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스크랩] 바울신학 -김세윤

하나님아들 2013. 5. 1. 17:20

바울신학

이번학기 신학신학 제1권을 하기로 했는데 보통 신약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에서 시작하여 어떻게 사도들의 신앙고백이 발생하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의 발생을 규명하고 사도들의 신앙고백의 의미들을 해석하는것이 신약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그래서 보통 신약신학을 Ⅰ,Ⅱ로 나누는데
제Ⅰ부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반영 예수에 관한 것을 알고
제Ⅱ부에서는 ‘사도들의 선포’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함에 있어서 바울은 어떻게 선포했으며 요한은 어떻게 선포하였고 또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의 대표적인 신학자들 즉 마태,마가,누가 또는 히브리서의 기자는 어떻게 선포하였는가 하는 사도들의 선포를 다루는 것이 과제이다.

Ⅰ.바울연구의 약사

바울신학을 함에 있어서 서론으로 바울 연구의 역사를 간단히 사펴 봄으로써 바울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가를 우리는 알게 되고 또 바울 신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주요한 문제들이 무엇인가? 논제들이 무엇인가 알게 된다.

1.종교개혁
종교개혁이 사실은 바울의 복음,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복음을 재발견 함으로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SOLA GRATIA(오직 은혜)ꠏꠈ
ꠉꠏꠏꠏꠏꠏꠏꠏ JUSTIFICATION(의)
SOLA FIDEI(오직 믿음) ꠏꠎ
그래서 바울신학의 중심을 이렇게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자는 구원이 있다는 구원론에 있다고 보고 바울신학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고 재천명했다. 그러나 소위 역사비평적인 신학해석 방법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변하게 된 것이다.

2. 역사비평적 신약해석 방법(The Historical-Critical Exegesis)
성경의 역사 비평적 해석이 발달하면서, 이제 상황이 완전히 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계몽주의 시대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인데 바울 서신들에 나타나는 여러 신학적인 사상들을 그들의 역사적인 상황에 비추어서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스콜라주이로부터 해방을 하고 바울의 신학사상들을 하나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해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방법론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방법론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는 바울신학을 현대화하는 경향이 많았다. 실제로는 바울과 그의 신학을 신학자 당대(그 신학을 연구하는)의 신대 전신에 의해서 재해석하고 그 시대 정신에 맞는 것으로 천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른바 바울을 현대화하는경향이 있었다. 이것을 자세히 공부하고 싶으면 H.Ridderbos의 ‘바울신학’의 첫 부분(바울 신학의 역사)을 보라. 여기에 비교작 잘 요약되어 있다.

3.. F.C.Baur(1792-1860)-Tubingen 학파
F.C.Baur는 Tubingen 대학의 교수로서 현대 신약신학 또는 바울신학의 아버지라 부리운다. 그가 Tubingen 학파의 대표자였는데 Baur와 Tubingen 학파는 기독교 역사를 헤겔의 관념론적 철학에 의거해서 특히 변증법적 방법론에 의거해서 해석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바울 신학에 있어서 ‘영’의 개념을 바울 신학의 중심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영’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것으로서, 유한하고 사대적인 ‘육신’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Baur에의하면 바울은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으로서 ‘영’을 받고 그 ‘영’에 의해서 하나님과 연합하고 그리하여 유한하고 상대적인 이 세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절대적인 자유에 들어간다고 바울이 가르쳤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와같은 신학을 유대 율법과 유대교의 특수 주의에 아직도 매여 있었던 원시 교회의 反에서 발달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정반합의 논리로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시 교회(초대교회)는 유대기독교로서 아직도 율법과 유대교의 특수주의 곧 유대인들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택되어서 구원이 유대인들에게만 있다는 유대 기독교(正)에 반해서 이와같은 ‘영’의 기도굑, 헬라 기독교(反)를 바울이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기독교의 특수주의와 ‘영’을 중심 개념으로 하는 바울 기독교 간의 갈등이 1세기 말부터 2,3세기에 걸쳐서 발달하는 초기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合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래서 F.C.Baur와 Tubingen 학파는 유대 기독교의 대표자를 베드로와 야고보, 즉 예루살렘 사도들로 보았고 바울과 베드로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설정하고 누가의 사도행전과 목회서신이 바로 유대 기독교적인 요소와 바울 기독교적인 ‘영’의 자유를 강조하는 헬라 기독교가 합일된 상태로 본다. 이것이 나중에 카톨릭 교회(보편교회)로 발전해서 고대교회,중세교회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의 사도행전과 목회서신 등의 신학을 소위 ‘초대 카톨릭 교회의 신학’이라고 한다. 요즈음도 불트만 학파에서는 ‘Early Chtholicism’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쓴다. 그래서 1960년대,1970년대에 신약신학에서 가장 격력하게 논의된 것이 누가의 신학이다. 누가 신학은 바울 신학의 ‘은혜와 믿음만’의 자유신학에 대한 배반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신학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계 추가 반대쪽으로 옮겨져서 누가 신학이 역사성 없이 순전히 헤겔적인 변증법적인 논리에 의해서 발전한 신학이 아니라고 하여 누가의 사도행전에 대한 명예회복이 많이 일어났다.

4.. LIBERALISM
Liberalism은 크게는 정통신학을 견지하지 않는 사람들을 전부 Liberalism이라고 하지만 신학역사에 있어서 Liberalism은 주로 19세기 후반 20세기 초(1차 대전 전:1914-1920)까지의 신학운동을 대개 Liberalism이라고 한다. 그들이 특징은 문명낙관론,인간성낙관론에 근거해서 일부 감정을 중요시하는 Romanticism과 부르조아(사회윤리)를 중요시하는 윤리주의 등이다. 그래서 이럴 때는 Liberalism이 좁게 쓰인다.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K.Holsten,H.Ludemann,O.Pfleiderer,H.J.Holtsmann 등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F.C.Baur와 마찬가지로 바울의 ‘영(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중ㅅ미으로 삼고 특히 그것을 헬라적인 사상적 배경에 의해서 해석을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그들이 제출한 중요한 문제는 바울에게 있어서 신비적-윤리적 체계 category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구원론은 두가지 전혀 서로 다른 category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1)법적체계(Juridical/Forensic system)→Justification δικαιοσυνη δικαιοω
법적체계는 영어로 Juridical 또는 Forensic system 이라고 한다. 바울의 이러한 구원론에서는 중생개념이 Justification읻.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 석방을 받는 것인데 죄인 에수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무죄 석방을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법적인 개념이다.
δικαιοω는 ‘의롭게 한다.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법정에서의 무죄석방을 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처럼 구원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expiation(속죄), propitation(화해)로 보아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에 대한 진노함을 풍어버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행위이다. 이런 구원론의 체계가 바울에게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바로 이것을 바울 신학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바울신학의 모든 다른 요소들이 전부 이 진리에 의해서 포용되고 해석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이 우이 죄에 대한 진노함을 풀어버린 대속의 제사인데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다.
구원의 덕은 무엇인가? 구원의 덕을 어떤 개념으로 어떤 카테고리로 해석하냔면 법정의 카테고리로서 우리에게 무죄석방이 선언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법정의 카테고리가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는 바울 신학의
구원론의 전부인줄 알았는데 신비적-윤리적(Mystical-Ethical)체계가 있다는 것이다.

(2) ꠆ꠏ
신비적-윤리적(Mystical-Ethical)체계 ꠐ with Christ (συν χριστω)
ꠌꠏin Christ(εν χριστω)
여기에서의 중심 개념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론의 체계가 바울에게 또한 있는데 이것이 신비적 체계이다. ‘신비’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데서 나왔는데 초월자와 연합한 것을 신비주의(Mysticism)라고 한다. 원래 Mysticism이라느 말에 종교사적인 정의는 바로 초월자와 연합을 꾀하는 사상을 가리킨다.
자유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법적체계의 구원론이 바울의 유대교적 배경에서 왔고 바울의 신비적-윤리적 구원론은 헬라적 배경에서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헬라 종교와 문화의 영향으로 이와 같은 구원론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면 우리의 영이 승리를 하고 그리하여 우리 자아가 진정한 사랑과 자유의 삶을 살고 윤리적 탈바꿈을 자져온다. 법적체계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었다. 우리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린 대속적 죽음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육신의 힘을 이기고 그리고 부활한 예수와 연합해서 그의 부활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두가지 체계가 연합되지 못하고 종합되지 못하고 긴장을 이루는 가운데 곤존했다는 것이다. 후에도 다루겠지만 지금까지도 바울의 구원론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이 두가지 체게가 따로 따로 나올대 바울의 구원론에 있어서 이 두 쳬계가 서로 독립되어서 혼합되거나 종합되지 못한 상태로 공존하는 것이냐? 아니면 이게 사실상은 한 구원론인데 이에 대한 두가지 다른 표현들이냐? 이것들이 게속 issue로 남아 있다.
자유주의 학자들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앞에서 말한대로 감정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낭만주의 시대의 사람들과 같다. 따라서 이들은 감정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며 심리학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방루 신학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하여 바울의 신학적인 언명들을 심리학적으로 점급하여 해석하려는 경향을 많이 보였다.
대표적으로 Holtzmann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다메식 도상에서의 체험을 객관화요, 설명이요, 일반화요, 체계화로 본다. 다메섹 체험 이전에 바울은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충시하려고 하면 할 수록 더 큰 죄인임을 깨닫는다. 바리새인 바울의 도덕적인 파산과 그것으로 인한 괴로움을 롬 7장에서 읽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 새로운 체험을 Holtzmann은심리학적으로 분석해서 바울의 기독론, 구원론 등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래서 Liveralism의 또 하나의 특징이 바로 바울신학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이다. 바울의 신앙 체험을 강조하고 이 신앙 체험을 심리학적으로 표횬함으로 객관화하고 체계화한 것이 바울신학이다. 이렇게 본 것이다. 그래서 말로 표현되고 설며되고 객관화되고 체게화된 이 신학적인 언명들을 이해하려면 그것들이 표현하는 바울의 신앙체험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을 심리학적인 접근방법으로 깨닫는다는 것이다.

5.W.Wrede
바울 연구에 있어서 분수령을 이루는 Wrede는 예수 연구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마가 복음에 소위 ‘메시야적 비밀’이라는 책을 써서 에수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하고 그리고 복음서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사람이다.
그런데 그이 조그만책 Paulus(1904)에서 Wrede는 Holtzmann에 의해서 대표되는 19세기 바울 해석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바울신학은 바울 개인의 종교적인 체험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사,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바울신학이 중심이다.
또한 Wrede는 바울신학은 헬라사상에 비추어 해석될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유대교적인 전제에 의해서 펼쳐진 것이기 때문에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의거해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의 주장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바울의 기독론은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바울시대에 널리 있었던 신화적인 구원자 신화를 나사렛 예수에게 뒤집어 씌움으로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기독론과 구원론에 근거하는 교회의 신앙고백이 주로 바울의 기독론에 근거하는 한 우리 기독교의 진정한 창시자는 예수가 아니고 바울이라고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생기는 유명한 문제-물론 그전 Liberalism부터 나왔지만 ,이 Wrede에 의해서 더 아주 예리하게 다루어지는 문제가 바울과 예수 였는데 그 순서조차 ‘Paul & Jesus’ 쓴다.(‘예수와 바울’로 쓰는 것이 아니고 ‘바울과 예수’로 쓴다). 바울이 예수를 선포함에 있어서 그 당시의 역사적인 예수와는 별 관계가 없이 당시 유행하던 구원자 신화를 예수께 적용함으로서 이 기독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한 Wrede의 조그만한 책이 바울 연구사의 중요한 이유는 이렇다. Liberalism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두 가지 구원론인 상이한 체계를 발견하는데에 그치지만 Wrede에 의하면 바울의 구원론의 본질은 법적인 체계이고 따라서 Justification의 카테고리는 바울 신학의 본질적인 일도 아니고 갈라디아나 로마나 빌립보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임기웅변으로 어쩌면 심지어 기회주의적으로 개발한 전투무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Kamfeslehre(Kamp의 싸움)이라고 한다. 즉 싸움을 하기 위해서 개발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바울 신학의 중심부분도 본질적인 부분도 아니라고 말한다. 종교개혁자들은 Justification을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보았는데 Wrede쯤에 와서는 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울 신학의 본질이 아니고 이것은 유대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개발한 것인데 그것이 마치 바울 신학의 중심인 것 같이 오해됐다는 것이다.
이미 바울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issue들이 우리에게 제기되었다.
역사적인 예수와 바울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것도 바울 연구의 아주 중요한 issue이다. 신약신학 1같으면 이것을 아주 많이 강조한다. 역사적인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래서 어떻게 바울의 신앙고백과 선포(케리그마)가 발생했나? 여기에서 그런 신학자들이 주장한바 처럼 무슨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오묘한 연결을 했고 승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바울신학의 구원론에 있어서 무엇이 제기됐는가? 구원론에 있어서 이런 다양한 카테고리(체계) 이것도 바울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issue이다.
또한 무슨 문장을 이루고 있는가? 도대체 이 칭의론이 바울 복음의 본질이냐? 즉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했고 우리가 정통 개신교가 고백해온대로 칭의론이 바울의 구원론의 본질이고 중심이냐? 아니면 이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유대주의자들과 싸우는 그 상황에서 잠깐 개발된 것에 불과하냐? 이런 것도 중요한 issue이다.
또한 바울신학의 중요한 issue는 바울의 사상적 배경이 유대교냐? 아니면 헬라사상이냐? 하는 이런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이처럼 바울 연구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는 이유는 바울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issue(요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요점들을 머리 속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6.종교사학파(Religios Deschichtlichie Schule/Religion Historical School)
19세기 말부터 성경의 여러 사상들과 제도들 또는 개념들을 지중해 연안의 세계, 또는 근동 세계의 고대 종교들과 비교하여 연구하는 운동이 발생한다. 이런 운동을 하는 학파를 종교사학파(옛날 문서들에서는 ‘비교 종교학’이라고도 하는데 오새는 잘 안 쓴다.)라고 한다.
그래서 세례와 성만찬을 신비 종교들에 있었던 유사한 행위들과 비교하여 연구하는데 이 학파의 초기에 있었던 사람들은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롬6장은 헬라 세계의 신비종교들이 자연신(isis,osiris,mithra)들과 같은 것으로 본다. 자연이 어떤가? 봄에 생명이 싹터 가지고 여름에는 무성하고 가을에는 말라 비틀어지고 겨울에는 다 죽어 버린다. 그 다음에 또다시 봄에 생명현상이 솟는다. 이러한 죽고 다시 살아남 즉 죽고 삶의 cycle이 자연현상인데 자연 현상 뒤에 이와 같은 신들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신들이 바로 스스로 죽고 부활하는 신들로 보았다. 그래서 이런 신들과 연합을 하면 병합을 하면 이 신들과 함께 죽고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들과 연합하는 의식하는 것이 바울 교회의 세례 의식과 비슷하고 또한 신들과 지탱하는 수단이 신들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내용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성만찬과 비슷하다. 그래서 바울의 세례에 대한 가르침이라든지 성만찬 가르침은 이러한 신들을 섬겼던 신비종교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것이다. 역사적인 예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원래 유대교적 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와도 관계가 없고 바울이 헬라 신비종교들에서 빌려 가지고 온것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도 다 이런 것에서 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가 W.Busset이다.
W.Busset의 유명한 책 ‘Kyrion Christos(1921)라는 책에서 부셑은 일단 W.Heitmuller가 제시한 두 교회론을 이어 받아서 말한다. W.Hertmuller의 두 교회론은 예루살렘 또는 팔레스타인에서의 베드로,요한,야고보 등을 중심으로하는 유대 기독교가 있었고 또한 헬라 기독교가 있었는데 바울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Jewish Christianity에서는 아직도 율법과 유대교의 언약 사상(선민사상), 유대교의 특수주의(특별히 선택된 백성, 즉 유대주의)가 있었고 Hellenistic Christianity에 있어서는 헬라 종교(신비종교)의 영향 아래 전혀 새로운 기독교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W.Heitmuller의 두 교회론을 받아들여서 그 위에다가 그것을 설명했다.
그는 설명하길 팔레스틴에 있는 유대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가 ‘곧 올 인자’ 즉 곧 돌아올, 재림할 인자-‘그 사람이 아들’로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신앙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이 그들이 신앙의 중심이 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인자-그 사람의 아들로서,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와서 그의 심판하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이것이 그당시의 유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바울을 거두고 하는 Hellenistic Christianity에서는 예수가 지금 현재 ‘영’으로 그의 예배자들 가운데 임재하는 ‘주’로서 예배의 대상이 되고 지금 현재 그를 신봉하는 자들이 그와의 신비적인 하나됨을 체험해서 구원을 입는다는 것을 신앙이 중심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osiris,isis,mithra 등과 같은 헬라의 신비종교 영향 아래 발달한 새로운 신학이며 새로운 기독교로서 바로 이 헬라 신비종교에서 이러한 여신들이 ‘주’라고 불림을 받았기에 예수도 ‘주’라고 신앙고백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Bousset의 이론에 의하면 초대의 요대 기독교 교회에서는 예수를 예배하지 않았고 다만 예수를 재림하는 인자로 기다릴 따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Hellenistic Christianity에 와서야 비로소 예수를 예배하게 되고 예수가 예배의 대상으로 신격화되었으며 지금 성령으로 예배자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분으로서 그와의 영적인 하나됨을 체험케 하는 분으로 이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Bousset의 기독론, 또는 신학에 의하면 ‘예수가 주다’‘예수가 하나님이 아들이다’하는 신학은 모두 전적으로 Hellenistic Christianity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현재의 구원을 강조하는 구원론은 다 여기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W.Bousset와 쌍벽을 이루는 종교사학파의 대표자는 바로 R.Reitzenstein이다. 그는 ‘Corpus Hermeticum(Hermet:목차)’라는 하나의 문서와 헬라의 신비종교들 그리고 이란의 종교들을 연구하였다. 근동 세계와 지중해 세계에 보편적으로 태초의 인간에 대한 신화(Urmensch Myth/Ur;태초,처음,Mensch;사람/Primal Man Myth)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인도로부터 시작하여 지중해 서안까지에 이르는 방대한 중동지역의 고대에 ‘최초의 인간에 대한 신화’가 있었다고 한다. 신화가 약간 변형되어서 인도 종교들에도 나타나고 이란 종교들과 바벨로니아 종교에도 나타나며 에집트의 종교들에서도 다 나타나는데 헬라 종교에도 나타나고 히브리 사람의 종교에도 나타난다. 그래서 창세기의 아담도 사실은 이 중동에 널리 퍼져 있는 태초의 인간에 대한 신화의 한 견해(책)라고 주장했고 이것이 헬라 세계에서는 어떻게 신화로 발전하느냐 하면 헬라의 존재론적인 이원론, 즉 Idea의 세계에 속한 본질(Essence)의 세계, 또는 빛(light)의 세계 또는 영원의 세계에 속한 우리 인간의 영혼(Soul)이 물질의 세계 이 밑의 세상, 우리의 몸(matter body), 이것은 시간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에 변화의 노예가 되어서 낳고 ,눕고,병들고,죽는다. Body가 사망에 갇혔다. 그라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몸 속에 갇힌 영혼이 Idea의 세계라는 본향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Idea의 세계에 속한 영혼이 태초의 몸 속에 들어가 타락을 하였고 다시 Idea의 세계에 복귀해서 구원을 입는 것과 같은 헬라적인 인간관,구원관을 객관화한 것이 태초인간 신화라고 보았다. 그래서 Reitzentein에 의하면 태초 인간이 light의 존재였는데 암흑의 존재와 싸워가지고 져서 그의 몸이 산산조각이 났는데 바로 그 빛의 조각(태초인간)들이 우리 인간들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조각을 많이 받아가지고 철학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조각이 하도 적어가지고 그 본향의 세계에 대해 완전히 망각한 가운데 있다가 결국, 물질주의(육신주의)적인 세상의 종국이 일어나고 이런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IDEA,LIGHT,ESSENCE
SOUL 영원
ꠐ ↑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
↓ ꠐ
MATTER(BODY) 시간
그런데 Ur-Mensch가 다시 나타나서 자기 몸 조각을 받은 인간들의 영혼들을 일깨웠는데 암호를 만들어서 그 암호로 일깨웠다는 것이다. 군대에서 암호로 암호하면 자기편으로 알아 듣는다. 이처럼 Ur-Mensch가 와서 인간들에게 암호를 말하면 그 말을 알아 듣는 사람은 자기의 몸 조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빛의 조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을 다시 이끌로 하늘 나라의 세계(Idea)로 복귀한다. 그런데 그 암호가 바로 비밀지식이다. 이렇게 해서 Ur-Mensch Myth가 바로 영지주의(Gnosticism)로 바뀌어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 지식이 Ur-Mensch의 암호이고,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영혼이 본질의 세계로 빛의 세계로 복귀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보았다. 이처럼 인간 영혼이 물질의 결합으로 타락함과 그것으로 복귀함이 구원이라는 전형적인 헬라적 인간관과 구원관을 객관화하고 극화한 것이 Ur-Mensch라는 것이다 .
그런데 Reitzenein은바로 이와 같은 영지주의적인 ‘태초의 인간에 대한 신화’를 바울이 예수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 관계없이 예수에게 이 신화를 뒤집어 씌워서 바울의 기독론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기독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인가? 빌2:1-12을 보면 원래 예수가 하나님으로서 본체가 하나님과 같은 분이다. 그렇지만 그 동등함을 취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바라는대로 부활했다. 에수가 이렇게 하나님 처럼 하나님의 아들로서 물질의 세상으로 들어와서 암흑의 세상에 죽음을 체험을 맛보고 그러나 다시 부활하여 복귀하는 이 드라마(극화)인 빌2:1-12은 Rietzenstein에 의하면 사실은 바울이 역사적 예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헬라 세계에 태초인간에 대한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아주 정교하게 만들고 바울 신학에 있어서 그 근본으로 삼은 사람이 바로 불트만이다.
그래서 1950-60년대 주로 이것에 대한 논쟁이 아주 격렬하였다. 진자 바울신학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냐? 바울의 기독론이 영지주의의 신화의 역사화냐?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움으로 역사화한 것에 지나지 않느냐? 바울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도 바울의 아담, 기독론, 또 바울이 교회를 하나님의 몸이라고 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에 있어서 Reitzenstein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 학파는 이것들 모두가 영지주의에서 왔다고 한다. 진짜 그러는가에 대한 토론이 1950-1960년대에 걸쳐 70년대 중반까지 격력하게 논의되었다. 이것은 바울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issue가 아닐 수 없다.

바울신학 제2강
7.종말론적인 해석
종말론적 해석의 창시자는 W.Wrede인데 이를 발전 시킨 사람이 A.Schweitzer이다. 아프리카에 의료 선교사로 간 그는 원래 신학자였다. 젊은 나이(30대 초)로 스트라스부르그 신약한 교수였다. 기숙사이면서 동시에 신학교육도 일부 시키는 대학에 소속된 곳의 長이기도 하였다. 그는 ‘에수전 연구(라이마루스에게)’라는 유명한 책을 통해서 예수 연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었는데 바울 운역에 있어서도 두권의 책으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다. Geschichte Paulus Forschurg(바울 연구의 역사 1912)와 Die Mystik des Paulus(사도바울의 신비주의,1931)라는 책이 그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마치 20시기의 대표적인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안다. 오히려 그는 인본주의자였다. 그는 그의 의과대학 논문 ‘예수의 정신 상태’에서 예수가 조금 미쳤다고 봤다.
그는 주장하길 임박한 종말-하나님 나라가 금방 임박할 것으로 예수가 알았다. 예수가 가지 제자들을 갈리리 여러동네에 보내어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으니 빨리 회개하라는 선포를 하라고 내보내고 나서는 그 제자들이 자기에게 돌아오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주로 알았는데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지도 않았고 이스라엘이 회개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안되겟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연결해야겠다고 여기고 회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대결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부름 받아서 온 자기를 그들이 잡아 죽이면 하나님은 하는 수 없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심판을 하시고 하나님 나라는 도래하지 않겠나 하는 판단으로 절망적 상황가운데 유대 지도자들과 대결하여 죽음을 자초했다. 이렇게 함으로해서 하나님이 패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으로 기대했는데 불행히도 하나님 나라는 도래하지도 않고 역사는 쉬지도 않았으며 그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가버렸다. 결국 불행하게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돌아버린 역사의 수레바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출려고 수레바퀴를 꽉 붙들고 있는 예수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찢어 놓았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역사적 예수의 추구(라이마루스에게)’라는 책의 결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론에서는 갈릴리의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우릴 부른다고 신비스럽게 써 놓고 있다. 그리고는 자기가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에서 신약교수로 있을 때 하루는 자기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어느 주일날 예배갔다 와보니까 자기 책상 위에 아프리카 내지 선교를 하는 개신교 선교단체(파리에 본부가 있는)의 자료가 있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부르심으로 알고 교수직을 팽개치고 선교사 의사고 가야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갈릴리 예수의 나를 따르라는 목소리를 자기가 듣는 듯한 감을 느겼다고 한다. 그래서 선교사가 되기고 하고 선교단체에 지원을 했다. 그런데 선교단체에서는 이런 Liberal 중의 Liberal, 이런 이단자를 선교사로 보낼리가 없다. 이것을 미리 알고는 선교단체의 이사회가 열리기 전에 이사들을 한 사람씩 찾아다니면서 ‘내가 가서 절대 신학자나 목사 행세는 하지 않고 오로지 의사 노릇만 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설득한다. 이렇게 해서 선교사가 아닌 의사로 파견받기로 결의를 받는다. 그때부터 의학공부를 한다. 스트라스부르그 신학교수를 하면서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의사 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그는 이미 Bach 연구의 대가로서 특히 커다란 Organ(파이프 올겐)의 건축 기법에도 정통해서 그에 관한 책을 쓸 정도였다고 하며 또한 연주의 대가이기도 했다. 이렇게 재주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의사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의 졸업논문이 ‘예수의 정신 상태’라는 제목이었다.
그후 그는 아프리카에 가서 일체 목사 행세를 하지 않고 의사만 한다. 하루는 아프리카 교회에 문제가 발생해서 선교사들과 흑인 본토박이 목사들이 논쟁을 벌였는데 참석자들끼리 서로 이야기하다가 선교사 하나가 그럼 우리 Dr.슈바이처의 의견을 들어 보자고 제안하자 한 흑인 목사가 하는 말이 그 사람은 우리처럼 신학자가 아니니까 그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그의 일기책에서). 이정도로 그는 자기가 신학자,목사라는 감추기로 합의한대로 자기의 신분을 감추었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 전통적인 개념의 선교사는 아니었다. 그런데 신학을 초보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신앙인으로 보는데 그는 비록 위대한 신학자이긴 하였어도 신앙은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신학자였다. 그는 현대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들을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당시까지 제기된 여러 해결책의 옳지 않음을 아주 예리하게 파헤친 사람이었다(예수 연구나 바울 연구에서) 그런 점에서 신약학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유명한 신학자였다.
그는 종교사학파가 바울 신학을 헬라 종교사적인 배경에 비추어서 해석하려고 하는 것에 반대하여 철저하게 유대교, 유대 묵시사상에 비추어 해석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A.Schweitzer, W.Wrede,J.Weiss 등을 가리켜 ‘철저 종말론 학파(Konsequente Eschatologie Schule;Thorough going eschatological school) 라고 한다. 곧 임받한 종말의 사상적 배경-종말이 임박하다는 유대 묵시 문학적 배경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도, 바울 신학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서 슈바이처에 의하면 신비주의라고 한다. 그리스도와(with)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in)있게 된다는 이 사상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Christ-mysticism꠆ꠏwith Christ(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ꠌꠏin Christ(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신학의 중심은 그리스도-신비주의(Christ-mysticism)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가?
(1)임박한 종말-예수의 가르침.
예수는 종말이 임박했다고 가르쳤다.
(2)예수의 죽음과 부활:종말의 실현
그런데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 종말이 실현됐다고 봤다.
(3)종말의 미완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바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읻. 종말의 미완성이다. 온 세상 모두가 심판받고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그런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였다. 예수는 종말이 임박하다고 가르쳤으며 초대 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종말이 실현됐다고 가르쳤는데 객관적인 사실로는 죽은 자들이 부활한 것도 아니고 세상이 심판을 받아서 역사는 끝나고 새하늘과 새땅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바울에게 그리고 초대 교회에 있어서 문제였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한편 종말이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 종말의 완성이 아직도 미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해결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결했느냐?
(4)Paul-already-but not yet:→메시야 왕국→Kingdom of God
벌써(already) 종말이 실현됐다는 것과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but not yet) 는 갈등, 긴장 관계를 바울이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 메시야 왕국이 있을 것을 천명함으로써 곧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와는 별개로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 이전에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메시야 왕국이 있을 것을 강조함으로써 해결했는데 이것은 주로 묵시문학에서 특히 바룩서와 제4에스라서의 종말론적 사상에서 바울이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메시야 시대, 하나님 나라 시대 전에 메시야 왕국이 있다는 것을 빌려 가지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세상이 심판받고 새하늘과 새 땅이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디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메시야 왕국이 지금 벌써 수립되었다는 식으로 바울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메시야 왕국이 시작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5)꠆ꠏ세례-with Christ(union)-죽고 부활
ꠌꠏ성만찬-in Christ-Christ mysticism→justicism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경험을 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하나되어;롬6장)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또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 체험을 날로 새롭게 한다.
(6)새 하늘과 새 땅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곧 메시야적 왕국의 끝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고 그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종결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하나님 나라의 도래)이다. 이때에 모든 사람들의 부활, 보편적 부활이 있다. 그래서 슈바이쳐에 의하면 바울은 두 부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믿음 가운데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짜 종말-예수의 재림때 이루어질 보편적 부활로서 이중 부활 교리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신학의 핵심은 우리가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게 옛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앞에 이야기한대로 Christ-Mysticism(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그리스도-신비주의)이라고 말한다. 이 Christ-Mysticism이 바울 사상의 중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이뤄졌냐면 유대교 묵시문학적 종말론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지난 강의에서 종교사학파의 주장은 mysticism이 헬라 종교사, 헬라 신비종교의 배경에서 왔다고 그랬는데 슈바이쳐에 의하면 유대묵시문학적 배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슈바치여는 주장하길 이것은 바울이 또 하나의 구원론의 범주인 Justification(칭의,의롭다함;은혜로,믿음으로 의인됨)의 사상과 별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자유주의자는 바울의 구원론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두가지 범주들, 즉 신비주의적 카테고리(Mysterical category;성례적 범주)와 법률적 범주(juridical category;이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법정의 언어로 표현한 것)로 해석되어 있다고 했고 종교 개혁자들은 법률적 범주가 바울 신학의 근본이라고 하였는데 슈바치쳐는 Christ-Mysticism이 근본이라고 한다. 그의 표현대로는 신비적 범주가 화산의 주분화구이고 법률적 범주는 이 분화구의 언저리에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분화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신비적 범주가 중심이고 법률적 범주는 신비적 범주에 곁들여 있는 부속물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바울이 왜 법률적 범주를 자랑했느냐 하면 법률적 범주는 바울 전의 교회에서 자기에게 전승된 것인데 바울이 갈라디아와 로마에서 유대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법률적 범주를 강조하다보니까 오늘의 바울 서신들에는 마치 법률적 범주가 바울 신학의 중심인것 같이 보이는데 사실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 주분화구이고 법률적 범주는 종속된 조그만 분화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처럼 법률적 범주는 바울에 있어서 중심을 이루지 못한다고 주장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러한 슈바이쳐의 결론의 영향이 계속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신학에 있어서 신비적 연합, 즉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삶에 동참한다는 구원론이 바울신학의 중심이고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했던 칭의의 교리는 겨우 바울신학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슈바이쳐가 이렇게 결정한 이유들 중에 하나는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을 보면 전부 신비적 연합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사람을 입으라, 그리스도를 덧입으라. 옛 아담적인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덧입으라. 윤리적인 가르침이 전부 신비적 연합의 범주에 근거를 두고 있다. 법률적 범주로부터는 윤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으로 선언이 되어버렸는데 더 의로와질 것이 뭐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그래서 롬6:1에 보면 그 전까지의 내용에서 바울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열심히 설명한다. 그러다가 곧장 냉소주의적인 질문에 부딪히게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면 죄를 더 저지르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 커질 것이 아닌가? 소위 방종주의를 낳게 된다. 모든 법적인 절제를 다 떨쳐버리고 우리 마음대로 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더 커질 것이 아니냐 는 식으로 이른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럴 수 없없느니라 그런말도 안되는 소리 마라’ 그리고는 설명하기를 신비적 연합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설명한다.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옛사람은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으로 부활했는데 어떻게 그런 엉뚱한 소릴 하느냐고 바울이 설명한다. 여기에 근거하여 슈바이쳐는 주장하길 여기서 법률적 카테고리로는 윤리를 뒷받침할 수 없으니까 윤리를 논할 때는 어느새 바뀐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의 진정한 중심은 신비적 연합이고 법률적 카테고리는 Kampferlehre(싸움의 가르침,논쟁적 가르침)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논쟁ㅎ기 위해서 법률적 카테고리로 가르쳤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가 바울 신학을 함에 있어서 큰 문제 하나가 진짜신비적 카테고리와 법률적 카테고리가 별개의 것이냐? 이렇게 연결되지 못한 것이냐? 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 슈바이쳐가 주장한 것같이 신비적 연합이냐? 아니면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법률적 카테고리냐? 또는 요사이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어떤 다른 것이냐? 도대체 바울신학의 중심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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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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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며 도대체 중심이란게 없는 것인가? 즉 바울신학에 중심이 있어서 모든 주제들이 다 중심으로 연결된 일관성이 있는 것이냐 아니면 바울 신학이 논리적 일관성도 없고 기회주의적으로 저때는 저런 가르침, 이때는 이런 가르침을 그때 그때 조각조각 만들어서 통일되지도 못한 상태로 있느냐? 하는 이런 문제들이 우리가 바울신학을 함녀서 항상 해결하려고 노력해야할 문제들이다. 슈바이쳐의 이 철저 종말론적인 바울 해석은 종교사학파들의 헬라주의적 배경에 의해서만 바울신학을 해석하려는 것에 대한 중대한 교정임에 틀림없다. 바울신학에 있어서 유대교적 배경 특히 묵시문학적 배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 주는데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슈바이쳐의 바울 해석도 무리가 많고 문제가 많다. 그 문제점을들 보면
(1)유대 묵시문학,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을 마치 통일된 것으로 단순화하여 설정해서 바울신학의 배경으로 삼은 것이 벌써 문제가 되고,
(2)바울 서신들의 자료들을 자기 사상에 맞는 것만 골라쓰는 해석방법도 문제가 되며
(3)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을 너무 물질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4)궁극적으로 예수와 바울의 종말론이 사실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5)우리가 나중에 토론하겠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상과 은헤로,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두 사상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사실은 이게 기가막히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8.불트만 학파(R.Bultmann)
R.Bultmann의 ‘바울 연구’를 보려면 그의 신약신학(허혁 열)을 보면 된다. R.Bultmann의 바울 신학은 많은 오류에도 불구하고 통찰력들이 많다. 배울 것이 많다. 불트만도 몇조각의 좋은 진리를 발견한다. 그게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불트만이 발견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불트만은 신학적으로 말하면 Kant같은 자이다. Kant를가리켜 모든 철학의 커다란 저수지라고 한다. 모든 철학적인 경향이 칸트에와서 다 종합되었다고 해서 칸트를 저수지같은 자라고 한다.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여러가지 토론한 신학적인 경향들이 불트만에 와서 통합된 위대한 종합을 이루는 저수지와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서 다시 여러 다양한 신학자들이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불트만 이전의 다양한 바울 해석의 경향들이 전부 불트만에게 큰 영향을 주어서 그러한 것들이 불트만에게서 모두 나타난다.
(1)Lutheran 신학의 영향
루터신학이 큰 작용을 한다. 루터신학의 유산이 불트만에게 중심을 이룬다. 특히 불트만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조, 불트만의 말로 하자면 선포의 신학을 강조한다. 루터의 하나님 말씀의 강조에 근거한다.
그리고 루터 신학의 유산인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 신학의 강조가 불트만에게서 강력히 나타난다. 물론 정통 루터파나 정통 개신교도들이 입장에서 보면 불투만이 이걸 다 재해석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불트만에게 물어보면 루터를 제일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것은 따져봐야 할 것이다. 가령 엘랑켄 대학의 정통파 루터교의 대표인 보수주의자 K.Kunneth는 불트만이 루터를 완전히 재해석할 뿐 아니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불트만은 W.Kunneth가 잘못했고 자기가 더 맞다고 할 것이다.
(2)종교사학파의 영향
종교사학파의 영향이 또한 불트만에게 지대하다.
불트만 스스로가 자기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들중 하나를 지난 신간에 이야기했던 W.Bousset의 κυριος χριστος 를 꼽는다. 그래서 그는 종교사학파의 영향으로 인해 바울의 헬라적 배경을 아주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바울이 헬라 교회의 케리그마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못을 박고 바울은 헬라 교회에 속한 사람으로 헬라 교회의 신학적 대표라고 한다. 그러므로 헬라 종교사적 배경 아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의 선생은 W.Hertmuller이었는데 그는 W.Bousset과느 거의 동시대 사람(불트만보다 조금 더 올라감)이고 W.Bousset이 W.Heitmuller의 사상을 전개시켰다. 여기서 두 교회를 분리한다.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를 분리하는 사상을 처음으로 W.Heitmuller가 제시했는데 그것을 W.Bousset이 발전키셨다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다.
유대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은 예수가 바로 재림할 ‘그 사람의 아들’로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도 헬라 기독교는 지금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는 운명에 동참해서 구원받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를 구분해서 전혀 다른 두개의 종교가 되어 버렸다고 했다. 그것을 불트만이 이어받는다.
뿐만 아니라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종교사학파의 대표, 라이쯘 스타인의 영향으로 영지주의, 그중에서도 구원자신화를 매우 강조한다. 그래서 종교사학파의 영향이 불트만에게 계속 나타난다.
(3)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관념론의 영향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관념론이 그에게 양형을 주어서 그는 바울에게 있어서 바울 신학의 중심은 인간론이라 한다. 인간의 존재, 인간의 실존, 인간론은 변하지 않는 거이고 다만 인간의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인간의 자기 이해를 알도록 시대에 따라 다양한 언어 수단으로 표시한다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의 관념론의 영향을 받았다.
(4)슈바이쳐의 영향
슈바이처식의 철젛나 종말론이 영향을 끼쳐서 불트만도 종말론에 대한 강조가 강하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이란 슈바이쳐식의 철저한 종말론, 즉 시간적으로 미래의 종말론이 아니라 실존으로 재해석된 지금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판을 받고 시간적으로 종말에 일어난다고 하는 객관화된 종말론이 아니다.
이 시간의 끝,예를 들어 서기 2500년에 종말이 있는 것, 가령 2500년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과 구원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을 시간적인 종말론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면을 하고 우리의 죄적인 실존에 대한 심판,불트만의 실존주의적 용어로 하면 우리의 가짜 실존에 대한 심판을 바독 새로벡 진짜 값있는 실존을 하도록 하는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구원이 지금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이고 재해석한다 .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불트만 이전의 신학적인 경향들이 불트만에게서 전부 영햐을 발휘해서 불트만이 모두 종합을 한다. 그의 새로운 다이맨손(차원;demension)이라 한다면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철학을 도구로써서 바울을 해석하려고 한데 있다. 이것이 아마 불트만이 새로운 공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불트만의 신학이 강조점을 몇가지 줄쳐본다.
(1)첫째로 인간론 중심이다. 불트만의 신약신학 p191에서 하나의 원칙을 천명한다. 아주 자주 인용되는 중요한 원칙이다. 바울의 신론은 동시에 인간론이고 그 역도 옳다. 인간론은 동시에 신론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어떠한 언명도 동시에 인간에 대한 언명이고 그 역도 참이며 사실이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하든지 그것은 동시에 인간에 댛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바울의 기독론은 동시에 바울의 구원론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신약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여러가지를 말하는데 스콜라의 철학이나 신학에서 말하는 하나님 자체에 대해 반영하지 않는다. 하난미에 대해서 신약성경에서 말할 때는 항상 우리의 창조주 우리의 구원자 우리의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한다. 항상 인간에 관곗하시는 그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에게 은혜 베푸시고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신론은 동시에 인간론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한 존재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요구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해서 살지 않으면 안되는 존재로 본다. 바울이 인간에 대해 말한다면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어떻게 생겼다는 식으로 스콜라 철학이나 스콜라 신학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가령 거룩하다고 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전능하다고 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의 신론은 동시에 인간론이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가 교회 신학에서와 같이 신성과 인성을 가졌느냐 하는 이런 것을 추상적으로 토론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천명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계시를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말할 때는 또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대표를 통해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킨다. 하여간 인간의 대표로서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래서 바울의 기독론은 가령 그리스도의 신성, 인성 이런 것을 추상적으로 토론하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그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권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기독론은 동시에 구원론이며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의 신약신학을 읽어보면 바울의 신학을 인간론 중심으로 전개하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제1부는 믿음이 오기 전의 인간, 제 2부는 믿음 아래의 인간, 이렇게 나누어서 바울의 신학을 요약하고 체계화 한다.
①제1부, 믿음이 오기 전의 인간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세상에 있게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를 진죄인인가 드을 다룬다. 그래서 세상,죄,율법,인간의 육신,몸 등을 다룬다.
②제2부 믿음 아래서의 인간
믿음이 무엇인가? 구원은 무엇인가? 은혜가 무엇인가?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 함을 받은 인간,이런 것을 토론한다.
이처럼 철저한 인간론 중심으로 바울 신학을 요약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19세기식 자유주의의 관념론을 이어받아서 궁극적으로 인간의 실존의 변하지 않는 중심이고 다른 것들, 즉 신학이라든지, 기독론이라든지 구원론이라든지 하는 것들을 인간이 자기 이해를 표현하기 위한 다양하 언어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 이해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그것을 여러가지 시대시대의 다양한 언어,숙어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에게 있어서 신학의 과제는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된 본질적인 문제, 인간의 자기이해를 해석하여 터득하는 것이 바울신학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2)또한 불트만 신학의 강조점 하나가 영지주의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 전 헬라 교회나 바울 자신도 당시의 헬라 세계의 영지주의 사상과 영지주의 개념들을 잔뜩 이용해서 가독교적 실존의 이해를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불트만의 신약신학 책에 바울전의 헬라 기독교 바울 신학을 토론하기 직전에 ‘영지주의’라는 section이 있는데 읽어보라 불트만 신학을 이애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받는다. 불트만에 의하면 영지주의의 근본 본질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인간의 진정한 자아-그것을 헬라말로 표현하면 인간의 영혼이다. -영혼의 감옥이며 타향이다. 그러면 인간의 진정한 자아인 영혼의 고향은 바로 Idea의 세게, 영원의 세계이다. 그런데 시간의 세계인 이 세상, 물질과 시간의 세계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의 타향이고 감옥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속에 인간의 진정한 자아가 여러 악령들에 의해서 감옥에 갇혀 있어서 대다수의 영혼들이 자기 본향을 망각하고 이 세상이 진짜 자기들 삶의 무대이며 본향이고 자신이 마땅히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전부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물질 세계이고 시간세계이며 암흑의 세례로서 본질의 세계가 아니고 본질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본질,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모조품인데 다만 실제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 현상의 세계(phenomena) 현상, 곧 본질의 나타남이 모조품에 굴과한데 우리에게 마치 이 것이 본질처럼 보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환상의 세계,가짜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의 영호이 가짜 세계인 이세상에 갇혀 있어서 이 세상이 가치들이 가짜이며 사실은 환상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것같이 영생이나 구원을 줄 것같이 우릴 속이며 우리가 그렇게 환상을 한다. 그래서 그것을 추구하려고 발버둥 친다. 돈,권력, 이세상의 지식, 명예같은 것들은 사실상 시간의 세계에 변화의 세계에 속해서 썩어 없어져 버린다. 잠깐 있다 없어지며 본질적인 것이 못된다. 영원성도 없다. 그래서 reality가 없다. 그러니까 그런 가치들을 우리가 얻었다 한들 사실은 우리가 행복하지도 않고 이것들이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 가짜 세상 속에서 이런 세상의 가치들이 진짜 좋은 것으로 보이고 우리에게 행복을 주며 영원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혼은 세상이 이런 가짜 모조품의 환상에 갇혀 있는 한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 시간의 세계와 함께 썩어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에서의 구원은 영혼(진정한 자아)이 ‘자기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니고 영원의 세계, 본질의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즉 본향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 세상이 가짜임을 알게 되어서 이 세상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와져서 영원한 가치(영원의 세계)에로 복귀하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Essence(본질의 세계)
Reality(실제의 세계) 영원--자기 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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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세계 ꠆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모조품 ꠐ 세상 ꠐ←영혼(인간의 진정한 자아)
Phenomena(현상의 세계) ꠐ감옥,타향,변화ꠐ 지식(구원자 신화)
llusion ꠐ 물질,시간 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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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덯게 그렇게 아느냐? 지식을 얻는다. 그 지식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본질의 세계에 속한 것이며 이 세상은 가짜라는 것,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것 ,혹은 가짗들이 덧없는 것이고 가짜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적, 헬라적인 이원론이다. 이것이 동방의 이원론과 섞여서 만들어진 것이영지주의인데 이것이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이 영지줒의는 ‘구원자 시노히’로 객관화되고 극화했다고 한다. 어떻게 객관화하고 극화했느냐면 영혼을 ‘태초의 인간(primal man,ανθρωπος,Ur-mensch)이 암흑의 세계와 싸워가지고 져서 세상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것이 타락이다. 굴러 떨어질때 태초 인가은 영원희 세게, 본질의 세계, 빛의 세게에 속한 자로서 빛으로 된 자이다. 그런데 이 자가 떨어져서 몸이 산산조각이 났고 바로 이 조각들이 영지주의 인간들의 영혼, 빛의 조각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자들은 큰 조각을 받았고 어떤 자들은 작은 조각을 받앟다. 어떤 자들은 하나도 못받았다. 그래서 영지주의에서는 인간을 3등급 또는 4등급으로 나눈다. 그래서 영지주의적인 인간,즉 빛의 조각을 많이 받은 자를 영적 존재라고 한다. 조금 받은 자는 혼적 존재, 아예 못받은 자는 땅 흙의 존재로서 구원의 여지가 없다. 영지주의 인간만이 그 영혼에 아직 본향에 대한 지식이 가물가물 살아 있다. 그 가물가물 살아 있는 상태를 가리켜서 잠자는 상태로 있다고 한다. 본향에 대한 지식이 영지주의 인간의 영혼속에 잠자는 상태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이 ανθρωπος(불트만의 영지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자들은 바로 이부분에서 공격함)-영지주의의 ανθρωπος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암호를 발한다. 암호를 발하면 자기 편만 알알듣고 자기 편만 모인다. 그러니까 ανθρωπος기 암호를 발하면 자기 몸 조각을 받아서 하늘의 세계-본향에 대한 의식이 아직도 잠자는 상태로 있는 가물가물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만 알아 듣고 모인다. 이렇게 해서 몸을 이룬다. 그래 가지고 자기 조각들의 몸을 이루어서 이들은 하늘로 올라간다. 이 세상을 벗어나서 하늘로 복귀함이 곧 구원인데 이에 필요한 암호는 바로 비밀지식이다. 그것이 영지주의자들의 지식이다. 그래서 영지주의 종교에 들어여면 이 비밀의 지식을 가르쳐 준다. 이 비밀의 지식에 의해서 모여든 자들만을 ανθρωπος가 하늘로 인도한다. 그러니까 이 ανθρωπος가 믿음의 개척자이며 믿음의 구원의 완성자라는 말이다. 이 말이 히브리서에 나온다.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케제만 같은 자는 히브리서의기독론도 이런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그림을 볼때 생각나는 것은 또한 빌립보서의 찬송시 같은 것이다(빌2:6-11). 그리스도의 본체가 하나님의 동일 본체시나 세상에 낮아져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여 낮아졌는데 하나님이 높이셨다. 요한복음의 기독론도 다 이런 그림이다. 그러니까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의 기독론이나 요한의 기독론이나 히브리서의 기독론이나 모두 다 영지주의의 ανθρωπος신화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워서 역사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불트만은 주장하길 이는 스스로 구원받는 구원자 신화라고 한다. 자기가 창세전에 태초에 졌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아야 하는데 스스로 구원받는 과정에서 자기 몸의 파편들을 다시 모아 가지고 자기 몸의 파편을 받은 영지주의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된다는 신화라는 말이다. 이것이 구원자 신화이다. 그런데 이 구원자 신화 사상을 초대교회의 신학의대표자들인 요한,바울,히브리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사실은 영혼의 타락과 영혼의 구원에 관한 영지주의 근본벅인 세계관과 인간관을 객과화해서 극화한 것에 불과하다. 영혼이 본질의 세계에 속하는데물질이 세곙니 이 세상에 갇혀 자기고 보통의 영혼들은 물질의 세계가 전부인줄 알아야 물질의세게의 가치들이 진짜 가치인줄 안다. 그러는한 이 물질 세계에 탐닉하고 빠져 가지고 이 물질 세계와 함께 썩어지고 사라져 버린다. 이런 상태 속에서 영혼의 세계가 구원 받으려면 이 물질의 세계의 가짜성을 알고 이 물질 세계의 가치에 대해서 휩쓸리지 않기로 결단을 하고 영원의 세게의 가치를 사모하고 추구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영지주의의 본질적인 문제인데 그것을 객관화하고 극화한 것이 이 구원자 신화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그 영지주의 신화를 바울이나 요한이 예수에게 뒤집어 씌워서 역사화했다고 한다. 또한 바울과 요한이 영지주의의 틀을 이용해서 기독론과 구원론을 전개하지만 바로 그렇게 함으로서 영지주의를 교정한다는 것이다. 너희들의 영혼의 힘으로 이 세상의 가짜성을 발견하고 영혼의 세게로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가 곧 하늘에서 온 ανθρωπος(구원자)라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비로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알고 영원희 세게에 대해서 알아서 우리가 믿음의 결단을 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가치들이 전부인줄 알고 이 세상의 세려들에 휩쓸려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데세에 밀려 그저 사는 삶, 이세상의 가짜 가치들을 추구하며 사는 삶을 ‘가짜 삶’이라 하는데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이 가짜인것을 알고 하나님의 영원의 세계에 대한 가치를 아니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이 세상의 가치들과 대세에 휩쓸려서 사는 가짜 삶을 청산하고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나의 진정한 자아가 영원의 세계에,본질의 세게에 속함을 재확인하고 본질의 세계의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 런 삶을 주권자적인 삶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가짜 삶을 청산하고 의미있는-자기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주권자적 진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이것은 보다 시피 실존주의적인 인간론을 표시한 것이다. 바로 그걸 표시할 때 영지주의 사상이 불트만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된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이 이런 식으로 신학을 전개했다.
이것에서 부터 불트만의 비신화론을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란 무엇이냐 하면 진짜 복음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을 우리의 생각을 추구하는 가짜 삶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가치, 진정한 삶,이 세상이 대세에 휩쓸려서 그냐 ㅇ남이 결정하고 자기는 할 수 없이 따라가는 가짜 삶이 아니고 자기가 진짜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결정하는 것이 구원이며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며 그 복음의 핵심이고 본질인데 그 복음을 영지주의적인 객관화된 신화적인 언어로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화적인 언어의 껍질을 벗기면 이러한 본질에 도달한다. 그래서 그것(이러한 작업)을 비신화라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당시 3층적인 우주론에 의해서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 복음 즉 창조전부터 하나님 아들로 존재한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가지고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로 구원한다는 식의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 복음을 진짜로 분석하면 그것은 영지주의적인 세계 이해와 인간 이해를 객관화 한 것인데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기 이해를 당시의 숙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라니까 우리가 그 숙어에 붙들려 있으면 그 숙어가 표현할려고 하는 진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숙어를 비신화함으로써 그 껍질을 벗김으로서 그 본질을 터득하자는 것이 소위 불트만이 비신화론(denythologization)이다. 이런 모든 불트만적인 신학의 프로그램을 그놉ㄴ이 되는 것은 하이데거의 신존의 신학(존재의 신학,Sien)이다.
(3)불트만에 있어서 또 하나의 신학적인 강조점이 케리그마 신학이다. 말씀의 신학이다. 그래서 이 신앙 아래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원사건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과거에 한번,그리고 영원히 효과가 있도록 일어난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지금 선포되는 말씀, 곧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가짜 삶을 버리고 진짜 삶을 살도록 신앙의 결단을 하도록 하는 선포에 의해서 지금 발생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상당히 이해하기에 난해하다.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기의 선포 속으로 예수가 부활한다는 것이다. ins wort(지금 자기 속으로) 지금 자기가 선포하는 케리그마 속으로 에수 그리스도가 부활해서 그 케리그마 속에서 선포되는 설교의 말에서 듣는 사람은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를 체험하게 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게 한다. 그래서 세상 속에 존재하는 옛 자기 이해를 가진 가짜 인간은 죽고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진 진짜 삶을 사는 살마으로 되게 한다는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체험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과거의 사건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그와 같은 자기 이해의 변화를 가져로도록 하는 선포의 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트만에 의하면 케리그마, 설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과 함께 동시에 구원의 사건으로서 종말론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2000년 전에 팔레스틴에서 일어났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주관적 구원의 사건(그 구원의 사건이 오늘날 나에게 효력을 발생하는)의 분리를 거부하고 그것을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래서 바울신학의 구원사적,종말론적인 틀을 신화적인 껍데기라고 부인하는데에 그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 불트만의 신학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적 철학을 빌려서 바울 신학을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20세기 인간들에게 의미있게 선포하려고 하는 Hermeneutic의 노력이다. 곧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20세기 사고방식을 대표한다는 것으로 보고 20세기의 우리들에게 의미있게 서노하려고 하는 Hermeneutic의 위대한 노력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통찰력이 참 많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불트만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가 설교에서도 즐겨 인용할 수 있는 통찰력이 많이 있다. 그런데 신학 전체로서는 문제가 많다. 그래서 불트만의 신학책 읽고 설교 듣고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소리는 못들었다. 여기에 큰 아이러니, 역설이 있다. 불트만은 예낫 1세기식의 원시적인 세계관,우주관으로 표현된 그때의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된 복음을 아무리 선포해 봤자 오늘 우리에게 복음의 본질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도를 위해서라도 20세기 사고 방식으로 바울과 요한의 언어를 번역해서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보수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이 이것인데 그러면 불트만 설교 듣고 그리스도인 된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냐? 한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으나 별로 없다.
불트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역사성을 부인한다는 것이다. 특히 구원사적,종말론적 틈을 옛날 고대의 원시적인 신화의 껍질에 불과하다고 해서 중요시 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성을 많이 부인한다. 그래서 비록 그의 요한복음 주석이 위대한 주석이어서 거기서 신학적인 묵상이 깊이는 배울 수 있지만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적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아주 철저히 부인하는데 그런 것이 불트만 신학에서 우리가 배울 수 없고 본받을 수 없는 점들이다.
또한 영지주의 신화가 이런 식으로 1세기에 있었다는 것이 완전히 부인된다. 나중에 2세기 후반 3세기에 이와 비슷한 영지주의 신화가 발달한 것이 사실인데 그것은 우리 신약 성경의 기독론에 영향을 받아서 영지주의가 발달한 것이다. 그 영향이 영지주의 신화에서 바울과 됴한에 빌린 것이 아니고 거꾸로 영지주의자가 주후 2세기 후반부터 발달하는데 유댜교와 기독교 특히 성경의 기독론, 예수의 선재 사상에서부터 출발하고 그의 인간되고 십자가에 죽도 다시 높임 받은 이와 같은 신약성경의 기독론의 틀에 맞춰서 헬라 시대 영혼의 본질의 세계에서 물질의 세계로 타락하고 다시 본질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을 객꽌화하고 극화했을 때에 비로소 발생하는 신화라는 것이다. 이 신화는 우리 신약성경에서 빌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 불트만이 아주 완전히 망했다.
다음 시간에 불트만의 제자들을 하겠는데 불트만이 제자들이 불트만을 많이 비판한다. 이 비판을 보면 불트만의 신학이 한계점을 우리가 알게 된다.
질문:지혜사상과 구원자 신화와의 한계?
답:월피스 같은 사람은 지혜(σωφια)신화가 구원자 신화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헬라 사상에 σωφια사상이 있었느냐? 헬라 사상에 σωφια 사상이 있는게 아니고 유대교 지혜 사상이 있었느데 헬라 유대교에서 막강하게 발전한다. 이것은나중에 영지주의 구원자 신화에 신약의 기독론과 함께 공헎나다. 신약의 기독론 ,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은 유대교의 지혜 사상을 전승사적으로 이어받아서 발달하는 사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내재함을 말하기 위한 언어 수단이다. 나중에 또 다루게 된다.

