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전략적 이해
(The Strategical Understanding of Mission)
시작하는 말
선교는 분명히 타문화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복음은 일종에 전파해야할 내용이다. 그러나, 이 내용의 전달과 함께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바로 ‘어떻게’라는 방법이다. 즉, 선교에는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선교 초창기부터 선교학자들은 그 방법을 연구해 왔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선교 방식나 선교 전략이 모든 족속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교지가 부족사회냐? 농촌사회냐? 혹은 도시사회냐에 따라서 그 적용의 범위가 달라지게 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가 불교인가? 유고인가? 혹은 이슬람인가? 하는 등의 종교적인 문제에 따라 선교 전략 역시 달라지게 된다. 한 마디로 선교의 전략에는 표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선교사들은 고민하게 된다. 그 고민은 “어떻게 보다 효과적인 선교 방식을 통해 자신의 선교지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속에 복음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도록 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이 고민의 문제를 해결하기 필요한 것이 선교지에 대한 연구이며, 문화에 대한 연구이다. 오늘날 선교학자들은 이 모든 선교 전략을 상황화(Contextualization)이라고 부르고 있다.
상황화란 복음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복음을 제시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릇된 상황화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복음으로 착가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의 전략적인 측면을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어떤 것이 선교를 위한 바른 상황화인가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생각된다.
1. 상황화의 출발
상황화의 출발점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문화와 전달자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세계관의 차이에서도 발생한다. 즉, 주님의 위임명령에 순종해서 복음을 전달해야 하는 지역이 동일한 지역이 아니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역시 동일한 문화권에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문화적인 다양성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달자의 자세에 대해 고린도전서 9:19-23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했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령세례를 체험한 초대 교회의 성도들 역시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다. 초대 교회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위험한 생각들이 있다. 복음을 전파하는 것 외에 그들은 다른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문화를 이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담고 있는 자신들의 문화라는 그릇이야말로 최고로 복음을 담기에 좋은 그릇으로 생각한다.
초대 유대교에서 개종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범한 그릇된 생각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짊어지지 못하는 할례와 유대의 다양한 문화를 이방에 있는 형제들에게 강요했다. 그들은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유대 문화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점에서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고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는 선교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들은 함께 모였고, 회의를 통해 이방 문화 속에 강요해서는 안된 유대인들만의 문화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그들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서 그 이방인들이 실행해서는 안되는 복음과 반대되는 행위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방인들에게 우성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할 것을 결의하고, 명령하였다(행15:20).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방 문화를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던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은 사도들의 그것과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새로운 접근법을 사용하였다. 그가 사용한 방식은 상황화였다. 바울은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문화 속에서 얼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분을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인 습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신들만이 가진 고유한 사회적 관습과 문화적인 유산과 전통 속에서 얼마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의 모습으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으로 복음의 전파자가 되었던 것이다.
찰스 크래프트(Charles H. Kraft)는 오늘날 선교지로 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사도행전 15장의 교훈을 잊어버린 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선교사가 지니고 있는 문화처럼 그들이 변화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화에 대한 오류는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다.
1) 상황화의 역사적인 교훈
우리는 역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보아야 한다. 만일 문화 = 복음이라면 세계의 모든 문화는 동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삶의 형식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문화가 다른 여러 백성들을 그분의 도구로서 사용하여 복음을 전달해 오셨다. 예를 들면, 신약시대 이후 국교회가 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들이 모든 사람들을 획일적인 종교적인 문화 아래에 두려고 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로마 문화를 채택하도록 강요했고, 종교적인 색깔도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틴어 일색의 문화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종교 개혁자 루터를 통해 하셨고, 독일 형식의 예배를 드리도록 하셨다. 루터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은 스위스의 제네바를 중심으로 칼빈에 의해서 또다시 변형되었고, 영국과 유럽 각국에서 그들 나름대로의 예배 방식과 문화에 맞는 형식을 갖추도록 하셨다. 아시아가 열강들의 제국주의 아래 놓이게 되자 제국주의자들은 아시아의 문화를 열등한 문화로 생각하고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옷을 입고 있는 복음을 강요했다. 그러나, 아시아인들에게는 아시아인들의 옷이 있었다. 아시아의 여러 교회들은 그들의 옷을 벗겨내고 오직 복음의 본질 속에 아시아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문화의 옷을 다시금 그들의 상황에 맞도록 복음 위에 입혔다.
