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개요
-이름:출애굽기는 헬라어로는 “탈출“을 의미한다(“떠남“/ 히 11:22 참조). 이 책에서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속박과, 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또는 “탈출“)을 설명한다. 출애굽기의 핵심 단어는 구속이다. 왜냐하면 “구속한다“는 것은 “석방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책 전체가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을 상징하는 묘사들로 가득 차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는 두 군데에서 사용되었는데,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주제로 한 부분인 누가복음 9장 31절에서, 또한 베드로후서 1장 15절에서의 “떠남“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성경에는 세 종류의 탈출 경험이 나온다. 이스라엘의 애굽에서의 구원, 십자가를 통한 그리스도의 죄인 구원,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신자들의 구원이다.
-저자:모세가 이 책을 기록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책의 통일성(개요 참조)은 한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보여주며, 목격한 사실에 대해 기록했다는 것은 당시에 저자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이 책이 모세의 기록임을 확인하셨다(요 7:19/요 5:46-47).
-목적:창세기는 시작의 책이요, 출애굽기는 구속의 책이다. 이 책은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그 종교 의식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제시한다. 물론, 이 언급들은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서 값주고 사신 구속을 상징하고 있다. 출애굽기에, 특히 성막에는 그리스도와 신자에 대한 모형과 상징이 많이 나온다. 이 책에는 율법의 수여 과정도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사건들과 상징들을 모르고는 신약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모형:출애굽기에는 몇 가지의 기본적인 모형이 나온다.
1)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며 그들을 속박 아래 두려고 하는 세상 제도에 대한 모형이다.
2)바로는 사탄의 모형이며 “이 세상의 신(神)“으로 자기를 예배하고 하나님을 거부할 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화하려고 생각한다.
3)이스라엘은 세상의 속박에서 구원받아 순례의 여행길에 오른 교회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
4)모세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5)홍해를 건넌 일은 이 현실의 악한 세상에서 신자를 구원하는 부활의 상징이다.
6)만나는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심을 상징한다(요 6장). 바위를 친 것은 그리스도를 친 것으로, 그의 죽으심을 통해 성령을 받게 된다.
7)아말렉은 순례의 여행에서 신자를 공격하는 육신의 상징이다.
8)출애굽기의 핵심적인 모형은 물론 그리스도의 죽음을 묘사하는 유월절이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고, 우리가 매일 강건하도록 어린 양을 먹음으로 그의 생명을 소유한다. 자세한 것은 뒤에서 살펴보자.
-모세와 그리스도: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상징이므로 여러 가지 비교와 대조를 볼 수 있다.
직분상으로 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모세는 선지자(행 3:22), 제사장(시99:6/히7:24), 종(시 105:26/딤전 2:5), 구원자(행 7:35/살전1:10)였다.
성격상으로 보아 그는 온순하고(민 12:3/마11:29), 충성되고(히 3:2), 순종적이며, 말과 행위에 능력이 있었다.(행 7:22/막 6:2)
생애에 있어 그는 아들로 태어나 죽을 위기에 처했었고(마 2:15-) 하나님께서 섭리로 보호하셨으며, 애굽에서 통치하는 것보다 유대인들과 고난당할 것을 택했다(히 11:24-26). 그는 처음에는 형제들에게 거절당했으나 두번째는 영접을 받았다. 그가 거절당했을 때에 이방인 신부를 얻었다(그리스도와 교회). 모세는 애굽을 책망하였고, 그리스도는 세상을 책망하셨다. 모세는 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했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셨다(눅 9:31). 그는 백성을 인도했고, 먹였으며, 그들의 짐을 졌다.
물론 대조적인 면도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지 못하여 여호수아로 그 일을 수행하게 하였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7)."
출애굽기 개요
출애굽기 개요
-주제:구속(눅 9:31/벧후 1:15)
1. 구속-하나님의 능력/1-17장
죄의 노예/ 1-4장
바로의 완악함 / 5-11장
하나님의 구원 / 12-17장
(1)유월절-죽임당한 양, 그리스도 / 12-13장
(2)홍해 횡단-부활 / 14-15장
(3)만나-생명의 떡, 그리스도 / 16장
(4)내려 친 바위-성령을 주신 그리스도 / 17장 1-7절
(5)아말렉-육(肉)대 영(靈)/ 17장 8-16절
2. 공의-하나님의 거룩함/ 18-24장.
준비된 민족 / 18-19장
계시된 율법 / 20-23장
(1)계명(하나님 편)/ 20장
(2)심판(인간 편)/ 21-23장
체결된 언약 / 24장
3. 회복-하나님의 은혜/ 25-40장
성막의 설계/ 25-31장
성막의 필요성-이스라엘의 죄 / 32-34장
성막의 건설 / 35-40장
출애굽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을 찾아보기는 쉬운 일이다. 모든 사람이 죄와 세상에 속박되어 있어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구속주, 그리스도를 보내셔야 했고 그의 피(유월절)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저주로부터 구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을 통하여 애굽(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이 사실은 홍해를 건너는 것으로 모형지워졌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영(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우리순례의 여행을 시작한다. 하나님은 천국의 만나(말씀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로 우리의 영양을 공급하시는데 우리는 가끔 세상의 “부추, 양파, 마늘, 고기“를 먹으려는 육적인 식욕을 나타낸다. 그는 성령의 생수를 주셔서 우리의 순례를 새롭게 하신다. 그러나 언제나 육신(아말렉)과의 투쟁이 있고 이 투쟁에서는 말씀과 기도로써만 승리할 수 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이것은 이 땅에서 천국까지 가는 그리스도인의 여행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세상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할 풍성한 유업에 이르기까지의 영적인 여행을 상징한다. 가나안은 에베소서 1장 3절의 “모든 신령한 복“의 모형으로 나타난다. 많은 성도들이 실패의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출 1
“노예가 된 이스라엘“-출애굽기 1-2장
1.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박해(1장)
새로운 세대(1:1-7) -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가 될 것은 창세기 15장 13-16절에서 예언되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을 때가 100세였으므로 4세대는 400년과 같다고 하겠다. 오늘날에는 한 세대는 그보다 적을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는 약속도 이루셨다(창 46:3). 야곱의 본래 가족이던 70명이 백만이 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임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수가 늘어났다(행 7:15-19 참조).
새로운 왕(1:8-14) - 사도행전 7장 18절은(문자대로의 헬라어로는) “다른 종류의 또다른 왕“이라고 말한다. 즉 새로운 왕이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뜻이다. 역사는 이 시대에 “힉소스“의 침략자들이 애굽을 점령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들은 아마도 앗시리아에서 온(사 52:4) 셈족인 것 같다. 새 왕은 자기 백성에게(애굽인이 아님) 유대인이 이처럼 많다는 것은 자신의 통치에 위협이 된다고 경고하여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대하기로 결정했다. 요셉은 애굽의 구원자였으므로 왕이 애굽인이라면 그를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애굽에서의 이런 노예생활은 죄인이 이 세상에서 영적인 노예생활을 하는 모습이다. 유대인들은 애굽으로 내려가 가장 좋은 땅에서 살았다(창 47:6). 그러나 이런 호화로움은 후에 고난과 시련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잃어버린 죄인과 얼마나 유사한가! 죄는 기쁨과 자유를 약속하나, 가져다 주는 것은 슬픔과 속박이다.
새로운 작전(1:15-22) -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이라는 왕의 계획은 큰 성공을 거두는 것 같았으나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 하나님은 산파들을 사용하여서 왕을 혼란시키고 후에는 아기의 울음소리를 사용하여 바로의 딸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사용하여 강한 자들을 패망케 하신다. 물론 이 전략은 살인자 사탄에게서 힘입은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을 멸망시켜 메시야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사탄의 노력의 일부였다. 후에 사탄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할 때 헤롯을 이용하였다. 여인들이 왕의 명령을 거스린 처사는 옳은 것인가 ? 그렇다. 정당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행 5:29). 그 땅의 법이 명백히 하나님의 명령에 반대될 때 신자들은 하나님을 첫자리에 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하나님은 산파가 바로에게 한 변명을 인준하시지는 않았지만(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지만) 그들의 믿음을 보고 축복하셨다. 명심할 것은 하나님의백성을 익사시키려 했던 바로 그 통치자가 자기의 군대가 홍해에 익사하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이다(출 15:4-5). 우리는 심는 대로 거둔다. 비록 그 추수시기가 늦어진다 할지라도(전 8:11)!
이 장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노예로 만들려는 사탄의 시도가 나온다. 1절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이다(창 32:28). 세상의 전투자(사탄)는 하나님과의 투쟁자에게 도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사탄의 속박에서 구원받게 된다."
출 2
2. 하나님이 선지자를 예비하심(2장)
마치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신 것처럼 보인다. 유대인들은 기도하고 부르짖으며(2:24-25) 하나님의 구원이 어디서 올 것인지 궁금해 했다.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기억했다면 400년이 경과해야 함을 알았을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준비하고 계셨으나, 또한 사악한 가나안 민족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며 기다리고 계셨다(창 15:16). 하나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신다. 지도자를 선택해 놓고, 그의 능력의 일을 위해 준비시키고 계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준비할 때 사용하신 방법을 눈여겨 보자.
경건한 가정-사도행전 7장 20-28절과 히브리서 11장 23절을 읽자. 출애굽기 6장 20절에서 이 경건한 부부가 아므람과 요게벳이었음을 알게된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결혼을 해야 했던 일은 위대한 신앙과 사랑의 행위였다. 하나님은 이 일로 인해 그들을 상주셨다. 믿음으로 행동했으므로(히 11:23), 그들의 아들 모세를 낳는 일에 관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있어야 했다. 그는 “준수한 아이“(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으로 그를 하나님께 바쳤다. 부모들은 태어나는 각 아이들에게서 하나님이 무엇을 보시는지 알 수가 없다. 부모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녀를 키우는 것은 중요하다. 이 아이를 강에 띄우는 것은 참된 믿음을 필요로 했다. 이 강은 다른 아이들도 내다버리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한 어린 아이의 눈물을 사용하셔서 어떻게 공주의 마음을 감동시키는지 눈여겨 보자. 또한 그를 양육하는 데에 그 아이의 친 어머니를 배정하시는 것을 보라(욥 5:13참조).
