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宣敎(선교) 以前(이전)의 求道(구도)
♠ 중 국
1253년 천주교는 원(元)나라에 전해졌다. 1300년 전후로 크게 발전했는데 당시 원나라에는 3만여 명의 고려 사람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도 천주교와 접촉하였을 것이다. 1583년 명나라에 마태오 리치 신부가 들어가 선교하여 북경에 성당을 세웠으며, 신종의 황태후를 비롯하여 2500여 명의 신자가 생겼다. 마태오 리치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진 [천주실의]라는 교리책을 썼다.
♠ 일 본
프라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인도 고아에서 출발하여 1549년 8월 15일 일본의 규수, 야마구지 지방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전교를 시작하였는데 신자수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1605년 경에는 일본 전국에 40만 명의 신자가 생겼다.
♠ 한국
☞ 1592년 4월 일본의 풍신수길이 15만 7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1593년 일본인 전교회장(후안 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함께 와서 왜군 신자들을 돌보아 주었으나 별로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고 1595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4만여 명 가운데 장기(長岐)지방 근처에서 7천여 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후 덕천막부(德川幕府)의 금교정책으로 1611년부터 1720년까지 1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조선인 신자 7천여 명도 모두 순교하였다
4-1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 1636년 병자호란 때 여진족의 청나라는 10만 대군을 몰고 조선을 쳐들어오자 조종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했지만 결국 남한산성에 투항했다가 1637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리고 갔는데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청의 세조에게 신임을 얻어 벼슬을 하고 있는 아담 샬 신부와 사귀게 되었다.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 얻어 통감목사(벼슬)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 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1644년 귀국 길에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얻은 학식 높은 천문학과 기독교 관계의 서적, 서양문물, 그리고 천주교 신자 환관, 궁녀들을 데리고 서울에 오게 된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1644년에 학질로 돌아온지 70일 만에 죽게 되자 그들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고 모든 서교와 서양과학의 전달이 수포가 되었다.
(세자가 북경에 있는 동안 조선인 2-3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4-2 조선 학자들의 서학 접촉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西學(서학)과의 接觸(접촉)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의 실지 연구',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실증, 실용의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났다.
서구 학술의 수입은 서학을 통하거나 관심을 가져야만 되었다. 또 하멜과 접촉으로 문예부흥과 근대화 물결에 변모해 갔다.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하게 되었고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어 살아가던 도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되었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여 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3년간 억류되어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알 수 있다. )
실학파 선구자
☞ 조선조 이 수광 (1563-1628)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 일에 보상이 있고 악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고 이웃을 제2의 나라라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주교책을 가져왔다.
주장 : 천주가 하늘, 땅을 창조, 사람은 불멸의 혼을 가졌고, 불교의 윤회는 잘못됨을 변론하고 있으며 인성을 원래 착하다고 소개하였다. 이 주장으로 동양의 사고에 심각한 도전을 주었다. (우리나라 실학운동의 선구자인 지봉 이수광(1563 - 1628)은 마태오 리치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등의 책을 보고 새로운 실학운동을 일으켰고 이 책이 전해져 8대 손에 이르러 천주교를 믿는 운동이 일어나고 후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 "천주실의(天主實義)"
개요
중국 명(明)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한 예수회 소속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利瑪竇)가 한문으로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
구분 : 천주교 교리서
저자 : 마테오 리치
시대 : 중국 청초(1603)
제목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며, 8편 17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말(明末) 청초(淸初)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총 500여 종에 이르는 서양 학술서적을 다투어 한문으로 번역 출판하는 분위기 속에서 1593~96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며, 1603년에 중국 북경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거듭 출판되었다.
카톨릭 철학과 스콜라 사상의 입장에 선 서사(西士)와, 전통 유학과 불교 ·도교의 사상을 갖춘 중사(中士)가 토론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동양사회에 대한 천주교 전파가 목적이었으므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경우 불교와 도교 이념도 동원하였으며 중국의 고사(古事)와 성어(成語)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1편은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2편은 불교·도교에 대한 논박과 상제(上帝) 개념 등 천주교 수용의 기반이 되는 유교의 성격에 대한 설명을,
3편은 천국(天國)의 필요성과 식물 ·동물 ·인간의 특성을,
4편은 인간 영혼의 신령함과 범신론적 일신론(汎神論的一神論)에 대한 비판을,
5편은 윤회설 등 불교에 대한 비판과 그리스도교의 재계(齋戒)의 성격을,
6편은 죽은 후의 상벌(賞罰)과 지옥 ·천국 ·연옥에 대한 설명을,
7편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본성을,
8편은 천주교 신앙생활과 상통하는 중국 고대의 생활과 천주교에 귀의하여야 할 당위성을 논하였다.
이 책의 일차적인 특징은 불교와 도교는 배척했지만 유교는 태극설(太極說)을 제외하고는 그 의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천주교 전파의 바탕으로 삼으려 했던 점에 있다. 중국에서는 건륭제(乾隆帝)가 이 책을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하게 할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으며, 일본에도 처음 발간된 이듬해에 전파되었다.
한편 유 ·불 ·도교의 입장에서 반발도 거세게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종진지(鍾振之)의 《천학초징(天學初徵)》 《천학재징(天學再徵)》 등의 반론과 그것을 모은 《벽사집(闢邪集)》이 나왔다. 또한 천주교 내부에서도 유교에 영합한 오류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조선에서도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지봉유설》에 그 편목이 실려 있는 바와 같이 사신 일행을 통해 바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18세기 중엽 이후 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 등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반대중을 위한 번역본도 많이 필사되었다. 반면에 이익(李瀷)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 이래 신후담(愼後聃)의 《서학변(西學辨)》, 안정복(安鼎福)의 《천학문답(天學問答)》, 홍정하(洪正河)의 《실의증의(實義證疑)》 등을 통해 많은 비판과 배격을 받았다.
