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마리아는 왜 은혜를 입었을까? 누가복음 1:26~31

하나님아들 2024. 9. 6. 17:52

마리아는 왜 은혜를 입었을까?

누가복음 1:26~31

 

서론

설교제목이, “마리아는 왜 은혜를 입었을까?”. 제목이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은혜는, ‘고맙게 베풀어 주는 신세나 혜택’, 공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목에서 왜 은혜를 입었을까?”하면 ?’는 조건부입니다. 마리아가 어떤 조건을 갖추었기에 성모(聖母)가 되는 하나님의 선택을 입었다 이런 결론입니다. 이것이 확장되면 구원도 결국에는 내가 그만큼 했기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보태어 구원해 주시지 않았나, 하는 다른복음의 결론이 나옵니다.

 

이건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시혜(施惠)이지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 자격을 갖출 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갖추어 얻었다면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그건 합당한 보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 속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근거합니다. 부모님 은혜, 할 때 어떤 자격과 조건을 갖추어서 얻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은혜에 관한 신학이 그런다 해도, 인간 편에서 마리아를 조명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이래 저래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보다는 아하~ 은혜를 받는 사람은 뭔가 다르구나~ 하는 점입니다. 그래야 은혜를 갈망하고 잘 보관하려 하지 무조건 그냥 주시는 공짜라고 자칫 은혜만능주의에 빠진다면 제대로 은혜를 누리지 못하거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종교인으로 끝납니다.

말씀에 순종하다

마리아는 은혜를 입었기에 황당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38절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당시 마리아를 성경은 처녀라고 반복합니다.

 

27절 약혼한 처녀 그 처녀의 이름은 29절 처녀가

처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요, 젊은 여자입니다. 마리아의 나이 15~16세 정도라니 어린 소녀입니다. 15 16세 어린소녀라면 중학생 나이잖아요? 중학생 나이에 네가 임신했다는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일까요? 요즘 아이들 말로 너무 어이없어서 ~” 그랬을까요?

대부분 34절이 자연스런 반응일 것입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의아한 질문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의 반응입니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상태입니다. 유대 관습은 결혼하기 1년 전에 정혼(약혼)합니다. 유대율법학파에서도 엄격한 샴마이학파는 정혼한 여인의 부정은 사형으로 규정했습니다. 혼전 성관계도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정혼기간에 신랑이 사망하면 손 한번 못 잡았으면서도 신부는 미망인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방적인 임신 통보에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 침묵 상태는 있었겠지만 이런 상태에서 마리아는 어찌 나는 주님의 아기바구니이니 아기를 담았다가 가져가소서”(38절 의역), 몸과 생애를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고백의 이유 역시도 38절에서 찾습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말씀대로의 그 말씀은 28절부터 천사가 하신 그 말씀들입니다. 31, 네가 잉태할 것인데 아이는 아들이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성자(聖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아멘! 으로 수용하면서 더 나아가 오래 전에 에덴동산의 그 예언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자의 후손 성경계보를 비롯해서 인류계보는 남자 중심입니다. 그래서 모두 남자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 여자가 바로 동정녀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어려서부터 믿음의 교육을 통해 이스라엘은 여자의 후손되는 구세주 메시아를 통해 구원 받는다는 메시아 신앙을 품고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셨을 것입니다. 정확히는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의 고지에 두려움, 당혹스러움도 있었지만 동정녀의 몸에서 오실 메시아 신앙이 있어 어린소녀의 마음이지만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며 받은 것입니다. 말씀의 힘입니다.

여자의 후손, 예언을 믿다

마리아의 신앙은 이곳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곧장 엘리사벳을 찾아 나섭니다. 천사는 엘리사벳의 임신 사실도 그 예표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그래서 39절 빨리 일어나 40,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그 거리가 160km입니다. 우리교회에서 문경시청까지가 160km입니다. 그 거리를 어린소녀가 빨리 달려간 것입니다. 왜 그 어려운 길을 택했을까요? 자기운명에 들어온 하나님의 섭리! 그것은 행운이고 축복이기보다는 두려움입니다. 누구에게 먼저 가야 하나요? 부모님? 정혼자 요셉? 동네에서 함께 자라난 동무들 아니면 회당의 랍비를 찾아서 상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마리아는 다 제치고 엘리사벳을 찾아 그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확인해 보고 싶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확인하고 싶었다면 금방 돌아왔겠지요? 마리아는 56, 석 달을 함께 있다가 돌아옵니다. 마리아가 방문했을 때 엘리사벳은 이미 임신 6개월입니다. 마리아가 3개월을 함께 보내었으니 엘리사벳은 임신 9개월이 되어 해산할 시기가 되어 출산을 보고 돌아왔던지 그랬을 것입니다.