특수교육(행 7:22)-왕의 양자로 궁전에서 양육되며 모세는 애굽의 훌륭한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오늘날조차도 사람들은 애굽인들의 학문에 놀라고 있으며 모세는 반에서도 선두에 있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교육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모세는 자기가 받은 훈련을 사용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지혜를 대신할 만하지는 않았다.큰실패(2:11-15/히 11:24-26)-모세가 궁을 떠나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어야겠다는 위대한 결심을 한 것은 40세 때였다. 우리는 그의 사랑과 용기를 칭송하지만 그의 행동에서 나타난 것처럼 그가 여호와를 앞질러 달렸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12절은 그가 눈으로 보이는 바 대로 행하고 믿음으로 행치 않았음을 말해 준다. “좌우로 살펴“보았고, 동산에서의 베드로처럼 모세는 손의 검과 팔의 힘을 의지하였다. 후에 그는 칼 대신 지팡이로, 자신의 힘이 아닌 하나님께로서 오는 능력으로 바꾸었다(6:1). 베드로처럼 모세는 적을 잘못 알고 싸웠다(사탄이 아니라 사람). 그는 잘못된 힘(영이 아니라 육신)을 사용했다. 그는 잘못된 무기를 사용했고, 때가 아닌 때에 행동했다. 그는 시체를 묻었으나 이것은 살인자를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았다. 다음 날은 두 유대인들이 싸우고 있었고 모세는 그들을 도우려 했다. 이 때 그는 적들과 친구들에게 사람을 죽인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가 취할 방책은 그 땅에서 도망하는 것뿐이었다.
모세의 실수를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그의 용기와 신념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반스 해프너 박사가(히 11:24-26 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았고, 불멸의 것을 택했고, 불가능한 일을 했다.“ 믿음에는 단호한 거절이 수반되며, 이러한 거절은 보상받게 된다. 불행하게도 모세는 행동을 너무 서둘렀다. 하나님은 그를 더 깊이 훈련하시기 위해 별도로 제쳐놓으셔야 했다.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고후 10:3-6).
오랜 지연 기간(2:16-25)-모세의 생애는 똑같은 세 기간으로 나뉘어진다. 애굽의 왕자로 40년, 미디안의 목자로 40년, 사역의 40년이다. 성경의 많은 중요한 장면들이 우물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주의를 끌 만하다.
양떼에게 물을 먹이려는 여인들을 돕는 친절한 행동으로 인하여 모세는 이드로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게 되었다. 소녀들이 모세를 “애굽인“으로 보는 것에 유의하자. 이 말은 그가 유대인을 닮은 것보다 애굽인과 더 닮았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적이어서(영적인 의미로) 사람들이 그 참된 유전 형질(形質)을 볼 수없음은 불행한 일이다! 모세는 미디안에서 충성된 종으로 40년을 보냈으며 여기서 하나님은 앞에 놓인 어려운 직무를 위해 그를 준비시키셨다. 그가 자기 민족에게 거절당하는 동안 이방인 신부를 취했는데, 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습이다. “게르솜“이란 “이방의 객“을 의미하는데, 이는 모세가 자신의 참된 위치는 애굽으로 돌아가 이스라엘 백성과 항께 있어야 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나 그는 백성의 신음소리를 듣고 행동할 적절한 시간을 기다리셨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적임자와 적절한 계획을 사용하셔서 적확한 시기에 역사하신다. 모세는 얼마 안되는 양을 돌보고 있으나 곧 민족 전체를 인도하게 될 것이다. 목자의 지팡이는 능력의 막대기로 바뀌며, 그는 하나님께 사용되어 능력의 민족을 창조하는 일을 도울 것이다. 그가 그 비천한 일에 충성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여 위대한 일을 수행하셨다."
출 3:1-모세의 소명-출애굽기 3-4장-
모세에게 새 날이 동터올랐고 모든 것은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날 아침, 그가 양들을 데리고 나갈 때에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큰 유익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신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1.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심(3:1-6)
불타는 나무는 세 가지의 복합적인 의미가 있다. 불타는 나무는 하나님의 모습이다(신 33:16).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계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나무는 타버리지 않았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불가능한 임무를 맡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나무는 괴로움의 용광로를 통과하면서도 타버리지 않는 이스라엘을 상징했다. 인간들은 얼마나 자주 유대인을 근절시키려고 시도했던가! 그러나 실패해왔다.
끝으로, 그 나무는 모세의 예표(豫表)였다. 비천한 목자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꺼뜨릴 수 없는 불이 될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경이로움 중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장소로 인도되었음에 주목하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참된 시작이기 때문이다. 겸손하게 신을 벗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능력으로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부르시기 전에도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사 6장). 불타는 나무에 대한 기억은 광야에서의 긴 시련의 여정을 통하여 모세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출 3:7-10
2. 하나님이 모세를 임명하심(3:7-10)
“내가... 고통을 정녕히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왔노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의 소식인가! 모세는 자주 그의 사랑하는 백성의 상황에 대해 이상히 여겼으나 이제 그는 하나님이 내내 그들을 지켜보고 계셨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때의 형편을 그리스도가 태어났을 때의 형편과 쉽게 적용시켜 생각할 수 있다. 속박과 시련과 슬픔의 시대였으나 하나님이 아들의 인격을 통해 강림하셔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내어 약속된 땅으로 데리고 가실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가 시작하신 일을 그가 끝내신다!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하려 하심을 듣고 기뻤다. 그런데 이제 그 자신이 구원자라는 소식을 듣는다. “내가 너를 보내겠노라!“ 하나님은 이 땅에 그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해 언제나 인간이란 도구를 사용하셨다. 준비하는 데 80년이 걸렸으며 이제 행동할 때였다. 불행하게도 모세는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지 못했다."
출 3:11-4:17
3. 하나님이 모세에게 응답하심(3:11-4:17)
모세는 그를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즉각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실패자가 아니었던가? 가족이 있지 않은가? 나이가 많지 않은가? 아마도 이런 어떤 논란이 그의 마음 속을 스쳐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해 논쟁적인 최소한 네 가지의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나는 누구인가(3:11-12)-이전 40년 동안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모세의 겸손에 우리는 탄복한다. 그는 “배워... 말과 행사에 능한“(행 7:22)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러 해에 걸친 사막에서의 교제관계와 훈련은 모세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육으로 행하는 사람은 충동적이며 장애물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겸손하게 행하는 사람은 앞에 놓인 전투를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대답은 그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약속은 40년 동안 그를 지탱케 했으며, 여호수아에게도 그러했다(수 1:5). 우리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 15:5).
누가 나를 보내는가 ?(3:13-22)-이 질문은 회피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명을 위해 모세를 보냈다는 신적인 권위를 원할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여호와(“스스로 있는 자, 전에도 있었고, 이제도 있고, 영원히 있을 자“)라고 계시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이 이름에 다른 이름들을 첨가하셨는데, 요한복음에는 “나는...이다“(I AM)는 언급이 일곱 번 나온다(요6:35/요8:12/요10:9/요10:11/요11:35/요14:6/요15:1-5). 하나님이 “있는 자“라면 그는 언제나 동일하시며 그의 목적들은 성취될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을 성취하실 것을 모세에게 약속하신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이다.(4:1-9)-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를 믿게 될 것이라고 방금 말씀하셨으므로(3:18), 이 언급은 불신앙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두 가지 기적을 주셨다. 지팡이가 뱀으로 변하였고 손이 문둥병에 걸리는 기적이었는데, 이 기적들이 백성들 앞에서 그의 신임장이 될 것이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을 때 우리 손에 가지고 있는것을 취하여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다윗의 물매, 베드로의 배, 바울의 학식을 사용하셨다. 물론 지팡이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능력이 되어졌다. 모세는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기적을 통하여 육신의 사악함을 고치셔서 그의 영광을 위해 모세를 사용하실 수 있으심을 보여 주셨다. 모세의 손 자체는 별 것이 아니었으나 하나님의 손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세번째 표적을 더하셨다. 이 표적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확신시켰다(4:29-31). 그러나 믿음없는 애굽인들도 이를 흉내내었다(7:10-25).
나는 재능이 없다.(4:10-17)-하나님은 “나는... 이다“(I AM)고 말씀하셨고 모세가 할 수 있었던 말은 “나는... 이 아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능력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실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자기가 언변이 없다고 주장했다(바울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전 2:1 참조). 그러나 사람의 입을 만드신 바로 그 하나님께 자신을 바칠 때에 그의 입을 사용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달변이나 수사(修辭)의 기술을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멧세지로 채울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이 필요하실 뿐이다. “다른 보낼만한 자를 보내시고 나는 보내지 마소서“라고 모세는 13절에서 외친다. 이런 불신의 태도가 하나님을 노하게 한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협력자로서 아론을 보내시지만, 아론은 도움보다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던 것이 드러났다. 그는 그 민족이 우상을 숭배하도록 했고(32:15-28), 모세에 대항하여 불평했다(민 12장). 모세가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 육에 속한 연약한 인간을 의지하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14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움직이실 때 “줄의 양 끝에서“ 일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는 다른 것을 세우기 위해 다른 하나를 내려뜨리지 않으신다."
출 4:18-31
3. 하나님이 모세에게 확신을 주심(4:18-31)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적의 표적과 그의 형 아론이라는 조력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 구절들을 보면 아직 믿음으로 행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장인에게 애굽으로 여행하는 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형제가 아직 살아있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떠나기 전에 신실한 태도로 이 땅의 임무를 돌보려 했으나, 이드로에게 좋은 간증이 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그가 새로운 봉사의 생활로 한 걸음 내딛자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확신들을 유의해서 보자.
그의 말씀(19-23절)-모세를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은 죽었다. 하나님은 모세가 그를 신뢰하고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나 큰 도움이 되어 주는가!그의 징계(24-26절)-유대인에게 할례는 중요한 것이었으나 모세는 자기 아들에게 그 언약을 시행하는 일을 무시했었다(창 17장).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자기의 직무를 생각나게 하도록 징계를 내리셔야 했다(아마도 병들었던 것같다). 모세가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자기 집안조차 제대로 이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스라엘을 인도할 수가 있겠는가 ? 모세는 아내와 아들을 미디안에 남겨놓고(18:2) 아론과 함께 간 것이 분명하다.
그의 인도하심(27-28절)-하나님은 아론이 오고 있다고 약속했었고(14절), 이제 그 약속을 성취하셨다. 비록 모세와 아론이 둘 다 연약함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님을 실망시켰으며, 서로간에도 한 번 이상 실망시켰던 반면, 모세가 형을 옆에 둔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모세가 불타는 나무를 보았던 “하나님의 산“에서 만났다(3:1). 모세는 하나님이 그에게 계시하셨던 위대한 진리들을 형에게 말했다.