신약신학 제 3강
8.Bultmann의 제자들
Bultmann의 제자들은 E.Kasemann,G.Bornkamm,E.Fuchs,C.Ebeling 등이 있다.
또 E.Kasemann이라는 사람이 1952-1953년에 ‘역사적 예수의 문제’라는 강연을 시작으로 해서 Bultmann의 실존주의 신학이 너무 역사를 무시하는 신학이라면 반기를 들기 시작하여 역사적 예수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성을 강조하는 Bultmann의 제자들의 달라진 시각을 E.Kasemann,G.Bornkamm,E.Fuchs,G.Ebeling 등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 연구에 있어서는 다른 제자들보다 E.Kasemann이 상당히 중요한 연구의 진전을 가져왔다.
(1)E.Kasemann
Kasemann은 Bultmann에 반기를 든 역사적 예수 문제에 있어서의 논문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묵시사상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래서 그는 ‘묵시 사상이 기독교 신학의 어머니다’라는 중요한 These를 제출해서 불트만식의 실존주의 신학이 세계적인 하나님의 온 창조를 포괄적으로 다루는 면을 너무 무시하고 너무 개인주의적인 집중을 한다는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바울 신학에 있어서 우주적 평면을 강조하여 바울 신학의 관심이 ‘주권의 영역’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려하여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의 개념은 ‘주권의 변화’라는 말로 표현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 말들이 신학교 책들에 가끔 나오는데 ‘주권의 영역’이란 말은 독일말로 Herrschafts bereiche(복수로 ‘주권의 영역들’)이다. 그래서 사단이 악과 고난을 다스리는 주권의 영역과 예수 그리스도가 주로서 다스리는 주권의 영역과의 대결이다. 그래서 역사의 장 또는 세상을 사단과 에수의 주권 다툼으로 보고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구원이라 한다.
따라서 구원이란 내 개인의 주권이 바뀜(Herrschagwechse;Herrschaf=주권 wechse=바뀜) 주가 바뀌는 것이다. 사단을 주로 섬기던 자가 예수를 주로 섬기는 주권의 변화로 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Kasemann은 그의 중요한 논문 바울 실학의 중심이 과연 기독론이냐 인간론이냐 하는 토론에서 Bultmann은 너무 일방적으로 바울 신학의 중심을 인간론으로 봤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고 하고 바울 신학의 중심은 기독론이며 이 기독론이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하나님이 의’라는 개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주시는 의라는 선물의 의미도 있지만 그런 의미보다 먼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힘’이라 한다.
Bultmann은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τυνη του Θεου를 우리 개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우리가 의롭다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새로운 자아,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Kasemann은 주장하길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의란 말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힘’이라고 한다 그래서 의롭다함도 새창조로, 새로운 창조의 사건으로 이해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의롭다함이 사탄의 주권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영역으로 새롭게 창조됨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바로 묵시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 등등으로 불트만의 여러 신학적인 주제에 대해서 새로운 도전을 했다.
Bornkamm도 사실은 바울이라는 중요한 책을 썼지만 Kasemann과 같은새로운 제안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그것을 중요시 다룰 필요가 업고 다름 단계로 Bornkamm의 제자이면서 Bultmann신학에 하나의 영향을 이어간 사람이 F.Hann이다.
(2)F.Hann
그의 ‘신약 기독론’이라는 중요한 저서에서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W.Heitmuller나 Bousset같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신학의 발달사는 근볼적으로 두 교회로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로 나누어 가지고 유대 기독교의 신앙중심은 ‘그 사람이 아들’로 재림하는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신앙의 중심이었는데, 헬라 기독교에서는 헬라 종교들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를 주, 하나님의 아들 등등으로 고백을 하고 지금 그 예수의 구원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 특히 성례신(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체험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고백이라고 했다. 그런데 불트만에 와서 이둘 사이에 또 한단계를 넣는 그런 암시를 한다. 곧 헬라 유대기독교이다.
그런데 Hann에게 와서는 세교회의 단계를 확실히 구분해서 초대교회의 신학을 분류하고 초대 교회 신학의 발달단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③헬라 기독교
②헬라,유대기독교
①유대기독교→아람
첫째 단계를 팔리스틴 유대 기독교라 하면 즉 아람말을 사용하는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기독교와 헬라 말을 상요하는 diaspora세계의 유대인들 가운데 전파된 복음에 의해서 생성된 헬라 유대 기독교, 그다음 이방인들 사이의 헬라 기독교, 이처럼 삼단계로 나누어서 초대 교회의 신학 발달 과정을 설명하려 했다. 대개 바울은 헬라 기독교에 속하는 것으로 설정을 해서 신약에 있어서 신학의 발달 과정의 제일 마지막에 속하는 것으로 바울과 요한을 설정했다.
이런 것이 한동한 유행이었다. 그래서 가령 W.Kramer같은 사람도 그렇게 했고, 또 영국 사람으로 미국의 유니온신학교에서 오래 가르친 R.H.Fuller도 비슷한 도식을 가지고 신약을 이해하려 했다. 이 ‘세교회신학’의 문제점은 그들이 무엇보다도 역사를 무시한 것에 있다. 시간의 문제를 무시한 것이다.
ⓐM.Hengel
이것을 가장 예리하게 제시한 사람이 튀빙겐의 M.Hegel교수이다. 이 사람은 역사가로서의 자질이 많은 사람이어서 가장 기본적인 관찰부터 시작을 한다. 바울이 약 주후 32-34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주후 30년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불과 2,3년만에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신학교육을 받은 신학자로서 초대교회에 참여했다. 아주 초창기부터 참여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가장 끝 단계인 헬라 교회에 소속될 수 있으며 도대체 바울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공헌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이 된 사건의 역사를 보더라도 바울과 초대 교회 사이에 이런 세교회는 물로두교회의 단계를 거쳤다는것도 말이 안된다.
또한 우리가 간진하고 있는 바울의 편지를 보면 제일 빠 편지가 48,49년의 편지이다(다수의 의견을 따르면 데살로니가 전서가 가장 오래된 편지로 약 49년이며 또 영국의 소수 의견 F.F.Bouce같은사람의 의견을 따르면 우리가 가진 편지중에 갈라디아서가 가장 첫 편지로 약 48년 쯤에 쓰여진 편지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바울의 첫 편지 사이에 불과 18-19년 차이 밖에 없다. 그런데 바울은 누구에게 그 편지를 썼는가?자기가 이미 복음 선포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헥 되면 한해쯤 또 줄어든다. 그러면 바울의 첫 편지에서 부터 완숙한 단계의 편지라고 볼 수 있는 로마서,고린도 후서, 또는 나중에 쓴 편지라는 갈라디아서, 이들 사이에 기독론에 있어서 신학적인 큰 발전이 있었느냐면 그렇지 않다. 가령 주후 58년 쯤에 쓴 편지들까지 별 큰 진전이 없다. 무슨말이냐하면 적어도 이때쯤이면 바울신학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불과 15,6년 사이에 무슨 세단계의 교회들을 거쳐서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느냐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가장 근본적인 시간적인 이유 때문에 이런 학설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I.H.Marshall
또 에버딘 교수로서 복음주의 신약학자의 대가인 I.H.Marshall은 주장하길 도대체 헬라 유대교외 세 교회로 가르치는데 있어서 전제가 무엇이냐 하면 헬라 사상과 유대 사상이 완전히 다랐고 헬라 유대교-디아스포라 세계의 유대인들의 사상과 팔레스틴의 유대인의 사상이 완전히 달랐다는 것인데, Hengel의 중요한 연구(Heellenismus und Judentum)나 다름 사람의 연구를 볼 때 팔레스틴이 주전 330년 알렉산더에 의해 정복된 이래로 계속해서 헬라의 통치를 받았다. 그래서 팔리스틴이 완전히 헬라화 됐다. 고고학적인 발견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헬라말을 많이 썼다. 예수의 제자들도 헬라 이름을 썼고 무덤에는 헬라 묘비명도 많다 .그래서 예수님도 헬라말을 썩 잘했을 가능성이 많다. 또한 헬라 사상이 유대교에 많은 영향을 주어서 유대교 중에 정통 유대교를 대변하는 쿰란 문서에도 헬라적인 용어나 헬라적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 많이 침투해 있다. 따라서 일단 헬라 사상과 유대 사상이 그렇게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었다. 둘째로 특히 헬라 유대교와 팔리스틴의 유대교가 그렇게 크게 달랐다는 것은 더 말도 안된다. 그래서 이런 세 교회를 가르치는 전제를 무너드린다.
거기에 근거해서 Marshall 같은 사람은 가령 Hann이나 Kramer 같은 사람이 주장대로 이 신앙고백은 헬라 사람들에게 나왔고 저 신앙고백을 팔레스틴에서 나왔다는 식으로 그것들을 자세히 간추려 가지고 나누는 그런 것들을 모두 너무 억지주장인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세 교회 Scheme으로 초대교회 신앙을 설명하고 바울과 요한의 신학을 제일 마지막 단계에 두는 그런 책들을 많이 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제 퀘퀘묵은 것이 되어 버렸다.
9.구원사적 해석
O.Cullmann,J.Munck,H.Ridderbos 같은 사람의 이름을 들 수 있다.
(1)O.Cullmann
O.Cullmann은 ‘Christ and Time''Salvation in History' 같은 책에서 ①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②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약속과 성취의 관계로설명을 하고③ Typology의 중요성을 강조하고④바울이 전승받은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즉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심이라는 것을 강조하며⑤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복음의 계시를 받았고 사도로 부름을 받았는데 그때에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을 겸하여 계시를 받아서 바울은 자기의 이방인 선교의 구원사적 의미를 철두철미하게 깨달아서 그렇게 열심히 이방인 선교에 힘을 썼으며 롬 9-11장에서 이방인 선교의 구원사적 의미를 파헤치고 있다는것⑥또 종말론에 있어서 벌써 우리가 구원의 첫열매를 받았으나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벌써와 아직의 scheme의 중요성 속에서 불트만이 강조한 오늘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해서 신약 전체의 신학에서 뿐 아니라 바울 신학에 있어서도 구원사적인 사고방식이 중심을 이룸을 강조했다.
(2)J.Munck
J.Munck는 ‘Paul and salvation of mankind'라는 책에서 바울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원사 또는 구원의 계획에 대한 이해가 아주 중요했음을 아주 강력하게 개진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고 그러면 종말이 올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바로 하나님의 종말에 들여오는 하나님의 구원사를 완성해서 하나님의 종말을 들여오는 자로 생각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로마와 예루살렘의 신학적인 중요성을 보고 바울이 로마로가려고 했으며 로마를 지나서 스페인까지 아마 어쩌면 전세계를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으로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방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종말이 임하게 하려고 했다고철저하게 구원사적으로 바울신학을 개진하고 있다.
(3)H.Riddelbos
H.Riddelbos는 ‘Paul'이라는 책에서 바울신학이 중심은 어떤 한 구원론적인 개념에 있지 않고 종말론적인 또는 구원사적인 출발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바울의 설교의 모든 내용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로 종말의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포하는 것이며 그 종말의 구원의 시대를 설명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구원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바울 신학의 여러 다양한 면들이 다 통일된 의미, Unity를 ㄱ지고 상호 연관된 것을 나타남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10.바울의 유대교적 배경에 의해서 바울신학을 해석하려는 시도
좀더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이것이 현대의 1970년대로부터 지금까지의 바울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경향이다. 여기서 주로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E.P.Sanders와 그의 추종자들인데 그 이전부터 살펴봐야 할 것은 J.Klausner과 C.G.Montefiore이다.
(1)J.Klausner과 C.G.Montefiore-H.J.Schoeps
먼저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J.Klausner C.G.Montefiore(개혁 유대인들)인데 이 두이 바울신학을 연구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을 했다.
바울의 반유대교적 경향과 유대교를 율법종교로 정의하는 경향은 그가 당시 팔레시틴의 정통 유대교, 즉 랍비 유대교를 오해한데서 발생한 것이다. 그는 헬라 Diaspora 유대인으로서 Torah, 모세 율법을 헬라적인 법(νομος)로 이해했다. 그런데 이 토라는 법으로서, 그 법을 어기면 벌을 자초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표징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특히 유대교에서의 회개와 용서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바울 신학 자체가 바로 유대교에 대한 이런 오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자기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Montefiore에 의하면 바울이 헬라 유대인으로서 정통 유대교에 있어서의 토라의 의미, 즉 하나님의 선택의 표징으로서의 토라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헬라 그레코로만식의 법으로만 이했다.(그레코로만의 법사상은 어때요? 법을 어기면 벌을 받고 법을 지키면 의롭게 된다).그렇게 이해해서 헬라 유대교를 율법종교로 낙인을 찍었는데 그것은 오해였다. 또 바울이 무엇을 잘못했느냐면 정통 유대교에 있어서의 회개와 용서의 중요성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이러한 Klausner나 Montefoire의 학설을 더 학적으로 깊이 한 것이 독일의 유대학자 H.I.Schoeps였다. H.I.Schoeps도 Modtefoire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헬라 유대인으로서 정통 랍비 유대교를 깡그리 무시해버렸다는 것이다(1959년에 쓴 그의 중요한 책에서)
(2)W.Davies
그런데 바로 이런 Klausner 나 Mintefoire를 염두에 두고 또한 바울신학을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으로만 해석하려고 했던 당시의 신학적인 경향에 반하여 영국의 W.Davies가 ‘Paul and Rabbinic Judaism’을 1948년에 출판했는데 거기서 Davies는 바울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랍비 유대교의 배경에 의해서 설명하고 있다.
Davies에 의하면 바울의 사상적 배경은 전적으로 랍비 유대교적 배경이었다. Montefiore나 Schoeps에 완전히 반해서 또는 Bousset나 Bultmann이나 불트만의 후계자들에 반해서 설명하기를 바울의 신학적 배경은 헬라사상이 아니라 전적으로 유대교인데 그것도 Montefire나 klausner가 말하는 정통 랍비 유대교였다. 다만 메시야가 벌써 왔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통해서 메시야가 벌써 도래했다는 바울의 확신에 의해서 교정된 랍비 유대교에 비추어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을 해석해야도니다고 W.Davies는 주장했다.
(3)E.P.Sanders
한동안 W.davies의 영향을 받았던 E.P.Sanders(원래 캐나다 사람인데 현재 옥스포드에서 교수로 있다)는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1977)’이라는 책,그리고 최근의 ‘Paul,Law and Jewish People, 1983’이라는 책에서 바울연구에 있어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가장격력한 토론을 야기시켰다.
Sanders는 그의 첫 책에서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율법종교라고 왜곡한 가운데에 그 유대교에 반한 것으로 바울의 신학을 해석하려고 했던 전통적인 바울 연구를 Anti Semitism으로 규정하고 특히 독일의 루터전통을 이어받은독일의 신약학자들을 아주 Anti Semitism으로 규정하여 맹렬히 공격을 하고 바울과 바울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교를 공정히 비교해야 된다고 한다. 바울 당시의 유대교를 방루 신학의 카테고리로 해석하려고 하면 유대교에 대한 공정한 이해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울신학 자체로서 우리가 연구를 해야 되고 유대교도 유대교 자체를 살펴 연구를 해서 바울 사상과 유대교가 각각 어떠한 종교의 패턴을 가지고 있는가를 추출한 뒤에 그것을 비교해야 된다고 주중했다. 그래서 이런 방법론으로 살펴보니까 팔레스틴의 유대교는 한마디로 Covenantal Nomism(언약적 율법주의)이라고 할 수 있다.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정의할 수있는 듀대교에 대항해서 바울이 싸웠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언약적 율법주의가 도대체 무엇이냐?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바울 당시 팔레스틴의 유다교는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①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
②그리하여 율법을 주셨다.
③이 율법은 하나님의 선택을 지탱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④이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순종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았다.
⑤하나님은 순종을 상 주고 불순종은 벌 주신다.
⑥그러나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한다.
⑦속죄는 언약의 관계를 지탱하거나 또는 언약의 관계를 회복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⑧순종에 의해서 또는 속죄에 의해서 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서 언약관게에 지탱되는 모든 사람들은 종국에 구원받을 사람들이다.
이런 것이 언약적 율법의 구조였다.
다시 말하면 Sanders가 8가지로 요약한 이 요점들을 가진 것이 바울 당시의 유대교였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들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들의 하나님 노릇을 해주겠다고 언약을 맺었다. 그러니까 이 언약은 은혜의 언약이며 곧 선택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선민이다. 이 언약의 또는 선택의 표징으로서 율법, 토라를 주셨다. 그래서 토라는 두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하나님 쪽에서 이 언약을 지탱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 지탱의 의지이며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도 이 언약을 지켜서 언약의 관계 속에 있어야 된다는 언약을 지켜야 된다는 요구 즉 순종의 요구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이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한 된다. 그러나 이 순종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언약으로 약속된 구원의 관계속에 머무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Sanders는 말하길 유대인들이 바울 당시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가기(getting in)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자기들이 들어가 있는 구원의 공동체에 머루르기(staying in)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Covenantal Nomism이라 한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아주 중요하게 구분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당시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은 구원의 공동체에 들어가기 위해서(getting in)가 아니라 이미 자기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언약의 은혜 위에서 구원의 공동체에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니까 그 속에 지탱되고 그 속에 머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다.
언약-선민-율법(Torah) ꠏꠏꠏꠏꠏꠏꠇꠏ하나님의 언약 지탱 의미
ꠌꠏ요구-순종
언약 ↓
-----→이스라엘 staying in→atonement(제사,회개)
은혜
그러면 구원의 공동체 속에 머무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킴에 있어서 가끔씩도 아니라 여분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어덯게 되느냐? 그렇게 되면 이 구원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위기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런 때는 위해서 율법은 이 속죄의 하나님과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도를 제시했는데 속죄의 제사가 그런 것이고 또 회개함이 그런 것이다. 율법은 이처럼 속죄의 제사와 회개를 통해서 설령 율법을 못지켜도 언약의 공동체, 구원의 공동체에 머무를 수(staying in) 있는 방도를 율법은 또한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상황에서 완전히 구제불능의 상태가 되어서 이 구원의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출당하느냐 하면 이 언약 자체를 부인할 때 곧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더이상 이스라엘,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 아니라고 주장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가령 당시의 유대인으로서 로마 세계에서 출세하기위해 유대교를 완전히 부인하고 유대교를 핍박하는 로마 사람들의 앞장을 서서 유대인들을 핌박하는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만 언약의 공동체에서 완전히 구제불능으로 쫓겨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 자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시 팔레스틴의 유대교였는데 바울 서신들을 보면 이러한 유대교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고 유대교가 이런 식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지키면 그 공로를 쌓고 이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한다는 식으로 마치 유대교가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바울은 유대교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을 가르친 유대교에 대항해서 바울은 그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무료로 은혜로 거저 우리의 율법의 행위 없이 우리의 아무 공로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이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 한다고 그의 구원론을 전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바울이 유대교를 완전히 왜곡했다는 것이다.
율법→지킴→공로→賞→義
그러니까 Sanders에 의하면 이처럼 아름다운 유대교를 바울이 왜 이렇게 더루운 종교로 만들었느냐? 그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이 다메식 도상에서 예수가 메시야로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의롭다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바울은 문제에서 해결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해결을 받고 그 해결에서 문제로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은혜를 나타냈다면 그 해결에 있어서 유대교 내에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구원이 있을 수 없느냐?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키려는 행위는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들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인데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께 반발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결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유대교를 바라보니 유대교가 갑자기 이런 것으로 이해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당시 유대교가 사실 앞에서 말한 그런 체계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Sanders는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이 유대교를 왜 비판하느냐? 그는 그의 책에서 되풀이해서 말하기를 한마디로 바울은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에 비판한다고 되풀이한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제공한다고 다메섹 도상에서 확신을 갖게 되자 자연히 유대교를 보았을 때 이것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공로를 쌓아서 스스로 구원하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는데 그것은 저버리고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구원하려는 못된 짓이라 해서 유대인들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질문:Snaders가 말하는 유대교 사상과 구약에 나타난 사상과 같은 것을 말하는가? 다른 것을 말하는가?
답:Sanders는 바울 당시의 팔레스틴 유대교를 말하는데 그것을 추출하기 위해서 주로 외경이나 위경과 초기 랍비 문서들, 쿰란 문서들을 살핌으로 이러한 당시 유대교의 패턴과 구조를 추출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사 단 하나의 예외가 4에스라 책이라고 한다. 4에스라 책은 사실 유대교를 비판하는 것이 바울 사상과 비슷하다. 이 하나만 예외이고 외경과 위경과 랍비 문서, 쿰란 문서를 다 조사해 보면 자신이 요약한 그런 사상을 가졌는데 이는 바로 구약의 사상과 아주 깊이 연괸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Sanders는 당시 유대교를 이런 것에 재구성하지만 자기가 여기서 재구성한 유대교는 구약의 사상과 맥이 통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 책이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영,미에서 Snaders의 추종자들이 많이 만오고 Sanders는 일약 위대한 신약학자가 되어서 옥스포드의 교수로 불려갔다.
이 사람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바울의 율법신학을 아주 가장 실랄히 비판한 사람이 H.Raisanan이라는 헬싱키 대학의 교수이다. 이 사람의 ‘Paul and the Law 1983’이 라는 책이 튀빙겐에서 출판이 됐는데 이 사람은 1981,82년 나와 함께 튀빙겐 대학에서 흄볼트 연구 교수를 했다. 그래서 Raisanan은 당시 이책을 쓰고 있었고 나는 ‘Son of Man’을 쓰고 있어서 이 책은 WUNT라는 시리즈의 29권(83.11)으로 나오고 내 책은 30권(83.12)으로 나왔다. 그래서 나하고 인연이 많다. 또 이 친구와는 튀빙겐 대학의 외국인 교수 아파트의 위 아래 집에 살았다. 그래서 잘 안다. 차도 같이 많이 마시고...그런데 이 친구가 이 책을 출판했는데 내 책을 많이 비판했다. 내가 다시 1983년에 튀빙겐에 흄볼트 교수가 갔을 때 그런데 내가 내가 1984년에 내 첫책 2판이 나오게 되었다. 독임에서 그때 독일의 은사들이 Sanders 와 Raisanan이 나를 비판한 것에 대해서 답을 하고 도리어 Sanders와 Raisiana에 대해서 내가 아주 실랄히 공격하는 후문을 달았다. 그래서 Raisanan과 내가 대 논쟁이 벌어져 가지고 그 뒤에 Raisanan이 나에게 답한답시고 New Testment Stuidis라는 권위있는 저널에 1986년 논문을 하나 써서 김세윤 욕을 잔뜩 해놓았다. 그런데 그것은 답할 필요도 없이 형편없는 친구이다.
얼마전 1988년 G.Klein이라는 불트만 학파의 불트만의 마지막 제자 중 하나인데 1960-70년에 아주 영향력이 있었던 뮌스터 대학 교수인데 이 친구가 바울신학에 있어서의 태풍의 눈이라는 article에서 Sanders와 Raisanan의논지를 집중적으로 점검을 한다. 왜냐하면 현재 바울 연구에 있어서 가장 격렬히 토론되는 주제가 바로 이 사람들이 제출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Klein은 바울 연구에 있어서 태풍의 눈이라 해가지고 이 사람들의 책들을 아주 비판적으로 토론하는데 거기에서 H.Weder(지금 취리히 대학 교수)의 논지도 조금 인용을 하지만 주로 내 논지를 많이 인용을 해가지고 이 추친구들을 여지 없이 박살낸다. 그래서 H.Klein이 내 대신 Raisanan에게 충분히 답했다고 본다. 하여근 그런 상태이다. 이 Klein의 article이 개혁사상에 번역되어 나오니까 읽어보기 바란다. 그러면 지금 바울신학이 어떻게 토론이 되고 있으며 이 못된 친구들이 어떤 자들인지 알 수있다.
Raisanan도 방루 시대의 유대교는 Sanders가 아주 정확히 기술했다고 보고 심지어 Raisanan에 의하면 Sanders가 예외고 취급한 4에스라 책도 Sanders가 기술한 유대교 그대로를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다. 더 나아가서 Raisanan은 바울에게 있어서 법이라는 말νομος의 사용법을 아주 꼼꼼히 점검해 보면 바울이 이 법이라는 말을 여러가지 의미로 썼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법에 대한 νομος에 대한 언급들이 상호 모순 투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바울은 일관된 율법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기회주의적으로 상황에 따라 어떤 때는 율법이 하나님의 법이라고 , 영적인 것이라고 우리 생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 율법이 죄와 세상과 사단에 도구라고 욕하기도하고 이렇게 상호 모순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반율법적인 은헤에 의한 믿음을통한 nustification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 가르침은 그가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과 투쟁하는가운데에 우연히 발생한 것이라는것이다. 그의 신학이 처음부터 중심적인 복음의 이해로 발달한게 아니고 갈라디아에서 유대주의자들과 투쟁하는 그 상황에서 우연히 발생한 교리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에서 이와 같은 투쟁의 과정에서 바울은 비로서 율법을 유대인들의 구원의 길로 왜곡하고 이렇게 함으로서 바울은 당시 유대교를 완전히 공정하지 못하게 왜곡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율법과 그리스도가 마치 서로 상극을 이루는 두 구원의 수단인 것인야 대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지난 1700년 동안 있어온 서양의 Anti Semitism에 대한 모든 첵임이 바울에게 있다는 것이며 심지어 나찌 히틀러의 유대인 핍박도 바울이 책임을 져야 된다고 주장을 하고 있다.
거기에 반해서 J.D.G. Dunn은 바울이 유대교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Sanders와 Raisanan이 전제하는 당시 유대교에 대해서 바울이 반응을 한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바울 서신에 나오는 율법들에 대한 가르침을 우리가 잘 살펴보면 Sanders와 Raisanan이 요약하여 기수한 그 유대교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그들이 말하는대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 그 유대교를 전제하고 그 유대교에 반응하는것이라고 바울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으로 출발하자는 논문도 쓰기도 했다. 그래거 지금 이야기한 것들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가장 격렬히 토론되는 주제들이다.
11.J.Christian Bekker
그는 지금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약 교수인데 화란 사람이다.
그의 저서 ‘Paul the Apostle 1980’이라는 책이 유럽에서는 별로인데 미국에서는 교과서로 많이 읽히고 있는 책이다. 그는 Cullmannr과 Ridderbos와 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내가 따로 떼어서 취급하는 이유는 최근의 책이고 해서 그런다 .
그는 바울신학의 일관된 중심은 당시 유대교의 묵시 사상이라고 한다. 곧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서 조정된 당시 유대교의 묵시 사상이 바울신학의 일관된 중심이라고 한다. 바울은 그러기에 그리스도 사건을 당시 유대교의 묵시상을 빌려서 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의,의롭다함, 화해,자유,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그리스도 안에 있음,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함, 영광 등등이 바울적인 신학언어들은 바울 사상의 상징적 구조를 구성하는 요인들로서 바울의 복음을 독자(수신자) 또는 바울의 특수 상황의 필요에 따라 바울신학을 해석하는 것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한데 바울신학을 구성하는 그런 표면적인 상징어들(의, 의인됨, 화해,자유,입양,영광, 주안에 있음, 주와 함께 연합함) 을 모두 움켜쥐고 이런 것들을 바울신학의 구조를 구성하는 요인들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표면상에 나타난 것들로 이러한 요인들은 다 바울이나 독자들의 특수상황에 따라 바울의 복음을 해석하는 상징symbol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복음을 해석하는 것이다. 가령 독자의 상황을 따라 이러한 상징을 통해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징들이 표현하려고 하는 복음, 이를 다른 마로 하면 이런 상징들을 모두 일관되게 상호연관되게 얽고 있는 근본중심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묵시사상의 평면에서 이해되었다. 묵시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세상의 악과 고난의 역사가 하나님의 계시(묵시)로 곧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하나님 심판으로 끝나고 새로이 오는 세상이 시작한다는 것이 유대 묵시사상의 근본인데 이러한 묵시상의 언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해석하는 것이 바울신학의 복음이고 바울의 복음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묵시계시
십자가/오는 세상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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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의 오심이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 새역사를 열으신 사건이라는 것이 유대 묵시문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해석한 것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바울신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역사속에 개입이고 하나님이 새역사를 열은 사건이며 새세상을 창조한 사건이고 우리를 구원한 사건으로서 그의 재림때 완성된다는 이것이 바울 복음의 본질이며 이 복음이 유대 묵시 사상의 언어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그 묵시 사상으로 이해된 이 복음을 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들이 이런 symbol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중 어느 하나를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Lutter이하 개혁자들은 ‘의’를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하나의 표면상의 symbol에 불과하고 더 깉은 structure에서의 바울 신학의 중심은 유대묵시사상의 언어로 표현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하나님의 계시사건으로 하나님의역사 개임의 사건으로 즉 우리를 위해서 새 역사를 열고 새 세상을 창조하고 한 사건으로 구원의 시대를 연 사건으로 보는 것이라는것이다. 또 지난 번에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한 것을 바울신학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들(브레덴와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랬는데 그런 것도 다 이것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표면의 symbol에 불과하고 더 깊은 것은 유대 묵시문학이 제공하는 언어로 이해된 하나님의 계시의 사건으로 또는 하나님의 역사의 개입의 사건(구원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그리스도의 사건이라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궁극적인 관심은 종말에 예수의 재림으로더불어 있을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이고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받음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Bekker에 의하면 바울에 있어서 구원사의 climax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의 현재 영광받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주로서 대신 행사하는 하나님의 영광, 곧 예수의 재림때 완전히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것이 구원사의 cliamx라는 것이다. 한번 읽어보라. 이 친구도 하도 술을 잘 마셔서 학회에 갈 때마다 얼굴이 빨갛게 하도 술에 취해가지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른다. 1986년 11월 아틀란타에서 ‘바울 연구 150년사’라는 주제를 가지고 예일 대학의 L.Keck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Bekker가 거기에 대해서 반응-답을 하기고 했는데 시카고의 B.Xkrucks가 사회하는데 약 2000명 가령이나 모여 있었다. Keck가 강연을 다 마치고 사회하는 스트락스가 베커 보고 나와서 답변을 하라고 하니까 이 친구가 넥티아는 반쯤 풀어 내려지고 와이셔츠는 다 풀려진 상태에서 나와 가지고 몇 마디 시작하다가는 ‘어 이거 아닌데 내가 원고를 어디다 두고 왔는가? ’하는 것이었다. 술이 잔득 취해가지고 자기 원고가 어디 있는지 조차 몰라서 망신을 당했다. 그런데 본인은 그게 망신이라고 생각 않하겠지...그리고 그 이듬해에도 튀빙겐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내 앞을 지날 때 술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그 친구 책에서도 술냄새가 조금 많이 난다. 그래서 뒤죽박죽되어 있다. 뒤죽박죽되어 있는 것을 내가 맑은 정신으로 정리를 하려니까...반번 읽어보라. 이 뒤에도 바울 연구가 많이 진전되었다. 가령 H.Ludemann이 지금 바울에 관한 책을 연속으로 1,2,3권 식으로 쓰고 있는데 이런 것도 앞으로 더 붙여야 할 것이다. 별로 중요성이 없으니까 이 정도로 바울 연구사를 간단히 마쳤다. 아주 간단간히 바울 연구사를 마침에 있어서 바울연구들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issue들을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고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
(1)바울 신학의 배경이 무엇이냐?
바울의 유대교와의 관계,바울의 팔레스틴 유대교와 헬라 유대교와의 관계, 또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진짜 Sanders와 Raisanan이 말한대로냐? 그래서 바울 신학의 배경에 대한 토론이 새롭게 전개되고 있다. 바울과 헬라사상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전의 Bousset나 종교사학들이 생각하고 있던 거냐? 아니면 그 어떤 것이냐?
그래서 바울신학의 배경이 중요한 문제이다. 바울의 유대교와 헬라 사상과의 관계가 중요한 문제이다.
(2)바울과 초대교회의 바울 전 기독교와의 관계
바울이 초대교회로부터 얼마만큼 케리그마를 이어 받았으며 얼마만큼 바울 스스로 신학자로서 초대교회의 신학 발전에 공헌을 한 것이냐?
이것이 상당히 중요한 issue이다.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 불트만이 말하는대로 역사적 예수는 바울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냐?
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말을 그처럼 인용않느냐?
왜 예수의 행적은거의 한마디도 않느냐?
왜 그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만 집중하느냐?
이런 바울과 역사적 에수와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이다.
(3)바울 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
바울신학이 도대체 중심이라는 게 있느냐?
바울신학의 중심이라는 말은 바울 신학의 다양한 요소들 혹은 다양한 주제들을 일관되게 모두 상호 관계 속에 있도록 정이할 수있는 중심 사상이 있느냐?
종교개혁자들은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 바울사상의 중심이라고 했고 또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로부터 일어나서 종교사학파에게 더 확실하게 주장된 심지어 Schwetizer와 W.Davies까지와 Sanders까지에 이르러서 계속 주장되는 ‘그리스도와 연합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 이른바 그리스도 신비주의가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불트만식으로 인간론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Cullmann이나 Kasemann식으로 기독론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Christian Bekker식으로 묵시 사상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등등 바울신학의 중심이 무엇이냐의 문제이다.
또는 도대체 중심이란게 있느냐?
아니면 바울신학은 별로 정리되지 못한 어떤 일관된 체계를 갖추지 않은 그냥 미완성의 사상이냐?
(4)바울의 연대도 중요하다.
(5)바울의 개별적인 신학적인 주제들
바울의 기독론,인간론,구원론,바울의 율법신학,바울의 윤리,바울에 있어서 구원사와 종말론, 바울의 성령론,교회론,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하게 토론되어야 한다.
(6)그러면 앞으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루려고 하냐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을 계시받고 사도로 부름받은 그 체험에서부터 출발하여서 바울이 자기에게 계시된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이 구원사건을 어떻게 해석해 가는가? 구약과 유대교, 그리고 초대교회의 케리그마 전통이제공하는 카테고리드로가 개념들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구원사의 평면에서 어떻게 해석해 가는가?
또 그가 선교지에서 부딪힌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여 어떻게 해석해 가는가?
이런 것들을 추구해 보려고 한다. 이렇게 해 봄으로 우리는 바울 신학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상수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변수가 무엇인지 따져보고 이렇게 해서 바울신학의 중심도 헤아려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 시간부터 그렇게 살펴 보려고 한다. 내 책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질문:교수님께서 구원사적 해석에서 O.Cullmann을 소개했는데 그의 사상을 우리가 받아야합니까?
답:그분의 사상에서 배울게 많고 또 배우지 못할게 또 많다.
질문:개혁주의 신행협회에서 나온 신학 사전에 보니까 O.Cullmann을 좌경신학자로 구분해서 개혁주의에서는 받기 힘들다고 해 놓았는데....
답:그런식으로 한 사람들은 다 엉터리들이다. 왜 그러냐면 우리가 Cullmann의 영향이 굉장이 많다. Ridderbos책도 보면 Cullmann의 영향이 굉장히 많다. Ridderbos는 다 훌륭하지. 그분은 우경신학자지. Ridderbos의 하나님 나라 라든지 바울이라는 책에 보면 Cullmann의 영향이 지대하다 .그것은 옳지 않다. 그게 아니고 쿨만 신학이 복음주의 신학에 공헌한 공헌이 지대하다. 특히 최근에 신약학사에서 그가 우리 보수주의 신학을 위해 한 공헌은 지대하다. 그런데 그의 구원사적 신학이 특히 어느 점에서 받아들이기 함드냐면 만일 구원론쪽으로 흐른다. 그리고 K.라너식의 ‘익명 그리스도인’신학으로 흐른다. 그것은 만인 구원론과 같이 가는 것이다.
‘Christ and Time’보다는 그의 더욱 완숙한 책 ‘Salvation within Hisatory’에서 아주 강력하게 드러나는데 이런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신학이 다 틀렸다고 한다? 그러니까 신학을 그렇게 하면 안된다. 누구는 좌경신학자이고 누구는 우경이고... 신학을 했다면 그런 식으로 사고하지 말고 쿨만에게서 배울 것은 무엇이고 배우지 못할 것은 무엇인지 불트만에게도 마찬가지아. 이런 것을 Criticism한다고 한다. 이 말은 헬라의 κρινειν이라는 말에서 왔다. 이것은 분리,분간한다는 말이다. 좋고 나쁜 것을 가른다. 그런 것을 할줄 아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이다. 배울 것은 우경이니까 우측에다 놓고 못배울 것은 좌경이니까 좌측에 놓고 이렇게 분리해서 이런 것은 안배우면 된다.
질문:영지주의가 신약성경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했습니까?
답:지난 시간에 무엇을 들었는가? 영지주의 신화는 분명히 주후 2세기 이후이다.(구원자 신화) 그래서 도리어 신약의 기독론의 도움으로 발전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영지주의적 경향-지식을 강조하는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구조에다가 영혼이 지식을 얻어 Idea의 세계에 영혼의 세계에 복귀한다는 영지주의의 경향(지식을 강조,신화가 아직 없는) 그런 gnosticism을 요새는 incipient gnosticism이라고 한다. 이제 막 잉태된 영지주의라는 말이다. 또는 영지주의적 경향이라고 한다. 그런 것은 어쩌면 신약시대에 벌써 여기저기서 시작을 볼 수 있다. 가령 고린도 사람들이 무엇을 그렇게 주장하고 자랑하고 사고하고 난리를 피웠는가? 지식을 요한의 세계에도 그런 것이 있다. 요한일서나 요한복음에 보면 그래서 incipient gnosticism 막 시작하는 잉태된 영지주의는 벌써 신약시대에 시작했는데 신화는 주후 2세기 이후에 발생하였다. 그것은 이렇게 발전하는 영지주의 신약의 기독론과 유대교의 소피아 사상이라든지 로고스 사상, 또는 천사 사상이라든지 이런 것의 영향을 받아 가지고 만든 것이다.

바울신학 제4강
지금까지는 서론을 하였고 이 시간부터는 바울의 신학을 시작하겠는데 첫째로 바울의 사도로의 부르심 바울의 소명에 대해서 하겠다.
Ⅱ.사도바울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를 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첫 시간에 이야기한대로 바울은 사도로서 선교사이며 신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사도직과 연관시켜서 그리고 선교와 연관시켜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사도 바울에 대해서 또는 바울의 사도됨에 대해서 먼저 시작하려고 한다.
1.소명전의 바울
소명전의 바울을 살펴봄으로써 바울의 신학적인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아주 기본적으로 바울은 이스라엘인 이고 베냐민 지파인이다(롬11:1/빌3:5/고후11:22). 따라서 바울은 로마 이름인 바울과 더불어 유다 이름인 사울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행13:9).
많은 사람들, 특히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 오해를 많이 한다. 원래 바울의 이름은 사울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회심하여 바울이 됐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거짓말로 은혜를 많이 받게 한다. 그런데 그런게 아니다. 내가 78년에 처음 한국에 와서 바울을 강해할 때 이것을 말했더니 어떤 목사들이 ‘그게 아니라 사울은 큰 자라는 뜻이고 바울은 작은 자라는 뜻인데 큰 자로 교만하게 까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 되게 두들겨 맞고 회심하고는 겸손을 표시해서 작은 자라, 바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소리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이른바 토착화된 한국의 신학이다. 나도 바울에 대해서 꽤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그런 것은 읽어본 적도 없도 본일도 없다고 했더니 ‘하눅 주석책에는 다 그렇게 쓰여졌다’고 한다 .당시 유명한 한국의 두 주석책에는 다 그렇게 쓰여졌다고 한다. 그것 모두 거짓말이다. 내가 아무리 떠들어보아도 소용이 없길래 다시 연구해서 가르친다고 했다.
paulos라는 말은 물론 라틴말로 작은(little)이라는 형용사이다. 그러나 아주 흔한 로마 이름이다. 그러나, 사울이라는 말은 큰 자라는 의미가 없다. 그냥 괜히 지어낸 말이다. Paulos(작은)라니까 사울은 큰가보다고 생각했는가 보다. 여기서 사울이 큰자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둘째로 또한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당시에 많은 헬라 유대인들은히브리 이름과 로마 이름을 겸해서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9에 누가는 거기까기 사울로 부르다가 그 이후부터 바우로 부른다. 그런데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다메섹 회심 사건을 9장에서 말하고 있다. 9장에서 13장 까지는 계속 사울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울이 바울된 것은 다메섹 도상 회심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무엇하고 관계가 있느냐? 13장 이후는 바울이 헬라 세계에서의 선교활동과 관계가 있다. 헬라 세계인 로마 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니까 자연히 그의 히브리 이름보다는 로마 이름을 쓴다. 그러니까 행 13장 이후에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주로 쓰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의 편지들은 모두 다 헬라말 쓰는 이방 교회들에게 보내느 것이므로 바울이라는 로마 이름을 쓰는 것이다. 사울이 바울이 된게 아니라 원래 헬라 유대인들, 특히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히브리 이름 하나, 그 다음에 헬라 이름 하나 중앙에는 바울 가가 로마 시민권을 받을 대에 스폰서 역할을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다. 그래서 이름이 세 부분이었다. 나의 스승인 F.F.Bouce의 한 친구가 바울의 가문이 로마 시민권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추측하길 바울의 집안 이 대대로 천막쟁이였다고 하면서 또한 그는 2차 대전 때에 전공을 세운 영국장교여서 군대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말하길 BC 64년에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지성소에까지 들어가서 유대인을 잔뜩 잡아갔다. 그래서 포로로 잡으면 노예가 되므로 그들은 폼페이 장군의 군대에 부역하는 노예가 되었는데 그후 폼페이가 아시아에서의 전투에서 대승하였다. 그래서 이때에 바울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아마 끌려가서 천막짓는 노예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맏은 군대의 야영을 위해 중요했기 때문이다(옛날에는 천막이 아주 중요한 군수물자였다). 그런데 그후 북부 아시아 전투에서 폼페이 장군이 대승하여 그때에 전공을 세운 이유로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그중에 아마 바울의 할아버지는 바울 만큼 똑똑했는지 하여 공을 특별히 많이 세우고 로마의 시민권을 받게 되었고 바울 가문은 어쩌면 시민권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추측이다. 그런데 근거는 하나도 없다. 다만 바울의 집안이 천막쟁이였다는 것과 당시 천막쟁이가 군대에게 유용했고 폼페이가 노예를 많이 잡아갔다는 듯의 여러 주변 몇가지 사실은 얼기설기 해서 그럴 듯하게 소설을 쓴 것이지 진짜는 하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가운데 이름을 Pompey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운데 이름은 모른다.
(1)바울이 원래 베냐민 지파 사람이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의 가자 위대한 인물은 이스라엘 초대 사울왕의 이름을 따서 사울이라고 지었을 거이다.
(2)중요한 것은 다소 출생이었다는 것이데 다소는 로마의 길리기아 지방의 수도였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의 경계위치에서 교통과 무역의 중심이었으며 헬라 도시여서 희랍과 동양의 인종과 문화가 섞였던 곳이다. 또한 그 지방의 수도로 학문의 중심지이기도 하여 철학과 수사학의 학교들이 있었고 상당히 학문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울의 편지들 중에 나타나는 헬라적 요소들이 바울의 다소 배경에 나왔다고 본다. 그러나 바울이 헬라 철학과 수사학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것은거의 확실하다. 특히 바울과 바울보다 조금 먼서 산 알렉산더의 필로를 비교하면 바울은 필로만큼 헬라적 영향을 받영하지 않는다. 어쩌면 다소의 회당 훈련이 헬라 문화를 바울에게 간접적으로 전달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화란의 W.Von.Unnik라는 학자는 행 22;3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증명하려 한다. 바울이 아주 어렸을 때 예루살렘으로 바울 가족이 이주했기 때문에 실제로 바울이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라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다소의 영향을 별로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행22:3에서 바울은 자기의 자서전적 자료를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내가 다소에서 낳고 이성(예루살렘)에서 자라고 이 성의 가말리엘 문하에서 내가 교육을 받았다(이것은 Von. Unnik이 증명한 바 없다). 당시 헬라 세계에서 자서전을 쓸 때에 또는 어떤 사람의 전기를 쓸 때 인생의 성장기를 이처럼 3단계로 말한다. 어디서 낳고 어디서 자라고 어디서 교육 받음을 말한다.
이런 것을 보면 교육받는다는 말은 자란 것과 교육받은 것이 같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란 것이 교육받은 것보다 앞설 수도 있다. 따라서 교육받는 것이 보통 7-8세부터 시작된다면 자란 것은 최소한 이때부터 이거나 아니면 그 전부터라는 말이다.
바로 이런 자료를 근거로 해서 W.Von.Unnik는 말하길 바울이 5-6세쯤에 바울의 식구가 예루살렘으로 이주를 해서 바울이 당시 헬라세계의 자서전적 서술방식으로 자기가 다소에서 낳고 다소에서 자란 다음에 예루살렘에서 교육받은 것이 아니고 다소에서는 다만 낳기만 하고 아주 어렸을 때 예루살렘으로 이주해서 예루살렘에서 자랐으며 거기에서 교육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사실 헬라적인 배경은 아주 약한 것이고 오히려 예루살렘 배경이 강한 것이다.
행 22:3에서의 ‘바울은 어렸을 때부터 예루살렘에서 자라서 주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라는 결론과 잘 화합을 이루느 또 하나의 바울 배경의 요소는 바울이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적 교육은 예루살렘에서만 가능했다. 유대 땅에서만 가능했다. Diaspora 세계에서는 바리새 운동이 아직 확산되지 않았고 또 어쩌면 바리새 운동은 확신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유대땅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도 바울이 예루살렘과 더 밀접한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이 스승은 랍비 가말리엘 1세라고 한다. 왜냐하면 가말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랍비가 또 있기 때문이다. 가말리엘의 아들 2세가 또 있었다. 그 가운데 바울의 선생은 할아버지 도는 아버지에 해당하는 가말리아 1세 밑에서 공부했다.
또한 바울은 자기가 히브리인이라고 한다(고후11:22/빌3:5).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Εβραιος라 하는데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Ελληνιστης 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Ελληνιστης의 정확한 뜻에 대해서는 지금도 일부 토론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다수 의견이 무엇이냐면 헬라 이방인이 아니고 헬라유대인들을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 밖의 로마 지국에 흩어져 사는 diaspora 유대인들로서 모국어인 아람말을 잊어버리고 헬라말을 쓰는 유대인들을 Ελληνιστης라고 한다.
반면에 Εβραιος는 diaspora 세계로 이민한 지 최근이어서 아직도 뿌리가 남쪽 유대 땅에 있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그래서 언어도 힙리아(아람)말을 모어로 쓰는 사람들이다.
미국에 가서 보면 안다. 이민 1세대는 한국말을 쓴다. 2세대 부터는 한국말을 다 잊어버리고 영어를 쓰는데 거기서 1세대에게 우리나라는 한국을 가리키고 거기에 사는 미국 사람은 미국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2세대부터는 우리나라는 미국을 일컫는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한국인이라 하면 아직 한국 말하고 한국을 우리 나라라고 하는 이민 1세대를 가리킨다. 2세대는 소위 미국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민 2세대를 헬라 유대인이라 할 수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런 배경을 알 때 바울이 스스로를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다. 자기가 diaspora로서 자기가 태어난 다소 출신이기는 하지만 어려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하여 거기서 자라고 아마도 아람어와 헬라어, 둘다 모국어로 쓰며 교육받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는 다소 출신으로서 Ελληνιστης로 통하였고 다시 로마 세계 diaspora로 나오면 Εβραιος로서 인정된 것 같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쓰는 편지에서 말하길 예루살렘을 팔면서 고린도에 침투한 거짓 사고들이 자기들야말로 순종 이스라엘 히브링ㄴ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주장하니까 바울 자신도 ‘자도 그 사람에 비하여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면서 ‘나도 이스라엘인-히브리인이고, 내가 아람어로 하기로 하면 그들보더 더 잘한도 조금도 자기가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의 사상적 배경은 거의 유대교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어떻게 헬라어를 잘하고 또 헬라 문화,종교적인 논술을 그 편지들에 반영하느냐?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팔레스틴과 예루살렘이 BC330년 알렉산더 대왕이 유대 땅을 정복한 이래로 유대 땅은 계속해서 헬라 사람들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비록 BC 160-164년 정도까지 80-90년동안 마카비 형제들에 의한 하스모닝나 왕가의 유대왕국 지배가 있었짐나 하스모니안 왕가도 이때쯤 되면 이미 헬라화된 왕가였다. 그래서 BC 330년부터 바울 당시까지 AD35년이라고 하면 약 350년 동안 헬라 사람들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래서 헬라말이 예루살렘에서 아주 많이 통했고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면 묘비라든가 또는 묘에 갇힌 부장품 같은데 보면 헬라말과 아람말이 같이 쓰이고 있었고 예수의 제자들 중에도 헬라 이름을 가진 안드데아,빌립 등이 있었다. 보통 헬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헬라말이 아주 많이 통했다. 심지어 랍비학교에서도 헬라 말을 가르치고 헬라 철학도 조금 가르쳤다. 그래서 헬라의 철학 사상 또는 종교사상이 유대교에도 많이 영향을 주어서 쿰란 문서에도 보면 헬라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도 헬라 문화를 충분히 바울이 얻을 수가 있었다. 또 바울 보다 조금 늦게 산 사람이며 예루살렘 출신 유대인으로 처음에는 유대 국수주의자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로마에 부역한 헬라말을 매우 유창히 쓴 학자가 바로 요세푸스이다. 요세프스가 원래 예루살렘 출신 열혈당 장군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스물 몇 살 부터 장군이 되었다고 자기 자랑을 ‘유대 전쟁사’라는 책에서 쓰고 있다. 나중에 주후 67년 쯤에 에스파시안 장군한테 항복하고 그 사람이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 자기가 계시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에스판시안이 아중에 드디어 황제가 된다. 그래서 그는 완전히 유대민족을 등지고 그 사람은 중의원에서 로마 황실에서 대접을 받는다. 그래서 거기서 요세푸스가 많은 책을 쓴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헬라어가 유창한헬라어이다.
그래서 바울 당시에 팔레스틴에서도 유창한 헬라어를 배울 수가 있었고 헬라의 사상적인 영향을 접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 헬라어는 유대교를 통해서 중계된 헬라 사상이다. 그ㅐ서 나중에 바울이 이방 세게에서 선교할 때 주로 70인역-헬라어역을 쓰는 이유는 물론 이방 사람들에게설교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울이 벌써 헬라어에 능통하여 헬라어에 익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G.Bornkamm 같은 사람들은 바울의 다소 배경이 후에 그로하여금 이방인들에게로 사도가 되게 하는데 공헌했다고 주장을 한다. G.Bornkamm의 ‘바울’이라는 책이 있는데 상당히 좋은 책이다. 아마 한국말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독일에서 엄청나게 많이 팔린 책이다. Ridderbos의 책도 읽어보는 것도 좋다. 조금 구식이지만 구식으로는 제일 잘 쓰인 책이다. 이런 책과 Bornkann의 책과 견주어서 읽으면 상당히 도움이 된다. 한국의 보수 쪽에서는 Ridderbos가 교황 다음 쯤 되는데 Ridderbos가 쓴 책중에 가장 훌륭한 책은 ‘바울’책이다. ‘하나님 나라’보다 훨씬 훌륭한 책이다.
G.Bornkamm 같은 사람은 바울이 다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로마 세계의 전체에 대한 의식이 있어서 그리고 헬라 언어를 배우고 헬라 문화에 익숙하여서 팔레스틴 우물안 개구리로서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세계적인 선교사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게 설득력있는 설이 못된다.
첫째로 바울은 설령 팔레스틴에서 자랐지만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 대한 의식이 항상 있었을 것이다.
둘째 앞서 이야기 한대로 예루살렘 스스로가 헬라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로마 사람들의 지배를 받아서 헬라 언어와 문화를 습득할 수 있어서 헬라 세계에 대한 의식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지역이었고
또한 당시 유대교는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교의 선전을 열심히 했던 때이다. 특히 헬라 세게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이 이방의 우상숭배체 참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상 숭배의 헛됨과 미련함을 증명하고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옳고 유대교의 율법에 의한 삶의 청결함, 순결함, 의로움 등을 굉장히 자랑하는 문서들을 많이 발달시킨 때였다. 그래서 바울이 그런 것을 많이 미리 접했을 것이다.
또한 갈5:11에서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전에는 할례를 선포하는 유대 선교사 노릇을 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 받고 나서는 할례와 율법을 선포하는 유대 선교사가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선교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를 들어 G.Bornkamm도 이렇게 주장한다.
바울 당시에 유대교에는 선교사라는 직업이 없었다. 또 선교사라는 이름도 없다. 오늘날까지도 유대교는 선교사라는 이름이 없다. 유대교에는 구조상 선교사가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토론에서 요세푸스의 책이 중요한데 그의 책을 보면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아디아비니 왕한테 가서 모세 율법을 갈쳐서 그 왕으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유대교가 당시 헬라 사람들에게 선교를 했느냐? 않했느냐?를 토론할 때 상당히 중요하다.
또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욕할 때 ‘너희들이 제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산을 넘고 바다를 거치고 온갖 곳을 돌아다니고 하나를 얻으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갈 자로 만들다’는 말도 이 context에서 많이 토론이 된다. 이말은 어뜻 보면 유대 선교사가 유대교 신봉자 하나를 얻기 위해서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넌 것 같이 그렇게 열심히 헌신적으로 일한 것 같이 보인다. 그래서 요세푸스 이야기와 예수의 말씀이 이런 갈등을 있을 때 토론이 된다.
앞어 이야기한대로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선교사가 있지 않았다. 아시 말하면 한 종교 공동체에 의해서 그 공동체의 신앙을 선전하도록 보냄을 받은 자는 정식으로 없었다는 말이다. 바로 요세푸스가 이야기하는데로 아나니아같은상인이 장사하는 동안에 사적으로 자기와 접촉할 수 있는 사람에게 모세 율법을 가르치고 여호와를 증거해서 유대교 신봉자는 얻는 일을 더러 있었겠으나(요세프수는 아나니아를 바리새인이라고 한다)특히 예수 말씀을 유의해서 diaspora유대인들의 증거로 유대교의 매력을 느낀 이방인들을 팔레스틴 유대인들이 ‘아, 저런식으로 우리 회당에 한 발 걸치고 있으면 재미 없으니 우리 식으로 철저히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대로 회심시키기 위해서 그 때에 바리새인이 팔레스틴에서 파송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더러 있었을런지 모르나 유대 회당 하나가 정식으로 어떤 사람 하나를 지명하여 ‘너는 유대교를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파송하는 이런 일은 유대교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 회심 전에 혹 할례를 선포하는 일을 가끔 했어도 그것은 전적으로 비직업적인 것이고 비항구적인 것이고 아나니아와 같이 장사같은 다른 일을 하는 도중에 가끔 자기와 접촉하는 사람에게 몇 번 소개한 정도였을 것이라는말이다.
그래서 바울의 배경이 바울이 나중에 이방인 선교사가 되는데에 공헌을 했다는 것은별로 신빙성이 없는 논지이다.
*바울의 신학적 배경*
바울은 도대체 다메섹 도상 회심 전에 어떠한 신학을 가지고 있었느냐? 여기서 중요한 구절, 빌3:5,6에서 두 문장이 나온다. 이 구절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 회심 전의 자기 과거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팔일만에 할례받은 언약 백성의 일원’이었다.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주신다. 베냐민 지파이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다. 히브리인의 원래의 의미는 diaspora세계에 사는 사람은 모국어(히브리어-아람어)를 지탱하는 사람이다. 그의 부모들이 일찌감치 팔레스틴에 이주 간 것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엄격히 말하면 Ελληνιστης인데 자기가 이렇게 말한다. 다음 두 구절이 중요하다.
κατα νομον φαρισους
κατα ζηλος διωκων την εκκληια
이 두문장에 바울의 신학적인 입장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빌 3:5의 “ κατα νομον φαρισους”라는 구절이 바리새인을 가장 잘 정의하는 말이다.
예수 바울 당시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정확하게 어떤 신학적인 견해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대강 알지만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오늘날 우리는 바리새인이 누군지 알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바리새인이라는 말 자체도 잘 모른다. 설이 두가지가 있다.
미국의 유명한 학자 J.Nensner는 신약의 증거들, 유대교의 여러 증거들, 랍비 문서들을 다 뒤져 가지고 바리새인에 대한 책을 썼는데 거기보면 한마디로 바리새인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거의 확실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충산층의 경건운동으로서 율법지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고 청결운동-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출 19:5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상을 완성해야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출 19:5에 인용된 벧전 2:9에 그래서 교회에 전가된 하나님의 이상이 ‘너희들은 왕은 제사장들’이다. 원래 히브리어로는 ‘너희들은 제사장들의 왕국이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제사장들의 왕국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비록 제사장들이 아니고 평신도 중간층 신분이었지만 ‘제사장적 이상’인 순결을 완성하기 위해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목욕하고 기도하기 전에 손을 씻고 밥먹기 전에 손을 씻고 하는 이러한 제의적인 순결성을 유지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성전에 제사장들에게 적용되었던 레위기의 율법들까지도 자기들에게 적용할려고 애쓴 사람들이라는 것을 거의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았는지 잘 모른다.
J.Nensner에 의하면 또 하나 확실히 알 수있는 것은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열심히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채소까지도 십일조를 했다. 그래서 박하라는 것도 드렸다. 그래서 예수님이 ‘채소까지 십일조를 열심히 한 놈들이 형식을 잘 갖추었는데 외식하는 놈들이다’고 한다.
그런데 빌3:5에 대한 말이 바리새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말이다.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바리새인을 정의하니까 제일 정확하다. 그래서 나의 스승 O.Betz는 κατα νομον φαρισους 가 바리새인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리새인은 율법이라는 기준에 의해서 바리새인이 되었다. 바리새인의 바리새인됨은 율법에 의해 결정된다. 바리새인은 율법에 가장 철두철미한 사람들이다.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고 지킨 사람들이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자기가 더할 수 없이 철저히 율법주의자 바리새인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바울의 신학적 배경은 율법을 하나님의 계시로 철두철미하게 믿고 그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연구하고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받겠다고 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다
다음으로 열성(κατα ζηλος)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자기가 교회를 핍박한 자다를 것이다. κατα νομον φαρισους와 κατα ζηλος가 평행절을 이루고 있다. 이 때의 열성이라는 말은 심리학적인 카테고리가 아니라 신학적인 카테고리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열성’은 이른바 ‘열성 신학의 전승사’를 가지고 잇다. 열혈당원 이름이 ζηλοται ‘열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의 모범은 바로 마카비 형제들이었다. 그러니까 주전 164년에 유대교를 폐하고 각 동네마다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모든유대인들로 하여금 그 신상에 와서 제사하고 절하라고 할 때에 ‘모딘’이라는 동네의 제사장이었던 마카비 형제의 아버지, 마카티아스가 안티오쿠스의 영을 받드는 헬라 장교를 창으로 찔러 죽이고 거기에 동조한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다 죽이고 ‘하나님의 명예와 언약의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은 나를 따르라’고 해서 드디어 이른바 그 유명한 카마비 반란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마카비 형제들은 언약과 율법, 하나님의 명예와 이스라엘의 순결을 위해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한 마카비 형제들은 비느하스를 모범으로 가지고 있었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손자로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에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가나안 족속하고 동침하므로 비느하스가 그를 창으로 찔러 죽여서 피를 흘렸다. 그는 하나님의 명예와 이스라엘의 순결을 위해 그의 열성이 불타서 그랬다. 그래서 비느하스가 열성 신학의 대표자이며 창시자이다. 민25:1-18/시106:21/ 마카비1서 2:21,26,54/마카비4서18:12 등등에서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위해 열성을 가진자로서 이스라엘의 순결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를 창으로 찔러서 피흘림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속죄의 제사로 인정되었다.
마카비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마가비 1서 2:23f에 보면 이스라엘의 순결을 짓밟고 율법과 성전을 더럽히고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들을 죽임으로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제사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 ‘열성신학의 전통’은 이스라엘 그리고 그 신앙,성전의 순결을 회복하기 위하여 율법을 어기는 자들을 징범하던 운동이다. 특히 외세와 합류하여 유대의 정통신학에서 벗어나는 유대인들을 제일 먼저 그리고 혹독하게 핍박하고 외세에 대항하여 투쟁하던 운동이 열성운동이다. 전통신앙에서 빗나간 이단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속죄하는 제사로 생각했다(민25:13).
그러면 어떻게 이스라엘의 순결을 더럽히고 정통신학을 더럽히는 자들이 누구냐? 물론 마카비 시대에는 헬라인들, 셀류키드 왕조와 불의하게 협조하는 자들이다. 로마 시대-예수 당시,바울 당시에는 로마 사람들과 협조하는 세리들,장사치들,일부 사두개파등 이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리스도인들도 들어가게 된다. 요16:2에서 출회하는-너희를 이단자라고 회당에서 내쫓는 일만 발생할 것이 아니고 앞으로는 너희를 죽이는 자들이 너희를 죽임이 곧 하나님께 예배-속죄의 제사를 하는 것이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열성의 신학’이다. 그래서 열성의 신학은 항상 피를 동반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언약과 율법과 이스라엘의 순결을 위해서, 그 길에서 어긋나고 그것들을 더럽히는 자들을 죽이는 것으로 ‘열성의 신학’이 나타났다. 그래서 ‘열성의 신학’은 항상 피를 동반하고 폭력을 동반한다. 그래서 피흘림이 이스라엘에 대한 속죄의 제사로 인정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바울 당시의 열혈주의자들도 이렇게 폭력적인 운동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의 신학적인 과거를 바로 그 유명한 열성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바울이 교회를 핍박하되 폭력으로 했다. 갈1;14/빌3:5 등에 보면 ‘교회를 잔해했다’-곧 폭력을 휘둘렀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가 말하는 주후 66년에 로마 전쟁을 일으킨 열심당원이었느냐? 아마 거기가지는 안갔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활동한 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32-34년 사이로부터 64-65년 네로에 의해 수교당할 때까지 일 것인데 빌립보서를 언제, 어디서 썼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로마의 감혹에서 썼다는 옛전통적인 견해가 옳다면 나는 62년이 후에 쓴 것으로 본다.

AD 32-34 AD62 AD65-66
ꠐ다메섹 회심 ꠐ ←----ꠐ빌립보서 씀 ꠐ전쟁 폭발
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ꠊ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ꠊꠏ
그러나 빌립보서를 가이사랴나 에베소 감옥에서 썼다면 그 전에 썼을 가능성도 많다. 그래서 바울이 32-34년 쯤 열혈당 원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가지고 AD66년에 드디어 전쟁을 폭발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에서 이 전에 자기의 신학적인 과거를 쓰고 있다. 이전에는 보수 바리새인들이 특히 shammai학파의 영향을 받은 보수 바리새인들이 나중에 열혈당으로서 정치,군사 운동을 발전하는 그런 사람들의 경향을 점점 쌓아가고 있었다. 저점 열혈다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이 아마 32-34년쯤 열혈당원은 아니지만 신학적으로 그들과 사상적인 뿌리를 경향을 같이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신학적인 배경을 조금 더 정확히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보다 조금 전에 팔레스틴에 큰 두 학파가 있어서 팔레스틴에 예수 당시부터는 점점 랍비 학파들이 점점 일어나기 시작하여 랍비가 자기 집에서 랍비 학교를 시작한다. 그런데 나중에 AD 100년 이후 특히 AD3-4이후 랍비들이 자기들의 가라침의 전승을 소급해서 거슬러 올라갈 때 예수 당시 다양했던 랍비 학교들을 대개 큰 두 학파로 從道를 했다.
하나는 Shammai학파이고 하나는 Shammai제자로 시작한 Hillel학파인데 Hillel은 바빌로니아에서온 유대인으로서 Shammai 학교에서 율법을 배웠다.
Shammai은 아주 극보수자이고 Hillel은 자유주의자였다. 그런데 나중에 랍비 정통에서는 Hillel학파가 승리한다. 그래서 지금의 랍비 문서들을 읽어보면 Hillel을 많이 칭찬하고 Shammai가 아주 인간성이 좋지 않은 앞뒤가 꽁꽁 막힌 사람으로 나온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이방인 하나가 Shammai한테 와가지고 “라비여 내가 발을 하나를 들고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율법을 나에게 가르치면 내가 할례를 받고 유대인되 되겠소”하니까 Shammai가 몽둥이로 두들겨서 쫓아버렸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또 Hillel학파에 가서 똑같이 말했다 그러자 Hillel이 말하기를 “아 간단하다. 남이 너에게 해주지 않기를 바라는대로 너도 남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 이른바 예수의 사상수훈에서의 황금률의 부정적인 표현을 말하면서 이것이 율법의 전부라고 했다. 예수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긍정적인 표현을 했는데 Hillel은 부정적으로 표현해싸.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지 않은대로 너희도 남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말라. 남이 너에게 뺨을 때리는 것을 원치 않으면 너도 뺨을 때리지 말라는 것이다. 황금률의 반대를 말해서 그 사람을 얻었다는 이야기이다.
Hillel은 이렇데 율법에 대해 자유주의자였고 Hilel은 인간성이 풍부했고 또 이방인들에 대해 열려진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유대인들로 환영했다. 반대로 Shammai는 꽁꽁 막힌자로 율법주의자로 인간성이 부족했고 이방인들을 반대하는 국수주의자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사상적으로 Hillel학파에 속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일단 바울의 사상이 상당히 자유주의적인 면에서 봤을 때 이방인들에게 열려진 태도로 인해 Hillel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바울의 선생 가말리엘은 지금까지는 Hillel의 손자로 보았다. 그래서 Hillel의 손자 가말리엘에게서 Hillel의 가르침과 사상을 바울이 이어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열려진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이미 이방인들에게 율법(할례)을 전하는 선교일도 종종 했을지도 모른다(갈5:11). 그랬다가 나중에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연히 이방인 선교로 나갈 수 있도록 다 준비가 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했다.
특히 J.Jeremias는 전통 견해를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 바울이 구약을 해석하는 방법과 Hillel이 구약을 해석하는데 도입한 이른바 미돗트라는 방법을 비교해 볼 때 바울이 Hillel의 개발한 구약해석방법을 택했다. 그러니까 바울이 Hillel학파에 속한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까지 증명할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주로 J.Newsner의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가말리엘이 Hillel의 손자이기는 커녕 Hillel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 더러 도리아 가말리엘이 사상적으로 Shammai학파에 가까왔다. 바울의 선생 가말리엘은 위대한 학자였다. 그래서 가말리엘이 죽었을 때에 랍비 문서에 ‘의가 세상을 떠났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가말리엘이 위대한 학자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가말리엘의 가르침은 별로 전승이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말리엘이 위대한 하자라는 것이 랍비 문서에 나오는데 실제로는 가말리엘의 가르침은 몇개 전승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 몇개 안되는 가말리엘의 가르침의 전승을 분석했을 때 아주 보수적인 Shammai학파에 가까웠다. 따라서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Hillel학파가 아니고 도리어 신학적으로 Shammai학파에 가까왔을 것이다. 이것을 더욱 뒷받침하는 것이 열성 신학이다. 열성신학은 Shammai 학파에더 가깝다. 그래서 빌 3:5이 바울의 신학을 도리어 Shammai학파에 가까운 신학으로 그리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랐다는 것도 J.Newsner의 연구에 의하면 도리어 Shammai학파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신학적인 배경을 이렇게 요약할 수있다.
부르심을 받기 전에 바울은 아주 극단적으로 보수파 바리새인으로서 Shammai학파에 속하였고 열혈당의 신학적 동기로 교회를 팝박한 자였다. 이렇게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자로서 이방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방 선교사로서는 전혀 부적격자였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바울의 신학적 배경을 보았다.
2.핍박자 바울
율법과 조상의 전통을 위한 열성을 가졌던 바울은 모세 율법과 성전을 나사렛 에수의 이름으로 비판하던 그리스도인들, 특히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다. 스데반을 중심으로 한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과 성전을 비판했다. 스데반의 긴 설교에서 알 수 있다. (행6장 7장 특히 6:11,13ff) 그래서 스데반을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욕했다고 고소한다 .그러니까 열성당원은 율법과 성전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싸웠다. 이처럼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열성을 가졌던 바울이 자연히 율법과 성전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비난하던 그리스도인들 특히 헬라 유대 그리스도인들(Ελληνισται) 그중에서도 스데반 그룹을 핍박했다.
왜냐하면 Pirqe Aboth 라는 미쉬나의 조그만 책이 있다. 이 책의 1:2을 봄녀 세상이 세 기둥 위에 서 있다. 세 기둥에 의해 지탱되는데 곧 율법과 성전 그리고 선한 행위의 세 기둥에 의해 지탱된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율법,성전,선한행위의 세 기둥 위에 지탱된다. 이런 옛날 말들은 그 숙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항사 생각해볼려고 해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를 말한다. 성전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 그리고 선한 행위는 도덕적인 인간관계를 의미한다. 이 세개가 없으면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이 세상이 암흑이 빠지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없으면 인간이 스스로 우상을 만들어 가지고 다 자기 주장이 있어 거지고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한 행위가 없으면 또 마찬가지이다. 구구 절절이 맞는 말이다. 그들은 세상이 율법,성전,선한 행위 이 세 기둥 위에 지탱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 중에 두가지를 공격하니 그냥 놔 주어서는 되겠는가? 당장에 비느하스이 열성, 마카비의 열성이 나오는게 당연하다. 그래서 잡아 죽여 피를 흘리게 해야 한다. 그래서 갈1:13/빌3:5ff/행22:3ff 를 보면 바울은 자기가 율법에 대한 정열 때문에 교회를 핍박했다고 한다. 그래서 왜 교회를 핍박하였는지의 한가지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율법을 어겼다고 보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첫째 이유이다.
둘째 이유는 아마 갈 3:13에 나오는 것 같다. 갈3:13에 신 21:23이 인용이 되어 있다. 당시 신21:23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이해되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갈 3:13에서 유추할 수 있지만 최근에 이것을 확인하는데 4Q Nah 7ff에서 바로 신21:2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 있다. 또한 11Q Temple(11번째 나온 Temple scroll이라는 문서) 64:6-13에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자들에게 신 21:23을 적용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신21:23이 당시 십자가에 못박혀 죽거나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한 신명기 이해에 의거해서 유대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이 부화시키고 높이신 그리스도라고 선포하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인들의 선포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이 저주했는데 그 저주한 증거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신21:23)이 예수를 저주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목박혀 주저받은 예수를 부활시키고 높이신 메시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메시야는 정의상 하나님의 축복의 채현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주 받은 자를 높이고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우편에 높이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다. 자기가 저주한 자를 그리스도로 세우는 모순을 하나님께서 범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메시야라고 선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케기르마가 율법의 열성을 가진 바울에게도 거슬린 것이다. 그래서 아마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근본이유가 될 것이다(행5:30/10:39/13:29/벧전2:24).
또한 저스틴 마터,순교자 유스티누스가 유대인 Thipo와 나눈 대화편의 39:7/89:1-9을 보면 계속해서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받은 것으로 나온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스캔들이었다. 그래서 갈 5:11/고전 1:23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거침돌이 되고....하나님이 저주를 선언했는데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하나님이 축복의 메시야의 증거라고 하니 이것은 거침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이유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이유인데 이들은 사실은 한 이유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야인 에예수의 이름으로 율법을 비판했기 때문에 그들의 율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에 근거한 것일 분 아니라 그리스도이 십자가와 부활을 구원의 사건을 해석하는 데에도 근거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양자택일을 하여야 했다. 율법이냐 아니면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냐. 율법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게 저주를 선언하는데 과연 율법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하는 십자가에 달린 자가 진짜 메시야야 그리스도냐 이처럼 율법이냐? 아니면 그리스도냐? 의 양자 택일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예루살렘의 헬라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주로 바울의 핍박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집작이된다. 히브리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기는 했는데 그러나 그들은 보수적으로 유대 지방에 할 수없이 살아야 하였기에 어느 정도 적응하여 핍박을 덜 받았던 것 같다. 그러나 헬라파 유대인들, 특히 스데반에 의해서 대표적으로 볼 수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은 예수의 정신과 예수의 십자가의 구원의 사건을 정확히 이해를 해서 율법을 비판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메시야라고 활발히 선포하자 바울은 그들을 폭력으로 대항했던 것이다. 그의 율법에 대한 열성에 의해서 그들을 폭력을 핍박한 것이다. 아마 고전 12:3에서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고는 예수가 주라고 말할 수 없고 누구나 성령으로 말하면서 예수가 저주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없다. 고 한다 .여기서 두번째 문장 ‘예수가 저주 받은 자다’는 말은 바울이 자기가 핍박하던 사람들에게 선언하도록 강요하던 문장형식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가지고 너 많은 사람이 있는 이 자리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저주 받은 자라고 말하라 그러면 내가 놓아주겠다. 계속해서 예수가 주라고 하면 영청신세이고 돌로 쳐 죽인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미 핍박하러 돌아다니면서 예수가 저주 받은 자라고 말하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바울신학 제5강
지난번에 바울이 그리스도인 되기 전에 가진 신학적인 입장과 바울이 교회를 핍박한 이유까지 했다. 이 시간에는 다메섹 사건을 하겠다. 다메섹 사건을 위해서 무슨 준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1.바울의 다메섹에서의 변화에 대한 준비가 있었느냐?
바울이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은 그가 회심전에 초대교회,특히 헬라파 유대교의 선포를 알았음을 전제로 한다. 교회가 무엇으로 선포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선포라는 것이 마음에 거슬려서 교회를 핍박했을 것이다.
그래서 회심 전에 바울은 초대교회 특히 헬라파 유대교회의 케리그마를 알았다. 그는 아마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부활된 주라고 하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알았을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간들의 죄를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 구원의 사건의 의미를 알았고 그리하여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이 효력을 잃었다는 정도의 헬라 유대교회의 케리그마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나번에 이야기 한대로 바울이 교회르 핍박한 이유 두가지 중에 첫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율법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정도는 바울이 신학적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것을 준비라한다면 준비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것은 긍정적인 준비라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준비이다.
그런데 다메섹 사건의 바울의 회심에서 준비된 것이 있었느냐를 논할 때는 대개 심리적 준비과정이 있었느냐를 주로 논한다. 여기서 주로 토론되는 자료는 롬 7:7-25인데 이 구절이 바울의 자서전적인 자료로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를 얻고자 하였던 바리새인으로서의 내적 강등을 그리고 있는 바울의 자서전적인 성격의 것이냐?
아니면 바리새인적인 것으로 바울 자신이 과거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지킴으로 의를 얻고자 하는 바리새이으로서의 투쟁과 갈등을 그리고 있는 것이냐?
이것이 바로 토론의 주제이다. 만약 그렇다면 롬 7장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전의 심리적 준비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이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을려고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의 죄악스러움을 깨달아서 율법으로는 도저히 의를 얻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정말의 소리르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아마 여러분들이 다음과 같은 설교를 들었을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핍박한 그리스도인들이 다 평화롭게 순교학도 의연하고 찬란히 얼굴이 빛나고 그래서 뭐 저런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있는가보다고 생각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핍박하다가 점점 핍박당하는 그 사람들의 신아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결정적인 단계가 다메섹에서 일어났다. 요새는 그런 설교 하지 않아도 옛날에는 많이 했다. 한국에서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이런 설교가 많으데 요새는 대개 그렇게 보지 앟는다. 그것은 다 가짜다.
왜냐하면 빌 3:5f와 갈 1:14ff을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의 다메섹 이전의 바리새인으로서의 삶을 그리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본다. 긍정적으로 볼 뿐만 아니라 빌 3:5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율법지키는데 어려움을 느기고 내가 율법을 못지켜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가 아니고 나는 이만하면 됐다. 나는 흠없는 자다.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바리새인으로서의 과거, 율법의 행위를 알던 과거에 대해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 여기지 않는다. 전혀 긍정적으로 만존해 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롬 7장을 말할 대 요새는 바울의 바리새인으로서의 과거를 자서전적으로 그리는 것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롬 7장이 무엇이냐? 크게 두가지 설이 있다 바리새인으로서의 자서전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요구와 그래서 의인으로 살고자 하는 과정 중에서 겪는 투쟁,갈등 이런 것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또한 동시에 아직 죄인ㅇ니 상태로서 성화의 과정에 있는 소위 Simuliustus et Peciator를 나타낸 말이다. 그리솓인이 믿은 후의 성화의 과정을 그린 것이라는 이런 설이 있다.
그런데 요새 지배적인 설은 그게 아니고 이건 전혀 자서전적인 요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상황을 그린 것도 아니다. 바울이 아담의 상황, 또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이 구원의 사건의 빛 아래에서 보아서 객관적인 상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새 주로 학자들이 많이 취하는견해이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제일 먼저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제일 먼저 강력하게 창시한 사람은 W.Kummel이었고 그 이후 모든 Bultmann학파가 있고 그것을 좀더 세련되게 한 것이 E.Kasemann이다. 그래서 Kasemann의 주석책을 보면 이 설이 아주 대표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객관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롬 7장에는 자서전적이 아니고 객관적인 것이니까 바울의 일생에 잘 맞출 수없는 요소들도 포함되어 있고 또 거기에는 보통 인간의 경험들 특히 율법을 지키는데에 대한 회의가 극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보통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율법 지키는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즉 그리스도인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율법지키는 행위가 사실은 얼마나 어려운 행위였고 불가능한 행위였나를 안다. 유대인 자신들은 피상적으로 지키는 것으로도 만족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의가 아니고 진정한 의는 이러이러한 것인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깨달음을 어떻게 알게 되느냐?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롬 7장에는 보통 인간의 경험들 특히 율법을 지키는데에 대한 인간의 능력에 대한 회의가 극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완전한 무력에 대한 통찰력은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이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으며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에 대한 통찰력은 열성 있고 성공적이었던 바리새인 바울에게는 오직 회심 후에야 비로소 생겼을 것이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한동안은 이런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어던 사람들은 견해 1을 어떤 사람들은 격해 2를 부활시키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 그런데 나는 3의 견해가 맞다고 본다.
견해1:자서전적인 성격으로 보는 견해
견해2:회심 이전의 심리적 준비과정으로 보는 견해
견해3:아담적 인간의 객관적 실존을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의 빛 아래 조명한 것이라는 견해.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Kummel의 책에서부터 읽기 시작하여 최근에 나온 J.Dunn의 로마서 주석도 한번 보고 H.Gundry(LA 옆에 있는 바바라에서 가르치는 복음주의 학자)의 Article을 보라. 이런 사람들의 최근 경향은 이 두설(1,2) 중에 하나를 부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견해 3이 일관적으로 맞다고 보느데 다만 거기에 내가 한가지 좀더 조정을 한다.
그러니까 롬 7장은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의 상황을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한데 이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 인간을 그리는데 있어서 바울은 자기의 과거 율법 아래에서의 경험을 자료로 쓰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도둑질 하지 말라는 계명이 자기로 하여금 탐심을 일으키는 경험을 바울이 한다고 하는 인간으로서 그런 경험을 바울은 자료로 쓰고 있다. 그래서 견해 3이 맞는데 바울은 어떻게 해서 율법 아래 있는아담적인 인간의 상황을 알수 있느냐 하면 자기 스스로 율법 아래있는 아담적 인간으로서 과거에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자서전적인 요소가 있다. 과거 율법 아래서의 자기 경험을 일부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자서전적인 요소들이 일부 있다. 그런데 율법 아래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그런 율법에 대한 절망은 과거의 자기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새롭게 깨달은 바 갈1:14이나 빌3:5f에서의 바울은 우리에게 자기 과거에 대해서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하기는 커녕 율법의 의로는 흠없는 자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서 만족하고 썩 자랑스러운 과거를 생각했다. 그래서 이 7장의 일부 바울의 자서전적인 요소들이 있으나 율법의 지킴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율법을 통해서 의를 얻는 것을 절망적으로 본 것은 과거의 요소들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깨달은 뒤에 자기가 자기의 과거를 뒤돌아 보았을때 ‘아 율법 아래 있는 아담적인 인간의 상황이 이것이구나’하고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롬7장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에 대한 심리적 준비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이 회심은 심리적으로 준비되었다거나 조건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준비가 있었느냐 할 때 일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를 알았던 것은 긍정적인 준비라기 보다는 사실은 부정적인 준비였다. 왜냐하면 그 케리그마에 반항을 했으니까 그렇다. 그러나 심리적 준비 같은 것은 없다. 예날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바울 신학을 심리적으로 이해하려고 그랬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부활하신 에수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본 사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바울에게 나타났다. 이때 쓰는 전문 언어가 ωφθη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 부활하사 예수가 보여졌다는 말이다. οραω의 aorist passive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보여졌다.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에수의 나타남을 말하는 전문적인 동사인데 바울은 바로 이 동사를 고전 15:8에서도 계속 사용한다. 그리스도가 죽고 장사되고 하나님께 일으키심을 받아서 게바에게 보이시고(ωφθη:보인 바 되고)그 다음 열 두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 야고보에게 나타나고 그 다음 모든 사도들, 그다음 오백여 형제들에 나타난다고 하는 series가 두개의 series다. 나에게도 나타났다(8절). 이것이 나타남의 series이다. 그런데 이 게바에도 ωφθη를 야고보에게도 ωφθη를 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다메섹 도상에 부활하신 에수의 나타남은 부활하신 에수의 게바에게 나타남과 야고보에게 나타남,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남과 동질의 것이다. 같은 Quality의 나타남,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이다. 그러니까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았다(εορακαΊ고전 9:1). ‘내가 주를 보지 않았느냐?’바울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스스로를 부활의 증인들 중의 하나로 꼽는다. 그런데 자기가 마지막 증인이다. 자기에게 알려진 부활한 예수의 나타남은 여기까지이다.
그런데 만삭되지도 못한 자기에게도 나타났다. 그래서 만삭되지도 못한자는 문자 그대로 하면 유산된 자 같은 나에게 도 나타났다는 것이다. 자기가 부활의 증인들 속에 끼어들어간다. 끼어들자마자 그 문을 닫아 버린다. 자기가 마지막이니까 자기 뒤에는 없다는 말이다.
부활하신 예수의 나타남. 그러니까 그 뒤에도 예수가 가끔 나타나겠지요. 황상봤다는 사람이 하도 많으니까..... 그런데 그것은 부활-나타남과 다르다. 전문어로 쓸 수 있는 부활-나타남 그것은 바울이 아는데 까지는 여기까지 밖에 없다. 그런데 바울이 그 속에 자기를 유산된 자 같이 힘들여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마지막 부활의 증인으로 끼원놓고는 넣자마자 문을 닫아 버렸다. 그래서 자기가 예수의 부활의 증인들 중의 하나다. 따라서 초대교회의 사도직의 객관적인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본다. 누가에 의하면 초대 교회의 사도직의 조건이 두가지이다. 누가가 맛디아를 유다 대신 뽑는데 사도직의 조건을 두가지로 내었다. 하나는 세례요한 때 부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때까지 우리와 함께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예수에게서 배워서 예수를 증거할 수있는 자, 즉 역사적 예수의 증인, 두번째는 부활의 증인 이조건을 엄격히 바울에게 적용하면 바울은 사도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에게서 예수가 세례 받을 때부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때까지 바울이 예수를 따라다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가 바울을 사도로 인정했느냐 안했느냐 하는이것이 중요한 신학적 논점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바울을 한 두번 사도로 부르지만 그 외에는 사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에게는 사도는 12사도만 사도였느냐? 누가가 이른 바 구원사적 신학에 의해서 열두 사도에게만 사도직을 국한시켰느냐 아니면 바울도 사도로 인정했느냐? 이런 것이 누가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논점이다. 그런데 그것과 관계없이 바울은 이 사도직의 조건을 무엇으로 보느냐면
(1)그리스도의 부활-나타남(ωφθη)의 증인이어야 할 것
(2)그 부활-나타남 때의 높임 받은 주로부터 정식으로 보냄을 받았을 것.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사도라도 주장을 한다. 어쩌면 방금 예로 든 누가와 바울에게 있어서의 사도직에 대한 조건의 정의가 약간 다르면서도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 이유는 초대교회에서 바울의 사도직이 그렇게 인정이 안되어 가지고 바울이 자기의 사도직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 가령 갈라디아에서도 바울의 사도직이 좀 의심을 받아 가지고 문제가 많았다. 고린도 교회에서도 문제가 많았고 어쩌면 로마 교회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교회에서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잘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교회들처럼 자기 사도직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있거나 이를 부인하는 적대자들이 침투한 교회들에 쓰는 편지의 서두에는 바울이 항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도로 임명된 바울’이라는 자기의 사도직을 제일 먼저 강력히 내세운다. 그러나 자기의 사도직에 대해서 다 인정하고 문제삼지 않는 빌립보 교회나 데살로니가 교회들에 쓸때는 구태여 자기가 사도라는 것을 별로 쓰지 않는다. 그 편지의 서두에서는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 디모데와...에게 편지를 쓴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자기의 사도직의 권위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편지의 서두에 자기의 사도직을 강조한 편지인 롬,고전,고후,갈라디아서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교회들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이 문제거리였다. 고린도나 갈라디아에서는 문제가 되고 로마 교회에서 사도직이 인정되지 않는지 확실히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이 상당히 자기의 사도직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이 사도였는가 아니었는가를 다루면서 자기가 자꾸 사도라고 주장을 하는 것은 아마 예루살렘에서 파송받아서 고린도에 온 자들을 바울이 냉소적으로 위대한 사도, 초특급 사도라고 냉소적으로 그린다. 그러면서 그들을 거짓사도라고 한다. 이 친구들은 예루살렘에서 임명장, 추천장을 가지고 와서 ‘우리는 사도직이 예루살렘에서 다 공인된 사람들이다’고 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것이 하나도 없다. 종이짝 한장도 못 내놔봤다. 박사학위도 없고 목사 안수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친구가 자기가 돌아다니면서 사도라 한다. 이처럼 고린도에 와서 고린도 교인들을 충동하니까 그 교인들은 ‘아 진짜 바울의 사도직에 결함이 있긴 있는가 보다. 왜 사도라면 당연히 우리더러 헌금 내가지고 그 헌금으로 월급 받고 먹고 살아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집에 취직해서 열심히 천막을 만들어 가지고 월급 받아서 먹고 살면서 우리 교회에서 목사 노릇하는 것을 보니까 뭔가 캥기는게 있나보다’ 이렇게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고전9:1 에서 ‘내가 주를 보지 않았느냐?’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하신 주를 보는 것이 사도직의 첫째 되는 요건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사도임을 증명한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그렇다. 그러면 에수도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은 복음으로 먹고 살아가라고 그랬는데, 그권리를 포기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천막 사업에 취집해 가지고 먹고살았느냐?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그렇다. 왜 바울이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았느냐?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공짜로 선포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자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자기는 사도의 당연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다고 한다. 자기가 사도직에 뭐 캥기는게 있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고 한다. 고전 9장에서는 그 정도로 설명하다. 그런데 고후 10-13장에까지 보면 이 친구들이 자꾸 그걸 가지고 물고 늘어졌다. 바울이 자기네들과 함께 그 교회에서 목사할 때는 자기들한테 돈 하나도 안받는 것이 바울이 사도직에 결함이 있으니까 캥기니까돈 한푼 안받고서는 에베소로 간 뒤에는 자꾸 디모데를 보내고 디도를 보내 가지고는 자꾸 헌금하라고 한다. 명목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회에 갖다 준다고 헌금하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 사기꾼이라 한다.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오해하고 욕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거짓 사도다 결함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안수증,임명장 잔득들고 온 사도를 보라. 당당히 사도권을 행사하고 헌금 내라고 해서 먹고 사는데 바울은 그렇지 못하고 여기 있을 때는 말도 똑똑히 못한 친구가 간 뒤에는 편지는 좀 무게 있게 쓴다. 진짜 그렇다. 고린도전후서를 읽어보라. 그러니까 바울이 아주 냉소적으로 말을 해요. 그렇게 전 상황에서 방루의 사도직을 의심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진짜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했든지 안했든지 바울은 그들이 자기 사도직을 인정하고 자기 복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고 한다(갈2:9). 그런데 예루살렘 사도를 빙자하여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이른바 사도들은 바울 사도직을 부인했다. 그럼 그들이 맞느냐? 아니면 자기가 사도라고 끝까지 주장한 바울이 맞느냐? 우리가 지금 현재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 그래서 고후 10-13장이 바울은 자기의 사도의 표징들을 댄다. 사도의 표징이 무엇인가?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할례를 받고 율법 잘지키고 또 예루살렘과 연관되어 있고 또 환상을 보고 큰 성령의 은사를 주장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의 사도의 표징이라고 내세웠다. 그래서 바울이 화가 나가지고 그런 것들이 사도의 표징이라면 나도 그들에게 부족할 것이 하나도 없다. 나오 아바르함의 자손이고 베냐민 지파이고 8일만에 할례를 받았도 또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고 나도 성령의 은사, 환상을 보고 무슨 이적을 행하고 그런 것들로 말하자면 그것데서도 뒤질 것이 하나도 없다. 나도 천상의 3층까지 갔다온 사람이다. 그리고 능력의 이적을 다 한 사람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 말을 하자마자 뭐라고 하는가? 이런 것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들이나를 자꾸 이런 말을 하도록 병신 만든다. 강요해서 내가 바보같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표준이 아니라 그들은 그런 것을 표준이라 하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나도 그런 것 다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진짜 사도의 표징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으로서 그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여서 그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고난을 자기 사도직의 표지으로 바울은 내세운다. 그래서 십자가의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서 그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것, 자기의 사도직의 고난을 표징으로 바울은 내세운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서 바울의 사도직을 그렇게 강력하게 내세운 것은 얼핏 읽으면 너무 자기 망상증에 빠진 자기 집착증에 빠진 정도로 오해받을 만큼 자기의 사도직을 강력히 내세우는 이유는 자로 사도직이 복음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복음의 진리성과 복음의 권위와 직결되어 있다. 만약 바울이 사도가 아니면 그가 선포한 복음이 권위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의 진리성과 권위를 위해서 바울은 자기의 사도직을 방어하지 않으면 안된다. 변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사도직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의 문제는 결국 무엇에 달려 있는가? 바울의 선포한 복음의 진리성에 달려 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이 같이 간다. 바울의 복음이 진리이면 그는 진정한 사도였고 우리가 바울의 복음을 배격하면 그의 사도직도 배격할 수 밖에 없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런 위기에 놓여 있었고 고린도 사람들도 그런 위기에 놓여 있었다. 어쩌면 갈라디아의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그 엄청난 투쟁의 소문이 로마까지 퍼져가지고 로마 사람들도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해서 오해가 있을 가능성이 많으니까 바울이 로마서를 체계적으로 쓴 것이다. 자기 복음의 진리를 밝히기 위해서 로마서를 쓴 목적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그러면 어떻게 인정해야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기준은 그의 복음의 진리성이다. 우리가 그 복음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증인으로서 사도로 부름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니까 다메섹 사건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 사건인데 이 사건은 한 편 사도로의 임명의 사건이었다.
둘째로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계시의 사건(αποκαλυψις 라고 한다.(갈1:12).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계시한 사건이라 그런다(갈1:16). 그래서 두번 모두 갈1:12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αποκαλυψις라고 하고 1:16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바울에게 계시하셨다. αποκαμυπτιν라는 동사형을 쓰고 있다. 이 αποκαλυψις와 αποκαμυπτιν라는 동사는 묵시문학적인 전문언어이다. 계시라는 묵시문학적인 전문언어이다. 이 전문언어로서 하늘에 이미 결정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 세상 끝-종말에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그 구원의 계획이 드러나게 하다는 것을 계시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종말론적인 개념-묵시문학적인 개념이다. 이미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구원의 계획이 이 세상 끝에 드러남, 그것을 계시(αποκαλυψις)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첫째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이 종말에 세상의 역사 속에 드러나서 새 역사 새 세상을 시작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선지자들이나 묵시자들에게 미리 나타내져서 선지자나 묵시자들이 종말에 만 천하에 드러나 모든 사람에게 계시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미리 알고 미리 선포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고난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도록 위로하고 권면하고 또 타락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그런 역할을 하도록 한다. 그래서 이렇게 선지자들이나 묵시자들에게 미리 나타낸 것도 계시이다. 이런때 쓰는 말이 αποκαλυψις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원래 의미이다. 종말에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사건으로 드러남-구원이 성취되어서 드러남 이것이 계시이다. 그것은 선취로서 미리 드러남이 계시의 두번째 의미이다. 이런 의미를 갖는 전ㅁ누언어로 αποκαλυψις라는 말이 쓴인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나타난 예수를 바로 이런 언어를 사용해서쓴다. 여기서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αποκαλυψις라는 말을 재림에 대해서도 쓴다. 고전 1:7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린다. 그때 쓴 말이 αποκαλυψις라는 말이다. 재림을 기다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살후 1:7/골3:4에서도 비슷하다. 이렇게 바울은 예수 재림의 원래 의미로 αποκαλυψις라는 말을 쓴다. 종말에 나타나서 구원이 완성되고 새하늘과 새땅이 시작된다.
그런데 바로 종말에 그리스도 예수의 αποκαλυψις가 있을 터인데 자기에게 미리 다메섹 도상에서 αποκαλυψις가 일어 났다는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이다.(갈1:12,16). 여기서 우리는 좋은것 하나를 발견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의 αποκαλυψις-그 재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는 종말에 있을 계시의 선취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영광가운데 나타났고 그래서 자기에게 온 예수를 즉 자기에게 일어난 예수의 오심-παρουσια를 재림할 영광가운데 오실 (παρουσια할 또는 αποκαλυψις할)주 예수 그리스도의 선취라고 보았다. 그것을 뒤집어 말하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의 계시를 체험하고 곧 그가 자기에게 오심-παρουσια를 체험하고 그것이 종말에 있을 παρουσια와 αποκαλυψις의 선취로서 종말에 바로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 예수의 계시와 만남이 있을 것을 확신했다.
이와 같은 묵시구조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허락된 예수 그리스도의 αποκαλυψις는 재림의 선취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는 영광의 빛에 휩싸여서 나타났다(고후4:6/행9:3/22:6/26:13). 여기서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형상등으로 깨닫게 되었고 이 체험은 바울에게 있어서 내적 개종을 가져오는 사건이었다. 곧 자기의 죄악스러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체험하고 또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체험했다(고후5:17). 고후 5:17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내 책 첫 부분에 내가 상당히 자세히 그것을 논의 했다.
이러한 현상이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났다. 자 그러면 이런 현상들을 자세히 보기 시작하다.
a.준비
b.그리스도의 부활-나타남,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 자체
c.사도로의 부르심
다메섹 사건을 바울은 사사로운 회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도로서의 부르심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고전15:8ff/9:1ff/갈1:16에 이런 것이 강력히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깨달았다.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은 바울의 복음과 그의 이방인을 위한 사도직으로 부름의 원천이었다(갈1:12/16).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누차 강조하고 있다(살전2:4/갈2:7/롬1:1,5/15:15/고전1;17 등등).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후 여러해 후에야 비로소 이방인들을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깨달았다고 보려고 한다. 그들은이런 가설을 전제하고 있다. 회심 후 바울은 유대인들 간에 복음 선포를 하였으나 그것을 실패하고는 후에 ‘아 지금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는 때가 아니구나 유대인들은 그 심장이 완약해져서 지금 구원받을 때가 아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겠구나’하고 그 후에야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자’고 하였고 그들의 반응이 좋자 자기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을 점차 가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다 옳지 않음을 내 책에서 자세히 밝혔다. 갈1:16에 바울의 논증을 자세히 보면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계시하심은 그의 아들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그래서 자기를 이방인 사도로서의 부름과 그 부름의 내용은 다메섹 사건과 직결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나중에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고 그러는데 그렇지 않다. 지난번에 더 내가 이야기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도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사도들한테 더 조언을 받을 것도 없고 곧장 아라비아로 갔다. 그런데 아라비아 사막의 뙤악 볕 밑에 가서 2,3년간 묵상기도 하러 간게 아니다. 많이 그렇게 해서 쓸데없는 은혜를 끼치는데 그러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간 이유는 바로 전도하러 갔다. 아라비아가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가 아니고 다메섹 성밖 아라비아이다. 다메섹 언저리에 있다. 거기에 당시 나바티아 왕국이 있었다. 나바티아 왕국에 가서 이방인들에게 열심히 전도했다. 자기가 부름받은 대로 계시 받은 대로 복음을 선포했다. 그러자 거기서 반대측 사람들에게 몰려가지고 나바티아 왕 아레타스 4세가 바울을 체포하려고 다메섹 성밖에 경비원,전경들을 풀었다. 그래서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도망했다. 기도원에 조용히 굴속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뭘하러 잡으려고 애썼겠는가? 열심히 가서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이고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그러니까 그곳의 종교와 엇갈려서 ‘이놈 안되겠다. 귀찮은 놈이다’고 하여 체포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처음부터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아라비아로 간 것은 기도원에 간 것이 아니고 전도하러 갔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방인 사도로 나서서 아라비아에서 전도하다가 거기서 쫓기고 자기 고향 다소로 가서 거기서 전도하여 상당히 명성을 얻었다. 목회를 잘한다. 전도를 잘한다고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 안디옥 교회가 번성했다. 안디옥은아마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혼합교회였던 보양인데 거기에 교회가 자꾸 팽창을 하니까 예루살렘에서 바나바 목사를 목회하라고 파송했다. 그래서 바나바가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자기 보더 좀 더 똑똑한 길리기아 지방 다소에서 목회를 아주 잘한다고 바울 목사를 청빙하러 가서 청빙해왔다. 그래서 바울이 바나바의 부목사 노릇을 좀 하다가 같이 선교사로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선교하다가 두번째 선교부터는 그 역할이 뒤집어져 버린다. 첫번재 선교 여행 도중에 아무래도 바울이 더 능력있는 설교가, 목사이니까 바울이 당회장 목사가 되고 바나바가 부목사가 된다. 사실 그런 것이 은혜있지 아라비아에 가서 혼자 뙤악볕 밑에 기도한 것은 은혜가 하나도 없다. 또 이렇게 바나바 같은 훌륭한 목사, 번성하는 교회를 자기가 감당하기 힘드니까, 자기보다 능력있는 사람을 부목사로 청빙해온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자기보다 능력있는 사람을 절대로 부목사로 안쓰지. 교회 뺏기고 자기 왕국 뺏기니까 절대로 안쓰지! 바나바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가? 또 바울도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갈1:14에서 자기가 자기 동료들 중에 최고였다. 유대 율법 가말리엘 문하에서 자기가 최고의 학자였다. 자기가 다메섹에서 엄청난 계시의 체험도 하고 다소에서 지금 목회에 괸장히 성공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바나바가 나같은 사람을 부목사로 오라고 해? 에이 나 그런데 안간다 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바울도 얼마나 훌륭하고 겸손한 사람인가? 아여간! 그런 것이 은혜이지 쓸데없이 아라비라에 간 것, 은혜 하나도 없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았짐나 바울이 가는곳마다 전략적으로 그의 설교를 유대 회당에서 시작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바울이 원래 이방인 사도로 다메섹 도상에서부터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복음선포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가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열심히 선포하다가 유대인들이 마음이 강퍅해져서 복음을 잘 안받고 도리어 이방인들이 복음을 잘 받으니까 ‘아 유대인들은 지금은 구원받는 때가 아닌가 보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선포에 전력해야 하겠다.’하고서 비로서 그때에야 이방인 사도라는 확신을 갖고 자기의 다메섹 사건을 뒤돌아보면서 ‘아 그때 사실 내가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식으로 추후에야 해석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개 이런 것을 근거로 둔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 회당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가 바울이 자기가 이방인 선교라고 강력히 주장한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같은데서 이다. 갈라디아서가 AD49년 쯤에 쓰였다. 그러니까 자기가 이방인 사도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갈라디아서 같은곳에서도 주후 49년 이후에도 가령 바울이 고린도 같은데에 50-52년 쯤에 가서도 회당에서 시작을 하다. 바울이 유대회당에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것과 그의 이방인 사도라는 확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유대 회당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 자기가 이방인 사도라는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고 이방인 사도지만 유대 회당에서 시작을 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신학적인 이유이다. 이것은 복음이 구원사적 우선권이 유대인들에게 있다. 그래서 심지어 바울이 57-58년에 로마 사람들에게 쓰는 편지에서도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그것은 구원사적 우선권이다. 그들이 먼저 선민으로 먼저 차지할 수있다. 그러나 시간적이 우선권은 아니다. 바울은 이것을 롬 11:25,26에서 밝힌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이방인들이 먼저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나서야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이다. 시간적으로 먼저 이방인들이 우선권이 있다. 그러나 구원사적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어서 그들이먼저 복음을 들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복음을 덧입고 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먼저다. 그래서 구원사적 우선권을 위해서 일단 회당에 먼저 가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실제적인 장점들이 회당에 더 많이 있다. 당시 회당은 여행하는 유대인들에게 여관,호텔 노릇을 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에 갔다. 그러면 어디가서 자느냐? 제일 잠자기 좋은 데가 회당이다. 또한 회당에서는 노동중계도 했다. 그래서 회당에 가서 ‘내가 어디 어디서 온 유대인인데 원래 다소 출신인데 한 도안 예루살렘에서 살았소. 그리고 우리 집안 대대로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요. 회당장! 어디 직장 알선좀 해주시요.’ 그러니까 ‘아 그래요, 여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하는 큰 천막 회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원래 로마에 본점이 있었고 고린도, 에베소에 지점이 있는데(요새말로 하면 다국적 기업가 였다. ) 글라우디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들을 다 내쫓아 버리므로 지금 고린도의 지점에 와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거기가서 어떻게 일자리는 구해보자!’ 그래서 거기서 바울이 취직을 했다. 회당에서 취직 알선도 해준다. 그래서 바울이 법을 벌어 먹고 일할 수있었다.
그런데 회당에는 이방인들이 있었다. 두 종류의 이방인들이 회당에 있었다. 하나는 개종자들:이들은 아예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된 사람들이고 유대 율법대로 할례까지 전부 받아서 유대인들이 된 개종자들(αροσελυτης)이고 또 하나는 유대교에 매력을 느끼고 유대의 신앙과 유대 도덕을 높이 평가해서 유대의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유대교의 가르침은 받으나 할례를 받고 아직 개종하지 않은 자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경회하는 자들(σεβομενον)이라 한다.
바로 이런 두 부류의 이방인들이 여기 회당에 앉아 있었다. 이 사람들은 구약으로 잘 준비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회당에 가서 에배때 앉아 있으면 유대 회당에는 목사가 없고 회당장이 예배의 리더였다. 회당장이 안식일 그 날에 읽기로 되어 있는 율법 모세 오경 중의 한 구절을 읽고 그런 것을 언제 시작했느냐에 대해서는 토론이 많다. 어쩌면 선지서에서 한 구절, 또 거룩한 책, 시편 이라든지에서 한 구절 읽는다. 그런 것을 lectionary라고 하는데 lectionary가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느냐에 대해서는 토론이 많다. 어쩌면 바울 이후에 시작되었는지 바울 때 이미 시작됐는지 우리 기독교에도 카톨릭이나 성공회,루터교에도 그런 것이 있다. 1년 52주 매 주 읽는 성경 구문을 정해 놓았다. 구약의 한 구절,복음서 한 구절,서신서 한 구절,설교도 될 수 있으면 정해진 본문을 따라서 설교한다. 이런 것을 lectionary라고 한다. 그 흐름을 따라 읽는다. 읽고나서는 회당장이 우리 중에 누가 좋은 권면의 말씀이 있으면 나와서 하라고 하면 바울이 저 뒤에 앉아 있다가 후다닥 나와서 바로 오늘 그 읽은 말씀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성취가 되었다 하면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개중에 유대인들 몇은 ‘하 그것 그럴 듯하다. 좀 더 들어보자’고 바울에게 요구하겠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런 못된 놈이 어디가 있느냐 당장에 나가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개종자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아주 솔깃하다. 자기들은 유대 회당에 백년 다녀 보았자 겨우 2등 시민 구원 받을가 말까 할 정도인데 조금 설교를 관대하게 하는 이른바 자유주의자는 우리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그러는데 유대 민족 보수주의자니 보수 근본주의자는 이방인이 개종해도 할례 받아도 소용이 없고 겨우 유대인들 종노릇이나 하므로 찌거기나 조금 얻어벅는다고하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 차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빋음을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러니까 ‘야 그것 썩 좋은복음이다. 그것 우리끼리 좀 더 들어보자’ 해가지고 바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간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도 유스도 집에 간다.
바울이 이 σεβομενον들 일부 이방인 개종자들을 데리고 교회를 세웠다. 얼마나 훌륭한 준비된 사람들인가? 복음은 딱 알아 듣게 준비된 자들 바로 이런 실제적인 선교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바울이 회당에 간다.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행 16장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 갔는데 그속에는 유대 회당이 없다. 유대인 회당이 있을려면 유대인 남자 10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족수이다. 남나 10명이 있어야 유대 회당이 생기는데 당시 빌립보시 사정상 유대인들이 별로 없었나 보다. 그래서 남자 10명이 없어서 회당이 없다. 그래서 안식일날 바울이 시냇가 빨래터에서 하나님을 경회하는자 몇이 모여서 기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다. 거기서 만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루디아이다. 그래서 그에게 선포해서 빌립보 교회를 세운다. 그래서 바울 선교의 첫 target는 바로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다. 그래서 이들 유대 회당에 먼저 가서 복음을 선포한 것은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을 충실히 이행함의 일부이지 그가 이방 사도라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사에서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받고 먼저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 헬라 유대 그리스도인들 소위 헬레니스트들이다. 그래서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복음 선포를 하고 나바티아왕 아레타스에 의해서 쫓긴 뒤(고전11:32/행9:24) 다소로 가서 거기서 목회를 했는데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보셔다가 이방인 선교사가 되었다. 바울의 이름이 좋은 목회자로 훌륭한 목회자로 명성이 높았다. 갈1:24에도 반영되어 있다. 바울은 이때의 자기의 사도직의 부름을 자기로서는 저항할 수없는 강제성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빌3:3에 바울은 그리스도에 의해 붙잡혀 체포되어 징집되어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는 숙명적 하나님의 강요를 받은 것을 느겼다. 고전 9:16ff에서는 복음 선포하는 것이 나의 숙명이라고 그랬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안으면 나에게 화가 있다. 교회를 핍박하는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고 있을 때에 그리스도가 그를 체포하여 자기의 종으로 만들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그의 주로 부터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 숙명αναγκη로 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가 없었다. 그 부르심은 구체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바울은 헬라인들에게나 야만인들에게 다 빚진자라고 한다. 롬 1:14(οφειλετης)에 보면 바울이 자기가 헬라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빚진자라고 그런다. 이것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하듯이 우리가 다 미국 사람들이 복음 전해 주어서 우리가 복음을 공짜로 받았으니까 그복음을 인도네시아 사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어야할 복음의 빚을 졌다고 하는 의미도 아니다. 또 도시 사람들이 농촌 사람들의 피땀 어린 농사를 지어서 그것을 먹고 살고 공장 큰애기들이 옷을 짜주어서 입어서 빚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 빚졌다는 말은
1.상법적 개념으로서 채무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빚을 갚아야할 의무가 있는 자.
2.전의어:‘...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많은 주석가들이 대개 이런 식으로 바울이 자기가 헬라인이나 야만인들에게 즉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할 의무를 가진 자라는 것을 강력히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썼다고 많이 주석을 한다.
나는 주장하길 원래 바울은 (1)의 의미로 쓴다. 바울이 실제적 이방인들에게 빚을 졌다. 왜 바울이 빚을 졌다고 그러느냐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본다. 그래서 부른다는 말 καλειν이라는 말을 바울은 보통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구원의 사건을 두고 말한다. 또 은혜라는 말도 그렇다. 은혜(χαρις) 라는 말도 보통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쓸 때는 구원사건을두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 자신에게 대해서 이말을 쓸때는 항상 자기 사도직을 두고 말한다. 자기 사도직으로의 부름,자기 사도직의 은혜(롬1:5/15:15ff)것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어진 은혜’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이 말은 아예 자기의 사도직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은 구원의 사건을 말한다. 바울은 이 현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느냐면 자기에게의 구원이 자기의 사도직의 형태로 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의 구원은 자기의 사도직으로의 부름에 내포되어 있다. 어째서 바울은 이런 인식을 하게 되냐면 아주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했다. 여기서 바울은 내가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축복받았다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사고가 이렇게 끝난다면 이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인식이 된다. 그러나 바울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은 내가 우주의 중심이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뒤애서 존재하는 내 종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이고 그 우주의 중심인 주권자가 그의 주권자적인 뜻에 의해서 나를 구원했다면 그주권자의 뜻을 위해서 나를 구원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어디다 쓰기 위해서 구원한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자로서 나를 구원한 것은 그의 뜻이 있어서 나를 구원했는데 그 뜻은 나로 하여금 그를 섬기도록 위해서이다. 그러면 나를 구원한 그 뜻은 무엇이냐? 바울은 무엇을 깨달았는가? 갈1:16 등에서 보면 이바인들을 구원하려는 뜻,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 1:12,16에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구원의 사건을 항상 부르심으로 그린다. 이방인들에게 사도직하라고 사도직으로 부르심으로 그린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구원의 사건을 단순한 구원의 사건으로 즉 자기가 구원받아서 나는 좋다는 식의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쓰시기 위해서 부른 사건으로 본다(고전9:16αναγκη). 그 하나님이 쓰시기 위한 부름 속에 자기의 구원이 내포된 것이다. 왜냐하면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주권자적으로 나를 쓰기 위해서 구원한 것이다. 나를 쓰기 위해서 선택하고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러니까 갈 1:16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그의 아들을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나에게 그의 아들을 나타내리라’고 되어 있ㄷ. 그럼 거기에서 강조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러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한 목적이 무엇인가? 바울을 구원하기 위해서인가? 그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게 큰 목적이고 그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울을 쓰기 위해서 바울을 구원했다. 그러면 바울이 누구 덕분에 구원받은 것인가? 이방인 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이 아니었다면 바울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이방인에게 빚졌다. 자기의 구원의 빚을 졌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신실하게 이행하므로해서 자기는 그 구원의 빚을 갚는 것이고 자기 구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서는 상당히 긴 설명을 해야 겨우 알아 듣는 사실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너무나 구원을 우리 중심적으로 생각해 왔다는 것을 말한다. 신본주의 입장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 각자가 구원받았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담녀 우리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무엇에 쓰기 위해서 나를 구원했나?
그러면 우리는 바울과 같이 구체적으로 답할 수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 사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이북 사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사람을 위해서 아니면 어떤 사람은 전라도 광주 사람을 위해서, 어떤 사람은 서울 사람,아니면 내 학새들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는 식으로 우리가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하냐면 우리가 그 사람들 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심지어 우리의 구원사건까지 하나님 중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빚진자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와 우리 회중과의 관계가 섬김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내 회중 덕분에 구원받은 것이니까 내 회중을 빚진자의 심정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간의 상호관계는 빚진자와 섬김의 관계이다. 그래서 빚진자로서 섬김이 상호관계이다. 이럴 때에 목사는 회중 위에 군림할 수 없고 선생은 학생들 위에 군림할 수가 없다. 섬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웃은 이웃에게 군림할 수 없다. 이웃은 이웃 덕분에 구원받았다. 그래서 이웃을 빚진자로 섬겨야 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는 사랑의 섬김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와 같이 자기가 빚진자이기 때문에 자기 구원이 사도직으로 왔기 때문에 이웃에게 복음선포하는 것으로 왔기 때문에 고전 9:16에 복음 선포하는 것이 나에게 숙명αναγκη라고한다. 그래서 이 숙명을 거스리면 자기가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내가 복음 선포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 이것은 내가 멸망을 받는다. 그래서 이와 같은 필연성, 그리고 강제성, 이런 것들을 바울은 아주 강력한 말들로 표현을 한다. 빚진자,숙명,빌3:14f ‘그리스도에 의해서 체포된-징집된’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 소명감에 대해서 이런 확신을 갖고 덤벼야 바울 발바닥이라도 따라 갈 것이다.