이러한 역사적인 교훈이 오늘 세계의 여러 선교지에서 무시되고 있다는 것은 크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복음을 전달하는 사람들은 회심자들에게 자신들이 가지고 온 문화의 옷을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이 문제로 세계 선교지는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과연 어디까지 얼마 만큼 양보하고 그들이 가진 문화를 복음의 문화로 인정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교훈을 받아들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속에서 복음과 상반되는 문화와 복음과 어느 정도 접촉점을 가지고 있는 문화 그리고 복음과 일치되는 문화를 발견하고 그들의 관점과 그들이 입고 있는 문화의 옷을 통해 복음이 뿌리 내리도록 힘써야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2) 복음과 문화의 연결 방식
인류학자들은 문화를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는 조직화된 관습들 및 그 밑바닥에 있는 세계관이라고 말한다. 문화는 세계관과 떨어져 있는 말이 아니다. 문화는 사람들의 생활방식, 그들의 삶에 대한 설계와 태도, 그들의 생물적,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 대처해 가는 삶의 방식이다. 문화는 또한 학습되고 유형화 된 가정들이며(흔히 이를 세계관이라고 말함), 개념들과 행동 및 그 결과 나타나는 생산물들이다(문화적인 유산이라고 말함).
예를 들어 챨스 크래프트는 문화는 표면층과 깊은 층을 가지고 있는 강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표면은 눈에 보이나, 강의 대부분은 표면 아래에 있기 때문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은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조류, 강의 혼탁도, 강 속에 움직이는 여러 생명체들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다. 이처럼 문화의 표면 현상 뒤에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세계로서 세계관이 있다. 이 세계관의 영향에 따라서 문화가 변화되는 것이다.
이점에서 복음의 영향력은 표면적인 인간들의 삶의 변화에 두는 것에 목적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삶의 방식에 앞서 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변화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진 문화에는 열등이나 우등과 같은 계층적인 우열은 없으나, 한 문화 속에는 몇 가지 차원의 다양한 문화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선교적 전략을 세우는데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 문화에는 서로 다른 민족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그 서로 다른 문화 속에는 또다시 빈부, 여자와 남자, 노인과 청년, 직업에 따라 삶의 방식이나 대응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래의 도표는 사람들의 행동과 문화 차이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다.
사람(사회) |
문화 |
표면적 차원의 행동 대체로 습관적으로 그러나 또한 창의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행하거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느끼는 것 |
표면적 차원의 문화 구조 습관적으로 행하거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느끼는 것들에 관한 문화적 유형들 |
심층적 차원의 행동 대체로 습관적으로 그러나 또한 창의적으로 아래 것들에 관해 가정하고, 평가하고 헌신하는 것. 1) 선택하고, 느끼고, 추론하고, 해석하고, 존중하는 것에 관하여 2)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관하여 3)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헌신하고, 적응하거나 아니면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기로 결심하는 것에 관하여 |
심층적 차원의 문화 구조
깊은 차원의 행동들에 대한 가정들, 평가들, 헌신들을 수행하는 유형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선택하거나, 느끼거나, 추론하거나, 해석하거나, 가치 판단을 하거나, 설명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거나, 헌신하거나, 적응하거나,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기로 결정하는 유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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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문화의 계층적 차이에 대한 이해는 결국 선교 전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노인과 어린이 청년과 남자와 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문화는 차이가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 역시 다르다. 따라서, 복음을 전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 같은 구원의 능력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 차이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들에게 맞는 세계관을 찾아 그 세계관을 복음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때문에 선교는 문화와 인류를 이해하는 안목이 필요하며, 이들에 대한 연구는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적 전략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2. 상황화와 비상황화(Contextualization and Noncontextualization)
상황화는 일종의 문화에 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이것은 문화 변혁 또는 기존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기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복음 전달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변화는 결국 과거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문화적인 전통을 파괴하는 위험을 지니기도 한다.
1) 상황화의 방식의 이해
만일 선교지의 문화가 복음적이 세계관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과 믿음들이 비성경적일 때, 어떻게 이와 관련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 그 첫째 방법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옛 믿음들과 관습들 중 일부분만을 ‘이교적’인 것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 문화 속에 있는 연극, 춤, 몸에 장식하는 장식품들, 결혼 풍습, 장례의식 등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전통 종교들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이러한 문화 방식을 거부하게 된다. 선교사들은 그들이 가진 문화를 거부하는 대신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수입하여 문화 공백을 채우려하는 습성이 있다. 선교사들은 토착 정서에 맞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대신에 서구의 찬송가와 메로디를 들여오고, 마루에 돗자리를 깔고 예배를 드리는 대신에 장의자를 들여오며, 교회 역시 서구형의 모양으로 세운다. 결국, 토착인들의 눈에는 기독교 외국의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며,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라에서조차 이방인처럼 취급을 받는 모순을 가지게 된다.