백성의 영접(29-31절)-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다(3:18).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세를 영접하며 머리숙여 절하던 이 유대인들은 그들의 노역이 더 심해지자 그를 미워하고 비판했다(5:19-23). 사람들의 반응에 당신의 희망을 걸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당신을 실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출 5-10
선행된 아홉 재앙-출애굽기 5-10장-
1. 명령
이 장들에서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 백성을 보내라!“고 일곱 번 말씀하신다(5:1/7:16/8:1/8:20/9:1/9:13/10:3). 이 명령은 이스라엘이 노예 생활을 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켜 그를 섬기게 하려 하심을 나타낸다. 이것은 세상과 육신의 노예가 되어 바로에 의해 보여지는 바 사탄의 지배아래 있는 모든 잃어버린 죄인들의 상황이다.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눈여겨 보자.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하는가?“(5:2).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으며 그들에게는 “헛소리“로 들린다(5:9).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바로에게 제시했으며 그 결과로 이스라엘의 노역이 무거워졌다. 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말씀에 항거하여 마음을 굳게 한다(3:18-22/4:21-23).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자기 주장을 제시하여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이지만, 바로 자신이 하나님이 주장에 대항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이 된다. 얼음을 녹이는 그 태양이 진흙도 굳게 한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를 보고 도움을 청했으나, 그들은 구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여호와께는 청하지 않았다(5:15-19). 유대인들이 모세의 의견을 따를 수가 없었고(5:16-23), 그를 격려하는 대신 오히려 그를 힐난했던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지내는 신자들은 도움이 되기는 커녕 지도자들에게 근심을 끼친다. 모세는 물론 실망했으나 그의 문제를 여호와께 가지고 갔다. 6장에서 하나님은 그의 이름(1-3절)과 그의 언약(4절)과 그의 개인적인 관심(5절), 그리고 그의 신실하신 약속들(6-8절)을 모세에게 상기시켜 주심으로 그를 격려하셨다. 하나님의 “나는...이다“ “내가... 하겠다“는 말씀은 적을 정복하기에 충분하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압제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은 그의 능력과 영광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6:7/7:5/7:17/8:10/8:22).
무대가 설치되었다. 바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였고, 이제 하나님은 애굽에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박해하는 나라들을 심판하심으로 창세기 12장 3절에서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9:16), 그의 진노(시 78:43-51), 그의 광대하심을 나타내며, 애굽의신들이 거짓 신인 것과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실 것이었다(12:12/민 33:4).
2. 대결
애굽에 내린 열 재앙은 몇 가지 일을 성취하였다.
재앙은 하나님의 능력과 돌보심을 이스라엘에게 확신시키는 표적이었다(7:3).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애굽 민족을 징벌하며 그들의 신이 거짓됨을 나타내는 심판의 재앙이었다(9:14).
요한계시록에 계시된 바와 같은 장차 임할 심판을 예표하는 재앙이었다.
재앙의 차례를 유의해서 보자. 이 재앙들은 세 가지씩 세 그룹으로 분류되어지며, 열번째 재앙(장자의 죽음)으로 마무리 된다.
1)물이 피로 변함/7장 14-23절(경고됨-7:16 “내 백성을 가게 하라“)
2)개구리/8장 1-15절(경고됨-8:1)
3)이 /8장 16-19절(경고되지 않았고 술객들이 흉내내지 못함-8:18-19)
4)파리떼 /8장 20-24절(경고-8:20)
5)가축의 전염병/ 9장 1-7절(경고-9:1)
6)백성에게 종기가 남/ 9장 8-12절(경고없이 임했으며 술객들도 괴로움을 당함-9:11-12)
7)우박과 불/ 9장 13-35절(경고됨-9:13)
8)메뚜기/ 10장 1-6절(경고됨-10:3)
9)극심한 흑암/ 10장 21-23절(경고가 없었고 바로가 모세를 다시 보지 않겠다고 함-10:27-29)
10)장자의 죽음/ 11-12장(마지막 심판)
처음의 세 가지 재앙은 유대인들도 함께 받았으나 그 다음의 일곱 재앙에서는 유대인과 애굽인이 구별되었다는 점에 주목하자(8:20-24). 출애굽기는 성경의 두번째 책이고 둘은 분할의 숫자이다.
재앙들은 사실상 애굽의 신들과 여호와 사이의 대결이었다(12:12 참조). 나일강은 그들에게는 생명(생활)의 근원이었으므로, 신으로서 숭배되었다(신 11:10-12). 모세가 이것을 피로 변하게 했을 때, 이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여신 헥트(Hegt)는 개구리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애굽인에게 있어서 개구리는 부활의 상징이었다. 개구리 재앙은 그 백성들로 하여금 여신에게서 등을 돌리게 했음이 분명하다. 이와 파리떼는 백성들에게 불결을 가져왔는데, 이는 굉장한 타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애굽인들은 점 하나 없을 만큼 깨끗하지 않으면 신들에게 예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염병은 애굽인들이 신성시하는 가축들을 공격한 것이었다. 하토르(Hathor)는 “암소-여신“이었고 아피스(Apis)는 신성한 황소였다. 건강과 안전을 주관하는 신들과 여신들은 독종과 우박, 그리고 메뚜기떼로 말미암아 공격을 받았다. 흑암의 재앙은 애굽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애굽은 태양신 라(Ra)를 주신으로 섬겼기 때문이다. 태양이 3일 동안 가리워졌을 때 이것은 여호와가 라(Ra)를 정복했다는 의미였다. 마지막 재앙(장자의 죽음)은 출산의 여신 메스케미트(Meskhemit)와 그녀의 동료 하토르(Hathr)를 정복했는데 이들은 장자를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이 모든 재앙들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심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물론 이와 같은 재앙들을 요한계시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신, 곧 사탄과의 최후 대결을 물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계 8:8/계 16:4-5), 개구리(16:13), 육체의 질병과 고난(16:2), 우박(8:7), 메뚜기(9:1-) 흑암(16:10) 등의 재앙으로 묘사하셨다.
애굽의 술객들도 지팡이를 뱀으로(7:8-13)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7:22-25), 개구리를 모으게 하는 것들은 모세를 흉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티끌로 이를 만들지는 못하였다(8:18-19). 디모데후서 3장 8절은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흉내내어 그들에게 대적할 것이라고 경고한다(살후 2:9-10 참조).
3. 타협
바로는 사탄의 모형이다. 그는 애굽의 신이었다. 그는 최고의 능력(하나님이 제한한 곳을 제외하고)을 소유하고 있었고, 거짓말장이요 살인자였으며, 사람들을 노예로 삼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했다. 바로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네 개의 교묘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라(8:25-27)-하나님은 세상에서의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신다. 세상과 벗됨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약 4:4). 애굽인들은 소를 숭배했으므로 유대인들이 소를 잡아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것을 보고 적대감을 가질 것이었다. 신자는 “나와서 분리되어야 한다“(고후 6:17).
멀리가지 말라(8:28)-“광신자가 되지 말라!“고 세상은 말한다. “종교를 가지는 것은 좋지만 너무 진지하게는 되지 말라!“ 여기서 “경계선 신자“, 즉 세상과도 가깝고 동시에 주님과도 가까운 곳에 머물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남자만 가라(10:7-11)-이것은 여자와 자녀들은 세상에 남겨두라는 뜻이다. 믿음은 전체 가족을 포함하는 것이며 남자에게만 관계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정의 머리들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세상에서 떠나 분리된 생활을 하는 축복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때가 너무나 많다.
재산을 애굽에 남겨 두라(10:24-26)-사탄은 우리의 물질적인 부를 붙잡아 두어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기를 몹시 좋아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며,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다“(마 6:21). 양떼와 소떼를 사탄이 사용하게 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성도들이 너무나 많다(말 3:8-10).
모세는 이 타협안들을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사탄과 세상에 타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과 평화롭게 지냄으로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전폭적인 순종과 완전한 분리를 요구하신다. 이 일은 양의 피를 흘리고 홍해를 건넘으로 성취되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우리가 그와 함께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갈 1:4)."
출 11
유월절-출애굽기 11-13장-
이 부분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어린 양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과 노예생활로부터의 구원을 나타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그의 사역을 상징한다(요 1:29/고전 5:7-8/벧전 1:18-20).
1. 어린 양이 요구됨(11장)
“한 가지 재앙을 더!“ 하나님의 인내가 극에 달하여 그의 마지막 심판인 장자의 죽음을 내릴 차례였다. 어린 양의 피로 보호를 받지 못하면 모두에게 죽음이 임할 것이었다(11:5-6/ 12:12-1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은 “장자“가 죽을 것이라고 구분지으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한 번 태어남을 거절하시는 것을 말하고 있다. “두 번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처음 태어난“ 사람들, 곧 장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니 너희는 거듭나야 한다.“ 인간들은 죽음의 형벌에서 자신을 구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대가없이 애굽인들을 위하여 노예생활을 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정당한 삯을 요구하도록 허락하신다. 이것은 빌리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었다(창 15:14/출 3:21/출 12:35 참조).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애굽의 장자와 이스라엘의 장자는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은 양의 피를 바른 데에 있었다(7절).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피 아래 있어“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차이점이다!"
출 12:1-5
2. 어린 양이 선택됨(12:1-5)
유대인들은 두 가지 달력을 사용하는데, 신앙력과 시민력이다. 유월절은 신앙력이 시작되는 첫 달에 지켜진다. 어린 양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을 이룬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죽음이 믿는 죄인들에게 새로운 시작이 되는 것과도 같다.
양은 베임을 받기 전에 선택된다-열흘째에 선택되어 14일과 15일 사이의 저녁에 죽인다.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려고 따로 분리된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미리 운명지어진 어린 양이었다(벧전 1:20).흠이 없다-이 양은 상처가 없는 수양이었고 이는 흠과 점이 없으신 완전한 하나님의 어린 양을 상징한다(벧전 1:19).
검사를 받는다-10일부터 14일까지 사람들은 양들을 지켜보고 만족한 것인지를 확인한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그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 특히 십자가를 지시기 전 마지막 일주일 동안, 검사를 받으시고 지켜봄을 당하셨다!
다음의 발전과정을 유의하자. “어린양“(3절)이 “그 어린양“(4절)으로 또 “네 어린양“(5절)으로 변천된다. 이것은 “한 구주“(a Saviour)(눅 2:11), “그 구주(the Saviour)“(요 4:42), “내 구주(my Saviour)“(눅 1:47)와 비슷하다. 그리스도를 “한 구주“(많은 구주 중의 하나)나 “그 구주“(다른 사람에게 구주)라고 불러서는 충분하지 않다. 나는 “그는 나의 구주이시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출 12:6-7
3. 죽임을 당하는 어린 양(12:6-7)
살아있는 양은 사랑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으로 구원을 받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이나 그의 생활을 통하여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는다. 히브리서 9장 22절과 레위기 17장 11절을 읽고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의 중요성을 알아보자. 물론, 양을 죽이는 것은 지혜로운 애굽인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길이었다(고전 1:18-23).
