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신학과 설교
역사신학(Historical Theology)과 설교(Preaching)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역사신학을 공부하는 학도들만 아니라 목회 하시는 목회자님들로부터 늘 받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체적인 답변은 실질적인 예화들(illustrations), 즉 생생한 예화들을 교회사에서 제공받을 수 있다고 이해하는 듯싶다. 판에 박힌 예화들보다는 사실적이고 현장감 넘치는 예화들이 설교와 함께 전해지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보다 감동적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사에 나타난, 특히 초대교회나 청교도 전쟁 때에 나타난 신앙의 선배들, 즉 영웅적 순교장면과 극적인 삶들을 수집하여 설교에 적절하게 예화들로 삽입하여 설교의 내용을 보다 감동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 수 있다는 말씀들을 하시곤 한다. 그러다 보면 역사를 성도들로 하여금 올바로 인식하게 하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만 보게 하는 역효과를 일으키는 경우도 혹 있거나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여하튼, 바쁜 목회 현장에서 분주하신 목회자님들은 학창시절에 배운 교회사 지식이상으로 넘어가기가 어려운 실정이기에 여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사려된다. 그 가운데서도 목회를 하다가 신학 석사과정(Th.M.)이나 박사과정(Ph.D.)에 오셔서 보다 폭넓은 교회사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여 노력하시는 노학도님들이나 목회자님들을 볼 때마다 감사한 마음과 존경을 가지어 본다. 다시금 우리의 주제에 관심을 가져보자. 역사신학과 설교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말은 교회사를 어떻게 목회에 접목시킬 수 있을까라는 답을 예상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답변을 찾기 위해 역사신학에 대한 정의, 설교와의 관련성,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역사신학과 친근할 수 있는지를 설명토록 하겠다.
역사신학에 대하여
먼저 역사신학을 정의해보면, 역사신학을 영어로는 ‘Historical Theology’하는데 ‘역사적 신학’ 또는 ‘신학의 역사’로 번역할 수 있는 말이다. 어떤 대학교에서는 역사신학이나 교회사(Church History)라는 말을 구별하여 쓰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역사신학은 교회사와 조직신학을(Systematic Theology) 함께 다룬다고 보는 경우이다. 역사신학이란 전문적인 면에서 보면 마치 교리사적인 성격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교리사가 역사신학인 것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사신학과 교리사의 차이점을 알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궁금점을 풀기 위해서는 교리사(History of Doctrines)와 역사신학의 정의를 내리려고 하기보다는 역사신학과 관련된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규명하다보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여긴다.
교회사가 무엇인가? 아마도 평소에 당연시되었던 교회사라는 말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기에 독자들은 이를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다. 성령으로 영감 되어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이, 즉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실제 삶 속에 진행되었는지,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2,000년의 일반 역사에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교회사의 관심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사는 성경 역사의 연장선에 있으며 성경의 구속 역사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동시에 교회사는 일반 대학교에서도 일반 역사를 배우면서 주제를 신학과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폭넓은 학문이라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일반 대학교에서도 역사학을 전공하여 연구논문을 교회와 연관시켜 쓸 수도 있다. 교회사는 성경의 역사 이후 일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고찰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에 나타난 여러 제도들(institutions), 운동들(movements), 사상들(thoughts), 사건들(events), 그리고 영웅들(heroes)을 연구하게 된다. 관련된 사상들의 형성, 발전 그리고 역사적 배경과 상황들, 영향들, 그리고 결과들에 교회사는 관심을 갖는다. 역사들의 사건을 하나님, 즉 성경의 구속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철학(Historical Philosophy)적인 면을 갖기도 한다.
이에 비해 역사신학은 사상적인 면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니 교회사와 조직신학은 동반자 역할을 하게 되고, 역사신학을 하시는 분들은 조직신학적인 관점으로 역사신학을 보는 경향도 있다.
역사신학이든, 아니 교회사든 어떤 신학적인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이나 신학적 현상을 보고, 해석하느냐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본다. 역사신학을 한다고 할 때에는 신학적 해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신학의 역사(History of Theology)를 더듬게 되고 해석하고자 하는 신학의 형성, 발전, 변천, 그리고 결과와 영향을 연구하게 된다.
정리해보면
역사신학은 교회사와 조직신학과 관련을 가지게 되지만 교회사는 역사신학을 포함하고 있고 역사신학은 조직신학적 모습을 지니고 있다. 공통점은 신학적 해석이라는 점이다.
설교에 대하여
우리의 주제가 설교인데, 실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설교를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조심스럽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여 적용한다는 면을 가지고 있음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설교에는 해석을 빼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교회사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연구하고 해석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해석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두 관계-교회사와 설교의 관계-는 이미 그 공통성을 가진 셈이고 관련성을 찾은 셈이다. 그것이 바로 ‘해석’(interpretation)이다.