선교사들이 만일 옛 문화의 방식을 억누르게 된다면 그 문화는 지하로 숨어들게 된다. 새로 회심한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러 교회로 오긴 하지만, 주중에는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성경에 의지하기보다는 무당과 마술사들에게로 간다.
선교사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 문화를 정죄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선교사들이 그들의 감독자로서 서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선교사들은 복음의 전파자로서 그들 가운데 있기보다는 그들의 왕처럼 군림하여 그들 자치의 결정권을 통제하는 경향이 발생하곤 한다.
선교지에서 선교사가 취할 수 있는 문화에 대한 두 번째 방식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선한 것으로 보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변화될 필요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복음이 외국인의 소유물로 보이는 것이 세계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그들이 받아들이는 큰 장애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 방식은 큰 위험을 가지고 있다. 즉, 개인적인 범죄나 문화적인 죄에 대해 간과한다는 것이다. 이점에서 상황화는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복음을 전할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리고 부족 전체가 악한 길에서 돌아서도록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을 찾아야할 것이다.
이 같은 무비판적 상황화는 온갖 종류의 혼합주의에 이르도록 문을 열어주는 결과는 가져온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 반대되는 믿음들과 관행들을 계속해서 놓아둔다면, 이것들은 조만 간에 그들이 새로 발견한 믿음(기독교)과 뒤섞이게 될 것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새로운 이교주의가 발생하도록 하는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세 번째의 상황화에 대한 접근 방식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유산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이다. 그 평가 단계로서 첫째는 옛 방식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가진 문화를 연구하는 것이다. 선교사와 교회의 지도자들은 회심한 사람들이 지녔던 전통적인 방식을 함께 연구할 수 있다.
둘째 단계는 교회에서 그 문제와 연관된 것들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함께 성경을 연구하여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식과 장례식 행사를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그들에게 가르칠 수 있다. 이 단계는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그들이 이 단계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단코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벌려야할 것과 가져야할 것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회심한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과거의 습관과 관습들을 성경을 통해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를 사용할 것인가? 혹은 거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들이 취하는 또 다른 방식은 기독교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재해석할 것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토착 음악을 그대로 두면서 복음을 위한 새로운 전달 방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음악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화 속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침투 되도록 재해석해 갈 것이다.
2) 상황화의 장점들
기독교 선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고 성경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하나님의 나라의 상징인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과거 상황화라는 말은 “문화화됨(inculturated)” 또는 “토착화(indigenization)”라고 불리웠다. 기독교의 상황화는 신약 기록의 중요한 부분이다. 신약의 사도들은 히브리적인 생각들을 헬라의 문화의 사고에 맞도록 변형시켰다. 하나님, 교회, 회심, 회개, 로고스 개념 등 많은 주제들이 논의되었고, 그들의 삶과 실천 영역을 다루기 위해 일반 대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변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바울이 유대주의의 기독교인들과 얼마나 갈등하였는지 성경을 통해 수시로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사도행전 15장에 나타나는 예루살렘 총회는 이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는 좋은 본보기이다.
초대 교회로부터 교회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계속해서 복음의 본질은 변화되지 않았으나, 복음이 전파된 나라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민족과 부족에 알맞는 옷을 입었고 재해석되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챨스 크래프트는 이것을 “성경적인 기독교가 역사상 모든 시점에서 모든 언어와 문화에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라고 말함으로서 상황화라는 것은 복음이 그 문화와 언어 속에서 “거듭 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점에서 상황화는 기독교가 여러 가지 문화 속에서 다양한 방식에 의해서 증거되며 전파 될 수 있도록 하는 역동적인 힘으로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상황화라는 것은 복음이 전파되면서 그들 속에 있는 오랜 문화 인식과 자신들의 민족이 가지고 있는 역사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필수적인 재해석 작업이며 필연적인 요소인 것이다.
3) 예측할 수 없는 상황화의 위험성
상황화에는 위험이 언제나 복음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이미 지적하였던 것처럼 혼합주의는 언제나 상황화의 적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혼합주의는 그들 민족이 가진 문화와 전통과 함께 얽혀서 새로운 의식과 종교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도 사람들은 예수님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 중의 하나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온 것으로 받아들인다. 남미에서는 교회 안에서 이교의 점술과 마술이 행해진다. 서구의 경우 이웃을 사랑하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동성애를 받아들이고 허용한다. 복음 전파를 위한 상황화는 이제 오히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잘못된 혼합주의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혼합주의에 이르게 되는 원인은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는 믿음에 대한 오해이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믿음의 본질적인 내용과는 달리 그들은 삶 속에서 믿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로마 카톨릭의 경우 믿음이라는 용어를 통해 기독교적인 의식을 실행한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많은 방식들이 이방문화의 유산인 것이다.