바울신학 제6강
지난번에 바울의 소명까지를 한 것 같다. 오늘은 바울이 받은 계시로부터 시작하겠는데 오늘은 주로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계시를 하고 다음부터는 바울이 받은 계시를 하려고 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αποκαχυπειν / αποκαλυψις이것이 계시란 말의 전문언어이다.
그런데 바울은 갈1:12-16 바로 이것이 묵시문학의 전문언어, 하나님의 계시를 두고 말하는 묵시문학의 전문어를 써서 자기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기술하고 있다. 갈1:12에 보면 “나는 사람으로부터 그것(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고 가르침을 받은 (배운 것)도 아니고 αποκαλυψις Ιησου  χριστου 예수 그리스도이 계시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았다” 그 말을 16절에 펼치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나에게(문자 그대로 하면 -내 속에)αποκαλυψις(계시)하였다. 나로 하여금 그들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우해서 가를 나에게 αποκαλυψια 했다. 이렇게 묵시문학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위해서 쓰이는 전문언어를 쓰고 있다. 또 엡 3:3에는 또 하나의 묵시문학의 전문 언어인 μυστηριον 비밀 이라는 말을 이 αποκαλυψις이라는 말과 겸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엡 3:3 κατα αποκαλυψιν εσνωρισθη μοι ο μυστηριον 계시에 의해서 το μυστηριον 그 비밀이 내게 알려 지게 되었다.
또 고후 4:6에는 또 하나의 종말론적인 개념이 δοξα(영광) 이라는 말이 αποκαλυπτεα 같이 쓰인다. 바울은 이렇게 일련의 묵시문학적 전문 언어를 써가지고 지금 말한 갈 1:12,16/엘3:3 이라든가 고후 4:6 등은 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기술하는 것들이다.
유대 묵시문학에서 이것은 전문언어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을 가진 것인가?두가지 뜻이 있다. 사실은 하나의 뜻인데 서로 연결된 두 대목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첫째로 유대 묵시 문학에서 계시만 새로운 시대 곧 구원의 시대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사건을 두고 말한다. 곧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실현을 말한다. 그것은 종말에 이 세상 끝에 하나님이 구원을 완성해서 그 구원을 실현해서 구원의 시대 오는 세상을 들여 온다 이 말이다. 이 사건을 두고 말할 때 계시라고 한다(원래 의미)
그러나 동시에 두번째 의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갖고 율법에 순종하도록 권면하기 위해서 꿈이나 환상들을 통해서 그 종말에 실현된 구원의 계획을 미리 선지자들이나 묵시가들에게 나타내 보이는것도 계시라 한다. 그러니까 계시는 종말에 일어날 것이다. 이것이 원래 근본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조말에 일어날 구원의 실현, 게시를 미리 이 세상에 있는 선지들이나 묵시가들에게 꿈이나 환상들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서 이 선지자들이 종말전에 미리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 선포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소망을 갖도록 하고 위로를 받도록 하고 그들에게 하나님께 순조하여 살도록 권면하게 한다. 그래서 계시가 이런 이중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런 개념적 배경에 비추어서 갈 1:12과 16절에서 바울의 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첫째로 갈 1:12,16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그리스도의 부활 출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도의 부활 나타남을 의미한다. 그것을 바울이 말한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부활 나타남을 두고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한다. 부활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해서 거기서 무엇을 깨달았어요) 바울은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유대교에서 부활은이 시대이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행위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이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로 이 시대의 끝과 새 시대의 시작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 4:4/롬3:2ff/고후6:2 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구원의 사건 그리스도의 사건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고 종말이 시작된 것을 선포한다. 그것을 두 두마디로 합쳐서 말하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고후 6:2에는 무엇이라고 해요?“지금은 구원의 시대다 .종말에 일어나리라고 하는 구원이 일어났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하나님께서 종말에 굳원읠 실현할 때로 미리 예벙한 그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열렸다. 롬3:21절도 마찬가지다.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 다 죄아래 있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의가 율법 밖에서 일어났다. 계시 되었다. 나타났다” 거기도 계시란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거기는 동사가 φανερι인데 αποκαλυπειν과 동의어 이다.
둘째로 그러나 이 종말적 구원의 시대가 실현되지 않았음도 동시에 깨달았다. 그래서 갈 1:14에 “그리스도가 그 스스로를 우리 죄들을 위해서 내어 주셨다”고 그래서 우리가 악한 세대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선택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이 악한 세대가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고후 4:4에 보면 이 세상에 지금도 사단이 통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 신이 안 믿는 자들의 마음을 안믿는 자들의 이해하는 능력을 소경이 되게 눈을 멀게 했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영과의 빛을 못보게 만들었다. 이 세상이 아직도 이 세상은 이 세상의 신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다. 그래서 악한 세상이다. 곧 그리스도의 주권이 전 세계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고전 15:24ff). 그러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무엇이냐?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에 불과하다(고후15:30). 아직 완전한 수확이 일어나지 않았다. 바울의 논 밭에 나가면 처음 나온 이삭에 불과하다. 그 처음 나온 이삭은 첫 열매이다. 이제 종말에 구원의 시대가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 그 그리스도의 부활은 첫열매에 해당한다. 아직 완전하 수확의 때는 당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롬 8:23에 이 성령의 첫 열매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και τοι αυτηυ αμαρχην του πνευματος εχοντες αμεις και αυοτι.....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온전히 효력을 나타내기를 기다리면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자들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구속의 완성을아직도 기다리는 자로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전문적인 언어를 써서 그는 고린도 전서 1:17/ 살후 1:7/골 3:4에서 그리스도의 αποκαλυψις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이 때는 αποκαλυψις의 원래 의미, 종말의 사건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계시(αποκαλυψις)를 기다린다. 곧 그의 재림을 기다린다. 고전 15:23/살전2:19/3:13/4:15/5:23/살후2:1,8f/빌3:20.
그때의 그리스도의 계시가 최후의 심판과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가져올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무엇에 적용하는가? 예수의 재림때 이것은계시의 원래 의미로 그런데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도도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그런 묵시문학적인 계시의 전먼운어의 틀 속에서 바울은 쓰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두 계시 종말에 일어날 재림을 두고 말하는 계시와 바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주어진 게시의 관계를 어떻게 말해야 되느냐면 종말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계시가 선취되었다. 그래서 종말에 일어날 그리스도의 계시와 더불어 올 구원의 실현과 지금 선취되는 구원 지금 우리가맛보는 구원과의 관계를 어떻게 나타내느냐? 바울은 첫 열매와 완전한 추수(완성)로 표현한다. 바울의 종말론도 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구조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과 연관이 되 있고 또 그것을 그리는 바울의 전문 용어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처음 오신과 그가 이룬 구원은 그의 최후의 계시와 최후의 구원의 임시적 실현이었음을 바울은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에 의해서 선포된 구원은 종말 때 계시될 최후의 구원의 선취의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바울은 구원을 현재의 실재로 선포하면서 벌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적어도 첫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그 구원에로 사람들을 초청한다. 동시에 바울은 그것이 종말에 완성되는 것으로 가르치며 그 완성을 기다리는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까 내가 불러준 그 많은 구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대표적으로 빌3:20 “우리가 하늘로부터 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이 비천한 몸을 그의 영광의 몸에로 완전히 변형시킬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미래에 오는 분으로 우리 몸을 비천한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형시킨다. 영화의 상태로 변형시킨다. 이것은 미래에 있을 구원의 완성이다. 그래서 구원의 3시제가 발생한다. 구원은 미래에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구원은 미래의 종말론적 실체이다. 그러나 현재에 이미 첫맛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것이 구원의 현재성이다. 아니 현재 우리가 못볼 수 있는 것은 그 구원 사건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음을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원의 과거에 참여하고 미래에 올 구원을 향해서 가는 구원의 현재성. 그래서 구원의 3 시제를 가지고 있다. 바울의 서신에 보면 어떤 것은 우리가 믿음을 이미 구원을 받았다. 의롭다함을 받았다느 과거 부정과거 시제로 말하면서도 또 빌 3:20,21/롬8:23 등에서 구원을 미래로 말한다. 우리 몸을 완전히 변화시킬 것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바울이 종말론적 전문 언어들을 써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의 사건을 기술한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건을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이유가 오늘 집중적으로 추궁할 이 비밀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비밀(μυστηριον)-mystery or secret 또는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영어판에서는 secret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μυστηριον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즉 재림 때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취적 계시를 선포하는 복음은 유대의 묵시가들에게 주어진 계시와 같이 한 비밀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내용 곧 그리스도 안에 구원의 밸생했다는 것 그의 재림 때 그것이 완성될 것이라는 것은 이 시새에서는 믿는 자들에게만 환히 보이는 것이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감추어졌다는 말이다. 비밀이다. 아까 고후 3:4이 왜 그것이 감추어졌다고? 이 시대의 신이 그들의 마음을 눈멀게 해서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곧 재림 때 그것은 모드 자들에게 환하게 보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 이 시애에서는 구원의 계시이면서 동시에 감추어진 것이다. 누구에만 계시해요? 믿는 자들에게만 그래서 계시와 감추어짐의 변증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복음을 비밀이라고 한다. 가령 고전 2:1 같은데 보면 사본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우리말 개혁 성경은 μυστηριον이라고 읽게 해서 “하나님이 증거”을 그렇게 번역을 했는데 요사이 댑분의 사본가들이 택하는 것은 거기 μυστηριον이 μυστηριον του Θεου이라고 읽는다. “하나님이 비밀을 내가 너희들에게선폰할 때에 내가 성숙한 자들에와 같이 하지 못하고 애들에게 하는 것처럼 한다”고 말한다. 즉 바울이 자기가 고린도에서 선포한 복음을 하나님의 μυστηριον라고 부른다.
2:6 이하에서 복음을 무엇이라고 하냐면 Θεου σοφιανεν ‘하나님의 비밀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 그렇게 말한다. 이처럼 μυστηριον이라는 말을 자꾸 쓴다. 이것은 계시와 감추어짐의 변증법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바울은복음과 그 복음의 내용인 그리스도에게 라는개념을 적용한다. 고전 1:18-2:16에 대표적으로 그러는데 그 중에서 1:23/2:1,6/4:1 등 또 골 1:23-29와 엡3:1-13 까지에는 이른바 계시의 형식, Yale대학에서 오래 가르쳤던 노르웨이 신학자 N.A.Dahl은 이것을 “Revelation Schema”라고 하였다. 골 1:23-29까지 읽어보면..
그런데 거기서 집중적으로 26-27을 보세요. “ 이 비밀이 만세전과 모든 세대 전부터 감추어진 것인데 이제 그의 성도들에게 계시되었다” 거기서 φανερω가 αποκαλωτειν 이란 말과 동의어이다. 계시되었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께서 이런 계시를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인들 가운데 이 신비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한 자들에게 계시되었다. 그런데 이 계시가 무엇이냐면 ο εσην χριστος(너희들 가운데 곧 이방인 너희들 가운데 선포된 그리스도가 바로 이 비밀이다). 그가 영광스러운 소망으로서 곧 비밀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감추어졌던 것이 이제 계시되었다. 엡3:1-13도 바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고전 2:6-16가지도 마찬가지로 이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지혜가 곧 하나님의 εν μυστηριον 비밀에 싸여 있는 지혜가 2:6에 보면 이러한 지혜는 이 세대의 지혜도 아니고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지혜도 아니다. 멸망하도록 되어 있는 폐기되어가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다. 우리가 비밀 속에 싸여 있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만세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곧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정하신 것이다. 8절에 이 세대의 통치자들 중 아무도 이 비밀을 담지 못했다. 그들이 만약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다음 성경 증명이나오고 10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을 통하여 이 비밀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지금 무슨 소리예요? 이 비밀, 고전 2:6-10까지에 이 비밀 또는 이 비밀로 둘러싸여 있는 하나님이 지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 세상에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이 세대에 속한 것도 아니고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전혀 모르는 것이다. 감추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세대에서 전혀 몰랐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다. 그래서 감추어졌던 비밀이 이제 계시되었다.
그것을 계시의 형식이라 그러는데 지금 고전 2:6ff와 골1:26,27/엡3:1-13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골 1:26,27에서 그리고 엡3:1-13에서 바울은 무엇을 비밀이라고 부르냐하면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가 비밀로서 옛날에는 감추어져 있었는데 그것이 계시되었다. 그것을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갈1:16/골1:26,27/엡3:1-13 여기서는 무엇이라고 하느냐면 하나님께서 그이 아들을 계시하셨다. 이방인들 가운데 그의 아들을 복음으로 선포하도로 ㄱ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무엇이 비밀이예요? 너희들 가운데 선포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된 그리스도 그래서 이방인들 가운데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가 비밀이다.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분, 실행하는 분이다. 엡3:3-
3절에 이 비밀이 계시를 통해서 내게 알려졌다.
4절에 보면 이 계시를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한다. 즉 그리스도가 비밀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5절에 봄녀 다른 세대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이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그의 성령을 통해서 계시되었다. 여기서도 감추어졌다가 계시됨의 형식이 나온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비밀의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3:4에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해서 그 비밀의 내용이 그리스도란 말이다. 그것을 다시 한번 정의한다. 6절에 이 비밀이 무엇이냐면 이방인들이 그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부름을 받고 한 몸이 되고 구원의 약속에 동참자가 되었다는 것이 비밀이다. 여기서 비밀을 두번 넣었다. 비밀의 내용이 그리스도이고 그 다음에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로 간주한다. 누구와 더불어가 강조되어 있지 않으나 그 언어상 들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εν χριστω 한 몸이 되고 구원 약속의 동참자가되었다 그래서 곧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참여하게 돔 이것이 바울이 비밀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는 바울은 계시의 내용 곧 비밀의 내용을 기독론적으로 정의할 때 그리스도가 그렇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인데 무엇을 항상 내포하냐면 이방인들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내포한다. 이방인들의 구원의 혜택을 받는 자라는 것을 항상 내포한다. 이것은 그의 아들을 복음이라고 그런다. 여기서는 이방인들의 선포된 그리스도를 비밀이라고 그런다. 여기서는 아예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동참자라는 것이 강조되었다. 그래서 기독론적인 정의에서 점차 교회론적인 또는 구원사적인 구원의 계획적인 강조점의 이동이 생긴다. 그런데 지금 이 구절들이 전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을 두고 이야기한다.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계시 받았을 때의 체험을 두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무슨 가설을 얻을 수 있냐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게시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내세울 때 이방인들도 구원하기 위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구원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일부였다는 것을 바울이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로마서 11:25,26절에 나오는 비밀을 이해해야 한다.
롬 11:25,26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들이 이 비밀을 모르기 원치 않는다 또는 형제들이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기를 원한다는” 말은 중요한 선언을 위한 엄숙한 선언의 형식이다.아주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기위해서 독자들의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자 이비밀이 무엇이냐면 그 다음 왜 그들이 이 비밀을 알아야 되느냐면 그들이 거만해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다. οτι절 이하가 μυστηριον의 내용이다. 비밀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부분적인 심장의 강퍅함(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이스라엘에게 임했다. 언제까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드러올 때까지 역서 들어온다는 말은 전문용어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더는 말이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에게 πωρωσις απο μεριυς 이것이 번역하기 힘든 말인데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가 왔다는 말이겠지. 숫적으로 (질적으로 보다는) 일부는 안강퍅해지고 일부 강퍅해져서 일부 하나님께순종하고 일부 안순종하고 그런 말이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에서 일부에게 심장의 강퍅함이 임했다. 여기서는 이것도 하나의 passium dividium이다. 하나님의 행위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심자에 강퍅함이 왔다는 소리는 누가 그들ㅇ의 심장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이 그들의 심장을 강퍅하게 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그게 비밀이다. 그 다음 26절은 그 비밀의 내용에서 바울이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이 비밀이 무엇을 내포하냐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 종말에 우리의 구원을 완성할 분이라는 그것만을 내포한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무엇을 또 내포하느냐면 이방인들도 그 구원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도 내포되어 있다. 이 두가지가 비밀이라고 그런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자꾸 가면서 사상의 진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말은 성경적인 증거를 댄다. 기록된 바와 같이 곧 시온에서 구원자가 올 것이다. 그가 야곱으로부터 불순종 또는 불경건을 떨구어 버리고 등등..해서 사59:20/시14:7/렘31:33/사27:9 등을 겸하여서 인용함으로써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결론을 성경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하나님께서 대부분의 이스라엘의 심장을 강퍅하게 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심장이 강퍅한 상태는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언제까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가지. 그러니까 여기에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구원에 이른다. 그것에 댛나 성경적인 증명이 여기 이사야서 시편 예레미야서 등에 나온 말이다. 자 그래서 여기서 바울은 무엇을 비밀이라고 하냐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비밀이라고 그런다. 먼저 이바인들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의 나라에 데려와서 구원하고 그 뒤에 모든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인데 그것을 비밀이라고 한다.
이 일련의 비밀과 이것이 어떻게 내용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 여기서도 전부 계시를 두고 말하면 항상 계시의 내용이 무엇이냐?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 또는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을 비밀이라고 그런다. 그런데 그것은 항상 무엇을 했어요? 이방인들이 구원의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롬 10장에서는 여기서는 아예 기독론적인 요소는 없고 구원의 게획만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다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언어상 하나 고찰할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랍비들의 숙어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서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개개의 유대인 전부가 모든 개개의 유대인 이란 말이 아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서 그런 말이다.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 체험을 그리고 이방인 사도로 부른 그 체험을 사 6장과 49장에 비추어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터득했다고 나는 주장을 한다. 내 책에 대단히 길게 주장을 했다. 그걸 이제 증거를 좀 대야지 왜? 그렇게 생각하냐?
1)갈 1:15-16절에서 바울은 사49:1-6에서 나오는 주의 종의 부름을 인용해서 자기의 이방인 사도로 부름을 기술하고 있다. 갈 16:15,16에 바울은 두개의 구약 부름의 이야기 등을 인용하고 있다. 하나는 렘 1:5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부름, 또 하나는 사49:1-6에서 주의종의 부름. 모태로부터 이방의 빛이 되도록 부름. 그래서 바울은 자기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 사도로의 부름을 어떻게 이해했다고요? 예리미야와 같은 선지자 주의 종의 부름, 이사야에 있어서 주의 종의 부름으로 곧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름을 예레미야서와 시아서야 49장의 빛 아래 비추어 해석을 이해했다. 사 49장에 근거해서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름을 해석했다는 것은 증명이 되었다. 그러면 사 6장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바울의 용어상 직접 관계 있는 것은 없다. 갈 1:15,16에서 사 49:1-2을 용어상 반영하듯이 바울의 어떤 말이 사 6장을 반영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우리로 하여금 사 6장을 유의하게 한다. 사 6장은 선지자의 부름의 전형이다. 그래서 그 곳에 하나님의 왕좌와 하나님의 궁정의 전경에 환상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그때 주로 부정적인 토론이다. 왜 그러냐면 랍비들의 언어에 이런 말이 있다. 조상들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의 조상의 공로로 그의 후손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다는 것을 랍비들이 즐겨 천명한다. 그리고는 예외가 있다. 다름과 같은 놈들은 구원을 못받는다. 우상 숭배자들과 간음한 자들, 도적질 한 자들, 십계명을 어긴 자들은 구원을 못받는다고 들어 놓았다. 그러니까 모든이르사엘이 구원받는다는 소리는 개개의 구원받지 못한 이스라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천명하는말이다. 유대인 전부가 구원받는 소리가 아니고 이스라엘 전체로서(대체로서)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말이다. 자 이비밀을 바울은 왜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예수가 왔는데 정작 구원에 예정된 구원의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구원 밖에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롬 9-11장 까지의 클라이막스에서 이 비밀을 지금 말하고 있다. 이 비밀은 분명히 바울이 터득한 구원의 계획은 분명히 바울의 선교 전략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구원의 계획을 바울이 터득했기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이다. 대부분의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유대인 선교에 집착할 때에 바울은 그게 아니다. 지금은 어느 때요? 이스라엘의 심장을 하나님께서 강퍅하게 한 때이다. 아무리 가서 선포해 보아도 별 볼일 없다. 지금이 어느 때요?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해서 이방인의 구원의 충만한 수를 가져올 때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아주 과감히 이방인 세계에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방인의 충많나 수를 채우려고 한 것이다. 자 이러한 비밀의 계시 곧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가 바울에게 언제 어떻게 임했느냐? 우리는 지금까지 이 배경에서 볼 때에 그리고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에 대해서 계시라든지 비밀이라든지의 묵시 문학적인 전문 언어를 적용해서 기술하는 것을 보아서 어떤 가설을 세울 수있는가? 이 구원의 계획도(롬1:25에서 말하는) 이 비밀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 가설을 그러면 어떻게 받았느냐? 거기에대해서 자세헤 토론하는 주석가들을 보라. 여러가지 가설이 많이 있는데 나는 내 책에서 무엇을 강력히 주장했느냐면 사 6장과 49장에 근거해서 이사야 6장에서의 토론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어전회의라고 했는데 이사야가 하나님을 보았는데 하나님이 보좌에 높이 앉아 게시고 또 그곳에 천사들 스랍과 체루빔들이 부복하고 있다. 거기에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 가운데 옵저버로 서 있다. 하나님이 자기 천사 대신들과 무엇을 상의해요? 이 패역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해서 싹쓸이를 해버리고 다시 새 그루터기에서 나오는 새싹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을 상의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상의하는 것인데 주로 심판을 상의한 것이다. 이 궁정회의에서 이것을 하나님께서 종말에 미래에 이루실 것이다. 이 계획은 그럼 우리가 누구를 보내서 이 패역한 민족에게 선포할 것인가? 그래서 이 패역한 민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회개케 할 것인가? 그렇게 묻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럼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가서 구원 계획을 선포할 것인가? 그러니까 이 천사들은 부복하고 감히 한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데 이사야가 환상 중에 옵저버로 참석했던 사람이 한발 다가가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가 선지자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선포하는 자로 선지자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메시지를 계시받고 그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다. 그것을 서너포하느 자로 부름을 받고 위임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가 거기서 보냄을 받는다. 이런 것이 선지자들의 부름에 늘 되풀이되는 것이고 묵시가들이 계시와 부름에서 되풀이 되는 것으로 이것을 רוס 또는 דר 라 그런다. 곧 하나님의 어전회의라고 한다. 영어로는 a Heavenly Assembly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의 회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어전 회의에서 결의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רוס 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전회의가 רוס이고 그 어전회의 결성사항인 구원의 게획도, 하나님의 뜻도 רוס라고 그러는데 이 때의 רוס를 헬라어로 번역하면 μυστηριον라 한다. 곧 비밀 구원의 게획이다. 묵시문학에서 비밀이 어떻게 계시되느냐면 이와같은 어전회의를 통해서 이다. 이것이 사 6장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높임받은 그리스도를 본 것도 사 6장과 아주 비슷하다. 사 6장과 평행점이 많다. 무슨 평행점이 있느냐? 첫째로 아까우리가 힘들여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계시란 말 ποκαλυπειν 또는 ποκαλυψις,μυστηριον이라는 말을 계속 바울이 쓰고 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하게 하냐면 바울이 선지자와 묵시가들의 하나님의 메시지를 계시받을 대의 전형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런 형식의 계시를 기술하기 위해서 전문적으로 쓰이는 언어가 계시란 비밀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바로 이와같은 계시란 말과 μυστηριον 이란 말로 기술하고 있음으로 해서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냐면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부활하신 높임받아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본 사건도 이 선지자들이 또는 묵시가들의 하나님의 궁정회의를 보고 그것에서 μυστηριον을 계시받은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깨닫게 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사 6장과 바울의 부름, 이사야의 환상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환상 여기서 환상이라는 말은 vision과의 유사점을 살펴보면 첫째로 이사야도 주를 보았으며 내가 주를 보았다. 바울도 고전 9:6에 주를 보지 않았느냐?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데 이사야도 그 주를 영광의 빛 속에서 보았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그 주를 영광의 빛이 내리 쪼이는 상태에서 보았다. 고후 4:6/행9:2/26장에 보면 그 영광의 빛이 바울의 눈을 소경을 만들 정도로 찬란하게 나타났다. 영광 가운데 이사야도 주를 영광 가운데 보았다 .이사야도 자기의 선지자의 부름 때 용서와 화해를 체험했다. 이사야 6:7 ‘그것을 내 입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제단의 숫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지진다. 그래서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깨끗하게 한다. 이 의식은 레위기 16장에 나오는데 구속의 날에의 속죄와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화목의식이 이사야에게 베풀어진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사야가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화목된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쓸만한 자로 갖추어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며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서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를 받았다. 하나님이 바울을 화목시켰다. 자기의 원수로 자기에게 대항하던 바울을 자기에게 화목시켰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우리가 나중에 바울의 구원론에서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가령 고후 5:17f 이하에 나오는 화목이라는 καταλαγη는 카테고리, 그리고 롬 5장에 나오는 화목이라는 카테고리,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이 죽음이 소외된 또는 적대 관계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제사라고 해석하는 것을 화목이라는 카테고리, 메타포, 그림언어는 신약성경에서 바울만 쓰는 언어이다. καταλαγη 화목(reconciliation) 에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화목제물로 해석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과 인가이 다시 친구가 되게 하는 화목하게 하는 주로 설명하는 것은 바울만이 쓰는 언어이다. 그래서 나는 내 책에 무엇을 괴장히 강조하였느냐 하면 바울이 이와 같은 독특한 자기의 하나님과의 적대라는 메타포 언어를 개발한 것은 또 이것의 전제가 무엇이냐하면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적이며 원수이다는 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이다. 가령 롬 5장에 우리가 원수 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사랑을 베푸시고 우리를 자기에게 화복시켰다. 이런 원수라든지 화목이라든지 하는 언어는 신약성경에서 바울만이 쓴다. 왜 바울이 이런 언어를 개발했느냐? 자기 과거 때문이다.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로 행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의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사실은 고후 5:1-12이 전부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내 책의 1장에서 그것?? 길게 증명을 했다. 그러니까 이사야가 그의 부름 때에 레 16장의 대 구속의 날, 제사 행위를 통해서와 마찬가지로 용서받고 화목되는 체험을 했듯이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원수로 돌아다닐 때에 어쨋다고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고 화목되는 체험을 했다. 그래서 사6:7과 고후 5:18/고전 1:8을 비교해 보라. 또 이사야가 하나님이 나타날 때 보냄을 받은 것같이 그때 나오는 동사가 הלשׁ이다. 이것은 αποσολλειν이다. 우리를 위해서 누구를 보낼꼬? 그런데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보냄을 받았다. 그래서 자기를 뭐라고 부르는가? 보냄을 받은자, 사도라고 부른다. 사도란 말이 αποστολος 이다. 고전 1:23에서 바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가 나를 보낸 것은 세례를 주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니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보냈다. 그렇다. 그리스도가 자기를 보냈다. 그래서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낸 것과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났을 때 주가 바울을 보냈다. 그래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이다. 가령 고전 1:17/롬1:1 등을 참조하라.
*구약의 묵시문학도 이미와 아직의 긴장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거기서는 이미 쪽은 조금이고 아직 쪽은 많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부터는 이미 쪽이 많고 아직 쪽이 조금있다. 그래서 어느 계시나 이미와 아직의 구조가 있다.

바울신학 제7강
바울이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하는 비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즉 지금이 이방이의 충많나 수를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도록 하는 때이고 그 때까지 이스라엘의 대다수의 심자을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로 불러오는 때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고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의 계획을 바우이 어떻게 계시받았느냐? 지나번에 우리가 그 계시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때에 받았다.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 받을 때 어떻게 하나님의 나타남의 상황 속에서 특히 이사야에 있어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떻게 하나님이 나타남의 상황속에서 선지자가 궁전회의,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해서 그곳에서 자기가 선포해야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계시 받게 됨을 살펴보고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과 이사야의 소명의 체험과 견주어서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받은 계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계시를 성경적으로 확인받을 것인가? 그런것을 고찰해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의 사도 부름받음과 이사야의 선지자로 부름 받음이 유사점을 하났기 살포 보았는데 그중에 아마 세개를 한 것 같다.
네번째로 하나님의 회심 가운데 궁정회의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뜻을 들었듯이 바울도 αποκαλυτειν(계시한다)는 말과 αποκαλυψις 또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자기가 환상 속에서하나님 우편에 앚아 계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자기의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난번 첫 시간에 공부한 것처럼 αποκαλυψις라는 언어 자체가 그리고 μυστηριον이라는 언어 자체가 그렇다.
궁정회의에서의 하나님의 דוס(계획)의 드러남을 말하기 때문에 또 바울은 자신을 히브리인들 중 히브리인으로 히브리인으로부터 난 히브리인이라고 바울은 소개한다. 이런 철저한 유대인의 바리새인 신학자가 어떻게 다메세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만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는가? 당시 유대의 모든 신학적인 조류들의 공통적인 이해는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을 받고 지금이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때이다. 이스라엘이 다 회개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신학에서 랍비들은 토론이 많았ㄷ. 왜 이렇게 메시야가 안오고 지체를 하느냐? 모든 이스라엘이 아직 회개를 안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온을 높이고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그러면 하나니의 영광의 빛이 시온에서 온세상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파하면 모든이방인들이 여호와가 진짜 ‘신’인 것을 알고 자기들이 지금까지 섬긴 신들이 전부 우상이며 목석에 불과한 것임을 알며 그것들을 다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또 자기들 속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모시고 시온에 몰려와서 진정한 신인 여호와를 경배하고 그의 구원에 참여한다. 좀 관대한 유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다고 그러고 좀 편협하고 못된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이방인들은 그렇게 해도 구원을 못받고 그렇게와도 이스라엘의 종 노릇이나 한다고 민족주의로 만들어 놓았다. 무슨 소리냐면 즉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면 메사야 시대가 와서 그들이 구원을 받고 그 연후에야 이방인들이 이런 식으로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온다. 이것은 선지서들에서부터 오는 이른바 이방인들의 종말론적인 순례 이바인들의 시온에로의 종말론적인 순례사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상이다. 이사어 2장 11장 등 미가 5장 2장 등 온갖 곳에 다있는 아주 중요한 사상이다.
이 사상에 근거해서 먼저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메시야의 구원을 받고 그 뒤에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는다.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인보다 먼저 구원받는다는 법은 없다. 유대신학에서 있을 수가 없다. 이러한 철저한 유대의 종말론에 지금가지 고착된 바리새인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갑자기 이방인들이 사도로 나설수 있느냐? 가령 갈6장6장에 하나님게서 자기에게 아들을 계시했다고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다 회개했는가? 천만의 말씀. 유댕니들이 메시야의 덕을 힘입었는가? 천만의 말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전혀 믿지도 않고 그런데 그들은 제쳐두고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것을 살펴보아도 바울에게 있어서 롬11:25절이 말한 것과 같은 그런 구원의 계획을 전혀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구원의 계획을 바울이 그때에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 받을 때에 동시에 계시 받았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있게 이방인들의 사도로 나설 수 있으며 뒤돌아 보지 않고 뒤돌아 보지 않고 예루살렘에 유대 사도들이 달갑지 않게 여기고 그곳에 보수(바리새)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훼방하고 반대를 해도 열심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또 하나 이유를 생각해보면 이사야가 그의 부를 때에 이스라엘이 심장을 완악하게 만든 하나님의 뜻을 받은데서 바울은 로마서 11장 25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완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 같다. 사실에서 바울의 선교현장에서 일어나는일이다. 복음을 선포하면 이방인들은 복음을 받는데 이스라엘은 복음에 더 저항한다. 그래서 그들의 심장이 더 완악해진다. 이것이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선포가 이스라엘 심장을 완악하게 했듯이 바울의 복음선포도 이스라엘 심장을 더 완악하게 했다. 또 하나 로마서 11:25에 언제까지 이스라엘의 심장이 완악하게 되냐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까지 이렇게 한시적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심장을 완악하게 만든 것이 한시적이다.
이것은 이사야 6:11절과 연관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하고 그들의 눈을 무겁게 하고 귀가 얼게 해서 이사야의 말을 못깨닫고 이사야가 선포하면 선포 할수록 심장이 완악해져서 그들을 심판한다고 하니까 이사야가 묻는다.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묻는다. 그래서 심장이 완악하게 함은 항상 한시적이 언제까지니이까? 이질문은 시편에도 여러번 나온다. 하나님의 백성이 심판 가운데 고난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게 부르짖는 문장 형식이 이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언제까지 입니까?에 대한 답이 이사야 6장에 주어졌는데 아마 바울도 하나님께서 내가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한다. 너는 유대인간에는 더이상 복음을 선포하지 말고 이방인에게 가서 에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해라. 이렇게 명령했다면 구약에 항상 나오는 이 문장형식에 따라 언제까지니이까? 하고 물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라고 그러는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런 정도 바울의 비밀과 이사야서 6장의 계시와 유사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속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선고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그 완악한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동안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빛이 되어 주의 구원이 땅끝가지 이르게 하여야 한다(사49:1-6). 바로 갈라디아서 1:5에 보면 바울이 사49:1절에 바로 이 ‘주의 종이 부름’을 자기의 부름에 적용하고 있다. 주의 종을 불러서 이방인의 빛이 되게 했듯이 그래서 주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한다는 예언이 자기의 사도직에로의 부름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바울이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해서 이방인의 빛이된다. 이방의 빛이 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한다. 하나님을 알게 한다는 말이다. 빛이라는 말은 계시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한다. 또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한다. 그러나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가 들어면 완성되어 이빙인의 완전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이스라엘의 완악함도 끝나고 글하여 그들도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긍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도 바울은 어쩌면 이사야 6장 13절에서 얻었을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이사야 6장 13절이 특히 탈굼을 보면 당시 어떻게 해석이 되냐면 하나님께서 벌하시고 그 뒤에 불로 다 태워버리고 그루터기에서 새로 나는 싹으로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시작한다 해서 탈굼을 보면 지금 우리 구약성경 이사야 6:13보다 훨씬 더 소망있게 훨씬 더 긍정적인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것에서 바울은 완악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이스라엘이 그것이 끝이 나고 그 끝 뒤에는 구원이 있을 것을 확신한 것 같다. 또 이사야 49:5,6절에서도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소망을 확인한 것 같다. 이제 바울의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바울의 선교의 여러 형태들의 중요한 바울 선교의 여러 형태들의 요점들을 설명할 수 있다.
첫째로 왜 바울이 유대인 선교를 포기하고 이방인 선교자로 나섰나를 설명할 수 있다. 조금전 이야기 한 것데로 당시 바울에게 알려진 모든 유대 종말론은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유대의 대다수가 거의 구원을 안 받았는데 바울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로마서 11:25절에 확고한 구원사에 대한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바울이 왜 그렇게 바삐 뛰어다니면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하고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나를 설명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바울은 자기에게 알려진 온 세계를 돌면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려고 했다.
세째로 바울과 유대 사도들과의 갈등을 설명할 수 있다. 유대 사도들은 유대교의 종말론에 집착을 한 것이다. 먼저 유대인들이 구원받고 그 나중에 이방인들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자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서 먼저 교회를 세운다. 갈라디아,고린도,빌립보에서 복음을 선포해서 교회를 세우는데 유대 사도들에게 있어서 보면 이게 아주 위태로운 일이다. 이 예루살렘에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나 이런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아마 야고보와 보수 바리새 사도들의 눈에는 이게 아주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 AD 46년 쯤에 예루살렘 교회 leadership이 베드로에게서 야고보로 넘어간다. 베드로가 그곳의 핍박으로 예루살렘을 떠나게 됨으로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의 지도력 아래 놓이게 되는데 그때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과격히 보수적이 된다. 그래서 바리새적으로 되어간다. 이들이 입장에서 볼때 바울의 이방인들의 선교는 아주 위험하다. 유대인들이 먼저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 이방인들이 저렇게 다닌다 말이다.
지금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시온이 영광받고 모든 이방인들이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 때까지 지금 현재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그들이 먼저 유대인들이 되어야 할터인데 어떻게 되는가? 할례받고 율법을 수용함으로서 유대인들이 되어서 지금 현재 누릴 수 있는 현재의 구원에 동참해야 할 터인데 바울은 율법과 할레를 깡그리 무시하고 곧장 이방인들에게 먼저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고 그들의 교회를 세운다. 그러기에 아주 위험하다. 그러니까 이 교회에서 바울의 교회에 대표단을 갈라디아,고린도,빌립보에 보내가지고 너희들은 모든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너희들이 지금 구원받을 때가 아니다.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때이다. 그런데 바울이 정통성이 없는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배운 일도 없고 우리와 관계가 없는 자가 시리아의 수도 안디옥 어느 근방에서 자기가 에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엉터리 복음을 선포해 가지고 지금 교회를 세우고 그러는데 여러분들이 이제라도 진정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다 수용하고 할례를 받아서 유대인이 되고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자로 구원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한 것이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이방교회 침투를 해가지고 문제를 일으켜서 바울은 그게 아니다. 율법을 수용하고 할례를 받는 행위는 에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를 부인하는 행위라하고 가령 갈라디아서,고린도 후서,빌립보서 에서 보는 격렬한 투쟁과 갈등을 하다.
그래서 유대 사도들 그러면 모순이 있다. 왜그러느냐? 바울은 베드로를 자기 편이라고 본다. 바울과 야고보 일당과의 갈등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다른 이해에서 설명이 된다.
네째로 어떤 바울의 선교의 형태가 설명이 되냐면 바울은 이방 선교를 하면서도 항상 한눈은 예루살렘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가 말하는 이른바 1차,2차,3차 여행 끝에서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기가 로마를 향해서 스페인으로 가고자 하는 소망이 가득차서 고린도에서 로마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도 우선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에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지금 자기가 오랫동안 로마로 갈려고 했는데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등에서의 일에 의해서 지체되었다고 한다. 특히 고린도에서의 반란 때문에 바울이 오랫동안 지체했다. 그런데 드디어 고린도의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기쁜 마음으로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야말로 그렇게 바랫던 로마행 그리고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으로 선교여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하면서도 그러면 빨리 뛰쳐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오랫동안 바랐으니까. 어디에 써 있는가? 롬1:15절에 다 써있다. 그러면 왜 예루사렘으로 돌아 가느냐? 돌아가는 것도 아주 위험한 여행이다. 자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여행이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끝에 바울이 로마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한 기도를 부탁한다. 그 기도 제목이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가 유대인들 가운데 믿지 않는 유대인들 손에서 구출되도록 이당시에는(AD 57년 쯤) 팔레스틴에서 열혀당 운동이 아주 고조된 때이다. 글서 66년에 드디어 반란전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열혈당 운동은 이방인들에게 적대감도 있었지만 특히 이방인과 교류하는 유대 백성들에 대한 그들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순결을 더럽힌다 해가지고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일차적인 표적이다. 바울은 이들에게 체포될 가능성이 많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들이 바울을 잡으려고 잠복을 한다.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이다. 그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 소에서 구출되도를 기도를 부탁한다.
또 하나의 기도제목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 교회들이 헌금을 받아주도록 바울은 이것도 불확실하다. 왜 그러냐면 예루살렘 교회도 야고보와 같이 바리새주의적 지도력 하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인정안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의 교회들이 한 헌금을 받아주지 않으면 이 말은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로 인정 안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이방인 세계에서 세운 교회는 큰 문제가 생긴다. 바로 그런일 때문에 바울이 헌금을 열심히 했으며 바울이 헌금을 걷은 것은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었다. ①하나는 바로 아까 이야기한 이방인들 종말론적인 순례이다. 신저지들의 vision에 의하면 종말에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시온이 나타나면 영광의 빛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온세상에 퍼지면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자기들의 보화들을 가지고 온다고 그랬다. 하나님이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다. 그 영광이 빛을 바울이 전파한다. 이사야 49:1-2절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전파한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어쨌는가? 데살로니가 전서 2:1-0절에 보면 자기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께로 왔다. 그 증거로 그들이 헌금을 해서 그들이 보화를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한다는 사도들의 예언에 따라 이 바울이 헌금을 모집한 것이다. 헌금을 모집해서 고린도를 해서 오는데 다시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간다. 각 교회에서 몇 명씩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간다. 왜 ? 그렇게 위험한 상황인데 유대인들이 얼씬만 해도 잡아 죽이려고 하는데 아까 이야기한데로 이바인과 교류한다는 가장 큰 핍박의 표적이었는데 바울이 그렇게 위험하면 혼자 변장을 하고 슬쩍 갈 일이지 보란듯이 이방인 헌금단을 조직해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는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 이 옛 선지자의 약속(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선포해서 그들이 그들의 우상을 버리고 살아 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섬기기 위해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헌금을 열심히 거둔 것이다. 요약하면 바울의 헌금 목적이 옛 이방인들이 종말론적인 시온에 대한 순례를 완성(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②또 하나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구제목적도 있었다. 어쩌면 구제목적이 기본적이니까 먼저라고 합시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사도에 의해서 예루살렘 교회가 특별히 바울에게 그것을 부탁했다(갈2:10).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바울도 내가 구제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구제 다음에 옛선지자들이 비젼확인.
③예루살렘 교회(유대인들)와 이방인들 교회의 교제(fellowship)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나님의 중요한 이유는 곧 이방인들 교회의 정당성 인정문제이다. 만약에 예루살렘 교회가 헌금을 안받는다하면 이제 이방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 선언되는 것이다. 그런 바울은 구원사적인 연속성이 없이 자기가 자기 교회를 세운것 밖에 안돼 버린다.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로마 세계의 동북구(동반부)에서의 선교를 일단락 짓고 서반부로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음에 있어서 여기에서의 선교를 결산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세운 교회들이 원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 하나된 그리스도 교회로 인정받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 목적이 있다. ④또 하나의 목적은 로마서 11:13-14절 거기에 “내가 내 이바인들의 사도됨은 영광스럽게 여긴다”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소리가 아니라 자랑한다는 말이다. 아주 자랑한다는 소리이다. 이것을 자랑한다. 목적이 무엇이라고 그러는가?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하게 해서라도 그중에 몇사람을 구원하고자 해서 그렇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자기 이방인 사도직을 유대인들에게 자랑을 하다. 그게 아니고 어떻게든지 유대인 몇 사람이라도 구원해야 되겠는데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들로 하여금 시기나게 해서라도 구원시켜야 하는 것이 제일 순위이다. 바울이 대 헌금단을 조직해가지고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다. 이 헌금을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것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음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나타낸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들은 개 돼지들로서 전혀 구원 가능성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의해서 구원의 하나님의 자녀됨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표시로 헌금을 가지고 왔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바울이 이방인 사도직을 자랑한다. 그렇게 해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해서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그런 것이다. 유대인들의 대 대수가 언제 구원받는가? 충만한 수(이방인의)가 들어올 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라도 몇 사람이라도 구원시키려고 하는데 그방법이 시기나 나게 하는 것이다. 바로 헌금에 이런 목적이 있다. 그래서 이 헌금은 바울의 보시는 바와 같이 바울의 이방인 사도직 수행에 있어서 또는 바울의 선교전략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다. 그래서 바울이 헌금을 거둔 것이다.
그런 바울의 선교 형태. 이런 것 그리고 바울이 왜 이방 선교 여행이 끝나면 꼭 예루살렘에 돌아왔느냐? 보는 바와 같다. 바울이 이방인들의 사도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는 조건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사람이 이방인 사도 바울이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도 바울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급하다. 하루빨리 지금 로마에서 마치고 스페인에 가서 거기서 복음 선포하고 빨리 북부 아프리카에 와서 거기서 복음을 선포하고 알렉산드리아로 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 당시 자기에게 알려진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러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풀리고 이스라엘이 구원받는 것이다. 바로 바울의 이와같은 구원사적인 이해가 바울의 이와 같은 선교형태를 낳게 된 것이다. 오는 우리에게도 바울의 선교전략이라든지 선교이해는 상당히 생소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복음선표한다는 소리는 각 개인에게 하나하나 다 복음선포해서 말귀 알아들었느냐? 해가지고 말귀 알아들었으면 교회 나와서 합습받고 세례받고 그래서 몇 년 공부 더해야 된다. 그게 우리가 말하는 소위 복음화이다. 그런데 바울의 신약의 복음 선포를 보면 대개 큰 도로변에 큰 도시에 가서 거기 몇 사람 회당에 가서 두어번 소리 지르고 그래가지고 믿게 된 사람 몇 사람 해가지고 그러면 너희들끼리 예수 잘 믿어라 하고 딴 도시로 가서 또 회당에 가서 두어번 설교하고 몇 사람 모아 가지고 이제 복음이야 가르치고는 그러면 너희들끼리 잘 해봐. 너희들을 성령께 맡긴다. 그리고는 또 옮겨가고 이랬다. 방루이 언제 거기에 있는 사람에게 다 복음 선포했는가? 바울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이 에베소와 고린도이다. 그러나 에베소도 2년 정도 햇수로는 3년 정도 머물렀을 것이다. 고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외는 잠깐 머물정도였다. 그래놓고는 바울이 롬 15:10에서는 뭐라고 그러는가? 내가 이지역(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서는 복음을 편안히 전파했다고 한다. 편안히 전했다는 말은 복음을 꽉 채웠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더이상 일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다. 그러니까 내가 새로운 세계로 가야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느냐?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바울에 이해에 있어서는 소위 오늘날 새로운 개념으로 말한다면 represantative Universalism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하다. 그래서 한 사람은 개인이 아니고 그가 속한 족속의 대표이다. 그래서 이 사람이 복음을 들었으면 그 사람에 속한 족속이 복음을 다 들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바울이 로마로해서 스페인으로 가서 그 다음은 북 아프리카로 해서 복음을 선포할 모든 굼이 좌절되었을 때 바울은 새롭게 깨닫는다. 하나님의 계획이 자기로 하여금 온 세상에 빙 돌게 한 것이 아니고 그러나 바울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받았다. 모든 이방인들의 대표가 누구인가? 로마의 가이사이다. 바울에게 알려진 모든 통치자가 가이사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헌금단을 데리고 왔다. 바울이 우려한 대로 거기서 체포되었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 이런 온 세계를 다 돌면서 실제로 자기가 복음을 선포할 꿈이 좌절되니까 가이사에게 상소를 한다. 그런데 사도행전의 기사를 보면 가이사에게 상소를 않했으면 Felix 가 풀어줄 수있었는데 로마 시민으로 가이사에게 상소한다고 하니까 할 수 없이 로마의 최고시민 가이사 앞에서 바울은 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그러면 왜 석방될 수 있었는데 바울이 쉽게 말하면 뇌물 몇푼 집어주었으면 석방될 수 있는 것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석방은 안받고 가이사에게 상소하느냐? 그것은 가이사와의 재판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가이사는 이방인들의 왕으로서 세상의 주라고 주장한다. 세상의 주인 가이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되심을 재판의 과정을 통해서 증거하려고 한다. 그러면 가이사가 세상의 주,왕으로서 이방인들의 대포자, 즉 이방인의 대표 가이사에게 선포함으로 바울은 모든 이방인에게 선포한 셈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해서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이것이 일리가 있는 것이 가이사 콘스탄틴 대제 한 사람이 복음의 증거를 받아들여서 로마제국 전체가 기독교화 한것이다.
바울이 이와같이 represantative Universalism 이런 식으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고리도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면 아가야 지방 전체에 복음 선포한 것이다. 이런 식을 생각했을 것이다.그러니까 바울이 자기의 모든 이방인들의 복음 선포로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인들이 완악함이 풀리고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또 로마서 11:2절과 같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받아서 어떻게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선포를 수행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첫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바울의 모든 신학은 이와 같은 선교사업의 수행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늘 그의 바울신학의 선지자를 기억하여 공부해야 함.
*바울의 복음*
①계시와 전승으로서의 복음.
복음이란 말 자체가 아주 중요한 말이다. ευαγγελιον말 자체가 아주 신학적인 어휘이다. 어떻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소식이 복음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느냐? 이것이 최근에 많은 토론의 대상이다. 편리하게 좀 나이먹은 아티클이지만 G.Friederich의 EDNT사전에 나오는 ευαγγελιον이라는 아티클을 읽어보든가? 아니면 좀더 깊이연구하고 싶으면 P.Stahlmacher의 “Das Plan Evangelum”이라는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복음이라는 말이 생성되었는가? 이것은 어디서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되냐면 예수의 하나니 나라 선포를 복음이라고 그런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O.TT. Betz가 우리에게 누차 강조했듯이 사52:7에 “거기에 복음을 선포하는 자 또는 샬롬 평화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도다” 하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그복음의 내용은 무엇이냐면 너희 하나님이 다스리신다(사52:7) 그래서 하나님이 다스리심 이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가령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했다. 왜 하나님이 다스림이 기쁜 소식이냐면 그것이 곧 구원의 의미이다. 샬롬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총조를 사단이 차지하고 곧 하나님의 주권,하나님 왕으로서 다스림을 사단이 찬탈 하여서 악과 고난으로 다스린다. 그런데 이 사단의 주권을 하나님께서 쳐서 없애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서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인간이 들어오게 되니 곧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은 구원을 의미한다(샬롬).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그게) 복음이다. 그리고 초대 교회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한 활동을 복음 선포라 할때 그것은 사42:7과 53장 등에서 왔다. 그런데 바울의 사도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하나님 나라가 복음이다(예수에게 있어서) 그것으 이사야서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 한다.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느냐? 즉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연결하는 문제 이것이 신약에서 열심히 설명하는 주제이다. 또는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마,막,눅,요)들은아주 유대 문학적으로나 헬라 문학적으로나 독특한 장르(문체) 문학형식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어떻게 보면 전기같지만 전기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전기 같다(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기 같다). 그러나 그게 전기와 다른 것은 예수의 생육과 가르침과 행적 이런 것을 그냥 무슨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듯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케리그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결단하는 요구를 우리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보통 전기와는 다르다. 이러한 독특한 문학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문학의 이름을 복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 이때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님 나라와는 어떻게 관계가 있느냐? 이런 여러 문제를 제시해 준다. 그래서 이 복음이라는 낱말 자체는 아주 잘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사야는 복음을 히브리어로 הרושׁב라고 한다. 그리고 복음 선포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רשׁב이다(피엘형). 그래서 이러한데서 나오는 것에 근거해서 전혀 새로운 기독교적인 용어를 개발했는데 그게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그것을 공부하면 우리가 초대 교회의 신앙의 새로움과 깊은 의미를 어느정도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상당히 좋은 연구 과제이다.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우리가 할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복음을 어떻게 받았느냐?
1)바울은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갈1:11,16)
갈1:11-12
자기는 이것(복음)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다. 여기서 받는다는 것(παραλαμβνειν)은 히브리어의 לכק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승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한 랍비가 그의 스승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이어받는다는 전문언어이다. 그렇게 자기는 복음을 한 랍비가 랍비의 선배,스승랍비로부터 전수받듯이 인간을 통해서 전수받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인간을 통해서 자기에게 전수된 것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왔다. 정반대이다. 전승을 전수받는 것이다. 이것(παραλαμβνειν)은 전적으로 계시받아서 왔다고 말한다. 아마 갈라디아의 교회에서 그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아마 이렇게 주장한 것 같다. 바울은 원래 예루살렘 사도드로부터 복음을 전수 받았다. 이방인들에게 잘 먹혀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율법과 할례등의 요구를 그 복음으로부터 떼어 내 버림으로서 그복음을 인간적인 복음으로 만들고 왜곡했다. 이렇게 주장을 하면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바울한테 받은 복음은 인간들에게 잘 먹혀들어가기 위해서 인간들이 율법지키고 할례 받는 이 어려움을 완화한 싸구려 복음이다. 왜곡된 복음이다. 그러니까 그런 복음에 의한 신앙은 잘못된 것이고 그것으로서는 구원이 충분하지 못하니까 지금이라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바울이 아예 원천적인 전제부터 부정을 하는 것이다.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무슨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어떤 인간으로부터 복음을 전수받은 일이 없다. 오로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하므로 16절 그 예수 그리스도의 게시를 통해서 내가 복음을 받은 것이지 내가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인간들로부터 전수받았다고 나보고 그 복음을 왜곡했다고 내가 전수받은 일도 없다. 자기가 갈라디아서 선포한 율법의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 은혜로만 그리고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느니 복음을 자기가 누구한테 전수받아 가지고 그것을 왜곡해서 인간에게 잘 먹혀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고스란히 계시받은 것이라고 한다. 아주 그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문제는 고전 15:1-11에까지 보면 갈 1:11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한다. 나에 의해 선포된 복음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을 통해서 배운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시된 것이라고 아주 엄숙하게 선포했다. 고전 15:1도 똑같은 문장 형식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들에게 알게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선포한 복음은” 여기까지는 갈1:11과 똑같다. 다만 갈 1:11은 수동형에 의해 “나에 의해서 전해진 복음”이라고 했고 고전 15:1은 능동형으로 “내가 선포한 복음” 이것만 다르지 내용형식은 똑같다. 그 다음 완전히 180도 다르다. 나도 그것을 받은 것이고 여러분들이 받은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이 선 것이다. 그런데 구절에 “내가 받은 것을 여러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전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여기서 자기가 복음을 받았다. 그 다음에 쓰는 말이 그 복음을 바울이 παραδιδοναν 전승했다. 이것은 παραλαμβνειν 전승받았다. 이것(παραδιδονανα)은 전승했다. 이 두개가 랍비 유대교에서 한 랍비가 그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승해주고 그 제자는 그 가르침을 전승받고 하는 전문언어이다. 바울은고전 15:1-3에서는 이와 같은 랍비들간의 전수하고 전수 받는 전문언어를 동원해서 자기보다 먼저 된 사도들로부터 전승받았다고 그런다. 그리고 이제 바울이 누구에게 그것은 똑같은 방식으로 전수했는가?고린도에 전수했고 그러니 큰 문제가 발생했다. 고전 15에서는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승 받았다. 그리고 복음을 고전 11:1-3까지에서 복음은 무엇인가? 전승이다. 갈1:11-12,15 등에 의하면 그것을 바울은 강력히 부인한다. 부인하면서 복음이 계시라고 그런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가지고 미국의 경망스런 J.T.Sanders라는 사람은 “바울이 둘 중의 한 곳은 거짓말하고 있다”고 그런다. 이와 갈라디아에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정말 그런가?
그런데 사실은 거짓말이 아니고 둘다 깊은 의미가 있다. 바울은 복음을 계시 받았다. 바울의 복음은 그래서 계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해 봅시다. 내책 “Original For Gospel” pp67-70에서 토론을 했다. 그리고 Ladd의 신약신학 영어판 pp386-394에도 토론이 되어 있고 C.Backer의 “바울”이라는 책 pp109-136에도 토론이 되어 있고 Goppelt의 책 “신약신학” 제 28장 3항에도 토론이 되어 있다.
(해결책)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복음의 진리를 인간이 설득해서 설득해서 깨달았는가? 무슨 예루살렘 사도들한테 가서 깨달았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얻은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고 주장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그의 아들로 계시하셨을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곧 복음의 진의로 터득하게 되고 인정하게 되고 확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복음을 받았다고 그런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은 역사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즉 나사렛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므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관한 역사적인 사건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고 해석해서 기술함으로 선포되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역사 속에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복음을 우리가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으로 서술함으로서만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의미로 복음은 전승의 대상이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고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죽고 부활했는가를 아는가?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예수의 죽음과 삶과 부활의 증인들) 즉 예수를 따라 다닌 사람들이 서술해주어야 우리가 아는 것이다.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예수의 옛 제자들로부터 전수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자기가 복음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고전15:3-5까지 요약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을 설명하는 서술이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은 고전 15:3-5까지의 요약대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서술함으로서만 선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전 15:3-5까지의 복음의 서술은 규범적인 것이다. 왜 그러냐면 바울이 11절에서 “모든 사도들이 다 똑같이 그 복음을 선포한다”고 그러다. 나나 저들이나 이렇게 선포하고 이렇게 너희들은 믿는다. 그러니까 모든 사도들이 공통으로 이와 같은 서술 방법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 당도했을때(고전15:1)에 이 복음을 그대로 넘겨주었고 그 복음 안에 너희들이 지금 서 있다. 그 복음으로 너희들이 구원 받았다. 그래서 고전 15:3-5은 규범적인 복음 서술 형식이다. 이 형식을 바울이 전승으로 받았다는 말이다. 고전 15장의 바울의 관심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게 바울의 관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도드로가 모든 교회가 공통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형식을 상기시키는 것이 주요했던 것이다. 고전 15:2에 보면 번역이 좀 재미가 없다. “내가 어떠한 말투로(πινι λογω ευηγγελισαμην υμιν) 상기 시키겠노라”는 말이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자기가 선포하고 모든 사도들과 온 교회가 선포하고 믿는 복음의 문장 형식 하나 하나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전승의 전문언어를 써서 상기키시는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에서는 중요한 것이 그게 아니고 복음의 내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심으로 우리가 믿음으로만 덧입을 수 있다고 복음이 내용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유대주의자들은 복음보다 율법과 할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갈라디어사는 복음의 문자 형식이 중요한게 하니다. 즉 이것이 issue가 아니다. 이러한 문자 형식으로 전달되는 내용의 해석이 중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해석하는 복음의 진리가 누구한테 전승받아서 왜곡한 것이 아니라 계시로 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계시 이것은 곧 은혜,믿음으로만의 구원을 의미한다. 그것은 원래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받는게 아니고 믿음 더하기 율법이라는 복음을 받았는데 그 중에 율법을 떼어내버린 것이라고 유대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그게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구원의 사건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은혜 그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피상적으로 보면)보면 바울이 정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둘다 어울리밍 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복음은 계시이면서 전승이다. 또는 전승이면서 계시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진리는 전승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승이 된다. 사실은 우리에게도 계시가 되어야 한다. 복음의 문장 형식은 우리에게 전승된다. 그러나 진리를 깨우치는 것은 성령의 계시에 의해서 또는 영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항상 계시와 전승이다. 바울이 갈 1:15이 후에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받은 3년 뒤에 예루살렘에 가서 게바를 알고 지내러 갔다고 한다.
갈 1:18에 “ιστορησαι κηφαν” 라고 나온다. 이 말을 요새 학자들은 게바에게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갔다고 확대 해석을 한다. 그래서 게바와 두 주간 같이 지내면서 예수에 관한 정보를 확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복음을 베드로에게 전승받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기술하는 문장 형식으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은 계시와 전승이다.

