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Christology)
신약 기독론의 주요 목적은 신약의 작품들 속에서 보도되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주장들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A.도입
1.목적
2.방법
3.주요한 충격
B.예수에게 돌려진 기독론적 주장들
1.예수 그리고 유대인의 기대
2.자신의 역할에 대한 예수의 견해
3.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수의 견해
C.엄격한 의미의 기독론의 시작
1.그리스도의 부활
2.성령 체험
3.초기 기독론의 다른 특징들
D.바울의 기독론
1.아담 기독론-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2.지혜 기독론- 신성으로서의 그리스도
3.성령 기독론-성령으로서의 그리스도
E.제 2 세대 작품속에서의 다양한 강조점들
1.제 2 바울서신
2.바울의 영향을 받은 보다 넓은 부류
3.누가복음-사도행전
4.바울의 영향권밖에 있는 부류
F.요한의 기독론
1.성육하신 말씀
2.영광의 아들
3.요한 1,2서-기독론의 위기
G.결론
1.유대교와의 연속성
2.예수 자신의 자아 인식과의 연속성
3.신약 기독론의 통일성과 다양성
4.다음의 기독론을 위한 기초
A. 도입
1. 목적
예수의 사역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는 종종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중재자나 구원자의 모습들(메시야,예언자,영웅,천사장,하나님 자신)과 결부되는 새로운 세대를 기대하는 유대인의 희망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면서 이러한 모든 범주들은 점점 더 한 인간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되었고 집중되었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예수에 대해 직접적으로 “우리의 하나님,예수 그리스도”(Eph.18:2;롬 3:3)라고 말했고,기독론이 바티칸 공의회의 전통적인 신앙 성명에 얼마나 알맞는 가를 보여 주었다. “한 의사가 계신다. 그는 육체인 동시에 영이시다. 그는 태어나셨으나 아직 태어나지 않으신 분이다. 그는 인간 속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죽음에서 참된 삶이 되신다. 그는 마리아에게서 나신 동시에 하나님에게서 나신 분이시다. 그는 고통을 느끼시지만 그러나 느끼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Eph. 7:2). 그 백년 내에 기독교의 주장들은 나타났고, 결정적인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신약은 그 첫 번쩨 개화기를 담고 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그리고 왜 그것들이 출현하였고, 그러한 형태를 띄게 되었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끔 해준다.
2.방법론
적어도 유대교적 기대에서 기독교의 신앙으로의 변화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발달사적인 접근이 선택 되었다. 이 방법은 전승사적인 분석이 예수 자신의 확신들과 가르침의 주요 윤곽을 밝혀 줄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또한 초기 기독교 회중들의 믿음에 관한 충분히 신뢰할 만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그에 따라 우리는 필요하다면 각 신약 기자들의 가르침과 강조점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연대와 기원 장소에 따라서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이 그 시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했던 모든 것을 다 밝혀내지 못하겠지만,신약의 작품들이 단순히 첫 세대에서 유래된 내용들을 전하는 것 이상으로 간주되어 왔고,그러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초창기의 자료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줄 것이다.
신약의 기독론은 마땅히 각 개별 문서가 말하고 있는 기독론의 묘사에 국한될 것이며 고유한 상호관계와 일관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할 것이다. 다양한 대표적 취급법들은 표제들에 초점을 마추었다. 표제들이 그 전체의 이야기들을 모두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상당한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는 있을 것이다. 표제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에 대한 불만족은 보다 최근에 다양한 접근 방법들(주제 중심적, 범주의 변환, 개념적 궤도 그리고 이와 비슷한)의 요구에 의해 제기되어 왔다. 아래에서 이루어질 연구에서 적절하다고 느껴질 때에면 이 모든 방법론들을 사용할 것이다.
신약의 기독론을 저술하려는 대부분의 시도들은 또한 보다 큰 양식들과 개별 양식들의 발전단계를 추적하기 위하여 사후 조명의 도움과 보편적인 시각을 사용한다. 그것들은 최초의 기독론이 형식화되던 과정을 “외부”에서부터 묘사하려 하였다. 이러한 접근 방법이 가지는 위험성은 후대의 발전들을 그 이전의 자료로 역 해석한다는 점이다. 이 방법은 저자들 스스로의 피할수 없는 보다 제한적인 지평들을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안으로부터”의 과정을 묘사하는 보다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새롭거나 이전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공식를 인지하지 못하도록 방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단순한 변형이나, 대체적인 범주들과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구별해 낼 수는 있어야 한다.
3.주요한 촉진들
신약 기독론의 형성화에서 제일 중요한 요인으로는 3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1)특별한 그의 가르침 뿐만아니라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충격을 주었던 그의 사역을 포함하는 예수가 가져온 충격 (2)그의 죽음과 부활이 주었던 충격 (3)예수의 능력과 신분에 대한 보다 확실한 증거를 인식할 수 있었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험.
신약의 기독론을 다루고 있는 자료들은 본래 예수와 그들 자신들의 경험에 대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공헌은 예수로 집중되었을 유대적 희망의 다양한 주요 특성들이다. 또한 수백년의 기간이 넘도록 재검토되면서 그 중요성이 인정되고 있는 그레코-로만 세계속에서 널리 통용되던 다양한 범주들도 중요한 공헌에 속한다.
B.예수에게 돌려진 기독론적 주장들
예수는 기독론을 가지고 있는가? 즉 그는 자신에 관한 중요한 주장들을 만들어 냈는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은 이 점에 있어서 현져하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자신에 대한 예수의 주장들이 장마다 중요한 특징들로 나타나는 반면, 공관복음서에서는 자신에게로 주의가 집중되는 것을 피하려하는 모습의 예수가 나타난다. 요한의 기독론은 다른 것들과 비교해 볼 때 아주 특징적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공관복음서에 주의를 모으고 나중에 따로 요한복음을 다루는 것이 가장 좋을 듯 싶다.
1.예수와 유대인의 기대
예수의 시대에 살았던 유대인들의 희망은 다양한 메시야적 그리고/또는 예언적 범주들을 포함한다.
a.왕으로서의 메시야. 다윗의 아들(사 11:1-5; 아17:23; 4QFlor 1:10-13). 이것은 이스라엘의 독립과 위대성을 다시 회복시킬 한 새로운 왕을 기대하는 대중적인 기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중적인 관심과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일으켰던 그러한 흥분들을 불러 일으켰던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메시야의 역할을 맡을 예비자로 간주되었을 것이다(비교,요 1:20, 6:15). 예수가 메시야로 자칭하는 자로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기본적 사실이다-유대인의 왕(막 15:26 pars). 대제사장 앞에서의 심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마도 제기되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가?”- 메시야적으로 해석되는 삼하 7:13-14에 의거하여 성전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운다라는 말 때문에 제기된 소송을 근거로(4QFlor에서 처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에서의 상징 행위(성전 청소)가 가지는 그 특이한 모습은 분명히 넓은(종말론적) 또는 특정한(왕 메시야) 개념에 있어서 이와 동일한 문제를 불러 일르켰을 것이다. 만일 그의 추종자들 스스로가 예수의 사역 초기에 이런 문제를 제기 하였다는 것, 특히 그의 사역이 성공적이었고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는 점에 있어서 이러한 질문을 가졌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막 8:27-30).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견해들이 예수에게 주어졌을 때 과연 그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가이다. 가장 초기의 전승이 주고 있는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는 결코 단 한번도 그 자신의 유익을 위해 그러한 칭호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자신에게 적용된 이러한 것들을 흥쾌히 받아 들이지도 않았다. 막 6:45은 그가 대중들이 기대하는 메시야의 역할을 거부했다는 점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으나(참조,요 6:15), 막 8:30-33과 예루살렘 입성은 이와는 다른 입장을 그리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러한 직함을 철저히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라는 것이지만(막 8:30,14:62,15:2),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처럼 예수가 그 직함을 자신의 것으로 보았다고 묘사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 직함을 새롭게 하고 초대 기독교인들을 위해 새로운 내용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의 사건을 필요로 했다.
b.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기독교적 유대교의 부류에서 제사장으로서의 메시야는 왕으로서의 메시야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 받았다(예로,T.12 P.; 1QSa 2:11-22). 그러나 예수가 레위 족속 이외의 다른 족속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결코 예수를 위한 하나의 선택으로서는 보여지지 않는다.
c.예언자. 유대인들의 기대감은 여기서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엘리야의 돌아옴(말 4:5; 시락 48:9-10),모세와 같은 예언자의 돌아옴(신 18:15,18), 무명 또는 종말론적인 예언자의 돌아옴(사 61:1-2; 1QS 9:11; 11QMelch). 이러한 것들이 다른 기대감들인지 아니며 단순한 기대의 변형들인지는 현재 분명하지 않다. 아마 그 당시에도 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한(a) 예언자나 그(the) 예언자로서 기꺼이 인식하려는 의향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막 6:15 par.; 8:28 pars.; 요 6:14; 7:40,52).하지만 그 당시에 다른 이들도 그러한 동일한 직함을 부여 받았다는 것이 잊혀져서는 안된다(막 11:32;요1:21;요세프스,Ant 18:85-87;20:97-8,167,169-72, 188).