어린 양의 피는 집의 문에 발라야 되었다(12:21-28). 12장 22절에 나오는 그릇이란 단어가 사실상 문지방일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문지방의 움푹 들어간 곳에서 어린 양의 피를 묻혔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문 양옆의 기둥과 문위의 인방에 그 피를 뿌렸다. 집에서 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피를 넘어가는 것이며 저주를 받았다(12:22/히 10:23). 물론,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날은 그 달의 14일째였고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 드려지는 날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죽이라고 했지 그것들을 죽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에 주목하자. 하나님께는 한 어린 양(One Lamb)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22장 7절에서 이삭은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세례(침례)요한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대답했다. 하늘의 모든 이들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고 말한다(계 5:12)."
출 12:8-20
4. 양을 먹음(12:8-20)
우리는 유월절, 곧 무교절의 중요 부분을 무시하는 때가 더러 있다. 누룩(효모:yeast)은 성경에서 죄를 상징한다. 누룩은 잠잠하게 일하면서 부패시키고 부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불로써만 처리된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 동안 누룩을 모두 집 밖에 두어야 했고 7일 동안 누룩있는 떡을 먹지 못하도록 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적용시킨다. 이 장을 주의깊게 읽자.
어린 양의 피는 그들을 죽음에서 건져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순례 여행에 대비하여 힘을 얻도록 그 양을 먹어야 했다. 구원은 다만 시작일 뿐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 위한 힘을 얻으려 한다면 그리스도로 배를 채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순례하는 사람들로서(11절) 주의 명령에 따라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 양은 불로 구워야 했는데 이는 십자가에서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해 준다. 양을 날것으로나 물에 삶아 먹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 곧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아니라 그의 지상 생활과 모범으로 배불리는 노력을 말해주고 있다. 나중에 먹으려고 남겨두어서는 안되었다. “남은 것“은 신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전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의 완성된 일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남은 것은 부패하게 되며 그 형태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썩지 않았다(시 16:10). 유감스러운 것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어린 양을 죽음에서 건져준 구원으로 받아드리면서도, 그 양을 매일의 양식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43-51절은 이 절기에 관한 보다 깊은 교훈을 준다. 낯선 사람이나 고용된 종이거나 할례를 행치 않은 사람은 참예할 수 없었다. 이런 규례는 구원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출생하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여행자가 없으며, 오직 은혜로 말미암으며 일해서 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얻은 것임을 상기시켜 준다. 할례는 골로새서 2장 11-12절에 기록된 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영적인 할례를 지적하기 때문이다. 이 절기 중에는 집 밖에서 먹지 않도록 했는데(46절), 이 절기를 피흘린 양과 분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와는 별도로 “그리스도를 먹겠다“는 현대주의자들은 스스로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출 12:21-42
5. 어린 양을 신뢰함(12:21-42)
그 날 밤에 구원을 받는 데는 믿음이 있어야 했다. 애굽인들은 이 모든 일들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며, 모세와 그의 백성은 이것으로 충분했다. 반드시 명심할 것은 그 백성이 피로 구원을 받았고 말씀으로 확인을 받았다는 것이다(12절). 피 아래 있어 안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전을 느끼지 못한“ 유대인들이 많았음은 의심할 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구원을 잃을까봐 근심하는 성도들이 있음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그가 하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정확히 행하셨다. 애굽인들은 유대인들을 충동하여 그 땅을 떠나게 했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11:1-3). 하나님은 하루도 늦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말씀을 지키셨다!
6. 어린 양이 영광을 받음(13장)
어린 양이 장자를 위해 죽었고 이제 장자는 하나님께 속한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값으로 산 하나님의 백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값주고 산 바 된 백성“이었다(고전 6:18-20). 이 민족은 그들의 장자, 곧 최선의 것을 여호와께 바쳐서 어린 양을 영원히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그를 섬기기 위해 손과 눈과 입을 그에게 바칠 것이다(9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가장 가까운 길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셨으며 오늘날도 그렇게 하신다(17-18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분명하게 그의 뜻을 밝히신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데 우리가 그를 위해 하는 일은 너무 적다!
요셉의 뼈에 대해서는 창세기 50장 24-26절과 여호수아 24장 33절, 히브리서 11장 22절을 읽도록 한다."
출 14:1-12
홍해 횡단-출애굽기 14-15장-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를 통한 그리스도인의 구원을 예증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구원을 받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가는 여행 중에 겪게 되는 이스라엘의 경험들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투쟁과 축복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있기를 원했으며 가나안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상징한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유업을 주장하는 생활이다(엡 1:3). 슬프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옛 유대인들처럼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나 광야의 불신앙 가운데 길을 잃고 방황한다. 그렇다. 그들이 피로 구원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그들의 부유한 영적인 유업을 주장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이 장들에서 네 가지 다른 경험들을 살펴본다.
1. 두려움 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14:1-12)
하나님은 홍해 근처에 야영하도록 이스라엘에게 특별히 장소를 지시하셨다. 그는 또 모세에게 애굽인들이 추적해 올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것임을 그의 말씀에 설명해 놓으심으로, 우리가 무엇을 바라야하는지 알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다. 사탄은 사람들이 자기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 이를 기뻐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추적하여 다시 노예로 삼으려 한다. 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들의 적이 오고 있음을 경고해 주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하였다. 그들은 애굽 군대가 오는 것을 보자 낙담하여 자포자기하였으며, 두려움으로 부르짖었다. 두려움과 믿음이 한 마음 속에 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두려워할 것은 없다. 흔히 있는 경우지만 그들은 기도하고 피차에 격려하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영적인 지도자를 비판했다.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었는데,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애굽을 돌아다 보고 “바로의 노예로 있는 편이 더 나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하여 치시고 큰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하셨으나, 그가 그들을 내내 보고 계심을 믿지는 않았다. 의심할 바 없이 같이 간 혼합된 군중은(12:38) 이 불평의 합창을 지휘했을 것인데 저들은 후에도 이렇게 했다(민 11:4). 이 “혼합된 군중“은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서 개심치 않은 세상적인 사람들을 나타낸다."
출 14:13-31
2. 믿음으로 행하는 이스라엘(14:13-31)
모세는 승리의 길이 여호와께 대한 신뢰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히 11:29). 그의 세 가지 명령에 유의하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을 보라“,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전진하기“ 앞서 조용히 서있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15절).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지 않으면 믿음으로 걸어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의 지팡이를 들었고,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의 군대 사이에 임하셔서 그들을 보호하셨다(19-20). 주께서 일하시는 것은 세상에는 어두움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빛이다. 하나님은 그날 밤에 군대가 접근치 못하도록 거리를 유지시켰다. 다음으로는 강한 바람을 보내어 길을 여셨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고 유대인들이 두려워했을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그들을 놀라게 했던 바로 그 바람이 그들을 구원하는 도구였다. 모든 백성이 마른 땅을 밟으며 홍해를 걸어서 건넜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었던 바로 그 바다가 애굽에게는 정죄(定罪)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물로 애굽인들을 익사케 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영원히 분리시키셨다. 바로는 그가 뿌린 씨를 거두었다. 그는 유대인의 남자 아이들을 익사시켰었는데 이제 그 자신의 군대가 익사를 당했다.
우리는 이 사건의 영적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전 10:1-2). 홍해의 횡단은 부활을 통하여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모형이다. 이스라엘은 물을 통과함으로써 “모세에게, 또는 모세와 함께 세례(침례)를 받았다.“ 또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세상(애굽)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애굽인들은 바다를 통과할 수 없었는데, 이는 피로써 보호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월절과 홍해 횡단을 대조하면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월절 홍해횡단
어린양의 죽음-갈보리 그리스도의 부활
죄의 형벌에서 구원됨 죄의 권세에서 구원됨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대속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하나됨
로마서 3-4장 로마서 6-8장
구원-죽음을 두려워할 필요없음 성화-적을 극복함
여호수아 3-4장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요단강 횡단은 믿음으로 그 땅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여 영적인 유업으로 들어가는 신자를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다. 각 경우를 볼 때 그리스도인이 승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행할 때이다."
출 15:1-23. 승리를 찬양하는 이스라엘(15:1-21)
이것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노래이며, 속박으로부터 구속된 후에 불리워졌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인만이 노래 부를 권리가 있다(시 40:1-3). 출애굽기는 탄식으로 시작되었으나(2:23) 어린 양으로 인해 노래하는 민족을 보게 된다. 이 노래는 하나님을 높이고 있음에 유의하자. 이 18구절가운데 적어도 45회나 여호와를 말하고 있다. 사실상, 하나님의 인격과 거룩한 성품, 그의 놀라운 권능의 일들을 높이는 대신 인간을 높이는 노래들이 너무도 많다.
2절에 나타난 후렴을 유의해서 보자. 에스라의 지도 아래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을 때에도 시편 118편 4절에 이 후렴구가 반복된다. 이사야 12장 2절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민족을 다시 회복시키실 미래의 그 날을 가리키며 이 후렴구가 반복된다(사 11:15-16). 선지자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때, 제사장 에스라의 인도로 바벨론에서 구원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이방 나라들에서 구원받을 때, 왕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이킬 때 그 노래를 부를 것이다.
이 노래를 상세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나, 주목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1-10절)과 인도하심(11-13절)과 승리(14-17절)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점이다. 이 노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를 내다보고 그 영광을 주목하는 것으로 끝난다(18절). 미리암은 여성 합창대를 지휘하였다(남성을 지휘한 것은 아님-고전 14:34/딤전 2:11-12). 물론 여성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에게 베풀어진 구속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출 15:22-27
4. 불신앙으로 불평하는 이스라엘(15:22-27)
해변에 남아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겠지만 신자는 순례자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야만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셔야 함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훈련시켜 자신의 마음을 깨닫도록 하셔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성도를 만족시킬 수있는 물은 세상에 없다. 유대인들이 물을 보자 그것이 쓴 물임을 알았다. 그들은 즉각적으로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했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사악한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을 찬양하나, 다음 순간 쓴 물을 보자마자 불평을 터트린다. 이 경험은 이스라엘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가르쳤다.
생활에 관하여-삶이란 쓴 것과 단 것, 그리고 승리와 시련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따라 살고 있다면 우리의 가는 길에 무엇이 오든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시련이 끝날 때마다 반드시 영적인 “엘림“(Elim: 27절)이 있어서 그곳에서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우리는 단 물과 함께 쓴 물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알고 계심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자신들에 대하여-생이란 하나의 큰 실험실이다. 매 경험들이 우리 마음을 X-선 촬영을 하여 우리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나타낸다. 마라의 물은 유대인들이 세상적이며 육체의 만족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임을 드러냈다. 그들은 보이는 것으로 행하고 세상으로 만족을 얻고자 했다. 그들은 감사할 줄 모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 시련이 오자 하나님께 불평하였다.