한자문화권의 여러 나라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서양인이 한자로 저술한 서적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책이다.
☞ 이익의 성호사설
성호 이익은 남인가문 출신으로 과거 실패 후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학문적 측면에서의 연구가 시작하여 이수광에 서구과학기술에 대해 단편적으로 소개한 이후 이를 학문적으로 발전시켰다. 성호는 천문, 역법, 지리 등 각 분야에 걸친 그의 견해를 {성호사설}에 실어 "서학은 오로지 천주를 숭상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의 상제이며, 그 공경하고 섬기고 두려워하는 믿음은 佛氏와 흡사하다. 천당지옥설을 가지고 권징한다."고 하여 서학을 불교와 흡사하다고 하였으며 교화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이론적인 학자형 입장을 취하였다.
西敎(서교)의 宗敎成(종교성) 問題(문제)
서학과 서양문명을 공부한 자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였기에 오판을 한 사람과 학구적으로 연구하는 석학들 중에서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오판한 사람
(1) 신후담
① 비판적 입장으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천당지옥설, 영혼불멸의 설은 분명 불씨의 설이다. 일찌기 우리 유가에서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아직 그것이 불씨와 다른 점이 무엇이고 유교와 같은 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불씨의 여론을 모았으면서도 도리어 불교를 배척하니 리마두는 우리 유교의 죄인일 뿐 아니라 처음부터 불씨의 반적이다."라고 규정한다.
② 천주교의 영혼불멸설 부정 --> "인간의 영혼은 식물이나 동물의 그것보다는 뛰어나지만 형체가 없어지면 영혼도 필경 없어지는 것"이라 하여 서학의 영혼불멸설 부정하였다
③ 정통 유학을 정학으로 지키기 위해 서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안정복
① {천학고} : 천주교 동전의 역사적 논고, {천학문답} : 31항목에 걸친 문답을 통해
천주교를 공격하였다.
② 조상의 제사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비판함으로써 서학을 공격 -->
서학에서 가상(위패)을 걸어 놓고 제사지내는 유교의 전통을 잘못된 것이라 하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전통적인 예속을 벗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③ 서학도들이 천주상을 놓고 예배드리는 것도 가상을 놓고 제사지내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였다.
④ 천주교를 현세부정의 종교로 무군무부의 비윤리적 사회윤리로, 천당지옥설을
통해 비합리적인 논리로 파악하였다.
(3)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
① 종교로서의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서양과학기술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자세를 보였다..
② 박지원은 천주교가 불교보다 허위의 가르침이고 불교보다 해가 더 큰 것이라
하며 사학이라고 하였다.
③ 박제가 {북학의} : 선교사들을 데려다 그들의 과학기술만 배우고 선교활동을
못하게 하면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신서파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 정약용 . 이벽 . 이승훈 등
① 정약용은 천주교 교리를 원시유교의 상제설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유신론적인 입장을 취함 --> 천주교 신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었다.
② 이 벽 : 한국천주교회를 창설한 중심인물. {聖敎要旨}는 韻詩體로 천주교의 교리를 읊고 거기 에 이벽 자신의 해설을 덧붙인 것인데, 이는 조선 후기사회에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최초 기록하였다.
③ 허균 : 게 12장을 얻어 논쟁을 벌였고 천주교의 신앙에 전향했다고 볼 수 있다. 허균은 천 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천주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혔다. 또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④ 홍유한: 이 익의 제자이며 금욕적인 생활과 그리스도의 축일인 제7일에는 안식하고 묵상하 며 보냈다.
⑤ 정하상 상제 상서의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하는 내용과 척불숭유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서학이 조선에 미친 영향
① 18세기에 학문적으로 발달한 서학은 실학의 선구자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실학시대의 실학자들에 의해 연구됨
② 특히 정권과 유리된 재야학자들에 의해 발전한 서학은 實正, 實利, 實證의 합리적 비판적 근대의식을 구현하는 문화운동의 관점에서 이질적이기는 하지만 실학의식의 형성, 발전의 외적요인으로 작용
③ 서양과학서의 연구는 부국안민을 위해 이용후생적인 목적에서 실학발생의 요인이 되었고 형이상학적인 이학 및 종교서들은 남인계 학자들의 도덕의 상승을 위한 목적으로 읽혀졌고, 그 도덕의식이 종교를 흡수함으로써 소위 종교운동 대두시킴
④ 당시 남인 학자들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전통을 지키려는 형식과 규범을 거부하는 근대적 의식과 득세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지배의식에 대립된 평등의식이라는 기반 위에서 서학을 수용하게 됨
4-3 이승훈의 入信과 조선 천주교회의 터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호는 만천(蔓川)이며 세례명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이다.
강원도 평창(平昌) 에서 태어나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하였다. 1783년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천문학과 수학, 과학적 견문을 넓히고 선교사들과 토론을 하면서 기독교 가르침이 신묘하고 교훈이 순결함에 이끌려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한국교회의 주춧돌을 놓는다는 의미로 영세명을 '베드로'라 불렀다.(1784)
다음해의 3월에 교리서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하여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하여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자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하였다. 이후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우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
명례방 자리에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에서 타계하였다.(최초의 순교 사진은 1920년대 모습이다 자)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 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이 벽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을 담당했던 이 벽(李 檗)은 1754년(영조 30년)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고 경학(經學)연구에 몰두하다가 새로운 학문인 서학(西學)을 접하게 되자 기존 학문인 유학(儒學)에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1779년 겨울, 당대의 저명한 학자인 권철신을 전교하여 이름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연다는 소식에 그는 이 모임에 참석하여 천주교 도리의 위대함을 발견하였다. 이 벽은 이승훈에게 수세를 받게 하고 나중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영세명을 '요한'이라 불렀다.
