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은혜에 ‘의하여’, 행위는 선한 일을 ‘위하여’
에베소서 2장 8~10절
서론
기독교가 어떤 인종이나 국가에 들어가면 두 가지의 양상이 나타납니다. 복음의 대상들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거나 제도를 개선하는 일입니다. 아니면 기전의 문화와 정교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먹힘으로 변질되는 경우입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교회는 복음지를 개선한 경우입니다. 영국은 원래 해적이었는데 복음을 받아들이고 신사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인들은 미국을 졸보라고 무시합니다. 그만큼 자기들은 젠틀하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기독교는 본질만 같을 뿐 형식이나 예배에서 그런 미신이 없습니다. 기대를 갖고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가면 성지교회들이 무당집처럼 변해있음에 실망하고 또 실망하고 돌아옵니다. 기독교가 그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혼합되어 변질되어 버린 케이스입니다.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어떤가요? 사회는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기독교가 아니었으면 인권이나 참정권 등에서 상당히 제약을 받고 낙후된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와 서양문물이 들어왔고 학교와 병원… 사회복지시설이 들어오면서 대한민국을 100년 일찍 성장사키지 않았나, 하는 자부심이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기존의 종교를 온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토속 내지는 기성 종교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고 말았습니다.
유교의 영향-기독교를 현실에 만족하는 종교가 되어 직분이 자칫 계급 조직이 됩니다.
불교의 영향-자선이나 수행, 고행 등 자력으로 구원받으려는 행위 구원 믿음이 됩니다.
샤머니즘-우리가 신을 기쁘게 해드려서 그에 대가로 뭔가를 얻어내려고 빅딜을 합니다.
이런 영향으로 복음적인 기독교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 결과 믿음만 강하지만 생활인격은 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은혜에 ‘의해서’
에베소교회는 처음에는 복음을 제대로 전달받았습니다. 그러나 3년 사역 후에 바울이 떠난 후 심각한 위협이 뒤따랐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가르침을 외면하고 뭔가 노력하고 행위에 의지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복음이 변질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우상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바울이 사역한 지역들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아덴(아테네)은 그리스, 로마의 지식(철학)의 중심이요, 고린도는 상업중심지, 로마 본토는 정치, 군사의 중심지였습니다. 여기에 에베소는 종교적 중심지였습니다. 에베소는 아시아의 관문으로 모래층이 쌓여 항구가 죽어가고 경제가 약화되자 아데미신전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했습니다. 높이 100m 아데미상(像)은 유방이 32개인 풍요의 여신입니다. 아데미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갑니다. 이런 대신전에 창기들과 남창들이 사제로 등록되어 있고 그들과 접촉하면서 무질서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순수성에서 떠난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거짓선지자들이 구원의 조건을 율법이나 행위로 자꾸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는 바울의 개인적인 사상이고 조상들에게서 내려온 구원은 율법을 지키고 행위를 통해서만 보장받는다는 가르침을 전한 것입니다. 여기에 에베소교인들이 솔깃하고 만 것입니다.
-영지주의, 에피크로스 학파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들은 영은 깨끗하고 육신은 악하여 구원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어차피 구원받지 못할 육신으로는 정결하게 살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부도덕을 일삼았고 에베소교회 신자들도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마술이 성행해서 마술로 앞일들을 예언하고 마(魔)의 힘으로 뭔가 이루려 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하늘에서 왔다가 하늘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늘에 있는 ‘이온’이라는 정령들이 이를 훼방합니다. 따라서 무당이나 마술사들의 도움으로 정령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사람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들을 돕는 것이 신비한 지식이라 합니다. 신비한 지식을 통해서 어느 수준에 이르면 하늘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태를 “충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영지주의입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구원관이 잘못됩니다. 구원을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하고 고상한 지식을 쌓아야만 구원받는 줄로 알았습니다.
로마의 옥에 있던 바울이 이 소식을 듣습니다. 유난히 애정을 쏟아 목회 했던 교회가 잘못된 믿음으로 기울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애통하는 심정으로 편지를 씁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고 하나님에 의해 완성된 것임을 강조하는 서신입니다.
8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우리의 구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자비하심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자기자랑에 빠지지 않고 교만함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우리가 만들어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래서 행위를 통하여, 내가 뭔가를 했기에 구원을 받았다! 아직도 나는 구원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방법을 통해 구원을 성취해 나간다! 여기에는 은혜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공로로 만들어 내고 내 종교심을 자랑하게 만듭니다. 그만큼 은혜가 없습니다. 바울은 은혜 없는 믿음을 탓하고 있습니다.
8,9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구원은 예수님으로 이미 완성된 것이고 이미 하늘나라에 앉아있는 것이지 뭔가 다른 것에 의지하거나 내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인간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받은 것입니다.
내가 박집사님을 통해 양복을 참 많이 얻어 입었습니다. 얼마나 비싼 양복입니까. 그걸 값없이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에 의하여 얻었으니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걸 새양복이 내가 정성을 더한다고 이걸 갖다 붙이고 저걸 갖다 붙이면 때로는 모양새가 더 아름다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양복을 지어주신 집사님이 기뻐하며 아름답다 하시겠습니까? 그건 오히려 은혜를 모르는 일입니다.
구원에도 이런 원리가 작동합니다. 하나님께서 해놓으신 일들,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들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찬양하라! 바울은 이런 사실을 에베소교회에 지적하고 있습니다.
