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길목
요한복음 1장 14~18절
서론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빼버리면 성경은 존재할 수 없고, 성경이 존재하지 않으면 기독교는 없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역시 성경 이전부터, 창세 이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에덴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었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타락과 대홍수, 노아, 아브라함, 야곱, 다윗 왕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거세게 사람들에게 임했습니다. 은혜가 없었던 시대는 없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피해간 국가는 없었습니다. 대홍수에도 은혜가 있었기에 인류는 죄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은혜의 힘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래서 시리즈 제목을 ‘은혜가 이긴다’로 정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난 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으니…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독생자는 하나님의 은혜의 중심이요 용광로입니다. 제주도에 산방산이 있는데 전설인즉, 사냥꾼의 잘못 쏜 화살을 맞고 성이 난 옥황상제가 한라산 봉오리를 뽑아 던진 것이 산방산이라 합니다. 한라산 백록담 구덩이 규모에 맞게 봉오리만 있는 산이어서 그럴듯합니다.
비유에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독생자의 은혜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독생자는 하나님의 품에서 뽑아낸 하나님의 은혜엑기스요 은혜덩어리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은혜였습니다. 병자, 극빈자, 죄인… 상품이 될 수 없는 불량품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상품을 만드십니다.
이후, 은혜는 안개처럼 세상을 덮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것과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성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하는데 능숙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신자들이 상당수입니다.
14절에서, 독생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고 그 충만이 누구에게 흘러내리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에게 흘러내려
16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가 풍성한 생활을 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은혜가 궁핍한 중에 살아갑니다. 은혜 결핍 자체를 모르기도 합니다. 은혜가 없으니 교회는 다니지만 타고난 성격 자체를 벗지 못하고 그러기에 성화의 향기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 구주 예수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고 합니다. 은혜가 자라야 한다는 간곡한 권면입니다.
은혜가 자라려면 먼저 은혜를 받는 경험들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는 길목이 따로 있습니다. 고기 다니는 길목이 있고 짐승들 길목이 있습니다. 장사도 잘 되는 길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길목에 교회가 있어야지 외진 곳이나 막힌 골목에 교회가 잘될 리가 없습니다. 음식솜씨가 뛰어나거나 목회자질이 특출하면 골목이나 길목이 무슨 이유가 되겠어요? 그러나 누구나 특출한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골목상권이 좋아야 하고 길목이 좋아야 합니다. 장사가 잘 되는 길목에 자리를 잡으면 반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길목
은혜에도 길목이 있습니다. 은혜의 길목에 있어야 은혜가 지나갈 때 은혜를 받습니다. 술집 같은데 가서 있으면서 은혜가 지나가기를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삭개오(눅19:1-10). 은혜를 받기에는 직업도 좋지 않았고 은혜가 지나가는 곳에 있었지만 키가 작아 사람들에게 치여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지나가는 길목으로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동선(動線)을 파악하고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은 은혜의 장소가 아니라 조롱과 멸시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삭개오에게는 그곳이 은혜의 길목입니다. 체신도 내려놓고 사회적 신분도, 자존심도 내려놓고 그 대신 창피의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조롱의 자리였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까지 올라가면서 은혜를 사모하는 그 낮은 자세를 귀하게 보시고 은혜의 한 말씀을 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속히 내려오라! 조금이라도 그 조롱의 자리에 있게 하고 싶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삭개오는 땅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은혜의 자리로 왔고 집으로 예수님을 모신 것만 아니라 가난한 마음에 은혜의 주님을 모셨습니다. 그날 삭개오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고,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기독교전승에, 직장과 신분을 청산하고 베드로와 동역하다 가이사랴 감독이 되었다 합니다. 그 날 삭개오가 은혜의 자리가 아니라 돈을 버는 자리, 고리의 세금으로 폭리하는 길목에 앉아있었다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게 살다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길목에 있었기에 은혜의 왕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 바디매오도 마찬가지입니다(눅18:35~43).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오신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성읍으로 들어오려면 동선이 어디입니까? 당연히 성문 입구입니다. 성문 입구에서 구걸하다가 예수님께서 들어오시고 그 앞을 지나가실 때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절)
그는 예수님께서 들어오시는 길목에서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구세주여~ 그 말입니다. 바디매오는 길목도 좋았고 은혜 받는 비결도 알았습니다. 정확히 그 사람의 신분 길목으로 다가갑니다. 그러자 은혜는 더 빨리 공급됩니다. 그 자리에서 눈을 뜬 것입니다.
