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날마다 죽는 생활입니까?(고전 15:31)
광주 출신의 첫 기독교인 오방(五放) 최흥종(1880,5,4~1966,5,14)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압기와 근대에 이르는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기독교 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치며 성자다운 삶을 산 인물로 평가받는 귀한 분입니다.
이 분이 55세 되던 해인 1935년 3월 17일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사망통고서」 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 오방 최흥종은 죽은 사람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인간 최흥종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차후에 거리에서 나를 만나거든 아는 체를 마십시오.
본인을 사망자로 간주하시고 우인(友人) 명부에서 삭제하여 주십시오. 이 최흥종은 오늘부터 지상에서 영원히 떠나 하나님 품에서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자유롭게 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를 바랍니다.
호가 오방(五放)인데 5가지 속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는 뜻으로서 가정에 대하여 방만자(放慢者), 사회에 대하여 방일자(放逸者), 사업에 대하여 방종자(放從者), 국가에 대하여 방기자(放棄者), 종교에 대하여 방랑자(放浪者)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결심을 따라 십자가의 주님만 믿고, 범사에 주님의 교훈대로 살며, 살든지 죽든지 주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으므로 주위 사람들에게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해 달라고 통고한 것입니다. 기독교 목회자, 독립운동가, 교육가, 한센 병 환자 구호사업가였던 최흥종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자유를 누리는 그런 믿음으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런 고백을 합니다. 바울이 어떤 의미에서 이런 고백을 하는 지 그 영적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으로 자기절제의 삶을 살겠다는 각오입니다. |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씀을 의역(意譯)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매일 죽으면서 삽니다. 또는 나는 매일 죽음 앞에서 살아갑니다. 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죄에 대하여 죽었고, 욕심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09장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의 행적들을 보십시오. 그는 선교의 일에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던져버립니다.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의 일정을 보면 순간순간마다 그의 생명이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지를 모르는 환경이었습니다.
전도자로서 당하는 핍박이 그러했고, 환난이 그러했고, 건강이 그러했습니다. 날마다 죽음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매일 죽음을 무릅쓰고 살았기 때문에 바울의 삶은 날마다 주님 안에서 죽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건한 삶, 선교의 길을 가는 바울이었지만 그에게도 순간순간 옛 사람의 본능이 솟구치면서 선교의 길을 중단하고 싶은 갈등이 일어날 때가 있었습니다.
롬 0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롬 06:02) 자라고 고백하면서도 현실의 환경 앞에서 믿음의 갈등을 합니다. 건강한 생활이 무엇입니까? 옛사람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삶입니다. 옛 생각, 세상적인 삶, 이기적이며 탐욕적인 것들을 계속적으로 무너뜨리는 삶입니다.
그래도 혈기가 올라옵니다. 불신앙의 고집도 올라옵니다. 믿음에서 이탈하고 싶은 마음도 올라옵니다. 자존심 때문에 죽기 싫은 마음이 있습니다. 고생하기 싫은 마음이 있습니다. 내 안에 내 맘대로 하고 싶은 자아는 계속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런 것들을 깨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을 하는 것은 날마다 내 스스로를 죽이고 또 죽인다는 뜻입니다.
예, 믿음의 사람은 마음속에 암적 요소들(갈 05:19~21)인 악령의 열매들이 고개를 들고 올라오지 못하도록 계속 눌러주어야 합니다. 그런 암적인 것들에게 생각의 에너지를 주지 말고 바로 바로 차단하십시오. 그렇지 못하면 잠깐 동안의 틈만 있어도 우리를 흔들 것입니다.
이내 세상적인 것들을 마음에 채워 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의 갈등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래서 악령의 열매들이 올라 올 때마다 바로 바로 차단하십시오. 동시에 성령님의 열매들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날마다 죽는 생활입니다.
갈 0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날마다 나를 죽이는 영적 훈련을 합시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죽기는 죽는데 영적으로 죽습니다. 반면 날마다 내 속에 있는 악령의 열매를 죽이면 세상에 대하여는 죽고 믿음이 살아납니다.
2. 사도 바울이 왜 날마다 죽어야 합니까? |
갈 0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이 날마다 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완전히 죽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하다 헐벗고 굶주리는 생활을 밥 먹듯 하고, 매도 많이 맞고, 감옥에도 갇히고, 날마다 죽음을 체험하다시피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본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고생은 고사하고 얼마든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이력서를 보면 유대인 사회에서는 그리 시시한 사람이 아닙니다.