바울신학 제8강
지난 시간에 아마 갈1:11,12 그리고 15,16 등에서 바울이 복음을 계시로 받았다는것을 주장하는 것과 고전 15;1-8까지에서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로부터 전승으로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대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지난번에 설명을 한 것 같다 .
그래서 복음이 계시이면서 동시에 전승이라는 것. 예수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종말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이 복음인데 이것은 계시로 알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구원의 사건이 역사적 예수,나사렛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이나는 역사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은 동시에 전승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나사렛 예수의 사건(삶과 죽음과 부활)이 그냥 평범한 인간의 생애가 아니고 이것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확인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이 복음은 계시이면서 동시에 전승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왜 이 복음의 계시성을 강조하느냐면 자기가 받은 복음은 곧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리가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믿음으로만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자기 복음이 갈라디아 교회에서 그 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에 의해서 공격을 받기 때문에 바울이 자기가 예루살렘 사도로부터 받은 복음을 인간들에 의해 더 쉽게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왜곡한 것이 아니다. 자기는 원래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이 복음 곧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전파한 복음, 지그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공격하는 이 복음을 자기가 사도로 부름받은 때에 계시받은 복음이다. 이렇게 주장하기 위해서 자기의 복음의 계시성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에 고전 15장에서는 바울의 주안점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사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인데 이 핵심을 온 세계 교회가 같이 고백하는 것이고 이 신앙고백 위에서 우리들이 다 장래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는데 이 지금 고린도의 사람들이 부활을 부인함으로 바울이 그들에게 전세계 교회의 공통된 신앙고백, 또 공통된 복은 자기가 고린도인들에게 선포한 복음 자기가 먼저 사도된 자들로부터 전승받은 복음을 상기시킴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인할려고 부활의 신앙을 끝까지 겨지해야 했다. 그것에 근거해서 우리가 우리 개인들의 장래의 부활을 소망할 수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이 전승된 복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한편으로는 복음을 전승받고 계시받았다. 곧 계시 받았다는 말은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그를 통해서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계시받았다. 그런데 바로 그와 같은 사실(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를 위한 구원자다. 예수의 사건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등을 그런 뜻을 나타내는 신앙고백 이게 전승이다. 이 전승으로 또 바울에게 주어졌다. 그게 어떻게 되었느냐면?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등을 전승되었고 또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등으로 전승되었고 또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등으로 초대교회가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고 이러한 신앙고백을 선포의 형식(Kerygma)으로 삼았다.
복음 ꠆ꠏ계시
ꠌꠏ전승-신앙고백-예수=그리스도 ꠏꠈ
주 ꠐ⇨바울신학
하나님의 아들 ꠐ
죽고 부활함 ꠏꠎ
그래서 이런 것들이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의 형식이다. 복음에 에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는 이 복음의 구체적인 표현형식이 이런 식으로 초대교회에서 되었다. 바울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라는 계시를 받고 그 복음을 초대 교회에서 이미 성립된 복음의 표현형식을 전승받아서 그것을 빌려서 그 형식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만 바울은 이것을 그냥 전승받아서 그대로 쓰기만 한게 아니고 자기의 신학적인 통찰력 특히 구약과 또 자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이런 것의 빝 아래 더욱 풍부하게 그 의미를 함축시켜 가지고 이 초대교회가 이렇게 예수가 그리스도,예수가 주,예수가 하나님의 아드, 죽고 부활함 등으로 신앙고백할 때 또는 그런 형식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에 뜻했던 것보다 더 깊이 그리고 더 큰 의미를 부과해서 다시 말해서 더 발전시켜서 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신학이다. 바울은 이러한 과정중에서 초대교회가 미처 쓰지 않는 복음선포 형식도 스스로 개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일종의 기독론적인 표현형식이 예수가 하나님이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예수가 마지막 아담이다. 이런 것들은 바울 신학에서만 나오는 예수에 대한 선포형식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부 초대교회(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의 복음의 표현형식을 빌려서 그것을 더 풍부하게 해서 예수를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의 사건이다고 선포하기도 하고 일부 자기가 직접 새로운 신학언어들 기독론적인 칭호들을 개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 사건됨을 선포한 것읻. 이런 것들이 바울신학이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신학 할때 이런 것들을 바울신학이라고 그러는데 바울신학의 독특성을 말한다면 이 초대교회의 공통된 케리그마를 바울과 신약에서 바울 외의 문서들(요한,마태,마가,누가,히브리서) 등과 비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어떤 점에서 바울이 요한,마태,마가,누가,히브리서 저자와 어떤 점에서 같이 또 어떤 점에서 좀더 색다르게 선포하는가 또는 이 ‘주’라는 칭호는 또 어떻게 바울과 신약에 있어서 바울이 아닌 다른 저자들과 어떻게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어떻게 좀 색다르게 사용하는가 하는 이런 것을 살펴봄으로 바울신하이 독특성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것(예수=그리스도,주,하난미이 아들,죽고 부활함)은 완전히 바울신학의 독특성이다. 이런 것들을 이제 전부 가려서 생각을 해보면 바울신학의 전제를 그릴 수 있고 또 바울신학이 초대교호의 보편적인 신학과 공통신앙이 어떻게 일치하며 어떻게 독특한 점이 있는가 하는 이런 것들을 우리가 헤아릴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좀 해볼려고 한다.
바울은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정의하고 구원론적으로도 정의한다.
가령 기독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롬1:2-4/고전15:3-5/고전1:23/갈1:12,16/고후4:4 등 또 구원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롬1:16등. 그런데 기독론과 구원론은 두개이 상이한 서로 분리될 수있는 교리가 아니라 한 교리의 양면이나 우리가 편의상 이렇게 분리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론은 구원론의 근거이고 구원론은 기독론을 인간론적인 응용(적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원론은 무엇이냐면? 기독론을 우리 인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적용한 것이다. 우리 인간들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미를 파헤친 그것이 구원론이다. 그래서 기독론이 구원론의 근거이기 때문에 이 ‘바울신학’은 기독론 중심이라 할 수 있고 우리의 바울 연구에 있어서도 기독론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불트만 학파에서는 길고 실존주의 신학에서는 구원론 중심으로 바울신학을 전개했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이 사람들은 인간론이 중심이다. 인간론이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 우선한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것은 옳지 않다. 이 옳지 않음을 가장 예리하게 지적한 사람이 전에 불트만의 제자였던 E.Kasemann이다. 그래서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는 인간론보다는 기독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을 인간에 적용한 것이 곧 그리스도의 인간을 위한 의미르 이제 해석할 때에 비로소 기독론이 구원론이 된다 하는 것을 밝혔다. 자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칭호,또 주라는 칭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또 하나님의 형상,아담,이런 칭호들을 따져가면서 바울신학의 연구를 할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해결할 것이 있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바울 전에 신학의 단계가 어느정도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복음을 계시받고 사도로 부름받았을 때에 당시 교회의 신학이 어느정도 발달했나 곧 당시 교회가 복음을 어떻게 선포하고 있었나? 아까 이야기하대로 바울은 당시 교회가 선포하고 있던 복음을 전승받아서 그 표현 바업으로 자기의 계시 받은 복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풍부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름받고 복음을 계시받을 그대 즈음에 그러니까 이게 시간적으로 말하면 AD32-34 이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한 것이 AD 30년 쯤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 죽고 부활하심과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사건은 불과 2,3년 떨어진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직후 이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나타나고 예수를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하는 복음 선포 양식들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울전에 얼마만큼 발달해서 바울이 이때부터 받은 복음의 계시를 어떻게 이들이 먼저 이룬 그 복음이 표현 방법들(이것이 전승이다)에 의해 표현되게 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데
첫째로 고전 15:3-5 여기에 보면(지난번에 고전 15:1-2은 살펴보았던 바울이 랍비들의 전무 개념인 전승받고, 전승하는 전문언어를 써서 복음을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 된 자들로부터 전승받아서 고린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제일 먼저 전승한 것이다.그 믿음 안에 이들이 서 있고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3절부터 그 내용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들을 위해서 죽었다. 성경의 예언대로 죽었다. 그 다음에 4절에 그가 장사되었다. 이게 다 ‘οτι’라는 절이다. 영어로는 that 절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 또 ‘οτι’ 장사되었다. 그 다음 4절 후반부에 첫째로,둘째로,세째로 그 다음에 3일만에 부활되었다(일으킴을 받았다). 이것도 성경대로 그 다음에 게바에게 보여졌다(나타났다). 그러니까 부활해서 나타남 게바에게 나타나고 그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났다. 12제자 12사도가 전문용어이다.여기까지가 ‘οτι’절로 되었었다(that절). 그 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나타나고 그 다음에 모든 형제들,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 다음에 6절에 500여 형제들에게 나타났다. 게바에게 나타나고 12제자에게 나타나고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고 그리고 괄호속에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몇은 죽었어도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 이런 것은 괄호에 들어가는 것이다. 7절에 그 다음에 야고보에 나타나고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 다음에 8절에 마지막으로 바울 자신에게 나타났다. 우리 성경에는 ‘유산된자’와 같은 자기에게 나타났다. 여기 이 두부분(7절,8절)은 ‘οτι’로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대개 학자들이 3-5절까지가 원래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초대교회가 선포했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이어 받았다. 지금 부활 나타남을 씨리즈로 말하고 있다. 세 씨리즈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부분(7-8절)은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돼 덧붙였냐면 지금 고전 1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활 나타남에 대한 정보를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왜 덧붙였냐면 지금 고전 15장에서 바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활 나타남에 대한 정보를 원래 복음에 덧붙인 것이다.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에 있어서 그러니까 원래 여기 (3-6)까지 복음이다. 초대교회가 선포한 복음이다. 그런데 여기서 살펴보면 첫째로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썼다. 예수가 메시야다라는 칭호를 썼다.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자다. 메시야다. 그러니까 예수가 성경예언을 성취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의 성경에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 사건이다.
둘째로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한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의 그리스도됨. 즉 종말론적인 구원자 됨을 무슨 정치적인 해방으로 무슨 다윗과 같이 왕조를 재건하고 이방인들을 정복하는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우리 죄를 속죄,죄문제를 해결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됨이다. 우리 죄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자적인 행위는 죽고 부활한 것이다. 이 나타남은 부활의 확인이고 그래서 예수의 그리스도 사건은 예수의 그리스도로서의 행위는 구원의 행위는 종말 구원자의 행위는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대로이고 그러니까 그것이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 주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이런 식으로 바울 전에 이미 교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고 예수의 그리스도됨을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핵심이 있다고 보았고 그의 그리스도로서의 행위는 무슨 정치적인 군사적인 구원이 아니고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할 구원으로 보았다. 이렇게 바울 전에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이게 οτι절로 되어 있다.
이제 하나하나가 사실은 이 순서를 가만히 보면은 우리가 마가복음의 순서와 많이 일치한다. 영국의 신약학자 C.H.Dodd는 ‘이 고전 15:3-5에서 그리고 사도행전 전반부에서의 사도들이 설교에서 그리고 마갑고음에서 공통적인 내용과 순서를 기출해 냈다. 가령 “성경의 메시야에 대한 종말의 구원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할 때가 왔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게 성취되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바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 회개하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을 덧입어라 그러면 성령이 너희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내용들을 초대교회에서 공통적으로 설교했다. 그래서 C.H.Dodd는 이런 것을 Kerygma라고 그랬다. 초대교회의 설교다. 그래서 초대교회 선교가 이와같은 공통적인 내용과 순서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마가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마가복음도 막8:27-31 이것의 내용은 “베드로가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 그리스도됨을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에게 넘겨줌을 받아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여기서부터 죽음을 예고한다”이게 마가복음의 분수령이다. 그전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설명하는 서론에 해당한다. 여기서(막8:27-31)부터서 예수가 메시야이고 제자들에 의해 고백되는데 어떻게 원수들에 의해 체포되고 어덯게 재판받고 수난받고 죽고 어떻게 부활했는가? 이게 예수의 수난사(Passion narrative)이다.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막은 예수의 수난사의 긴 서론이 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막 전체가) 사실은 막 8:27-31 안에서도 계속해서 예수의 죽음의 사건이 반영되어 있다.(예고되어 있다. 간접적으로). 그래서 막에서도 예수의 수난이 복음의 중심이다. 막 8:27-31에서도 보면 예수의 메시야됨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C.H.Dodd는 이런 것을 Kerygma라 불렀다(고전15:3-5 사도행전에서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 요약, 그리고 막에서 그 순서를 추출해서) 이런 것을 알려면 C.H.Dodd의 책을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이 책이 한때 영향력 있는 책이었다.
한말 더하고 넘어가면 요 말들이(고전15:3-5) 가령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 .그가 장사되었다. 이 하나하나가 한 문장 한문장이 사실은 예수의 수난사 전체에 대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고전15:3-5)서 한문장 한문장은 한문단의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령 초대교회 사람들이 이 복음을 선포할 때에 왜 사람들이 말하는 사영리식으로 했다(사영리→인간은 죄인이다-4개의 진리가 요약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소개할 때도 우리는 인간은 죄인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만 하는가? 왜 죄인이고 죄인이란 뜻을 설명한다. 둘째번하고 또 설명한다.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초대교회 교인들도 이것을 복음으로 선포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 그가 장사되었다. 그 말만 한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이며 어디서 났으며 무슨 일을 했으며 무엇을 가르쳤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고 어떻게 가르쳤고 제자들을 모아서 어떠헥 했다. 그런데 이것이 그원수들에게 어떻게 이용당해 가지고 그리스도가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되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는 제목이다. 그다음에 예수의 장사된 것은 성경에 많다. 어떻게 여자들이 향료를 준비하고 또 아리마대 요셉이 어떻게 예수를 사랑해서 무슨 향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와 가지고 자기 집안의 무덤에 묻었다는 이런 이야기등이 있다. 이게 제목이다. 이것을 선포할 대는 예수가 어떻게 향료를하고 어떻게 묻고 그런 것이다. 그 다음에 그가 삼일만에 성경대로 살아났다. 이것은 또 예수의 빈무덤 이야기 이런게 주욱 나온다. 예수의 나타남 게바에게 나타났다. 성경에 보면 제일 먼저 예수가 누구에게 나타났는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그런데 여기 왜 막달라 말리아가 나타났느다는 말을 쏙 빼고 게바에게 나타났다고 했는가? 당시 여자들은 증인 자격이 없었다. 여자들이 증인서면 역효과가 난다. 그래서 빼버린 것읻아. 그래서 게바가 제일 먼저 나온다.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복음의 공식적인 표현은 제일 먼저 게바에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들에는 게바 전에 마리아가 예수를 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가령 M.Hengel같은 사람은 그게 아주 우리 복음서의 성격과 역사성,신빙성에서 좋은 증인을 해주고 있다고 한다. 복음서가 만약에 초대교회 신앙을 그냥 역사화 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면 -그것이 불트만 학파의 양식사학파들의 주장-복음서에 게바가 예수를 제일먼저 본 것으로 되어 야 할 것이다. 마리아가 본 것은 삭 빼버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자가 증언하면 역효과가 날 판에 왜 마리아가 제일 먼저 보았다고 하는가? 마리아가 게바 다음에 보았다고 해도 좀 어설픈데 게바보다 먽 보았다고 한다. 이것은 왜 그런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이것을 신실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서의 역사적 신실성을 말한다. 그래서 이제 게바에게 먼저 나타났다고 하지만은 아마 우리 복음서에 있는데로 이라 선포한 사람들은 어덯게 여자들이 이제 향료를 준비해가지고 갔는데 마리아에게 나타났고 마리아가 어떻게 게바에게 가서 알려가지고 게바에게 준비했는데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고 이런 예수의 나타남의 이야기를 쭉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을 풀면 아까 이야기한데로 οτι절(That)들은 다 무엇이냐면 각각의 이야기들의 요약하는 제목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제목에 함축된 이야기를 다 풀면 무엇이 되느냐면 막 같은게 된다는 말이다. 복음서들 같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복음서에서 복음서들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마가가 복음을 펼친 것을 뭐라고 말했느냐면 복임이다. ευαγγελιον이라 했다.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은 고대 문학장르에서 아주 독특한 장르이다. 신약성경의 현상이다. 복음이라는 문학장르가 있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도 학자들이 복음이라는 문학장르를 고대 알렉산더 대왕같은 헬라 영웅의 전기와 비교해볼 수 있을까 아니면 모세에 대한 전기(유대 사람 전기)와 비교해 볼 수 있을까? 아니며 이게 무엇이냐? 이렇게 해서 문학장르를 새롭게 정의할려고 하는데 그런 전기와도 일부 공통점이 있지만 전기가 아니다. 헬라식으로 전기가 아니다. 복음서가 전기이기 위해서는 에수가 어떻게 자라고 교육받고 성격이 어떻고 기런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게 하나도 안나타난다. 복음서에 보면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예수이 공생애의 가르침과 선포와 그의 투쟁과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임을 깨닫고 믿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믿음을 유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는 전기라기보다는 선포(Kerygma)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트만과 같은 양식사학파들은 복음은 전적으로 전기의 성격이 전혀 없고 선포의 성격만있고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선포의 성격만 있다고 강조해서 양식사학파의 대전제이 하나가 이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학자들은 이 복음이라는게 독특한 문학장르이지만 일부 당시의 전기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니까 당시의 전기,극작(드라마),헬라의 비극작품들과도 일부 비슷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아주 독특한 문학장르이다. 그런 류는 바로 이와같은 복음의 선포에서 복음서들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다. 또 (바울전의 신앙고백)을 살펴볼 수 있는데 롬 1:3-4에서 바울은 롬1:1에 “예수의종 마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성별되고 사도로 부름받고” 바울이 그 다음 7절에 로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 성도로 불림움 받는 자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되어 있다. 발신은 바울이고 수신은 로마에 있는 성동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쓴다. 그런데 바울이 자기가 어떤 사도인가 설명하는데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사도로 부름받았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받았다. 또는 분별되었다는 사도”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는 2절에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이냐를 또 길게 정의를 한다(2-4절까지).그래서 그 과정 중에 복음을 여러가지로 정의한다.
복음이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 복음이 저자가 하나님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복음의 신적 quality를 말한다. 복음이 인간적인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사건을 말한다. 그러니까 신적 quality로 되었다. 인간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적인 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 다음 2절에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이냐면 성경들이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이 무엇이냐면 성경에 있어서의 선지자들의 예언, 또는 선지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성취이다. 성취가 복음이다. 이 복음을 이렇게 두번째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사적으로 복음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종말론적 사건이다.
세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냐? 3절에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들이 복음의 내용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바울은 아주 자주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요약한다. 여기서도 복음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이 복음이다.
9절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아들의 복음. 그의 아들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섬긴다고 바울이 말한다.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복음의 내용으로 정의한다. 그 다음에 이제 3절과 4절에서 지금까지 복음이 정의였고 이제 그의 아들에 관한 정의를 두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3절에 그이 아들이 어떤 분인가? κατα σαρκα(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라) 그 다음에 4절에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 (성결의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우리만 번역은 잘못되어 있다. “성결의 영으로...”“능력으로”가 어순이 잘못되어싿.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홣여”이렇게 원인적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또 시간적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죽은자들로부터,부활할때부터)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된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사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εν δυναμις가 하나님의 아들(명사)를 수식하는 말이다. 동사를 수식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능력으로 임명된 것이 아니고 능력을 행사하는 전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이 아들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거기_____ 이말이 임명되었다는 말도 되지만 등극했다는 말도 된다. 내용이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내용을 헬라어로 쓴 이유가 있다. κατα σαρκα(육신에 의거해서) 이말이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지금 σαρκα(육신)과 성령을 대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게 정확히 무슨 말이냐? 아니면 예수가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로 낳지만 성령에 의해서 잉태된 성육신한 자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이게 아주 번역하기 어려운 말이다. 이걸 논할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을 대부분의 학자(바울 전의 교회의 특히 아람말을 쓰는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의 복음 또는 신앙고백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금방 나타난 것과 같이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성령을 성결의 영이라는 표현은 이것은 완전히 셈족언어의 형식이다. 바울은 성령을 항상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ων 으로든가 το αγιων πνευμα 그러지 이런 식으로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로 쓰기 때문에 이것은 분명히 셈족언어 스타일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유대셈족 말을(아람어를) 쓰는 유대 기독교가 정의한 복음 또는 신앙을 바울이 문자 그대로 직역했다는 말이다. 그런 흔적이 여기 남아 있다. 또 하나 κατα σαρκα와 κατα μνευμα를 대조시킨 것이 바울신학이기는 한데 그것이 대표적으로 롬 8장에 나온다. 그러나 바울은 σαρκα 와 πνευμα를 이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방루에 있어서 σαρξ는 육신은 항상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로서 인간을 말한다. 여기서는 그런 뜻이 있지 않다. 이것은 도리어 구약과 유대교적인 의미로 רשׁב 이다. 그냥 하나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 우리 몸을 가지고 물질적인 세계에 사는 존재 이정도 뜻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항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육신이라는 말은 살덩어리라는 소리가 아니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로서의 인간을 육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의미가 전혀 없다. 그러니까 이게 바울적인 언어가 아니다. 이런 것도 신앙고백이 바울 전의 기독교의 복음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롬 1장에서 복음을 또 한번 정의한 것이다. 롬 1:16에서 복음을 정의하는데 그전 (롬1:1-9)에 복음은 기독론적으로 정의하고 롬 1:16에서는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겠지만 이 두정의가 일핏 보기에는 이렇게 완전히 다르지만-하나는 구원론적이고 하나는 기독론적으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정의가 똑같은 것을 말한다. 여기서 이게 ①κατα σαρκα②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 바울전의 기독교 복음이다는 것이다.
아까 고전 15:3-5까지를 대강 분석함으로서 바울 전의교회가 무엇을 복음을 보았으며 그 복음을 어떻게 선포했는가를 대충 살펴보았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이 복음 선포할 때 예수를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했다. 그런데 몰1:3-4은 삼하 7:12-16까지를 근거로 삼고 있다. 이른바 구약의 나단의 예언 또 나단의 신학이라고 하는 이 부분을 근거로 삼고 있다. 이 나단의 예언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 다윗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네 수가 다하면 그러니까 네 씨, 다윗의 아들 하나를 일으켜서 그를 네 왕 위에 앉히고 내가 너희 집을 세운다(너희 왕조를 세운다). 그를 나의 아들로 선언한다.’ 곧 하나님의 백성 예수를 하나님을 댓니 통치하는 자라고 선언한다는 말이다(자기 아들을 세운다는 것은)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을 짓도록 하겠다. 성전을 짓게 하겠다. 이것이 나단의 예언의 내용이다.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준 약속이다. 그러니까 다윗의 씨가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아서 다윗 왕위에 앉혀지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솔로몬 위에 처음 약속이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솔로몬)을 일으켜서 그를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를 예수의 왕으로 세워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로 선언했다. 자기 아들로 선언한 의미는 자기 백성 예수 위에 자기(하나님) 대신 통치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말읻.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 그 뒤 이 약속에 근거해서 예수 왕으로 등극할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백성 위에 합법적으로 통치하는 자라는 것을 선언하였다. 이것이 시편의 등극시에 잘 반영되어 있다(시2편,89편 등). 가령 2:7(예수의 세례 때 울려퍼진 소리)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이렇게 다윗의 왕위에 등극하는 다윗의 아들(예수 왕)을 하나님께서 자리도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 대신 통치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구약에서 메시적으로 해석이 된다. 그게 이제 스룹바벨과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고 또 돌아오고 하는 다 이런 과정들도 있지만 선지자들 또는 시편의 기자들 나단의 예언을 계속 자기들을 실망시킨 다윗의 자손에서 그것이 실현될 수 없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다윗과 솔로몬을 정점으로 다윗 왕조가 퍠역한 타락의 길로 간다. 그러니까 여기서 성취될 것으로 못본다. 또 나중에 바벨로니아에서 돌아온 다윗 왕가의 마지막 왕자인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취되리라고 굉장히 기대를 했는데 그것도 흐지부지 되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점점 이 예언을 종말에 성취될 예언으로 본다. 그래서 이 예언이 바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의 뿌리가 된다. 그래서 메시야의 칭호들이 전부 다윗의 씨,다윗의 다들,다윗의 가지,하나님의 아들 등이 메시야의 칭호들이 된 것이다. 다 여기서 나온것이다. 예수의 사건, 삶과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기독교 공동체는 바로 예수가 이 예언을 성취한 것이다. 복음이 선지자를 통한 약속의 성취이다. 예수가 바로 이 약속을 성취한 것이다. 왜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아들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켰다.(부활로 4절 εξ αναστα...그를 부활시킴으로 말미암아) 이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하나님의 아들로 왕위에 등극하게 했다. 그러니까 다윗의 아들로 예수가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다. 육신의 삶에서도 그는 다윗의 아들로 메시야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부활전에요 부활후에가 완전히 다르다. 부활 전에는 감추어진 아들이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들만 그를 이해할 수있고 믿음 있는 자들만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능을 덧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믿음 있는 자들만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세로 치유함을 받고 용서함을 받는 그런 권능을 덧입었다. 그러나 그게 대게는 감추어 졌다는 것이다. 이제 부활로 말미암아 만유의 주로 등극했다. 어떤 권세를 행사하는 주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이제 감추어진 것이 싹 벗겨졌다. 빌2:9-11과같이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우편에 올리셔서 온 우주로 하여금 그를 주로 고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의 신앙고백이다.
그래서 바울 전에 이미 예수의 사건이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 사건으로서의 유대메시야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분이라는 것,그가 다윗의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그가 만유의 주로 이제 능력을 행사하는 분으로 이제 사단의 권세의 영역에서 인간들을 해방시켜서 자기의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권세(주권)의 영역으로 들여오는 주권자라는 것(골1:13) 등의 의미를 바울 전에 이미 예수에게 신앙고백한 것이다.
또 하나 많은 학자들은 롬 3:24-25에서 초대교회 예루살렘 공동체의 신앙고백의 모습을 볼 수있다고 한다. 불트만 학파는 헬라 유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본다(3:25f) 아주 어려운 것이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피를 통한 ιλαστηριον으로 세웠다(25절)”“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ενδειξιν 하기 위해서이다. εις ενδειξιν της δικαιοσωνης αυτου(=Θεου)이다. 그 다음에 δια την παρεσιν των προγεγονοτων αμαρτηματων 이렇게 되어 있다. 26절 εν τη αρχη του Θεου προς την ενδειξιν της...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은혜로 의롭다’하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됨의 근거를 설명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선언하고 어떻게 해서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느냐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그 근거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ιλαστηριον으로 세우셨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크게 두 해석의 주류가 있다.
하나는 전통적 해석 방법. 이것이 무엇이냐면 ιλαστηριον이라는 말이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영어로는 propitiation이다.내용상으로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그래서 우리 대신 벌받는 대속물을 바침으로써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노를 풀어버린다. 이것을 ιλαστηριον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해서 노하신다. 그래서 우리를 벌 주시고자 한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 대신 벌을 받아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버린 것이라는 것을 ιλαστηριον이라고 하고 propitiation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버린 사건이다. 우리 대신 벌을 받으시므로 말미암아 그 진노를 풀어 버린 사건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의’를 증명했다. ‘하나님의 의’가 증명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동안에 과거에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서 간과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 필요가 있었다. 전통적 해석 방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오래동안 인류의 죄를 정죄하지 않고 그냥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오래 참았다. 그러니까 인류는 계속 죄를 쌓아가지고 역사 속에 의로운 하나님이 인류를 다스리심과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있나 없나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문제 삼기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들을 벌주어야 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벌을 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사랑의 하나님이라 그래서 인간들에게 내릴 벌을 자기 아들 그리스도에게 내림으로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벌을 받도록 함으로써 이 공의를 만족시켜서 (만족시킨다는 교리가 여기서 나온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더 이상 진노하지 않도록 그의 노를 풀어 버렸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제 의롭다고 선언할 수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의로우신 분임을 증명하게 되었다. 이게 전통적인 해석방법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근거해서 왜? 대속의 죽음은 ιλαστηριον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대신 받아서 그의 노를 풀어버려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이상 진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를 더 이상 그 진노의 상태에서 해방시켰고 의롭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해석은 이른바 penal substition theory 라고 그런다.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나? 또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어떤 근거에 의해서 의롭다 하시는가? penal 그러면 형법적인 벌주시는 대치이론이라는 말이다. 우리 대신 그리스도가 대신했다(substitution) . 그래서 벌을 받았다. 이런 이론이다. 이것은 그래서 atonement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의롭다고 했느냐에 atonement 이론 중 중요한 penal tubstitution theory라 이것을 형법적인 카테고리로 설명을 하는 것이고 벌주는 것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벌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와 벌 받음에서 자유롭게(의롭게) 되었단 말이다. 이런 것을 penal substitution theory 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복음주의 구원론의 기초이다. 이 때의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υνη)’라는 것은 어떤 놓음,규범에 맞지 않으면 벌주는 법적 개념으로서 ‘의’라 즉 forensic(법적 재판적 개념)의 ‘의’이다. 이때의 δικαιοσυνη의 ‘의’를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의인 되었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이냐면 재판정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그말이다.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서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의 재판정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서 하나님의 진노함의 벌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의인’되었다는 소리이다. 칭의라는 말이다. 이게 하나의 해석의 system이다.
그러나 최근에 독일에서부터 강력히 일어나는 해석방법은 이것(위엣것)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또 penal substitution theory는 하나님을 너무나 헬라적인 벌주기를 좋아하고 또 무슨 제사 바치면 화를 풀어버리는 이런 우상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을 격하시킨 것이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언약의 하ㅏ니이고 그의 백성이 설령 언약에 신실치 못하고 죄를 지어도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지 벌주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을 그냥 인간적인 편협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또 ‘의’라는 개념은 이것은 재판적 개념으로는 로마(헬라)적 개념이다. 구약적인 개념으로 ‘의’는 법적인 개념이 아니고 관계론적 개념으로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충족하는 것을 ‘의’라고 한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הקדצ에는관계론적 개념으로서 이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충족할 때 그 ‘의’라고 한다. 가령 부자간의 관계에서 아버지에게는 그 아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사랑할 의무가 주어진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 대해서 의무를 다할 때 아버지는 의롭다. 아들은 이 관계에서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다할 때 아들은 의롭다. 이웃과 이웃의 관계 속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관계에서 나오는 이웃에 대한 의무이다. 이 의무를 다할 때 이웃이 의롭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언약으로 의무를 진 것이다. 언약의 관계가 하나님게 지우는 의무가 무엇인가? 하나님 스스로 이 언약의 관계로 이스라엘을 부름으로서 자기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는 의무를 진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관계에서 나온 의무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의무를 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느때 의로운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할 때 의롭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언약을 지키지 못한다. 언약의 관계에서 나온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불의하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안지키고 하나님 노릇 안해주면 하나님도 불의하다. 이스라엘은 언약의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불의하지만 하나님 만은 그 언약에서 나온 의무를 신실히 지킨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의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는 이런 법정의 개념이 아니라-잘못하는 자를 벌주는 개놈이 아니라-그의 언약의 신실함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 곧 그의 언약에 신실함은 항상 이스라엘 대한 구원의 형태로 나타나다. 왜?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신실함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또는 구원의 힘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령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이 과정에서 애굽의 군사들을 다 홍해에 수장시켜 버렸다. 그것을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냈다고 그런다. 법정개념으로 어떻게 사람을 작뜩 죽인 것이 의로운가? 또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을 차지 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기에 사는 사람들을 싹쓸이를 해버렸다. 헬라적인 ‘의’개념으로는 객관화되고 추상화된 ‘의’의 개념으로는 불의한 일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냈다고 그런다. 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의 ‘의’를 나타내서 이방민족들 다 정복하고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을 주리라고 한다. 헬라적인 의미로 이방민족을 다 죽인 것이 무슨 ‘의’인가? 그런데 왜 ‘의’라고 그러는가? 이것이 이스라엘(선택한 백성)에게 하나님 노릇해주는 것이란 말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짓밟는 이방인들을 싹쓸어야 구원할 수있다는 말이다. 즉 언약의 관계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의’라는 것이다. 이 일부의 독일 학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의 학자들은 롬 3:25-26의 결정적인 말씀을 바로 이 카테고리(구약적인 ‘의’-관계론적)로 해석한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의 ‘의’가 나타났다 하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 사건이다. 이 소리는 에수가 우리 대신 벌 받았다는 소리가 아니다. 무엇을 전제하냐면 언약의 관계를 인간이 지키지를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불의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언약에 충실해서 우리에게 이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수단을 제공했다. 이 ιλαστηριον이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즉 언약을 회복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ιλαστηριον을 성전에 있었던 시은석으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시은석은 언약궤 뚜껑 위에 하나님게서 앉아 계셨다고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좌가 언약궤 뚜껑에 놓였다고 보았다. 이 언약궤 뚜껑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헤가 베풀어졋다고 보았다. 언약궤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언약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파괴해 버려서 하나님과 관계가 절단이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해서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한다는 말읻. 그래서 언약궤의 뚜껑이 하나님의 어좌로서 이것이 은혜를 베푸는 자리라는 것이다 . 그래서 시은석을 우리 죄를 덮어 버려서(expation)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인간들과 하나님을 다시 한번 회해시킨 사건이다. 그래서 현대의 독일식으로 해석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이 그의 언약에 신실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자기와 화해의 수단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의’를 드러냈다. 자기 의는 바로 언약의 신실함 즉 우리에게 하나님 노릇해 줌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지켜서 우리를 다시한번 그의 은혜의 관계 속으로 회복되게 한 우리를 자기에게 화해시킨 사건이다. 이런 식을 해석을 하는 것이다.
이 두해석 하나는 penal substitution theory해석과 현대 독일 신학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가 어려운 이유가 있다. 바울 신학을 공부하다보면 두 요소가 다 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진노함이 계시되었다고 그런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열심히 말한다. 진노를 벌 주는 개념이다. 또 바울은 열심히 최후의 심판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령 살전 1:10에서 우리가 그의 아들을 하늘로부터 기다린다 그의 아들이 우리를 그의 진노함으로부터 건져낼 것이란 말을 한다. 그러니까 ‘의롭다함’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최후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무죄 석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penal conseat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울에게 있어서 관계론적인 개념도 있다. 그런데 구약에서 ‘의’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아직도 이 부분이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이 바울 신학이 구원론에 있어서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칭의론이 핵심이다. 그래서 옛날에 조직신학을 한 사람들은 penal substitution theory가 전부인줄 알고 안주해 버렸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penal substitution theory는 부도덕한 걸로 본다.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 아닌 사람을 죄인 대신에 벌 주느냐? 이것은 부도덕하다고 본다. 특히 영국사람들이 그런다. K.Barth는 영국은 지금까지 펠라기우스 전통이 살아있어 가지고 도덕적 개인주의(개인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책임짐) 때문에 이것은 부도덕하다고 본다. 이런 것은 현대적인 해석에 별 의미가 없다할 망정 이 바울 신학에 자세히 보면 두가지가 다 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게 아직도 석연치 않아가지고 구약과 신약에 있어서 ‘의’개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있어서 책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교통정리가 덜 되었다. 그래서 내 책에 두 가지 해석을 다 써놓고 나는 결정못하겠다고 했다. 이 말은 둘다 옳다는 말이다. 전통적인 해석도 옳고 최근에 새로운 통찰력도 상당히 의미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토론하기 위해서 자세히 설명한 것이 아니고 많은 학자들은 특히 후자 쪽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롬3:25-26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자기 의를 나타내고 우리 죄를 대속해서 자기와의 화해관계로 환언시킨 의미로 그의 피흘림이 제사이고 그런 의미로 구원의 사건이라는 신앙고백이 많은 학자들은 바울 전에 이미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롬3:25-26은 고전 15:3-5/또 롬1:3-5과는 좀 달리 아까 고전 15:3-5/롬1:3-5은 독선적으로 바울 서신에 있는 모든 것이 바울이 썼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학자들이 바울 전에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고전 15:3-5에서는 바울이 자신이 인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두곳은 바울 전의 것이라고 다 인정한다. 그런데 롬 3:25-26은 지금도 상당히 많은 소수의 학자들이 바울이 직접 쓴 것이라고 본다. 다수 학자들은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어쨌든 우리 성경롼에 아무 관계 없는 것이고 차리라 바울 전의 것이라면 보수 신학자들에게는 더 좋은 것이다. 보수 신학자들은 현대 신학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무조건 이단자가 발견했다고 해서 의심하고 들어간ㄴ데 바울 전에 교회가 발견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AD32-33년에 되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엄청난 신학이 바울 전에 이루어졌다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 직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엄청난 신학적 통찰력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됨을 증명해 준다. 이것이 만약에 바울 전의 것이라면 그렇다. 그래서 우리가 신학을 하면서 보수신학의 이해관계로 따진다면 이것이 바울 전의 교회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더 유익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바로, 멍텅구리들은 이런 소리 하면 이단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불러주고 바울이 썼으니가 바울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바울이 써야 했는데 무슨 소리냐? 바울 전에 교회가 하는 것을 바울이 인용했다고 그러면 영감이 좀 떨어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바울 전에 교회가 영감받아서 이렇게 신앙고백 했으면 이것이 더 귀중하다.

바울신학 제9강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심각하게 대두된 것은
첫째로 바울이 서신들의 예수에 예수의 가르침을 거의 인용하지 않고 있다. 예수이 말씀이 인용됨직한 곳에도 예수의 말씀들이 거의 인용이 안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말씀들이 바울 서신에 거의 전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특히 에수의 가르침의 중심 개념 즉 하나님 나라라든지 또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든지 이런 가르침들이 바울 서신에는 거의 안 나타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아버지 되심을 선포했는데 바울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는데 바울은 에수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래서 바울과 예수의 관계는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큰 테두리 내에 중요한 문제이다. 그래서 많은사람들은 왜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이어받지 않고 인용하지 않느냐? 그래서 극단적으로 Bultmann은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적 예수 또는 예수의 역사는 예수가 유대인으로서 율법 아래서 낳았고 살았으며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할 뿐 역사적 예수의 다른 점들=그의 가르침이라는 그의 행적=가령 하나님 나라 선포라든가 또는 치유,이적이라든지 등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또 예수이 역사-예수가 어떻게 체포되었고 어떻게 십자가에 못박혔고 또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돕고 어떻게 병자를 치유하고-이런것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그래서 Bultmann의 용어로 하면 예수가 살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 그것에만 바울은 관심이 있었다.
이것만으로 바울신학이 충분하다는 것이다.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was)?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에수가 유대인으로 살고 또 율법아래 살고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만 바울신학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 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에 대해서 이것은 바울신학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바울이 무시해버린 것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Bultmann의 신약신학 책을 보면 처음 에수에 관한 것이 30page밖에 안된다.
그의 책 신약신학이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신약신학의 전제이지 신약신학의 내용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600-700page 되는 그의 신약 신학 책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해서는 불과 30여 page로 요약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바울 신학에 있어서 예수가 살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이 바울 신학의 전제로서 이것만 중요하지 예수가 어떤 분이었느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불트만에 의하면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 전혀 보고를 하지 않고 반영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전혀 인용하지 않고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다. 그래서 이것이 상당히 문제이다.
그러면 바울의 Kerygma가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바울의 케리그마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확보하는가? 바울의 복음이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그의 하나님의 죽음의 빛 아래 비춰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유래하지 않으면 이 바울의 복음은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불트만에 의해서 바울의 케리그마라는 것이 주로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 적용해서 역사화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죽고 부활했다는 등등이 다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적용을 해서 역사화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케리그마적 신학이라고 한다. 즉 케리그마를 강조하는 신학을 말한다. 이런 케리그마적 신학이 오늘 한국에서까지 유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 삶의 정황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우리의 문제를 규정을 한다. 그래서 가령 남미에서의 필요는 정치적,경제적 해방이다 라고 규정한다. 그러면 예수는 구원자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need는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다. 고로 예수는 해방자이다. 이런 식으로 신학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예수가 우리 죄를 속하는 속죄제사는 우리를 위하여 죽고 부활하여서 죄의 용서를 가져오고 우리와 하나님과 올바른관계를 가져오고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우리를 하나님 자녀되게 하고 이런 우리의 성경적 카테고리는 다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당시 바울의 정황에서는 그런 것이 의미가 있고 communication 하고 다 중요했는지 모르지만 오늘 우리의 삶으 정황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need는 해방이다. 그러면 예수는 구원자이므로 고로 예수는 해방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도 이런 신학이 바로 민중신학이다. 토착화신학이 다 이렇다. 삶의 정황(context)에서 먼저 문제를 정의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예수는 구원자이다. 고로 예수는 해방자다라는 것이다. 1976년 제네바의 W.C.C. Eccumenical institute에서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신학자들의 토론이 열렸는데 하루는 거기서 가나 출신 W.C.C. 상당히 높은 고관이 말하기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죄의 용서를 가져오는 구원자 이것은 아주 무의미하다’ 는것이다. 그런데 제국주의 선교사들이 이런 신학을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주입시켜 가지고 아프리카 교회가 그런 무의미한 신앙고백을 자주 되풀이 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프리카 사람드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기독론은 어떻게 펼쳐지느냐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구원을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민족 해방을 하고 인종 차별 주의자들로부터 해방을 하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과 지금 살아 있는 후손들과 중계하고 또 가물고 기근이 들때에 비르 내리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통적으로 아프리카에서는 종족의 추장이 그런 역할들을 했다고 본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기독론은 예수가 추장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면 예수가 추장으로서 무엇을 하느냐? 가물때 비를 가져오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의 영혼과 살아 있는 후손과 중계하고 종족의 삷을 위협하는 제국주의자들과 싸워서 종족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는 추장이라고 고백을 해야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서 그들의 구원의 의미를 미리 정하고 예수가 구원자이므로 고로 예수가 바로 그런 구원자 즉 추장이라는 것이다. 그 다음날 인도 사람이 일어서 가지고 긴 강연을 한답시고 복잡하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로 강연을 해대는데 그 중에 자신이 아는 소리 몇마디는 이런 것이다. ‘인도 사람들도 죄를 용서하고 초월한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고 의롭게 하고 하는 것으로 무의미하다. 인도의 힌두교 즉 범신론에 세뇌되고 이것 밖에 모르는 이들에게 올바른 기독론과 구원론은 예수가 krishna(인도 힌두교의 범신의 환생의 한 형태를 가리킴) 라고해야 한다. 그래서 우주와 합일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논지는 인도에서 기독론은 krishnalogy로 밖에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인도의 방갈로에 유명한 에큐메니칼 신학교인 U.T.C라고 있는데 이 학교의 교문 정문에는 십자가에 힌두교의 krishna가 못박혀 있다. 이게 이른바 토착화신학이다. 이것도 kerygma 신학이다. 예수가 추장이다. 예수가 krishna이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예수가 민중이다. 남미에서는 예수가 해방자이다. 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적용시킨다. 그래서 70년대 한동안 토착화 신학에 이름하여 유행했던 것이 WCC 써클에서 하는 수련회나 학회 가면 항상 매번 주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의 질문을 이런 식으로 이용한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고도 하고 엘리야라고도 하고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그리스도라고도 하고 주라고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했는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니까 너희의 삶의 정황 속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을 엘리야,세례요한 이라고 답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식으로 그리고 서양신학(교회의 신학)에서 이 사람들이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라고 고백해 왔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면 가이사랴 빌립보 사람들이 당신을 엘리야라고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다. “네 말로 해보아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중입니다. 추장입니다. 해방자입니다. krishan입니다.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토착화 신앙고백이고 이 세대의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러듯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신앙고백하는 근거가 무엇이냐?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지 않으면 예수가 뭐, 뭐다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하다. 아무런 근거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런 신앙고백은 미신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를 우리가 믿는 아무런 실제(reality)가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들이 신학을 이렇게 하면서 그들은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느냐면 신약성경에 특히 바울을 보면 어디 역사적 예수에 근거하냐? 바울 서신에 보아도 하나님 나라는 몇번 나오느냐? 그리고 예수가 그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한번도 안나온다. 또 예수가 열심히 병자를 치유하고 그러는데 그런게 어디가 있느냐? 바울도 그리스도는 주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몰라가지고 지금까지 이런 칭호들도 헬라 세계에서 온 창조들로 보았다. 그러니까 자기의 이방 선교 지역에서 필요에 따라 그 문화에서 얻은 칭호들을 가지고 예수에게 신앙고백하고 죽을 때에 케리그마로 선포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못할 것 뭐있냐?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전개해 왔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를 중요시 다루어야 한다.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들은 예수를 선포했는가? 어덯게 선포자가 선포이 대상이 되었느냐?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했다. 사도들은 예수를 선포했다.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하나님이 아버지되심). 사도들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포했다.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어떤 관계가 있느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어떻게 관계가 있느냐? 이런 것을 규명하는 것이 신약신학 제 1권 촛점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예수의 자기 이해를 규명하고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보았을 때 어떻게 사도들의 선포로 다시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는가? 어떻게 선포자가 선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나? 왜 사도들이 예수의 십자가의 부활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에 집중하게 만드나 하는 것들을 집중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것이 신약신학 제 1이다. 이중에 혹시 강의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은 89년도판 가을호 신학지남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관한 논문이 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여기 다룬 문제의 핵심들을 깨달을 수 있다.
지금 이 문제가 큰 문제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의 하나의 변형으로 또는 한 조각으로 바로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가 토론이 되는것이다. 그런데 그게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절실하게 토론이 도어야할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데로 바울 서신에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그의 가르침이 거의 인용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제를 먼저 제기했다. 먼저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이다. 바울의 복음은 바울전 교회를 중계자로 해서 그들을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선포와 사역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앞부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계시에 근거해서 초대교회의 기독론적 그리고 구원론적 신앙고백과 케리그마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 그의 가르침과 행적으로 보았을 때 발생한 것이다.
첫째로 바울의 복음은 초대교회를 매체로 해서 역사적 예수와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의 계시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면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어덯게 일어났는가? 예수의죽음과 부활의 빝 아래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서 발생한것이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에서본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유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바울은 가령 갈 1:18 같은데서 암시하기를 “베드로와 예수를 직접 알고 예수의 가르침 직접 받고 예수의 목격자인 사도들로부터 예수의 전승을 이어받았음을 암시한다” 갈 1:18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 후 3년만에 예루살렘에 갔다. 간 이유는 갈 1:18에 베드로를 방문하기 위해서 갔다고 되어 있다. 거기에 쓰인 동사가 헬라어로 ιστορησαι ετερον 되어 있는데 이 동사는 ‘베드로 알고 지내기 위해서’조금 더 확대해서 해석하면 ‘베드로로부터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걸 강조하기 위해서 Oxford에서 가르쳤던 신약학자 G.D.Kilpatrick은 다음 주장을 한다. 헬라어로 ιστορησαι κηφαν이 G.D.Kilpatrick에 의하면 ‘심방하기 위해서’‘알고 지내기 위해서’‘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근거에 의하면 바울은 베드로에게 정보를 얻기 위해서 갔다고 볼 수있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가서 주로 무슨 정보를 얻었겠는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Bultmann 은 이 이야기 한데로 바울은 예수가 유대인으로 살았다는 것과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가 어떤 가르침과 어떤 분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불트만과 쌍벽을 이루는 금세기 위대한 신약학자 C.H.Dodd는 말하기를 갈 1:18에 바울은 2주간 동안 베드로를 심방했다. 고 말한다.
그래서 갈 1:18은 바울이 예수의 목격자인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전승을 상당히 받았을 것을 암시한다. 특히 베드로의 전승을 받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이다. 마침 마가복음이 신학이 바울 신학과 상당히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암시를 받을 수있는데 베드로와 같은사도를 통해서 바울이 예수의 전승을 받았을 것이다. 또 하나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고전 15:3-5을 바울은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전수 받고 또 이말은 랍비들이 그의 선생 랍비로부터 가르침을 한자도 빠짐없이 그대로 전수(전승)받고 자기 제자에 그대로 전수(전승)할 때 쓰이는 전문언어라는 것이다. 이것은 랍비용어이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힌트는 바울이 복음을 랍비 언어를 동원해서 전수받고 전승했다고 그러는데 그렇다면 복음의 요약자체가 랍비식의 요약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쓸수가 있다.
그러면 랍비식의 요약은 무엇인가?
이것은 ןמס이라고 한다. 이것은 암기가 중요한 문화 속에는 암기술이 발달한다. 그런데 랍비들은 선생의 가르침을 한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암기해야 그대로 전승할 수 있는 것이다(그 당시에는 책이 흔하지 않고 전부 머리 속에 있다) 또 그 당시의 가르침은 그대로 암기시키는데 있었다. 우리 한국 교육인 서당 교육이 그대로 암기시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암기시킨 교육이 아루어져 시험내면 암기한 것ㅁ나 쓴다. 조금 생각하게 해서 쓰는 것은 잘못쓴다. 이런 암기식의 교욱이었을 때는 암기술이 발달을 한다. 그러니까 전체 내용을 줄이고 또 줄이고 줄여서 암기하게 한다. 그래서 내용을 한마디로 간추리는 제목이거나 아니면 이 내용중에 두드러진 개념 하나 딱 말하면 일사처리로 거기에 관련된 것이 다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ןמס이라고 한다. 제목이든지 또는 한 사상을 기술하는 것에 중심 개념이든지 우리에게 두드러지게 연상력을 빨리 발휘하도록 하는 그런 개념이든지 이런 것을 자주 개발하도록 해서 암기하도록 하게 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랍비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 받아가지고 ןמס식으로 암시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전 15:3-5에 보면 ①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성경대로 죽었다②그리스도가 장사되었다③사흘만에 성경대로 부활했다④게바와 12제자에게 나타났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 οτι라는 절로 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첫째로 고전 15:1-2에서 “여러분들이 제일 처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선포한 복음을 상기키시겠다”고 그런다. 어떤 말투로 내가 그것을 선포했는가를 상기시키겠다고 그런다.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가 고린도에서 선포한 복음을 어떤 말투로 선포했는가를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까 그대로 지금 바울이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복음을 선포한답시고 이렇게만 하고 끝났겠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 장사되었다. 성경대로 사흘만에 부활했다. 그리고 게바에게 나타나고 12제자에게 나타났다고만 하고 말아버렸겠는가? 그럴리가 없다. 그리스도가 어던 분이며 무슨 일을 했기에 또 무슨 가르침을 했기에 어떻게 원수들한테 체포되어서 어떻게 로마사람들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되었는가?
즉 예수의 수난사를 다 말했을 것이다. 이것의 요약이 ןמס이다.
또 어떻게 집 한칸도 없이 유리방황하는 이분을 그이 추종자들이 장사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아리마대 요셉이 무덤을 빌려주어 가지고 또 어떻게 향유와 모든 장례 재료들을 다 가지고 와서 절차를 밟고 어디 무덤에 묻혔는가 그러니까 고전 15:1-5까지는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관한 것을 많이 알았음을 암시한다. 사실은 마가복음 자체가 예수의 수난사를 이루고 있다. 어던 학자가 말하기를 “마가복음은 긴 서론이 붙은 예수의 수난사”라고 한다.
막8:27부터서는 계속 예수의 수난에 관한 것 뿐이다. 예수가 어떻게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고 어떻게 예루살렘 입성해서 성전에서 소란피우고 체포되고 재판받고 처형되었는가가 긴 수난사이다. 그 앞에 것은 서론이다. 왜 예수와 그의 원수들과 conflict가 일어났는가? 수난사 중심으로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말한 복음도 수난사 중심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가 수난받음을 이해될 수 있게 하기위해서는 신 서론이 붙을 수 밖에 없다. 예수가 무슨 가르침을 하고 무엇을 했기에 체포가 되고 죽게 되었는가? 그래서 바울은 복음은 마침 고전 15:1-2에서 랍비식으로 전수받고 전승된 것으로 말하는데 그렇다면 고전 15:3-5은 한마디 한마디가 랍비식의 ןמס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고전 15:3-5의 한마디 한마디는 복음서에 볼 수있는 수난사라든지 장사,부활,나타난 이야기를 더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곧 바울이 편지에는 역사적인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안 썼지만 이런 걸로 살펴보건데 첫째로 적어도 바울 스스로 역사적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해 많이 알았고 둘째 교회 개척하는 상황에서 복음 선포할 때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자세히 설했을 것이다.
둘째로 고후 5:16
불투만은 그의 모든 바울 신학을 바로 이 본문에 근거했다. 불트만은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바울이 뭐라고 그러느냐? “보라 우리가 과거에는 육체대로의 그리스도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를 그렇게 알지 않는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바울이 여기서 부인하는 것은 육신적 그리스도 곧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고 역사적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뒷받침할려고 하는 것은 신앙 없는 짓이다. 선포를 그냥 무조건 믿어야 그것이 신앙이지 그 선포의 역사적 근거를 찾으려는 행위는 믿음없는 것이다. 어떤 역사적인 증거가 우리의 신앙을 뒷받침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을 역사적 뒷받침으로 증거하겠는가? 이것은 신앙에 대한 오해이며 왜곡이다. 방루 스스로 여기서 육신적 그리스도,곧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배격하고 있지 않느냐? 이렇게 불트만은 자기의 케리그마에만 집중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무시를 고후 5:16말로 정당화한 것이다.
그러면 불투만이 구절을 잘 이해했느냐? 천만의 말씀이다. 이 구절은 아주 쉬운 헬라어이다. 불트만은 아주 유명한 헬라어도 능통했다. 그러나 히브리어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히브리어로 못읽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헬라어에 대해서는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고대 헬라 고전 작품에도 아주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헬라어를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왜 오해했느냐면 자기 신학적인 전제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자기 신학에 이 성경을 두드려 맞추려다가 미련한 짓을 한 것이다. 문제는 ‘육신대로 κατα σαρκα’ 가 두번 나온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απο του νυν’ ‘우리가 아무도 육신대로 알지 않는다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 ‘전에 그리스도도 육신대로 알았으나 κατα σαρκα εικαι εγνωκαμεν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 ‘이제는 αλλα νυν’ ‘더 이상 그렇게 알지 않는다 ουκετι γινωσκομεν’ 여기에서 불트만은 κατα σαρκα를 위에 ουδενα와 Χριστον 하고 같이 가는 말로 보았다. 그래서 육신적 그리스도,육신적 그리스도를 알지 않는 걸로 해석했다. 그런데 실제로 κατα σαρκα는 명사형을 수식하는 형용사구가 아니고 동사οιδαμεν εγνωκαμεν를 수식하는 부사구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도 육신적인 방법으로 알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육신적으로 알지 않는다는 말이다. ‘안다’는 말을 수식하는 부사구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문장 구조로 그렇지만 의미로도 그렇다.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에 상응하는 말이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 이다. 불트만식으로 한다면 κατα σαρκα Χριστον를 육신적 그리스도 그래서 역사적 예수로 해석하고 싶으면 ουδενα οιδαμεν κατα σαρκα도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우리는 아무도 역사적인 존재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아무도 육신적인 존재는 우리는 알지 않는다. 말이 되는가? 의미로도 헬라어 문장구조로도 말이 안된다. 우리는 육신이다. 그러니까 κατα σαρκα는 둘다 ‘안다’는 동사에 걸리는 부사로 보아야 한다. 무슨 뜻이냐면 역사적 예수,또는 육신적 예수에 대한 관심과 지식을 바울이 여기서 배척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적인 척도로, 또는 육신적인 시각으로 그리스도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육신적인 평가,척도,시각,관점에서 알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육신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부자이면 상적인 척도이면 존경해야 하는 것이고 학위가 많아도 종경한다. 이랬던 것이 다 육신에 속하고 세상에 속한 것이다. 부,약식,미모,권력 등 다 육신에 속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육신적인 평가방법,육신적인 가치관,시간에 의해서 어떤 사람은 잘났다고 종경하고 어떤 사람은 못났다고 무시하고 그랬는데 이제부터는 그러지 않는다. 왜? 우리가 그리스도인 된 뒤부터는 그렇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자로 곧 성령을 받아서 영적인 존재가 된 뒤부터는 영적인 가치관, 시각에서 사람을 평가하지 이 세상 육신적인 평가 방법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는 심지어 그리스도도 육신적인 세상적인 관점에서 육신적인 가치관으로 척도를 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렇지 않다.
바울이 여기서 배격하는 그리스도를 육신적인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평가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자기가 과거에 그랬다는 것이다. 다메섹 도상 전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 전에 ‘자기가 유대교에서 가졌던 메시야 사상,그리스도 사상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앎이다’
이렇게 배격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야를 민족적 정치적 군사적 지도자로서 이방인들을 다 정복하고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영광을 자유를 번영을 줄 분으로 생각했다. 바울이 이러한 유대교적 메시야관을 육신적으로 그리스도를 앎이라고 지칭히는 것이다. 이것을 배격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새로운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불트만이 고후 5:16에서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이 없음을 근거할려고 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런데 안병욱 교수의 글을 읽으면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을 안 가지고 배격했다고 고후 5:16을 불트만 식으로 해석하고 인용하면서 그러기에 바울은 민중을 위해 산 예수를 왜곡했다고 바울을 열심히 욕한다. 그런데 불트만이 이렇게 기초적인 헬라어를 몰라가지고 딴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러데 그사람들이 몰라서가 아니고 자기들의 신학적인 이해를 위해서 그런다. 그래서 하나님 진리를 왜곡하고 난리를 펴서 한동안 교계를 어지럽히고 오도하고 그런다.
세째로 바울 서신 안에 역사적 예수의 전승이 아나도 없느냐? 얼마 없고 빈약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 이 빈약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느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상과 비교를 해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 설교문의 요약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바울의 편지는 곧 설교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편지들의 케리그카 성격과 비슿한 사도행전에 있어서의 설교를 분석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행전에는 역사적 에수의 가르침이 많이 나오는가? 많이 인용되는가? 사도행전에 있는 설교문에도 안되어 있다.
또 바울 외의 신약의 서신을 베드로 전후서라든지 히브리서라든지 요한 서신등을 보면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많이 인용되어 있느냐? 여기에도 안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행전 연설문에 있어서는 상당히 심각하다. 왜? 사도행전을 틀림없이 제 3 복음서의 저자가 썼다. 즉 제 3복음서 저자 누가가 썼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 복음을 저술한 분이기 때문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철두철미하게 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을 쓰면서 설교문에는 자기가 누가복음에서 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혀 반영하지 않느냐 말이다. 또 마찬가지로 요한일서에도 전혀 반영이 안되어 있다. 또 AD 2세기 중반의 설교인 제2서신 Clement의 저자 D.Clement는 복음서 전승의 내용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 편지인 제 2클레민트에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인용하지 않는다. 지금가지 우리가 똑같은 현상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바울 서신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인용이 안되었다고 해서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전혀 몰랐다든가 또는 관심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하게 성격이 똑같은데 비록 context가 다르지만 그러니까 1960년대 70년대에는 사도행전의 역사성을 비판학자들이 그냥 난도질을 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사도행전이 역사성이 없는 1세기 말의 작품으로서 교회의 신앙과 경건성을 북돋으려는 책이고 구원사의 책이지 이것이 역사적으로 초대교회의 살교들을 요약하고 초대교회의 성장과정,선교과저을 요약한 책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으 독일의 Conzelmann, E.Henchen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늘 이유를 무엇으로 대했냐면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바울의 설교라고 요약된 부분이 여러 곳에 있는데 그게 바울의 신학과 다르다. 또 바울의 가르침을 전혀 반영치 않고 있다. 바울의 중심개념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설교에서는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의 설교의 동행자였다면 바울이 언제 어떤 편지를 썼는가를 기록할 뿐 아니라 그 편지들에 담긴 바울의 가르침도 바울의 설교에서 반영을 해야 될텐데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서신에 대해 일체 언급도 없고 또 바울 서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일체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을 몰랐고 바울 서신에도 관심이 없었다”고 이런 식의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데 지금 사도행전의 저자가 분명히 누가복음의 저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에 누가복음에 있는 예수의 전승이 안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련의 사실들에서 우리가 사도행전의 기독은 예수의 말씀이 반영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예수의 전스을 몰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전승을 몰랐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의 전승을 많이 써 놓았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역사적 예수의 전승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거나 관심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똑같은 논리로 사도행전에 바울서신이 인용이 안되었다는 이유로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 서신을 몰랐거나 바울 서신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바울이 앞에서 이야기한 첫번째 이유 즉 베드로를 알고 지내고 정보를 얻으러 가서 보름 동안 날씨만 이야기하고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열심히 베드로로부터 예수에 관한 정보를 얻었고 또 바울이 고전 15장에서 하는 것을 보면 당시 랍비 학교의 전승과정을 염두해 두면 바울이 역사적인 예수에 가르침과 행적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복음 선포할 대 그것들을 많이 인용했을 것이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에 인용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냐? 그 이유는 다른데서 찾아야 한다. 바울이 몰라서가 아니고 아마 편지라는 문학장프에 gattung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이야기한 제2의 Clement에 그는 분명히 복음서를 많이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편지에는 구가가 복음서의 내용을 다 알면서도 설교에는 별고 안스고 있다. 바울서신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이 흔히 나오지 않는 이유는 편지라는 문제(gattung)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이미 자기가 복음 선포해서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앞에 이야기한 고전 15장을 우리가 분석해 보건데 바울이 처음 복음 선포할 때에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을 많이 전수했다. 그 뒤 그 교회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들에게 신학적인 원칙을 적용해서 조언을 한다.
편지가 바로 이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편지들에는 예수이 가르침과 행적이 많이 인용이 안되었을 것이다는 말이다.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
첫째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불렀다. 그런데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들에게 약속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게 하겠다는 그 약속을 성취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서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며 초대장을 발부한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드림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 제의(제사의식)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십자가의 대속적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드림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한 구원의 성취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해 주겠다. 이것이 곧 구원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이다. 그래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구원은 곧 죄인들을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만듦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약속한 구원의 성취이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교회는 자연히 설교와 관심이 어디에 집중하겠는가? 약속에 집중하겠는가? 아니면 약속의 성취에 집중하겠는가? 당연히 약속의 성취에 집중할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나님 나라 선포했다는 것은 쏙 들어가고 그의 죽음이 대속의 새언약 세우는 죽음으로서 우리를 하나님 백성 되게 했다. 우리 죄를 속하고 우리를 의로운 자로 만들었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예수는 십자가와 부활해서 일어날 구원을 향해서 갔다. 그러면 그 구워을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약속을 했다. 초대 교회는 이 약속의 성취를 뒤돌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서 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의 성취를 뒤돌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과 새언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그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렇게 관점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더이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되풀이 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데 집중했다. 이것이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우리를 하나님 백성 되게함 그리하여 우리들을 하나님 자녀되게 하고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영생을 얻도록 한 사건으로 거기에 집중을 한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서론으로 필요했지 이것은 계속 되풀이되는게 아니다. 바로 이와같은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에서 우리는 바울이 왜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가르침(하나님 나라)을 더이상 많이 인용하지 앟는가를 설명할 수있다.
둘째로 그러나 구원론이나 기독론 말로 윤리적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주 예수의 가르침으로 주의 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으로 재천명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예수의 가르침이 사실은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 서신을 읽으면서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재천명이구나 하고 왜 우리가 빨리 감지하지 못하냐면 여기에도 해석학적 관점의 변화가 발생하기 때문에 그렇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전의 예수의 상황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후 특히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상황과의 차이점에서 똑같은 예수의 가르침의 원칙이 조금 변형되어서 바울 서신에 적용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 서신에서 곧장 예수의 가르침을 인식하지 못하나 표면을 조금 열고 자시히 분석하면 바울의 윤리적 가르침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주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 예로 롬12:7/살전5:15/벧전3:9 등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이 나오는데 이 세곳(두속의 바울 서신과 한 곳의 베드로 서신)에 서는 같은 형태로 나온다. 그런데 이것이 눅6:27/마5:44의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미는 같으나 약간 변형되어 나온다. 그러니까 롬,살전,벧전에서 바울과 같은 형태로 나온다. 그러나 이 세곳 모두 예수의 산상수훈과 약간 변형되어서 나오다. 왜 이 변형이 이루어지는가? 복음서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수가 회개하라는종말론적인 부름이 표현으로 나타나다. 그러나 서신들에 있어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윤리적 가르침은 이미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종말의 상황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상황 속에서는 아직 종말의 구원이 일어나지 않았다(십자가의 죽음 전). 그래서 이 죄인들에게 종말의 구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나 바울의 상황속에서는 종말의 구원을 덧입은 사람들 가운데 어떻게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로 상황이 변하므로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인용하는데 약간 변형해서 인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혼문제도 그렇다. 고전 7:10에 예수의 이론에 관한 가르침이 직접 인용이 되어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 직접 인용된 것은 참으로 드문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마 5장,19장에 이혼을 무조건 금했다. 매태의 소위 예외규정에서 간음을 제외하고는 이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마태의 예외 규정이다. 원래 이혼을 금했다. 그런데 고전 7:10에서 바울은 마태복음이 이혼을 금하는 말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약간 변형해서 적용하느냐? 이혼 안하는 것이 좋은데 만약에 상대방이 불신자라거 이혼하자고 끝까지 주장하면 이혼해도 무방하다고 변형해서 적용한 것이다. 왜? 바울은 지금 헬라적(이방인의 상황) 상황에서 복음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유대인의 공동체 (모세 율법하에 있는 공동체)에서 이혼을 전면 금지한 주님의 가르침의 상황과 이방인들이 섞여 사는 헬라 공동체에서 바울이 신자들과 불신자들이 섞여 사는 사회에서 에수이 이혼의 가르침을 원칙을 적용하되 그 상황의 특수성에 의해서 약간 변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바울 서신들에서 이와 같이 약간 변형된 모양으로 예수의 가르침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참 좋은 연구이다. 최근에 이런 연구가 상당히 많다. 이 연구들은 윤리적인 가르침에서 굉장한 많은 성공을 기약한다. 그러나 바울의 중심개념에 있어서 가령 튀빙겐 대학의 조직신학자 E. Jungel의 박사 학위 논문인 ‘바울과 예수’라는 책에서 ‘바울의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의 언어가 전적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해석학적 연속이다’고 본다. 약간 변형된 모습으로 그러나 그 가르침은 신실하게 선포한 것으로 본다. 사실 그렇다. 그래서 바울을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예수의 가르침을 잘 알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정신을 아주 신실하게 누구보다도 더 이어받은 분이다.
그래서 A.Schlatter라는 아주 경건한 신약학자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바울이 아니라(바울과 예수가 자꾸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은근히 다음 결론 바울이 기독교 창시자라고 한다) 바울이 스스로 주장하듯이 Der Bote Jesus 예수의 심부름 꾼 이었다. 예수의 사도, 예수의 사자, 그래서 예수의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했다. 우리가 바울을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정신을 신실하게 전승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신학 제10강
지난 시간에 바울과 역사적 예수와의 관계를 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바울의 배경을 살폈고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됐으며 사도가 되었는가? 그리고 그의 사도로서의 면모를 살펴보았고 그 다음에 바울의 복음을 토론하기 시작해서 계시와 전승으로서의 복음을 토론했다. 그것과 관련해서 왜 바울에 있어서 예수의 가르침이 거의 전혀 인용이 안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점에서 출발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예수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바울의 신학은 예수의 가르침과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바울 신학의 독특한 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적으로 말하면 독특한 점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이른바 형상 기독론이라고 하는데 고후 4:4-6/골1:15/고후3:16-18 등에 나오는 εικουν(image)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이라는 아담 기독론과 하나님의 지혜다 하는 지혜 기독론이 나온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과 지혜 기독론을 포함하는 형상 기독론이 바울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중에 보겠지만 형상 기독론과 아담 기독론과 더불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교회론도 바울의 독특한 신학이다.
이것은 아담 기독론과 관계 있다. 그러니까 기독론적으로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독특한 점이 형상 기독론이다. 그러나 가령 지혜 기독론은 바울에게도 나오지만 신약의 다른 부분에도 많이 나온다. 특히 요한복음에 아주 중요하게 나온다. 그리고 마태복음에도 조금 강조되어 있다. 또 신약의 다른 저자들과 공유하면서도 바울이 특별히 강조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더 심화된 신학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들 기독론이 바울과 요한에게 있어서 더욱 심화됐다.
그래서 아들 기독론에서도 바울 신학의 독특성이 나타난다고 볼 수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요한복음과 비슷하다. 또 구원론적으로 바울 신학의 독특성을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작의 죽음을 하나님의 의”에 나타남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우리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의의 카테고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하는 이것이 또한 바울 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이다. 신약의 다른 저자에게서 별로 볼수 없는 바울 신학의 독특한 점들이다. 그래서 바울의 기독론, 구원론, 인간론,교회론 등을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주로 바울신학의 독특점을 특히 강조해서 살펴 보겠다 그러나 바울 신학에 있어서 독특한 점만 국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신약의 저자들과 공유하는 점 가운데 이러 독특한 점들을 강조하기 때문에 둘다 다 살펴보겠다.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해서 토론하고자 한다. 그런데 지난 학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일부 겹치는 데가 있다. 그러면 ‘바울 기독론’ 해가지고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형상 이런 순서로 전개해 나가겠다.
*바울의 기독론
1.서론
바울은 그의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기독론적으로 정의하는 성경구절은 롬1:2-4/고전1:23/15:3-5/갈1:12-16/고후4:4 등등 이런 곳에서 바울은 복음을 기독론적으로 정의한다. 또 롬1:16에서는 구원론적으로 정의한다. 기독론과 구원론은 두개의 분리된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리이다. 기독론은 구원론의 근거가 되는 것이며 구원론은 기독론으 ㅣ인간과 세상에 대한 적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은 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했다. 그러니까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기독론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했다고 하는 것이 구원론이다.
최근에 불트만이나 또 그보다도 더 과격한 H.Braun같은 자는 바울의 진정한 관심은 인간론이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것이 바울의 신학에 있어서 변하지 않는 상수이고 기독론은 변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 인간론과 인간의 구원을 논하는 구원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은 인간론이 어떻게 설정되고 인간에게 필요한 구원이 어덯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가변적인 것으로 변수로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그런데 현대의 상황화의 이름하에 도는 토착화의 이름하에 이런 식의 신학이 많이 전개된다. 그래서 가량 1970년 방콕에서 열릴 WCC 회의에서 “Salvaioin Today”라는 주제로 회의가 열렸다. “오늘 구원이 무엇이냐”를 설정한다. 오늘 인간들이 구하는 구원이 무엇이냐?그리고는 바로 이런 구원을 가져온 분이다 하고 그리스도를 정의한다. 이런 식으로 자유주의 써클레서 전개된다. 가령 남이에서 남미인들이 희구하는 구원이 무엇이냐? 정치적,경제적 해방이다. 이것이 오늘날 남니인들이 희구하는 구원이다. 먼저 남미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을 정의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이러한 구원을 가져오는 분이다고 그리스도를 정의하다. 즉 남미에서는 해방자로 정의한다. 정치적 해방자로 이렇게 구원을 설정한다. 한국에서는 한국의 해방신학이 이른바 민중신학 형태로 나타나는데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 무엇이냐? 민중 신학자들에 의하면 민중을 억압하는 독재자들 집권층,재벌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구원인데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민중의 상징으로서 민중의 해방을 가져오는 분이다. 이런 식으로 기독론이 전개된다. 1976년 WCC Ecumeical intitut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에서의 신학”이라는 주제로 토론이 열렸을 때에 아프리카 WCC대표는 ‘아프리카에서는 그리스도를 추장이라고 고백해야 의미가 있다며 추장 기독론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추장이다고 해야 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은 전통적으로 종족인 추장이 구원을 가져왔다. 가물때 비를 오게 하고 병도 고치고 백인의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싸워서 종족을 보존하기도 하고 이런 것들을 전통적으로 추장이 하는 것으로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희구하는 구원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가 구원자라며 바로 그리스도가 그런 추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추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인도의 대표자는 인도의 상황속에서는 그리스도를 Krishan 라고 고백해야 한다고 한다. Krishan 기독론을 해야 한다고 신학을 전개했다. 이것이 왜 틀렸느냐면 인간론,구원론을 우선하고 보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 신약전체에서 그리고 바울 신학에서 기독론이 중심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의 규명이 우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추궁할 대 비로소 구원론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어떤 인간으로서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갖게 된다. 그래서 신약 전체 특히 바울 사상에 있어서 기독론이 우선이고 기독론이 중심이다. 그리고 인간론, 구원론은 기독론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순서를 뒤집으면 앞에 이야기한 옳지 않은 신학들이 나타난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그리고 바울 신학에서 신학이 거의 기독론 중심이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서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들은 전부 기독론적 신앙고백이다.(고전15:3-5/롬1:3-4/3:25-26/4:25/빌2:6-11/골1;15-20 등 등) 무수히 나오는 초대 교회 신앙고백들은 전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즉 그의 인격과 하신 일에 관한 것인데 그것에 인간론적인 적용이 구원론이다 .원래 초대교회 신앙고백은 기독론 중심이다. 그러다가 점차 신앙고백이 두 부분으로 발달한다. 원래는 한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이제 이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으로 발전한다. 가령 고전 8:6 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두분으로 되어 있다. 전치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하나님과 만물이 그로부터 나왔으며 그를 목표로 존재한다(εκ εις)” 그리스도는 그를 통해서(δια) 만물이 빚어졌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그리스도가 창조의 수단 그리고 우리의 구원의 수단으로 점차 두 member로 발달한다. 그 다음 삼위일체를 즉 성령을 덧붙여서 세 member로 특히 예배언어에 발달한다. 그래서 우리가 축도로 쓰는 고후 13장 끝부분에서 삼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으로 나타난다. 처음에는 기독론적인 신앙고백,그 다음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 다음에 성령을 덧붙이는 삼위일체론적으로 발달한다. 이런 것을 보아도 초대교회 그리고 바울 신학에 있어서 기독론 중심-예수가 그리스도다,예수가 주다, 하나님의 아들이다-이라는 신앙고백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부활했다 등의 기독론 중심에 우선에 그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되고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 인간은 인간을 이해하게 되고 우리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기독론이 우선하고 기독론의 인간론적 응용 또는 적용이 구원론이고 기독론에 근거해서 신론,성령론,교회론,종말론이 펼쳐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 바울 신학 전체의 기독론 우선의 중심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트만이나 H.Braun의 인간론,구원론 우선의 신학이 잘못되었다. 그들의 영향을 받은 현대 신학자들이 현대의 Kerygma 신학과 상황화(contextualization)의 신학이 많이 틀렸다. 지난번에 본 바와 같이 바울은 부활하시고 높임받으신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통해 그의 복음을 받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이 신학 형성에 있어서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하나의 본질적인 그리고 구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바울의 기독론과 구원론을 공부함에 있어서도 바울이 어떻게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계시의 체험 부활하고 높임받은 그리스도의 계시의 체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펼쳐가는가를 추구하면 우리는 그의 기독론,구원론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았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바울은 주로 구약과 유대교, 2차적으로 헬라 종교사가 제공하는 해석의 카테고리들 그리고 언어 수단들을 동원해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계시를 해석해서 나온 것이 바울의 신학이다. 바울의 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이 다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의 계시를 어떻게 구약과 유대교에서 제공하는 해석의 범주들로 해석해가고 펼쳐가는가를 살펴보면 바울 신학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순서를 따를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 체험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울 스스로가 주장한다(갈1:12/16). 그러나 그것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의 자리에서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보는 신학 전체를 한꺼번에 터득했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 신학은 점차 발달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구약과 유대교의 해석의 범주들과 언어 수단에 의해서 다메섹 도상의 계시를 해석해감에 따라 점차 발달했고 또 선교의 현장에서-고린도 교회에서 갈라디아 교회-부딪히는 문제 그리고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토론 등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때 받은 복음의 빛 아래 해결해 감에 따라 그의 신학이 발달을 하고 그이 신학이 예리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바울 신학의 발달 과정에 있어서 물론 지난번에 우리가 계시로서의 복음과 전승으로서의 바울의 복음을 살펴보았다. 초대교회의 전승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초대교회의 전승을 물려받고 또 선교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사고함에 있어서 바울에게 항상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것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복음의 계시였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모든 신학은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의 체험에 물들여져 계시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모든 구약과 예수의 전승과 선교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들 모든 것을 다메섹 도상에서 받은 복음의 계시의 빛 아래 보고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상의 계시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때한꺼번에 다 나왔다는 것이 아니고 바울이 그의 신학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항상 다메섹 도상의 체험의 빛 아래 보고 발전시켰기 때문에 바울 신학의 모든 요소들이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연결되었다는 의미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게 볼 수 있는 그런 신학이 어느 때쯤 완성되었을 것인가? 대개 연대를 잡아 볼 수 없을 것인가? 아마 예루살렘 사도회의 또는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때 까지는 지금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바울신학의 면모가 확실히 형성되었을 것이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M.Hengel 교수의 중요한 논문중에 “기독론과 신약의 연대”라는 논문이 있다. 원래 독일말로 쓰였는데 최근에 Hengel의 여러 논문에서 묶어 나온 영어판이 있다.
1960년 불트만의 영향으로 신약에 있어서 신앙고백의 발전을 불트만은 두단계로 보았다. 원래 그의 선생 Muller,W.Bousset 영향으로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 이 두단계를 거쳐서 바울과 요한의 신학이 발전했다고 보았다. 유대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다시 올 인자로 그 사람으 아들로 기다리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주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헬라 기독교에 와서 헬라인들이 자기들이 종교사에서 나오는 신화들 또는 개념들 또는 카테고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해가지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는 등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영생에 참여한다는 등 또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등 성만찬의 신학은 다 헬라 기독교에서 발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들이 다 헬라 기독교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과 요한이 받아서 발전시켰다고 생각했다. 불트만의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여기 한단계를 더 넣어가지고 삼단계로 본다. 팔레스틴 유대 기도교 그리고 헬라 유대 기독교 그 다음 헬라 이방인들 기독교 이렇게 3단계를 통해서 신약의 바울과 요한 신학이 발전했다고 주장한다. F.Hahn, R.H.Huller 등 이들은 이런식을 주장했다. 그래가지고 신약성경에 나오는 여러기독론적,구원론적 신앙고백의 쳐어 칭호들,사상들을 헬라 기독교에서 나왔다고 그런다.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는 예수를 다시 오신 인자로만 기다렸다고 그런다. 그러니까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하고 그와 연합해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그런 것들은 다 헬라 기독교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가령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은 헬라유대교이다. 그래서 매 단계를 거쳐 가면서 기독교가 완전히 변모해 버렸다. 그렇다면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또 팔레스틴 유대 기독교의 근본을 이루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것이다. 우리 전통 교회의 신앙고백이 주로 바울과 요하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진정한 창시자는 누가 되어버렸느냐? 예수가 아니고 바울이 되어 버렸다. 이 따위 신학이 흥행하던 때에 M.Hengel 교수가 말하기를 “신학적으로 삼단계로 발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느냐?” 우리가 역사가로서 정신 바짝 차리고 생각해보고자 해서 기본적인 것부터 생각한다.
①바울이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느냐? 예수가 AD 30년에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면 바울 32-34년 여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바울이라는 사람이 아주 훈련된 신학자가 초대교회 초창기부터 참여한 것이다. 연대를 정신 바짝 차리고 살펴보자.
②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편지가 다수 의견에 의하면 데살로니가 전서라고 한다. AD49년 쯤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F.F. Bruce를 중ㅅ미으로 한 소수의 의견에 의하면 갈라디아서가 제일 먼서 쓰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AD 48년 쯤 기록되었다.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49년도에 열렸다. 그런데 48년 쯤에 세계 전도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48년쯤에 부터 바울 신학을 확실히 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전서와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면 벌싸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 들어 있는 기독론,구원론이 다 들어 있다. 그러니가 바울 신학이 48-49년 쯤 즉 그의 세계 전도 여행 시작 무렵까지는 바울 신학이 거의 지금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완성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30년대에서 48년까지는 18-19년 차이이다. 이 사이에 언제 기독교가 3단계를 거쳐서 발전할 단계가 있어 시간적으로 게다가 처음에 고려한 것 바울이 초대교회에서 거의 유일하게 훈련을 받은 신학자로서 아주 초창기부터 했다. 그러면 총창기 기독교 형상이 있어서 바울은 무엇하고 있었느냐? 아라비아에서 묵상만 하고 있었냐? 묵상했어도 신학을 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바울 신학이 다메섹 도당에서의 체험 직후부터 형성되어서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가지는 오늘 우리가 그의 편지들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신학이 거의 다 완성, 형성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나중에 선교의 장에서 문제들 특히 유대주의자들이나 고린도의 성령받았다고 하는 광란주의자들,자유주자들과의 토론을 통해서 신학이 더욱 예리하게 되고 확실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개 늦어도 선교 여행 무렴 대개 48-49년 쯤 신학이 거의 다 완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2.본론
1)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 이런 칭호들은 다 바울 전의 교회에서 이미 나사렛 예수에게 적용했던 칭호들이다. 진정한 의미로 바울 전의 칭호들이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그리스도를 주로,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기 때문에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핍박한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높임 받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에 대한 선포가 옳음을 확인하고 그대로 그들의 예수에 대한 칭호-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들을 수용했다. 그러면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미,예수의 우리를 위한 의미를 표현함에 있어서 바울의 특별한 신학적 공헌이 무엇인가? 이것을 살펴보면 유익할 것이다.
W.Kramer같은 사람은 그리스도,주,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세 칭호들이 신약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느냐? 어떤 구문속에서 쓰이느냐? 어떤 뜻을 나태내도록 쓰이느냐?를 연구한다. 그래서 바울 전 소위 바울전의 단계에서는 그리스도의 칭호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쓰이고 바울은 그것을 어떻게 이어받아 더 심화시키고 발전시키고 그랬느냐를 따지는 것이 W.Kramer의 “Christ Lord Son of God” 이라는 책이다. 바울 전 단계의 사상은 어디서 어떻게 아느냐? 주로 바울 서신들에 남아 있는 바울이 인용한다고 보는 신앙 고백들을 살펴봄으로 안다. 가령 대부분의 학자들은 빌 2:6-11까지를 바울전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이어받았다고 그래서 인용했다고 본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안본다. 또 롬 1:3-4에 확실히 바울전의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롬3:24-26까지도 바울 전의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것들을 살펴봄으로서 바울 전단계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떻게 고백되었고 그것을 바울이 이어받아서 어떻게 더 발전시키고 심화시켰는가? 또 M.Hengel의 좋은 연구가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와 더불어 우리가 특기할만한 것은 바울 전 단계에서 벌써 소위 interpretatio christiana(그리스도적 해석)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야임이 드러나자 예수의 유대 추종자들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들을 예수에게 다 적용했느냐? 많은 사람들은 다 적용한 것으로 말한다. 그래가지고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은 유대인들이었으니까 그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했다면 그들은 에수에게 구약과 유대교의 다양한 메시야 사상을 다 예수에게 적용 뒤집어 씌운 것이 아니냐 하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신약성경에 그려진 예수 그리고 신약성경의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메시야 예수가 당시 묵시문학의 메시야 사상과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도 당시 민속 메시야 사상은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이 아주 다양한 소위 연결되지 않는 복잡한 메시야 사상이 있었는데 그래도 주된 메시야 사상이 민속 메시야 사상(frek medio iunism) 이다. 삼하7:12-16에서 나오는 나단의 예언에서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아들인 다윗 왕조를 재건할 군사적 정복자요, 정치적 왕을 메시야로 보았다. 이것이 주된 메시야 사상이다. 그런데 우리 신약성경에 예수를 메시야라고 초대교회에서 주장을 하나 예수를 전혀 그런 식으로 그리지 안고 있다. 그러니까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공부를 많이 했다는 사람 W.Wrede 그후 Bultmann 같은 사람도 신약성경에 있어서 공관복음에 있어서 예수는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는 다르다. 그러므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었고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붉구하고 교회는 예수가 메시야라고 고백하고 선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었던 역사적 진실과 그를 메시야라고 고백하는 역사적 사실과 신앙사이에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가가 이른바 복음이라는 것을 서서 예수가 메시야였다. 그래서 그의 메시야 됨이 초자연적인 존재들에게는 다 이해되고 악령들도 이해했고 예수를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도 대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지지 않은 이유는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됨을 비밀로 소문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마가가 이야기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소설이다. fiction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였나? 그럼데도 불구하고 그의 메시야됨이 안알려지고 비밀에 쌓여 있었나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른바 메시야 비밀이라는 이론이 W.Wrede에 의해 처음 나온 것이고 마가복음이 이 메시야 비밀을 중심으로 하는 소설이고 다른 복음서도 이어 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불트만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것이 다 어디서 시작하느냐면 예수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또 신약성경에 선포된 예수의 사상이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다음과 같은 전제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무슨 전제인가? 예수가 메시야라면 예수에게 구약과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이 완전히 전가되었을 것이 아니겠느냐? 그게 아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구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그래서 우리 신약신하 1에서 그것을 쭉 살펴보았다. 어떻게 예수가 유대교의 당시 주된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나단의 예언을 이렇게 정치적 군사적 왕으로서가 아니고 이사야 42장부터 53장까지 예언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성취하는 것이다. 또 어떻게 다니엘 7장에서 예언된 인자,그 사람의 아들 역할을 감당함으로 성취하는가? 이렇게 예수는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의 text를 당시 유대교 묵시문학의 해석과 전혀 새롭게 해석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과 흔적은 처음부터 끝가지 그의 메시야됨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당시 구약의 메시야 text를 예수와 달리 해석한 유대교 사상에 찌들은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를 못했다. 그러나 예수가 정치적 왕으로 주장하는 자로 곧 가이사에게 맞선 반역한 자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다가 예수가 부활했다 . 이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킨 사건도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한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예수의 주장, 가르침이 옳다고 확인된 것이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유대교에서 해석한대로의 메시야는 아니지만 은근히 메시야라고 주장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킴으로 예수가 앓다고 인정하셨다. 그의 메시야 주장만 옳은게 아니고 그의 구약의 메시야 text에 대한 해석이 옳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메시야의 행위가 유대교에서 기다리는 정치적 군사적 정복과 혁명과 다윗 왕조의 재건함이 아니고 대속의 제사로 스스로를 바쳐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이사어 42장에서 53장에 의거해서 메시야적인 과업으로 보았다. 바로 그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옳았고 예수가 그 메시야적 임무를 감당한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예수가 자신이 어떤 메시야인가를 가르쳤다. 이사야 42장 53장의 보면 대속의 죽음을 감당함으로서 그리고 다닝레 7장의 예언을 감당함으로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단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야로 가르쳤다.-과 가르침이 긴가민가 했다. 왜?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유다 같은 배신자가 나타났고 결국 다른제자들도 다 도망가버렸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거쳐서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하심으로 예수가 메시야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교인들에게는 무슨 깨달음이 왔느냐? 그것은 예수가 메시야이다. 그런데 유대 메시야 사상은 틀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메시야 사상을 옳다고 인정했으니까 그래서 초대 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했다. 헬라말로 하면 χριστος즉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에 있어서 메시야와 그리스도라는 칭호에 더이상 유대교적인 사상을 내용으로 채운 것이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과 하신 일로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의 내용을 채운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What Jesus was(예수가 어떤 분이었는가?)” 그리고 “What Jesus did(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 가 예수가 메시야라 그리스도라 할 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의 내용을 형성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야가 뭐라고 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inter pretatio christiana(그리스도적 해석)이라고 그러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초대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선포할 때 그 메시야 사상이 일부 유대교 메시야 사상과 겹친 부분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초대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할 때 그 내용을 예수가 어떤 분이었으며 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 그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그의 메시야됨의 내용이다. 예수의 메시야적 과업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할 때 무슨 일을 감당한 자로 말하는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므로 우리를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로 메시야는 구원자이다. 즉 정치적 해방을 가져오는 분이 아니고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킨 분이다. 어덯게 해서 이러한 새로운 메시야 사상이 나왔느냐면 바로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가ㅗ 부활에서 나왔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메시야 사상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예수가 어떤 분인가? 무슨 일을 했는가가 예수의 메시야됨의 내용이다. 이런 것을 inter pretatio christiana라고 한다.
이러 아주 기초신학적인 ABC에 해당하는데 신학을 몇십년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몰라 가지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가령 지난번 살펴본 고린도 후서 5:16같은 ‘위대한 천명’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민족적 해방자로 정치적 왕으로 알았다. 그것을 바울이 육신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한 메시야 사상이 틀렸다는 것이다 이제는 무엇을 깨달았으냐면 그런 메시야가 아니고 예수가 하신 일이 진짜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해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이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것이고 바로 예수가 그런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분이기에 그분이 메시야라는 것이다. 그것을 좀 정리하면 “에수는 스스로를 속죄와 새언약을 세우는 일 제사로 바치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단7:13에 인자로서 그리고 삼하 7:12 나단의 예언에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메시야 과업으로 보았다. 그러한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되자 초대교회는 그의 추종자들은 바로 그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가 정의한 그의 메시야적 과업을 감당한 사건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수가 자기의 메시야적 과업을 스스로를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로 바친다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자기의 메시야로서의 과업이다. 다윗의 아들로서 그리고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메시야적인 과업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자 부활의 빛 아래 봤을 때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의 그러한 메시야의 과업을 감당한 사건임이 드러났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바로 메시야다. 예수가 메시야적 과업을 달성한 분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 초대교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라는 선포는 그러므로 예수 안에 또는 그의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로 바로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야됨은 항상 그의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과 부활로 정의한다. 그래서 이른바 πιστις-formula(믿음의 형식)이 형성된 것이다. to believe that christ did(혹은 was juised) for us(our sins)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 복음이다. 이때 항상 쓰는 칭호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신 분,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항상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 쓰인다. 그것이 메시야적 그리스도적 행위이다. 그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났다는 것이 복음이다.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일으킴 받은 분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구원을 담당한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 믿음과 선포의 내용이다. 그래서 πιστις-formula의 약식이 뭐냐면 to believe in Christ 그리스도를 믿는다. 또는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바울이 고전 1:18에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이것이 무슨 얘기냐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음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전체 약자이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기술한 약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음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 십자가에 스스로를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바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소리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이것은 유대 묵시문학에서 말하는 메시야 사상하고 판이하다. 그러나 오묘하게도 예수의 가르침과 그리스도적 행위의 빛 아래 구약의 예언들을 다시 보면 예수의 구약 해석이 훨씬 더 옳았다. 구약의 메시야적 사상을 진정으로 성취한 것이다.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에서 유대묵시문학적 메시야 사상이 나오고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나오는데 다르다. 그러나 뿌리는 같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리스도의 행위를 체험하고 보았더니 에수의 가르침이 옳았다.

