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신 예수님! (요20:11-18)

하나님아들 2024. 8. 21. 23:55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신 예수님! (요20:11-18)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예수님은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 예언된 그대로였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자신의 죽으심과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 계속 말씀해오셨습니다.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요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2: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요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2: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고, 예수님은 성경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죽으셨고, 또한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요, 반드시 일어나야 할 필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여주는 증거는 너무나도 많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봅니다. 예컨대 예수님을 장사한 무덤에서 돌이 옮겨졌습니다. 그 안에는 빈 무덤만 남았습니다. 본시 돌을 인봉하고, 경비병들이 그 앞을 굳게 지켰던 무덤이었습니다.

또한 무덤 안에는 세마포가 예수님의 몸을 쌌던 본래의 모습 그대로 놓여져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그대로 세마포 밖으로 빠져 나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여기에 더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이외에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증거들은 모두가 간접적인 것들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친히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적어도 열 번 이상, 그리고 적어도 오백 명 이상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구원을 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단 한번도 불신자들에게는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이왕이면 예수님을 배척하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에게 보이시면 더 낫지 않았을까요?

 

눅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부활하신 예수님이 몇 사람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앞에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더라도 그들 외의 다른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나 택함을 받은 자신의 제자들에게만 보이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그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막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이와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맨 먼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지 아니하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보이지도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맨 먼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실 막달라 마리아는 특별한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서안의 작은 마을 막달라에 살던 시골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였습니다. 복음서 이외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는 여성이었습니다. 이처럼 마리아는 그저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맨 먼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때 막달라 마리아가 그만큼 예수님을 간절하게 찾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그 때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우리가 막달라 마리아처럼 비천하더라도, 예수님은 그것을 상관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간절하게 찾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의 필요도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찾는 마리아(11~13절). 둘째, 마리아에게 보이신 예수님(14절~16절). 셋째, 예수님을 전하는 마리아(17절~18절).

 

눅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를 찾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 그리할 때 그들 속에서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도 찾아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고, 우리에게도 성경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속에서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큰 은혜가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찾는 마리아(11절~13절).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사십 일을 이 땅에 머무셨습니다. 그 동안에 예수님은 하셔야 될 일이 많으셨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셔야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파송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먼저 자신을 나타내셔서, 그에게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맨 먼저 보이셨습니다.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는 이 말씀이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본문 앞 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무덤을 보고서 나서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날 새벽 아직도 날이 어두울 때였습니다. 몇 명의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을 향했습니다. 그 때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당도했던 여자도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와보니까, 예수님의 무덤에서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깜짝 놀라서 그 길로 얼른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 안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에 두 제자는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그 집은 제자들이 함께 모여있던 곳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두 제자는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무덤 곁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울다”라는 동사가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었습니다. 그리고는 또한 울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말하자면 마리아는 계속해서 울고 또 울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마리아는 계속해서 울었습니까?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예수님이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그 곳에 계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울고 또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마리아는 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창21장에서 하갈이 바로 자기 옆에 샘을 두고서도,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고 소리 내어 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전연 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요16: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울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이 때에도 마리아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출25:18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성막 안에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그 지성소에는 법궤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법궤의 윗면을 속죄소 또는 시은좌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속죄소 두 끝에는 각기 한 그룹, 곧 한 천사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시체가 뉘었던 곳의 양 끝에는 각기 한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눅24:4에 의하면, 그들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막16:5에 의하면, 그들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들이 천사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의 무덤에서 돌을 옮기고,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무덤 안에 앉아있는 천사들은 아마도 무덤을 청소하기 위해서 그 곳에 온 사람들일 것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사람들이 누구이든지 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님에게만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들에게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단지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그 사실에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요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리아가 얼마나 슬프게 울었든지, 천사들은 그의 울음을 일차적인 관심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리아에게 이와 같이 물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물론 천사들은 마리아가 우는 이유를 몰라서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천사들은 마리아의 불신앙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울어야 할 이유가 전연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오히려 크게 기뻐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천사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기가 울고 있는 이유를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내 주님(my Lord)”이라고 불렀습니다.

말하자면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도 그의 주님이셨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변함없이 예수님은 그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 꼭두새벽에 자기의 주님인 예수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그 곳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의 주님을 어디로 옮겨버렸는지, 무덤 안에는 그의 주님이 계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의 주님에게 자기가 준비해온 향품을 발라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사실이 너무도 슬퍼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마리아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그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보이지를 않자, 그는 너무 마음이 아파서 울고 또 울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든지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든지 간에, 만일 그런 일에 우리가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며 큰 비극입니다.

