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스크랩] < 기독교 강요 >제4강좌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아들 2013. 1. 24. 11:15

 

< 기독교 강요 >제4강좌 삼위일체 하나님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4)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9년 05월 21일 (목) 14:07:00 기독신문 ekd@kidok.com
 
‘세 위격’의 하나님은 ‘동일 본질’ 
 
고유한 특성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아…
관계 따라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려
 
'제4강좌' 삼위일체 하나님: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세 인격으로 계심(기독교강요 1.10.1-1.13.29)
 
1.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심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1.13.1). 하나님께서는 본질(ouvsia, essentia, essence)에 있어서 한 분이시다. 즉 한 실체(substantia, substance)시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esse). 그런데 한 분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적 존재(subsistentia, subsistentia)로 존재하신다(subsistere).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u`postasij, hypostasis)과 세 인격(proswpon, persona, person)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위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시나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시다. 각각의 위격은 고유한 특성(proprietas, proprium, property)에 있어서 서로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각 위격은 하나님의 전 실체를 가진다. 그러므로 삼위께서는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본질(o`moousia)이시다. 삼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하나님이 없는, 단지 공허하고 무가치한 하나님이라는 이름만이 우리 머릿속에 떠다닐 것이다”(1.13.2, 6).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는 아들을 아버지의 ‘위격의(thj u`postasewj)’ 형상이며 영광의 광채라고 말씀함으로써 성부와 성자가 위격에 있어서 구별됨을 분명히 드러냈다(1.13.2).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제2위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삼위일체로서 ‘더욱 친밀하게’ 알리셨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영원하신 말씀께서 성부와 함께 계신 성자로서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였다(요 1:1 주석).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믿음과 세례가 하나라고 하였다(엡 4:5). 그런데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로서 거행되는 세례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삼위일체 진리를 확증하셨다(1.13.16).
 
한 분 하나님께서는 삼위로 계신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자를 ‘내 목자, 내 짝된 자’로 부르심을 기록하였다(슥 13:7).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그 분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요 5:32), ‘나를 보내신 이’라고(요 8:16) 부르셨음을 기록하였다. 성자께서는 자신께서 홀로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이 지금 증언하시는 분으로서 함께 계심을 말씀하셨다(요 8:16, 18). 태초에 아버지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음도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 존재가 구별됨을 확증한다(요 1:3; 히 11:3).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빛이 있으라(창 1:3)는 말씀 전에 말씀으로 계셨다(1.13.8).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신 독생자께서는 영원히 그 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시는 분으로서 성육신하셨다(요 1:18; 17:5). 성부와 성자의 위격이 구별되듯이 성령의 위격도 구별된다. 주님께서는 자신께서 보내실 영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부와 성령이 구별됨을 지시하셨다(요 15:26). 그런데 그 영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성령과 자신을 또한 구별 지으셨다(요 14:26). 그리하여서 그 영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다(요 14:16). 이렇듯 한 분 안에 삼위가 구별되니 갑바도기아 교부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휩싸이지 않고는 한 분을 생각할 수 없고 곧바로 한 분으로 이끌림을 받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1.13.16).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부인하면 삼신론자가 되며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심을 부인하면 단일신론자가 된다. 초대 교회의 아리우스와 마케도니우스는 각각 성자와 성령의 신격(qeothj, deitas, deity)을 부인하였다. 반면에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위격적 존재이심을 부인하고 양태설(樣態設)을 취하였다(1.13.4, 5).
 
위격에 있어서 성자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셨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시간이나 지위에 있어서 전후나 고하가 없다. 다만 우리가 먼저는 성부를, 다음으로는 그 분의 지혜로서 성자를, 마지막으로는 그분의 능력으로서 성령을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러한 순서(ordo)로 다룰 뿐이다(1.13.18).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2조 3항에서 규정하듯이,
 
“실로 아버지께서는 아무로부터도 아니시니 분명 나시지 아니하셨으며 나오시지도 아니하신다; 그러나 아들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각각의 위격은 본질에 관해서 하나님이시나 관계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불린다. 성자는 자신에 관해서 스스로 계시나, 아버지에 관해서 나셨다. 따라서 성자는 자신에 관해서 하나님이라고,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이라고 불리신다. 또한, 아버지는 자신에 관해서 하나님이라고, 아들에 관해서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성령께서는 자신에 관해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성자에 관해서는 나오신(출래하신, 발출하신) 분으로서 불리신다(1.13.9).
 