두 번째는 표면적인 모습들은 기독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삶의 의식은 이방적인 혼합주의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있지만, 삶의 방식은 전통적인 문화 유산과 그들이 과거에 믿었던 생각과 그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는 성경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기 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옛 관습과 습속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에서조차 그리고 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 이 혼합주의는 너무나도 쉽게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혼합주의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 것인가? 그 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능력과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종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성령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대답을 하게 된다. 아래의 그림은 상황화와 혼합주의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높음 |
상황화 |
낮음 |
중 간 |
높음 |
혼합주의 |
낮음 |
성령의 역사에 의지함 |
지역문화와 삶의 방식에 의지함 |
높음 |
상황화 |
낮음 |
중 간 |
높음 |
혼합주의 |
낮음 |
성령의 역사에 의지함 |
지역문화와 삶의 방식에 의지함 |
이상에서 보듯이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그곳에는 혼합주의의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 전파를 위해 감수해야할 위험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언제나 개척 단계에서 성경적이고 상황화된 기독교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들이 가진 문화 속에서 가장 성경말씀에 적합한 메시지를 찾아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며, 그 방법을 찾는 것이 그들의 숙제가 되는 것이다.
3. 상황화에서 일어나는 영적 대결
어거스틴은 모든 도시 안에는 두 도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나는 하나님의 도시이며, 하나는 사단의 도시이다. 이 말은 인간의 삶 속에는 언제나 영적인 대결이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예수님 역시 영적인 대결이 복음 전달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셨다(마12:28-29).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가 바로 진리의 대결임을 인정한다. 예수께서도 40일 동안 금식하신 후에 사단과 진리로서 맞서 싸우셨다(마4:1-11). 그러나, 이러한 진리의 대결 외에도 예수님은 영적인 대결들을 하셨다. 흔히 현대 선교학자들은 이러한 대결을 “능력대결”이라고 말한다.
1) 능력 대결의 범위
능력 대결이라는 말은 선교 인류학자인 알랜 티펫(Alan Tippett)이 처음 사용한 말이다. 그는 그의 책 남부 폴리네시아의 종족운동(People Movements in Southern Polynesia)라는 책에서 ‘남태평양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지역의 이교적인 신의 능력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이는 대결이 나타낼 때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복음을 더 빨리 받아들이는 것으로 관찰’하였다. 이는 마치 출애굽 때에 바로의 제사장에 대항하여 모세와 아론이 그들이 가진 능력을 나타내 보임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능력 대결은 엘리야와 아세라 선지자와 바알 선지자의 갈멜산 대결에서도 볼 수 있다(왕상18:20-40).
최근에는 능력 대결이라는 말이 치유, 악신으로부터의 해방,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특정한 종족 집단이 숭배하거나 두려워하던 영들과 그들이 가진 능력들 또는 거짓 신들보다 더 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시적이고 실제적인 표현들을 포함하는 말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능력 대결의 관점을 통해 보면 교회의 역사는 사단과 악한 영들에 대항하는 하나님과의 능력 대결의 역사로 보게 된다. 오늘날 이 능력 대결에 대한 관심은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에게 특히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능력 대결이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한 가지 만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귀신을 제어하고 사단을 축출하며, 병을 고치는 기적적인 부분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능력 대결은 단순히 영적인 능력과 대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능력 대결의 범위는 단순히 힘과 힘의 겨루기라기 보다는 더 넓은 의미에서 세심하게 다루어야할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순히 능력 대결보다는 더 넓은 범위에서 사단과 싸우셨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의 능력 대결의 범위
예수님께서 사단과 대립하여 싸운 것들을 살펴보면 단순하지가 않다. 그분은 물론 영적인 능력으로 그와 맞싸웠다. 마귀의 자녀들(요8:44)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분은 싸우셨다. 그분의 능력은 그를 제압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분이 자신의 영적 능력을 사용하신 것은 언제나 자녀들에게 자유함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눅8:26-39). 그분의 능력은 일방적인 부분도 있었으나 그를 믿는 사람들의 믿음과 관련이 있었다. 때문에, 치유와 귀신을 몰아내는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주면 많은 사람들 몰려 올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 분명하다.
능력 뒤에는 반드시 회심이 필요하다. 회심없는 이들은 모두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주님을 따랐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떠나고 말았다(요6:66). 그러나, 베드로와 몇 명의 제자들은 계속해서 그분을 따랐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도 떠나려느냐?”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니이다”(요6:68-69)라고 고백하였다. 회심없는 능력의 체험의 결과는 일시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게 할 수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능력 대결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 대결이 균형과 오래 도록 힘을 갖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가 필요함을 생각하게 된다.