종교개혁시절에 외쳤던 선배들의 구호는 “sola scriptura”였고, 그 말씀을 바로 전달하고 지키는데 모든 힘을 기울였다. 설교단과 설교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후배들인 우리 역시 말씀의 권위성(authority)과 무오성(inerrancy), 설교의 강조점을 두는 것이 당연하다. 이 말은 성경 해석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았다는 것이고 성경 본래의 의미에 관심을 가졌고, 즉 meant에 관심을 가졌고,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지금에 어떤 의미, 즉 meaning이 있는지에 관심을 가진다. 현대에 와서는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applying)하는데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기에 정확한 해석이 아니면 정확한 적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정확한 해석을 위해 신앙의 선배들이 강조했던 것처럼, 성경 원어들-Greek과 Hebrew-에 신학도들, 즉 목사후보생들은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는다.
또 성경해석의 제방법을 터득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는데 사용되는 용어들로서 귀납법적, 모형적, 문자적(literal), 서술적(narrative), 수사적(rhetorical), 문학적, 철학적, 상황적, 등등을 열거할 수 있고, 신학적으로 반드시 점검을 받아야할 사항들이지만, 성경을 해석하는데 여러 방법들을 소개되어 있다. 그만큼 설교에는 meant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즉 해석하는데 강조를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현대에 와서 설교의 관심은 해석된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만 아니라 올바른 적용을 위해 청중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 대한 분석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새로운 접근이라기 보다 이미 오래 전부터, 즉 아리스토틀(Aristotle)의 수사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긴다. 웅변을 하는 자들이 청중들의 기대와 상황을 분석한다는 것은 일반 수사학에서도 있었던 사실들로서 이러한 방법을 설교학에서 사용하려는 것이다. 왜 사용해야하느냐?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등등의 질문에 답변을 이 글에서 찾으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설교에서 전하는 말씀을 올바로 해석해야한다는 사실, 전하는 자의 자세와 듣는 자들의 상황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 설교학에 언급된다는 사실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해석 분야가 교회사와 설교에 공통적 분모 일뿐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들에 대한 상황분석 역시 교회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씀을 듣기 위해 찾은 사람들이나 설교를 하는 시대적 상황이나 형편을 무시하고 설교한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청중들이나 설교를 하는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는 측면이 교회사의 일인 것이라 말하고 싶다. 특히 교회사에 나타난 설교자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현대 설교자들은 어떤 설교자들의 자세를 가져야만 할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위대한 설교자들을 연구하므로 현대 설교자들은 본인들의 모습을 거울을 보듯이 점검할 수 있다. 말씀을 전하는 진정한 자세를 교회사에 등장하는, 특히 종교개혁시대나 청교도들 가운데서 수많은 영웅들을 통해 밝히 알 수 있다. 현재 자신들의 모습과 그들간의 차이점을 찾아보고 올바르고 진실한 모습을 찾아갈 수 있다.
교회사는 정말 설교자들의 안내자이다. 그 설교자들이 직면했던 청중들을 배울 수 있다. 허공에 떠 있는 말씀이 아니라 당시의 청중들은 어떠했고 무엇을 걱정하고 바랬는지를 알게 되고 설교자의 설교를 읽게 되거나 알게되면 현대 설교자들의 자세와 마음 자세가 달라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더욱이, 설교의 내용들에만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설교자들이 직면했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설교의 내용이나 설교자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세상을 향하고 위한 말씀을 받는 청중들 만 아니라 청중들이 살았고 직면했던 그 시대적 상황은 매우 중요하다.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강조점이 달라진 것을 교회사를 통해 배울 수 있다.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성도들에게 교육관 건축을 위한 기금설교를 하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 설교자, 설교를 듣는 청중, 청중들이 직면했던 상황들을 배울 수 있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설교와 역사신학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지 보다 분명해진다.