1784년 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건너 받은 이 벽은 두문불출하고 이 책들을 숙독하고 나서 곧 선교 활동에 나서 정 약전. 약용. 약종 형제들과, 유명한 학자 권철신. 일신 형제들도 입교 시켰다.
그리고 1784년 가을에는 명례방(지금의 명동부근)에 살던 통역관 김 범우의 집을 교회 예절 장소로 사용하다가 1785년 1월에 추조금리(秋曹禁吏:지금의 형사)에게 발각되었다.
(을사 추조 적발사건) 이 벽의 부친은 이 사실에 자살하려 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이 벽은 신자들도 만날 수 없고 외출도 금지되어 그는 식음을 전폐하다가 10여일 뒤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도무지 찾을 길이 없던 그의 무덤이 지난 1979년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어 천진암 강학회터에 권 철신, 권 일신, 이 승훈, 정 약종과 함께 이장되어 자리하고 있다.
명동의 명례방 즉 진고개의 김범우 집은 지금의 명동성당이 우뚝 솟았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효시
사실 두 기둥이 된 이승훈과 이 벽이 신앙의 미숙과 바른 이해가 결해되어 배교를 하고 번민을 하였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자발적인 전도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자발적으로 수용된 것이었다. 17세기에 베이징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천주교를 서학이라 하여 서양 문물의 하나로 간주하였을 뿐 하나의 종교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학문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천주교가 종교 신앙으로써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식과 역사적인 처절한 시련 앞에 갱신해야 한다는 필요를 깨달아 복음이 압도가 되어 국가의 기본정책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 교난이 발생하였다.
5. 體制(체제)와 傳統(전통)에 異質(이질)로 經驗(경험)된 基督敎(기독교)
辛亥(신해), 辛酉(신유)의 敎難(교난)
수난을 불러온 요소
a. 조상제사의 문제
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
그러므로 불효는 일천 가지 중에 가장 큰 죄이다.
그리고 효 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조상제사는 정치적 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 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이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영조때 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5-1. 辛亥(신해) 敎難(교난) 1791
인조 이후 서학연구 기풍이 생겨나고 일반 민간에 천주교가 유포되기 시작하는 초기에 정부는 이를 일시적인 현상이며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서학연구가 활발해지고 드디어 신앙운동으로 진전되었을 때는 정부는 주자학체제에 대한 도전이라 단정하여 탄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의 유포에 대하여 나라에서는 스스로 자멸하리라 보아 처음에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천주교의 교세가 해서, 관동 민간인 사이에 확장되었고 정조 때에는 호남지방에 선비들에게 신앙이 되자 천주교가 제사 의식을 무시하여 예속 생활을 그르치고, 인간 평등을 부르짖어 신분 질서에도 위협이 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9년(1785)에는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로 규정하고 이를 믿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내렸다. 이 때 전라도 진산 유학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르자 조야가 충격을 받고 이들을 참형시킨 교난이 발생하였다.
신해교난으로 이승훈은 예산쪽으로 정배를 떠나고 홍문관에 소장된 서양책들이 불태워졌다.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이다.
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하였다. 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 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하였다. 그 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했다.
5-2 辛酉(신유)敎難(교난)
시파(세자 동정하는파) - 남인 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
숙종때 남인 세력이 약화되어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하였고 곧이어 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악랄한 방법으로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간섭 정치를 하여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채재공이 죽자 죽은 후 관직까지 박탈하였고 1801년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천주교박해의 두 요소: 비인간성과 비국민성, 체제도전 --- 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겨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해야 신유 박해 때 사형 당한 정약종
한다고 하였다
신해박해 이후에도 천주교인들은 더욱 교세를 확장하는 한편, 정조 18년(1794년)에는 우리나라 사람과 용모가 비슷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데려왔다. 주문모 신부는 그 뒤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비밀히 전도에 힘써, 약 5년 뒤에는 전국의 교인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순조 1년(1801년, 신유년)에 노론의 벽파 가 시파를 꺾기 위하여 시파와 가깝던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가환·권철신·이승훈·정약종 등 많은 신도가 사형 당하고,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귀양 갔다.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였다가 사형 당했고, 왕의 친척도 가리지 않고 처형하여 300여명이 순교 또는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신유사옥 또는 신유박해라 한다.
6. 황사영 백서사건
-힘의 신앙
6-1. 힘의 신앙형태
조선 후기에 외환을 거치면서 서양문명 월등함에 학문으로 전환한 점을 들 수 있고 남인들이 붕당적인 정치적 구조 속에 비극으로 정쟁의 구실이 되었다.
서양문명의 힘의 전개 과정 속에 천주교의 해석이 다양하였지만 실패하고 정치적인 평면에서 나라와의 심각한 충돌을 야기하였다.
그 힘의 신앙의 형태가 곧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다.
6-2 황사영의 백서
황사영은 일찍 17세에 진사 급제하였고 정약종의 사위이며 주문모 신부를 사사하고 세례를 받았던 열렬한 신도였다.
1801년에 신유 박해가 시작되자 충북 제천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나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 구베아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하였다. 그는 청의 힘을 빌어 천주교 박해를 면해 볼려고 진성서을 올렸다.
북경 주교에게 참혹한 박해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건의하기 위해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13,311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해와 참상을 보고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졌다.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되었다.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내용.( 정치적인 기상도와 탄압과정을 제보함)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 하고, (4)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왕으로 하여금 서교를 받아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5)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싣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하였다.
결과
* 그 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그 자신은 물론 남아 있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끔찍하게 처형당했으니, 이를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 한다. 그 이후 천주교는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 하며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리게 되었다.
* 이백서는 의금부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교황청에 보관이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의 밀서가 공상적이고 위험천만한 내용이었다.