예수 스스로가 이러한 호칭을 어느 정도는 인정했고(막 6:4 pars.; 눅 13:33),그래서 특별히 자신의 임무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이사야 61:1-2을 사용했던 것 같다(마 5:3-4=눅 6:20-21; 마 11:5=눅 7:22; 눅 4:18-19). 또한 그는 의도적으로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특히 성전에서의 행동과 마지막 만찬). 그러나 이따금씩 예수가 자신의 역할이 일반적인 예언자의 역할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다는 실마리가 발견된다. 즉, 막 12:1-9 “나는 보내심을 받았다” 가 아닌 “내가 왔노라”라는 주장(막 2:17 pars에서 처럼)과 전형적인 예언자의 공식인 “주께서 가라사대”가 아닌 “내가 말하노니”를 사용한 점.
d.치료자. 신체 기능의 놀라운 회복이 새로운 시대의 표시로 기대되었지만(사17-19,35:5-7), 이것이 위에서 살펴본 어떠한 모습들과 특별히 연관되어 지지는 않았다. 병을 고치는 것과 귀신을 몰아 내는 것들은 고대 세계에서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에 의해 널리 행해지는 일들이었다(막 9:38-39, 행19:13-19: 요세프스,Ant 8:45-49). 그래서 예수가 능력있는 치료자요 축사가로 알려졌다는 것은 반론할 여지가 없지만, 그것이 예수의 동시대인들에 의해 큰 의미로 받아들여졌었는가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나 예수 자신은 하나님의 종말의 통치가 자신이 행한 축귀(막 3:23,27; 마 12:28=눅 11:20; 눅 10:18)와 신유(마 11:5-6=눅 7:22-23)를 통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자신의 사역에서 보았던 것 같다. 이 자기 평가에는 그의 사역을 아주 특색있게 만들었고, 그를 비판의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확연한 것이었던 하나님의 영에 의한 기름부으심에 대한 주장도 포함된다(마 3:28-29 pars.). 또한 특이한 것은 그가 귀신을 몰아내던 기술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떠한 물리적인 도움을 사용하지도 않고, 명령의 형식에 있어서 어떤 높은 권위에 호소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가 아마도 자기 자신의 권위를 인식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인 하나님의 능력 부으심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마 11:28-33 pars.).
e.선생.예수는 전승 속에서 보통 선생이라고 불리워진다(마 5:35; 9:17,38; 10:17,20,35; 등등).비유와 수많은 격언을 말하는 “비유가”로서의 특색있는 그의 방식이 공관복음서에 선명히 남아있다. 이것은 예수가 가르치면서 의지했던 권위가 놀라움과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마 1:27 par., 6:2 par., 11:28 pars.).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분명 이것은 그가 가르치는 방식이 구현하였던 그 즉각성과 직접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 이전 권위들에 호소하지 않고,격언을 시작하면서 자주 사용하던 전형적인 ‘아멘’,그리고 모세가 친히 부여한 확정된 판정들을 반대하는 예수의 해석(마 5:31-42). 예수는 분명히 자신을 하나님의 대사 그리고 대변자로 보았고(마 9:37 pars.), 예언적 전통의 최고 절정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자신을 단순히 지혜 선생이나 신성 지혜의 종말론적 밀사로 보지 않았다(눅 7:31-35 pars.;10:21-22 par.; 11:49-51 par.). 이러한 자기 이해는 희생 의식에 대한 언급이 없이 죄가 용서되었다라는 그의 선포(막 2:10과 같은)와 그가 자신의 가르침과 부름에 대해 요구했던 배타성의 뒷편에 놓여야만 한다.
요약하자면 예수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이러한 다양한 범주들 중 어떠한 것도 예수 스스로 자신의 것이라고 이해했었을 그 역할을 완전히 알맞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없는 듯 하다.
2.자신의 역할에 대한 예수의 견해. 위에서 관찰된 사실들로 보아 예수는 자신의 사역이 그의 청중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말론적 대리인으로 보았다. 이러한 자기 이해는 예수 자신의 언급에 의한 두 양식으로 요약되어져 왔다.
a. 하나님의 아들. 나중에 전통적인 신앙고백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칭호가 되어버린 이 명칭은(하나님 아들) 예수의 시대 당시에는 훨씬 더 광범위하게 언급되었고, 단순히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을 가르키기 것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 명칭은 이스라엘(출 4:22), 천사들(욥 1:6-12),왕(삼하 7:14), 의인들(솔로몬 2:13-18) 또는 카리스마적인 랍비들에게 사용되었다(m. Ta˓an. 3:8). 1세대 기독교인들이 이 칭호를 차용하여 그것을 오로지 예수만을 일컫는 말로 만들었던 과정은 첫 세기 후반부 기간 동안의 복음 전승들 속에서 그것의 의미가 증대되었던 사실 속에 반영되어 있다. 즉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예수의 말씀들의 숫자가 그것을 이야기해 준다(막 3회, Q문서 4회, 누가의 특수자료 4회, 마태의 특수자료 31회, 요한 100회이상).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이 과정이 이미 예수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다. 기본 자료로는 예수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그의 습관을 들 수 있다( 마 11:25-26=눅 10:1-22; 막 15:34은 유일한 예외 ). 이 때 사용된 단어는 거의 확실히 아람어 ˒abbā(막 14:36)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헬라어 계열의 교회들 속에서 예수의 아들되심을 특징짓는 것으로서 분명히 기억되고 보전되었기 때문이다(롬 8:15-16; 갈 4:6).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 단어가 가족의 용어로서 친밀한 가족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에(심지어 우리는 그가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처럼 친밀한 용어로 기도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록 그가 분명히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처럼 기도하라고 가르쳤지만(눅 11:2), 이와 동일한 바울 계열의 본문들은 이러한 기도 양식이 아들의 영을 의지하는 기독교인들의 특징이라고 여겨졌다는 사실을 명확히 가르켜 준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최소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되심이라는 개념을 협소화 시킨 과정은 다름 아닌 예수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가 이것을 분명한 가르침의 주제로 삼았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특별히 마 11:27과 막 13:32이 이미 네 번째 복음서에 가서야 완전한 표현으로 나오는 기독론적 강화의 흔적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위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 사이의 직접성과 긴급성이 ‘아바’ 기도문의 예수에게 있어서 시종 일관하다고 말할 수 있다.
b.인간의 아들. 우리가 가진 기록에 의하면 이 표현이 예수가 스스로가 선택하고 스스로가 지명한 가장 명확한 예일 것이다(막 2:10, 8:31, 14:62). 그러나 이 표현의 의미는 금세기 동안에 걸쳐 신약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확실히 이 표현은 형식상 예수께로 소급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거의 복음서에서만 발견된다(총 86번중 82번이 복음서이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실질적으로는 예수의 입술을 통해서는 나타난다. 행 7:56을 제외하면 우리는 예수 전승 이외에선 ‘인자 기독론’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가장 일관된 설명에 의하면 이 표현은 예수 전승에서 기원된 것으로서 예수 자신과 함께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전승 중 몇몇 특수한 예들이 전승을 편집하는 재작업을 반영하고 있다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마 16:28 처럼). 그러나 그러한 재작업 조차도 예수 자신의 말에 국한된 연설 어법으로 확립되었던 원래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예수 연설의 확고하고도 명확한 특징이었음에 틀림없다.
비록 어느 정도는 자기를 일컽는 말이기도 했지만(자신을 ‘누군가’로 언급하는 정중한 영어 어법이 좋은 예를 이룬다), 적어도 몇몇 경우에서 예수는 이 문구를 보통 아람어 어법 즉,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인자=사람; 시 8:4을 참조). 이러한 어법은 아마도 막 2:10과 2:28과 같은 본문들에도 반영되어 있고, 다른 전승인 막 3:28-29 par.은 아람어에서 사용된던 인자=사람 공식에 의해서 가장 잘 설명된다. 이것은 왜 어떤 본문에서는 ‘인자’가 나오고, 그와 평행을 이루는 다른 본문에서는 ‘내’가 나타나는가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눅 6:22=마 5:11; 눅 12:8=마 10:32). 물론 이러한 경우에 그 문구는 칭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와는 다른 제안 즉, 유대인의 사고속에서 이 문구가 하늘에 속한 구속자의 모습을 지칭하는 칭호로 벌써부터 확고히 확립되어 있었다라는 제안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니엘 7:13에서 그것은 칭호가 아니다. 인자같은 모습은 이스라엘의 적을 상징하는 동물의 형상을 이기는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분명히 유대의 묵시 문학가들은 단 7:13의 환상을 하늘의 구속자를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각각의 경우(에녹의 비유,4 에스드라서)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이것이 다니엘 본문의 새로운 해석이라는 것이다. ‘에녹의 비유’ 의 연대가 논의되고 있지만, 예수보다 앞선 연대로는 가정할 수 없다. 4 에스드라서도 주후 70년보다 훨씬 후대의 것이다. 예수가 자기 자신을 이미 유대인의 기대 속에서 구속자로 알려져 있던 인물과 동일시 했었다라고 말할 어떠한 표시도 없으며, 그러한 신분이 고백되어지거나 옹호되어져야 할 어떠한 징후도 없다. 다니엘 7:13절을 처음으로 자신의 역할로 해석한 것이 예수 자신이었을 가능성은 뒤이어 나오는 좀더 광범위한 질문의 몫이다.