2.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일하심
 
세 위격은 고유한 특성에 따라서 고유하게 역사하심으로 구별된다. 제 2위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시기 전에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말씀’이셨다. 그 분께서는 ‘스스로 영원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sermo)’이셨으며 성부께서 만물을 짓기 전에 가지신 ‘지혜(sapientia)’이셨다(잠 8:22~3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중보자로 삼으셔서 천지를 창조하였다(창 1장). 그 분께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만물을 붙드신다(히 1:2~3).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후 될 일을 미리 예언하였다(벧전 1:10~11; 벧후 1:21). 칼빈은 아들의 하나님이심을 특히 그 분께서 말씀으로서 역사 가운데 말씀하신 분이심을 강조한다(1.13.7). 창조 중보자 그리스도는 그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 이미 구속 중보자로서 예언되셨다. 구약 시대 때 그 분께서는 ‘임마누엘(사 9:6)’로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5~6; 33:15~16)로서 선포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시대에 이미 ‘의가 흘러나오는 참다운 여호와’로 증거되셨다(1.13.9). 주님께서는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으로 야곱에게, 모세에게,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에게 나타나셨는데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그 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미 그 당시에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이루어 가고 있었음을 합당하고 지혜롭게 지적했다(1.13.10).
 
신약 시대 사도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셨음을 증언하였다(딤전 3:16). 특히 이사야와 시편의 말씀들이 거듭해서 인용되었다. 요한은 이사야의 성전 환상을 성자의 영광으로 돌렸다(요 12:41). 사도 바울은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걸림돌이 되나 그 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서 선포한다(롬 9:32~33). 그 분께서 아버지와 동등하시나(요 5:18) 자기를 비어 종이 되셔서(빌 2:6~7) 구원을 이루셨다. 그 분께서 ‘허물을 도말하는 자’로서 예언되신 분이셨다(사 43:25).
 
칼빈은 성자의 위격적 존재를 다루면서 그 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강조하였다. 한편 그 분의 사역의 특성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특히 그 분 자신께서 ‘구원 자체(ipse salus)’이심을 부각시킨다. ‘견고한 망대’로서(잠 18:10) 구원을 위하여 부를 이름(욜 2:32)이 예수 외에 다른 이름이 아님이 선포되었다(행 4:12). 칼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주시요 모든 은사의 조성자가 되심으로써 성도들은 그 분과 교통함으로써 자라가게 됨을 특히 성자의 위격을 다룸에 있어서 중요하게 여겼다(1.13.11~13).
 
한편 성령의 위격을 다룸에 있어서 칼빈은 그 분께서 창조와 섭리의 영이심을 먼저 지적한다. 성령께서 만물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심이 설명된다. 그리고 성령께서 구원의 영이심을 강조한다. 성령께서는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지으셔서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구원의 전체 과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사역을 감당하신다. 일체의 선이 다 성령으로부터 온다. 그 분께서는 모든 은사의 ‘원천(origo)’이시며 ‘조성자(autor)’이시다(고전 12:11).
 
성령의 위격적 특성은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분(qui loquitur)’이시라는 사실에서 확증된다(사 6:9; 행 28:25~2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성도는 성령의 ‘입 기운’으로 말씀을 들음으로써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경험을 거부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역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영을 부인함은 하나님 자신을 부인함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1.13.14~15).
 
아버지는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서 일하신다. 칼빈에게 있어서 존재적 혹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서로 지향하며 역동적으로 관련된다. 아버지는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으시고, 아들은 나셨으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출래하신다, 발출하신다). 이러한 삼위의 위격적 존재는 삼위의 위격적 사역으로 전개된다.
 