바울신학 제11강
전 시간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살펴 보았다. 바로 이와 같은 interpretatio Christian 에다가 초대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를 항상 예수의 이름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썼다.
사실은 εστιν(be 동사)가 Ιησους와 χριστος 사이에 생략되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다”와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썼다. 어떤 예수를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가 정의한 대로 그리스도를 말한다. 이 신앙고백이 또는 이렇게 되는 하나님이 이름이 되어 버렸다. 특히 메시야란 말을 헬라 문자 그대로 원어에 의하면 Χριστος라는 말이 Χριω라는 ‘기름 부음을 받는다’ 동사에서 나온 말로써 헬라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구약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게서 ‘종으로 위임한다’는 표시로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그런 구약적인 종교사적인 배경이 없는 사람에게 χριω 로부터 나온 Χριστος란 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점차 헬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란 말이 예수의 두번재 이름으로 되어 버렸다.
그러나 바울과 다른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원래 칭호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씩 그리스도와 예수의 제2이름으로 쓰이기도 하면서도 칭호적인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또 하나의 칭호가 같이 오는 법이 없다. 주라는 칭호와 주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같이 오지 않는다. 항상 다른 기독론적 칭호와 그리스도의 칭호를 쓰려면 그 가운데 예수란 이름이 함께 온다. 또는 우리를 낀다. 그래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라든가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주이다’ 항상 ‘우리’란 말씀,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또 하나의 기독론적 칭호들과 같이 막바로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면 서로 정립이 안된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우리 주라는 말이다. 그래서 χριστος 우리 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두개의 칭호를 한꺼번에 겹쳐 쓰지 않고 그렇게 해서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이름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칭호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칭호와 다른 기독론적 칭호들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N.T.에 예수의 칭호가 여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예:인자,말씀,문,왕....) 영국의 신학자 V.Taylor “N.T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들”이란 책을 썼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어디서 사용되느냐 하면 믿음이 형식 쓰인다. 그래서 믿음과 선포라는 말이 늘 같이 나온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고 부활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관계해서 쓰고 있다. 앞으로 생각해보겠지만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그런데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라고 말하며 또는 그리스도의 사건이라고 말한다. 혹은 메시야적 사건.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더불어서 그리스도라 칭호가 쓰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선포를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말한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하는데 십작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한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항상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쓰고 믿는다는 말과 선포한다는 동사는 그리스도라는 함께 쓰였는데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칭호와 다른 칭호가 무엇이 있는가?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가장 기본된 칭호이고 곧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고 그리하여 구약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사를 성취하신 분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가 가장 기본된 칭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하나님의 구원의 성취자이라는 뜻이고 구약과 연관을 나타내는 칭호이다. 구약의 구원사와 연관된 칭호이다. 다른 기독론적 칭호들은 예수의 그리스도됨의 다양한 면들을 특별히 부각시키는 칭호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다른 기독론적 칭호-즉 하나님의 아들,인자,아담,지혜 등-들을 예수의 그리스도 됨의 여러측면들을 특별히 부각시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기독론 칭호들 중 그리스도가 가장 기본이다. 다른 기독론 칭호의 기능은 예수의 그리스도됨의 여러 면들을 부각시키는 칭호라는 말이다
*예수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 어떻게 발생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고도서 O.Cullman “신약의 기독론”-‘주’칭호 부분
H.Marshall “Origiens of N.T Christis the”
page 97-110까지 The Origins of New Testament Christalogy
W.Kramer 영문판 page 65-107,152-182 “Christ,Lord,Son of God”
W.Bousset “Ktruos Christos”
F.Hahn “Christologishe Hoheistitel”
1.배경
1)헬라 사상 속에서 κυριος의 의미
헬라의 세속적 언어에서 κυριος말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또는 재산을 많이 가졌거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부름이 형식이었다. 영어식으로 한다면 Sir master에 해당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종교적 사용법에서 신들에 대해서도 쓰였는데 이집트나 시리아나 소아시아에 퍼졌던 신비종교들의 신들에게 썼다. serapis osiris mithra,isis 이런 여신들과 남신들에게 쓰였는데 여신들에게는 그것의 여성형인 κυρια로 썼다. 남신들에게는 κυριος로 부르고 이런 신들을 숭배하는 신봉하는 자신들을 δουλος δουλοσια(종) 이라고 사용했다.
정치적인 사용법에 있어서 통치자를 κυριος라고 불렀고 특별히 로마 제국의 동반구에서는 벌써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황제숭배사상이 벌써 1세기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신들로서의 로마 황제들을 κυριος라고 썼다. 유대교적인 배경으로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히브리어된 M.T 구약성경의 הוהי를 유대인들이 거룩한 이름을 죄악스런 입술로 불러서는 안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에 나올때마다 הוהי발음하지 않고 נדא(아도나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번역하면 ‘나의 주’라는 뜻이다. 이런 관습에 따라서 LXX가 번역되었는데 הוהי를 항상 κυριος로 번역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LXX의 관례에 따라 야훼라는 말이 나오는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에 항상 κυριος로 번역했다. 이런 증거들을 우리가 볼 때 신약시대에 헬라어를 보는 diaspora유대인이 הוהי 하나님을 κυριος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배경에서 ארמ가 헬라어의 κυριος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말이었다. 원래 세속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언어인데 선생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나 노예를 소유한 사람에게 쓰는 경의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것의 호격이 ירמ ‘나의 주’아도나이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ארמ라는 말이 하나님을 부를때로 썼고 지체높은 인간을 부를 때도 사용되었다. 지체 높은 사람을 부를 때는 영어의 Sir ,master에 해당하는 말이다. 또 사해문서 11Qtg(11번째 쿰란에서 나온 표제의 아람어 사본) 욥 24:5-7에 보면 ירמ 절대혀으로 하나님을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헬라어 κυριος와 마찬가지고 아도나이의 절대형인 히브리어로 ןידא과 아람어 רמ(마라,마레)로 쓰인다. 원래 일반적으로 높은 사람은 경칭ㅇ어로 쓰여서 점차 신에게도 썼던 말이다. 결국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지칭하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마로 쓰인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릴 수있다. 지금까지는 언어적 배경을 말했다.
2.예수가 주라는 칭호
신약신학 1 ‘간접 기독론’에서 무엇을 다루느냐면 ‘예수의 절대적 권위 주장(독어로는Vollmachtsanspruch,영어로는 claim to Authority’이다.
예수의 독특한 말,버릇,행적,가르침을 통해서 예수가 간접적으로 자기의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는 이것을 공관복음서들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가령 예수의 독특한 말 버릇 두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한가지가
①아멘이다. 우리는 보통 아멘을 맨 끝에 쓴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 끝에, 기도 끝에, 하나님의 찬양 끝에 사용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이요 진실이다. 신실하다고 발음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의지의 표시임을 나타내면서 아멘 했다. 그런데 유댕니도 우리와 같이 썼다. 하나님 말씀의 선포 후에 기도후에 찬양 끝에 ‘아멘’하고 응답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와 정반대로 사용했다. 항상 ‘아멘’을 쓰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하고 중요한 말씀을 선포할 대 이렇게 아멘을 거꾸로 썼다. 이것이 이런 용법은 예수의 전에도 없었고 당시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이렇게 말버릇을 정확히 고찰하면 예수가 어떤 자기이해를 나타냈는가를 헤아릴 수가 있다. 이런 독특한 예수의 말버릇을 또는 가르침,행적을 독특한 것으로 살펴보아서 ‘예수의 자기 이해’를 규명하고 ‘예수의 권위 주장’하는 것을 간접 기독론이라고 한다. 우선 아멘의 사용법을 알기 위해서는 형식면세어는 비슷한 선지자들의 선포형식,구약에서 선포형식이 어떻게 되는가? 구약에서 선지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 ‘여호와가 말씀하신다’‘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했다’고 말하는데 선지자의 이런 서문은 무슨 의도로 말하고 있는가?
자기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신적인 권위,자기 말이 아니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청중들의 관심을 인간인 자기에게 돌려서 여호와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기 위해 자기가 선포하는 선지자적 메시지의 신적인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도 중요한 말씀이 서문을 다셨다. 그런데 서문을 다는 그 점에 있어선 비슷한데 그 의도는 정반대이다. 선지자는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하나니께 돌리고 하나님이 자기 말씀에 진지됨을 보장하게 하신 것이지만 예수는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하게 하셨다. 누가 말하냐면 하나님이 말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위로 말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됨을 아멘성은 말하지만 예수는 누가 증명하는가? 내가! 예수는 자기가 선포한 말씀에 아멘해요. 우리 나라 번역에 진실로 내가 말하노니 진실로란 말이 원래는 아멘이에요. 헬라어로 쓰여진 우리 신약성경에 히브리말 아멘이 그냥 있어요. 왜냐하면 예수의 독특한 말버릇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번역하면 안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예수가 어떠한 자기이해를 나타내느냐면 우선 선지자와 비교할때 선지자를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선지자가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자라고 하며 자기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자란 말이다.
자기말의 진리성, 권위 있음을 자기 자신이 아멘 함으로 자기가 보장한다. 아멘이란 이와 같은 용법에는 예수의 신적 자기 이해, 권위를 포함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자라고 권위 주장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동격이다. 쉴리어란 신학자가 킷텔 사건에 썼다. 이 신약학자는 아멘이란 한마디에 신약 기독론 전체가 함축되어 있다고 말한다. 아멘이란 이 한마디에 우리의 예수에 대한 모든 신앙고백이 함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아멘은 예수의 신적인 자기 권위 주장이다. 또하나의 예수의 독특한 말씨는 아빠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아빠라 하지 않았다.
②언약사상에 의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언약사상에 의해서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구약의 중요한 사상이다. 출4:22 이하에서부터 줄곧 나오는 중요한 사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아비가 아들을 돌보듯이 돌본다는 사상이 구약성경에 들어 있다.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문서에서 특히 하나님에 대한 칭호들을 많이 발달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예가 기도문서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아빠란 말은 원래 집에서 어린 아이가 육신의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다. 우리 나라 아빠와 같다. 다만 다르다면 조금 확대해서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친구나 아주 친근한 선생님에게 도 사용했다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라고도 불렀다. 아빠란 말의 원래 의미가 아들이 아버지에게 친근감,경외심,신뢰심,전적으로 의로횜 그리고 순종심을 다포함해서 나타내는 말이 아빠였다. 아빠란 말을 감히 하나님께 쓴다는 것은 경망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하난ㅁ이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란 언약사상이 있었지만 하나님을 감히 아빠라 부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수께선 하나님을 아빠라 불렀다. 기도 가운데도 항상 아빠라 불렀다. 그러니까 아빠란 말속에도 독특한 의미가 있었다. (아멘이란 말처럼)
아멘이란 말속에 독특한 자기이해가 숨어 있듯이 아빠란 말도 그렇다. 그런데 예수 자신만 이 말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서도 아빠로 싲가한다. 그래서 이게 예수의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다. 심지어 바울도 헬라 말을 쓰는 로마 그리스도인,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쓸때 하나님을 아빠 하고 그 옆에 아버지 하고 번역을 한다. (롬8:16/갈4:6). 이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 귀중한 가르침, 심지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헬라말을 쓰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하나님의 자녀 되어 그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이시기에 심지어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렇게 사용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독특한 점은 또한 자기와 제자들을 구분했다. 하나님 우리 아빠라 하지 않고 아빠란 말 사용하는데 하나님 나의 아빠 너희들의 아빠라고 구분했다. 자기와 제자들을 아빠란 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구분했다. 더불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느냐 하면 이러한 세가지의 현상을 관찰하는데 아빠란 말과 예수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추종자들에게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됨,곧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있는 특권을 마련해 주는 분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했다.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는 자로 스스로를 이해했다. 또 예수의 권위주장이 어디에 나타나는가? 예수의 죄를 사해주는 권위를 주장하는데 나타난다. 가령 막2:1-12까지 보면 예수가 중풍병 든자에게 “소자여 네 죄가 사하여 졌다” 거기에 앉아 있는 신학자들이 참람하다. 즉 하나님을 신성모독했다. 하나님의 권위를 침해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죄 용서는 하나님의 독특한 특권이기 때문이다. 죄 용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심판관이며 하나님만이 창조주이므로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그의 피조물이 그의 창조의 뜻에 옳게 살았나 옳게 살지 않았나 하나님만이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기에 그만이 궁극적인 심판관이고 그가 궁극적인 심판관이기 때문에 그만이 죄를 용서해주실 수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예수가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를 주장한다. 물론 유대의 유대종교의 틀안에서는 대제사장이 성전에서 회개와 속죄의 제사에 근거해서 그런 제사를 받친 자에게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선언했다. 그런데 예수는 대제사장도 아니고 성전의 무슨 제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아무 그런 것과 관계 없이 죄용서를 선언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하나님의 대권을 침범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뭐라 했냐면 막2:10에 인자가 땅위에서 죄사함에 대해서 권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인자로서 권위를 어디서 받느냐면 단7:14에 한사람의 아들 같은이 곧 인자에게 하나님께서 권세와 영광과 왕권을 위임한다. 인자가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한다. (죄용서 하는 권위다) 곧 신적 권위위 주장을 한다.
또 어디서 예수의 권위 주장이 나타나냐면 모세율법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는데 산상 수헌의 반대 어법 마5:17,19,21 읽어보면 거기에 “너희가 옛 사람에게 살인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무시하고 욕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로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너희가 옛사람에게 간음하지 말라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그의 마음에 이미 간음ㅎ나 것이다. 하나님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반대 어법이다. 실인하지 말라,간음하지 말라, 이것은 십계명이다. 모세 율법의 총정리가 십계명이다. 그런데 예수가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는 행위,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행위,이것은 행위의 최소한을 규제하는 계명이다. 형제의 목을 치거나 간음행위 하는 것을 규제하는 것이다. 예수의 법은 행위이전의 마음의 상태,심장에서의 동기를 규제하는 것이다. 이것을 동기의 최대한 행위의 최소한 그러니까 자기가 이러한 말투로서 모세와 예수 자신을 비교 대조 시킨다. 그런데 그 가르침을 그 내용으로 예수가 모세를 능가하는 행위의 회소한 만을 규제하는 모세의 법보다도 더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동시의 최대한을 규제하는 완전한 법을 선언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자기가 모세를 능가하는 것을 나타내고 이제는 아멘의 말버릇에서 선지자를 능가하는 여기서 모세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법에 계시자라. 그러니까 모세보다 더 권위 있는 하나님의 법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계시하는 자라. 자기 이해를 나타낸다. 내가 모세보다 잘났다고 직설법으로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모세보다 훨씬 잘낫다 이말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틀 안에서 모세보다 더 능가하는 자가 없다. 모세 다음은 하나님이다(유대교 안에서). 심지어 메시야도 모세의 밑에 있다. 모든 선지자들과 랍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메시야도. 왜냐하면 심지어 메시야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다. 모세가 품꾼이다. 신18:25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다. 탈굼 사53장의 탈굼판에 보면 메시야가 모세 율법을 잘 가르쳐서 백성으로 하여금 의롭게 하는자이다. 모세 율법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러니까 메시야도 모세 밑에 있다. 그런데 예수는 무엇을 주장하는가? 예수가 모세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에 있어서 자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들여오는 분으로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기와의 관계에 의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못들어가고 하는 걸로 표시한다.그러니까 예수가 인긴의 운명의 결정자라고 스스로를 지금 나기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바로 하나님 나라를 들여오는 분으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킨 분으로 인가이 그와의 관계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혹은 못들어가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엄청난 권위 주장을 했다. 그를 믿고 이런 엄청난 권위 주장을 하는 예수를 제자들이 따라 다니면서 그 주장에 걸맞게 부르려면 어떻게 불러야 겠어요? 주라고 부르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것과 동의어인 랍비란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래서 주여란 뜻고 되고 선생이라고 제자들이 보통 불렀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3개의 예수의 말씀 가운데 ‘주’라는 칭호가 지금 보통 아람아로 사람들의 지체높은 자에게 권위있는 사람들에게 썼던 랍비 이상으로 더 의미 있게 쓰여진 경우가 다음과 같은 3개가 있다.
①막11: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가 입성할 때에 그 제자들에게 가서 당나귀 하나를 붙들어 오라고 하는데 그 사람에게 가서 어디 가면 당나귀가 메어 있느냐? 당나귀를 풀어 오라. 누가 말을 하면 왜 그것을 풀어가느냐 하면 “주께서 쓰기겠다 하라” 이것이 암호라고 할 수 있다. 성경마다 구구절절 기적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여기도 기적으로 보고 예수가 어디에 나귀가 묶어 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예수와 당나귀 주인과의 비밀이 약속이 되어 있다. 어느 곳에 나귀를 만들어 놓고 예수가 제자들을 보내어 주면 왜 가져가느냐 하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예수가 보낸 것으로 비밀리에 이루어 약속되었다. 그리고 이루어졌다. 예수가 아주 위험한 상황속에 입성하고 있다. 모든 일은 비밀리에 예수의 최후의 만찬고 비밀리에 예약되어 있다. 그런 상황이다. 여기서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이 주라 말은아마 ‘마리ירמ’보다 좀더 깊은 의미가 있지 않느냐?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것이 스가랴 9장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다.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서 입성은 그러니까 적어도 메시야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②막12:35-37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대한 시비이다. 왜 서기고나들이 유대 신학자들이 메시야가 왜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나단의 예언(삼하7:12) 나오는 메시야 전승에 의하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다. 예수가 거기에 시비를 건다. 왜 메시야가 하나님의 이들이라고 하느냐? 시110:1절에 다윗이 메시야를 무엇이라고 부르냐면 나의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보다 낮은 다윗의 아들이 되겠느냐고 시편 110;1절을 들어서 당시 주된 메시야 사상을 예수가 시비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말이라고 아직도 주석가들의 논란이 많다. 여기서 예수가 당시 메시야 사상을 부인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윗의 아들됨을 부인하는 것이냐? 아니면 다윗의 아들됨이 부족하다는 것이냐? 메시야를 그는 인간적인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과 같은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다윗과 같이 이방인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태평성대를 가져올 분, 그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힘받은 자로서 만유의 주제,그렇게 말하기 위해서 시비하는 것이냐?여러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하여간 여기서 시 110:1절을 인용해서 다윗의 아들에 대한 대칭해서 ‘주’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다윗보다 권위 있는 하나님보다 더 높임 받은 인자로서 그의 ‘주’됨을 나타낸다. 은근히 예수가 다윗왕쪽보다 더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 받은(시110:1) 주 되심을 은근히 말한다.
③눅6:46을 읽어보라
제자들이 예수를 랍비,마리라고 이렇게 불렀다. 그러면서도 시편 110:1절의 말은 숭종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왜 주여 주여 하면서 내가 가르치는 것을 듣지 않느냐? 이 말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제자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의 ‘주’도 인간적인 스승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가 간접 기독론을 통해서 ‘주’라는 칭호의 의미있는 사용으로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나타냈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을 최소한대로 예수를 마리 또는 랍비 나의 주여 정도로 최소한도로 그 정도로 밖에 표시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정도로는 표시해야 했다. 그래서 그에게 완전한 순종을 했었다. 그러면 예수가 κυριος라는 신앙고백을 어떻게 발생했느냐? W.Bousset가 그의 책 ‘크리스토스 큐리오사’란 책에서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지금 온 우주를 통치하는 ‘주’라는 신앙고백을 제일 처음 안디옥에서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예 종교에 간섭대로 예수를 예배하는 체험에서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원래 팔레스틴의 유대교에는 예수를 재림하는 인자로 기다리는 것을 그들의 신앙의 내용으로 삼았으나 안디옥에서 헬라 기독교인들이 보로서 예수를 예배하게 되고 예배이 대상으로서 신격화된 예수에게 자기들의 옛 종교를 이시스 등의 신비종교애서 신을 κυριος라 했듯이 이제 기독교에서 예수에게 예배하면서 예수를 κυριος라고 부르면서 그가 지금 주권을 행사하는 자라 믿고 고백하고 선포하기 시작했다. 이 이론은 현대 20세기에 자유주의자들이 신약 기독론 이해의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 됐다. 불트만에 의해서 완전히 수용이 되었고 크라머 한은 계속해서 부셑의 이론을 약간씩 변형해서 계속 개진하고 있다. 바로 이점을 명백한 오류로 지적하고 길게 설명하는 것이 오스카 쿨만의 신약기독론에 잘 서술되어 있다.
이 헬라 사람들이 κυριος란 말을 신에게 적용하고 헬라 유대인들이 구약의 야웨를 κυριος로 번역하여 부른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의 예수에 대한 κυριος로의 신앙고백의 언어적인 면으로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다. 언어적으로 헬라인들이 신을 κυριος라고 부르고 헬라 유대인들이 야웨를 κυριος라고 부른 것이 신약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κυριος라고 고백함이 언어적으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약성경을 보면 헬라 기독교에서 예수를 κυριος라 지칭하는게 점점 더 많아졌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주’라는 사실은 부셑이 말한대로 헬라인들에 의해서 안디옥에서 처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틴에서 아람 말을 쓰는 예수의 유대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의 부활 직후 발생한 것이다. 그걸 이제 좀 증명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에 대한 예배가 안디옥에서 헬라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이 된 것이 아니고 팔레스틴에서 예수의 부활 직후에 발생했던 것이다. 이것을 쿨란의 책에서 잘 보여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자 제자들이 흩어지고 예수가 부활하여 그들에게 나타남으로 그들을 다시 모았다.(그날이 안식일 다음날). 그날 그들은 예수의 최후이 만찬을 기념하여 떡을 뗐다. 그때에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여 있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부활하시고 높임받은 ‘주’로 스스로를 나타냈다. 그래서 그렇게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부활에서 나타난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부르고 그날 모여서 ‘주’로 최후의 만찬을 되풀이 함으로서 최후의 만찬으로 말미암아 절정에 달했던 예수 그리스도와 fellowship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에 대한 에배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그 예배에서 안식일 다음날 주의 날에 그들에게 항상 잔치를 베풀었던 최후의 만찬에 절정에 이르렀던 잔치를 베풀었던 부활하신 영적으로 자기들과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서 부활하신 영광 받으신 분으로 나타나서 그들과 새롭게 교제를 하는 주와 더불어 만찬을 하는 그 체험에서 초대교회가 안식일 다음 주일날 바로 부활해서 나타난 주를 기념해서 (그가 실제가 되게 그들의 체험속에 실제가 되어 나타나게 하는 그런 예배를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부활이 나타난 날 또 그날을 기념하는 날 주의 날이라고 하고 그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예배하는 날로 정하고 그때에 나누는 최후의 만찬을 주의 만찬이라 그래서 첫째로 예수에 대한 예배중 κυριος라는 칭호는 부활과 예배와 관계된 것이 사실ㅇ니데 예배가 안디옥에서 헬라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고 헬라 종교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예수의 부호라에서 그들에게 높임 받은 자로 나타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헬라 종교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제의,만찬과 더불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의해서 절정에 이르렀던 그의 제자들과의 fellowship이 부활한 예수와 더불어 새로와짐에 의해서 생겼다는 것이다.
둘째로 고전 16:22 “μαραναθα” 라는 말이 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μαραναθα라는 아람어로 썼는데 아주 중요한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어디에서 끊느냐가 중요하다. 그 정신을 존중해서 우리 신약성경에도 그렇게 써야 하는데 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번역했다. 그것은 틀렸다.
μαραν/α/θα
① ②
①서술어:주께서 오셨다(한글개역)
또는 주께서 오신다. 이렇게 되면 신앙고백이 된다.
②기독형식으로 ‘주여! 오소서’ 라는 기도가 된다.
그러면 어떤 것이 맞는가?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μαρανα/θα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주여! 오소서’라고 읽어야 한다. 그의 증거는 요한계시록에 ‘아멘 주여! 오소서’라고 끝난다. 그리고 또한 디다케라는 책 10장에 성만찬에 바로 “마라나타” 기도로 나온다. 그래서 요한계시록과 디다케에서 ‘주여 오소서’라는 기도가 초대교회의 중요한 기도였다.
사실을 알며 주의 재림,성령으로 예배에 오심을 부르는 한편으로 종말론적 기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반론적으로 우리 신약 성경에서 신앙고백을 ‘주’로 번역이 되었다. 대개 예수가 우리 주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였다는 번역이 되었다. 그러나 기도문이나 예배의식의 말은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되었다. 아빠도 기도때에 부르는 말이다. 그래서 ‘마라나타’가 기도문이기 때문에 번역되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예수를 아람어를 쓰는 사람들이 종말이 오는 심판 주로 보았으며 예배시에 주로 오셔서 예배를 받으시는 분으로 인식하였다. 영국의 A.J.Rawlinson 사람이 바로 ‘마라나타’가 W.Bousset의 이론을 반박하는 아킬레스건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느냐하면 원래 예수의 생전에 그의 절대적 권위 주장에 상응해서 그를 mare 또는 rabbi라고 불렀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하시고 높힘 받은 형체로 곧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내심을 보고 그를 한 차원 높게 더 심오한 의미로 그를 ‘주’라고 부르며 떡을 떼는 fellowship을 중심하는 예배에서 부활하셔서 나타난 ‘주 예수’ 그의 현재적 주권의 행사를 체험하고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예수가 절대적 의미로 신적의미로 κυριος라는 신앙고백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Bousset나 Bultmann의 이론이 정면으로 반박되고 ‘예수가 주다’ 는 신앙고백은 생전의 예수의 절대주장과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곧장 팔레스틴 그리스도인에게서 생긴 사건이다.

바울신학 12강
지금까지 ‘예수가 주다’는 신앙고백이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살핌.
이 신앙고백의 의미 살핌 אר אנרמ 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기도이다. 주여 오셔서 빨리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소서.
동시에 이 기도는 Didache 10:6(1세기의 책,12사도들이 가르침이라는)에서 예배 특히 성만찬을 중심으로 한 예배에서의 기도이다. 마18:20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약속(유대인에게 하나의 회당이 하나의 예배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남자 10명이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집단의 최소단위 두세 사람이면 예배공동체가 됨.)
그 약속에 근거해서 주의이름으로 모인 우리에게 특히 주의 만찬에서 fellowship을 기념하는 그 모임에 부활하셔서 나타나셔서 그 교제를 갱신하셨듯이 지금 우리 가운데 주로 오셔서 만찬 테이블에 주석을 차지하소서. 그래서 계 3:20에 쓰여진 그 말씀을 체험하게 하소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예배때에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주와 더불어 나누는 만찬을 성만찬이라 주의 만찬이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중요한 의미 하나를 발견케 된다. 예배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교제, 잔치의 현재적 실현이다고 말할 수 있다. 또는 현재적 선취.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잔치라고 즐겨 표현,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가 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 종말에 참여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미리 체험되는 것이 예배이다. 예배때 오시는 주는 종말에 재림할 주의 또는 종말에 주로서 재림함의 선취이다. 즉 예배때 주의 오심은 종말의 현재적 선취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종말에 파루시아 하시는데 지금 벌써 현재 예배때 파루시아 한다. 우리와 함께 임한다. 이래서 우리 주 예수의 주권을 지금 예배 통해 체험할 수있는데 예배 통해 체험하는 그의 주권이 오실 주에 대한 기다림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볼때 마라나타는 다음과 같은 2가지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①주라는 칭호는 부활하시고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이다.
②이 주라는 칭호가 쓰는 두가지 context 상황은 예배와 종말론적인 소망이다. 이제 보겠지만 하나 더 있는데 예수의 현재적인 통치. ‘예수가 주이다’는 신앙고백의 의미 두번째.
(2)이 신앙고백과 더불어 시110:1의 중요성
신약성경에서 자주 인용되는 성경말씀이다. (롬8:34/고전15:25/골3:1/엡1:20/히1:3/8:1/10:21/벧전 3:22/행2:34/5:31/7:55/계3:21/마22:44,46 등)
그런데 예수가 이 구절을 어떻게 인용했나? 메시야가 왜 다윗의 아들이냐?
다윗이 스스로 그 시에거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메시야가 다윗보다 더 높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 주되심. 시110:1 ‘주께서(처음 주-여호화) 야웨 하나님께서 나의 주 메시야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를 나의발 앞에 굴복시킬 때가지 나의 우편에 앉으라’ 가지 대권자가 되라.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대권을 휘두르는 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높이심을 말함.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바로 이와같은 에수의 시110:1의 사용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높이심을 이 구절의 성취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킴-자기 우편에 앉게 하셔서(대권을 위임하는 행위사건)-그리하여 그가 주가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위임받아 행사하는 자가 되었다.
예수의 부활에서 그의 제자들은 그가 절대적 신적 권위 주장했음이 하나님에 의해 옳다고 인정되었음을 보고 또 그들의 רמ 마레,주가 영광 가운데 높임받은 것을 보고 시 110:1을 예수께 적용하여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 하나님의 대권 위임받은 자로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행사 하는 자로 높임받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예수가 주라는 칭호는 시110:1의 의미를 띠게 된다. 주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이다.(부활해서)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분이라는 의미로 빌2:9/딤전3:16같은 신앙고백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빌2:6-11의 그리스도 찬송시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고 즉 하나님의 이름 야웨(הוהי-ינרא,κυριος 라고 부름)를 예수에게 주었다. 자기 우편에 앉혀 대권 위임했으니까 이름을 준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자들이나 땅 아래 있는 자들이나 온 우주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했다. 고백하게 했다. 그래서 예수가 만유 위에 군림하는 주가 되었다. 심지어 야웨의 이름을 갖는 분이 되었다. 딤전 3:16도 비슷한 뜻.
이래서 초대 교회 교인들은 구약성경의 야웨에 대한 구절을 예수에게 적용했다. 신약성경에서. 그래서 구약성경의 야웨에 대한 구절들을 신약성경에서 인용할 때 거의 예수에 대한 말씀으로 인용한다(예외-몇번 하나님 아버지를 두고 말할 때). 그래서 예수가 심지어 하나님에게만 드려져야할 예배를 받는 분이 되었다. 그래서 모든 만유가 그에게 무릅을 꿇고 모든 사람들의 입술이 그를 주로 고백하게 했다.
(3)예수의 주권의 기간
예수의 주권은 그의 부활과 승천으로 시작하고 즉 그의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로의 높임으로 시작하고 그의 재림으로 더불어 끝난다. 고전 15:24에 바울은 그의 재림 때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모든 힘을 다 때려 부수고 그리고 나서 즉 이 세상의 하나님의 통치에 반발하는 세력을 다 평정하고 하나님께 그의 왕권을 아버지께 돌려준다. 이리하여 하나님이 만유 위에 군림하시는 분이되게 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마땅히 이 세상의 통치자, 주이시다. 그런데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한 사단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를 일군으로 써서 사단의 통치를 완전히 없애고 뒤집어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권을 회복하는 자로 모든 사단의 권세를 쳐부수고 언제? 그의 재림 때,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결정적 승리를 했고 그리고 그의 재림과 더불어 그 나머지 잔여 세력, 최후 발악하는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고(이 그림=사단의 세력을 자기 발등상으로 만듬. 발로 딛고 서는 상으로 만듬,완전히 발아래 굴복시킴) 그러면 이 세상이 하나님이 대한 반란 끝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만유위에 군림하시도록 통치권을 돌려드리면 최초의 샬롬이 회복된다. 그렇게 되어 하나님이 이제 만유 위에 통치하게 된다.
예수님의 주권은 그의 부활과 승천에서 시작하여 그가 이 세상의 모든 반란세력을 다 집압해서 하나님께 왕권을 돌릴 때까지의 기간이다. 그러니가 예수의 주권기간은 현재부터 그의 재림때까지이고 그의 재림 이후 기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하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예수의 그 사역을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실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의 대권을 대신 행사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파루시아 때에 세상의 반란 세력이 다 진압되어서 하나님께 왕권이 돌려짐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진정한 의미로 하나님의 통치하심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다. 그래서 예수의 통치,주권 기간은 그의 승천과 그의 재림 사이의 현재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전 15:24,25. 신약성경에서 시 110:1을 인용할 대 우리는 신약성경의 독특한 ‘벌써와 아직도’의 종말론적 긴장을 항상 엿볼 수 있다. 시 110:1을 예수의 승천에 적용할 때 예수의 주권에 적용할 때 예수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벌써 이 모든 사단의 세력을 굴복시키고 하늘의 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벌써 그의 주권을 행사한다.그러나 아직도 이들이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악과 고난이 흉흉하고 예수의 주권이 아직도 거스려진다. 그의 파루시아 재림때에 그가 드디어 최후의 발악을 하는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굴복시킬 것이다.
그래서 벌써 dimension을 παρουσια 때 완성될 정복과 연결해서 말하고자 할대에는 사단을 꽁꽁 묶었다든지 등뼈를 분질렀다든지 등의 그림을 쓸 수밖에 없다.
이 그리스도의 주권의 기간 즉 그의 승천과 재림의 기간이 바로 교회의 기간이다. 또 그 기간은 성령의 역사의 기간이다. 성령이 구원의 첫 열매 απαρχη 롬8:24, 보증금αρραβυν 고후 1:23/5:5엡1:13 곧 성령이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첫열매이고 종말에 완성될 구원이 우리에게 확실히 보장된다고 하는 보증금 역할을 함으로써 벌써와 아직도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1)그리스도의 두 주권의 영역
이것은 두개의 동심원으로 나타낼 수있다.
빌2:9-11 까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가 벌써 시110:1의 성취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만유위에 주로 군림한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한다. 벌써 온 세상 위에 주로 군림한다. 그런데 아직도 이 세상에서는 사단이 주행세를 하면서 세상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서(골4:3) 예수의 주되심을 모르고 그를 주로 고백하지 않고 도리어 마치 사단이 주인인양 사단의 주권아래서 산다. 그것이 세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으로 예수의 주되심을 깨닫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이 통치하는 이 세상에서 사단이 진짜 주가 아니라 예수가 진짜 주임을 깨닫고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거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으로 넘어온 자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됨, 곧 구원받음은 주권의 바뀜이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곧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 흑암으로 다스리는 흑암의 주권,권세의 영역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주권의 영역으로 옮겼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세례 곧 세상의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여역 교회로 들어오는 의식인 세례의식이 사단을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사단을 주로 고백하던 옛자아가 죽어버리고 장사됨을 상징해서 물로 빠지고 예수의 주권으로 새롭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을 상징해서 물에서 씻긴 몸으로 나오는 극을 한 것이다. 롬10:8 “너희가 입술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며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켰다고 믿으면 구원 얻는다” 이것이 세례의식. 세례때 고백하는 믿음이다. 그 세례 때 바로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 그 고백전에 사단을 부인하는 의식이 있다.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서 악과 고난과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다의 영역에서 의와 사랑으로 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의 주권에의 영역으로 transference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교회와 세상이 어떻게 다르냐? 둘다 예수님의 주권아래 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의 공동체이고 세상은 예수가 진짜 주이나 그의 주권을 모르거나 부인하고 대신 사단의 주권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사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주권은 교회를 중심으로 행사되며 교회에서 더 강도높게 나타난다. 왜? 교회들이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니까 이 세상에서는 항상 변증법적으로 행사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이 예수의 주권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주권을 따른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 만유의 주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주권에 거스리고 사단의 주권에 순종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나 예수가 불순종을 이용해서라도 자기 주권자적인 뜻을 성취해 나가는 영역이 세상이다. 변증법적으로는 그러나 교회에서는 예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예수의 주권이 더 강도있게 행사된다. 더 분명하게 행사된다.
그러니까 교회의 멤버들은 벌써 에수의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므로써 그의 주권의 축복을 누리나 세상 사람들은 그의 주권을 무시하거나 무지하거나 불순종하는데 사단을 도리어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순종하는데 예수가 사단을 이긴 주이기 때문에 사단에 대한 순종 곧 불순종을 예수가 이용해서라도 자기의 주권자의 뜻을 이룬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듯에 의식적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뜻에 반해서 순종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의 주권의 축복을 직접 누리지 못한다. 이런 세상과 교회의 관계 예수의 주권의 영역 세상과 교회가 이렇게 다르다. 그러나 교회도 세상 장으로 말하면 이렇게 두개가 있는데 시간적으로 말하면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 속에 있다. 그래서 교회자체도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속에 있다. 그래서 교회 자체도 예수의 주권을 알고 그 주권에 의지하고 순종하지만 그래서 예수의 주권이 벌써 행사되고 나타나고 그의 주권의 축복,구원이 벌서 나타나지만 아직도 완성이 안된 상태에서 그래서 교회에서도 아직도 예수 주권에 대한 완전한 순종이 없고 그의 구원의 축복이 완전히 체험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세상과 교회가 비슷한 점이 있다. 교회의 예수 주권에 대한 변증법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다. 그럼 정확히 교회와 세상의 다른 점을 어떻게 나타내야 되느냐? 정도의 차이냐? ①알고 모름-예수의 주권에 대한②예수 주권에 대한 의식적 순종,무의식적 순종. 그렇기에③예수 주권의 축복을 누림,못누림의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자체도 already but not yet의 긴장속에 있기 때문에 그런면에서는 세상과 별 차이가 없게 된다. 그래서 최근 신학에서는 교회가 세상 차이를 자꾸 약화시키는 그런 운동이 자꾸 벌어진다. 특히 카톨릭 신학에서 K.Rahner, 한스 퀀 같은 사람들의 신학적인 마더를 써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우주적인 그리스도,그리스도가 교회의 그리스도,주만이 아니고 온 세상의 구원자이고 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리스도되시고 주되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자들만 그의 주권아래 있는 것이 아니고 벌서 세상은 그의 주권아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자들도 벌써 그의 주권 아래 있다는 의미로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개념을 발달시킨다. 그래서 교회밖 타종교의 사람들도 우주의 주로 이미 군림하시는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자들로서 벌써 그의 심판과 그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들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도 모르지만 그들은 벌써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면 그것은 그들의 종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는 모르지만 그들은 벌써 그리스도인이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와 가르침에 따라 선을 행하면 그것은 그들의 종교를 통해 역사하시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다. 이런 식으로 사고를 진정시켜 불교들에게는 불교를 통해서 희두교도들에게는 희두교를 통해서 이 예수의 주권이 행사되고 그 주권에 대한 순종이 일어나고 그런 것을 서로 확인하는 것이 종교간의 대화이다. 그래서 대화의 신학이 발달한 것 dialogue 기독교, 불교, 흰두교도들이 다 같이 앉아서 어떻게 흰두교도들은 희두교의 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나타나고 그것에 순종하는가?를 봐야 된다 해서 대화의 신학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런 이론들이 어디서 틀렸냐하면 예수의 주권과 사단의 주권(이 세상이 예수의 주권 아래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단의 주권 아래 놓였다) 에 거부하고 사단의 주권에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순종하고 그의 불순종을 이용해서라도 자기의 주권을 성취하는 그런 의미로만 예수가 그들의 뜻에 반해서 그의 주권에 순종케 한다는 그 사실을 그러니까 변증법적 긴장을 약화시키는 오류를 범함. 그래서 사단의 세력의 실제를 부인하고 무시하는 그런 결과를 갖는다. 그래서 이런 신학을 그리스도 일원론식의 신학이라 한다. 마치 이 세상에 작용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권만 작용하는 것처럼 사실 사단의 세력도 막강하게 작용한다. 그래서 이 세상이 사단의 주권아래 있다. 사실은 예수와 사단이 서로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 자기 주권을 주장하기 위해서 각축을 벌이는 장이 이 세상이고 세상의 각사람이다. 그런데 그것을 망각하고 마치 그리스도만 주로 군림하는 것같이 한다. παρουσια 때 그럴 것이지만 지금 but not yet의 상태 속에서는 이 세상이 그리스도와 사단의 주권의 각축장이고 그래서 세상 사람의 예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은 변증법적으로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사단을 부인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의결단,그리고 그러한 결단이 세례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인 교회의 성원이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익명의 그리스도인 있을 수 없다. 성립안된다. 이런 개념이 있으면 선교가 개종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자기 종교내에서 이미 벌써 다 그리스도인이다. 불교도는 불교에서 흰두교는 흰두교에서 선교는 오직 대화로만 존재한다. 대화로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종교의 틀을 통해서 역사하시는가 서로 확인하는 것으로만 존재하다가 이런 선교신학이 한세대를 풍미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우리 신약성경에서는 이런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의 결단,회개와 사단을 부인하는 일 이제까지 사단을 순종했던 삶을 청산하는 일, 거기서 돌이켜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믿음, 신앙고백이 있고 그것에 근거한 세례라는 극화를 통해서 세상에서 교회에 들어오는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주권의 변화가 일어나는 일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을 개종이라고 한다.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모든 민족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에로 부른다. 롬1:5 바울이 모든 이방인들을,모든 민족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순종으로 불러오도록 명령받았다고 사도직을 받았다고 했다.
(5)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롬10:9/빌2:9/고전12:3/롬10:9 “네가 네입술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켰다고 믿으면 구원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또 고전 12:3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면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고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하면서 예수가 저주받으 자라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자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 곧 그리스도인,구원받은 자이다. 오순절신학 영향,방언,환상등 난리해야 성령받았다 한다. 신비한 이상한 체험 해야 한다고 하나 성령받은 증거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함에 있다. 예수가 저주받은 자이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신21:23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거짓 선지자이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사형감. 그래서 ‘네가 그리스도가 저주받았다고 해라’ 강요했던 것 같다. 바울 스스로 핍박자로서 행할 때에 예수가 저주받은자라고 선언하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했던 것 같다. 또 헬라로마 관원들은 그리스도교들이 붙잡혀오면 예수가 저주받은자이다. 로마 황제에게 대항한 조인이었기에 총독 빌라도가 십자가에 사형집행한 자라고 인정하면 무죄석방해주마고 예수가 저주받은 자라고 강요했던 것 같다. 그런 핍박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주라고 신앙고백해야 된다. 그런데 아마 항상 어느 시대에서나 있듯이 이런 극단의 핍박의 상황에서 그 핍박을 모면하기 위해서 예수가 자저븓을 자이다고 순순히 핍박자의 요구를 들어주어 놓고는 나중에 핍박이 지나간 후에 교회에 모여서 아 그때 성령의 인도함으로 살짝 그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있었던 모양. 바울이 성령에 의해서는 그런말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령이 그 순간 그렇게 말하게 해서 내가 말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가 주이다고 말하게 한다.
예수가 주라는 고백은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의 주권으로 들어가서 구원받고서 한 고백이고 교회의 멤버가 된 고백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이것이 핍박의 상황에서 test가 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군림한 예수에게 스스로를 종으로 그에게 속하고 매인바됨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그에게 그의 주권에 순종하겠다는 것을 서약한 행위이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주 에수와 종된 우리의 법적인 관계를 성립시키는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주로 예배와 윤리의 상황에 적용된다. 바울은 원래 핍박자로 시작했기 때문에 다메섹 도상에서 놀림받은 예수를 주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그의 종으로 인정하는 체험의 극적인 성격 때문에 자신을 주에 대해서 말할 때 상당히 독특한 강도를갖고 말한다. 가령 빌3:12에 보면 바울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징집되었다(우리말:붙잡힌바 되었다). 그래서 그의 사도가 되었다. 그의 δουλος 종이 되었다.
롬1:1/고후4:5/갈1:10/빌1:1 등 특히 빌3:8의 언어를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의 가장 고상한 가치를 두고 있다. 바울이 보통 편지에서 ‘우리’라고 자기를 두고 말할때는 문체적인 복수를 쓴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나’란 말이 자주 나온다. 아주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면서 자기 신앙의 절실해진 상황에서 그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의 절실함을 잘 나타낸 말이다. ‘나의 주’독특한 개인적인 dimenson 은 잘 나타낸다. 그리고 개인적인 관계, 아주 personal 한 주 예수와의 관계의 강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니가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의 표증이다.
(6)주라는 칭호는 윤리적인 가르침에 많이 쓰인다.
예수가 주라고 신앙고백은 우리와 주종의 관계를 법적인 관계로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주권에 완전히 순종해야 되는 종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윤리적인 context에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바울은 주라는 칭호를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또는 교회 내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룸에 있어 가장 많이 쓴다. 이 맥락에서 우리들은 바울이 흔히 쓰는 ‘주 안에서’라는 문장 형식을 이해해야 된다.
가령 빌 4:2 유두게하고 순두게가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열렬한 집사였던 것 같다. 이들을 중심으로 빌립보 교회가 조금 분열의 위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한 마음을 갖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안에서’이런 윤리적인 가르침,그리고 또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주라는 칭호를 쓰는데 그때 쓰는 문장형식이 주안에서이다. 이 말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그의 주권에 순종하는 그의 주권의 영역에 든 사람들로서 살라는 말이다 그들이 왜 다투냐? 자기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둘다 예수의 주권 아래 있는 자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의 주권의 영역 속에 그의 주권에 절대적으로 순종애햐 하는 종으로 존재한다. 그러헥 생각했을 때는 그들이 자기 뜻을 관철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 위에 같은 주이신 예수의 주권자적인 뜻을 추구할 것이다. 그런 의미로 주 안에서, 예수를 수로 고백하는 자들로서, 그의 주권의 영역에 있는 그의 종들로서 한 마음을 품으라. 그러니까 주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결정과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분이고 그분의 주권자적인 뜻에 따라 행동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인 가르침의 상황에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의 가르침 상황에 주라는 칭호를 가장 많이 쓴다. (자세히 알려면 W.Kramer의 책 참조.자세히 쓰여 있음)
(7)주라는 칭호는 그러나 확신과 위로를 줄때 쓰이는 칭호이다.
교회와 교회의 성원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의 세력을 꺽고 승리하신 주 예수 에게 속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다만 확신을 갖고 기쁨을 갖어야 한다. 그래서 주는 우리에게 순종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축복하고 안위하고 승리케하고 구원하시는 분이다. 이런 context 속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라는 말을 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확신과 위안을 주시는 분 사단의 세력을 꺽고 승리하신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란는 뜻을 나타낼 때는 ‘주안에서’라는 말을 쓴다. 그래서 빌 4:4 “주안에서 기뻐하라” 이 세상안에서는 기뻐할 것이 하나도 없다 .빌리보 교인들도 바울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어떠면 사형선교 받을 가능성이 많은 상태이다. 빌리보 교인들은 가난에 찌들은 상태에서 외부적으로 핍박을 받고 있다. 내부적 분열이 있고 그런데 주안에 기뻐하라. 주가 어째서 우리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가? 우리에게 이 모든 악과 고난을 갖다주는 사단의 세력을 꺽고 이기어서 우리에게 궁극적인 구원을 가져다줄 그런 능력 사랑을 가지신 분을 우리가 주로 모시고 있다. 그 주의 권세 아래서 우리의 십자가 우리의 구원이 확신이므로 우리가 위안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주 안에서’라는 문장형식이 한편으로는 윤리적인 상황 속에서 예수의 주권에 순종한 자들이라는 말, 또 한편은 사단의 세력을 꺾고 이기신 주에 속한 자들로서 그의 주의 승리에 참여하는 자들로서 라는 말. 그의 구원에 참여하는 자들로서라는 말. 이렇게 두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전혀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에 덧입은자들로서(그리스도는 그의 죽음과 부활에 함께 쓰임) 그 죽음과 부활에 구원의 사건을 덧입은 자로서라는 말이다.
(8)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예수의 신성을 함축하고 있다.
빌2:9-11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혀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 야웨 이름 주셨다. 그래서 예수, 야웨,주라는 이름 가졌다. 그러니까 예수가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 이름에 주 모든 무릎을 꿇게 했다는 것은 시 45:23의 인용이다. 사 45:23을 보면 야웨 이름 외에 어떤 다른 이름에도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것. 예배해서는 안된다는 것(전통적으로 예배하는 자세가 무릎 꿇는 것) 야웨외에 어떤 신에게도 그런데 이 구절을 이제 예수에게 적용한다. 왜? 예수가 야웨란 이름을 받았으므로 예수가 사 45:23. 야웸나 배타적 예배를 받을 수있는 분이 되었다는 것. 그래서 예수가 예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예수의 신성을 말한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함축한다. 이렇게 해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성에 높임받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높임받았음을 함축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이름을 주시고 자기의 대권을 위임하셨다는 확신 가운데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서 야웨에 관한 말씀들을 다 예수에게로 적용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가 히1:10 이하에 나타난다. 주로 이 우주의 창조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하나님 아버지와 분명한 구분을 초대교인들은 잊지 않았다. 고전 8:6 에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아버지-εκ 만물이 그로부터 났고 그가 창조의 기원,창조주
-εις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해서 존재.
만물의 존재목표가 그에게 영광돌림이다.
그 다음에 I-‘주’-δια 만물이 그를 통해서 났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origin goal 이고 ㅇ예수는 하나님 아버지가 쓰는 수단 일꾼이다. 이렇게 구분했다. 하나님의 아버지와 주를 그러면서 동시에 여기서 예수님의 선재를 천명한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되도록 창조되었은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되도록 창조되었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일군 노릇을 했다. 창조의 수단 노릇,그러니까 창조전에 있었다 .선재설. 예수가 주이다는 신앙고백은 그가 선재함을 내포하고 예수님의 신성을 함축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와 정확히 구분하는 이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원래 기독론적인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고백에서 이럴 때 이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이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으로 발달한다.
하나님의 이름인 주가 예수에게 적용됨으로 말미암이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에 관한 다른 칭호들이 예수에게 다 적용된다. ‘주’라는 이름과 더불어. 그래서 가령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 왕,그런데 예수가 이스라엘의 목자, 왕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의 목자이고 왕ㅇ시다. 하나만 빼놓고는 ‘아버지’! 자. 에수가 주라고 신앙고백이 어떻게 발생했고 무슨 의미를 갖는가를 살펴 보았다.

