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허점
로마서 6:1~5
서론
사도행전 6장에 초대교회가 조직을 만들면서 일곱 집사를 세울 시기에 어느 교회사가는 당시 기독교인을 2만에서 2만 5천명이라고 합니다. 요즘에는 2만 5천명 이상되는 교회가 수두룩하지만 2천년 당시에는 로마제국에서 기독교 경계령이 내려진 상태입니다. 로마 황제 외에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기독교는 불온 세력입니다. 그들에 대한 일종의 계엄령이 내려진 것입니다.
유대교, 유대인 집단에서는 기독교를 나사렛 이단이라, 예수를 이단의 괴수라 단정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되면 사회에서 출교하거나 가정에서 추방했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짧은 시간에 2만 명 이상의 신자들이 생겼다는 것은 그야말로 폭풍성장입니다.
신자들이 모이면 교단이 되고 교단이 되려면 교주, 조직,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지금 이런 단계까지 올라 선 것입니다. 교리 중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교리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결국은 영혼 구원”(1:9)이라 합니다. 믿는 목적이 곧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세 가지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율법주의.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지만 율법을 행함이 없으면 의를 얻을 수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조항 613개를 지키는 것만큼 의를 얻게되고 그 율법의 의에 근거해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것입니다.
-반(反)율법주의. 율법지상주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율법폐기론자들인 이들은 사람은 어떤 선행으로도 의를 얻을 수 없고 어떤 악한 일을 해도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신앙생활에 필요 없으니 “율법은 개에게나 갖다 주라!” 그런 식입니다.
-갈라디안주의. 이건 율법과 반율법의 중간지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구원에 대한 가능성의 길이 열렸으니 다음에 구원을 받는 것은 내 행위가 덧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보기에 이런 구원관들은 전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들 교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행위를 내세우는 깃입니다. 그래서 잘못됨을 알리기 위해 서신을 보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에 맞서 인간은 죄인된 신분이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았다는 것을 역설하는 로마서를 씁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선생은 반율법주의가 교회를 방종의 길로 이끈다며 야고보서를 씁니다. 구원을 받은 믿음이라면 행위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동생 유다도 반율법의주의자들을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는”(유4절)자들이라며 경고합니다. 갈라디안들에게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써서 인간이 의롭게됨에는 그 어떤 것도 첨가하지 못하고 오직 믿음 홀로 가능하다는 것을 전합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지만 본문의 내용도 반율법주의자들의 방종을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초장에서 인간의 죄성을 파헤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수문’을 열었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이 용서 받으면 더 감격스럽고 감사가 크다! 죽을병에 걸렸던 사람이 고침 받으면 그 감격은 더 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죄를 이기지 못할 은혜는 없다” 죄의 한계, 죄의 크기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주장입니다. 이신칭의의 근거가 됩니다.
바울이 어느 정도까지 은혜를 강조하는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라고 합니다. 은혜를 강조하다보니 바울의 말을 왜곡해서 죄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어차피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그러니 착하게 살 필요가 뭐 있나? 교회에 나가 죄를 회개하면 은혜의 하나님께서 모든 잘못을 다 용서해 주실 텐데… 회개만 하면 하나님이 용서하신다…’
은혜의 남용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은혜를 죄에 대한 진정한 회개도 없이 쉽게 죄를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죄를 조장하는 장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바울시대는, 대부분 로마제국 하에 있었습니다. 로마 문화는 신화(神話)와 목욕탕문화입니다.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에로스적인 신들입니다. 그래서 에로틱합니다. 여기에 목욕문화, 곧 노출문화가 있습니다. 상류층은 타락했고 귀부인들은 방탕했습니다. 여성노예들을 상대로 부인 앞에서 성희롱은 당연시 여겼고 귀부인들 역시 남성 노예들을 노리개로 삼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기독교문화를 만납니다. 자연스럽게 신앙인이 되고 거듭남으로 기독교에 입문한 것이 아니라 황실이 기독교에 기울어지자 시세에 편승하기 위해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일종의 ‘무임승차’를 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해라, 죄를 버려야 한다, 정결해야 한다…” 이런 가르침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지금까지 보편화되던 즐거움과 쾌락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믿음으로 살려면 버릴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좋은 날이 다 끝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겐 빠져나갈 구멍은 있는 법입니다. 기독교에도 교리의 허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라고만 명령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고 정결하게 살지 못했을 때 용서 받을 수 있는 장치도 마련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교리입니다.
죄를 짓고 고해신부에게 고백합니다. 음성 변조로 자백하거나 목소리를 알지 못하는 먼 성당을 찾아 고백합니다. 로마신전에서의 고백은 도대체 용서는 받은 것인지, 죄가 그냥 남아있는지 찜찜했지만 신부에게 고해하고 “네 죄를 사하노라!”는 음성을 들으니 이제 확실합니다. 내 죄들이 사함받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더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기독교에 고해성사가 들어온 것이 로마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부에게 죄를 자백하고 신부가 죄를 용서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도 용서해 주겠냐고 우습게 여겼지만 세월이 지나갈수록 그렇게 믿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짓는 데도 편하고 죄를 짓고 난 이후에도 양심의 가책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톨릭이 현대에 와서 더욱 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가톨릭에서만 성행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서도 일반화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어떠한 사람도, 어떤 행위도 무조건 다 용서해 주신다… 회개만 하라… 한쪽 강도를 봐라,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을 봐라, 모두 용서받지 않았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이런 가르침을 하다 보니 교인들이 어떻게 교활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는지… 죄를 우습게 알고 오히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묘한 논리가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죄도 더 많이 지어라?! 은혜를 자주 받으려면 죄도 자주 지어라! 은혜를 크게 받으려면 죄도 크게 지어라! 은혜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화끈하게 타락하고 화끈하게 은혜 받자? 그래서 나도 간증을 하자? 그래서 죄에 대해 관대해집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왜곡되게 전파된 곳이 한국 기독교입니다. 범죄자 중에 교인 비율이 많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많이 강조되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남용이자 은혜의 허점입니다. 은혜의 잘못된 중독 현상입니다.