주님에 관하여-하나님이 길을 계획하셨으므로 필요한 것도 아신다. 하나님은 나무(십자가-벧전 2:24)를 사용하셔서 쓴 물을 달게 만드실 수 있으시다. 그는 여호와 라파(Jehovah-Rapha), 곧 “치료하시는 여호와“이시다! 우리는 생의 모든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를 신뢰할 수 있다."
출 16
하늘로부터 내린 떡-출애굽기 16장-
이 장은 요한복음 6장과 연관지어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날마다 공급받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예증하는 것이기도하다.
1. 만나는 예수가 누구신가를 설명한다
“만나“(manna)라는 이름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이다(15절).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것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쓰고 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었다.“ 만나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지 생각해보자.
작다(14절)-그의 겸손을 말한다. 그는 젖먹이와 종이 되었다.
둥글다(14절)-그의 영원하심을 뜻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8:53-59).
희다(31절)-그의 순전성과 무죄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시다.
달다(31절)-그의 성품을 뜻한다. “오,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눈으로 보고 알라!“ 그러나 민수기 11장 4-8절을 보면 유대인과 함께 온 신자 중에서 “혼합된 군중“은 만나의 진가를 알지 못하였다. 세상적인 군중은 애굽의 부추, 양파, 마늘을 원했다. 그들은 단순한 만나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나를 가루로 만들어 반죽하여 떡을 만들었다“. 그러자 만나는 꿀맛이 아니고 “기름“ 맛이었다. 우리는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개량하려 해서는 안된다.
만족케 한다-이 민족이 거기서 38년 동안을 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떡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양육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2. 만나는 예수께서 오신 방법을 예시한다
하늘에서-만나는 애굽에서 들여온 것이 아니고 광야에서 만든 것도 아니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만나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굶주린 죄인들에게 주는 아버지(하나님)의 선물이 되어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요 6:33). 그리스도를 “보통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밤에-만나는 밤에 내리는데 이는 이 세상이 죄로 어두움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때도 밤이었는데 그것은 세상의 빛이 되시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를 거절한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도 밤이다(고후 4:1-4).
이슬 위에(13절)-이것은 성령의 모형이다(민 11:9).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눅 1:34-35). 예수께서 처녀에게서 나지 않으셨다면 그는 결코 “거룩한 자“로 불리워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이슬은 만나가 땅으로 말미암아 더러워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광야에-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놀라운 곳이겠으나, 영광을 향해 순례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은 광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림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웬 은혜인가 !
반역하는 백성에게(1-3절)-이스라엘은 얼마나 잘 잊곤 하는가! 그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난 것이 6주 밖에 안되었는데 하나님의 여러 기적들을 벌써 잊어버렸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께 대항하여 불평하였으며(15:22-27), 옛 생활의 육적인 음식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자비로 그들에게 떡을 공급하셨다. 4절을 다음과 같이 읽을 수 있겠다. “감사치 않는 죄인들에게 불과 유황의 비를 내릴 것이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떡의 비를 내리셔서 그들을 향하신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다(롬 5:6-8 참조). 2백만 명에게 6파인츠(한 오멜)씩 공급하려면 60대의 자동차분량을 싣는 화물열차 네 대분이 매일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하신가 !
그들이 있는 곳에-만나는 유대인들이 거두어 들이기 쉬운 곳에 있었다. 산을 오르거나 시내를 건너야 할 필요는 없었다. 만나는 그들이 있는 곳에 내렸다(롬 10:6-8).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라도 그에게 올 수 있다.
3.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할 일을 보여 준다
우리는 필요를 느껴야 한다-그리스도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영적인 배고픔이 내면에 있다(요 6:35).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가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했던 것은 “내가 주려 죽는구나“라고 말했을 때였다(눅 15:17-18). 오늘날 세상의 불안과 죄는 대개 영적인 배고픔을 채우지 못한 결과이다.
우리는 몸을 구부려야 한다-만나는 식탁 위에나 나무에 내리지 않았다. 만나는 땅에 내렸으며 그것을 집으려면 몸을 구부려야만 했다. 스스로 겸손하지 못한 죄인들이 많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으려 한다. 교만은 아마도 다른 어떤 죄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지옥으로 보내는 것 같다.
우리는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사람은 만나를 바라보거나, 찬양하거나,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을 보고 있어서는 배부르지 못하다. 스스로 그것을 먹어야만 했다!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내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이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요한복음 6장 51-58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은 그리스도께서 문자 그대로의 살과 피를 의미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밝힌다. 요한복음 6장 68절은 그가 말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HIS WORD)이었음을 알려 준다. 우리가 그 말씀을 받을 때, 살아계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일찍 그 일을 해야 한다(21절)-“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이 말은 이사야 55장 6절에 나오는 경고이다. 만나는 태양으로 인해 뜨거워지면 사라졌으며 이것은 심판의 날이 이르면 그리스도께로 돌아서기에 때가 늦음을 암시하고 있다(말 4장). 만일 만나를 줍지 않으면 만나 위를 걸어가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 얼마나 가혹한 처사인가!
우리는 계속해서 그를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물론 한 번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요 10:27-29). 그러나 우리의 순례여행에 대비하여 힘을 얻으려면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먹었던 것처럼(출 12:1-) 그리스도로 양식을 삼는 일이 중요하다. 신자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는가? 그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일찍 일어나 말씀으로부터 영혼에 영양을 공급할 귀중한 만나를 모으도록 초청하고 계신다. 우리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저장해 두어서는 안된다(16-21절). 우리는 매일 새로운 날에 신선한 음식을 모아와야 한다. 성경에 표시를 하고 노트에 요약하지만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먹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저장된 만나“는 벌레가 생겨 그들에게 양분이 되기는커녕 독이 된다.
그리스도이신 영적 만나는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내렸던 육적인 만나보다도 더많은 것을 성취함에 유의하자. 구약의 만나는 육체의 생명을 지탱했으나 그리스도는 그를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영적인 생명을 주신다. 구약의 만나는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게 자신을 제공하신다(요 6:51). 이스라엘을 위해 만나를 확보하는 데 모세는 아무 값을 치루지 않았으나 그리스도는 세상이 자신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영접함으로 살기 위해 몸을 구부리는 대신 그리스도 위를 걸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매일 만나를 모으는 것은 이스라엘의 순종여부를 보시려는 하나님의 시험이었고(4절) 아직도 그는 자기 백성을 시험하신다. 성경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여 영적인 음식을 모으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믿고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슬픈 일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육적인 식성으로 굶주려 있다는 사실이다(3절). 목회자나 주일학교 교사에게 대신 만나를 모아다가 수저로 떠 먹여 달라는 사람도 많다. 우리가 영적으로 행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나의 날을 시작하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생각하는가 ?“를 시험해보는 것이다.
여호수아 5장 10-12절은 유대인들이 길갈에서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만나가 그쳤으며 “그 땅의 묵은 곡식“을 먹었다고 되어 있다. 만나는 위에서 내려왔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기형을 말하고 있다. 곡식은 장사되는 곳, 죽음의 장소를 벗어난 곳에서 자랐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천국의 유업에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엡 1:3). 천국의 유업에 참여한다 함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천국의 제사장직을 통해서 우리가 가지는 축복들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과 사역을 중시하여 “육신에 따라 그리스도를 알고“(고후 5:16)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천국의 제사장 직분에 참여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너무도 많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제사장 직에 참여할 때 그들은 “그 땅의 묵은 곡식“을 먹게 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다."
출 17:1-7
광야에서의 문제들-출애굽기 17-18장-
이스라엘이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갈 때에 여러 다른 경험들과 시련들에 봉착하게 되며, 이런 체험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한 것과 아울러 자신들을 보다 잘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되었다. 이 장들에서는 세 가지 이러한 경험들이 나온다.
1. 바위에서 솟는 물(17:1-7)
이 회중은 전에도 목이 말랐었는데(15:22)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해결해주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 백성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잊은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곳에 있다면 결국 그들을 돌볼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 1-12절에서 우리에게 경고하는바, 백성은 모세를 비난하며 하나님께 불평하는 죄를 범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태도로써 사실상 “여호와를 시험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으며 돕지도 아니하신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평을 반복함으로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고 있었다.
모세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의 때에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본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주님께 돌이켜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약 1:5). 주님은 지팡이를 들어 바위를 치라고 모세에게 지시했으며 물이 나올 것을 약속하셨다. 이 바위는 그리스도이신데(고전 10:4 참조), 바위를 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말한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의 지팡이를 느끼셨다(이 지팡이는 뱀으로 변했던 그 지팡이였고-출 4:3 , 애굽에 재앙을 내리는데 도움을 준 지팡이인 것을 기억하라).
여기서는 일의 순서가 놀랍다. 16장에서는 만나가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가 지상에 오심을 나타내며, 17장에서는 바위를 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나타낸다. 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은 후에 주신 성령을 상징한다(요 7:37-38).
바위와 관계되는 두번째 경험에 대하여는 민수기 20장 1-13절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바위에게 물을 내라고 말하도록 모세에게 지시하셨으나, 그는 자기 뜻대로 바위를 쳤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모세는 모형을 망쳐 놓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한 번만 죽을수 있기 때문이다(롬 6:9-10/히 9:26-28 참조). 성령은 단번에 주어졌다. 그러나 하나님께 구함으로써 부가적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다. “두번째 축복들“과 성령의 “세례(침례)“를 구하는 사람들은 모세가 범한 것과 같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를 새로 못박는 것이며 이 죄는 모세로 하여금 축복의 장소 밖에 머물게 했다.
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이스라엘이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에서 마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내려침을 받은 반석이 광야를 통과할 때 유대인들과 함께 여행을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더러 있으나 이 설명이 바른 것 같지는 않다. “저희“(them)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전에는 없는 것으로, 이 문장은 그들이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는데 이 일은 만나를 주신 다음의 일이라는 뜻이다(10:3/출 16:1-)."
출 17:8-16
2. 대적과의 싸움(17:8-16)
새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축복인 동시에 하나의 전쟁인 것에 놀란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싸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들 대신 싸워 주셨기 때문이었다(13:17).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서 적을 정복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통하여 싸우신다. 아말렉 족속은 에서의 자손들로서(창 36:12/창 36:16) 육신으로 인한 방해를 보여 준다(창 25:29-34).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 단번에 세상(애굽)에서 구원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돌아 오실 때까지 언제나 육과 싸울 것이다.
성령을 상징하는 물이 주어진 후에 아말렉족속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하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갈 5:17).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의 본성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죄악된 본성이므로 대립이나 대결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본성은 계속 싸우게 된다. 신명기 25장 17-19절은 아말렉이 “비열하게 공격“했고 뒷편에서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부지중에 다가온다.