“아버지께 일하심의 시작 그리고 모든 것들의 기초와 원천이, 아들께 지혜와 계획 그리고 일들을 행하심에 있어서의 경륜이, 성령께 행위의 능력과 작용이 돌려진다”(1.13.18)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은 건덕(建德)을 위하여 지혜롭게 가르쳐져야 한다(1.13.3, 29).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무리 고상한 지식이라도 마치 유모가 아이에게 “옹알이 하듯이(quodammodo balbutire)” 낮추어서 맞추어 주신다.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의 은혜 가운데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1.13.1). 그 분께서 원하시면 깨닫지 못할 자 없으며, 그 분께서 막으시면 알 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오직 스스로 계시며, 스스로 역사하시며, 스스로 알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할 일이다.
 
 
[칼빈500주년기념특별기획] 피난처마다 위대한 개혁사상 설파
  앙굴렘·바젤에 은신,
〈기독교강요〉 집필 완성 제네바서 활동, 당대 최고 개혁자 명성 얻어
 
2009년 05월 22일 (금) 08:58:16 강석근 기자 harikein@kidok.com
 
칼빈 신앙 대탐험 / 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1. 인간 칼빈을 말한다 - 도망자에서 망명객으로
 
▲ 칼빈은 제네바에서 설교가·신학자로서 명성을 굳혔으며 제네바 시민들을 개혁신앙으로 교육시키기 위해 예배 및 훈련지침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림은 고 한풍렬 화가의 제네바 풍경.
 
회심의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예비 사제이자 인문주의 세속학자였던 칼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 자리에 성경만을 손에 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우뚝 서 있었다.
 
포도원 농부로 변신하여 파리를 떠난 칼빈의 정처없는 나그네 생활은 시작되었다. 고향인 누아용을 비롯하여 오를레앙, 앙굴렘, 뿌와띠에, 끌래락 등 안전한 곳이라면 프랑스 어디든지 찾아 다녔다. 불안한 방랑객 칼빈은 대학시절에 만난 친구 루이 뒤띠에의 도움으로 앙굴렘에 도착하여 다소 평온한 가운데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름도 존 칼빈 대신 샤를 데스뻬빌이란 가명으로 사용했다. 뒤띠에는 당대에 최고 많은 개인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던 개종한 신부였다. 이곳은 <기독교강요>의 저술의 계기가 되고, 훗날 칼빈이 개혁사상을 펼치는 변화의 공간이 된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방랑자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칼빈은 학문연구 뿐만 아니라 강가나 동굴 같은 곳에서 모임을 갖고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신앙을 설파했다. 많은 사람이 안전을 의식하지도 않고 수배자의 말을 듣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몰려들었다. 당시 칼빈은 화형당할 이단으로 몰려 추적을 당하고 있었다. 프랑스 어느 곳에서도 신교도는 안전한 곳이 없었다.
 
1535년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떠나 1년 이상 머물면서 잉크에 깃펜을 적시며 참된 신앙에 대해 서술한다.
“폐하, 제가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구도자들에게 참된 경건으로 지도할 몇 가지 원리를 밝히려는 것이었습니다.…그리스도를 추구하면서 목말라 하는 동포 프랑스인들을 위해 시작하였습니다. …화염과 칼로 어지럽히는 이성을 상실한 자들의 거침없는 분노의 표적이 된 그 교리의 본질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저는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대의, 그리스도 그 분의 대의를 변호하고자 합니다.”
 
그의 언어는 강경하고 통렬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적인 교리체계로 끌어낸 위대한 <기독교강요>는 이렇게 태어났다. <기독교강요>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으로 끝나며 모든 것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발견한다. 법률가의 논리로 명료하게, 문필가로서 능숙하고 유창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는 지성으로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열정으로 썼다.
 