3.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수의 견해. 예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극심하고도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예견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그럴법한 추측이다. 예수 바로 이전에 있었던 선임자(세례 요한)가 이 모든 것을 보여준 것처럼 이것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있어서 의로운 사람이나 예언자들의 전형적인 운명이었다(솔로몬 5:1-5, 마 23:29-37 par.).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그 적대감은 그 이전 언제부턴가 있어왔던 것이 틀림없다. 분명히 성전에서의 예언자적인 행동이 곧 뒤이어 따라온 앙갚음을 초래하였다. 확신에 찬 예수에게로 소급될 수 있는 격언 전승은 예수가 자신의 죽음에 담긴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제공해 준다. “잔”(cup) 격언(막 10:38 par., 14:36pars.)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라는 구약의 이미지(사 51:17-23)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세례”와 “불” 격언(막 10:38, 눅12:49-50)은 아마도 종말을 알려줄 마지막 시련을 묘사하기 위해 불같은 세례라는 세례 요한의 은유를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러한 이미지들을 예수에게 적용해 볼 때, 예수는 아마도 자신의 죽음이 일종의 대표적이고 대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듯 하다.
더욱이 만일 인자가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막 8:31, 9:31, 10:34)이 이미 그 원래의 형태에 있어서 다니엘의 환상에서 나오는 인간 같은 이의 모습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면, 한층 더 명확한 대표적 의미는 배제되어 질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전승의 초기 단계에서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언급이 있었다는 것은 승인되기 어렵겠지만, 그와 비슷한 함축들이 막 10:45과 14:24에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는 있다.
예수는 자신이 죽은 후에 자신이 옳았음이 입증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라는 생각은 매우 그렇듯 한 것이다. 그 유형은 의인의 고난에 대한 유대인들의 성찰속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사 53:10-11; 단 7; 솔로몬 5:1-5; 마카비후 7:23). 그리고 종말의 시험을 견디고 난 후에 이루어질 입증에 대한 희망은 예수의 예상된 수난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그의 확신을 관련시키기 위한 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막 14:25이 확인해 주는 바와 같이). 만일 그가 이 희망을 부활과 관련지어 표현한 것이라면(막 8:31; 9:31; 10:34), 그것은 아마도 그가 마음에 지니고 있었던 마지막 날에 있을 부활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마지막에 있을 개인의 부활 개념은 예수에게 일어났었던 일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이해에서 파생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우리는 예수가 자신 스스로를 자신의 메시지의 중심에 놓았다거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요구했다고 말할 수 없는 반면, 또한 우리는 예수가 자신을 단순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의 선포자로만 이해했다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매개자이라는 주장,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긴급성과 직접성 그리고 대표적인 죽음과 죽음후에 자신의 의로움이 입증될 것에 대한 기대는 예수 전승 안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그 다음 기독론의 발전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필요하고, 어째든 기대해야할 일종의 기초이기도 하다.
C.진정한 기독론의 시작
이제 막 진술된 것들에도 불구하고, 예수 살아 생전에 예수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이 부활과 성령의 체험없이 그 무엇이 될 수 있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1.그리스도의 부활.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믿음은 확실히 기독론을 형성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누가복음과 그리고 그가 사용한 자료의 강조점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사도행전의 설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행 2:24-32; 4:1-2,33; 10:40-41; 13:30-37; 17:18,30-31). 바울 이전의 형식인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올리우셨다”는 마땅히 첫 번째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으로 묘사될 수 있을 것이다(롬 10:9, 살전 1:10, 롬 8:11(두번), 갈 1:1,골 2:12 엡 1:20, 딤후 2:8).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바울 자신의 집중이 고전 15:12-20 특히,15:17과 빌 2:9-11에서 나타난다. 모든 복음서에서 부활은 예수에 관한 전(全) 진술에서 최고 절정을 형성한다. 기독론을 결정함에 있어서 부활의 중대한 특성들이(watershed character) 다양하게 나타난다. 마가복음에서 부활은 “메시야의 비밀”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막 9:9). 또한 요한복음에서도 마태복음과 유사하게 부활이 해석학적 열쇠로 나온다(요 2:22). 그리고 누가는 부활로 말미암아 “주”라는 명칭이 예수의 것이 되었다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예수를 언급할 때 “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보도한다. 끝으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명령이 오직 부활로 인해 보편적인 것이 된다(마 28:18-20; 비교 10:5-6).
부활이라는 개념이 두드러지지 않는 곳에서 조차도 예수의 죽음 후에 그에게 일어난 일의 의미는 히브리서(히 9:11-12)와 계시록(5:5)에서 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평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의미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들려지심과 부할을 구분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없어 보인다(행 2:32-33; 빌 2:9; 벧전 3:21-22; 요 12: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개념이 처음부터 확립되어졌다라는 것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가장 초기의 공식들은 예수의 부활이 보통 죽은자들의 부활의 시작이었다고 가정한 것 같다(고전 15:20; 비교 마27:51-53).
2.성령 체험. 마지막 날에 기대 되었던 성령의 부으심이 이미 그들 체험의 한 요소였다는 것 또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기본적이고도 일치된 주장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가장 의미있는 것은 인식된 성령의 영향 또한 기독론을 형성함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왔다라는 점이다. 오시는 이의 사역은 성령 세례로 특징지워 질 것이라는 세례 요한의 예언은 모든 종류의 복음 전승에 간직되었다. 오순절 성령체험은 높이 들림을 받은 예수에게로 명백히 그 공로가 돌려졌다(행 2:33).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과 동일시 하는 것이 곧 확립되었다(행 16:7, 벧전 1:11, 아래의 바울을 보라). 그리고 또한 성령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으로 이해하는 것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행 5:32, 히 2:4; 벧전 1:12; 요일 5:7; 계 19:11; 아래 요한을 보라). 요한 계시록에서 하나님이 일곱 영(=성령)은 어린 양의 눈으로 묘사되고 있다(계 5:6).
3.초기 기독론의 다른 특징들. 지나간 일에 대한 성경의 해설을 찾는것이 초대 기독교인들의 불가피한 주요 목적이었음에 틀림없다. 수치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메시야 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한 요구였음에 틀림없다. 이것은 눅 24:26,46 그리고 행 3:18 같은 본문들 속에, “그리스도가 돌아가셨다”라는 초기의 공식 속에(롬 8:34,14:9; 살전 4:14),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기에 못박히셨다”라고 확정된 바울서신의 강조 속에 반영되어 있다(고전 1:23,2:2, 갈 3:1). 비록 사도행전 3-4장의 언급들이 대속적인 고난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고난 받으심에 대한 변호에 강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의심할 여지없이 이사야 53장은 이른 시기서부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롬 4:25, 고전 15:3, 벧전 2:24-25).
시 110:1은 빠르게 예수의 높이 들리심에 대한 근본적인 증거 본문이 되었다(행 2:34; 롬8:34; 고전 15:25; 히 1:3,13; 벧전 3:22). 이보다는 작지만 시 2:7도 또한 증거 본문이 되었다(행 13:33, 히 5:5). 이러한 사용의 결과로 우리는 나중에 초기 형식들(행 2:36, 13:33, 롬 1:4)과 관련해서 “양자론자”(adoptionist)로 취급될 수 있는 것들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본문들이 예수에 대한 두 호칭, 즉 유대교와 보다 광범위한 헬라 세계 사이에 복음에 관한 의사소통의 다리를 가장 잘 놓을수 있었던 두 호칭에 부가적인 자극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주님으로서의 예수(고전 16:22, 야 5:7-8, 그리고 행 11:20, 롬 10:9=바울 이전 세례의 고백; 빌 2:9-11),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행 9:20, 살전 1:9-10, 히 4:14).
이러한 본문들을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다는 흔적이 예수 전승 자체에 남아있다(막1:11,12:35-37,14:24,62,눅 22:37). 그런데 이것들은 예수 스스로가 그것들을 언급했는지 안했는지의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다양한 “사람의 아들” 격언이 예수 전승 안에서 완전한 자아-언급적 존칭으로 변형된 것은 초기에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동시에 이 시기 전체에 걸쳐 일어난 예수 전승의 사용과 재사용은 그것의 계속적인 관련성 때문에 예수 사역의 말씀과 특징을 회상하려는 활발한 요구가 있었음을 충분히 암시해 주고 있다. 복음서 밖의 예수 전승에서는 그 관심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어쩔수 없는 추론으로 남는다. 예를 들면, Q자료는 예수를 (종말론적) 지혜교사로 제시하려는 강한 관심을 반영한다(특히 눅 7:35; 10:21-22,11:31,49:13:34). 이외에 예수 전승의 본질적 요소들이 새롭게 형성된 회중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다(행 2:42; 고전 11:2;골 2:6; 살후 2:15). 이러한 전승들은 저자와 독자들에게 공통된 기반을 제공했음이 틀림없다(롬 13:8-10,고후 10:1,살전 5:2,야 5:12).