첫째는 진리의 대결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그곳에 있었던 1세기의 유대인들은 오늘날의 사람들과 유사하게 영적 능력에 관심이 많았다. 바울은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한다(고전1:22)라고 했고, 예수님께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다(마12:38-42). 말세의 징조 중의 하나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라도 미혹하게 하는 것이다(마24:24). 유대인들의 요구에 대해 주님이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인가? 그분은 영적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며, 비록 인간들이 죄 가운데 있지만 그들을 계속하여 사랑하신다는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 낮아짐이 어떤 것인가를 그분은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그분이 능력을 행하신 것은 오직 영혼을 사랑하실 때, 그리고 그들 속에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구원자라는 믿음이 있는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주님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계획을 알도록 가르치셨다. 그분이 가르치신 진리는 이성적인 진리가 아니었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 나타난 진리는 인격적이고 경험적인 것이었다. 그분이 능력을 나타내실 때 그분은 언제나 그곳에는 제자들을 말씀으로 깨우치시기 위한 이유가 있었다. 능력은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되어야 한다. 이 대결은 다음의 과정을 가지고 발전하게 된다.
출발(인식) ----> 과정(지식으로 이끔) -----> 목표(진리를 이해함)
둘째는 순종의 대결이다. 찰스 크래프트는 이를 충성대결이라고 말한다. 이 순종의 대결은 주님께 헌신하며 그분의 뜻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살며, 전적으로 부패한 심령을 가진 육의 사람들이었다. 육체의 사람과 영의 사람은 계속해서 우리 안에서 대결하고 있다(롬7:19-20). 이 둘 사이에 있는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대결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인 그 진리와 진리의 영이신 성령에게 자신을 둘 때이다.
이 대결은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악한 영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육신을 훈련하는 것이며, 그 아들의 형상을 닮아 가도록 하는 것이다(롬8:29). 순종의 대결은 아래의 과정을 가지고 발전한다.
출발(예수님을 향한 헌신) ---> 과정(관계에서 성장) ---> 목표(예수그리스도의 성품)
셋째는 능력 대결이다. 능력대결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하게 한다. 이 대결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악한 영으로부터 놓임을 받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으며, 오해의 여러 요소가 존재한다. 능력 대결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과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능력을 체험하고 세상에 그분의 능력을 드러나게 한다. 그럼에도 성경에서는 이 능력 대결의 모습과 어느 정도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사단을 제어하는 권능이 있음을 말씀하셨다(눅10:19). 능력 대결은 다음의 과정을 가진다.
출발(치유,해방...) ---> 과정(자유의 증가) ---> 목표(사단에 대한 승리...)
따라서, 이 세 가지의 대결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영적 능력을 나타내거나, 복음을 전파하는 지역과 대상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일방적인 선언하는 진리의 전파나,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어느 한 가지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능력 대결이라고 말할 때 이 세 가지가 조화되어 선교지에서 어떻께 뿌리를 내리고 복음이 정착될 수 있는가를 선교사들은 생각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능력대결에 대한 과정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출발(주의를 끔) ---> 과정(보여줌) ---> 목표(하나님을 신뢰함)
결론적으로 이 세 가지의 대결은 무지와 진리의 오류 속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에 대한 이해로 이끄는 단계에서 출발하여, 말씀에 대한 순종과 그분에 대한 헌신을 요구하며(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인간들의 본질적인 구원의 목적인 영적인 구원을 통한 자유와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구속을 얻는 능력의 관계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선교는 전략이라는 말이 있다. 그 전략은 너무나도 많은 방법을 소유하고 있다. 기관과 기관의 협력과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야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지역마다 종족마다 그 방법이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선교지에서 반드시 뿌리 내리고 정착해야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다. 선교지를 섬기는 모든 선교사들의 공통된 목표는 그들의 섬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의 영광을 드러 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어떻게?라는 질문은 이점에서 본질적이다. 따라서, 토착화의 작업은 모든 선교사들의 연구 과제이며, 이 토착화에서 어느 부분을 제거하고 받아들여야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복음을 받아들인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선교지에서 토착화 작업 중에서 자주 부딪치는 것이 바로 능력 대결이다. 능력대결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한 선교지에서 복음을 뿌리고 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능력 대결은 어느 한 쪽면이 아닌 세 가지 면의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토착화는 능력 대결을 어떻게 감당해 내느냐?에서 그 출발점이 있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능력 대결 역시 새로운 선교 전략의 한 분야로 연구되어져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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