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스크랩] 성령의 중보기도

하나님아들 2013. 3. 17. 21:28

성령의 중보기도


구약에서의 성령의 임재와 능력


성령께서 특별한 때, 특별한 목적으로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하셔서(감동하셔서) 특별한 일을 수행하셨다. 영원하지 못했다.
여호수아 / 신34:9,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삼손 / 삿14:5-6.'삼손이 그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서 딤나의 포도원에 이른즉 어린 사자가 그를 맞아 소리 지르는지라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삿15:14,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르는 동시에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하매 그 팔 위의 줄이 불탄 삼과 같아서 그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사울 / 삼상11:10-11.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전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사울의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함을 보고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하고'
신약에서의 오순절 이후의 성령의 임재
예수께서는 승천 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성령을 받아서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쏟아 부어 주셨다.
요엘 선자자의 예언 / 행2:17-18,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이 예언이 예수로 인해 오순절에 성취 /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그 성령임재는 그 당시의 성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오순절 이후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이 임하신다.
행2:37-39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지금의 성도들은 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누구에게나 임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임하신다.
그 임재하신 성령은 떠나지 않으신다.  내 속에 임마누엘되신다.
분명 주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그 약속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성전에 대한 이해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이 성전되었다고 한다.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상징
그리스도인이 성전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
성막성전 -> 건물성전(솔로몬) -> 예수성전 -> 그리스도인 자체가 성전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가 아니다. 하나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가 아니다.
성령님 지금 이 시간 내게 임재하여 주옵소서. 이는 구약적 이해방법이다.
신약적 이해 방법은 '성령님 우리 안에 함께 계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을 때 임재하신 성령은 우리가 성령에 의지하여 예배할 때, 충만히 나타난다.
우리가 기도도 하지 않고, 말씀도 집중하지 않으며, 우리가 찬양과 무관히 살고 내 속에 성령이 계심에 대한 기뻐함도 없이 지낸다면 성령충만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 임재하신 성령은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여 성령께 집중하며 예배드릴 때, 즉 기도하며, 찬양하며,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며, 그 분으로 인해 기뻐하며 즐거워할 때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은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하신다.
육체의 소욕을 거부케 하신다.
우리가 성령께 집중하여 예배드릴 때, 말씀을 들으며, 읽으며, 찬양과 기도 가운데 그 성령께 의지할 때 성령은 우리의 죄악상을 보게 하시며 그 죄악상으로 인해 심히 애통케 하신다.
우리가 매번 회개할 때 성령이 임재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면 성령이 임재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이 임재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임재했는데 회개할 때 성령이 충만케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임재하신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매 순간 순간 그 성령님을 인정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분으로 인해 힘을 얻고 확신을 가지며 감사하며 나아가는 삶이 성령충만함이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은 꿔다놓은 푸대자루가 아니다.
우리의 뒷방만 지키시는 분이 아니시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의 인생은 연약하다. 우리의 육체는 참으로 연약하다.
조금만 건드리면 이리 흔들, 저리 흔들거리는 것이 인간이다.
조금만 힘들면 이게 뭐냐고, 이 불평 저 불평한다.

권면하는 사람보고 당신들은 안당해 봐서 몰라하면서 면박을 준다.
또 조금만 일하면 쉬 피로하다.
우리의 육체는 병들기 쉽고 병들면 기운이 빠지고 힘이 없어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다.
우리들의 정신적 건강도 여러 주변의 환경으로 어려움을 당한다.
우리의 지식은 한정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지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엄청난 위협적 환경에 대처하는 힘도 약하다.
한번도 경험하지 않은 어려움이 닥치면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막히며 어떻게 할 줄 몰라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던 욥도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몰랐으며,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 이긴 엘리야도 심령과 육신의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죽기를 간구한 적이 있다.
이처럼 기도하는 것 자체도 힘이 들어 쓰러져 버린 상태에서 한도 없이 눈물만을 흘리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임재하신 성령은 우리의 무엇을 아신다고 하는가?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어떻게 도우시는가?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빌어야 할 지 몰라도,
 
돕는다는 말의 어원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무거운 짐을 옮긴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의 무거운 짐을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도우시는 것.
바울은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표현했다.
마치 돕는 자가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나르기 위해 그 무거움과 어려움을 함께 걱정하는 것 같은 상황을 묘사한 것.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탄식하신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그 모습을 보시고 심정적인 이해를 하시며, 성령님께서도 우리를 안타까이 여기시며 불쌍히 여기신다.
부모가 죽어 가는 자녀를 바라보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 때문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린다는 말이 아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 연약한 인간이 아니다.
그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과 심정을 꿰뚫어 보시며 우리의 안타까운 환경 때문에 눈물을 흘리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께 간구 하신다.
성령의 생각과 마음을 누가 아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성령의 안타까운 마음을 아신다.
그 성령의 기도는 틀림없이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기도가 아니기에, 인간은 자기의 뜻대로 구하거나, 자신의 소욕대로 구할 수 있으나, 그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막연히 구할 수 있으나, 성령님은 누구의 뜻대로 구하는가? 우리를 위해 구하시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신다.
성령님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할 수 밖에 없기에 확실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이 거부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도우시는 성령님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성령님이 계시므로, 그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에 그 성령님께 의지하며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의 긍휼하심을 바라 보야야 한다.
성령님의 도우심에 깊이 감사하여야 한다.
성도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며, 고난 중에도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며 감사할 수 있게 되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엘리야 처럼 로뎀나무 아래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차라리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외치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간이다.

그러나 내 안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하박국과 같은 확신을 가진다.

합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름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한국 교회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1907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 집회입니다.

모든 참석자들은 은혜를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마지막날이 되어도 별 다른 은혜가 없자 부흥회를 인도하던 길선주목사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1500여명이 모인 대 집회였지마는 성령의 은사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통성기도를 하는 중 길선주목사는 집회에 은사가 없음은 자기의 회개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일어나 큰 소리로 회개했습니다.
나는 아간과 같은 놈입니다. 저 때문에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언젠가 제 친구가 죽으면서 재산을 정리 해 달라 해서 그것을 정리는 했는데 그 친구의 부인을 속이고 100원을 가로챘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고 길선주목사는 공개적인 회개를 했습니다.

이 회개하는 시간에 다른 사람들도 죄를 자복하며 통회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국 역사에 길이 남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 평양과 한국 교회에 새 부흥 운동과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글쓴이 : 행복충전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