초기 시대의 강한 특징 중 하나는 역시 임박한 그리스도의 다시오심에 대한 기대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마지막 부활의 시작이었다고 믿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였고(위를 보라),이 기대는 행 3:19-21, 고전 16:22 그리고 살전 1:9-10과 같은 초기 공식들 속에 반영 되어졌다. 또한 Q에 의해 사용된 인자(Son of Man)자료는 그가 영광과 심판 가운데 오실것에 대한 예리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마 19:28 par.; 24:27,37,44 par.). 초기 바울 서신이(살전4:13-18,고전 7:29-31)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절박한 기대는 서서히 없어지게 되었고, 유대적-기독교 사회 내에서 특유한 생명력을 간직하게 되었다(야 5:7-8, 계 22:20).
예수의 높이 들리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 기대되는 짧은 시간의 지연은 왜 사도행전 자료에서 하늘에서의 어떠한 중간적 기능도 예수에게 돌려지지 않고 있는지를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예수를 하늘의 중보자로 여기는 이해는 초기 즉, 히브리서에서 발전된 것보다 앞서서 나타났음에 틀림없다(롬 8:34). 왜냐하면 천상의 중보자 개념은 이미 유대교에서 확고히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토빗 12:15; T.Levi 3:5, 5:6-7).
기독론에 대한 초기 단계의 자세한 묘사를 얻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아주 명료하고 일관된 윤곽 만큼은 재구성 될 수 있다.
D.바울의 기독론
바울 기독론의 배경은 사실상 이미 위에서 언급되었다. 다메섹 도상의 충격은 그것이 쉽게 과장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평가 절하되어서도 안된다(고후 4:6과 갈 1:16의 관점에서). 마찬가지로 “은혜 받는” 경험과 “그리스도화되는” 그의 계속적인 경험은 근본적인 것이었다(아래의 D.3를 보라). 가장 중요한 영향들은 헬라적 유대교를 통해서 온 것이었다(D.2를 보라). 바울이 이미 널리 퍼져있던 영지주의적 구속자 신화를 채택하였다고는 20세기가 선호하는 가설은 바울 이전 자료들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없거나, 바울 자료 자체에 의해서 필요 없게 되었다.
독특한 바울서신의 공헌은 3개의 항목 아래로 요약되어 질 수 있다.
1.아담 기독론-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는 그의 삶과 죽음에 있어서 실수를 할 수 있는 인간성을 지닌 인간이었고 또한 그의 부활이 새로운 인간성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 바울의 근본 확신이었다. 여기서 후자는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의 두 시대 안에서 펼쳐진 인간 역사를 개관하는 본문들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롬 5:12-21;고전15:20-22,45-49). 전자는 히 2:6-9의 충분한 설명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시 8:4-6을 사용한 본문들(고전 15:27,엡 1:22,빌 3:21)에 내포되어 있다. 다수의 학자들이 이 마지막 구절들이 아담 기독론의 표현으로서 적절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한 롬 8:3(“죄있는 육신의 모양”),갈 4:4(“여자에게서 나시고,율법 아래에서 나신”),고후 8:9(“그의 가난함”),빌 2:7(“사람들과 같은......종의 형채”) 등에서 표현된다.
위에서 논의된 많은 언급들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삶의 대표적 기능은 특히 그의 죽음에서 정점에 이른다; 만일 이 한 사람이 죽은 것이면,모두가 죽은 것이다(고후 5:14).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희생” 또는 “화목재”의 범주 보는 바울의 해석과 일치한다(롬 3:25,고전 5:7). 여러 본문들이 명백히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희생의 작용을 대표적 속량으로 보았다(고후 5:21;롬 8:3:갈 3:13,4:4-5),즉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활로 이끄는 예수의 죽음에 참여함을 통해 죽음을 깨뜨리기 위해서, 죄 없는 한 사람이 인간의 죄(죽음)의 영향을 경험한다.
예수의 죽기까지 순종하심은 아담의 불순종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것이고(롬 5:19,빌 2:8),아담의 어리석음의 결과인 인간의 운명을 자발적으로 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성을 창시한 그리스도의 역할은 부활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고전 15:21-22, 롬 8:29, 골 1:18). “부활”하시고 “영적인 몸”으로서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이시고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마침내 성취하는 인간성의 유형이다(고전 15:45-49).
바울의 독특한 몇몇 다른 강조점들이 이 항목 아래로 포함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은 다소 놀랄만한 점이다. 특히,(이미 고유의 이름으로 확정되어 있었던) “그리스도”를 통합적 이미지로 강조하여 사용한 것이 놀랄만 하다- “그리스도 안에”(약 80회),“그리스도 안으로”(갈 3:27),“그리스도와 함께”(갈 2:20),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20회 이상),“그리스도의 몸”은 말할 것도 없이(롬 12,고전 12). 이 말은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과 동일화 되심으로 가능해진 그리스도와의 동일화를 가리키는 말이다-구원의 과정은 최종 목표인 그리스도의 부활에 완전히 동참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에 점차 참여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진다(롬 6:3-6;그러므로 또한 “옛 성품과 새로운 성품”의 창조 주제 골 3:9-11, 엡 4:22-24). 아담 기독론은 개개인이 아닌 공동체로서의 구원 과정에 대한 이해와 일치한다( 엡 2:15,4:13).
바울 기독론의 다른 한 측면 또한 실제로 아담 기독론과 일치한다. 명확한 이유들로 인해 이것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라는 주제에 적용된다. 위해서 살펴본 몇몇 자료들 속에서 이 표제의 탁월함은 분명해 진다(롬 8:3,15-17,29;갈 4:4-7;골 1:13)-하나님의 종말론적 가족에서 장자로서 일으켜진 그리스도. 그러나 이것은 예수에 대한 바울의 가장 탁월한 호칭, 즉 “주”라는 호칭의 중요한 한 측면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첫 번째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 의도를 성취시키는 분은 바로 부활한 주로서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시 8:6을 언급하고 있는 고전 15:25-27). 이는 아마도 골 2:15에 있는 “승리자이신 그리스도”라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는 듯 하다.
2.지혜 기독론-신성으로서의 그리스도. 가장 지속적인 발전은 아마도 예수를 지혜 범주에 적용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신성한 지혜는 가장 중요한 가교 개념들 중의 하나로서 그 시대의 광범위한 종교철학적 사고 안에서 알기 쉽고 호소력있게 표현하고자 노력하던 유대교을 위해 오랜동안 맡은바 역할을 해왔다. 유대교 자체 내에서 지혜는(성령과 말씀과 함께) 창조적,계시적,구속적 절박함 속에서 하나님을 말하는 한 중요한 방법이었다(잠언,시락,지혜,필로). 이 지혜가 토라 속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 유대교의 특징적인 주장이었다(시락 24:23;바룩4:1).
바울과의 동등한 관련성이 이미 지혜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조성되고 있다(고전 1:30). 즉,신적 지혜의 표현으로서의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의 결정적인 자기-표현으로서의 그리스도(골 1:19;2:9).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대담하게 지혜 용어를 사용한다. 특히 창조 사역에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말할 때(고전 8:6; 골 1:15-17). 대부분이 결론을 내리는 바 처럼 그가 이것으로 그리스도가 선재했는가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더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가 선재하는 지혜의 역할을 남김없이 가정하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바울은 신성한 지혜와(고전 1:24),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이 가리키고 있는 바가 다름아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고후 5:19).
여기에서의 모호한 요소들은 다른 언급들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아담 기독론과 지혜 기독론 사이의 중요한 다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롬 8:3과 갈 4:4에서의 어법은 네 번째 복음서의 이미지와 가까운 만큼 막 12:6의 이미지와도 밀접하다. 좀더 많을 것을 드러내 주는 것은 “주”라는 호칭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위상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특히 롬 10:9 그리고 고전12:3을 주목하라; 200회 이상 그리스도를 언급한다). 제의적 하나님을 선호하는 헬라적 종교에서 “주”의 사용은 그것을 중요한 전도적 변증적 도구의 하나로 만들었다. 헬라의 관용적인 혼합주의에 대항하여 바울은 배타적으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주장하였다(고전 8:5-6,빌 2:9-11, 고전 15:25). 이를 행함에 있어서 그는 야웨를 지칭하는 구약의 본문들을 주 그리스도에게로 적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롬 10:13;고전 2:16;빌 2:10-11- 강력한 유일신론적인 사 45:22-23을 사용하면서).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사용이 전통적인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을 침해하는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전 8:6; 3:23; 11:3; 15:24,28).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대리자로 돌려버리는 식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롬 15:6; 고후 1:3,11:31; 엡 1:3,17; 골 1:3).
