이...
요약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가 체포되어 처형받고 십자가에 달려 있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최후의 만찬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해왔던 모든 것의, 잔치의 종합,완성, 종결의 잔치를 하면서 거기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두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데 자기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란 의미의 이란 소리는 히브리어의 숙어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란 뜻이다. 히브리말에는 추상명사가 없어서 이런 말로 그런 추상명사를 삼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란 소리는 ‘모든 사람들’ 이란 소리이다.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즉 자기가 내일 당할 죽음이 대속의 제사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설명을 한 것이다.
자 그러면 대속을 하면 무슨 결과가 나타나요? 제사와 덕을 입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해가 일어난다. 언약을 세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요. 언약을 세우면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언약의 형식이 아닌가? 그래서 언약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었듯이 예수가 새언약을 세움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핵이 누구냐하면 거기의 만찬석에 둘러앉은 12제자들인 것이다.
옛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 상응하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에 상응하는 12제자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가 빠졌지만 이 12이라는 말이 전문어어가 되어가지고 심지어 바울도 12라고 칭하고 있다. 실제로는 11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예수의 자기 죽음이 무엇이냐 하면 속죄의 제사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인데 이 죽음을 통해서 어떤 결과들이 오는가 하면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해한 새로운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와 결부해서 생각해볼 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의도를 성취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죽음인 것이다.

출처 : 智本知神
글쓴이 : Healer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