이스라엘은 적을 어떻게 이겼는가? 그들에게는 산에 중재자가 있었고 골짜기에 사령관이 있었다! 산 위의 모세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을 보여주며, 검을 가진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을 보여 준다(히 4:12/엡 6:17-18). 물론 모세는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에 대한 불완전한 모형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지치지도 않으시며 조력을 필요로 하시지도 않기 때문이다(히 4:16/히 9:24). 바울은 신자들이 “기도로 서로 도울 수 있다“고 말한다(고후 1:11). 아론과 훌이 한 것도 바로 이 일이다.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가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말한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적을 무찔렀으며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큰 승리로 세상을 이기신 것과 같다.
하나님의 백성이 육신을 이기고 승리를 얻는 데 있어 하나님과 협력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로마서 6장은 간주하는 것과 순복하는 것, 그리고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을 말해 준다. 모세 혼자서는 전쟁에 이길 수 없으며, 여호수아 역시혼자서는 전쟁터에서 승전할 수 없었다. 승리는 둘 다를 요구했다. 우리에게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고(롬 8:34), 우리를 위하시는 성령께서 내주하시며(롬 8:26), 그리고 손에는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여호수아가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섬멸하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그는 그들을 파했을 뿐이다(13절). 이 생애 중에는 육을 멸하거나 “근절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에 우리에게 새 몸을 주실 것이다(빌 3:21). 육을 완전히 섬멸시키겠다는 약속은 14절에 나온다. 사무엘상 15장을 조사해 보면 사울의 죄는 아말렉을 끝까지 처치하기를 거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무엘하 1장 6-10절은 그를 죽인 사람이 그가 살려 두었던 아말렉 사람 중의 하나였음을 알려 준다. “육을 위해서는 대비를 하지 말자!“
“여호와닛시“(Jehovah-Nissi)는 “여호와는 우리의 깃발“이란 뜻이다. 우리가 승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요 16:33/요일 2:13-14/요일 5:4-5)."
출 18
3. 세상에서 온 지혜(18장)
이드로가 모세에게 준 충고가 주께로부터 온 것인가 육신에서 온 것인가에 대하여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 장이 미래의 왕국을 상징하며 이 때에 신부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이방인(이드로로 상징됨)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며 그의 통치권을 함께 나누어 가지게 될 것은 분명하며 이것은 마치 부장들이 모세와 함께 통치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드로의 권면이 육신적인 것이며 주께로부터 온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민수기 11장에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그의 영을 70장로들에게 부어 그 능력을 나누어 주었다. 이드로는 다분히 이기적으로 문제를 해석했다.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앉았고,“ “그대의 하는 것이 선하지 못하도다.“ “이 일이 그대에게 너무 중함이라.“ “그대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이 말은 마치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 21절 이하에서 “주여, 자신을 불쌍히 여기사 십자가를 지지 마소서“라고 말한 것과 같게 여겨진다. 하나님은 3-4장에서 모세에게 그가 단독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모세는 이드로의 의견에 동의하고 하나님께 불평하였다. 11절에서 이드로는 여호와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다“고 시인하지만, 시인이란 진실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정확히 고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구나 27절에서 이드로는 이스라엘과 함께 머물기를 거절하고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확실히,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며 그 조직에 있어 잘못된 것은 결코 없다. 그러나, 이드로에게서 온 “세상적인 지혜“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이드로 자신조차도 확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3절). 그는 여호와께서 하신 모든 일을 기뻐하였으나(9-10절) 하나님께서 모세를 도와 생의 일상적인 짐을 질 수 있게 하심을 믿으려 하지는 않았다. 모세는 이드로의 책략을 채택했고 백성들도 동의했다(신 1:9-18). 그러나 하나님이 이 조직을 인정하셨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사실상 민수기 11장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태도로 볼 때 그렇지 않음을 알수 있다.
아말렉이 공격해 오듯 공개적이고 분명한 육신의 공격이 있는 반면 또한 이드로의 경우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육신의 생각들도 있다. 모세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부르신 일을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가능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을 동정하여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고 느끼고 하나님이 너무 큰 짐을 지게 하셨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이사야 40장 31절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읽자."
출 19-23
하나님의 율법-출애굽기 19-23장-
● 중요성 : 오늘날의 신약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모세의 율법과 그 의미라는 논제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하나님의 언약들에 혼동을 일으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말씀을 검토하여 전체 모세 체제의 위치와 목적을 결정하는 것이 현명하다.
● 이름 : 출애굽기 19장의 시작과 아울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골 2:14) 우리는 모세의 제도 아래 있게 된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 “율법“, 때로는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편의상 우리는 흔히 “도덕율“(근본이 되는 십계명을 가리킴), “의식법“(제사 제도에 나타난 모형과 상징에 연관됨), “민법“(백성의 생활을 치리하는 일상의 법을 의미함)이라고 말한다. 사실상 성경은 도덕법과 의식법 사이에 어떤 구분을 두고 있지는 않는 것같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의 일부인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대한 네번째 계명은 “도덕법“에 있는 것이지만 분명히 유대 안식일에 관한 “의식법“의 일부이다.
● 목적 :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유대인과 영원한 약속을 하셨다(창 15:1-). 이 언약은 그들이 순종하거나 불순종하거나 상관이 없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가나안 땅의 소유권을 주셨다. 모세의 법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첨가된“ 것이지 그것을 무효화시킨 것은 아니었다(갈 3:13-18). 율법은 하나님의 이전 언약 옆에 나란히 끼어든 것이고(롬 5:20) 또한 임시적인 방법이기도 했다(갈 3:19).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다(출 19:4-6/시 147:19-20).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려고 율법을 주신 것은 아니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갈 3:11/롬 3:20). 하나님은 다음의 이유들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그의 영광과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함(신 5:22-28)
인간의 죄성을 나타내기 위함(롬 7:7/롬 7:13/딤전 1:9-/약 1:22-25)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알리고, 이교를 믿는 이방 민족들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함(시 147:19-20/엡 2:11-17/행 15:1-)이스라엘에게 경건한 삶의 기준을 주셔서 땅을 물려받고 축복을 누리도록하기 위함(신 4:1-/신 5:29-/삿 2:19-21)
이스라엘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기 위함(갈 3:24)
몽학선생은 아이를 성인의 생활에 대비시키는 직무를 맡은 훈련받은 노예였다. 아이가 성숙하여 성인이 되면 유업을 받게 되며, 몽학선생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율법 아래의 이스라엘은 “영적인 아이“였으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갈 3:23-4:7).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모형과 의식으로 나타내기 위함(히 10:1)
율법은 거울로 비유된다. 인간의 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약 1:22-25). 멍에로 비유되는 것은 율법이 속박을 가져오기 때문이며, 속박이라 함은 육신이 율법에 순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행 15:10/갈 5:1/롬 8:3). 가정교사로 비유됨은 이스라엘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한 길을 준비하기 때문이며(갈 3:23-4:7), 돌비에 쓴 의문은(고후 3장)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에 기록된 사랑의 율법과 대조된다. 그림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소유한 실현과 성취에 대조된다(히 10:1/골 2:14-17).
율법이 할 수 없는 일들, 즉 무엇을 완전케 하는 일(히 7:11-19/히 10:1-2), 죄로부터 의롭게 하거나(행 13:38-39/롬 3:20-28), 의롭다함을 주는 일(갈 2:21), 마음에 평안을 주며(히 9:9), 생명을 주는 일(갈 3:21) 등을 할 수 없음에 유의하자.
● 그리스도와 율법 :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요 1:17).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세의 율법제도와 그리스도인이 교회에서 가지는 은혜로운 지위 사이에는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서 나셨고(갈 4:4-6) 모든 면에서 율법을 성취하셨다(마 5:17). 그의 인격과 사역은 율법에 나타나 있다(눅 24:44-47). 그는 율법의 마침이며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이시다(롬 10:1-13). 그는 율법의 형벌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받으셨다(갈 3:10-14/골 2:13-14). 율법은 더이상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엡 2:11-12).
● 그리스도인과 율법 :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롬 6:14/갈 5:18) 은혜의 영역에서 살고 있음을 아주 명백히 밝힌다. 그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며(롬 7:1-4) 율법에서 구출되었다(롬 7:5-6),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속박에 다시 말려들지 말라고 경고를 받고 있다(갈 5:1-4). 은혜의 영역에서 떨어져 나와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 말이 그리스도인은 법없이 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를 무시해도 된다는 뜻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이것은 바울이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영광스런 지위를 강조하자 그의 적들이 바울에게 던진 반론이다(롬 6:1). 고린도후서 3장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복음의 영광이 구약 율법의 임시적인 영광을 훨씬 능가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안에서 성장함에 따라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된다고 하였다(3:18). 사실은 신약 그리스도인들이 구약 신자들 보다 생활에서 요구받는 것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 율법은 외적인 행위를 다루지만 신약 율법인 사랑은 내적인 마음 가짐을 다루기 때문이다. 율법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이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란 면허증은 아니다. 우리는 자유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그 자유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만 한다(갈 5:13-26 참조). 우리는 더 높은 법, 사랑의 법, 곧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다(갈 6:2). 우리는 육신의 힘을 좇아 하나님께 순종하려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롬 7:14). 육은 죄악되고 연약하여 법에 순복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여기며(롬 6장), 성령께 굴복할 때,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율법을 성취하신다(롬 8:1-4).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체를 그림자와, 자유를 속박과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은혜 안에서 가지는 높으신 부르심을 상실하는 것이다. 율법이란 하나님을 기쁘게 할 무슨 일을 행해야 한다는 뜻이며, 은혜는 그의 완전하신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는 뜻이다
● 오늘날의 십계명 : 구약의 율법은 모두 십계명을 확대하여 적용시킨 것이다. 십계명 중 아홉 가지 계명은 오늘날의 신자를 위해 신약에 반복되어 있다.
1)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행 14:15/요 4:21-23/딤전 2:5/약 2:19/고전 8:6).
2)우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말라(행 17:29/롬 1:22-23/요일 5:21/고전 10:7/고전 10:14).
3)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약 5:12/마 5:33-37/마 6:5-9).
4)안식일을 기억하라(신약 어디서도 반복되지 않았다)
5)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엡 6:1-4).
6)살인하지 말라(요일 3:15/마5:21-22).
7)간음하지 말라(마 5:27-28/고전 5:1-13/고전 6:9-20/히 13:4).
8)도둑질하지 말라(엡 4:28/살후 3:10-12/약 5:1-4).
9)거짓 증거하지 말라(골 3:9/엡 4:25).
10)탐내지 말라(엡 5:3/눅 12:15-21).