* '나라는 망하여도 천주교는 남아야 한다'는 이 백서는 민족의식을
망각한 처사로 한국 천주교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개인 생각*
철저한 신앙심과 호교론에 입각하여 오로지 종교의 자유와 교화의 부흥만을 희망한 사항 과 신앙의 보존을 위해 자신의 안전과 입신 영달을 아닌 교회의 재건과 이 겨레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목적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배울만하나 무책임한 발상으로 주의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주를 위한 열심은 높이 평가 할 수 있으나 방법에 있어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고 그 시대가 참혹한 배경 밑에 있어다고 하지만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바라보면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아니 되고 선으로 행해야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알 수 있다.
6-3 토사 교문의 핵심
*토사교문(討邪敎文)의 반포(1861.12.22)
유교 도덕을 높이고 받들어온 조선에 모든 사람이 마음을 고쳐서 천주교를 떠나 공자의 도를 행하라는 내용이다.
이 교문의 반포로 피비린내 나는 박해는 멈추었으나 천주교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답변 불능의 반박문으로서 법이 있는 한 박해는 언제나 야기될 수 있어서 근본적인 법령이 되었다.
* 황사영은 최후의 충성은 로마에 바친다는 카톨릭 사상과 정순왕후는 교종마저도 왕강의 전제 밑에 굴속한다는 상반 된 생각은 조화 될 수가 없었다.
* 사옥참화로 인해 쇄국의 정책을 쓰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삼엄한 통제 아래 단절되었다.
제 2장 한국의 로마 카톨릭 교회
4. 선교이전의 구도
4-1.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4-2. 조선학자들의 서학 접촉
4-3 이승훈 입신과 조선 천주교회의 터
5. 체제와 전통에 이질로 경험된 기독교
5-1. 신해 교난
5-2. 신유 교난
6. 황사영 백서 사건
6-1. 힘의 신앙과 형태
6-2. 황사영 백서 사건
6-3. 토사 교문의 핵심
♠ 중 국
1253년 천주교는 원(元)나라에 전해졌다. 1300년 전후로 크게 발전했는데 당시 원나라에는 3만여 명의 고려 사람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도 천주교와 접촉하였을 것이다. 1583년 명나라에 마태오 리치 신부가 들어가 선교하여 북경에 성당을 세웠으며, 신종의 황태후를 비롯하여 2500여 명의 신자가 생겼다. 마태오 리치는 우리나라에도 전해진 [천주실의]라는 교리책을 썼다.
♠ 일 본
프라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인도 고아에서 출발하여 1549년 8월 15일 일본의 규수, 야마구지 지방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전교를 시작하였는데 신자수가 3천여 명이나 되었다. 1605년 경에는 일본 전국에 40만 명의 신자가 생겼다.
♠ 한국
☞ 1592년 4월 일본의 풍신수길이 15만 7천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세스페데스 신부가 1593년 일본인 전교회장(후안 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함께 와서 왜군 신자들을 돌보아 주었으나 별로 선교활동을 하지 못하고 1595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4만여 명 가운데 장기(長岐)지방 근처에서 7천여 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후 덕천막부(德川幕府)의 금교정책으로 1611년부터 1720년까지 1백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조선인 신자 7천여 명도 모두 순교하였다
4-1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 1636년 병자호란 때 여진족의 청나라는 10만 대군을 몰고 조선을 쳐들어오자 조종은 필사의 노력으로 대항했지만 결국 남한산성에 투항했다가 1637년 정월에 남한산성에서 내려와서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3번 절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데리고 갔는데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청의 세조에게 신임을 얻어 벼슬을 하고 있는 아담 샬 신부와 사귀게 되었다. (아담 샬은 청나라 왕의 신임 얻어 통감목사(벼슬) 당시 예수회의 선교 정책은 어느 나라에서 선교하든지 왕실과 고위층에 먼저 접촉하는 의도가 있었음.)
1644년 귀국 길에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얻은 학식 높은 천문학과 기독교 관계의 서적, 서양문물, 그리고 천주교 신자 환관, 궁녀들을 데리고 서울에 오게 된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1644년에 학질로 돌아온지 70일 만에 죽게 되자 그들도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고 모든 서교와 서양과학의 전달이 수포가 되었다.
(세자가 북경에 있는 동안 조선인 2-3명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4-2 조선 학자들의 서학 접촉
* 당시 천주교를 서학이라 했다.(사람들이 서학에 관심을 많이 가짐)
西學(서학)과의 接觸(접촉)
당시 척불 숭유로 인해 임진, 병자호란으로 당하자 조종에서는 이때부터 '조선의 실지 연구', "조선 경제의 개조책"이라는 책도 만들고 실증, 실용의 새로운 학문들이 일어났다.
서구 학술의 수입은 서학을 통하거나 관심을 가져야만 되었다. 또 하멜과 접촉으로 문예부흥과 근대화 물결에 변모해 갔다.
(이들은 동양에서 무역하고자 네델란드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파선하여 경주 앞 바다에 표류하게 되었고 이들은 물을 얻기 위해 표류했다가 억류되어 살아가던 도중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같이 상륙한 2사람은 참전했다가 전사했고 벨트브레만 남았는데 전공이 인정되어 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되었다.
벨트브레가 표류한지 이십여 년이 지나 1653년에 하멜 일행이 본국을 떠나 일본으로 오다가 또 표류해 제주도로 오게 되었다.. 일행 64명중 36명만이 살아 남았고 제주도에서 13년간 억류되어 살다가 15명이 탈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 하멜의 기사에서 보면 그들이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알 수 있다. )
실학파 선구자
☞ 조선조 이 수광 (1563-1628)이라는 사람이 '지봉유설'을 썼다.
지봉유설 - 천주교에 대해 설명함. 윤회를 부정하고 착한 일에 보상이 있고 악한 자는 지옥에 간다는 이야기와 교황은 임기가 끝나면 좋은 사람을 투표로 뽑고 이웃을 제2의 나라라는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이수광은 마태오리치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임진란 전후로 3차례의 명에 사신으로 갔다. 그때 과학책, 천주교책을 가져왔다.