바울이 예수를 “하나님”으로 불렀겠는가의 문제는 그다지 많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첫째, 유대적 공동체들 내에서조차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처럼 배타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시 45:6; 82:6; Philo Sacr9; Quaes Gen II.62). 또 오직 분명한 경우는 후기 또는 제 2 바울 문학에서 발견된다(딛 2:13). 롬 9:5과 같은 보다 초기의 엄격한 유대적 상황에서 어떠한 유대인도 “메시야”를 모든 것 위에 계신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기도문을 읽었을 것 같지는 않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은(롬 1:8,7:25; 고후 1:20; 골3:17)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할이 중보자로서 특징지워 진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다른 말로 하자면, 아담 기독론이나 지혜 기독론도 다른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강조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영(Spirit) 기독론- 영으로서의 그리스도.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에서 “영”은 사실상 지혜의 동의어 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과 동일시하기 위해 논리적인 단계로 보였을 수도 있는 것을 그가 그리스도와 지혜를 동일시 했던 때와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 들이지는 않았다. 지혜와의 동일화는 창조에서 지혜가 담당한 역할을 해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과의 동일화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소급된다(롬 1:4, 고전 15:45; 그러나 고후 3:17은 해당 없다.여기서 “주님”은 출 34:34의 주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영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의 정도가 기독교인의 경험을 다루고 있는 본문들 속에 나타난다(특히 롬 8:9-11 그리고 고전 12:4-6):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경험에서 그리스도와 영은 하나이다; 그리스도는 성령과 독립적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을 통해서 경험되어지고 그리고 영으로서 경험되어 진다.
이것은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론이 성령론의 지배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은 단지 그리스도를 언급함으로서 알려진다고 바울은 생각하였다-“아들의 영”(롬 8:15),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으로 알 수 있는 영(고전 12:3),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바꾸시는 영(고후 3:18). 이제 영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규정되어 질 수 있다(롬 8:9, 갈 4:6, 빌 1:19). 그리고 영성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를 배경으로 측정되어야만 한다(고후 4:7-5:5,13:4; 빌3:10-11). 그러므로 영은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과 관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매체로서 재규정된다(고전 6:17). 그것을 넘어서 그리스도와 영 사이의 동일화를 적절히 말할수 있을지는 그다지 분명치 않다. 영은 여전히 하나님의 영이며(롬 8:9,11,14; 고전 1:11,14;등등), 하나님이 주시는 영이다(고전 2:12-22, 5:5;등등). 그리스도를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지혜나 주라고 부르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롬 8:11의 복잡한 구문들로 판단해 볼 때, 바울은 그리스도와 영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지혜의 관계와 같은 분명한 용어로 인지하지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이 초기 단계에서 이미 발생하고 있었던 기독론 즉, 하나님을 그의 내재적인 자기-계시 안에서 재정의 하는 발달된 기독론은 단순한 다신론이나 아니면 좀더 사변적인 “바이니타리아니즘”(삼위 중에서 두 인격을 숭배하는 것)으로도 쉽게 풀리지 않을 요소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E.제 2 세대 저작들의 다양한 강조들.
1.제 2 바울 서신들. 이미 구원자로 결정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맟추고 “때가 찬 경륜의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주적인 통일에 초점을 두고 있는 에베소서의 장황한 서두 축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이 발견된다(엡 1:3-14). 이미 골로새서에서 발전된(골 1:26-27,2:2) 그리스도를 이제껏 신비스럽게만 느껴져 왔던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계시로 이해하는 사상은 더 발전되어지고 좀더 단호한 어조로 설명된다(엡 2:11-3:13). 이 모든 것은 바울의 지혜 기독론에 대한 일종의 변화로서(골 2:3,엡 3:10), 그것을 이방인들을 향한 사도로서 가지는 바울의 중심 관심과 좀더 완전하게 통합시키고 있다. 또한 엡 4:4-6의 좀 더 완전한 고백조의 자료와 보다 정교한 이미지인 그리스도의 몸(4:15-16)과 교회의 남편되신 그리스도의 이미지(5:23-27)를 주의하라.
목회서신들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방법에 대한 진전된 새로운 단계에 주의를 두지 않는다. 이야기는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미리 결정되어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관한 이야기이다(딤후 1:9-10, 딛 1:2-3), 딛 2:13에서의 언급은 두 번째 하나님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언급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의 영광의 나타나심”에 대한 언급이다- 한분이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으로서 예수의 오심. “구주”라는 명칭은 초기 바울의 글들에서 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호칭은 하나님의 호칭으로도 그리스도의 호칭으로 동등하게 사용된다(특히 딛 1:3-4; 2:10,13; 3:4,6). 그러나 기독론은 이미 잘 확립된 신조와 찬양조의 신조들(딤전 1:15,2:5-6,3:16,6:13;딤후 2:8;딛 3:5-7),즉 “경건에 일치하는 가르침”(딤전 6:3) 속에 특색있게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두 번째 나타나심에 대한 이야기 역시 이미 임박한 성취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소망을 신중한 어조로 나타내고 있다(딤전 6:14;딤후 4:1,8;딛 2:13).
2.바울의 영향을 받은 광범위한 부류. 베드로 전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말세에 나타나신바 되었고 세상이 조성되기 전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동일한 확신을 발견하게 된다(벧전 1:20)-분명히 이것은 이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기독론적 강조점이었다. 베드로 전서의 특징은 고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으로 이것이 주요 기독론적 관심을 결정한다. 영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을 미리 말하던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려진다(벧전 1:11). 그리스도는 흠없는 희생 양이었다(벧전 1:19). 이사야 53장의 전 내용 중에서 신약은 고난을 참으시는 그리스도의 인내하심을 한 본보기로서 예를 들었다(벧전 2:21-25; 비슷하게 3:17-18). 독특한 바울의 강조의 메아리 속에서 “영광의 영”을 경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벧전 4:13-14). 그러나 저자의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영향은 구원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다(벧전 1:3,3:18-21). 동시에 그는 죽음과 부활 중간에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최초의 심사숙고가 있었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는 일(벧전 3:18-20,4:6). 또한 베드로 전서는 전도와 변증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 구약 본문 묶음의 가장 좋은 예들을 가지고 있다(벧전 1:6-"8).-“stone testimonia"
신약에서 히브리서는 요한복음 다음으로 기독론을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어 왔고 유지해 왔다. 히브리서는 가장 발전된 단계의 표현인 지혜 기독론과 아담 기독론 두개를 포함하고 있다(히 1:2-3; 2:6-17). 그러나 그것의 주요 목적은 그리스도가 어떠한 중재자 인물들보다 더 뛰어나심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언자들보다(히 1:1-2),천사들보다(히1:4-16),그리고 모세보다(히 3:1-6) 뛰어나신 아들. 그러나 주된 신뢰는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제시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선한 대제사장에게 요구되는 극히 인간적인 특징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아론의 계열이 아닌(히 5:1-10), “무궁한 생명의 능력에 의한” 멜기세덱의 반차를(시 110:4) 쫓아.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레위계열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시기 때문이다.
이 중심적 주제는 8-10장에서 플라톤적 이상주의와 히브리적 종말론의 멋진 융합에 의해 다루어 진다. 필로에게서와 같이, 이 지구상에서의 일상적 지각은 단지 천상의 실제 세계에 대한 그림자이며 불완전한 모사에 불과하다. 따라서 제사장과 희생의 성막도 진정한 하늘 성전에 대한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진정한 대제사장이시며,양심을 깨끗게 하시기에 홀로 충분한 그리고 경배자들을 완전케 하기에 충분한 희생물이시다. 히브리의 종말론과 연결해서 “이곳 아래의” 그림자는 옛 언약의 “그때”와 동일시되고, 하늘의 실제는 새 언약의 종말론적인 “지금”과 동일화된다. 그러므로 제사장직과 제사는 불완전하고 예비적인 그림자의 낡은 양식에 속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실제적인 내면의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단번에 열어 놓으셨다. 이러한 사변적인 수단들을 통해서 분명 저자는 그것이 비록 사회적인 추방을 의미한다 할지라도(히 13:8-16), 독자들로 하여금 유대인 제사의 확실함(tangibility)으로 되쫓아가지 않도록 하고, 그들에게 기독교의 덕목,즉 오직 제사장과 기름부은 희생물은 그리스도라는 덕목을 설명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복음서들 중에서는 마가복음이 바울의 관심들을 가장 유사하게 공유하고 있다. 그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막 1:1,11).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단순히 기적에 관한 것으로만 이해된다면(막 3:11, 5:7),그것은 오해다(막 13:22). 그렇기에 비밀의 주제(막 3:12과 5:43)와 제자들의 우둔함에 대한 주제(막 4:13과 8:14-21) 등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복음서의 중심이자 전환점에서 예수는 베드로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에 대해 이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하심으로 응답하시고, 곧 인자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심을 가르치셨다(막 8:30-31). 마가복음의 두 번째 단락은 다시 한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하늘의 목소리로 시작한다(막 9:7). 그 후에 해설자는 곧 다가올 수난에 대한 예언을 반복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동한다(막 9:12,31; 10:33-34,38-39,45; 12:8 등등). 이야기의 절정에서 대제사장은 오직 예수를 거부하기 위해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막 14:61-64).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방금 죽은 십자가의 예수를 향하여 “진실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고백하는 로마의 백부장에 의해 고도의 극적 효과가 발생한다(막 15:39). 이것을 통해 우리는 마가가 고후 10-13장에서 바울이 의도했던 목적 즉,십자가의 기독론을 사용하여 예수의 기적을 너무나 많이 강조하는 영광의 기독론(소위 “신인” 기독론)을 교정하고자 했던 것과 비슷한 목적을 위해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3.누가행전(Luke-Acts). 누가의 신학에 대한 모든 연구는 그가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조적인 평행들을 추적해보아도 알 수 있다(두 서언과 성령이 기름부음,눅 1-2장=행 1 그리고 눅 3:21-22=행 2:1-4; 이야기를 위한 여행 구조). 우리는 누가의 두 저작들 사이에 연속성과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보게 된다. 누가는 우리가 누가의 기독론을 오직 한 쪽에서만 뽑아내는 잘못, 즉 다른 한 쪽과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중 구성을 해 놓았다. 예를 들어 누가는 사도행전에서는 예수의 설교 사역에 대한 언급이 포함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오직 2:22과 10:36-39에만 언급됨). 왜냐하면 그는 그의 독자들이 이미 누가복음을 알고 있다고 가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누가의 신학을 담고 있는 이 두 권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의 기독론에서 지배적인 주장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의 최고 절정이요 또한 역사의 중심이다. 예수가 자신의 앞 시대와 자신 이후의 시대를 연결하는 동시에 분리시킨다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통합적 주제가 나온다. 반면에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까지의 적지않은 과도기들을 특징짓는 성취에 대한 점층법적 어조도 나온다(이스라엘에서 예수까지-눅 1:67-79, 3:4-6, 4:16-22: 예수에서 교회까지-눅 24:26-27,44-48; 행 1:16-20; 2:16-21,25-36). 또한, 눅 9:31과 11:20에는 출애굽 주제에 대한 미묘한 기억이 나오고 모세/예언자 기독론에 관한 주장은 그의 두권의 책에 교차하여 등장한다(눅 24:19; 행 3:22, 7:37). 이와 비슷하게,심지어는 더 눈에 띨 정도로 오실 그리스도를 예고하고(눅 1:15,41,67; 2:25), 그의 사역을 특별하게 구별시켜주는 성령(눅 3:22; 4;1,14,18; 10:21; 행 1:2,10:38),동시에 종말의 때에 첫 신자들에게 충만히 부어질(행 1:5,8; 2:4,17-18,33 등등) 성령에 대해 누가는 강조한다.