신약에 나와 있는 이 율법의 요약을 눈여겨 보자. 안식일에 대하여 언급한 구절은 없다(마 19:16-20/막 10:17-20/눅 18:18-21/롬 13:8-10). 물론 사랑의 “새 계명“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위한 근본적인 동기이다(요 13:34/롬 13:9-10). 이 사랑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널리 흘러나간다(롬 5:5).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며,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그 외의 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옛 본성은 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새 본성은 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을 위한 옛 언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날이었다. 반면에 주의 날은 새 언약 아래 있는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날이다. 안식일은 행위로 얻는 구원을 상징한다. 6일간 일하고 그리고 쉰다. 반면에 주의 날은 은혜로 받은 구원을 뜻한다. 먼저 쉬고 다음으로 행위가 따른다. 안식일, 희생제사, 음식에 관한 법, 제사장 직분, 성막 예배 등,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라졌다."
출 24
성막-출애굽기 24-27장-
● 서론 :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 가운데 거하시는 다섯 가지 다른 경우를 제시한다. 즉, 성막에(출 25:8), 성전에(왕상 8:1-), 인간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요 1:14/골 2:9), 교회에(엡 2:20-22), 거룩한 성에(계 21:3) 임재하신다. 이 중에서 처음 세 가지는 과거와 연관되고, 네번째는 현재에, 그리고 다섯번째는 미래에 연관되어 있다.
이 중의 첫번째는 성막이다. 이 성스러운 건축물은 500년 동안 유대 민족의 생활에서 그 중심을 이루었다. 하나 하나가 깊은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몇 가지 뚜렷한 외양을 조사하고 이들이 암시하는 교훈을 지적해 보기로 하자.
1. 인간의 노력:하나님의 요구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구속자의 승리를 찬양하며 홍해 옆 광야에 서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 의향을 담은 요구를 해오셨다. “내가 그에게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백성이 말했고,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해 짓게 하리라“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출 15:2/출 25:8).
그 옛날 솔로몬이 그러했듯이 당신은 몹시 궁금한 중에 물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왕상 8:27) 만일 거하신다면 어떤 근거로 죄악된 인간들 중에 머무실 것인가? 확실히 백성의 거룩함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성막 건축에 관한 지시를 받으며 산에 있을 때 백성들은 그 산의 아래에서 황금 송아지를 섬기고 있었다(출 32장). 그 대답은 백성의 도덕적인 탁월성에서 발견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은혜에서 찾을 수 있다.
족장 시대의 초기에는 하나님이 가끔 이 땅을 방문하셨던 것이 사실이다. 날이 선선할 때에 동산을 거니셨고(창 3장), 마므레 평지에서 아브라함을 방문하셨다(창 18:1). 하나님은 구원이 완성된 땅에서만 그들 중에 거처를 마련하실 수 있으셨다.
2. 성막
건축에 필요한 재료 설명(출 25:1-9)
세부적인 설명, 크기, 기명과 기물의 크기(출 25:10-27:29)
성막은 두 구획으로 나뉜다. 성소와 지성소(Holy of Holies)인데 둘은 두껍고무거운 휘장으로 분리되어 있었다(출 26:31-33). 이 막은 굉장히 무거워서 보통 말이 양쪽에서 잡아 당겨도 찢을 수 없다고 한다. 성막의 전체 길이는 대략 45피트(약 13.5m)이고 너비는 15피트(약 4.5m)였다. 이 성막은 좋은 흰색 베실로 짠 막이 둘려쳐진 뜰 안에 있었고 이 뜰은 길이가 약 175피트(약 52.5m), 너비가 약 19피트(약 5.7m)였으며, 높이는 8피트(약 2.4m)는 족히 되었다. 행렬을 멈추고 진을 칠 때는 떠오르는 해를 마주보며 이스라엘 각 지파의 중앙에 세워져 있었다. 뜰에는 보통 사람들도 들어갔으나 성소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갔고,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일년에 단 한번 들어갈 수 있었다.
3. 기꺼운 마음과 지혜로운 마음
거룩한 명령(출 35:4-19)
백성의 반응(출 35:20-29)
이 일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이다.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뱅이, 통치자와 보통 사람들 모두가 참여했다. 가난한 사람은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성경구절은 아무데도 없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적으나마 정성껏 바치는 헌금을 받으셨다(막 12:42-43). 예수 그리스도는 바치는 문제에 있어서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으셨다. 오늘날 하나님은 영적인 성전, 19세기 동안 조용히 커 온 성전을 건축하고 계시다. 성막이 건설되고 있는 과정에서 망치나 도끼나 어떤 쇠 연장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왕상 6:7/엡 2:19-22 참조). 하나님의 일이나 일군들을 위하여 바치는 것은 모든 신자의 특권이다.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양이 적은 것일지 모르나 첫째 기꺼이 드리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가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서 받으시며, 없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고후 8:12).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우리는 자신을 위해 쓰기를 좋아하고,
끝없이 보물을 쌓아두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다만 빌려드릴 뿐.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주신 분이건만.“
이 세계에서 드리는 사람들은 영원 세계에서 백만장자들이다."
출 15-27
4. 접근방법(25-27장)
하나님이 인간에게 접근하심-25장에서 27장까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접근하심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로마서에서 자세히 설명된 진리와도 상응한다. 이 부분에서 첫째로 된 진리와도 상응한다. 이 부분에서 첫째로 언급되고 있는 특별한 제구(祭具)는 법궤이며, 피로 얼룩진 시은소가 덮여 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에서...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로마서 3장은 이 진리를 설명하며, 이 표현의 본체적인(모형이 아닌) 의미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함-28장에서 30장까지는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을 설명한다. 이 부분은 히브리서의 가르침과 상응된다. 법궤가 첫 부분(하나님이 인간에게 접근하심)에서 뛰어난 것이듯,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두번째 부분에서는 대제사장의 역할이 특출하다.
5. 성막의 기구들
우리는 성막의 기명과 기구들에 대한 설명이 안에서 밖으로, 즉 지성소에 있는 법궤로부터 뜰 문 안에 있는 놋단으로 진행되는 것을 보았다(출 25-27:16). 그러나 문에서 함께 따라가며 가까이 가면 이 순서와는 거꾸로 이 기구들을 만나게 된다.
1. 문 6. 금촛대
2. 놋단 7. 향단
3. 대야 8. 휘장
4. 문 9. 지성소
5. 떡상 10. 법궤
이 자료의 대부분은 죠지 헨더슨의 「출애굽기 연구」(George Henderson “St-udies in the Book of Exodus“)에서 발췌하였다."
출 28-31
제사장 직분-출애굽기 28-31장-
1.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론
제사장 직분에 대한 연구의 서론으로서, 이스라엘 국가의 구분을 먼저 알아야 하겠다. 이 부분은 삼중의 성격을 띠고 있다.
아론과 그의 자손은 제사장으로 선택되었다(출 28장)
레위 지파는 성막의 예배를 거행하도록 선택되었다(민 3장).
그 남은 자들은 이스라엘의 군대이다(민 1-2장). “이렇게 하여 제사장 가족, 일군들의 지파, 그리고 무장한 군인들의 민족으로 구성되었다(민 3). 달리 말해서 예배자(Worshippers), 일군(Workrs). 군인(Worriors)이 있었다.“ 거의 500년 동안,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에 이르기까지 성막은 이 민족에게 단결을 가져다 주었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심을 증거했다(왕상 6:1). 솔로몬의 출현과 성전의 건축으로 성막의 사용과 봉사가 끝났다(대하 5:1-10).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거처가 그 형태는 바뀌었지만 그가 신실한 자기 백성들 중에 임재해 계시다는 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
2. 접근 방법
이것은 앞 부분을 복습하는 것이다. 이 부분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복습이 꼭 필요하다. 접근의 방법은 출애굽기 25-30장에 설명되어 있다. 25-27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접근해 오시는 방법을 설명하며, 로마서에서 자세히 설명된 진리와 상응한다. 이 부분에서 처음에 언급된 특별한 기구는 법궤이며 피로 얼룩진 시은소(속죄소)가 덮여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에서...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3장은 이 진리를 설명하며 이 표현의 원형적인(모형이 아닌) 의미의 중요성을 나타낸다.
두번째 부분은 28장에서 30장까지 계속되며 인간이 하나님께 접근하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히브리서의 가르침과 상응한다. 법궤가 첫부분에서 뛰어난 것이듯 두번째 부분에서는 대제사장이 탁월하다.
3. 이 부분을 푸는 열쇠
이 열쇠는 히브리서 7, 8, 9, 10장에서 찾게 된다. 출애굽기 28장에서 30장까지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장들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에는 아직 성전이 서있었고 의식이 행해지고 있을 때였지만(히 10-11장 참조), 기자는 그의 풍성한 교훈을 성전에서 이끌어내지 않고 옛 성막에서 이끌어낸다. 여기에는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다. 성막이 사용된 시기 동안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가나안에 입성하기까지 순례자였으며, 그 후에는 군인이었던 사람들의 역사이다. 법궤가 고정된 건축물인 성전으로 이동될 때 궤를 나를수 있도록 옆의 고리에 끼는 채가 빠져나왔다(대하 5:9). 즉 순례의 날들이 끝난 것이다. 이 땅에서 나그네요 순례자인 우리들에게, 이 땅에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는 이들에게(히 13:1-), 이 곳이 우리의 쉴 곳이 아님을 아는 사람들에게(마 2:10) 이 고대 구조물이 주는 가르침은 교훈과 위로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황량한 환경을 상징으로 보여 준다. 곧, 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교회를 가리킨다.
위에서 말한 히브리서의 각 장(7, 8, 9, 10장)에서 이 주제와 관련있는 네 가지 언급을 뽑아보자. 각 경우에 있어서 교훈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게 된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장 직분과 그리스도인의 시대 구분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제사장 직분-“저희(아론의 자손들) 제사장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히 7:23-24). 이 서신에서는 예수님이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고 두 번 언급되었다(히 1:12/히 13:8).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은 보좌에서의 미완성된 사역이라는 대조적인 짝을 찾게 된다(요 19:30/히 7:25).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하려고 죽으신 분이 이제는 사셔서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지키신다.
제물-“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 유대인의 제단에서 죽임을 당한 제물들의 피로써는 죄악된 양심에 평화를 줄 수 없으며, 죄의 얼룩을 씻어버릴 수도 없다. 그러나 하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다. 이는 다른 어떤 희생 제물보다도 고상한 이름과 풍성한 피를 가진 제물이다.
지성소-성막은 하늘의 일들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며(히 9:23),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신성한 명령이 바로 이 사실이다(출 25:4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히 9:24). 이 성구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세 가지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는 어디에 나타나시는가? 하늘에,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 언제 나타나시는가? 지금이다.