주장 : 천주가 하늘, 땅을 창조, 사람은 불멸의 혼을 가졌고, 불교의 윤회는 잘못됨을 변론하고 있으며 인성을 원래 착하다고 소개하였다. 이 주장으로 동양의 사고에 심각한 도전을 주었다. (우리나라 실학운동의 선구자인 지봉 이수광(1563 - 1628)은 마태오 리치 신부가 지은 [천주실의]등의 책을 보고 새로운 실학운동을 일으켰고 이 책이 전해져 8대 손에 이르러 천주교를 믿는 운동이 일어나고 후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 "천주실의(天主實義)"
개요
중국 명(明)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한 예수회 소속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利瑪竇)가 한문으로 저술한 천주교 교리서.
구분 : 천주교 교리서
저자 : 마테오 리치
시대 : 중국 청초(1603)
제목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이며, 8편 174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명말(明末) 청초(淸初)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총 500여 종에 이르는 서양 학술서적을 다투어 한문으로 번역 출판하는 분위기 속에서 1593~96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며, 1603년에 중국 북경에서 처음 간행된 이후 선교사들에 의해 거듭 출판되었다.
카톨릭 철학과 스콜라 사상의 입장에 선 서사(西士)와, 전통 유학과 불교 ·도교의 사상을 갖춘 중사(中士)가 토론하는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동양사회에 대한 천주교 전파가 목적이었으므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 교리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필요한 경우 불교와 도교 이념도 동원하였으며 중국의 고사(古事)와 성어(成語)를 적절히 이용하였다.
1편은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2편은 불교·도교에 대한 논박과 상제(上帝) 개념 등 천주교 수용의 기반이 되는 유교의 성격에 대한 설명을,
3편은 천국(天國)의 필요성과 식물 ·동물 ·인간의 특성을,
4편은 인간 영혼의 신령함과 범신론적 일신론(汎神論的一神論)에 대한 비판을,
5편은 윤회설 등 불교에 대한 비판과 그리스도교의 재계(齋戒)의 성격을,
6편은 죽은 후의 상벌(賞罰)과 지옥 ·천국 ·연옥에 대한 설명을,
7편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본성을,
8편은 천주교 신앙생활과 상통하는 중국 고대의 생활과 천주교에 귀의하여야 할 당위성을 논하였다.
이 책의 일차적인 특징은 불교와 도교는 배척했지만 유교는 태극설(太極說)을 제외하고는 그 의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 천주교 전파의 바탕으로 삼으려 했던 점에 있다. 중국에서는 건륭제(乾隆帝)가 이 책을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하게 할 정도로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으며, 일본에도 처음 발간된 이듬해에 전파되었다.
한편 유 ·불 ·도교의 입장에서 반발도 거세게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종진지(鍾振之)의 《천학초징(天學初徵)》 《천학재징(天學再徵)》 등의 반론과 그것을 모은 《벽사집(闢邪集)》이 나왔다. 또한 천주교 내부에서도 유교에 영합한 오류라는 비판이 일어났다.
조선에서도 《어우야담(於于野談)》과 《지봉유설》에 그 편목이 실려 있는 바와 같이 사신 일행을 통해 바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며, 18세기 중엽 이후 이벽(李檗) ·권철신(權哲身) 등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회가 성립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일반대중을 위한 번역본도 많이 필사되었다. 반면에 이익(李瀷)의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 이래 신후담(愼後聃)의 《서학변(西學辨)》, 안정복(安鼎福)의 《천학문답(天學問答)》, 홍정하(洪正河)의 《실의증의(實義證疑)》 등을 통해 많은 비판과 배격을 받았다.
한자문화권의 여러 나라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서양인이 한자로 저술한 서적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책이다.
☞ 이익의 성호사설
성호 이익은 남인가문 출신으로 과거 실패 후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학문적 측면에서의 연구가 시작하여 이수광에 서구과학기술에 대해 단편적으로 소개한 이후 이를 학문적으로 발전시켰다. 성호는 천문, 역법, 지리 등 각 분야에 걸친 그의 견해를 {성호사설}에 실어 "서학은 오로지 천주를 숭상하는데, 천주란 곧 유가의 상제이며, 그 공경하고 섬기고 두려워하는 믿음은 佛氏와 흡사하다. 천당지옥설을 가지고 권징한다."고 하여 서학을 불교와 흡사하다고 하였으며 교화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이론적인 학자형 입장을 취하였다.
西敎(서교)의 宗敎成(종교성) 問題(문제)
서학과 서양문명을 공부한 자들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였기에 오판을 한 사람과 학구적으로 연구하는 석학들 중에서도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오판한 사람
(1) 신후담
① 비판적 입장으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를 "천당지옥설, 영혼불멸의 설은 분명 불씨의 설이다. 일찌기 우리 유가에서는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아직 그것이 불씨와 다른 점이 무엇이고 유교와 같은 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불씨의 여론을 모았으면서도 도리어 불교를 배척하니 리마두는 우리 유교의 죄인일 뿐 아니라 처음부터 불씨의 반적이다."라고 규정한다.
② 천주교의 영혼불멸설 부정 --> "인간의 영혼은 식물이나 동물의 그것보다는 뛰어나지만 형체가 없어지면 영혼도 필경 없어지는 것"이라 하여 서학의 영혼불멸설 부정하였다
③ 정통 유학을 정학으로 지키기 위해 서학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 안정복
① {천학고} : 천주교 동전의 역사적 논고, {천학문답} : 31항목에 걸친 문답을 통해
천주교를 공격하였다.
② 조상의 제사문제를 제기하여 이를 비판함으로써 서학을 공격 -->
서학에서 가상(위패)을 걸어 놓고 제사지내는 유교의 전통을 잘못된 것이라 하면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전통적인 예속을 벗어나는 것이라 하였다.
③ 서학도들이 천주상을 놓고 예배드리는 것도 가상을 놓고 제사지내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하였다.