한편, 이스라엘의 시기는 점차적으로 대체되어 진다. 예루살렘 성전은 연속성에 대한 중요한 초점을 제공한다(눅 1:8-23; 2:22-51; 24:52-53; 행 2:46; 3:1-10; 5:20-21,42).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스데반에 의해 “손으로 만들어진”것(행 7:48; 41과 비교해 보면서 읽으라)으로 공격당한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을 떠나 이방으로 향하는 바울 자신의 점차적인 전향(행 9:15, 13:45-50, 22:21-22, 28:25-28)에 의해 바울이 마지막으로 거절당하고 붙잡히게 되는 장소가 된다(행 21:7-36; 26:21). 또한 성령과 예수의 성공적인 관계 양식에 관한 묘사에서 시대들 사이의 불연속성은 기독론적으로 특징지워 진다-첫째,성령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삶을 지닌 분(눅1:35),둘째,유일하게 성령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눅 3:22, 4:18; 행 10:38), 셋째, 높이 들리셔서 성령을 부여하실 신성한 권한을 부여받은 고귀하신 분(행 2:33), 그래서 바울과 같이 성령은 “예수의 영”으로 불려질 수 있게 되었다(행 16:7). 부활현현을 40일이라고 제한함으로서 승천과 부활 사이에 10일 간의 간격(행 1장)을 만들어 예수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와 구분하려는 시도가 눈에 띤다.
구원의 역사에 관한 기독론적 관심의 재형성에서 한가지 중요한 요소는 파루시아(parousia)의 지연이다.누가에 의해 관찰된 지연의 내용은 과장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는 눅 10:9,11,18:7-8 그리고 21:32에서 임박한 기대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눅 19:11,20:9 그리고 21:8에서 지연에 관한 확실한 경고들을 집어넣지 않는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언급되어 있는 보다 긴 시간 규모(행 1:6-8)는 마지막의 것들에 대한 교리 등을 해석해 주는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이야기(행 10:42, 17:31, 24:25)와 함께 선교를 위해 관찰된 것 같다. 들리심과 파루시아 사이의 기간을 이처럼 늘이는 것은 사도행전이 “부재 기독론”(absentee christology)을 담고 있다는 인상을 더욱 강화시켜 준다. 이 부재 기독론은 바울과 요한의 상호 내재적 강조 그리고 좀더 친숙한 표현인 “그리스도 안에서”와는 달리 환상(행 9:10,18:9,22:17-21,26:13-19) 속에서나 그의 이름을 통하는 것(행 3:6,16; 4:10-12,30; 10:43) 이외에는 그리스도의 공언된 더 이상의 행동을 포함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누가의 기독론이 가지는 다른 독특한 특징들은 그가 “구원”에 집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공관복음 저자들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예수를 “구주”라고 부르고(눅 2:11; 요한복음음 오직 4:42에서만),“구원”을 그에게 돌린다(눅 1:69, 2:30, 3:6, 19:9). 이와 동일한 강조가 사도행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명사형: 행4:12;5:31; 13:23,26; 28:28, 동사형:특히 행 2:21, 4:12, 15:11 16:31). 또한 누가행전 속에는 놀랍게도 어떠한 속죄 신학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의 설교에서 “종”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언급들은 여러가지 수난의 주제보다는 오히려 수난-해명의 주제를 강조한다(행 3:13, 26; 4:27,30; 5:30; 10:39-40; 13:29-30). 이러한 특징들이 누가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암시해주고 있을지 모른다는 인상은 속죄 신학에 대한 가장 명확한 마가의 표현들이 빠져있다는 사실(눅 22:27; 비교, 막 10:45)과 이야기의 가장 예민한 두 곳에서의 혼동(confusion)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눅 22:19b-20,god 20:28). 결국 우리는 누가가 그리스도의 부활 현현(눅 24:39-43; 행 1:3)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이고도 객관적인 특성을 묘사할 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영적 현상의 확실한 특성(눅 3:22; 행 4:31,8:18-19,12:9)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준거하여 기술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묘사는 성령 시대와 그리스도 시대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강조하고 있으며 신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방법으로 부활과 승천을 구별한다.
4.바울의 영향권밖의 부류들. 약 5:7-8의 “주”라는 모호한 언급이 아마도 역시 예수를 언급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에는 예수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이 단지 두 번 나올뿐(야 1:1; 2:1) 거의 기독론이 빠져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 전승에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다(약 1:5,22-23; 4:12; 5:12). 그리고 사회정의를 향한 예언자의 열정과 유대의 지혜 교훈이 잘 조화된 곳에서예수를 “의로운 이”로 언급한다(약 5:6). 아주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이것을 함축적 기독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냐하면 이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러한 강조점들이 (모든 복음서에서 처럼) 반드시 마가의 수난 구조 태두리 안속에 억제될 필요 없이 어떻게 보존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탄생 이야기에 대한 이중적 강조는 또한 마태에게 그의 중요 기독론적 주제들을 공급해준다-다윗의 아들과 메시야로서의 예수(마1:1,17,20;2:4),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마1:18,20; 2:15). 분명 유대적인 상황속에서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변증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마 11:2,16:20,23:10,24:5에서 편집적인 삽입들이 나온다). 마태는 또한 신약의 다른 어느 저자보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마 9:27; 12:23; 15:22; 20:30-31 pars.; 21:9,15).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가 더 중요한 명칭이다. 왜냐하면 마태는 마가 관념의 절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마 3:17, 8:29, 17:5, 26:63, 27:54), 그 주제를 확장시키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마 14:33, 16:16; 27:40,43; 28:19).
한편, 이것은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완성시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마 2:15; 4:3-6=신명기6-8장에 대한 미드라쉬). 그러므로 또한 함축적 인 모세 유형론(예수는 산상 수훈에서 다섯 덩어리중 첫 번째 것을 제공한다)과 지속적인 예언 성취의 주제가 나온다(마 1:22-23; 2:15,17-18,23; 4:14-16; 8:17; 12:17-21; 21:4; 27:9-10). 그러나 더욱이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가 그의 백성 중에 하나님의 현존으로서 임재하셨음을 의미한다(마 1:23; 18:20; 28:20). “하나님의 아들”이 기독론적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은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횟수가 증가하는 것에 잘 반영되어 있다(마 7:21; 10:32-33; 12:50; 16:17; 18:10,19). 그 결과 예수를 종말론적 지혜의 밀사로서 뿐만 아니라 지혜 그 자체로 표현하려는 마태학파의 분명히 의도적인 편집들이 등장하게 된다(마 11:19,25-30; 23:34-36,37-39).
묵시문학적인 이미지가 다양한 해석의 문을 열어 놓았기에 기독론의 전(全) 의미가 불명확하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 계시록의 가장 놀란만한 특징은 하나님과 높이들린 그리스도와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처음의 환상의 묘사는 이전의 묵시문학적 환상들에서 유래된 요소들의 놀라운 혼합물이며(특히 겔 1:24,8:2; 단 7:13, 10:5-6), 유대 묵시문학 전승의 일부이기도 하다. 유대 묵시문학의 전승 속에서 영광의 천사는 하나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아브라함의 묵시록 10장). 단지 차이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유대의 묵시문학적 전승 어느 곳에서도 천사는 숭배의 재물을 금지하고 있는 반면, 요한 계시록에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한 경배의 대상으로 나온다는 점이다(계 5:13,7:10).