해석적 관점에 대하여
앞서도 언급했듯이 역사신학은 교회사와 조직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 설교에서도 성경본문을 올바로 해석하려면 조직신학의 도움을 받듯이 역사신학에서도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하고 분석할 때에 조직신학, 즉 교의신학의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역사를 온전히 객관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객관적 해석을 위해 역사신학자들이 노력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객관적 해석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말도 되지만 동시에 객관적 해석을 위한 상황을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를 접할 수 없기에 완전히 객관적인 해석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화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사나 성경이나 조직신학에서 제공하는 교리적 기준을 가지지 않고 해석한다는 것은 힘들다. 교리적 기준은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해석 기준을 제공해 준다. 그렇다고 교리들에 덧입히는 해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해석할 때에 교리적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일반 역사철학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교리적 도움을 받지 않고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전락시키는 경우가 되고 책들 중의 하나의 책으로만 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역사신학과 설교는 모두 해석을 위해 조직신학의 도움을 받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역사신학과 설교와의 관계가 이렇게 있다고 아무리 외쳐도 설교에 도움이 되도록 역사신학을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제시되어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두 관계성을 이론적으로 살펴보았다면 이제는 설교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역사신학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성경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방법과 흡사하다는 것을 먼저 말하고 싶다. 성경의 전체 내용을 알기 위해 핸드북(Handbook)을-물론 성경을 처음 접할 때 이야기이지만-접한다. 그런 후 보다 알기 위해 각 권에 대한 주석들이나 신학적 해석을 연구한다. 이처럼 교회사도 전체적으로 먼저 알기를 독자들에게 권한다. 전체적인 맥락을 먼저 세우고 난 후, 교회사에 나타난 각 사건들을 전체 줄기에 삽입시키거나 대조하는 방법을 택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면에서 좋은 교회사 책으로는 김기홍 박사님께서 쓰신 『이야기 교회사』상․하, 유스토 곤잘레스가 쓰신『간추린 교회사』, 김영재박사님이 쓰신 『기독교 교회사』, 정상운 박사님을 비롯하여 교회사 전문 박사님들이 엮으신『알기 쉬운 교회사』, 세계적 학자이신 롤랜드 베인톤이 쓴 『세계 교회사』, 김의환 박사님이 쓰신 『기독교회사』, 조계광 목사님이 번역하신 커티스의 『교회사 100대 사건』등등의 책들을 통해 쉽게 전체 교회사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교회사를 연대적으로 전체 맥락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연대적으로 정리하기를 강력히 권한다.
보다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각 시대, 즉 초대, 중세, 종교개혁, 근세 등으로 나누어 각 권을 선택할 수 있다. 교회사는 사건별로 전체를 살피는 것과 아울러 인물별로 살필 수도 있다. 이에 추천할 만한 책들은 정준기 박사님이 쓰신 『청교도 인물사』, 곽안전 박사님이 번역하신 모이어의 『인물 중심의 교회사』, 박용규 박사님이 번역하신 우드브리지의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상․하, 『존 폭스의 순교사』 등을 권한다. 인물 연구조차도 일단 전체 맥락을 세운 뒤에 이루어 져야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사 전체를 일단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 후 각 사건들이나 각 인물들을 연대별로 대조하면서 시대별 특성을 고려한다.
예를 들면, 1519년 마젤란(Ferdinando Magellan, 1480?-1521)이 세계를 일주할 때에 유럽에서는 마틴 루터(1483-1546)와 요한 에크(Johann Eck)와의 논쟁이 있었고,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Zwingli, 1484-1531)는 취리히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 종교개혁에 뛰어 들게 되고,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는 성경 라틴어판을 개정하고 있었다. 전체 교회사를 보면서 각 사건들을 대조하거나 각 나라의 교회사 사건들을 비교하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므로 교회사 사건이나 인물들을 이해하고 연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전체적인 안목 없이 부분적인 지식만 알아서 교회사를 이해하다보면 오해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또 교회사를 이해하고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 기독교 사상사, 다른 말로 하면 교리사적인 면의 책들을 권하고 싶다. 박희석 박사님이 번역하신 헤그룬트의『신학사』, 서영일 박사님이 번역하신 길리안의 『기독교 사상사』, 곤잘레스가 쓴 『기독교 사상사』1-3편, 본인이 번역힌 브라운의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과 정통』, 김영배 박사님이 번역하신 제베르그의 『기독교 교리사』, 맥그라스가 쓴 『신학의 역사』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책들을 교회사, 역사신학을 이해하는데 교회사에 대한 선지식이 있는 분들이 접할 수 있는 좋은 교회사 전문교재이다.
보다 전문적인 책들이나 적절한 도서를 위해서는 교수님들에게 여쭈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책들을 접하는 가운데 기독교 사상 흐름을 알게되고 어떤 기독교 교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어떻게 결론 내려졌는지를 알게 되므로 교리들을 접할 때마다 그 논쟁 초점과 주요 이슈를 알게 되고 발생된 이슈들의 배경을 알게 된다. 그러면 설교를 할 때에 다루어지는 교리의 배경을 알게 되고 왜 중요한지도 아울러 알게 된다. 설교자가 역사를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상황을 잘 이해하게 되므로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를 청중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에 이른다.
정말 본인은 설교강단에서 설교의 청중들이 매주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으며,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기를 바란다. 설교는 늘 신선한 내용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를 위로와 희망차게 전하기를 바란다. 이 시대가 무엇을 원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각 시대에 전파된 설교의 상황과 메시지가 보다 입체적으로 연구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바라기는 설교의 청중들이 “목사님, 설교가 신선해졌어요. 기대가 되요”라는 반응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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