④ 천주교를 현세부정의 종교로 무군무부의 비윤리적 사회윤리로, 천당지옥설을
통해 비합리적인 논리로 파악하였다.
(3)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
① 종교로서의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고 서양과학기술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자세를 보였다..
② 박지원은 천주교가 불교보다 허위의 가르침이고 불교보다 해가 더 큰 것이라
하며 사학이라고 하였다.
③ 박제가 {북학의} : 선교사들을 데려다 그들의 과학기술만 배우고 선교활동을
못하게 하면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 신서파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사람): 정약용 . 이벽 . 이승훈 등
① 정약용은 천주교 교리를 원시유교의 상제설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서 유신론적인 입장을 취함 --> 천주교 신자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었다.
② 이 벽 : 한국천주교회를 창설한 중심인물. {聖敎要旨}는 韻詩體로 천주교의 교리를 읊고 거기 에 이벽 자신의 해설을 덧붙인 것인데, 이는 조선 후기사회에서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최초 기록하였다.
③ 허균 : 게 12장을 얻어 논쟁을 벌였고 천주교의 신앙에 전향했다고 볼 수 있다. 허균은 천 주교를 믿는 것을 말하고 그 천주교가 동남의 오랑케에게 퍼져 믿는 자가 많은데 우리만 모르고 있다고 밝혔다. 또 허균은 만주국에서 언젠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처형 당했다 (그는 천주교인)
④ 홍유한: 이 익의 제자이며 금욕적인 생활과 그리스도의 축일인 제7일에는 안식하고 묵상하 며 보냈다.
⑤ 정하상 상제 상서의 책을 바침.
우리나라 카톨릭에 대한 최초의 변증서 = 상제 상서
내용 : 3400자로 되 있는데 천주교를 변증하는 부분과 잘못된 오해 부분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임금의 자녀라고 긍휼을 구하는 내용과 척불숭유였는데 정하상은 이 책에서 불교를 공격했다. (즉 기독교가 불교와 다르다는 것을 말했다.- 강조)
서학이 조선에 미친 영향
① 18세기에 학문적으로 발달한 서학은 실학의 선구자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실학시대의 실학자들에 의해 연구됨
② 특히 정권과 유리된 재야학자들에 의해 발전한 서학은 實正, 實利, 實證의 합리적 비판적 근대의식을 구현하는 문화운동의 관점에서 이질적이기는 하지만 실학의식의 형성, 발전의 외적요인으로 작용
③ 서양과학서의 연구는 부국안민을 위해 이용후생적인 목적에서 실학발생의 요인이 되었고 형이상학적인 이학 및 종교서들은 남인계 학자들의 도덕의 상승을 위한 목적으로 읽혀졌고, 그 도덕의식이 종교를 흡수함으로써 소위 종교운동 대두시킴
④ 당시 남인 학자들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전통을 지키려는 형식과 규범을 거부하는 근대적 의식과 득세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봉건적 지배의식에 대립된 평등의식이라는 기반 위에서 서학을 수용하게 됨
4-3 이승훈의 入信과 조선 천주교회의 터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領洗者).
호는 만천(蔓川)이며 세례명 베드로, 자는 자술(子述) 이다.
강원도 평창(平昌) 에서 태어나 1780년(정조 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심하다가 천주교인 이벽(李蘗)을 만나 천주교에 심취하였다. 1783년 사은사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을 따라 청(淸)나라에 가서 베이징[北京]천주교당 북당(北堂)에서 천문학과 수학, 과학적 견문을 넓히고 선교사들과 토론을 하면서 기독교 가르침이 신묘하고 교훈이 순결함에 이끌려 예수회(會)의 루이 드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한국교회의 주춧돌을 놓는다는 의미로 영세명을 '베드로'라 불렀다.(1784)
다음해의 3월에 교리서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가지고 귀국하여 1785년 명례방(明禮坊:현 명동)의 김범우(金範禹) 집을 교회로 삼고, 가성직(假聖職)제도를 채택하여 사제대행권자로서 주일(主日)미사와 영세를 행하며 전도를 시작하였다. 이승훈이 돌아온 5년만에 신도 4000명이 불어나자 중국 신부에게 안수 받을 신부를 요청하였다. 이후 정부 형조 판서는 진고개의 예배당을 급습하여 양반은 훈방하고 김범
명동성당 :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집이 우는 충청도를 유배하여 그곳
명례방 자리에 1887년부터 10여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에서 타계하였다.(최초의 순교 사진은 1920년대 모습이다 자) 이듬해 당국에 발각되어 체포되자 가족들의 권유로 배교(背敎)하고 척사문(斥邪文)을 공표하였으나, 1787년 복교(復敎)하여 자치적으로 교회활동을 개시, 자신이 주교가 되어 성사(聖事)를 집행하였다.
1789년 평택현감(平澤縣監)에 등용되었는데 이듬해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가성직제도와 자치운동은 위법이며, 조상에 대한 제사도 철폐해야 한다는 파리 외방전교회(外邦傳敎會)의 회신을 받고 돌아오자, 그는 제사문제로 두 번째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정조 15)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서학(西學) 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 당하고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다시 배교하고 석방되었다가 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밀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교인이 되었는데, 이듬해 주문모를 맞아들인 죄로 최인길(崔仁吉) ·지황(池璜) ·윤유일 등은 붙잡혀 처형되고 그는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의금부(義禁府)에서 취조를 받고 이 해 2월 서소문 밖 형장에서 사형되었는데, 18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대역죄만은 신원(伸寃)되었다. 그러나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在誼)가 순교한 데 이어 1871년에는 증손 연구(蓮龜) ·균구(筠龜)가 순교함으로써 4대에 걸쳐 순교자를 낸 집안이 되었다.