바울신학 제13강
서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바울의 기독론을 설명하고 그 다음에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 마지막 아담이다. 하나님의 지혜이다 등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론을 좀 살펴보고 그 다음에는 바울의 구원론으로 들어가서 구원론의 여려 개념들 또는 그림 언어들 등을 차례로 살펴보고 또 시간이 허락하면 구원론 전에 인간론을 한 두 시간하고 구원론을 하고 또 시간이 허락하면 바울의 교회론을 다루려고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
참고서적
M.Hengel “The Son of God”
I.H.Marshall “Origins of NT Christology”
E.Schweiber “ο υιος του Θεου TDNT Ⅷ”
O.Cullmann “NT Christology” 하나님의 아들 장 참조
J.D.G.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pp12-64
1.배경
1)헬라적 배경
종교사학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은 헬라 사상에서 왔다. 헬라 사상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신과 인간)의 차이가 크지 않아서 인간 중에서 조금 힘이 세고 인간중에 탁월하면 그래서 가령 이적을 행한다든지 또는 훌륭한 철학자라든지 그래서 많은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칭호했다. 그리고 신격화했다. 이러한 전통에서 예수가 지혜로운 가르침을 하고 특히 이적을 베풀고 그러기 때문에 가령 마가복음을 필두로 해서 헬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유행했던 학설이 헬라 세계에서는 지혜가 많은 철학자든가 또는 이적을 베푸는 즉 영적 힘이 있는 자를 신적인 인간(Θειος ανηρ)이라고 했다. 그래서 신격화 했다. 그런데 마가복음이 이렇게 지혜로운 가르침을 하고 특히 이적을 행하는 예수를 헬라 사상의 Θειος ανηρ 어의 카테고리로 묘사를 하고 그래서 막 1:1에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마귀들에 의해 선포되기도 하고 그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마가복음 마지막에 백부장이 심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이런 식으로 마가복음이 예수를 헬라 사상의 이적 베푸는 자로서 Θειος ανηρ로 그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했고 마가복음의 그림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이 발생하게 된 아주 좋은 모범을 보여준다고 하는 것이 종교사학파들의 전제였다.
M.Hengel의 책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TDNT Kittel 사전에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헬라어 부분을 쓴 Von Martitz가 헬라 문서들을 열심히 뒤져 보았지만 인간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흔치 않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 자체가 아주 드물게 나온다. 그리고 Θειος ανηρ라는 말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다. 이것은 최근에 Bieler라는 사람이 지어낸 문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의 Θειος ανηρ의 사상 여기서 이런 자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가설이 성립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M.Hengel의 ‘신비 종교’라든지 또 영지주의 신화에 대한 자세한 survey도 마찬가지 결론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한마디로 헬라 사상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에 대한 배경을 찾을 수가 없다. 종교사학파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이 헬라 사상에서 나왔다고 주장을 하면 서 바로 바울이나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서 종말에 올 인자 또는 그 사람의 아들에 관한 기대를 중심으로 했던 원래 예루살렘에 초대교회의 신앙을 헬라식으로 탈부꿈 시켰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은 ‘예수가 주다’는 신앙고백과 함께 기독교의 헬라화의 한 현상으로 보았다. 그런에 앞애서 말한바와 같이 헬라 사상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상이 흔치 않다. 그래서 이것은 배경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또 하나 관찰해 보아야 할 현상은 바울 서신에 있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칭호가 주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어떤 편지냐면 유대교와 논쟁을 담은 편지이다. 반면에 헬라 사상과 논쟁을 담은 편지인 고린도 서신들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만큼 그렇게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유대교와의 논쟁에 있어서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사상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상이 헬라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고린도전,후서에 더 훨씬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유대교와 논쟁할 대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상이 헬라교에서 나왔다면 유대인과 싸우면서 예수가 자꾸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면 그것이 훌륭한 논쟁이 되겠는가? 유대교 쪽에서 그러니까 틀렸다고 그럴 것이다(헬라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반면에 고린도서에 있어서는 너희들의 옛종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있고 그러는데 그런게 다 아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고린도서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그런데 비교적 드물다). 또 복음서도 마찬가지이다. 헬라적 성격을 더 많이 띤 누가복음 보다는 유대교적 성격을 더 많이 띤 마태복음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가 더 많이 나온다. 이것은 무슨 가능성을 제시해주냐면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칭호가 헬라 배경보다 유대교와 관계있다는 가설을 가능케 한다.
2)구약의 배경
그래서 구약과 유대교를 살펴봄으로서 거기에 배경이 이루어졌나를 본다. 구약에 있어서는 세가지 종류의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부여된다.
첫째는 천사들
천사들은 하나님의 하늘에 있어서 궁정의 신하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운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인간의 딸들과 결혼해서 이상한 존재들을 낳게 되었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집합명사로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개별화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언약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노릇해주고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의존해서 살 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 수 있는 그런 관계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살 수 있는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 아버지의 자원으로 상속받아 사는 아들의 관계로 비유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 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구절은 출4:22-23 ‘이스라엘이 나의 첫 아들(맏아들)이다’
세번째 이스라엘의 왕에게 특별한 관계에 있는 왕으로 나타나는데 왕은 두 가지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과 같다. 하나는 하나님 대신에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들이고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들인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나 인간편에서 보나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런데 왕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고대문화나 종교에서나 어디에나 다 있던 사상이다. 우리 한국에도 단군 신화가 그런 것이다 중국의 천자사상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천황사상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고대 근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애굽에서도 왕을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그랬고 바벨로니아에서도 왕을 ‘신의 아들’.
이것은 통치권의 정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에서는 왕이 신의 아들이다 했을 때는 일본인들과 비슷하게 진짜로 육신적으로 신에게서 탄생된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바벨로니아에서는 육신적인 생성보다는 하나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림으로 보았는데 구약에 있어서는 왕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함은 바벨론 사상과 비슷하다. 우리 단군 신화도 애굽쪽에 가깝다. 신의 육신적인 후사로 나타나 있다.
왕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함에 있어서 특별히 유의해야 할 것은 이른바 나단의 예언(삼하7:12-16)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늙은 다윗에게 보내 가지고 성전을 지을려고 애썼던 다윗에게 너는 성전 짓지 말라고 하면서 이와같은 약속을 준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나단의 약속,나단의 신탁’이라고 한다. 그 내용인 즉 ‘다윗의 수가 다하면 (그의 생명이 다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다윗의 아들 하나를 택해서 다윗의 왕위에 앉힌다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다윗 가문을 세우겠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 아들로 만들겠다(나의 아들로).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을 짓게 하겠다’는 약속을 준 것이다. 즉 나단의 신탁은 다윗왕조를 세우는 것이다. 다윗이 이제 사울을 쓰러뜨리고 왕이 된 것인데 그 다음부터는 다윗 가문에서 왕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다윗의 씨로서 다윗의 왕위를 잇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택하여서 왕으로 세운 합법적인 정통성있는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를 나의 아들 만들겠다. 왜냐하면 왕이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로하여금 나를 위해서 성전(집)을 짓도록 하겠다. 그래서 이것이 다윗 왕조를 세우는 형식이다. 보는바와 같이 다윗의 씨가 곧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이다.
나단의 신탁은 솔로몬에 의해서 일단 성취가 되었으나 구약의 여러 곳에서 누차 재해석이 되어가지고 메시야적으로 재해석이 된다. 시89:4f,27f/대상 17:13/22:20/28:6/사9:5 등등 예레미야서 등에서 이 신탁이 메시야적으로 재해석이 되어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왕위를 재건할 사람에 대한 기대의 근본으로 사용된다. 특히 슥4:6-10/6:12-13 까지를 보면 바빌로니아에서 포로로 잡혀 갔다고 되돌아 오는 유대인들 가운데 그 지도자가 다윗 가문의 마지막 왕자였던 스룹바벨이었다.
그래서 고레스다 유대인들을 바빌로니아에서 팔레스틴으로 귀환하여 새롭게 나라를 세우도록 허락하므로 유대인들은 다윗 가문의 마지막 왕자인 스룹바벨이 다윗 왕조를 재건해서 왕이 되어가지고 하나님 아들로서 다윗 왕조의 태평성대를 다시 열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주심으로 메시야 사상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스룹바벨이 바로 바빌로니아에서 돌아오는 사람들과 더불어 성전 짓는 일을 했다. 그러니까 나단의 예언이 다윗의 아들(씨)이 성전을 짓는다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다윗 왕조가 재건되는 줄로 알았다. 다윗의 시 스룹바벨이 다윗을 왕위에 앉고 하나님 아들로서 선포되고 성전을 짓고 하면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망했던 유다 왕조가 다시 독립국가가 되느구나 하는 등이ㅡ 메시야 사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단의 신탁은 구약과 유대교에 있어서 다윗의 아들, 왕,메시야 사상에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
또 시2편과 110편을 보면 나단의 신탁에 의거해서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를 잇는 대관식의 의식이 행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는 자로 하나님 아들로 선포한다. 그래서 가령 시 2:7에 보면 “내가 오늘 너를 낳아싿”고 한다.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는 자로 유다의 왕을,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로서 자기 백성을 합법적으로 정통성을 가지고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세례 때 바로 이 말이 울려퍼졌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나단이 신탁에 근거하고 있다. 다웃의 아들로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는 자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로 낳은것으로 선언한다. 시 110편도 마찬가지이다. ‘내 우편에 앉으라’ 하나님 우편에 등극하는 것이다.
3)유대교의 배경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의 구약적 사용방법이 유대교에서도 계속되나 천사들을 하나님이 아들로 부르는 경향이 조금 약화된다. 그러나 계속한다. 가령 philo의 글 같은데 보면 계속 나온다. 그런데 유대교에 있어서 두가지의 중요한 전승사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또는 이 세상 사이의 중개자에 대한 사상이 발달하고 신 개념에 있어서 이른바 binitarianism(이위 일체론)적인 신 개념이 발전하고 그것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신격화의 전통이 발달한다. 그것이 두가지 갈래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지혜문서 그리고 또 하나는 문시 문서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에디오피아 에녹서 같은데는 묵시문서라로도 할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또 지혜문서적인 요소가 많다. 항상 딱 뗄수가 있는게 아니다.
①지혜문서
지혜문서에 보면 하나님의 한 속성이라고 볼 수 있는 지혜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하나의 물체와 같은 주체성을 띄게 된다. 이런 것을 hypostatized(헬라말로 견고한 것)했다고 한다.
이렇게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형체와 시공을 차지하지 않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시공을 차지하는 지혜를 물체화 한다. 그리고 인격화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 하나의 인격체로 상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이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제일 먼저 창조된 하나님이 자려로 사실은 하나님이 딸로 인식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있어서 일군(agent) 노릇함으로 상상이 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자기의 팔 즉 지혜를 일군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지혜의 발자국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질서가 있고 조화가 있고 합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들에게 계시하는데 지혜를 통해서 계시한다고 한다.
지혜가 인간들이 머리 속에 들어가서 인간들로 하여금 이성을 갖게 해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한다. 하나님을 인식하게 한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 수단으로 본다. 또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는데 지혜를 통해서 한다. 인간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뜻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해서 구원을 받도록 한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일군 노릇한 것으로 상상한다. 이런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알렉산드리아에서 주전 160년쯤 쓰여짐-에서 9장 4절 10절에 보면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어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다.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가지고 시온에 내려온다.
시락서 24:1-12 “하나님의 지혜가 어디에 정착을 할꼬” 하고 방황했다가 가장 열려진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내려오신다.(시온) 그래서 모세 율법에 담긴다.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지혜를 담은 것이다. 그래서 모세 율법과 하나님의 지혜가 동일시 된다(시락서 24장). 왜 그러냐면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알고 유대인들이 모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다.
그리고 모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계시와 구원의 수단인 지혜가 모세 율법에 담겨 있다. 그래서 모세 율법을 지혜를 담는 그릇으로 보고 율법과 지혜를 하나로 본 것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일군이다 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이 딸이라고 불리운다. 가령 philo는 그의 여러책에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그런다. 잠언 8:30에도 딸이라고 나온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라고 나오는데 특별히 선재하는 딸이다. 이 말은 태초(우주가 창조되기 전에)에 이미 존재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는다는 말이다. 왜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딸이라고 하느냐면 지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חמקה(호크마)도 그렇고 헬라어의 σοφια도 다 여성 명사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여성명사를 차마 아들이라고 못해서 딸이라고 그런 것이다. 반면에 지혜와 거의 동의어인 λογος는 남성 명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말씀,하나님의 지혜라고 한다.
λογος도 선재하고 하나님 아들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다. 보냄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일군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므로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사(εικων) 이라 한다. 지혜가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래서 지혜를 보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이말은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지혜 신학이 발달을 한다. 그런데 지혜신학의 발달은 동시에 하나님의 초월 사상의 발달과 더불어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님이 초월해서 하나님 위에 계신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직접 이 세상을 빚으시고 이 세상에 자기를 계시하시고 이 세상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우리를 구원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시고 이 세상에 자기를 계시하시고 이 세상의 역사를 다스리셔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사실인데 그것을 그냥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 사상이 약해지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는 즉 하나님은 내재하신 것만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초월해야 한다. 초월해야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보다 더 커야(초월)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주가 비슷하거나 똑같으면 어떻게 고장난 우주를 고치느냐 하고 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주를 고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말하려면 하나님이 초월하시고 해야 한다.
즉 초월이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저 하늘위에 꼭대기 혼자 앉아 초월하기만 하면 구원이 일어나는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동시에 내재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분이 초월하셔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분이 또 우주속에 관심을 갖고 역사에 개입하시고 내재하시는 분이어야 구원이 실제로 일어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동시에 강조된다. 그래서 이것-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펴현할려고 하는 언어 수단이 바로 지혜신학(지혜사상)이다. 하나님이 초월하시기 때문에 우주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초월하신 분이 어떻게 세상에 오시고 세상 역사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직접 구원하시냐면 그의 딸 즉 지혜를 통해서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기 우해서 지혜 사상이 발전했다. 이것이 하나의 언어 수단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언어로 말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신학언어를 대할때마다 말하려는 의미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나를 헤아려야 한다. 말하려는 의도(aussageabsicht)를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지혜가 초월 하나님과 이 세상과의 중보자로 상정이 되어 있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세상과 역사 속에 내재하심을 천명하고자 하는 하나의 신학언어적 수단으로 지혜사상이 발달하였다.
②묵시문서
묵시문서에 있어서는 앞에 말한 바와 같이 binitarianism(이위일체론)과 이스라엘의 신격화 사상(apotueosis of Israel)이 발달하는데 이것에 대한 context는 하나님의 출현에 대한 vision에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출현을 보는 theophany-vision tradition에서 나타난다. 에스겔 1:26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םדא תומד הא רמכ)으로 전차(הבכרמ)-불이 활활 타오르는 전차-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여 있고 거기에 하나님 나타나는데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에스겔이 보니까 사람과 비슷한 겉모양으로 나타났다. םדא תימד הארכ은 창1:26을 뒤집은 말이다. 거기에 תומד המלצב으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과 비슷함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그러니까 창 1:26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비슷한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겔 1:26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비슷함과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유명한 구약학자 G.Von Rad라든가 또는 jwmes Barr같은 사람들은 모세오경의 문서설을 받으들이는 사람들에 의하면 창1:26은 소위‘제사장 문서(P)'라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들은 창1:26의 그 위대한 신학적인 천명-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은 제사장 전통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보는 전통에서 나왔다고 그런다. 대개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성전에 나타난다. 왜 그러냐면 이 땅위에 하나님이 거처지가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성소에 하나님의 어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기에 앉아 계신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도 이사야 6장에 성전에서 하나님을 보는 장면이나온다. 그래서 제사장 출신인 이사야나 에스겔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날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나타나서 스스로 계시할 때 인간과 비슷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거기가 받은계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형상에 있어서의 비슷함이다. 이처럼 겔 1:26에 쓰이는데 겔1:28쯤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과 비슷하게 나타났다고 하는데서 발전을 해가지고 하나님의 영광(הוהי דובכ)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가지고 에스셀을 쭉 읽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실체를 갖게 되는 인상을 받는다. 앞의 하나님의 지혜와 실체를 같는다. 하나님이 지혜와 같이 즉 hypostatized그런다. 그리고 인격화되고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고 시공을 차지하고 인격화되는 하나의 실체로 상상이 된다고 그랬는데 마찬가지로 에스겔내에서 하나님 영광이 하나님을 드러내는-하나님을 계시-하나님 대신 보여주는 실체로 나타난다. 그래서 보통 하나님의 영광을 빛으로 선지자들에 의해서 체험된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도 하나님의 빛이 내리 쬐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래서 예스겔에서 영광이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실체로 상상이 된다.
단7:9-14 이 본문은 다니엘이 환상을 보는 것이다. 처음에 흉안한 제 짐승이 차례로 일어나서 서로를 잡아 먹고 하나님 백성을 짓밟는 것이 나타난다. 이 네 짐승들을 네 이방 왕조를 나타낸다. 9절에 보면 “왕좌-우리말에는 단수 복수가 없는데 여기에서는 복수이다-들이 놓이고 그 왕좌위에 백발이 성성한 옛적부터 계신이가 나타난다.” 하나님이 아주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책이 펴지고 즉 대 심판이 벌어진다. 그래가지고 하나님 백성을 짓밟는 흉악 무도한 자가 불에 태워죽는 대 심판이 벌어지고 하는 내용이 9절에서 12절까지의 내용이다. 13절에 “또 내가 보니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옛적부터 계신이에게 나아간다.” 그래서 14절에 보면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았다. 즉 왕권을 받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를 받았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 우편에 왕으로 등극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았다. 단7:9이하도 에스겔서 1장과 마찬가지로 theophany이다. 그런데 단 7:9이하는 신적인 존재가 둘이다. 옛적부터 계신이하고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다.
에스겔서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같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이 어덯게 분리되기 시작하냐면 하나님 영광이 사람과 같이 나타났다. 그런데 다니엘 7장에서는 하나님이 마치 백발이 성성한 노일같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또 한사람-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셈족 언어의 숙어로서 그냥 한 사람이라는 소리-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셈족 언어의 숙어로서 그냥 한 사람이라는 소리-과 같은 형상을 한 또 하나의 존재가 구름을 타고-구약에서는 구름타고 오는 것은 theophany 현상에서만 나타남-왔다.
그러니까 두번째 신적인 존재인데 이 존재가 사람과 같은 형상을 한 것처럼 생겼다. 그가 하나님게 나아가서 왕좌들이 놓인 그곳에서 하나님의 권세를 위임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신 행사하는 자로 등극하는 장면이다. 그러면 노인같은 하나님과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의 관계를 구약적인 언어로는 부자-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이처럼 다니엘서 7장에서 제2의 신적인 존재,theophany 현상에 하나님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행사하는 제2의 신적인 존재가 상정이 되었다.
그런데 다니엘서 7장과 에스겔서 1장을 언어적으로 자세히 분석해 보면 아주 유사점이 많다. 여기서 전승사적으로 발전했다고 본다. 그래서 곧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에 상응한다. 이것이 발달한 모습이다. 전승사의 좀 더 발달한 모습은 랍비문서 중 바빌로니아판 탈무드 Hagiga라는 문서가 있다. 가령 b(Bt)__Hagiga,b__Shab,j__hagiga 이런 말이 나오는데 앞에 b 약자가 나오면 b 약자는 바빌로니아판 탈무이라는 말이다. 바빌로니아판 탈무에 shab라는 책자,Hagaga라는 책자이고 j는 예루살렘 Hagiga라고 한다. 탈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예루살렘 탈무드와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있다. 바빌로니아 탈무드가 조금 길다. 예루살렘판 탄무드를 또 팔레스틴판 탄무드라고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P라고도 쓰기도 하고 PT라고도 한다. 바빌로니아 탈무드도 때로는 Bt라고도 한다. 하여간 바빌로니아 탈무드 Hagiga라는 책 15장에 보면 AD2세기 초에 당시유명한 랍비 세사람-아키바,엘라이자 벤 아브야-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세 랍비가 하늘에 가서 궁정의 여러곳을 구경하고 관광을 하다가 제일 마지막에 제일 높은 하늘에 하나님의 어좌가 있는 곳에까지 갔다. 가서 숨죽이고 있는데 엘라이자 벤 아브야가 “하늘에 두분이 계시는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것을 소위 ben abuya 의 Two Powers(두 이단) 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 한 힘(Power)-하나님에 대한 호칭-만이 있다.
유대교는 전통적으로 아주 극단적인 절대 유일신론이다. 그런데 하늘에 두분이 계신다고 부르짖은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이단이라고 파문이 되었다. 즉 유일신론을 부정했다. 그런데 또 어떤 문서가 있냐면 제3 에녹서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은 Beb Enoch 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어로 보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AD 4 세기 이후에야 글로 완성이 되어 쓰여진 책이다. 그 전승은 상당히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본다. 거기에 “Metatron” 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는데 제 3에녹은 주로 신비문서이다. 그래서 주로 하늘의 궁정에 관한 것이다. 또 하나님 나타남에 보는 것에 관한 것이다. Hagiga도 마차가지이다.
그런데 거기에 Metatron 이라는 존재가 나타나는데 Metatron이 누구냐면 야웨 어좌 뒤에 앉는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군 노릇을 한다. 그래서 Metatron을 소야웨라고 부른다.
tron은 헬라어의 θρονος 로서 영어로는 throne(왕좌)라는말이다. 하나님의 어좌 뒤에 앉는 자이다.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일군으로 하나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소야웨라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출현을 보고 세계를 보는 묵시문학에서 두번째 신적인 존재의 전승이 점차 발달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스겔 1장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니엘 7장으로 또 앞의 Hagiga 이야기로 제 3에녹서에 있어서 Metatron으로 점차 발달한다. 이런 현상을 묵시문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출현의 vision전승에서 하나님이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와 나타나는 즉 하나님이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 일군 노릇하는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와 같이 나타남의 전승을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이위일체론의 발달이라고 한다. 이때에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분신과 같이 나타나는 두번째의 존재가 하나님 아들이다. 즉 하나님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이다. 이런 전승이 발달을 한다.
그런데 이것도 지혜신하고가 마찬가지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함을 천명하고자 하는 언어 수단이다. 그렇게 중요한 것은 단7:9-28가지 보면 특히 13-14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 우편의 왕좌에 등극해서 하나님의 왕권(하나님 나라)을 받아서 통치하는 것을 본 것이 다니엘의 환상이다. 그래서 단 7:15부터 읽어가면 다니엘이 이것이 무슨 뜻인가 걱정한다. 그러니까 18,22,28절에 보면 천사가 와서 해석을 해준다. 뭐라고 해석해 주냐면 이 환상은 “종말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고 해석을 해준다. 단 7:13-14은 vision이고 단 7:18f은 해석이다. 곧 마지막까지 남는 종말의 하나님의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됨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다니엘의 환상 가운데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다. 구원의 계획은 이런 vision으로 계시되었는데 그 뜻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종말에 대한 구원의 계획으로서 다니엘에게 계시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앞에서 말한 것 같이 Apothiosis of Israel 이라고 한다. 즉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왕권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래서 신과 같이된다. 즉 인간이 신이 된다는 것이다. 곧 종말에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왕권을 받고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출 4:22f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하나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해서 사는 자들이다. 아들일고 한 말의 가장 기본의미는 ‘상속자’라는 말이다. 아들이 나타내는 그림의 가치는 상속자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의미이다. 하나니의 부요함을 상속받아 사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성을-영혼을,지혜를,능력을 -상속받아 사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이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숙명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현실은지금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영원,지혜,능력,사랑-속에 살기는 커녕 계속 외세에 짓밟히는 상황읻.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제이다.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은 “지금 현재는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하는 이방 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지만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숙명을 궁극적으로 달성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들됨이 실제로 나타나게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받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 Apotheosis 라고 한다. 이것이 묵시문학에서 구원의 궁극적인 모습니다. 묵시문학에서는 구원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됨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성 안에 있는 한 이것은 구원이 아니다. 인간의 한계성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됨이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에게로 올림-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가 점차 이렇게 묵시문학에서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일군 노릇하는 자로 쓰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종말에 있어서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전승의 선상에서 창 28;12에 나오는 야곱의 벧엘에서의 꿈 이야기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이 흥미롭다. 창 28:12에 나오는 야곱의 벧엘에서 꿈 이야기는 유대 랍비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야곱에 벧엘에서 잠자다가 꿈에 하늘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자기 몸에 내려와 가지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낟. 이것에 대한 랍비들의 주석이 아주 황당무게하다. 이 이야기는 여러 랍비책에 다 나온다. 구약의 아람어판인 탈굼-네오피트,후드 죠나판,옹겔로스-의 모든 판에 장황하게 설명되어 나온다. 내용을 살펴보면 야곱이 에서한테 쫓겨 가지고 아비집을 떠나서 지금 어머니 고향으로 도망가는 중에 벧엘에서 잡을 자게 되었다. 그런데 아비집을 떠날 때부터 천사들이 야곱을 호위한다. 그러다가 벧엘에서 잠이 들엇다.
그러니까 야곱을 호위했던 천사들이 야곱을 쳐다보고는 사다리를 하늘에 놓고는 빨리 올라가서 하늘에 있는 자기 동료 천사들에게 “야 너희들 야곱을 볼려면 빨리 내로오라”고 했다. 왜 그러냐면 하늘에 가장 높은 곳-하나님 어좌-에 야곱의 형상(본상)이 앉아 있기 때문이다. 땅에 있는 야곱은 모조품이다. 그런데 야곱이 어떤 판에는 하나님 어좌에 앉이 있다고도 하고 어떤 판은 하나님 어좌에 야곱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하도 거룩해가지고 천사들이 감히 못쳐다보게 하나님께서 만들었다. 그래서 부복하고 천사들이 하나님 어좌에 앉아있는 야곱이 어떻게 생겼나하고 아주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마침 동료 천사중 야곱을 호위하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야곱이 걸어다닐 때는 차마 못 쳐다보고 야곱이 잠잘 때 얼른 훔쳐보고 궁금증이 풀리니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너희들 하나님 어좌에 앉아 있는 야곱의 형상을 볼려면 빨리 내려와서 지금 잠자고 있는 야곱을 보면 안다고 하는 내용이다’
야곱의 꿈 이야기를 랍비들이 이렇게 주석했다. 이것이 바로 요1:51에 나오는 말이다. 거기에서 예수는 나다나엘에게 약속을 하다. 네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말씀에 있어서는 야곱을 인자로 대처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예수께서 자기를 통하여 이 이야기가 성취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무슨 뜻이냐? 앞의 다니엘 이야기와 똑같다.
야곱은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는 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 세상에 속하고 하나님 어좌에 높인임받는 것이 그의 숙명이다. 하나님 어좌에 높임받아서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숙명이다.
그런데 야곱의 지상에서 실제는 에서에게 열심히 쫓기는 존재이다. 야곱은 이스라엘인데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야곱에 함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이 지금 이방 민족에게 짓밟히는 상황이 그의 조상 야곱이 쫓기는 상황과 똑같은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스라엘-의 진정한 숙명은 하나님 우편에 앉았다. 하나님 어좌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영광에 부요함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랍비들의 창 28:12-야곱의 벧엘의 꿈에 대한 주석-은 이스라엘의 숙명에 대한 식학적인 표현이다. 동시에 자기 민족에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한 소망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 어좌에 높임받아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았다.
신적인 존재들이 되나. 이것을 예수께서 요 1:51에서 바로 이것이 자기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야곱-이스라엘-이 그 사람의 아들과 대치된다. 단 7장에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symbols이라고 한다. (단7:14-18 이하에서).단 7:13-14의 성취로 오신 예수가 인자로서 또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 조상으로서 옛야곱-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은 불신앙으로 끝난다. 그런데 예수가 다니엘서에 예언된 ‘그 사람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음,하나님 나라를 받음의 역사를 이룬다’ 하는 것이 나다나엘에게 주는 약속이다.
나다나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주는 예수의 약속이다. 지금까지 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 아들에 관한 전승사적 발달을 보았는데 하나는 지혜문서에 있어서의 지혜신학의 발달-하나님 아들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딸-과 또 하나는 묵시문학에 있어서의 이위일체론적인 발ㄷ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의 대표로서의 신적인 존재가 하나님 어좌에 등극함.
그래서 종말에 하나님 백성에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과 같이 됨. 즉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예해서 곧 하나님 왕권을 받아서 하나님과 같이 됨이라는 종말에 구원의 소망을 본 것이다. 이런 것이 신약에 있어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된다는 믿음이 배경이다.
예수가 하나님 앋르이라는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된다-입양 양자-는 구원론과 직결된다는 것이 바로 지금까지 배경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바울신학 제14강
지난 시간 줄거리
유대교에서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로 실체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 묵시문학에서 소위 이위일체론적 신 개념을 살펴보았다.
묵시문학에서의 이러한 신학적인 발전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자 개념이 발달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하는 소위 Apotheosis에 대한 관심-이스라엘이 궁극적인 구원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아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됨에 있음을 나타내는 신학적인 발달이라고 하는데까지 했었다.
③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엘인들
유대교에 있어서 또 하나이 발달은 모든 이스라엘이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 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엘인들과 언약을 지키지 않는 패역한 이스라엘인들을 구분하고 전자-언약을 지키는 신실한 이스라일인들에게-에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제한한다.
이런 경향이 유대교에서 점차 발달을 한다.
그래서 가령 지헤문서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언약에 신실하도록 -언약에 신실한 것이 어덯게 표현되냐면 율법을 잘 지키므로 표현됨-곧 율법을 잘 지키도록 깨우침을 받는 자들을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이 곧 의로운 자들이고 그리고 이들이 하나님이 아들이다.
지혜로운 자들=의로운 자들=하나님의 아들
가령 외경중에 ‘Jesus ben Sirach보통 이것을 Sir이라고 약자로 쓴다. 또는 이 책을 Ecklesiasticus 라고도 한다. 이것의 약자는 Ecclus이다. 왜냐하면 이것과 비슷한 책이 있는데 Ecclesiastes가 있다. 이것은 우리 성경의 전도서이다. 이것의 약자는 Ecles이다. 그러기 때문에 혼동하기 쉽다.
’는 책이 있다. Sirach은 원래 사두개 출신 서기관이었다. BC 2세기(190년경)에 쓰여진 서기관 작품인데 이 Jesus ben Sirach의 손자가 그의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쓴 책이다. 이것이 지혜서로 분류된다. 이것은 외경중의 하나이다.
Jesus ben Sirach 책 4장 10절 또는 ‘wisdom of Solomon’ 라는 책이 있다. 이 책 2:18/5:5 등에 지혜에 의해서 언약에 신실하고 율법을 잘 지키도록 깨우침을 받은자들을 지혜로운 자들,의로운 자들이라고 하고 이들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칭호를 받고 주의 종들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솔로몬의 지혜 2:13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묵시문학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가령 단 7장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종말로 받는다. 곧 인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의 대표로 나온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는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고 끝까지 하나님의 언약과 율법에 충실한 자들이다. 이들이 하나님 우편이 높임 받아서 인자의 하나님 아들됨에 참예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유대 신학자 philo의 작품 중에 ‘congi Ling’ 라는 책이 있는데 이것이 ‘언어의 혼돈’이라는 책이다. 이 책 46장에 의하면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그는 맏아들인 λογος의 품안에 안겨야 할 것이다. 이 λογος는 하나님의 첫 아들로서 천사들 중에 제일 우두머리-그러기 때문에 천사장-이고 그의 이름들 중 시작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말씀이기도 하고 그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기도 하고 또는 보는자 곧 이스라엘이기도 하다.’ 아주 중요한 text이다.
λογος=맏아들=시작=하나님의 이름(말씀)=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스라엘
중요한 것은 λογος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 누구인가? 아담이다. 그래서 바울의 아담 기독론을 논할 때 항상 인용되는 말이 philo의 'confi Ling' 46장이다. philo도 벌써 아담 시작이 있었다는 식으로 해서 이런 것이 아주 중요한 text dlek.
여기에서 관심은 λογος가 하나님의 맏아들인데 시작이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축4:22-23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다름 아닌 λογος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필로가 유대인들에게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 중에 아직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들은 λογος의 품에 안겨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됨을 얻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적인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림받을 만한 자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림받은 자들은 λογος의 를 받은 자들이다. 곧 지혜 문서의 지혜를 가리킨다. 지혜문서에서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지혜의 근본이 잠언에 의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다.
이 말은 언약을 지킨다는 소리이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하나님 됨을 인정하고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왜 이것이 지혜로운 일인가? 천지를 지으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힘에 덕입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있겠는가? 지혜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성공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곧 야웨의 올바른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다. philo에 있어서 λογος는 지혜와 거의 상호교환할 만한 개념이다. 앞의 지혜 문서-Sir이나 Wis,Sol-에서는 “지혜를 받아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하나님 아들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philo는 우리에게 λογος를 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됨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또 유대 후에 신비문서들에서는 이적을 행하는 자들이나,또는 환상가운데 하나님을 보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유대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나단의 전승이 계속 유지된다. 삼하7:12-14의 나단의 신탁의 전승이 유대교에서도 계속 유지된다. 그래서 메시야의 하나님 아들됨이 특별한 의미로 계속 천명이 된다. 그래서 가령 쿨란에서 발견되 조그마한 문서 하나가 있다. 그 문서는 4Q Florilogium 이라는 것인데 이 조그마한 문서는 구약의 여러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text들을 가령 삼하 7:12-14의 text와 시편 2:7-예수의 세례 때 울림과 시편110:1-신약성경 중 가장 많이 인용된 ‘주께서 내 주께 말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 승천 받음을 이 시의 성취로 본다. 또 기타 몇 곳에 구약을 상호 연관시켜서 종말에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문서가 4Q Florilogium 이다. 그런데 여기 -삼하7:12-14-에서 바로 이 text가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종말에 일으켜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우시의 집을 견고하게 짓는다. 곧 다윗 왕조를 견고하게 재건한다는 것이다. 나단의 예언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구야에 있어서 중요한 메시야 사상의 뿌리라고 했는데 그것이 쿰란 공동체에서 아주 생생하게 전승이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메시야-다윗의 아들-가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IQS의 2장 11절 이하 또 하나 중요한 text가 4Q ps DanAa4Q ps DanAa
ps:Pseudo의 약자이다. 뜻은 의사이다.
다니엘서의 내용같지 않나 하는 문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4번째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문서인데 PS는 문서의 성격을 말한다. 즉 다니엘서의 한 조각과 비슷하다는 소리이다. 가령 4QpHab라고 쓰는 문서가 있다. 하박국에 대한 해석서라는 소리이다.

라는 괴상한 부호가 달린 문서인데 이것은 4Q 243 이라고도 한다. 이 문서-text가 4Q ps DanAa가 상당히 재미있는데 이 문서에서 단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구름을 타고 오는 인자 같은 이-가 지극히 높으신 이-하나님의 성도들,종말의 성도들의 예표-의 성도들이 그들의 대표인 하나님 아들로서 한 사람의 같이 나타나는 이를 통해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 단 7장의 예언을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text가 4Q ps DanAa로 해석한다.
단7장⇒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ꠏꠈ하나님 나라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ꠏꠎ
그래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덕을 보게 하는 분이 바로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석해 놓고 있다.
그래서 최근가지도 가령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은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을 가진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처음으로 한 신앙고백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게 이상한 것은 구약에서 분며히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로 지칭하는데 어째서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지 않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드디어 이와 같은 쿰란 문서들에서 메시야를 하나님이 아들로 지칭하는 예가 최근에 발견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 나단의 신탁의 해석상에서 메시야,다윗의 아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더 이상 유대교에서는 메시야를 하나님 아들로 지칭하는 전통이 없었다고 쿨란문서가 발견도니 이후로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쿰란 문서들이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할 때 그것을 나단의 신탁에 근거한다. 그래서 가령 마14:61에 예수의 재판때에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묻는다. ‘네가 메시야 곧 복받으실 이-하나님의 아들-의 아들이냐’고 묻는다.
지금까지 많은 비평가들은 이 말은 전적으로 역사상이 없다고 보았다.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는 예가 유대 전승에서 발견이 안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네가 곧 메시야 복받으실 이의 아들이냐’로 묻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나주에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이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왜? 팔레스틴 유대문서에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하는 증거가 나온다. 그런데 메시야를 하나님이 아들로 지칭하는 것도 다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하는데 바로 예수의 재판 때에 대 제ㅏ장의 질문도 나단의 신탁에 의거해서 질문한 것이다.
(총괄)
헬라 문서와 구약과 유대교에 있어서의 여러가지 하나님 아들에 대한 배경을살펴 보았다. 한편 헬라 문서에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이 우리 기대와는 별로 아나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구약과 유대문서에는 하나님 아들이 중요한 개념이다. 그래서 신약에 있어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전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에서 그 배경을 찾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예수와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인식하고 혹 그렇게 지칭하셨나? 지금까지 배경을 했고 지금은 예수와 하나님 아들을 하겠다. 여기서는 이른바 간접적 증거에서 간접 기독론을 살펴 보겠다. 예수가 진짜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고 불렀나를 볼려면 방법론적으로 간접 기독론을 통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보통 신약신학 1에서 자세히 다룬다. 예수의 자기 이해-예숙께서 자기를 뭘로 보았느냐? 어떻게 인식했느냐? 자기를 어떻게 계시하셨느냐?를 따져보는데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두세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간접 기독론 또 하나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 선포했는데 그 하나님 나라 선포에 반영된 자기 이해가 무엇이었난? 자기가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았느냐? 하나님 나라 선포한 권위가 어떤 성질의 것이고 무엇이라 보았느냐? 또 하나는 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 또는 인자-를 불렀는데 이게 무슨 뜻이냐? 주로 세가지 방버븡로 지금까지 많이 써왔다. 예수의 자기 이해를 예수 스스로가 뭘로 보았느냐? 그래서 신약신학1-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는 이런 것을 자세히 다룬다.
1)간접기독론
간접기독론을 하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우리 공관복음-요한복음 제외-에 예수께서 당싱 유행하던 메시야적 칭호들을 꺼린다(적용을 잘 안하신다). 남들이 예수에게 당시 유행하던 칭호-가령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하나님의 아들,메시야-들로 예수께 신앙고백하면 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기는 하나 스스로는 이런 칭호들을 적용안하신다. 스스로는 항상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메시야적 칭호들을 배제한다. 둘째로(더 중요한 이유) 비판학자들이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 이후 그의 추종자들-그리스도인들-이 비로소 예수를 베시야로 인식하고 예수의 메시야됨을 당시 유행하던 유대교적 칭호와 나중에 헬라 종교들이 신에 대한 칭호-주,하나님의 아들-등으로 예수에게 신앙고백을 했다.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예수에 의해서 시작된 것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복음서의 저자들이 예수의 입속에 자기가 그리스도됨,또는 하나님의 아들,주됨 등을 가끔 집어 넣었다. 이렇게 회의적으로 주장하므로 이것을 반박하려면 그냥 그렇지 않다고 자꾸 반박하면 토론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칭호들이 일체 안나온 중립적인 자료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우리에게 알려진 유대교나 헬라 세계에서의 메시야나 신에 대한 칭호가 예수에게 전혀 적용되지 않는 얼핏 보기에 예수의 메시야도미괴 아무 관계 없는 중립적인 자료들만 살표봄으로서 이런 자료들이 혹 예수의 어떠한 자기 이해를 독자들에게 보여 주느냐를 살펴보아 가지고 예수께서 스스로 메시야로 인식했나 안했나를 규명하여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이래서 쓰는 방법이 간적기독론이다. 메시야적 칭호들이 직접 나오는 자료는 일단 제쳐놓고 메시야적 칭호들이 안 나오는 자료들을 살펴봄으로 간접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적 자기 이해를 규명하는 방법이다.
I.Howard Marshall의 “The Origins of New Testmet”(신약 기독론의 기원)을 읽오보면 자세히 썼다.
간접기독론에서 다루는 것은
(1)어법꠆ꠏαμεν
ꠌꠏαββα
①αμεν
어법(말버릇) 중에서 αμεν 사용법과 독특한 하나님에 대한 칭호 αββα 이다. I.H. Marshall의 책과 김세윤 교수의 신약신학에서 잘 다루어 놓았다. 이 두마디에 있어서 예수의 어법이아주 독특하다. 그래서 예수삭 이 두 말을 쓴 것이 독특하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이 두말을 번역하지 않고 히브리어로 또는 아람어로 그대로 표기하였다. 그런에 우리 성경에는 다 번역해 놓았다. 가령 αμεν을 진실로 다 번역해 놓았다. 예수께서 “Amen I your 에게” 말한다는 중요한 선언을 할 때 쓴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αμεν을 꼭 우리와 같이 썼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 끝에 또는 하나님의 말씀 선포 끝에 또는 기도 끝에 응답으로 썼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하나님이 말씀 또는 기도 끝에 응답으로 썼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하나님의 말씀, 또는 우리가 기도가 진실하다. 확실하다. 사실이다는 의미로 αμεν하고 응답하는 것이다. αμεν이라는 말은 진실하다 확실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응답용으로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같이 아멘을 사용했다.
그런데 예수는 독특하게 αμεν을 먼저 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고 중요한 말을 선포한 것이다. 아주 독특한 말이고 이렇게 말한 사람이 없다. 예수 전에도 없었고 예수 후에도 없었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도 따라서 하지 않았다. 따라서 안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첫째로 어법이 독특하다. 이 독특한 어법을 쓸때는 아지 이해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어법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는 이 어법과 형식이 비슷한 것과 비교해 보애야 하는데 그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말투(어투)이다. 선지자들 보통 말할 때 “야훼의 말씀이 또는 야훼의 영이 내게 임했다” 그리고는 자기에게 임한 말씀 또는 야훼 영이 자기에게 계시하는 말씀을 선포했다.
αμεν과 선지자들이 선포가 넓게 보면 형식적으로 비슷하다. 중요한 말씀의 선포에 서문을 단 것이다. 그러나 그 낸용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선지자들의 말투의 의도는 자기가 선포하는 말에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 그 권위를 말하고 있는 인간 자기에게서 청중의 관심을 여호와에게 돌림으로서 확보할려고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반면에 예수의 “αμεν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는 서문에 의도는 정반대로 청중의 관심을 자기 자신에게 끄는데 있다. 여호와에게 돌릴 것도 없이 자신의 권위로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선포하는 말에 진리됨, αμεν됨을 보장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가 비교해서 예수가 선지자의 계시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하면 신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선지자는 자신의 신적 권위를 야훼에게 호소했는데 예수는 자기 스스로 진리됨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계시에 있어서의 신적 권위를 은근히 나타낸다. 그래서 H.Schlier-Kittel 사전의 αμεν에 대한 Article을 쓴 사람-라는 사람은 αμεν이란 말 속에 신약기독론이 다 들어 있다고 말한다.
②αββα
예수께서 하나님께 독특하게 αββα라고 부른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출 4:23에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맏아들임” 이것이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말읻.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부자간이 관계라는 것은 언약의 관계를 나타내는 metaphor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됨은 언약신학의 표현으로서 구약에서 아주 중요한 metaphor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유대인-은 하나님을 한번도 αββα라고 부르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피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대칭어-전능하신 이,거룩하신 이,천지를 지으신 이,천지의 주재자,임재하시는 이,영광-를 많이 개발하였다. 특히 기도 언어였는데 하나님을 부를 때에 하나님에 대한 대칭어를 많이 개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αββα라고 부른 예가 일체 없다. 왜 그러냐면 αββα라는 언어가 원래 우리말 “아빠”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의 아비에 대한 부름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귀에는 이 말이 아주 경망스럽게 들린 것이다. 하나님께 감히 함부로 부를 없다는 것이다. 다만 예수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 αββα라는 말이 우리말 “아빠” 보다 확대해서 쓰여졌다. 원래 근원은 똑같다. 그래서 어린 아이만 쓴 것이 아니고 장성한 아들이 늙은 아버지에게도 아빠라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친구나 스승(랍비)에게도 “아빠”라는 말을 쓰기도 하였다. 그때 “아빠”라는 말은 전부 항상 아주 밀접한 친근감으로 쓰였다. 그리고 종경심,의존심,경외심,순종심 등을 묶어서 나타내는 칭호가 αββα라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께서 독특하게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αββα라고 불렀다.
둘째로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αββα로 부르도록 가르쳤다주기도문에 보면 첫 머리말이 αββα이다. 하나님을 αββα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 저런 것 청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말 어순에는 하늘에 계신 으로 시작하나 원래 주기도문에는 αβινυ (우리 아빠)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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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째로 그러나 항상 예수는 자기와 제자들을 구분했다. 자기와 제자들을 통틀어 싸 잡아서 하나님을 예수는 항상 “우리 아빠”하지 않았다. 나의 아빠, 너희들의 아빠로 구분했다. 이와 같은 예수의 아빠 사용의 3가지 관찰점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예수는 스스로를 독특한 하나님의아들로서 그의 제자들-추종자들-에게 하나님 아들됨을 증계해 주는 자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추종자들을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예수의 αββα 가르침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심지어 롬8:15,갈4:6에 헬라말을 쓰느 로마에 그리고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아람어 αββα라는 말을 쓴다. 이것이 중요한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예수로부터 왔기 때문). 에수의 족특한 어법에서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 되게 하고-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부요함을 덕입어 살 수 있는 사람되게 함-하나님을 우리에게 절대로 계시하는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다.
(2)예수께서 용서해 주는 권위 주장(막2:10).
이것은 하나님의 대권자로서의 자기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죄용서는 하나님만 하시는 것인데 예수께서 죄 용서하는 권위를 주장한다. 곧 하나님의 대권자로서 자기 이해를 나타내고 자기가 죄의 용서를 선언한 자들은 곧 하나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언약의 관계 있음을 의도하기 위해서 예수가 항상 회개하고 그를 믿고 따르는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를 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그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됨을 말한다.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항상 잔치로 비유했다. 그 잔치로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고 죄를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들어오라고 초대한 뒤에 그 초대에 응한 자들은 예수께서 항상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래서 그들의 죄가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잔치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부요함에 참예하게 될 것을 극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일련의 죄를 용서해주는 권위를 주장하고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체를 베풀면서 자기가 하나님의 대권자로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되게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아들들 되게하는 것이라는 자기이해를 나타낸다. 그리고 간접 기독론에 다른 요소들인 예수가 모세보다 더 위대한 권위를 주장하고 하는 것은 αββα와 다 연결되지만 이상의 것으로 충분하다.
2)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했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한 뒤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의도가 무엇인가?- 신약신학 1에서 아주 자세히 다룬다-의도는 죄인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초대장 발부를 말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와서 하나님 백성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이 되라는 초대장 발부이다. 또는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해주겠다는 약속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내 백성”이라는 것이 언약의 형식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일단의 사람들을 택하여서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너희 하나님 노릇 해 주겠다”로 약속하는 것이 언약이다. “내가 너희들의 하나님으로서 너희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복주고 구하겠다 즉 너희들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겠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제 나의 백성으로 나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나에게 순종하며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였다. 하나님께 의존하는 대신 우상을 의존하기도 하고 앗수르가 위협하면 애굽에 의존하고 애굽이 위협하면 바벨론에게 의존하는 짓을 하다가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래서 새 언약을 세운 것이다. 새 언약을 세운 것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고 초대하고 또는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곧 그의 대속과 새 언약의 제사에 자기를 받침으로 우리를 실제로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예수이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의 선포는 약속이요, 초대이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약속의 성취이다. 그러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나타나는 결과가 무엇인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 살 수 있는 것이다.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 아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이전된 하나님의 백성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십자가의 죽음은 궁극저긍로 우리를 하나님 백성-하나님의 아들들-되게 함에 목적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되려면? 하나님의 아들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의 상속자 된다는 말이다. 그것을 하나님 나라로서는 하나님이 베푸는 잔치로 비유해서 하나님이 베푸는 부요한 잔치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 다 같은 그림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 줌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나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아들이나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나 다 똑같은 그림이다. 이것을 해주는 것이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하는 구원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나타난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하나님 백성-하나님 아들들-되게 해 주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앞에서 말한 간접 기독론의 αββα라는 기도와 똑같다. αββα 기도에 나타난 예수의 자기 이해는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추종자들을 하나님 아들들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피조물의 제한성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제한성 때문에 우리 인생은 항상 결핍 상태에 있다. 우리 인생의 근본 문제가 결핍이다. 시간이 짧다. 짧은 지혜,조그만 능력,조그만 사랑 등 인간의 근본문제가 결핍성에 있다. 여기서 모든 불안,갈등,두려움 등 모든 인간의 문제가 온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하는 것이 구원이다. 하나님의 무한에 참여해서 얻는 삶을 영생이라고 한다. 우리의 결핍된 부족한 자원들로 이루어지는 것을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죽을 병이 든 거지 같은 삶이다.
그것이 비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전지하심,전능,영원,완전사랑-으로 이루어진 구성된 삶은 완전히 신적인 삶일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구성된 삶이기 때문에 신적인 삶인 것이다. 이런 삶을 성경에서는 영생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 되어서 그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됨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 아들들 되어서 신적인 삶을 살게 될 때에 피조물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Apotheosis라고 한다. 즉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됨인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받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그들의 숙명이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하나님과 같이 됨을 말하다. 그것을 에수가 성취해 준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도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삶 곧 영생에 참여하게 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를 하였다.
의도⇒초대⇒하나님의 백성⇒약속⇒십자가⇒대속,새언약 제사⇒새로운 하나님의 백성⇒결과
3)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인자)
예수께서 자기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에 의도는 무엇이고 그 뜻은 무엇인가를 여기서는 간단히 결론만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단7장에 쓰여 있음-에 대표로서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αββα라고 부르며 그의 사랑과 부요함에 힘입어 살 수 있게 하는 자라는 듯으로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간접 기독론에서 살펴본 바오 같이 예수의 αββα라는 말,예수의 자기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하나님 자녀들-되게 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덕입어서 살 수 있게 하고 그래서 신적인 삶에 참여하게 하는 자라는 것이다.
4)예수에게 있어서 나단의 신탁에 근거한 시험.
예수에게 있어서 나단의 신탁에 근거한 시험이 여러번 왔다. 곧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들되는가 하는 시험이 예수에게 여러번 왔다.
광야에서의 시험이 “네가 하나님이 아들이거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것이 예수의 시험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구문은 막12:35과 그 이하에 쓰여진 메시야의 다윗의 아들됨에 관한 예수의 논쟁이다.
예수께서 당시의 정통 서기관-신학자-들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서기관들은 나단의 신탁-삼하7:12f-에 근거해서 “메시야는 다우시의 아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 110:1을 인요하면서 다윗이 여기에서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한다. 그래서 유대교의 고정된 이해에 의하면 앞선 것이 높다 .그러면 다윗의 아들 보다는 다윗이 앞선다. 그러니까 다윗이 높아야 한다. 그런데 다윗이 시편 110;1에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높인다. 그러니까 분명히 다윗보다 더 높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보다 뒤진게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이게 알쏭달쏭한 말이다. 예수가 나단의 신탁을 부인하는 것인가? 나단의 신탁을 부인해서 그곳에서 유래하는 전통 메시야사상-메시야는 다윗의 아들-을 부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으로는 부족한다는 것인지. 메시야를 기껏해서 다윗의 아들 쯤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다윗의 주라고 예수가 주장할려고 하는 것이다. 이 논쟁에 담긴 예수의 자기 이해가 무엇이냐? 여기서 적어도 한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다윗의 주라는 것이다. 그럴려면 적어도 하나님 아들 쯤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논쟁도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됨을 암시한다. 다윗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는 자로서의 의미로서는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단의 신탁이다.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백성 위에 하나님 대신 전통성으로 가지고 합법성을 가지고 통치하는 자라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가 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의 등극식에 항상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는 것이 있다. 그런데 예수는 지금 이 말에서 그 정도가지고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왕으로서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보다 더 독특한 의미로에 하나님 아들됨을 은근히 주장한다. 다윗의 주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으로서 하나님의 모든 원수들을 평정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들됨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칭호가 나오지 않는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오는 곳이 두세곳이 있다. 이런 자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아들이라는 칭호를 쓰는 자료들)
①마11:25-27
여기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있는데 25절에 αββα라는 말이 나온다. “전지의 주이신 아빠여 내가 당신에게 감사함으로 부르짖습니다” “이것들(ταυτα)을-해석하기 어렵다-지혜 있고 이해한다고 하는 자들에게는 숨기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계시하는 것을 감사합니다” “아빠여 이것이 당신이 기뻐하는 뜻입니다” 해놓고는 자신(예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αββα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나님을 αββα로 부를 수있는 자이기 때문에 독특한 하나님 아들과의 관계로 표현했다. 27절에 “모든 것들이 나의 아버지로부터 나에게 위임되었다” 그러니까 지가(예수)가 하나님을 αββα로 부를 수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전권대사:모든 것이 나에게 위임되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전권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27절에 αββα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했다. 아들 외에는 또 아무도 αββα를 알지 못하는데 여기에 예외가 하나 있다. 아빠에 대한 계시를 받은 자만 아빠라고 말한다.
Q
αββα ꠧꠧꠧꠧꠧꠧꠧꠧꠧꠧꠧꠧꠧꠧꠧꠧꠧꠧꠧꠧꠧꠧꠧꠧꠧꠧ⇒아들
아들 ꠧꠧꠧꠧꠧꠧꠧꠧꠧꠧꠧꠧꠧꠧꠧꠧꠧꠧꠧꠧꠧꠧꠧꠧꠧꠧ⇒αββα