행위는 선한 일을 ‘위하여’
그런데 은혜를 너무 강조하다보면 사람의 도리를 등한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칫 무례한 기독교, 버릇없는 기독교인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마틴 마티는, “오늘날의 문제 중 하나는 예의바른 사람은 종종 강한 신념이 없고,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예의가 없다”는 점이라 합니다. 이게 한국 전통의 종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유교적 기독교, 불교적 기독교, 샤머니즘적 기독교도로 변질된 혼합의 결과 같습니다.
유교라고 하면, 기독교와는 상극을 이룬다 생각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천주교인들이 왜 점잔하게 보이는가, 열정이 부족하고 공로구원 사상이 그렇게 만든 부분도 있지만 특히 한국 천주교가 시작되면서 유교-성리학 학자들이 그걸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통치이념이던 성리학은 유교의 한 분파로, 소산물이 선비사상이고 선비들은 실천 도덕과 인격과 학문의 성취를 역설하였습니다. 선비들의 중심이 바로 3가지의 강령(綱領)과 5가지의 인륜(人倫)으로 이루어진 삼강오륜입니다. 삼강은? 한강 낙동강 섬진강? 오륜은 바퀴 륜(輪)으로 오해해서 수레바퀴, 자전거 바퀴, 자동차바퀴, 인력거바퀴, 마차바퀴라고 쓴 아이들도 있고 오륜은 올림픽기(旗), 올림픽마크라고 말한 우스개도 있습니다.
유교의 삼강오륜(五倫)은?
군위신강(君爲臣綱). 왕은 신하의 생활모범이 되어야 한다.
부위부강(夫爲婦綱). 남편은 아내의 생활모범이 되어야 한다.
부위자강(父爲子綱). 부모는 자녀의 생활모범이 되어야 한다.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 친밀함에 있으며,
군신유의(君臣有義).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유별(夫婦有別).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장유유서(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붕우유신(朋友有信).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사실 얼마나 좋은 가르침입니까? 사람의 도리에 관해 성경의 가르침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성리학의 가르침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고, 그러다보니 너무 엄격했고 교만했습니다. 그걸 지키지 못하면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았고 선비들만이 이런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며 계급을 소론과 노론… 사색당파라는 붕당(朋黨)을 만들어 냈습니다. 폐단입니다. 그래서 김경일 교수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씁니다.
성경은 이런 가르침이 인륜의 가치이지만 그걸 가동하는 힘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둡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5:18)고 강조합니다. 성령충만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고 삼강오륜이라는 인륜의 가르침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이런 마음이면 기쁘게 지키고 타인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조선에 들어왔을 때 깨어있는 성리학자들이 탄복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구나… 그래서 천주교를 ‘서학’ 혹은 ‘천주학’이라 명하면서 학문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들은 학문으로 받았지 종교로까지는 받아내지 못합니다. 이를 종교로 받아들인 대표적 성리학자가 경기도 광주(지금은 남양주) 출신인 다산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형제들입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 정약전은 ‘다산어보’의 저자이며 정약종은 형제 중에 가장 믿음이 좋아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을 만큼 열심입니다. 신유박해 때 정약전 정약용은 배교했지만 정약종은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순교합니다. 초대 천주교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매부) 조선천주교단을 일구어낸 이벽(처남), 조상제사를 폐지해서 첫 순교자가 된 전라북도 진산(지금은 금산) 사람 윤지충은 외사촌, 백서사건으로 유명한 조카사위 황사영…이 모두 일가친척입니다.
삼강오륜의 성리학을 따르던 선비들이 조선천주교회의 중심이 되니 실천종교를 만들면서 행위구원 체제를 신봉하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한국천주교가 도덕과 윤리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좋지만 그만큼 교리는 약합니다. 인간의 도리를 살리다 은혜의 도리를 놓쳐버렸습니다. 술 담배, 조상제사… 등의 교리들은 행위종교로 만들어 행위구원을 만들어 냈습니다.
바울은 이런 면에서 상당히 중용(中庸)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구원 이후의 삶에 항상 주목하기를 강조합니다. 그에게 있어 구원은 은혜에 ‘의해서’ 생활을 ‘위해서’ 주어졌다고 합니다. 교리와 생활, 믿음과 생활, 기도와 생활… 꼭 같이 강조합니다. 13권의 서신들 대부분이 믿음과 삶, 교리와 생활을 다룹니다. 로마서는 11장까지는 교리부분, 12~16장까지는 생활부분입니다.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4장까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교리부분이고 5장 6장은 ‘선행을 위해서 구원받았으니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잘못된 구원관과 함께 성도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들은 항구를 중심으로 하는 시민계층입니다. 아데미 신전이 육적 타락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마술사들은 요행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잘못된 철학들이 그들의 행위를 악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런 영향들은 에베소교인들로 하여금 신앙에 따른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교인들간의 다툼, 술 취함, 도적질, 분을 품는 일, 음행, 화목하지 못한 가정… 모두가 은혜 중심적이지 못한 삶입니다. 구원을 행위로 얻으려고 하는 행위 중심의 교리가 가져 온 나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답게 성결을 ‘위하여’ 살며 갈등을 해소하고 교회의 일치와 화목을 ‘위하여’ 사회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라, 고 바울은 권합니다.
결론
우리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십계명으로 구원받은 것은 아니지만 십계명을 통해 선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래야 선민으로서 거룩한 성민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해서 우리의 행위에 대해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완성된 것이지만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아름다운 성결의 삶을 완성하기 ‘위해서’ 열심히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삶 속에서 합당한 열매가 맺어져야 합니다.
은혜에 의해서 구원! 구원 이후는 행위를 위해서! ‘의해서’와 ‘위해서’를 잘 구분하며 살면 성숙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낼 수 있습니다. 삼강오륜의 유교인들보다 더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더욱 매진하십시오! 매일 매일이 빛나는 그리스도의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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