바울은 은혜의 강수가 넘쳐났을 때 사람들에게 넘쳐나는 은혜 파문의 반응들도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0)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죄를 많이 지으면 은혜도 많이 짓는다는 것처럼 오해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은혜의 허점’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은혜의 허점을 그냥 넘어갔다가는 부도덕하고 무질서하고 죄를 조장하는 기독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6장과 7장에서 긴장과 열기로 ‘은혜의 파문’을 차단합니다.
바울은 1절에서 반문합니다. “뭐?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하겠다고? 죄가 더할수록 은혜가 더한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더 많은 죄로 들어가겠다고?”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론이 나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죄 짓는 일에 악용할 수 있습니까? 죄를 짓는 일을 정당화하는 데 하나님의 은혜가 이용당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가 우리 불의에 이용당한단 말입니까?
2절에서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흠정역에는 “하나님이 금하신다.”
15절도 읽어봅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0세기 독일신학자 본회퍼는 은혜 남용을 “값싼 은혜”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짜 비싼 은혜를 받았다면 어떻게 그 은혜를 저버리고 이렇게 죄에 이용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6장에서 은혜를 받은 것을 남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세 예화로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력하게 차단합니다.
㉠ 죽음 비유(2절)-“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죄를 짓는다고? 물을 더 많이 마시기 위해 소금을 입에 털어 넣겠다고? 그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론상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죄는 끊임없이 귀환합니다. 쓴뿌리로 계속 돋아납니다. 우리 본성을 자극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11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14절,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가 우리에게서 죽어있지만 우리에게 남아있는 죄성 때문에 죄는 끈질기게 다시 삶 속으로 비집고 들어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로 자처해야지 은혜로 죄를 살려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죄들을 밀어내야 합니다. 죄와 투쟁을 벌여야 합니다. 용서받을 길이 있으니 죄를 짓자, 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 라는 말로 우리 죄들을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받은 은혜가 값싼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 노예 비유-하나님의 은혜는 도덕적 미로에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면허증이나 자유통행증처럼 악용되고 있습니다. 용서받을 것을 미리 아는데 왜 힘겹게 살아야 하나? 그래서 편히 살고 회개하는 쪽을 택합니다. 로마가톨릭은 성당으로 가서 타인에게 입술로 자백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고백하고 사함을 받았다고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기에 죄를 무심하게 여기며 그 결과 교인들이 더 쉽게 죄를 택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은, 2절에서 “그럴 수 없느니라” 하면서 노예의 비유를 듭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절)
죄는 원래 우리의 상전입니다. 죄는 우리가 일종의 노예 신분입니다. 그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죄의 포로입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상전은 의(義)-하나님입니다. 새 상전을 모셨는데 옛주인인 죄의 종노릇을 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속량해 주신 새주인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새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않으려면 죄안에 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대부분 우리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우리가 용서받은 자로 살지 않으면 스스로 속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결혼 비유(7장)-아내가 착한 여인이라고, 자비로움이 많다고, 무한정 용서를 하는 아내라고 바람을 피운다면? 그래서 내가 당신이 얼마나 좋은 여자인가를 드러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면? 그 착한 아내에게서 어떤 답이 나오겠냐는 것입니다. 귀싸대기가 올라옵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하는 말이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2절).
부부싸움을 하고 나면 더 좋아진다? 그래서 더 싸우자? 그러면 남편이 하는 말이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2절). 그것은 아내에 대한, 남편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려고 다칩니다. 당연히 사랑은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그만큼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부모의 사랑, 은혜를 확인하기 위해 자주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값싼 은혜로 자족하게 됩니다.
운전자가 보험이 되어있다고 마음껏 사고를 냅니까? 물론 보험에서 보상은 해주지만 사람도 다치고 자동차도 손상됩니다. 용서를 받으니 죄를 짓자, 하는 것과 보험이 있으니 마음껏 사고를 내자!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허점입니다. 은혜를 낭비하고 은혜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면 칭의는 성화의 신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낙과가 될 것입니다.
결론
다음 주일이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를 개혁한다고 나왔지만 아직도 개혁주의교회에는 로마가톨릭의 거짓된 가르침들이 이곳저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행위에 의지하고자 믿음 말입니다. 그리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장치가 있다고 해서 너무 쉽게 죄를 짓고 너무 쉽게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았다 그 죄들을 입어버리고… 혼자서 북치고 장구를 치는 썩은 은혜에 기반을 둔 그릇된 행위들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 믿음은 공회전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생각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신앙개혁입니다.
윌터 트로비쉬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지만 일단 그분이 받아주시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위해 사랑하는 것이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선행을 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은 사람은 죄에 대해 맛 자체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향한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더 조심하게 되고 죄에 대해 통탄하며 탄식하면서 성화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진짜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들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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