이 벽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을 담당했던 이 벽(李 檗)은 1754년(영조 30년) 경기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문에 뜻을 두고 경학(經學)연구에 몰두하다가 새로운 학문인 서학(西學)을 접하게 되자 기존 학문인 유학(儒學)에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었다.
1779년 겨울, 당대의 저명한 학자인 권철신을 전교하여 이름 있는 학자들과 더불어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연다는 소식에 그는 이 모임에 참석하여 천주교 도리의 위대함을 발견하였다. 이 벽은 이승훈에게 수세를 받게 하고 나중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영세명을 '요한'이라 불렀다.
1784년 봄,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건너 받은 이 벽은 두문불출하고 이 책들을 숙독하고 나서 곧 선교 활동에 나서 정 약전. 약용. 약종 형제들과, 유명한 학자 권철신. 일신 형제들도 입교 시켰다.
그리고 1784년 가을에는 명례방(지금의 명동부근)에 살던 통역관 김 범우의 집을 교회 예절 장소로 사용하다가 1785년 1월에 추조금리(秋曹禁吏:지금의 형사)에게 발각되었다.
(을사 추조 적발사건) 이 벽의 부친은 이 사실에 자살하려 하였고 이러한 상황에서 이 벽은 신자들도 만날 수 없고 외출도 금지되어 그는 식음을 전폐하다가 10여일 뒤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도무지 찾을 길이 없던 그의 무덤이 지난 1979년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 공동묘지에서 발견되어 천진암 강학회터에 권 철신, 권 일신, 이 승훈, 정 약종과 함께 이장되어 자리하고 있다.
명동의 명례방 즉 진고개의 김범우 집은 지금의 명동성당이 우뚝 솟았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효시
사실 두 기둥이 된 이승훈과 이 벽이 신앙의 미숙과 바른 이해가 결해되어 배교를 하고 번민을 하였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자발적인 전도로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것이 아니라, 오랜 동안의 학문적 연구를 통해 자발적으로 수용된 것이었다. 17세기에 베이징을 다녀온 사신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천주교를 서학이라 하여 서양 문물의 하나로 간주하였을 뿐 하나의 종교 신앙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학문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던 천주교가 종교 신앙으로써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후반부터였다.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식과 역사적인 처절한 시련 앞에 갱신해야 한다는 필요를 깨달아 복음이 압도가 되어 국가의 기본정책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이러한 배경 위에 교난이 발생하였다.
5. 體制(체제)와 傳統(전통)에 異質(이질)로 經驗(경험)된 基督敎(기독교)
辛亥(신해), 辛酉(신유)의 敎難(교난)
수난을 불러온 요소
a. 조상제사의 문제
유교 사상의 뿌리가 되는 사상은 효이다(효는 백행지본이다.)
그러므로 불효는 일천 가지 중에 가장 큰 죄이다.
그리고 효 중에 큰 부분이 제사이다.
중국의 마테오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할 때 조상제사는 정치적 의식이요 기독교는 유교의 발전이라고 했다.(배타 방지 위해) 그러다 보니 종교가 혼합적이다.
b. 붕당적 요소(당시의 당파 싸움으로 인한 박해)
영조때 부터 천주교가 들어 왔는데 해서, 관동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때 는 사색 당쟁이 극심하던 때이다.
5-1. 辛亥(신해) 敎難(교난) 1791
인조 이후 서학연구 기풍이 생겨나고 일반 민간에 천주교가 유포되기 시작하는 초기에 정부는 이를 일시적인 현상이며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서학연구가 활발해지고 드디어 신앙운동으로 진전되었을 때는 정부는 주자학체제에 대한 도전이라 단정하여 탄압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의 유포에 대하여 나라에서는 스스로 자멸하리라 보아 처음에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천주교의 교세가 해서, 관동 민간인 사이에 확장되었고 정조 때에는 호남지방에 선비들에게 신앙이 되자 천주교가 제사 의식을 무시하여 예속 생활을 그르치고, 인간 평등을 부르짖어 신분 질서에도 위협이 되고 있음에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정조 9년(1785)에는 천주교를 사악한 종교로 규정하고 이를 믿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내렸다. 이 때 전라도 진산 유학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르자 조야가 충격을 받고 이들을 참형시킨 교난이 발생하였다.
신해교난으로 이승훈은 예산쪽으로 정배를 떠나고 홍문관에 소장된 서양책들이 불태워졌다.
조상제사 때문에 첫 희생자는 윤시충이다.
윤시충은 전라도 사람으로 25세에 진사급제하고 서울에 올라와 김범우 집의 교리 연구에서 감화 받고 3년후 입교하였다. 그리고 모친이 별세 했을 때 상복 입고 호곡하고 위폐를 모시지 않고 제사도 드리지 않았다. 이 사실이 관가에 알려지자 윤시충과 외종형 권상연은 같이 처형당하였다. 그 당시 천주교 믿는 자는 패륜 외도라 하여 박해했다.
5-2 辛酉(신유)敎難(교난)
시파(세자 동정하는파) - 남인 이라는 천주교도가 많이 가입해 있었다.
숙종때 남인 세력이 약화되어 남인에 속해 있으면 등용길이 막혔다.
이런 남인에게 우호적인 재상인 채재공이 있었는데 1799년 사망하였고 곧이어 정조대왕이 또 사망하자 천주교 박해가 터졌다.