● 누구를 위함인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결과-성막의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앉을 의자가 없다. 이 단순한 이유로 보아 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두를 위하여 홀로, 그리고 모두를 위하여 단 번에 된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의 예물과 제사가 “예배하는 자를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음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제는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강력히 확신시킨다(히 9:9/히 10:14). 예비하는 자의 양심은 희생제물의 가치로 나타난다.
4. 몇 구절에 대한 주석
출애굽기 30장 7절의 불과 출애굽기 30장 10절의 피는 대속물 없이는 받을만한 예배가 없음을 가르쳐 준다. 달리 말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유일한 기도는 “주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이다.
속전(구속의 값)은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모두에게 동일하다(출 30:15). 이 말은 부자가 구원을 받은 후에 남보다 많이 헌금을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을 위하여 일하는 것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말씀으로 매일 씻는 일에 태만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효력을 잃게된다(출 30:21).
이 내용의 대부분은 죠지 헨더슨의 “출애굽기 연구“에서 발췌한 것이다."
출 32
두번째 십계명 판-출애굽기 32-34장-
서론적으로, 명심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율법을 세 번 주심-“율법이 삼중(三重)으로 수여된다“. 첫번째는 출애굽기 20장 1-17절에서 구두로 주셨다. 이것은 순전한 법령으로서, 범죄함을 위한 희생제물이나 제사장 직분에 관한 조항은 없다. 여기에는 히브리인들 사이의 관계와 연관된 재판에 대한 내용(출 21:1-23:13)과, 세 가지의 연례적 절기를 지키라는 지시가 첨가되어 있으며, 23장 20-33절에는 가나안 정복에 따른 교훈이 나온다. 모세는 이 모든 말들을 백성에게 고했다(출 24:3-8).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허락되었다(출 24:9-11). 두번째로, 모세는 돌판을 받으러 올라오라는 부름을 받았다(출 24:12-18). 그리고 나서는 이야기가 나뉘어진다. 산에 있는 모세는 성막과 제사장 직분과 희생제사에 관한 은혜로운 교훈들을 받았다(출 25-31장). 그동안에(출 32장) 아론이 이끈 백성들은 제1계명을 깨뜨린다. 모세가 돌아와 '하나님의 손으로 쓰여진'(출 31:18/출 32:16-19) 판을 깨뜨렸다.
이상의 사건을 분명하게 마음에 새기면 이 부분을 이해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중(二重)으로 율법을 깨뜨림-32장 1-6절에는 아론과 백성들이 십계명을 깨뜨리는 기록이 나온다. 특별히 제1, 제 2계명을 범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책은 우리가 계명 하나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이라고 말한다(약 2:10-11). 아론은 율법의 의미, 정신, 본질을 깨뜨린 것이다. 19절에는 모세가 문자 그대로 율법을 깨뜨리는 기록이 나온다. 이 두 경우는 아무도 십계명을 지킬 수도 없고 지키려고도 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해 준다. 한 사람만 십계명을 지켰는데 세상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이제 각 장을 요약해 볼 차례이다.
1. 32장
골짜기의 장면(1-6절)-모세는 산정에 있었고 사탄은 산 아래에 있었다. 모세가 변화산 상에 있었을 때도 그러하였다(마 17:1-16). 이스라엘은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잊었다“(시 106:10). “그들의 마음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섰다“ 이것이 죄의 뿌리였다.산의 장면(7-14절)-사탄은 하나님을 매장시키려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으로 그를 나타내려 한다. 모세가 없어지자 백성들은 매우 편안했다. 그래서 그가 전혀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고전 10:7)
(1)여호와께서 그들을 벌하셨다(7-10절). 하나님은 죄를 벌하셨고, 지금도 벌하고 계시며, 언제나 벌하실 것이다. 죄는 경시해도 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성경은 죄를 가볍게 여기는 자는 어리석다고 했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긴다“(잠언 14:9).
(2)그리스도의 모형인(요일 2:1)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 중재한다(32:11-14)
심판(15-24절)
(1)모세는 돌판을 깨뜨린다(32:15-21).
(2)아론의 거짓말(32:22-24).
분리시키는 부르심(25-35절)-산 위에서 모세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변호한다. 반면에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변호한다. 그는 제사장이요 선지자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다시 우리 주님의 형상이다.
이 장을 끝내기 앞서 몇 가지 실천적인 교훈들을 지적해 두는 것이 좋겠다.
(1)모세는 불신앙의 뿌린 씨를 추수하고 있었다. 그는 아론을 우선 순위의 위치에 두지 말았어야 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버지와 조카를 데려감으로 인하여 받은 고난을 되살려보자. 우리는 인간적인 끈을 생각지 말고 주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 낫다.
(2)여기서 교회의 모형을 볼 수 있다.
● 지도자가 높은 곳에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높은 곳에 계신다.
● 그들은 신앙을 버렸고 다만 종교적이었다. 그들은 애굽과 같은 종교, 즉 눈에 보이는 것을 원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어떠한가? 우리의 생활에서 어떤 것들이 우상이 되어지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 그들은 인내하지 못하였다.
● 지도자가 돌아왔을 때, 그는 백성들이 죄에 빠져 있음을 발견했다. 주께서 오늘 돌아오신다면 그분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음을 발견하실 것인가?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 하나님의 백성이 그 때 한 일을 우리는 오늘 해야 한다. 진문(陣門) 밖으로 나와 우리의 지도자께로 나아가자(출 32:26/히 13:13).
● 모세가 심판했다. 그는 전과 같이 아론에게 입맞추지 않았다(출 4:27).
● 하나님이 죄를 멸하셨다(19, 20절).
● 아론은 거짓말을 하고(22-24절), 백성의 말에 귀를 기울여(1-2절), 우상 숭배를 하게 하는(21절) 죄를 범하였다. 죄는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다."
출 33
2. 33장
계속된 여행(출 33:1-6)
영문 밖(출 33:7-11/히 13:13 참조)
하나님의 은혜(12-17절)-이 부분에, 특히 14절에는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나온다. 하나님의 약속에 특히 주의하자.
(1)모세의 생애에서의 이 약속의 배경
● 모세의 기도(출 32:30-32)
● 낙망한 자에게 주신 약속(출 33:32)
● 용기를 잃은 자에게 주신 것(출 33:12/출 33:13)
(2)이 약속의 어법: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내 얼굴이 너와 함께 할 것이며“.
(3)체험에 있어서의 이 약속의 증거: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지키신다. 그는 언제나 그처럼 행하신다.
모세와 하나님(출 33:18-23)"
출 34
3. 34장
두번째 율법판(출 34:1-4)
이스라엘을 위한 모세의 기도(출 34:5-9)
약속들과 권고(출 34:10-17)
절기들과 안식일(출 34:18-35)-출 34:24 절을 특히 유의하자. 이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한 그 재산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을 믿을 수 있다. 아멘!
출 35-40
성막건립-출애굽기 35-40장-
이 장에서는 이전 부분들과 같은 내용을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성막에 대해 간단히 주석을 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단순하나 값비싼 건축물을 설립하기 위하여 어떤 계획을 세우는지를 하나님께서 비용을 충당하신 방법을 강조하여 살피게 된다.
1. 성막에 대한 주석
이 장들에서 성막의 건립에 사용된 재료와 예배 장소에 쓰이는 기구와 용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평범한 독자들에게는 지루할지 모르나,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귀중한 것이다. 왜 자세하게 반복되어 있는가? 이는 성막과 관계된 것들, 즉 휘장과 널판, 갈고리, 기둥과 숟가락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그 사랑하시는 아들의 무한한 완전성과 영광들을 보이시기 때문이다. 속죄소에서 놋단까지 사중으로 거쳐가게 되는 것은(언제나 이런 순서인데) 네 복음서를 갖기 때문이다(37:1/39:35/40:3/40:20).
이 부분(35-40장)은 하나님의 휴식(안식일)으로 시작되어 그의 휴식처(성막)로 끝난다. 그의 그 크신 사랑으로 자기의 안식에 인간을 초대하시고 이들에게 오셔서 함께 거하신다(히 4장). 성막이 건축되는 동안에라도 안식일은 지켜져야 했었다(35:2). 또한 만나를 먹을 때에 끓이거나 빵을 만들기 위해서 불을 피워서도 안되었다. 안식일의 주님께서 준비하신 그대로 먹어야 했다(35:3).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성취되었다 ! 이 말이 자주 반복되는 것에 유의하자. 인간의 재간이나 기호에 맞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39:42-43).
성막은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서 건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 그러나 그것은 보배로운 피가 뿌려지고 거룩한 기름부음을 받게 되기까지만이었다. 십자가에 달려 기름부음을 받은 구세주만이 인간과 함께 가하실 수있기 때문이다.
광채(Splendour-37:1/38:21), 섬김(Service-39:32-43), 희생(Sacrif-ice-40:1-16), 아들됨(Sonship-40:17-38)이란 단어들은 메시야 복음의 네 가지 영광을 나타내며, 영광스런 황금 보좌에서 고난의 놋제단까지 네 번 이동하는 것에도 나타난다. 첫번째 통과할 때의 특징이라면 비싼 값을 치루는 것으로서(38:24-31), 왕의 광채(마태복음)를 나타낸다. 두번째의 통과시에는(39:32-43, 여기 기록된 열 번의 '모든') 봉사, 즉 종의 겸손(마가복음)을나타낸다. 세번째는 희생과 기름부음(40:2/40:9 . 유월절)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어린 양의 희생(누가복음)을 나타낸다. 네번째는 영광 중에 거하는 메시야의 하나님되심(요한복음)을 보여 준다. 이 통과를 표시해 주는 귀중한 물건들은 일련의 연관성을 가지는데, 황금보좌와 황금제단, 등대와 상, 놋단과 놋대야는 왕이시며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빛과 생명되시고, 구세주와 성결자이신 그리스도로 설명된다.
성령이란 말은 누가복음에 12회, 마태복음에 6회, 마가복음에는 4회, 요한복음에는 7회 언급된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집을 건설하고 그 재정을 충당하는데 어떤 계획을 세웠나에 대하여 알아볼 것이다. 건축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설계도에 따라 이루어졌다(출 25:9).
요청(출 25:1-9)
“마음에 원하는 자“(25:2/35:5/35:21/35:29)
마음이 “지혜로운 자“(35:10)
반응(출 35:5-10/출 36:4-7).
이유
● 그들의 소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대상 29:14/고전 4:7/약 1:17).
● 성경에 그에 대한 예가 있다(고후 8:1-2). 마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으면 손은 하나님을 위해 헌금으로 채우는 데에 신속하다.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다(고후 8:9). 하나님은 아들조차도 아끼지 아니하셨다(롬 8:32).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갈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