탕자(눅15:11~12).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재산을 탕진하고 은혜가 없는 비(非)은혜의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고생을 하고보니 너무도 아버지의 은혜, 아버지의 집이 그리웠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집입니다. 집에서는 그걸 모르고 아버지에게서 형에게서 비(非)은혜를 느꼈고 숨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와 보니 세상은 더 비은혜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비은혜의 장소에 머물면서 아버지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은혜의 아버지, 은혜가 있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면서 그 길목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달료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되…”(20절)
아버지는 방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매일 골목에 나와 있음이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그곳은 아들이 집을 떠나며 걸어갔던 길목입니다. 아들은 뒤로 돌아보지 않고 떠났지만 아버지는 매일 그 골목을 지키며 아들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 골목은 은혜의 골목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거렁뱅이를 보는 골목이지만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측은지심, 은혜의 마음입니다. 아들은 은혜의 길목에서 아버지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강도(눅23:39~43). 한쪽 강도는 십자가 꼭대기 길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구원을 보장하는 은혜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십자가는 저주와 조롱과 고통의 자리였지만 강도에게는 은혜의 길목입니다. 다른 곳의 길목에서 은혜를 받았다면 새사람이 되어 주님에게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었지만 십자가라는 인생의 막다른 길목에서 겨우 구원이나 받았습니다.
그러나 겨우 구원이나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의 목표입니다. 그러니 엄청난 은혜의 길목입니다. 같은 십자가라도 반대편 십자가는 심판의 길목입니다. 그가 은혜의 길목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의 물꼬를 그에게 텄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십자가는 은혜의 길목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하는 은혜의 책입니다. 성경인물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길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이사야와 아삽에게는 성전이 은혜의 길목입니다. 하박국은 성벽의 탑이 은혜의 길목입니다. 야곱은 철야기도 중에, 요나는 고기의 배 속에서, 다윗은 죄중에서, 바울은 약함 중에서, 마리아는 향유를 쏟아, 홀 여인은 두 렙돈의 헌금을 드리다가… 은혜를 체험합니다. 각자가 은혜의 길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장소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마음이 된다면 어떤 상태, 어느 곳에 있던지 구원의 은혜를 받고 회심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은혜는 1회성이지만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려면 그 은혜가 자라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계속 공급받으려면 은혜의 길목을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항시 은혜의 골목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습관입니다. 은혜를 받는 습관을 잘 만들어야 그 습관이 길목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자라며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결론>
미국 베들레헴신학교 데이비드 마티스 교수는 ‘은혜 받는 습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영적 습관을 말합니다. 말씀의 습관-규칙적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기’, 기도의 습관-하나님의 귀에 아뢰기, 교제의 습관-교제는 ‘하나님의 몸에 속하기’, 성도들과의 교제입니다.
이런 일들은 규칙성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습관들이 규칙성을 가지려면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가정에서는 거의 신앙생활을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대부분 교회에서 발생했고 성장합니다. 예배를 통한 규칙적인 좋은 습관은 하나님의 은혜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는 일입니다. 빌 게이츠는 말합니다.
“좋은 습관은 재산이다. 좋은 습관을 가졌다면 당신은 평생 그 습관의 덕을 볼 것이다.”
평생 그 습관의 덕을 본다…. 은혜의 덕을 보게 됨으로 은혜가 자라가고 은혜를 누리게 되고 나중에는 은혜의 영광, 하늘나라의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저는 새벽기도회를 다녀와서 다시 잠을 자지 않습니다. 낮잠도 자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름 여러 일들을 할 수 있었고 집필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마다 30장씩 읽어 한 달 1독을 습관화함으로 오늘 현재 153독을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설교 준비에 큰 덕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요! 좋은 습관이 은혜가 다니는 길목입니다. 좋은 습관으로 은혜가 다니는 길목, 습관을 만들어 길목이 생깁니다. 한두 번 걸어서 길이 됩니까? 계속 걷다보면 길이 되고 길이 되면 사람이 오고 물건이 유통되고… 그래서 마을이 형성되고 문명을 만들어 갑니다.
지금은 낙심의 때가 아니라 수고해야 할 때입니다. 은혜를 받고 누리기 위해서! 바울은 지금은 은혜 위에 은혜러라 은혜의 때라고 합니다. 은혜를 받을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점검을 해봅시다! 은혜의 길목에 있습니까? 은혜가 없는 길목으로 피해 있습니까? 은혜의 골목으로 나아갑시다! 그 길목에서 ‘은혜 받는 습관’으로 생활합시다! 매일 임하는 은혜에 은혜로 살면서 죄를 이기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도록 함께 노력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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