빌 03:0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06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혈통과 가문이 좋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거기다 학력도 대단합니다. 헬라의 철학과 유대교의 율법을 다 공부하였고, 길리기아 다소 사람(행 22:03), 즉 도시 출신으로서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도 가졌습니다(행 22:28). 또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의 문하에서(행 22:03) 수학을 하였으니 최고의 스팩을 갖춘 사람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유대인 사회에서 얼마든지 출세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이 왜 자신을 세상적으로는 죽은 사람처럼 내려놓고도 또 날마다 죽은 사람처럼 삽니까? 스스로 고생길을 사서 하는 데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가 죽음으로 인해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고백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주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요, 예수님과 함께 자기도 죽는 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시절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 평촌 골의 깡패 김익두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교회사에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그가 시장으로 가는 길목에 누워있으면 시장 가던 사람들이 그를 피하기 위해 30리 길을 돌아가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깡패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여 신학을 하고 목사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안수를 받기 전 김익두 사망이라고 부고장을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은 너도 나도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김익두가 목사가 되어 성경 찬송을 끼고 고향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 놈 죽었다더니 멀쩡히 살아있네? 귀신은 뭐하나? 저런 놈을 잡아가지 않고서. 그 말을 들은 김익두 목사님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성경찬송을 바닥에 놓고 예수님 여기 잠깐만 계십시오. 내가 저 놈들 혼 좀 내놓고 오겠습니다. 하고 논으로 뛰어들어서 농부를 논바닥에 메다꽂았습니다. 마침 그 모습을 본 한 노인이 소리쳤습니다. 저 놈 좀 보게. 옛날 김익두가 멀쩡히 살아있네 그려, 부고장도 다 거짓으로 돌린 거야. 이 말을 들은 김익두 목사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주님, 옛날 김익두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들어갈 때는 죽으려고 들어갔는데, 목사 안수를 받을 때는 십자가 아래서 죽은 줄 알고 부고장까지 보냈는데 내가 덜 죽어서 이 모양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는 한평생 자기를 죽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니 성령님이 권능이 충만하여 많은 병자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김익두가 완전 죽으니 놀라운 신유의 역사들이 나타난 것처럼, 우리도 죽어야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내 인생을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런 삶으로 전진을 합시다.
3.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도 날마다 죽습니까? |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날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당합니다. 날마다 죽음을 경험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3차 선교여행까지의 일정들을 보면 그는 날마다 죽음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의 현장들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고후 11:23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는 daily baptism이란 말을 했습니다. 날마다 세례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날마다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도 죽고, 내일도 죽고,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도, 주님을 섬기는 생활도, 성도를 섬기는 생활도 이렇게 죽은 자세로 섬겨야 하며, 오늘의 삶, 매일의 삶, 이 순간의 삶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스타일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을 한 번 짐작해 해 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O O야, 나는 네가 똑똑한 직분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네가 재주가 많고 특출한 자녀가 되는 것 보다는 내게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기 원한다.
자아를 죽이고, 자기 생각과 고집과 주장을 다 버리기 원한다. 나의 뜻을 전적으로 순종하는 직분자가 되기 원한다. 그렇게 위해서는 날마다 무조건 죽어라 하느니라. 이렇게 말입니다.
바울의 생애는 한 마디로 주님의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경건 생활을 더 성숙시키기 위하여 날마다 죽는 삶을 택하였습니다. 매일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오르내렸습니다. 굶주림과 황제의 박해 때문에, 이교도들의 박해와 사나운 짐승들 때문에 얼마든지 위축될 삶이었음에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순교를 당하기까지 세상에 속한 것들을 비우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적 부요함을 마음에 채우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였습니다.
빌리 그레이엄(미.1918,11,7)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빌리 그레이엄이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그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십시오. 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주소를 옮긴 것뿐입니다. 예, 우리도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을 한다면 그것은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 세계로 옮긴 삶, 세상적인 모든 것을 비웠다는 의도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옛날 로마 사람들, 헬라 사람들 중에 소위 지성인들은 서로 만나면 이렇게 인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메멘토는 리멤버(Remember), 즉 기억하라는 말이고, 모리는 죽음(to die)이라는 말입니다.
나도, 당신도 죽을 것이니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삽시다. 라는 인사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며 욕심과 싸우고, 이기적인 생각과 싸워 승리합니다. 바울도 자기를 찌르는 가시 때문에 교만을 이길 수 있고, 더 겸손해질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고후 12:09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보세요.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물었습니다. 아무도 없으십니까? 손들어보세요. 그때, 뒤에서 나이가 많은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감격스러워 할아버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그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응, 있었는데 이제는 다 죽었어.
예, 우리 가운데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다 죽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내가 지금 죽어서 해결하면 됩니다. 내가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거하시면 그때부터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날마다 죽노라. 라는 고백 속에서 사랑이 싹이 틉니다. 이 길만이 내가 사는 길, 승리의 길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천국 영생과 그 상급)에 두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날마다 죽는 믿음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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