칼빈은 1536년에는 이탈리아의 페라레를 방문하여 공작 부인 르네를 만나 개혁신앙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회동하며 지속적인 우의와 신앙을 다진다. 1564년 칼빈이 동생 앙뚜안에게 대필을 부탁하여 르네 공작부인에게 전한 편지에 ‘절대적인 조언자요, 영적인 스승이 되어 주었다’고 한 점을 보면 페라레에서 칼빈은 이후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바젤도 더 이상 가명을 사용하며 숨어 지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연구하고 저술할 또다른 은신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기로 결심했는데 마침 동부지역이 전투가 한창이어서 우회의 길을 따라 제네바에서 머물기로 하고 들렀다. 제네바는 빼어난 자연경관이 경이롭지만 칼빈에게는 ‘신천지’인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펼치는 꿈의 도시로 다가서고 있었다.
 
제네바는 르페브로 교수 밑에서 신교로 개종한 파렐이 진을 치고 왕성한 사역을 전개하고 있었다. 파렐 역시 파리에서 맹렬하게 활동하고 위험을 피해 도망쳐 온 담대한 복음전파자였다. 파렐은 ‘연구를 핑계로 하나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을 저주할 것이다’는 말들로 단판에 칼빈을 설득하고, 제네바에서 함께 동역자로 일할 것을 권면했다.
 
칼빈은 성 베드로교회에서 매일 강연했다. 이미 성상에는 로마 가톨릭의 제단이 제거되어 있었으나 구체제와 권위를 대체할 새로운 구도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한마디로 제네바는 개혁신앙에 대한 심정적 호응만 무르익었을 뿐 교회 조직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칼빈은 이곳에서 설교자로 활동하다가 1536년 로잔에서 로마 가톨릭과 회합을 가진 뒤 당대 최고의 개혁자 반열에 오른다. 칼빈은 성만찬론의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통박했다. 이 반론으로 120명의 수도사와 80명의 사제들을 포함한 로잔시와 주변 도시가 완전히 개신교로 변화되었다.
 
칼빈은 설교가 뿐 만 아니라 신학자로서 명성을 굳힌 가운데 제네바 시민들을 개혁신앙으로 확고히 교육시키기 위해 <신앙고백서>를 쓰고 예배 및 훈련지침을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과 평의회 의원들의 압력을 받아 결국 스트라스부르그로 떠났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보낸 3년은 평화로웠다. 폭도들의 고함이나 총소리도 없었고, 성례를 집행할 때 소란을 피우는 자들도 없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복음을 성공적으로 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급적 논쟁을 피하고 배우려는 자세로 임했다. 그는 여기서 교구를 관장하는 법령을 쓰고 <로마서 강해> <성만찬에 관한 소논문> 등도 출판했다. 특히 유럽 종교개혁자 사이에 가장 마음이 넓고 관대하다던 부써를 만나 인격적인 성숙과 목회자적 성품 그리고 학문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 제네바의 레만호수.
 
‘어둠 넘어서 빛으로’
개혁 중심지 제네바
 
스위스 남서부 주네브 주의 주도. 프랑스 국경 레만호(제네바호) 남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이 시는 칼빈의 종교개혁 중심지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금융중심지로 공공 민간 할 것 없이 많은 국제기구의 본부가 자리하고 있으며, 1864년 국제적십자사, 1919년 국제연맹이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제네바는 로마 제정시대부터 수상 및 육상 교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400년부터 주교좌의 소재지가 되기도 했다. 1124년 주교가 도시 영주로 군림하고, 1533년 마침내 주교가 도시의 지배권을 양도하자 시민들은 주교를 도시에서 완전히 추방했다. 1536년 칼빈이 주도한 종교개혁 도입은 주교로부터 정치적 교회적 자립을 완성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개신교 도시가 된 제네바는 스위스 가톨릭 제주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스위스 연방에 가입하지 못했다. 제네바가 스위스 연방에 가입한 것은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한 1815년이었다.
 
계몽주의 운동의 중추세력이었던 장 자크 루소가 제네바 출신이며 이곳에 볼테르가 피신하기도 했다.
한편 1559년 칼빈이 설립한 아카데미(제네바대학교)는 국제학 식물학 교육학이 권위를 떨치고 있다. 1533년 제네바 종교개혁의 다음 모토는 오늘날 여전히 시의 구호(口號)로 사용되고 있다. “어둠을 넘어서서 빛으로(post tenebras lux)!”
 