도표에서는 아빠와 아들간이 상호 앎(mutual knowledge)을 말한다. 성경에서 안다는 말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이다. αββα가 아들을 알고 아들은 αββα를 안다. 이것이 배타적인(exclusive)-다른 존재는 모른다. αββα만 아들을 알고 아들만 αββα를 안다.-관계이다. 이들의 아주 독특한 배타적인 상호 앎의 관계-자기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다른 어떤 존재에 의해서도 나누어지지 않는 독특한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그 앎이라는 것은 union(하나됨)-밀접한 관계-이다. 그런데 예외는 아들에 의해서 αββα에게 계시를 받은 자만 αββα라고 한다,. 그런데 아들이 이렇게 αββα를 계시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αββα를 알게 할 수 있는 이유는 27절 전반부-모든 것을 위임 받음-에서 αββα의 전권을 위임-그의 전지전능,완전한 사랑-받았기 때문에 아들이 이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αββα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들-하나님의 전권대사-을 봄으로서 αββα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도 자기가 독특한 관계를 가진 하나님 아들-다른 어떤 존재와도 나눌 수 없는-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라는 자기 이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한동안 E.Norden의 영향을 받은 Bultmann 같은 사람은 눅10:22/마11:27 말을 요한복음적인 자료가 어떻게 해서 공관복음에 떨어진 운석이라고 표현하였다. “요한복음이 하늘에서 공관복음의 땅에 떨어진 운석”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이런 말투는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자주 대하는 말투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에는 전혀 이런 말투가 없다. 여기 -마11:27/눅10:22-만 독특하게 나온다. 그래서 요한복음이 하늘에서 공관복음의 땅에 떨어진 운석이라고 표현하다. 이것은 전적으로 헬라적인 신비주의 곧 상호 앎을 통한 하나됨 사상을 나타내는 헬라적인 신비주의이다. 가령 요한복음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이런 것은 헬라적인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런 말을 했을리가 없다는 식으로 이 말의 진짜성을 부인했다. 이런 사람-Norden,Bultmann-들은 대게 헬라 문서만 조금 알고 유대교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유대 문서들을 진짜 잘 아는 사람-T.W. Manson, J.Jeremias-들은 이말(마11:27/눅10:22)이 완전히 셈족적 성격을 강력히 증거했다 J.Jeremias 신약신학 6장에 보면 자세히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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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eremias에 의하면 예수께서 세례 때에 메시야로 소명받을 때에 계시의 일부가 이것(셈족적인 성격)이다. 그래서 이것의 진짜성을 굉장히 강조했다. 그런데 Jeremias의 토로이 조금 잘못된 것은 이때의 αββα와 아들을 독특한(고정된)의미로 보지 않고 하나의 비유-예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비유로 보았다-보았다. 그래서 a father,a son으로 해서 부정관사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the father,the son 이 아니고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아는 것이다. 여기에 숨어 있는 그림은 고대사회에서 직업전수의 그림이다.
a father---------------- a son
the father the son
가령 요한복음 5장에도 나온다. C.H. Dodd가 잘 지적했듯이 고대 사회에서 직업 전수할 때 아버지가 일생동안 닦은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안가르쳐 준다. 아들에게만 고스란히 전스한다. 그러니까 아버지만 아들을 안다. 아들만 αββα의 전권을 고스란히 위임받아 가지고 αββα의 기술을 전적으로 안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의 직업 전수에 있어서의 관계는 배타적 관계이다. 이것을 예수께서 자기와 하나님과 독특한 그림으로 쓰고 있다고 J.Jeremias는 말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H.Marshall의 중요한 artide이 있다. 이 때 부정관사의 a가 아니고 the son으로 보아어 한다고 H. Marshall은 굉장히 강조ㅎ나다. M.Hengel도 Marshall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런데 Jeremias 책을 읽으면서 이 점을 유의해서 읽어야 한다. 그런데 Jeremias의 발견에 덧붙여서 W.Grim이 마11:25-27까지 또는 30절까지를 아주 의미 깊에 해석한 책을 하나 출판했는데 Grim에 의하면 마11:25-27까지는 단 7:19-23에 근거하고 있고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낸다.
최근에 Jeremias나 Grim의 연구로 이말(a father,a son)이 헬라 세계의 신비주의를 반영하는가짜 예수 말이 아니라 완전히 셈족성격-셈족언어-이 잘 보존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만이 할 수 있는 진짜 예수의 말인 것이 증명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이 말씀(마11:27/눅10:22)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 있는 분으로 하나님을 유일하게 계시할 수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자가 디ㅗ도록 하는 자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을 독특하게 αββα로 부른자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들들되게 하는 독특한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여기서 잘 나태내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아들이라는 말이 직접 쓰인 자료이지만 이 자료는 진짜이다. 그래서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의 자기 이해를 직접 잘 나타낸 자료라고 말할 수 있다.
②막12:6
이 말씀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포도원의 주인으로서 이스라엘 지도자들-포도원 농부-에게 열매를 구하기 위해서 종-선지자-들을 보냈다. 악한 농부들이 주인에게 세금을 안 바치려고 종들을 때려서 보내 버린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낸다. 그러니까 농부들이 멀리서 아들을 보고 “아들이 오는 구나” 저자는 상속자라 저자를 죽이면 포도원이 다 우리 것이다. 이것은 다시 갈릴리에 농업제도의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한 비유이다. 갈릴리의 농장이 많은 경우 이와같이 소작농의 경우였다. 대 지주는 도시-예루살렘-에 살고 가난한 농부들은 소작농을 했는데 가끔 소작농들이 반란을 일으켜 상속자를 죽여 없애면 그 땅이 자기들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주 잘 반영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 자세한 해석이 M.Hengel의 책중에서 농업 제도와 관련된 언급이 있고 또 K.Snodgrass의 좋은 책히 있다. 시카고에서 가르치는 K.Snodgrass의 “The parable of the wicked peasant”라는 좋은 책이 있다. 하여간 비유에서 예수는 은근히 자신을 아들이라고 나타낸다. 그런데 이 아들이 이스라엘 지도자-포도원 농부-들에 의해서 죽음을 당할 것을 나타내고 그러나 곧 예수는 시편 118편을 인용한다. 그래서 건축자들에 의해서 버리진 돌이 건물의 모퉁이 돌이 될 것을 곧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되고 높임받을 것을 예고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비유의 진위서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는 비판학자들도 참 많으나 최근에 M.Hengel 이나 K.Smodgrass등의 연구로 이 비유의 진짜성이 많이 증명이 되었다. 그래서 이 비유도 예수가 굉장히 직접적으로 분명히 자신을 선지자들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고 있다.
③막13:22
여기서 언제 종말이 임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아들도 천사들도 모른다. 단지 아버지만 안다고 한다. 여기서도 내가 하나님 아들이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느 곳에서도 내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지는 안는다. 마11:27/막12:6/막13:32 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을 구 있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론
예수께서 어떻게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는가를 말했다. 다음에는 예수가 어떻게 다른 존재-귀신들,제자들-들에 의해서 하나님 아들로 고백되었는가? 이것에 대해서 예수가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하고 그 다음에는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는가? 하고서 바울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바울신학 제15강
지난 시간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공생애 동안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선포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이제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의 선포를 하겠다.
3.다른 존재들에 의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선포
1)세례때(막1:11,12)
“너는 내가 기뻐하고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이 하늘로부터 퍼졌다. 그런데 예수의 세례와 시험에 대해서 나의 글에서 자세히 언급했다.
여기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이 말은 시편2:7에서 왔고 사42:1과의 혼합 인용이다. 시 2:7은 삼하 7:12-14까지에서 나오는 나단의 신탁에 전승에 의거한 등극시로서 다윗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아들로 선언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전통성 있게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고 사 42:1은 “주의 고난 받은 종의 노래”의 첫 노래의 시작으로서 주의 종의 부르심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심오한 시2:7-나단의 신탁-과 모든 유대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삼하 7:12이하의 전승에 속하는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들인 메시야 사상을 낳은 나단의 신탁의 전승의 일부인 시2:7에서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야됨-다윗의 아들됨-에 대한 자기 이해를 얻었을 것으로 집작할 수 있고 그런데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됨은 사42장 이하에 기록된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메시야적 사명이다. 이렇데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됨은 정치적 전사적 왕으로서 물리적 왕국을 재건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사 42장에서 53장까지 기록된 “주의 고난받은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메시야라는 자기 이해를 얻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2)시험
바로 이 세례 직후에 시험이 나오는데 이 시험은 두 갈래로 전승-마가판,Q판-되었다. 내용은 똑같다. 사단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이해를 시헌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결같이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일 것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왕으로서의 하나님 아들-메시야-이 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권위를 자의적으로 행세하는 메시야가 되든가 이런 식-주의 고난받은 역할이 없는-으로 메시야가 되라는 시험을 하는 것이다.
예수가 시험을 물리쳤다는 소리는 자기가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들로서 메시야인데 그런 메시야로서 무슨 일을 하느냐? 주의 고난받은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라는 원래 세례때에 부르심에 신실함으로 결심하여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친 것으로 되어 있다.
“너는 내가 기뻐하고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시2:7/사42:1
나단의 신탁(삼하7:12) ꠧꠧꠧꠧꠧꠧꠧꠧꠧꠧꠧꠧꠧ시편2:7⇒이사야42:1-53장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메시야)왕
3)베드로의 신앙고백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고백이 막8:29/눅9:20에는 그냥 “당신은 메시야이다. 그리스도라고”만 되어 있는데 마16:16에는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해 놓았다. “당신은 그리스도,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메시야를 하나님 아들로 마16:16에서 해석해 놓은 위에서 나단의 신탁 전승 때문에 그렇다.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들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메시야를 하나님 아들로 부연(해석)해 놓았다. 여기서도 세례 때와 시험때의 경험이 베드로를 통해서 되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축복을 하고 “자신을 어떤 의미로 메시야인가?” “메시야로서 어떤 일을 감당할 것이냐?”를 설명한다. 곧 자기가 죽임-고난 받는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설명하자 베드로가 자기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예수에게 대항함으로서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께서 다시 한번 고난받은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아들로서의 메시야 됨에 대한 시험을 받고 이것을 처음 시험 물리쳤듯이 베드로의 시험도 물리치는 장면이다.
4)예수이 성전 죄목
또 막9:7과 병행절에 나오는 변화산에서의 하늘의 음성-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은 헤례 때의 하늘의 음성의 재확인이다. 바로 예수의 메시야적 과업이 달성될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르심에 대한 재확인이 되어진다. 또 예수가 내 쫓는 악령들에 의해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이 고백되고 선포된다(막3:11/5:7등). 예수는 악령들에게 조용하라고 명령한다. 악령들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 아들됨이 선포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 산헤드린에서 재판(막14:61/마태 병행절) 받을 때에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당신이 메시야냐? 축복받을 이-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는다. 그래서 예수의 재판이 그의 하나님 아들됨에 관한 제판임이 들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의 죄목때문에 그런다. 예수의 죄목은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예수가 산헤드린에 체포되어서 재판 받은 죄목이 막 14:58에 의하면 성전 죄목이다.
증인들이 나서서 “이 자가 성전을 때로 부수고 사흘안에 새로 짓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즉 성전을 모욕,성전을 공격,성전을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법에 의하면 사형감이다. 이것이 예수의 재판 받은 죄목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예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묵비권을 행사하자-대제사장이 다시 묻는다. “네가 그러면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것이 바로 나단의 신탁에 근거해서 그런다.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다우시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르고 하나님 아들로 선포되고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짓는다. 그러니까 예수가 대 제사장-유대 신학자들-들의 눈에 보았을 때, 성전을 새로 짓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나단의 신탁을 주장한 것이다. 곧 자기가 다윗의 아들,메시야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다우시의 아들,메시야의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은근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답을 하고 스스로를 인자로 표현해서 말을 한다.
5)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주위 사람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에 주의 사람들이 예수를 놀린다.“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의 고통에서 내려오라(마27:43)”
막15:39/마27:54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로마의 백부장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을 선포하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고백되고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위에 의해 쫓겨난 악령들에 의해서 인지도고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그의 원수들(유대의 지도자들에)의해서 문제거리가 되고 재판거리가 된다.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십자가에 달림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보면 지금까지 공관복음이 자료들-예수의 간접기독론,예수가 은근히 하나님 아들이라고 부른 점,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됨이 인정됨-을 survey했는데 그것을 결론지으면 다음과 같다.
결론
공관복음들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의 하나님 아들됨을 은근히 나타냈고 특별한 경우에는 그것에 대해서 후에 분명히 언급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예외적인 경우에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그의 하나님 아들됨이 인정되었다. 이 점은 곧 복음서들의 신빙성을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관복음이 쓰여질 당시는 이미 예수를 하나님의 앋르로 고백하는 것이 교회의 중심 고백들 중에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관복음서들에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들-하나님에 의해서거나,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베드로에 의해서거나(마16:27에 의하면 혈육은 너에게 그것을 가르쳐 줄 수없다)또는 초인적인 통찰력을 가진 사단(시험때) 악령들에 의해서나 고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사저으로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분명히 주장했다고도 하지않고 일상적으로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 고백되엇다고도 공관복음서는 스지도 않고 있다.
4.예수가 어떤 의미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느냐?
예수가 성전을 부수고 새로 짓는자라고 주장했다. 곧 나단의 신탁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성전을 위협하는 행위느 그리고 자기가 메시야로서 나단의 신탁을 성취할 자로 이 성전을 때려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한 행위는 유대인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신명기법 13장 17장 18장에서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것이었다. 곧 하나님에 의해서 보냄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주장하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닌데도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오도하는 거짓 선지자를 사형에 처하라는 법이다. 바로 이러한 신명기법에 의해서 유대 지도자-산헤드린-들은 예수를 사형받아야 마땅하다고 빌라도에게 공식적으로 넘겨 주었다. 성전을 모독한 자들은 자기들이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 원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형권이 박탈되었다. 사형권은 로마의 집행관(총독,관리)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러나 예외저인 경우 곧 성전을 공격했다든가 하나님을 욕도게 하는 경우는 유대인들에게도 사형권이 주어졌다. 로마의 정부가 유대인들에게 권리를 인정해 주었다 그래서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너희 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발뺌을 하는 것이다. 산헤드린이 자신들의 공의로 예수를 처형할 수도 있었으나 신명기법에 의하면 그들은 돌로 쳐 죽여야 하는 사형법을 택해야 한다. 이럴 경우 산헤드린 지도자들이 두려워한 것은 예수 운동이 종결되지 않고 예수가 진짜 선지자로 추앙받을 것으로 두려워했다. 왜 그러느냐면 중간사 시대에 강력하게 대두되는 사상이 “진정한 주의 종은 고난을 받는다” 당대의 패역한 세대에 의해서 고난을받는다. 진정한 선지자, 진정한 의인은 당대의 믿음없는 세대에 의해서 고난받는다는 사싱이다. 이것을 보통 PASSIO IUSTI라고 한다.
만약 당시에 인기와 신망을 얻었던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돌로 쳐 죽이면 예수의 추종자들 눈에는 그것 자체가 예수의 의인됨,진정한 선지자됨이 더 확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자기들의 법대로 서형을 집행하지 않고 예수가 나단의 신탁을 주장한 점은 곧 그가 메시야 이것은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나단의 신탁에서 유래하는 민속베이야 사상에 의하면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왕, 그리고 이방민족들을 정복할 전사로서의 메시야라는 주장이다. 이것을 빌라도에게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해주면 빌라도는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로마 황제-가이사-에게 반란한 자로 취급을 하고 이렇게 되면 그를 로마 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신21:23에 의거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자로 판명이 된다. 이렇게 되면 예수의 유대인 추종자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저주받음이 판명되기 때문에 예수 운동이 종결될 것이라고 하고 빌라도에게 억지로라도 압력을 넣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킴-시켜서 이것을 본 제자들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인정했음을 깨닫고 예수의 모든 주장이 옳다함을 깨닫고 그러므로 우리의 CONTEXT에 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도 옳다. 그가 주의 고난받은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옳다 라는 깨달음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나오고 예수가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다(사53장). 이 예언대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했다는 신앙고백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었으므로 우리 죄문제를 해결한 의미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었다. 곧 우리 구원자였다. 그러므로 메시야였다는 신앙고백이 발생한 것이다.
5.바울 전(pre-pauline)의 교회에서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발생한 것을 롬1:3,4절에서 이 신앙고백이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가장 잘 살펴볼 수가 있다.
롬 1:1-4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데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복음을 여러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이때는 저자의 속격이다. 하나님이 복음의 저자이다. 복음이 인간이 만들어 낸 이야기도 아니고 인간이 제시하는 구원의 수단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사건,신적 힘(능력)을 가진 것이다.
둘째로 복음을 구원사적으로 정의했다(2절)
하나님께서 성경에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약속한 것을 성취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약성겨에서의 구원의 약속에 대한 성취이다. 또는 구원의 예언에 대한 성취이다. 그러면 3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내용적인 정의이다.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아들에 있다. 여기까지가 복음의 여러 정의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또 복음을 롬 1:16에 또한번 정의한다. 복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더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롬 1:3에서는 기독론적으로 정의되어 잇는데 여기는 구원론적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것이 어떻게 설로 연관되어 있는가를 나중에 보겠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자주 요약을 한다. 가장 유명한 갈 1:16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사도로 부르셨다. 그때에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하셨다. 그의 아들을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ευαγγελιμαι-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복음이라는 말로 간단히 요약한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아들이다.
그 다음에 바울은 그러면 하나님 아들은 어떤 분이냐를 롬 1장 3절과 4절에서 두 부분으로 신앙고백을 말한다.
3절에 보면 이 아들은 어떤 분이냐면 εκ σπερματος Δαυιδ(다윗의 씨로부터 난 자들), του γενομενου κατα σαρκα(육신적으로는) 그 다음 4절에는 του ορισθεντος υιος θεου εν δυνμει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 εξ αναστασεως νεκρων 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모든 신학자들이 인정하듯이 아주 초기-유대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지금 κατα σαρκα 와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가 있다. 바울이 만든 신앙고백이 아니고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면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은 성령을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το αγιων πνευμα 하든지 το πνευμα το αγιων 하든지 아니면 αγιως라는 형용사를 쓴다. 그런데 여기 αγιωσυνης는 완전히 셈족 언어를 직역한 것이다. 이것은 셈족 언어를 모어로 쓴 그리스도인들이 증거라는 표시이다. 그래서 바울이 지은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지었다.
또 다른 하나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윗 아들임을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윗 아들임이 강조된 cicle은 유대인들 세계에서 그렇다.
또 하나는 κατα σαρκα , κατα πνευμα바울은 위에 본문처럼 대조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πνευμα와 대조되는 σαρκα는 항상 하나님과 적대하는 인간으로서의 σαρξ 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냥 육신의 측면에서 인각으로서라는 뜻이다. 규범적인 뜻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σαρξ가 πνευμα와 대조될 때는 항상 부정적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더러는 히브리어의רשׁב를 그냥 번역해서 인간을 말할 때 쓰기도 한다(흔치는 않지만). 그러나 πνευμα 와 대조해서 쓰일때는 이것을 항상 하나님께 대항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말할 때 σαρξ라고 한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체로서 살겠다고 자기 주장을 하는 존재로 보았을 때 인간을 σαρξ라고 한다. 지금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것은 유대인들의 어법이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이것은 바울전에 셈족 언어를 쓰는 예루사렒 교회의 신앙고백-아주 오래된 것,최초의 것-을 바울이 여기서 인용한 것이다. 이것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정확히 κατα σαρκα 와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쉽지 않다. 상당히 어렵다E.Schweizer의 논문 중에서 κατα σαρκ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해 놓았고 또 이 사람의 Kittel(신약사전) 8권에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리고 πνευμα에 대한 기사도 썼다. υιον θεου을 찾아보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렌필스,케제만 로마서 주석도 참고할 것.
. 아무튼 “육신의 영역에서 본다면”하고 대충 보면 다윗의 씨로부터 나왔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κατα σαρκα 는 이해가 간다. 그런데 κατα πνευμα αγιωσυνης가 이해하기 어렵다. 성령에 의거해서 그런지 성령의 힘으로 그런 말인지 아니면 ㅇ여적인 평면에서 그렇다는 말인지 상당히 어렵다.
우리말 어순이 틀렸다.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다”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어순 중 능력으로 인정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εν δυναμει 는 υιου θεου에 붙는 말로서 형용사구이다.
그래서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 곧 ‘절대 주권을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었다는 말은 등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언제부터? 여기에 나오는 εξ 또는 εξ αξαστασεως 는 죽은자들 가운데 부활한 때부터를 말하는 때를 말할 수도 있고 원인-죽은자 가운데 부활함으로 말미암는 원인-을 말할 수도 있다. 아니면 둘의 의미가 다 있을 수도 있다.
원래 육신적인 평면에서 다윗의 아들로 난 사람을 하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켜서 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로 세우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εξ αναστασευς의 신앙고백은 나단의 신탁이 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말과 마찬가지이다. 나단의 신탁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צרꕳ σπερμα)를 일으킨다고 되어 있다. ‘내가 그를 일으키겠다’고 되어 있다. 이 말이 70인역에서는 αναστησω 히브리어는 יתמי קהו(내가 그를 일으킨다)로 되어 있다. 일으켜서 다윗의 왕 위에 앉히고 그를 나의 아들로 선언한다. 나단의 신탁에서 다윗에게 약속하기를 ‘네 수가 다하면 너의 씨(σπερμα)를 일으켜서 네 왕위에 앉히고 그를 나의 아들로 만든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단의 신탁 한 마디가 한 마디가 이 신앙고백을 이루게 된 것이다. 롬 1:4에서 일으킨다는 말이 αναστασευς 이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셔서 라는 의미이다. 이 신앙고백을 만든 초대교회에서는 다윗의 씨,가문에서 난 예수를 죽은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부활시키심으로 나단의 약속의 성취로 보았다. 그래서 예수가 은근히 자기를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단의 신탁을 통해서 성취해서 새로운 성전을 지을 분으로 은근히 기르쳤는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셔서 나단의 신탁에서 약속한 다윗이 씨를 일으키는 일을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약속대로 그를 자기 아들로 다윗의 왕위에 앉혔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육신에 있는 동안에도 다윗의 씨로서 나단의 신탁의 성취자로서 하나님 아들로 선언될 분이었다. 그러니까 육신에 있는 동안에는 예수감추어진 하나님 아들이었다. 익명상태의 하나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를 죽은자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으키셔서 하나님 아들로 만방에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예수가 익명성을 떨쳐 버리고 이제 전권(능력)을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로 되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최초의 신앙고백-한편은 나단의 예언을 근거하고 한편은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다고 은그히 주장한 예수의 자기 이해 또 자기 주장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의 빛에 주셔서-이렇게 해석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신앙고백을 만든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예수가 나단의 신탁을 성취한 의미로 하나님 아들로 보았다. 다윗의 왕위를 또는 다윗의 왕조를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육적이고 영적인 측면에서 제거한 하나님 아들로 보았다. 그런데 3절에서 του γενομενου εκ σπερματος Δαυιδ κατα σαρκα 여기서 바울이 복음은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복음은 3절에 περι του υιον αντον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은 του γενομενου εκ σπερματος Δαυιδ (육신에 의하면 다윗의 씨로부터 낳았다). 이것은 신앙고백에 대한 바울의 서문이다. 이 서문이 효과가 무엇인가? 이것을 볼려면 갈4:4-6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갈4:4 “때의 충만함이 왔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냈다(του υιον αντον-그 아들을 보냈다) ”
그래서 그의 아들이 여자의 몸에서 낳았다. 율법 아래 생성되었다. (γενομενον εκ γυναικος γενομενον υπο νομον)
구조가 롬 1:3-4절과 똑같다.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인데 그의 아들이 다윗의 씨에서 낳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은 여자의 몸에서 낳았다. 갈 4:4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서 여자의 몸에서 낳게 했다는 사상은 선재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과 같이 존재하신 그의 아들을 세상으로 보냈다.(εξ αναστασευς). 세상으로 보내서(εξαπεστειλεν) 여자의 몸-인간이 되게 -에서 낳게 했다. 율법 아래 낳게 했다. 즉 유대인이 되게 했다. 그래서 선재 사상과 성육신 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롬 1:1-4에서도 똑같은 논리로 바울이 초대교회 신앙고백에 이와같이 서문을 달음으로서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은 다윗의 씨에서 낳았다고 서문을 담으로서 선재사상과 성육신 사상을 내포하는 것이다. 원래 이 신앙고백 자체(2절)만 보면 선재사상이 없다. 다윗의 씨로 낳았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행사하는 아들로 등극시켰다. 이 원래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2절)을 보면 선재사상이 없던지 아니면 불분명하든지 그렇다. 바울이 이렇게 서문을 달음으로서 말미암아 이 선재사상이 비로소 분명해진다(갈4:4).
6. 선재사상(Pre-exsistence)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M.Hengel의 유명한 논문 하나에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의 선재사상은 바울 신학과 요한 신학에 중요하게 등장을 하는데 (소위 지혜신학의 일부로 등장)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공헌이이다고 처음에 제시를 했다. 그후 조금 있다가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내가 조금 생각을 해보니까 Hengel이 처음에 맞았다. 그런데 어덯게 해서 바울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 사상을 초대 교회에서 제일 먼저 이것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되고 그것이 대해서 신앙고백하고 천명하였는가? 그 방법(key)은 ‘지혜신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혜신학-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선재사상을 발달시킴-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에 의거해서 바울이 예수의 선재사상을 발달시켰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에 있어서 바울의 공헌이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제부터서 이것을 보려고 한다.
바울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하나님 아들로,고백하는 자들을 핍박하는 자로서 다메섹을 가는 도중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우편에 높임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를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쓴다(갈1:6).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자기에게 계시했는데 이 때의 예수를 ‘그이 아들을 나에게 계시’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여 하나님 영광 가운데에 높임 받아 나타나는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체험했다. 그의 신적 영광이 너무 찬란해서 바울은 그를 주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전 9:1에 그렇게 말하고 있다.
주라는 칭호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나 둘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진 예수를 말한다. 비슷하게 행 9:5/22:8/26:15에서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고 부른다(당신이 누구냐?).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主로,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하는 것이다(갈1:16). 이것과 일치하는 것이 행 9:20이다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한번빡에 안나온다. 행 9: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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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계시(체험)받고 바울이 선포하기 시작한 복음을 행 9:20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요약한다. 이것은 갈 1:16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의 아들을 계시한 것은 ινα ευαγγελιζωμαι αντον εν οτις εθνεσιν(이방인들 가운데 그의 아들을) ευαγγελιζωμαι 는 ευαγγελιον과 같은 어원에서 나오는 동사인데 조금 과장해서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ευαγγελιζωμαι는 원래 선포한다는 말이다. -로 할 수 있다. 바울은 분명히 복음이라는 말을 염두해 두고 쓴 것이다. 왜? 지금 바울은 갈 1:11부터 자기가 받은 ευαγγελιον의 계시를 두고 말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선포하는 것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받은 ευαγγελιον을 말한다. 그래서 ευαγγελιζωμαι는 ευαγγελιον을 염두해 두고 쓴 동사이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하셨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그의 아들을 ευαγγελιον으로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바울의 증언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누가가 바울의 다메섹 도상이 사건을 그리는 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심지어 누가도 그 전승에 신실-보통 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잘 안씀-해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하고 그 체험을 복음으로 선포하는 상황 속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으로 바울이 다메섹 도상 직후 계시 받은 복음을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에 의거해서 자기가 핍박하던 교회의 신앙고백이 복음임을 깨닫게 된다(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가 그리스도,주다. 그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고 초대교회에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들을 바울이 수용하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아들 기독론에 그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롬 1:3-4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곧 나단의 신탁의 성취자로서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 발전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높인 분이 아니고 태초부터 하나님 아들로 선재하신 분이다고 바울은 예수의 본질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력을 첨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증명하려고 롬 1:3-4절과 갈 4:4을 비교한 것이다. 갈 4:4에 하나님의 선재 사상이 나타나듯이 롬 1:3에도 바울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는 서문을 달음으로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으로 하여금 비로소 선재사상을 끼게 만들었다. 그런데 바울의 편지들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재사상을 나타내는 문구들이 여러곳에 나온다. 그것이 주로 보냄의 형식과 더불어 나타난다. 그 하나가 갈 4:4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래서 여자의 몸에서 낳게 했다” 롬 8:3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골 1:13f에 선재사상이 나타난다. 곧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이 세상으로 보냈다. 최근에 J.Dunn이 “바울의 서신에는 진정한 의미로 예수의 선재 사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1세기-사도시대 신학관계- 말에 속하는 요한복음에서 비로소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선재사상이 나타난다”고 이런 주장을 상당히 강력하게 했다. 다행히 많은 학자들이 이 주장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
나는 두가지로 주장을 한다. 첫째 바울의 선재사상이 있다. 둘째 이 선재사상은 요한복음, 히브리서에도 있지만 초대 교회에서 바울의 공헌이었다. 바울의 공헌이 초대교회에 널리 퍼져서 요한복음에도 나타나고, 히브리서에도 나타난다.
바울의 공헌이라는 것에 대한 증명
앞서 말한대로 이것은 원래 주장하기를 M.Hengel 교수가 그의 “Christology and N.T.Chronology”라는 논문에서 말했는데 나중에 몇 년 후 그의 책 “Son of God”에서 이 전제를 철회하고 ‘시리아(안디옥)의 바울 당대의 교회에서 얻어진 통찰력’이라고 애매하게 표현한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요한복음에도 나오고 히브리서에도 나오고 또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선재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지혜신학인데 이 지혜신학이 마태복음에도 나온다. 그래서 바울서신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외경적인 지혜신학이 신약 전체의 전승에 전 과정에 폭넓게 나온다. 이런 것을 감안해서 M.Hengel이 나중에 이런 식으로 애매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나는 주장하기를 “만약에 하나님 아들의 선재사상,그리고 선재 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지혜 신학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초대교회에서 초창기 사건(AD 32-34)-과 관계가 있다면 이 하나님 아들의 선재사상이 바울의 공헌일 가능성이 크다는 식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지금 설명해야할 것이 선재사상과 이것의 배경을 이루는 지혜신학이 바울 다메섹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증명하려는 것이다김세윤 박사 “바울 복음의 기원” (Son of God)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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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신학 제16강
지난 시간 줄거리
지난 시간에 롬 1:3-4에서 바울이 인용하는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신앙고백과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는 이른바 보냄의 형식(the sending formula)-갈4;1/롬8:3 등-을 비교할 때 롬 1:3-4에 인용된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에는 아직 선재사상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보냄의 형식-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에는 선재사상이 뚜렷히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롬 1:2에서 바울이 복음을 정의함에 있어서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서문을 담고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인용함으로써 바울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선재하셨던 분으로 다윗의 씨로 즉 여자의 몸에서 낳은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로 분명히 드러난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선재사상이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재 사상은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에 교회에서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보는데 나는 내 책에서 주장하기를 “아마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였던 바울이 터득한 통찰력이고 바울이 초대교회의 기독로적 발전에 기이한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이것을 보기 위해서 차례로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사상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보도록 하겠다.
1)종교사적 배경-구약/유대교-지혜 사상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의 지혜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지혜 사상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천명하기 위한 신학적인 언어수단으로서 하나님의 지혜-hypostatizetion-가 하나님의 속성인 추상명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하나의 물체화한 것으로 이해하고 인격화 한 것으로 이해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역할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일군 노릇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딸이라고도 불림을 받는다고 한다.
⇨보냄(sending) ꠆ꠏ창조ꠏꠈ일군(agent)
ꠐ 계시 ꠐ
ꠌꠏ구원ꠏꠎ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의 딸 지혜를 통해서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시는데 그의 딸-지혜-을 보내서 그의 뜻을 계시한다. 구원의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딸-지혜-을 보내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지혜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 하는 것이 구원의 수단이고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군 된다.
즉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와 창조의 수단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계시의 수단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율법이다. 율법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것이다. 그래서 지혜서라고 할 수 있는 sirach 24장에서는 이 율법이 하나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 곧 지혜가 주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지혜를 받는 행위이고 의로운 행위에서 구원을 받는다. 이런 지혜신학이 발달을 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딸-선재한 지혜-을 보내서 후에 창조와 계시와 구원을 하신다는 사상이 유대교에 발달하는데 이것을 앞에서 말한대로 초월하신 하나님의 이 세상에 내재하심을 말하고 후에 창조와 계시와 구원활동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 수단으로 말한다.
이런 신관을 이위일체론이라고도 한다. 지혜신학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에 선재사상과 보냄의 형식이 된 것이다.
곧 바울의 서신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의 몸에서 낳게 하고 율법아래 낳게 했다는 것은 우리를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속량해서 구원하실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내서 모든 뜻을 계시하고 그가 구원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곧 신약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점진적인 계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딸인 지혜 활동이라고 그려진 것은 실제로는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 되기 전에 활동을 그린 것이다. 이런 종교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다루는 것 중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과 보냄의 형식을 초대교회에서 누가 제일 먼저 발달시켰느냐 하는 통찰력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재정돈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보기 시작한 것이 누구이냐? 초대교회에서 누가 제일 먼서 시작했느냐?
하나님의 아들의 선재사상이라든지 선재한 하나님의 아들의 보냄의 형식이 지혜신학에 근거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으로 만들어졌으니까 초대교회에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제일먼저 동일시했는가를 살펴보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 선재사상, 보냄의 형식을 제일 먼저 개발했는가를 해결할 수 있다.
2)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와 동일시함을 우선 바울신학 내에서 본다면
①고전 10:1-4 까지에서 바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므리바에서 물을 공급한 반석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는 그들을 계속 동행했다. 그런데 바울은 고전 10:4에 “이 반석은 그리스도라” 한다. 이 유대 랍비들에게는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므리바에서 모세가 반석을 지팡이로 쳐서 물을 얻어 공급해서 유대인들을 구원한 것이다.
그래서 반석이 구원의 수단이었다. 그런 이후-므리바에서 물을 잔뜻 마신 것-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 다음에는 어디서 물을 마셨는가?
이것이 유대 랍비들에게는 문제였다. 그래서 유대 랍비들이 상상하기를 반석이 이스라엘 족속이 광야에서 헤매는 동안에 계속 그들을 따라 다니면서-동행하면서-물을 공급했다고 신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런데 Alexsander의 Philo는 이 신학을 이어 받아서 ‘그 반석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였다’고 한다. 이것은 결국 광야에서 물을 공급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주는 구원 수단이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혜를 통해서 구원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반석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지혜의 수단이다. 그렇다면 구약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수단인 반석-물을 공급-도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전의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0:4에서 이 반석은 바로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반석을 지혜-Philo와 같은 유대의 신학-로 그리는 수용해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는 곧 그리스도를 지헤와 동일시하는 것을 고전 10:4에서 볼 수가 있다.
②롬10:6-7(신30:12-14)
여기서 바울은 신30:112-14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저 하늘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 하늘에 올라가서 그것을 받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저 바다 밑에 있어 가지고 인간이 노려해서 바다에 가서 가져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 계시의 말씀이 바로 우리와 같이-옆에,속에-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마음만 있으면 하늘로 올라가고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엉뚱한 노력없이 금방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 말씀이 목적-대상-이다. 그런데 이것을 유대 묵시문서인 Baruch3:29ff에 보면 하나님 말씀을 지혜로 대치해 놓았다. 하나님의 지혜가 저 하늘 위에 있어서 인간들이 좇아 올라가서 구해올 것도 아니고 저 바다 밑에 있어서 인간들이 불가능한 노력을 해서 건져올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와 같이 있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하나님의 뜻에 금방 우리에게 환히 밝혀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울은 롬 10:6f에서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인 신명기의 말씀이 유대 묵시 문학에서는 지혜로 이해되었는데 바울은 그리스도라 하여 다시 한번 그리스도와 지혜를 동힐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③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εικων του Θεου (고전 4:4.골1:15 등)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 7장 25절과 26절을 보면 지혜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소리는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소리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안다. 지혜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형상이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는데 바울은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와 지혜를 동일시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아예 고전 1:24에서 바울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 라고 불럿다. 비슷하게 고전 1:30/골2:3 등 여러 곳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고 있다.
다음 단계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이해하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무엇에 근거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게 됐느냐?
3)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로 부르게 된 근거-다메섹 도상에서 얻은 두 개의 통찰력에 의해 근거
①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주,주님으로 나타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 같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형상-εικων του Θεου-을 가진자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하나님 영광(δοξα)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에 하나님 같은 자로, 하나님 같이 나타났다. 즉 하나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났다. 나중에 보겠지만 오로지 바울만이 신약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형상 기독론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유대 신학에서는 하나님 형상을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하고 바울은 곧장 예수를 지헤와 동일시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형상 이것은 사실 같이 가는 말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형상으로 보았다. 갈 1:16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를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나에게 계시했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고후 4:4-6까지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반영하는 말인데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을 반영한 말인데 거기에서 바로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갈 1:16과 고전 4:4-6까지의 유사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②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율법을 능가하고 대치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을 향해 가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힌-신21:23등-것이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라고 선포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름으로 율법을 비판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다메섹에 갔다. 그러니까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바울에게 율법이냐 예수가 그리스도냐의 정통성을 가지고 간 것이다. 율법이 정말 하나님의 계시인가? 그래서 예수에게 내린 저주가 옳은 것이냐? 유대 신학자 바울로서는 이렇게 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그게 아니라 예수가 메시야됨에 비추어서 이 율법이 온전하지 못하다. 예수가 도리어 율법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대 신학-율법신학-이 옳으냐? 그리스도인들의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옳으냐? 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유대 신학에 의하면 율법이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했다고 생각했던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편에 높이셔서 계시했으므로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선포가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율법의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선언은 예수 자신이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죄를 위한 것이다. 예수는 종말에 구원을 완성한 메시야라 그렇다면 그전의 모든 성경-율법과 선지서-은 예수에 대한 예언-약속-에 불과하다. 예수가 메시야로서 율법의 성취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메시야로서 하나님이 뜻의 종말론적인 완성된 계시로서 율법을 능가한 것이다. 성취는 불완전-율법,성경-한 것에 미완성한 것을 능가하는 것이다.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함을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율법이 하나님의 완전-메시야-한 계시가 아니라 이것은 불완전-율법성경-한 계시이다(완전한 계시에 비춰 보았을 때).
불완전하기 보다는 미완전한 계시이다. 아직 예비적 미완의 계시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하나님 아들은 완성된 종말론적인 하나님이 계시라는 것이다. 율법을 성취하고 누군각가 대치하는 것이다. 지혜신학에서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한다 해서 지혜를 담고 있다. 지혜 신학에 있어서는 율법이 지혜의 구체화(enbodyment)라고 보았다. 지혜가 하나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이것이 율법에 담겨져 표현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신학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신학자(바울)가 예수는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했다는 것은 지혜를 불완전하게 또는 미완적으로 담고 표현했다. 율법이 예수에 의해 성취되고 능가하고 대치되었으니까 지혜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히 담겨져 표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의미로 유대 신학에서는 율법이 곧 지혜라고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야 말로 이보다 훨씬 큰 정당성을 가지고 지혜라고 해야 되지 않느냐?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나타나셨다. 아예 성육신했다고 해야 한다.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하나님 아들-를 통해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왜 그러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계시의 수단인 지혜가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완전히 몸으로 들어났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의 두 통찰력 부활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것은 바울로 하여금 예수-하나님의 아들-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생각했고 또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예수가 영광된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된 것을 본 것은 곧 하나님 아들 예수가 율법을 성취하고 능가하고 대치했다는 통찰력을 주었는데 이것도 바울로 하여금 예수-하나님 아들-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생각했다-을 바울은 유대 지혜 신학에 있어서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하게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혜라고 선포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롬 10:4에 율법의 τελος이말이 해석하기 어려운 말이다. 완성이라는 말인지 율법의 목적이라는 말인지 율법을 종결지었다는 말이지 아니면 세가지 다 의미하느냐? 결국에는 세가지 다 의미한다.
이다.
예수가 율법을 성취(완성)하고 능가하고 대치한다. 그래서 율법의 라는 말이 우리 말에는 마침이라고 번역되어 있다-“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다”-또한 τελος가 완성(성취),목적-goal,end- 또는 끝장-termiantion- 내버림이다. 끝장 내버린다는 말은 대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로마서 문맥에 있어서는 termiantion의 뜻이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 하여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렇게 깨달았다. 그래서 예수를 지혜로 부르고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으로 봤다. 예수의 품격(person)과 사역(work)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이다.
지혜는 헬라어의 σοφια 나 히브리어의 המקוה 로 여성명사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다. 그래서 딸이라고 하지 않고 아들이라고 했다. 딸이나 아들이나 다 그림 언어이다. 하나님과 함께 속하는 하나님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의 품격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하고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지혜가 하나님의 사자 노릇하는 하나님의 보냄 받은 곧 하나님의 전권 대사 노릇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자 또는 전권대사로 보냄을 받아서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다 지혜의 카테고리로 설명한 것이다.
person(품격)⇨‘하나님의 아들’ 선재
work(사역)⇨보냄/사자/전권대사 창조,계시,구원
그러니까 구약과 유대 신학의 지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우리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와 같이 얻은 통찰력으로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의 품격과 그의 사역을 설명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완성된 계시-그리스도-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거꾸로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하나님 아들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사역중 중보자 노릇함이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전히 계시되기 전에 그 예비계시인 구약과 유대교에서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렸다고 설명해야 한다.
사실은 전자보다 후자가 더 옳은 말이다. 그래서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히 스스로 계시한 하나님 아들을 체험하고 바로 이러한 계시의 카테고리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그렸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을 한 것이 바울의 신학적인 공헌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은 초대교회에서 아주 초기의 사건-AD 32,33-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신학자였고 바울에게만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지혜의 칭호가 하나가 분명히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이유들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그의 품격과 사역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 바울의 초대교회에서의 신학적인 공헌이다. 그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계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것이 지혜기독론-지혜의 카테고리로 예수의 품격과 사역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혜기독론의 일부가 선재사상이다. 그리고 예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했다는 것이 지혜기독론의 일부이다. 이런 것들도 다 바울의 초대교회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인용-롬1:3,4-하는 것은 아직 이런 지혜기독론이 나타나지 않지 않는가 나는 주장한다.
이 주장에 맞서서 많은 학자들이 지혜기독론을 바울서신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전체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 아주 중요하게 나타나고 요한복음의 하나님 아들을 기독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요 3:17).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멸망하도록 하지 않고 구원을 얻도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보냄의 형식이 나온다. 요 3:16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는 내어줌의 형식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낸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에도 하나님 아들이 보냄의 형식으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카테고리는 계시이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계속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들은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것이 계속 보냄의 형식,선재사상,선재사상등은 요한복음에서 나오는 중요한 기독론이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지혜 기독론이 중심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헬라적 용어로 말한다면 ‘예수가 λογος이다’ 해서 요한복음 서문에 나오는 λογος 사상이 사실은 지혜기독론을 내용으로 삼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만 나타난게 아니고 요한계시록에도 있다(하나님을 지혜로 하는 사상). 또 히브리서에도 있다. 히 1:1-3까지가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이다. 이것이 지혜신학이다. 지금까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부분적으로,조각조각-으로 계시했던 하나님이 종말에 그의 아들 통해서 완전히 계시했다. 그러니까 그의 아들이 구약-율법,선지서-에 부분적인,예비적인 미완의 계시들을 완성해서 완전히 계시한 것이다(그의 아들이).왜 그의 아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종말론적으로 계시할 수 있느냐면 그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고, 본체-χαρακτηρ(도장 찍음)-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도장 찍음(형상)이다. 그러니까 απανγασμα(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라는 말이나 하나님의 본질의 도장이라는 말-바울 용어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은 내용은 똑같다.
이것은 완전히 지혜 기독론-지혜신학-이다. 요한 문서에도 히브리서에도 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의 이른바 Q문서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을 특히 마태복음이 지혜신학을 아주 많이 확대했다. 그래서 이 Q문서라는 곳에 이른바 지혜의 말씀을 5가지로 보통 양식사가들은 분류한다①마11:16-19은 눅7:31-35과 병행
②마11:25-27은 눅10:21-22과 병행
③마태만의 특수 자료 마11:28-30
④마23:34-36은 눅11:49-51과 병행
⑤마23:37-39은 눅13:34-35과 병행
이 5개의 말씀들-4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병행,③만 마태에만 나타남-은 근본적으로 마태와 누가에게만 공통ㅇㄹ ㄴ고 마가에 없는 자료이기 때문에 이런 자료를 편리하게 Q자료라고 한다.
.여기에서 예수의 말씀을 지혜의 말씀이라고 한다.
마11:16-19가지만 보면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옳다함을 얻느니라” 누가 복음에 의하면 “지혜는 그의 자녀들로 정당함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약간 다르다. 왜 그런가가 아주 중요한 토론이다. 마 11:25-27까지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로 아버지를 계시하는 자이다. 아버지를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해서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즉 아버지의 전권대사이며, 계시자이다. 마 11:28-30까지는 유대 신학에서 지혜가 패역한 세대의 사람들을 불러서 지혜를 얻어 하나님을 알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초대와 같은 말이다. Q 문서에 나오는 5개의 말들을 이른바 지혜의 말씀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혜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는 Q 자료에 있어서 이것-예수가 자신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와 견주어서 가르쳤다-이 중요하다. 이것을 먼저 분석한 Bultmann은 그의 ‘신약 전승의 역사’-양식사적 공관복음 연구에 기초를 놓은 책으로 허역 박사에 의해 번역됨-책에 지혜의 말들이 분석되어 있다. Bultmann에 의하면 이런 말들은 거의 다 교회가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예수가 말한 것은 몇가지 밖에 없다고 한다. 지혜는 다 Q공동체의 기독론을 표현-Q공동체가 예수의 됨됨,예수의 의미-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그 뒤에 이 말들을 중요하게 분석한 사람들 중에 J.Suggs는 미국학자,‘지혜,율법,그리스도’라는 조그만 책을 쓰고 또 스위스의 F.Christ라는 사람이 ‘Jesus σιφια’라는 책을 썼다. J.Suggs는 많은 것을 마태의 신학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J.Suggs에 의하면 ‘예수가 자신을 세례 요한과 더불어 지혜의 마지막 사자로 그리고 있다’ 종말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제공하는 선지자와 같은 분으로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자신이 지혜의 마지막 사자로 그리고 있다. F.Christ는 좀 더 적극적이어서 ‘예수가 스스로를 지혜로 보았다’ 즉 예수가 스스로를 구약과 유대교에서 그리고 지혜역학을 한다고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수와 율법’‘예수의 율법에 대한 태도’. 이런 것들 다루는 책들은 다 이 문제를 다루게 되어 있다R.Banks의 ‘Jesus and Law’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다. 누가복음 주석 중 I.H.Marshall 것을 보면 마태복음과 병행되는 누가복음에 보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 그래서 예수의 말씀들 중에 지혜의 말씀들-앞의 주7)참고-이 있다. 여기서 F.Christ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가 자신을 지혜와 동일시했느냐? 아니면 J.Suggs가 주장한 바와 같이 지혜와 동일시하지 않고 자신을 지혜의 자녀로 또는 지혜의 마지막 사자들 중의 하나고 보고 있느냐? 이것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Bultmann식으로 우리는 교회가 나중에 지혜기독론 표현으로 지어가지고 예수의 입에더 집어 넣어 가지고 마치 예수가 한 것으로 한 것이냐고 하는 극단의 견해거 있지만 이런 견해를 우리가 안 따른다 해도 최소한은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지혜의 역할에 근거해서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Bultmann 식의 극단적인 것이 다 가짜라는 설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최소한도 위에와 같이 말할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신약 전체에 지혜 신학이 있다. 예수의 역할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요한복음에 현저하고 히브리서,공관복음서에 나타난다. 야고보서에도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야고보서를 지혜 문서라고 한다.
‘바울전에 교회에서 이미 지혜기독론은 형성이 되었다’고 대개 주장한다. 그러나 몇년 있다가 자기 주장을 슬그머니 고쳤다. 바울 한 것이 아니고 바울 전 교회가 했든지 이것보다는 이와 같이 엄청난 신학적인 통찰력을 얻을 신학자가 누가 있겠는가? 바울과같은 훈련된 신학자나 되니까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바울과 동시애의 교회에서 일어났다. 바울전에 교회에서 발생했거나 아니면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울과 동시대에 교회에서 발생했다고 애매하게 표현했다. 나는 주장하기를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바울의 지혜기독론은 다메섹 도상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또 바울은 초대교회에서 유일하게 훈련된 신학자라는 면에서 바울의 공헌이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런 책들-요한복음,히브리서,공관복음-은 바울 후의 책들이다. 그러나 분명히 바울 전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Q 문서이다.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지혜의 역할로 그리고 있는데 이것을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예수의 지혜의 말씀이 바울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역사적 뒷받침을 해주었다’고 본다. 역사적인 예수의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활 후에 교회가 아직 신학하기 전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마침 예수를 하나님 아들로,하나님 형상으로,지혜의 성육신으로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전개함이 예수의 지혜의 말씀이 역사적 근거를 뒷받침했다. 그래서 다른 신약의 저자들도 한편으로는 예수의 말씀에 근거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바울에게서 이미 시작된 지혜기독론의 영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을 지혜의 카테고리로 전개했다. 지혜기독론의 대표적인 표현이 보냄의 형식이다.
4)보냄의 형식(The Sending formula)
이것의 구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냈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 중 갈 4:4/롬8:3에 비슷하게 롬 1:2-4까지 나온다. (요3:17/요일4:9,10,14 등)
보냄의 형식에 쓰이는 칭호는 항상 아들이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에는 선재사상-하나님이 그의 선재한 아들을 보냈다는 말-이 들어 있다. 이 아들을 보내서 여자의 몸에서 낳아 성육신했다. 이것은 지혜 사상의 표현인데 왜 보냄의 형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이냐면 보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냈다는 문장형식에 뒤따라서 쓰여진 말이다. 보냈다는 말은 히브리 사고의 보낸(הלשׁ, הֹלשׁ)의 전통에 의해서 설명을 한다. 히브리인들은 셈족 전체에 있어서 ‘사자’즉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자(주인)와 같다’는 것이 히브리인들의 사자에 대한 이해이다. 이것이 아예 Mishnah랍비들이 주후 100년쯤에 유대교를 재건하기 위해서 쟘니아(예브네)에 모여서 구약의 랍비들의 해석의 전통에서 법들을 추출해서 법전을 만드는 것을 미쉬나라고 한다.
의 Berakoth 5:5에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자와 같다’라는 법조문이 나온다. 그래서 사자는 보낸 주인의 ‘전권대사’라는 소리이다. 보낸 주인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전권을 행사할 수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인과 똑같다. 특히 보냄을 받은 사자가 아들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이유는 아들이 상속자이기 때문에 보낸자(아버지)의 전건을 위임받은 자인 것이다. 이 사상이 복음서에도 잘 반영이 되어 있다. 가령 포도원 농부의 비유(막12:5-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악한 농부들에게 아들을 보낸다. 그래서 이 악한 포도원 농부들이 ‘저 자를 죽이자’즉 저자가 상속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다 자신들의 것으로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상속자이므로 특히 아들이 보냄을 받을 때는 더 전권대사 사상이 강한 것이다)에 나와 있다.
그래서 보냄이라는 형식은 꼭 아들이라는 칭호에만 쓰인다.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 이유가 두가지이다. 하나는 지혜신학을 Model로 했기 때문에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 그려지고 있는 것에 대항해서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보냄이 셈족의 사자의 법에 따른 것인데 그때의 사자는 보낸이의 전권대사인데 특히 아들일 경우 더 그렇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보냄의 형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보냄의 형식에서 나타낼려고 하는 것은 ‘예수가 선재한 하나님 편에서 오는 즉 초월해서 오기-우리 바깥에서 오는-때문에 우리를 다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일부가 아니고 초월해서 오는 즉 하나님 편에서 오는 것이다.’ 초월하는 것만 구원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초월의 편에서 오는 구원자라는 말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 편에서 오는 즉 하나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의 구원(목적)을 실제로 이루는 하나님의 일군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실제로 담당하는 ‘중보자,실행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편에서 오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초월해서 오는 분으로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이말은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편에서부터 오는 초월해서 오는 구원자가 됨, 예수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임 등의 뜻이 포함되어 잇다.
하나님+그의 아들+보냈다+목적(구원)
↳사자=주인

전권대사

일군,실행자
5)내어줌의 형식(giving-up formula)
내어줌의 형식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여기에도 항상 쓰이는 칭호가 아들이다-을 내어 주였다(παρα διδομι 영어로는 give up). 이것의 목적은 구원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요3:16이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롬8:32/갈2:20/비슷하게 롬5:10/요일4:10 등에 나온다.
하나님+그의 아들+(내어)주셨다+목적(구원)
하나님의 사랑
내어줌의 형식은 롬 8:32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어쩌면 창22:16의 이른바 ‘이삭을 묶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바침’을 Akdeah Issac이라고 하는데 근거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바울이 이 언어를 반영한다.
그래서 롬 8:32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이가 창 22;16 언어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Akedah Issac은 아브라함이 그의 독생자를 하나님께 내어주었다(제사함). 이것은 랍비 유대교 구원론의 아주 중요한 중심적인 사상이었다. 그래서 가령 랍비 유대교에서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모든 아브라함 자손은 구원받는다’- 왜? 조상들의 공로가 후손들의 모든 잘못을 덮고 조금 남는다. 그래서 구원받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조상들의 공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Akedah Issac-것이다. 결국 Akedah Issac 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지금의 신약신학에 있어서 요한에 있어서는 이것이 세례 요한ㅇ 예수에 대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로다’라는 데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이삭이 자기 제사를 드릴 나무를 지고 갔다는 것과 연결시켜서 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신학에서도 Akedah Issac 신학이 반영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유대학자 G.Vemes는 강력히 주장
. 그래서 요한의 구원이나, 바울의 구원론 곧 요한이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Akedah다로 설명했을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했을 가능성이 많은 이유가 Akedah가 유대 신학에서 중심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게 볼려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G.Vemes책을 읽든지, 최근에 나와 있는 학문적인 주석 중에 롬 8:32을 보면 토론해 놓았다.
.
Akedah Issac을 반영하든지 않든지 간에-적어도 롬8:32은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왜 반영하게 되고 어떻게 반영하게 되고 하는 것은 좀 더 토론할 문제이다.
아무튼 내어줌의 형식에서 그의 아들을 쓰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내어줌의 형식이 나올 때는 주제가 항상 사랑이다. 대표적으로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다’ 그의 아들을 내어줄만큼 사랑하셨다. 그 다음에 롬8:32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서도의 주제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이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그와 더불어 주시지 않겠느냐?’믿는 이로서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아들로 계속해서 죄악의 세상속에서 고난받는 이들에게 믿음의 확신을 주고 하나님의 사랑의 확실함을 주려고 하는 것이 롬8장의 의도이다. 바울이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줄 정도로 사랑을 했는데 이 사랑에서 누가 끊는다는 말인가? 하고 막반 항변-칼이냐,적신이냐,죽음이냐 등등-한다.
그러니까 내어줌의 형식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여기서는 내어줌의 형식에 반영된 그의 아들-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앞에 말했듯이 보냄의 형식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적인 전권대사로서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라고 했다.-이라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하나님의 사랑의 몸담아 나타냄-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때는 예수가 곧 하나님의 사랑 덩어리이다.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신약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의 사랑함에 있다이런 말을 해도 실감이 안나는 것은 너무나도 한국은 하나님을 사랑으로 안가르치고 거짓말로 하나님을 염라대왕으로 가르쳤다. 조금만 잘못해도 유황불 밑으로 내동댕이 치는 분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실감이 안나는 것이다. 성경전체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보냄의 형식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분이다’ 곧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다. 우리의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다.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구원의 소망이 있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인간은 항상 지혜와 선행으로 구원받으려고 한다. 세계 모든 종교가 다 그렇다. 종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문명이 그렇다. 자본주의,공산주의,과학주의 등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래서 지혜를 많이 개발해서 한 사람을 잘 교육시키고 과학기술을 많이 발달시키면 인간이 풍요로워지고,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고 인간성이 회복되고 서로 사랑하고 잘 살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인본주의적인 인간 구원의 길이다. 다른 종교들-불교,힌두교,유됴-도 다 지혜로 얻고 선행을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를 아무리 개발해 보아도 구원이 없다. 왜? 모든 인간적인 것은 피조물의 제한성으로 특징되는 것이고 불안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지혜로,선행으로 도저히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 몰랄라 해버리면 구원이 안일어 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위한 분이다. 하나님도 사랑이다.

바울신학 제17강
지난 시간에는 내어줌의 형식까지 했다.
6)하나님 아들
그 다음에 바울은 하나님 아들을 그의 복음이라고 한다(갈1:11,18ff/롬1:2-4,9/살전1:10/행9:20). 바울은 이런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정의하거나 아니면 요약을 한다.(비슷한 성경구절은 롬8:3). 이것은 복음의 정의 쓰여졌을 때에 하나님 아들은 율법을 완성해서 죄와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고 가장 잘 표현하는 칭호였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복음을 즐겨 정의하고 요약했다.
(1)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으신 하나님 아들로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계시되었을 때에 바울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라고 생각했던 모세 율법을 완성하고 능가하신 분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바울은 율법식학을 표현했던 지혜신학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적용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지혜신학을 표현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을 능가한 이’라는 뜻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능가해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에 완전한 수단이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복음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니까 하나님 아들이 곧 복음이다. 이런 점에 롬 1:2-4까지에 나오는 기독론적인 복음의 정의와 롬 1:16-17에 나오는 구원론적인 복음의 정의가 내용적으로 일치함을 이해할 수 있다. 롬 1:2-4에서는 복음을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기독론적으로 정의한다. 그 다음 롬 1:16-17에서는 복음을 구원론적으로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구원론적으로 전개한다. 지금까지 많은 주석가들은 롬 1:16ff의 구원론적인 복음의 정의가 바울의 정의이고 로마서 전체에서 롬 1:16-17에 내려진 정의를 바울이 펼친다고 보았고 그런데 이러기 전에 자기의 복음의 정의를 롬 1:16-17에 내리고 그 다음에 로마서 본론에서 그 정의를 이제 신학적으로 전개하지 전에 로마서 서두에 복음을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서 초대교회-하나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의 신앙고백을 인용한 것은 자기가 세우지 않은 로마교회에 자기의 복음을 소개하며서 자신의 복음의 전체 이해와 같은 이해를 보여줌으로서 로마 교인들에게 우선 환심을 살려고 로마서 서두에 초대교회의 공통된 ‘하나님 아들에 관한 신앙고백’을 바울이 인용하였다는 식으로 주석가들이 많이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고 바울에게 있어서는 앞의 여러 곳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가 복음을 가장 잘 정의하는 기독론적인 칭호이다. 왜 그러냐면 하나님 아들이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이 인류를 위한 사랑의 체현이라는 뜻을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유대신학에 있어서는 율법이 계시의 수단이고 율법이 인간들에게 구원의 힘이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제 복음이 구원의 힘이라고 한다.
복음이 구원의 힘인 것은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하나님 아들이 율법을 능가하는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라든가, 주라는 칭호들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는 아주 아껴서 사용ㅎ나다. 그러나 대게 ‘하나님 아들’을 쓰는 곳에는 신학적인 논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쓰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에서 인용한 논문에서 보듯이 복음을 정의할 때 쓴다김세윤 박사,‘바울 복음의 기원’pp 127-136 참고.특히 pp132,133 자세히 다룸.
. 또 하나 염두해 둘 것은 바울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신학-요한복음,히브리서-에 있어서도마찬가지인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은 또 우리에게는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해주는 분이라는 뜻이 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인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 되게 해주는 분이라는 것이다 특히 갈 4:1-6/롬8:1-23 등이 성경에 보면 잘 나타나고 있다.
①갈4:1-6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서 여자에게서 낳게 하고 율법 아래 있게 한 것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속량하여서 하나님의 아들들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분이라는 듯이 포함되어 있다. 이 context에서 바울은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에 대한 부름인 아빠 αββα라는 말을 인용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서 율법 아래 있던 노예 취급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아들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자녀들 되어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데 이것이 곧 구원이라는 말이다.
왜? 천지를 지으시고 역사를 다스리는 무한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므로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상속자-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신적 부요함에 참여하여 영생을 얻게 된다.
②롬 8:1-23에도 갈 4:1-6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도 바울이 예수의 독특한 기도형식 중의 하나인 αββα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래서 이 점에서 바울은 예수의 말을 별로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독특하게 αββα라고 부르셨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부를 때 αββα로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이와 같이 예수의 αββα라는 말 사용에서 예수의 가지 이해를 밝힐 수 있냐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그의 추종자들을 하나님 아들들되게 하는 분이라는 자기 이해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을 독특하게 αββα로 부르면서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αββα라고 부르도록-유대인들은 하나님을 αββα라고 부르지 않았다-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해주는 분이라는 뜻이 들어 있는데 이 사상을 그대로 바울이 갈4:1-6과 롬8:1-23에서 해석하고 있다.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해주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들 되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는 맏아들과 동생들과의 관계이다.
πρωτοτοκος(맏으들)⇨첫열매(First Born)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πρωτοτοκος(맏아들,첫아들)이고 우리들은 그의 형제들로 나타난다. 롬 8:29에 보면 예수가 독특한 의미로 하나님 아들이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μονογενης라는 말로 표현한다. 독특한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즉 ‘독생자라는 말로 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첫 아들-맏아들-이라는 말은 첫열매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의 형제들이어서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담도록 예정된 것으로 바울은 말을 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들됨에 참여해서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말한다.

바울신학 제18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표현된 기독론의 결론 부분을 하겠다.
바울신학에서 주로 다루어 왔는데 바울신학에 있어서 기독론은 요한복음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깊이 있게도 나타난다. 그래서 가령 요20:31에는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믿고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라고 한다. 요 3:17/요일4:9,10,14 등에 바울 서신과 마찬가지로 보냄의 형식이 나온다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으로 보내셨다. 곧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신 이다’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를 보내신 아버지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아버지를 생략하고 나를 보내신 이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예수는 보냄을 받은 이’로 지칭이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했을 때 전치사가 εκ이고 다른 저자-세례 요한,제자,사도-들이 온 것에 대해서는 απο 또는 παρα라는 전치사를 쓴다. 예수-하나님 아들-가 하나님으로부터 옴은 εκ를 쓴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된 상태에서 나옴,하나님 본질로부터 나옴을 의미한다εκ는 내부에서부터 나올때 쓰는 전치사이다.
απο(= παρα)는 겉에서 나올 때 쓴다.
.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로 라는 보냄의 형식에서 이와 같은 일련의 언어가 나온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심,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심’으로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planipafertiary=agent)보냄의 형식의 기본 의미(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대권을 위임받아서 그 대권을 실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를 위임받은 하나님의 agent(실행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한 자로서 초월해서 부터왔다. 그러기 때문에 그라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를 위해 대행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오는 자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보낸 분이어야 한다. 초월해서오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와 같은 독특한-하나님 아들 됨-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요한 복음은 μονογενης 이라는 말을 쓴다. (요1:14,18). 또 αναπητος 라는 칭호를 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라(갈3:16,18/요일4:9)”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하나님 아들의 주된 과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는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의 계시자이기 때문에 이 아들은 하나님과 하나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절대로 순종해야 한다.
*On tological(존재론적) Unity
하나님과 아들의 존재론적인 하나됨이 천명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또는 상호 내재-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함(요10:30) 또는 εγω ειμι-“I am”(나는 --이다)-가 요한복음에 8개가 나오는데 두 종교가 있다. 하나는 절대적 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보어를 수반하는 εγω ειμι가 있다. 그래서 여기 “내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내가 세상의 빛이다”“내가 선한 목자다”“내가 참 포도나무다”“내가 양의 문이다”“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런 것들이 I am의 말씀의 보어를 동반(수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의 절대적 용법-너희들이 그 사람 아들을 들어 올리면 그 때에 εγω ειμι 인것을 알리라 으로도 쓰인다. 그런데 이 εγω ειμι는 분명히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가령 출 3:3에 나오는 것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는 소리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분으로 “하나님의 창조주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느니라”는 뜻으로 하나님 이름을 스스로 주장한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과 아들의 하나됨을 나타낸다.
*Functional Subordination(의지의 하나됨,기능적 순종)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는 아들이다.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기 위해서는이 세상에서 그는 이 세상에서에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고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가령 요14:28에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시다”라는 언어가 나온다. 그래서 앞에 나오는 Unity-“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와는 형식적으로는 모순을 일으키는데 ‘나와 아버지가 하나다’라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됨을 의미한다. ‘아버지가 나보다 크시다’는 것은 기능적-아버지는 아들을 보내심,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아버지 일을 행하는 분이고 즉 아버지의 뜻을 전적으로 받듦-으로 요 8:28에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가라쳐 준대로 말한다’ 나의 가르침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다.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보내신-위엄하신-아버지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받아서 한다. 여기서 의지의 일체(Unity of the will)-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의지를 일치시킴-이 바로 순종(Subordination)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세상에 고스란히 순종적으로 성취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Ontological Unity,Functional Subordination-는 계시의 요건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같아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계시의 제일 원칙이 하나님은 하나님만 계시할 수 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줄 안다. 아버지하고 아들하고 99.9%가 같다. 그런데 0.1%가 다르다. 그러면 0.1% 다른 것이 계시가 아니다. 동물학적으로 원숭이와 사람이 가령 99%가 같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10%가 계시가 안되어서 원숭이를 보아도 사람이 어떻게 생긴지 모른다. 그러니까 완전히 아버지와 아들이 같을 때에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안다. 이것이 고대교회에서 소위 Arianism-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아들이 아버지보다 조금 못하다는 것이다-논쟁이다.
이게 큰 이단이냐면 조금 모자라면 계시가 아니다. 아버지를 알 수 없다. 아버지를 알 수 없으면 구원이 안 일어난다. 그러니까 Arius 논쟁이 바로 여기에 촛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Arius는 functional subordination-아버직 나보다 크다(요10:38)-에 논쟁에 근거를 삼았다. 여기에 반대한 아단나시우스는 ontological unity-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다-에 근거를 삼았다. 서로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 말을 가지고 논쟁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존재론적-본질적-으로 같아야 한다. 본질적으로 같아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전혀 독립적인 의지를 가지고 독립적인 행위를 하면 계시가 안일어난다. 아들의 뜻을 보고 아버지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아들의 한 행위를 보고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다. 아들은 전적으로 아버지에게 자기 의지르 ㄹ일치시켜야 한다. 곧 전적으로 자기 의지를 아버지의 의지에 일치시켜야 한다. 곧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본질의 Unity는 필연적 의지의 Unity를 내포한다. 의지의 Unity는 다른 말로 하면 기능적인 순종의 관계이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이런 의미로 욯나복음에서는 ‘아버지가 나보다 크다’‘나의 가르침은 내 가르침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가르침이다’ 아들은 자기 뜻대로 아무것도 못한다. 그를 보내신 이의 권위로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둘-ontological unity와 functional subordiantion-다 충족이 되어야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 이 두가지를 상당히 강조했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적인 신인식의 출발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하나님 아들에 의해서 계시 되었다. 이 말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다는 말이다. 그래야 계시가 일어난다. 그래서 초월자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는 말이다.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객관적 계시 또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면 아들을 통해서 역사 속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오늘 우리에게 계시하게되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이 아들을 통해서 또는 아들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되게 한다. 이것이 주관적 계시 또는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은 아들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가? 똑같은 논리로 아들과 하나여야 한다. 성령을 아들의 영이고 또 아버지의 영이라고 한다. 이것이 내재의 완성이다. 초월하신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아들에게서 내재요 오늘 우리에게 객관적 계시를 주관적으로 계시되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들로 인식하므로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삼위일체로적인 논리의 출발점이다. 앞에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삼펴보기 위해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할 때에 지혜신학의 발달,묵시문학의 이위일체론적인 발달을 이야기한 것이 아래 도표를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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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ꠐ하나님ꠐ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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ꠐ객관적 구원 ꠐ성령 ꠐ
ꠐ(계시) ꠌꠏꠏꠇꠏꠏꠏ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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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ꠐ하나님의 아들 ꠉ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ꠌ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ꠏꠎ 주관적 계시(구원)
그때 문시문학에서나 지혜신학에서나 이위일체론적인 신 개념이 발달했고 왜 생겼냐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것의 완성된 form이 위의 도표이다. 하나님은 초월하신고 내재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행위를 하실 수 있고 또 하시는 분이다라는 것의 하나님이 삼위칠체론적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위일체론적만 있어도 부족하다. 그래서 이것을 성경신학적으로 말하면 전승사적 신개념의 발달이라고 할 수도 있고 옛날 조직신학적인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의 구원사-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려는 과정-을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점차 초월하신고 내재하시는 하나님으로 그린다. 그래서 이위일체로적인 하나님으로 그리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할 경우는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역사속에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한 구원의 행위를 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깨닫도록 하시고 덧입게 하신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활동이다. 하나님이 초월하신 내재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곧 삼위일체론적으로 존재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있는 분이다. 그래서 이렇게 삼위일체 신론이 이렇게 해서 발달한 것이다.
삼위일체 논리의 구조가 이러한데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추상화할려고 하면 더이상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위일체론의 논리적인 구조가 그것이 하나님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구원의 행위를 하신 하나님을 말할 때 삼위일체론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 이러한 논리를 초대 교인들-바울이나 요한,마태,신약의 저자-들과 함께 터득할려고 하지 않고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추상화해가지고 ‘어떻게 세 분이 한 신으로 존재하느냐’ 이런 식으로 문제를 자주 질문하면 추상화되어가지고 어떻게 셋이 하나되느냐 하는 숫자노름밖에 안된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의 근본문제가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느냐를 설명하는 것으로 설정이 된다. 해결할 길이 없다. 이것을 위해 많은 비유를 들고 있다. 어거스틴이 든 빛과 열과 색으로 삼위일체론을 설명했다. 셋이 한 존재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유가 별 의미가 없다. 마치 삼위일체가 셋아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의 문제로 추상화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제기되기 때문에 심지어 한국의 토착신학 한다는 유동식 교수는 ‘한국 사람의 심성이 원래 삼위일체로적인 신을 인식하고 있다’고한다. 왜 그러냐면 화랑도의 정신이 풍류정신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람의 가장 깊은 심성이 풍류정신이라고 한다. 풍류정신의 근본은 한,멋,삶을 연구하는 것이 풍류정신이고 화랑도 전신이다. 그러니까 한 ,멋,삶이 삼위일체라고 말한다. 한신교수 주재용 교수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런데 한국의 대표적 신학자들이 이 모양이냐면 삼위일체의 근본논리와 의미를 이해를 못했기 때문이다. 맨날 조직신학 카테고리로 해석해서 ‘삼위일체란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냐?’에 집착을 해서 그런다. 아무런 의미도 없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때에 기억할 것은 첫째로 19세기-자유주의학파-20세기-종교사학파-에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에 댛나 신앙고백을 헬라철학의 존재론에서 나온 게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삼위잉ㄹ체론적으로 고백하는 자는 신약성경에 유대인들-바울,요한,마태-이다.
둘째로 이들이 쓰고 있는 언어가 어느 context에서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쓰느냐면 예배용어와 신앙고백 속에 들어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의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체험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때에 절대 유일신론 신앙고백-여호와가 한 주이시다-신6:4-에 의해 낳았고 교육받고, 하루에도 몇번씩 암송하고 해야 했던 바울이 요한이 마태가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 그러냐면 그리스도 안에 체험속에 계시된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구원의 행위를 하신 하나님을 논할 때에 하님의 삼위일체론적인 존재를 아주 자연스러운 언어로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헬라적인 ,존재론적인 사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대한 체험-하나님 자기 계시,하나님의 구원-을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이 계시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됨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하는 하나님이 바로 초월하신고 내재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시고 지금 나에게 스스로를 계시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논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어떻게 세분이 하나 되느냐 하는 이것은 조직신학적으로 인간의 지적인 흥미를 충족시키고 변증학적으로 피요한 사유 단계일지도 몰라도 거기에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에 최종목표,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극단적으로 가서 우리 인간의 지혜-인간의 인식능력-는 stop하고 만다. 삼위일체론 신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까지는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나님 초월을 부인하는 Pantheism 이든가, 하나님 내재를 부인하는 Deism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둘다 하나님의 계시,구원이 안 일어난다고 했다. 그러면 인간의 구원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우리 구원은 삼위일체 신관에만 가능하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론적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자력 구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계시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신학이 궁극적으로 삼위일체론에 정박되어 있다. 삼위일체론적 신관이 없으면 계시,구원을 논할 수 없다. 구원,계시가 안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구원을 논한다면 자력 구원뿐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구원론-하나님 은혜에 의한 구원-과 모든 종교들의 자력 구원론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자력 구원체계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말한다. 이것은 신관의 궁극적 차이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에서만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간을 위한 구원의 행위가 이루어진다. 왜 초월하시는 하나님,구원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내재하심을 삼위일체 신관은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요3:16/10:11/15:13/요일4:10 등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내어 주심이 강조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이런 점은 바울신학과 다 비슷하다. 바울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하다. 다만 삼위일체신관-ontoligical unity,functional suboreination-이 요한복음의 묵상이 바울신학보다 좀 더 깉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같다. 히1:1-3에 보면 하나님 아들이 계시자이다. 과거에는 부분적으로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는데 가령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는 다른 모양으로 종말에 완성의 순간에 아들을 통해서 자기를 말씀(계시)하셨다. 그러니까 아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도장-말에 도장 찍으면 자국(형상)-즉 아들이 χαρακτηρ라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자임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 1,2장을 넘어가면 아들이 성육신하여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자라는 사상이 히브리서에도 나타난다. 히브리서도 근본적으로 바울,요한에서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에 있어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자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한 계시자요,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실행자요, 우리를 하나님 자녀되게 하는 분이요 등의 뜻이 들어 있다.
결론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의미는 다음과 같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서부터 나왔다(초월해서 오심). 그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하나님의 실행자 되시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고 그가 하나님의 완전한 구계시자이고 그가 창조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약속의 성취자이시고(고후1:19/롬1:1-4) 그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을 상속받게 하심 등을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에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 아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우리 구원이 초월자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로, 사랑으로 주어졌음’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본질-초월자-로부터 옴. 즉 보냄의 형식 그리고 초월자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즉 내어줌의 형식이다. 그래서 초월자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이 초월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행위를 담당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이 인간 내재속에서 실제-인간들이 스스로 이루어야 할 것-가 아니다.
즉 자력 구원론이 아니고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소리에는 항상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초월로부터 우리에게 은혜로 왔음이 들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신앙고백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이와같이 하나님 이름에 대한 풍부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복음을 아예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로 정의한다. 하나님 아들에 관한 교리가 삼위일체론적인 틀 속에 가지고 있지 않은 종교들이 다 부족한 종교인 것이 여기서 들어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론적인 신의식의 틀 속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교리가 없는 종교들은 신의 초월이 부정되거나 내재가 부정이 되는데 이런 종교들에게서는 구원이 전부 인간의 자력 구원론이다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자기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문제가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제한적 존재가 자기 제한성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어떻게 자기의 제한된 자원으로 고칠 수 있는가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그래서 이런 종교들은 다 부족한 것이다. 선교신학 토착화신학을 읽어면 이슬람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거부감 되는 것이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이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신학을 잘 모르는 선교학자들은 이슬람 세계에서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빼자고 한다. 도저히 뺄 수 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빼면 기독교 신앙이 무너진다.
.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은 원래 하나님이 초월해서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구원의 행위를 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구원의 초월자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사랑을 베푸셨다. 그래서 그분이 스스로 사랑이삼을 나타낸다. 초월하시기 때무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에게 오셔서-내재하신-우리에게 구원의 행위를 하셨다. 이런 것을 다 나타내는 것이 ‘에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기에 구원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서 계시했기 때문에 신의식이 가능하다. 이런 의미로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라는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이것을 빼버리면 기독교에 남는 것이 없고 껍데기만 남는 것이다. 그래서 토착화의 한계가 이런데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들이라는 그림을 쓰지 말고 다른 그림을 쓰자는 것이다. 그러면 이보다 더 좋은그림이 있는가? 하나님과 본질이 하시고,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은 자이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체현의 의미보다 더 좋은 그림이 어디 있는가?
아들보다 더 좋은 그림이 어디 있는가? 인간의 체험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을 그대로 이어 받은 존재가 아들이다.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받는 자가 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위임받는자도 된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들보다 더 좋은 그림이 없다. 요즈음 여성주의자들은 딸이라고 하자는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어떤 비인간,비인칭 등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다.
Ⅱ.하나님 형상 기독론(εικων του Θεου)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고후4:4-6.골1:15). 롬8:29/고전15:49/고후3:16-18/비슷한 사상 빌3:21 등의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을 쓴다. 그리고 εικων과 어느 때는 동의어가 되는 μορφη-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형태)-를 빌2:6에서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 형상-εικων-언어가바울 서신에서만 나온다. 이것과 거의 동의어를 사상 또 εικων 과아주 가깝게 쓰는 말이 요한 신학에도 나오고,바로 앞에서 이야기-히1:1-3-한 그리스도의 시-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 나타난다. 가령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를 λογος로 지칭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헬라 사상 Philo의 사상에 의하면 λογος가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계시로 지칭해서 나타난다. 에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자인 것을 한마디로 하나님 말씀이다. 말씀이라는것은 하나님의 속뜻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λογος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형상과 일치하는 말이다. 또 히1:3에 하나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밖으로 발하는 광채(απανγασμα)-도장 찍듯이 나타내는 큰점(χαρατεω)-는 εικων(image)라는 말과 아주 비슷한 말이고 개념은 똑같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다른데서는 이런 말을 쓰지 않고 오로지 바울 서신에만 쓴다. 또바울 서신에 쓰이되 여러 곳에서 스이고 기독론과 구원론을 위해서 다 나온다.
가령 롬8:29/고전15:49의 구원론적으로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 형상이 가까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아들은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독특한 하나님 아들 예수와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들 된 우리의 관계는 형제간으로 설정되었다. 독특한 아들 예수가 맏아들이다. 우리는 다 그의 동생이다. 이 사상이 히브리서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예수의 자기 이해와 똑같다. 예수께서 독특하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그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게 했다. 자주 하나님 아들됨을 자기 추종자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 아들들 되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아들이 하나님 형상이다. 그러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 아들들 된 우리들은 그의 동생들로서 그의 형상에 같아지는-conform-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형상’이라는 말이 구원론적으로 쓰인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되고 하나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되어서 태초에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 영광에 참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고전 15:49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원래 아담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으나 그 형상에 신실하지 못해서 타락한 첫 아담의 형상을 입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했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 영광’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마지막 아담-하늘로부터 오신 이-의 형상을 입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형상이 구원론으로 쓰였다. 고후 3:16-18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기독론이나 그의 형상에 일치해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이 바울의 서신에서 중요하게 나온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곳에는 안 나타난다. 심지어 요한복음이나 히브리서에 비슷한 사상이 나올법도 한데 그 사상이 발달되지 않았고 막상 이런 언어들은 안 나온다.’
그래서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은 ‘바울은 독특한 기독론 구원론’이라고 할 수있다. 그러면 그 다음 문제는 이것이 어디에서 유례했느냐?
1.기원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기독론과 우리가 하나님 형상을 그를 통해서 회복한다는 구원론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
1)전통적으로 여기에 대한 답-형상 기독론,구원론-은 바울의 아담기독론의 일부라고 한다. 이것도 바울의 독특한 기독론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이라 부르는 것은 바울에게서만 나온다 상당히 비슷한 사상이 요한복음이나 공관복음, 특히 마가 복음 같은데서는 예수의 세례 후 시험 받을 때 시험 기사에서도 아담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예수를 아담과 비교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2)명백히 그리스도를 아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바울서신밖에 없다.
바울 서신에서 형상 기독론과 마찬가지로 아담기독론은 구원론 체계를 낳아 가지고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믿음의 행위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사람으로 부활한다. 이런 것은 다 아담 기독론의 틀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은 Matlew,Black이 말한바와 같이 바울 기독론과 바울 구원론이 ‘Scafolding(집을 지을 때 얽어메고 견고하게 해서 틀으 짜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 기독론이 바울 구원론의 틀을 짜고 있는 것이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다. 그리하여 그의 구원에 참여한다. 사실 이런 모든 구원론은 사실 아담 기독론이다. 그러기 때문에 아담기독론은 바울에게 독특하게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것은 아담이 태초에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고전 1:45과 같이 명백히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가 잃어버림과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으로서 우리에게 하늘의 인간의 형상을 가져다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게 아담 기독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3)다른 사람들은 바울의 지혜기독론에서 나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솔로몬의 지혜 7:33에 의하면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고 있다. 이때의 뜻은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로서 계시의 수단이다.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을 계시하는 자이다.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 의 형상이라고 한다. 형상이라는 말은 형상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앞에서 바울의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는 기독론에서 근접을 이루는 것이 지혜기독론이라고 했는데-보냄의 형식은 지혜기독론의 발달-바울에게 있어서 지혜 기독론은 중요하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문서에서 이것이 전승했다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로 생각했기 때문에 지혜의 한 속성-하나님의 형상 됨-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면 문제는 바울의 아담 기독론,지혜기독론의 기원은 무엇이냐? 지금까지 주로 논쟁이 바울의 아담 기독론의 논쟁의 형식으로 이어졌다. 바울의 아담기독론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는 구구한 학설이 제기 되었다.
①Ur-mensch(태초의 인간)
지중해 세계-인도,이란,이라크,바빌로니아,헬라,이집트 일대-에 태초의 인간-Ur-mensch(primal man)-에 대한 여러가지 사상들이 있었다. 이것의 히브리판이 창세기 1장에 아담론이다. 히브리판의 종말론적 표현이 다니엘 7:13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인자(사람)’으로 온 것이다. 이거시 나중에 여러가지 혼합으로 나타나는데 영지주의에서 태초 인간이 구원자 신화의 중심인물로 나타난다. 그래서 바울이 이처럼 헬라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Ur-mensch사상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알렉산드리아의 필로의 작품에도 태초인간에 대한 상상이 많다. 이런 종교사적 자료들을 총집합시켜 가지고 이런 헬라 세계의 혼합종교에서 바울이 inspiration을 얻어 가지고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다. 특히 Bultmann에 의해서 강조된 영지주의 구원자 신화에서 이것이 나왔다.
Bultmann이 재구성한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에 의하면 ‘태초 인간이 빛의 몸을 하고 있었고 Idea(본질)세계에서 어쩌다 암흑의 세계와의 투쟁에서 져서 타락하게 된다. 그래가지고 그 몸이 산산조각이 난다. 그래서 빛 조각들로 쪼개진다. 그래가지고 암흑의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영혼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태초에 빛의 몸으로 이루어진 태초 인간의 파편들이 빛 조각으로 이것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영혼은 고향을 망각하고 시간(물질)의 세계가 전체의 세계인줄 알고 산다. 그런데 어떻게 된 셈인지 Ur-mensch가 다시 나타나 가지고 여기에 속하는 암호를 발한다. 암호는 바로 비밀지식이다. 암호를 발하면 자기에게 비추었던 파편을 가지고 있는 영혼이 깨우침을 받는다. 즉 지식을 믿는다. 그래서 이 세상에 본향이 아닌 것을 알게 되어서 본향에 대한 지식을 얻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렇게 Ur-mensch는 암호를 발하여서 자기 몸의 파편을 다시 모은다. 그래서 자기 몸을 일어 가고 점점 빛의 세계,본질의 세계로 그 안에서 자기가 구원받음으로 자기 몸에 파편을 가졌던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영지주의적 인간들도 자기 몸에 연합시켜서 구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주주의 신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구원받는 구원자 신화라는 것이다. 독일어로 ‘der erloserythus’영어로는 ‘The redeemer Myth’(스스로 구원받으면서 남을 구원하는자 신화)
바로 이러한 영지주의-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에서는 구원의 수단이 비밀지식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의 교회에 들어가면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암호-비밀지식-를 얻는다. 그래서 영지주의자-영적인 지식을 나누는 자-라는 것이다.
오늘날 구원판 등에 이러한 요소가 상당히 많다. 만약에 영지주의 신학이 이렇다면 바울의 아담 기독론,구원론과 비슷하다. 아담의 이름이 사람이다. 아담이 태초의 사람이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한다. 그래서 그 때문에 그 후손들이 다 암흑속에 산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바울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다. 새로 나타난 아담(사람)이라는 말이다. 영지주의에서처럼 타락해서 몸이 산산 조각이 난 Ur-mensch가 다시 나타나듯이 아담도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또 바울 신학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자기 몸인 자기와 연합시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화래서 그리스도 안-εν χριστος-에 내포되어서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라고 한다. Ur-mensch도 같다. Ur-mensch가 자기 파편들을 가진 자들을 모아서 자기 몸을 이루어 가지고 하늘로 올라간다. 올라간 것 때문에 Ur-mensch는 구원의 길을 개척한 개척자이고 구원의 선두주자이다. 이것이 Bultmann에 의하면 히 12:2에 믿음주의라는 말이 아니고 믿음의 개척자,앞서가는 자, 길잡이이고-απαρ-그 다음에 완성자라는 것을 두고 말한다. Ur-mensch가 자기 몸을 파편으로 가진자들을 앞장서서 본향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말한다. 상당히 그럴듯하다. 그래서 Bultmann의 영지주의 신화에서 바울의 아담 기독론이 나오고 바울의 모든 기독론-하나님 아들의 기독론,예수가 주라는 기독론-이 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령 빌립보서의 찬송시-그리스도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나 스스로 낮추어 가지고 죽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셨다-도 이와 같은 Movement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신약의 모든 기독론이 영지주의 신화를 예수에게 뒤집어 씌워서 역사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식이었다.
특히 아담 기독론이 그렇다고 한다. 이것이 상당히 그럴듯해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미혹했다. 그래서 내 책에 이 설이 틀렸다고 논증해 놓았다. 이것이 틀린 가장 큰 이유가 영지주의 신화가 어떤 문서에도 확실히 나타나지 않는다. 이말은 Bultmann 이 원래 아무 연결이 없는 조각들을 합쳐가지고 자기의 신화를 만든 것이다. 원래 헬라의 이원론적인 인간론에서 인간이 어떻게 영과 육으로 구성된 존재가 됐느냐를 설명하고 인간론적인 토론으로 헬라 이원론에 의하면 영은 본질의 세계에 속한다. 또 어떻게 해서 육인 물질의 세계에 속해가지고 우리가 이 물질의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더 완전한 영혼의 세계에 대해서 동경하게 되었느냐? 어째서 이러한 인간의 실존이 있겠느냐는 헬라적 대답으로 영-영혼,ψυχη-이 타락해서 육-σωμα-속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σωμα에 갇힌 ψυχη-ψυχη가 σωμα에 갇힌 것이 타락이다-가 다시 해방이 되어서 Idea의 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 그래서 ψυχη의 σωμα로부터 탈출로 인한 Idea세계로 귀환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객관화하는 극(dramatication)화 해가지고 이것을 헬라 철학,종교서적에 인칭으로 쓰는 경우가 있었다. 근본적으로 ψυχη의 타락과 σωμα로부터 구원이 객관화되고 극화 되는 것이 있는데 이렇게 될 때 이것은 신화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런 것이 있다. 그러나 Bultmann이 이야기한데로 이것은 원래 태초의 인간에 대한 Speculation에 의해서 태초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태초 인간이 다시 자기 몸을 다 모아가지고 본향으로 올라간다. Bultmann이 재구성한 이런 식은 없다.
헬라의 이런 사상-ψυχη가 뭔가에 갇힌다. ψυχη가 나중에 다시 올라간다.-에서 한 조각 배고 또 고대 문서라든지 등에 Ur-mensch에 대한 Speculation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여기에서 Ur-mensch라는 이름을 빌리고 그리고 창세기에서 아담 빌리고 또 유대교와 동방 종교 연합해 가지고 거기에 보면 영지주의 현상이 2,3세기에 많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또 빌리고 또 나중에 기독교-빌2:1-11까지의 Movement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선재하셨던 분이 성육신하고(내려옴) 다시 높임 받음-적 3단계 구조에 영향을 받아가지고 구원자 신화를 말하는 영지주의가 나중에 있다. 여기서 이 체계를 따지고 해서 Bultmann 이 스스로 조각들을 붙여가지고 만든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전, 신약전 어떤 문서에도 Bultmann이 재구성한 신화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과 조금 비슷한 그림이 나오는 것은 주후 3세기 이후-신약성경에 빌2:6-11까지 같은 선재,성육신,높임의 3단계 기독론의 패턴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영향이 신약성경에서 영지주의로 갔다고 보아야 한다. 영지주의에서 신약성경으로 갔다고 하면 안된다.
그래서 Bultmann의 영지주의 신화론을 철저히 파헤쳐 논 사람이 하나는 베르린 대학의 C.Colpe이고 또 한사람은 H.M.Schenke 또는 스코틀랜드의 R.Mcl wilson 이런 사람이 옳지 않다고 주장해 놓았다. 그래서 신약전체에 영지주의 신화가 없다. 이것은 영지주의를 배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또하나 중요한 이유는 지금까지 요약한 것 주에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Ur-mensch가 타락해서 자기 몸이 암흑세력과 싸워서 산산 조각이 났는데 어떻게 해서 다시 Ur-mensch가 나타나서 자기 몸을 또 모은다는 말인가?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신화라는 것이다. Bultmann의 신화구성에서 조금 잘못되었다. 그래서 원래 Bultmann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Bultmann 의 제자들이 전부 신약성경의 모든 기독론,구원론,교회론을 해석하려고 달려들었다. Bultmann의 제자 H.Schlier-나주에 카톨릭으로 전향해 버림-는 에베소서의 교회론-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머리-을 신화로 해석했다.
E.Kasemann은 골로새서,에베소서에 몸,그리스도 몸에 대한 인간론,교회론을 Bultman이 구성한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해석할려고 한 것이 박사학위 논문이다. 그리고 E.Kasemann이 교수되는 논문은 히브리서의 기독론과 구원론을 완전히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서 해석했다(히12:2).
이 사람의 영향력있는 논문 두편이 빌2:6-11-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을 완전히 영지주의신화로 해석한다. 골 1:15-20-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도 완전히 영지주의 신화로 해석한다. 그는 완전히 자기 선생인 Bultmann 이 재구성한 영지주의 신화로 자기 경력을 쌓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1970년에 죄를 회개했다. 이런 것은 다 엉터리이고 잘못되었다고 옥스포드 대학 강연에서 말했다. 문서적으로도 기독교(신약) 전에 이런 것이 있었다는 것도 없고, 구조상으로도 문제가 많다. 그리고 1973년에 로마서 주석을 출판했다. 여기에 보면 영지주의 신화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해 놓았다. 여기에 보면 Ur-mensch가 산산조각 나 버렸는데 다시 자기 몸을 일으켜 가지고 자기 파편들을 다 모아가지고 구원을 이루느냐?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자기 몸이 다 조각이 나버렸는데 어떻게 또 나타나 가지고 조각들을 모아서 자기 몸을 이루느냐? 몸이 두개나 되느냐? 하나는 원래 가지고 있도 또 조각을 모아서 그래서 두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 사람 말대로 Sslvadus와 Salvatus의 본질적인 것이다. Salvadus는 구원 하는 사람,Salvatus는 구원받는 사람이다. Bultmann이 구성한 영지주의 신화에 의하면 어떻게 된 것인가?
Ur-mensch가 스스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받으면서, 구원하는 자라는 말이다. 이것이 어떻게 일치하는가? 이미 자신도 타락해서(져버려서) 구원을 받아야할 입장에 있으면 어덯게 남을 구원하느냐? 그래서 영지주의 대부분의 문제가 첫째로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고 둘째로 Bultmann이 재구성한 것에는 구조상 문제가 있다. 그래서 영지주의 신화에 근거해가지고 바울의 아담 기독론을 재해석할려고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는데 다 허사였다.