행여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멀리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리아처럼 울고 또 울면서, 예수님의 임재를 갈망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주시며, 우리의 문제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마리아에게 보이신 예수님(14절~16절).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간절하게 찾았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 계신 모습으로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찾는 이상을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보다 언제나 더 좋은 것을,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마리아는 자기가 슬피 우는 이유를 천사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천사들은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미 부활하신 예수님이 무덤 밖, 곧 마리아의 뒤에 서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마리아는 뒤로 돌이켰습니다. 어쩌면 뒤에서 나는 인기척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사들이 앉은자리에서 일어나서, 마리아에게 그의 뒤를 돌아보라고 손짓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마리아는 자기의 몸을 뒤로 돌이켰습니다.

그 곳에는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가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흘러내리는 눈물로 인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겠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살아 계시리라고는 전연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습니까?

 

막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이전과는 다른 모양을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부활의 몸, 영화로운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모인 곳의 벽을 그대로 통과해서 지나가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시골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니까,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셔야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대로,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그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시니까, 비로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면서도, 예수님이신 줄 몰랐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모양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여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뒤에, 예수님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두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는 질문과 아울러 “누구를 찾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첫째 질문, 곧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는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물었던 질문과 동일합니다. 천사들의 입에 그들이 할 말을 담아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천사들은 예수님이 그들의 입에 담아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다시 한번 마리아에게 지금은 울 때가 아님을 깨우쳐주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기뻐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질문은 “누구를 찾느냐?”였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자기가 향품을 발라 드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 질문을 통해, 또다시 마리아의 불신앙을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이 때 아직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마리아에게 나타내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또한 그 동산지기가 예수님을 다른 곳으로 옮겼을는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마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마27: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마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마27: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마27: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말하자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의 동산지기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동산지기가 예수님의 시체를 다른 곳으로 옮겼을 것이고, 또한 무덤 안에 있는 두 청년은 그 동산지기 밑에서 일하는 일꾼들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면서 그 동산지기에게 애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 때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바를 향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더해서 어떻게 그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것을 따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예수님을 찾아야만 한다는 일념뿐이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은 지극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맨 먼저 마리아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더 깊이 더 뜨겁게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드디어 예수님은 예수님을 애타게 찾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마리아의 닫힌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는 이가 예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로 자기의 몸을 돌이켰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동산지기에게 말을 하고 나서는, 이 때 무덤 쪽으로 되돌아 서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랍오니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랍비라는 말보다 훨씬 더 큰 공경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을 부를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의 주님이시며,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그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한 목자이시며,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요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돌보심을 받는 예수님의 어린 양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처지에 무관심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다 아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언제나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늘 들으며, 예수님의 뒤를 잘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전하는 마리아(17절~18절).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기 전에, 마리아는 슬퍼하며 계속해서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 난 뒤에, 마리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쁨으로 전했습니다.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마28:9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동안 마리아는 애타게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아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꼭 붙들었습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자기가 예수님을 놓치거나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기를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와 같이 밝히셨습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조금은 이해하기 어렵도록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이런 뜻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가셔야 할 것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셨더라도, 그저 일시적으로 잠시 이 땅에 머무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이미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 일 후에 승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자들이 있을 거처를 예비하실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보내실 것입니다.

성령님은 제자들 안에 영원토록 거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다시금 깨우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보내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변화 산에서의 세 제자들처럼, 마리아도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가리켜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마리아처럼 열심히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자기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또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의 아버지는 제자들의 아버지이시며, 예수님의 하나님은 제자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의 사랑은 한이 없습니다. 요13:1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랑으로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기를 붙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마리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그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자들에게 갔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슬픔의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쁨의 여인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눈물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환희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를 바꾸어놓았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또한 마리아는 자기가 들은 것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신 것과 예수님이 곧 승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애타게 찾았습니다. 신실하신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찾아오셨고, 또한 그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 결과 마리아는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임재를 애타게 갈망합시다. 예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에게도 찾아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역사하시며,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내가 내 삶 속에 살아 역사하시는 주를 보았다.” “내가 이 주님을 당신에게 알리고 싶다.”

이와 같이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곳이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써 날마다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