처음에 유다의 사자와 다윗의 뿌리, 죽음을 정복한 자와 역사의 주(계 5:5)이신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언급된다(계 5:6,8,12-13; 6:1 등등). 어린 양은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자이다(계 6:16,7:14,12:11). 그리고 그의 피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승리케 한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 양이 “보좌의 중앙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진다는 점인데(계5:6,7:17), 다른 곳에서 “보좌에 앉혀진 이”로 묘사되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계 4:9-10; 5:1,7,13; 6:16; 7: 10,15;19:4;21:5).그 하나의 보좌는 분명 하나님과 어린 양 모두에 의해 공유되어 있다(계22:1). 그래서 또한 각각은 똑같이 “알파와 오메가”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계1:8,21:6,22:13).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는 천상의 두번째 권능자로서 하나님 곁에 올려졌을 뿐만 아니라, 환상에서의 선견자 이미지는 어느 정도 하나님께과 융합되어 진다. 이것은 구원 약속을 동일한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주어진 것으로 그리고 혼인식의 어린양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고있다(계 3:21; 19:7-8; 21:2,9-14).
F.요한의 기독론.
요한복음은 신약에서 가장 완전히 발달된 기독론을 가지고 있다. 공관복음서와의 현저한 차이가 1장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호칭에 대한 일반적 나열에서 단번에 확연해 진다(“하나님의 어린양”,“메시야”,“하나님의 아들”,“이스라엘의 왕”,“사람의 아들). 예수 가르침의 스타일과 내용에서도 매우 차이가난다:공관복음서의 예수는 주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해서 경구와 은유로 말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의 예수는 주로 자기 자신에 대해 긴 담화의 형식을 빌어 말하고 천국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는다. 또한 독자들은 자기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했던 아들,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영원한 ”나로다“라는 예수의 의식이 요한복음서 전체에 흐로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요한이 표현들이 상당한 전승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다(요 6:20과 막 6:50; 요 10장과 눅 15:4-6), 그러나 위의 강조점들이 요한복음에서는 일관적으로 나오지만 이전의 예수 전승에서는 결여되어 있기에 우리는 이것들은 초기 전승에 대한 충분한 숙고의 결과라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제 4 복음서 기자의 주요 목적은 서론에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데 이 서론은 뒤이어지는 강조들과 요 20:31에서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표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1.성육하신 말씀. 서언에서 요한은 초기의 지혜 기독론을 확장시킨다. “지혜”의 개념보다 “말씀”의 개념이 선호되고 있는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는 아마도 남성형이 좀더 적당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이 “말씀”이 유대의 유일신 사상과 그리스의 종교 철학(필로와 같은) 사이에 의사소통의 가교를 제공하기에 적절한 개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의 지혜 신학의 선상에서 말씀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를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씀은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 즉 인간이 알 수 있는 하나님으로 생각되었다. 말씀은 구속적인 “추가”(afterthought)가 아니라, “태초에” 있는 존재였다(요 1:1-2). 하나님 자신의 능력이 창조와 계시에서 발휘된다(요 1:3-5,9-10).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인간이 되신 말씀이시요, 하나님의 영광을 구체화시키는 분이시다(요 1:14). 그분 홀로 하나님을 드러내신다(요 1:18).
비록 “말씀”이라는 개념이 서언 이후에는 사라지지만, 뒤이어 나오는 내용들은 사실 말씀/지혜 기독론의 방대한 상술에 불과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그 메시지가 끊임없이 반복된다-예수는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하나님을 드러낸 사람이다. 나다나엘은 하늘과 땅 사이의 사다리이신 인자를 볼 것이기 때문에 “참 이스라엘인”이다(요 1:47-51).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만이 하늘의 것들을 증언할 수 있다(요 3:11-13).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신다(요 3:31-33). 오직 아버지로부터 오신 그만이 아버지를 보셨다(요 6:46). 요한에게 있어서 특이한 “나로다”(I am)라는 진술들은 지혜 언어를 사용한다(목자,빛 등). 그리고 야웨의 “나로다”를 모방하는(출 3:14; 사 43:10) 그 진술들은 단호하게 예수가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자아-계시요(요 6:35; 8:12,24,28,58 등등),하나님의 실제에 대한 결정적인 현현(요 1:14,17;14:6)이라고 주장한다.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보았다. 왜냐하면 영광 속에서 하나님 즉, 인간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사 6장;요 12:41). 그러므로 요한의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저항이 나온다-그는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고,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러한 저항들과 논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진술에서 신앙의 조항을 만들어 낸다(요1:18; 20:28);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는 다른 제 2의 신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고 성육하신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되어야만 하고, 또한 가능한한 인간의 영역내에서 자신을 제시하시고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또한 요한 기독론의 지배적인 범주의 기능이기도 하다-하나님의 아들. 비록 “메시야”라는 호칭이 여전히 중요한 것이기 하지만(주의하라 요 1:41과 4:25),요한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의 빛에 비추어 이해되어지기를 바랬다는 것은 명확하다(요 11:27; 20:31). 그 이유 또한 아들 언어에 대한 요한의 특징적인 상술을 통해 볼 때 확연하다:“아들”은 하나님과 예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예수가 증거하는 하나님 계시의 권위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는 유일하다: 그는 독생자이시다(요 1:14,18; 3:16,18);그의 아들되심은 나뉘어질 수 없다(그 홀로 “아들”이시다;신자들은 “아이들”이다;바울과 비교해 보라).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나온 또 다른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 그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요 14:9). 통상 결과적으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순종을 강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연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더 잘 이해되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증언하는 아들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반복적인 주의가 나온다(요 5:19-23,26-27; 6:35-40,57; 10:25,37-38; 14:25-31; 15:26).
요한 기독론의 주요 강조적인 이것과 함께, 유대의 유일신 사상에 대한 기독교의 재정의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랍비 유대교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일성을 사실상 포기하는 그러한 재정의를 거부하도록 만들었던 긴장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예수를 지상의 하나님으로서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성도 명백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그것을 인식했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안내의 발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2.찬양받는 아들. 네 번째 복음서 기자가 비록 바울이 그의 지혜 기독론과 균형을 이루며 가지고 있었던 아담 기독론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다른 균형이 복음의 중요한 다른 요소들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특히, 요한은 예수가 인류의 진정한 한 부분이 아닌, 단지 인간의 모습만을 띤 하나님이셨다라는 인상을 배제하기 위해 애쓴다. 말씀은 “육체”가 되셨다(요 1:14). 이 육체는 출생한 인간을 형성하는 요소이다(요 1:13; 3:6). 영원한 삶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어야만 한다. 즉,예수가 지상에서 육신의 몸으로 사셨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요 6:53-56). 목격자들이 확인해 주는 것처럼 정말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요 19:34-35). 그 강조점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저 복음에서 결정적인 요점을 뜻할 뿐이다. 요한은 아마도 그 윤곽이 아주 선명히 잘 그려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요한복음은 다른 어느 복음서들보다도 더 잘 예수의 거절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그 나름의 방식으소 설명하고 있다. 서두에서 언급된 어두움에 의해 거부되는 빛에 관한 주제, 즉 자신의 백성에게 거부되는 말씀이라는 주제는(요 1:5,11) 요한복음 전체의 중심사상이 된다. 그 빛은 어쩔수 없이 비판적이고 분열을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몇몇 사람들만 그것을 받아들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증오하기 때문이다(요 3:9-21). “찬성”과 “반대”를 가려내는 과정으로서의 “심판”은 요한복음의 중심 부분(6-12장)을 같이 붙잡고 있는 줄거리이다. “때”에 관한 언급은 지속적으로 울리는 북소리 처럼 다가올 고난을 예고하는 본문을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요 2:4; 7:30; 8:20; 12:23,27; 13:1; 17:1). 예수의 죽음이 가지는 soteriological 의미는 여전히 두드러진 특징이다(요 1:29, 6:51, 12:32, 13:10, 19:34). 그러나 기독론의 관점에서 이보다 더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의 죽음이 그의 부활 그리고 승천과 신학적인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들려 오려지심”(요 3:14, 8:28; 12:32), 승천하심(요 3:13; 6:62; 20:17),그리고 특히 영광 받으심(요 7:39; 12:16,23; 13:31; 17:1)의 개별적 사건. 바울에서 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은 십자가와 관계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바울처럼 요한은 성령의 개념을 기독론과 밀접히 상호 관련시켜서 묘사한다. 강력한 말씀/지혜 기독론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여전히 요단 강에서 예수에게 부여되었으며, “그에게 남아있는” 자에게 주어지고, “지나칠 정도”(without measure)로 주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진다(요 1:32; 4:34). 성령은 분명 그리스도에 의해 부여된 선물이다(요 1:33; 4:10,14; 4:34(?);7:39; 15:26; 16:7; 19:34). 예수 사역의 구원 절정의 조화가 강조되어 진다. 왜냐하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성령을 넘겨주셨고(요 19:30), 선교를 위한 (오순절 날의) 성령의 부어주심이 부활의 날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요 20:21-23).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성령이 “보혜사”(Paraclete)나 상담자,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다른 보혜사”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요 14:16). 성령은 예수의 후속자로서 예수의 자리를 대신하신다. 그리하여 자신의 제자들에 내주 하시기 위해 되돌아 오신다는 예수의 약속은 바로 오셔서 내주하시는 보혜사와 관련되어 진다(요14:15-26)-요한의 “실현된 종말론”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중의 하나. 보혜사의 기본적인 역할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유지,완성케하는 것이요(요 14:26; 15:26; 16:7,10),그리스도의 것을 그의 제자들에게 알리심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요 16:12-15). 그러나 바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은 요한의 기독론이 성령의 개념을 남김없이 흡수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혜와 말씀의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Paraclete를 보라). 별개의 기능들은 여전히 이 둘, 즉 예배에 임하시는 성령과 그리고 성령과는 별도로 그리스도에게 돌려지기 때문이다. 그의 실현된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여전히 미래에 있을 파루시아에 대한 약속(요 14:3)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신 성령과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한주 후에 도마에게 나타나신다(요 20:26-29).