 
[칼빈500주년기념특별기획] 가족 이름으로 꽃피운 8년간의 성숙
[칼빈 신앙 대탐험 / 개혁주의 미래를 묻다] 1. 인간 칼빈을 말한다 - 남편과 아버지로서
 
2009년 05월 29일 (금) 08:56:32 조준영 기자 joshua@kidok.com
 
미망인 이들레트와 소박한 결혼식, 생활안정 찾아
자녀 죽음이어 아내마저 사망…15년을 독신으로
 
▲ 일러스트=강인춘
 
좀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느덧 그녀의 정숙하고 단아한 자태가 떠올랐고, 새벽의 고요를 깨고 부드러운 목소리조차 들려오는 듯 했다. 친구 마틴 부써가 처음 그녀를 추천했을 때 그녀는 평소 생각하던 배우자감과 꼭 들어맞았다. 정숙하고 순종적이며, 까다롭지 않고 검소하고 인내심이 많은 여자였다. 자녀가 둘 딸린 미망인이긴 했지만, 그녀의 장점들은 그것을 뛰어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가슴 속엔 어느덧 그녀에 대한 연모마저 자라고 있었다. 때는 1540년, 서른한 살이 된 칼빈에게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목회와 교육, 저술활동에 매진하던 칼빈은 평소 결혼과 이성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결혼 전에 자신은 아내를 취해본 적도 없으며, 또 결혼하게 될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 같은 그의 태도에 동역자이자 친구인 마틴 부써와 윌리엄 파렐은 종종 결혼을 해서 안정된 가정생활을 맛보라며 염려 섞인 권면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칼빈은 외로움과 아내의 적절한 보살핌을 받아 교회를 더 잘 섬기고 싶은 마음에 1539년을 전후해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한다. 그리고 1539년 5월 19일 파렐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결혼에 대해 언급하고, 좋은 아내감을 소개해줄 것을 부탁한다.
 
“저는 여성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딱 반해서 그녀의 결점들까지도 덮어주는 그런 넋 빠진 연애가는 아닙니다. 나를 사로잡는 유일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은 정숙하고 지나치게 까다롭지 않으며, 검소하고 인내하는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건강을 염려해주는 여인입니다.”
 
1540년 2월 칼빈은 재산이 많은 귀족 출신의 처녀를 소개받았으나, 그녀가 프랑스말을 모르고 자신의 가문과 교육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이유로 단념하고 만다. 그 후 또 다른 여인을 소개받고 3월 10일 결혼하려고 했으나 이도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칼빈 자신을 통해 회심한 재세례파 장 스토르더의 미망인 이들레트를 아내감으로 추천받은 것이다. 몸이 허약했던 그녀는 당시 자크라고 알려진 아들과 쥬딧이라는 딸을 데리고 가난하게 살고 있었으며, 자녀들의 교육에만 힘을 쏟고 있었다. 칼빈의 전기를 쓴 데오도레 베자에 따르면 그녀는 ‘훌륭한 성품을 지닌 경건한 부인’이었으며, 머리가 좋고 마음이 따뜻하다는 평을 받았다.
 
결혼식은 8월 10일 윌리엄 파렐의 주례로 조촐하게 거행됐다. 이로써 칼빈은 한 여인의 남편이자 두 자녀의 아버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줄곧 망명과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쫓겨 다니듯 살았던 칼빈에게 결혼생활은 그간 맛보지 못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이들레트는 칼빈에게 단순한 아내 정도가 아니라, 남편의 목회 사역을 돕고 섬기는 동역자였다. 칼빈은 그녀를 ‘내 인생의 훌륭한 동반자’ ‘내 사역의 신실한 조력자’ ‘보기 드문 여성’ ‘근엄하고 존경할만한 여성’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여느 가정이 그렇듯 칼빈의 결혼생활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네바 의회의 간곡한 요청으로 1541년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 부부는 1542년 7월 첫째 아기를 낳지만, 2주 만에 여의고 만다. 칼빈 부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통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 칼빈은 이후 이들레트와의 사이에 적어도 두 명 이상의 자녀를 낳았으나 모두 유아기에 죽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들레트는 산후 조리에서 몸이 회복된 후 곧바로 심한 병에 걸려 병상에 누워 지내기 시작했다. 1547년에는 이들레트가 데려온 아들이 뚜렷한 이유 없이 가출을 해, 칼빈은 그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사방을 찾아다녀야 했다.
 