바울신학 제 19강
영지주의-태초 인간의 신화,구원자 신화-에 호소하는 신학자가 E.Brandenvurger가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책에서 주장하기를 ‘원래 아담기독론은 바울의 창작이 아니고 고린도 교회가 그들의 영지주의적 배경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을 해가지고 두 인간-Anthroper-에 대한 교리로 발전을 시켰는데 그래서 타락한 첫 인간과 우리가 연대해서 영혼이 육신속에 갇힌 상태로 살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마지막 애인간-와 연대해서 우리가 이미 세례를 통해서 영혼이 이미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부활이 필요없다고 고린도 교인들이 주장했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주장-두 인간의 교리-을 그리스도 사역을 그리스도 안의 구원을 해석하려고 하면서 틀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대해서 일부 교정을 가한 것이 ‘바울의 아담 기독론이 시발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것은 내 책에서 그렇지 않다고 굉장히 비판했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예수의 자기 칭호-그 사람의 아들-에서 바울의 아담기독론이 나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아람로어 한 사람이란 뜻인데 이것을 헬라어로 고치면 ανηρωπος이고 이것을 다시 히브리 말로 바꾸면 םדא이다. 이래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에서 바울이 힌트를 얻어 가지고 예수를 아담이라고 부르고 최초의 아담과 비교 대조했다. 이런 것이 보수주의 학자들의 견해인데 이것도 별로 옳지 않다. 왜 그러냐면 이러한 증거도 없고 바울 서신에서도 증명하기도 어렵다. 또 종교사적으로 단7:13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창세기 아담과 관계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별로 신통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해결책을 좀 다르게 찾아보자 해서 먼저 아담 기독론의 기원은 해결되지 않았다고 보고 더불어서 항상 기독론의 기원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형상 기독론이 어디서 나왔느냐? 아담 기독론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그러면 아담 기독론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해결이 안되었다. 그래서 이 순서를 뒤집어 가지고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형상 기독론이 먼저 발생하고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으로 비교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형상 기독론이 먼저 성립이 되고 그것에 연이어서 아담 기독론이 성립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가지고 형상기독론의 기원부터 규명을 하고자 한다. 그라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들을 관찰해 보아야 한다.
2.언어
1)형상(εικων)-Image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고후4:4/골1:15)
여기에 εικων, μορφη 라는 말은 빌2:6에 예수께서 하나님의 συνμορφη-form-이것은 image(형상)이라고 번역되는데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은 비슷한, 유사한 대표,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본질의 틀(form)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감추어진 본질을 드러내는 모습이다. μορφη라는 말은 보통 form 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말도 본질의 외적 표현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εικων과 μορφη는 뉘앙스에 있어서 조금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경우 상호 교환용으로, 동의어로 쓰인다. 뉘앙스에 조금 다른 εικων은 모습을 겉으로 드러냄의 뜻이 조금 강하고 form은 본질의 외적 형태라는 뜻이 조금 강하고 εικων은 둘다 비슷함을 전제하고 있다.
εικων이 비슷하다는 뜻을 조금 강하게 나타낸다고할 수있다. 뉘앙스가 조금 다르기는 다른데 고대 문서에 보면 서로 상호 교환적으로 쓰이고 있고 바울의 편지에도 이 두말이 보통 같이 한꺼번에 나온다. 가령 롬8:29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들의 εικων에 συν μορφη 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하나님 아들-가 하나님 형상이다. 하나님 아들에 εικων(Image)에 συν μορφστα같은  μορφη가 되게 했다고 εικων과  μορφη를 항상 같이 쓴다. 그래서 이 말이 뉘앙스가 조금 다르지만 아주 유사하다.
그런데  μορφη라는 말과 εικων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 ʿο μοιομαι(εις)와 비슷하다. 또  μορφη와 같이 쓰이는 말이 σχημα-외적인 형태(form)-이다. 바울도 συν μορφη도 쓰고 συ σχημαται-롬12:2/고전11:13ff/빌3:21 등-라는 말을 쓴다. 이런 말들이 다 동의어들이다.
εικων은 구약에서 -히브리어로 םלצ이다-이말을 보통 번역한다. 그러나 가끔  μορφη가지고 이 말을 번역할 때도 있다. 그런데 םלצ라는 말은 항상 תומד(비슷한)라는 말과 같이 쓴다. 어떤 때는 εικων이 보통 םלצ만 번역할 때도 있다. 그래서 μορφη과 εικων가 거의 동의어이듯이 םלצ와 תוםד는 항상 같이 쓰이는 말이다.
תומד는 사실은 비슷하다는 추상명사이고 םלצ은 드러난 모습-동상-을 말하고, 항상 비슷함을 전제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원래 비슷하다는 추상명사로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사실은 창 1:26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슷한 곧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두 단어가 같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으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어 내자고 한다(창1:26/5:3).
그런데 εικων과 μορφη 두 언어는 헬라 종교에서도 중요하고 철학에서도 중요하고 특히 나중에 영지주의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특히 εικων이라는 말은 유대 랍비 문서에도 아예 헬라어로 빌린 말 זינוהיא로 히브리말에 이렇게 기록이 되어서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는 Theophany-하나님의 나타난 때에 인간이 실제로 모는 것-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זינוהיא을 본다. 헬라어 εικων을 이런 식-זינוהיא-으로 히브리말로 표현했다. 즉 빌려온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환상 가운데 볼때 하나님을 볼 수 가 없어서 하나님을 보는게 아니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זינוהיא를 본다는 식인 헬라 사고방식으로 표현한다. 이때의 זינוהיא 는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지혜가 물체화하고 인격화했다고 했듯이 물체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나의 구체성을 띄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말-μορφη ,εικων 또는 이말을 번역하는 히브리말들-이 중요핟. 이런 말들과 또 같이 쓰는 말이 있다.
2)דובכ/δοξα(하나님의 영광)
דובכ와 δοξα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또는 같이 쓰는 말이다. 또는 하나님의 얼굴-פנה/προσωπον-도 늘 같이 쓰는 말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토론은 내 책에 다 있다. 이런 언어들-μορφη, εικων,δοξα-과 또는 도의어-ομοιομαι(σις)-들이 어떠한 상황속에서 주로 쓰이느냐 하면 주로 Epiphany 주로 Vision의 상황 속에서 많이 쓰인다Euiphany는 신적존재의 나타남을 말한다. 이것의 구체적인 것이 Theophany-하나님의 나타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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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과 유대 묵시문학 또는 랍비문학들을 보면 하나님의 나타남 또는 다른 하늘이 존재가 나타남을 그릴 때 위에 말한 언어들이 주로 많이 쓰인다. 환상 가운데 체험되는 존재를 그리기 위해서 이런 말들이 많이 동원된다. 제일 쉽게 볼 수 있는게 겔1:26이다.
‘사람의 모양 같더라’가 사실은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람의 나타남-הא רב-,같은(כ),또 한번 같은(תומד)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럴때 תומד라는 언어가 쓰인다. εικων , μορφη 라는 말에 히브리적 상대어인 תומד라든지 הארמ-εικων과 동의어-라는 뜻이 있다. 이런 말들이 하나님이 나타남을 그릴 때 이렇게 쓰인다.
םדא הארמןכ תומד
사람 나타남 같은 같은
단 7장도 마찬가지이다. ‘옛적부터 계신 이’ 여기에서 하나님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나타나고 또 하나의 신적존재가 인자같이 나타난다.(שׁנא רבכ) 즉 사람의 아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 네번째 에스라 13:3에 보면 ‘인자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여기서도 תובד라는 말을 쓴다. 또 계1:13ff를 보면 요한이 환상 가운데 ‘인자 같은 이’를 본다. ‘Ομοιν υιον ανθρωπος ομοιον ομοιομαι ομοιομαι(σις) 등의 εικων의 비슷한 말을 쓴다.
또 유대묵시문학의 the testament of Abraham(아브라함의 유언)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보면 영광된 아담이 ‘만유의 주재인 ομοιμαι모습으로 나타나고 아벨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모습-ομοιον υιον θεου-과 μορφη와 같이 동의어로 쓰인다. 그러니까 영광된 아담은 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벨은 바로 하나님 아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
삼상 28:13f에 있는 사울이 엔돌의 무당에게 찾아가서 사무엘을 불러 내라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때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내어서 사무엘을 본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를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그이 책 ‘안티쿠티스’에서 ‘사무엘이 하나님 같은 인간으로 나타난다’ 또는 하나님과 같은 form(μορφη)로 나타난다.
그가 하나님의 iamge(εικων)를 가지고 하나님의 몸체(σχμα)-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래서 죽은 사무엘의 영이 무당에 의해서 이런 형태로 보여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형상-εικων-으로냐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결론)
①초월적인 존재를 환상 가운데 볼 때에 보는 자는 보통 보이지 않는 하나님,또는 하늘의 존재를 히브리 말로는 הארב, תובד로 본다. 헬라어로는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등을 본다.
②하늘의 초월적인 존재가 항상 지상의 유비 형식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럴 때에 הארב, תובד, כ 이런 언어가 쓰이고 헬라어로는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 언어가 쓰인다.
하늘의 실재는 그 위인데 지상의 유비를 들어서 그릴 때 하늘의 실재가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갈 때 σχμα, εικων, μορφη, ομοιομα등의 언어가 쓰인다.
③신적 존재가 나타날 때는 인간과 같은 형상 또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반면에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Adam,Abel,Abrahm등-이 환상 가운데 나타날 때는 거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또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신적 존재가 나타날때는 인간(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아담,아벨,아브라함-이 나타날 때는 하나님의 모습 또는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럴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말이 되는가? 이것은 이른바 논리에서 토톨로지-영이 흙이다라는 말과 같다-와 같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타났는데 사람같이 나타났다고 하면 아브라함이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같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영광스런 형체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것이 유대 묵시문학이나 랍비 신비문학에서 초월적인 존재의 나타남을 그리는데 있어서 정규적으로 쓰이는 언어들이다. 지금 모습,형상,비슷함 등은 초월적인 존재들의 나타남을 환상 가운데 보여줄 때의 context에서 쓰인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에스겔 1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아담(사람)의 겉모양 같은(השׁרב) 같은(תומד)모양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높임(영광)받은 인간이 나타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아들과 같은 모양으로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언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겔1:16에 하나님이 사람의 הארב 또는 사람과 비슷함(תובד)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창세기 1:26은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םלצ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תומד로 만들어었다. 그래서 독일의 유명한 구약학자 G.Von.Rad는 영국의 구약학자 J.Barr같은 사람은 주장하기를 ‘창세기의 하나님 인간을 자기의 형상과 자기의 모습대로 지었다 하는 위대한 신학적 천명은 에스겔서 1장에서 그려진 것과 같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모습)으로 체험한 계시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구약의 문서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창세기 이 부분-창1:26-도 제사장적 문서(P)로,에스겔서-겔1:26-도 물론 제사자적이었기 때문에 소위 P문서이다. 그래서 주로 하나님은 구약의-이사야 6장도 마찬가지-성전에 나타난다.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통 하늘에 계시나 지상에 계시면 성전에 계신다.
성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여 있다.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체험한다(사6장,겔1장). 이것이 이른바 제사장적 문서(P)라고 하는데 창1:26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은 창 1:26에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Theophany-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는 환상 가운데 사람의 형상(모습)으로 보는 계시의 체험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곧 하나님과 인간에는 외적인 모습에 비슷함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이다. 보인다면 우리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분이다. 그러면 그 분은 우리 이성보다 작은 분이다. 그런 분은 하나님이 하나님이 될 수가 없고 구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이성보다 크다. 인간의 지각을 뛰어 넘는다. 그래서우리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이성에 자기를 계시-보여줌-한다. 그러니까 더 크신 분으로서 우리 이성에게 자기를 깨닫게 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서 깨닫게 하느냐면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말이다.이것이 구약과 묵시문학에서의 언어이다.
그런데 지혜 문서-솔로몬의 지혜라는 책 7장에서 그렇고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철학자 Philo의 글등-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혜 또는 하나님의 말씀-λογος-이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사자 노릇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 노릇한다. 그런데 바로 이 계시의 중보자 노릇함이 하나님이 스스로를 보여주실 때-Theophany-에 실제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지혜라는 거이다. 또는 λογος라는 것이다. 왜 그러냐면 지혜와 λογος가 하나님의 εικων이기 때문에 실제로 Theophany할 때 인간이 보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고 지혜나 λογος를 보는 것이다.
그런데 지혜나 λογος를 보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또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은 지혜나 λογος가 하나님의 εικω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 형상을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지 안다.
지혜/λογος⇨하나님의 아들(딸)⇨하나님의 사자 노릇

창조,계시,구원

계시의 중보자

Theophany
이럴때-Philo나 지혜문서의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에는 이런 의미로 지혜나 λογος를 하나님 εικων, μορφη라고 할 때 지혜문서-묵시문학서와 마찬가지로-도 Theophany상황을 염두해 두고 이런 언어를 쓴다. Philo의 책 중에서 재미 있는 것이 있는데 ‘꿈에 관하여’-de Somnis-에서 제 1장 227절에서 241절까지 보면 ‘벧엘에서 야곱이 환상 가운데 하나님을 보았다.’그런데 Philo는 이 사실은 야곱이 하나님을 본 것이 아니고 λογος-하나님의 천사,사자-를 보았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느냐면 λογος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Philo나 지혜문서도 묵시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출현상황에서 본다. 그런데 지혜문서나 Philo에게서 중요한 것은 지혜나 λογος가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εικων 이라고 한다. 이처럼 εικων(형상) 언어를 하나님의 나타남-Theophany 또는 Euiphany-의 현상에서 그릴 때에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하나의 가설을 쓸 수 있는데 바울도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사이라고 하면 εικων, μορφη 언어를 Eupihany 현상에서 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ㅇ다. 앞에서 말한 묵시문학-하나님이 나타나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러나 하늘에 높임받은 인간이 나타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에서나 Philo도 하나님 아닌 하나님의 λογος 즉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나나니까 하나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염두해 두고 위의 가설을 좀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바울이 혹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서 하나님 영광 가운데 나타난 나사렛 예수-바울에게는 인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나타날 때에 그를 유대 묵시문학의 언어료 표현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인식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나타남을 체험한데서 나왔을 것이다는 가설을 성림시킬 수 있다.
그래서 바울도 유대의 묵시문학,지혜문학적 전통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아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서 높임받은 상태로 그의 영광의 광채에 나타났을 때에 그를 두고 ‘그가 하나님 같이 생겼다 하나님 비슷하다, 하나님의 형상이다’하는 이런 언어를 썻을 것이다. 이런 가설을 가지고 그러면 바울의 서신에서 실제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지칭한 구절들을 해석해보면 다메섹 도상의 Christophany 현상을 지적하는 요소들이 있는가를 찾아 보아 가지고 그런 요소들이 있으면 위에서 말한 가설들이 확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언어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 15:47을 보면 첫 아담은 흙에 속한 자라고 하고 우리가 지금까지 첫 아담과 연대에 있어서 흙에 속한자의 형상을 입었는데 마지막 아담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 말할 때 마지막 아담을 하늘에 속한자라고 한다. 즉 ‘του επουρανιον’-하늘의 인간,하늘의 존재-의 형상을 입는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늘의 존재로 말하고 있다. 하늘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를 연상하게 한다. 왜 그러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자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형상(εικων)이라는 말을 하늘과 연결시켜서 보면 다메섹 도상에 체험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빌3:20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기의 영광된 형상(형체)-εικων, μορφη, μορφη의 동의어인 αχμα가 쓰임-으로 바꿀 것이다. 그런데 그 분이 하늘에서 오는 분이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하늘보부터 계시된 하나님의 아들’을 체험한 것은 하늘로부터 올-재림-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른바 성취-prolepsis-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하나님 영광가운데 계시되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가 종말에 재림할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는 것을 빌 3:20-21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후 3:1-4:6이 이주 중요하다. 특히 3:16-18까지를 보면 18절에 ‘우리 모두가 얼굴에 씌운 것을 벗은 상태로 주의 영광을 바라본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보냐면 거울에 반사된 것을 바라보듯이 주의 영광을 바라봄으로서 그 형상으로-την αυτην εικνα-변화되어 간다.-μετα μορφουμεθα-모습이 변화한다는 말이다. μορφη가 변한다고 바울이 여기서 쓰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εικων으로 우리의 형태가 변화되어간다는 말이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봄으로서 변화되어 간다. 지금 바울은 자기가 주의 영광을 본 다메섹 도사에서의 Christophany를 염두해 두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드러나느냐면 고후 4:4,6까지가 그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에게 나타난 그리스도의 광채를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하기도 하고(고후4:4) 그리고 고후 4:6에서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복음은 무엇이냐면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을 선포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함이 빛을 비춤이다. 이 말은 인식하게 하고 깨닫게 함이라는 뜻이다. 고후 4:4,6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의 영광의 빛’ 이런 언어로 강력하게 다메섹 도상의 그리스도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context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서슬러 올라가서 보면 고후 3:18에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일반화해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체험-구원의 체험-을 18절에서 ‘주의 영광을 거울을 들여다 보듯이 보며’ 거울에 들여다 보듯이 보면 주의 영광의 빛이 반사된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닮아간다. 사실 고후3:1-4:6까지는 장,절이 잘못되어 있다. 사실은 4:6까지는 3장에 같이 붙는 것이다. 고후 3:1-4:6까지는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 있어서 Christophany의 체험과 모세에게 주어진 시내산에서의 하나님의 출현-Theophany-을 비교 대조하는 것이다.
모세는 옛 언약의 사자로서 율법의 계시를 받았다. 이 계시를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런데 이 영광은 사라지는 영광이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까봐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는말이다. 그런데 수건은 율법에 가려짐을 상징하고 또 율법을 읽는 유대인들의 심장이 완악해짐-영적인 눈이 못뜨게 됨, 가려짐-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아무리 회당에서 읽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유댕니들은 시내의 계시에 근거해서 회당에 모여서 예배한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의거해서 그렇다. 그런데 바울은 새언약의 사자이다. 복음을 계시받은 것에 근거해서 그렇다. 여기에서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할 뿐만 아니라 쳐다보면 볼 수록 더욱 더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이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으로 우리가 변화된다는 대조를 하고 있다. 왜 이런 대조를 하고 있느냐면 고린도 교회에 모세의 율법에 호소하는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이 모세 율법을 존중하지 않은것을 시비함으로 바울이 대조하면서 그렇게 하는 자들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것인데 모세가 벌써 속임수를 썼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져가고 있는데 이것은 종말에 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야 안에서 완성될 영광에 겨우 pointing하는 정도인데 그것을 절대화해가지고 그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덮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후 4:1에서부터 읽어가면 바로 모세에게 호소하는 유대주의자들이야말로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속임수를 써서 주의 일은 한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이들을 공격한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을 복음의 내용으로 선포한 자이기 때문에 전혀 속임수를 쓸 필요가 없다(고후4:1-6).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자들’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자들이다. 모세가 감추었다(속임수를 썼다)는 말이다. 이들은 바울이 속임수를 쓴다고 했다. 그런데 바울은 거꾸로 말하고 있다. 내가 속임수 쓸 이유가 없다. ‘나는 하나님의 드러난 영광을 그대로 쓴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복음에 무슨 궤휼을 쓰고 숨기고 속임수 쓰지 않는다고 한다. 바울의 복음은 가려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히 드러난 하나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이것은 재창조의 사건이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하는 것은 창조의 사건이다. 이 하나님이 다시 종말에 하나님의 얼굴에 자기 영광의 빛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창조의 사건임을 나타내고 있다.
고린도후서 3:1-4:6
유대인
그리스도인
Sinai Theophany
(모세)
옛언약의 사건
Torah
하나님의 영광
수건(가려짐)
Damacus Christophany
(바울)
새언약의 사자
Gospel
그리스도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 영광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변화

그리스도의 영광된 형상이 변화되는 context에서 고후 4:4에서 그리고 고후 3:18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같이 쓰는 말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영광 가운데 나타나는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바울 신학에만 이 용어가 나온다(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는 것)
.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지칭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형상으로 변화되어가는 자들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이래서 형상 기독론과 형상 구원론이 발생을 했다. 형상 기독론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남의체험을 두고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두 단계로 논증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는 형상이라는 말이 종교사적으로 어떤 context에서 쓰이는가? 그래서 여기서 가설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신전 존재의 나타남의 visions을 그릴 때 형상이라는 말이 쓰인다. 그러니까 바울도 신약성경에서 독특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vision체험과 형상 기독론이 연결되었다는 가설을 얻은 뒤에 실제로 바울을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부르는 본문들을 관찰함으로서 거기에 vision의 체험의 요소들이 있느냐를 보니까 ‘하늘’‘영광’‘그리스도 얼굴에 반사한 영광’ 하는 것들은 ‘하늘로부터 영광 가운데 나타남,영과의 광채로 덮혀 나타난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을’우리에게 연상케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한번도 자세히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고후3:18/고후4:4-6까지 또 빌3:20,21/고전15:49 등을 보면 자연히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을 연상하게 된다. 이처럼 세번이나 그로진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그려져 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울이 다메섹에 당도하기 전에 ‘하늘에 엄청난 빛이, 하나님 영광의 빛이 하늘로부터 내려쬐서 바울이 거꾸러지는 장면이다’그래서 그리스도-높임받은 주-를 본다. 그래서 누가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서 그리는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Christophany현상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빛의 현상이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타남이다. 그래서 바울은 한번도 사도행전적으로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 Christophany현상을 그리지 않지만 반면에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신학적으로는 설명하다. 그 언어들-하늘,영광,빛,εικων-이 우리로 하여금 사도행전에서 그리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현상을 완벽하게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그러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깨달음을 알았다. 신학자 바울에게도 이 인식-다메섹 도상-이 무엇을 생각하게 했는가? 우리 성경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창1:26). 그런데 아담이 계속 하나님 형상으로 머물렀느냐? 유대 랍비들에 의하면 두가지 사상이 있다. 하나는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문장은 유대문서에 안나온다. 아담이 타락하므로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우리는 많이 쓰는데 유대인들은 이런 말을 않는다. 왜냐하면 G.Von Rad나 J.Barr같은 사람의 견해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창 1:26에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다는 신학적인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주해함에 있어서 많은 학자들이 도대체 인간의 어떤 면이 하나님의 형상이냐?’를 가지고 많이 토론해왔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학자만이 아니라 랍비들도 엄청나게 토론했다. 또 영지주의자들도 엄청나게 토론했다총집합적인 책이 C.Westermann ‘창세기 주석’Biblical commentary 시리즈 주석. 역대 의견들이 집대성 되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냐?’
.
요즈음 조직신학에서는 주로 관계론적-인간이 하나님과 관계할 수있다는 관계,fellowship 으로서 인간을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상당히 추상화해서 생각한다. 그런데 G.Von Rad나 J.Barr같은 사람은 형상이라는 말이 도대체 어떻게 쓰이고 어느 상황에서 쓰이고 하는 것을 감안해서 이런 깊이까지도 형상이 의미를 하겠지만 적어도 하나님 형상이라는 개념 한 단면은 외형적인 모습이 비슷함이다. 지금가지 전통신학에서 이면을 무시해 왔는데 이것은 구약과 유대교 전승에 의해서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신약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 내적 본질은 중요하고 외적 형상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고정관념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형상도 없는 분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면 무슨 외적인 모습은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 존재론적인 본질적인 무엇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히 추상적인 의미로만 생각하게된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전체를 두고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 중에 적어도 한 면은 외적인 모습에 비슷함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초월자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할 때에 인간의 이성에 알 수 있게 계시한다. 그래야 계시가 일어난다.
이럴때 하나님이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외형적인 모습의 비슷함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 형상이라는 말의 한 요소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랍비들은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러냐면 아담이 원래 사람 모습이었는데 범죄한 뒤 벌레같이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진 것은 아니다. 원래 사람이었는데 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아담이 범죄한 후 6가지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①얼굴의 광채-하나님 영광을 반사하는 자-을 잃어버려서 추남이 되었다. 하나님과 굉장히 비슷했는데 이제 조금 비슷해졌다.
②키가 줄어 들었다. 키가 엄청난게 장대여서 사방을 덮고 남을 정도로 키가 컸는데 이제는 조그만 해졌다.
③땅의 열매를 잃어버렸다. 땅의 소산이 풍부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아무 결핍이 없이 살았는데 이제는 피땀흘려 농사해도 겨우 굶어죽을지 먹고 살지 모르는 상황이다.
④나무 열매를 잃어버렸다. 포도 한송이가 그때는 장정 열대명이 들어도 못들었는데 이제는 조그만해졌다. 그래서 배고프게 되었다.
⑤하늘의 별(광채)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암흑과 혼돈의 세계에 살게 되었다. 빛을 잃어버렸다. 무질서와 암흑과 혼돈이 되어 버렸다.
⑥영생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잃어버렸다. 여섯가지를 잃어버렸다고 하면서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인간이 하나님 형상됨을 말한다. 가령 창5:3-범죄 이후-에도 아담과 그의 자손 셋의 하나님됨을 천명한다. 유대 랍비들은 바로 여기에 기독교 신학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에 인간의 존엄성(dignity)-가치-을 근거하고 도덕을 근거했다. 그래서 인간이 서로에게 상해-죽이다,살인-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하나님 형상을 헤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계속해서 하나님 형상임을 천명했다. 이것에 근거해서 인간의 가치와 도덕성을 천명했다. 이 두가지 사실이 바울에게도 그래도 나타난다.
가령 고전11장에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아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그래서 랍비들도 마찬가지로 바울도 인간이 계속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롬3:21 ‘범죄해서 하나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하나님 영광은 하나님 형상과 거의 동의어이다. 아담이 잃어버린 것이 하나님 영광이고 얼굴의 광채이고 키가 줄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M.Smith-유대 신학자-는 ‘정확히 말하면-유대 랍비들의 견해-아담이 범죄하므로 하나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형상이 굉장히 줄어든 상태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형상됨이 완전히 부정되지-인간이 하나님 형상 됨이 완전히 부정되버리면 하나님과 fellowship도 못한다-않지만 그 관계가 굉장히 약화되고-아담의 하나님 형상됨이 약화되고-줄어들었다고 보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여섯가지 잃어버렸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랍비들이 말한대로 아담이 하나님의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했듯이 바울도 우리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하지 형상(전체)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대 신학에서 Endzeit-종말,구원의 시대-는 태초의 회복-Urzeit-이다라는 역사관에 있어서 기본원칙-유대 신학에서는 항상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구원의 체험-에 따라 항상 태초의 완전한 상태와 견주어서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 신학에 있어서 구원의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 때의 Exdus라는 말은 애굽에서 도망해서 홍해 건너는데 까지만 아니고 가나안의 정착까지 전체의 사건을 출애굽사건이라고 한다. 그때에 Sinai 광야에서 모세가 하ㅏ님의 영광을 보았다. 시내광야에서 율법이 계시되고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또 그때 시내에서 만나를 먹고 영적인 물-브리바의 바위에서-을 공급받았다. 이럼 체험들을 태초에 아담의 낙원회복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재창조로 보았다. 출애굽의 구원의 체험을 태초에 아담의 창조와 견주어서 재창조라는 범주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때 나타난 하나님 영광이 창조 때의 하나님의 빛이 나타남이다. 그래서 이 세상이 암흑과 혼돈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한번 하나님의 빛을 비췬다. 그때 먹었던 만나가 아담의 타락으로 궁핍해진다. 또 그때 마셨던 물-생명수-생명력을 샘솟게 한다. 그래서 아담이 잃어버렸던 영생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출애굽해서 이런 것을 체험한 이들이 금 송아지를 섬겼다. 그래서 아담과 똑같은 짓을 했다.
그래가지고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다 잃어버렸다. 그래서 종말에 메시야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에 근거-로 제2의 출애굽을 한다. 이것이 종말의 구원이다. 그러니까 종말의 첫 구원은 출애굽과 같고 그것은 그러므로 출애굽 당시에 모든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것이고 만나와 물을 다시 회복하고 이것은 즉 태초의 풍요로움을 회복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때 시온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계시되는 것으로 유대신학에서는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구원자-모세-는 자연히 아담과 비교,대죠된다. 그러면 이 때 메시야도 자연히 모세와 비교,대조되고 그렇게 하여 아담과 비교 대조된다. 그래서 람비문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한 랍비가 하루는 아담과 모세의 무덤에 갔다. 그랬더니 둘이 열심히 논쟁을 하고 있었다. 누가 더 위대하냐? 아담이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내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모세가 말하기를 그러나 당신은 하나님 형상에 머무르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한 내가 더 위대하다고 하면서 둘이 싸웠다”
이 이야기는 위와 같은 것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즉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영광,하나님 형상을 모세가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모세 세대-금송아지 섬김-가 또 잃어버렸다. 그래서 이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야가 다시 나와서 구원의 삶을 삶으로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역사관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첫 구원의 사건을 높이 평가하면 평가할수록 아담에 의해서 잃어버린 것을 더 나쁘게 평가해버릴 것이다. 종말에 구원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면 할 수록 태초 아담의 상실을 더 나쁘게 말할 것이다. 이러한 context에서 간혹 유대 신학에서는 차마 아담이 하나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못하나 이런 context-당신 보다 내가 더 위대하다. 왜? 당신은 형상을 잃어버렸지만 나는 그것을 회복했다-에서는 거의 이런 말을 할 정도가 된다. 마찬가지로 종말에 구원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아담을 더 나쁘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담이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리고 형상도 거의 잃어버렸다. 그래서 종말에 메시야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난다.
바울이 이와 같은 신학의 후예이다. 이러한 역사관,구원관,종말관을 가진 바울에게-고후4:6/고후3:18-반영된 체험-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남-을 했다. 이러한 신학적인 배경에서 바울은 예수가 아담이 잃어버렸던 영광과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 형상을 회복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하고 예수의 마지막 아담의 역할을 대초에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대조하기도 한다. 여기서 비교는 인류의 조상이다. 아담은 첫 창조에서 인류의 조상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재창조에서 인류의 조상이다. 둘다 하나님 형상이다. 그리고 둘다 조상으로서 Stamvater-후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는 가지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둥지이다. 이런 점에서 아담과 예수가 비교되고 비슷한 것이다.
그러나 대조되는 아담을 하나님 형상(영광)을 불순종으로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 후손들을 불순종-범죄함-에 동참케 해서 그들을 죄와 죽임의 권세 아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으로 그의 순종으로 아담의 죄를 속죄해서 그와 연합하는 자들을 구속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한다. 이것이 롬5:12ff에 아담이 마지막 아담의 비교,대조이다. 또 고전 15장에 나오는 아담과 마지막 아담(그리스도)의 비교,대조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으로 체험하고 이 체험은 곧 바울에게 창1:26에 비추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담과 비교, 대조하게 하고 이와 같은 유대교의 종말론,역사 이해에 비추어서 아담 기독론,아담구원론을 이루게 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울에게서만 형상 기독론,형상구원론이 나온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혜기독론의 일부 또한 여기에서 나온다. 지혜 문학에서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다. 그래서 지혜기독론은 일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인식에서 나온다. 아담기독론은 예수의 인성을 주로 확인한다. 지혜기독론은 예수의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자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로 천명한다.

바울신학 제20강
지난 시간까지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I=εικων του θεου-는 인식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얻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인식은 훈련받은 신학자 바울로 하여금 즉각 두가지를 예수와 더불어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이다’왜 그러냐면 지혜문서에 가령 wisdom of solomon 7:26에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Philo의 책 여러 곳에도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지혜가 하나님 형상이라고 할 때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라는 말이다. 지난번에 ‘하나님 아들’을 볼때 지혜가 하나님의 속성인데 점차 독립적인 개체로 인격화한다고 했다. 이것의 논리 구조와 이러한 신학적인 의도를 지난번에 설명했다. 그래서 지혜가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래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의 수단인데 그중에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하나님을 보여주는 자-라고 말할 때에 지혜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학적 전통에 익숙한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본질의 나타남,본질의 계시상태-을 그 얼굴에 반사하는 자로 나타나므로 예수를 구약신학이 유대신학이 제공하는 언어로 예수의 의미를 설명할 때 ‘예수가 곧 하나님의 지혜이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공부한 고후4:4-8까지는 주로 지혜신학의 반영이다. 또 골 1:15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데 보여주는 이가 지혜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지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약과 유대교의 전승사 속에서 또는 조직신학적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 계시에서 지혜의 활동이라고 그려진 것이 사실은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히 드러나 보인다.
완성된 계시에 의해서 볼때 예수의 활동을 불안전한(예비적) 계시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황동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혜의 케테고리를 예숭게 적용했을 때에 유의할 것은 예수가 지혜라 할때에 예수와 지혜를 완전히 identification했다기 보다는 이제 완성된 계시에서 터득한 진리가 과거에 하나님의 구원사에거 지혜의 활동-창조,계시 구원의 중보자 노릇하는 이로서의 지혜활동-이라는것이 사실은 성육신 전에 예수의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육신 전의 예수의 활도을 과거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아직 완성된 계시가 없기 때문에 부분적인 불완전한 계시에서 하나님의 지혜활동으로 깨닫게 되었다.
지혜신학-예수를 하나님의 지혜-에서 이렇게 부르게 되는 데는 ①εικων이 중요한 요인이다.②지난번에 하나님 아들과 관계에서본 바와 같이 Sir24같으데서는 모세 율법이 지혜를 담는 체현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지혜가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의 계시이고 그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얻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이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래서 이런 지혜문서에거는 모세율법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인 지혜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 율법을 공부함으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의 근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율법을 공부함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율법에 담겨 있다. 또는 율법이 지혜를 담아서 표현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깨닫고 지혜가 불충분(불완전) 하게 담겨 있던 율법을 예수가 능가하는 분이므로 예수가 바로 지혜의 완전한 표현이다고 해서 예수를 지혜로 말한다. ③예수의 지혜 가르침이다. 이것이 앙식사가들은 공관복음-마11장 23장 그리고 이것의 누가복음 병행절(Q자료)-에서 보면 ‘예수께서 지혜의 사자’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③은 바울이 나중에 알았다.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터득한 진리로서 예수를 지혜로 생각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의 지혜 가르침이 바울로 하여금 예수를 지혜로 설명하게 하는데 역사적인 뒷받침을 해준 것이다.
(지혜기독론)
그래서 지혜 기독론이 발생을 했다. 지혜기독론의 중요한 관심이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 골1:15/고후2:4-6까지가 지혜기독론의 표현이다.
1)그러므로 지혜기독론은 결국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예수가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이다.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소리에는 본질보다 못한 모조품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본질 그대로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는 계시하는 분이다. 그래서 지혜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천명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2)아담 창1:26⇨새아담(마지막 아담)
‘예수가 하나님 형상이다’라는 깨달음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 형상’으로 보게 됨으로 자연히 바울은 예수를 창 1:26의 아담과 비교 대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랍비들은 아담이 타락하면서 하나님 형상을 잃어보렸다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거의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 영광-דובכ 곧 δοξα는 εικων과 거의 동의어(고후4:6/고후3:18)-을 잃어버렸다고는 말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도 롬 3:21에 ‘우리가 다 범죄해서 하나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 즉 하나님 영광의 결핍상태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하나님 본질에 참여 못함,신성에 참여하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나 바울도 라비들과 똑같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 형상을 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고전11장)한다. 그래서 고전 11장에서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지만 하여간 남자가 계속 하나님 형상이라고 바울을 불러 줌으로서 랍비들과 언어 사용에 있어서 비슷하다. 그러니까 인간이 완전히 하나님 형상을 일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랍비들이 잃어버렸다고 하지 않느냐면 아마 외적인 모양하고 관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이라 할때 적어도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외모의 비슷함인데 아담이 범죄해서 외모가 달라졌다. 유대인들은 아담이 범죄후 여섯가지를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형상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형사이 많이 달라져 조금 남았다. 굉장히 소외되고 질적,양적으로 약화되었지만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러한 언어 사용에 충실해서 우리가 범죄하므로 하나님 영광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만 형상을 잃어버렸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아담이 잃어버린 얼굴의 광채-을 되찾음은 고후 4:6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반짝인다’ 그러니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유대 신학에서 아담이 범죄하므로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잃어버렸다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으로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발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새 아듬으로서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 영광을 회복하고 아담에게 축소되고 악화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비슷한 점이 옛 인류의 조상-죄와 죽음 아래에 있는 조상-과 새 인류의 조상이다. 이때에 바울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역사관은 ‘종말은 태초의 회복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형상으로 나타나고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났다면 그것은 태초의 아담이 가졌던 하나님의 영광과 형상을 회복한 종말의 도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태초의 아담에 상응하는 예수가 종말의 아담이다. 그래서 바울은 새 아담이라고 하지 않고 마지막 (종말) 아담이라고 부른다. 아담이 첫 인류-옛 인류-의 조상인 것같이 Endzeit(종말)은 Urzeti(태초)와 같다. 종말은 태초와 같다는 역사관에 의해서 마지막 아담은 종말의 인류-새 인류의 조상-의 조상이다. 아담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잃어버렸는가?불순종으로 잃어버렸다. 예수는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마지막 아담이 되었다. 그래서 첫 아담은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했다. 그래서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Stammvater이다.
첫 아담의 후손들은 전부 그의 불순종으로 연루시켜서 죄와 죽음 아래 있게 했는데 마지막 아담도 종말에 인류의 stammvater이다. 그래서 그의 순종에 참여-믿음으로 참여-하게 해서 그들을 의와 생명을 얻게 했다. 이렇게 아담 기독론을 대조시키고 있다. 마지막 아담에서 구원론이 나온다. 앞에서 말판 지혜기독론에 따른 구원론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하나님을 알게 됨-을 얻음이다. 그런데 아담 기독론에서 나오는 구원론은 우리가 옛 아담의 형상을 입었던 것과 같이 이제 마지막 아담의 형상을 입게 된다(고전15:49). 또는 옛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옛 아담과의 연합(solidarity)에서 벗어나서 마지막 아담과 연합해서 그의 하나님의 형상에 참여하게 됨을 롬8:29에서는 마지막 아담의 형상에 같은 형상이 된다(μοροφουσθαι).하나님 아들의 εικων에 συμ(같은) μορφη(형상)이 된다. 또 고후3:18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의 εικων에로 μεταμορφουσθαι(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 그래서 앞에서 본 빌 3:21-συμμοροφουσθαι, μεταπορφουσθαι, συσχημασθαι(그의 틀)-도 마찬가지로 같은 틀이 되어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한 하나님의 형상을 덧 입는 회복하는 것이 곧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전개한다.
앞에서 말한 εικων에서 나오는 지혜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을 천명하는 좋은 수단이다. 그런데 형상기독론에서 나오는 아담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천명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칼세돈 이래로의 교회 신학자들이 신약의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의 양성론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를 줄곧 토론해왔다 이것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의 존재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εικων 이라는 카테고리로 설명할 때에 가장 쉽게 설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형상이라는 소리에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같이 천명되는 신학언어이다. 칼빈신학교 교수인 A.Hoekma가 ‘그의 형상으로 지음 받음’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아담 기독론이 바울의 구원론에 scafolding(버팀목) 즉 틀을 짜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요 대신이라고 고백하고 그를 믿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συν χριστω) 해서 그리스도 안에(εν χριστω) 있게 된다. 그렇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그리스도의 됨됨(What Christ was) 그리고 그가 어떤 일을 했는가?(What Christ has done)-이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우리의 한 일이 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짐 곧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대표로 계심으로 말마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서 그의 의인됨이 우리의 의인됨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들됨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들 되고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 됨이 우리의 하나님 형상됨이다. 그리스도가 하신 일-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이 우리의 순종함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대신 벌받음이 우리의 죄에 대해서 벌받아 버림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음이 우리의 높임 받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음-이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내포시킨다. 이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Stammvater 안에 내포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됨됨-What Christ was?(그가 어떤 분이었는가?)-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가 어떤 일을 하셨는가?-What Christ has done?-가 우리의 하신 일로 하나님이 간주하신다.
믿음-그리스도의 대표성,대신성- ꠏꠈ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함ꠏꠎꀲ
(υπερ ημων) What Christ was
What Christ has done

의, 올바른------→우리
위의 표가 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아담됨의 전제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죄은으로서 첫 아담이 우리의 Stammvater로서 우리는 첫 아담이 가지들로서 아담이 어떤 분이었는가가 우리의 어떤 분이고 아담이 한 일이 우리가 한 일이다.
아담과의 solidatrity 속에서 아담에 내포되어서, 아담과 연대해서 우리가 죄와 죽음 아래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마지막 아담-를 믿음- 우리가 새 인류의 대표로서, 대신으로서,죽고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우리가 이 상태-옛 아담-에서 마지막 아담상태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됨됨이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우리의 하신일이 되어서 우리가 그의 의와 하나님 형상과 영광, 그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울 구원론의 틀이데 결국 아담 기독론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옛 아담과 solidarity(연대) 속에서 벗어나서 새 아담의 solidarity(연대)에 들어가므로 새 아담의 운명-자격-에 동참함이 곧 구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은 스코틀랜드의 M.Black 교수가 잘 표현했듯이 ‘바울의 구원론을 가능케 하는 틀(기본)’이다. 이른바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상이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 mysticism-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 운명-함께 죽고 부활해서 생명을 얻음-에 동참이다. 다른 말로는 아담기독론의 구원론적인 적용이라고 볼 수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주제는 ‘인간론’리델보스,Bultmann ‘신약신학’의 인간론-실존주의적으로 쓰여짐-이것에 대해 교정을 시도한 것이 R.H.Gundry “the Soma Biblical Theology” 주로 바울을 다루는 것이다. 불트만은 몸을 총체론적인 관점에서 인간 전체를 몸이라고 한다. 인간이 몸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몸이다. Gundry가 이것에 대해서 중요한 교정을 시도한다. C.U.P에서 나오는 S.N.T.S.M.S 세계 신약학회에서 나오는 단행본 씨리즈에 나왔다.
이다.
σομα문제를 다루면 바울의 교회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독특한 개념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옴’이라고 하는 그림이 어디에서 나왔고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다루게 된다. 또 바울신학에 다룰 주제는 ‘종말론’이다.
질문:창1:26에서 아담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에 있어서 도대체 인간이 어떤 면이 하나님 형상이냐? 하나님 형상이라는게 도대체 인간의 무엇을 지칭하는 말이냐?
답:C.Westmann의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수십가지 이론이 있다. 아담이 하나님의 대권자로 하나님의 피조물을 통치하려는 왕적 권위를 두고 영광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이론이다. 또 요새 인기 있는 이론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하나님 형상이라고 한다. C.Westmann의 창세기 주석을 보면 자세히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제시된 이론이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또는 아담이 하나님 형상이다 할때에 이모든 의미를 다 함축할 가능성이 많다. 지금가지 책들이 인간이 실존에 있어서 독특성-동물들과 피조물들-을 전부 하나님 형상과 빗대어 생각해볼려고 했다. 이것은 사실 다 하나님 형상이라는의미에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중에 중요한 것 중에 항상 간과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외모의 비슷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항상 간과되었는데 그 이유는 항상 사람들이 헬라적 이원론으로 생각을 해서 본질과 형상은 달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현상은 값없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추상화된 것-왕권,하나님을 아는 지식,또는 하나님과 fellowship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했지 외모에 있어서의 비슷함은 생각안할려고 했다. 그것은 항상 값없는 것으로 낮추었기 때문이다. G.Von Rad 나 J.Barr의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언어가 도대체 어떤 context에서 쓰이냐면 ‘하나님이 나타나는 환상을 보는’ context에서 쓰인다. 이것은 분명히 외모를 두고 한 말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제시한 것과 같이 ‘하나님 형상에 있어더 외모도 한 요소이다’ 이것에서 시작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 형상이라고 할 때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의미(significance)를 설파(해설)한다.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배경이 제공하는 언어와 범주를 사용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배경을 구약-하나님의 말씀-계시로 보았다.
그러니까 구약에 하나님의 계시가 제공하는 개념과 범주들로 자기가 새롭게 받은 계시들을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라는 개념 또는 범주와 아담이라는 개념 또는 범주를 예수에게 적용해서 예수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significance를 해설한 것이다. 이것이 한편 지혜기독론이고 아담기독론이라는 것이다. 지혜기독론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중요성을 들춰내는 것이니까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신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아담기독론은 예수의 인성을 천명하게 하는 수단이다. 그러니까 하나나님의 형상에 들어 있는 다른 의미-왕적 권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혜 기독론이나 아담기독론에는 이런 의미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왕적권위가 아담기독로에 있는지 모르다. 왜 그러냐면 롬8:19‘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들의 계시를 간절히 기다린다’ 다시 말해 학수 고대한다. γαρ αποκαραδοκιακαρε라는 말은 목,δοκια는 늘어 뺀다.
좌우 다 제외하고 목을 길게 늘어 빼서 멀찍이에서 오는 물체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말이다. 좌우 안쳐다본다는 말이 여기에서는 없는데 απο라는 말이 여기서 그 기능을 한다. 오로지 목표만 향한다.
이 명사는 신약성겨에 두번 밖에 안나온다(롬8:19/빌1:20). 여기에서 αποκαραδοκια 는 바울이 피조물에 간절히 바램에 의해 쓴 것이다.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석받되는 것이 빌리보 교인들을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롬8:19은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 아들들에 계시됨을 기다린다’ 우리들이 하나님 아들로서 완전히 드러나는 계시-종말론적인 개념-의 사건을 간절히 기다린다. 왜 그러냐면 그 때 자신들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피조물의 대표(왕)로서 범죄하므로 피조물이 같이 그 타락에 참여해서 같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구원도 새 아담-새 인류,하나님 아들들-과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하나님 형상인 인간과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이 다스리게 된 창조와의 solidarity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εικων이라는 말에 이런 뜻도 있는지 모른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마지막 아담에 solidatity 해서 하나님 아들로 그의 형상에 참여한다. 그러니까 로마서 8장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인간들과 피조물의 연대성을 살펴볼 때에 형상기독론에도 이것이 내포되어 있다.
질문:어떤 책에 보니까 ‘하나님의 전 경륜과 내면 속에서 장차 그리스도가 성육신할 그 형상을 아담이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답:이것은 좋은 착안이다. 그런데 성육신할 형상을 아담이 본 받았다가 아니다. 이것은 불트만 간에 ‘아담과 그리스도’라는 주제로 대 논쟁-롬5:12-24 가지의 주석을 가지고-을 벌였다.
K.Barth는 여기에 대한 주석을 ‘Christus und Adam’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Bultmann은 ‘Adam und Christus’를 썼다. 여기에서 순서가 중요한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이고 아담은 그리스도-하나님 형상-의 모조품-Abid-이다.’ 그러니까 바르트에 의하면 ‘바울신학에서 그리스도는 Urbild-하나님 형상-인데 모든 인간들의 하나님 형상됨의 Ur(원형)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원형인 그리스도에 Abild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들로 Abid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간적으로는 그리스도가 늦게 오는 아담 뒤에 왔지만 사실은 영원한 perspective에 보면 그리스도가 원형이고 아담은 그리스도의 abild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불트만은 아담이 먼저이고 그리스도가 마지막 아담인데 무슨 소리냐고 하면서 대 논쟁을 벌였다. ‘아담을 첫 아담’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 이러게 놓고 보면 불트만이 맞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것을 영원한 경륜 속에서 보면 바르트가 맞다. 그래서 시간 내에서의 먼저 오고 뒤에 온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삼위일체론적으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제2위의 하나님 아들-이 Urbild로서 아담이 abild 였는데 이것에 아담이 충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 함으로 그리스도가 다시 우리에게 Urbild가 되셔가지고 우리에게 Vorbild가 되신다는 마이다. 그리스도가 Urbild로서 abild 가 나오게 하는 Vorbild라는 말이다우리말로나 영어로는 나타내기 힘든 말이다.
Urbild-원형
Vorbild-선형(Vor-먼저) Abild의 원본이라는 말이다.
Urbild(원래 원본) 와는 조금 다르다. Urbild가 Abild의 Vorbild 노릇한다. 왜냐하면 Abild가 Urbild를 모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 모방할 때 Urbild가 Vorbild가 되는 것이다.
. 질문의 내용이 바로 이러한 관계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비록 시간적으로 아담 뒤에 오지만 (고전15:45) 예수가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이것의 Abild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론적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제2위이 하나님 아들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이것을 지혜신학에서는 지혜라고 한다. 이것의 모조품이 아담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것에 충실하지 못했다 .예수가 성육신해서 다시 우리에게 자기의 Urbild됨을 보여주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Vorbild로 해서 그이 Abild가 되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앞서서 말한 구원론적인 언어들이다. 우리가 그의 형상에 같은 모양이 되어 간다는 말이다김세윤 박사 ‘바울 복음의 기원’pp266 συμ note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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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구원론)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다음과 같은 metaphors(그림)을 동원한다.
Ⅰ.Justification(의인됨)
Ⅱ.Reconciliation(하나님과 화해함)
Ⅲ.Sonship(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됨)
Ⅳ.New creation(새로운 피조물)-하나님의 형상,영광을 얻음.
이와 같은 그림을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할 때 주로 쓴다. 이 그림들이 전부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관계가 있다. 특히 이 그림-의인됨,화해함-은 바울만 슨다. 신약성경에 ‘믿음으로 의인됨’은 다른데는 없다. 물론 다른데 ‘의’에 대한 개념들이 나오지만 이런 식으로는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됨’이라는 카테고리로 전개하는 것은 아주 바울적인 것이다. 또 하나님과 화해됨 이것은 죄인을 하나님의 원수-εξθρος-로 지칭한다. 롬5장 같은데서는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상호 적대관계-원수의 관계,죄를 하나님께 적대한 행위-로 설명을 하고 그것에 관해서 구원을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는 관계로 그린 것은 καταλλαγη-동사로 καταλλασσω-언어는 바울에게만 나오는 것이다(롬5장/고전5장 골1:15-20). 이것이 엡 2장에서는 교회론적으로 확대되어 가지고 그리스도 몸-교회-안에서 이방인들과 서로 상호 원수 되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해서 하나됨-하나님과 인간이 화해,인류를 갈랐던 두 종류 인간이 하나됨-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확대되어서 해석되어지는 아주 중요한 그림인데 이것이 바울의 편지에만 나오는 개념이다. 물론 화해의 그림을 나타낼려고 하는 실제를 나타내는 사상은 다른 신약 책들에도 있다. 특히 예수이 비유 중 탕자의 비유에 잘 나타난다. 또는 예수께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하는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그 행위에 잘 나타난다. 죄인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께 화해되어서 그 화해의 잔치 베품은 탕자의비유라든지 예수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적 행위에 바울의 화해라는 개념의 실제가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을 구원론적으로 개념화 한 것은 바울에게만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묻기를 왜 바울이 이와 같은-화해-그림을 개발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런 그림을 설명했을까?
이것은 분명히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관계 있다. 왜 그러냐면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구원받고 뒤돌아 보아서 깨달은 것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고 자기와의 적대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화해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화해의 말을 선포하는 사도적 직분까지 주었다는 것이 고후 5장의 자기 변론이다(고후5:11-21). 이것이 바울의 사도적 자기 변호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정통 유대교 출신임을 내세운다. 그래서 족보를 내세우면서 사실은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아브라함에게 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니까 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덕을 볼려면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음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런 것을 받고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의 덕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자신들의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를 자랑하면서 곧 사도들의 추찬장을 내보이면서 자랑을 했다. 그러나 바울은 추천장이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의 원수 노릇했던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환상을 보았다고 갑자기 사도가 되었다고 까불고 다니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자라고 말한다.
또 무엇을 자랑했느냐면 성령의 엄청난 체험(고후10-13장)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환상으 ㄹ보고 이적을 행하고 하는 것을 내세우면서 권위주의적으로 행사했다. 이런 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잘 먹혀 들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바울이 자기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아굴라 집에서 겨우 천막이나 짓고 했던 사람이 우리에게 감히 헌금으로 부양해달라고 말도 못했는데 에보소로 간 뒤에는 밑에 있는 자들을 시켜서 자꾸 돈 내래고 한다. 이제 보니까 바울이 우리 앞에 권위행사하지 못한게 정식 추천자이 없어서 그랬구나! 우리 있을때는 말도 제대로 못한 친구가 저리로 가서는 편지로 아주 묵직하게 쓴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이 변호하는 것이다(고후10-13장).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도 모자라는게 하나도 없다. 족보로 말하면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베냠니 지파요 할례로 말하면 나도 팔일만에 할례 받았다. 또 성령의 체험으로 말하면 너희는 하늘의 일층도 못갔지만 나는 삼층까지 갔으며 말할 수 없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또 사도의 표징들-기사,이적,권능-도 너희 못지 않게 나도 다 행사했다고 한다치유의 능력:치유를 암, 앉은뱅이만 고치는 것이 이치유가 아니고 인간의 모든 아픔을 다 치유하는 것이 치유이다. 인가의 갈등,허무,낙담,못된 버릇, 등에서 변화되는 것을 치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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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도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섬기는 자세로 일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을 섬기기만 했는데 그것이 되어서 미안하다고 나 용서해 달라고 아주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이 ‘내가 매를 들러 오랴’ 그런데 그 중에 추천장 문제로 말하면(고후3장) ‘내가 왜 추천장이 필요하냐’ 여러분들이 나의 추천장이 아닌가 말이다. 나의 복음 선포-사도적 행사-로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으면 그것이 나의 사도직의 바름 그리고 나의 복음의 바름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증명이지 무슨 종이에 쓴 추천장이 필요하냐고 바울이 말한다. 이 추천장을 이야기하는 그들은 꼭 유대인들이다. 왜 그러냐면 문자주의자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모세 율법이 돌판에 써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문자주의만 주장하는데 그것은 문자는 죽이고 영이 살린다. 내가 복음 선포 했는데 그 복음 선포를 성령이 너희에게 강하게 역사해서 우상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그 영의 역사가 진짜 추천장이고 그것이 새 언약-영적인 언약-에 합당한 복음 선포이고 사도직의 행사이다. 모세 율법은 사라져가는 영광이라고 한다(고후3장). 그래서 모세가 사라져 가는 영광을 감추기 위해서 수건을 썼다. 그래서 돌판에 수건이 끼워져 있어 가지고 너희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너희들 마음 속에도 수건이 끼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새 언약을 예언할 때 그 언약을 돌판에 새기지 않고 ‘마음 속에 새긴다’고 했다. 이렇게 지금 바울이 공박에 대해 대답을 했다. 그러면 과거에 핍박자였다는 공박에 대해서는 바울은 고후 5장에서 말하고 있다. 내가 사실 핍박자였다. 왜 핍박자였는가?(고후5:16).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육신대로 안다’는 소리는 역사적 예수를 안 알겠다는 그 소리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육신적인 관점에서 평가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과거에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교적 메시야 사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메시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핍박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가 진짜 메시야임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뒤에는 더 이상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을 갖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꾸 유대 족교,율법을 주자하고 하는 자들은 지금 육신적인 관점에 사로잡힌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결코 옳지 않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핍박자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주셔서 그를 인식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이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의 대속의 죽음에 완전히 녹아버려서 내가 변화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라고 나오는 것은 바울의 문제의 특징으로 ‘자기’를 두고 한 소리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옛 죄인이 그의 대속의 죽음에 힘입어서 구원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옛 것은 다 지나가 버렸다. 더 이상 내 과거를 묻지 말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자요 원수된 나를 용서해주고 새 피조물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은 그 사랑으로 나를 녹인 하나님이 이제 나를 자기에게 화해시킬 뿐 아니라 화해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도직까지 주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전권대사(사도)로 하나님 대신, 사람들에게 더 이상 원수노릇하지 말고-내가 옛날 바리새 시대에 그랬듯이-그리스도를 통해서 화해 되어가고 호소하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고후5:11-21은 구구절절이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카테고리가 화해라는 것이다.

바울신학 제 21강
지난 시간에는 바울의 구원론 중에서 그리스도-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는가 하는 것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그점이 의인됨이다. 오늘은 주로 이것을 보도록 하겠다. 다른 그림들-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한다. 또는 그의 속죄의 제사와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백성 곧 하나님 자녀들이 된다. 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인데 형상에 같아짐으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하고 하나님 영광에 참여한다-을 많이 썼다. 이런 것들이 대개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 중심 카테고리인 의인됨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선 바울이 설명하는 의인됨을 보겠다.
롬3:21-26까지 살펴보겠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됨의 가장 중요한 논지가 집중적으로 천명이 되어 있다. 사상적으로도 주석하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부분이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증거된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관계 없이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인데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또는 율법을 잘 행하는 자들이나 그들에게 아무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를 져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
이 본문이 바울 구원론에 가장 중심이 되는 본문으로서 중요한 개념들이 다 나온다. 그런데 문법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주석하기가 제일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부분이 24저로가 25절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απολυτρωσεως-으로 통하여 그의 은혜-αυτου χαριτι-로, 선물-σωρεαι-로 -은혜성을 강조한 말로서 δωρεαν도 사실은 은혜라는 말이다-또 모든 사람들이 의인된다는 말이다. 주어는 23절의 παντες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곧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δωρεαι 공짜로-로 의인이 된다’
25절에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ον-관계대명사-하나님께서 ιλαστηριον으로 προεθετο(내세웠다) δια πιστεως ο Θεος, εν τω αυτον αιματι(믿음으로 우리가 덧입는다고 하는 괄호 속에 들어가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δια πιστεως ο θεος는 괄호 속에 넣고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εν τω αυτον αιμαιτι(그의 피로 말미암는 ελαστηριον으로 내세웠다. εις-목적구-는 ενδειξις를 위해서 그렇다. 이 ενδειξις는 자기의 의로움-της δικαεοσυνης αυτον-을 ενδειξις 하기 위해서 그렇다. ενδειξις를 번역을 한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서로 전혀 반대되는 의미로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왜 그것이 필요하느냐면 δια την παρεσιν παρεσις 때문에 필요했다. προγεγονοτων(과거에 지은 죄들을) ανοχη(오래 참음 가운데) παρεσις함으로 말미암아 그의 의(δικαιοσυνη)를 ενδειξις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ιλαστηριον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ον προεθετο ο θεος ιλαστηριον(지금 이때에 그의 의를 ενδειξις하기 위함이요) εις ενδειξιν της δικαιοσυνης 그가 의롭고 또 예수를 믿는자르 의롭다 하기 위해서이다‘로 되어 있다.
롬 3:24-26의 본문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다. 그런데 크게 두 종류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해석이 있고 하나는 현대적인 해석이 있다.
(전통적인 해석)
전통적인 해석은 ελαστηριον을 영어로 라틴말에서 온 propitiation으로 해석을 하든지 아니면 expiation으로 해석한다. propitiation이 무슨 뜻이냐면 신의 진노함을 풀어 버리는 제사라는 말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바울이 지금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제사로 해석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인들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그래서 죄인들이 다 죽음을 징벌로 받을 처지에 있다. 아니면 진노 아래 있어서 죽음의 징범아래 있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징법을 십자가에서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진노함을 풀어버렸다. 그래서 하나님이 더 이상 우리에게 진노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사랑을 대하게 했다는 것이 proptitiation이다. 그런데 ιλαστηριον이 헬라오로 이런 뜻이다. 신의 진노함을 풀어버림, appasement(달램)-제사를 드려서 달램-을 통해서 노하지 않게 한다는 뜻이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 그런 저열한-비열한-사상을 적용할 수가 있느냐? 어찌 헬라의 저열한 신들과 같이 인간이 제물을 바쳐서 노한 신의 노를 풀어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성경에 하나님은 거룩한 사랑이시고 또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제물어 내어주셨는데 어떻게 자기가 내어준 제물로 자기 노가 풀어져 버렸다고 할 수 있느냐? 는 논리에 거부감을 느낀 현대학자들은 propitiation이라고 하지 말고 expiation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expiation이라는 말은 ‘죄를 덮어 버림’이다. 그러니까 propiation은 제사를 드려서 노한 신의 노를 풀어버림이고 expiation 은 그 죄를 덮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성전에서 제사 행위 중에 하나가 이스라엘의 죄위에 제물에 피를 뿌려서 덮어 버려가지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안 보고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더 이상 죄인들로 간주하지 않음’ 그래서 expiation으로만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래서 최근 영어 번역에는 대개 expiation으로 번역이 된다. 그러나 보수주의 학자들은 주장하기를 바울의 책 중에 로마서 자체내에서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엄연히 중요한 개념이고 죄인들을 하나님의 원수라고 지칭하기도 하고 또 롬8:3에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고 정죄했다고 하고 또 갈3:13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한다. 또 고후5:21에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죄로 만들었다고 한다. 여기서 ‘죄로만들었다’ 할 때 이말은 바로 αμαρτια 또는 히브리어로 ישׁתכ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로 protitiation을 말한다. 이런 언어들을 무시하고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징벌하시고 저주하신 형법적-penal-카테고리를 적용해서 안된다고 말하는 것은 순전히 현대인들의 생각히지 바울의 객관적인 용어를 보면 바울이 전부 형법적인 언어를 쓴다. 그러니까 porpitiation이라는 말을 바울이 지금 ιλαστηριον에 의도했다. 이것을 고집하는 학자들이 대개 보수주의-복음주의-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 이것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형법-penal-적인 것은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의 사건이 되었느냐? 즉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다. 어떻게 십자가가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고 화해를 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이루게 하나를 할대에 전통적인 개혁주의,복음주의자들의 설명을 penal substitution theory라고 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substitution-으로서 하나님의 형벌-penal-을 받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함,심판,징벌을 피하게 되느냐?’ 즉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서 우리가 그 하나님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이것을 갈3:13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롬8:3/고후5:21). 그러니까 롬3:25절도 이렇게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할려면 ελαστηριον이 expiation을 포함할지 모르지만 너무 약하고 더 중요한 요점은 propitiation에 있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한다. 최근 학자들 중에 이것을 굉장히 강조한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L.Morris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 부분에 대해 박사 학위 논문도 쓰고 일부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썼다.
그러면 εις ενδειξις라는 말은 영어로 to porve로 쓴다. 이 말은 ‘자기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로 해석한다. παρεσις는 overlooking(간과함)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해서 본문을 다시 한번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선물로(공짜로) 의롭다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απολυτρωειως-이 어떻게 이루어졌느냐면 25절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그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풀어버리는 우리 대신 벌받는 대속의 제사로 바쳤다. 이것은 그의 의로우심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이다. 왜 그의 의로움의 증명이 필요했느냐? 그의 오래참음 가운데 우리가 과거에 지은 죄들을 그가 지금까지 간과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때에 자기도 의로우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기 위해서 자기 의를 ενδειξις(증명)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리이냐면 이때의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법정의 개념-죄인들을 벌주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가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과거에 지은 죄를 간과하셔서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되었다. 하나님의 의가 증명되어야 할 입장에 놓였다. 하나님이 정말 악인을 벌주고 의인을 상주는 분으로 되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은 죄를 간과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를 증명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예수를 지금까지 인간들이 짓는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사실은 의로운 진노함을 나타냈는데 그 진노함을 인간들에게 다 풀면 인간들이 진멸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들 대신으로 세워서 그에게 하나님의 의에 의한 심판을 대신받는 제사로 삼아서 인간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버리게 했다. 26절에 ‘그래서 이제 이때에 하나님이 이 예수를 그리스도의 ιλαστηριον(구속의 행위)에 근거해서 죄인들을 예수를 믿는 믿음을 보고 의롭다함에도 하나님이 불의하지 않고 자기가 의로움을 증명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타협하지 않고 예수 믿는 자들을 지금 현재 의롭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다시말하면 전통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의는 우리 죄인들을 심판해서 진멸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propitiation으로 내세워서 그로 하여금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도록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타협되지 않고 천명되었다. 벌주는 의는 천명이 되는데 그것은 예수가 대신 받게 함으로 된다. 동시에 그의 사랑이 또 증명됨이 전통적인 해석으로서 이것을 penal substitution theory 라고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해석이다.
(현대적인 해석)
독일의 W.G.Kummel(퀨멜) 이래로 대부분의 독일 학자들과 상당수의 영미 학자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다. W.G.Kummel은 이 두말-ενδειξις,παρεσις-의 사용법에 대해서 자세한 연구를 통해서 ενδειξις가 ‘증명’이라는 뜻도 있고 παρεσις가 간과함이라는 뜻도 있지만 또 무슨 뜻이 있느냐면 to show(나타내기 위해서) 또 παρεσις 는 to pardon (용서함)이라는 듯도 있다. 그래서 롬 3:24-26은 사실 이런 뜻으로 쓰였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후로 많은 학자들은 롬3:24-25은 바울전에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여기 인용을 하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믿음으로 말미암는’-δια πιστως-라는 말 같은 것을 바울이 삽입을 해가지고 약간 보충해서 지금 여기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울 전에 교회의 신앙고백인 ιλαστηριον이 이제 현대적인 해석을 하는 사라들 사이에서는 해석이 구구하다. 어떤 사람은 expiation이라고 한다. propitiation은 다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ιλαστηριον 이 성전의 지성소에 언약궤의 뚜겅을 시은좌라고 해석도 하고 또는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죄를 덮어버림으로서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목케 하는 화목제사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로 해석한다. 그런데 다 어디에다 주안점을 두냐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 제사장이 대 구속의 날-렘16장-에 대제사장이 성전의 가장 깊숙한 지성소에 가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놓인 시은좌 위에 피를 뿌림으로서 과거 한 해 동안 지은 이스라엘의 죄가 다 덮혀지고 그래서 다 용서되고 그래서 과거 일년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들로 말미암아 손상되었던 하나님과 그의 언약의 백성간에 언약의 관계가 다시 한번 새로워진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한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대 구속의 날에 ceremony였는데 지금의 바울전의 예루살렘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와 같은 성전의 대 구속의 날에의 제사의 종말론적인 완성으로 해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새언약을 세운 새언약제사이다. 죄가 언약관계의 파손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대 구속의 날에 속죄 제사들은 죄로 말미암아 파손된 언약 관계를 수선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해를 시작함에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시작 할려는 것이다. 이것의 종말론적인 완성을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 구속의 날로 속죄의 제사 곧 언약을 새롭게 하는 제사로 본 것이다. 바로 바울 전의 교회가 이렇게 보았다.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냐? 현대적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움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이때 하나님의 의는 더이상 법정의 개념이 아니고 언약의 개념-관계론적 개념-이다. 곧 구약에서부터 오는 하나님 의의 가장 기본적은 개념은 관계의 신실함이다. 구약에서 의라는 것은 הקדצ 또는 צדק는 원래 관계론적인 개념으로서 관게에서 나오는 의무를 충족함이 의라는 것이다. 관계에서 나오는 의무를 다하여 옳바른 관계를 유지함이 ‘의’이다. 그래서 부자간의 관계에서 아버지에게 아들을 잘 양육할 의무가 나온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을 잘 양육할 때 아버지가 의롭다고 한다. 아버지가 의롬움은 부자간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이다. 부자간의 관계에서 아들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를 공경하고 순종할 의무가 있다. 아들이 그 의무를 다할 때에 부자간의 관계를 옳바로 잘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란 무엇이냐?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언약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냐? 또는 우주(인류)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하나님과 온 피조물의 관계의 대표적 표현이지 그 원칙은 똑같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노릇해 주시고 우리가 그의 하나님 노릇해주심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장초주와 피조물의 관게이고 그의 특별한 대표적 형태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다’라는 언약의 형식에 의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언약의 관계를 이스라엘과 맺음으로서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해줌이고 이 언약의 관계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해서 사는 의무를 진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이런 의미로 언제 의로운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할 때 이스라엘은 의롭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노릇해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란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신실성이 하나님의 의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언약에 대한 신실성으로서 그것은 항상 구원의 하나님으로 나타난다. 하나님 노릇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령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내었을 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움을 펼쳤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해주겠다는 언약을 지켰다는 말이다. 그 언약에 나오는 의무를 신실하게 지켰다는 말이다. 또는 사사들의 성전에서 블레셋 족속들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을 이기게 하신 것을 하나님이 그의 의로 나타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언약의 신실함인데 이것은 항상 구원의 힘으로 나타난다.
지금 현대적 해석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렇게 이해한다. 그것은 구원의 힘으로 나타나는 언약의 신실함을 말한다. 그래서 바울 전의 예루살렘 유대교회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했다. 그것은 유대 성전 신학의 종말론적 완성으로서 과거에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이 지은 죄-언약을 지키지 않은 죄,하나님 의지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는 당연히 벌을 초래하나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불의하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겠지만-불의하지만-하나님은 의로우신다. 하나님은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내어주심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이렇게 세워서 언약을 새롭게 하는 제사로 내세운 것은 속죄의 제사-언약을 새롭게 하는 제사-에 힘입어서 언약을 지키지 못했던 하나님 백서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사건이다. 곧 구원의 사건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나타냄이다. 자신이 너희 하나님이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노릇해주겠다고 약속한 그 약속을 지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해주심이다. 언약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하나님 백성될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그들의 죄를 속하는 그리하여 언약을 새롭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다시 한번 자기 백성으로 만들어서 자기의 부요한 은총에 의지하여 살도록 만듬-하나님이 내가 너희 하나님이다-이 언약의 자기 쪽의 의무를 지킴이다. 이것이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쪽의 의를 나타낸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과거에 지은 죄들을 용서해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언약을 파기해서 죄를 지었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이 징벌해버렸으면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도 못한다. 그러면 언약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기 쪽의 의무를 다함이 못된다. 그들을 용서해줌으로서 내가 너희 하나님 이라는 하나님 노릇해주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의 제사 곧 언약을 새롭게 하는 화목제사로 내놓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현대적 해석이다. 더 자세히 보려면 전통적 해석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주석이 I.C.C에서 나온 Cranfield의 로마서 주석이다. 그러나 현대적 주석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주석은 E.Kasemann(케제만) 주석이다. 이 두 주석이 1973년 무렵에 동시에 나왔ㄷ.
현대적 해석에 의하면 이와 같은 바울 전의 신앙고백을 바울이 수용을 하고 여기 지금 δια πιστεως 라는 말을 삽입함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줌 즉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하셔서 속죄의 제사-새언약의 제사-로 내세워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 백성되게 함을 믿음으로 덕입는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이말은 바울이 보충함으로 바울전의 교회의 신앙고백-바울전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일단 유대인들에게만 적용-을 이제 확대해서 온 인류에게 바울이 적용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22절에 말한바와 같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27절,31에 더 강조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과 둘 다 믿음으로 구속에 덕ㅇ르 입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이런 식으로 지금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사를 덕입는데 대해서 차이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것이 원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유대인들에 대한 언약의 성취로 해석했던 것을 바울이 온 인류에게 확대해석한 것이다. 현대적으로는 이렇게 해석을 한다. 두 해석이 서로 다른데 어느 것이 옳은가? 사실 바울이 바울 전의 신앙고백을 많이 인용한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상적으로 어떤 것이 옳은가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바울 신학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제 그래서 한 학기 정도의 토론할 과업으로 들어간다. 나는 내 책에서 둘다 옳다고 보았어요. 어느 것을 고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좀전에 이야기한바 롬8:3/갈3:13/고후5:21절 등과 더불어 본문을 해석하면 이 전통적 해석도 참으로 옳다. 철두철미하게 맞다. 더 나아가서 이 의인됨(δικαιουν)-to justificaiton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인정된다.’ 여러분이 소위 칭의론 또는 의인론이라고 하는데 to justification이 무엇이냐? 법정의 개념이냐? 그래서 의인이 무죄석방된다는 말이냐? 의인으로 선언됨의 말이냐? 소위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 의인으로 부죄석방의 뜻이냐? 아니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들어감 그것이 의인됨이다. 의인됨이라는 것은 법적인 관계이냐? 그래서 선언적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함(=무죄석방-의인이라고 인정함) 선언적이다. 법정의 판사가 ‘너 무죄’‘너 의인’ 그래서 ‘너 벌을 받을 필요없음’라는 그 행위냐? 최후 심판때에 일어난 그 판결이 여기에서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것이냐? 아니면 관계론적인 개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인된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에 들어감-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속에 있음-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노릇해주시고 우리가 그의 하나님 노릇해줌에 의존해서 순종해서 삶, 그런 올바른 관계를 맺음(들어감)을 말하느냐? 바울서신 전체를 보면 둘다 그런 의미가 있다. 이래서 바울의 믿음으로 의인됨이 문제를 일으킨다. 이 문제는 시간이 없으니가 앞으로 더 연구하기 바랍니다. 전통적인 의인론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유산으로서 되었기 때문에 알고 있을 줄 안다. 그러나 바울의 의인론에 있어서 문제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도대체 ‘δικαιοσυνη του θεου’(신실성)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이냐? 지금 전통적인 해석에 의한 법정의 개념이냐? 아니면 구약에서 나오는 관계론개념으로서 도리어 하님의 구원행위(구원의 힘,또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힘)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δικαιοσυνη을 받는 것(justification의인됨)은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를 벌 을 주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자를 상을 주는 그런 개념이냐? 아니면 하나님과 관계론적인 개념인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구원의 힘들을 말하느냐? 다시 말하면 의인된다는 것은 단순히 무죄석방하고 의인으로 인정됨을 말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감을 말하느냐?
그 다음에 의인론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냐?
바울은 δικαιουν(의인됨)-to justification 또는 δικαιουσθαι-ro be justified(의롭다함을 받음,수동태) 바로 이것을 율법의 행위가 없이 (율법 없이, 율법과 관계없이 롬3:21).
롬3:21 “Νυνι δε χωρις νυμου δικαιοσυνη Θεου πεφανεερωται μαρτυρουμενη ουπο του νομου και των προφητων 율법과 관계없이 롬3:22 δια πιστεως-믿음으로만,δια χαρις,-은혜로만 또는 공짜, 바로 이것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모른다. 자 그렇다면 무슨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윤리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면 윤리는 어디에 근거하느냐? 우리가 율법의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의인으로 선언되면 롬6:1,14에 있는바 ‘자 죄를 더 짓자’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크게 하자. 소위 Antinomianism 즉 반규범주의,방종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냐? 바울의 δικαιοσυνη (to justification)교리가 윤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또 한가지는 가령 슈바이쳐 또는 그전에 학자들이 지적한 바 바울의 구원론은 두개의 체계가 있다. 하나는 신비주의 체계 곧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고(συν χριστω) 그리스도 안에 내포됨되어서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해서 신비주의적으로 성례주의적으로(먹고 마시는 성례)와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는 세례와 먹고 마시는 성찬식의 의식을 연합하여 내포되어서 운명에 동참하는 체계가 있었다. 하나는 법적인 개념인 재판석 카테고리가 있었다. 이렇게 법적인 개념으로 보고 있었는데 AD 10 세기 자유주의 학자들은 법적체계로 보고 헬라주의자들은 신비주의적(성례주의적) 체계로 다시 보았다. 그런데 슈바이쳐는 17세기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것은 유대교적 배경에서 나온 카테고리이고(그리스도의 구원을 해석하는 카테고리이고) 이것은 헬라 신비종교 성례사상에서 나온 카테고리이다. 이것은 서로 완전히 따로 논다. 통일되지 못하고서 슈바이처는 그렇지 않다. 이것도 헬라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유대교의 묵시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묵시사상의 메시야사상에서 나온것인데 메시야와 연합하는 것이다. 메시야의 운명에 동참함,이것도 유대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슈바이쳐는 바로 그것만 고정하고 그 나머지는 그전에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한데로 주장했다. 이것과 저것은 따로 놓고 더 나아가서 슈바이쳐는 이것이 바울의 구원론의 중심이고 이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종교개혁자들이 바울의 복음의 진수로 보았던) 이 구원론의 카테고리는 구체적인 것에 불과하고 슈바이쳐 언어로 한다면 이것은 바울신학의 주분화구(바울신학을 표현한 수단)이고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부차적인 곁다리 분화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서 교회 유대주의자들의 도전 때문에 논쟁용으로 갈고 닦아서 만들어졌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마치 바울의 구원론 중심인 것 같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바울의 논쟁교히이다. 슈바이쳐는 바울의 구원교리의 근본을 두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 가운데 바울의 윤리가 나온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주고 부활했으며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우리가 새롭게 살아야 한다.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말 속에서 새로운 윤리가 나올 수 없고 도리어 방종주의가 나올 수 밖에 없다(반율법주의:율법의 행위를 철저히 부인하는 자들). 또 하나의 문제는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기껏해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빌립보서에만 나온다. 다른 서신들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들은 달았다. 그래서 의인론을 논함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다 해결해야 되요. 진짜 서로 다른 주제가 바울의 구원론에 신비적 카테고리와 법적 카테고리도 혼합되지 못하고 엉성하게 있느냐? 이것이 하나고 둘째 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윤리에 어떻게 연결되느냐? 세째 믿음으로 의인됨이 바울신학의 중심이냐? 아니면 곁가지이냐 별로 중요하지 않느냐? 이것을 해결하지 위해서 ‘믿음으로 의롭하함’을 정확히 해석함으로서 가능하다. 그래서 시간이 다가서 말할 수 없고 해결의 방향만을 설명을 하면 ‘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으니까 많은 책들을 참고 바랍니다’
해결방향 제시
1)믿음으로 의인됨 얻는다는 면에서
믿음이 무엇이냐? 이것은 나의 책 ‘구원이란 무엇인가’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이것이 복음의 사건이고 복음이다. 왜 이것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의인이 되느냐, 구원을 받느냐? 바로 열쇠가 여기에 있다. 그가 우리 대신이며 대표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의 대신인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또 우리의 대신인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의도미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하신 일에 참여하게 함 그리하여 구원을 받는다.그래서 믿음으로 의인된다는 말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그래서 신비주의 카테고리와 법정적 카테고리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고 믿음의 사건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고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킨다. 왜 믿음은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했음을 받아들임으로서 우리 대신 인정함을 우리를 내포시킨다. 이 믿음의 극화가 세례라 할 수 있고(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두개의 카테고리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이다. 또 하나 윤리의 문제, 두개 카테고리가 하나라면 더 이상 어느 것이 바울신학의 구원론에 있어서 어느것이 주된 카테고리냐 어느 것이 부차적인 의미 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만다. 그러면 그 문제는 다르게 제기된다. δικαιοσυνη, δικαιουν 원어가 로마서 혹은 갈라디아서 빌3장에만 나오고 다른 서신에 전혀 나오지 않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의 대답은 두가지이다.
가령 고전 1:30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또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등 고린도 전후에서도 나오고 살전 1:1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에수시니라’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의인으로 선언한다. 여기에는 바울의 구원론이 펼쳐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농축된 언어로 나온다. 왜 펼쳐지지 않았느냐? 바울이 이렇게 쓴 교회들이 그처럼 그 구원론이 되지 않아서 펼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나 빌립보 교회, 로마 교회에 쓸 그런 이유가 있다. 둘째 고린도전후서에서 바울은 은혜로만 믿음으로만 의인됨의 원칙을 고린도의 지혜신학에 관하여 펼치고 있어요. 인간은 유사이래로 두가지 구원의 길을 항상 추구하고 있다. 인간의 자구책(자력구원)은 두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인간이 지혜를 쌓음으로서(문명을 발달시킴으로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것이 특히 헬라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이다. 또 하나는 종교적 선행이나 수양을 쌓거나 덕행을 닦아서 스스로 의를 쌓아서 구원을 얻으려고 했다. 이 두가지가 인간 스스로가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이 인간의 자력구원 자구책이었는데 은혜로만,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초월해서만 올 수 있음을 말한다. 왜 강조하느냐면 구원이 되기 위해서는 초월해서 와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재적인 자원 동원해서 선을 쌓고 지혜를 쌓아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런 것들에 구원을 걸려고 할수록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의 잠나심과 헛된 것을 믿는 자기자신의 믿음을 더 사랑하는 자이다. 육신에 환상을 주는 것이 율법이다. 이것을 바울은 육신이라고 함. 육신으로 하여금 자기주장으로 하여 스스로 자구책을 구하여 지혜를 탐구하여 선행을 해서 구원을 얻을 수있을 것 같이 육신에 환상을 주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이고 율법이 지극한 해요 어떻게 율법을 지키면(선행을 쌓아서 내가)구원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꼼짝 못하고 나에게 축볼하지 않고 못베기게 만들겠다. 내가 십일조를 이렇게 많이 하고 새벽기도를 이렇게 많이 했는데 자기가 나를 구원안하고 배겨?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위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율법행위라고(육신이라고) 했다. 율법과 육신-사탄-죽음 이것은 악의 순환이다. 그래서 완전히 나누어야 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에서는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요.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은 이렇게 적용해야 한다. 신비적인 카테고리나 원리적인 카테고리가 분리된 것이 하나이다. 그래서 믿음의 현상이라는 것으로 다 해결이 된다. 이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다른데서는 안나오느냐? 다른 서신에서도 나오는데 그것이 펼쳐지지 않는 이유는 ...
그러나 고린도에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어요. 그것은 지혜와 문제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요. 그러면 문제가 하나 더 남았는데 윤리는 어떻게 되느냐? 이것은 좀전에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의’를 관계론적으로 풀면 쉽게 해결되요. 의인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감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 대명교회
글쓴이 : 행복충전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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