 

 3개월을 체류했을까요? 처음부터 3개월을 작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엘리사벳을 만나보았더니 이 집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가 자기와 비슷합니다. 남편 제사장은 벙어리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늙은 몸에 자식이 생긴다는 말을 사가랴 제사장이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응답되는가, 그걸 눈으로 보고 싶었고 다른 하나는 엘리사벳을 모델로 태교(胎敎)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태교교육은 잉태를 아는 순간 포대기에 성경을 수놓는 일을 합니다. 출산쯤이면 포대기에 성경구절로 가득 찹니다. 그래서 아이를 이 성경보자기로 쌉니다. 이스라엘 아기들이 눈을 뜨면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강보요 강보에 쓰여진 성경말씀입니다. 성경말씀들은 유대 아기들의 뼈와 피와 살 속에 박힙니다. 최고의 태교교육입니다.

 

마리아는 사가랴가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거나 들었을 것입니다.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68 찬송하리로다

76 77절에서 마리아는 충격을 받습니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제사장의 아들이면 얼마나 대단한 아들입니까? 엘리사벳의 아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출산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주인공이 아니라 주 앞에 가서 하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누구인가? 이미 답은 알고 있습니다.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마리아의 아들이 바로  구세주 메시아라는 것을 성령 충만한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가 증언한 것입니다. 제대로 찾을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메시아 예언을 따르다

마리아는 여기서 더욱 확신합니다. 그래서 정혼한 약혼남이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갈 때에 동행합니다. 로마법에 여자도 호적해야할 의무가 있었지만 직접 고향에 가서 호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동행했을까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140km 정도(요단을 우회하여 돌아가는 길)가 됩니다. 여기서 대전시청까지 141km, 딱 그 거리입니다.

그때쯤이면 배가 많이 나와 그 먼 길을 걷는 데는 이만저만 불편하지 않았겠지요. 장거리 여행은 산모와 태아에 위험입니다. 더딘 발걸음에 일정이 길어집니다. 요셉은 하루 벌어 먹고사는 목수입니다. 한 시가 급합니다. 여러 모양으로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동행합니다.

 

그때쯤이면 마리아 임신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이 퍼지고 마리아는 정신적으로 압박을 받기에 인구 조사를 기회로 마리아를 데리고 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요셉은 이미 그녀를 아내로 맞이해서(1:24) 방패막이 노릇을 하고 있다하지만 이런 것은 추측이고 이건 정답이 아닙니다. 동행의 이유도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는 그 말씀과 말씀신앙에서 찾아야 합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해 준 말을 굳게 믿었습니다. 태중의 아들은 죄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까지 작명해 주셨습니다(1:21). 메시야 예수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다는 예언은 이미 수백 년 전에 미가 선지자를 통해 오랜 세월 전해왔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5:2)

 

왜 베들레헴인가?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중에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입니다.

32,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그러니까 태중의 아기가 다윗의 자손 메시아라면 당연히 유다 땅 베들레헴, 다윗의 고향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시간도 들고 고생도 많고 위험도 있고 남편의 일에 지장도 주었지만 마리아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메시아가 출생한다는 그 예언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열망으로 고생을 자처하고 나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렇게도 말씀을 사모하고 들은 말씀, 배운 말씀, 읽은 말씀대로 살려는 마리아가 하나님의 눈에 어여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신앙이 마리아를 은혜의 여인으로 키운 것입니다. 말씀이 없이 상황에 따라 감정에 따라 휘둘렸다면 오늘의 성모 마리아는 없었겠지요.

 

결론

코로나가 아직 종식되지 않는 상황에서 코로나19의 변이 바이러스 오미크론의 기습을 받게 되었습니다. 목사부부가 오미크론에 감염되고 의도적이든 얼떨결에 그랬던지 거짓말까지 해서 교회가 비난을 당함으로 더욱 우울하고 짜증나고 두려움으로 대림절 둘째주일을 맞습니다.

 

독일 전문가는 오미크론이 팬데믹을 종식시켜줄 크리스마스 선물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미크론이 델타 변이를 밀어내면서 코로나를 일반 감기 비슷하게 만들어주는 것 아니냐는 기대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건 전문가의 말이지 주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의 말씀으로 어려운 상황을 견디었고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결국은 세상에 구원을 들여온 축복의 태()가 되고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만약 마리아가 이런 신앙이 아니었다면 아들로 교만의 병을 얻어 빌립보교회의 여성지도자 순두게와 유오디아와 같은 신자로 끝났을 것입니다.      

 

우리도 개인이나 국가든 이런 저런 곤고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해도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백으로 힘들고 지친 세상을 잘 넘길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