3.요한 1,2서- 기독론의 위기
요한 일서는 아마도 요한복음 보다 나중에 기록된 것으로서 요한 공동체 내에서 발생한 몇몇 위기상황을 반영해 주고 있다. 요한복음과 그리스도에 관한 요한복음의 설명이 나오게 된 것도 바로 이 위기 상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많은 수의 이전 구성원들이 떠났다(요일 2:19). 그리고 그 분열점은 기독론의 문제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탈자들은 “적그리스도”로 불리워지고 있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 때문에 추궁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요일 2:18,22; 4:3; 요이 7). 특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고 주장했다(요일 4:2-3;요이 7). 즉 복음서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석함으로 인해 옹호되었을지도 모르는 가현설의 한 형식을 주장했다(위의 6:1을 보라). 따라서 요한 학파의 제 2 세대 구성원인 이 저자는 요한복음에서 시도된 좀더 뚜렷한 종합에서 어느 정도 후퇴하였다. 요한 일서를 여는 구절들은 분명히 요한 복음이 서언을 회상케 만든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설교 말씀의 내용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전의 사상을 회상케 만들기도 한다(요일 1:1-3, 특히 눅 1:2과 행 10:36). 요일 5:20은 아마도 예수를 “참 하나님”으로 언급한다(특히 요 1:18). 그러나 균형잡힌 강조가 더욱 분명하고 예리하게 묘사되어 있다: 즉 생명의 말씀은 확실한 역사성을 가진다(요일 1:1).“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를 가지고 오셨다”라는 고백은 영들을 시험하는 주요 기준이다(요일 4:1-2). 그리스도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주장도 단호히 배제된다(요일 5:6-8).
요약하자면 요한 1서와 2서는 1세기 말에 탐구되기 시작했던 모험적인 분야에 관한 생생한 징후를 제공해 준다.
G. 결론
1. 유대교와의 연속성
다양한 신약 본문 전체를 통해서 보면 다음과같은 주된 주장이 약회된 곳이 전혀 없다 : 예수는 유대인 이었고 또 유대교와 그것의 성스러운 문서들에 의해 제공되어진 사상에서 이해 되어져야 한다. 다양한 범주의 내용들이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방식이 특히 놀랍다-메시야와 사람의 아들, 주와 하나님의 아들, 지혜와 말씀, 속량제와 제사장, 아담과 영, 종과 양, 구세주와 하나님. 물론 대부분의 범주는 하나 혹은 다른것에 의해 재정의 된다-사람의 아들은 인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은 단지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그리고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 등으로 변화된다. 그러나 그 범주들은 심지어 유대인들이 그리스-로마 세계의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을때조차도 본질적으로 유대교적인것으로 남았고 그것은 드러나게 언금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적으로 예수는 유대교적 용어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것이 분명히 이해되어져야 한다-중요한 것은 예수는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하나님의 목적들과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과 연계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명백히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이스라엘 희망의 결정적이고도 단호한 성취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의 중요성은 예수 자신에 의해 제공되는 모든 이용 가능한 범주들을 이끌어 냄없이는 제대로 표현될 수 없다.
2. 예수 자신의 자아 이해와의 연계성
이 두번째 양상은 그다지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 중요한 이유는 많은 신약의 기독론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 사건은 결정적으로 예수에게 제공할 수 있는 범주들을 재구성했기 때문에 그 사건의 한쪽 측면만 엄격히 비교될 수 없다. 예를 들면, 메시야주장이 기독론안에 통합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로서 뿐이다. 제사장의 범주가 수용되어 질수 있는 것은 오직 ‘멜기세덱의 반열’을 쫓고 ‘불멸의 삶의 능력’에 의한 제사자으로서이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사람의 순종은 노피 들리신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는 ‘아담’이라는 명칭을 가진 첫 번째 사람의 불순종을 반전시키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예수의 전승 자체내에서는 충분하고도 명확한 선례들이 있다.-특별히 예수의 친밀한 아들되심의 자각, 그의 고통에 대한 징후 그리고 그의 죽음후에 있을 자신의 의로움이 입증될것이라는 그의 희망. 결과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의 자신에 관한 주장의 왜곡이 아니라 그들의 합당한 성취라는 주장은 정당하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또한 신약의 기독론의 이어지는 주장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안의 기초를 두지 않는 전적으로 새로운 출발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빛안에서 선교의 실재성안으로의 더 완전한 통찰로 이해되어진다.
3. 신약 기독론안에서의 통일성과 다양성
신약 기독론의 주된 핵심에는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가장 고귀하게 찬양을 받으실 신분으로 들려졌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은 신약 본문들안에서 언제나 변하지 않는 요소이다. 그것의 더욱 확장된 형식에서 그것은 구가지 양상을 취한다-창조와 구원에서의 사람(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 목적의 정점인 그리스도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결정적 계시인 그리스. 후자는 후대의 본문들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고, 요한복음에서는 성육신 교리로서 명백히 드러나지만, 그리스도의 사역 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을 위한 결정적 순간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초기의 강조는 많이 제거되었다. 어떠한 측면도 신약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어떠한 다른 기독론의 강조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소홀히 취급되거나 강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약의 문서에는 시종일관 기독론을 통제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사실과 특징이 존재한다.
개별 저자들의 특별한 강조들은 결코 이 주요 골자에 대한 통일된 표현이나, 이 중심 사상에 대한 지나친 강조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그 골자는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어떤 두명의 저자도 그것을 정확히 동일한 용어로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들의 차이와 그들이 말했던 상황의 차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된 신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매우 다양한 표현들을 불가피하게 양산하였다. 그러나 그 골자 이외에도 표현들(presentations)의 범위는 주제,양식 그리고 이미지의 광범위한 상이점을 포괄한다-마가와 마태의 차이를 충분히 포괄할 수 있고, 야고보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기독론적으로 중요한 특징들이 없는 사실도 포괄할 수 있으며, 히브리서와 계시록의 특유한 요소들로 충분히 포괄할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하다. 분명 각 저자들은 그들 자신의 다양한 상황들에 좀더 들어맞게 말하기 위해 다른 방법들과 다른 강조들을 사용하여 복음을 재표현(“재선포”는 요한의 말이다)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이미 확정되어진 통찰들에 충실한가에 대한 관심도 포함하고 있었다. 몇몇의 경우에 있어서 그 관심은 다른 모든 것들(특히 보혜사)을 제외할 만큼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에 있어서 기독론은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단순히 전해지는, 즉 짜여진 전승들의 단순한 양도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높이 들리신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한 창조적인 응답으로서 여겨졌다. 그런데 이것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신약 기독론의 일부이다.
4.다음의 기독론을 위한 초석
상황적이고 특수한 그리고 동시에 발전하고 있는 많은 신약 기독론의 특징은 다음의 사실들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신약 기독론의 모든 요소들이 몇몇의 초기 형식들에 반영되어 있는 기록들과 기독교 이전의 유대적 지혜전승의 한 부분으로서 유행하던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지혜 사상과 같이 다 진척되었던 것은 아니다-특히 “양자론자”-. 몇몇 요소들은 돌발적으로 채택되기도 했다-바울의 아담 기독론은 이레니우스(Irenaeus)의 교리 “요약”에서 채택되었고, 성령의 시대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의 시대에 대한 누가의 개요는 몬타니즘과 현대적 율법주의 속에서 왜곡된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의 장대한 환상은 비잔틴 판토크레이터(Byzantine Pantocrator)속에 그 영향이 남아있다. 그러나 미래로 들어가는 중요 간선도로는 바울과 요한의 지혜/말씀 기독론에 의해 제공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순조롭지가 않았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이해하는 개념은 가현설의 문제를 피해야만 했을 뿐만 아니라(이미 요한 1,2서에서),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의문으로 인해 유대교와의 명백한 단절을 만들어 내는 결과를 낳아야만 했다(벌써 요한복음에는 그것이 예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2세기 후반에가서 양태론적 해석이 활기를 칠 기회를 주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신약 본문은 기독교가 유일신주의를 포기하지 않도록 막아줄 수 있기에 충분한 안전 장치를 가지고 있었으며(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 또한 삼위일체의 방향에 입각한 유일신론의 재규정을 필요로하는 하나님과,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그리고 그리스도의 영 사이에 내포되어 있는 관계들의 역동성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차후의 공식들이 신약 기독론에 있는 균형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충분히 설명할지는 열린 문제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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