정조 아들 순조(11세)가 왕에 오르자 악랄한 방법으로 정순왕후(정조의 첩)가 순조 뒤에서 간섭 정치를 하여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채재공이 죽자 죽은 후 관직까지 박탈하였고 1801년 서학을 박해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천주교박해의 두 요소: 비인간성과 비국민성, 체제도전 --- 서학은 인륜에 반역하고, 교황 은 장가도 들지 않고 아들도 안 낳고 밑의 똑똑한 자를 뽑아 자기의 위치를 넘겨준다고 하는데 이것은 조선의 세습 윤리와 안 맞아 박해해야 신유 박해 때 사형 당한 정약종
한다고 하였다
신해박해 이후에도 천주교인들은 더욱 교세를 확장하는 한편, 정조 18년(1794년)에는 우리나라 사람과 용모가 비슷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데려왔다. 주문모 신부는 그 뒤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비밀히 전도에 힘써, 약 5년 뒤에는 전국의 교인이 1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순조 1년(1801년, 신유년)에 노론의 벽파 가 시파를 꺾기 위하여 시파와 가깝던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가환·권철신·이승훈·정약종 등 많은 신도가 사형 당하고, 정약전·정약용 형제는 귀양 갔다. 주문모 신부도 자수하였다가 사형 당했고, 왕의 친척도 가리지 않고 처형하여 300여명이 순교 또는 유배되었다. 이 사건을 신유사옥 또는 신유박해라 한다.
6. 황사영 백서사건
-힘의 신앙
6-1. 힘의 신앙형태
조선 후기에 외환을 거치면서 서양문명 월등함에 학문으로 전환한 점을 들 수 있고 남인들이 붕당적인 정치적 구조 속에 비극으로 정쟁의 구실이 되었다.
서양문명의 힘의 전개 과정 속에 천주교의 해석이 다양하였지만 실패하고 정치적인 평면에서 나라와의 심각한 충돌을 야기하였다.
그 힘의 신앙의 형태가 곧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다.
6-2 황사영의 백서
황사영은 일찍 17세에 진사 급제하였고 정약종의 사위이며 주문모 신부를 사사하고 세례를 받았던 열렬한 신도였다.
1801년에 신유 박해가 시작되자 충북 제천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를 찾아온 황심을 만나 천주교 구하기 위해 북경의 주교 구베아에게 편지 보내자고 약속하였다. 그는 청의 힘을 빌어 천주교 박해를 면해 볼려고 진성서을 올렸다.
북경 주교에게 참혹한 박해 상황을 보고하고 대책을 건의하기 위해 길이 62 센티 폭 38센티의 비단에다 작은 글씨로 13,311자의 글로 보냈는데 내용은 박해와 참상을 보고하는 것인데 그만 도중 들켜서 조선 조정에 밝혀졌다.
* 이 백서가 들켜 카톨릭은 매국종교로 지탄 받게되었다.
백서 내용 :
(1). 조선 천주교의 실상을 기록하고, 그래서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는 내용.( 정치적인 기상도와 탄압과정을 제보함) (2). 당시 정계의 사색 당쟁의 실상을 기술. 박해의 이유는 당쟁 때문이라고 말하고 이것 때문에 경제적으로 교인이 열악하다고 기술. (3). 중국의 신도 1명을 택해 북경 지대에 점포를 개설해서 청국과 조선 사이에 통신 연락을 하게 하고, (4) 북경의 청국 황제를 움직여서 조선왕으로 하여금 서교를 받아들이게 하도록 압력 부탁, 또 중국의 공주를 조선조 왕자에 게 정략 결혼시켜 조선을 굴복시키고 서학을 받아들이도록 부탁, (5) 군함과 군수 물자를 싣고 와서 이 나라를 치라고 부탁. 나라는 망해도 천주교는 전파 되야 한다고 하였다.
결과
* 그 후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그 자신은 물론 남아 있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끔찍하게 처형당했으니, 이를 '황사영 백서 사건'이라 한다. 그 이후 천주교는 지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 황사영은 1801년 27세의 나이로 모반죄에 의해 참수되고 이 사건으로 300명이 순교하였다. 이것을 신유박해라 하며 이후 서학의 창대를 염려하여 쇄국 정책을 조선에서는 실시. 북경 외의 모든 문을 닫아 버리게 되었다.
* 이백서는 의금부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교황청에 보관이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의 밀서가 공상적이고 위험천만한 내용이었다.
* '나라는 망하여도 천주교는 남아야 한다'는 이 백서는 민족의식을
망각한 처사로 한국 천주교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개인 생각*
철저한 신앙심과 호교론에 입각하여 오로지 종교의 자유와 교화의 부흥만을 희망한 사항 과 신앙의 보존을 위해 자신의 안전과 입신 영달을 아닌 교회의 재건과 이 겨레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목적에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은 배울만하나 무책임한 발상으로 주의 일을 그르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주를 위한 열심은 높이 평가 할 수 있으나 방법에 있어 잘못 되었다고 생각되고 그 시대가 참혹한 배경 밑에 있어다고 하지만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바라보면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아니 되고 선으로 행해야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알 수 있다.
6-3 토사 교문의 핵심
*토사교문(討邪敎文)의 반포(1861.12.22)
유교 도덕을 높이고 받들어온 조선에 모든 사람이 마음을 고쳐서 천주교를 떠나 공자의 도를 행하라는 내용이다.
이 교문의 반포로 피비린내 나는 박해는 멈추었으나 천주교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답변 불능의 반박문으로서 법이 있는 한 박해는 언제나 야기될 수 있어서 근본적인 법령이 되었다.
* 황사영은 최후의 충성은 로마에 바친다는 카톨릭 사상과 정순왕후는 교종마저도 왕강의 전제 밑에 굴속한다는 상반 된 생각은 조화 될 수가 없었다.
* 사옥참화로 인해 쇄국의 정책을 쓰게 되었고 외교 관계가 삼엄한 통제 아래 단절되었다.
제 2장 한국의 로마 카톨릭 교회
4. 선교이전의 구도
4-1. 병자호란과 소현세자
4-2. 조선학자들의 서학 접촉
4-3 이승훈 입신과 조선 천주교회의 터
5. 체제와 전통에 이질로 경험된 기독교
5-1. 신해 교난
5-2. 신유 교난
6. 황사영 백서 사건
6-1. 힘의 신앙과 형태
6-2. 황사영 백서 사건
6-3. 토사 교문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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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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