칼빈의 기도와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들레트의 병이 회복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결혼 9년째인 1549년 4월 이들레트는 칼빈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칼빈은 그때의 슬픔과 고통을 “주님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 고통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사십 세에 혼자가 된 칼빈은 그 후 죽을 때까지 15년을 독신으로 지냈다. “보기 드문 자질을 갖추고 있던 내 아내가 일년반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이제 기꺼이 독신으로 살고자 한다”는 다짐을 마지막까지 실천한 셈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버지로서의 칼빈 역시 모자란 편이 아니었다. 칼빈은 이들레트가 죽기 전 그녀에게 그녀가 데려온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으며, 실제 두 아이를 양육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이들레트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를 잃은 후 칼빈은 자신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천천의 자녀들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였다.
 
웅장한 첨탑보다 때로는 숨겨진 한 모퉁이가 더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걸어간 애틋하지만 아름다웠던 시간. 불안한 시대를 살다간 칼빈의 인생에서 간과할 수 없는 보석 같은 한때다.
 
“결혼은 상처 치료하는 꿀과 같다”
 
칼빈의 결혼관 ‘긍정적’
 

▲ 존 칼빈의 아내, 아들레트 반 뷰렌.
 
칼빈에게 있어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정한 세례와 성찬뿐이었고, 결혼은 성례가 될 수 없었다. 칼빈은 에베소서 5장 32절의 “이 비밀이 크도다”에 대한 주석에서 중세 가톨릭교회가 결혼을 성례로 인정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32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그리스어 단어 ‘mysterion’(비밀)은 후대를 거치면서 잘못 해석되고, 번역되면서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례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칼빈을 비롯해 종교개혁자들은 결혼을 ‘하나님의 질서’라고 보았다. 칼빈은 앞서 루터가 결혼의 일차적 목적을 육욕의 해결과 출산에 있었다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동시에 좀 더 성숙한 결혼관을 제시했다. 칼빈에게 있어 결혼의 일차적 목적은 자식을 낳기 위한 것보다는 인간의 사랑과 두 사람의 연합에 있었다.
 
성(性)에 대한 견해에서도 칼빈은 루터에서 진일보했다. 루터는 어거스틴이나 아퀴나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성적 결합을 원죄의 결과로 보았으며, 근원적으로 선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빈은 성적결합을 타락의 결과로 받아들이기 하지만, 그것이 결혼이라는 틀 안에서 정숙하게 행해진다면 사악한 것이 아니라 선한 것으로 보았다. 칼빈의 이러한 견해는 정신적·영적인 것과 육적·물질적인 것을 구분하는 이원론을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칼빈은 1545년 말에 결혼법을 제정했다. 칼빈은 결혼법에서 예절과 질서에 대한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남녀간의 기본적 평등에 관한 관심을 보여준다. 특히 8항에서 “어떤 아버지도 그의 자녀들의 즐거움과 동의가 없이는 그 결혼이 아무리 좋게 생각될지라도 그의 자녀에게 강요할 수 없다”며 결혼이 자유의사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고 밝혔다.
 
칼빈은 부부의 연합에 따라서 자녀가 있게 되므로 혼인에 대한 규례는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의 기초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자녀들이 귀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모가 되는 부부의 사랑을 선행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결혼은 쑥과 같이 쓴 부분도 있지만 그 자체는 서로 연약한 사람들이 약점을 보완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꿀과 약과 같다고 보았다.
 
http://blog.joinsmsn.com/media/index.asp?folder=121&uid=lyk3390

 

 

 

출처 : 신들의 찻집
글쓴이 : 벤자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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